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반 중국의 우두서(牛痘書) 간행ㆍ보급과 우두 인식의 변화 - 『서양종두론(西洋種痘論)』과 『인두략(引痘略)』을 중심으로 -

The Publication and Dissemination of Books on Cowpox Vaccination and Changes in the Perception of Vaccination in Early 19th Century China - Focusing on Xiyang Zhongdou Lun (Western Vaccination Theory) and Yindulue (A Brief Treatise on Vaccin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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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2026;35(2):811-870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6 August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6.35.811
*Associate Professor, Institute for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김성수*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한국의학사 전공
Received 2026 July 02; Revised 2026 July 16; Accepted 2026 August 01.

Abstract

In 1805, Alexander Pearson administered the cowpox vaccine, which had been transported to Macau, to the Chinese people, marking the beginning of the first cowpox vaccinations in China. Under the patronage of Zheng Chongqian, Pearson published Yingjili-guo Xinchu Zhongdou Qishu (A Wonderful Book on the Newly Discovered Method of Vaccination in England), the first book on cowpox vaccination in China, while concurrently passing down the vaccination method to four Chinese individuals: Liang Hui, Qiu Xi, Zhang Yao, and Tan Guo. Notably, Qiu Xi authored Yindulue (A Brief Treatise on Vaccination), successfully spreading awareness of cowpox vaccination throughout China, and its influence was so immense that it was reprinted dozens of times throughout the 19th century following its first publication in 1817.

However, looking strictly at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the process of spreading the cowpox vaccination method was far from easy. The area where it was introduced was the southernmost region of China, and the process of expanding its reach and propagating outward from there was sluggish. During this period, the greatest catalyst for the dissemination of cowpox vaccination was Qiu Xi’s Yindulue. Although works like Zhongdou Qishu and Xiyang Zhongdou Lun existed prior to Yindulue, it was Yindulue that achieved massive success by providing appropriate solutions to various practical problems that arose during the spread of cowpox.

Qiu Xi's interpretation of cowpox vaccination using traditional medical theories, an approach for which he is highly credited, was a continuation and development of the attempts made in Xiyang Zhongdou Lun. Unlike Huang Anhui, who attributed the cause of smallpox to "heart fire" (xinhua), Qiu Xi focused on "fetal toxin" (taidu), a concept easily understood by the general public, which seems to have garnered much greater public consensus. However, the enduring popularity and widespread use of Yindulue can also be attributed to other practical aspects presented in the text, such as the operational guidelines for vaccination bureaus—including establishing vaccination cycles for lymph (dumiao) harvesting and managing gratuities—as well as implementing measures to prevent infectious diseases to ensure the safety of the lymph, and improving preservation methods to extend its storage life.

The dissemination process of cowpox vaccination is also closely tied to the reprinting of Yindulue, and an analysis of the texts included in the book reveals several key facts. First, the introduction of cowpox vaccination to Beijing around 1828 was a milestone event in its dissemination. This meant that the spread of vaccination did not rely solely on moving northward from the stronghold of Guangdong, but rather, transmission originating from Beijing also played a major role. While Guangdong was a remote region at the southernmost tip of China, Beijing was the capital of the Qing Dynasty and the political and economic center, which gave it a far greater sphere of influence.

Second, within Yindulue and the broader dissemination process, subtle signs of a perceptual shift began to emerge, moving away from traditional medicine that emphasized culture toward a modern mindset that prioritized trials and results. Although the vaccination technique was wrapped in the outer garment of traditional medicine in terms of its technical aspects, underneath lay a latent shift in perception that approached the experimental medicine pursued by Western medical science. This created a peculiar entanglement between the West and China, and between modernity and tradition, reflecting a facet of the 19th-century Chinese intellectual world. This complexity is evident because, alongside the main text written by Qiu Xi, Yindulue contains various writings left by a diverse range of figures who took the lead in printing and promoting the book.

1. 머리말

1805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인 피어슨(Alexander Pearson, 1780~1874)이 마카오로 운반된 우두 백신을 포르투갈인, 영국인, 마카오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게 접종하면서, 중국에서 최초의 우두 접종이 시작되었다. 정숭겸(鄭崇謙)의 후원 아래 피어슨은 중국에서 최초의 우두서인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咭唎國新出種痘奇書)』(이하 『종두기서』)를 출간하는 한편, 네 명의 중국인 양휘(梁輝), 구희(邱熺), 장요(張堯), 담국(譚國)에게 우두 접종법을 전수했다. 특히 구희는 『인두략(引痘略)』을 저술해서 중국 전역에 우두를 알리는 데 성공했고, 『인두략』은 1817년 처음 간행된 이후 19세기 내내 수십 차례 간행될 정도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董少新, 2007; 朴基水, 2013).

우두법을 전수한 이들 가운데 구희가 주목받게 된 배경은 당연히 『인두략』 때문이었는데, 현재까지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인두략』의 성공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로 우두 성공 사례를 적극적으로 선전했으며, 둘째 우두를 중국의 전통 의학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우두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했다는 점이다. 먼저 구희는 1806년부터 우두 접종을 시작하면서, 광동 지역의 고위 관료나 저명인사의 자제에게 무료로 접종해주고는 그들에게 받은 감사의 시문(詩文)이나 편액(扁額)을 책으로 펴내서 우두의 효과를 널리 홍보하는 한편 호의적인 이해를 끌어냈다(董少新, 2007: 138-139). 한편 인두법(人痘法) 용어의 차용, 남좌녀우(男左女右)의 접종법, 전통적인 태독(胎毒) 이론의 채용, 우두의 효능에 대한 오행적(五行的) 해석, 삼초(三焦)를 이용하는 경맥(經脈) 이론 등 익숙한 인두법의 지식을 우두법에 적용해서 낯선 기술에 대한 거부감을 최소화했다(張嘉鳳, 2007: 772-792). 이에 『인두략』의 내용이 중국의 사대부로부터 관료, 상인들의 공감을 끌어냈고, 결과적으로 6~70여 차례가 넘게 간행되면서 우두 보급에 이론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1)

우두 보급과 『인두략』에 관한 연구에서 구희가 전통 의학을 이용해 우두를 재해석했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구희는 분명하게 밝혀 놓은 적이 없다. 그런데 『인두략』 간행 2년 전에 등장한 황안회(黃安懷)의 『서양종두론(西洋種痘論)』에서는 우두를 보급하기 위해서 먼저 우두에 대한 원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구희에 앞서 전통 의학 지식을 이용해 우두를 해석하고자 했다. 하지만 황안회의 『서양종두론』은 19세기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희의 『인두략』이 크게 성공을 거두어 거듭 간행되었다는 사실 외에, 우두의 중국적 해석의 창시자로서 구희를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張嘉鳳, 2007: 788-790).

이 글에서는 19세기 전반 중국에 우두법이 널리 보급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 『인두략』을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우두 지식의 전개 과정과 우두의 보급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중국에 우두법이 소개된 직후이기 때문에, 우두에 대한 저항과 함께 수용을 위한 노력이 여러 각도로 이어졌다.2) 먼저 낯선 서양의 방법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거부감을 극복할 논리가 필요했으며, 동시에 이를 효율적으로 보급하기 위해서는 접종 방식이나 우두국(牛痘局)의 운영을 체계화할 필요도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요구에 『인두략』은 체계적으로 대응했으며, 반대로 황안회의 『서양종두론』은 먼저 중국적 해석을 제시했음에도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인두략』의 성공 요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양종두론』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한편 『인두략』이 수십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두 보급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훌륭한 자료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인두략』 중간(重刊) 과정에서 실린 여러 편의 서문(序文), 발문(跋文) 등을 어느 지역에, 어떤 인물에 의해 우두가 전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로만 활용했다. 그러나 『인두략』의 계속된 간행은 우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저항과 수용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서문과 같은 글의 성격상 구희나 『인두략』에 대한 과한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우두 보급 과정에서 나타난 반대의 논리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식의 변화과정이 상당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인두략』 외에도 실제 우두를 수행한 종두의(種痘醫)나, 상인(商人), 선교사(宣敎師), 관료(官僚)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우두 보급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梁其姿, 2012: 70-91). 다만 이 글에서는 하나의 의서인 『인두략』을 통해, 19세기 전반 중국 사회에 우두의 보급과 인식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려는 시도로 한정을 두었음을 밝힌다.

이 글에서 『인두략』을 분석하는 차례는 먼저 황안회의 『서양종두론』에서 시작한다. 구희의 『인두략』에 2년 앞서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 의학으로 우두의 해석을 먼저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구희가 황안회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한편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계화 했다는 점을 밝히고, 전통적인 해석을 포함해 우두 기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보급을 위한 우두국의 효율적 운영책을 제공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을 밝힌다. 마지막으로는 『인두략』의 거듭된 간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우두의 보급 상황, 그리고 우두로 표상되는 서양에 대한 인식의 변화, 우두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인두 재접종이라는 의도적 시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실이 갖는 의미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2. 황안회(黃安懷)의 『서양종두론』

1805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인 피어슨이 마카오로 운반된 우두 백신을 포르투갈인, 영국인, 마카오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게 접종하면서, 중국 최초의 우두 접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피어슨은 1805년 5월 무렵에 우두 접종법을 소개한 간단한 소책자 The History in Chinese of the Vaccine Inoculation을 저술했고, 7월 정도에 스턴튼(George Staunton, 1737~1801)이 중국어로 번역해서 『종두기서(種痘奇書)』를 출간했다(朴基水, 2013: 223-228; 조정은, 2018: 347-353). 『종두기서』는 처음에 200부가 출판되었고, 이후 두 차례 더 간행되었다(張嘉鳳, 2007: 760-761). 그리고 정숭겸의 지원 아래 진행된 우두를 익힌 구희는 접종 시작에서 10여 년이 지난 1817년 『인두략』을 펴냈고, 이를 계기로 우두 접종은 마카오와 광동(廣東)을 넘어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3)

그런데 『인두략』에 앞서 1815년(嘉慶 20) 남해(南海)의 황안회가 『서양종두론』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1805년에 피어슨이 쓴 『종두기서』가 중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우두 서적이라면, 『서양종두론』은 중국인에 의해 저술된 최초의 우두 안내서였다. 그러나 황안회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는 것처럼 『서양종두론』은 『종두기서』와 마찬가지로 많이 출판되지 못했기 때문에, 2년 뒤에 발간된 구희의 『인두략』이 수십 차례 간행되어 중국에서의 우두 보급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張嘉鳳, 2007: 768-769). 이런 사정으로 황안회의 『서양종두론』의 전본(傳本)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서양종두론』에 대한 학술적인 평가는 매우 소략하다. 하지만 『인두략』의 성공 요인이 우두를 전통 의학의 관점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라면, 『서양종두론』이 『인두략』보다 먼저 그와 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물론 장지아펑(張嘉鳳)에 의해 구희의 『서양두서(西洋痘書)』에 실려 있는 『서양종두론』이 일부 분석되었지만(張嘉鳳, 2007: 788-790), 여전히 해명되지 않았거나 오해된 부분이 있다. 현재 상해도서관에는 구희가 썼다고 전해지는 1827년 간행의 『서양두서』라는 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서문에 해당하는 주순희(周純熙)가 쓴 1쪽의 짧은 글을 시작으로, 온여괄(溫汝适)의 서문 4쪽, 구희의 서문 5쪽, 정조형(鄭兆珩)의 서문 2쪽, 서양종두론 12쪽, 접종 안내도 4쪽, 그리고 「서양두설(西洋痘說)」로 시작하는 『인두략』이 합본된 서적이다.4) 『인두략』의 원문을 이어 「방약(方藥)」 7쪽, 그리고 주순희가 쓴 「양두질의(洋痘質疑)」 12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서양두서』는 앞부분의 『서양종두론』과 후반부의 『인두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서양종두론』은 1815년에, 구희와 온여괄의 서문은 1817년에, 정조형의 서문은 1821년에, 주순희의 서문과 「양두질의」는 1827년에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서양두서』의 맨 앞에 책을 간행하게 된 사정을 아주 짧게 기술하고 있는 주순희(周純熙)의 글에서 『서양종두론』과 『인두략』 사이의 관계를 일부 살필 수 있다.

우두에 관한 책[此書, 필자]은 가경(嘉慶) 을해년(1815)에 처음 판각되었으나, 그 논설과 처방[藥方]이 아직 온전히 갖춰지지 않았다. 정축년(1817)에 몇 가지 조항이 약간 보충되었으나 여전히 완벽하지는 못했다. 도광(道光) 신사년(1821)에 이르러 다시 한 권이 나왔지만, 뒷부분은 상세하고 앞부분은 소략한 점을 면치 못했다. 이에 이제껏 세 차례에 걸쳐 간행된 내용들을 하나로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의 뜻있는 분들[同志]께 공개하고자 한다. 혹여 빠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책을 전하는 사람의 허물이나, 나[熙]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도광 정해년(1827년) 거듭 간행함.5)

여기서 1815년 처음 간행되었다고 말한 책이 바로 황안회의 『서양종두론』이고, 1817년에 나온 것은 구희가 쓴 『인두략』이며, 1821년에 간행된 것이 바로 『인두략』 혹은 『서양두서』였다.6) 여기에 주순희가 글을 붙여 재차 간행한 것이 필자가 확인한 상해도서관 소장 1827년 간행본 『서양두서』이다. 그런데 장지아펑은 위의 인용문에서 “此書”를 말 그대로 “이 책”, 즉 『서양두서』로 이해한다. 따라서 『서양두서』는 1815년 처음 나왔으며, 약간 보충해서 1817년 『인두략』으로 간행했고, 다시 1821년에 『서양두서』를 간행한 이후 1827년에 중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만약 구희가 1815년에 책을 냈다면 어째서 그에 해당하는 서문은 발견할 수 없는가 하는 점이다. 실제 여러 『인두략』 판본을 검토해 보면, 1817년에 작성된 구희의 서문만 있지 1815년의 서문은 찾을 수 없다. 게다가 다른 어떤 글에서도 1815년 구희가 편찬ㆍ간행했다는 서적은 등장하지 않는다. 즉 구희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이 1815년에 쓴 구희의 어떤 책을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1815년에 나온 것은 구희의 『서양두서』일 리가 없으며, 황안회의 『서양종두론』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7) 게다가 이미 1817년에 『인두략』을 명칭을 바꾸었는데, 굳이 1821년과 1827년에 『서양두서』라는 이름으로 회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림 1.

『서양두서』 표지

Figure 1. Cover of Xiyang Doushu (Western Smallpox Book)

좌측 상단에 『서양종두론』이 간행된 가경(嘉慶) 을해년(1815)의 표기가 있으며, 우측에 『서양두서』가 간행된 도광(道光) 신사년(1821)의 표기가 있다. (상해도서관 소장)

그림 2.

『서양두서』 내지 첫 면

Figure 2. First page of Xiyang Doushu)

주순희가 쓴 『서양두서』 간행 내력과 함께 『인두략』에 실린 온여괄(溫汝适)의 서문(1817)이 있다. (상해도서관 소장)

구희의 『인두략』과 비교해서 황안회의 『서양종두론』이 중국 사회 내에서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지만, 앞서 출판된 『종두기서』처럼 단순히 우두의 기술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우두 보급을 위한 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황안회는 우두 보급을 위해 이론적 측면에서 설명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그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인두략』보다 먼저 우두의 이론적인 근거를 중국 전통 의학의 맥락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황안회가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이나 우두의 원리를 전통 의학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노력 일부가 장지아평에 의해 밝혀졌지만, 1815년에 『서양종두론』과 함께 『인두략』의 원형이 간행되었다는 추정을 기초로 『인두략』을 중심에 두고 『서양종두론』을 비교 언급한 정도에 그쳤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張嘉鳳, 2007: 789-791). 그러나 1815년에 출간된 것은 『서양종두론』이며, 『인두략』은 1817년에 간행되었으므로, 『인두략』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서양종두론』을 상세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8) 왜냐하면 황안회, 구희 두 사람 모두 남해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황안회가 구희보다 앞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물론 황안회의 글이 구희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지만, 1806년부터 우두 접종의 최전선에 있었던 구희가 10여 년 동안 책을 쓰지 않았다가 1817년이 되어서야 『인두략』을 출판했다는 사실에서 영향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서양종두론』의 첫머리에서 황안회는 영국의 의사 제너[咭拿]가 우두 방법을 개발했으며, 1805년 필리핀[呂宋]을 거쳐서 마카오[粵]로 우두법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9) 그가 책을 쓴 1815년에는 이미 마카오뿐만 아니라 광동을 중심으로 우두가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두 전파에 관한 사정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피어슨이 쓴 『종두기서』를 직접 보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서양종두론』에서 ‘이 책[伊書]’을 근거로 우두법의 기원과 접종의 방법, 그리고 접종 후에 생긴 두장(痘漿)을 이어서 접종하는 방법을 소개하는데,10) 당시 중국에 소개된 우두법 관련 서적은 『종두기서』가 처음이자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안회는 우두 보급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언급을 제시한다. 즉 이 책이라고 말한 『종두기서』에서 우두 접종에 대한 그림과 접종법만 있고 우두의 원리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 까닭에, 코로 접종하는 인두법과 다르다는 사실을 구실로 사람들이 의심한다고 전했다.

이 책[伊書]을 살펴보면 단지 그림과 접종법만 있고, 그 원리를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처음 접종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코로 불어넣는 것(인두법, 필자)과 다른 것을 보고 몹시 의심하여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이 괴이하지 않음을 알지 못한 까닭은 저 오랑캐[鬼子]가 <우두의> 원리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11)

사실 우두법의 개발은 경험을 근거로 반복적으로 실험하여 얻은 결과였다. 특별하게 우두의 원리를 밝히거나, 더 나아가 두창의 발생 원인과 우두가 두창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된 것이 없었다.12) 그렇기에 황안회가 지적한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우두가 어째서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원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대응하여, 황안회는 전통 의학의 두창과 인두법 이론을 적용해서 우두의 작용 기전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우두 전래 이전부터 중국의 전통 의학에서는 이미 두창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고, 두창을 치료하는 전문 서적도 여럿 편찬된 상태였다.13) 게다가 인두법이 개발ㆍ보급된 지도 오래였기 때문에,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통 의학을 통해 두창에 관한 이론적인 이해는 대부분 밝혀졌다고 할 수 있었다. 즉 송대 이래로 계속해서 전승되어 온 태독설(胎毒說)에 근거한 두창 발생의 이유, 치료의 방법, 나아가 태독 제거를 통해 두창의 예방을 꾀하는 인두법이 중국 사회에 이미 널리 퍼진 상태였다.14)

인두법의 논리는 다른 사람의 두독(痘毒)을 가져다가 아이의 태독을 밖으로 끌어내어 두창이 발생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15) 바로 이러한 방식을 우두에도 적용하려고 시도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추가한다. 황안회는 먼저 우두가 인두보다 안전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어 중국인들이 낯설게 여긴 접종법이 어떤 이유로 효과적인지를 설명하며, 이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 즉 두묘(痘苗)를 사람이 아닌 소에게서 가져와도 두창을 예방할 수 있는 까닭을 밝힌다.

황안회가 가장 먼저 주목한 대목은 우두법의 안전성이었는데, 인두법에서 두독(痘毒)이 약화(弱化)된 두가(痘痂)를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오히려 두창에 걸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강조했다. 우두에는 두창에 걸릴 위험 내지는 후유증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선인[前人]들이 큰 지혜를 내어 종두법을 창안했으니 … <인두법으로> 열 중에 아홉은 목숨을 건지므로, 그 방법이 매우 좋다. 그러나 만전(萬全)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는 폐장이 코로 연결[開窺]되기 때문이다. 폐는 우산[華蓋]과 같아서 모든맥(脈)이 모이고, 장부(臟腑)를 덮고 있다. <폐장에서 두창의> 독기(毒氣)를 한 번만 받아도, 오장육부(五臟六腑)의 화(火)가 일제히 일어난다. 독(毒)에는 천심(淺深)이 있어서, 두(痘)가 나오는 데에도 소밀(疏密)이 있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몸을 조리하지 못해서 간혹 <생명을> 구하지 못하는 때도 있지만, 이것은 <인두를> 접종하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16)

인두 접종으로 인해 도리어 두창에 걸리더라도, 이는 인두를 접종하는 종두의(種痘醫)의 잘못이 아니라 인두법에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불완전성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태독(또는 화독)이 심해서 두창이 몸에 심하게 나타나거나, 조리를 잘못하게 된다면 두창의 피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두독이 강한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접종 이후 발현되는 증상을 통해서만 파악이 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에 미리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접종에 사용되는 두묘의 독도 중요했지만, 황안회가 주장하는 인두법의 위험은 근본적으로 접종법에도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인두의 접종 형태는 두가(痘痂)를 솜으로 싸서 코에다 하루 정도 넣어두는 방법이었는데, 두창의 독이 코를 통해 인체 내부로 전해지는 방식이다.17) 그런데 코가 폐와 연결되어 있고 폐는 오장육부(五臟六腑)의 나머지 장부를 덮고 있으므로, 코를 통해 폐에 전해진 두독이 오장육부 전체에 바로 영향을 준다고 황안회는 주장했다.

즉 인두법에서 사용하는 코로 두가를 넣는 방식은 곧바로 폐에 두창의 기운을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폐는 화개(華蓋), 즉 우산과 같은 역할이어서 오장육부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으면서 나머지 장부를 덮고 있다. 결국 인두법의 접종 방식은 폐장을 통해 오장육부에 직접 작용해서 장부에 잠복해 있던 화(火)의 기운이 동시에 일어날 가능성이 크고, 간혹 인두 접종으로 두창에 걸리는 사고가 생겨나기도 한다고 이해했다.18)

이에 반해 우두법은 인두법에 비해서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인데,19) 그 이유를 황안회는 두 가지 점에서 원인을 찾았다. 첫 번째는 폐장을 통해 오장육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인두법과 달리, 특정한 혈만을 취해서 심장에 깃든 심화(心火)만을 제거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우두를 이용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서양의 방법(즉 우두법) 역시 코에 <두가를> 불어넣는 방법(吹鼻法, 즉 인두법)과 같다. 그러나 <우두 접종법의> 교묘함은 훨씬 나으니, 무엇 때문인가? 인두법은 폐를 통해서 <두독을> 끌어내고, 팔을 째는 법(즉 우두법) 역시 폐를 통해서 <두독을> 끌어낸다. 다만 인두법은 오장육부(五臟六腑)의 화(火)를 불러일으키는 까닭에 두창이 많이 돋아나기도 한다. 팔을 째는 법은 양팔 가운데에서 오직 협백혈(夾白穴)이라는 미세하게 <맥이> 뛰는 혈 자리를 골라서, 살을 째고서 장액(漿液)을 넣는다. 경락(經絡)과 피모(皮毛)는 모두 폐에 속하는데, 협백혈은 또한 심장으로도 통한다. 『내경(內經)』에서 이르기를 “모든 통증과 부스럼[瘡瘍]은 모두 심장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두창은 선천(先天)의 사화(邪火)가 심장에 잠복해 있는 것이다. 우두 접종법은 매우 교묘(巧妙)해서 다른 경락에 영향을 주지 않고, 다만 선천의 심화(心火)만을 꺼낸다. 이런 까닭에 수포[顆] 하나만 나와도 완벽한[萬全] 효과를 얻는다. 접종에서 우두를 사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소의 속성은 토(土)에 속하기 때문에, 화독[毒]이 토를 만나면 풀어진다. 소의 토성을 빌어 두창의 화독(火毒)을 풀어내는 것이다.20)

인두법과 다르게 팔의 피부를 얇게 벗겨낸 이후에 우두를 접종하는 방식은 피와 장액이 섞여서 심장으로만 전달되기 때문에, 앞서 인두가 오장육부의 화기를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약하게 영향을 미친다. 즉 심장에 잠복해 있으면서 두창을 일으키는 사화의 기운에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온몸에 두창이 발생하지 않고 접종한 부위에만 작은 물집이 생긴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처럼 두가(痘痂)를 코에다 넣는 인두법과 다르게 팔의 피부를 째고 접종하는 방법 자체가 큰 영향을 준다면, 사람의 두가를 사용해 우두와 같이 접종하는 방법도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접종에 사람의 두가를 사용하지 않고, 우두를 사용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황안회는 소가 갖는 토의 기운 때문에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이른바 오행(五行)의 상생(相生) 관계에서 화생토(火生土)의 논리를 이용했다. 즉 우두가 갖는 토의 기운이 심장의 화독에 영향을 주어서, 심장의 화(火)가 토(土)로 변화되도록 촉발하는 가운데 본래 갖고 있었던 화의 기운이 약화(弱化)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안회가 설명했던 우두의 장점은 이후 구희의 『인두략』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특정한 혈 자리에 접종해야 하며, 우두를 사용하는 이유는 소가 토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기본적인 논리와 매우 유사하다. 물론 황안회의 주장이 삼초(三焦)를 중시하는 구희의 논리와 다른 측면도 있지만, 논리의 저변에 담긴 인두ㆍ우두에 대한 이해는 매우 유사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인두략』의 검토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황안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우두의 보급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해결해야 문제가 있었다. 첫째 우두 접종을 했음에도 수포가 나오지 않는 이유나, 접종이 완료된 이후에도 “반드시 두창이 재발할 것”이라는 잘못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식을 극복해야 했다.21) 그는 우두 접종 후에도 간혹 두창에 걸리는 이유는 우두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접종하는 사람이 접종해야 하는 협백혈에 제대로 접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2) 황안회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논리는 이후 구희의 『인두략』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적어도 황안회나 구희에게 있어서 우두는 두창의 완전한 예방법이기 때문에, 접종에도 불구하고 두창이 나오는 이유는 결국 접종의의 잘 못이라고 이해했다.

두 번째로 우두법 도입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던 두묘의 확보와 관련해서, 흥미롭게도 재귀우두(再歸牛痘)23)와 유사한 형태를 제안했다. 그는 서양에서처럼 유력한 가문이 재산을 내어 두묘를 확보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일 두묘가 떨어지게 되면 천만리나 떨어진 외국에서 가져와야 하는 어려움에 닥쳤을 때의 자구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24)

19세기 초반 중국에 소개된 우두 접종법은 먼저 우두를 접종한 사람으로부터 두묘를 확보해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접종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이렇게 얻은 두묘의 보관 기관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접종이 계속해서 바로바로 이어져야만 두묘가 유지될 수 있는 단점이 있었다. 황안회가 제시한 방법은 이러한 고충을 해결할 묘책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醫)라는 것은 의(意)”라고 했다.25) 소의 두종[牛之種]을 사람에게 접종할 수 있으니, 마찬가지로 사람의 두종[人之種]을 소에게 접종할 수 있을 것이다. 두창[天行]이 유행하는 때를 만나면, <사람의> 두가(痘痂) 가운데 깨끗하고 기운이 튼실한 것[純淨堅厚]을 골라 갈아서 사람에게 하듯이 병이 없고 건장한 소에게 코로 종두하면 소의 두종[牛之種]을 얻을 수 있고, 다시 그것을 가져다 사람에게 접종하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26)

두묘를 얻기 위한 매우 시험적인 제안이었지만, 실행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사실 사람에게서 나온 두창바이러스를 소에게 접종했다가 다시 사람에게 옮긴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두창바이러스(Variola virus)와 우두바이러스(Cowpox virus)는 분명히 다르고, 성공적으로 소를 거쳐 사람에게 접종한다고 하더라도 두창바이러스라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소에게 있는 토의 기운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황안회의 우두 해석을 고려할 때, 사람에게서 나온 두장이 소를 거치면서 토의 기운을 가지게 되어 우두와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만약 우두 접종을 받은 사람의 두장을 이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재귀우두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수 있다.

황안회의 주장이 옳은지 여부를 떠나, 전통 의학의 이론을 끌어와 우두의 효과를 해석하려고 한 점, 두묘를 확보하기 위한 창의적인 제안을 제시하는 등 우두 보급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황안회가 제시한 논리는 인두법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적극 채용한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우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접종법의 차이와 소에게서 나온 장액을 사용하는 두 가지 측면 때문이라고 여겼고, 각각의 사항을 수용할 수 있도록 논리를 제시했다.

첫째로 접종하는 위치를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의 혈인 협백혈(俠白穴)로 지정해서 두가를 코에 넣는 방식인 인두법과 마찬가지로 폐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차이가 없음을 드러냈다. 두 번째로는 소가 오행 가운데 토에 속한다는 점을 들어 사화(邪火)를 약화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구희에게 한편에서는 그대로 계승되고, 다른 편에서는 새로운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황안회와 달리 구희는 『인두략』을 저술하기 전에 10여 년에 걸쳐 현장에서 우두 접종을 시행하고 있었기에, 황안회가 주목한 접근법과 유사하면서도 실제 접종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을 『인두략』에서 치밀하게 제시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3. 『인두략』의 논리와 우두 보급

1) 구희(邱熺)의 우두 재해석

광동 남해 출신의 황안회가 『서양종두론』을 발표한 지 2년 후, 동향(同鄕)의 구희는 『인두략』을 펴낸다. 구희가 『인두략』을 저술하기 이전에 『서양종두론』을 보았는지, 즉 『서양종두론』의 영향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1817년에 처음 간행된 『인두략』에서 황안회에 대한 언급이 없는 반면에, 1821년 간행된 『서양두서』에서는 『서양종두론』을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여 년 넘게 우두 접종 현장에 있었던 구희나, 간략하지만 재빠르게 우두 안내서를 발간한 황안회가 우두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창의 전염성과 증후의 위험, 그리고 인두법의 한계 때문이었다. 구희는 두창이 아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전염병)이었으며,27) 보통의 경우라도 20~30%의 사망자가 발생하며 혹독할 때는 발병자의 절반 정도가 사망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28)

다행스럽게 인두법이 개발되어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것 역시도 완전한 방법은 아니어서 인두의 피해도 발생하고 있었다.29) 따라서 우두는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보급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우선 우두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 필요했기에, 우두의 원리는 종두(즉 인두법)처럼 태독(胎毒)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점이 같고, 단지 접종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주장했다.30) 즉 우두 역시 인두법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우두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려는 의도였는데, 이는 『서양종두론』이나 『인두략』에서 취한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인두략』은 앞서 간행되었던 『종두기서』나 『서양종두론』에 비해 체계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접종법과 보급책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다. 총 8개의 항목에 걸쳐, 우두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 그리고 우두 행정을 위한 실제 사례를 제시했다. 첫 번째 항목인 「인두설(引痘說)」에서는 우두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수재유양묘장(首在留養苗漿)」에서는 두묘와 장액을 배양하는 방법, 특히 우두를 접종받은 아이로부터 두묘를 확보하는 방법을 기술했다. 그리고 「차재인식풍질(次在認識瘋疾)」에서는 접종받을 아이에게 풍질(瘋疾)31)이 있는지 파악하는 법, 「인설법(引泄法)」에서는 태독(胎毒)을 빼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어서 「도묘법(度苗法)」에서는 두묘를 운반하는 다양한 방법, 「출두시의변(出痘時宜辨)」에서는 우두가 나왔을 때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변하는 법을 소개했다. 「출두후수지(出痘後須知)」에서는 우두가 돋아난 후에 치료를 위해 알아야 할 것, 마지막으로 「방약(方藥)」에서는 각 증상에 따른 처방을 제시했다.

이처럼 접종 기술 외에도 현장에서 필요로 지식을 상세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인두략』이 『서양종두론』에 비해 늦게 편찬됐지만 종두의(種痘醫)를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계속해서 간행되는 이유가 되었다. 여기서는 우두 이해와 관련되는 항목을 중심으로, 구희가 『서양종두론』과 다르게 우두를 해석하는 방식을 살펴보도록 한다. 앞서 황안회는 사람의 두장이 아니라 소의 두장을 사용하는 이유, 그리고 접종을 통해 태독이나 심화를 제거하는 원리를 설명했다. 구희는 이를 더 심화시켜 『인두략』의 첫 글인 「인두설(引痘說)」에서 명확하게 밝히는데, 구희의 설명은 황안회와는 결을 달리한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황안회는 접종 부위가 협백혈이며, 소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내경(內經)』의 “모든 통증과 부스럼[瘡瘍]은 모두 심장에 속한다”라는 부분을 인용해 선천(先天)의 사화(邪火) 중에서도 심화와 관련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화생토(火生土)의 원리를 근거로 토에 해당하는 소의 두장이 심화가 토로 변환되는 기운을 촉진해서, 화의 증상을 약화한다고 이해했다.

구희 역시 황안회와 유사하게 중국의 전통 의학을 이용해서 설명했지만, 우선 우두가 개발된 경위에서 나타난 경험적 사례를 말하는 가운데 협백혈이 아니라 제너가 처음부터 소락혈(消樂穴)ㆍ청냉연혈(靑冷淵穴)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32) 수태음폐경의 경혈인 협백혈이 아니라 수소양삼초경의 경혈인 소락ㆍ청냉연혈을 주장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한 사정을 우두가 어째서 태독을 끌어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대개 소는 토(土)에 해당하는 가축이며, 사람의 비장(脾臟)도 토에 속한다. 토<인 소>로써 토<인 비장에서 독을> 끌어내니, 같은 기운이 서로 감응하고, 같은 부류끼리 서로 생장토록 하는 까닭에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두종(痘種)이 소로부터 왔기 때문에 우두(牛痘)라고 부른다.33)

여기서 구희는 비장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사정을 엿볼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비장을 거론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두창의 증상은 태독이 깃들어 있는 오장에 따라 달라지는데, 신장에 있을 때가 증상이 위험하지만, 독이 신(腎)에서 간(肝)으로, 심(心)으로, 폐(肺)로, 비(脾)로 순서대로 전해지면서 증상이 점차 약화된다. 따라서 두창의 독이 신장에서 발현될 때 가장 위험하고, 비장일 경우는 가장 가볍다고 주장했다.34)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종금감(醫宗金鑑)』에서 제시한 두묘(痘苗)의 독이 오장에 전해지는 과정, 그리고 오장에 있던 독이 몸의 표면으로 나오는 과정 즉 인두법의 논리를 그대로 채용했다. 코에다 두가(痘痂)를 넣는 방법은 두묘의 기운이 오장(五臟)을 차례대로 거쳐 안으로 들어가고, 몸 안에 있던 태독이 두묘의 기운이 들어가는 것과 반대의 순서에 따라 오장을 거쳐서 밖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전송(傳送)의 순서[次序]라고 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과 『의종금감』에서 보이는 차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하지 않았다.35)

분명하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황안회의 주장보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신에 구희는 『의종금감』을 인용하여 우두 접종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약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태독이 비장에서 발현되면 가장 안전한데 이때 비장은 토에 해당하므로, 토에 해당하는 우두가 비장을 거쳐서 두독이 발현되도록 해서 안전하다는 것이다. 구희가 『인두략』으로 이름한 것은 바로 두창의 독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였으며, 우두가 인두법과 절대 다르지 않음을 상기시키는 대목이었다.

『의종금감(醫宗金鑑)』에서 “두창이 발생하기 전에 태독을 끌어낸다”라고 한 것이 바로 같은 의미이다. 장손옥(張遜玉)36)이 『종두신서(種痘新書)』에서 말한 “가묘(佳苗)로 태독(胎毒)을 끌어내면, 그 독이 횡행하지 않으며 증상도 저절로 순조롭다”라고 한 것 역시 이 의미이다. 그런 까닭으로 종두(種痘)에는 모두 인법(引法)을 사용하니, 피모ㆍ혈맥ㆍ기육ㆍ근골(筋骨)로부터 동시에 독을 끌어내는데, 우두(牛痘)가 가장 빠르다.37)

우두 접종이 인두와 가장 큰 차이를 갖는 것은 무엇보다 접종받은 아이의 증후가 훨씬 가볍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의종금감』에서는 “종두에서 조섭(調攝)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으며,38) 이에 따라 한열(寒熱)을 피하고 음식을 조심하는 여러 가지 사항들을 알려주었다.39) 그러나 우두는 평상시와 같이 음식을 먹어도 되고, 열흘이 지나면 접종의 성공 여부를 바로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40) 그래서 “아이에게서 고통을 제거하고, 부모에게는 걱정과 수고를 덜어주니, 이 방법이 진실로 선(善)하다”라는 사실을 부각했다.41)

구희가 우두 접종과 관련해 황안회와 달리하는 점은 접종 부위에 대한 설명에도 있다. 그리고 이는 사실 접종으로 인해 태독을 끌어내는 것에 관한 이론적인 접근의 차이에서 발생했다. 황안회는 수태음폐경의 협백혈에서 혈(血)을 취함으로써 전통 의학에서 말하는 폐장과 함께 심장에 있는 사화를 끌어낸다고 했지만, 구희는 삼초경의 혈 자리를 중시했다. 여기에는 앞서 피모ㆍ혈맥ㆍ기육ㆍ근골(筋骨) 즉, 폐장ㆍ심장ㆍ비장ㆍ간장 등에 잠재한 태독을 한꺼번에 나오도록 하는 데에 삼초경이 역할을 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두를 접종하는 방법은 양팔 가운데 소락혈(消爍穴)ㆍ청냉연혈(淸冷淵穴)의 두 혈 자리가 위아래로 서로 연결되는 곳에 접종하기에 콧구멍을 막는 법(塞鼻孔法, 즉 인두법)과는 다르다고 여기는데, 이는 사람의 양팔이 바로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삼초(三焦)는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關要]이 되는 장부로, 천지(天地)의 삼원(三元)과 같아서 오장(五臟)과 육부(六腑), 영위(營衛)와 경락(經絡)을 모두 다스리며, 내외(內外)ㆍ좌우(左右)ㆍ상하(上下)의 기운을 통하게 한다. 삼초가 소통되면 내외ㆍ좌우ㆍ상하가 모두 소통되며, 그 관문이 되는 자리에 접종[引]하면 곧바로 피모로부터 혈맥ㆍ기육ㆍ근락(筋絡)으로 동시에 바로 전해져 들어간다. 설사 태독이 신장(腎臟)에 깊이 저장되어 있더라도 역시나 자연스럽게 동시에 끌고 나온다. <그러면> 길을 안내하는 사람[引路]과 같아서, 평탄한 길[坦途]로 안내하면 걸리거나 헛디뎌 넘어질 염려가 없다. 실을 자아내는 일[引絲]과 같아서, 단서를 당기면 어지러워질 걱정이 없다.42)

구희가 익숙한 태독의 개념을 이용해서 우두의 원리를 황안회와 달리 설명하였던 것에 더하여,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 이유는 실제 접종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해서 우두를 시행하려는 종두의(種痘醫)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금기와 관련된 설명이었다. 구희는 날씨와 함께 다양한 금기가 있었던 인두법과 달리 우두는 계절이나 날씨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며 여타의 금기와 남녀노소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창나(瘡癩)와 나력(瘰癧), 피부병 등의 질병이 없다면 아무 때나 접종하면 된다고 말했다.43)

인두법처럼 금기가 되는 항목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양팔에 접종할 때 남녀를 구분해서 접종할 팔의 순서를 정하기도 했다. 이는 인두법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접종할 때 아이 옷의 양 소매를 말아 팔 위로 걷는다. 작은 끈 두 개를 써서, 각각 1개씩으로 양 소매 앞뒤를 꿰어서 단단히 묶는다. 【양 팔뚝을 노출케 하는데, 날씨가 추워도 피하지 않는다.】 남자는 왼쪽 팔에 먼저 접종하고, 여자는 오른쪽 팔에 먼저 접종한다. 두묘를 접종하는 사람은 왼손으로 아이의 팔을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오른손으로 칼끝으로 가묘를 조금 채취한다. 양팔의 소락혈(消爍穴)ㆍ청냉연혈(淸冷淵穴)에 <접종하는데>, 양팔의 혈(穴)마다 1방울씩을 접종한다. 만약 아이의 나이가 8~9살 이상이면 매일 비리고 기름진 여러 음식[五味]을 먹으므로, 혹 후천의 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두 혈이 서로 연결되는 중간에 각 1알씩을 더 접종하는데, 4알 혹은 6알을 넘기지 않는다.44)

이제 접종할 부위가 정해지면, 실제 접종을 하는 일만 남게 되는데 매우 조심해야 하는 대목이었다. 즉 피부를 벗기는 방법은 칼을 수직으로 세우면 안 되고, 가볍고 정교하게 두묘를 찍어야 한다. 칼날로 살살 피막(皮膜)을 얇은 종이처럼 평평하게 벗겨낸다. 벗겨낸 곳은 너비가 약 1푼이 되게 하고, 피가 약간 보일 정도까지 벗긴다. 그런 다음 칼끝의 장액을 돌려가며 문질러 약간의 피와 함께 벗겨낸 혈(穴) 자리 가운데로 들어가게 한다.45)

이렇게 해서, “장액이 피와 섞여, 그 기운이 삼초경(三焦經)에 도달하도록 한다. 혈기(血氣)가 서로 교감하면 자연스레 효과를 본다. 절대로 손에 힘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살 속으로 깊이 찔러 피가 많이 나오면 도리어 장액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했다.46) 접종이 끝난 뒤 팔에 피가 약간 보이더라도 닦아내지 말고, 피가 마르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피를 닦다가 장액마저 닦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가 마르면 옷소매를 내리기만 하면 되는데, 다만 가급적 부드러운 천으로 된 옷을 사용하라고 했다.47)

이상과 같이 구희는 우두의 원리를 황안회와 마찬가지로 전통 의학을 동원해 해석하려고 했다. 우두가 토(土)의 성질이라는 이해한 점에서는 같지만, 황안회는 두창의 원인인 심화(心火)를 약화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구희는 같은 토에 해당하는 비장을 통해 태독(胎毒)을 끌어낸다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접종 부위인 상완(上腕)에서 협백혈 대신 소락ㆍ청냉연혈을 중시했고, 이는 우두의 작동 원리를 삼초경맥을 통해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서양종두론』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접종법을 훨씬 상세하게 기술했다는 차이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 이외에 『인두략』이 더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바로 우두국(牛痘局)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알려주었다는 점이다. 우두 접종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피접종자에게 접종하는 문제로만 끝나지 않았다. 구희는 『인두략』을 저술하기 이전에 이미 10여 년에 걸쳐 피어슨이 개설한 우두국에서 접종을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취득한 다양한 정보를 『인두략』에 기술함으로써 종두의와 더불어 우두 보급을 원하는 지식인 계층, 혹은 사회의 지도층에 영향을 크게 미칠 수 있었다.

2) 우두 보급을 위한 장치들

우두를 보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묘(痘苗)의 확보였다. 처음에는 필리핀을 통해 두묘를 들여왔지만, 접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미 접종받은 아이에게서 두묘를 채취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 방법은 이미 『종두기서』에서 제시되어 있었다. 즉 접종한 지 6일이 지나면 작은 수포(水疱)가 나오고, 점차 커지면서 9일이 되면 맑은 물과 같은 두장(痘漿)이 가득 찬다.48) 이때 작은 침으로 두장이 가득한 환부 인근에 3~4곳 작은 구멍을 내서 칼끝으로 두장을 묻혀 다른 사람에게 접종하는 것이다.49)

이렇게 얻은 두묘를 이용해 즉시 접종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문제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채취한 장액을 바로 접종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아 비녀에 두묘를 묻혀서 말린 다음에 거위 깃털로 만든 통에 넣고 밀랍으로 봉인하는 방법이 나왔는데, 이때에도 2개월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사용법은 두묘를 바른 상아 비녀를 꺼내서 따뜻한 물로 김을 쐬어서 부드럽게 하고, 피부를 절개한 접종 부위에 비녀를 잠시 꽂아 두었다가 빼내는 식이었다.50)

두묘를 확보하는 방식에 대해 황안회는 『서양종두론』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황안회가 직접 접종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사실 황안회가 주목한 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우두 원리에 대한 설명, 그리고 우두묘를 확보하기 위한 재정적인 문제의 해결방안 정도였다. 이와 다르게 구희는 『인두략』에서 접종의 기술적인 방법과 함께 두장을 확보하기 위한 우두국의 운영방식을 상세히 설명한다.

우두법<의 성패는> 오로지 두묘를 배양[養苗]하는 데 있다. 두묘는 서양에서 처음 왔는데, 그 후에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하여 연속되어 끊어지지 않는 것을 귀중하게 여겼다. 내가 이미 양행회관(洋行會館)에 우두국을 설치하여, 여름에는 8일을 1주기로 하고, 봄ㆍ가을ㆍ겨울 세 계절에는 9일을 1주기로 삼았다. 주기가 끝나면 다시 접종을 시작하는데, 접종하러 오는 때에 비바람이 있더라도 <일정을> 고치지 않았다. 그리고 양행(洋行)의 선한 일 하기를 좋아하는 여러 사람이 다시 금전을 내어 이자를 늘려, 4월부터 9월까지에 접종하러 오면 사례금[菓金]을 헤아려 장액을 제공한 사람에게 주었다. 사례금을 주었던 이유는 대개 한여름이나 장마철에는 평상시 깊이 신뢰하였던 사람도 <세속의 금기에> 많이 구애되어 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묘를 접종하지 않으면 장액을 얻을 데가 없고, 장액을 얻지 못하면 두묘를 이어갈 수 없다.51)

그는 사례금을 주는 방식으로 접종에 필요한 장액의 제공을 유인하고자 했는데, 덕분에 장액이 충분히 확보되면서 접종하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사람들이 금기를 많이 따졌던 한여름에도 두묘를 확보하는데 전혀 지장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52)

사례금을 주는 방식 외에도 두묘 채취가 두묘를 제공하는 아이에게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힘써 강조했다. 즉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수천, 수만의 아이에게서 시험했지만, 결코 두묘를 제공한 아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사례는 없었다고 했다. 아울러, “두창의 근심은 독(毒)에 있으니, 두장이 이미 가득 찼다면 이미 독이 전부 빠진 것이다. 올바로 채취한다면, 결코 장해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게는 손상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한데, 어찌 즐겨 하지 않겠는가?” 혹은 “좋은 방법이어서 사람을 구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여기에 있는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면, 나 역시도 기꺼이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해서, 두묘 제공의 무해(無害)함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53)

우두를 도입하여 우두국을 운영하려는 사람들에게 구희가 제공하는 정보는 유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역시 두묘를 확보할 방법을 고민해야 했을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구희는 자신이 경험한 남해양행의 운영방식을 소개함으로써 적절한 대응 수단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때 주의해야 하는 사항은 접종 이후 두장이 가득 차서 두묘의 채취가 가능한 시기를 정확하게 계산해 1주기를 설정하는 일이었다. 그다음에는 그 주기에 맞춰 사례금을 주고라도 두묘를 채취할 대상자들을 모아 다른 사람에게 접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두묘를 확보하여 전종하면서, 두묘를 확대하는 과정 중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즉 접종받은 아이에게 다른 질병, 특히 전염될 수 있는 감염병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를 소홀히 한 채로 두묘를 채취한다면 접종을 통해 오히려 다른 질병을 전염시킬 수도 있고, 접종으로 얻는 두묘의 확보가 사실상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종두기서』나 황안회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부분을 구희는 분명하게 파악했다.

그래서 접종할 때 접종받을 아이에게 피부병과 같은 질병이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같다. 그러나 광동[粵東]의 지세가 땅이 낮고 습하여서, 풍질(風疾)이 없던 적이 없었다. 종두하러 온 사람들이 <풍질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뒤섞여 잘못해서 <풍질이 있는 사람의> 장액(漿液)을 채취해 병이 없는 아이에게 전하여 큰 해가 될 것을 걱정했다. 이러한 사정을 양행(洋行)의 여러 사람에게 말하고, 양제원(養濟院)의 풍질을 아는 사람이 보증[具結] 문서[存案]를 갖고 기일이 되면 우두국에 와서 살펴보게 할 것을 담당 관리에게 청원하였다. 접종한 사람은 먼저 검사를 마친 연후에 <그에게서> 두묘를 채취하였는데, 저절로 잘못이 없어졌다.54)

특히 구희가 활동했던 지역인 광동은 풍질이 자주 발생했고, 우두 접종이 도리어 다른 질병의 전염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전통 의학에서는 질병을 발생시키는 외부적 요인으로 풍(風)ㆍ한(寒)ㆍ서(暑)ㆍ습(濕)ㆍ조(燥)ㆍ화(火)의 육기(六氣)를 들었는데, 풍질은 이 가운데 풍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피부 질환을 말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피부에 발진이 생기는 풍진(風疹)이나 습기와 결합한 풍열습진(風熱濕疹), 만성 피부 질환인 피부소양증(皮膚瘙癢症), 그리고 나병으로 알려진 풍나(風癩)도 있다. 피부병이나 발진성 질환의 전염을 막기 위해, 접종을 받고 1주기가 지나 두묘 채취의 대상자가 되면 양제원에 소속된 의원으로부터 보증서를 받아 지참하도록 했다.

이는 두묘의 변질이나 감염을 막으려는 방법으로, 두묘 채취 시기뿐 아니라 애초 접종할 때부터 피부병의 유무를 중시했다.

그 <우두 접종> 방법은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가능하다. 날씨[天氣]를 가리지 않으며, 길일[良辰]을 택하지 않으며, 바람을 피하지도 않고, 금기도 없으며,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어른ㆍ아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소아가 태어난 지 백 일이 지난 후, 지금 창나(瘡癩)ㆍ나력(瘰癧)ㆍ태독(胎毒) 및 피부병(皮膚病)ㆍ혈열병(血熱病)ㆍ감적(疳積) 등의 질병이 없으면, 아무 때나 접종해도 된다.55)

우두 접종에 특별한 금기가 없는 것이 장점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던 것과 달리 피부병의 여부는 접종자이건 두묘 제공자이건 양자 모두에게 중요한 검토 사항이었다. 여기에는 발진 질환, 피부병에 걸린 아이에게서 채취한 두묘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즉 접종대상자가 환자라면 접종으로 인해 처음의 질병이나 우두로 인한 증상이 악화할 수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두의 효력을 약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접종에 사용할 좋은 두묘[佳苗]를 선정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충분히 화농(化膿)이 되고 발진의 형태가 정상적이면서, 무엇보다 질병에 걸리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고 강조했다.56)

우두 보급 확대에 있어서 중요한 다른 문제는 두묘의 보관이었다. 접종받은 아이에게서 8~9일이 지나 화농(化膿) 상태에서 두묘를 채취하는데, 채취 시기에 따라 효과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너무 이르게 되면 인두(引痘)하는 힘이 없고, 기간이 지나서 장액이 오래되면 역시 성공할 수 없었다.57) 이와 마찬가지로 채취한 두묘 역시도 일정 기간이 지나게 되면 인두, 즉 두창의 예방 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래서 구희도 “신선한 장액을 채취하여 두묘를 접종한다면, 사람에게서 사람에게 전하는 방법은 정말로 좋지만, 다만 근처일 경우에만 시행할 수 있다”라고 말할 지경이었다.58)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미 『종두기서』에서도 장액을 건조해 보관하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이를 구희는 건묘법(乾苗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또 건묘법(乾苗法)이 있다. 상아(象牙)로 만든 작은 비녀 2개를 각각 장액이 가득한 아이의 두창 위에 대고, 두세 차례 적셔서 두창의 고름 응어리를 채취한다. 그것이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려 거위 깃촉[毛筒] 안에 넣고 밀납(蜜蠟)으로 밀봉하면 2~3일을 보관할 수 있다.59)

건묘법으로 확보된 두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과정이 필요했다. 먼저 물을 끓여서 수증기로 비녀에 말라붙은 두묘를 부드럽게 한 다음, 이를 칼로 깎아 모아 접종 부위의 벗겨진 피막 안으로 비녀를 넣어야 한다. 이때 비녀를 살살 움직여서 피부에서 피가 나오게 하고, 장액이 피와 함께 피부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식이었다.60) 그러나 건묘법에는 큰 단점이 존재했는데, 구희는 “다만 건묘<를 사용하면> 우두가 나올 때도 있고,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두엽(痘靨)을 사용하거나 선장(鮮漿)을 사용하면, 두창의 기운이 비교적 완전한 것과는 다르니, 자연스러운 이치다”라고 했다.61)

실패의 확률도 있는 데다가 그나마 보존이 가능한 기간이 2~3일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이 방법을 이용하더라도 우두의 전파과정은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광동에서 북경으로 보낸 건묘를 이용해 우두 접종에 성공했던 일은 정말로 천운(天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62) 도리어 여러 차례 건묘 전달에 실패하고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몇 명의 아이를 데리고 가면서 차례로 접종하고 두묘를 채취하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하는 경우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고 하겠다.63) 이제 두묘를 더 오래 보존할 방법의 개발이 필요했다.

이에 구희는 인두법(人痘法)에서 두묘로 사용하는 두가(痘痂) 이용 방식을 차용(借用)했다.

만약 먼 곳이어서 신선한 장액을 채취하기가 어렵다면 가묘(佳苗)의 딱지[靨]를 찾는 것【앞의 방법처럼 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릇에 담아 밀봉하고 몸 근처에 차고 있으면서 밤낮으로 떼어놓지 않으면 10일이나 보름 정도 유지할 수 있다. 만약 즉시 사용할 수 없으면, 두창이 발생하는 기일에 맞춰 딱지를 신선한 장액 위에 펴놓아서, 그 기운[氣息]이 더해지게 한다. 혹은 칼끝에 신선한 장액을 적셔서, 딱지의 등 부위를 문지르면 역시 좋다.64)

즉 우두 접종으로 생긴 두가(痘痂)를 보관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 효력이 약해질 즈음 신선한 두장에 적셔서 효력을 다시 회복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건묘는 사용 직전에 수증기로 부드럽게 했던 것과는 약간 다르게 모유를 사용해서 두가를 축축하게 만들어 사용하라고 했다.65) 다만 이런 방법으로 보존 기간을 얼마나 늘렸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희가 “이 방법은 특히 길이 멀어 신선한 장액을 채취하기 어려운 경우를 위해 말한 것”이라고 했으므로, 기간 연장의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렇다면 남해에서 북경까지 보낸 건묘도 사실 구희가 개발한 이 방법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구희는 우두 접종 이후에 나타나는 경과와 진두(眞痘)와 가두(假痘)의 구분법, 발열 등의 증상에 사용할 수 있는 처방들도 소개했다. 『종두기서』나 『서양종두론』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부분이 바로 접종에 따른 발진 이후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대처하기 위한 처방을 알려주었다는 점이다.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한 대비책이었지만, 대증(對症)에 따라 전통 의약을 적절하게 제시했기 때문에 활용도는 높았을 것이다.

구희는 10여 년에 걸쳐 우두 접종의 최일선에 있었다. 그 경험은 우두 보급이 단순히 접종 기술을 넘어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끔 했다. 두묘를 확보하기 위해 접종 주기를 정하고, 사례금으로 채취대상자를 유인하는 방식은 자신이 활동한 양행에서도 시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안전한 두묘 확보를 위해 피부병을 비롯한 전염병 감염의 여부를 확인했으며, 무엇보다 두묘의 보관 기간을 늘리는 방법도 제시했다. 또 접종으로 발생한 증상을 치료하기 위한 대책으로 상황에 따른 처방도 알려주었다.

구희의 『인두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삼초경맥을 이용하고, 남녀좌우라는 전통적인 인두법 방식에 따른 접종법 등을 제시한 사실이 전부는 아니었다. 실제로 우두 접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지식은 지금까지 살펴본 두묘의 확보 및 보관, 전염병 감염 여부의 확인 등의 세세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한 개인을 치료하는 일반적인 진료와 다르게 두창과 같은 전염병의 예방에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의사의 활약만으로 충족될 수 없다. 특히 별도로 두묘가 공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두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적인 이해가 필요했고, 그 요구를 『인두략』이 충족시키면서, 우두 보급을 원했던 사람들의 주의를 끌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4. 우두 전파과정과 우두 이해의 변화

1) 『인두략』의 중간(重刊)과 우두의 전파

구희는 『인두략』의 내용이 널리 전파되어, 많은 사람이 우두 접종을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인두략』의 가장 마지막 부분인 「출두후수지(出痘後須知)」, 즉 ‘우두 접종으로 수포가 발생한 이후에 알아야 하는 것’이라는 글의 끄트머리, 사실상 발문(跋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상의 각 조항은 모두 내가 직접 시험해 효과를 본 것이다. 접종했음에도 <우두의 농포(膿疱)가>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고, 나왔다면 안정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뒷날의 재앙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 나타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두창을 치료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던 일인데, 이제는 변하여 지극히 쉽게 되었으니, 하늘[上蒼]이 아이들을 아껴서 그렇게 한 뜻이 있지 않겠는가? … 증상에는 <치료가> 어렵거나 쉬운 <구분이> 있으며, 의사에게는 현우(賢愚) <의 차이>가 있어서 걱정스러움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누구라도 만약 그 두독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접종하여 빼내면, 돈 한 푼 들이지 않으며 조금도 놀라게 되지 않을 것이니, 얼마나 안심할 일이며,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바란다면 부모들이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며, 동지들이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큰 기대이며, 또한 부모들도 기대하는 바이다.66)

구희의 바람대로 『인두략』은 1817년 처음 간행된 이후로, 우두의 보급과 함께 계속해서 재간행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60~70여 회에 걸쳐 재간행되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인두략』의 본문과 함께 출판의 경위를 밝히는 서문이나 발문, 그밖에 우두의 보급 상황을 알려주는 다양한 글이 추가되었다. 즉 1817년 백란당(百蘭堂)에서 『인두략』이 처음 간행되었을 때는 온여괄(溫汝适)과 구희의 서문만이 있었지만, 이후 재간행되면서 여러 인물의 글이 다양하게 수록되었다. 대표적으로 북경에 우두를 전파한 증망안(曾望顔)이 1828년 작성한 서문은 1831년 백란당(百蘭堂) 판을 경업당(敬業堂)에서 간행한 판본을 비롯해 다양한 판본에 실려 있기도 하고, 그 외에 각 지방에서 간행된 판본에는 저마다의 상황을 기록한 글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만을 대상으로 분석하려는 이글에서 검토한 『인두략』의 판본은 대략 15종 정도로, 1817(1831)년 백란당, 1827년 규장재(奎光齋), 1831년 경업당(敬業堂), 1889년 세덕당(世德堂)에서 간행한 『인두략(引痘略)』, 1862년 삼원당(三元當)에서 간행한 『인두략(引痘畧)』, 1838년 보령당(保齡堂)과 1846년 일본 구원실(九畹室)에서 간행한 『인두신법전서(引痘新法全書)』, 1847년 숭덕당(崇德堂)에서 간행한 『인두략합편(引痘略合編)』, 1854년 전운재(篆雲齋)와 1874년 본립당(本立堂)에서 간행한 『인두신서(引痘新書)』, 1868년 유운선관(留雲仙館) 간행 『인두방서(引痘方書)』 등이며, 이외에도 간행처가 확인되지 않는 1899년 판본의 『인종보영우두방서(引種保嬰牛痘方書)』도 있다. 여기서 19세기 후반의 판본도 일부 검토하게 된 사정은 분석의 대상으로 하는 19세기 전반에 작성된 서문 등의 글을 포함하고 있는 판본이기 때문이며, 이 밖에 필자의 노력에도 미처 검토하지 못한 판본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밝혀둔다.67)

이들 판본에는 『인두략』의 본문에 해당하는 내용과 함께 여러 인물의 서문, 발문 등이 있어서 우두법의 전파 경로 및 보급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된다. 실제로 중국 내에서 우두의 전파과정을 탐구한 연구들은 대체로 『인두략』의 간행 상황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이미 1930년대에 저술된 『천화와 우두(天花與種痘)』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이루어진 연구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유지되고 있다.68) 분석을 위해 앞서 간행된 다양한 판본들에 실린 글을 연도별로 재구성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두략』에 실린 서문, 발문 등

Table 1. Prefaces, postscripts, etc. included in Yindoulue

서ㆍ발문은 글의 특성상 평가 부분에서는 때로 과장도 있지만,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중심으로 객관적인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 위의 글을 토대로 우두의 전파과정을 살펴보면, 처음 우두가 도입되어 접종이 이루어졌던 지역이 마카오였기 때문에 중국 내로 전파되는 과정 역시 마카오와 가까운 인근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1805년 『종두기서』를 출간한 정숭겸은 광동에 소재한 양행의 상인으로, 그의 지원 아래 마카오에 소재한 남해회관에서 종두의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인근 지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는데, 이미 복건에 있었던 안서공도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69)

1815년 『서양종두론』을 간행한 황안회와 1817년 『인두략』을 저술한 구희의 출신인 남해(南海)는 현재 행정구역으로 광동성 불산시(佛山市)의 남해구(南海區)로, 마카오와 함께 우두 보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지의 역할을 했다. 이후 1817년 처음 간행된 『인두략』에 서문을 쓴 온여괄은 순덕(順德) 사람이었는데, 순덕 역시 불산시의 일부인 순덕구(順德區) 지역이다. 남해와 순덕 지역을 포괄하는 불산시는 광주(廣州) 남쪽, 마카오에서 정북 쪽에 있는 도시로, 광주시 시할구이다. 따라서 마카오로 전해진 우두법이 가장 먼저 영향을 준 곳은 인근의 광동성 서남 지역이었다고 하겠다.

1817년 『인두략』이 처음 간행되고 난 이후, 현전하는 간행본을 정리한 보고에 따르면 1827년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에 소재했던 규광재(奎光齋)에서 간행한 것이 두 번째라고 말한다. 그러나 1821년 정조형의 글, 1824년 증조의 글이 있는 것을 보아, 1820~21년 사이와 1823~24년 사이에도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821년은 앞서 『서양두서』에 실린 주순희의 글, 즉 ‘차서자(此書者)’로 시작하는 글에서 우두서가 나온 시기로 특정한 때이기도 하다. 정조형의 글이 실린 것이 『서양두서』인지 별도 판본의 『인두략』인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정조형은 1810년대 말 광동 지역에 우두법이 널리 시행되고 있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강남(江南)에 있을 때, 유럽[歐羅巴]에 우두를 행하는 기술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가경(嘉慶) 23년(1818년), 남해(南海) 사람 나지포(羅芝圃)와 관청[節署]에서 만나 막역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기예(技藝)를 이야기하다 마침내 이 일(즉 우두법)에 이르게 되었고, 이어서 구호천(邱浩川)이라는 분이 이 기술을 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그의 저서와 당대의 이름난 공경대부[名公鉅卿]들이 지어 보낸 시문들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에 구(邱)군이 아이들을 살린 공로가 결코 작지 않음에 감탄하였다. (중략) 마침 내가 광동[粵東]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통지(通志, 광동 통지)』에서 그 일을 채택하여 잡록(雜錄)에 넣게 되었으므로 이에 서문을 쓰노라.70)

정조형은 우두법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상세한 내력을 알게 된 것은 『인두략』이 간행된 직후 남해의 인물인 나지포를 만난 뒤였다고 술회한다. 그를 통해서 구희의 저서인 『인두략』을 읽었는데, 이와 함께 당대의 공경대부들이 보낸 시문도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두 접종 이후 감사의 글을 모은 『인두제영(引痘題詠)』이 간행된 시기는 1823년인데, 정조형의 글에 따르면 『인두제영』과 같은 형식의 글이 이미 출판된 흔적을 볼 수 있다. 아마도 1813년에 완성했다고 하는 『천화신영(天花新詠)』으로 보이는데(董少新, 2007: 138), 이러한 글의 존재는 우두법에 대한 확신을 주는데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구희를 비롯한 종두의들이 우두를 접종하고 『인두략』이 간행되면서 광동 지역에는 우두가 널리 퍼져 나가자, 광동 지역을 중심에 두고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정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1827년 주순희가 쓴 「양두질의(洋痘質疑)」이다.

가경 원년(1796년)부터 외국인이 바다를 항해하여 광동[粤[에 이르니 이 법이 마침내 중국에 전해졌다. 10여 년이 지나 광동 유읍(乳邑) 출신의 요(廖) 씨가 기술을 익혀 돌아왔다. 우리 고을은 유읍과 이웃하여 그 기술이 매우 신묘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후에 이첨산(李瞻山) 선생이 <의사를> 초빙하여 시험해 보았는데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히 믿어 의심이 없지는 않았다. 다시 비묘(鼻苗, 인두법)를 하는 자에게 청하여 시험해 보게 하니, <우두를 맞은 아이는> 두창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에 다시 열도 나지 않았다. 이어 인척인 이목당(李牧堂)의 조카 또한 반복해서 시험해 보았으나 털끝만큼도 <두창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 역시 뒤이어 어린 자녀들에게 시험해 보았는데 모두 앞서와 같이 탈이 없었다. 그런 후에야 과연 양두(洋痘)의 기술이 속이지 않았음에 감탄하며 믿게 되었다!71)

우두가 처음 중국에 소개된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주순희는 유읍 출신의 요(廖, 廖鳳池, 필자) 씨가 우두를 익혔으며 우두의 효과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첨산(李翹楚, 필자)을 비롯한 사람들의 시험에다가 자기의 경험이 더해지자, 결국 우두의 효과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72) 대략 1810년 무렵 광동의 북부 지역이었던 유읍, 즉 현재의 소관시(韶關市) 서북쪽 유원(乳源)과 이웃하고 있던 주순희가 살던 지역에도 마찬가지로 우두가 소개되었다.

마카오에서 시작된 우두는 불산시를 거쳐, 광동의 북부인 소관시로 점차 알려졌다. 마카오가 중국의 최남단에 있었던 만큼, 지식 전파의 경로는 당연히 북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1831년 서문을 쓴 오진유(吳珍儒)의 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오진유는 일찍이 내과를 전공하여 종두에 밝았고, 20여 년이나 종두를 접종해오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1822년 겨울 청읍(淸邑)에 사는 친지가 가화현(嘉禾縣)의 이교초(李翹楚)를 초빙해 우두를 함을 처음 알게 되었고, 마침내 1823년 봄부터 형산(衡山)과 청읍에 우두가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73)

즉 광동성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던 북쪽의 호남성에 먼저 전파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광동과 가장 가까운 가화현에 전파되었다. 가화현은 현 호남성(湖南省) 남부 침주시(郴州市) 지역으로, 앞서 주순희가 우두 전파를 알린 소관시와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전파자는 유읍의 요봉지로부터 우두의 효과를 알게 된 이교초였으며, 그는 가화현보다 북쪽인 형산과 청읍 지역으로 우두를 전파했다. 가화현 북쪽에 있는 형산은 현재 호남성 형양시(衡陽市) 남악구(南岳區) 인근인데, 가화현과 장사의 중간 지점에 있는 지역이었다. 한편 청읍은 형산 주변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형산의 서북쪽에 있는 소양시(邵陽市) 소동현(邵東縣)이라고 한다. 그리고 윤작한을 통해 1828년에는 호남성 중앙 지역인 상담(湘潭)까지 퍼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74) 이상의 상황을 정리하면 1805년 우두 접종이 처음 시행된 이후, 1820년대까지 광동 지역에 널리 퍼지고, 북쪽으로 호남성 지역까지 우두 접종이 보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828년 우두 전파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광동성 향산(香山) 출신인 증망안(曾望顏, 1790~1870)의 노력으로, 우두가 북경에까지 전파된 것이다. 마카오에서 태어난 그는 1822년 과거에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지낸 인물로, 당시에는 강서도감찰어사(江西道監察御史), 강남도감찰어사(江南道監察御史) 등을 역임한 명사였다. 그는 북경의 두창 유행으로 발생한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이에 우두법을 전파하려고 나섰다.

우두법, 우리 광동[粤]에는 집마다 그 책이 있어 사람들은 그 기술을 이해했다. 어린아이들이 그것에 힘입어 안전할 수 있었던 사례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내가 북경[京師]에 갔을 때, 두창으로 몸이 상한 아이들이 항상 60~70%나 되는 것을 보자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동지들과 돈을 내서 경비로 삼아 우두를 가져오려고 했지만, 길이 7~8천 리나 되었다.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하려면 수십 명의 아이를 데리고 분주히 다녀야 하니 일이 정말로 어려웠다. 만약 여러 지역을 거쳐 전종(傳種)하면서 차례로 나아가려고 해도, 외성(外省)에서는 들은 적이 없어서 사람들의 믿음을 얻기가 어려웠다. 이에 <집에 있던> 그 책을 열람하니, 이른바 건묘(乾苗)를 전하는 방법이 있었다. 제군(制軍) 이록평(李鹿坪) 선생과 오상운(伍商雲)에게 편지를 보냈다. 모두 자리를 바꾸었으나, 책의 방법대로 건묘를 채취하여, 역마(驛馬) 편으로 도착한 것이 금년 봄 3월 19일이다. 함께 붙인 것이 도착하였는데, 상운이 보낸 잠장(簪漿)은 서양의 우두장(牛痘漿) 중에서 얻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아이들에게 법대로 종두[引種] 하고서, 다음으로 외부에 전달했다. 즉시 효과를 보지 못한 적이 없었다.75)

이때 가장 어려운 일은 어떻게 두묘를 확보하는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광동에서 북경까지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많은 아이를 데리고서 arm-to-arm 방식인 전종으로 두묘를 가져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 우두가 널리 인식되지 못한 상태에서, 인접 마을 간의 전파로 전달하기란 요원한 일이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구희가 『인두략』에서 설명한 건묘법(乾苗法)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건묘의 실패 가능성이 있는데도, 다행히 오상운으로부터 전달받은 건묘는 효과가 있었다.76) 이제 우두가 남부 지역을 벗어나 중국의 중심이라고 할 북경에 전파되었고, 우두 지식이 급격하게 확대될 가능성이 열렸다. 정치와 행정, 경제의 중심인 북경에서의 우두 소식은 곧 널리 알려졌다.

증망안은 두묘를 확보하자, 북경 미시아통(米市衙衕)에 있던 남해회관(南海會館)에 우두국을 세워 본격적으로 우두 접종을 시작했다.77) 그리고 『인두략』을 교정하고, 책의 앞부분에 1805년 정숭겸(鄭崇謙)이 쓴 ‘번역이의원설(繙繹夷醫原說)’을 붙여서 책을 간행했다고 한다. 해당 서문이 실린 1831년 판본에는 같은 내용으로 제목만 다른 「양의종우두원설(洋醫種牛痘原說)」이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증망안의 글이 1828년에 쓰였다는 점에서, 1828년에 『인두략』이 간행되었는지 아니면 1831년에 가서야 간행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참고로 같은 해인 1828년에 보전(莆田) 사람 곽상선(郭尙先)이 쓴 글은 증망안의 기록과 연결되는 사실로 보아,78) 아마도 1828년에 별도로 책이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경에서의 우두 접종으로, 이제 우두의 전파 경로는 두 가지 길로 확장되었다. 하나는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파로, 이는 주로 인근 지역을 경유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북경을 통한 경로로, 그 전달자들은 관료 생활 등으로 북경에서 체류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1820년대 후반 시작되어 1830년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우선 광동을 시작점으로 하는 인근 지역으로의 전파 경로를 살펴보자. 앞서 1831년에 쓴 오진유의 글을 통해서 광동을 넘어 북쪽으로 호남성 지역까지 우두가 보급된 사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는 다르게 1831년 10월에 작성된 안서공(顏叙功)의 기록은 광동의 동쪽인 복건 지역에 우두가 전파된 과정을 보여준다. 남해 인물이었던 안서공이 1803년부터 복건[閩]에 머물게 되었는데, 1805년 고향 남해에서 우두 접종이 널리 행해지고 두창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 것이 계기였다.79)

몇 년 뒤에 방문한 조카들에게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상태였다.80) 그러다가 1828년 광동에 갔다가 직접 보고 듣는 경험을 하면서, 우두법을 확실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당시 광동의 상황을 “어린아이[嫛婗]가 있는 집치고 우두의 보호에 의지하지 않는 집이 없었다. 두창 유행은 듣지 못했고, 코에 접종하는 방법(인두법, 필자) 또한 폐지되어 있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우두가 보편화된 상황이었다.81) 이에 복건 지역에도 우두를 전파하려고 했지만, 시간만 허비했다. 그러다 1830년 봄에 두창이 유행하여 큰 피해가 발생하는 상황이 벌어지자,82) 재차 우두의 도입을 시도했다.

이에 한두 동지들과 상의하여 온갖 방책을 짜내고 돈을 마련하여 훌륭한 스승을 초빙하기로 했다. 마침 광동[粵]에서 가장 먼저 그 기술을 전수한 분이 구호천(邱浩川) 선생이었는데 우리 집 형제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선생을 복건[閩]으로 모시고자 했으나 선생은 집안일로 인해 직접 오지 못하고, 대신 제자인 진벽산(陳碧山)을 보냈다. 처음에는 건묘(乾苗)를 가지고 복건에 들어와 접종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여러 차례 왕복하며 고생을 겪은 끝에, 다시 많은 돈을 들여 유모[乳婦]들을 고용하고 어린아이들을 등에 업게 하여 길을 따라 차례로 <아이의 팔에서 팔로> 접종하며 왔다. 마침내 올봄 정월 16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에 도착하였다. 고위 관리[大憲]부터 거부[巨室]들까지 믿고 행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0개월이 지나 수백 명을 시험해 보았는데 손을 대는 대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음이 없었다.83)

구희를 초빙하려던 계획과는 달리 그 제자인 진벽산을 맞아들였는데 처음에는 접종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가 가져온 건묘가 효과가 없었던 까닭이었는데, 몇 차례 걸쳐서 시도했지만 결국 두묘 확보에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유모를 고용해 아이들을 데리고 가, 길을 오면서 차례로 접종하면서 두묘를 가져오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노력의 결과 1831년 정월 복건에 두묘를 들여와서 접종을 시작했고, 10개월 동안 수백 명에게 접종했다고 전한다. 안서공이 쓴 글에서는 두묘의 확보가 쉽지 않았고, 『인두략』에 소개된 건묘법의 채용으로도 완전한 효과가 있는 두묘를 얻는 일이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복건 지역은 그나마 광동에서 아주 먼 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구희를 초빙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마침내 그 제자인 진벽산을 통해 우두 기술을 전수받았으며, 몇 번에 걸친 건묘의 실패에도 몇 아이들을 동원해서 두묘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 지역은 이러한 기대가 어려웠음을 남경(南京) 일대에 우두가 보급되는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831년 고여(古畬)가 기록한 글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동[粵東]에서 북경[都門]에까지 <우두를> 깊이 믿고 힘써 행하고 있으나, 그외에는 서적만 겨우 간행되었을 뿐이다. 남경[金陵]에서는 아직 <우두를> 행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 전파되는 것이 넓지 못하고 행해지는 곳 또한 멀리까지 미치지 못해서, 좋은 법이 결국 묻혀버릴까 진실로 애석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다시 번각(翻刻)하여 인쇄해서, 널리 전하려고 한다. 아울러 사방의 선(善)을 좋아하는 군자들이 북경[都中]에서 국(局)을 설치해서 접종하는 여러 방법을 조사하고, 그것을 좇아서 실행하기를 바란다.84)

해당 글을 지은 고여는 한강(邗江) 지역 인물로 표현되어 있는데, 한강은 현재 강소성(江蘇省) 양주시(揚州市) 인근으로 남경과 가까운 지역이다. 고여의 묘사에 따르면 1830년 정도까지 광동과 북경 정도에 우두가 널리 행해지고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에는 『인두략』이 간행되어 지식이 알려진 수준에 그쳤다. 그는 남경에도 우두가 보급되기를 희망하면서, 우두국의 설치와 운영 등을 북경의 예에 따라 실행하면 좋겠다는 구상을 했다. 북경에서 우두를 접종했던 남해회관에서는 분명히 『인두략』에서 제시된 운영방침을 따랐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상세한 내용을 조사해서 실행하자는 의견이었다. 우두의 전파에는 접종 기술 외에도 우두국을 운영할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한 숙지가 필요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남경에 우두법이 전해지고 『인두략』이 간행된 사실은 같은 해 장원(章沅)이 쓴 글로도 확인된다. 그는 현재 남경시 강녕구(江寧宁區) 말릉가도(秣陵街道) 일대에 해당하는 말릉(秣陵) 사람이었다. 장원은 1828년 북경에 있을 때 우두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믿지 않았지만, 광동 사람인 증탁여(曾卓如)를 찾아가 문의하면서 점차 확신을 갖게 되었다. 증탁여는 앞서 1828년 북경에 우두를 전한 증망안이었므로,85) 증탁여가 보여주었다는 베껴 쓴 십여 페이지의 우두서는 『인두략』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장원은 자기 아들에게 종두할 정도로 확신하게 되었고,86) 무엇보다 두묘가 떨어진 겨울에 두창이 유행했지만 접종받은 아이에게 두창이 생기지 않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87) 이를 통해 우두법의 탁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88)

한편 남경에 우두가 알려지자 인근에도 전파되었으며, 장강(長江)을 끼고 교통로가 원활했던 안휘(安徽)와 나아가 사천(四川)까지도 우두가 전파되었다(內政部衛生署, 1932). 이러한 사실은 『인두방서』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1868년 당도(當塗) 황안민(黃安敏)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두를 접종하고자 했으나 그 전수법을 얻지 못했고 두종(痘種)도 없었다. 이후 유양(維揚)에 머물며 장사(長沙)의 양후생(楊煦生) 스승께 학업을 여쭈었다. 당시 스승님은 도문의공(陶文毅公)의 초빙을 받아 한상(邗上) 포씨(包氏)의 제안당(濟安堂)에 머물고 계셨는데, 그곳에서 아침저녁으로 모시며 배울 수 있었다. 이어 무읍(蕪邑)의 풍비의창(豐備義倉)에 국(局)을 설치하여 접종을 시행할 때, 집안의 큰할아버지[伯祖]이신 근민공(勤敏公)의 명으로 고향에 돌아가 10년 동안 그 일을 도왔다. 당도(當塗) 현령인 황오운(黃五雲), 계진숙(季晉叔) 두 분 또한 유지[紳董]들과 힘을 합쳐 잇달아 국을 설치하고 나에게 그 일을 겸하여 맡겼다.89)

당도(當塗)는 현재 안휘성(安徽省) 마안산시(馬鞍山市) 지역으로, 황안민은 우두를 배우기 위해 현재 강소성(江蘇省) 양주시(揚州市) 지역인 유양(維揚)으로 가서 양후생(楊煦生)에게서 학습했다. 1820년대 호남 지역에 우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던 상황을 고려할 때, 장사의 인물인 양후생도 그때 우두 접종에 종사했던 인물로 보인다. 양후생은 당시 정치가로 알려졌던 문의공(文毅公) 도주(陶澍, 1779~1839)90)의 초빙으로, 유양 인근 한상(邗上)91)에 있는 포씨 가문에서 사람들에게 우두를 가르치고 있었다.

학업을 마친 황안민은 현재 안휘성 무호(蕪湖)인 무읍(蕪邑)으로 와서 우두국을 설립하고 운영하다가, 큰할아버지 근민공 황월(黃鉞, 1750~1841)92)의 부름으로 고향인 당도 지역에서 다시 우두국을 경영했다. 1838년 황안민의 큰할아버지인 황월이 쓴 「중간우두신서소인(重刊牛痘新書小引)」에서 1838년이 우두국을 설치한 지가 3년이라고 했으므로,93) 황안민이 유양에서 우두를 학습한 시기는 대략 1835년 무렵으로 보인다. 황안민이 우두를 배울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1830년대 초반 남경에 우두가 소개되고, 그 소식이 안휘의 당도까지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우두의 전파는 마카오에서 처음 접종이 시작된 이후에 광동 지역으로 확대되고, 점차 광동과 인접한 호남과 이어서 복건으로 넓어져 갔다. 이와 함께 1828년 북경에 전파된 이후에는 북경을 경유해서 각 지역으로 다시 전해지는 다른 경로도 마련되었다. 1830년대 초반까지 두 경로를 통해 우두는 확대되어 갔지만, 그렇다고 중국 전역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며 한편으로 여전히 전통 신앙에 기대어 두창을 모면하려는 의식도 여전했다. 무엇보다 이후 중국 내의 정치적ㆍ사회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도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850~1864)이었다.

대략 전란(태평천국의 난, 필자)이 일어난 이래 지금까지 10년 동안 유리걸식하며 떠도느라 이 의술은 오랫동안 도외시되었고, 그 판각들도 모두 흩어져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뜻밖에 동치(同治) 원년(1862년) 봄, 상해에서 바다를 건너오다 이하하(裏下河) 일대에 두장[漿]이 아직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았으니 참으로 뜻밖의 기쁨이었다.94)

안휘에서 우두를 접종하던 황안민이 쓴 1868년의 기록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접종이 사실상 끊어지게 된 사정을 말하고 있었다. 우두묘를 장기간 보존하거나 새로운 우두묘를 제작할 방법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10여 년에 걸친 전란은 사실상 우두의 지속성을 저해하는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나마 그가 1862년 상해 인근 이하하(裏下河)에서 우두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2) 우두의 정당화와 인식의 변화

1817년 간행된 『인두략』에 실린 구희와 온여괄의 서문, 1821년 정조형(鄭兆珩)의 서문에서는 우두가 이미 광동지역에 널리 퍼져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힘주어 주장했다. 다만 우두를 접종한 사람들은 두창이 유행하는 시기에 두창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밝히는 수준이었으므로, 앞서 우두 전파과정에서 처음부터 그 효과를 바로 믿지 못했다는 사례가 다수라는 점에서 진위를 의심받는 때도 종종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인두략』이 계속해서 중간되는 과정에 번번이 등장하는 이러한 단순 경험보다 명쾌한 설명이 필요했다.

이른 시기라고 할 1824년에 작성된 남해의 증조(曾釗)가 쓴 글은 당시 우두 보급에 의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과 함께, 우두가 두창 예방에 효과가 있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는 먼저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의심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새로운 지식인 우두에 대한 의심을 거둘 것을 말했다.

예로부터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도 그 시작에 어찌 기이하고 창조적이지 않았던 적이 있겠는가? 식견이 있는 자는 이를 알아보고, <식견이> 얕은 선비들은 이를 의심한다. 같은 고을의 구희[邱君]는 우두로 당대에 이름을 알렸는데, 우두는 서양[紅夸]에서 온 것으로, 전세(前世)에는 없던 것이니 이른바 기이하고 창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자녀 두 명에게 우두를 <접종해서> 시험했는데,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재발하지 않았다. 무릇 전후로 시험해 본 자들이 모두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 일(즉 우두)은 당연한데도, 사람들이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이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95)

이제는 확정된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사실 처음부터 용인된 것이 아니라, 의심받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확고하게 인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우두의 효능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우두의 수용 여부는 효과를 인정하기에 앞서 새로운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어떤가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한편 종두의 방법이 효과가 있는 까닭은 선천(先天)의 독을 끌어내기 때문임을 여러 예를 통해 설명하기도 했다. 즉 불이 났을 때, 번지지 않게 하려면 옆집 지붕을 거둔다거나 혹은 둑이 터지려면 한편으로 수문을 내서 물이 나가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마찬가지로 태독 끌어내기 위해 피부를 째서 종두하는 것도 같은 이치라는 설명을 제시한다.96) 그러므로 인두법에서 코를 통해 태독을 빼내는 방법과 하등의 차이가 없을 뿐인데, 다만 사람들이 인두법을 믿고 우두법을 의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두법이 생소한 것처럼 인두법도 처음에는 마찬가지로 생소했을 텐데, 우두법을 의심한다면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처럼 적절하지 않다는 발언이었다.97)

증조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마찬가지로 서양의 지식이 근대문물의 발전을 이끈 것처럼 발달해 있음을 상기시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1827년 중간된 『서양두서』에 실린 주순희의 「양두질의(洋痘質疑)」가 그것이다. 호남(湖南) 의장(宜章) 인물인 주순희는 본래 종두의였는데, 글의 마지막에 30여 년이나 종두를 시행하지 않았으나 우두의 효과를 알리기 위해서 쓴 것임을 밝히고 있다.98)

그는 서양에서 전래한 우두법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의 전략을 구사했으며, 이는 이후에 쓰인 여러 글에서 핵심 논거로 작동했다. 첫 번째가 바로 서양의 우수한 기술력이었다. 그가 예시로 든 것은 역법(曆法)과 율려(律呂), 그리고 누구나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명종과 같은 시계, 구리줄로 만든 현악기 종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어린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우두만이 괴이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요지였다.99)

이러한 기술은 서양의 학문이 중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서양 학문의 발전이 우두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는 서양에서 학문을 매우 정교하게 다루며, 대학과 중학, 소학 등의 학교에서 학문을 하고, 특히 대학에는 핵심 학과로 의과, 정치학과, 교육, 도과(道科, 신학)를 체계적으로 공부한다고 설명했다.100)

의과를 자세히 보면, 의과에는 내과와 외과, 성인과 소아의 구분은 없다. 분명하게 장부도[臟圖ㆍ腑圖], 맥도(脈圖), 근육 해부도[筋解圖], 경락과 영위도[經絡ㆍ營衛圖]가 있다. 대개 인체 관절의 오묘한 것을 그림으로 분명하게 하였고, 증세에 임해서는 색을 보고, 터럭을 보며, 소리를 듣고, 형태를 모사(模寫)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이 있다. 진맥에도 육도(六度)와 구후(九候), 오기(五氣)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해외의 신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이 미처 듣지 못한 것일 뿐이다. 우두법[洋痘]은 의학의 여기(餘技)일 뿐이다.101)

그러면서 서양의 우두를 시기하고 기롱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했다.102) 우두가 가지는 장점은 두창의 예방뿐만 아니라, 예후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즉 인두는 아이가 몸이 약하면 크게 열이 나고 해수(咳嗽)와 구갈(口渴)이 있으며, 무엇보다 발두(發痘)가 많아서 생명이 위급해지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우두는 평상시와 같아서 밥도 잘 먹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해로우며 어떤 것이 이로운지는 명확하다는 것이다.103)

그는 사람들이 우두는 거짓이고, 인두가 진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혈(氣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104) 즉 그는 전통 의학의 기혈론을 갖고 우두와 인두에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천기(天氣)를 받아들이는 폐와 연결된 코로 접종하는 인두법은 기(氣)에 속하고, 우두는 팔에 접종하는 것이라 혈(血)에 속한다. 그런데 의학에서 기와 혈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서로 유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105) 그리고 태독을 끌어내는 방식의 차이도 주목한다. 즉 인두는 코를 통해 오장을 두루 돌면서 나오기에 여러 증상이 생기지만, 우두는 명문(命門)에 잠복한 태독을 끌어낼 두독을 바로 침투시키기 때문이라고 이해한 것이다106)

두 번째로 제시한 방법은 접종 이후 두창에 걸리지 않았다는 경험을 단순하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목전(目前)에서 확인시키는 방법이었다. 원래 주순희가 우두법을 알게 된 계기는 인근 지역인 유읍(乳邑)107)에서 활동한 요봉지(廖鳳池)가 우두를 배워온 사건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두의 효과를 믿지 않았는데, 이교초(李翹楚)를 통해 시험한 결과를 보고 믿게 되었다.108) 이것이 특별한 사례인 이유는 의도를 갖고 우두의 효과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며, 게다가 반복적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 없이 완전하게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인두 접종[鼻苗痘]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을 불러 <우두 접종한 아이에게 인두 접종을> 시험하였는데, 단지 두창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에서 열(熱)도 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인척인 이목당(李牧堂)의 질녀가 있어서 다시 반복해서 시험하였는데, 조금도 두창이 나오지 않았다. 나 또한 뒤따라 딸아이에게 시험했는데, 전처럼 무고(無恙)하였다. 그런 연후에 우두(牛痘)라는 기술이 과연 사람을 속이지 않았음에 탄식하였다. 믿을지어다.109)

우두 접종 이후 시일을 두고 재차 인두를 접종하는 방법은 며칠 만에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매우 컸다. 우두의 효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자주 등장했는데, 1834년 나여금(羅如錦)이 쓴 「인두명변(引痘明辨)」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나여금 역시 의학을 공부하고 두과(痘科)를 전공했지만, 많은 실패를 경험한 인물이었다.110) 그는 요봉지와의 만남을 계기로 우두를 접하게 되었는데, 요봉지는 앞서 주순희가 언급한 유읍에서 우두 접종으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나여금이 우두의 효능을 확신하게 된 과정은 주순희와 유사했다. 그 역시 처음에는 반신반의(半信半疑)했지만,111) 반복적인 시험 즉 인두와 우두의 복수 접종을 통해서 우두가 두창을 예방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 과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집안에서 두창을 앓지 않았던 사람에게 우두를 접종했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이미 우두를 앓았던 사람에게 접종하니, 두창의 종기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우두를 접종한 사람에게 <인두로> 코에 접종했더니 <수포가> 나오지 않았다. 반복해서 여러 번 시험했고는, 의심 없이 믿게 되었다.112)

우두 접종에 이은 인두 접종이라는 일련의 시험적인 방식을 나여금도 똑같이 실행한 것이다. 이 방법을 주순희가 창안한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지만, 글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우두에 대한 확신을 끌어낼 수 있었던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두에 확신을 갖게 된 나여금은 둘을 비교하면서 사실상 인두나 우두는 별 차이가 없다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즉 6일 만에 열이 나서 9일째에 열이 사라지고 약간의 상흔이 남는 인두의 순증(順證)과 비교해,113) 우두에서는 열과 고통이 없고 3일 만에 접종받은 팔에만 약간의 두(痘)가 나오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114) 그리고 주순희와 마찬가지로 인두는 기분(氣分)으로 가고 우두는 혈분(血分)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속도와 예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사실상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훨씬 낫다[萬全]고 말했다.115)

한편 주순희가 마지막으로 언급한 것은 우두 접종의 가격, 즉 이익 추구와 관련된 문제였다. 마카오의 양행(洋行)에서 우두국을 개설해 접종하지만, 그들은 모리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116) 미처 언급하지 않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즉 양행의 행위가 선한 의지에서 나왔다는 것과 접종에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117) 게다가 인두의 경우 두창 감염으로 인한 치료의 비용이 발생할 수 있지만, 우두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인두에 비해 훨씬 저렴한 우두의 비용은 큰 경쟁력이었고,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하층민에게 우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데에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상 주순희가 변론하고자 했던 문제는 주로 우두의 두창 예방 효과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제기된 다른 의문은 우두의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가와 관련되었다. 즉 인두를 시행하는 종두의를 중심으로 우두를 하면 나중에 다시 두창이 걸린다는 주장, 즉 복출(復出)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실 두창이 다시 나온다는 의심은 오래되었고,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의심이었다.

1831년 「견신양두설(堅信洋痘說)」을 쓴 상담(湘潭) 출신 여광서(黎光曙)는 그 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서양식 종두법[種洋痘一法]이라는 방법이 있는데, 바람을 피할 필요도 없고 입[口]을 막을 필요도 없으며, 시술 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만에 하나도 실패할 일이 없다. 이 얼마나 좋은 방법인가. 하지만 어째서 널리 퍼지지 못하는가. 사람들이 굳게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양식 종두법[洋痘]을 맞고도 다시 두창[天行痘]에 걸릴까 두려워한다. 광동에서 이 방법이 시행된 지 30년이 되었고, 광동 사람들은 모두 이 방법을 좋다고 말하며, 다시 두창에 걸린 사람은 아직 없다고 한다.118)

이어서 그는 광동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두창이 난 경우는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상담 지역에서 접종한 이들도 마찬가지였음을 상기시킨다.119) 나아가 “우두를 하면 10년 뒤에 반드시 두창에 걸린다”라는 소문을 듣고, 그렇다면 10년마다 우두를 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대답한다.120) 어차피 우두는 안전하니, 10년마다 접종해서 죽을 때까지 두창을 피하면 된다는 논리다.

우두를 접종한 지 시간이 흘러도 예방의 효과가 있어서 두창 유행 시기를 무사히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을 넘어, 이 문제를 두고 본격적으로 고민한 이는 지금의 호북성 지역인 초북(楚北) 출신 당원량(唐源亮)이었다. 1830년에 작성된 「복출해(復出解)」에서, 당원량은 과거의 경험상 두창에 감염될 염려가 없음을 분명하게 전한다.

호천(浩川) 선생이 우두(牛痘) 접종을 창시하여 영아[嬰孩]들을 보전한 것은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아는 바이다. 나[亮]는 임오년(1822년) 가을부터 광동[粵]에서 노닌 지 이제 9년이 되었는데, 친히 그 일을 목격하니 접종한 자가 모두 10여만 명에 달했으나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손을 대는 대로 사람을 살려내니 그 공적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오직 두창이 유행하는 시기를 만나 천백 명 중 우연히 한두 명이 다시 <두창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치를 모르는 무리는 곧 그 기술을 믿기 어렵다고 의심한다.121)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의심하는 까닭은 우두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우두 접종에도 두창이 발생하는 이유로 크게 네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는 우두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까닭에 접종해야 할 혈인 소락혈ㆍ청냉연혈에 제대로 접종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둘째로 사용한 두묘인 장액이 좋지 않아서 태독이 전부 배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접종으로 발생한 수포가 진짜 우두가 아니었거나 혹은 고름이 충분히 차지 않아 태독이 전부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며, 넷째로 위의 세 가지가 적절하게 되었음에도 선천적으로 태독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2) 특히 네 번째의 경우처럼 태독이 강하다면 두창이 유행할 시기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므로, 우두 접종이 더욱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두창이 태독 때문에 발생한다는 이론에 따르면, 우두를 통해 태독이 일정하게 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혹여 나중에 재차 발생하더라도 그 위험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123)

우두 접종 이후에도 두창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접종의 실수, 두묘의 불량 등도 주요 원인이지만, 면역 효과의 불완전성으로 우두의 재접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동아시아에 알려진 시기는 19세기 후반이었다. 유럽에서도 19세기 중반까지 통계적인 접근을 통해 재접종의 필요성을 차츰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124) 그런데 두창의 예방 원리로서 태독의 배출을 제시하는 논리에서, 복출(復出)의 발생과 원인에 대한 추정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복출의 원인이 정확한 혈에 접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우두가 갖는 미세한 약점인 면역의 불완전함을 상쇄할 수 있는 구실이기에 우두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었으면서, 동시에 『인두략』이 제시하는 혈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는 순환논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두에 대한 경험적 이해가 확대되고, 나아가 그 효과를 목전의 시험으로 확인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단순한 경험을 넘어 의도된 경험, 즉 우두 접종 이후에 인두를 재차 접종해서 우두의 효과를 확인한다는 발상은 파격적이었다. 애초에 제너가 우두의 효과를 사람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 고안한 방법이지만, 그것은 중국의 우두 전파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두략』이 중국의 전통 의학을 동원해서 우두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상태에서, 이를 확신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두 재접종을 통해서 불신을 극복하는 방식은 이전까지 전통 의학에서 실행되었던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 의학에는 음양오행론이나 기혈론, 장상론(臟象論) 등의 이론 외에도, 임상적으로 축적된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전통 의학의 경험과 이론화 과정은 우두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일정한 조건인 인두 재접종을 취하는 방식의 시험과는 분명히 다르다. 우두처럼 극적인 상황이 전개된다거나 보편적인 효과를 얻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같은 이유로 인두 재접종은 의학을 둘러싼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여지가 있었다.

적은 사례를 들어서 변화의 양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우두를 두고 황안회가 ‘저 오랑캐[鬼子]’의 지식이라고 말했던 것과 달리 1827년 주순희는 주목할 표현을 남겼다.

언어와 풍교(風教), 물산(物産)과 기술은 그들이 처한 지역<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글로 써서 전부 기록할 수 없다. 요체는 그것에 이익이 있고 해로움이 없는지를 살펴서 믿는 데 있을 따름이다. 서양의 우두술은 방법이 간편하고 거두는 효과가 빠르니 상법[常]이지, 괴이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찌해서 이를 하지 않는가?125)

주순희는 우두가 “상야비괴야(常也非怪也)”라고 단언한다. 이는 결국 서양 혹은 서양의 학문이 ‘오랑캐의 것’ 내지는 ‘괴이한 것’이 아니며, 선택은 ‘언어와 풍교’ 같은 문화적인 차이가 아니라 해당 기술이 갖는 ‘이해(利害)’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결국 의학-과학과 기술-은 그들이 지켜온 문화라는 고유성이 아니라 현재에 주는 이해관계, 현실적 명증성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전반 우두의 보급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서양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5. 맺음말

1805년 피어슨이 마카오로 운반된 우두 백신을 중국인들에게 접종하면서, 중국에서 최초의 우두 접종이 시작되었다. 정숭겸의 후원 아래 피어슨은 중국에서 최초의 우두서인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를 출간하는 한편, 네 명의 중국인 양휘, 구희, 장요, 담국에게 종두법을 전수했다. 특히 구희는 『인두략』을 저술해서 중국 전역에 우두를 알리는 데 성공했고, 1817년 처음 간행된 이후 19세기 내내 수십 차례 간행될 정도로 『인두략』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러나 19세기 전반 시기를 국한해서 본다면, 우두법이 전파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소개된 지역이 중국의 최남단 지역이었으며, 따라서 그곳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영역을 넓혀가며 전파되는 과정은 더뎠다. 이때 우두 보급의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구희가 쓴 『인두략』이었다. 물론 『인두략』 이전에 『종두기서』나 『서양종두론』이 있었지만, 『인두략』은 우두가 퍼지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의 해결책을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뒀다.

구희가 창안했다고 평가받는 전통 의학의 이론을 이용한 우두의 해석은 『서양종두론』의 시도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황안회가 두창의 원인을 심화에 두었던 것과 다르게 구희는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태독에 주목하면서, 더 많은 동의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두략』에서 제시한 우두국의 운영법, 즉 두묘 채취를 위한 접종의 주기 설정 및 사례금 운영, 두묘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감염병의 차단을 제시한 점, 그리고 두묘의 보관법을 개선하여 보관 기간을 늘린 점 등도 『인두략』이 그토록 널리 이용된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우두의 보급 과정은 『인두략』의 중간(重刊)과도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인두략』의 여러 판본에 실린 서ㆍ발문 등을 분석하면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1828년 무렵 북경에 우두가 전해진 것은 우두 보급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광동을 거점으로 북쪽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의 전파 이외에, 그것과 함께 북경을 시발점으로 하는 전파도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특히 광동이 중국 최남단의 벽지였지만, 북경은 청나라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의 중심이었기에 파급력은 더욱 컸다.

둘째로 『인두략』, 그리고 우두의 보급 과정에서 서양의 기술을 판단하는 근거가 원리적 근거를 중시하는 문화의 측면에서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결과를 중시하는 형태로 인식의 변화가 감지된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여전히 태독설을 토대로 두창의 발생을 설명하고 우두의 작용 논리를 찾았지만, 근저에는 무엇보다 서양에서 전해진 우두가 분명하게 예방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는 서양과 중국, 근대와 전통이 기묘하게 얽힌 관계를 형성하였고, 이는 19세기 전반 중국이 직면한 역사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형국이었다.

구희가 쓴 『인두략』은 적은 분량의 의서이지만, 그것이 중국 사회에 미친 파급력은 매우 컸다. 단순히 우두법을 널리 알렸다는 사실 이외에도, 우두법을 처음 발견한 서양을 다시 인식하게 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황안회가 『서양종두론』에서 썼던 ‘오랑캐[鬼子]’라는 표현을 우두와 관련하여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으며, 수십 차례 재간행된 『인두략』에 실린 구희의 서문에서 밝힌 사실, 즉 우두가 영국의 의사 제너에 의해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인두략』만큼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Notes

1)

張嘉鳳은 『全國中醫圖書館聯合目錄』(1991)에서 62종의 『인두략』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지만(張嘉鳳, 2007: 769), 최근의 연구(李计筹ㆍ郭强, 2024: 91)에서는 『中国中医古籍总目』 (上海辞书出版社, 2007)를 근거로 76개의 판본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출판 시기의 하한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수 있고, 새로운 판본이 발견될 수 있어서 이러한 수치는 매우 유동적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두략』의 출판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2)

이러한 점에서 우두 보급에 광동 행상(行商)의 역할을 규명한 박기수의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朴基水, 2013).

3)

중국에서의 우두법 전파는 다음의 연구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다(조정은, 2018). 구희는 우두 접종에 참여한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인두략』을 편찬했으므로, 저술은 늦게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10년 사이에 구희가 우두서 편찬과 관련한 행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재 상황에서, 황안회의 『서양두서』 편찬이 큰 자극이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대신 10년간의 경험은 『인두략』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는데, 이러한 내용은 뒤에서 자세하게 서술한다.

4)

『인두략』의 본문 첫 편은 「인두설(引痘說)」인데, 특이하게도 『서양두서』에는 편의 제목이 「인두설」 대신 「서양두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두략』과 일치한다. 장지아펑은 주순희의 글을 근거로 『서양두서』가 『인두략』의 원형으로, 1817년 『인두략』의 이름으로 간행하기 이전 1815년에 『서양두서』라는 이름으로 처음 간행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을 전제로 구희가 처음에는 ‘서양두(西洋痘)’에서 ‘인두(引痘)’로 명칭의 변화를 꾀함으로써, 1815~17년 사이에 내지화(內地化) 즉 중국화의 방식을 취했다고 결론을 내린다(張嘉鳳, 2007: 788-789). 이러한 주장은 1815년 판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추정이며,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5)

『西洋痘書』, “此書, 自嘉慶乙亥年新鐫, 其論說與藥方, 尙未全修, 丁丑年畧增數條, 猶未盡善, 至道光辛巳, 繼出一帙, 未免詳後略前, 今將三次所刊, 彙成一冊, 公諸同志, 恐有遺漏, 咎在傳書之人, 熙亦無可如何也, 道光丁亥年重刊”

6)

본 글에서 제시하는 <그림 1>에 따르면 『인두략』보다는 『서양두서』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821년 간행되었을 때, 구희와 온여괄의 서문에 정조형의 서문이 추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순희는 1821년 간행된 책은 뒷부분이 상세하고 앞부분은 소략한 단점이 있다고 했는데, 실물을 확인하지 못한 까닭에 평가의 이유를 현재로서 파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7)

장지아펑이 1815년 『서양두서』가 나왔다고 주장한 데에는 황안회의 『서양종두론』과 상관없이 구희가 독자적으로 전통 의학적 해석을 일찍부터 구상했다고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8)

이하 황안회의 『서양종두론』의 분석 가운데 일부는 장지아펑의 연구와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 가령 우두의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나, 두창 원인으로 『내경』을 인용한 심화(心火) 제시, 우두가 갖는 효과를 소의 토(土) 성질에서 찾는 등의 내용인데, 필요에 따라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9)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嘉慶十年, 西洋咭唎船載痘種, 並其國醫咭拿, 自呂宋航海至粵, 爲人種痘.” 우두의 개발 및 중국 전파를 서술하는 것은 『종두기서』 이후 하나의 전통처럼 굳어졌다. 다만 『서양종두론』에서 영국인 의사 제너[咭拿]가 마치 필리핀에서 마카오로 온 것처럼 기술한 대목은 분명한 오류이다.

10)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據伊書所載, 國醫咭拿, 憫出痘之多災, 見養牲之家獨不出痘, 審視其牛身起藍泡, 疑其爲痘, 挑取其漿, 用小刀剔起小兒兩臂中央之皮, 以牛痘之漿裝入於內, 旋出一顆, 又將其漿輪流遞種, 百發百中, 永不再出云云”

11)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但查伊書只圖繪種法, 而未確指出其源, 故於初種之時, 人見其與吹鼻異, 多疑以爲怪, 而不知殊非怪也, 彼鬼子特未發明其所以然耳”

12)

두창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은 20세기 이후이다. 1906년 엔리케 파스헨(Enrique Paschen, 1860~1936)이 광학현미경으로 천연두 바이러스의 미세한 입자(Paschen bodies)를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했으며, 1940년대에 이르러서야 전자현미경으로 두창바이러스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13)

가령 명나라 왕긍당(王肯堂)의 『유과증치준승(幼科證治准繩)』, 장개빈(張介賓)의 『경악전서(景嶽全書)』 등에서 두창이 상세하게 설명되었고, 이후 청대에서는 인두법의 보급과 함께 두창 전문 의서의 출판도 활발했다. 대표하는 서적으로 오겸(吳謙) 등이 펴낸 『의종금감(醫宗金鑑)』, 장염(張琰)의 『종두신서(種痘新書)』 등이 있다(邓铁涛, 2006: 194-203). 특히 정약용(丁若鏞)은 『마과회통(麻科會通)』에서 19세기 초반까지 두창에 관련된 다양한 논의를 고증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정리하고 있다(김호, 1996).

14)

황안회는 태독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태독설의 관점을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痘瘡之起, 由來遠矣, 或云自周, 或云自漢, 然總不越乎氤氲化醇, 搆精結胎時, 先天之邪火, 邪火伏於臟腑, 感天時, 則發沿門挨戶, 故曰天行”; “夫人不生於空桑, 自不免乎出痘.” 즉 두창은 태아가 형성될 때 받은 선천의 사화(邪火)가 장부에 잠복해 있다가 발생하는 것으로, 사람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때 선천의 사화라는 말은 사실상 태독과 다름없다.

15)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前人出大智慧, 創爲種痘之法, 預貯痘痂之純淨堅厚者, 研而爲麵, 于天行未起, 和風甘雨之時, 擇嬰兒之無疾病, 瘡疥疳積等症者, 以紙筒裝痂末, 吹其鼻內, 或用銀簪, 剔取鮮漿, 藏諸鼻中, 令其氣息, 透入於肺, 同類相招, 因而洩發”

16)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前人出大智慧, 創爲種痘之法 … 十存其九, 法至善也, 然不能保其萬全者, 因肺開竅於鼻, 肺爲華蓋, 朝百脉而覆臟腑, 氣一感之, 則五臟六腑之火, 一齊进發, 毒有淺深, 痘有疎密, 偶一失調, 故間有不救耳, 非種之之過也”

17)

정약용은 『마과회통』에서 이러한 방법을 『의종금감』과 『종두신서』를 근거로 잘 설명하고 있다. 『與猶堂全書』 7集 集醫學集, 6卷 麻科會通, 種痘要旨, 「下種」.

18)

인두법은 사실상 두창을 앓는 것인데, 다만 두창을 약하게 앓는다고 이해하면 좋다. 따라서 만약 두가의 독성이 강하거나 혹은 접종받은 사람의 면역이 약한 경우 두창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수도 있다. 황안회는 인두를 접종하는 종두의를 두고, 두각을 나타내는 자라도 옛것만을 고수하는 소와 양의 눈을 가진 존재나 책에만 얽매인 자벌레 등으로 묘사한다.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矌觀乎天花盛行之時, 其闇昧無識, 貪財嗜利, 粧模作樣, 草管人命而不知罪孽者無論矣, 卽或淺嘗輒效, 徼倖成功, 世所稱漸然見頭角者, 亦不過牛羊之眼, 恪守師傳, 旣不能因人變化, 而虄屈之虫, 專泥成書, 又不能隨地迁移”

19)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乃得萬全之法也, 而西洋種痘之法, 眞萬全之法矣”

20)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夫西洋之法, 亦猶之乎吹鼻之法耳也, 而巧則過之, 何也, 吹鼻之法, 由肺引入, 挑臂之法, 亦由肺引入, 但吹鼻則觸動五臟六腑之火, 故出痘或多, 挑臂則於兩臂之中, 獨取夾白微微動處之穴, 剔起裝漿, 經絡皮毛俱屬於肺, 而夾白一穴又兼入於心, 內經云, 諸痛瘡瘍, 俱屬於心, 痘爲先天邪火, 伏之於心, 彼巧莫巧於單刀直入, 獨提出先天一點心火, 而餘經不動, 此所以獨出一顆, 而奏萬全之效也, 其用西牛之痘爲種者何, 以牛性屬土, 毒逢土則解, 借牛之土性, 以解痘之火毒耳”

21)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余恐日後轉相傳授, 差之毫釐, 謬之千里, 訛以傳訛, 必至復出, 遂譁然謂種法荒謬而置之不議, 則辜負慈航救世之苦心, 爲大可惜矣”

22)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若不從微微動處點定下針, 偏左偏右, 稍遠夾白之穴, 則不獨不能提出先天心火, 而痘不出, 即出後亦復發, 此非種法之差也, 特其下手種痘時之謬耳”

23)

재귀우두법(再歸牛痘法, Retro-vaccination)은 우두를 접종받은 사람에게서 채취한 두장을 다시 소에게 접종하여 두장을 배양하는 방법이다. 여러 차례 사람을 거치면서 전종(傳種)하면 우두의 활성(活性)이 급격히 약화되는데, 이를 피하는 한편 전종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의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 중국에서 재귀우두법이 시행된 것은 복건(福建) 소무(邵武) 사람인 등류(鄧旒)에 의해서라고 하는데, 지식의 근원은 알 수 없다고 한다(조정은, 2023: 6).

24)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茲有力之家, 各捐菓金以留其種, 洵菩提甘露遍滴人間也, 能留其種固佳, 倘萬一失傳, 千萬里遠隔重洋, 又何能一時飛渡耶”

25)

醫者意也에 대한 의미는 별도의 연구가 있을 정도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의사가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정도로 해석한다.

26)

『西洋痘書』 「西洋種痘論」, “顧思醫者意也, 牛之種可以種人, 人之種亦可以種牛, 當天行之時, 擇痘痂之純淨堅厚者, 研而爲面, 如人吹鼻種痘之法, 以種無病少壯之牛, 得牛之種, 則可以轉而種人, 似亦無不可也”

27)

『引痘略』 「引痘說」, “痘爲小兒一大病”

28)

『引痘略』 「序」, “嬰兒之患天花, 十損二三, 甚者不存五六”

29)

『引痘略』 「序」, “宋以來始有取痘苗, 絮於鼻孔一法, 後人效之, 可謂善於所感, 事捷而功鉅矣, 然猶失十一於百千, 未能操券而十全也”

30)

『引痘略』 「序」, “牛痘之理, 原包種痘, 諸法之中, 雖種之法, 有不同, 而其爲善方, 引導於外, 則一也”

31)

풍질(瘋疾)은 두통이나 정신 장애로 인하여 말과 행동이 병적인 상태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특히 풍라(風癩)를 의미한다. 풍라는 통상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을 뜻하며, 풍질(風疾), 대풍(大風), 대풍라(大風癩) 등으로 불렸다.

32)

『引痘略』 「引痘說」, “痘何以曰牛也, 痘之種自牛來也, 外洋向無此疾, 後由他處傳染, 患亦滋多, 惟畜牛取乳之家, 獨不沾染, 醫人欲窮其故, 見牛乳傍有靑藍小疱, 形與痘類, 因悟牛之患痘必輕, 以之傳人, 必然無害, 於是按古針刺法, 取牛痘之漿, 種人兩臂消樂ㆍ靑冷淵二穴, 旬日果於所刺之處, 隨出數顆, 按日灌水, 按日滿漿, 按日結痂ㆍ落靨, 無一損傷, 無一復出”

33)

『引痘略』 「引痘說」, “蓋牛士畜也, 人之脾屬土, 以土引土, 同氣相感, 同類相生, 故能取效, 若此痘種自牛而來, 故曰牛痘也”

34)

『引痘略』 「引痘說」, “正痘有發熱, 卽現點者, 最險之症, 腎經之毒也, 由腎而肝, 而心, 而肺, 而脾, 傳經旣多, 其症亦遞減, 故痘之發毒, 腎最重脾最輕”

35)

『引痘略』 「引痘說」, “按古痘苗塞鼻孔法, 亦必五臟傳徧, 始能發熱, 緣鼻者, 肺之外竅也, 苗塞鼻中, 其氣先傳於肺, 肺主皮毛, 肺傳於心, 心主血脈, 心傳於脾, 脾主肌肉, 脾傳於肝, 肝主筋, 肝傳於腎, 腎主骨, 痘毒藏骨髓之內, 感苗氣而發, 其毒自骨髓盡達於筋, 腎藏之毒解矣, 自筋盡達於肌肉, 肝藏之毒解矣, 自肌肉盡達於血脈, 脾藏之毒解矣, 自血脈盡達於皮毛, 心臟之毒解矣, 自皮毛盡達於顆粒, 肺藏之毒解矣, 苗氣必歷五臟層遞而入, 內毒亦必歷五臟層遞而出, 此傳送之次序也”

36)

장염(張琰)은 명나라 때의 의사이다.

37)

『引痘略』 「引痘說」, “金鑑所謂, 引其毒於未發之先者, 卽此意, 張遜玉種痘新書所謂, 以佳苗而引胎毒, 斯毒不橫, 而症自順者, 亦此意, 故凡種痘, 皆用引法, 而引毒從皮毛ㆍ血脈ㆍ肌肉ㆍ筋骨同時而出, 則牛痘爲最捷也”

38)

『醫宗金鑑』 卷60, 編輯幼科種痘心法要旨, 「調攝」, “種痘之在調攝最爲緊要, 自始至終, 不可稍忽, 如避寒熱愼飮食是也”

39)

『醫宗金鑑』 卷60, 編輯幼科種痘心法要旨, 「調攝」.

40)

『引痘略』 「引痘說」, “今牛痘則止種四顆, 或六顆, 小兒嬉笑飮食, 一切如常旬日之外, 告厥成功, 無災無害”

41)

『引痘略』 「引痘說」, “不惟小兒省却疾苦, 卽育子者亦省却憂勞, 法誠善也.” 이처럼 우두 접종 이후 별다른 부작용이 없으며, 예후가 좋다는 것은 이미 『종두기서』에서도 밝힌 내용이었지만 피접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재차 강조했다.

42)

『引痘略』 「引痘說」, “今種牛痘法, 擇於兩臂中, 消爍ㆍ淸冷淵二穴, 上下交連之處種之, 似與塞鼻孔法有異殊, 不知人身兩臂, 乃手少陽三焦經也, 三焦者, 人身最關要之俯, 如天地之三元, 總領五臟ㆍ六腑ㆍ營衛ㆍ經絡, 通內外ㆍ左右ㆍ上下之氣, 三焦通, 則內外ㆍ左右ㆍ上下皆通, 得其關要之處引之, 直從皮毛ㆍ血脈ㆍ肌肉ㆍ筋絡, 同時直傳而入, 使縱有胎毒深藏於腎, 亦自然同時引挈而出, 如引路然引諸坦途, 則無顚躓之患, 如引絲然引其端緖, 則無棼亂之憂”

43)

『引痘略』 「引泄法」, “其法不論春夏秋冬, 隨時皆可, 不揀天氣, 不擇良辰, 不避風, 不禁忌, 不分男女, 不拘大小, 自小兒生百日後, 但現在無瘡癩無瘰癧無胎毒, 及皮膚ㆍ血熱ㆍ疳積諸疾病, 便可隨時引種”

44)

『引痘略』 「引泄法」, “種時, 孩童衣衫兩袖, 捲貼膊上, 用小繩二, 前後各一, 橫穿兩袖, 結束緊緊 【令兩臂露出, 雖寒天不忌】, 男先左, 女先右, 種痘者左手執定孩童之臂, 勿令伸縮, 右手將刀尖點取佳苗, 向兩臂消爍淸冷淵穴, 每臂每穴, 各種一顆, 如孩童年至八九歲以上, 日啗腥膩五味, 恐或有後天之毒, 則於兩穴上下相連之處, 中間更各種一顆, 不宜出四顆, 六顆數外”

45)

『引痘略』 「引泄法」, “其刺法, 用刀不宜直竪, 宜輕巧將點苗, 刀尖輕輕平刺皮膜, 如一紙之薄, 刺處約寬一分, 以微見血爲度, 將刀尖之, 漿輾轉抆拭, 同其微血注于所刺穴中”

46)

『引痘略』 「引泄法」, “其氣達于三焦之經, 血氣相感, 自然取效, 斷不宜手重, 恐深刺入肉, 出血畧多, 反將苗漿帶去”

47)

『引痘略』 「引泄法」, “如法種畢, 其兩臂微血, 勿被衣衫拭去【如拭去可將漿補種原處】, 侯血點旣乾, 徐將衣袖垂下, 不必用紬包裹束扎, 反令血氣不行, 貼身之衣, 宜用柔軟絲紬, 若衣服漿洗粗硬者, 恐致擦損”

48)

『咭唎國新出種痘奇書』, “如種下四日, 其形發紅, 至六日起一小疱, 八日其疱畧大些, 頂平不尖, 中央一點硬的, 週圍漲如淸水, 根脚如有紅線圍纏, 覺有些疼, 至九日漿已滿足, 若取痘漿種於別人, 務以第九日爲度”

49)

『咭唎國新出種痘奇書』, “如取種之法, 以鮮痘漿卽時傳種更妙, 可將鐵小針, 向其痘相近邊傍處, 刺三四小吼, 俟有些漿水流出, 沾在小刀尖上, 卽可種於別人”

50)

『咭唎國新出種痘奇書』, “若離隔遠涉, 難取鮮漿, 可將象牙小簪沾些痘漿, 俟乾了藏於鵝毛筒內, 用蜜蠟封固, 可能留至兩個月之內, 如過期斷斷不能用矣, 務宜於兩月之内, 早種爲佳, 臨種之時, 於毛筒内取出象牙小簪, 用煖水熏潤, 先將鐵扁針刺破皮膜, 然後將牙小簪上之痘種, 挿入刺破皮膜處”

51)

『引痘略』 「首在留養苗漿」, “牛痘法, 全在養苗, 此苗始自外洋, 嗣後以人傳人, 貴乎連綿不絕, 予旣於洋行會館設局, 夏月以八日爲一期, 春秋冬三季以九日爲一期, 周而復始, 來種者風雨勿改, 而洋行好善諸公, 復醵金生息, 四月至九月, 來種者, 酌以菓金與取漿之人, 其所以設菓金者, 蓋當盛夏溽暑之時, 卽平日深信者, 亦多拘執而不肯來, 痘不種則漿無從取, 漿不取則苗無以繼”

52)

『引痘略』 「首在留養苗漿」, “今旣設菓金, 俾來者孩童旣獲安全, 而貧乏亦不無小補, 於是種痘者源源而來, 而佳苗乃綿綿弗絕, 行之旣久, 人咸知牛痘之法, 雖盛暑亦無礙也”

53)

『引痘略』 「出痘後須知」, “問取鮮漿時, 於取漿之小兒有妨礙否, 曰予已試騐諸千萬人, 俱未見其有妨礙也, 其所以疑有妨礙者, 緣種痘之人, 見有好痘, 揑破痘漿, 盜以作種, 其取漿之時, 或手力太重, 或揑入太深, 或漿未灌滿, 而取之非其時, 或筋脉有關, 而取之非其處, 如是則或致有礙耳, 若牛痘之法, 則不然, 俟其八九日, 灌漿滿足, 輕輕點取, 於己無損, 於人有益, 何樂而不爲乎, 蓋痘之患在毒, 痘漿旣滿, 則毒已盡泄, 取之得法, 斷然無礙, 且予之行此, 亦不過以善方濟人耳, 若損此而益彼, 卽予亦不肯爲也”

54)

『引痘略』 「次在認識瘋疾」, “父母愛子之心, 人人皆同, 粵東地勢卑濕, 不無瘋疾, 來求種痘者, 恐一同混雜, 誤取其漿, 傳之無疾小兒, 爲害不淺, 以此告知洋行諸公, 呈請有司, 派令養濟院認識瘋疾之人, 具結存案, 逢期到局伺候, 凡來種者, 先令驗過, 然後取苗, 自無貽誤”

55)

『引痘略』 「引泄法」, “其法不論春夏秋冬, 隨時皆可, 不揀天氣, 不擇良辰, 不避風, 不禁忌, 不分男女, 不拘大小, 自小兒生百日後, 但現在無瘡癩無瘰癧無胎毒, 及皮膚ㆍ血熱ㆍ疳積諸疾病, 便可隨時引種”

56)

『引痘略』 「引泄法」, “擇其痘頂不尖, 脚不斜, 不皺, 不黃, 不暗, 不破, 要如紅線圍纒, 收束緊實, 色若珍珠寶光者, 又察此童現在無瘡癩ㆍ瘰癧ㆍ胎毒ㆍ皮膚ㆍ血熱ㆍ疳積疾病等症者, 是謂佳苗”

57)

『引痘略』 「引泄法」, “牛痘灌漿滿足, 總在八九日, 故種痘之期, 大都以八九日爲率【太早則漿無力, 遲則漿老無功】”

58)

『引痘略』 「度苗法」, “按期取鮮漿種痘, 以人傳人固妙, 但祇可施之近處”

59)

『引痘略』 「度苗法」, “又有乾苗法, 將象牙小簪二枝, 各就滿漿之孩童痘上, 兩三次沾取痘凝, 俟其乾了, 藏于鵝毛筒內, 用蠟密封, 可留三兩日”

60)

『引痘略』 「度苗法」, “用時取備淸水一碗煎滚, 以牙簪在滚水氣上熏潤, 互相刮浮其槳, 推聚于簪尖上, 卽用刀如前法, 刺破孩童皮膜, 隨將簪插入所破皮膜孔裏, 輾轉略爲搖動, 得其微血, 洗此槳於肌膚內, 亦可, 或將有漿之簪插入滾水內, 立卽提起, 搖去滚水, 如法用之”

61)

『引痘略』 「度苗法」, “但乾苗有引出, 有引不出者, 不如用痘靨, 更不如用鮮漿, 得氣較全, 自然之理也”

62)

『引痘略』(1831), 「序(曾望顔, 1828)」.

63)

『引痘略』(1831), 「序(顔叙功, 1831)」.

64)

『引痘略』 「度苗法」, “按期取鮮漿種痘, 以人傳人固妙, 但祇可施之近處, 若遠處難取鮮漿, 可尋佳苗之靨【如前式者】, 礶藏密封, 帶在身旁, 日夜不離, 可以留十日半月, 倘不能卽用, 逢痘期之日, 將其靨背鋪在鮮漿之上, 使其氣息沾潤, 或用刀尖沾鮮漿, 抹過靨背亦可”

65)

『引痘略』 「度苗法」, “凡用靨時, 取備人乳少許, 將刀尖刮取靨中之肉【卽痘痂向肉一面膿所結成者】, 放於磁器面上, 以人乳滴入, 令其濕潤, 然後用刀尖研刮乳漿, 照法剌于臂上, 此特爲路遠不能取鮮漿者而言, 卽痘靨亦可取效”

66)

『引痘略』 「出痘後須知」, “以上各條, 皆予所親試而立效者, 引無不出, 出無不住, 不患後災, 不憂復發, 以醫痘至難之事, 今變而爲至易, 莫非上蒼愛憐赤子, 有意使然, 夫父母之于子, 未有不欲其以生以長以至成人, 願聽其自出天花, 症有險易, 醫有賢愚, 懸懸莫必, 孰若趁其毒之未發, 引而出之, 不費一錢, 不受一嚇, 何等放心, 何等快意耶, 所願爲父母者, 深信勿疑, 同志者, 廣爲傳布, 此則予之厚望, 亦凡爲父母者, 所厚望也夫”

67)

1817년 처음 나온 백란당판 『인두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1831년에 재차 백란당에서 간행한 판본을 토대로 추정했을 때, 당시에는 본문 이외에 구희와 온여괄의 서문만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서양두서』를 검토하면서 1821년에 간행되었다고 주순희가 말한 판본도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 세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판본의 확인과 함께 원자료의 확보가 필요하다.

68)

內政府衛生署, 『天花與種痘』 內政府衛生署, 1932, 7-8쪽. 현대의 연구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마찬가지이며, 다음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董少新, 2007; 张秀丽ㆍ李紫慧, 2025; 廖育群, 1988).

69)

『引痘略』(1831), 「序(顔叙功, 1831)」, “余於嘉慶癸亥, 需次來閩, 閱二年, 卽聞吾鄕有以牛痘種臂之術行世, 而能萬全無悞, 勿藥有喜, 心竊奇之, 而未之信”

70)

『引痘略』(1831), 「序(鄭兆珩1821)」, “余在江南, 聞歐羅巴, 有牛痘行術, 而不得其詳焉, 嘉慶二十三年, 與南海羅君芝圃, 遇於節署成, 莫逆交談藝之次, 遂及此事, 因知有邱君浩川者, 傳此術,并得讀其書, 及當代名公鉅卿投贈之作, 於是歎邱君活幼之功, 非淺鮮矣 … 時方從事於粵東, 通志乃採其事入雜錄而爲之序”

71)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自嘉慶元年, 外洋人航海至粤, 此法遂傳於中國, 逾十餘年, 粵之乳邑出水岩廖某者, 得術以歸, 吾宜與乳比鄰, 聞其術甚神, 初未之信, 後得李瞻山先生, 延而試之果騐, 然猶未盡信無疑也, 復請業鼻苗痘者試之, 不但無痘, 卽身亦不復熱矣, 繼又有姻親李牧堂之姪, 亦反覆相試, 毫無發露, 僕亦隨試于小兒女, 悉如前無恙, 然後嘆洋痘之術之果不欺人也, 信矣哉”

72)

이상의 내용은 『인두략』의 전파와 관련하여 몇 차례 언급된 대표적 사례이다(张秀丽ㆍ李紫慧, 2025: 28). 이외에도 안서공, 증망안과 관련된 내용도 일부 소개되어 있다.

73)

『引痘新法全書』(1838), 「識(吳珍儒, 1831)」.

74)

『引痘新法全書』(1838), 「序(尹作翰, 1831)」.

75)

『引痘略』(1831), 「序(曾望顔, 1828)」“牛痘之法, 吾粤家有其書, 人解其術, 嬰兒賴以安全者, 不可勝旣, 予來京師, 見孩童傷於痘者, 十恒六七, 心焉憫之, 思與同人, 醵金爲經費, 傳牛痘來者, 然路且七八千里, 欲以人傳人, 携數十童子, 奔走道路, 事固甚難, 卽欲隨地傳種, 以次遞進, 而外省向所未聞, 亦難必人心之信, 因閱其書, 有所謂傳乾苗法者, 乃札致制軍李鹿坪先生, 暨伍商雲都轉屬, 其如法取 乾苗, 由驛而致, 果於今春三月十有九日, 俱寄至而商雲, 所寄之簪漿云, 是西洋牛痘漿, 最難得者, 遂將小兒軰, 依法引種, 次弟傳之於外, 無不立效”

76)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때 오상운이 보내온 두장은 『인두략』에서 제시한 새로운 방법, 즉 두가를 두장에 적신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증망안이 잠장(簪漿)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77)

미시아통(米市衙衕)은 현재 북경시 서성구(西城區, 과거 선무구(宣武區) 채시구(菜市口) 인근 지역이다. 한편 남해회관은 과거 선무구 미시후통(米市胡同) 43호였으며, 1824년 건립되었다. 특히 청말 정치가이자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가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증망안이 남해 출신이어서 남해회관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우두에 익숙한 남해 지역 인물들이 다수 있어서 운영에 편리함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78)

『引痘略』(1831), 「跋(郭尙先, 1828)」, “痘重病也, 自牛痘種, 自異域, 傳至粵東, 粵東遂無以痘夭者, 徒以道遠, 不能傳至都, 都下人, 日兢兢焉, 以痘爲慮, 香山曾卓, 如太史閔之寓, 書粵中, 傳牛痘漿, 於象牙簪上, 以來種焉, 而驗旣驗, 則思廣其傳, 因設種痘局”

79)

『引痘略』(1831), 「序(顔叙功, 1831)」, “余於嘉慶癸亥, 需次來閩, 閱二年, 卽聞吾鄕有以牛痘種臂之術行世, 而能萬全無悞, 勿藥有喜, 心竊奇之而未之信”

80)

『引痘略』(1831), 「序(顔叙功, 1831)」, “又數年姪兒女輩來, 知皆曾試, 其術絕無所苦, 厥後里人之來遊者, 益咸稱牛痘之妙無異辭, 如是者有年, 心竊是之而信猶未篤也”

81)

『引痘略』(1831), 「序(顔叙功, 1831)」, “迨道光戊子, 奉差回粵目之所染, 耳之所濡, 盖凡家有嫛婗, 莫不仰資懷保而天行之痘, 無聞種鼻之方, 亦廢於是, 益信其術神其功鉅”

82)

『引痘略』(1831), 「序(顔叙功, 1831)」, “是事余心任之, 思廣其術於閩中, 已非一日, 顧力棉有待,坐致蹉跎, 庚寅春, 福郡盛出天花, 良醫束手, 童穉生存, 什不四五, 慘聞駭見, 寔切攖心”

83)

『引痘略』(1831), 「序(顔叙功, 1831)」, “爱是, 商之一二同志, 百計張羅, 歸聘良師, 適粵中最先傳其術者, 爲邱浩川先生, 與余家昆季交善, 欲聘來閩, 而先生以家事不果行, 乃命其徒陳碧山, 始以乾苗入閩佈種, 不驗, 往返數次, 辛苦備嘗, 復以多金僱募乳婦, 襁負幼童, 沿途遞種, 遲至今春正月十有六日, 方到省垣, 凡大憲巨室, 莫不信行已, 閱十月, 歷試數百人無不應手而效”

84)

『引痘新書』(1874), 「序(古畬, 1831)」, “惟是自粵東都門, 篤信力行, 外書僅刊布, 金陵亦未聞, 更有行之者, 傳旣不廣行, 復不遠, 良法終湮, 誠爲可惜, 用是重爲翻刻刷印, 冀廣其傳, 并望四方好善君子, 查照都中設局, 引種諸法, 踵而行之”

85)

『淸稗類鈔』, 幕僚類, 「文宗垂詢劉樹森」, “咸豐中, 曾卓如中丞望顏入覲, 文宗曾以劉名垂詢及之” 함풍(咸豐) 연간에 중승(中丞)이었던 탁여(卓如) 증망안(曾望顔)이 황제를 알현했을 때, 문종 즉 함풍제가 유수삼(劉樹森)이라는 인물을 물어보았다는 기사이다. 탁여가 증망안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86)

『引痘新書』(1874), 「序(章沅, 1831)」, “戊子春, 余在京師, 聞牛痘之說, 未之信也, 往問粵東, 曾君卓如, 見其所抄牛痘書十數頁, 語極詳悉, 遂免曾君爲余子試種, 兩臂上各出一粒, 若行其所無事也, 嗣是聞風而起漿以傳漿種出者, 不下萬兒, 皆無一失”

87)

『引痘新書』(1874), 「序(章沅, 1831)」, “至冬寒, 漿斷而天行大盛, 殤者無算, 其曾種牛痘之兒, 竟無一再出, 而羅此厄者, 嘻異矣”

88)

『引痘新書』(1874), 「序(章沅, 1831)」, “夫痘至險也, 而牛痘則至夷, 種痘甚勞也, 而種牛痘, 則甚逸, 育嬰之道, 就大於是敢不自述所幸, 以告天下之誠求保赤者”

89)

『引痘方書』(1868), 「序(黃安敏, 1868)」, “欲種牛痘, 不得其傳, 且無其種, 後客維揚, 因問業於長沙楊煦生師, 是時, 師應陶文毅公聘, 延至邗上包氏濟安堂, 中朝夕獲追隨焉, 嗣蕪邑豐備義倉設局施種, 家伯祖勤敏公命歸鄕里, 襄其事者十年, 當塗邑侯黃五雲, 季晉叔二公, 亦會同紳董相繼設局, 屬余兼司其事”

90)

도주(陶澍)는 청말의 정치인으로, 안휘포정사(安徽布政使), 양강총독(兩江總督) 등을 지냈다.

91)

중국 강소성 양주시(揚州市) 한강구(邗江區) 일대로, 현재의 한상가도(邗上街道)라고 한다.

92)

황월(黃鉞)은 청말 정치인으로, 『청사고(淸史稿)』에 전기가 있다.

93)

『引痘方書』(1868), 「重刊牛痘新書小引(黃鉞, 1838)」, “今自設局, 已來三年於玆, 余家男女孫曾九人, 及所識親友, 大江南北, 不下數千餘人, 經所謂十全爲上者, 牛痘是矣” 여기서 대강(大江)은 장강(長江)을 의미하며, 글이 작성된 도광(道光) 무술년은 1838년이다. 따라서 1835년에 우두국이 설립된 이후, 장강 인근 지역에서 수천 명에게 접종이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94)

『引痘方書』(1868), 「序(黃安敏, 1868)」, “槪自兵燹以來, 十載於茲, 流離瑣尾, 此術久已置之度外, 其板均散佚無存, 不意於同治紀元春, 由上海渡洋, 見裏下河一帶, 其漿猶有存者, 實出望外, 東亭楊君小谷, 挽余爲邑人引種, 迨今亦種至數千百人”

95)

『引痘略』(1831) 「跋(曾釗, 1824)」, “自古至常之事, 其始曷嘗不奇創, 識者知之, 淺士疑焉, 同邑邱君, 以牛痘聞於時, 牛痘來自紅夸, 前世無有, 殆所謂奇創者非耶, 余兒女子二人, 試其術, 迄今幾十年不再, 凡前後試者, 無不同然, 然則其事亦可以爲常矣, 然而人猶不能不疑者, 未思其理也”

96)

『引痘略』(1831) 「跋(曾釗, 1824)」, “今夫火, 天下之烈者也, 燎原焚庌, 勢將蔓延, 及䟽瓦發苫, 灾不旁及, 今夫水, 天下之衝激者也, 隄之坊之, 決則襄野, 若穴防竇堤, 隨孔而瀉, 遂不旁決, 何則, 氣有所洩也, 牛痘之術, 剔膚解腠其理, 亦若是已矣, 且痘者, 先天毒也, 毒無形而有氣, 氣畜於內, 發於皮毛, 於是, 形如豆然, 牛痘之術, 剔皮毛, 施其種, 此由外引内也, 天行者, 由內達外, 牛痘者, 由外引內, 其事雖殊, 其理本一”

97)

『引痘略』(1831) 「跋(曾釗, 1824)」, “牛痘之術, 剔皮毛, 施其種, 此由外引内也, 天行者由內達外, 牛痘者, 由外引內, 其事雖殊, 其理本一, 尙何疑哉, 近世種痘, 有自鼻入之術, 其始曷嘗不創人, 乃信彼而疑此, 所謂知其一, 不知其二也”

98)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僕不事此道幾三十年, 今洋痘書成, 特將生平所見聞而盡信者, 不計工拙臚列述之, 附於篇末, 無非爲洋痘打破疑團, 惟願世之仁人君子, 覧此者, 母以文法求之, 可也”

99)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如曆法律呂二家, 中國有之, 究不若外國之精且簡, 銅壺滴漏仙器也, 洋人訪其規, 則有時辰鐘時辰標之異製, 鐘鼓琴瑟樂器也, 洋人擴其義, 則有銅絲琴指環鐘之巧, 音又况小呢羽毛之類, 其出自外洋者, 皆爲珍於中國, 此固人所共見共聞者也, 茲乃於其有資日用者, 相率以爲常, 于其有利嬰孩者, 遂驚疑以爲怪”

100)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其人尙文學極精巧, 國王廣設學校, 有大學中學小學, 大學分四科, 一醫科, 一治科, 一教科, 一道科, 四科外, 又有度數之學, 曆法家ㆍ算法家ㆍ量法家ㆍ律呂家, 國王取士, 以醫科ㆍ曆家爲最家”

101)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詳其醫, 其科無內外大小之分, 著有臟圖ㆍ腑圖ㆍ脈圖ㆍ筋解圖ㆍ經絡營衛圖, 凡人身之關節奧窔, 披圖了然, 而其臨症則, 有視色ㆍ視毫毛ㆍ聽聲ㆍ寫形諸法, 診脈則, 有六度ㆍ九候ㆍ五氣之分, 此非海外之神異, 而爲中國所朱聞者歟, 洋痘者, 醫之餘技也”

102)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甚至洋烟一事, 其貽害于人者匪淺, 且羣然呼之吸之, 而於洋痘則忌之譏之, 鳴呼何其愚之甚也”

103)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與其鼻苗一種, 而使嬰兒身弱體, 因發而爲大熱爲咳嗽爲口渴, 痘多者或至倉皇失措, 如此其急, 孰若羊痘一種, 而令嬰兒嬉笑自如, 飮食無恙, 如此其緩後, 是其孰利孰害”

104)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夫洋痘與鼻苗痘, 所爭不過氣血之分耳”

105)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世人必謂, 洋痘假而鼻苗痘眞, 何也, 豈以鼻苗從鼻入, 屬氣分者爲眞, 洋痘從臂入, 屬血分者爲假乎, 不知氣與血二者, 本相流通, 人藉氣以生, 未有不資血以活, 血如不行, 氣能獨運乎”

106)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夫洋痘之與鼻苗痘, 其難易緩急, 固有間矣, 與其種鼻苗, 而有周廻五藏之難, 孰若種洋痘而使直達命門之易”

107)

현재 광동성 북부 지역 나정시(羅定市) 인근 지역이다.

108)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此法遂傳於中國, 逾十餘年, 粵之乳邑出水岩廖某者, 得術以歸, 吾宜與乳比鄰, 聞其術甚神, 初未之信, 後得李瞻山先生, 延而試之果騐.” 张秀丽;李紫慧, 「晚清牛痘术和牛痘局的兴起」 『南都学坛』 45(4), 2025 참조.

109)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然猶未盡信無疑也, 復請業鼻苗痘者試之, 不但無痘, 卽身亦不復熱矣, 繼又有姻親李牧堂之姪, 亦反覆相試, 毫無發露, 僕亦隨試于小兒女, 悉如前無恙, 然後嘆洋痘之術之果不欺人也, 信矣哉”

110)

『引痘新法全書』(1838) 「引痘明辨(羅如錦, 1834)」, “余初業岐黄, 繼習痘科多年, 每見逆症, 莫之能救, 慘目傷心”

111)

『引痘新法全書』(1838) 「引痘明辨(羅如錦, 1834)」, “後遇嶺南廖鳳池先生, 得其秘授種牛痘之法, 喜不自勝, 猶信疑莫決”

112)

『引痘新法全書』(1838) 「引痘明辨(羅如錦, 1834)」, “旋將家人未出痘者, 種之果效, 已出者種之不發, 又將出過牛痘者, 以鼻苗種之, 亦不發, 反復屢試, 信無疑矣”

113)

『引痘新法全書』(1838) 「引痘明辨(羅如錦, 1834)」, “兒體無病, 將苗種於鼻內, 以鼻孔爲肺竅, 通呼吸隨氣分, 引傳於肺脾及心肝腎, 至六日發熱, 九日退熱, 散現肌膚, 顆數稀少, 兒體安然, 是爲順症”

114)

『引痘新法全書』(1838) 「引痘明辨(羅如錦, 1834)」, “隨血分引入三焦及腎, 從腎中引出命門, 胎毒由肝心及脾肺, 第三日仍從兩臂發出, 小兒並無煩熱困苦”

115)

『引痘新法全書』(1838) 「引痘明辨(羅如錦, 1834)」, “牛痘一法簡便萬全, 人疑不信, 謂鼻苗痘, 六日發熱, 九日出現, 必忌風寒穢物, 擇飮食, 而牛痘不然, 不發熱, 三日卽現, 不忌風寒穢物, 不擇飮食, 疑其出於皮毛淺近之間, 非若鼻苗痘從藏時發出也, 持此說者, 是不明陰陽氣血之理, 獨不觀內經云, 氣爲陽, 血爲陰, 腑爲陽, 藏爲陰, 氣清血濁, 陽動陰靜, 理固然也”

116)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咸謂洋痘之無濟, 獨不聞粵省洋行, 開局放痘, 不取毫利, 孰非爲小兒造普渡慈航乎”

117)

양행에서 무료로 우두 접종을 시행한 사실은 박기수, 앞의 논문에서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우두 접종에 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우두국의 운영과 두묘 제공자에게 주는 사례금 등으로 일정하게 지출이 되었을 것은 틀림없다.

118)

『引痘新法全書』(1838), 「堅信洋痘說(黎光曙, 1831)」, “今有種洋痘一法, 不避風, 不禁口, 行所無事, 萬無一失, 豈不大好, 奈何猶不能盛行, 只是人不能堅信, 怕出了洋痘, 遇着天行痘, 子又會復染, 夫廣東行此, 近三十年, 予所問廣東人多矣, 皆言從未有復出者, 廣東三十年來, 所生之人, 在外省仕官商賣者不少, 未聞有再染天行痘子者”

119)

『引痘新法全書』(1838), 「堅信洋痘說(黎光曙, 1831)」, “夫廣東行此, 近三十年, 予所問廣東人多矣, 皆言從未有復出者, 廣東三十年來, 所生之人, 在外省仕宦商賈者不少, 未聞有再染天行痘子者, 就是湘潭, 雖未盛行, 前三四年也, 有十數家出洋痘, 何曾再染天行, 痘子來, 且今年有幾家出了洋痘, 信不的確, 又吹苗試之, 並不復出, 此亦實實, 信得過了”

120)

『引痘新法全書』(1838), 「堅信洋痘說(黎光曙, 1831)」, “或謂種洋痘者, 過十年當復出, 果爾則十年一回, 百年不過十回, 穩穩當當也, 不費力, 況乎必無此理也”

121)

『引痘略』(1831) 「復出解(唐源亮(1830)」, “浩川先生創種牛痘, 保全嬰孩, 遐邇共知【亮】, 自壬午秋遊粵, 九載于玆, 親睹其事, 見其所種者, 計有十餘萬人, 竟無一失, 應手活人, 其功曷可勝紀, 惟遇天行時, 千百中偶有一二復出者, 不明其理之輩, 卽疑其術之難憑”

122)

『引痘略』(1831) 「復出解(唐源亮(1830)」, “疑其術之難憑, 不知近日傳授多人, 有學識未透者, 或認穴不正, 或誤以不佳之痘漿引之, 遂致小孩胎毒, 不能泄盡, 復出者有之, 抑或出痘不眞, 灌漿不足, 胎毒亦未泄盡, 復出者有之, 如穴道正而引痘之漿亦佳, 所出之痘, 又眞猶見有復出者, 此計胎毒太重故也”

123)

『引痘略』(1831) 「復出解(唐源亮(1830)」, “受毒最重之小孩, 未曾出過牛痘, 遇天行時, 不至戕生者幾希, 若出過牛痘, 毒已泄其大半, 卽天行時再出, 亦不過餘毒, 畢露無險無虞, 决不至戕生, 屢見屢騐, 人所共信”

124)

우두 접종 후에도 두창이 발생할 수 있으며, 재접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19세기 후반 더전(John Hephun Dudgeon, 1837~1901)에 의해서 명확하게 소개되었다(德貞, 1873).

125)

『西洋痘書』 「洋痘質疑(周純熙, 1827)」, “凡語言ㆍ風教ㆍ物産ㆍ技術, 其因地而異者, 書亦不能盡誌, 要在審其有利而無害者信之而已, 洋痘之術, 爲法便而收功捷, 常也非怪也, 人奈何而不爲此”

References

1. 『與猶堂全書』 『麻科會通』 (韓國文集叢刊 286).
2. 『咭唎國新出種痘奇書』.
3. 『引痘略』 (百蘭堂, 1817; 奎光齋, 1827; 敬業堂, 1831; 世德堂, 1889).
4. 『西洋痘書』 (廣東:味經堂, 1827).
5. 『引痘新法全書』 (保齡堂, 1838; 九畹室(日本), 1846).
6. 『引痘略合編』 (崇德堂, 1847).
7. 『引痘畧』 (禪山:三元當, 1862).
8. 『引痘方書』 (留雲仙館, 1868).
9. 『引痘新書』 (北京: 琉璃廠 篆雲齋, 1854; 本立堂, 1874).
10. 『引種保嬰牛痘方書』 (1899).
11. 德貞, 「牛痘續考」, 『中西聞見錄』 14 (1873.8.).
12. 內政部衛生署, 『天花與種痘』 (南京: 內政部衛生署, 1932).
13. 邓铁涛 主编, 『中国防疫史』 (南宁:广西科学技术出版社, 2006).
14. 梁其姿, 『面對疾病: 傳統中國社會的醫療觀念與組織』 (北京: 中国人民大学出版社, 2012).
15. 김호, 「朝鮮後期 ‘痘疹’ 硏究-《麻科會通》을 중심으로」, 『韓國文化』 17 (1996), 133-183쪽.
16. 朴基水, 「淸 중엽 牛痘法의 도입과정과 광동 行商의 역할」, 『明淸史硏究』 40 (2013), 219-270쪽.
17. 조정은, 「의학지식의 수용과 변용-종두법(種痘法)의 전래와 한문 우두서(牛痘書)를 중심으로-」, 『明淸史硏究』 49 (2018), 339-372쪽.
18. 조정은, 「근대 중국 우두(牛痘)의 역사: 백신 기술과 도구 그리고 현지화」, 『의사학』 32-1 (2023), 1-32쪽.
19. 李计筹·郭强, 「耶鲁大学藏心耕堂本《引痘略》研究」, 『南京中医药大学学报』 25-2 (2024), 91-98쪽.
20. 張嘉鳳, 「十九世紀初牛痘的在地化-以『咭唎國新出種痘奇書』, 『西洋種痘論』與『引痘略』 爲討論中心」,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集刊』 78-4 (2007), 755-812쪽.
21. 董少新, 「论邱熺与牛痘在华之传播」, 『广东社会科学』 1 (2007), 134-140쪽.
22. 张秀丽, 李紫慧, 「晩淸牛痘术和牛痘局的兴起」, 『南都学坛』, 45-4 (2025), 26-35쪽.
23. 廖育群, 「牛痘法在近代中国的传播」, 『中国科技史料』 9-2 (1988), 36-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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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서양두서』 표지

Figure 1. Cover of Xiyang Doushu (Western Smallpox Book)

좌측 상단에 『서양종두론』이 간행된 가경(嘉慶) 을해년(1815)의 표기가 있으며, 우측에 『서양두서』가 간행된 도광(道光) 신사년(1821)의 표기가 있다. (상해도서관 소장)

그림 2.

『서양두서』 내지 첫 면

Figure 2. First page of Xiyang Doushu)

주순희가 쓴 『서양두서』 간행 내력과 함께 『인두략』에 실린 온여괄(溫汝适)의 서문(1817)이 있다. (상해도서관 소장)

Table 1.

『인두략』에 실린 서문, 발문 등

Table 1. Prefaces, postscripts, etc. included in Yindoulue

년도 작성자 및 제목
1805년 정숭겸, 「양의종우두원설(洋醫種牛痘原說)」
1817년 구희(邱熺) 「자서」 / 온여괄(溫汝适) 「서」
1821년 정조형(鄭兆珩) 「서」
1824년 증조(曾釗) 「발」
1827년 주방증(朱方增) 「종우두서(種牛痘序)」 / 주순희(周純熙) 「양두질의(洋痘質疑)」 / 주순희(周純熙) “차서자(此書者)”
1828년 증망안(曾望顔) 「서」 / 곽상선(郭尙先) 「발」
1830년 당원량(唐源亮) 「발」 / 당원량(唐源亮) 「복출해(復出解)」
1831년 윤작한(尹作翰) 「서」 / 고여(古畬) 「서」 / 장원(章沅) 「발」 / 손재(遜齋)
안서공(顔敍功) 「서」 / 오진유(吳珍儒) 「지(識)」 / 담사락(譚思樂) 「서」, 「발」 / 오진유
「출두유물약유용약론(出痘有勿藥有用藥論)」 / 여광서(黎光曙) 「견신양두설(堅新洋痘說)」
1834년 나여금(羅如錦) 「인두명변(引痘明辨)」
1838년 나신재(羅愼齋)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