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 제국의 민간 의료

Treatment of Diseases in the Civil Society of the Han Empire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6;35(2):689-730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6 August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6.35.689
*Associate Professor, College of Humanities and Institute for Historical Studies at Chung-Ang University, Chung-Ang University
민후기*
*중앙대학교 인문대학 겸 중앙사학연구소 부교수, 중국고대사 전공
Received 2026 June 30; Revised 2026 July 16; Accepted 2026 August 05.

Abstract

The separation of medicine and shamanism, which began during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led to the emergence of “excellent physicians (醫)” who were distinct from shamans, a trend that continued from the Warring States Period through the early Han Dynasty. However, while there were some instances of these highly skilled physicians treating commoners, their medical practice was primarily concentrated among the ruling elite—including rulers, high-ranking officials, and those associated with them. Furthermore, physicians with outstanding treatment records in the general populace were sought after by the imperial court, the central government, feudal lords, and local administrative offices; many excellent physicians consequently flocked to the capital, Chang’an, or regional centers, where they were offered substantial compensation. Consequently, patients in the grassroots of society, who found it difficult to receive treatment from these skilled physicians, had no choice but to rely on shamans for their medical care. Folk healers served, on the one hand, as shamans and priests, and on the other, as practitioners who treated common ailments through methods such as acupuncture and herbal medicine. The state, too, dispatched physicians from the imperial court or local administrative offices to the general public to provide relief during special circumstances, such as the outbreak of infectious diseases.

During the Han Dynasty, those who supplied medicinal herbs for the treatment of illnesses in civilian society included the “mu-ui(巫醫)” and recluses documented in historical records, as well as anonymous herb gatherers not mentioned in those records. They supplied civilian society with approximately 130 types of herbal medicines, including ginseng, as evidenced by the herbal records unearthed to date. A significant number of them possessed medical knowledge and helped treat the common people’s illnesses. Furthermore, while it was relatively easy to obtain medicinal herbs in the capital, Chang’an, or in provincial centers, the farther one traveled from these areas, the more difficult it became to procure them, and their prices were often beyond the means of ordinary people.

Furthermore, at that time, many people believed that illness was “a calamity brought on by spirits,” and for them, treating an illness meant driving out spirits and evil entities. Consequently, incantations performed by shamans were widely practiced as a method of healing and, taking the form of sympathetic magic, even extended to natural objects. The common people of that era also actively engaged in magical healing through methods such as “chukyu(祝由).”

1. 머리말

20세기 초반부터 진행된 출토자료의 발굴은 종래 문헌자료의 공백을 채워주면서 중국 고대 의료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 1927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거연한간과 돈황한간 등 중국 서북 지역에서 발견된 한대(漢代) 간독들1)은 중국 고대 의료사 연구에서 완전히 공백으로 남아있던 한대 서북지역 변경사졸들의 질병의 종류(嶽嶺, 2013: 75-78; 裘錫圭, 2008: 16-19), 처방(張雪丹ㆍ張如青, 2025: 1-4; 閆敏敏ㆍ顧漫, 2025: 285-298) 등을 알 수 있게 해줌으로써 변경의료라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출토자료들은 기존 문헌자료와 결합하여 중국 고대 의료 연구, 그 중에서도 한대 의료사를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1972년부터 시작된 마왕퇴한묘의 발굴을 계기로 본격화된 한대 묘장 고고학의 발굴성과(湖南省博物館ㆍ中國科學院考古研究所編, 1973; 湖南省博物館ㆍ湖南省文物考古研究所, 2004)들은 종래 문헌에 단편적으로만 기록되어 있던 당시의 의서와 처방 등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고 있으며, 의료기구의 복원 등으로까지 연구의 범주를 확장시켜주고 있다(周一謀, 1994). 따라서 지금까지 한대 의료사 연구는 문헌자료와 출토자료를 결합시켜 황실ㆍ국가의료(高偉, 2005: 7-12), 변경의료(馮驪ㆍ上官緒智, 2006: 123-130; 高元武, 2011: 82-87; 範香立, 2024: 3320-3323), 의서와 처방(張雷, 2019; 馬繼興, 1992 등),2) 등의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왔다.

현재까지 진행되어온 한대 의료사 연구들 가운데 주로 출토자료와 관련된 성과들을 중심으로 극히 일부만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이러한 연구 성과들에 비해 한대 민간 의료3)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관련 연구들을 살펴보면, 우선 쟈오페이민(焦培民)은 황족, 중앙의 고위관리, 고위관리를 지낸 명사, 제후국과 군현의 관리, 사법관료, 군대 등을 한대 국가의 전문 의료 보장 대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재해와 역병이 발생했을 때의 대민 의료지원을 중앙정부의 임시 의료원조라는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焦培民, 2010: 41-78). 양용(楊勇)은 진한시기의 민간 의료를 무술(巫術), 예의, 방기(方技)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고찰하여, 당시 사람들이 무술과 의방을 동등하게 여겼음을 서술하고 있다(楊勇, 2020: 145-154). 진스치(金仕起)는 중국 고대의 의사들의 신분과 역할을 시대별로 개괄하면서, 양한시대 민간에서 활동한 의사들을 도가에 가까웠던 의사, 의료기술이 뛰어나고 저술을 남겼지만 동시에 방술에 밝았던 의사 등으로 분류하고, 활동 형태에서도 권귀 가문을 돌아다니며 치료한 의사들과 자신의 집이나 시장에서 치료한 의사들로 나누어 그들의 의료 행위를 정리하였다(金仕起, 1995: 32-38). 타오쥬안샹(陶傳祥)은 한대 기층의료를 논하면서 중앙과 지방 관부의 의료제도는 일정 수준 갖추어졌지만, 무의(巫醫)를 중심으로 치료와 약재 공급이 이루어진 민간 의료분야는 그 발전 수준이 낮았음을 논하고 있다(陶傳祥, 2016: 96-101).

이상에서 한대 민간 의료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간략히 정리해보았지만, 종래 연구에서는 한대 의료와 약재, 무축의 측면이 별도로 다루어지고, 한대 민간 의료 자료의 사용 또한 단편적이고, 서술 내용 또한 소략하여 한대 민간 의료의 전모를 파악하기 힘든 점이 있다. 이러한 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자료적으로는 민간 의료에 대한 문헌, 출토자료4)를 망라하여, 2장에서는 종래 연구에서 미진하게 다루어졌던 민간 의료 담당자들을 의ㆍ무의ㆍ국가라는 삼자 측면에서 고찰하여 이들이 민간 의료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살펴보고, 3장에서는 민간의 질병치료에 사용된 약재를 제공한 사람들과 그들이 제공한 약재에는 어떤 종류가 있었는가를 살펴보고, 4장에서는 한대 민간의 무축(巫祝)치료를 무술, 자연물 신앙, 축유 등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민중들이 왜 이들 행위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대 민간 의료를 거칠게 나마 전체적으로 조망해보고자 한다.

2. 질병 치료: 의(醫), 무의(巫醫), 국가

중국 고대 의사의 기원이 ‘무의(巫醫)’라는 점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지만, 무의의 역할과 관련하여 『일주서(逸周書)』에서는 “향(鄉)에 무의(巫醫)을 두고, 백약(百藥)을 갖추어 병을 대비하였다”5)라고 하고,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는 “무(巫)는 귀신을 섬기고 기도하여, 재앙을 막고 병을 낫게 하고 복을 청하는 사람이다”6)라고 하여 고대 중국에서 무의가 치료사와 주술사의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7) 그렇지만 전래문헌을 보면 이미 춘추시기부터 진(晉)의 의연(醫衍), 진(秦)의 의완(醫緩)와 의화(醫和), 그리고 제(齊)와 초(楚)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醫)’ 등8)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춘추시기부터 무(巫)와 결별하여 병을 치료하는 전문직으로서의 ‘의(醫)’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전국, 진한시대를 지나면서 진단의 주요 방법으로 진맥이 정립되고,9) 치료방법으로 침, 뜸, 약 분야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10) 의학은 본격적으로 주술과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치료성적이 우수한 의사를 ‘훌륭한 의사[良醫]’ 내지 ‘현명한 의사[賢醫]’라고 부르고, 반대로 치료성적이 좋지 않은 의사를 ‘우둔한 의사[愚醫]’라고 불렀다.11) 이렇게 의사를 치료성적에 따라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확실히 주술보다는 의학적 치료가 중요하다고 여기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대에 들어서서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만성한묘(滿城漢墓)에서 출토된 의료기구에 ‘의공(醫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처럼 ‘의(醫)’의 본질을 ‘공(工)’12)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치료 성적이 좋은 의사를 ‘양공(良工)’ㆍ‘상공(上工)’으로 부르고,13) 반대로 치료 성적이 좋지 않은 의사를 ‘하공(下工)’ㆍ‘추공(粗工)’으로 구분하여 부르기 시작했다.14) 순우의(淳于意)의 스승 공손광(公孫光)이 순우의에게 “그대는 필시 국공(國工)이 될 것이다”15)라고 표현한 것은 한대에 이미 침구와 같은 치료도구나 약물 가공 도구의 발전(熊長雲, 2021: 132-151) 등에 따라 의학이 주술과 분리되어 하나의 전문 기술, 즉 의술로 정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마천이 편작창공열전의 사평(史評)에서 6가지 고칠 수 없는 병 중의 하나로 무당의 말을 믿고 의원을 믿지 않는 것을 든 것16)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따라 ‘의(毉)’자가 주술사를 뜻하는 ‘무(巫)’와 결합했다가 차츰 약탕관을 형상화한 ‘유(酉)’자로 바뀌어 ‘의(醫)’자로 바뀌는 과정은 의학이 주술과 결별하여 전문 기술로 변화해간 과정을 잘 보여준다(臧振, 1994: 135).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이 글에서는 주술에서 벗어나 ‘양의’, ‘현의’, ‘의공’으로 불린 한대 의사들을 ‘의(醫): 의사’로 표현하고자 한다.

실제 뛰어난 전문 의술을 가진 의사들이 한대 민간 의료 영역에서 활동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난 민간 의료 영역에서 활동한 최초의 의사는 전국말기의 편작(扁鵲)인데, 그는 말년에 의사로 천하를 편력하면서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한단(邯鄲)에서는 부인과의사[帶下醫], 낙양에서는 이목비의(耳目痹醫), 함양에서는 소아의(小兒醫)로 활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7) 한대(漢代)에 들어와서는 순우의(淳于意)가 조산부(曹山跗), 여자 박오(薄吾), 성개방(成開方)과 같은 민간인들을 치료한 기사가 실려 있고, 성제(成帝)시기 풍야왕(馮野王)이 관직을 사직하고 처자와 함께 귀향하여 민간에서 의약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18) 후한시대에는 교현(橋玄)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의사가 사는 마을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19)이 있고, 파군태수(巴郡太守)를 지냈던 번민(樊敏) 역시 자신의 병을 민간인 마을[閭里]에서 치료하였다고 기록20)하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리(里)’나 ‘여리(閭里)’로 표현된 민간인 마을에 의사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민간인들의 질병을 치료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의사라는 전문직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춘추시대부터 의사들의 의료 활동은 국군(國君), 고위 관료나 그에 관련된 인물 등의 권귀계층에 집중되었다.21)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문헌에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의사들의 치료 대상을 살펴보면, 편작이 치료한 사람들은 조간자(趙簡子), 괵(虢)나라 태자, 제(齊)나라 환후(桓侯) 등으로 권귀계층이 대부분이었다.22) 이러한 상황은 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 편작창공열전에는 순우의(淳于意)가 치료한 사람들 24명에 대한 진료 기록이 남아있는데, 제왕(齊王) 관련 인물 12명, 제북왕(濟北王) 관련 4명, 치천왕(菑川王) 관련 2명, 양허후(陽虛侯) 관련 2명으로 순우의가 치료한 24명 가운데 20명이 권귀계층 내지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고, 일반 평민을 치료한 사례는 3, 4명에 불과하다.23) 후한말 화타(華佗)의 진료도 관리 및 사인(士人) 관련 인물들을 치료한 것이 14사례인데 반해, 일반평민을 치료한 것은 3사례24)에 그친 것으로 보아 화타의 진료 역시 관리 내지 그들과 관계있는 인물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우의가 자신의 집에 머물지 않고 주로 제후들을 포함한 권귀계층을 치료하러 다니다가 주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고발된 것 25)은 당시 민간에서 뛰어난 의사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말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민간에서 치료 성적이 뛰어난 의사들을 만나기 어려웠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 의사들이 조정의 초모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서』 두주(杜周)의 전기에 기록된 소제(昭帝) 말년에 황제가 병이 들자 천하의 명의를 불러들였다는 기록이나26) 같은 책에서 공승(龔勝)이 나라에서 의무(醫巫)를 불러들일 때 언제나 수레를 보냈다고 말한 것,27) 그리고 후한시대에도 민간에서 의술로 이름을 떨치던 곽옥(郭玉)28)을 불러들였다는 기록을 보면 한대 황실에서 이름난 의사를 불러들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단 황실뿐만 아니라 고영후(高永侯)의 가승(家丞) 두신(杜信)과 환관 평(平), 치천왕(菑川王)의 태창(太倉) 마장(馬長)과 풍신(馮信)이 순우의에게 진맥법, 약제를 쓰는 법, 약제의 오미(五味)를 맞추어 조제하는 법, 화제탕(火齊湯)의 조제법을 배운 사례29)나 순우의에게 진맥, 경맥(經脈)의 분포, 기해술(奇咳術) 등을 다 배우기도 전에 제(齊)나라 왕의 시의(侍醫)로 임명된 당안(唐安)의 사례 등을 보면30) 제후왕이나 열후들도 휘하의 관리나 환관들을 명의에게 파견해 의술을 배우게 하거나 의사들을 초빙하여 곁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31)

치료성적이 좋고 이름난 의사들이 황실과 제후왕, 열후들의 초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의사들 역시 권귀계층을 치료할 수 있는 수도 장안이나 제후왕과 열후의 영지, 지방 주군의 중심지에 모여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에는 의경(醫經)ㆍ본초(本草) 등에 밝았으며 고향을 떠나 장안에 가서 귀인이나 황실 인척의 집에 출입하면서 의술활동을 펼쳤다는 제(齊)나라 출신 누호(樓護)32)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누호와 같은 뛰어난 의술과 명망을 가진 의사들이 장안으로 몰려든 이유 역시 『한서』 외척전에서 의사 수씨(修氏)가 한무제를 침으로 치료하여 20만전을 받았다33)고 하고, 『사기』 화식열전에서 “의사, 방사와 같은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이 가진 재주를 다하는 것은 많은 대가를 얻기 위해서이다”34)라고 한 것처럼 뛰어난 의사들을 권귀세력 주변에 모이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많은 대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황실이나 제후왕 등이 뛰어난 의사를 구하고, 이름난 의사들 역시 원하던, 원하지 않던 황실, 제후왕, 열후, 각급 관부의 주변에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일반 서민들이 양의나 의공으로 불리는 뛰어난 의사들의 진료에 접근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이제 여기에 있는 10명을 치료하여 9명을 일으켜 세우는 양의(良醫)가 있다고 하면 그에게 치료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만 명에 달할 것이다”35)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양의(良醫), 현의, 의공과 같은 뛰어난 의사들의 치료를 받기 힘든 기층의 민간인들은 질병의 치료를 실질적으로 무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주대(周代)부터 향(鄉)에 무의(巫醫)을 두고 백약(百藥)을 갖추어 병을 대비한 것36)을 보면 당시 무의가 민간 영역에서 백성들의 치료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춘추시대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무(巫)는 신(神)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여 병을 낫게 하고 복을 청하는 사람이다”37)라고 한 『공양전』의 기사는 춘추시대에도 무의가 일면으로는 귀신을 섬기면서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를 하고, 다른 일면으로는 병을 낫게 하는 일을 하였음을 말해준다(周策縱, 2009: 63-69).38)

이러한 사정은 한제국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漢) 문제(文帝: B.C.180-B.C.157 재위) 때에 조착(晁錯 혹은 鼂錯)이 백성들을 모집하여 변새지방의 새로운 성읍으로 이주시키고 의무(醫巫)를 배치하여 질병 치료와 제사를 담당하도록 건의한 것39)은 한 초기에도 여전히 한(漢) 조정에서 무의를 최일선의 대민 의료와 제사의 담당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왕망(王莽)의 집정시기에 의무(醫巫)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의 1/10을 세금으로 징수했다는 기사를 보면 당시에도 여전히 무의가 기층 민중들의 질병을 치료했음을 알 수 있다.40) 『후한서』 경엄(耿弇) 전기의 각주에서는 혜강(嵇康)의 『성현고사전(聖賢高士傳)』을 인용하여 안구망(安丘望)이 성제(成帝)의 부름을 사양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무의로 살아갔다고 하고,41) 같은 책 허양(許楊)의 전기에서는 허양이 주천군(酒泉郡) 도위(都尉)로 있다가, 왕망이 찬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무의가 되어 다른 군에 가서 숨어 살았다고42) 하고 있다. 후한시대에 일부 엘리트 계층이 무의가 되어 기층 사회의 의료를 담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들 무의들은 민간인들의 병을 어떻게 치료했을까? 풍각 점술과 고약 만드는 일에 능했던 단예(段翳),43) 부수(涪水)가에서 낚시를 하며 걸식을 하다가 아픈 사람에게 침을 놓아 치료하고 『침경』과 『진맥법』을 저술한 부옹(涪翁), 부옹에게 의술을 배웠지만 은거하며 출사하지 않은 정고(程高), 정고에게 의술을 배웠으며 빈천하거나 노비일지라도 성심을 다하여 치료하다가 화제(和帝) 때 태의승(太醫丞)이 된 곽옥(郭玉)44)의 이야기는 한대 무의가 침, 약 등을 통해 민간의 질병을 치료했음을 알려준다.

의ㆍ무의뿐만 아니라 국가 역시 일정 상황에서 민간사회의 질병 구제에 참여하였다. 『수호지진간』에서도 관리의 임무를 서술하면서 “늙고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보살펴라”45)라고 한 것을 보면 병든 사람을 포함한 약자를 보살피는 것은 이미 진대(秦代)부터 관리의 주요 임무였음을 알 수 있다. 장가산한간(張家山漢簡)에서도 “관리들이 각기 자신들의 관할구역을 순찰하다가 질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거두어 식사를 제공하라”46)고 한 것을 보면 한대에도 관리들이 민간의 병자들을 구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진ㆍ한대에 관리들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민간인 병자들을 거두어 음식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치료를 제공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47)

그렇지만 특수한 경우에 관청은 민간사회의 질병 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운몽수호지진간에 보이는 나병에 걸린 환자를 찾아내고,48) 격리하였다는 기사49)를 참고하면 전염병의 일종인 나병에도 이미 진대(秦代)부터 국가 차원의 관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서』 익봉전(翼奉傳)을 보면 전한 원제시기에 역병이 돌자 익봉이 민간인들에게 의약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고 있고,50) 같은 책 평제기(平帝紀)를 보면 “백성들이 역병에 걸린 경우 관부의 빈 곳을 숙소[邸第]로 제공하고, 의약을 배치하도록 하라”51)고 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들을 참고하면 한대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국가 차원의 관리, 격리, 치료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52)

특히 문헌자료들의 기록에 따르면 전한에서는 12회 나타난 전염병53)이 신망 시기를 거쳐 후한시대로 갈수록 기후의 한랭, 건조화가 심해지면서(류자오민, 2005; 104-132)54) 신망(新莽)시기에는 4회,55) 후한에서는 34회56) 발생한 것처럼 전염병 발생이 폭증하였다. 『후한서』 종리의(鍾離意)의 전기에서는 건무(建武) 14년(서기 38년)에 회계군에 역병이 크게 돌아 수만 명이 죽었는데, 현의 관리인 종리의가 환자를 문병하고 의약을 공급하여 관내의 많은 사람들이 그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57) 같은 책 조포(曹褒)의 전기에서는 성문교위(城門校尉) 겸 장작대장(將作大匠) 조포가 전염병이 퍼지자 병든 무리들을 의약으로 치료하고 죽을 쑤어 공급하여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고 기록하고 있다.58)

후한시대의 극심했던 전염병의 상황을 왕충(王充)은 “전염병이 퍼지면서 천호(千户)나 되는 문중에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해 멸문한 집안도 있다”59)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건안 22년(217년)의 전염병 창궐은 극심하여 건안칠자(建安七子) 중 왕찬(王粲), 서간(徐干), 진림(陳琳), 응창(應瑒), 유정(劉楨) 다섯 사람이 한 해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전염병이 신분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휩쓸었다.60) 조식(曹植)은 이 해의 전염병 상황을 “전염병의 유행으로 집안마다 가족을 잃는 극심한 비통함에 휩싸이고, 집집마다 슬픈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가정은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어떤 가문은 심지어 종족 전체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61)고 서술하고 있다. 장중경(張仲景) 역시 『상한론(傷寒論)』 서문에서 후한 말년 건안년간의 빈번한 전염병 상황을 “우리 종족은 본디 많아 이전에 200여 명이 넘었지만, 건안년간이 시작된 이래 10년도 지나지 않아 그 가운데 3분의 2가 사망했다. 그 중 상한(傷寒)으로 죽은 사람이 열에 일곱 이었다”62)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이 널리 퍼져있는 상황에서 역병과 같은 질병이나 수재와 같은 재해의 빈발은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끊이지 않는 재해는 기존의 왕조가 이미 ‘천명’을 잃었다는 징조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이에 중앙 조정은 전염병을 중심으로 한 질병의 유행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으며, 조세 징수의 면제ㆍ감면ㆍ유예, 장례 비용의 지급 등의 조취를 취하였다.63) 또한, 전염병과 같은 대규모 인명 상실을 초래하는 질병의 성행은 사회ㆍ경제적 측면에서 노동력, 생산력, 소비능력의 상실과 경제 불황을 야기시키고 이는 연쇄적으로 국가재정의 측면에서 정부가 부과할 수 있는 세금과 노동력 동원의 감소를 가져와, 정치 지도자들의 권위와 정권의 합법성에 도전과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林富士, 2001: 33-34). 이러한 상황에서 한(漢) 제국은 평소 황실과 관부 인원의 치료를 담당하던 태의(太醫)를 비롯한 한대 관의(官醫)들을 전염병 창궐 지역에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64)

그리고 후한 순제(順帝)시기에 사도(司徒) 이합(李郃)이 관리와 백성들 사이에 퍼진 질병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파면된 사례를 참고하면,65) 전염병을 포함한 질병 관리는 중앙부처 중에서는 사도가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풍속통의』에서 “진귀(陳龜)가 경조윤(京兆尹)으로 승진하여 백성들에게 질병이 생기자 의약을 제공하고 항상 호조(戶曹)를 시켜 돌보도록 했다”는 기록(應劭, 1981: 403-407)을 참고하면 지방 관청에서는 호조가 질병을 담당하는 일선 부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본 순우의에게 파견되어 의술을 배운 지방 관아의 관리들과 같이 지방관부는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관리들을 민간의 유명 의사에게 파견하여 의료 지식을 습득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약재의 공급

2장에서는 의ㆍ무의ㆍ국가가 한대 민간사회의 질병치료를 담당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지만, 그러면 질병치료에 필요한 약재는 누가, 어떻게 공급했을까? 우선, 『설원』에서는 “무의는……탕약과 죽으로 병을 다스린다”66)라고 하여 무의가 탕약과 죽을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산해경』에도 무의와 약재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기술들이 있다.

대황의 안에 풍저옥문(豐沮玉門)이라는 산이 있는 있는데, 해와 달이 들어가는 곳이다. 영산이 있는데, 무함(巫咸), 무칙(巫則), 무분(巫肦), 무팽(巫彭), 무고(巫姑), 무진(巫真), 무례(巫禮), 무저(巫抵), 무사(巫謝), 무라(巫羅)라는 10명의 무(巫)가 이 산을 오르내리는데, 온갖 약[百藥]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67)

위에 서술한 『산해경』의 기사에서 무의들이 ‘온갖 약[百藥]’을 찾아 산을 오르내렸음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의들이 직접 약재를 채취하는 일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민간에 약재를 제공한 『한서』와 『후한서』 등의 기록을 보면 무의만이 민간사회에 약재를 제공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서』에는 동해가에서 약을 팔아 살아갔다는 낭야(琅邪) 사람 안기생(安期生)의 이야기68)가 실려 있다. 『후한서』에도 문도가 백여 명이나 되고 빈객들이 그의 학문을 흠모하여 찾아왔지만 집이 가난하여 늘 나귀가 끄는 수레는 타고 현(縣)에 가서 약을 팔아 양식을 댔다는 장해(張楷),69) 무안산(武安山)에 은거하면서 약초를 캐서 파는 일을 업으로 하고 살았다는 대동(臺佟),70) 이름을 숨긴 채 산에서 약초를 캐서 장안(長安)의 시장에서 팔아 살아갔다는 한강(韓康),71) 주군(州郡)이나 황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운양산(雲陽山)에 숨어 살면서 약초를 캐며 살아갔다는 위저(韋著)72)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은사(隱士)들의 주요한 생계 수단 중의 하나가 약초 채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장 관리로 있다가 시장에서 약을 파는 노인으로부터 의술과 도술을 배워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여러 이적을 행했다는 비장방(費長房)의 이야기73)는 약초를 채취하여 파는 일로 생업을 유지하던 사람들 중에는 의약지식을 가지고 백성들의 질병 치료를 도운 경우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무의와 은사뿐만 아니라 문헌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름 없는 약초꾼들 역시 약재 공급의 주요한 통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약초를 캐서 민간에 제공했을까? 『여씨춘추』 임지(任志)」 편 등에는 약재의 재배와 채집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74) 『예기(禮記)』에도 녹각(鹿角), 선태(蟬蛻), 반하(半夏) 등의 약재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아(爾雅)』의 석초(釋草)편 등에도 약재로 사용된 식물과 동물이 기록되어 있다.75) 다소 신화적 색채가 있지만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물, 식물, 광물을 포함해 100여 종의 약재가 기록되어 있고, 약재의 생산지역과 생산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들 전래 문헌자료의 기록만으로는 질병에 어떤 약재들이 어떤 질병에 쓰였는가를 알기 어려웠는데, 최근 출토된 간백자료들에서 질병에 대한 처방전이 발견되면서 질병과 약재의 사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무의와 은사, 그리고 약초꾼들이 주로 채취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간백자료에 나타난 처방에 사용된 초본 식물들만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76)

생강류[薑(畺)ㆍ薑葉ㆍ生畺(薑)ㆍ幹薑(畺)ㆍ枯畺(薑)], 고본류[藁本ㆍ(菻)本], 괄루류[栝蔞ㆍ栝樓根ㆍ生栝婁(蔞)根], 길경류[桔梗ㆍ利如], 당귀류[當歸ㆍ말린 當歸], 대황류[大黃ㆍ大黃丹], 토사류[菟絲ㆍ菟絲實], 란류[蘭ㆍ蘭根ㆍ蘭本ㆍ蘭實ㆍ蘭葉ㆍ蕑ㆍ大蘭], 낭아류[狼牙ㆍ狼牙根], 노여류[蘆茹(閭茹ㆍ蘭茹)ㆍ代廬茹], 문동[門冬], 오구[烏韭], 백렴류[白蘞ㆍ蘞本], 백원류[白芫ㆍ白芫本], 사상류[蛇床ㆍ蛇床華], 세신류[細辛ㆍ少辛(遼細辛)], 속단류[續斷ㆍ續斷根艾ㆍ艾葉], 오두류[烏頭ㆍ天雄則(荝)], 오훼류[烏喙ㆍ秋烏豙(喙)], 전극류[瘨(顛)棘ㆍ瘨(顛)棘根], 지황류[地黃ㆍ生地黃ㆍ말린 地黃], 차전류[車前ㆍ车前草实], 출류[朮(秫)ㆍ朮根], 토루류[土蔞ㆍ土蔞根], 쑥류[蒿ㆍ靑蒿ㆍ白蒿ㆍ駱阮白苦ㆍ鵲巢下蒿ㆍ萩], 황기류[黃耆ㆍ戴糝], 간본류[奸(葌ㆍ藁)本], 감수[甘遂], 감초[甘草], 경천[景天], 계[葪(芥)], 고삼[苦參], 고초[槁草], 관[雚], 관교[菅茭], 관동[款冬], 궁궁[芎䓖], 권백[卷柏], 닥풀류[葵ㆍ葵莖ㆍ葵種ㆍ陳葵ㆍ陳葵莖ㆍ陳葵穜(種)], 근규[蓳葵], 단삼[丹參], 대극[大戟], 독근[毒堇], 동동회[東冬灰], 동규종[冬葵穜(種)], 두우[杜虞], 낭독[狼毒], 래[萊], 여로[藜蘆], 용담[龍膽], 용수[龍須], 누로[漏蘆], 능지[菱芰], 마황[麻黃], 만동[滿冬], 매경[苺莖], 모[牡(杜衡)], 모란[牡丹], 모몽[牡蒙], 문동[虋冬], 미무본[麋(蘼)蕪本], 반하[半夏], 발계[菝葜], 방규[房葵], 방기[防己], 방풍[防風], 백금[白芩(芍)], 백미[白薇], 백창근[白昌根], 백채[白茝(芷)], 백초[白草], 백형[白衡], 봉류[蓬虆(蓬蘽)], 부자[附子], 분균[汾菌(囷)], 비[蕜(韮)], 비렴화[非(飛)廉華], 비해[萆薢], 산개[山芥], 산제[產齊(薺)], 상륙[商陸], 서[藇], 서여[署與(薯蕷)], 석공룡[石公龍], 석남초[石南草], 석명[析蓂], 석위[石韋], 석의[石衣], 술[蒁], 황기류[蓍(耆)根(黄芪)], 시호[柴(茈)胡], 양초본[蘘草本], 어의[魚衣], 오미자[五味子], 옥영채[屋榮蔡], 요초[芺草(要(蔈)苕)], 우슬[牛膝], 완[菀], 울금[鬱金], 원의[垣衣], 원지[遠志], 원화[芫花], 육종용[肉蓯蓉(肉松容)], 자[茈], 자완[紫菀], 자위[紫葳], 자삼[紫參], 작약[芍藥], 전호[前胡], 절피[節皮], 절화[節華], 정력[葶藶], 지각[枳殼], 지모[知母], 지유근[地榆根], 지초[枝草], 진곽[陳藿], 진구[秦艽], 진신[陳薪], 진추[陳芻], 진포[陳蒲], 질려[蒺藜], 인삼류[參ㆍ人參ㆍ沙參(白沙參)ㆍ玄參ㆍ鹿腸ㆍ白參ㆍ赤參], 창포[菖蒲], 탁오류[橐吾ㆍ山朮], 택사[澤瀉], 택슬[澤桼(漆)], 패모[貝母], 해[韰(薤)], 황금[黃芩], 황련[黃連].77) (이들 약재의 간백자료 출전은 <부록 1>을 참조)

위에 나타난 것처럼 지금까지 출토된 간백 자료에는 대략 130여 종류의 약재가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예기』에서 “맹하지월(孟夏之月)에 백약을 모아서 쌓아놓아야 한다”78)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약재를 비축하여 질병에 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말해준다. 간백 자료에 기록된 약재 중 일반 가정에서는 생강, 쑥, 등은 자체적으로 비축이 가능했겠지만, 인삼, 석위(石韋) 등과 같은 약재나 복령(茯苓)79)과 같은 버섯류는 질병이 들었을 경우에 약초꾼이나 약재상으로부터 구입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갈홍(葛洪)이 『포박자』 내편에서 당시의 약가에 대해 “갑작스러운 급성 질환을 치료할 때는 모두 값비싼 약재를 사용하는데, 그 수가 수십 가지에 달하므로, 부유한 집안이라 해도 수도에 거주하지 않는 한 미리 비축해 둘 수 없어 급히 마련하기 어렵다”80)고 하여 당시의 약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일반 서민들이 값비싼 약재를 구하거나 그 가격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후한서를 보면 청하효왕(淸河孝王) 유경(劉慶)이 화제(和帝)에게 외조모 왕씨가 늙어 죽을병에 걸렸는데 지방에서는 의약을 제대로 쓸 수 없으니 낙양에 모셔가서 치료받게 해달라고 주청한 것81)을 보면 지방과 수도 낙양과의 의사와 약재의 차이 또한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희귀하거나 값비싼 약재는 구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민간사회는 황실이 필요한 약재를 공납해야만 했다. 『태평어람』에는 후한 사람 응소(應劭)가 황실에 올린 표(表)가 실려 있는데, 그는 글 중에서 “이전에 상계리(上計吏)가 약재를 바쳤으나, 빠진 것이 있어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여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도로가 어느 정도 통하게 되었으니, 삼가 오관(五官)벼슬에 있는 손애(孫艾)를 보내 복령 10근, 자지(紫芝) 6지, 녹용 5근, 오미 1승(升)을 진상하게 하였으며, (이후) 계리가 출발할 때마다 다시 표를 올려 진상하겠습니다”82)라고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지방 군국(郡國)들은 궁정에 진귀한 약재들을 바쳤고, 약재 부족 등의 이유로 공납하지 못한 분량이 있으면 차후에 다시 공납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후한서』에 실린 연독(延篤)의 전기에는 황제의 아들이 병이 들자 조정에서 군현에 조서를 내려 우황(牛黃)과 같은 진귀한 약재를 바치게 했다는 기록83)이 있는데, 이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정에서 군현에 약물을 바치라고 지시했음을 알려준다. 약재뿐만 아니라 약재 지식에 능한 사람 또한 황실의 초모대상이었다. 『한서』 교사지(郊祀志)에는 전한 성제(成帝)시기에 방사(方士)와 약재를 담당하는 본초대조(本草待詔) 등 70여 명을 귀가시키는 조취를 취하고 있는데,84) 이것은 전한 조정에 약재 담당 관리가 상당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정은 후한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한서』 평제기(平帝紀)에는 방술(方術)과 약재학[本草] 등에 능통한 사람을 초빙하자 거주지 관청에서 발행한 전신(傳信)을 가지고 초거(軺車)를 타고 장안에 오는 사람이 수 천 명에 달했다85)고 기록하고 있다.

4. 무축(巫祝) 치료

2장과 3장에서는 의ㆍ무의ㆍ국가에 의한 한대 민간의 질병 치료 상황과 약재의 공급을 살펴보았지만, 당시에는 질병을 ‘귀신이 재앙을 불러오는 것’86)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들에게 있어서 질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귀신과 사악한 정령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무의에 의한 법술과 주문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林富士, 2008: 3-28; 張寅成, 2011: 69-92).

① 옛날에는 덕을 행하고 복을 구하였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도 간소하였으며 인의를 행하면서 길한 것을 구하였기 때문에 점복은 간혹 드물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풍속은 덕행은 적게 하면서 귀신에게 복을 구하고 예를 태만히 하면서 제사를 열심히 한다……지금 풍속은 거짓과 속임수를 부려 사람들에게 무축 행위를 하여 사례금을 취하고, 뻔뻔스럽게 말재주를 부려 재산을 축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본업을 버리고 서로 (巫祝을) 배우니 거리마다 무(巫)가 있고 마을[閭里]마다 축(祝)이 있다.87)

② 무축(巫祝)은 재물을 거두어 사례를 받고 민(民)은 그 입을 두려워하고 해고지가 두려워 감히 거역하지 못하여 재물은 귀신에게 다 바치고 재산은 제사에 탕진한다.88)

③ 양잠 방직을 그만 두고 일어나 무축을 배워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귀신을 섬기며 가난한 백성들을 속이고 현혹시킨다. 그 (무축을 행하는) 부녀는 연약하지만 질병이 있는 집들은 근심으로 애가 타서 모두 쉽게 두려워하며 틈만 나면 달려가는데, 집을 떠나 길가에서 서성거려 비를 맞고 습기에 젖어 풍한으로 몸이 상하고, 간악한 사람들에게 속고 도적에게 당하니 화와 해가 더욱 커져 병을 중하게 하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혹은 의약을 버리고 다시 달려가 귀신을 섬기다가 죽게 되어도 스스로 무축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무(巫)를 늦게 섬긴 것을 한탄한다.89)

위의 자료 중 ① 은 『염철론』의 기사로 전한 중기에 무축행위가 성행했음을, ② 『풍속통의』와 ③ 『잠부론』의 서술은 후한시대에도 여전히 무축 행위가 질병 치료의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그 피해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훨씬 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심지어 이들의 무축행위를 배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하였다.90)

『후한서』에 실린 무술(巫術)을 잘한 서등(徐登)과 월방(越方)에 능했던 조병(趙炳)의 이야기는 당시 무술과 방기가 어떤 형태로 행해졌는가를 알려준다.

서등(徐登)이란 사람은 민중(閩中) 사람으로, 본래 여자였었는데 사내로 변신했으며 무술(巫術)을 잘했다. 또 조병(趙炳)이란 사람은 자(字)가 공아(公阿)인데, (廣陵郡) 동양현(東陽縣) 사람으로 월방(越方)에 능했다. 그때 병란을 만나 전염병이 크게 돌았는데, 두 사람은 오상계(烏傷溪)라는 강가에서 만나 그들이 가진 술법으로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자고 함께 언약했다. 그리고서는 서로에게 말했다. “지금 뜻을 같이 하였으니 각자 능력을 한 번 시험해 봅시다.” 서등이 강물을 멈추게 하자, 강물이 흘러가지 않았다. 조병이 말라죽은 나무에 손을 대자, 다시 새싹이 나왔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고서 함께 도를 행하기로 하였다. 서등이 연장자라서 조병은 (서등을) 사부로 섬겼다. 두 사람은 청렴을 숭상하여 신에게 올리는 제수는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잔에 부어 올리고, 뽕나무 껍질로 육포를 대신하였다. 단지 (이렇게만 하고서도) 주술을 외워 모든 병을 낫게 해주었다. 뒷날 서등이 죽자, 조병은 동쪽 (會稽郡) 장안현(章安縣)으로 들어갔는데 백성들이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이에 조병은 초가지붕 위에 올라가 솥을 걸어놓고 불을 피자, 주인은 이 것을 보고 놀라 허둥댔지만 조병은 웃을 뿐이었다. 불을 다 때 밥이 익었지만 지붕은 아무렇지 않았다. 또 강에 이르자 나루를 건너려 했지만 사공이 응하지 않자 조병은 일산을 펴고 배 안에 들어앉아, 길게 숨을 내쉬어 바람을 불게 하여 물결을 헤치며 강을 건넜다. 이에 백성들은 신이라 믿고 복속했으며, 따르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장안현의 현령이 조병이 백성을 현혹시킨다 하여 잡아 죽였다. 그곳 백성들이 영강(永康)이란 곳에 사당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거기에는 모기들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91)

위의 기사에 보이는 조병(趙炳)의 이야기는 『포박자』와 『후한서』 주에서 인용한 『이원(異苑)』에도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포박자』에서는 도사 조병이 기(氣)를 사용해 사람과 호랑이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기둥에 박혀있는 큰 못을 기(氣)를 불어넣어 빼내 쇠뇌(弩)에서 발사된 화살처럼 날아가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92) 또한, 『이원』에서는 조병이 대야에 담긴 물을 기를 불어넣어 물고기와 용 모양의 얼음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에 대해 이현(李賢)은 “월방(越方)은 주문과 법술[禁咒]을 잘 하는 것이다”93)라고 주를 달고 있다. 조병이 행한 여러 가지 행위들은 당시 사람들은 이적으로 믿었겠지만, 현재적 관점에서는 마술에 가까움을 알 수 있는데, 위에 인용문에 보이는 서등과 조병이 “주술을 외워 모든 병을 낫게 해주었다”는 내용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주술, 마술, 치료를 구분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무의가 주술이나 마술을 통해 질병을 고쳐주었다는 이야기는 무위가 행한 술법과 치료에 깊은 신뢰를 부여했을 것이다. Raymond Firth의 “주술은 의식과 주문을 이용하여 사람의 의지를 외부 세계에 실현시키는 것으로 사람이 외부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설에 근거하여 어떠한 실제적인 목적을 달성한다”라고 한 말(Firth, 1956: 155)은 사람이 주문의 힘으로 질병을 포함한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던 한대의 민간 의료에도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술과 과학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일방에 대한 거부를 강력하게 따르는 경우를 제외하면, 과학을 믿으면서도 점을 보러 가고, 약을 먹으면서 동시에 주술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隋)ㆍ당(唐)에서 명(明)까지의 각 왕조에서도 관부에 축금박사(祝禁博士)ㆍ주금박사(呪噤博士)94)을 두거나 서금과(書禁科), 축유과(祝由科)95) 등을 설치하여 주술사의 병 치료를 공식화하였다. 청조 이후 관부에서 주금이나 축유와 관련된 부서나 인원은 없어졌지만, 1940년대에 섬서ㆍ감숙ㆍ영하 변경구 정부(陜甘寧辨區政府)가 기록한 “서방에서 청한 신령은 서방으로 돌려보내고, 남방에서 청한 신령은 남방으로 돌려보내며, ……”(Shen-Gan-Ning Border Region Government Public Office, 1980: 73)와 같은 샤먼의 귀신을 돌려보내는 노래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민간에서 주술사의 치병이 끊이지 않았으며, 주술이 의학에 미치는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주술은 그 시대에 과학이 무력했던 분야와 개연성이 큰 분야,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에서 일정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질병치료는 그 대표적인 분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주술의 질병치료에 대한 믿음은 단순히 무의(巫醫)의 활동에 대한 믿음에 그치지 않았으며, 자연물에게까지 확장되었다.

① 국(國)과 현(縣)에 수해와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질병에 시달리다 (무극산에) 빌면 곧 응답이 있었다.96)

② 여남군(汝南郡) 동양현(鮦陽縣)에 있는 밭에서 노루가 한 마리 잡혔는데, 주인이 미처 가져가지 못했다. 마침 상인의 수레 10여 대가 늪을 지나가다가 멀리서 노루가 새끼줄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가지고 가버렸다. [상인은 그냥 노루를 가져온] 그 일이 맘에 걸려서 가지고 있던 절인 물고기[鮑魚] 한 마리를 그곳에 놓아두었다. 잠시 뒤에 그 주인이 가 보았더니 잡힌 노루는 보이지 않고 절인 물고기[鮑君]만 보였다. 늪지대는 사람이 [걸어] 다니기 어려운 곳이었기에 주인은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를 신(神)이 한 일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알렸다. [절인 물고기는] 병을 치료하고 복을 비는 데에 대부분 효험이 있었다. 이 일로 사당[祀舍]이 세워지고 수십 명의 무당이 장막을 치고 종을 치고 북을 두드렸으며, 사방 수 백리에서 모두 기도하러 왔으며 ‘절인 생선 신[鮑君神]’이라고 불렀다. 그 후 몇 년 뒤에 절인 물고기의 주인이 사당 아래를 지나가다가 그 유래를 묻고는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다. 여기에 어떻게 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이 당에 올라가 절인 물고기를 가져갔고, 이때부터 사당도 무너졌다. “사물이 모이는 곳이 신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일은 사람들이 함께 찬양하면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97)

①은 『예석(隸釋)』에 실린 후한 영제(靈帝) 광화(光和) 4년(181)에 세워진 <무극산비(無極山碑)>의 내용으로 무극산 산신의 질병치료 효과를 기록하고 있고, ②는 『풍속통의』에 실린 절인 생선이 신이 된 이야기로 이 두 이야기는 당시 민간에서 자연물을 신으로 만들고 거기에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자연물 숭배는 무의가 현재적 관점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립된다고 여겨지는 제사와 의료라는 어떻게 보면 대립되는 두 가지 활동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돌개바람이 매섭게 일어나고, 폭우가 나무를 꺾으며, 음양의 기운이 어지러워져 여름에 춥고 겨울에 따뜻하며, 봄에 덥고 가을에 봄꽃이 핀다.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고, 별의 운행이 흐트러지며, 백성은 질병에 시달리고,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많아지며, 사람들은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오곡이 제대로 여물지 못한다.98)

② 요(堯)와 순(舜)의 덕을 실천하면 천하가 태평해지고 온갖 재앙이 사라지니, 비록 역병을 쫓아내지 않아도 역병의 귀신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걸(桀)과 주(紂)의 행실을 따를 경우, 천하가 혼란에 빠지고 온갖 재앙이 동시에 일어나니, 비록 매일 역병을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역병의 귀신은 여전히 찾아온다.99)

③ 짐이 부족하여 백관의 작위와 직급이 명확하지 않고 여러 관원이 오랫동안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며 적임자를 얻지도 못하였다. 이에 백성의 실망이 위로 하늘에 감응하여 음양이 변고를 일으켜 그 허물이 백성에 미치니 짐은 심히 두려울 뿐이다. 지난번에 관동(關東)지역에 연이어 재난이 닥쳐 기한과 질병에 시달린 백성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였다.100)

①의 『한시외전』에서는 나라에 도가 없어서, ②의 『논형』에서는 걸(桀)과 주(紂)의 행실을 따라서, ③의 『한서』에서는 황제가 부족하고 관원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서 재난과 전염병을 비롯한 질병이 초래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우주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행위가 감응하기 때문에 정치를 잘 하여 우주자연의 질서를 회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연물이 그 상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제사지내는 것 또한 중요했다. 『좌전』의 기사에서 “장마, 가뭄, 전염병 등의 재해가 발생하면 산천의 신에게 영(禜) 제사를 지내야 하고, 눈과 서리, 바람과 비 등이 철을 잃으면 일월성신의 신에게 영(禜) 제사를 지내야 한다”101)라고 한 구절은 우주, 자연에 대한 제사가 단순히 그 자체에 대한 숭배만이 아니라 제사를 통해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유지시키거나 회복시키고 이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거나 질병의 발생을 예방하려는 행위였음을 알려준다. 이것이 한대 무의(巫醫)가 질병 치료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제사를 통해 우주ㆍ자연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제사장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이유인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주술사이자 제사장으로서의 무의(巫醫)의 행위는 프레이져가 말한 유감주술(類感呪術: Sympathetic magic)의 중국 고대적 형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프레이져, 2005: 60-126).102)

그리고 한대의 개인들이 무의의 주술사나 제사장으로서의 행위나 그들 자신의 자연물에 대한 숭배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시각에 동의한 정도는 사회적 신분과 개인적 기질에 따라 매우 다양했을 것이지만, 한대 민간 엘리트 계층의 상당수 역시 인간과 질병을 포함한 우주자연의 질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모두는 아니었겠지만 상당수의 엘리트들은 『후한서』 방술전에 나타난 것처럼 천문, 둔갑(遁甲), 풍각(風角: 바람의 흐름을 읽어 치는 점), 도참(圖讖), 하도(河圖)ㆍ낙서(洛書), 바람과 별, 참위(讖緯), 역학 등103)을 통해 비를 내리게 하거나,104) 재난을 예방하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다.105)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해당 시기의 지식인으로 태학에서 공부하거나 관료였다는 점106)에서 이들의 활동은 민간의 유감주술을 지지 내지 강화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며, 예언은 때로 치료활동과 결부되기도 하였다.

단예(段翳)의 자(字)는 원장(元章)으로, 광한군(廣漢郡) 신도현(新都縣) 사람이다. 『역경』을 전공했고, 풍각 점술에도 능했다. 때때로 배우러 오는 자가 있으면 도착하기 전에 미리 그 성명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루터 관리에게 “며칟날 유생 2명이 여행 짐을 지고 오면서 나의 거처를 물을 것이니 알려주시오”라고 말했다. 뒷날 말 그대로였다. 또 어떤 서생이 공부하러 왔다가 몇 년을 배운 뒤, 대략 필요한 방술을 다 배웠다며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다. 단예는 고약을 만들어 서신과 함께 통속에 넣어 주면서 말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열어 보아라.” 서생이 가맹(葭萌) 땅에 왔을 때, 나루터 관리와 강을 건너는 문제로 싸우다가 관리가 채찍으로 시종의 머리에 상처를 냈다. 서생이 통을 열어 단예의 서신을 읽어보니 가맹 땅에 이르렀을 때 관리와 싸우다가 머리를 다친 사람이 보이면 이 고약으로 싸매주라고 쓰여 있었다. 서생이 그 말대로 하자 상처는 곧 나았다. 서생은 탄복하며 다시 돌아가 학업을 마쳤다.107)

이렇게 당대의 엘리트층이 전개하던 도참이나 바람점, 별점과 같은 유사학문에 의해 고무된 민간인들은 자연물을 숭배하고, 무의의 활동으로 질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는 수동적 위치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며,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주술적 치료에 뛰어들었다.

특히, 한대의 병을 낫게 하는 주술은 특정 질병들에 대하여 특정 주문으로 된 축유(祝由)108)를 행했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이었다. 마왕퇴한묘에서 출토된 『오십이병방』에 보이는 치료 방법을 통계내보면 전체 283가지 치료법 중에서 내복법이 60사례, 외치법이 147사례, 축유 치료가 39사례, 불명이 37사례로 주술에 의한 축유 치료법이 전체 치료방법 중 13.8%를 차지하고 있다.109)

그리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포함한 우주, 자연이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들의 정치나 제사와 같은 행위에 감응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축유 치료법을 보면 질병 역시 단순히 생명을 가진 존재를 넘어 인격을 가진 존재로 생각했다.

① 독사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는 처방: “숨을 토해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엎드려 먹고사는 독사 놈아! (너의) 아버지는 북쪽에 있고, (너의) 어머니는 남쪽에 머무르고, 동산(同產) 세 남자가 사람됨이 덕이 없으니, 그쳐라. 그치지 않으면 묶어버릴 것이다.”110)

② 신사(辛已)날에 축유하여 말한다. “내뿜어라. 신사(辛已)날이다”라고 세 번 한다. 그리고 말한다. “천신(天神)이 질병을 내리는 일에 간여했다면, 신녀(神女)여 차례에 따라 내 말을 들어라. 아무개 호부(狐父: 장퇴, 서혜부 탈장)는 이곳이 머무를 곳이 아니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지 않으면 도끼로 내리칠 것이다”라고 하고, 즉시 베[布]를 잡고 역귀를 쫓아내기 위하여 27번 두드린다[攺].111)

①의 독사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는 축유 치료법을 보면 독사를 가족을 가진 존재로, ②의 서혜부탈장(fox hernia)을 치료하는 축유 치료법을 보면 서혜부탈장을 역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따라서 이들 병들을 치료하는 방법은 병을 위협하여 쫓아내거나 다른 사물에 옮겨가게 하여 제거하는 방법 등이 사용되었다.

① 피부병[尤(疣)]이 있는 사람에게 벼의 줄기[禾]를 들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소리치게 하고, 이에 “나의 피부병[尤(疣)]이다”라고 답한다. (이후) 벼의 줄기[禾]를 버리고, 뒤돌아보지 않는다.112)

② 한 달의 마지막 날[月晦] 언덕에 있는 우물에 물이 있는 경우 헤진 빗자루로 병을 쓸어버리는 동작을 27번 하면서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은 한 달의 마지막 날이니, 병을 쓸어 없애 버린다. 북쪽으로.” (그런 다음에) 비를 우물 속에 던져버린다.113)

위의 인용문 ①에서는 피부병을 벼의 줄기에 전이시켜 없애고 있고, ②에서는 피부병을 헤진 빗자루로 쓸어 없애버리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3걸음 걷고 멈추는 곳을 하나의 점으로 삼아 전체 7개의 점으로 북두칠성의 모양을 만들어114) 북두칠성의 신통력을 얻고자 했던 우보(禹步),115) 피가 날 때 땅에 × 표식을 그려 멈추도록 하거나,116) 땅에 네모를 그리고 축사를 함으로써 가상의 공간에 신성성을 부여하여 사기(邪氣)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땅에 그림을 그리는 화지(畵地),117) 살상력이 있다고 믿었던 침 뱉기[唾],118) 북을 쳐서 병과 악귀를 쫓는 고(鼓),119) 방망이(椎), 도끼(斧) 등으로 상처 부위나 베[布] 등을 두들기는 이(攺),120) 침을 사용하여 병이 있는 곳을 찌르는 근(赾),121) 어떤 날짜의 이름을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바꾸기122) 등이 사용되었다.123)

민간 종교 체계의 어떤 신성한 세계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되면 삶의 많은 부분이 조짐들과 기적들로 채워지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청중과 주술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전문가가 된다. 약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여기에 참가하는 것을 훨씬 흥미로워 하거나, 약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그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Jordan & Overmyer, 1986: 270-71).

위의 Jordan과 Overmyer의 진술은 현대 타이완의 주술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지만, 동일한 상황은 한제국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강도는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전한 선제(宣帝) 시기의 질병에 걸린 민간인들의 상황을 “다섯 명이 사는 가구가 땅 100무를 경작하면 해마다 자신들이 쓸 것도 충분하지 않은데 불행하게 질병에 걸리거나 죽은 사람이 생기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내몰린다”124)라고 표현하거나, 후한 멸망으로부터 200여년이나 지난 시기에 활약했던 유송(劉宋)의 시인 포조(鲍照)가 “가세를 기울여 약을 쓰고, 집을 쓰러뜨려 의원을 맞이한다”125)고 한 것은 당시 민중들이 의약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축치료는 당시 민중들이 질병에 대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였을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치료성적이 좋은 의사[良醫, 賢醫, 醫工]를 만나기가 쉽지 않고, 용도에 맞는 약재를 구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도 그 비용을 부담하기가 힘들수록 심했을 것이다

4. 맺음말

본 연구는 출토 간백(簡帛) 자료와 전래 문헌을 결합하여 종래 단편적으로만 다루어졌던 한대(漢代) 민간의료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의 한대 의료사 연구가 황실 및 관부(官府) 의료, 변경 의료, 출토 의서 및 처방의 복원 등에 집중되어 상대적으로 민간의 의료 상황이 소외되었던 한계를 극복하고, 민간의 질병 치료 주체(의ㆍ무의ㆍ국가), 약재의 공급망, 그리고 민간 신앙과 결합된 무축(巫祝) 치료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우선, 질병 치료의 주체 측면에서 볼 때, 한대는 진맥과 침구, 약물학이 발전하면서 의학이 주술과 점차 분리되어 ‘양의(良醫)’나 ‘의공(醫工)’과 같은 전문 직업 의사[醫]가 확립된 시기였다. 그러나 이들 뛰어난 전문 의사들의 치료 활동은 수도나 지방 중심지를 중심으로 황실, 제후, 고위 관료 등과 같은 권귀계층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이 전문 의사들의 진료를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기층 사회의 일상적인 질병 치료는 주술과 치병을 겸비한 ‘무의(巫醫)’가 실질적으로 담당하였으며, 국가는 전염병의 유행처럼 사회 불안을 초래하는 특수한 상황에 한하여 관의를 파견하고 약재를 제공하는 등의 임시 구제에 나섰다.

질병 치료에 필수적인 약재의 공급 역시 민간의 독자적인 자구책과 국가적 수탈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었다. 출토 간백 자료에 등장하는 130여 종의 초본 약재는 민간에서도 다채로운 약물이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들 약재들은 무의, 은사(隱士), 그리고 이름 없는 약초꾼들에 의해 공급되었다. 그러나 인삼, 복령, 우황과 같은 귀하고 값비싼 약재는 황실에 대한 군국의 정기적인 공납으로 인해 수도로 집중되었고, 높은 약가로 인해 일반 서민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필수 약재를 구비하고 소비하는 데도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전문 의료진의 치료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상황과 약재 접근성의 한계는 기층 민중들을 무축(巫祝) 치료와 축유(祝由) 의식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질병을 인격성을 지닌 사악한 귀신의 침범으로 인식했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들에게 있어서 질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귀신과 사악한 정령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무의에 의한 법술과 주문이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이는 자연물에 대한 신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을 바탕으로 재이(災異)와 질병의 상관관계를 긍정했던 당대의 엘리트층이 전개하던 도참이나 바람점, 별점과 같은 유사학문에 의해 고무된 민간인들 역시 자연물을 숭배하고, 무의의 활동으로 질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는 수동적 위치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며, 스스로가 축유(祝由) 등과 같은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주술적 치료에 뛰어들어 질병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글에서는 의학의 역사를 주술에서 과학으로의 단선적 진보로서가 아니라 당대의 물질적 조건 및 사유 체계와 결합된 유기체라는 관점에서 전문 의술과 주술적 의례, 국가의 비상 구제와 민간의 약재 공급이 얽혀 형성된 한대의 민간의료 체계 전반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전문 의사의 등장이라는 한대 의료의 거시적 발전의 이면에 존재했던 의료 불평등 구조와 엘리트 중심 의료의 사각지대에서 활약한 무의, 은사, 약초꾼 등의 민간 의료에서의 역할, 그리고 민간 사회에 만연했던 무축치료 등을 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 고대 의학 발전사에서 합리적 의술과 주술적 치병 행위의 복합적인 공존 관계를 역사적ㆍ사회경제적 맥락에서 살펴봄으로써, 한대 민간에서 성행한 주술과 무축 치료 등이 미신이나 비합리적 후진성의 징표가 아니라, 전문 의사와 고가의 약재를 거의 이용할 수 없었던 당시 민중들이 질병이라는 실존적 위기에 처하여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현실적이고 유효한 질병 극복 기제였음을 살펴보았다.

Notes

1)

중국과 스웨덴이 합동으로 편성한 中國西北科學考察團은 1927년 1930년에 이르기까지 羅布淖尔, 額濟納河 유역의 옛 유적지에서 1만여 간독을 발굴하였다. 居延漢簡甲ㆍ乙遍에 의하면 이때 발견한 간독의 총수는 10,200매쯤 되었다. 勞干은 1943년 석판인쇄로 『居延漢簡考釋(釋文之部)』를, 1944년에는 『居延簡考釋(考證之部)』를, 1946년에는 『居延漢簡考證補正』 및 일련의 논문을 출판함으로써 한대 간독 연구의 본격적으로 시작했다(鄭有國, 1989: 124-127).

2)

출토자료 가운데 馬王堆漢墓, 滿城漢墓, 劉勝墓와 같은 제후나 지방 관장 등의 무덤 출토 유물은 당시의 의료 기구를 복원하게 해주고 있다(鍾依研, 1972: 54-56; 馬繼興ㆍ周世榮, 1978: 80-82; 謝佳芮, 2020: 215-222).

3)

‘민간 의료’는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와 ‘민간에서 행해지던 의료’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와 민간에서 행해지던 의료를 합하여 ‘민간 의료’로 정의하였다.

4)

戰國ㆍ秦代 출토 의학 기록으로는 戰國 중ㆍ후기로 추정되는 『清華大學藏戰國竹簡(拾)』에 병방이, 戰國말-秦으로 추정되는 里耶秦簡에 醫方이, 北京大學秦簡 4책에 祝由術 위주의 병방이, 秦代 末年으로 추정되는 周家臺秦簡에 醫藥病方과 祝由術이 기록되어 있다. 漢代 출토 의학 기록으로는 前漢 初로 비정되는 馬王堆漢簡(天下至道談, 雜禁方, 十問, 合陰陽方)과 馬王堆漢帛書(足臂十一脈灸經, 陰陽十一脈灸經甲本, 脈法, 陰陽脈死候, 五十二病方, 却穀食氣, 陰陽十一脈灸經乙本, 導引圖(題記), 養生方, 雜療方, 胎產書), 張家山漢墓 M247(脈書, 引書), 文帝시기의 張家山漢墓 M136의 徹穀食氣, 阜陽雙古堆漢墓M1 萬物, 전한 전기의 胡家草場漢墓M12(醫方, 雜方), 景帝ㆍ武帝시기의 天回 老官山漢墓M3(脈書ㆍ上經, 脈書ㆍ下經, 逆順五色脈臧驗精神, 犮理, 刺數, 經脈, 治六十病和齊湯法), 前漢 중기의 北京大學 漢簡과 海昏侯墓漢簡牘, 後漢 전기의 武威旱灘坡漢墓 의약목독, 의약간(갑), 의약간(을), 후한 중기의 張家界古人堤漢簡 의방과 長沙 尙德街 漢簡 약방, 전한에서 후한에 걸친 시기에 居延漢簡, 敦煌 馬圈灣 漢簡, 肩水金關漢簡殘方, 額濟納漢簡殘方, 羅布淖爾漢簡殘方, 天長紀莊漢牘, 懸泉漢簡 등이 있다.

5)

『逸周書』 大聚, “鄉立巫醫, 具百藥以備疾災.” 周策縱은 무의가 민간사회의 의료와 제사를 담당한 것과 관련하여 중국 고대의 무의의 진료소를 Kynortion산 등에 있었던 그리스 신의의 진료소 Abaton(Avaton, Adytom)에 비견하고 있다(周策縱, 2009: 59-62).

6)

『春秋公羊傳』 隱公 4年, “巫者, 事鬼神, 禱解以治病請福者也.”

7)

『廣雅』 釋詁4에서 “의(毉)는 무(巫)이다(毉, 巫也)”라는 구절에 대해 왕념손(王念孫)의 소증(疏證)에서는 “무(巫)와 의(醫)는 모두 질병을 없애기 때문에 의(醫)라는 글자는 (아래쪽에 酉 대신) 더러 ‘무(巫)’자를 써서 의(毉)라고 쓰기도 한다(巫與醫皆所以除疾, 故醫字或從巫作毉)”라고 하고 있다.

8)

『春秋左氏傳』(이하 『좌전』 僖公 30年, “晉侯使醫衍酖衛侯. 寗兪貨醫, 使薄其酖, 不死.”; 『좌전』 文公 18年, “十八年春, 齊侯戒師期, 而有疾. 醫曰, ‘不及秋, 將死.’”; 『좌전』 成公, 10年, “晉侯夢大厲, ……公疾病, 求醫于秦. 秦伯使醫緩爲之.”; 『좌전』 襄公 21年, “楚子使薳子馮爲令尹, 訪于申叔豫. ……楚子使醫視之.; 『좌전』 昭公 元年, “晉侯求醫于秦, 秦伯使醫和視之, 曰, ‘疾不可爲也, 是謂近女, 室疾如蠱. 非鬼非食, 惑以喪志. 良臣將死, 天命不佑.’”

9)

맥진에 대해 司馬遷은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에서 “지금까지 세상에서 말해온 맥은 편작에서 비롯되었다(扁鵲名聞天下. ……至今天下言脈者, 由扁鵲也.)”라 하여 맥진이 전국시대 편작에서 기원하였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10)

침, 뜸, 약 등의 발전과 관련된 출토 기물들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조(楊金生ㆍ李經緯, 2005: 45-56; 和中浚ㆍ吳鴻洲, 2001; 李經緯ㆍ梁峻ㆍ劉學春 2017).

11)

良醫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좌전』으로 晉 景公이 꿈에 나타난 아이들이 秦이 보낸 醫緩을 ‘良醫’로 표현하고 있다. 같은 책 昭公 11年, 定公 13년의 기사에도 ‘良醫’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렇지만 良醫라는 표현은 전국시대에서 한초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데, 다음의 사례를 들 수 있다. 『文子』 微明, “夫病濕而強食之熱, 病暍而強飲之寒, 此眾人之所養也, 而良醫所以爲病也.”; 『墨子』 貴義. “今夫伊尹之于我國也, 譬之良醫善藥也.”; 『墨子』 非攻下, “此譬猶醫之藥萬有餘人, 而四人愈也, 則不可謂良醫矣.”; 『呂氏春秋』 察今, “譬之若良醫, 病萬變, 藥亦萬變.”; 『呂氏春秋』 察賢, “今有良醫于此, 治十人而起九人, 所以求之萬也.”; 『淮南子』 說山訓, “良醫者, 常治無病之病, 故無病.”; 『史記』 范睢蔡澤列傳“良醫知病人之死生.” 賢醫에 대한 기록으로는 다음의 기사를 들 수 있다. 『韓詩外傳』 卷3, “人主之疾, 十有二發, 非有賢醫, 莫能治也.”; 『韓詩外傳』 卷3, “父不哭子, 兄不哭弟, 道無襁負之遺育. 然各以其序終者, 賢醫之用也.” 愚醫의 사례는 다음을 들 수 있다. 『黃帝內經』 素問, 疏五過論, “愚醫治之, 不知補瀉, 不知病情, 精華日脫, 邪氣乃並……”

12)

한대 의사를 『黃帝內經』 素問ㆍ疏五過論에서는 ‘醫工’으로, 『急就篇』에서는 ‘醫匠’으로 표현하고 있다. 『漢書』 卷63, 武五子傳과 『後漢書』 『後漢書』 卷41, 第五倫傳에서는 모두 ‘醫工長’이라고 하고 있다. 漢印 중에는 ‘琅邪醫長’(羅福頤, 1987: 圖 2.3-88), ‘彭城醫長’(朱德潤, 『集古攷圖』)이 있다.

그림 1.

滿城漢墓 발견 ‘醫工’ 기물(좌), 『集古攷圖』에 실린 ‘彭城醫長’ 도장(우)

Figure 1. An ‘medical artisan’ artifact unearthed from a Han-dynasty tomb discovered in Mancheng (left) and the “Chief Physician of Pengcheng” seal featured in JiguKaotu (right)

(좌: “医工”铜盆, 中國國家博物館. https://www.chnmuseum.cn/Portals/0/web/exhibition/exhibitions/201812han/41.html. Accesssed 30 Aug 2026. 우: 『集古攷圖』)

13)

『史記』 扁鵲倉公列傳에서 “良工取之, 拙者疑殆.”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漢代에 들어와 『黃帝內經』 靈樞편이나 素問편과 같은 의서 속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황제내경』 「靈樞」 脹論, “補虛瀉實, 神歸其室, 久塞其空, 謂之良工.”; 「靈樞」 “五色審察澤夭, 謂之良工.”; 「靈樞」 逆順, “上工, 刺其未生者也.”; 「靈樞」 逆順, “上工治未病, 不治已病.”; 「靈樞」 衛氣失常, “隨變而調氣, 故曰上工.”; 「素問」 八正神明論. “上工救其萌芽, ……故曰上工.”

14)

下工의 사례로는 다음 사례를 들 수 있다. 『황제내경』 「靈樞」 逆順, “下工, 刺其方襲者也, 與其形之盛者也, 與其病之與脈相逆者也.”; 「靈樞」 官能, “下工守其已成, 因敗其形.”; 「素問」 生氣通天論, “故陽畜積病死, 而陽氣當隔, 隔者當泄, 不亟正治, 粗(工)乃敗之.” 「素問」 八正神明論, “下工救其已成, 救其已敗.” 粗工의 사례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素問」 疏五過論, “粗工治之, 亟刺陰陽, 身體解散, 四支轉筋, 死日有期, 醫不能明, 不問所發, 唯言死曰……”; 「素問」 移精變氣論, “粗工凶凶, 以爲可攻, 故病未已, 新病複起.”

15)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公必爲國工.”

16)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病有六不治: 驕恣不論於理, 一不治也. 輕身重財, 二不治也. 衣食不能適, 三不治也. 陰陽幷, 藏氣不定, 四不治也. 形羸不能服藥, 五不治也. 信巫不信醫, 六不治也. 有此一者, 則重難治也.”

17)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扁鵲名聞天下. 過邯鄲, 聞貴婦人, 卽爲帶下醫, 過雒陽, 聞周人愛老人, 卽爲耳目痹醫, 來入咸陽, 聞秦人愛小兒, 卽爲小兒醫.”

18)

『漢書』 卷79, 馮野王傳, “光和 元年(178년), ……懼不自安, 遂病, 滿三月賜告, 與妻子歸杜陵就醫藥.”

19)

『後漢書』 卷51, 橋玄傳, “光和元年, (橋玄)遷太尉. 數月, 復以疾罷, 拜太中大夫, 就醫里舍.”

20)

洪适, 『隸釋』 卷11, <巴郡太守樊敏碑>, “君諱敏, 字升達. ……後漢中秋老(乞)身, 以助義都尉養疾閭里, 又行褒義校尉, 君仕不爲人, 祿不爲己, 桓桓大度, 體蹈箕首, 當窮台緄, 松僑協軌.”

21)

춘추시대 의사들의 치료 대상은 ① 의사가 국군(國君)을 치료하는 경우(무명의가 齊侯 치료[『좌전』 文公, 18년]), ② 국군이 다른 나라의 국군에게 의사를 파견하는 경우(秦伯이 醫緩을 晉景公에게 파견[『좌전』 成公, 10년], 秦伯이 醫和를 晉侯에게 파견(『좌전』 昭公, 원년), 醫衍이 衛侯 치료[『좌전』 僖公, 30년]), ③ 국군이 의사를 보내 신하를 치료하는 경우(楚康王이 無名醫를 파견하여 신하 薳子馮의 병세를 살피게 함[『左傳』 襄公, 21년]) 등이 대부분이다.

22)

전국시대 의사들의 치료 대상으로는 醫竘가 楚宣王, 魏 惠王(『尸子』 卷下)의 병을 치료하고, 扁鵲이 齊桓公과 秦武王, 虢國太子, 趙簡子 등을 치료하고(『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文摯가 齊王(『呂氏春秋』 卷11, 仲冬紀), 胥靡가 魏襄王의 王后의 병을 진료한 기록(『韓非子』 內儲說上)이 있다. 王과 王后, 諸侯와 夫人을 치료한 이외에, 無名醫가 趙簡子의 가신 陽城胥渠를 치료한 사례가 있고(『呂氏春秋』 愛士), 또한 齊王이 의사를 파견하여 孟子의 병을 돌보게 한 사례(『孟子』 公孫丑下)처럼, 각국의 군주들은 때로 궁전의 의사를 파견하여 신하나 객의 병을 돌본 사례가 있다.

23)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에 보이는 淳于意의 진료기록부에 나타나는 환자들의 신분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齊王 관련 인물들: 齊의 侍御史 成, 齊王의 가운데 아들, 齊의 郎中令 循, 齊의 中御府 장관 信, 齊王의 太后, 齊의 中尉 潘滿如, 齊의 北宮 司空의 부인 出於, 齊의 中大夫, 齊 승상의 家臣의 하인, 齊의 淳于司馬, 齊의 中郎 破石, 齊王의 어의인 遂, ② 濟北王 관련인물들: 濟北王, 故 濟北王의 유모, 제북왕의 모든 시녀들, 濟北王의 시녀 韓女, ③ 菑川王 관련 인물들: 치천왕, 菑川王의 美人, ④ 陽虛侯 관련 인물들: 陽虛侯, 陽虛侯의 丞相 趙章. ⑤ 일반 평민: 齊의 章武里에 사는 曹山跗, 臨菑縣 氾里에 사는 薄吾라는 여자, 安陽縣 武都里에 사는 成開方, 安陵 阪里에 사는 公乘 項處. 이 가운데 公乘 項處의 경우는 상당한 고위 爵級으로 보통의 일반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24)

『三國志』 卷29, 魏書 方技傳에 보이는 華佗가 진료한 환자들의 신분은 다음과 같다. ① 관리 및 士人: 曹操, 陳登, 某郡守, 督郵 徐毅, 故督郵 頓子獻, 府吏 兒尋, 李延, 縣吏 尹世, 軍吏 梅平, 李成, 甘陵 相의 夫人, 彭城夫人, 李將軍妻, 士大夫 1인. ② 일반 평민: 鹽瀆 嚴昕, 東陽 출신 陳叔山의 小男,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病人.

25)

淳于意는 齊의 太倉長이라는 공직에 있으면서도 제후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병을 고치고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병을 치료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문제 4년(B.C.176)에 고발을 당해 刑罪에 처해져 장안에 압송되었다.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左右行游諸侯, 不以家爲家, 或不爲人治病, 病家多怨之者.”

26)

『漢書』 卷60, 杜周傳, “昭帝末, 寢疾, 徵天下名醫, 延年典領方藥.”

27)

『漢書』 卷72, 王貢兩龔鮑傳, “州擧茂材, 爲重泉令, 病去官. 大司空何武, 執金吾閻崇薦勝, 哀帝自爲定陶王固已聞其名, 徵爲諫大夫. 引見, 勝薦龔舍及亢父甯壽, 濟陰侯嘉, 有詔皆徵. 勝曰: ‘竊見國家徵醫巫, 常爲駕, 徵賢者宜駕.’”

28)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郭玉者, 廣漢雒人也. …… 和帝時, 爲太醫丞, 多有效應.”

29)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諸侯王齊王之宦官. 喜好醫道, 曾從當時名醫淳于意學醫.”

30)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問臣意曰: ‘吏民嘗有事學意方, 及畢盡得意方不? 何縣里人?’ 對曰: ‘臨菑人宋邑. 邑學, 臣意敎以五診, 歲餘. 濟北王遣太醫高期, 王禹學, 臣意敎以經脈高下及奇絡結, 當論兪所居, 及氣當上下出入邪逆順, 以宜鑱石, 定砭灸處, 歲餘. 菑川王時遣太倉馬長馮信正方, 臣意敎以案法逆順, 論藥法, 定五味及和齊湯法. 臣意敎以案法逆順, 論藥法, 定五味及和齊湯法. 高永侯家丞杜信, 喜脈, 來學, 臣意敎以上下經脈五診, 二歲餘. 臨菑召里唐安來學, 臣意敎以五診上下經脈, 奇咳, 四時應陰陽重, 未成, 除爲齊王侍醫.’”

31)

일부 제후왕들은 醫生을 기르거나 醫書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前漢 同姓諸侯王이었던 濟北王에게는 太醫 高期, 王禹가 있었고, 齊王에게는 侍醫가 있었다. 王府에서는 醫生을 배양하기도 했는데 濟北王은 자신의 太醫를 臨淄의 명의였던 淳于意에게 파견하여 脈法, 鍼灸를 1년 이상 배우게 했으며, 菑川王은 馮信을 파견하여 淳于意에게 안마와 藥劑를 배우게 했다. 淮南王府에서는 劉晏이 方士들을 초빙하여 의료와 鍊丹製藥의 方術을 연구했다. 1973년 長沙 馬王堆에서 출토된 14종의 醫藥簡帛書는 前漢 長沙軑侯의 醫書이다(李經緯ㆍ林昭庚, 2000: 115-116).

32)

『漢書』 卷92, 游俠傳, “樓護字君卿, 齊人. 父世醫也, 護少隨父爲醫長安, 出入貴戚家. 護誦醫經, 本草, 方術數十萬言, 長者咸愛重之, 共謂曰: ‘以君卿之材, 何不宦學乎?’ 繇是辭其父, 學經傳, 爲京兆吏數年, 甚得名譽.”

33)

『漢書』 卷97下, 外戚傳下, “巫劉吾服祝詛. 毉徐遂成言習, 君之曰 ‘武帝時毉修氏刺治武帝得二千萬耳, 今愈上, 不得封侯, 不如殺上, 令中山王代, 可得封.’ 立等劾奏祝詛謀反, 大逆.”

34)

『史記』 卷129, 貨殖列傳, “由此觀之, ……醫方諸食技術之人, 焦神極能, 爲重糈也.”

35)

『呂氏春秋』 卷21, 察賢, “今有良醫於此, 治十人而起九人, 所以求之萬也.”

36)

『逸周書』 大聚, “鄉立巫醫, 具百藥以備疾災.”

37)

『春秋公羊傳』 隱公 4年, “巫者, 事鬼神, 禱解以治病請福者也.”

38)

이와 관련하여 周策縱은 고대의 巫醫가 노래와 춤으로 신을 내려오게 하고, 跳月, 望氣, 祭風雨, 祀生産,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의례 주관[送死], 祝禱와 詛祝, 絜除, 驅疫하는 ‘巫’의 역할을 수행한 것과 함께 醫酒, 湯液, 草藥, 蠱毒, 鍼石, 灸艾, 火 등의 ‘醫’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周策縱, 2009: 43-110). 史籍에서 巫와 医가 같이 언급된 사례가 많고 巫와 医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王國維도 지적하였다(王國維, 2007: 51-106).

39)

『漢書』 卷49, 爰盎晁錯傳, “陛下幸募民相徙以實塞下, …… 爲置醫巫, 以救疾病, 以脩祭祀, 男女有昏, 生死相卹, 墳墓相從, 種樹畜長, 室屋完安, 此所以使民樂其處而有長居之心也.”

40)

『漢書』 卷24下, 食貨志下, “工匠醫巫卜祝及它方技商販賈人坐肆列里區謁舍, 皆各自占所爲於其在所之縣官, 除其本, 計其利, 十一分之, 而以其一爲貢. 敢不自占, 自占不以實者, 盡沒入所采取, 而作縣官一歲.”

41)

『後漢書』 卷19, 耿弇列傳, “耿弇字伯昭, 扶風茂陵人也. …… 父況, 字俠游, 以明經爲郎, 與王莽從弟伋共學老子於安丘先生, 後爲朔調連率.”에 대해 李賢의 注에서는 “嵇康聖賢高士傳曰 ‘安丘望之字仲都, 京兆長陵人. 少持老子經, 恬淨不求進宦, 號曰安丘丈人. 成帝聞, 欲見之, 望之辭不肯見, 爲巫醫於人閒’也.”라고 하고 있다.

42)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許楊字偉君, 汝南平輿人也. 少好術數. 王莽輔政, 召爲郎, 稍遷酒泉都尉. 及莽簒位, 楊乃變姓名爲巫醫, 逃匿它界. 莽敗, 方還鄕里.”

43)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段翳字元章, 廣漢新都人也. 習易經, 明風角. …… 又有一生來學, 積年, 自謂略究要術, 辭歸鄕里. 翳爲合膏藥, 幷以簡書封於筒中, 告生曰: ‘有急發視之’.”

44)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郭玉者, 廣漢雒人也. 初, 有老父不知何出, 常漁釣於涪水, 因號涪翁. 乞食人閒, 見有疾者, 時下針石, 輒應時而效, 乃著『針經』, 『診脈法』傳於世. …… 和帝時, 爲太醫丞, 多有效應.”

45)

睡虎地秦墓竹簡整理小組, 『睡虎地秦墓竹簡』, 釋文注釋170, “作務員程, 老弱癃病, 衣食饑寒.”

46)

張家山二四七號漢墓竹簡整理小組, 2006: 48, “吏各循行其部中, 有疾病色者收食.”

47)

평시에 민에게 관부에서 치료를 제공한 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刑徒들에게는 의사의 치료를 받게 한 기사가 있다. 洛陽南郊에서 출토된 후한 刑徒磚志에 “右部無任勉刑穎川穎陰鬼薪範雍, 不能去, 留官致醫, 永初元年六月廿五日物故, 死在此下.”이라는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관부가 때로 형도에게 의료를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中國科學院考古研究所洛陽工作隊, 1972: 7).

48)

『睡虎地秦簡』, 封診式, “癘爰書: 某里典甲詣里人士五(伍)丙, 告曰: ‘疑癘, 來詣.’ 訊丙, 辭曰: ‘以三歲時病疕, 麋(眉)突, 不可智(知)其可(何)病.’ 毋(無)它坐. 令醫丁診之, 丁言曰: ‘丙毋(無)麋(眉), 艮本絕, 鼻腔壞. 刺其鼻不疐(嚏). 肘膝□□□到□兩足下奇(踦), 潰一所. 其手毋胈. 令號, 其音氣敗. 癘也.’”

49)

『睡虎地秦簡』 法律答問, “甲有完城旦罪, 未斷, 今甲癘, 問甲可(何)以論? 當遷癘所處之, 或曰當遷遷所定殺. 城旦, 鬼薪癘, 可(何)論? 當遷癘遷所.”

50)

『漢書』 卷75, 眭兩夏侯京翼李傳, “是歲, 關東大水, 郡國十一飢, 疫尤甚. ……臣聞之於師曰, ‘……今陛下明聖, 深懷要道, 燭臨萬方, 布德流惠, 靡有闕遺. 罷省不 急之用, 振救困貧, 賦醫藥, 賜棺錢, 恩澤甚厚.’”

51)

『漢書』 卷12, 平帝紀, “民疾疫者, 舍空邸第, 爲置醫藥.”

52)

『長沙走馬樓三國吳簡』의 戶籍簡에서는 戶人의 장애 여부와 질병(踵(腫)足, 刑, 盲, 闇, 聾, 眇, 腫病, 腹心病, 風病, 風矢病, 狂, 惪狂)이 기록되고 있는 것은 이 시기에 들어와 민간의 질병에 대한 국가의 파악과 통제가 한층 심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邢義田, 2011).

53)

전한시기의 전염병은 12회 나타난다. ① 後少帝 高后 시기(B.C.18) 長沙國 士卒大疫(『史記』 卷13; 『漢書』 卷95), ② 文帝 前元 말년(B.C.164) 水旱疾疫 (『漢書』 卷4), ③ 景帝 後元 1년(B.C.143) 5월 上庸民大疫死(『漢書』 卷26), ④ 後元 2년(B.C.142) 10월 衡山國ㆍ河東ㆍ雲中郡 民疫(『史記』 卷11), ⑤ 武帝 말년(B.C.89) 西北人民疫病(『漢書』 卷94上), ⑥ 宣帝 元康 2년(B.C.64) 夏, 5월 天下疾疫 (『漢書』 卷8), ⑦ 甘露中(B.C.53-50) 關東 流民疾疫(『漢書』 卷71), ⑧ 元帝初元年(B.C.48) 6월 民疾疫 (『漢書』 卷9), ⑨ 初元年(B.C.48) 9월 流民疾疫(『漢書』 卷 9; 卷75), ⑩ 成帝년간(B.C.37-B.C.7) 水旱疾疫(『漢書』 卷10), ⑪ 成帝년간(B.C.37-B.C.7) 疾疫溺死(『漢書』 卷84), ⑫ 平帝 元始 2년(2) 4월 靑州民疾疫(『漢書』 卷12).

54)

저자에 따르면 전한 성제 건시 4년(B.C.29) 이후, 중국 기후는 점차 한랭건조하게 변하기 시작하여 전한과 왕망의 멸망, 후한 왕실의 쇠퇴, 5호 동란, 한족의 강남 대이동 등을 초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55)

① 王莽 天鳳 3년(16년) 句町士卒疾疫(『漢書』 卷99中), ② 天鳳 3년-5년(16-18년) 益州士卒饑疫(『漢書』 卷95), ③ 天鳳 6년(19년) 饑疫(『漢書』 卷24下), ④ 地皇 3년(2년) 綠林大疾疫(『後漢書』 卷11).

56)

① 光武 建武 13년(37년) 揚ㆍ徐部大疾疫(『後漢書』 卷17引『古今注』), ② 建武 14년(38년) 4월 會稽大疫(『後漢書』 卷17引『古今注』), ③ 建武 16년(40년) 四方牛大疫(『東觀漢記』 卷18), ④ 建武 20년(4년) 秋 交趾軍吏瘴疫(『後漢書』 卷24), ⑤ 建武 22(46년) 西北人畜饑疫(『後漢書』 卷89), ⑥ 建武 25년(49년) 3월 武陵士卒多疫死(『後漢書』 卷24), ⑦ 建武 26년(50년) 郡國七大疫 (『後漢書』 卷17引『古今注』), ⑧ 建武 27년(51년) 西北 匈奴人畜疫死(『後漢書』 卷18), ⑨ 明帝 永平 18년(75년) 牛疫死 (『後漢書』 志 第16), ⑩ 章帝 建初 1년(76년) 京師 및 三州大旱, 災疫未息(『後漢書』 卷3; 卷48), ⑪ 建初 4년(79년) 겨울 京都牛大疫 (『後漢書』 志第16), ⑫ 和帝 永元년간(89년-104년) 疾疫(『後漢書』 卷35), ⑬ 安帝 元初 6년(19년) 夏, 4월 會稽大疫 (『後漢書』 卷17), ⑭ 延光 4년(125년) 12월 京師大疫(『後漢書』 卷6; 卷17), ⑮ 安帝년간(107-125) 汝南(百姓)遭疫死亡(『後漢書』 卷82上), ⑯ 順帝 永建 1년(126년) 1월 疫癘水潦(『後漢書』 卷6), ⑰ 永建 4년(129년) 夏, 疫氣流行(『後漢書』 卷30上), ⑱ 順帝년간(126-14년) 疾疫 (『後漢書』 卷38), ⑲ 桓帝 元嘉 1년(15년) 春, 1월 京師疾疫 (『後漢書』 卷7; 卷17), ⑳ 元嘉 1년(15년) 2월 九江ㆍ廬江大疫 (『後漢書』 卷7; 卷17), ㉑ 延熹 4년(16년) 春, 1월 南宮嘉徳殿大疫(『後漢書』 卷7; 卷17), ㉒ 延熹 5년(162년) 隴右軍中大疫(『後漢書』 卷65), ㉓ 延熹 9년(16년) 1월 南州水旱疾疫(『後漢書』 卷7), ㉔ 靈帝 建寧 4년(17년) 3월 大疫 (『後漢書』 卷8; 卷17), ㉕熹平 2년(173년) 春, 1월 大疫(『後漢書』 卷8; 卷17), ㉖ 光和 2년(179년) 春 大疫 (『後漢書』 卷8; 卷17), ㉗ 光和 5년(182년) 2월 大疫(『後漢書』 卷8; 卷17), ㉘ 中平 2년(185년) 春, 1월 大疫 (『後漢書』 卷8; 卷17), ㉙ 獻帝 建安 13년(208년) 春 赤壁士卒饑疫(『三國志』 卷47), ㉚ 建安 16년(21년) 鄴疫病(『三國志』 卷1 裴松之注), 建安 20년(215년) 合肥疫疾(『三國志』 卷5), 建安 22년(217년) 大疫(『三國志』 卷15), 建安 24년(219년) 荊州大疫(『三國志』 卷24), 建安 25년(20년) 洛陽 士民疾癘(『三國志』 卷15 裴松之注).

57)

『後漢書』 卷41, 第五鍾離宋寒列傳, “鍾離意字子阿, 會稽山陰人也. ……建武十四年, 會稽大疫, 死者萬數, 意獨身自隱親, 經給醫藥, 所部多蒙全濟.”

58)

『後漢書』 卷35, 張曹鄭列傳, “(曹褒)遷城門校尉, 將作大匠. 時有疾疫, 褒巡行病徒, 爲致醫藥, 經理饘粥, 多蒙濟活.”

59)

『論衡』 命義, “溫氣疫癘, 千戶滅門.”

60)

建安七子 중 王粲, 徐幹, 陳琳, 應瑒, 劉楨이 조조 막부의 일원으로 오나라 원정에 따라갔다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曹丕는 <吳質에게 보내는 편지(與吳質書)>에서, “지난해 전염병으로 친구들이 모두 그 죽었다. 徐幹, 陳琳, 應瑒, 劉楨이 일시에 같이 죽으니, 아픔을 말로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편지는 『文選』에 실려 있다).

61)

曹植, <說疫氣>, “癘氣流行, 家家有僵屍之痛, 室室有號泣之哀. 或闔門而殪, 或覆族而喪.”

62)

『傷寒論』 序文, “余宗族素多, 向餘二百. 建安紀年以來, 猶未十稔, 其死亡者, 三分有二, 傷寒十居其七.”

63)

『後漢書』 卷7, 孝桓帝紀, “九年春正月 ……己酉, 詔曰: ‘比歲不登, 民多飢窮, 又有水旱疾疫之困. 盜賊徵發, 南州尤甚. 災異日食, 譴告累至. 政亂在予, 仍獲咎徵. 其令大司農絶今歲調度徵求, 及前年所調未畢者, 勿復收責. 其災旱盜賊之郡, 勿收租, 餘郡悉半入.’”; 『後漢書』 卷7, 孝桓帝紀, 十一月甲申, 詔曰: ‘朕攝政失中, 災眚連仍, 三光不明, 陰陽錯序. 監寐寤歎, 疢如疾首. 今京師廝舍, 死者相枕, 郡縣阡陌, 處處有之, 甚違周文掩訩之義. 其有家屬而貧無以葬者, 給直, 人三千, 喪主布三匹; 若無親屬, 可於官壖地葬之, 表識姓名, 爲設祠祭. 又徒在作部, 疾病致醫藥, 死亡厚埋藏.’”; 『後漢書』 卷6, 孝順孝沖孝質帝紀, “甲辰, 詔稟貸荊ㆍ豫ㆍ兗ㆍ冀四州流冗貧人, 所在安業之, 疾病致醫藥.”; 『後漢書』 卷4, 孝和孝殤帝紀, “十五年春閏月乙未, 詔流民欲還歸本而無糧食者, 過所實稟之, 疾病加致醫藥. 其不欲還歸者, 勿强.” 등.

64)

『後漢書』 卷5, 孝安帝紀, “夏四月, 會稽大疫, 遣光祿大夫將太醫循行疾病, 賜棺木, 除田租, 口賦.”; 『後漢書』 卷7, 孝桓帝紀, “元嘉元年春正月, 京師疾疫, 使光祿大夫將醫藥案行.”; 『後漢書』 卷8, 孝靈帝紀, “大疫, 使中謁者巡行致醫藥.”; 『後漢書』 卷8, 孝靈帝紀, “二年春正月, 大疫, 使使者巡行致醫藥.”; 『後漢書』 卷8, 孝靈帝紀, “二年春, 大疫, 使常侍ㆍ中謁者巡行致醫藥.”

65)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李郃字孟節, 漢中南鄭人也. ……安帝崩, 北鄕侯立, 復爲司徒. 及北鄕侯病, 郃陰與少府河南陶範, 步兵校尉趙直謀立順帝, 會孫程等事先成, 故郃功不顯. 明年, 坐吏民疾病, 仍有災異, 賜策免.”

66)

『說苑』 卷19, 脩文, “古者有菑者謂之厲, 君一時素服, 使有司弔死問疾, 憂以巫醫, 匍匐以救之, 湯粥以方之.”

67)

『山海經』 大荒西經, “大荒之中, 有山名曰豐沮玉門, 日月所入. 有靈山, 巫咸, 巫則, 巫肦, 巫彭, 巫姑, 巫真, 巫禮, 巫抵, 巫謝, 巫羅十巫, 從此升降, 百藥爰在.”

68)

『漢書』 卷25上, 郊祀志上, “李少君 ……臣嘗游海上, 見安期生, 安期生食臣棗, 大如瓜. 安期生僊者, 通蓬萊中, 合則見人, 不合則隱.” “師古曰: ‘列仙傳云安期生琅邪人, 賣藥東海邊, 時人皆言千歲也.’”

69)

『後漢書』 卷36, 鄭范陳賈張列傳, “楷字公超, 通嚴氏春秋, 古文尙書, 門徒常百人. 賓客慕之, 自父黨夙儒, 偕造門焉. ……家貧無以爲業, 常乘驢車至縣賣藥, 足給食者, 輒還鄕里.”

70)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臺佟字孝威, 魏郡鄴人也. 隱於武安山, 鑿穴爲居, 采藥自業. 建初中, 州辟不就.”

71)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韓康字伯休, 一名恬休, 京兆霸陵人. 家世著姓. 常采藥名山, 賣於長安市, 口不二價, 三十餘年. 時有女子從康買藥, 康守價不移. 女子怒曰: ‘公是韓伯休那? 乃不二價乎?’ 康歎曰: ‘我本欲避名, 今小女子皆知有我, 何用藥爲?’ 乃遯入霸陵山中.”

72)

『後漢書』 卷26, 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豹子著, 字休明. 少以經行知名, 不應州郡之命. 大將軍梁冀辟, 不就. 延熹二年, 桓帝公車備禮徵, 至霸陵, 稱病歸, 乃入雲陽山, 采藥不反.”

73)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者, 汝南人也. 曾爲市掾. 市中有老翁賣藥, 懸一壺於肆頭, 及市罷, 輒跳入壺中. ……翁還, 撫之曰: ‘子可敎也.’ ……遂能醫療衆病, 鞭笞百鬼, 及驅使社公.”

74)

『呂氏春秋』 本生, 重己, 貴生, 情欲, 盡類, 達郁 편 등에 양생보건과 의약에 관련된 내용이, 「任志」, 「辨士」, 「審時」 등에 약재의 재배와 수집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75)

『爾雅』 釋草, 釋蟲, 釋魚, 釋鳥, 釋獸, 釋畜 등에도 약재가 포함된 많은 양의 식물과 동물이 기록되어 있다.

76)

약재를 이용한 처방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를 참조(張雷, 2019; 민후기, 2024: 371-429; 2025:265-325).

77)

질병에 따른 약재 처방전이 수록된 출토 간백자료는 다음과 같다. ① 周家台秦簡 病方, ② 北京大學藏秦簡 病方, ③ 馬王堆醫學帛書(③-1 五十二病方, ③-2 養生方, ③-3 療射工毒方, ③-4 房內記, ③-5 胎產書)), ④ 天回醫簡 六十病方 藥物, ⑤ 武威醫簡 藥物, ⑥ 阜陽漢簡 萬物 藥物, ⑦ 里耶醫簡, ⑧ 敦煌漢簡醫藥簡, ⑨ 居延漢簡醫藥簡, ⑩ 居延新簡醫藥簡, ⑪ 肩水金關漢簡, ⑫ 懸泉漢簡醫藥簡, ⑬ 羅布淖爾漢簡醫藥簡, ⑭ 額濟納漢簡醫藥簡, ⑮ 地灣漢簡醫藥簡, ⑯ 張家界古人堤醫方木牘 醫藥簡, ⑰ 天長西漢藥方木牘鎖阿金, ⑱ 長沙尙德街醫方木牘, ⑲ 荊州胡家草場醫藥簡

78)

『禮記』 月令 第6, “是月也, 聚畜百藥.”

79)

간백자료에는 버섯 중 茯苓이 자주 처방되고 있는데, 馬王堆醫學帛書 중 五十二病方과 養生方, 天回醫簡 六十病方, 居延新簡醫藥簡, 張家界古人堤醫方木牘醫藥簡, 荊州胡家草場醫藥簡에서 처방되고 있다.

80)

『抱朴子』 内篇, “治卒暴之候, 皆用貴藥, 動數十種, 自非富室而居京都者, 不能素儲, 不可卒辦也.”

81)

『後漢書』 卷55, 章帝八王傳, “慶多被病, 或時不安, 帝朝夕問訊, 進膳藥, 所以垂意甚備. …… 後上言外祖母王年老, 遭憂病, 下土無毉藥, 願乞詣洛陽療疾.”

82)

李昉, 『太平御覽』 卷984에 실린 應劭의 <貢藥物表>, “應劭表曰:臣劭言: “郡舊因計吏獻藥, 闕而不修, 慚悸交集, 無辭自文. 今道少通, 謹遣五官孫艾貢伏苓十斤, 紫芝六枝, 鹿茸五斤, 五味一升, 計吏發行, 輒復表貢.”

83)

『後漢書』 卷64, 吳延史盧趙列傳, “延篤字叔堅, 南陽犨人也. …… 時皇子有疾, 下郡縣出珍藥, 而大將軍梁冀遣客齎書詣京兆, 幷貨牛黃. 篤發書收客, 曰: ‘大將軍椒房外家, 而皇子有疾, 必應陳進醫方, 豈當使客千里求利乎?’ 遂殺之.

84)

『漢書』 卷25下, 郊祀志下, “候神方士使者副佐, 本草待詔七十餘人皆歸家.”라는 기사에 대해 顔師古는 “本草待詔, 謂以方藥本草而待詔者.”라고 주를 달고 있다.

85)

『漢書』 卷12, 平帝紀, “徵天下通知逸經, 古記, 天文, 曆算, 鍾律, 小學, 史篇, 方術, 本草及以五經, 論語, 孝經, 爾雅敎授者, 在所爲駕一封軺傳, 遣詣京師. 至者數千人.”

86)

『管子』 權修 第3, “上恃龜筮, 好用巫醫, 則鬼神驟祟”

87)

『鹽鐵論』 散不足 第29, “古時, 德行求福, 故祭祀而寬, 仁義求吉, 故卜筮而希. 今世俗寬于行而求于鬼, 怠于禮而篤于祭, ……今世俗飾僞行詐, 爲民巫祝, 以取釐謝, 堅頟健舌, 或以成業致富. 故憚事之人, 釋本相學. 是以街巷有巫, 閭里有祝.”

88)

應劭, 『風俗通義』 怪神, “巫祝賦歛受謝, 民畏其口, 懼被祟, 不敢拒逆, 是以財盡於鬼神, 産匱於祭祀.” 동일한 기사가 『後漢書』에도 실려 있다. 『後漢書』 卷41, 第五倫傳, “會稽俗多淫祀, 好卜筮. 民常以牛祭神, 百姓財産以之困匱, 其自食牛肉而不以薦祠者, 發病且死先爲牛鳴, 前後郡將莫敢禁.”

89)

王符, 『潛夫論』 浮侈, “休其蠶織, 而起學巫祝, 鼓舞事神, 以欺誣細民, 熒惑百姓. 婦女羸弱, 疾病之家, 懷憂憒憒, 皆易恐懼. 至使奔走便時, 去離正宅, 崎嶇路側, 上漏下濕, 風寒所傷, 姦人所利, 賊盜所中, 益禍益崇, 以致重者不可勝數. 或棄醫藥, 更往事神, 故至於死亡, 不自知爲巫所欺誤, 乃反恨事巫之晩.”

90)

『抱朴子』 內篇 道意 “後有一人姓李名寬, 到吳而蜀語, 能祝水治病頗愈, 於是遠近翕然, 謂寬爲李阿, 因共呼之爲李八百, 而實非也. 自公卿以下, 莫不雲集其門, 後轉驕貴, 不複得常見, 賓客但拜其外門而退, 其怪異如此. 於是避役之吏民, 依寬爲弟子者恒近千人.”

91)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徐登者, 閩中人也. 本女子, 化爲丈夫. 善爲巫術. 又趙炳, 字公阿, 東陽人, 能爲越方. 時遭兵亂, 疾疫大起, 二人遇於烏傷溪水之上, 遂結言約, 共以其術療病. 各相謂曰: ‘今旣同志, 且可各試所能.’ 登乃禁溪水. 水爲不流, 炳復次禁枯樹, 樹卽生荑, 二人相視而笑, 共行其道焉. 登年長, 炳師事之. 貴尙淸儉, 禮神唯以東流水爲酌, 削桑皮爲脯. 但行禁架, 所療皆除. 後登物故, 炳東入章安, 百姓未之知也. 炳乃故升茅屋, 梧鼎而爨, 主人見之驚懅, 炳笑不應, 旣而爨孰, 屋無損異. 又嘗臨水求度, 船人不和之, 炳乃張蓋坐其中, 長嘯呼風, 亂流而濟. 於是百姓神服, 從者如歸. 章安令惡其惑衆, 收殺之. 人爲立祠室於永康, 至今蚊蚋不能入也.”

92)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의 “趙炳, 字公阿, 東陽人, 能爲越方.”이라는 구절에 대해, 李賢의 주에서는 “『抱朴子』曰: ‘道士趙炳, 以氣禁人, 人不能起. 禁虎, 虎伏地, 低頭閉目, 便可執縛. 以大釘釘柱, 入尺許, 以氣吹之, 釘卽躍出射去, 如弩箭之發.’”이라고 하고 있다.

93)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의 “趙炳, 字公阿, 東陽人, 能爲越方.”이라는 구절에 대해, 李賢의 주에서는 “『異苑』云: ‘趙侯以盆盛水, 吹氣作禁, 魚龍立見」. 越方, 善禁咒也.’”라고 하고 있다.

94)

『隋書』 卷28, 百官下에서는 “太醫署有主藥二人. 醫師二百人. 藥園師二人. 醫博士二人. 助敎二人. 按摩博士二人. 祝禁博士二人等員.”이라고 하여 太醫署에 祝禁博士 2인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고, 『舊唐書』 卷44, 志 제24, 職官3에서는 “太醫署, ……咒禁博士一人, 從九品下. 咒禁師二人, 咒禁工八人, 咒禁生十人. 咒禁博士掌敎咒禁生以咒禁, 除邪魅之爲厲者.”라고 하여 太醫署에 從九品下 咒禁博士 등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95)

송대에는 書禁科(咒禁科ㆍ禁科), 원대에는 의학 13과 중에 축유과가 있었다(席榕ㆍ李昱頡ㆍ楊東方, 2020: 285-288).

96)

『隸釋』 卷3, <無極山碑>, “每國縣水旱及民疾病, 禱祈輒應.” 碑는 漢 靈帝 光和 4년에 세워졌다.

97)

『風俗通義』 怪神, “謹按, 汝南鮦陽有於田得麇者, 其主未往取也. 啇車十餘乘經澤中行, 望見此麇著繩, 因持去. 念其不事, 持一鮑魚置其處. 有頃, 其主往, 不見所得麇, 反見鮑君, 澤中非人道路, 怪其如是, 大以爲神, 轉相告語. 治病求福, 多有效驗. 因爲起祀舍, 眾巫數十, 帷帳鍾鼓, 方數百里皆來禱祀, 號鮑君神. 其後數年, 鮑魚主來歷祠下, 尋問其故曰, ‘此我魚也, 當有何神!’ 上堂取之, 遂從此壞. 傳 曰, ‘物之所聚斯有神.’ 言人共獎成之耳.”

98)

『韓詩外傳』 卷2, “國無道, 則飄風厲疾, 暴雨折木, 陰陽錯氛, 夏寒冬溫, 春熱秋榮, 日月無光, 星辰錯行, 民多疾病, 國多不祥, 群生不壽, 而五穀不登.”

99)

王充, 『論衡』, “行堯, 舜之德, 天下太平, 百災消滅, 雖不逐疫, 疫鬼不往. 行桀, 紂之行, 海內擾亂, 百禍並起, 雖日逐疫, 疫鬼猶來.”

100)

『漢書』 卷9, 元帝紀, “夏四月, 有星孛于參. 詔曰: ‘朕之不逮, 序位不明, 衆僚久懬, 未得其人. 元元失望, 上感皇天, 陰陽爲變, 咎流萬民, 朕甚懼之. 乃者關東連遭災害, 饑寒疾疫, 夭不終命.’”

101)

『左傳』 昭公 1年, “水旱癘疫之災於是乎禜之, 日月星辰之神, 則雪霜風雨之不時, 於是乎禜之.”

102)

프레이져가 말한 유감주술(類感呪術: Sympathetic magic)을 한대 지식인들은 ‘天人感應’으로 표현했다(劉國民, 2007: 260-369).

103)

『後漢書』 卷82, 方術列傳에는 바람의 흐름을 읽어 점을 치는 풍각과 占候에 능했던 관리 謝夷吾, 圖讖을 좋아했고, 재이에 대한 논설이나 길흉의 예언을 잘했던 博士인 勃海郡의 郭鳳, 七政, 元氣, 風雲에 의한 占候를 공부하여 郡의 文學掾이 되었던 楊由, 젊어 篤學하여 風角에 밝아 公府의 부름을 받았던 丹陽郡 句容縣 사람 李南, 또 河圖, 洛書 및 風星에도 통했던 漢中郡 南鄭縣 사람 李郃, 天文과 讖緯說, 풍각과 推步(천문역법의 계산)에 밝았던 汝南郡 平輿縣 사람 廖扶, 젊어 三輔에 유학하면서 京氏易를 전공했고 아울러 五經에도 밝았던 樊英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104)

高獲은 천문에 밝고, 遁甲을 깨달았으며 능히 귀신을 부렸으며 태수의 청으로 郡에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高獲字敬公, 汝南新息人也. 爲人尼首方面. 少遊學京師, 與光武有舊. ……時郡境大旱. 獲素善天文, 曉遁甲, 能役使鬼神. 昱自往問何以致雨.

105)

『後漢書』 卷82, 方術列傳에는 河圖, 洛書와 推步之術을 연구하였으며 弘農 현령이 되어 제단을 쌓고 기도하여 비를 내리게 해 황충을 사라지게 하고, 장마로 인한 백성들의 홍수 피해를 면하게 해주었다는 公沙穆, 天文과 算術에 뛰어나 조위가 한으로부터 선양받을 것을 예언하였다는 單颺, 五經에 박통했고 특히 圖緯之學에 밝아 일식과 궁중의 화재를 예언하여 맞추었다는 韓說, 젊어 太學에 유학하였으며, 楊厚한테서 圖讖說을 배워 劉備가 蜀에서 天子를 칭할 것을 예언했다는 董扶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106)

지금까지 든 인물들 가운데 李南은 太學에 유학했고, 唐檀도 太學에 유학하였으며 災異의 星占을 좋아하였으며 향리로 돌아와서는 늘 1백 여 명을 교육하면서 태수의 자문에 응하여 예언을 하였다.

107)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段翳字元章, 廣漢新都人也. 習易經, 明風角. 時有就其學者, 雖未至, 必豫知其姓名. 嘗告守津吏曰: ‘某日當有諸生二人, 荷擔問翳舍處者, 幸爲告之.’ 後竟如其言. 又有一生來學, 積年, 自謂略究要術, 辭歸鄕里. 翳爲合膏藥, 幷以簡書封於筒中, 告生曰: ‘有急發視之.’ 生到葭萌, 與吏爭度, 津吏檛破從者頭. 生開筒得書, 言到葭萌, 與吏鬥頭破者, 以此膏裹之. 生用其言, 創者卽愈. 生歎服, 乃還卒業. 翳遂隱居竄跡, 終于家.”

108)

『한어대사전』에서는 축유를 ‘고대의 주술과 부적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는 방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閆康 등은 “‘축(祝)’과 ‘유(由)’ 두 글자의 여러 의미를 조합해 보면, 고대 중국어 맥락에서 ‘축유(祝由)’는 (신에게) 병의 원인을 기원하거나, (환자에게) 병의 원인을 당부하거나, 병의 근원을 끊는 것 등 몇 가지 주요 의미를 지닌다”고 하고 있다(閆康 외, 2025: 3916-3918). 金麗는 ‘祝由’가 『五十二病方』에 나오는 ‘祝尤’에서 변형된 것인지 여부는 추가적인 고증이 필요하지만, 『오십이병방』에 수록된 축사와 방술은 다양한 형식을 통해 환자에게 정신적 위안과 주의 전환, 용기를 북돋아 주며, 이는 통증을 완화하고 병세를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되고, 정신 질환과 같은 일부 특수한 질병의 경우 심지어 완치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金麗, 2006: 326-328).

109)

『五十二病方』에 보이는 치료 방법을 통계내보면 전체 283사례의 치료방법이 나타나는데, 내복법이 60사례(21.2%), 외치법이 147사례51.9(%), 巫祝치료가 39사례(13.8%), 불확실이 37사례(13.1%)를 차지하고 있다. 외치법은 다시 敷法이 80사례(28.3%), 浴法이 10사례(3.5%), 塗法이 12사례(4.2%), 熨法이 14사례(4.9%), 炭法이 3사례(1.1%), 灸法이 8사례(2.8%), 熏法이 7사례(2.5%), 按摩가 10사례(3.5%), 手術이 3사례(1.1%)를 차지하고 있다(裘錫圭 주편, 2014).

110)

裘錫圭 주편,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中華書局, 2014. p. 233, “賁(噴)吙: ‘伏食, 父居北在, 母居南止, 同產三夫, 爲人不德. 已. 不已, 靑傅之.’”

111)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以辛已日由曰: ‘賁(噴)辛已日.’ 三; 曰: ‘天神下干疾, 神女倚序聽神吾(語), 某狐父非其處所, 巳(已), 不巳(已), 斧斬若.’ 即操布攺之二七.”

112)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34, “令尤(疣)者抱禾, 令人嘑(呼)曰: ‘若胡爲是?’ 應曰: ‘吾尤(疣).’ 置去禾<禾去>, 勿顧.”

113)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35, “以月晦日之丘井有水者, 以敝帚騷(掃)尤(疣)二七, 祝曰: ‘今日月晦, 騷(掃)尤(疣)北.’ 入帚井中.” 이와 유사한 주술이 『千金要方』 卷23, 去疣目方, “每月十五日月正中时, 望月, 以秃倏帚掃三七遍, 差.”라는 구절이다.

114)

『抱朴子』에서는 禹步에 대해 “똑바로 서서 오른쪽 발은 앞으로 왼쪽 발은 뒤에 있게 한다. 다음에는 다시 오른쪽 발을 앞으로 하고 왼쪽 발이 오른쪽 발을 뒤따르게 하며 합친다. 이것이 제 1 보이다. 다음에 또 오른쪽 발을 앞으로 한다. 그 다음 왼쪽 발을 앞으로 하고 오른쪽 발을 왼쪽 발에 뒤따르게 하며 합친다. 이것이 제2보이다. 다음에 또 오른쪽 발을 앞으로 하고 왼쪽 발로 오른쪽 발을 뒤따르게 하며 합친다. 이것이 제 3보이다. 이로써 禹步를 끝마친다(『包朴子』 登步).”라고 서술하고 있다. 禹步가 어떻게 생겨나 도교 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김현자의 연구를 참조(김현자, 1998: 221-239).

115)

禹步는 『오십이병방』에 6번 보이는데(㿗 3, 蚖 1, 疣 1, 魃 1), 『法言』 重黎에서는 “昔似氏治水土而巫步多禹.”라고 하고, 李軌의 注에서는 “禹治水土, 涉山川, 病足, 故行跛也. ……而俗巫多效禹步.”라고 하였고, 葛洪, 『抱朴子』 仙藥에서는 “凡作天下百術, 皆宜知禹步.”라고 하고 있다. 또한 우보로 3걸음마다 하나의 점을 만들어, 전체 7개의 점을 만드는데, 그 모양이 북두칠성의 모양과 같아 禹步를 북두칠성의 신통력을 얻는 걸음으로 인식하였다(臧振, 1994: 105).

116)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17, “外傷을 입어 피가 흐르는 것을 멈추는 처방: 상처 입은 사람이 피가 흐르면 축유하여 ‘남자는 피가 굳고, 여자는 피가 멈추어라.’라고 한다. (그런 다음에) 땅에 가로, 세로가 교차하는 ×를 그린다(傷者血出, 祝曰: “男子竭, 女子滅.” 五畫地【□】之).”

117)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24, “諸傷8: 傷者血出, 祝曰: ‘男子竭, 女子(滅).’ 五畫地【□】之.” 유사한 구절이 마왕퇴에서 출토된 養生方에도 走7(疾行善趨之方)에 “行宿, 自呼: ‘大山之陽, 天□□□, □□先□, 城郭不完, 口以金關.’ 即禹步三, 曰以產荊長二寸周晝畫中”이라는 구절과 走8에 “東鄉(向)呼: ‘敢告東君明星, 口來敢到畫所者, 席彼裂瓦, 何人?’ 有(又)即周中.”이라는 구절이 있다.

118)

『靈樞』 官能의 “疾毒言語輕人者, 可使唾癰咒病.”이라는 구절이나 『論衡』 言毒의 “太陽之地, 人民促急, 促急之人, 口舌爲毒. 故楚, 越之人, 促急捷疾, 與人談言, 口唾射人, 則人脤胎(脹), 腫而爲創. 南郡極熱之地, 其人祝樹樹枯, 唾鳥鳥墜.” 등의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고대에는 침에 살상력이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119)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45, “【禹】步三, 湮汲, 取棓(杯)水歕(噴)鼓三, 曰: ‘上有□【□□□□□□□□】鐵銳某□【□□】【□】□, 㱃(飲)之而復(覆) 其棓(杯).”

120)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52, “㿗1: 操柏杵, 禹步三, 曰: “賁(噴)者一襄胡, 濆(噴)者二襄胡, 濆(噴)者三襄胡. 柏杵臼穿一, 毋(無)一. □, 【□】獨有三. 賁(噴)者穜(撞) 若以柏杵七, 令某㿗毋(無)一 必令同族抱, 令㿗者, 直東鄉(向)窗道外, 攺橦(撞)之.”;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54, “以辛已日由曰: ‘賁(噴)辛已日.’ 三; 曰: ‘天神下干疾, 神女倚序聽神吾(語), 某狐父非其處所, 巳(已), 不巳(已), 斧斬若.’ 即操布攺之二七.”

121)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53, “刖刑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날이 밝을 즈음에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가운데가 빈 침[筩]으로 환자를 (令斬足者淸明東(向), 以筩(䞣)之二七.” ‘淸明’에 대한 해석은 周一謨ㆍ蕭佐桃, 1989: 13에 따랐다.

122)

『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5), p. 253, “辛卯日, 立堂下東鄉(向), 鄉(向)日, 令人提挾頹(㿗)者曰: “今日辛卯, 更名曰禹.”이라는 구절을 보면 ‘禹’라는 이름에 신통력을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123)

孫嘉璘 등은 ① 祝法, ② 咒法, ③ 禁法, ④ 唾法, ⑤ 噴法, ⑥ 符籙法, ⑦ 畫地法, ⑧手訣法, ⑨木擊法, ⑩ 帚掃法, ⑪ 注杯法, ⑫ 禹步法, ⑬ 芳香療法, ⑭ 五音療法, ⑮ 吐納導引法, ⑯ 叩齒法을 축유 내지 축유와 관련된 치료방법으로 들고 있다(孫嘉璘 외, 2025: 104-109 참조).

124)

『前漢紀』 前漢孝宣皇帝紀 제20, “今五口之家, 治田百畝, 歲常不足以自供, 若不幸即有疾病死喪之費, 則至於甚困.”

125)

鮑照, 『鮑參軍集』 卷4, <松柏篇>, “가산을 기울여 약을 구하고 집을 쓰러뜨려 의원을 불러오네. 뜸과 침의 고통을 헛되이 겪었건만 문득 죽음이 닥쳐 거절할 수가 없구나(傾家行藥事, 顛沛去迎醫. 徒備火石苦, 奄至不得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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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부록 1. 출토 간백 자료에 나타난 초부 약물과 버섯류

Appendix 1. Herbal Medicines and Mushrooms Found in Excavated Bamboo Slips and Silk Materials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그림 1.

滿城漢墓 발견 ‘醫工’ 기물(좌), 『集古攷圖』에 실린 ‘彭城醫長’ 도장(우)

Figure 1. An ‘medical artisan’ artifact unearthed from a Han-dynasty tomb discovered in Mancheng (left) and the “Chief Physician of Pengcheng” seal featured in JiguKaotu (right)

(좌: “医工”铜盆, 中國國家博物館. https://www.chnmuseum.cn/Portals/0/web/exhibition/exhibitions/201812han/41.html. Accesssed 30 Aug 2026. 우: 『集古攷圖』)

구분 간행 년도
草部藥物(121) •奸(葌ㆍ藁)本(②), •甘遂(⑤ㆍ⑲), •甘草(③-1ㆍ④ㆍ⑤ㆍ⑦ㆍ⑨ㆍ⑰ㆍ⑱ㆍ⑲), •[薑(畺)(③-1ㆍ③-4ㆍ④ㆍ⑤ㆍ⑧ㆍ⑨ㆍ⑩ㆍ⑫)ㆍ薑葉⑥ㆍ生畺(薑)④ㆍ幹薑(畺)(②ㆍ③-1ㆍ③-2ㆍ③-2ㆍ③-4ㆍ④ㆍ⑪ㆍ⑯ㆍ⑱)ㆍ枯畺(薑)(③-1)], •景天(③-1), •葪(芥)(③-1), •[藁本(①ㆍ③-2) ㆍ (菻) 本(③ - 2) ] , • 苦參(④ ㆍ ⑤) , •槁草(⑤) , •雚(③ - 2) , •菅茭(④) , • 款冬(④ ㆍ ⑤) , •[栝蔞(④)ㆍ栝樓根(⑤)ㆍ生栝婁(蔞)根④]ㆍ, •芎䓖(④ㆍ⑤ㆍ⑮ㆍ⑱), •卷柏(④), •葵(②ㆍ③-1ㆍ⑥)ㆍ葵莖(③-1)ㆍ葵種(③-1)ㆍ陳葵(③-1)ㆍ陳葵莖(②ㆍ③-1)ㆍ陳葵穜(種)(③-1), •蓳葵(③-1), •蓍(耆)根(黄芪)④, •[桔梗(③-2ㆍ④ㆍ⑤ㆍ⑧ㆍ⑨ㆍ⑩ㆍ⑩ㆍ⑫ㆍ⑯ㆍ⑰)ㆍ利如④], •丹參(④ㆍ⑭), •[當歸(⑤ㆍ⑧ㆍ⑱)ㆍ말린 當歸(⑤)], •大戟(④ㆍ⑲), •[大黃(④ㆍ⑤ㆍ⑧ㆍ⑩ㆍ⑲)ㆍ大黃丹(⑤)], •[菟絲(⑥)ㆍ菟絲實(③-2ㆍ④ㆍ⑤), •毒堇(③-1), •冬葵穜(種)(③-2), •東[冬]灰(①), •杜虞(③-4), •蘭(③-1ㆍ⑥)ㆍ蘭根(③-1)ㆍ蘭本(⑦)ㆍ蘭實(③-1ㆍ③-3)ㆍ蘭葉(③-3)ㆍ蕑(③-2)ㆍ大蘭⑲, •狼毒(⑤), •[狼牙(④)ㆍ狼牙根(③-1)], •萊(③-2), •藜蘆(③-1ㆍ④ㆍ⑤ㆍ⑫), •蘆茹(閭茹ㆍ蘭茹)(④)ㆍ代廬茹(⑤), •龍膽(④ㆍ⑧), •龍須(③-1ㆍ⑥), •漏蘆(③-1ㆍ⑤), •菱芰(③-3), •麻黃(⑤ㆍ⑯), •蔓④, •滿冬(③-2), •苺莖(③-1), •牡(杜衡)(③-5), •牡蒙④, •牡丹(⑤), •[門冬(③-2ㆍ⑤ㆍ⑩)ㆍ烏韭⑥], •虋冬(③-2), •麋(蘼)蕪本(③-1), •半夏(③-1ㆍ④ㆍ⑤ㆍ⑥ㆍ⑧ㆍ⑩), •菝葜④, •房葵(③-2ㆍ④), •防己(⑯), •防風(③-1ㆍ③-2ㆍ③-2ㆍ④ㆍ⑤ㆍ⑬ㆍ⑱), •[白蘞(③-1ㆍ④ㆍ⑤)ㆍ蘞本(②)], •白薇(④), •[白芫(⑧ㆍ白芫本(③-2)), •白芩〈芍〉⑯, •白茝(芷)(③-1ㆍ④ㆍ⑤), •白草(⑧), •白昌根④, •白衡(③-1), •附子(⑤ㆍ⑧ㆍ⑩ㆍ⑮ㆍ⑯), •汾菌(囷)③-2), •蓬虆(蓬蘽)(③-1), •蕜(韮)④, •非(飛)廉華(④), •萆薢(③-2ㆍ③-2ㆍ③-2), •[蛇床(③-2ㆍ③-4ㆍ④)ㆍ蛇床華(③-2)], •山芥④, •產齊(薺)(③-1), •商陸(⑥), •署與(薯蕷)⑤, •石公龍(⑩), •石南草(⑧), •析蓂(⑦), •石韋(③-1ㆍ③-2ㆍ⑥), •石衣(④), •[細辛(③-2ㆍ④ㆍ⑤ㆍ⑥ㆍ⑧ㆍ⑨ㆍ⑫ㆍ⑮ㆍ⑯)ㆍ少辛(遼細辛)④], •[續斷(⑤)ㆍ續斷根(③-1)], •蒁(③-2), •柴(茈)胡(④ㆍ⑤), •[艾(③-1ㆍ⑦)ㆍ艾葉⑥], •蘘草本(⑲), •魚衣(③-1), •藇⑰, •[烏頭(①ㆍ⑯)ㆍ天雄⑤ㆍ則(荝)④], •[烏喙(②ㆍ③-1ㆍ③-2ㆍ④ㆍ⑤ㆍ⑥ㆍ⑧ㆍ⑨ㆍ⑫ㆍ⑰ㆍ⑲)ㆍ秋烏豙(喙)(③-1)], •五味子(⑱), •屋榮蔡(③-1), •菀(③-2ㆍ④ㆍ⑮), •芺草(要(蔈)苕)(③-2), •牛膝(③-1ㆍ③-2ㆍ④ㆍ⑤), •鬱金(③-1), •垣衣(④), •遠志(⑤ㆍ⑧ㆍ⑩), •芫花(③-1ㆍ④ㆍ⑲), •肉蓯蓉(肉松容)(⑤ㆍ⑱), •參[人參(⑤ㆍ⑧ㆍ⑪ㆍ⑮ㆍ⑯)ㆍ沙參(④ㆍ白沙參(⑯)ㆍ玄參(④ㆍ⑱)ㆍ鹿腸(④)ㆍ白參(④)ㆍ赤參(④)]ㆍ, •茈(③-1), •紫菀(④ㆍ⑤ㆍ⑧), •紫葳(③-2ㆍ④), •紫參(④ㆍ⑥), •芍藥(③-1ㆍ④ㆍ⑤ㆍ⑧ㆍ⑫), •瘨(顛)棘(③-2)ㆍ瘨(顛)棘根(③-2), •前胡(⑱), •節皮④, •節華(④), •葶藶(③-1ㆍ⑤ㆍ⑧ㆍ⑩), •枳殼(⑩), •知母(④), •地榆根(⑧), •枝草④, •[地黃(⑪)ㆍ生地黃(④)ㆍ말린 地黃⑩ㆍ⑱], •陳藿(③-1), •秦艽(⑤), •陳薪(③-1), •陳芻(③-1), •陳蒲(⑥), •蒺藜(③-1), •[車前(③-2)ㆍ车前草实(①), •菖蒲(⑤ㆍ⑥ㆍ⑧), •[朮(秫)(③-1ㆍ③-2ㆍ④ㆍ⑤ㆍ⑦ㆍ⑨ㆍ⑪ㆍ⑮ㆍ⑯)ㆍ朮根(③-1)], •橐吾(⑤)ㆍ山朮④], •澤瀉(③-2ㆍ④ㆍ⑤ㆍ⑩), •澤桼(漆)⑲, •[土蔞④ㆍ土蔞根④], •貝母(④ㆍ⑥ㆍ⑩), •韰(薤)(③-1ㆍ③-1ㆍ⑦), •[蒿(③-5)ㆍ青蒿(③-1)ㆍ白蒿(③-1)ㆍ駱阮[白苦](③-1)ㆍ鵲巢下蒿(③-1)ㆍ萩(③-2)], •黃芩(③-1ㆍ④ㆍ⑤ㆍ⑧ㆍ⑪ㆍ⑯ㆍ⑱), •[黃耆(③-1)ㆍ戴糝(③-1ㆍ④)], •黃連(⑤)
버섯류 茯苓(③-1ㆍ③-2ㆍ④ㆍ⑩ㆍ⑩ㆍ⑯ㆍ⑱)

① 周家台秦簡《病方》, ② 北京大學藏秦簡《病方》, ③ 馬王堆醫學帛書(③-1 《五十二病方》, ③-2 《養生方》, ③-3 《療射工毒方》, ③-4 《房內記》, ③-5 《胎產書》), ④ 天回醫簡《六十病方》所見藥物, ⑤ 武威醫簡所見藥物, ⑥ 阜陽漢簡《萬物》所見藥物, ⑦ 里耶醫簡, ⑧ 敦煌漢簡醫藥簡, ⑨ 居延漢簡醫藥簡, ⑩ 居延新簡醫藥簡, ⑪ 肩水金關漢簡, ⑫ 懸泉漢簡醫藥簡, ⑬ 羅布淖爾漢簡醫藥簡, ⑭ 額濟納漢簡醫藥簡, ⑮ 地灣漢簡醫藥簡, ⑯ 張家界古人堤醫方木牘醫藥簡, ⑰ 天長西漢藥方木牘, ⑱ 長沙尚德街醫方木牘, ⑲ 荊州胡家草場醫藥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