고대 로마에서의 장애와 질병 사이 -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사례를 중심으로†
Between Disability and Illness in Ancient Rome - The Case of Emperor Claud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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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laudius, the fourth emperor of Rome, suffered from multiple health issues, including an unsteady gait, persistent tremors in his arms and head, and a speech impediment that caused him to stutter and mispronounce words since childhood. Despite possessing average or even above-average intellectual abilities, he was considered unfit for public office (cursus honorum) due to these physical conditions.
Based on remaining historical records, modern scholars have proposed several possible diagnoses, including cerebral palsy, dystonia, transverse myelitis, or Tourette syndrome. While earlier scholarship argued that he had cerebral palsy, more recent interpretations favor dystonia or Tourette syndrome. This claim is supported by historical records that show how Claudius' symptoms fluctuated over time since his childhood and how he was able to maintain a relatively stable health during his reign, carrying out his imperial duties effectively.
Claudius’s physical impairments subjected him to harsh treatment from his family. His mother Antonia the Younger, his sister Livilla, and his paternal grandmother Livia treated him with contempt. In contrast, his adoptive grandfather Augustus showed some leniency, expressing hope that Claudius’ condition might improve one day. None the less, both Augustus and his uncle Tiberius chose to excluded him from public service. His disabilities, especially his walking and speech issues, remained a source of ridicule even after his death. This is poignantly illustrated in Seneca’s satirical poem “Apocolocyntosis,” which was written after his death.
Unable to become a celebrated soldier or orator due to his physical limitations, Claudius was far removed from the Roman ideal of leadership both in his own times and in posterior times. He was often met with contempt and discrimination. Nevertheless, he proved to be a capable and successful emperor. Although none of his contemporary historians explicitly recorded the efforts Claudius may have made to overcome his disabilities, such perseverance can be inferred from the subtext of historical accounts. In this, Claudius offers a powerful symbol of resilience and hope.
1. 들어가며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인물일지 모르나, 로마의 네 번째 황제 클라우디우스(Tiberius Claudius Drusus Nero Germanicus, 제위 41~54)는 서구권에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유명세는 상당 부분 1976년 영국 BBC에서 제작한 드라마 “나, 클라우디우스(I, Claudius)1) 대성공 덕분으로, 이 드라마는 여전히 영미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Lacob, 2012)
이 극은 데렉 자코비(Derek Jacobi)가 연기한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멍청이(idiot), 바보(fool), 혹은 말더듬이(stammerer) 클라우디우스라 불리었음을 회고하며 시작된다. 당연히 이 장면은 극적인 드라마를 위해 연출된 것이지만 기록된 역사에 기반한다.2) 고대 작가들의 아래와 같은 서술은 클라우디우스의 인생 전반기, 즉 황제가 되기 전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는 아직 유아일 때 아버지를 잃었고, 유년기와 청년기 거의 내내 다양하고 골치 아픈 증상에 심각하게 시달렸다. 이로 인해 그의 몸도 마음도 약해질 수 밖에 없었고, 적절한 나이가 되었을 때도 어떤 공무도, 사적인 일도 해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랫동안, 심지어 그가 독립할 나이가 된 이후에도 그는 피후견인 상태에서 가정교사의 보호 하에 있었다.3)
그는 리비아(Livia)의 아들이었던 드루수스(Drusus)의 아들로, 이전에 집정관을 지냈던 것 외에는 어떤 관직에서도 검증받지 않고 황제가 되었다. 그의 나이 50세 때였다.4)
클라우디우스는 성인이 된 후에도 황실의 다른 성인 남성들처럼 적절한 공직을 수행할 상태가 아니었다. 삼촌 티베리우스(Tiberius)가 그가 아니라 그의 조카 칼리굴라(Caligula)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그 이유였을 것이다.5) 칼리굴라가 황제가 된 후에야 클라우디우스는 그와 공동으로 집정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칼리굴라가 4년을 채우지 못하고 근위대에 의해 암살당하자 우연과 행운이 겹쳐지며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6)
로마 제정 초기, 즉 원수정이라 불리는 시기는 거듭되는 직계 후계자의 부재로 인해 계승원칙이 확고하지 않았으며 혈통 이상으로 정치가로서의 능력도 중요한 공화정의 분위기도 강하게 남아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나 티베리우스처럼 군사적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었고 칼리굴라처럼 뛰어난 연설가도 아니었던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된 것은 그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최후의 성인 남성 생존자라는 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50세에 황제 자리에 오른 클라우디우스는 신체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13년간 황제의 직책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감찰관직을 부활시키는 등 관료제를 확대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했으며, 로마 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해주는 클라우디우스 수로(Aqua Claudia)를 완성했다. 또한 오스티아(Ostia)에 인공 항구를 건설했으며 브리타니아 원정에 성공해 국경선을 넓혔다. 노예가 병에 걸렸다고 버린 주인은 그 노예가 회복되었을 때 다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칙령을 내린 것도 클라우디우스였다. 그는 로마의 다른 황제들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성과를 보였고, 이는 황제가 되기 전 그를 괴롭혔던 질환 혹은 장애는 황제로서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를 궁금해 하게 만든다.
그를 장애인으로 보아야 하는가, 혹은 질환에 시달린 환자로 보아야 하는가는 어려운 문제다. 장애학에서는 질병은 치료나 죽음에 의해 종료되는 일시적인 것인 반면 장애는 지속된다는 기본적 논거를 따르며(김도현, 2019), 현대에 와서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주도로 장애에 대한 정교한 분류와 개념정리가 진행되었다(WHO,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Functioning, Disability and Health). 장애가 국가정책 및 지원과 연계되며 개념과 분류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경우 장애와 질병이 이런 기준을 가지고 뚜렷하게 구별될 수는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클라우디우스의 경우에는 건강 문제가 공적 생활에의 방해물이라는 점에서 주로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상태를 장애, 혹은 질병으로 명백하게 규정짓는 것보다, 당대 사람들이 그러했듯 클라우디우스를 장애와 질병 사이 어딘가에 있었던 존재로 보고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클라우디우스의 신체적 문제는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80여 년전 레온은 박약, 무력함, 지적 취약성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인 imbecillitas를 제목에 사용하며, 클라우디우스의 질환으로 인해 그가 보였던 비정상적인 행동을 분석했다(Leon, 1948). 세월을 뛰어넘어 2000년 나온 라이스의 논문 제목 역시 “머리를 흔들어대는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운동 장애”다(Rice, 2000). “박약한 황제”, “머리를 비정상적으로 흔들어대는 황제”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로마를 비롯한 고대세계의 기형 혹은 장애를 다룬 연구서에서도 클라우디우스는 빠짐없이 언급된다(Garland, 1995: 특히 40-42; Trentin, 2011: 200; Laes 외(eds.), 2013: 34-36; 163-167; Goodey 외, 2018: 48; Laes, 2018: 140-143). 클라우디우스의 증상을 현대 의학에 힘입어 분석하고 적절한 진단을 내리고자 하는 시도 역시 계속되었다(Ohry 외, 1985; Valente 외, 2002; Murad, 2010). 최근에는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기록했던 고대 역사가들의 서술 의도를 장애에 대한 차별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보려는 글이 나왔고(Whitacre, 2018; Michalopoulos, 2018; Kershaw, 2022), 카이사르부터 시작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네로까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황제들이 모두 신경 질환을 앓았다는 점에서 이를 유전학적 질병으로 규정짓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Carmargo 외, 2018).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의 이러한 관련 연구성과를 검토하고, 이제까지 국내에서 연구되지 않았던 클라우디우스의 건강상 문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클라우디우스가 보여준 신체적 증상을 원사료를 통해 검토해보고, 그가 시달렸던 장애 혹은 질병으로 인해 나타난 구체적 증상이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지를 들여다 볼 것이다.
또 하나 함께 살펴보고 싶은 것은, 이렇게 “비정상”으로 정의되었던 클라우디우스를 대하는 주변의 모습이다. 사료에 묘사된 그에 대한 주변인들의 태도를 보면 “신체적 또는 인지적 변이가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편견을 갖게 하는 사회적 범주로서의 장애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부합하는 모습들이 분명 존재한다(Harlow 외, 2015: 17). 그러나 고대 사료에서는 이를 장애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짓지 않으며 그의 불편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그친다. 또한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혹은 경우마다 상당한 온도차가 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의 상태를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냐, 혹은 치료가 불가능한 장애냐로 보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클라우디우스의 경우, 그가 그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황실의 일원으로 잠정적인 제위 계승자 후보군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클라우디우스, 신체적 문제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 아버지의 군사 원정 중에 루그두눔(Lugdunum, 오늘날 프랑스의 리옹)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 드루수스는 그 이듬해에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재혼하지 않은 어머니 안토니아(Antonia)가 그와 형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 누이인 리빌라(Livilla)를 키웠고, 이 가족들은 황실의 일원으로 아우구스투스와 그 아내 리비아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호를 받았다.
당시 로마 황실의 후계상황은 계속 변화하는 중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친아들이 없었고, 유일한 핏줄은 두 번째 아내인 스크리보니아(Scribonia)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율리아(Julia)였다. 그는 누이인 옥타비아(Octavia)가 안토니우스(Antonius)와 재혼하기 전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조카인 마르켈루스(Marcellus)와 딸 율리아를 결혼시켜 후계를 도모했지만, 마르켈루스는 자식 없이 젊은 나이로 죽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를 다시 자신의 친우인 아그리파(Agrippa)와 결혼시켰고,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와 루키우스 카이사르(Lucius Caesar) 두 외손자를 후계자로 입양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기원후 2년과 4년 아직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로 후계가 이어질 희망은 사라졌다.7)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며 데려온 전남편과의 두 아들 중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받았던 차남 드루수스 역시 이미 기원전 10년에 사망했으므로, 남아있는 후계자 후보는 리비아의 장남이자 율리아의 세 번째 결혼 상대가 된 티베리우스와, 그의 조카들, 즉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한 드루수스의 아들들이었다. 드루수스의 아들들은 어머니 안토니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손자들이기도 했다.
클라우디우스의 형인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사위 겸 양자가 된 숙부 티베리우스의 양자가 되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인 대 아그리피나(Agrippina)와 결혼했다.8)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잠정적인 후계자로서 활발하게 군사적, 정치적 커리어를 쌓았다. 잘 알려진 겜마 아우구스테아(Gemma Augustea)에서도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Victoria), 세계의 의인화 오이쿠메네(Oikoumene) 여신, 이탈리아의 의인화 텔루스(Tellus) 여신, 대양의 신인 오케아누스(Oceanus)를 동반하고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등장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만들어진 카메오 겜마 아우구스테아의 윗단 등장인물들
Figure 1. The upper figures of the Cameo Gemma Augustea, made in the Augustan era
(“Gemma Augustea”, https://www.khanacademy.org/humanities/ancient-artcivilizations/roman/early-empire/a/gemma-augustea, Accessed 22 February 2025)
일반적인 경우라면 클라우디우스에게도 역시 형과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앞에서 언급했듯 로마 고위층이 일반적으로 따르는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9)을 따라가기 힘들었던 신체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클라우디우스의 신체적 증상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고대 저술가는 『황제전(De Vita Caesarum)』의 저자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다.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한 뒤인 기원후 70년경에 태어나, 그를 직접 만나 기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비서이자 황실 기록소의 책임자로서, 클라우디우스에 관한 간접적인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수에토니우스가 소문이나 일화를 역사적 검증 없이 흥미 위주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가 편지에서 클라우디우스를 언급하는 등, 황실 인물들이 그의 건강에 대해 남긴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은 당대 사람들이 클라우디우스의 장애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수에토니우스보다 백여년 이후의 인물인 카시우스 디오(Lucius Cassius Dio) 역시 『로마사(Roman History)』”에서 클라우디우스의 건강상태에 대해 언급한다. 그의 『로마사』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지만10) 디오는 법무관, 집정관, 속주 총독을 역임한 로마 원로원의 일원으로 로마의 정통 역사를 쓰기 위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는 황제가 된 이후 클라우디우스의 치세를 상세히 기록한 작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연대기(Annales)에서 황제가 되기 전, 그리고 제위 초기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서술은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소략하게 남아 그의 서술을 이 글에서 참고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Aveline, 2006: 76).
역사기록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으나, 실제로 클라우디우스를 만난 인물의 기록도 있다. 철학자이자 저술가로 유명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티베리우스 시기부터 관직에 있었고, 다소의 부침을 거쳤으나 클라우디우스 치세에서는 그의 양아들 네로의 가정교사를 지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를 가까운 거리에서 접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작품 Apocolocyntosis (divi Claudii)는 역사기록이 아니라 풍자시이다. (신격화된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만들기(Pumpkinification)”11) 정도로 번역해야 할 이 작품은 죽은 클라우디우스가 올림푸스에서 스스로의 신격화를 위해 신들을 설득하다가 오히려 폭군임이 드러나 지옥으로 끌려가 온갖 고난을 겪는 내용으로, 여기에서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의 정상적이지 않은 걸음걸이와 말하기를 계속 웃음거리로 삼는다.
물론 이 작품은 클라우디우스의 사후에, 클라우디우스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제자였던 새로운 황제 네로를 추어올리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서술되었다. 풍자시인만큼 풍자와 그에 따르는 과장의 탈을 쓰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세네카가 풍자거리로 삼고 있는 클라우디우스의 육체적 특징은 다른 작가들이 언급한 내용과 대부분 부합된다. 살아 있는 클라우디우스를 만났던 인물인 세네카는 있는 사실을 과장할지언정 없는 사실에 근거해 클라우디우스를 조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클라우디우스의 증상은 주로 걸음걸이와 말하기에 집중된다.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서술 중 그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있다.
클라우디우스는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특히 누워 있을 때는 기품있고 위엄있는 모습이었다. 키가 크고 여위지 않았으며 매력 있는 얼굴과 점차 은발이 된 머리카락, 굵은 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을 때면 무릎이 약해 비틀거렸고 느긋한 순간에나 업무를 처리할 때나 보기 흉한 모습이 많았다. 웃을 때도 꼴사나웠고 화를 낼 때면 벌어진 입에서 거품이 나고 코에서 콧물이 흘러 더 역겨웠다. 그는 말을 더듬었고 머리는 항상 흔들렸는데, 그가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더 더욱 그러했다.12)
클라우디우스는 정신적으로는 모자라지 않았다. 가정교사들이 그를 지속적으로 가르쳤다(그는 실제로 역사와 관련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육체적으로는 아팠다. 그의 머리와 손은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목소리 역시 떨려서 원로원에 내놓을 정책을 직접 읽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도 재무관에게 시켜야 했다. 그가 직접 읽는다 해도 앉아서 읽었다. 그는 (이동을 위해) 덮개가 있는 의자를 사용한 최초의 로마인이었다.13)
이처럼 그는 지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나, 공적인 장소에서는 자주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외적 결함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세네카의 글에서는 죽은 후의 클라우디우스조차 이런 결함으로 인해 혹독하게 조롱당한다.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신격화를 요청하기 위해 신들이 사는 올림포스에 도착한 장면을 세네카는 이렇게 묘사한다.
제우스는 체구가 당당하고 머리가 아주 백발인 누군가가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지속적으로 머리를 흔들고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었고 이는 일종의 위협이 되었다. 전령은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은 그가 분명치 않은 소리와 이해할 수 없는 음성으로 무언가 대답을 했다고 전했다. 전령은 그의 언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알려진 어느 민족도 아니었다.14)
과거에는 불편한 걸음걸이에 대한 묘사로 인해 클라우디우스가 소아마비(poliomyelitis)를 앓았다는 견해도 있었으나(Scramuzza, 1940: 248) 소아마비 후유증은 주로 하지에 집중되므로, 이것만으로는 그의 떨리는 손과 머리, 목소리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가 머리가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증상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도상자료로서 입증하려는 시도가 있다. 남아 있는 그의 조각상과 주화에서 굵은 목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Valente, Valente 외, 2002: 393; Murad, 2010: 223). 이러한 목근육의 비대는 장기간에 걸쳐 비자발적인 머리 움직임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발생하는 것으로 관찰된다(Schwartzman, 2006: 86). 물론 당시의 도상은 빈번히 재활용되기도 했으며 현실의 인물상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았을 확률도 존재한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의 “굵은 목”은 앞서 보았듯 수에토니우스도 언급하고 있으며, 이것이 머리가 항상 흔들리는 증상과 연관되었을 확률은 상당히 커 보인다..

나폴리 국립 고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클라우디우스의 조각상
Figure 2. Bust of Claudius, Naples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Claudius”, 영문판 wikipidea,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laudius_crop.jpg Accessed 20 February 2025)

44-45년경 주조된, 클라우디우스의 옆모습이 조각된 데나리우스 주화15)
Figure 3. Denarius coin with the profile of Claudius, minted around 44-45 AD
(“Virtual Catalogue of Roman Coins”, http://vcrc.austincollege.edu/1/Claudius/713101.jpg Accessed 25 February 2025)
이런 점들을 고려해 20세기 후반기 이후 상대적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 병명은 뇌성마비(cerebral palsy)였다(Leon, 1948; Ohry & Levy, 1985:13; Levick 1990:13; Balsdon & Levick, 1998; 178). 리틀병(Little’s disease)이나 무도병(chorea)도 언급되나, 이 역시 뇌성마비와 연관된 증상들이다.
뇌성마비는 하나의 질병이 아니라 비슷한 임상적 특징을 가진 증후군들을 집합적으로 일컫는 개념으로, 미성숙한 뇌에 출생 시 또는 출생 후의 여러 원인인자에 의해 비진행성 병변이나 손상이 발생하여 임상적으로 운동과 자세의 장애를 보이게 되는 임상군이다. 경직성 편마비는 보통 생후 1년 이내에 발견되며, 발달 단계는 정상의 경우보다 4~6개월 가량 늦어지지만 보행이 가능한 경우가 많으며, 특징적으로 편마비형 보행을 보이게 된다. 하지와 같은 쪽 상지의 기능이 떨어지나, 지능에는 보통 장애가 없어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며, 골격계의 문제가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다. 경직형 사지마비는 사지의 경직형 마비를 보이나, 보통 하지가 심하며, 많은 경우에서 비대칭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는 근골격계 장애 외에 사시를 포함한 시각장애, 간질이나 연하장애, 구음장애, 침흘리기 등이 동반된다.16)
그러나 클라우디우스의 질환을 뇌성마비로 규정짓는 경우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의 증상이 일관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수에토니우스는 앞서 클라우디우스가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특히 누워 있을 때는 기품있고 위엄있는 모습”이라 언급했다. 그의 건강상태가 이전에는 나빴지만 황제가 된 후에는 위의 통증만 제외하면 아주 좋았다고 쓰기도 했다.17)
그의 상태는 어린 시절에도 늘 일관적으로 나쁘지만은 않았다. 양손자 겸 조카손자였던18)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늘 걱정했던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에서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나의 리비아, 당신의 손자 클라우디우스가 연설을 해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었다니, 지금 내가 놀라지 않았다면 죽어도 좋소. 실제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그렇게 서투른데, 연설을 할 때는 그렇게 명확하고 적절하게 말하다니, 정말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오.”19)
뇌성마비는 장기적인 신체적 장애를 동반하고, 일부 경우에는 지적 장애나 언어 장애 등 다양한 복합적인 어려움이 지속될 수 있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리 없이 연설을 수행할 수 있었 다는 언급은, 그가 보다 예후가 가벼운 근육긴장이상증이나 뚜렛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심지어 그가 가파른 경사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걸어 내려갔다는 묘사도 그의 증상이 뇌성마비가 아니었음을 뒷받침한다.
클라우디우스는 화재로 불탔던 폼페이우스 극장을 재건해 봉헌하는 행사에서 객석 상부 쪽에 있는 신전에 먼저 희생물을 바치고 관중들이 모두 엄숙하게 침묵을 지키며 자리에 앉아 있는 가운데 통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 그를 위해 준비된 악단석의 높은 자리에서 행사를 주도했다.20)
이 기록을 보면 클라우디우스는 장중한 예식이 필요한 경우에는 평지도 아닌 계단을, 그것도 매우 가팔랐을 극장의 계단을 위엄을 지키며 걸어서 오가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육긴장이상증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비정상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근육이 비틀어지는 이상 운동 현상이 나타나는 신경학적 질환으로, 근육긴장이상증이 있으면 근육이 불수의적으로 수축하여 뒤틀리거나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등 비정상적인 운동과 이상한 자세가 나타난다. 연축성 사경(또는 경부 근육긴장이상증)이라고 불리는 목 근육의 긴장 이상증은 가장 흔하게 나타나며, 연축성 발성 장애는 평소에는 후두의 해부학적 구조물이나 근육이 정상적으로 유지되지만, 말할 때는 성대 근육이 수축하여 숨이 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게 되거나 목이 조이는 것처럼 말을 하는 증상이다. 사지의 근육긴장이상증은 사지의 근육이 불수의적으로 수축함으로써 꼬이거나 반복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비정상적인 자세가 나타나는 증상이다.21)
이는 상당부분 클라우디우스의 증상에 부합되며, 증세가 지속적으로 악화되기보다는 변동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라이스는 이에 근거해 클라우디우스의 질환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병은 근육긴장이상증이었을 것이라 주장하며(Rice, 2000), 라에스도 이 견해를 따른다(Laes, Goodey & Rose(eds.), 2013: 164). 혹은 횡단성 척수염(transverse myelitis)이 제시되기도 하는데(Whitacre, 2018: 2), 횡단성 척수염은 사지 운동 능력 저하 및 감각 이상 혹은 마비/허리, 팔, 다리 등으로 연결되는 통증/과도한 근육 긴장22) 등의 증세를 보이고 완화가 가능한 질병이라는 점에서 클라우디우스의 증상과 일정 부분 부합한다.
클라우디우스의 증상에 대한 또 다른 진단은 우리에게 흔히 틱장애로 알려진 뚜렛 증후군(Giles de la Tourette syndrom)이다. 미국 정신의학회(APA: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은 불수의적 움직임과 소리를 반복적으로 보이는 신경 질환인 뚜렛 증후군의 진단을 위해 필요한 요건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여러 가지 운동성 틱(tic)과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음성 틱이 질병 경과 중 일부 기간 동안 나타난다. 2가지 틱이 반드시 동시에 나타날 필요는 없다.
2) 틱 증상은 자주 완화와 악화를 반복하지만 처음 틱이 나타난 시점부터 1년 이상 지속된다.
3) 18세 이전에 발병한다.
4) 장애는 물질(예, 코카인)의 생리적 효과나 다른 의학적 상태(예, 헌팅턴 병, 바이러스성 뇌염)로 인한 것이 아니다(DSM-5-TR, 2022, 93)
이 진단 역시 상당 부분 클라우디우스의 증세에 부합한다. 무라드는 클라우디우스의 비정상적인 머리 움직임은 복합적인 운동성 틱으로 인한 것이며, 발음 장애는 단일 및 복합 음성 틱으로 인한 것이라 말한다. 목을 그르렁대거나 꽥꽥 대거나 비명이나 기침소리를 내는 것이 음성 틱의 증상인데 이는 세네카가 묘사한 클라우디우스의 발음과 유사하며, 흐느적대는 걸음걸이는 운동성 틱이 하지에 영향을 준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운동성 틱은 감정 상태에 따라 악화되거나 좋아진다는 연구결과(Robertson, 2000)를 인용하며 클라우디우스의 장애가 뚜렛 증후군으로 진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Murad, 2010).
현재까지 남아있는 역사적인 서술은 매우 한정적이기에 클라우디우스의 증상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적절한 검사도 없이, 심지어 환자를 직접 관찰하지 않고 진단명을 확정하는 것은 더 상세한 기록이 있다해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기록과 현재의 의학적 견해를 종합해 볼 때, 클라우디우스의 진단명이 뇌성마비보다는 근육긴장이상증이나 뚜렛증후군에 가까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의 발달된 의학과는 달리 고대 로마에서는 뇌성마비에 대한 진단과 치료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클라우디우스의 증상이 어린 시절 이후 호전되었다면 이러한 변화는 뇌성마비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른 이후 장거리 원정인 브리타니아 원정을 무리 없이 치러낼 정도로 건강상태가 호전된 것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클라우디우스는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크세노폰(Gaius Stertinius Xenophon)라는 이름의 특정 의사를 깊이 총애해 그 총애가 의사의 출신지역인 코스(Kos)에까지 미쳤다.
황제는 코스 사람들에 대한 세금 면제를 제안했고, 이 지역의 유서깊음을 회고했다. “아르고스인들 혹은 레토 여신의 아버지인 코이우스(Coeus)가 이 섬의 최초의 거주민들이었다. 그리고 곧 아스클레피오스가 들어오며 치유의 기술이 도입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이를 시행하며 큰 명성을 얻었다”. 황제는 그 후손들의 이름 하나하나와 그들이 각각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도 언급하였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의술이 내게 도움이 되는 크세노폰도 같은 가계 출신이다. 그의 간구에 대한 보답으로, 코스 사람들에게 오직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만 복종하는 장소로서의 그들의 신성한 섬에서는 모든 공납을 면제해주어야 한다.” 황제는 코스 섬 사람들이 로마에 바쳤던 여러 가지 봉사나, 그들이 기여했던 로마의 승리에 대해 언급할 수도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평소와 같은 정중함으로 한 개인에게 쏠리는 자신의 총애를 외부적 요인을 빌어 가리려 하지 않았다.23)
물론 로마 황제들이 그리스 출신의 뛰어난 의사들을 자신의 주치의로 삼고 군사 원정에도 동행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공적인 일에서까지 황제가 특정 의사에 대한 선호를 드러낸 경우는 드물다. 코스에 남아있는 비문과 주화 등을 참고하면, 그는 클라우디우스의 총애에 힘입어 로마와 코스 사이 외교관계의 매개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신명주, 2022: 84-86; 2024: 234-236). 크세노폰과 그 형제였던 Q. 스테르티니우스는 민간에서 일해도 1년에 6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벌 수 있는 인기있는 의사들이었고, 황제에게도 1년에 5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급여를 받았다. 그들은 네아폴리스의 공공 건물을 정비하는데 엄청난 금액을 기부하고도 상속자들에게 3천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을 남길 만큼 부유했다.24)
크세노폰이 클라우디우스에게 어떤 치료를 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클라우디우스가 건강상의 문제를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과 그의 사망시까지 크세노폰이 주치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25)을 생각하면 크세노폰이 클라우디우스가 황제 역할을 무사히 수행할 정도의 건강 상태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Gaius Stertinius Xenophon의 얼굴을 담은 코스 주화
Figure 4. Coin with the face of Gaius Stertinius Xenophon, minted in Kos
(“Sample Excavation: Health and Illness B”, https://anaskafh.arsakeio.gr/hygeia_astheneia_b/. Accessed 25 February 2025)
3. 클라우디우스, 주변의 태도 - 차별과 조롱
혈통만 생각한다면 클라우디우스는 형인 게르마니쿠스와 비슷한 길을, 즉 미래의 황제 후보군으로 평범한 귀족 젊은이들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승진하는 관직의 행로를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앞서 언급한 신체적 문제로 인해 고인이 된 아버지 드루수스를 기념하는 검투경기를 형과 함께 주최할 때도 전례 없이 망토로 몸을 가려야 했고, 성인식날에도 보통은 곁을 따르는 친구나 친지도 없이 한밤중에 이동을 위한 의자를 타고 카피톨리움으로 가야하는 상황이었다.26) 그를 게르마니쿠스처럼 당당하게 대중 앞에 노출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황실 인사들의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에게 보낸 이 편지는 클라우디우스와 관련된 황실의 고민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친애하는 나의 리비아, 당신이 요청한 대로 당신의 손자 클라우디우스가 마르스 제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티베리우스와 대화를 나누었다오. 그리고 우리는 이번 기회에 그에 대해 어떤 방침을 취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소.
만일 그가 정상이라면, 말하자면 흠잡을 데가 없다면, 그의 형 게르마니쿠스가 그래왔듯 같은 직책에 같은 속도로 올라가야 한다는데 우리가 무슨 의심을 가지겠소? 그러나 그가 몸과 마음의 건강함이 부족하고 결함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이런 일을 조롱하고 냉소하는 버릇이 있는 대중들에게 그와 우리를 비웃을 핑계를 제공해서는 안되오. 우리가 각각의 경우에 대해 숙고하고 실제로 그가 관직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아닐지에 대해 미리 판단해두지 않으면 평생 중요한 고비마다 늘 걱정하고 마음을 졸여야 할 것이오.
아무튼 당신이 지금 조언을 구했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가 마르스 제전에서 사제들을 위한 연회를 주관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소. 클라우디우스가 스스로를 눈에 띄거나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도록 친척인 실바누스(Silvanus)의 아들의 조언을 받는 한 말이오. 그가 황실 좌석에서 대경기장의 경기를 보는 것은 승인할 수 없소. 관람석 맨 앞에서 몸을 드러내면 사람들에게 너무 잘 보일 것이기 때문이오. 그가 라티움 축제 때 알바누스 산에 가는 것도, 로마에 머무르는 것에도 반대하오. 만약 그가 형과 함께 알바누스 산에 갈 수 있다면, 수도장이 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소?27)
친애하는 리비아, 우리가 앞으로 끊임없이 희망과 공포 사이를 오가지 않도록 이번에 전체적인 방침을 결정하기를 원하는 내 생각을 당신이 이해했으리라 믿소. 원한다면 우리의 안토니아에게도 이 편지의 일부를 읽어주시오.28)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초대 황제라 불리지만, 당시 그가 구축한 체제는 공화정의 외피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아직은, 특히 로마시에서는 황제는 신적인 숭배를 받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장 뛰어난 일인자일 뿐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지만, 신격화는 자신의 양부 카이사르에게 한정하고 스스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몸을 낮추었다. 자신을 추앙하며 은으로 된 동상이 세워지자 동상을 녹여 만든 주화로 황금 삼각대를 사 팔라티움의 아폴론에게 봉헌하는29)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
아우구스투스의 강력한 권력은 후계자 후보군을 지명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군사적 커리어를 쌓을 기회를 보장해 주었지만, 황실 남자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화정기의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보여야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 길을 가기에는 어려운 신체적 결함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월성을 강조해야 하는 황실의 일원으로 이는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약점이었다.
그가 황실의 치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 탓인지 클라우디우스에게 가장 가까운 여성들, 즉 어머니, 누이, 할머니는 모두 그에게 매우 가혹한 태도를 취했다.
어머니 안토니아는 그를 늘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 대자연이 오직 시작만 하고 완성하지 않은 존재” 라 불렀다. 누군가를 멍청하다고 할 때면 “내 아들 클라우디우스보다 더 큰 바보로군"하고 말하곤 했다. 그의 할머니 리비아는 늘 그를 더없이 경멸해 말을 건 적이 거의 없었다. 그를 꾸짖어야 할 때면 짧게, 혹독한 쪽지로, 혹은 심부름꾼을 통해서 했다. 누이인 리빌라는 클라우디우스가 언젠가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제발 로마 시민이 그런 잔인하고 부당한 운명을 피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큰 소리로 보란 듯 기도를 올렸다.30)
그러나 언어 표현이 매끄럽지 않을 뿐 클라우디우스의 지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양이 되는 학문을 열심히 익혔고 여러 과목에서 성과를 보여주었으며, 티투스 리비우스의 격려를 받아 로마사 역사서를 저술했다. 그리스어에도 능통해 그리스어로 에트루리아사와 카르타고사도 썼다.31) 아우구스투스 역시 클라우디우스가 나아질 희망이 없다고 보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자신도 노력을 기울였다.
나는 젊은 클라우디우스를 당신이 없는 동안 날마다 저녁식사에 초대할 예정이오. 그가 늘 혼자서 술피키우스(Sulpicius)나 아테노도로스(Athenodorus)와 저녁을 먹게 하고 싶지도 않고, 또 그가 좀 더 주의깊게, 더 차분하게 사람을 골라 그 사람의 동작이나 태도나 걸음걸이를 흉내내기를 바라기 때문이오. 그 측은한 아이는 운이 나쁘오.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의 정신이 헤매지 않고 그 성격의 고귀함이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말이오.32)
하지만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생전 클라우디우스에게 복점관 외의 관직을 주지 않았고, 유언장에서도 제대로 된 상속자로 언급하지 않았다. 뒤이어 제위에 오른 숙부 티베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우디우스가 관직을 요구하자 티베리우스는 집정관의 휘장만을 주었고, 그가 실제의 지위를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자 사투르누스 축제(Saturnalia)와 시길라 축제(Sigillaria)를 위해 금화 40닢을 주겠다는 답변만을 보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은거했고, 주변에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들을 두고 음주와 도박에 빠져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33)
티베리우스가 유언장에서 그를 주요 상속자로 거명하고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 후 실제 집정관직에 오르면서 클라우디우스의 처지는 나아졌지만, 그에 대한 사소한 푸대접 혹은 놀림은 여전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만찬장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식당을 한 바퀴 돈 후에야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만찬 후에 잠들면 참석자들이 올리브나 대추야자를 던졌다. 잠든 클라우디우스를 광대들이 지팡이나 채찍으로 찌르거나 손에 슬리퍼를 끼워놓아 깨어났을 때 슬리퍼로 얼굴을 문지르게도 만들었다.34)
장난을 빙자한 은근한 업신여김은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된 후에도 등 뒤에서 지속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세네카가 Apocolocyntosis를 썼을 때, 그가 생각한 독자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전의 클라우디우스를 잘 아는 이들이었다. 세네카와 독자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공통 분모가 있었다. 독자들은 클라우디우스의 불편한 신체적 특징, 결함, 약점을 알고 있었고 이미 클라우디우스의 뒤에서 그를 비웃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Michalopoulos, 2018: 461).
세네카의 풍자는 풍부한 지식을 자랑하는 지적인 것으로, 그래서 더 혹독하다. 그의 글에서 클라우디우스가 올림푸스에 도착해 신들을 겁먹게 만들자 제우스는 이 괴물같은 존재를 다루기 위해 헤라클레스를 내보낸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는 첫눈에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마치 괴물을 두려워해본 적은 있지만, 아직 모든 괴물을 두려워하지는 않는 사람처럼. 비정상적인 걸음걸이, 육지 동물이 아니라 전형적인 바다괴물의 것 같은 쉬고 부정확한 목소리를 가진 이전에 본 적 없는 존재와 마주쳤을 때 헤라클레스는 자신에게 열 세 번째 과업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35)
세네카는 잘 알려진 헤라클레스의 열 두 가지 과업에 더해36) 짓궂게도 클라우디우스가 헤라클레스가 맞서야 할 열 세 번째 괴물이라고 빈정대고 있는 것이다.
세네카는 글의 첫머리부터 클라우디우스를 지배자로, 혹은 바보(fatuus)로 태어난 자라고 말하고, 뒤이어 클라우디우스의 바보같은(stolidus) 삶이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37)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입을 통해 신이 되고자 하는 클라우디우스를 사정없이 비웃는데, 불편한 걸음걸이와 함께 특히 그의 언어상의 장애를 공격한다. 신속하게 세 단어도 이어 말하지 못하는 자를 누가 신으로 숭배하고 믿겠냐는 것이다.38)
연설 능력은 공화정의 정치가이건 황제이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이기는 했지만, 이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은 연설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칼리굴라 황제의 질투를 사 죽음을 당할 뻔 했던39) 세네카 자신에 대한 과시로 느껴지기도 한다. 후에 네로의 가정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의 치세 초기 궁정의 음모에 휘말려40) 코르시카에서 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으며, 그때의 부정적인 감정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그의 조롱에는 거침이 없다.
수에토니우스 역시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세네카와 공유한다.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많은 일화를 기록하며 때에 따라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 사람 몫을 하지 못해 가정교사에게 눌려 지냈던 클라우디우스가 성인이 되고 황제가 되어서도 주변의 측근들, 즉 자신이 해방시킨 노예들과 아내들에게 좌지우지되었다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그가 크게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41)
그러나 수에토니우스에 의해 부패한 측근들로 매도되었던 클라우디우스의 피해방인들은 카이사르의 친구들(amici Caesaris)라 알려진 황제 직속 내각을 구성하며 클라우디우스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장애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나 동등한 계층의 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클라우디우스였으므로, 오히려 주변의 노예들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는 성과를 올렸을 가능성도 크다. 그가 속주 출신들을 원로원에 받아들인 최초의 황제라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갈리아 코미타(Gallia Comita)의 부족장 가문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얻었고, 그 중 많은 이들은 율리우스 가문, 즉 클라우디우스 자신의 피호인이었다. 원로원에 입성한 그들은 기존의 로마 원로원 세력과 황제가 충돌할 경우 당연히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는 세력이 되었다(요·하이켈하임, 1999: 641-643).
장애로 인해 그와 같은 계층, 즉 원로원 계층의 이들에게 놀림당하고 경원시 당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을 클라우디우스가 의도했건 아니건 궁극적으로 원로원 계층을 약화시키는 강력한 조치를 도입한 인물이라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함께 통치에 있어 클라우디우스의 수동성과 무능력을 강조한 기록들은 어느 정도 장애인들에 대한 고대 로마인들의 편견의 산물이라는 커셔(Kershaw, 2018: 134)의 주장 역시 귀 기울일 만하나, 로마인들이 가진 장애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과 완전히 유사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4. 나가며
로마의 네 번째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다리를 끌며 걷는 균형을 잃은 걸음걸이, 팔과 머리의 끊임없는 떨림, 말을 더듬고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언어 문제 등에 시달렸다. 그는 정상적인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런 신체적 문제로 인해 지적 능력마저 의심받아 공직을 감당할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수에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디오 등이 남긴 기록을 통해 그의 증세를 진단해보면, 뇌성마비, 근육긴장이상증, 횡단성척수염, 뚜렛증후군 등이 의심된다. 이전에는 뇌성마비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았으나, 최근에 와서는 근육긴장이상증이나 뚜렛증후군이 더 가능성이 커 보인다. 클라우디우스의 상태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변화했으며 장년기에 황제가 되고 나서는 황제로서의 업무가 무리 없이 가능한 비교적 안정적인 건강 상태를 유지했다는 기록이 여기에 힘을 실어준다.
그는 처음 계승권에서 배제되었으나 조카 칼리굴라가 암살당한 후 근위대의 추대로 50세에 황제가 되고 나서는 관료제의 확대와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 클라우디우스 수로 완공, 오스티아 인공 항구 건설과 브리타니아 원정 성공을 통한 영역 확대 등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공직생활에 나서기 어려운 신체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 즉 황실 인사들의 골칫거리였고 차별의 대상이었다. 그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 누이 리빌라, 친할머니 리비아가 그에게 보였던 태도는 매우 혹독하다. 양할아버지였던 아우구스투스가 오히려 다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클라우디우스의 상태가 더 좋아질 수 있다고 믿었던 듯 하나, 현실적으로 아우구스투스도 숙부인 티베리우스도 그를 공직생활에서 배제시키는 선택을 했다.
그가 황제가 되어 비교적 성공적인 통치를 하고 있는 동안도,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의 신체적 장애, 특히 걸음걸이와 언어 문제는 끊임없이 비웃음과 놀림의 대상이었다. 그의 사후 쓰여진 세네카의 풍자시 Apocolocyntosis가 이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신체적인 문제로 인해 성공적인 군인도, 달변의 연설가도 될 수 없었던 클라우디우스는 당대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로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상적인 지도자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많은 홀대와 차별을 받았다. 클라우디우스가 살았던 시기는 장애에 대한 규정과 관념이 아직 자리잡기 시작하기도 이전이었지만, 그에 대한 반감이나 공격은 그 시기에도 선명하고 격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적인 업적을 이루어낸 황제였고, 이는 유사한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준다. 클라우디우스의 장애와 능력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던 미국의 한 대학원생은 본인 역시 뇌성마비를 앓았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에게 매료당했다고 고백했다(Whitacre, 2018:3).42) 그 시절의 역사가들 중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했을 노력을 기록해준 이는 없었으나, 우리는 역사의 행간에서 그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클라우디우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희망이다.
Notes
R. 그레이브스(Graves)의 동명 소설 I. Claudius(1934)와 그 연작인 Claudius the God(1934)를 원작으로 한다.
I. Claudius는 물론 소설이지만, 작가 그레이브스는 실제로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De Vita Caesarum)”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옮긴 번역가이기도 했으므로 소설의 고증은 상당히 충실한 편이다.
Suetonius, Claudius 2.1-2.
Cassius Dio, Roman History, 60.2.1.
티베리우스의 치세 중 칼리굴라의 형들인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미래의 제위 계승자로 활발한 공직생활을 했음에도 둘 다 반역 혐의를 받고 목숨을 잃은 것을 생각하면, 클라우디우스는 계승자가 되기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별 탈 없이 목숨을 부지한 것이기도 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의 암살에 겁을 먹고 저택의 커튼 뒤에 숨어있는 클라우디우스를 한 근위대 병사가 발견하고 끌어내어 병영으로 데려갔다. 그가 병영에 구류되어 있는 동안 원로원에서는 공화정의 부활이 논의되었으나 단일 지도자를 요구하는 민중의 목소리와 병사 각각에게 상당한 하사금을 약속한 클라우디우스의 약속으로 인해 그는 황제가 되었다(Suetonius, Claudius 10).
그들의 동생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Agrippa Postumus)가 있었지만 그는 후계자로 부적절한 인물로 생각되어 기원후 6년경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유배형에 처해졌다.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인 외손녀 아그리피나와 결혼한 것에 비해 클라우디우스의 첫 아내는 아버지가 집정관을 지낸 고위귀족이기는 했지만 황실의 혈연은 아니었던 Plautia Urgulanilla였다.
영광의 행로(course of honor)로 번역되는, 첫 공직인 재무관에서 최고위직 집정관에 이르는 로마에서의 공직 루트.
디오는 로마 시민이었지만 니케이아에서 태어났고 모계가 그리스계였다. 그리스어는 당시 학식있는 로마인들에게는 필수적인 언어였다.
호박으로 만들기라는 의미의 Apocolocyntosis라는 단어 자체가 신격화(apotheosis)와 유사한 단어를 차용한 말장난이기도 하다.
Suetonius, Claudius 30.
Cassius Dio, Roman History 60.2.1.
Seneca, Apocolocyntosis 5.2.
앞면에는 Tiberius Claudius Caesar Augustus라는 축약된 명문이 확인되며 뒷면에는 창을 든 병사가 가운데 서 있는 근위대의 전투 성벽이 보인다.
서울대학교병원, 「N의학정보-뇌성마비」, http://www.snuh.org/health/nMedInfo/nView.do?category=DIS&medid=AA000605, 검색일: 2025.02.21; 클라우디우스가 보행 자체는 가능했다는 점에서 경직성 편마비로 분류되는 것이 적절해보이나, 그에게서는 구음장애나 침흘리기 등의 사지마비의 특징도 보인다.
Suetonius, Claudius 31.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할 때 데려온 드루수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낳았던 딸 소 안토니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Suetonius, Claudius 4.6.
Suetonius, Claudius 21.1.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근육긴장이상증」, https://www.amc.seoul.kr/asan/healthinfo/disease/diseaseDetail.do?contentId=31990, 검색일: 2025.02.19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횡단성척수염」, https://www.amc.seoul.kr/asan/healthinfo/disease/diseaseDetail.do?contentId=31865&tabIndex=1, 검색일: 2025.02.19
Tacitus, Annales 12.61.
Plinius, Naturalis Historia 29.5.
그만큼 황제의 측근이었기 때문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크세노폰은 클라우디우스의 독살 배후로 의심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클라우디우스의 사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나, 타키투스에 의하면 독을 뿌린 버섯을 먹은 클라우디우스가 그 버섯을 토해내자 독살을 계획한 그의 아내 아그리피나가 공모한 크세노폰을 불렀고, 크세노폰은 클라우디우스가 토하는 것을 도와주며 효과가 빠른 독약을 바른 깃털을 그의 목구멍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Tacitus, Annals 12.67).
Suetonius, Claudius 2.
라티움 축제 기간 동안 알비누스 산에서 로마의 집정관이 라티알리스 유피테르에게 제사를 지냈고, 그 동안 로마에서 집정관의 정무를 대행하는 사람이 수도장(praefectus urbi)였다. 그 해 로마의 집정관은 게르마니쿠스였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게르마니쿠스가 알비누스 산에 간 동안 클라우디우스가 수도장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공식 행사인 알비누스 산의 제례에 참여하거나 수도장 역할을 맡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Suetonius, Claudius 4.1-3.
Suetonius, Augustus 52.
Suetonius, Claudius 3.2.
Suetonius, Claudius 41-42.
Suetonius, Claudius 4.5.
Suetonius, Claudius 4-5.
Suetonius, Claudius 8.
Seneca, Apocolocyntosis 5.3.
헤라클레스는 그를 미워하던 헤라의 저주로 인해 광기에 휩싸여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죄를 저질렀다. 그는 죄를 갚기 위해 미케네 에우리스테우스 왕의 노예가 되어 그가 시키는 열 가지의 과업, 그 중 두 가지를 에우리스테우스가 인정하지 않았기에 결국은 열두 가지의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 네메아의 사자, 괴수 히드라 등 주로 초자연적인 괴물들을 대상으로 한 이 과업을 성공시킨 덕분에 그는 그리스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Seneca, Apocolocyntosis 1.1; 4.1.
Seneca, Apocolocyntosis 11.
Cassius Dio, 19.7-8
세네카는 칼리굴라의 누이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조카였던 율리아 리빌라와 간통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이 문제를 제기한 이는 당시의 황후였던 메살리나였다.
Suetonius, Claudius 29.
“로마사를 공부하며 그에 대해 배웠을 때 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장애에 매료되었다. 나는 뇌성마비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래서 내가 다리를 절며 걷고 언어장애가 있지만 로마 제국을 다스린 인물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나는 클라우디우스에게서 내 자신을 보았다. 그는 지적이고 위대한 업적을 세울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신체 상태가 사회가 지적이고 능력있는 인물로 간주하는 틀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오해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