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元) 의학의 수용과 고려 의학의 대응, 향약 그리고 단방의 활용

The Acceptance of Yuan China Medicine and the Response of the Koryŏ Medical Community: Utilization of Local Herbs and Simple Prescription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5;34(1):1-36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5 April 30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5.34.001
*Associate Professor, College of Korean Medicine, Daejeon University; Research Fellow, The Institute for Medical Humanities, Inje University
오재근*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부교수 및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원. 한의학 전공
†이 논문은 2023학년도 대전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이 논문의 초고는 2024년 11월 29일에 개최된 Needham Research Institute Seminar에서 발표됐다. 논문 작성을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해 준 the Needham Research Institute(NRI)의 John Moffett, 景德镇陶瓷大学의 刘培峰, 兰州大学의 史志林과 발표 원고를 꼼꼼히 살펴준 the NRI의 Sally Church에 감사드린다. 아울러 논문 작성 계기를 마련해주신 전북대 신동원 교수님과 논문이 완결성을 지닐 수 있도록 지도해주신 익명의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본문 중의 중국 인명은 문화체육관광부 2017년 외래어표기법에 입각해, 신중국 건립 이후 활동한 중국 국적의 인명은 간체자로, 그 이전 인명과 대만 국적 인명은 번체자로 표기했다. 참고문헌은 원서 기재 사항을 존중해 그대로 표기했다.
Received 2025 February 4; Revised 2025 March 18; Accepted 2025 April 24.

Abstract

In this study, I examine how Chinese medicine, particularly from the Song 宋 and Yuan 元 dynasties, was received during the late Koryŏ 高麗 dynasty, along with the responses of the Korean peninsula’s medical community. Previous discussions of Koryŏ medicine have primarily focused on hyangyak 鄕藥, local herbs that were readily available. To move beyond these limitations, this study explores how the medical systems of the Song and Yuan were conceptualized as central, representing universal medicine, while Koryŏ’s and its medical practices were positioned as peripheral, characterized as local medicine. The broader field of medicine is examined across four categories: medical principles, diagnostic methods or pathological explanations, formulas, and herbs.

Situated on the eastern periphery of the Chinese continent, Koryŏ regarded Song medicine as advanced and central. In response, Koryŏ actively sought to study Song medical knowledge by importing comprehensive, government-compiled medical texts and petitioning for the establishment of medical education. Following the fall of Song, the Mongol (Yuan) dynasty emerged as the new ruling power and invaded Koryŏ nine times over a 30-year period. In 1259, the Koryŏ king succumbed to the Mongols (Yuan), and Koryŏ remained under the political influence of the Yuan Empire until 1356. As a result, Yuan medicine was adopted in Koryŏ, both semi-compulsorily and organically.

Evidence of Yuan influence can be found in surviving Koryŏ texts, which reflect the impact of the Comprehensive Record of Sagely Benefaction 聖濟總錄, a key text emphasized in the Yuan dynasty’s medical civil service examinations, as well as the new formulas introduced by the renowned physician Li Gao 李杲, Luo Tianyi 羅天益. Moreover, among the writings left by Yi Saek 李穡, a Koryŏ writer, are anatomical records derived from Yuan texts and correspondence with Yang Jongjin 楊宗眞, who is believed to be a Chinese medical practitioner. These records indicate that Koryŏ intellectuals made contact with Yuan medicine through various channels. However, effective clinical implementation of such newly acquired medical knowledge required access to specific medicinal herbs. While Koryŏ was under the Yuan rule, the close political relationship provided relatively easy access to valuable medicinal herbs, but this access was limited. As Koryŏ increasingly adopted Yuan medical practices, challenges surrounding the supply and demand of herbs became increasingly significant, prompting local medical practitioners to seek practical solutions.

To Koryŏ medical scholars and practitioners residing in the periphery, the medicine of Song and Yuan represented universal medicine. While they were able to acquire the knowledge of medical principles, diagnostic methods or pathological explanations, formulas, and herbs from this universal medicine, the political and geographical distance between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restricted the availability of medicinal herbs in Koryŏ. The most viable response was to establish a material foundation rooted in local herbs and to compile formularies that documented local herbs and simple prescriptions 單方 composed of only a few accessible herbs. This process reveals the conflict, compromise, and adaptation that occurred as Koryŏ’s local medicine confronted and adopted the universal medicine of the Chinese center.

1. 머리말

고려 최고의 의가는 누구일까? 고려의 공식 역사서 『고려사』「열전」「방기(方技)」에 실려 있는 단 한 명의 의가는 설경성(薛景成, 1237~1313)이다. 그는 고려 국왕 충렬왕(忠烈王)이 아플 때마다 불려 갔을 뿐 아니라 중국의 황제 원세조(元世祖)의 질병 치료를 위해 여러 차례 중국에 파송되기도 했다. 설경성의 치료가 효과가 있자 원세조는 그에게 집과 곡식을 하사하고, 아무 때나 대궐을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1) 안타깝게도 그가 어떻게 원세조를 치료했는지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몽골(원)은 1231년 이래 30년 동안 아홉 차례 고려를 침략했다.2) 1259년, 고려 국왕은 몽골(원)에 굴복했으며 강화 조약을 맺은 뒤, 1356년까지, 대략 100년 동안 원 제국의 간섭을 받았다. 번국(藩國)으로서 어느 정도의 자주성을 인정받고 원 직할지로의 편입은 면했지만, 1270년에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통한 정치적 압력은 피할 수 없었다. 설경성 역시 고려의 국왕 뿐 아니라 원의 황제까지 모셔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 있었다.

고려 후기 의학의 특징을 설명하며 한국 의학사 연구의 선구자인 김두종(金斗鐘)은 ‘자주적 의학’ 그리고 미키사카에(三木榮)는 ‘한반도 고유 의학’이라는 표현을 활용했다(김두종, 1981: 136; 三木榮, 1963: 41, 61). 구체적으로 김두종은 고려 말기 정치적으로는 모든 것이 쇠퇴됐지만 의학은 오히려 독립의 방향으로 진행해 그 성과를 원에까지 드러냈을 뿐 아니라 자국산 향약재에 대한 연구가 깊어져 향약 방서가 출현하게 됐다고 서술했다(김두종, 1981: 111). 그리고 미키사카에는 몽골의 침략과 압박 하에서도 『어의촬요(御醫撮要)』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통해 전래의 의방(醫方)을 집성해내며 반도 고유의 의학을 발양시킨 것은 민족의 끊어지지 않는 전통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三木榮, 1963: 61). 두 연구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는 『향약구급방』에 실린 향약 관련 정보와 조선 초기 관찬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통해 확인된 수권의 고려 시대 ‘향약방서(鄕藥方書)’ 또는 ‘향방의서(鄕方醫書)’의 존재였다(김두종, 1981: 155; 三木榮, 1963: 61). 위 두 연구자의 견해는 여전히 고려 후기 의학을 설명하는 주된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지만(신영일, 1995: 178; 김기욱 외, 2006: 149-150; 이경록, 2010a: 304-312), 원 제국의 일원으로 복속되어 있던 고려의 정치적 현실이나 고려와 몽골(원)을 오가며 활동해야 했던 고려의 대표 의관 설경성의 의학을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3)

동아시아 전통 의학은 의학적 원리, 의학 이론에 해당하는 이(理), 생리 병리 지식을 통해 발병 원인과 병리 기전을 파악하고 진단한 뒤 질병에 대한 치료 전략을 수립하는 법(法), 치료 전략에 따라 방제를 구성하고 약물 복용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방(方), 개별 약물의 채취, 가공, 보관 등의 내용을 다루는 약(藥), 이른바 이법방약(理法方藥)으로 설명된다(谢观, 2003: 121).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 의서 『향약구급방』이나 조선 시대 의서 『의방유취(醫方類聚)』 그리고 『향약집성방』을 활용해 재구성된 『어의촬요』, 『비예백요방(備豫百要方)』 등은 방제 관련 저작인 ‘방서(方書)’의 일종이다.4) 방서는 의학적 원리에 입각해 진단되고 치료 방법이 결정된 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인 방제 및 약물과 관련된 정보를 주로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개별 방제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거나 약물 구성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경우 해당 방제를 어떤 질환 또는 병증에 어떻게 활용할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실제 『향약구급방』에 실려 있는 방제들의 경우 의학적인 접근 외에 독(毒), 술수(術數), 유감(類感)적 사고 등을 활용한 접근이 이뤄져 있기도 하다(신동원 외, 2023: 5-9; 오재근 외, 2020: 289-300; 이기복 외, 2019; 1-42).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향약구급방』이나 『향약집성방』을 통해 재구성된 방제들은 한반도 의학의 자주성이나 고유 의학을 주장하기 위한 논거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심지어 최근 강연석(Kang Yeonseok)은 향약 방서가 다수 편찬된 것을 근거로 13~14세기 한국 의학을 ‘향약 의학’의 시대로 규정하기도 했다(Kang Yeonseok, 2011: 33).

한편 마타한슨(Marta Hanson)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 의학에 대해 북쪽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기를 공격하는 치료 방법을 주로 활용하고 남쪽은 내부 기운을 보전하고 길러주는 치료 방법을 주로 활용한다며 방제나 약물 뿐 아니라 의학 이론과 치료 방법 등까지도 포괄한 의학 전반을 매개로 지역 간 의학의 차이를 설명했다(Marta Hanson, 2006: 126-130). 더불어 서소영(Suh Soyoung)은, 향약과 관련하여, 조선의 경우 중국 중심의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지식 체계를 구축할 필요도 없었고 의학 지식의 축적인 자주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학 지식에 조선이 지닌 고유한 차이와 지정학적 특징을 부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Suh Soyoung, 2017: 38). 이로 미뤄볼 때, 이법(理法)이 배제된 방약(方藥) 중심의 고려 의서 분석에 입각한 원 간섭기 그리고 고려 말기를 포함한 고려 후기 의학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다시 한번 검토될 필요가 있다.

고려 후기 그중에서도 100년 동안 이어진 원 간섭기의 의학은 실제 어떤 모습을 띠고 있었으며 또 어떻게 서술되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고려의 임상 의학과 관련된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김두종과 미키사카에 이후, 신영일, 안상우, 이경록을 비롯한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새로운 의서가 발굴되고, 문집, 묘지명 등으로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면서 고려 의학의 입체적인 면모가 드러났지만,5) 기존 서술을 전환시킬 만한 결정적인 자료는 등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금 더 나아간 역사 서술을 위해서는 고려 후기 및 조선 건국 초기의 의서, 고려 후기 당대에 편찬된 문집들을 꼼꼼히 분석할 뿐 아니라 기존과 다른 관점 또는 접근 방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원 간섭기 이전 송 의학을 학습한 고려 의학의 모습을 간단히 살펴본 뒤, 당시의 정치 상황을 고려해, 지배 국가였던 중국, 원을 중심(center) 그리고 피지배 국가였던 고려를 주변(periphery)으로 상정했다. 이어 중국, 원의 과거 제도에서 채택한 의서나 주요 관찬 의서 중의 정보를 보편 의학(universal medicine) 그리고 고려에서 편찬된 의서 중의 정보를 지역 의학(local medicine)으로 구분했다(김영식, 2021: 179-190; Suh Soyoung, 2010: 238-246).6) 아울러 약물 중심의 접근 방법을 극복하기 위해 이법방약의 틀을 활용해 의학 전반을 분석했으며, 주요 연구 대상으로 『향약구급방』, 『어의촬요』, 『비예백요방』에 이어 여말선초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간기방(簡奇方)』과 조선 초기의 관찬 의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까지 포괄했다.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9~1241), 이색(李穡, 1328~1396) 등의 문집 역시 검토해 그중에 실려 있는 의학 정보를 토대로 전문 의가들의 의학적 지식을 추정했다. 고려 의가가 남긴 임상 기록, 의안(醫案)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임상 의료의 실제적인 모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수 없는 점, 『향약구급방』 이외의 연구 대상 자료인 『어의촬요』, 『비예백요방』, 『간기방』 등이 조선 시대 의서인 『의방유취』를 통해 복원된 점은 이번 연구의 한계다. 다만 접근 방법 및 관점의 변경을 통해 동아시아 과학 및 의학 분야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던 중국의 지위 그리고 원의 지배를 받고 있던 고려 후기의 정치 현실까지도 감안한 연구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2. 송 의학 학습 이후 전개된 고려 의학의 일면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역병(疫病)이 돌면 승려와 도사들이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외우면서 마을을 다니거나 개인이 질병에 들었을 때도 『천수경(千手經)』의 소룡다라니(召龍陀羅尼) 등의 불경을 읽으며 질병을 치료하고자 했다.7) 주문, 푸닥거리, 안마 등도 질병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었다.8)

고려에도 의학을 전문적으로 학습하고 임상 진료를 수행하는 의가 또는 의관들이 존재했다. 고려 중앙에는 상의원(尙醫院)과 상의원이 분화한 태의감(太醫監), 상약국(尙藥局) 등의 의료 기구가 있었으며, 태의감과 상약국에는 태의감(太醫監), 태의소감(太醫少監) 그리고 상약봉어(尙藥奉御), 시어의(侍御醫) 등과 같은 여러 의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방에는 약점(藥店)이 구축되어 있었고, 지방에 파견된 의관인 의사(醫師)와 약재 수취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지방 토착 세력이자 향리인 약점사(藥店史)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이경록, 2010a: 121-130, 175-198). 고려의 관원 선발은 958(광종 9)년 이래 과거 시험을 통해 이뤄졌으며, 의관 역시 의업식(醫業式), 주금업식(呪噤業式)을 통해 선발됐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1078년 고려 문종(文宗)은 자신이 앓고 있던 풍비(風痺)를 치료하기 위한 의관 파송을 송에 요청했다. 송의 대형 관찬 의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이 고려에 들어와 있었지만 고려 의관들의 의술 수준으로는 자신의 병증을 치료하기 어렵다는 평가에서였다. 1079(문종 33)년 송의 한림의관(翰林醫官) 형조(邢慥) 등이 문종을 치료하기 위해 고려에 들어왔다. 1101(숙종 6)년에는 ‘제세요술(濟世要術)’이라는 평가와 함께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이 고려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고려 숙종(肅宗)은 재차 송 정부에 의학을 가르쳐줄 의관의 파송을 요청했다. 1103(숙종 8)년, 송의 의관 모개(牟介) 등이 반년 이상 고려에 머물며 의생들을 교육했다. 고려 정부는 이탄지(李坦之)를 비롯한 명망 높은 집안의 자제들로 하여금 의학을 배우도록 했다. 그리고 1118(예종 13)년에는 고려 예종(睿宗)의 요청에 의해 송 태의국에서 의학을 가르치던 교수(敎授) 양종립(楊宗立), 두순거(杜舜擧) 등이 고려에 들어와 2년 동안 고려의 의생들을 가르쳤다(이경록, 2010a: 233-251; Oh Chaekun et al., 2021: 76-78).

송 의학이 보급되고 있음은 문인들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규보(李奎報)는 약물 전문 서적 『본초(本草)』를 읽은 뒤 의원이 되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다.10)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중에 수록된 ‘이시랑(李侍郞)이 보내온 시문과 토란에 차운하여 작성한 시문’에서는 『도경본초(圖經本草)』 「우(芋)」에서 유래한 정보를 활용하고 있어 그가 1061년에 송 정부에서 간행한 『도경본초』 또는 1108년에 간행되어 『도경본초』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경사증류대관본초(經史證類大觀本草)』를 살펴보았음을 시사한다.11) 이밖에 임의(林懿, 1041~1117)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방술과 약물[方藥]을 점검하고 불서(佛書) 읽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12) 『신의보구방』을 들여온 당사자였던 만큼 그가 살펴보았던 의학 서적은 송에서 들여온 의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경록, 2010a: 241-242).

송 의학 전래 이후 편찬된 고려 의서로는 『어의촬요』와 『향약구급방』을 꼽을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 당시 고려 임상 의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어의촬요』는 1226년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대의 권력자 최우(崔瑀, 1166~1249)와 인척 관계에 있던 최종준(崔宗峻, ?~1232)이 다방(茶房)에서 수집한 약방문을 2권으로 나누고 긴요한 것을 첨부해 편찬한 방서다. 편찬 과정에 『천금방(千金方)』, 『태평성혜방』 등의 중국 의서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중에 수록된 방제의 2/3 가량이 중국 의서와 비교 취합되지 않아 고려 궁중 의학의 성과를 정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안상우·최환수, 2000: 42). 『어의촬요』 중에는 방서의 원조(方書之祖)로 알려진 『상한론(傷寒論)』의 유명 방제인 백호탕(白虎湯)이나 『상한론』의 대표 방제 마황탕(麻黃湯)에서 유래한 삼요탕(三拗湯) 등도 실려 있다. 편찬 과정에 참고한 『태평성혜방』 중에 『순화본상한론(淳化本傷寒論)』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马继兴, 1990: 123; 钱超尘, 1993: 477). 한편 『향약구급방』은 사대부(士大夫)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향약(鄕藥)을 활용해 일상적인 질병 문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편찬된 방서다. 고려 고종(高宗) 이후부터 14세기 전반 사이에 편찬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편찬자의 정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신동원 외, 2023: 19). 이 책 중에는 『증류본초(證類本草)』, 『천금방』, 『태평성혜방』 뿐 아니라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의 원문, 『보제본사방(普濟本事方)』에 수록된 중국 의가 허숙미(許叔微)의 경험 의안(醫案) 역시 인용되고 있으며, 개별 약물의 향약 명칭, 병증에 대한 설명을 고려 사람들의 발음을 활용해 기입하거나 편찬자 자신의 임상 사례를 수록하며 신뢰감을 높이고도 있다(Oh Chaekun et al., 2021: 63-71). 『향약구급방』의 편찬자는 독자가 사대부임을 감안해, 본문 중에 서, 표리냉열(表裏冷熱)을 살펴야 하는 내용은 기재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단 부골저(附骨疽) 등과 같은 위험한 질병의 경우 ‘대방(大方)’을 살펴볼 것 등을 강조하고도 있다.13) 이를 통해, 사대부가 아닌, 전문 의학 지식을 지닌 임상 의가들의 경우 병증의 성질을 표리냉열로 변별하는 ‘변증(辨證)’을 수행하거나 『천금방』, 『태평성혜방』, 『보제본사방』 등과 같은 전문적인 임상 의학 서적, 이른바 ‘대방’을 검토하며 각종 질병에 대처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144년, 죽음을 앞둔 원응국사(圓應國師, 1051~1144)는 스스로를 진맥한 뒤 “삼부(三部)의 맥(脈)이 끊어졌으니, 죽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의관, 시의(侍醫) 역시 국사의 의견에 동의했다.14) ‘삼부(三部)’라는 표현은 『황제내경소문』「삼부구후론(三部九候論)」 중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는 전신에 있어서의 상중하(上中下) 세 부위를 가리킬 뿐이다. ‘삼부의 맥’이라는 표현은 왕숙화(王淑和)의 『맥경(脈經)』에서 유래한 것으로 촌관척(寸關尺)을 지칭하며 그 박동이 균일하고 조화로우면 살 수 있지만 끝나면 죽는다고 간주된다.15) 원응국사 곁에 있던 시의를 비롯한 고려의 임상 의가들 역시 손목 촌관척 부위에서 박동하는 맥상을 살피고 변증을 진행한 뒤 그 결과에 따라 사생을 판단하거나 치료 방제를 처방했던 것이다.

요컨대, 692년, 통일 신라 효소왕(孝昭王) 원년 의학 교육 기구, 의학(醫學)이 건립되면서 중국의 의학 경전은 한반도의 의학 교육을 위한 표준 의서로 자리잡았다(오재근, 2023: 208-213). 고려 의학의 기본 기조 역시 통일 신라 그리고 중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중국 송의 의관이 직접 파송되어 고려의 의생들을 교육하면서 한반도와 중국 의학과의 거리는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의학의 원리, 생리 병리 지식, 진단 방법 그리고 치료 방법, 이른바 이법(理法) 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다만 임상에서 실제 사용하는 방제나 약물, 방약(方藥)에 차이가 있었다. 특히 『향약구급방』 편찬자는 향약으로 구성된 방제와 그것을 활용한 자신의 치료 경험을 제시하며 한반도에 축적되어 있던 의약의 성과를 제시하고자 했다.

3. 원 간섭기, 원 의학의 유입과 고려의 수용

원 간섭기, 충렬왕(忠烈王) 이후 고려 국왕은 원 황제의 부마(駙馬)이자 고려 국왕 그리고 원의 고려 통치기구인 정동행성의 승상이었다.16) 고려 국왕의 중첩된 책봉호를 통해 알 수 있듯 고려에는 원과 고려의 상반된 질서가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세조구제(世祖舊制)’를 통해 제후국 수준의 독립과 문화적 독자성을 보장받았지만, 정동행성에 평장정사(平章政事)로 파견된 고르기스(闊里吉思)는 원에서 반포한 법령을 근거로 신분 질서와 관련된 고려 법제에 간섭하려 들기도 했고, 고려 내부에서도 원의 문화를 쫓으며 고려의 문화적 독자성을 부정하는 새로운 지향이 등장하기도 했다(이종서, 2015: 367-391; 조원, 2017: 163-168). 의학 부분에서도 새롭게 입수된 원의 의학과 기존 고려 의학 사이에 갈등 또는 긴장 국면이 조성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원 의학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첫 번째, 의학에 대한 중시와 의학 과거 제도의 실시, 두 번째, 의학 이론 및 임상 의학 분야에서의 새로운 성취, 세 번째 다양한 지역의 약물 지식 취합, 네 번째 중국 남북(南北) 지역 의가들이 활용하던 통용 방제의 정리 등을 꼽을 수 있다(廖育群 外, 1998: 312-335; 李经纬·林昭庚, 2000: 401-443; 김대기, 2017: 456).

먼저 몽골(원)은 현지 의료인을 차출해 정복 과정에 동행시킬 정도로 의료인들을 우대했으며 의호(醫戶) 제도를 통해 의료 기술의 전승을 보호했다. 그리고 1316년, 원에서 의학 과거가 실시됐다. 이제 태의(太醫), 제거(提擧), 의학교수(醫學敎授)의 선발은 과거 시험을 통해 이뤄졌다(李经纬·林昭庚, 2000: 403; 김대기, 2017, 460-492). 의학 과거 실시 이전, 1305년에 최종 확정된 원의 의학 각과합시경서(各科合試經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송대 의서 『성제총록(聖濟總錄)』의 부각이다(조원, 2021: 48-50). 『성제총록』은 송 휘종(徽宗)의 이름으로 편찬된 북송의 관찬 종합 의서였지만 금(金)에 의해 1161~1189년 중에 처음 발간됐다. 그리고, 1300년, 원 정부는 이 책을 재발간했을 뿐 아니라 주제별로 구분해 개별 과목 의관 선발을 위한 의서로 선정했다[표 1]. 두 번째, 원을 대표하는 의가로 이고(李杲), 주진형(朱震亨)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고는 비장을 중심으로 한 내상(內傷) 질병의 이해를 제안했고, 주진형은 운기학 용어인 상화(相火)를 활용해 발병 기전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했으며, 병리 물질인 담(痰)의 역할 등을 강조하며 기존과 다른 접근 방법을 제시했다(Reiko Shinno, 2016: 121-147). 세 번째, 원이 대제국을 이루고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역을 관할하게 되면서 중국 뿐 아니라 그리스 및 서아시아 등 지역의 의약 지식도 취합됐다. 그 중 『회회약방(回回藥方)』은 원에 유입되어 있던 아랍 의학의 내용을 정리한 서적으로 그 중에는 갈레노스, 히포크라테스, 이븐시나 등의 의학 역시 포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宋峴, 2016: 6-10; Buell, 2007: 283-291). 끝으로 남풍(南豊)의 의학교수(醫學敎授)를 역임했던 위역림(危亦林, 1277∼1347)이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1337년 편찬, 1345년 간행)을 펴내며 자신의 고조(高祖)로부터 전래 되던 의약 지식을 정리했다. 이 책 중에서 위역림은 질병 명칭을 제시한 뒤 해당 질병의 병인과 병리 기전에 따라 병증을 구분하고 처방을 활용하는 변증 방법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을 비롯한 중국 남북 의가들이 제시한 새로운 방제 등을 수집 정리하고 군신좌사(君臣佐使)에 의거해 구성 원리를 설명했다(许敬生, 2006: 10, 537).

고려, 원, 조선의 의관 채용을 위한 의학 서적

Table 1. Books for Recruitment of Medical officer in Koryŏ, Yuan, and Chosŏn

그렇다면 원 의학의 성과는 고려의 의료 제도 그리고 실제 임상 의학의 내용 중에 어떤 식으로 등장했을까?

먼저 원의 공식 조직으로 고려 국왕이 책임자로 임명되어 있던 정동행성에는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 뿐 아니라 의학제거사(醫學提擧司)도 설치되어 있었다.17) 원의 각 행성에 설치되어 있던 의학제거사는 제거 1인, 부제거 1인을 둔 종5품 관청으로 전국의 의생 교육 과정을 감독하고 태의원 교관의 시험을 관장했다. 아울러 명의가 찬술한 저서를 교감하고, 약재를 판별 및 검험하며, 태의의 자제를 교육하고 전국에 설치된 ‘의학’을 통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김대기, 2017: 467). 이밖에 각 지역 약재의 진공(進貢)에 대한 책임도 지고 있었다(王振国, 2006: 350). 정동행성 의학제거사의 경우 해당 관직명이 『고려사』 중에 단 한차례 기재되어 있으며 활동 양상 역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아 명목상의 조직이었다는 견해와 원의 기타 행성에 설치되어 있던 의학제거사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병존하고 있다(이경록, 2010c, 350; 장동익, 1990: 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7).18) 공민왕(恭愍王) 무렵 의학제거사 포함 정동행성 설치 기구의 인사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으며, 정동행성 유학 제거사가 학교, 제사, 교양 등의 학교 사무를 담당하며 원의 유학을 고려에 보급하는 주요 창구로 작용했던 만큼(장동익, 1990: 67-71), 정동행성의 의학제거사 역시 일정 정도 원과 고려 간 의약 교류의 통로로써 작용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현재 알려져 있는 고려의 의과 과목은 1136(인종 14)년에 확정됐다. 다만 원 간섭기인 1259년 이후에도 동일한 과목이 유지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313(충선왕 5)년 원나라에서 과거를 실시하면서부터 고려의 과거가 향시(鄕試)로서 원의 회시(會試)에 응시하기 위한 예비시험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됐고 고려의 과거제 전반이 원의 과거제를 염두에 두고 변화된 점(이강한, 2010: 149-164), 1430년에 정해진 조선의 의학 취재 경서(醫學取才經書)에 『유연자방(劉涓子方)』, 『창저론(瘡疽論)』 등의 의서가 사라지고 『성제총록』, 『세의득효방』, 『서죽당방(瑞竹堂方)』(1326년 간행) 등 원대에 발간된 다수 의서들이 채택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일부 과목 또는 서적에서의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표 1].19) 특히 원의 의학 과거에 『성제총록』이 전면 부각되고 있고, 『의방유취』를 통해 채집된 고려 의서, 『어의촬요』 중에 『성제총록』과 동일한 내용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성제총록』이 고려 후기에 어떤 의서보다 중시됐을 가 능성은 높다.20)

『비예백요방』은 고려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대중용 의서다(이경록, 2014: 112-113). 『의방유취』를 통해 복원된 『비예백요방』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운기(運氣) 의학의 전면적인 도입이다.

“하늘과 땅은 텅빈 공간[大空]에서 생겨났고 사람과 만물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겨났다. 오행(五行)을 부여받아 쇠하고 왕성함의 때가 있으니 한쪽이 이기게 되면 태어나고 서로를 살려주게 되면 이뤄진다. 서로 균형이 맞으면 조화롭지만, 한쪽이 우세하게 되면 해롭게 된다. 천지는 사람을 따라 변하기 때문에 심기(心氣)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모든 기운이 그것을 쫓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섯 구멍이 작용이 비뚤어지고 똑바름에 따라 조금씩 반응하여 슬픔, 기쁨, 근심, 즐거움이 드러나고 균형이 잡힌 상태[平]와 질병의 상태[病]가 몸에 생겨나게 된다.21)

위의 인용문은 『비예백요방』의 앞부분에 자리한 서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김진희·안상우, 2009: 239). 운기 관련 논의를 책 머리에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제총록』의 구성과 유사하며, 운기의 변화상을 오행 중심으로 설명하고 운기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과 질병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섯 종류의 기운이 뭉쳐 있다가 때를 타게 되면 발동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성제총록』의 내용과 상통한다.22) 다만 『성제총록』과 달리 육기(六氣)와 관련된 내용을 기재하고 있지 않은 점, 인의예지신 등과 같은 심(心)과 관련된 논의를 운기와 연계시킨 점 등은 『성제총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비예백요방』 운기학 만의 특징이다(김진희·안상우, 2009: 241-246). 이를 통해, 송 휘종에 의해 도입된 이후 금대 의가 류온서(劉溫舒)의 『소문입식운기론오(素問入式運氣論奧)』, 성무기(成無已)의 『주해상한론(註解傷寒論)』 「도해운기도(圖解運氣圖)」 그리고 원대에 재발간된 『성제총록』을 통해 확산되고 있던 운기 의학이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윤창열, 2016: 176-181).

『간기방』은 그동안 크게 주목되지 않은 의서로 『의방유취』 「인용제서(引用諸書)」 순서에 입각해 『비예백요방』 이후 그리고 중국 의가 류순(劉純)의 『의경소학(醫經小學)』(1388년 간행)이 발간되기 이전, 여말선초에 편찬된 의서로 추정되고 있다(안상우, 2008: 275; 최환수·신순식, 1997: 36). 『의방유취』를 통해 관련 원문을 채집 및 분석한 결과, 이 책이 의학 이론이나 진단, 침구, 본초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의서라기 보다 여러 가지 종류의 방제를 수집 정리한 방서(方書)임을 확인했다. 아울러 원대 의서로 알려진 『경험비방(經驗秘方)』 뿐 아니라 『서죽당경험방』, 『세의득효방』, 『어약원방(御藥院方)』, 『왕씨집험방(王氏集驗方)』 등을 다수 인용하고 있음 역시 확인했다. 특히 이고의 『동원시효방(東垣時效方)』(1266년 편찬)에 수록되어 있던 자신환(滋腎丸), 이고의 제자 나천익(羅天益)이 저술한 『위생보감(衛生寶鑑)』(1281년 간행)에 수록되어 있던 금은화산(金銀花散) 등과 함께 『경험비방』 중에 실려 있는 지원(至元) 2년, 1265년, 원세조의 사위, 자사치르(扎撒赤兒)의 안질을 신성복명환(神聖復明丸)으로 치료한 사례 역시 기재되어 있어 원대 유명 의가들의 방제나 관련 경험이 한반도 의약계에 수용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부록 1]. 이밖에도 조선 건국 초기 권중화(權仲和)에 의해 편찬된 『향약제생집성방』 중에 『성제총록』, 『세의득효방』, 『서죽당경험방』, 『어약원방』 등이 적극 인용되고 있는 점은 상당 수준의 원대 의학이 원 간섭기 또는 고려 말기에 한반도에 유입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이경록, 2010c, 346-348).

당대에 손꼽히던 문인이자 관료였던 이색은 10여년 동안 투병하며 스스로도 상당 정도의 의학 지식을 획득하고 있었다. 그는 연라자도(煙蘿子圖)를 살펴보며 사람의 몸이 기계와 같이 작동한다는 것을 파악했고, 『맥경(脈經)』을 살펴보며 진단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도 습득했다. 또 자신의 질병 치료를 위해 이런저런 방제와 약물을 구해보기도 했다[그림 1].23) 연라자도는 송말 원초에 편찬된 내단 및 양생 전문 서적, 『수진십서(修眞十書)』 「잡저첩경(雜著捷徑)」 중에 실려 있는 그림과 설명문으로 오장의 형태와 기능 뿐 아니라 소화 및 호흡, 태아의 성장 과정 등이 상세하게 수록된 해부도다(김학동 외, 2015: 89-106). 그리고 『맥경』은 그 중에 실려 있는 문장의 23.2%가 『상한론』, 14.8%가 『금궤요략』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진단 전문 서적이자 임상 의서다(小曾戶洋, 1981: 400), 이색의 제자, 정도전(鄭道傳)이 저술한 『진맥도(診脈圖)』 중에 맥을 짚을 줄 알아야 처방을 구분하고 또 유효한 처방을 내릴 수도 있다는 문장이 기재되어 있는 만큼,24) 이색 역시 『맥경』을 통해 자신의 질병을 살피고 『상한론』에 실린 병리 기전, 진단 방법 및 처방 등에 대한 지식을 흡수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림 1.

연라자 내경도(煙蘿子內境圖)

Figure 1. Yanluozi’s Drawing of the Inner Aspect of the Body

(『修眞十書』, 「雜著捷徑」, 漢リポ Kanseki Repository 홈페이지, https://www.kanripo.org/, 검색일: 2025.2.4.)

벽운(碧雲)이 나의 병을 안타깝게 여겨,

마음을 십분 깊이 써주어서,

아침저녁 할 것 없이 왕래하느라,

궂은 날의 어려움도 가리질 않네.25)

진맥의 비결 전수받고 손만 대면 금세 알아,

귀신도 놀랄 만큼 오장육부를 훤히 보네.

해동에서 그의 의술 덕을 안 본 이 있으랴만,

그중에서도 목옹(牧翁)이 제일 고마워해야 하리.26)

위에서 인용한 첫 번째 시에서 이색은 벽운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질병 치료를 위해 여러 차례 자신을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다. 벽운은 ‘벽운공(碧雲公)’, ‘양벽운(楊碧雲)’으로 불리는 인물로, 두 번째 시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뛰어난 진맥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의가였다. 의학에 나름의 조예를 지니고 있던 이색은 벽운에게서 진료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진맥과 관련된 기술 역시 습득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실제 이색은 동년배였던 강판사(姜判事)로부터 요청을 받아 그의 육부맥을 살펴보기도 했다.27) 벽운의 정체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진료를 받았다는 점, 이색이 그를 ‘벽운공’이라고 부르며 두 자식으로 하여금 예(禮)를 행하게 했다는 점, 그가 도교와 관계된 인물인 우객(羽客)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28) 그리고 당시 고려 국왕이 이색의 질병 치료를 위해 여러 차례 태의(太醫)를 보냈다는 점29) 등을 고려할 때, 벽운은 중국 민중(閩中)의 도사(道士) 출신으로 ‘벽운(碧雲)’이라는 호를 쓰며 고려에서 판전의(判典醫)로 활동하던 양종진(楊宗眞)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원세조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파견됐던 고려 의관 설경성과 반대로, 고려로 시집온 충렬왕(忠烈王) 왕비의 수행원으로 그리고 왕비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관으로 송초(宋超), 태의 요생(姚生), 왕득중(王得中), 곽경(郭耕) 등이 고려를 방문하기도 했다(高伟, 1994: 137).30) 원과 고려 의가들 간의 직접적인 교류를 드러내는 사료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양벽운이 의학을 매개로 이색과 같은 환자와 교류했던 것처럼, 공주를 치료하기 위해 파견된 원의 태의들 역시 고려 현지의 의가 또는 환자 주변의 인물들과 교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려 의가들이 원의 임상 의학을 엿보거나 또는 학습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요컨대, 원대에 재발간 된 송대 의서 『성제총록』은 원의 의학 과거 주요 과목으로 채택됐다. 고려 의서 『비예백요방』이 『성제총록』과 동일하게 운기 관련 내용을 책 전면부에 내세우고 있는 것을 통해 고려 후기 『성제총록』이 상당히 중시 됐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 고려 말, 조선 초기에 편찬된 『간기방』이나 『향약제생집성방』 중에는 다양한 원의 의서들이 인용되고 있으며 원대 유명 의가들의 방제 역시 수록되어 있다. 한편 중국에서 고려에 건너와 의학 분야에 종사하던 인물들 역시 원의 의학이 고려로 들어오는 주요 통로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 긴밀했던 원과 고려의 관계만큼 원의 의학은 다양한 경로 그리고 방식으로 한반도에 유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4. 원 간섭기, 향약 그리고 단방을 활용한 방서의 편찬

고려 후기에 통용되던 의서 정보와 문인 이색의 의학 지식 수준으로 미뤄볼 때 고려 후기의 임상 의가들 역시 실제 상당한 수준의 의약 정보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다만 의학적 원리나 법칙, 이법(理法)에 의거해 질병의 병리 기전을 파악하고 수립된 치료 원칙에 따라 방제를 처방하는 것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약물을 확보하고 전탕하거나 환산제를 만들어 복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고려 정부와 몽골(원) 간에 강화가 성립된 뒤, 몽골(원)은 고려에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요구하기 시작했다(이강한, 2013: 31). 그 중에는 약물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1268년, 몽골(원)으로부터 원세조의 발이 부은 증상[脚腫]을 치료하기 위해 아길아합몽합(阿吉兒合蒙合)이라고 불리는 ‘소처럼 생긴[似牛]’ 물고기를 구해달라는 요청이 고려 정부에 도착했다.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아길아합몽합 가죽 17장이 몽골(원)으로 보내졌다.31) 아길아합몽합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중국학 연구자 프랜시스 클리브스(Francis Cleaves)는 ‘아길아합몽합’은 몽골어 ‘Аirɤa Mungqa[ɤ]’로 ‘멍청한 종마(種馬) [Stallion, the Foolish]’라는 의미이며, 윌리엄 헨토른(William Henthorn)이 제시한 번역어 ‘바다소(Seacow?)’에 따라 ‘듀공(Dugong)’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Cleaves, 1986: 153; Henthorn, 1963: 206). 반면 조선의 정동유(鄭東愈)는 아길아합몽합의 가죽을 ‘수우피(水牛皮)’로 보았고(정동유, 2016: 501, 678), 이후 이규경(李圭景)은 강치(嘉支), 물개(海狗) 등의 가죽 역시 ‘수우피(水牛皮)’로 불린다고 기재해두었다.32) 구종석(寇宗奭)의 견해에 따르면 물개 가죽은 쇠가죽처럼 두껍고 질겨 말안장 깔개를 만들 수도 있다.33) 듀공은 따뜻한 바다에 서식하는 동물인 만큼 한반도 바다에 서식하던 강치나 물개의 가죽이 원으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34)

강치나 물개의 가죽, 인삼, 매, 말 등과 같은 특별한 품목을 제외하면 고려에서 산출되는 물자의 가짓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약물만 하더라도 중국, 송에서 발간된 약물 서적 『경사증류대관본초』 중에는 1,744개의 약물 정보가 실려져 있는 반면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약재는 고려 이후 조선 세종 무렵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근거하더라도 384종에 불과했다(岡西爲人, 1983: 106; 이경록, 2010b: 239). 그 중 눈병을 치료하는 대표적인 약물, 용뇌의 경우, 『어의촬요』에 수록된 사용 빈도가 높은 10개 약물 중 하나였으나 한반도에서는 산출되지 않는 약물이었다(이경록, 2010c: 362). 실제 원 간섭기 이전에 활동한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이 앓고 있던 안질(眼疾)을 치료하기 위해 용뇌(龍腦)를 구했지만 실패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다 최고 권력자 최우(崔瑀)를 통해 가까스로 확보한 용뇌는 모양만 닮은 유사품이었다.35)

남송(南宋) 멸망 이후, 14세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원의 일방적인 물자 징발 및 수탈에 무제한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고려와 중국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상인들을 위한 중국어 학습서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가 편찬될 정도로 인적 및 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이강한, 2013: 39, 199).36) 심지어 원 간섭기에 활동한 문인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은 이규보가 구하지 못했던 용뇌를 매의 열병 치료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 나는 하얗고 노란색을 띤 매를 얻어 매우 아꼈다. 이 무렵 매가 병에 걸려 심해지면 한 구역을 쓸어버린 듯 아무 것도 남지 않도록 했다. 하루는 이 매가 음식을 물리면서 열이 심한 증상을 보였다. 사람들 모두 구석진 곳에 따로 두라고 했다. 나는 용뇌원(龍腦元)을 사용했는데, 이 매에게서 효과를 보았다.”37)

이조년이 활용한 용뇌원은 용뇌, 대황, 인삼, 세 가지 약재로 구성되어 있었다. 용뇌나 대황은 모두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가 아니었기에 원으로부터 수입해야만 했다. 이조년은 과거에 합격한 관료로서 여러 차례 원을 오갔던 인물이었던 만큼 약재 입수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길아합몽합과 용뇌의 사례는 고려 후기, 고려에서 산출되는 약재가 고려에서 원으로, 원의 약재가 원에서 고려로 전해져 활용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원세조나 이조년은 당대 최고 통치자이자 고위 관료였기에 어렵지 않게 양국의 약재를 입수했을 수도 있다. 고려의 모든 이들이 약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달째 병을 앓고 있던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의 아들이 이색을 찾아와 아버지의 질병 치료를 위해 곽향(藿香)을 구했다. 이색이 곽향을 내 주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마음을 안정하고 몸을 추스르기를 권하거나 약을 먹는 것보다 양생을 실천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겠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제공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38) 이색 스스로도 중요 약물 중 하나인 부자(附子)를 구하기 어려워했다.39) 곽향 또는 부자로 구성된 방제는 고려 의서 『향약구급방』 뿐 아니라 조선 세종 무렵에 편찬된 의서 『향약집성방』에도 실려 있지 않다.40) 부자만이 백부자나 향부자의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 보조적으로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 초기 전국의 약재 재배 현황을 조사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전라도 한 곳에서 곽향을 채취한다고 기재하고 있을 뿐 부자와 관련된 내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41)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의보감(東醫寶鑑)』「탕액편(湯液篇)」 중에는 곽향이나 부자의 향약 명칭은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곽향, 부자의 한자 표기 광곽(匡郭) 위에 중국 수입 약재를 의미하는 ‘당(唐)’이 표기되어 있다.42) 이로 미뤄볼 때 곽향이나 부자는 중국산 약재였으며, 고려 최고의 문인이었던 이인로나 이색조차 이들 약재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수입 약재와 달리 시호(柴胡)와 같은 향약재의 경우 정부에 공납되거나 민간을 통해 유통되고 있었다. 의료 기능을 담당하는 동서대비원, 태의감, 혜민국에는 각각 약물을 보관하는 약고(藥庫)가 있었으며 전국에서 공납한 약물들이 이 곳으로 운반됐다(이경록, 2024: 279-288). 실제 이색은 노비의 질병 치료를 위해 혜민국에서 약재를 구했다.43) 지방에도, 안동약원(安東藥院)의 경우에서와 같이 약재를 보관하고 제공하는 창고가 있었다.44) 다만 조선 전기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약재 가격은 가산을 탕진해야 할 정도로 비쌌다(김호, 1996: 46). 그렇기에 이색 같은 이들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향약(鄕藥)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관료인 오소윤(吳少尹)에게 제공하기도 했다.45)

약재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만큼 임상 의료 현장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중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향약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적은 수의 약물로 구성된 방제, 단방(單方)은 효과적인 방안이었다.46) 원 간섭기 그리고 고려 말기에는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향약고방(鄕藥古方)』,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 『비예백요방』,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 등의 향약방서(鄕藥方書)들이 여러 권 편찬됐다. 조금 앞선 시기에 편찬된 『향약구급방』과 『비예백요방』을 비교해보면 이들 방서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이론적인 측면에서,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운기학과 관련된 논의가 새롭게 다뤄지고 있었다.47) 질병 발생 원인과 병리 기전에 대한 이해, 치료 원칙 등에 대한 논의 역시 『향약구급방』에 비해 보다 다양해지고 또 구체화됐다. 다만 방제와 관련된 논의는 『향약구급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향약구급방』에 비해, 다루고 있는 병증의 종류와 개별 병증에 적용할 수 있는 방제의 개수가 늘어났고, 향약으로 구성된 방제 뿐 아니라 중국 의서를 출처로 삼는 방제까지도 수록되어 있었지만, 방제의 주된 형태는 3개 내외의 약물로 구성된 단방이었다(이경록, 2014: 90, 144). 『비예백요방』의 저자 역시 급한 때에는 눈앞에 물건을 취하여 1∼2가지 약물로써 7∼8가지의 손해를 예방할 수 있으니 백요(百要)라고 이름하여 분류하겠다며 그 취지를 밝혀두기도 했다(안상우, 2009: 25-28). 향약 방서 편찬자들의 단방에 대한 선호는 『향약집성방』 등을 통해 채집된 『삼화자향약방』, 『향약고방』 등에서 모두 확인된다. 이처럼 향약 그리고 단방 중심으로 방서의 편찬이 두드러진 것은 약물 수급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그 배경에 실천적인 성격을 띤 원의 성리학 도입 이후 전개된 지식인들의 현실 참여 의지가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이태진, 2002: 141, 강도현, 2009: 154-164).

중국 원대의 의가 나천익의 의서 『위생보감』「임통치험(淋痛治驗)」 중에는 고려 국왕이 주었다는 설명이 기재되어 있는 수지환(水芝丸)이 기재되어 있다. 하초 진기(眞氣)가 허약해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변이 배출되는 증상을 치료하는 이 방제 역시 한반도나 중국 도처에서 구할 수 있는 연실(蓮實) 하나만을 가공해 50알 정도 복용하는 단방이었다.48)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향약을 활용하는 단방 처방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려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있던 것이다. 이밖에 중국, 명대에 활동한 문인 이일화(李日華)의 문집, 『육연재필기(六研齋筆記)』 중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기재되어 있다.

“고려 의가[高麗醫人]가 질병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약물은 한 개나 두 개다. 세 개에 달하게 되면 매우 많은 경우에 해당하며, 네 개에 달하는 경우는 있지 않다. 약물의 성질이 전일하면 도달할 수 있고, 둘이 되면 치료하고, 셋이 되면 조절하며, 넷이 되면 참견하고 제어한다. 보다 많아지만 서로 간섭해 효능을 이뤄내지 못하게 된다. 나는 학질과 이질 설사를 치료하는 두 개 방제를 전달받았는데 매우 간단하면서 효험이 있었다. 여기에 기재해둔다. 이질 설사를 치료하는 방제는 단 두 가지 약물로 흰 색의 경우는 한증을 앓고 있는 것이니 생강 1냥과 가는 차잎 5돈을 사용하고, 붉은 색의 경우는 열증을 앓고 있는 것이니 가는 차잎 1냥에 생강 5돈을 사용하며, 붉은 색과 흰 색이 섞여 있는 경우는 생강과 차잎은 각각 5돈씩 사용한다. 강물 2사발을 1사발이 될 때까지 전탕한 뒤 따뜻하게 복용한다.”49)

이일화는 명대의 문인이었던 만큼 인용문에 기재되어 있는 ‘고려 의가’가 고려 시대의 의가를 가리키는 것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려 이래 한반도 출신 의가들이 단방을 활용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향약집성방』을 통해 확인된 가장 오랜 고려 의서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의 방제 역시 솔잎과 소금, 단 두 가지 약물로 구성된 단방이었으며,50) 위의 『육연재필기』 중에서 언급된 생강와 차 잎 두 가지 약물로 구성된 설사 치료 방제는 고려 의서 『삼화자향약방』과 『비예백요방』 중에 그대로 실려 있다.51) 『삼화자향약방』의 방제는 생강과 차 잎 두 약물의 용량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비예백요방』의 방제는 변증 관련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육연재필기』에서 소개한 방제의 내용과 동일하다. 다만 단방의 한계는 명확했다. 특정 질환에 대한 대처는 가능하지만, 활용 약물 수의 제약으로 군신좌사의 원리를 활용한 자유로운 약물 운용이 어렵다보니 응용 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고려 말기에 활동한 문인 원천석(元天錫)은 의원의 치료라고도 믿을 수 없다며 “효험 없는 단방은 내던져 버려야겠다”며 단방의 한계를 노골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52)

고려 말의 유학자 권중화(權仲和)는 이 문제를 직시하고 있었다. 조선 건립 이후 조선 정부에 의해 첫 번째로 편찬된 의서 『향약제생집성방』은 권중화가 이전에 진행했던 『향약방(鄕藥方)』 편찬 작업의 확장판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향약제생집성방』 중에는 향약재 뿐 아니라 한 개 방제 중에 2.39개의 약물이 활용될 정도로 단방 역시 강조되고 있었다(이경록, 2010c, 359-364). 다만 권중화가 『향약제생집성방』 편찬 작업에 가장 많이 활용한 의서는 『성제총록』, 『세의득효방』, 『경험량방(經驗良方)』 등의 중국 의서였다. 향약 관련 의서의 인용 횟수는 69회에 불과한 반면, 중국 의서 인용 횟수는 586회에 달했다(이경록, 2010c: 348). 방제와 약물에 있어서도, 단방이나 향약 외에, 『성제총록』의 방기탕(防己湯), 인삼탕(人參湯), 『의방집성(醫方集成)』의 신비탕(神秘湯),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의 화담옥호원(化痰玉壺元) 등 중국 의서 중에 수록된 다양한 복합 방제 뿐 아니라 단삼(丹參), 대황(大黃), 정향(丁香), 목향(木香), 자완(紫菀) 등 한반도에서 산출되지 않던 중국산 약물 역시 상당수 소개했다. 정리하자면 『향약제생집성방』은 조선의 풍속과 음식이 중국과 다르므로 치료에서도 반드시 약재를 달리해야 하며 한반도 자생 약재로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기치를 내건 관찬 종합 의서였지만,53) 실제로는 원 정부에 의해 각광 받던 종합 의서, 『성제총록』을 기반으로 중국 원 의학의 이법방약을 수용하면서도 고려 의약계가 향약 및 단방을 기반으로 거둔 방약 부분의 성과까지도 포괄했던 의서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 원의 의학이 보급됨에 따라 의학, 이법방약에 대한 지식이 확충됐다. 약물에 대한 지식은 증가했지만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약물의 가짓수는 많지 않았다. 약물의 유통 상황도 여의치 않아 중국, 원의 약물 뿐 아니라 국내산 약물 역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이색이나 이인로 같은 고려의 고위 관료 출신 문인들조차 중요 약물인 부자, 곽향 등을 구하기 어려워할 정도였다. 약물 수급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향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간단하게 구성된 향약 단방을 수록한 다수의 향약 방서들이 편찬됐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려 의약계의 대응이었다.

5. 맺음말: 보편 의학의 수용과 지역 의학의 한계 극복

중국의학사 연구자 리징웨이(李经纬)는 동아시아 전통 의학을 대표하는 중의학(中醫學)이 기본적으로 한족(漢族)의 의학이라고 단정한다. 수당 시기 중국 통일 이후 각 지역의 의약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화민족의 전통 의약학이 저마다의 특징을 지닌 민족의약학으로 발전했으며, 당송 이래 가장 앞선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의 의학이 한국・일본・베트남 등으로 전해졌다고 주장한다(李经纬, 2007: 153, 300). 고려 후기,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송 그리고 원의 의학이 주변부인 한반도로 유입됐다. 그렇지만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의해 중심 의학이 보편 의학으로 인정되고 주변 스스로 지역 의학이 지닌 제약과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과학사학자 김영식은 한 문화에 다른 문화의 과학이 전래될 경우 전래된 과학이 이를 받아들이는 문화를 변화시키거나 받아들이는 문화 또한 전래된 과학을 변화시킨다고 이야기한다. 또 그 과정에서 수용, 차용, 전유, 적응, 토착화의 과정이 진행되거나 또는 무시, 고립, 저항, 거부, 충돌 등이 벌어질 수 있다고 서술한다(김영식, 2013: 95-111).

고려 의가들이 송이나 원의 의학 지식, 예를 들어 의학적 원리, 진단 방법, 병리 기전 설명 방식, 방제 및 약물 관련 정보 등의 의학 지식을 학습하는 과정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원 간섭기 이전, 고려의 요청으로 송의 의관이 파견되어 고려의 의생들을 교육하면서 중국과 한반도 간 의학의 차이는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원의 황제, 원세조 뿐 아니라 원성종(元成宗)의 질병 치료를 위해 고려 의관 설경성을 수차례 호출할 정도였다.54) 원 정부가 선택한 의학 관료의 교육과 선발을 위한 서적 역시 기존의 의학 전통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 의가들의 원 의학에 대한 근원적인 이질감이나 거부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이 원의 과거를 보기 위한 전 단계로 간주되었던 만큼 고려의 지식인이나 의가들에게 원 제국의 의학은 그야말로 보편 의학(universal medicine)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비예백요방』, 『간기방』 등의 고려 의서나 조선 건국 초기에 편찬된 『향약제생집성방』 중에 원의 의학 과거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성제총록』, 원을 대표하는 관찬 방제 서적인 『세의득효방』의 문장 뿐 아니라 원대 유명 의가, 이고, 나천익 등의 방제들이 기재 되어 있는 점 등은 원 의학이 고려 의학에 미친 영향을 확인시켜준다. 이밖에도 고려 말의 문인 이색 등이 남긴 시문 중에는 고려에서 의관으로 활동하며 의약을 매개로 고려의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는 중국 의가들이 기록 역시 남겨져 있다. 어느 때보다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가 긴밀했던 고려 후기, 특히 원 간섭기, 중국 의학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고려로 유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중심, 중국과 주변, 한반도의 사이의 정치적 또는 공간적 거리는 주변부의 지역 의학이 중심에서 통용되는 보편 의학에 비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확인토록 했다. 고려의 경우, 송이나 원으로부터 다양한 의학 지식, 약물이나 방제의 활용 방법을 습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출 약재의 제한이라는 현실적인 장애 요소가 존재했다.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약물, 이른바 향약과 몇 개의 향약으로 구성된 간단한 방제, 단방을 활용하는 것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급하려는 지식인들의 열망은 고려 후기, 향약(鄕藥)을 활용한 방제를 수록한 여러 권의 의서들이 편찬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향약 방서의 편찬은 한반도 의학의 독립된 성과이기도 했지만, 주변부에 자리한 지역 의학(local medicine)이 중심의 보편 의학을 수용하면서 나타나는 충돌, 절충 그리고 적응의 과정이기도 했다. 요컨대 고려 후기 한반도의 의가들은 자신만의 의학을 만들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조건 속에서 당대의 보편 의학을 수용하고 학습했으며 또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향약 또는 단방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약물 수급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외부 세계, 그중 가장 가까운 중국과의 교역이었다. 원과 가장 친밀했던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던 고려였지만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한반도에 중국산 약재가 충분히 유통될 수 없도록 했다.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의학 지식이 파급될수록 중국산 약물에 대한 수요는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대체재인 한반도 산출 약재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이 문제는 결국 고려 내에서 해결되어야 했다.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중국산 약물을 지속적으로 수입하거나, 중국산 약물을 한반도에서 재배하거나,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약물로 중국산 약물을 대체해야 했다. 이상의 내용들은 고려 이후 새롭게 등장한 조선 정부의 중요 의약 정책 중 하나였다(이경록, 2020: 381-429). 그리고 산출 약물의 제약을 넘어 한반도 의가들이 자신만의 이법방약, 의학 이론과 진단 방법, 치료 원리를 개발하고 그에 입각해 자신만의 방제를 만들어내기까지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Notes

1)

『高麗史』 卷122. 列傳 卷35 方技 薛景成. 『고려사』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DB를 통해 확인했다(출처: https://db.history.go.kr/goryeo, 검색일: 2025.2.4).

2)

고려를 침략한 나라를 몽골로 불러야할지 원으로 불러야할지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이번 연구에서는 고려와 몽골(원)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만큼 1271년 고려에 공식적으로 통지된 국호인 대원(大元)을 활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편의상 1271년 이전은 몽골(원), 이후는 원으로 기술했다. 몽골(원)의 호칭에 대해서는 김호동, 이익주의 연구 참조(김호동, 2006: 221-235; 이익주, 2009: 5).

3)

이번 연구에서는 『신편한국사』의 견해에 따라 무신의 난을 기준으로 고려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했으며 고려 후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박용운, 1996: 1).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할 때는 통용되는 견해에 따라 1259년 고려와 원 사이의 강화가 성립된 이후부터 1356년 공민왕의 반원운동이 성립한 시기까지를 원 간섭기, 1356년 이후 고려 패망까지를 고려 말기로 기술했다.

4)

최근 중국 의서 목록을 가장 광범위하게 분류한 『중국중의고전총목(中國中醫古典總目)』(2007)에서는 중의고적분류표준(中醫古籍分類標準)에 의거해 전체 의서를 의경(醫經), 기초이론(基礎理論), 상한금궤(傷寒金匱), 진법(診法), 침구추나(針灸推拿), 본초(本草), 방서(方書), 임증각과(臨證各科), 양생(養生), 의안의화의론(醫案醫話醫論), 의사(醫史), 종합성저작(綜合性著作)으로 구분했다(薛清录, 2007: 1; 李鸿涛 外, 2020: 159-173, 228-232). 이경록은 선행 연구 중에서 이법방약(理法方藥)에 본질(本質)[性]을 추가해 고려 및 조선 시대 의학 전반의 흐름을 분석하는 시도를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고려 의서의 방약(方藥) 부분에 대한 성과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이경록, 2019: 1-28).

5)

고려 시대 의학에 대해서는 신영일이 고려 의서 『향약구급방』에 대한 초기 연구를 진행한 이래 안상우는 『의방유취』, 『향약집성방』을 토대로 『어의촬요』, 『비예백요방』, 『삼화자향약방』, 『간기방』 등의 주요 고려 의서를 복원했고, 이현숙은 고려의 불교 의학, 민간 의료, 전염병 등과 관련한 연구, 이미숙은 고려의 의료 제도 및 의료인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경록은 의료 제도, 의학 이론, 의서, 약물 등 고려 의학 전반에 대한 포괄적이고 세밀한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외에 고려의 대표 문인 이규보와 이색의 일상과 질병에 대해서는 신동원과 강민구의 연구가 발표되어 있다(신영일, 1995; 1997: 85-98; 안상우·최환수, 2000; 안상우, 2009; 안상우, 2008: 269-293; 이현숙, 2007a, 7-45; 이현숙, 2007b: 1-52; 이현숙, 2017: 261-293; 이미숙, 2001, 1-37; 이미숙, 2003; 이경록, 2010a; 신동원, 2014: 139-161; 강민구, 2010: 195-352).

6)

중국을 중심으로 상정한 김영식, 서소영(Suh Soyoung)과 달리 토고츠카라(Togo Tsukara)는 동아시아에 단일한 또는 최고의 중심 국가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 국가, 네트워크 그리고 교류가 존재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경록 역시 ‘중국’이라는 가상의 정치체가 항상 ‘중심부’에 자리 잡은 채 인접국들을 ‘주변부’에 위치시키면서 ‘한의학’을 영구적으로 공급하는 구조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Togo Tsukahara, 2019: 10-11; 이경록, 2023a: 160). 이번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고려 후기, 그 중 원 간섭기의 경우, 고려가 원의 피지배국 상태에 놓여 있던 만큼 김영식, 서소영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7)

『高麗史』 卷129. 列傳 卷42 崔怡. 『임익돈묘지명(任益惇墓誌銘)』,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淸道雲門寺圓鷹國師碑)』. 『임익돈묘지명』,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DB 고려시대금석문·문자자료를 활용해 확인했다. 이하 묘지명과 비명의 출처는 동일하다(출처: https://db.history.go.kr/goryeo, 검색일: 2025.2.4).

8)

『목은시고(牧隱詩藁)』 卷7, 詩, 詠病中. 『목은시고』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를 활용해 확인했다. 이하 『목은문고』, 『목은시고』의 출처는 동일하다(출처: https://db.itkc.or.kr/, 검색일: 2025.2.4).

9)

『高麗史』 卷73, 志 卷27 選擧1 科目1.

10)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卷10, 古律詩, 讀本草. 『동국이상국전집』,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를 활용해 확인했다.

11)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卷7, 古律詩, 次韻李侍郞以詩二首送土卵, 予以三首答之; 『경사증류대전본초(經史證類大全本草)』, 卷第二十三, 果部 中品 芋. 『경사증류대전본초』는 『경사증류대관본초』 뒤에 『본초연의(本草衍義)』를 합한 판본이다. 『경사증류대전본초』 원문은 1970년 히로카와서점(廣川書店)에서 가씨본(柯氏本) 『경사증류대관본초』를 축쇄 영인한 것을 활용해 확인했다.

12)

『임의묘지명(林懿墓誌銘)』.

13)

『鄕藥救急方』 下卷; 中卷 「附骨疽」. 『향약구급방』 원문은 이경록과 신동원 외의 연구를 활용해 확인했다(이경록, 2018; 신동원 외, 2023).

14)

『淸道雲門寺圓鷹國師碑』.

15)

『脈經』診三部脈虛實決死生第八」. 『맥경』 원문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홈페이지를 활용해 확인했다(출처: https://ctext.org/, 검색일: 2025.2.4).

16)

고려 국왕과 정동행성 승상 사이의 신분 관계에 대해서는 최윤정의 연구 참조(최윤정, 2022: 121-170).

17)

『高麗史』 卷39, 世家 卷39 恭愍王 5년(1356) 10월 12일.

1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 중에서 ‘의학제거사’를 검색해 확인했다(출처: https://encykorea.aks.ac.kr, 검색일: 2025.2.4).

19)

이경록은 선행 연구를 통해 의업(醫業, 의과)을 운영했던 고려로서는 원의 의료 제도와 법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므로 원의 법전인 『원전장(元典章)』 등을 염두에 두면서 의학 서적인 『성제총록』에 주목해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고 밝힌 바 있다(이경록, 2023b: 113).

20)

고려 시대 의약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인 『고려사』의 경우 편찬 무렵부터 누락된 것이 많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高麗史』「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따라서 『고려사』를 근거로 서술한 의학제거사, 고려 과거 시험 등에 대한 논의는 별도의 추가 자료가 확보되지 않는 한 현재와 같이 가능성을 제기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21)

『備預百要方』 “夫天地生於大空, 人物生於天地之閒, 承禀五行, 衰王有時, 相尅而胎, 相生而成, 平則爲和, 勝則爲害, 天地隨人而變, 故心氣一偏, 則諸氣皆從. 是以五竅之用, 邪正則小應, 悲喜憂歡形之, 平病生於身體.” 『비예백요방』 원문은 안상우의 『역대 한국의학 문헌의 복원 연구 Ⅱ』를 활용해 확인했다(안상우, 2009: 25쪽).

22)

『聖濟總錄』 卷二之下 「癸亥歲」. “其氣鬱有如此者, 或因鬱而必發, 謂五氣之鬱乘時而發也.” 『성제총록』 원문은 趙佶 敕編, 鄭金生 外 點校, 『聖濟總錄交點本』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2013)을 활용해 확인했다.

23)

『牧隱詩藁』 卷20, 詩, 題煙蘿子圖; 卷12, 詩, 又題; 卷7, 詩, 病中吟.

24)

『陶隱集』 卷4, 文, 診脈圖誌. 『도은집(陶隱集)』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를 활용해 확인했다.

25)

『牧隱詩藁』 卷27, 詩, 將進薄酒碧雲公, 會身不輕快, 不可風, 不敢出. 使二子行禮, 吟成二首. 碧雲憐我病, 用意十分深, 往來無朝暮, 艱難犯雨陰.

26)

『牧隱詩藁』 卷32, 詩, 楊碧雲來, 吟出絶句, 旣去和成三首. 脈訣相傳指下明, 洞看臟腑鬼神驚, 海東皆被刀圭力, 㝡是牧翁多感情.

27)

『牧隱詩藁』 卷35, 衿州吟. 書同年姜判事壁, 請予看脈, 故戲之云.

28)

『牧隱詩藁』 卷27, 詩, 將進薄酒碧雲公, 會身不輕快, 不可風, 不敢出. 使二子行禮, 吟成二首; 卷30, 詩, 病僧求書於僕, 從楊碧雲問藥.

29)

『牧隱詩藁』 卷7, 詩, 追憶金經有感.

30)

『高麗史』 卷30, 世家 卷30 忠烈王 18년(1292) 12월 20일; 『高麗史』 卷31, 世家 卷31 忠烈王 23년(1297) 6월 12일.

31)

『高麗史』 卷26, 世家 卷26, 元宗 8년(1267) 9월 23일, 10월 1일.

32)

『五洲衍文長箋散稿』「嘉支强治海馬鰅鱅辨證說」.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를 활용해 확인했다.

33)

『本草綱目』 卷41, 獸2 膃肭臍. 『본초강목(本草綱目)』 원문은 한의학고전DB를 통해 확인했다(출처 https://mediclassics.kr/, 검색일: 2025.2.4).

34)

아길아합몽합 외에도 인삼, 목과(木果), 송자(松子) 등의 고려 약재가 원으로 보내졌다. 이와 관련해서는 『高麗史』 卷30, 列傳3, 叛逆 金裕와 김두종의 선행 연구 참조(김두종, 1981: 143-145).

35)

『東國李相國後集』 卷9 古律詩. 眼病久不理, 人云瞳邊有白膜, 因嘆之有題; 謝晉陽公送龍腦及醫官理目病幷序.

36)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9 해도(海道) 중에는 송대에 이뤄졌던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교역 루트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Sally K. Church의 연구 참조(Church, 2006: 79-107).

37)

『鷹鶻方』 「劑藥法」 “厥後余得白黃鷹甚愛之, 是時鷹病方興, 一洞之内如掃無遺, 一日此鷹, 果有退食激熱之症, 人皆曰, 避方置之, 余於是用龍腦元, 從此鷹在爲.” 『응골방』 원문은 이원천이 번역한 『교주국역응골방(校主國譯鷹鶻方)』 (경북인쇄, 1994)를 활용해 확인했다.

38)

『牧隱詩藁』 卷15, 詩, 李子安, 病已月餘矣. 因韓上黨邀, 同往問候, 方始知之. 會僕亦病發, 未能上馬, 子來求藿香, 因有所感, 歌以自寬.

39)

『牧隱詩藁』 卷17, 詩, 謝那演送龍虎丹.

40)

『향약구급방』에도 부자에 대한 기록이 실려져 있지만, 오두, 천웅, 부자에 발생한 중독 증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소개하기 위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 『향약채취월령』, 『향약집성방』 「향약본초」 중에도 곽향과 부자에 대한 설명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41)

조선 전기 어숙권(魚叔權)이 저술한 『패관잡기(稗官雜記)』 중에도 약재 중에 조선에서 산출되지 않는 것이 많아 사신이 중국에 갈 때마다 의관(醫官) 두 사람을 보내 사가지고 오게 했는데, 거간꾼이 속여 팔았으며 그 중 소합유, 곽향, 독활 등이 가짜가 많았다고 기재하고 있다(『稗官雜記』 二). 『패관잡기』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를 활용해 확인했다.

42)

『東醫寶鑑』 卷3, 湯液篇, 木部, 藿香; 草部 下, 「附子」. 『동의보감』 원문은 한의학고전DB를 활용해 확인했다.

43)

『牧隱詩藁』 卷30, 詩, 從惠民局衆官索藥, 爲奴病也.

44)

『牧隱文藁』 卷1, 記, 安東藥院記.

45)

『牧隱詩藁』 卷15, 詩, 吳少尹來訪, 予以鄕藥一箱付之, 庶其散之民間疾病, 蓋終身行恕之一端, 足以自悲, 歌以自寬.

46)

단방은 한가지 약물로 구성된 방제가 아니라 간단하게 구성된 치료 방제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재근의 연구 참조(오재근, 2013: 1-10).

47)

『비예백요방』의 주된 성과로 강조되고 있는 ‘만물위약론(萬物爲藥論)’, ‘일병소약론(一病少藥論)’, 이른바 향약론(鄕藥論)은 별도의 의학 이론으로 간주하기 어려우며 『비예백요방』의 수록된 방제 구성 및 약물 활용 상의 특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이경록, 2010a: 318-333).

48)

『衛生寶鑑』 卷17, 名方類集, 水芝丸. 『위생보감』 원문은 许敬生 主编, 『羅天益医学全书』 (北京: 中国中医药出版社, 2006)을 활용해 확인했다. 나천익의 생몰연대와 원 세조의 곁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으로 미뤄볼 때 이 방제를 전해준 고려 국왕은 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충렬왕(忠烈王)일 가능성이 높다.

49)

『六研齋三筆』 卷一 “高麗醫人治疾, 用藥止一味兩味, 至三味則極多矣, 未有至四味者. 葢藥性專則達, 二則濟, 三則調, 四則叅與制, 再多則相牽而不能奏功矣. 偶傳瘧痢二方甚簡而驗. 今録於此. 治痢止二味, 色白者, 患寒, 用生薑一兩細茶五錢, 色赤者, 患熱, 用細茶一兩生薑五錢, 赤白雜者, 薑茶各五錢, 河水二碗, 煎至一碗, 溫服.” 『육연재필기』 원문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홈페이지를 활용해 확인했다.

50)

『鄕藥集成方』 卷3, 風門 3, 中風半身不遂. 『향약집성방』 원문은 한의학고전DB를 활용해 확인했다.

51)

『삼화자향약방』과 『비예백요방』 원문은 각각 『역대 한국의학 문헌의 복원 연구 Ⅱ』를 통해 확인했다(안상우, 2009: 377, 162-163). 생강은 수입 약재였으나 생강소를 통해 재배되며 토산화 되어 가는 중에 있었다(이경록, 2024: 275-289).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흥덕왕 3년 당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가지고 온 차나무 종자를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한 뒤부터 성행했다(『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第10, 興德王). 『삼국사기』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고대 사료DB를 활용해 확인했다(출처: https://db.history.go.kr/, 검색일: 2025.2.4).

52)

『耘谷行錄』 卷5, 詩, 病中吟三首. “無效單方可以拋.” 『운곡행록(耘谷行錄)』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를 활용해 확인했다.

53)

『鄕藥濟生集成方』, 鄕藥濟生集成方序. 『향약제생집성방』 원문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한글고전 홈페이지를 활용해 확인했다(출처: http://db.sejongkorea.org/, 검색일: 2025.2.4).

54)

『高麗史』 卷122. 列傳 卷35 方技 薛景成.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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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Suh Soyoung, Naming the Local: Medicine, Language, and Identity in Korea since the 15th Centur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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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부록 1. 고려 의서 『간기방』에 인용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 원대 의서와 그 중의 문장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그림 1.

연라자 내경도(煙蘿子內境圖)

Figure 1. Yanluozi’s Drawing of the Inner Aspect of the Body

(『修眞十書』, 「雜著捷徑」, 漢リポ Kanseki Repository 홈페이지, https://www.kanripo.org/, 검색일: 2025.2.4.)

표 1.

고려, 원, 조선의 의관 채용을 위한 의학 서적

Table 1. Books for Recruitment of Medical officer in Koryŏ, Yuan, and Chosŏn

구분 과목 출처
고려 의업식(醫業式): 『소문경(素問經)』, 『갑을경(甲乙經)』, 『본초경(本草經)』, 『명당경(明堂經)』, 『맥경(脉經)』, 『침경(針經)』, 『난경(難經)』, 『구경(灸經)』. 주금업식(呪噤業式): 『맥경』, 『유연자방(劉涓子方)』, 『창저론(瘡疽論)』, 『명당경』, 『침경』, 『본초경』. 『고려사』 (1136)
대방맥잡의과(大方脈雜醫科): 『소문』 1부, 『난경』 1부, 『신농본초(神農本草)』 1부, 『장중경상한론(張仲景傷寒論)』 1부, 『성제총록(聖濟總錄)』 83권. 『지정조격』 (1346)
소방맥과(小方脈科): 『소문』 1부, 『난경』 1부, 『신농본초』 1부, 『성제총록』 16권 제167~182권.
풍과(風科): 『소문』 1부, 『난경』 1부, 『신농본초』 1부, 『성제총록』 16권제5~20권.
산과겸잡병과(產科兼雜病科): 『소문』 1부, 『난경』 1부, 『신농본초』 1부, 『성제총록』 17권 제105~116권.
안과(眼科): 『소문』 1부, 『난경』 1부, 『신농본초』 1부, 『성제총록』 13권제102~113권.
구치겸인후과(口齒兼咽喉科): 『소문』 1부, 『난경』 1부, 『신농본초』 1부, 『성제총록』 8권 제117~124권.
정골겸금촉과(正骨兼金鏃科): 『소문』 1부, 『난경』 1부, 『신농본초』 1부, 『성제총록』 4권 제139~140권/제144~145권.
창종과(瘡腫科): 『소문』 1부, 『난경』 1부, 『신농본초』 1부, 『성제총록』 21권 제100권/제114~116권/제125~128권/제141권.
침구과(鍼灸科): 『소문』 1부, 『난경』 1부, 『동인침구경(銅人鍼灸經)』, 『성제총록』 4권 제191~194권.
축유서금과(祝由書禁科): 『소문』 1부, 『천금익방(千金翼方)』 2권제29~30권, 『성제총록』 3권 제195~197권.
조선 『직지맥(直指脈)』, 『찬도맥(纂圖脈)』, 『직지방(直指方)』, 『화제방(和劑方)』, 『상한류서(傷寒類書)』, 『화제지남(和劑指南)』, 『의방집성(醫方集成)』, 『어약원방(御藥院方)』, 『제생방(濟生方)』, 『제생발수방(濟生拔粹方)』, 『쌍종처사활인서(雙鍾處士活人書)』, 『연의본초(衍義本草)』,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침구경(針灸經)』, 『보주동인경(補註銅人經)』, 『난경』, 『소문괄(素問括)』, 『성제총록(聖濟摠錄)』, 『위씨득효방(危氏得効方)』, 『두씨전영(竇氏全嬰)』, 『부인대전(婦人大全)』, 『서죽당방(瑞竹堂方)』, 『백일선방(百一選方)』, 『천금익방(千金翼方)』, 『우마의방(牛馬醫方)』. 『세종실록』 (1430)

(『高麗史』 「志」卷27「選擧」; 『至正條格』卷31「醫藥」 「科目」 「各科合試經書」; 『世宗實錄』 卷47, 세종 12년(1430) 3월 18일. 『지정조격(至正條格)』의 출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至正條格 校註本』 (서울: 휴머니스트, 2007), 120-122쪽.)

『간기방』 문장 출전 내용
醫方類聚 卷70 / 眼門7 經驗祕方 / 眼目 神聖復明丸. 專治靑濛遮暗, 內外障, 不見分明.
中統元年七月十三日, 駙馬扎撒赤兒忽患眼疾, 不通道徑. 至元二年正月旦日拜年, 聖旨問: 駙馬扎撤赤兒不見, 那里去? 回奏患眼三年. 聖旨道, 敎天下醫人, 醫者興元府太醫馬太醫一年服效大明, 賜銀五十兩, 金十五兩, 珠子十二兩. 用藥下項: 羌活 獨活 羚羊角 石決明 草決明 當歸 生地黃 熟地黃 細辛 蜜蒙花 川芎 木賊 白蒺藜 枳實以上各半兩重 蒼朮一兩 赤芍藥 川椒 各二錢半 甘菊花半兩 右爲細末, 煉蜜爲元, 如桐子大, 每服三十丸, 茶淸送下, 食後服. 簡奇方同.
卷72 / 齒門2 御藥院方 五倍子散: 治牙齒搖, 及外物所傷, 諸藥不效, 欲落者. 川五倍子半兩 乾川地龍去土, 半兩, 微炒. 右爲細末, 先用生薑揩牙根, 後以藥末傅之, 五日內不得攻硬物, 如齒初折落時, 熱粘齒槽中, 貼藥齒上, 卽牢如故. 簡奇方同.
卷90 / 諸疝門2 瑞竹堂方 / 小腸疝氣 香妙丸: 脫烈平章服, 得效. 茴香鹽炒香, 去鹽不用 新蠶沙曬乾. 上等分, 爲細末, 煉蜜爲丸, 如彈子大, 空心細嚼, 溫酒送下, 甚者日進二服. 簡奇方同.
卷133 / 諸淋門2 東垣試效方 / 小便淋閉 滋腎丸: 蘭室祕藏一名通關丸. 治不渴而小便閉, 熱在下焦血分也. 玉機微義, 治下焦陰虛, 脚膝無力, 陰汗陰痿, 足熱不履地, 不渴而小便閉.
知母去皮, 剉, 酒製 黃柏剉, 酒製, 焙乾. 各二兩 肉桂一錢. 微義二錢, 簡奇方一分. 內經云, 熱者寒之, 遂用黃柏知母大苦寒爲主治, 肉桂辛熱, 與熱同體, 乃寒因熱用也. 上件爲細末, 煎熟水爲丸, 如鷄頭大, 祕藏微義如梧子大. 每服百餘丸, 至二百丸, 煎百沸湯送下, 空心, 宿食消盡服之. 頓兩足, 令藥易下行故也. 如小便利, 前陰中如刀刺痛, 有惡物下, 爲效驗.
卷175 / 癰疽門6 衛生寶鑑 / 瘡腫 金銀花散: 治發背惡瘡, 經驗祕方, 簡奇方, 治發背, 腦疽, 白雜惡瘡. 托里止痛, 排膿. 金銀花四兩, 去土 外科精義無花, 用黃葉嫩莖代之 甘草一兩, 炒. 右爲麤末, 每服四錢, 祕方, 精義, 簡奇方分作三錢. 水酒各一盞, 煎至一盞, 去柤, 稍熱服. 祕方, 簡奇方水一盞, 煎至七分, 溫服, 不拘時候. 瘡科精義與精義同.
鄕藥集成方 卷9 / 熱病論 / 暑 得效方. 香薷散 治藏府冷熱不調, 飮食不節, 或食腥膾生冷過度, 起居不節, 或露臥濕地, 或當風取涼, 而風冷之氣歸於三焦, 傳於脾胃, 脾胃得冷, 不能消化米穀, 致令眞邪相干, 腸胃虛弱, 飮食變亂於腸胃之間, 致吐利, 心腹疼痛, 霍亂氣逆, 有心痛而先吐者, 有腹痛而先利者, 有吐利俱發者, 有發熱頭痛體疼而復吐利虛煩者, 或但吐利心腹刺痛者, 或轉筋拘急疼痛, 或但嘔而無物出, 或四肢逆冷而脈欲絶, 或煩悶昏塞而欲死者, 此藥主之. 簡奇方. 治中暑昏迷不省人事. 香薷去土四兩, 厚朴去麤皮切碎, 薑汁炒令黃, 白扁豆各二兩. ○ 右剉散, 每服五錢, 水一盞, 酒一分, 同煎至七分, 去滓, 水中沈冷, 連喫二服, 立效, 不拘時.

* 『간기방』 중에 실린 원대 의서 인용 문장의 다수 출전은 『경험비방』과 중복된다. 가능한 출전이 『경험비방』과 중복되지 않는 문장을 선별 수록했다. 『의방유취』 원문은 成增秀 等 重校, 『醫方類聚』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2006)을 활용해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