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초기 일본의 ‘독일 의학’ 채택에 관한 비판적 재검토: 사가라 지안(相良知安)의 ‘의권(醫權)’ 구상과 의사 전문직화 기획을 중심으로†
A Critical Reconsideration of the Adoption of “German Medicine” in Early Meiji Japan: Sagara Chian’s Conception of Medical Authority and His Project for the Professionalization of Physic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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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article critically reconsiders existing explanations for the adoption of “German medicine” in early Meiji Japan and reconstructs the institutional and political context of that decision by focusing on Sagara Chian’s conception of medical authority (iken) and his project of medical professionalization. Previous studies have explained the shift largely in terms of the academic superiority of German medicine, the German provenance of Dutch-learning medical texts, the advice of foreign advisers such as Verbeck and Bauduin, political or ideological affinity between Japan and Prussia, or factional conflict surrounding William Willis. Yet these explanations do not sufficiently clarify why the final outcome took the form of a German-style institutional model combining university-based medical education, state examinations and licensure, a hierarchical professorial order, and state regulation of medical practice. This article first shows that, in the aftermath of the Boshin War, the British model represented by William Willis enjoyed strong political legitimacy within the new Meiji government. It then traces the appointments of Sagara Chian and Iwasa Jun, the proposal and collapse of the dual-employment proposal, and the subsequent politics of separation and compromise, arguing that the crucial issue was not a simple confrontation between pro-British and pro-German camps but a contest over who would control medical education, institutional design, and the authority to certify physicians. It further demonstrates that Sagara understood “Germany” not as a repository of superior medical techniques but as an institutional model linking the university, state licensure, hierarchical academic authority, military medicine, and hygienic administration. In this light, the adoption of “German medicine” in early Meiji Japan is best understood less as passive reception of a purportedly superior foreign medicine than as an institutional choice through which the modern Japanese state sought to reorganize physicians into a state-managed and state-certified profession. This reinterpretation sheds light not only on the formation of the Meiji state and its professional order but also on the broader genealogy of modern medical education in East Asia, including colonial Korea.
1. 문제 제기
1870년, 에도(江戶) 막부 체제를 타파한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국가의 공식 의료 및 의학 교육 체계로서 ‘독일 의학’1)을 채택한 사건은 일본 근대 의학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을 이룬다.2) 막부 중기 이래 ‘난학(蘭學)’이라는 이름 아래 네덜란드어를 매개로 서양 의학을 받아들여 왔고, 보신전쟁(戊辰戰爭, 1868∼1869)3)을 거치며 ‘영국 의학’이 강력한 실용적 대안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아직 통일 국가 조차 이루지 못했던 프로이센(독일)의 의학 교육 제도를 전면 도입하기로 한 결정은 그 자체로 극적인 정책 전환이었다. 이후 초빙된 독일인 군의(軍醫)들의 엄격한 교육과 지도를 통해 확립된 독일식 의학 체계는 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의학 교육 구조를 구축했고, 이는 일본 의사 집단의 성격과 사회적 위상을 장기적으로 규정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일본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메이지기에 형성된 대학 중심 의학 교육, 국가시험과 면허를 통한 자격 통제, 기초의학과 임상의 위계적 배열, 그리고 의사를 국가가 승인한 고급 전문직으로 조직하는 방식은 이후 일본 제국의 팽창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의 의학 교육 제도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메이지 초기의 ‘독일 의학’ 채택은 일본 근대 의학사의 한 장면에 그치지 않고, 근대 동아시아에서 의학 지식, 국가 권력, 자격 제도, 전문직 위계가 결합하는 장기 구조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는 ‘독일 의학’ 채택의 배경을 대체로 다섯 가지 설명 틀, 즉 ‘학술적 우위론’, ‘난학 원류론’, ‘외국인 고문 증언론’, ‘정치적ㆍ이념적 친화성론’, ‘파벌 갈등론’ 등으로 정리해 왔다.4) 이들 범주는 각기 당대 행위자들이 동원한 명분과 조건을 일부 포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왜 최종 결과가 단순한 외국인 의사의 초빙을 넘어 대학 중심 의학 교육, 국가시험과 면허, 교수직 위계화 등을 아우르는 정교한 제도 형식으로 귀결되었는지까지는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다.5)
본고의 목적은 이런 선행 연구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서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보신전쟁 이후 영국식 임상 모델이 신정부 내부에서 강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했다는 점을 인정한 상태에서, 의학교취조어용괘(醫學校取調御用掛) 사가라 지안(相良知安, 1836∼1906)과 이와사 준(岩佐純, 1835∼1912)을 매개로 표출된 ‘의권’ 확립, 의사 전문직화, 국가 주도 면허제 구상이 영국식 임상 중심 모델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왜 독일식 제도 모델이 더 적합한 대안으로 부상했는지 해명하는 데 있다. 최근 오자키 고지(尾崎耕司)가 병용안과 협상 결렬의 정치사를 복원했다면, 본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정치적 충돌이 어떤 제도 구상과 결합했는지 살필 것이다(尾崎耕司, 2012).
이를 위해 본고는 먼저 보신전쟁 이후 ‘영국 의학’이 왜 신정부 내부에서 유력한 국가 모델로 부상했는지 검토한다. 다음으로, 사가라 지안 및 이와사 준의 등용 배경과 문제의식을 재구성하고, 이들이 의사를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공인되는 전문직으로 어떻게 재편하고자 했는지 살핀다. 이어 ‘병용안’의 구상과 협상 결렬을 추적해 갈등의 핵심이 학술적 우열이 아니라 제도 통제권과 교육 주권의 문제였음을 밝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가라가 본 독일의 제도 모델과 ‘분리 타협’의 정치적 의미를 검토함으로써, ‘독일 의학’ 채택이 근대 국가의 관료제 형성과 의료 전문직 재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 제도사적 사건이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2. 보신전쟁과 ‘영국 의학’의 정치적 부상
1868년에 발발한 보신전쟁은 일본의 서양 의학 수용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에도 시대 이래 일본 서양 의학의 주류는 난방의학(蘭方醫學), 즉 네덜란드 경유 의학이었다. 난방의학은 해부학과 외과 지식도 포함했지만, 근대적 군진외과(軍陣外科)로서는 충분히 체계화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식 소총과 포병 화력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일본 최초의 근대적 내전은 즉각적이고 실전적인 외과 기술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때 신정부의 요청에 따라 신정부군(관군) 야전 병원과 도쿄(東京)의 ‘대병원(大病院)’에서 활약한 인물이 바로 영국 공사관 소속 의사 윌리엄 윌리스(William Willis, 1837∼1894)였다.
보신전쟁에 종군한 윌리스는 다카다(高田), 가시와자키(柏崎), 니가타(新潟), 시바타(新發田), 아이즈(會津) 등의 격전지에서 의료 활동을 전개했다. 약 9백명의 신정부군 부상병뿐만 아니라 약 7백 명의 아이즈번 소속(구 막부군) 부상병에 대해 직접 치료와 치료 지도(일본인 의료진 대상)를 병행하고, 38회의 절단 수술, 23회의 총탄 적출, 200여 명에 대한 괴사골 제거를 시행했다(ウィリアムㆍウィリス, 2003: 389). 또 다른 영국 공사관 소속 의사 시덜(Joseph Bower Siddall, 1840∼1904) 역시 요코하마군진병원(橫濱軍陣病院)에서 부상병에 대해 절단과 파쇄골 적출 등 총상 치료를 담당했다.6) 이처럼 윌리스와 시덜이 선보인 영국식 군진외과와 병원 임상은 총상에 대한 서양식 외과술, 클로로포름(chloroform) 마취, 위생적 처치의 실전적 유효성을 일본 의료진과 신정부 핵심 세력에게 각인시켰고, 그 결과 ‘영국 의학’은 메이지 국가의 초기 형성 국면에서
실제 전장 경험을 통해 효과가 입증된 서양 의학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됐다(神谷昭典, 1979: 30; Cortazzi, 1985: 97).
전장 경험의 정치적 효과는 곧 신정부 수뇌부의 윌리스 평가와 영국식 모델 인식에 반영됐다. 학교지사(學校知事)로서 신정부의 교육 행정을 담당하던 전 도사번 번주(藩主) 야마우치 도요시게(山內豊信, 별칭 야마우치 요도, 1827∼1872)와 메이지유신의 주역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되는 사쓰마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 등이 윌리스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은, 영국식 병원 임상과 군진외과가 순수한 의학적 효용을 넘어 정치적 상징 자산으로까지 상승했음을 보여 준다(青柳精一, 2011: 550). 보신전쟁이 수습된 직후 신정부 내부에서 윌리스를 중심으로 한 영국식 모델을 국가적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기류가 형성되고, 그를 의학 교육과 병원 운영의 책임자로 등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메이지 초기 국가의 의료 제도 개편은 처음부터 독일식 모델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국식 모델이 강력한 국가적 후보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출발했다.
이처럼 전장에서 입증된 윌리스의 외과적 실효성과 정치적 상징성은 곧 영국 공사관과 일본 신정부의 이해가 결합한 공적 임용 추진으로 이어졌다. 윌리스는 1869년 1월 영국 공사 파크스(Sir Harry Smith Parkes, 1828∼1885)의 예비 승인을 받아 영국 외교관 직무를 휴직한 채 일본 정부의 고용 전문가로 들어왔고, 군진병원에서 민간 종합병원으로 전환 중이던 대병원의 의료 책임자로서 진료와 의학생 교육을 함께 맡았다(Oberländer, 2009: 146-147). 이 임용은 신정부가 영국 외교 네트워크의 후원 아래 윌리스를 대병원과 신설 의학교의 중심에 앉힘으로써 일본 의학 교육을 영국식 임상 모델에 따라 재편하려 했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사가라 지안은 훗날 윌리스 등용 약속을 학교지사 야마우치 요도의 사저에서 이루어진 사적(私的) 선약처럼 회고했지만, 실제 과정은 외국관(外國官)을 경유한 공적 절차와 무관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당시 일본 외교 기구가 영국 측에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이었다(相良知安, 1904d: 760; 原口忠男, 1980: 18; Cortazzi, 1985: 165; 萩原延壽, 2000: 98-99). 윌리스 등용 문제는 단순한 개인적 친분이나 번벌(藩閥)의 후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사가라의 비판과 달리 실제 윌리스가 외교ㆍ행정 경로를 통해 공적으로 임용됐다는 점은, 곧 메이지 국가가 이미 초기부터 외국인 의사의 문제를 국가적 제도 설계와 직결된 사안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보신전쟁은 ‘임상과 외과의 실용성’이라는 기준을 국가적 판단의 전면으로 끌어냈을 뿐 아니라, 이후 메이지 정부가 ‘영국 의학’ 대신 ‘독일 의학’을 채택한 국면 역시 단순한 반영(反英) 선택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윌리스의 임상적 권위와 영국식 병원 모델의 정치적 정당성이 곧바로 일본 국가 전체의 의학 교육 체계를 규정하는 기준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보신전쟁의 혼란이 수습되는 국면에서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를 기획하던 신정부 엘리트들이 요구한 것은 눈앞의 환자를 살리는 실용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체계화된 ‘제도’와, 천황제 국가에 복무할 ‘관료적 지식인 집단’을 필요로 했다(中野健, 1971: 91; 神谷昭典, 1979: 101; 瀧澤利行, 2012: 256).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어느 국가의 의학이 전장에서 더 유용했는가가 아니라, 그 의학을 어떤 교육 질서와 자격 체계 속에서 국가가 관리할 것인가에 있었다.
이 지점에서 영국식 모델의 장점은 동시에 한계로도 드러났다. 영국식 병원 임상과 군진외과는 보신전쟁을 통해 실용성을 입증했지만, 그것이 곧 대학 중심 장기 교육, 국가시험과 면허, 위계적인 교수 조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신정부 입장에서는 외국인 의사의 임상 권위를 인정하더라도 의료 제도의 설계권과 자격 부여의 기준까지 외국인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7) 따라서 문제는 ‘영국 의학’의 가치 자체가 아니라, 영국식 임상 중심 모델이 일본 국가가 추구하던 교육 주권과 제도 통제라는 과제와 어디까지 양립 가능한가에 있었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바로 이런 긴장 때문에 사가라와 이와사는 처음부터 독일식 모델의 즉각적 전면 도입이 아니라, 윌리스의 임상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일본인 관료가 교육과 면허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절충안을 모색했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 의학’의 임상 중심적 실용성이 우세한 상황에서도 사가라 측이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실용성의 문제와는 별도로 국가가 의사를 조직하는 방식을 둘러싼 더 장기적인 문제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3. 의학교취조어용괘의 신설과 사가라ㆍ이와사의 등용
메이지 신정부가 ‘의학교취조어용괘’라는 직책을 개설한 것은, 보신전쟁 시기 의료와 의학 교육 체계를 재편하고 조직하는 방식을 둘러싼 실무적ㆍ정치적 과제가 부상한 가운데 이뤄졌다. 실제로 1868년(메이지 원년) 말에서 1869년 초에 걸친 의료 행정의 흐름을 보면, 1868년 12월 25일에 윌리스가 의학소(醫學所)와 병원의 책임자로 임명됐고, 1869년 1월 17일에는 사쓰마 번의(藩醫) 이시가미 료사쿠(石神良策, 1821∼1875)가 의학소ㆍ병원ㆍ종두관ㆍ미원(黴院)ㆍ약원(藥園) 등 오국(五局)의 취체(取締)에 취임했다(維新史料編纂事務局, 1938: 667; 尾崎耕司, 2012: 48). 그 불과 닷새 뒤인 1월 22일, 사가라 지안과 이와사준이 의학교취조어용괘로 임명됐고, 이어 2월에는 ‘대병원’이 ‘의학교겸병원(醫學校兼病院)’으로 개칭됐다(瀧澤利行, 2012: 247). 이 일련의 과정은 해당 인사가 기존 의료기관 정비와 새 학교 창설 준비라는 행정적 과제 속에서 단행됐음을 보여 준다.
사가라와 이와사라는 인물이 발탁된 배경에는 신정부가 당면한 실무적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정도 작용했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바우다윈(Anthonius Franciscus Bauduin, 1820∼1885) 문제였다.8) 사가라와 이와사 모두 사쿠라(佐倉)의 준텐도(順天堂)와 나가사키(長崎)의 세이토쿠칸(精得館)을 거치며 서양 의학을 수학했으며, 사가라는 세이토쿠칸의 운영을 맡고 이와사는 후쿠이번(福井藩, 현 후쿠이현) 양학소(洋學所) 교수를 역임한 경력을 지녔다. 이처럼 두 인물은 해군 군의 폼퍼(Johannes Lijdius Catharinus Pompe van Meerdervoort, 1829∼1908)와 바우다윈이 주도한 네덜란드계 의학 교육과 일정하게 연결돼 있었는데, 이런 배경 때문에 막부 말기의 의학 교육 인맥과 신정부의 새로운 행정을 연결하는 데 적합한 인물로 평가됐다고 여겨진다. 바우다윈의 오사카(大坂) 체류와 관련해서는 사쓰마번 출신의 ‘유신 십걸(十傑)’ 고마쓰 기요카도(小松淸廉, 별칭 고마쓰 다테와키, 1835∼1870)와 ‘도사 삼백(土佐三伯)’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 1838∼1897)의 노력이 거론되며, 바우다윈의 초빙과 처우 정리에 여러 정치 인물이 관여했다는 정황도 보인다(原口忠男, 1980: 24). 따라서 의학교취조어용괘 임명은 새로운 의학 교육을 설계하는 문제와 더불어, 막부 시기 고용한 외국인 의사와 기존 의학 교육 자산을 신정부 체제 아래로 재편하는 실무적 문제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9)
다른 한편으로, 이 인사는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별칭 마쓰다이라 슌가쿠, 1828∼1890)와 그 가신 이와사 준의 연결, 그리고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1828∼1905)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1838∼1922)를 비롯한 사가번 출신 인맥이 사가라 지안의 부상을 뒷받침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1869년 8월 마쓰다이라가 대학별당(大學別當)에 취임한 뒤 사가라와 이와사가 대학동교(大學東校)11) 개혁의 전면에 서게 됐다는 사실은, 이들의 활동이 처음부터 개인 차원이 아니라 신정부 내부의 유력 정치 인맥과 접속한 상태에서 전개됐음을 보여 준다(相良隆弘, 2009: 135-136; 柏木政伸, 2018: 48).
그렇다고 해서 사가라와 이와사를 단순한 대리인이나 수동적 실무자로 축소할 수는 없다. 정치권력의 소재가 정부 상층부에 있었을지라도, 그 권력이 채택할 수 있었던 의료 제도의 구체적 내용과 정당화 논리는 사가라와 같은 개혁론자의 구상 위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가라는 번의, 특히 외과의의 낮은 지위와 의사였던 부친의 감봉 경험을 계기로 의사의 사회적 위상을 국가가 승인한 학자적 전문직으로 끌어올리려는 강한 문제의식을 형성했고, 이는 의학교 창설, 국가 면허, 위계적 교육 질서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相良隆弘, 2009: 135-136). 다시 말해, 사가라와 이와사는 단지 배후 정치 세력의 이해를 실무적으로 관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신정부가 요구한 중앙집권적 의료와 의학 교육 체제를 구체적 제도 언어로 번역한 설계자이자 매개자였으며, 바로 이 점에서 ‘의권’ 확립과 의사 전문직화라는 본고의 핵심 논지는 정치사적 맥락과 더불어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데 사가라와 이와사가 처음부터 ‘독일 의학’ 도입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정책 환경에서 우세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윌리스의 임상적 권위와 영국식 병원 모델이었다. 신정부는 윌리스를 중심으로 의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 위에 의학교취조어용괘라는 별도의 실무 라인을 덧붙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신정부가 1869년 1월에 단행한 인사 조치는 ‘영국 의학’과 ‘독일 의학’이라는 이분법적 선택의 종결이 아니라, 영국식 임상 질서가 우세한 가운데 일본인 관료와 의사 집단이 제도 설계권을 확보하기 위해 개입하기 시작한 출발점으로 해석된다(柏木政伸, 2018: 46-48).
후대의 회고 등에는 “신념을 관철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의 [사가라] 지안은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태정대신(太政大臣)을 위시해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고토 쇼지로, 마쓰다이라 슌가쿠(松平春獄), 아키즈키 다네타쓰(秋月種樹), 나베시마 나오마사(鍋島直正) 등 정부 요인의 묘의(廟議) 자리에서 당당하게 자설(自說) [‘독일 의학’ 채택론]을 주장했다”는 서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相良隆弘, 2009: 136). 그러나 이는 공문서로 확인되지 않을뿐더러 당시 사가라와 이와사의 지위(무위)에 비춰 현실성이 떨어진다(原口忠男, 1980: 19-20). 따라서 한 차례 묘의를 통한 극적인 정책 전환 운운하는 영웅담 식의 통설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기존의 ‘영국 의학’ 우세 속에서 신정부가 필요로 한 의료와 의학 교육 제도 개편의 실무를 맡으며 점차 자신들의 구상을 정책 대안으로 밀어 올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의학교취조어용괘 임명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이해돼야 한다. 하나는 신정부가 윌리스 체제 아래에 남아 있던 기존 의료기관과 외국인 의사 문제, 특히 바우다윈을 둘러싼 실무적 난제를 처리해야 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실무 정리와 동시에 일본인 관료와 의사 집단이 국가의 이름으로 새로운 의학교와 병원 체계를 설계할 수 있는 제도적 발판을 마련해야 했다는 점이다. 사가라와 이와사는 바로 이 두 과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탁됐다. 따라서 이의 임명은 메이지 국가가 의료를 외국인의 손에서 완전히 떼어내지는 못한 채로도, 그 제도 설계권만큼은 일본인의 손으로 회수하려 했음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4. 사가라 지안의 문제의식과 ‘의권’ 구상
사가라 지안의 사상과 정치적 판단을 이해하려면, 그를 단지 메이지 초기 의료 개혁의 실무가나 난방의 출신 개혁론자로만 파악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사가번의 교육 개편과 서양 학문 수용이 교차하던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 1850년대 후반 번립(藩立) 의학교의 정비와 더불어 의학의 길에 들어섰다. 이어 1863년에는 나가사키 유학을 명받아 폼퍼 계열의 해부ㆍ임상ㆍ기초과학 교육을 체험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의학을 단순한 치료술의 집합이 아니라 국가가 조직하고 관리해야 할 지식 체계로 인식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였다(羽場俊秀, 2014: 53-56).
보신전쟁 이후 그가 신정부 중심부로 편입된 배경 역시 이런 학문 경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1868년 말 신정부의 의료 정책이 윌리스를 축으로 한 영국식 병원 임상에 기울어 있었는데도, 학교와 병원을 둘러싼 제도 정비가 본격화하면서 일본인 관료와 의사가 이를 장기적 교육 질서로 번역할 필요가 커졌는데, 이 과정에서 사가라는 1869년 1월 이와사 준과 함께 의학교취조어용괘에 임명됐다(森川潤, 1985: 375; Kim, 2014: 20). 같은 해 10월에는 대학권대승(大學權大丞)의 직책을 맡으며 의학교 설립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메이지 국가의 문교 및 의료 정책을 실무 차원에서 떠받치는 인물로 부상했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16).
그러나 그의 삶은 등용 이후에도 평탄하지 않았다. ‘독일 의학’ 도입 결정 이후 의제(醫制) 개혁을 추진하던 그는 1870년 9월, 부하의 회계처리 부정과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탄정대(彈正臺)의 조사를 받고 11월에 구속됐으며, 1872년 11월 말에 이르러서야 무죄로 석방됐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37-38). 당시의 혐의와 배후 사정이 모두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식 모델을 둘러싼 경쟁, 대학 행정의 개편, 내부 인사 갈등이 겹쳐 있던 국면을 고려하면, 사가라가 단지 학문적 논쟁의 장에만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메이지 초기 정치 사회의 균열 한가운데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의권’ 구상은 추상적인 제도론이나 후대의 합리화로 환원될 수 없으며, 난방의의 교육 경로, 국가 권력과의 밀착, 그리고 그에 뒤따른 갈등의 경험 위에서 형성된 정치 사회적 사고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애사적 배경 위에서 사가라의 문제의식을 관통한 것은 의사의 사회적 지위 문제였다. 에도 시대까지 일본에서 의사는 다이묘(大名)에게 고용된 번의조차 무사 계급의 하위에 머물렀고, 민간 의사는 환자의 비위를 맞추며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기능인에 가까웠으며, 의술 또한 독립된 고등 학술이라기보다 ‘잡기’ 혹은 ‘방술’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했다(Bowers, 1979: 64-65; 神谷昭典, 1979: 62). 사가라는 이런 현실을 두고 의사가 ‘법술사(法術師)’로 전락했다고 반복해서 토로할 정도로 의사의 위상 하락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다(相良知安, 1904c: 705; 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77-78, 135-140). 그가 훗날 자신의 의료 개혁 구상을 회고하며 “의(醫)의 명실을 바로잡아 의학의 범위를 정할 것”과 “의권은 먼저 해륙(海陸)의 군의에게서 확립할 것”을 내세운 것은, 그의 관심이 단순한 치료술의 개선이 아니라 의사의 권위와 자격을 국가 질서 속에서 재구성하는 데 있었음을 보여 준다(相良知安, 1904b: 690).
사가라 지안의 이런 인식은 의사의 사회적 지위를 단순한 치료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결부된 자격의 문제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그가 ‘의권’의 확립을 우선 육해군 군의에게서 모색했다는 사실은, 군대라는 국가 권력의 핵심 공간을 발판으로 의사의 위신과 권위를 끌어올리려 했음을 시사한다. 이 경우 ‘의권’은 의사의 집단적 권위를 뜻하지만, 그것은 무규제적 직업 자율성이라기보다 국가가 승인하고 보장하는 전문적 권위에 가까웠다. 즉 근세의 승려나 조닌(町人)적 기능인 윤리관에서 벗어나, 의사를 국가 질서 속에서 공적 책임을 수행하는 관료적 전문가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瀧澤利行, 2012: 256). 그가 1869년의 「의학교규칙」에서 의사를 ‘의사(醫士)’로 호명하며 “인명을 보호하고 인술을 집행하는 관(官)”으로 규정한 것은 그런 방향을 단적으로 제시한다(敎育史編纂會, 1938: 132-133).12) 여기서 ‘의사’는 사적 영업에 종사하는 치료자가 아니라, 국가의 급여와 공적 책무를 매개로 국정의 일익을 담당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재정의는 단순히 의사의 위신을 높이는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사가라가 구상한 ‘의권’은 국가가 정규 교육과 시험, 면허를 통해 의사의 자격을 통제하고, 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자의 의료 행위를 배제하는 방향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점은 훗날 「의제(醫制)」(1873년 작성, 1874년 공포)의 초기 구상 가운데 하나인 그의 「의제약칙(醫制略則)」(1873)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13) 이 문건은 예과ㆍ본과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대시험과 소시험을 통과하고 졸업 증서를 받은 자에게 자격을 부여하며, 개업을 원하는 자는 다시 별도의 시험을 거쳐 면장을 받도록 규정했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92-93). 나아가 원장과 교관의 경우 영리 행위나 불행(不行)이 있을 때 면장을 박탈할 수 있도록 정한 것은, 의사를 국가가 규율하는 자격 집단으로 재편하려는 구상을 보여 준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96). 당시 일본에는 의사의 자격을 묻는 국가적 기준이 아직 마련돼 있지 않아 무자격 ‘의사’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青柳精一, 2011: 158-161), 사가라의 ‘의권’ 구상은 의사의 사회적 명예 회복만이 아니라 의업의 진입과 수행을 국가가 관리하는 체제를 지향한 것이었다.14)
이처럼 사가라의 ‘의권’ 구상은 대학 중심 교육과 국가 면허제를 통해 의사를 국가가 선발ㆍ훈육ㆍ인증하는 질서를 지향했으며, 그는 그 질서를 현실의 국가 장치와 접속하는 우선적 경로로 군의를 중시했다. 초기 메이지 정부가 주목한 프로이센식 의학 교육은 단지 학술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군의 양성을 중심으로 실용성, 집단성, 국가 봉사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가라가 구상한 ‘호건(護健)’15)의 의학은 바로 이런 국가적 보호와 동원 논리에 잘 부합했다. 더욱이 마쓰모토 료준(松本良順, 1832∼1907)을 비롯한 당시 의학계 지도층은 의관(醫官)을 무관(武官)에 준하는 것으로 위치시키고 이를 통해 의사를 사족(士族)의 위상에 올려 정치의 중추와 연결하려 했다(神谷昭典, 1979: 128). 다시 말해 군대는 단순한 의학 교육의 응용 현장이 아니라, 오랫동안 ‘천한 기술’로 여겨졌던 의료를 국가 대의와 직결된 공적 직무로 승격시키는 상징적ㆍ제도적 무대였다. 사가라가 의학이 “화전(和戰)의 대의(大義)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천시됐다고 한탄한 대목 역시 의학의 위상을 국가 운영과 전쟁 수행의 차원에서 재구성하려 했음을 잘 나타낸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183).
따라서 사가라의 관심은 서양 지식의 수입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의 진정한 목표는 서양 의학을 매개로 일본인 의사를 외국인 교사의 도제적 수하에서 벗어나게 하고, 국가가 공인하는 독립된 전문가 집단으로 재조직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그는 “영구히 외국인을 불러들여 무릎 꿇고 가르침을 받는” 상태를 “수 치스러워 이가 갈릴 일(切齒慚愧)”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외국인 교사에 대한 구조적 의존을 강하게 비판했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77). 나아가 “10년 후 반드시 외국인과 외국 서적에 기대지 않고도 의도(醫道)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점은, 그가 지향한 것이 단순한 번역ㆍ수용의 체제가 아니라 관립 대학을 축으로 한 자율적 의사 재생산 체제였음을 드러낸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77). 결국 사가라에게 서양 의학의 채택은 가장 선진적인 지식을 수입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해 일본인 의사를 국가가 선발하고 훈육하며 인증하는 새로운 전문직 질서를 구축하는 문제였다. 요컨대 그의 ‘의권’ 구상은 자유방임적 직업 자율성의 선언이 아니라, 국가 권력과 결합한 전문적 권위의 제도화 구상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와사 준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가신으로, 사가라와 마찬가지로 사쿠라 준텐도에서 사토 다카나카(佐藤尙中, 1827∼1882)에게, 나가사키에서 폼퍼와 바우다윈에게 서양 의학을 배우고 후쿠이 양학소의 교수로도 활동했다(柏木政伸, 2018: 49-50). 즉 그는 단순한 임상의가 아니라, 막부 말기 난방의 교육 네트워크와 번 단위의 서양학 교육을 함께 경험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마쓰다이라의 가신이라는 정치적 배경은, 그가 메이지 초 신정부의 문교ㆍ의료 행정과 접속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이었다. 실제로 이와사는 의학교취조어용괘 임명 당시 사가라를 천거한 인물로 회고되며, 이후 대학대승(大學大丞) 등을 역임하고 1869년 10월에는 오사카부의학교병원어취건괘(大坂府醫學校病院御取建掛)로서 병원 건립 실무를 담당했다(柏木政伸, 2018: 50). 이처럼 그는 인사ㆍ행정ㆍ병원 운영을 잇는 실무의 핵심축에 속한 인물이었다.
사가라의 직무가 학교 사무와 학제 구상에 가까웠다면, 이와사의 직무는 병원 사무와 행정 실무 쪽으로 분화돼 있었다(大沢謙二, 1979: 17). 이런 차이는 윌리스와의 교섭 국면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와사는 외국인 의사 기용과 병원 운영 문제를 둘러싸고 영국인 의사와 네덜란드 의사를 병용하는 절충적 방안을 모색했지만, 그 구상은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이 사실은 사가라와 이와사가 처음부터 ‘영국 의학’의 전면적 배제를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영국식 임상 권위와 네덜란드ㆍ독일계 교육 자원을 일정하게 병용하는 현실적 해법을 검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와사가 사가라의 전문직화 구상과 국가의 제도적 수요를 병원 운영과 외국인 의사 교섭의 언어로 조정한 실무적 매개자였음을 시사한다.
이런 점에서 사가라와 이와사는 상이한 기능을 분담했지만, 그 관계를 ‘영웅’과 ‘조력자’의 위계로 환원할 수는 없다. 기존 서술은 대체로 ‘독일 의학’ 채택의 공을 사가라에게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와사의 병원 행정과 교섭, 실무적 매개 기능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16) 사가라가 ‘의권’의 확립과 의사 전문직화라는 규범적 비전을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제시한 인물이었다면, 이와사는 그 구상이 제도 속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병원 운영과 외국인 의사와의 교섭, 의료 행정의 실무 차원에서 조정ㆍ매개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서로 다른 자원과 기능을 지닌 두 인물이 메이지 초기 국가가 요구한 새로운 의사상과 의료 교육 질서를 각기 다른 차원에서 매개한 상호보완적 결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기에 사가라의 ‘의권’ 구상은 추상적 관념에 머물지 않고 제도 시행의 실무 국면과 접속할 수 있었으며, 이후 전개될 병용안의 모색과 그 귀결 또한 이런 기능적 분화와 협조의 맥락 속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5. 병용안의 모색과 협상 결렬
보신전쟁 직후의 정세에서 신정부가 윌리엄 윌리스를 처음부터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윌리스는 보신전쟁의 경험을 통해 정치적 상징성과 실무적 권위를 동시에 확보한 외국인 의사였고, 영국식 병원 임상과 군진외과 역시 일정한 실용성을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가라 지안과 이와사 준에게 주어진 현실적 과제는, 윌리스의 임상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일정하게 활용하면서도 의학 교육과 제도 설계의 주도권은 일본 국가가 확보하는 방안을 찾는 데 있었다(尾崎耕司, 2012: 50).
이런 상황에서 사가라와 이와사가 의학교취조어용괘 임명 직후인 1869년 봄에 신정부와 영국 측에 제안한 것은, 영국인 의사 윌리스와 더불어 네덜란드인 의사 바우다윈을 함께 기용하는 이른바 ‘병용안’이었다(尾崎耕司, 2012: 55). 이는 단순한 임시방편이라기보다 당시의 정치 지형을 반영한 절충안이었다. 신정부의 의료 제도 선택은 학술적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윌리스를 후원한 사쓰마 번벌과 네덜란드 의학 계열을 배경으로 한 조슈번벌 사이의 이른바 ‘의제(醫制) 논쟁’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森川潤, 1985: 375). 여기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의 외교적 경쟁까지 겹쳐 있었던 만큼, 의료 제도 문제는 곧 신정부 내부의 정치적 균형과도 직결돼 있었다(神谷昭典, 1979: 48). 그런 점에서 병용안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를 피하면서, 병원 운영과 의학 교육을 둘러싼 주도권을 조정하려는 정치적 타협책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병용안의 의미는 정치적 봉합에만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사가라와 이와사가 당시 무엇을 핵심 쟁점으로 파악했는지 보여 준다. 만약 그들이 ‘영국 의학’ 자체를 배척했다면, 애초에 윌리스를 포함한 절충안을 제안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병용안이 실제로 제시됐다는 사실은, 그들이 영국식 임상의 효용과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다만 그들이 경계한 것은 영국식 병원 중심 임상이 일본 국가의 의학 교육과 자격 부여 체계 전반을 규정하는 사태였다. 다시 말해 그들의 관심은 ‘영국 의학’의 배제가 아니라, 영국식 임상 권위를 일정하게 수용하되 그것이 국가의 장기적 의사 양성 체계와 제도 설계권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병용안은 교육 체제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윌리스는 임상과 병원 운영에서는 강점을 보였지만, 기초의학과 장기적인 교육 체계의 조직이라는 문제에서는 한계를 드러냈고, 일본인 교원들 사이에서도 그런 비판이 제기됐다(吉良枝郎, 2006: 763). 따라서 당시의 갈등은 단순한 친영(親英) 대 친독(親獨), 또는 영국 대 네덜란드의 대립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배후에는 병원 중심의 실천적 임상 교육을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가 통제하는 대학 중심의 장기적 의사 양성 체계를 세울 것인가라는 더 큰 문제가 놓여 있었다. 사가라와 이와사가 병용안을 모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병용안은 곧 좌절됐다. 윌리스가 네덜란드인 의사의 병용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정부의 대병원과 의학교 운영에서 “오직 영국의 의법(醫法)만을 쓸 것”을 요구했고, 이를 위반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신의(信義) 위반이라며 반발했다(尾崎耕司, 2012: 56). 오히려 그는 교칙 제정과 인사 등 운영 전반에 대한 실질적 전권까지 자신에게 일임할 것을 고집했다(森川潤, 1993: 348). 이런 태도는 단지 개인적 완고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신전쟁 시기 요코하마군진병원에서 형성된 윌리스 측의 제도적 자신감, 그리고 1869년 초 ‘의학 교겸병원’을 구성하는 5국을 사쓰마계 인물 이시가미 료사쿠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정은 그의 입장을 뒷받침했다(尾崎耕司, 2012: 54, 56). 병원 운영과 교육, 교칙과 인사를 하나의 연속된 권한 체계로 보는 윌리스의 입장에서, 병용안은 자신이 가진 임상적 권위와 제도적 권한의 분할 요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반대로 사가라에게 윌리스의 전권 요구는 외국인 의사의 강경한 태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메이지 국가가 새로 구축하려던 의학 교육의 주도권을 외국인 병원장에게 사실상 넘기는 일로 비쳤을 것이다. 사가라가 구상한 제도의 핵심은 의사를 단순한 치료 기술자가 아니라, 국가가 교육하고 자격을 부여하는 공인된 전문직으로 재조직하는 데 있었다(相良知安, 1904a: 51). 따라서 외국인 임상의의 권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병원 운영과 의학 교육, 자격 부여 전체가 그의 통제 아래 놓이는 상황은 수용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의 핵심 쟁점은 어느 나라 의학이 더 우수한지 겨루는 추상적 경쟁이 아니라, 누가 교육의 원리를 정초하고 누가 의사의 자격을 통제할 것인지 판단하는 제도 통제권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병용안의 좌절은 단순한 협상 실패가 아니라, 외국인 임상의의 권위 수용 범위, 그리고 병원 중심의 임상 모델을 국가의 장기적 의학 교육 질서와 접속하는 방식을 둘러싼 구조적 충돌이 표면화된 사건이었다. 병용안은 실패했지만, 바로 그 실패를 통해 영국식 모델의 임상적 효용과 정치적 위상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국가 주도의 의료 제도와 의사 자격 체계를 안정적으로 설계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병용안의 모색과 파탄은 이후 독일식 모델이 단순한 외국 의학의 수입이 아니라, 국가 주도의 의학 교육과 면허 체제를 구축하는 대안으로 부상하는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6. 왜 ‘독일 의학’이었는가: 사가라가 본 제도 모델
병용안의 좌절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물음은, 왜 최종적으로 ‘독일 의학’이 국가의 공식 모델로 부상했는가이다. 기존 연구는 이 문제를 ‘학술적 우위론’, ‘난학 원류론’, ‘외국인 고문 증언론’, ‘정치적ㆍ이념적 친화성론’, ‘파벌 갈등론’ 등으로 설명해 왔지만, 이런 설명은 선택의 배경이나 정당화 논리를 포착할 뿐, 왜 그 결과가 대학 중심 교육, 국가시험과 면허, 교수직의 위계화, 의료행위 규제라는 특정한 제도 형식으로 굳어졌는지까지는 충분히 밝히지 못한다.17) 따라서 본 장에서는 위 설명 틀을 순차적으로 검토하되, 그것들을 상호 배타적인 원인론으로 다루기보다 각기 어디까지 설명력을 가지며 또 어디에서 한계를 드러내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앞서 검토한 ‘파벌 갈등론’과 병용안의 좌절을 선택의 환경으로 전제한 상태에서(中野健, 1971; 原口忠男, 1980; 森川潤, 1993; 安田健次郎, 2007; 仲宗根玄吉, 2011; 尾崎耕司, 2012; 柏木政伸, 2018), 사가라 지안이 ‘독일’을 어떤 제도적 모델로 이해했는지, 즉 대학ㆍ면허ㆍ‘의권’이 결합한 국가적 의료 질서의 상으로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 가장 널리 제시된 설명 가운데 하나는, 1868∼1869년 무렵 이미 ‘독일 의학’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이를 채택했다는 주장이다(中野健, 1971; Bowers, 1979; 東京大学百年史編集委員会, 1984; 石原恵三, 1986; 鹿子木敏範, 1989; 相良隆弘, 2009; 仲宗根玄吉, 2011; 小高健, 2011; Kim, 2014).18) 물론 19세기 후반 ‘독일 의학’이 기초의학과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결합을 통해 국제적 영향력을 강화해 간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1868∼1869년 시점에 이미 그것이 모든 경쟁 모델을 압도하는 ‘세계 최고’로 보편적으로 인식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原口忠男, 1980: 19-20).19) ‘독일 의학’의 국제적 권위가 본격적으로 강화되는 계기는 일반적으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이후로 지목되며, 당시 일본 내부에는 독일어 교육과 ‘독일 의학’에 대한 직접적 이해의 기반도 거의 마련돼 있지 않았다.20) 따라서 ‘독일 의학’의 후대적 권위를 선택 당시의 자명한 전제로 소급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설명은 난학의 주요 텍스트가 독일어권 의학을 네덜란드어로 옮긴 것이므로, 일본이 기존의 학문적 원류를 직접 채택했다는 주장이다(中野健, 1971; Bowers, 1979; 東京大学百年史編集委員会, 1984; 石原恵三, 1986; 安田健次郎, 2007; 相良隆弘, 2009; 仲宗根玄吉, 2011; 吉良枝郎, 2012; Kim, 2014). 실제 사가라 지안 자신도 당시 일본 의학자들이 접하던 난방의학 서적의 다수가 독일어 원서를 번역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며, 원류를 직접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相良知安, 1900: 990-991).21) 난학을 통해 서양 의학을 접해 온 일본인에게 독일어권 의학이 낯설지 않았다는 점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일본 국가가 왜 최종적으로 대학 중심 교육과 국가 면허제를 갖춘 독일식 제도 모델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학문적 계보와 제도적 선택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19세기 중엽 서양 의학은 특정 국가가 독점적으로 발전을 주도한 폐쇄적 체계가 아니었고, 언어적으로도 영어와 독일어는 모두 네덜란드어와 같은 서게르만어군에 속했다. 따라서 난학 텍스트의 일부가 ‘독일 의학’의 번역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독일식 제도 모델의 채택을 정당화하는 것은 역사적 실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난학 원류론’은 학문적 연속성은 보여 주지만, 국가가 의학 교육과 면허제라는 제도 형식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제시하지 못한다. 여기에 더해 ‘독일 의학’ 도입 초기에는 극심한 언어 장벽과 기초의학 중심의 지난한 교육과정 때문에 많은 학생이 탈락하는 진통도 뒤따랐다(レオポルトㆍミュルレル, 1975: 45). 이 점은 일본이 단지 익숙한 원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비용과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제도 형식을 구축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퍼르베크(Guido Herman Fridolin Verbeck, 1830∼1898)와 바우다윈 등 외국인 고문의 권고 역시 오랫동안 ‘독일 의학’ 채택의 직접 원인으로 언급돼 왔다(川上武, 1965; 宗田一, 1966; 安芸基雄, 1967; Bowers, 1979; 東京大学百年史編集委員会, 1984; 鹿子木敏範, 1989; 相良隆弘, 2009; 小高健, 2011; 仲宗根玄吉, 2011).22) 특히 일본 근대 의사학(醫史學)의 초석을 다진 후지카와 유(富士川游, 1865∼1940)가 이시구로 다다노리의 회고를 활자화하고 다시 자신의 저서 『일본의학사』에서 “퍼르베크의 설에 기초해” ‘독일 의학’을 채택했다고 단정적으로 쓴 것을 계기로, 외국인 고문의 권고는 거의 정설처럼 유통됐다(富士川游, 1894: 167; 1904: 929; 1941: 732; 安芸基雄, 1967: 3). 물론 이런 회고는 메이지 후대 일본 의학계가 이 결정을 어떻게 기억하고 정당화했는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통상 회고는 뒤늦은 합리화의 언어를 포함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을 정책 결정의 직접 증거처럼 취급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국가 의료 제도의 ‘백년대계’가 외국인 고문의 단편적 조언만으로 결정됐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오히려 이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사가라와 이와사 측이 이미 형성하고 있던 제도 개편 구상을 외국인 고문의 권위로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퍼르베크는 의학 전문가가 아니라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그의 권위는 의학적 판단 자체보다 정치적 중립성과 상징성의 차원에서 기능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바우다윈 역시 난방의학 계통 인물들에게 큰 상징적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지만, 그의 권고가 곧바로 국가 결정의 단일 원인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오히려 네덜란드-독일의 학문적 연속성과 외국인 보증을 동시에 호출할 수 있게 해 주는 참조점으로 활용됐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다시 말해 ‘외국인 고문 증언론’은 독일식 모델 선택의 독립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개혁 관료의 지향을 보강하는 정당화 자원으로 재배치될 필요가 있다.
일본과 프로이센 간의 정치적ㆍ이념적 친화성,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을 견제하려는 지정학적 배려가 ‘독일 의학’ 채택의 주된 동력이었다는 ‘정치적ㆍ이념적 친화성론’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川上武, 1965; 宗田一, 1966; 神谷昭典, 1979; Bowers, 1979; 森川潤, 1985; 鹿子木敏範, 1989; 相良隆弘, 2009; 仲宗根玄吉, 2011). 사가라의 건백서에 영국은 일본인을 깔보지만, 독일은 아시아 진출에 익숙하지 않으며, 일본과 독일이 국체(國體)나 민족성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內務省衛生局, 1925: 8; 相良隆弘, 2009: 136). 그러나 ‘독일 의학’ 도입이 결정된 1869∼1870년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전이며, 통일 독일 제국은 아직 성립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에 본격적으로 기울어지는 일본의 헌정 구상도 대체로 1880년대의 일이다. 따라서 후대에 형성된 일본과 독일의 정치적 친화성을 1870년 의학 모델 선택의 핵심 원인으로 소급하는 것은 역사적 시간차를 무시한 해석이다.
오히려 사가라가 내세운 ‘국체의 유사성’이나 ‘아시아 진출 욕심의 부재’는 순수한 이념적 공감대라기보다, 영국 외압과 정부 내 친영파를 견제하면서 독일식 모델을 보다 안전하고 명분 있는 선택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적 수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독 정서 자체가 아니라, 영국식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서 독일식 모델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는 언어의 사용이었다. 즉, 문제는 독일이 일본과 본질적으로 더 ‘가까운’ 국가였는가가 아니라, 당대 일본의 개혁 관료들이 왜 독일을 ‘채택 가능한’ 모델로 표상했는가 하는 데 있다.
결국 핵심은 사가라가 ‘독일’을 무엇으로 인식했는가에 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개별 치료법이나 특정 학설이라기보다, 대학을 정점으로 한 고등교육 체계, 국가시험과 면허, 위계적인 교수 조직, 그리고 위생행정과 군진의학(軍陣醫學)이 결합한 국가적 의료 질서였다. 사가라는 “서양에서 대학이 가장 융성한 곳은 독일”이라 파악했고, 독일식 대학 모델이 의업을 ‘잡기’에서 학문으로 끌어올리는 제도적 장치라고 이해했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183). 또한 그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누른 것은 전적으로 대학생의 힘이었다”고 기록한 대목은, 그가 높이 평가한 것이 의학의 수준이라기보다 국가가 고등교육 체계를 통해 지식을 조직하고 이를 국가 경쟁력과 연결하는 구조였음을 잘 보여 준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183). 사가라에게 독일은 치료 기술의 총합이 아니라, 대학ㆍ국가ㆍ전문직이 결합한 제도적 상징인 것이었다.
이와 연결되는 것이 면허와 ‘의권’의 문제다. 사가라의 ‘의권’ 구상은 대학 중심 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대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선발, 훈육, 평가, 자격 부여가 결합한 장치였다. 장기 연한의 교육과정은 의사의 자격을 단편적 경험이나 개별적 숙련이 아니라 지속적ㆍ체계적 훈련의 이수에 결부시키고, 국가시험과 면허는 그 훈련을 국가가 인증하는 절차가 된다. 교수직의 위계화와 기초의학을 토대로 임상을 배열하는 교육 질서 역시 의학 지식의 내부 질서를 국가가 승인한 학문 질서로 바꾸는 기능을 했다. 그러므로 사가라에게 독일식 대학 모델은 의업의 ‘격’을 올리며, 의사를 국가가 양성하고 인증한 존재로 재정의하는 핵심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23) 여기에 위생행정과 군진의학의 연결까지 고려하면, 그가 독일 모델에서 포착한 것은 병원 내의 치료술만이 아니라, 국가가 건강과 인구를 관리하는 지식-행정 복합체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 의학’ 채택의 이유는 그것이 더 ‘우수한’ 의학이어서라기보다, 사가라와 이와사 측이 ‘의권’과 전문직화, 그리고 국가 면허제를 결합하려던 방향과 더 잘 ‘맞는’ 제도 모델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7. 분리 타협의 정치학과 국가 방침의 확정
중앙의 방침이 독일식 모델 쪽으로 기울었다고 해서 곧바로 영국식 모델의 정치적 기반이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보신전쟁을 통해 형성된 친영적 네트워크와 윌리스의 상징 자산은 여전히 무시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이후의 과제는 경쟁하는 두 모델과 그 후원 세력을 충돌 없이 재배치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 것이 중앙의 제도 표준화와 지방의 분리 수용을 병렬하는 이른바 ‘분리 타협’이었으며, 이는 외국인 임상 권위와 국가의 의학 교육 및 자격 통제권을 분리해 사가라가 구상한 ‘의권’의 제도적 실현 가능성을 열었다.
1869년 하반기 정부 내부에서 ‘독일 의학’ 채택으로 방침이 기울자, ‘영국 의학’을 지지하던 사쓰마계 인사들과 윌리스의 처리 방식이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교착을 푸는 방식은 윌리스를 중앙에서 배제하는 대신, 가고시마(鹿兒島)의 새 병원ㆍ의학교 책임자로 등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구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보신전쟁 시기의 경험이 놓여 있었다. 윌리스는 교토(京都)에서 사쓰마 측 부상병을 집중적으로 치료하며 사쓰마 지도층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고, 중앙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사쓰마 내부에서는 진작부터 영국인 의사를 초빙해 가고시마에 병원 설립과 의학 교육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Cortazzi, 1985: 103; 蒲原宏, 1988: 56; 小高健, 2011: 25). 따라서 ‘독일 의학’ 채택이 굳어지는 국면에서 사쓰마 측이 그를 가고시마로 초빙한 것은, 단순한 보상이나 퇴출의 완화 조치가 아니라, 윌리스와 영국식 임상 전통을 자번(自藩)의 공간에 보전하려는 정치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小高健, 2011: 24).
사쓰마가 이런 분리안을 수용한 이유는, 한편으로 윌리스와 맺어진 전쟁기의 개인적ㆍ정치적 유대를 저버리기 어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 의학교를 둘러싼 갈등을 정면충돌로 이끌지 않으면서도 자번이 의존해 온 인적 자산과 임상 전통을 잃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神谷昭典, 1979: 56-57; Cortazzi, 1985: 170). 실제로 윌리스와의 계약 체결 당시 사쓰마 측 고관은 윌리스에게 스스로 ‘사쓰마의 관리’로 여겨 달라고 말했으며, 계약 조건도 월 900달러의 급여, 주택 제공, 여행 경비 지급, 일방 해고 시 거액의 배상금을 포함할 만큼 파격적이었다(Cortazzi, 1985: 171). 이런 조건은 가고시마행이 단순한 좌천이 아니라, 사쓰마가 윌리스를 자번의 의료 및 의학 교육 공간에 제도적으로 편입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1869년 10월 28일, 윌리스는 가고시마 측과의 교섭 끝에 가고시마 의학교 및 병원의 교사로 부임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고, 같은 해 12월 3일 도쿄를 떠났다(蒲原宏, 1988: 56; ウィリアムㆍウィリス, 2003: 429-430).
윌리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배경도 비교적 분명하다. 그는 1869년 봄까지는 병원과 의학교 개혁에 상당한 의욕을 보였지만, 5월 이후 의학교 설치와 대학 편입, 그리고 사가라와 이와사의 고위직 임명으로 자신의 재량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느끼기 시작했다(森川潤, 1993: 349-350; Oberländer, 2009: 148-149). 같은 해 10월에는 윌리스의 임상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학술 중심의 교육 제도로 개편할 것을 요구하는 일본인 의사들의 청원과 더불어 약품ㆍ기구 조달을 둘러싼 의혹까지 겹치면서 긴장이 심화했는데, 이런 일련의 압박이 그의 사직 결심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Oberländer, 2009: 148-150). 따라서 그의 가고시마행은 중앙 무대에서 일방적으로 축출된 결과라기보다, 더 이상 통제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도쿄를 떠나 별도의 의료ㆍ교육 공간을 확보하려는 윌리스 자신의 현실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조건이 크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이 선택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윌리스는 가고시마 도착 직후 한때 고립감과 우울을 토로했으나, 곧 병원과 의학교를 정비하면서 자신의 작업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고, 사이고와의 신뢰 관계 역시 이런 선택을 떠받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Cortazzi, 1985: 173-178).
이처럼 ‘분리 타협’은 중앙에서는 독일식 학제를 국가의 공식 방침으로 확정하고, 지방에서는 사쓰마가 윌리스와 영국식 임상 전통을 가고시마라는 별도 거점에 수용함으로써 갈등을 조정한 정치적 장치였다. 이는 어느 한쪽을 즉각적으로 제거한 결과가 아니라, 중앙과 지방을 공간적으로 분리해 상이한 제도 모델을 일정 기간 병존하게 한 조치였으며, 메이지 국가가 단일한 표준을 일거에 강제하기보다 이런 공간적 분할을 통해 중심의 방침을 점차 고정해 갔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윌리스의 가고시마행은 단순한 개인적 이동이 아니라, 영국식 모델의 정치적 기반을 완전히 소거하지 않은 채 중앙의 독일식 학제를 공식 국가 의료 제도의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과정의 일부로 이해돼야 한다.
윌리스가 중앙 무대에서 자진 전출하는 형식을 취하자, 신정부는 외교적 부담을 상대적으로 덜고 ‘독일 의학’ 채택을 위한 공식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1870년 2월 14일(그레고리력 3월 15일), 외무경(外務卿) 사와 노부요시(澤宣嘉, 1836∼1873), 대학별당(大學別當)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외무대보(外務大輔)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 1832∼1893) 등이 연서한 서한이 주일 북독일 연방(프로이센) 대리공사 막스 폰 브란트(Max von Brandt, 1835∼1920)에게 전달됐고, 일본 정부는 독일인 의사 2명의 교관 초빙을 정식으로 요청했다(東京帝國大學, 1932: 379-381; 森川潤, 1993: 354).24) 브란트의 본국 보고와 조율을 거쳐 독일 측이 일본에 파견한 인물은 민간 의사가 아니라 현역 군의였다. 이는 일본 정부의 직접적 요구라기보다, 일본 지배층이 무사 계층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한 브란트가 군인 신분의 의사들이 일본 상층 사회에서 더 큰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들이 천황의 시의(侍醫) 자리에까지 오를 경우 프로이센의 정치적ㆍ문화적 영향력 확대에도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Bowers, 1979: 61; Kim, 2014: 22-23).
그 결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여파로 다소 지연된 끝에, 1871년 8월 프로이센 육군 군의 뮐러(Benjamin Carl Leopold Müller, 1824∼1893)와 해군 군의 호프만(Theodor Eduard Hoffmann, 1837∼1894)이 동교(東校)에 부임했다. 이를 계기로 도쿄의 의학 교육은 예과 3년과 본과 5년으로 이루어진 독일식 장기 정규과정으로 재편됐고, 교육 언어도 독일어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이 과정은 기존의 임상 중심적이고 비정규적인 교육 관행을 약화시키고 기초의학을 중시하는 장기 교육과정을 정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초기에는 언어 장벽과 긴 수학 연한 때문에 적지 않은 학생이 탈락하는 문제도 나타났지만(レオポルト・ミュルレル, 1975: 45), 이런 장기적ㆍ정규적ㆍ위계적 교육 체계의 성립은 의사의 권위를 외국인 임상의의 도제적 전수에서가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는 교육과 정의 이수와 선발에서 찾으려 했던 사가라의 문제의식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하는 계기가 됐다. 뮐러와 호프만이 설계한 교육과정의 기초를 이후 벨츠(Erwin von Bälz, 1849∼1913)와 스크리바(Julius Karl Scriba, 1848∼1905) 등이 계승하면서, 독일식 의학 교육은 제국대학 의학 체제의 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됐다.
8. 결론
본고는 메이지 초기 일본의 ‘독일 의학’ 채택을 둘러싼 기존 설명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그 결정이 성립한 정치사적ㆍ제도사적 맥락을 다시 해명하고자 했다. 선행 연구가 제시해 온 ‘학술적 우위론’, ‘난학 원류론’, ‘외국인 고문 증언론’, ‘정치적ㆍ이념적 친화성론’, ‘파벌 갈등론’은 각기 일정한 설명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왜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이 대학 중심 교육, 국가시험과 면허, 위계적 교수 체계, 의료행위에 대한 국가 통제를 결합한 독일식 제도 모델이었는지를 충분히 밝히기 어려웠다. 다시 말해, 기존 설명은 선택의 배경이나 정당화 논리를 부분적으로 포착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유효했지만, 그 선택이 어떤 제도 형식으로 고착됐는지를 둘러싼 문제에는 충분히 도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본고가 밝히고자 한 바는, 메이지 초기의 ‘독일 의학’ 채택이 학술적 우열에 대한 단순한 판단이나 외국인 고문의 증언 및 권고에 대한 수동적 수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보신전쟁 직후 신정부 내부에서 강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 것은 오히려 윌리스를 중심으로 한 영국식 병원 임상 모델이었다. 그러나 사가라 지안과 이와사 준이 직면한 과제는 그 임상적 권위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의 과제는 그 권위를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지, 그리고 병원 운영과 의학 교육, 의사의 자격 부여를 누가 통제할 것인지 다시 정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병용안의 모색과 좌절, 뒤이은 분리 타협의 과정은 단순한 친영-친독 대립이 아니라, 외국인 임상의의 권위와 일본 국가의 제도 설계권이 충돌하고 조정되는 정치적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 의학’ 채택은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된 선택이 아니라, 갈등과 절충, 공간적 분리와 제도적 고정의 과정을 거쳐 성립한 국가 방침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사가라가 ‘독일’에서 본 것은 개별 치료술의 집합이 아니라, 대학 중심의 장기 교육과 국가시험ㆍ면허, 교수직의 위계, 군진의학과 위생행정이 결합한 국가적 의료 질서의 형상이었다. 즉 ‘독일 의학’은 그에게 가장 우수한 외국 의학이라기보다, 의사를 국가가 선발하고 훈육하고 인증하는 전문직으로 재편할 수 있게 하는 제도 모델이었다. 본고가 사가라의 ‘의권’ 구상과 의사 전문직화 기획을 중심에 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독일 의학’ 채택을 외교적 우연이나 외국인의 권고로 환원하지 않고, 근대 국가가 의료 지식과 의료 행위를 편입시킬 제도 형식의 채택과 의사 집단의 조직 방식이라는 문제로 다시 읽어내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서 ‘독일 의학’의 채택은 특정 국가의 의학 내용에 대한 선호라기보다, 국가 주도형 의학 교육과 자격 질서를 선택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고는 또한 사가라와 이와사의 관계를 재검토함으로써, 메이지 초기의 의료개혁을 단순한 영웅담이나 인물 중심 서사로 환원할 수 없음을 보였다. 사가라가 ‘의권’의 확립과 의사 전문직화라는 규범적 비전을 선명하게 제시한 인물이었다면, 이와사는 그 구상이 병원 운영과 외국인 의사와의 교섭, 의료 행정의 실무 속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조정ㆍ매개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주도자와 조력자의 고정된 위계로 파악하기보다, 메이지 국가가 요구한 새로운 의사상과 의학 교육 질서를 각기 다른 차원에서 매개한 상호보완적 결합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런 관점을 통해 ‘독일 의학’ 채택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보다 구체적인 제도 설계의 문제로 읽을 수 있으며, 병용안의 성격과 협상 결렬의 의미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본고의 분석은 메이지 일본의 의학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메이지기에 형성된 대학 중심 교육, 국가 면허와 자격 통제, 엘리트 코스와 보조적 교육 경로의 병존, 그리고 국가가 의사를 승인된 전문직으로 조직하는 방식은 이후 일본 제국의 팽창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의학 교육 질서에도 장기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런 점에서 메이지 초기의 ‘독일 의학’ 채택은 단순한 외래 의학의 도입이 아니라, 근대 동아시아에서 의학 지식, 국가 권력, 자격 제도, 전문직 질서가 결합하는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Notes
본고에서 사용하는 ‘독일 의학’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치료법이나 단일한 의학 이론을 가리키는 실체적 개념이 아니라, 메이지 초기 일본이 독일어권, 특히 프로이센ㆍ북독일연방 계열로부터 수용한 의학의 학문ㆍ교육ㆍ제도적 모델을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다. 나카가와 요네조(中川米造)는 일본 근대 의학을 흔히 ‘독일 의학’의 이식으로 서술해 온 통념 자체가 일종의 ‘신화’로 기능해 왔다고 비판하면서, 일본이 실제로 무엇을 ‘독일 의학’으로 받아들였는지 역사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일본에서 이른바 ‘독일 의학’이라 불린 것의 한 중요한 측면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강조였으며, 동시에 메이지 정부가 초빙한 독일인 교사가 군의(軍醫)였다는 점에 주목할 때, 그것은 군의학 교육 모델과 결부된 국가주의적ㆍ제도적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中川米造, 1982: 276). 따라서 이 용어는 좁게는 독일인 의사에 의한 독일식 의학 교육, 곧 독일인 교사가 주도한 의학 교육의 내용과 방식만을 의미할 수 있으며, 넓게는 대학 중심의 기초의학 교육, 국가 주도의 의사 면허 및 의료 행정, 군의학과 위생학의 제도화를 포함한 독일식 의학 및 의료 체계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1870년 메이지 정부의 ‘독일 의학’ 채택은 단순한 외국 의사의 초빙에 그치지 않고, 프로이센계 근대 의학의 교육ㆍ행정 원리를 국가의 공식 체계로 채택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메이지 초기 일본에서는 ‘독일 의학’이 ‘영국 의학’과 과도하게 대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본이 수용한 프로이센계 ‘독일 의학’은 국가시험, 대학 중심 교육, 위생행정과의 긴밀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영국 의학’보다 더 강한 국가주의적ㆍ관료제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인식돼 메이지 국가의 제도 구상과 친화성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 의학’과 ‘영국 의학’을 완전히 상반되는 두 모델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영국 의학’에 병원 임상과 직업적 자율 규제의 측면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 의학’을 특징짓는 ‘국가적’ 요소가 부재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Carroll, 2002).
메이지 정부가 ‘독일 의학’ 채택을 결정한 정확한 날짜에 대해서는 단일한 공식 기록이 부재하지만, 내부적으로 채택이 결정된 것은 태정관 평결 시기인 구력 1869년 12월 8일∼12월 22일(그레고리력 1870년 1월 9일∼1월 23일) 이전, 외교 공문을 통해 대외적으로 ‘독일 의학’ 채택을 공식화한 시점은 구력 1870년 2월 14일(그레고리력 1870년 3월 15일)이다. 본고에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일본이 그레고리력(태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1873년 1월 1일 이전의 날짜에 대해 구력(舊曆, 태음태양력)을 그대로 표기했음을 밝혀 둔다.
1868년 1월부터 1869년 5월(그레고리력 6월)까지 이어진 일본 근대사 최대 규모의 내전으로, 왕정복고를 이루고 신정부를 세운 사쓰마번(薩摩藩, 현 가고시마현)ㆍ조슈번(長州藩, 현 야마구치현)ㆍ도사번(土佐藩, 현 고치현) 중심의 신정부군이 구 막부군ㆍ오우에쓰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ㆍ에조공화국(蝦夷共和國, 현 홋카이도)과 무력으로 충돌했다. 최종 승리를 거둔 메이지 신정부는 일본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게 됐다.
이 다섯 가지 용어는 널리 정착된 표현이 아니라, 본고의 논의 전개를 위해 편의상 마련한 조어(造語)임을 밝혀 둔다.
기존 연구에 대한 분석 및 검토는 6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시덜도 일본인 의사들에게 치료법을 교육했으며, 그들이 붕대법과 부목 사용을 빠르게 습득했다고 평가했다(Siddall, 1876: 87-88). 이처럼 윌리스와 시덜의 전시 보고는 보신전쟁이 단지 영국식 외과술의 실용성을 과시한 계기였을 뿐 아니라, 일본인 의사들이 서양식 군진외과와 위생적 처치법을 현장에서 직접 습득하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음을 보여 준다.
‘독일 의학’ 채택 결정 이후 신정부는 외국인 의사의 임상 권위를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초빙한 독일인 군의들에게 의학교 내부의 교육과정 편성, 교수 방법, 시험 운영에 관한 광범위한 재량을 부여했다. 그러나 국가 전체의 면허제와 의료행위 규제의 최종 확정 권한까지 외국인에게 양도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인 군의들은 국가 주도 면허제의 실질적 기준을 학교 교육의 형태로 깊이 설계하였지만, 이를 법령과 행정 체계로 전국화하고 수정ㆍ보완하는 최종 권한은 여전히 일본 정부가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바우다윈 문제’란, 막부 말기 나가사키(長崎)에 설립된 일본 최초 근대 서양식 병원 고지마양생소(小島養生所)의 후신 세이토쿠칸(精得館)에서 서양 의학 교육을 담당했던 네덜란드인 군의 바우다윈의 처우를 둘러싼 문제를 가리킨다. 신정부는 막부 고용 외국인 의사였던 바우다윈의 지위와 향후 거취를 정리해야 했고, 동시에 그가 지닌 교육 자산과 인적 네트워크를 새 체제 아래로 흡수할 필요도 있었다. 이 때문에 바우다윈의 제자였던 사가라 지안과 이와사 준이 호명돼 그를 신정부의 고용 아래 두고 오사카(大坂)의 나니와가병원(浪華仮病院) 등에서 강의를 맡게 하는 방식으로 그의 불만을 무마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이는 외국인 의사 한 명의 거취 정리에 그치지 않고, 구 막부 말기의 네덜란드계 의학 교육 자산을 신정부의 학교ㆍ병원 체계 속으로 재편하는 과제와 결부된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오자키 고지는 사가라와 이와사가 바우다윈과 긴밀히 상의하며 움직였으며, 그 직무의 초점이 기존 의학소 운영 일반보다 새 의학교 체제 구상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특히 사가라와 이와사가 임명된 직후는 기존 외국인 의사와의 관계 정리, 의료기관의 위치 재조정, 그리고 학교 중심 의료체제 구상이라는 세 과제가 한데 겹쳐 있던 시기였다(尾崎耕司, 2012: 45-47).
앞줄 왼쪽부터 이와사 준, 바우다윈, 사가라 지안, 쓰보이 이슌(坪井為春, 1824∼1886), 뒷줄 왼쪽부터 이케다 겐사이(池田謙斎, 1841∼1918), 시마무라 데이호(島村鼎甫, 1830∼1881), 오이시 료이쓰(大石良乙, 1849∼1878), 시바 료카이(司馬凌海, 1839∼1879)로 추정된다. 메이지 신정부가 위촉한 독일인 교사들이 도착하기 전, 바우다윈, 사가라 지안, 이와사 준 등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으로, 네덜란드계 의학 교육 인맥과 메이지 신정부의 의학 교육 제도가 접속하던 과도기적 장면을 보여 준다.
종두소를 모태로 1869년 2월에 설립된 ‘의학교겸병원’이 같은 해 12월 개칭된 것으로, 이후 동교(東校, 1871), 제1대학구의학교(1872), 도쿄의학교(1874), 구 도쿄대학 의학부(1877), 제국대학 의과대학(1886),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1897), 도쿄제국대학 의학부(1919)를 거쳐 1947년 이후 현재의 도쿄대학 의학부에 이른다.
1869년 11월에 제정된 「의학교규칙」은 사가라 지안이 단독으로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학교 행정의 책임자였던 그가 주도적인 설계자로서 자신의 이념과 구상을 제도의 언어로 번역해 낸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사가라 지안의 「의제약칙」은 후임 의무국장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 1838∼1902)에 의해 수정돼 1874년에 공포된 「의제」의 중요한 원안 가운데 하나였고, 내용적으로도 최종 「의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사가라의 ‘의권’ 구상은 사후적 회고나 추상적 관념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근대 의료 제도의 입안 과정에서 의업의 자격화와 국가 주도의 자격 관리를 구체화한 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사가라의 원안이 나가요에게 단순히 ‘인계’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가라와 제1대학구의학교(第一大學區醫學校) 그룹이 원안에서 성안에 이르기까지 입안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나가요는 단순한 계승자라기보다 이후 개정과 권력 재편의 국면에서 사가라 측과 대립한 인물로 파악된다(尾崎耕司, 2015: 15).
사가라는 진정한 ‘의권’을 확립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하는 정규 교육과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만 의료 행위를 독점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국가 주도 면허 구상은 당시 구 막부 소속 의사들에 의해 시즈오카번(靜岡藩)의 누마즈(沼津)에서 실험되고 있었다. 누마즈의 군진 의학 교육은 도제식 사숙을 벗어나 번의 통제를 받는 관료 양성 과정으로 재편됐으며, 정기 시험(Examen)과 더불어 3등에서 1등에 이르는 ‘의사’ 자격 부여를 규정했다(이규원, 2026: 260-262). 이 점에서 사가라가 구상한 정규 교육과 시험을 통한 의사 자격 규제는 ‘누마즈 모델’에서 이미 나타난 교육ㆍ평가ㆍ자격 부여 체계를 국가 규모의 면허제도로 확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가라 지안이 구상한 ‘호건’은 사적인 질병 치료 기술에 머물던 의학을 국가 행정의 차원으로 격상시켜 국가 주도로 질병을 예방하고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려는 거시적인 의료 개념으로, 천황 친정 체제 아래에서 백성을 교화하고 건강을 관리해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瀧澤利行, 2012: 255-256; 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34-37).
사가라를 기리기 위한 추도문이나 서사에서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영웅’으로서의 사가라와 ‘그를 보완하는 온건한 조력자’로서의 이와사의 구도가 강조돼 왔다. 특히 ‘독일 의학’ 논쟁과 관련된 묘의의 출두 명령에 ‘놀라서 복통을 일으킨’ 이와사를 두고 ‘홀로 출두해 유력 정치가들 앞에서 신념을 꺾지 않은’ 사가라의 근거 없는 신화는 ‘통설’로서 재생산돼 왔다(田中潮洲, 1924: 1959; 神谷昭典, 1979: 2-4).
메이지 신정부의 ‘독일 의학’ 채택은 일본 의학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므로 이를 언급한 문헌은 메이지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방대한 양에 이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술은 이 사건을 통사적 개설이나 인물사ㆍ제도사 서술의 일부로서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치며, 그 채택 이유와 과정을 독립적인 논제로 삼아 검토한 연구는 의외로 많지 않다. 본고에서는 기존 논의의 비판적 재검토를 위해 ‘독일 의학’의 채택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펼친 주요 논저 21편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되 그 외의 문헌도 적절히 참고했다(川上武, 1965; 宗田一, 1966; 安芸基雄, 1967; 中野健, 1971; 神谷昭典, 1979; Bowers, 1979; 原口忠男, 1980; 東京大学百年史編集委員会, 1984; 森川潤, 1985; 石原恵三, 1986; 鹿子木敏範, 1989; 森川潤, 1993; 安田健次郎, 2007; 相良隆弘, 2009; Oberländer, 2009; 小高健, 2011; 仲宗根玄吉, 2011; 吉良枝郎, 2012; 尾崎耕司, 2012; Kim, 2014; 柏木政伸, 2018). 특히 크리스티안 오벌렌더(Christian Oberländer)의 논의는 ‘독일 의학’ 채택을 학술적 우위, 난학 계보, 외국인 고문의 조언, 정치적 친화성, 파벌 갈등 가운데 어느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외교 네트워크의 개입과 외국인 의사의 제도적 특권, 일본 국가의 제도 재편이 결합한 ‘타율적 근대화’와 ‘내적 식민화’의 맥락에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Oberländer, 2009). 이 점에서 그의 연구는 기존 다섯 범주를 대체했다기보다, 그것들을 보다 상위의 구조사적 틀 속에서 재배열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본고의 의의는 오벌렌더의 구조사적 설명을 계승하면서도 사가라ㆍ이와사 등 일본인 관료의 제도 구상과 정치적 실천을 복원함으로써 ‘독일 의학’ 채택을 국가 주도형 의학 교육 및 자격 질서의 재편 과정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본고는 외국인 고문의 역할과 외교적 후원을 독립적 원인으로 보기보다, 병용안의 모색과 좌절, 분리 타협, 국가 방침의 확정을 거치며 일본 측의 제도 구상이 외부 권위를 통해 정당화ㆍ매개된 과정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아울러, 본고에서 기존 ‘독일 의학’ 채택론의 참고문헌으로 언급된 논저에는 그 비판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과, 채택론의 수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모두 포함돼 있음을 밝혀 둔다.
1927년, 육군 군의 및 오사카부립고등의학교(大阪府立高等醫學校) 교유(敎諭) 출신 다나카 고가이(田中香涯, 1874∼1944)는 ‘독일 의학’ 채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사가라 지안과 이와사 준은 일찍부터 독일 의학이 세계에서 으뜸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시대의 추세에 반해서라도 끝까지 영국 의학을 물리치고 독일 의학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까지 의가(醫家)들 사이에서 읽히고 있던 네덜란드 의서는 어느 것이든 독일 의서를 네덜란드어로 번역ㆍ서술한 것이었으므로, 독일 의학이 진보했다는 사실을 이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田中香涯, 1927: 23). 이런 논지는 일본인 연구자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바워스(John Z. Bowers)는 “의학 교육의 경우 독일이 세계적으로 지도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했다(Bowers, 1965: 34). ‘독일 의학’의 채택 이유를 그 학술적 우위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은 전후(戰後) 많은 연구자에게서 보이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외부의 외교ㆍ정치적 상황을 덧붙이는 경향을 보일 뿐, 당시 일본이 ‘독일 의학’의 우수성 자체를 인식하고 판단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는 데 주목한 연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가미야 아키노리(神谷昭典)는 “무엇보다 1868년 유신 단계에서 독일 의학의 우위성을 아프리오리하게 주장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神谷昭典, 1979: 4).
애초에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의 여러 분과로 구성된 근대 의학에서 특정 분과가 아닌 ‘의학 일반’의 우열을 일괄적으로 판정하는 것은 개념상 쉽지 않다. 더구나 19세기 의학은 국가 간 지식 교류와 번역, 유학생 이동을 통한 긴밀한 상호작용이 활발했으므로 이를 단순히 ‘독일 의학’, ‘영국 의학’과 같은 국민국가적 범주로 실체화하는 데에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 신정부가 ‘독일 의학’ 채택을 결정했을 당시 일본에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교사는 있었지만, 독일인이 교육에 관여한 적은 없었고,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일본인도 거의 없었다(酒井シヅ, 1985: 30).
초기 군의(軍醫) 제도 확립에 기여하고 육군 군의 총감 겸 육군성 의무국장(육군 군의 서열 1위)을 역임한 이시구로 다다노리(石黑忠悳, 1845∼1941) 역시 사후 회고를 통해 이런 ‘원류론’에 적극 동조하며 ‘독일 의학’ 채택의 학술적 타당성을 옹호한 바 있다(石黑忠悳ㆍ薄田貞敬, 1936: 134).
‘외국인 고문 증언론’을 제기한 모든 선행 연구가 외국인 고문의 증언만이 ‘독일 의학’을 채택하는 데 유일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논의한 것은 아니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가라 지안의 「1869년 의학교 취조에 관한 의견서」부터 「의제」 구상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단발성 파벌 투쟁의 부산물이 아니라, 의사를 국가로부터 면허를 부여받은 자격 있는 엘리트로 양성하려는 일관된 장기 설계도에 가깝다(相良知安ㆍ青木歳幸, 2024: 75-76, 91-125).
이 과정에서 사가라 지안이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구상이 실제 정책으로 연결되는 데에는 이와사 준의 정치적 주선과 행정 실무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당시 문교 행정의 최고 결정권자인 대학별당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는 후쿠이번주 출신이었고, 같은 후쿠이번 출신인 이와사는 그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青柳精一, 2011: 109). 이런 배경 속에서 비주류인 사가번 출신의 사가라가 제출한 건의가 정부 수뇌부의 재가를 통과할 수 있었으며, 윌리스와의 갈등 국면에서도 이와사는 병용안 교섭과 정부 내부 보고를 맡은 핵심 실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神谷昭典, 1979: 52; 新実藤昭, 1987: 497; 柏木政伸, 2018: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