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대안, 고착된 경로: 권위주의 정권기 의료 인력 공급 정책의 경합, 1961–1988†

Erased Alternatives, Locked-in Path: The Contestation of Medical Workforce Supply Policy in Authoritarian South Korea, 1961–1988†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6;35(2):575-633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6 August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6.35.575
*Assistant Professor, Department of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 College of Medicine,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Seoul, Republic of Korea
박승만*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조교수, 한국현대의료사 전공
†이 논문은 「2025년 가톨릭대학교 성의기초과학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다. 이 연구의 일부는 「2025년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연구 참여 프로그램」에 참여한 차원재 학생의 도움을 받아 수행되었다. 도움을 준 학생에게 감사를 표한다.
Received 2026 June 20; Revised 2026 July 16; Accepted 2026 August 03.

Abstract

This article traces how physician supply policy was formulated and implemented during Korea’s authoritarian era (1961–1988), spanning the military regime of Park Chung-hee and the New Military regime of Chun Doo-hwan. It examines several questions that have hitherto gone unexplained: the circumstances behind the initiation (1965), suspension (1971), and resumption (1978) of the founding of new medical schools; why most of these newly established schools were private; and the range of alternatives explored in lieu of building medical schools. The founding of medical schools that began in the mid-1960s was halted in 1971 amid opposition from physicians’ organizations and fiscal constraints. The government then turned to familiar alternatives—qualifying examinations and four-year medical colleges—but neither bore fruit. The Community Health Practitioner system, an adaptation of MEDEX, was successfully institutionalized, yet it remained constrained by persistent skepticism toward non-physician personnel and by its inability to address the growing demand for care in cities. After these alternatives had foundered one by one, the government reverted in 1978 to expanding medical schools. Coupled with a guiding principle of minimizing state investment, this reversion culminated in a model of physician training centered on private medical schools. In short, the 1960s and 1970s were at once a period in which a policy imagination for mobilizing other kinds of personnel took shape and a critical juncture at which that imagination was erased and a single path became entrenched. By showing that today’s prevailing assumption—that expanding the medical supply must mean founding new medical schools—is not inevitable but the product of a particular historical trajectory, this article draws out the significance this past holds for a present in which regional healthcare has once again become a contested issue.

1. 들어가는 말: 두 개의 상식

2024년 2월, 윤석열 정부는 2025학년도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의사 단체는 즉각 반발했고, 여기에 전공의의 집단 사직과 의과 대학생의 휴학이 이어지며 의료 공급은 장기간 파행을 겪었다. 갈등 끝에 2026학년도 정원은 증원 이전인 3,058명으로 되돌아갔다. 정권이 교체된 이후, 증원안은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6년 2월, 2027학년도 490명을 시작으로, 5년간 연평균 668명을 늘리는 단계적 증원안이 확정되었다. 증원분은 서울을 제외한 32개 의과대학에서 전원 지역의사선발전형으로 선발하며, 선발된 학생은 면허 취득 후 10년간 지정된 지역에서 근무할 예정이다.

2년에 걸친 논쟁에서 다투어진 것은 대체로 규모와 시기, 즉 얼마나, 언제의 문제였다. 그러나 논쟁의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는 양측이 공유한 전제가 있었다. 의료 공급을 늘리는 일은 곧 의사를 늘리는 일이고, 의사를 늘리는 일은 곧 의과대학의 정원을 조정하는 일이라는 가정이었다. 또한 누구도 묻지 않는 현실도 있었다. 의과대학의 대부분은 사립인 만큼, 정원 조정은 자연스럽게 사립 의과대학을 통할 수밖에 없다는 조건이었다. 현재 전국 40개 의과대학 가운데 국립은 열 곳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하기에 정부는 사립 의과대학의 협조와 수용 없이는 정원을 원하는 만큼 조정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립 우위의 교육 현실은 정책의 실현 강도와 가능성을 결정하는 요건이었으나, 이에 대한 의문은 공론장의 의제가 되지 못했다.

논쟁의 구도가 보여주듯, 오늘날의 시선에서 의료인 공급과 의과대학 증원의 등식, 그리고 의과대학의 사립 우위는 일견 당연한 상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이 필연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료가 반드시 의사에 의해 공급될 필요는 없고, 의사 인력이 반드시 의과대학, 특히 사립 의과대학을 통해 배출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 또는 과거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다른 대안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료 공급의 증가와 의과대학 신설 또는 증원을 필연적인 연결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상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러한 생각이 자리 잡는 과정에서 다른 방안에 대한 논의는 없었는가. 그리고 사립이 우위를 점하는 현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었는가.

지금까지 의료인 공급 정책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주로 인력의 분포와 배치, 그리고 유지와 유출 관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테면 신창훈(2023)은 무의촌 해결을 위한 의사 인력 배치 제도가 병역 제도와 맞물려 형성되고 변용되는 과정을 다루었고, 장원모와 박승만(2025)은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진행된 의사 인력의 도미를 조명함으로써 인력의 유지와 유출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을 돌아본 바 있다. 다만 의료인 공급과 관련된 요소는 인력 배치와 유출 관리에 한정되지 않으며, 새로운 인력의 유입과 양성 또한 중요하다. 홍창희와 박승만(2021)이 검정시험을 통한 의사 인력 공급을 살펴보았으나, 전체적인 인력 양성 정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부재한 실정이다.

의사단체의 문건으로 시선을 넓히면 일부 서술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단체 행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의료정책연구원(2024)은 「의과대학 입학정원 변동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대한민국의학한림원(2025)은 「의대 정원 증원 문제의 역사적 고찰」을 내어놓았다. 다만 전자는 정책의 배경이나 결정 과정을 분석하기보다 정원 변화를 간략히 정리한 수준이며, 후자는 “2000년 의약분업에서 2020년 전공의 파업까지”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주로 최근의 일만을 담는다. 무엇보다 두 보고서는 모두 의과대학 정원이라는 틀 안에서만 인력 공급의 역사를 서술하며, 사립 의과대학이 인력 양성을 담당하는 구조 자체는 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으로 전제한다. 앞서 말한 상식이 연구의 출발점에서부터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실과 연구의 흐름 속에서, 이 글은 의료 인력 공급이라는 너른 주제가 의사 인력 공급, 더 나아가 의과대학 증설 또는 증원으로 축소되어 가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의과대학 증설이 사립 의과대학 위주로 진행된 과정을 살핀다. 특히 주목하는 시기는 군부와 신군부의 권위주의 정권기이다. 본문에서 상술하겠지만, 당시의 경제 정책과 보건의료 정책이 의학 교육 정책의 지평을 제한하는 동시에, 이렇게 생성된 경로가 이후의 흐름을 사실상 규정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대안이 시도되고 소거되는 과정과 사립 의과대학을 통한 증원이라는 경로가 확정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돌아보고, 지역 의료와 의료인 공급이 다시금 문제가 된 오늘날 이러한 과거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정리한다.

2. 해결책의 우연한 등장과 기각: 의과대학 신설과 의사 단체의 저항, 1961–1971

2.1. 무의촌 문제와 인력 배치를 통한 해결

근현대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무의촌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무의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통계가 집계된 1955년 기준 무의촌은 전체 읍면의 52.0%에 달했고, 여기에 거주하는 이들도 전체 인구의 40.8%였다. 1960년대가 되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1960년 당시 여전히 무의촌은 전체 읍면의 48.7%, 전체 인구의 40.9%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군부 세력에게 이는 큰 과제였다.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삶이 달라졌음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장도영(張都暎, 1923–2012)을 축출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박정희(朴正熙, 1917–1979)는 “진정한 민주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총역량을 집중”한다고 약속했고, 이듬해에도 시정 방침 연설을 통해 “의료균점 시책을 수립”하겠다고 재차 선언했다.1)

무의면과 무의면 거주민: 1955–1974

Table 1. Doctorless Townships and Their Residents, 1955–1974

문제는 방법이었다. 가장 먼저 시도된 정책은 동원, 즉 기존 인력을 도시에서 무의촌으로 강제 재배치하는 방식이었다. 과거 이승만 정부 역시 의사의 무의촌 배치를 위해 공의(公醫) 제도를 운용한바 있었다(김진혁, 2023: 258–260). 차이는 박정희 정부가 이를 동원으로 강제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동원의 근거는 「국민의료법」에 명기된 지정업무종사명령이었다. 법적으로 “주무부장관은 국민보건의 향상을 도모함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의료업자를 2년 이하의 기간을 정하여 그 지정한 장소에서 지정한 업무에 종사케 함을 명령할 수 있”었다. 이는 「국민의료법」을 대체한 「의료법」에도 내용의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2)

이에 따라 다양한 인력이 동원되었다.3) 기준은 병역 수행 여부로, 1년 이상의 병역을 수행하지 않은 38세(제1차), 45세(제2–4차) 미만의 의사가 동원되었다(신창훈, 2023: 1054–1055). 의사가 전부는 아니었다. 한의사 인력도 동원되었다. 전국 45세 이하 한의사 가운데 일부를 시험으로 선발, 의과대학에서 미생물학 등을 교육한 다음, 공의로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에 한의사 인력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활용하는 의생 제도의 변용에 가까웠다. 한의사 동원은 1962년 논의되기 시작하여, 1963년 285명이 배치되었다.4)

물론 이러한 방식은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었다. 인력을 강제로 배치하는 방식이기에 반발이 뒤따르기 마련인 탓이었다. 2년의 기한이 설정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실제로 공의로 동원된 의사 인력은 2년의 지정 업무 종사 이후 배치가 해제되었으며, 한의사 인력 역시 1965년 모두 동원 해제되었다. 여기에 1965년 「의료법」 개정 과정에서 지정업무종사명령이 삭제됨에 따라, 추가 동원의 가능성도 소거되었다.5) 이후 이러한 방식의 인력 배치는 1972년 ‘수련의 파견 근무제’, 1973년 「의료법」 개정을 통한 특정업무종사명령 부활,6) 1978년 「국민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안」 의결을 통한 1979년 공중보건의사 배치까지 다시 시도되지 않았다.

공급 자체를 늘리려는 방안이 없지는 않았다. 식민지 시기부터 시행되던 검정 시험이 대표적이었다. 과거 조선총독부는 의학 교육 기관의 부족과 의료인의 부족이라는 이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검정시험을 통한 의료인 공급을 시도했고, 이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자격시험은 이후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며 바로 면허를 부여하는 형태에서 의과대학 졸업 학력을 인증하는 형태로 변하였다가, 1962년 「국민의료법」을 대신하는 「의료법」이 제정되며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는 의과대학 교육을 우회하는 의사 인력 공급안이 모두 소거되었음을 의미했다. 물론 검정시험이 존속한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었다. 1960년 이후 검정시험 통과자는 10명을 넘지 못했다(홍창희ㆍ박승만, 2021).

2.2. 의과대학 신설이라는 새로운 해결책

보건사회부는 위기 상황을 마주했다. 인력 배치 전략도, 우회 공급 전략도 모두 불가능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현상 유지, 동원 재개, 공급 확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농촌 의료 문제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여촌야도(與村野都)’의 정치 지형 속에서, 무의촌 문제의 방기는 지지 기반의 침식을 의미했다. 설상가상 동원이 해제된 이후, 무의촌 문제는 악화 중이었다. 무의면의 수는 동원이 이루어지던 1962년과 1963년 각각 413개, 455개까지 줄었으나, 동원의 종결과 함께 1964년과 1965년 다시 528개, 649개로 늘어났다. 인구 대비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두 번째 선택지인 동원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동원되지 않은 예비 인력은 부족했고, 이미 동원되었던 이를 다시 무의촌에 배치하면 즉각적인 반발이 뒤따를 수 있었다.

결국 보건사회부는 세 번째 선택지인 공급 증가를 택하고, 의과대학 신설을 추진했다. 당시 보건사회부의 입장은 두 가지 문건을 통해 확인된다. 하나는 1964년 판 『보건사회백서: 국민보건과 사회복지』이다. 여기에서 보건사회부는 간단한 수준의 인력 추계를 제시했다. 인구 증가와 인력 양성을 추산한 다음, 의사 1인당 인구수를 계산하는 방식이었다.7) 1964년 기준 의사 1인당 인구는 2,783명으로, 1,000명이 되지 않는 일본이나 “선진제국”에 비해 크게 높은 수치였다. 의사 배출이 현행 수준인 연평균 735명으로 지속할 경우 1980년에도 의사 1인당 인구는 1,879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었고,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의 본격화와 경제 성장에 따른 의료 수요 증가까지 고려하면 사정은 더 나빠질 수 있었다. 보건사회부는 “의사의 양성에 있어 특단의 조치가 강구되어야 하겠다”고 결론 내렸다.8)

이와 같은 입장은 보건사회부 장관 정희섭(鄭熙燮, 1920–1987)의 발언을 통해서도 반복되었다. 1966년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 출석한 정희섭은 이미 “상당한 의사가 부족이 되겠고” 또한 “앞으로 경제가 개발이 되겠고 국민 생활이 나아짐에 따라서 더 많은 의사 수가 필요”하므로, “의과대학을 증설하는 것을 저희 행정부로서는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정희섭은 여기에 냉전 상황의 특수성을 더하였다.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국방부에서 요청되고 있는 군의관의 숫자[가] 약 2,000에 달”하는데, “현재의 의과대학에서 나는 남성 의사의 수는 연간에 600명 밖”에 되지 않아 보건사회부는 “한 명도…… 쓸 수 없”다는 현실 진단이었다. 만약 “의과대학을 많이 증설하고 현재에 있는 의과대학의 학급을 늘”린다면, “국방부의 소요를 충족을 하고 남는 한 100명이나 200명의 인원[을] …… 무의촌에 의무적으로 …… 쓸 수 있는 길”이 마련될 수 있었다.9)

보건사회부의 방침이 확정된 이후, 여러 의대가 잇따라 신설되었다. 사립의 경우 경희대학교(1965년 인가, 1966년 신설), 조선대학교(1966년 인가, 1967년 신설), 한양대학교(1967년 인가, 1968년 신설), 중앙대학교(1970년 인가, 1971년 신설), 국립의 경우 충남대학교(1967년 인가, 1968년 신설), 전북대학교(1970년 인가, 1971년 신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모두 6개 의과대학이 새로 설치되었다.10) 여섯 개 의과대학이 신설되면서, 의과대학 정원 역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6개 의과대학 신설 후, 800명의 정원은 1,300명원으로 162.5% 증가하였다.

보건사회부가 정책을 수립하자마자 곧바로 의대 신설이 시작된 이유는 정부 방침이 여러 사학과 지역 사회의 이해관계와 합치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여러 사학은 의과대학 설립을 통해 대학의 위상을 제고하고자 했다. 한양대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설립자이자 총장이던 김연준(金連俊, 1914–2008)은 “한양대를 키우려면 의과대가 있는 종합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 내부의 반발에도 의과대학 신설을 강행하였다(이정훈, 2007). 다른 대학도 다르지 않았다.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은 마찬가지로 설립자 겸 총장이던 임영신(任永信, 1899–1977)의 “숙원 사업”이었으며(중앙대학교, 2021: 346–368),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역시 설립자 겸 총장이던 조영식(趙永植, 1921–2012)의 목표인 의약 계열 전 학과를 아우르는 종합대학의 설치와 이를 통한 ‘제3의학의 창조’를 위해 설치되었다(경희의료원, 1992: 110–114).

의과대학은 지역 사회의 오랜 바람이기도 했다. 충남대학교의 경우, 지역 사회의 요구에 따라 개교 2년 뒤인 1954년부터 의과대학 설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의과대학 설치는 계속해서 미루어졌고, 이러한 현실은 충청남도가 1963년 모범보건도로 선정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1966년 지역 사회 원로를 포함한 의과대학 설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대통령 박정희에게 건의문을 보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 이듬해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신설이 인가되었다(충남대학교, 2022: 247). 전북대학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역 사회의 요구가 지속하자, 1954년 문교부 장관 이선근(李瑄根, 1905–1983)이 의과대학 설치를 고려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미루어지고, 1966년 지역 대표와 전북대학교 동창회를 포함한 의과대학 설치 추진위원회가 조직, 중앙 정부에 신설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12) 이후 예산 문제로 개교가 미루어지며, 충남대학교보다 3년 늦은 1970년에 의과대학 신설이 인가되었다(전북대학교 의과대학, 2021: 23–32).

1960년대 이전 설치된 의과대학이 기존 병원과 연계하여 개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이 당시는 병원 없이 의과대학을 먼저 신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병원과 연계하여 개원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충남대학교의 경우 첫 신입생을 받고 3년이 지난 1971년 충남도립의료원을 부속병원으로 이관받았고, 전북대학교도 신입생이 임상 실습에 돌입하던 1975년 전북도립의료원을 부속병원으로 이관받았다. 중앙대학교는 의예과 첫 입학생을 받은 1971년 한국의과학연구소 부속 성심병원을 제1성심병원으로 인수하고, 한강성심병원을 제2성심병원으로 개원하였다.

병원이 없는 경우, 정부의 요구에 따라 개교에 앞서 병원을 착공하거나, 의학과 학생이 임상 실습에 돌입하기 전에 개원을 마쳐야 했다. 이를테면 경희대학교는 의과대학 신설 인가를 신청하던 1965년 병원을 짓기 시작했고, 조선대학교는 첫 입학생이 본과 3학년이 되어 임상 실습에 들어가던 1971년 병원을 개원했다. 한양대학교는 첫 입학생을 받은 다음 해인 1969년 병원을 기공하여, 임상실습이 시작되던 1972년 개원했다. 다만 경희대학교의 경우 병원 완공이 늦어져 첫 입학생이 본과 4학년이 되던 1970년에야 병원을 개원했다.

다만 병원 없이 신설한 의과대학의 경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경희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한양대학교는 1970년 당시 법률로 갖추어야 하는 필수 시설을 대부분 갖추지 못했다. 문교부 조사에 따르면 경희대학교는 부속병원 60%, 내부 시설 16.2% 실습 기구 8.7%만을 마련한 상태였으며, 조선대학교는 부속건물 60%, 내부 시설 16.2%, 한양대학교는 부속건물 50%, 내부 시설 16.2%, 실험 실습 기구 0% 수준이었다.13) 문교부는 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 신입생 모집을 중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비와 시설뿐 아니라, 교육 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희대학교의 교수 인력은 첫 신입생이 본과 3학년이 되던 1970년에도 기초와 임상을 모두 합쳐 20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한양대학교 역시 같은 해 첫 입학생이 본과 1학년이 되었으나, 의학과 모든 강의를 교수 7명이 담당했다. 당시 언론은 임상에만 30명에서 40명의 교수가, 기초에도 20명의 교수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상황은 신설 의과대학이 시설과 인력 측면에서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당시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병원 교수는 이와 같은 현상이 “대학병원 또는 종합병원들을 차려 영리를 취해 그 돈으로 의대를 운영해 보겠다”는 “위험한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라 진단하며, 대학 측의 안일함을 비판하기도 했다.14)

2.3. 의과대학 신설의 중단: 재정 문제

의과대학의 잇따른 신설은 1970년 인가되고 1971년 신설된 중앙대학교와 전북대학교를 끝으로 종결되었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재정 문제였다. 1960년대 말, 정부 내에서는 의과대학 신설에 회의적인 시각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보건사회부의 경우, 사회보장심의위원회(이하 사보심)가 대표적이었다. 사보심은 보건사회부 장관의 자문 기구로 설치된 일종의 정부 내 싱크 탱크로, 1960년대 초반에는 「의료보험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의 입법과 의료보험 시범사업, 산재보험 착수 등 굵직한 제도 기획에 집중했다. 이후 1960년대 중후반부터 사회개발 기초 연구와 장기 기획 구상에 돌입, 1968년 『사회개발: 제1집 기본구상(시안)』(이하 『사회개발』)을 발표하고, 이듬해인 1969년에는 보건의료 기획에 초점을 맞춘 『15개년 보건계획(1차 시안), 1972–86)(이하 『보건계획』)을 내어놓았다.

주목할 점은 『사회개발』과 『보건계획』이 앞서 살펴본 1964년의 『보건사회백서』와 입장을 달리하는 지점이었다. 의사 인력이 부족하다는 전망 자체는 동일했다. 사보심은 먼저 『사회개발』을 통해 무의촌의 해소와 향후 예정된 의료보험, 산재보험의 확대 시행을 고려하면, “의료필수량은 매년 증가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증가될 것이 예상되며 의료인과 의료시설은 더욱 부족할 우려”가 있으며, 따라서 “의사, 치과의사, 간호원의 수요가 증가하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이를 위해 1967년 12,450명에 해당하는 의사 수를 1970년 14,241명을 거쳐, 1975년, 1980년, 1985년 17,596명, 26,400명, 39,600명으로 증가시킬 필요가 있다고 계산하였다.15)

의사 인력의 부족을 전망한다는 점에서는 『보건계획』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보건사회백서』나 『사회개발』보다 자세한 인력 추계가 담겼다. 사보심은 수요의 증가와 이에 따른 공급을 계산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 과정에서 신규 공급, 사망과 은퇴, 미취업, 특히 당대에 문제가 되던 해외 유출에 따른 감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러한 추계에 따르면 인력 양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의사 수는 1971년 11,706명, 1976년 15,142명, 1981년 19,181명, 1986년 23,290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1986년 필요할 것으로 계산되는 27,610명에 비해 4,930명 모자란 값이었다.16)

『보건사회백서』와 달라진 점은 인력 충원의 방식이었다. 과거와 달리 사보심은 의사 공급의 증가를 주문하면서도, 의과대학 신설에는 반대했다. 사보심은 『보건계획』을 통해 “교수 요원의 확보와 막대한 신설 자금을 고려”하면 일단 “기존 의대의 학생 정원을 증원하되, 증원으로써 수요를 충족할 수 없을 때 의대를 신설”해야 한다고 썼다. 사보심은 먼저 1970년과 1971년 각각 60명과 50명을 증원하고,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매년 80명을 증원하여 총 350명을 증원한 다음, 1977년 이후 80명 규모의 신규 의대를 설치하는 방향을 권고했다. 이렇게 한다면 공급 증가의 효과로 순 공급량 27,620명을 달성, 필요량 27,610명을 웃돌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물론 이것으로도 지역 차원의 균형 분포를 이룰 수는 없지만, 절대적인 공급 자체는 달성할 수 있었다.17)

보건사회부만의 의견은 아니었다. 1967년 과학기술처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어놓은 바 있었다. 1967년 8월 과학기술처 내 설치된 인력개발연구소는 이듬해인 1968년 수요 증가에 따른 의사 공급 필요량을 계산하여 『장기인력수급추계 및 정책방향: 1967–1986』으로 정리했다. 이에 따르면 의사는 1971년 400명 모자라기 시작하여, 1976년 1,100명, 1981년 4,300명, 그리고 1986년에 이르면 13,800명이 부족할 것으로 추산되었다. 보건사회부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처는 부족한 의료 인력 공급의 방안으로 의과대학의 신설이 아닌 “학생정원[의] 증원”을 제시하였다.18)

보건사회부와 과학기술처가 내어놓은 증원이라는 결론은 예산 문제를 고려한 결과였다. 앞서 살펴본 바, 예산은 국립대학의 의과대학 설치를 지연시키는 요인인 동시에, 사립대학의 의과대학이 교육에 필요한 제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요인이었다. 전북대학교가 대표적이었다. 문교부장관 문홍주(文鴻柱, 1918–2008)는 1966년과 1967년 문교공보위원회에 출석하여 “의과대학 하나와 부속병원을 완성하는 …… 예산액이 4억 1,500만 원”이며, 그러하기에 충남대학교와 전북대학교 “양 의과대학[의] 공동 출발은 어렵”다고 발언하였다.19) 1970년 당시 한국 전체 예산이 4,343억이고, 보건 부문 예산이 30억 원 미만이었음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20)

사립으로 의과대학을 신설하는 방향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상기한바 신설 의과대학은 장비와 교수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대부분 예산 문제였다. 물론 사립인 만큼, 정부 투자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사립 의과대학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정부 예산이 지원된 경우는 없었다. 다만 준비되지 않은 신설이 여러 문제를 노정함에 따라, 사립에 대해서도 추가 인가를 중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앙대학교와 전북대학교 이후 한동안 신설은 중지되었고, 주로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정원이 확충되었다. 앞서 제시한 표 2에서도 보이듯, 이러한 과정에서 서울대학교가 120명에서 160명으로, 경북대학교가 80명에서 120명, 전남대학교가 70명에서 100명으로 증원되었다.

의과대학 정원: 1948–1986

Table 2. Medical School Admission Quotas, 1948–1986

2.4. 의과대학 신설의 중단: 의사 단체의 반대

의대 신설이 중지된 두 번째 이유는 의사 단체의 지속적 반발이었다. 대한의학협회(이하 의협)는 의과대학이 신설되던 1960년대 후반 계속해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1969년에는 회장 명주완(明柱完, 1905–1977) 명의로 「의과대학 증설계획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 행정부와 공화당, 신민당 등의 수뇌부에 전달했다.21) 이듬해 의협은 대의원총회 명의로 재차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22) 1960년대 당시 의협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1966년 「보건소법」과 「유사의료업자 법안」, 1967년과 1968년 고액소득세, 면허세, 영업세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정부 정책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익 단체이자 압력 단체로 거듭난 결과였다.23)

의협은 기관지 『의협신보』를 통해 의과대학 증설에 반대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제시하였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추계의 차이였다. 의협이 보기에 “의사의 수는 기설 8개 의과대학과 거반[去般] 인가된 2개 의과대학(도합 10개의대)의 의육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한 대인구비에 있어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또 다른 하나는 방법의 차이였다. 현재 무의촌 문제가 여전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단순한 의사 수의 증가보다는 오히려 적정한 예산책정으로써 효과적인 행정력을 구사”함으로써 해결할 문제였다. 즉 의사 수를 늘린다고 무의촌이 해결되지는 않으며, 지방 의료에 대한 예산 증액과 효율적 집행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마지막은 교육의 수준이었다. 신설 의과대학의 열악함을 볼 때, “한국 의학의 세계 수준 유지”를 위해서는 무분별한 신설을 막아야 했다.24)

물론 언급된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숨겨진 또 다른 이유는 경쟁의 심화였다. 도시에서는 이미 의사 간의 경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만약 의과대학 신설로 의사 공급이 늘어나는 경우, 의사 개인이 거둘 수 있는 이익은 저하될 것이 분명했다. 의협은 계속해서 이를 부정했다. 회장 명의의 「성명서」는 신설 반대가 “의사 개인의 이해면에서가 아니라 오직 한국 의학의 세계 수준 유지와 민족 보건 백년지대계를 위”한 것이라 썼고, 대의원총회 명의의 「성명서」 역시 “의사 수의 증가로 인하여 기성 개업 의사들의 영역 침범을 막기 위한 것이라 오인”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오히려 당대의 시선 속에서, 의협의 반대가 어떻게 독해되고 수용되는지 드러낼 따름이었다.

의협은 반대 의견 제시에서 더 나아가, 실력 행사에 나서기도 했다. 1969년 의과대학 실태조사가 대표적이었다. 의협은 1969년 1월 전국 의과대학의 운영 실태와 시설 및 교수진 현황을 조사했다. 의도는 분명했다. 시설과 교수진 부족을 빌미로 의과대학 신설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이미 신설된 의과대학의 운영을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25) 실제로 의협의 실태조사 자료는 1969년 2월 국회 문교 행정특감위원회가 종합 감사에서 문교부에 신설 의과대학의 폐쇄를 요구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26) 특감에 참여한 일부 의원은 “선시설 후인가 원칙을 무시”한 이면에 사학과 문교부의 결탁이 있음을 주장하며, 문교부 장관 권오병(權五柄, 1918–1975)의 책임을 추궁하기도 했다.27)

이러한 과정에서 문교부 장관은 의협과 감사 위원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였다. 장관은 한양대학교, 경희대학교, 조선대학교, 충남대학교의 시설이 미비하므로, 일정 기한까지 시설을 보강하지 못한 의과대학에 대해서는 “폐쇄 조치 등 강력한 행정권을 발동하겠다”고 약속하였다.28) 실제로 한 달 뒤, 문교부는 한양대학교, 경희대학교, 조선대학교 3개 의과대학에 대해 8월 말까지 시설 확충을 지시하고, 불이행 시 신입생 모집과 재학생 진급을 중단할 것이라 통보했다.29) 다만 실제로 행정 조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운영 중인 의과대학을 중단하는 일에 뒤따르는 행정적, 정치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대신 문교부는 이듬해인 1970년에도 이들 3개 의과대학에 대한 경고를 반복함으로써, 압박을 지속하였다.30) 의협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의과대학 신설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뒤따를 수 있음을 드러내 보였고, 이로써 다른 사학의 신규 진입을 일정 부분 저지했다.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의과대학 신설은 이렇게 중단되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돈이 많이 드는 선택지인 동시에, 보건사회부 안팎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거셌던 선택지이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의과대학 신설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새로 인가한 의과대학에서 졸업생이 배출되려면 6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전문의 과정까지 고려하면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야 했다. 설상가상 1965년부터 시작된 도미의 여파로 졸업생 상당수가 한국을 떠나버렸고, 의협의 주장처럼 무의촌을 향하는 졸업생도 많지 않았다. 결국 1970년이 되어도 무의촌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전국 읍면의 45.7%가 무의촌이었다. 보건사회부를 비롯한 여러 정부 관료는 당장의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3. 익숙한 대안과 완전한 실패: 자격시험과 의학전문학교 설립, 1967–1974

3.1. 자격시험의 부활

대안이 시급히 요청되는 상황에서, 여러 정부 관료는 익숙한 대안으로 눈을 돌렸다. 자격시험과 한지의사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했던 방식이었다. 한지의사 제도는 1913년 「의사규칙」의 제정과 함께 그리고 자격시험은 이듬해인 1914년부터 시행된 제도로, 모두 일제강점기가 끝나던 1945년까지 지속하였다(여인석 외, 2002; 홍창희ㆍ박승만, 2021).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고 경력을 시작한 보건사회부 관료 대다수에게 이는 더없이 익숙한 제도였고, 그러한 경험은 정책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먼저 검토된 방법은 자격시험이었다. 두 가지 장점이 있었다. 하나는 교육 인프라의 확충 없이 의사를 양성할 수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교육에 소요되는 시간 없이 시험 합격자를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하기에 미군정 역시 자격시험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다. 문제는 1960년대 중반 당시 자격시험이 이미 사라진 제도였다는 점이었다. 상기한바, 1951년의 「국민의료법」은 시험으로 바로 의사가 되는 길을 닫았고, 이후 의과대학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시험이 시행되었으나 이 역시 1962년의 「의료법」으로 폐지되었다(홍창희ㆍ박승만, 2021).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1960년대 중반, 폐지를 번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의사 단체의 반발 역시 제도의 부활을 막는 요인이었다.

한지의사의 부활도 함께 검토되었다. 한지의사 제도 또한 자격시험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한동안 존속했다. 국회의원 한국원(韓國源, 1905–1974)을 비롯한 정치권 일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국민의료법」 원안을 통해 10년 이상 근무한 한지의사에게 정규 면허를 부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용설(李容卨, 1895–1993) 등 의사 출신 국회의원과 의사 단체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국민의료법」은 기존 면허는 인정하되 신규 면허 배출은 중단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1950년대 후반 한지의사 제도의 부활이 다시 논의되었지만, 이번에도 의사 단체의 격렬한 반발로 곧 기각되었다(김진혁, 2023: 241–246). 이는 한지의사 역시 제도 부활에 따르는 정치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

문제는 대안이었다. 이들 방식 없이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사실 문제 해결의 대안은 제도 바깥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었다.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 활동하다 남한으로 건너온 여러 ‘월남 의료인’은 ‘월남보건동지회’를 결성하여 대정부 교섭에 나섰다. 무의촌 근무를 조건으로 북한의 면허를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였다. 이들 가운데에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등의 인력도 있었으나, 조의사와 같이 남한에 부재한 종류의 인력도 있었다. 조의사는 북한에서 의료 인력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소련의 펠셰르 또는 준의사(фельдшер, feldsher)를 변용하여 도입한 유형으로, 의사의 권한을 일부 보유한다는 점에서 한지의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이승만 정부는 이들의 요구에 선을 긋고, 당시 시행 중이던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자격을 입증할 것을 요구했다(김진혁, 2023: 86–87).

1960년대 중반, 한국에는 여전히 자격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월남 의료인 인력이 남아 있었다. 이들 인력을 대상으로 자격시험을 다시 시행하여 의사와 한지의사 면허를 준다면, 무의촌 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정부는 민주공화당 의원 조창대(曺昌大, 1926–1969)의 대표 발의를 통해 제도를 통과시켰다. 1966년의 「미수복지 등에서 귀순한 의약업자에 관한 특별조치법」이었다. 다만 의사 단체의 반발을 고려하여, 부칙을 통해 5년간 한시적으로 운용되는 제도임을 분명히 했다.31) 유휴 인력을 동원하면서도 자격시험의 전격적인 부활을 피해 의사 단체의 반발을 줄이는 타협안이었다.

법안과 규정이 마련된 이듬해, 월남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자격시험이 시행되었다. 먼저 1967년 6월 응시 자격에 대한 검정이 진행되었고, 의사와 한지의사 시험 응시자 가운데 각각 154명과 352명의 자격이 확인되었다.32) 1967년 당시 무의면은 742곳이었다. 이들이 모두 합격한다면 무의면의 68.2%를 일거에 유의면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33) 문제는 합격률이었다. 같은 해 7월 치러진 의사 추가 국가시험에서 월남 의사 합격자는 5명뿐이었고, 8월 치러진 한지의사 국가시험에서도 71명만이 합격했다.34) 이듬해인 1968년도 다르지 않았다. 의사 국가시험 합격자 수는 확인되지 않으나, 한지의사의 경우 295명이 응시하여 84명이 합격했을 따름이었다.35)

물론 합격률과 합격자 수가 유지된다면, 정해진 기한인 5년 동안 예비 인력을 모두 현장 인력으로 전환할 수도 있었다. 1969년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203명이 한지의사 국가시험에 응시했으나, 합격자는 50명뿐이었다.36) 예비 인력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합격할 만한 이들은 이미 첫 두 해의 시험에 합격했고, 나머지 인력은 합격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이 다수였다. 과거를 참고한다면, 이미 예견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시행되었던 자격 시험에서 귀순 인력은 초기에만 유의미한 수준의 합격자를 배출했고, 1960년부터는 합격자가 부재했다(홍창희ㆍ박승만, 2021: 139).

3.2. 자격시험의 확대

월남 의료인 대상 자격시험이 저조한 성과를 내면서, 정부는 한지의사 국가 시험의 응시 자격을 확대했다. 대상은 이른바 ‘동원 한의사’ 인력이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는 1963년 지정업무종사명령 제도를 근거로 한의사를 공의로 동원한 바 있었다. 다만 지정업무종사명령은 2년 한도였고, 1965년 「의료법」 개정 과정에서 지정업무종사명령이 삭제됨에 따라 동원된 한의사도 모두 원위치로 복귀하였다. 이들은 이미 보수 교육을 받고 공의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만큼, 한지의사 국가시험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은 인력이었다.

정부는 1969년 1월, 자격시험 부활 당시와 마찬가지로 여당 의원을 통해 한의사 인력의 동원을 제도화했다. 의사 출신 의원인 민주공화당 박병선(朴炳善, 1925–1969)이 대표 발의한 「한의사, 한지한의사 및 입치영업자에 관한 임시조치법」이었다. 이에 따라 “1962년 9월 17일 이후 의료법 제21조의 규정에 의하여 보건사회부장관이 지정한 의과대학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 지정업무에 종사한 한의사”인 동원 한의사와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경기도의생강습소를 수료하고 시험에 합격한 자 및 의생검정시험합격자로서 의료법 부칙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한지한의사의 면허를 받은 자”인 한지한의사에게 한지의사 자격시험의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다만 이번에도 의사 단체의 반발을 고려하여, 부칙으로 2년의 제한 기한을 두었다.37)

이에 따라 1970년부터는 월남 조의사뿐 아니라 동원 한의사 역시 한지의사 국가시험에 함께 응시했다. 월남 의료인 대상 국가시험은 1966년부터 5년 동안, 그리고 동원 한의사 대상 국가시험은 1969년부터 2년 동안 치러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한지의사 국가시험은 1971년에 종결될 예정이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시행된 자격시험을 통해 의사와 한지의사는 각각 54명과 301명이 배출되었다.38) 한지의사 인력을 더 확보하기 위해 1971년 12월 특별 시험을 시행했으나, 합격자는 0명이었다.39)

3.3. 자격시험의 중단

결과적으로 월남 의료인과 동원한의사를 통해 무의면을 해소하겠다는 정부의 의도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수치로만 보면 부분적인 성공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격시험을 통해 의사와 한지의사가 모두 355명 배출되었고, 이는 1967년 당시 742개이던 무의촌의 47.8%를 해소할 수 있는 규모였다. 기존의 한지의사 인력을 함께 고려한다면, 재배치만으로도 무의촌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들 인력이 무의촌을 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의사는 처음부터 무의촌에서 개원할 이유가 없었고, 한지의사는 정해진 지역을 무단으로 이탈하기 일쑤였다.40) 한지의사 면허를 받은 한의사는 개원에는 지역에 구애받지 않는 한의사 면허를, 실제 진료에는 양방 진료가 가능한 한지의사 면허를 활용하곤 했다.41) 그러한 탓에 1972년 당시 무의촌은 여전히 549개로, 1967년에 비해 193개 감소했을 뿐이었다.

한지의사 수: 1949–1980

Table 4. Limited-Area Physicians, 1949–1980

제도를 둘러싼 잡음 역시 끊이지 않았다. 먼저 제도 자체의 신뢰도가 흔들렸다. 시험 과정에서 감독관을 매수하거나, 시험 응시에 필요한 증명서, 호적 등을 위조하는 경우가 발각된 결과였다.42) 실제로 검찰은 1969년 응시자 6명과 보건사회부 공무원 4명을 수사하였고, 1972년에도 같은 혐의로 월남 의료인 가운데 의사 14명과 치과의사 1명, 약사 1명 등 총 16명과 보건사회부 공무원 5명을 구속 수사하고, 자격시험을 통해 면허를 취득한 의사 19명과 치과의사 1명을 지명수배했다.43) 이러한 상황에서 시험에 낙방한 이들은 단체 행동에 나서 제도를 공격했다. 불합격의 이유를 불공정한 과정에서 찾으려는 시도였다.

다음으로 의사 단체의 공격 역시 거세었다. 의협은 지속적으로 자격시험 제도를 공격했다. 의협은 자격시험 시행 첫해인 1967년부터 회장 명주완의 명의로 “귀순의료업자들의 직업보도를 꾀한다는 국가시책에 순응”한다고 하면서도, “여기서 파생하는 의료제도 상의 혼란이 야기되지 않도록 보사당국[이] 만전을 기해”달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제도에 대한 불만 토로였다.44) 같은 해 응시자 가운데 유자격자가 의사 154명, 한지의사 352명으로 확인되자, 의사 수의 급격한 증가를 우려하고 “무자격자가 날뛸 가능성”을 막기 위해 “시험[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45) 의협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메시지는 모두 기관지 『의협신보』의 1면에 배치되었다.

이후에도 의협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자격 위조 여부가 사실로 확인되자 『의협신보』를 통해 제도의 허점을 반복해서 공격하는 한편,46) 자격 심사에 직접 참여하여 엄격하게 심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이를 정책에 관철했다.47) 또한 자격시험이 시행되는 5년 동안 무제한으로 응시할 기회를 제한하여, 1년에 2회만 응시할 수 있도록 제도 개편에 나서기도 했다.48)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제도 자체의 폐지였다. 의협은 자격시험 합격률이 낮아 실제 효과가 없으므로,49) 굳이 유지할 필요 없이 폐지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50)

보건사회부 내에도 의협의 의견에 찬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의사 출신 관료, 이를테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있던 오원선(吳元善, 1922–1978) 등이 그러했다. 오원선은 여당인 민주공화당 조창대 의원의 발의안이 논의되던 당시, 보건사회위원회에 출석하여 남북 의학 교육에 차이가 있으며, 응시 대상 역시 과거 시행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기회의 낙오자”이기 때문에 굳이 시험을 치러 구제할 필요가 없다고 저항하였다. 쇼와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의정국장으로 있던 박양원(朴良元, 1921–2007) 역시 행정적 이유를 들어 난색을 보였다.51)

다만 시험이 시행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의 저항은 입법 과정에서 무력화되었다. 법안을 발의한 조창대는 “도대체 보사부의 정신상태가 문제”라며 장관과 국장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마찬가지로 유력 여당 의원이었던 중앙정보부 출신 길전식(吉典植, 1924–2011) 역시 “자연인 오원선 씨가 속해 있는 의학협회의 회원 한 사람으로서 협회가 싫어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너무 소아적인 견해를 떠나서 …… 보건사회부장관으로서 더 좀 큰 아량을 가지고 이런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보건사회위원회에서 입법을 지원하던 전문의원 오정근과 조영선은 의사 출신이었으나, 여당 입장에서 보건사회부를 향한 비판에 힘을 실었다.52)

그럼에도 보건사회부 내부의 저항은 쉽게 누그러질 수 없었다. 정권 수뇌부의 입장에 반하여 의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들이 실무를 맡는 한, 자격시험은 제대로 치러질 수 없었다. 상기한 보건사회위원회 전문의원 오정근과 조영선은 “법이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까다롭게 한다고 하면 이 법은 있으나 마나”라며, 자격 규정 강화 등을 통한 행정적 무효화를 우려하였다.53) 실제로 이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의협의 주장은 보건사회부 내의 동조 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정책에 반영되었고, 자격시험은 점점 까다로워졌다. 이에 따라 정권 수뇌부는 1966년 4월 저항의 축이던 장관 오원선을 해임하고, 과거 군사정권 초기 제 9대 장관을 역임했던 정희섭을 다시 장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정희섭 이후에는 의사가 아닌 행정 관료나 사법 관료 출신을 장관으로 앉혔다.54)

동원 한의사를 대상으로 한 한지의사 자격시험도 의협의 거센 공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의협은 제도가 논의되던 1968년 2월 『의협신보』를 통해 “파행하는 의무 행정”이라는 기사를 내어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같은 해 5월과 6월에는 상임이사회를 개최하여 총궐기를 포함한 실력 행사를 논의하였다.55) 이후에도 의협은 정책의 실효성에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며, 정책 철회를 유도하였다. 여기에는 도쿄의학전문학교와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한 신민당 의원 박기출(朴己出, 1909–1977) 등도 힘을 보태었다.56) 주목할 점은 대한한의사협회도 제도 거부에 함께했다는 사실이었다. 대한한의사협회는 한지의사 자격시험에 참여하는 한의사를 “전향”으로 간주하고, “한의사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57)

이렇게 시험 자체의 효용성이 떨어지고 보건사회부 안팎에서 제도를 향한 공격이 제기되면서, 자격시험은 1971년의 시험을 마지막으로 더 연장되지 않고 종결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끝이 예정된 제도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정책이 의존한 인적 자원 자체가 재생산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핀바, 문제는 자원의 양적 한계보다는 질적 수준에 있었다. 그러하기에 정부는 예비 인력이 여전히 남았음에도, 제도 존치에 뒤따르는 효용과 부작용을 저울질해야 했다. 이미 합격할만한 이들은 대부분 합격한 상황에서, 행정력 소비와 정치적 갈등은 불필요한 대가였다. 정권 수뇌부는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

3.4. 의학전문학교 부활안의 논의와 기각

자격시험 이후 새롭게 논의된 대안은 또 다른 과거의 유산인 의학전문학교 제도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시행되었던 의학전문학교는 예과 2년과 본과 4년으로 구성된 6년제 의과대학과 달리, 4년으로 전체 교육을 완료하는 체계였다. 해방 이전 6년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유일했기 때문에 정식 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 대부분은 의학전문학교 출신이었고, 이는 보건사회부 관료도 마찬가지였다. 1974년 당시 의정국장 민창동(閔昶東)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보건국장 성유운(成有運)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인물이었다(연세대학교 의과대학, 2016: 215;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2008: 328). 따라서 4년제 의학전문학교는 이들에게 그리 낯선 선택지가 아니었다.

사법 관료 출신으로 보건사회부 장관에 취임한 고재필(高在珌, 1913–2005)은 1974년 1월 29일, 보건사회부를 연두 순시하는 대통령 박정희에게 의학전문학교 제도의 부활을 보고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공직 생활을 시작했기에, 고재필에게도 4년제 의학전문학교는 익숙한 교육 제도였다. 고재필은 6년제 의과대학으로 의학 교육이 표준화됨에 따라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보고했다. 교육 시간의 증가로 개인이 투자해야 할 비용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배출된 인력 역시 자연스럽게 수익을 고려하여 지방 근무를 기피하고 수가를 높이 책정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의학전문학교는 이러한 한계를 돌파할 방법이었다. 고재필은 4년제 교육을 통해 “대중의사(大衆醫師)”를 양성할 수 있으리라 전망했다. 이러한 내용은 언론의 1면을 통해 대서특필되었다.58)

의사 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새로운 정책이 보도된 다음 날, 긴급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의협 기획이사 이주걸(李柱傑, 1914–2006), 경희의료원 원장 송호성(宋浩星, 1913–1982), 가톨릭중앙의료원 의무원장 조규상(曺圭常, 1925–2013), 한양의료원 의무부원장 김기홍(金箕洪, 1921–1986),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안치열(安致烈, 1922–2000),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권이혁(權彛赫, 1923–2020) 등 의료계 주요 인사가 모인 자리였다. 이들의 의견은 동일했다. 의사 배출은 이미 충분하기에 의학전문학교 설치는 불필요하며, 설령 의학전문학교를 설치한다고 해도 졸업생이 무의촌에 갈 유인이 없으므로 농촌의 인프라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의사의 질이 떨어지며 종류가 많아져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논리도 함께였다.59) 정부로서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6년제 출신도 있었지만, 이주걸(대구의전), 조규상(경성의전), 안치열(평양의전) 등 의학전문학교 출신도 다수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의협도 공식 반응을 내어놓았다. 정책이 발표되고 닷새가 지난 1974년 2월 4일, 『의협신보』에는 “의전제 부활은 부당하다”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공청회에서 표명된 의견은 다시 한번 반복되었다. “의사가 과연 부족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의료 인력의 부족보다는 의료비 부담 등이 문제이기에 “보건 외적 제 요인에 표출된 문제를 보건내적 시책으로 근본적인 해결을 시도한다는 것은 …… 미숙한 시도”라는 주장이었다. 더 나아가 의학 교육 제도는 “몇 사람의 정책 입안자나 보건행정 당국에 의해 손쉽게 다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신중하게 수립된 장기적인 계획에 근거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60)

정부는 곧바로 후퇴했다. 고재필은 의학전문학교 부활을 “사실무근”이라 일축했다. 여러 제도적 대안을 연구 검토하고 있다고 보고했을 뿐인데, 이러한 사실이 와전되어 물의를 일으켰다는 설명이었다. 고재필은 혹여 이러한 정책을 실제로 도입하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의협 등 관계 단체와 협의, 최종 결정을 하겠다고 확약”하기도 했다. 차관 홍종관(洪鍾寬, 1925–1997) 역시 기자를 불러 의학전문학교 부활은 “검토조차 한 일[이] 없다”고 해명했다.61) 고재필과 홍종관의 해명은 사실과 거리가 있었다. 대통령 연두순시는 여러 기자를 대동한 공개 행사이기에, 오보의 가능성이 낮았다. 그런 면에서 장차관의 해명은 사실 관계를 바로잡기보다는 의료계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면피성 발언에 가까웠다.

유신 체제가 성립한 지 1년 남짓한 시점에 정부가 후퇴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긴급 공청회에 참가한 이들의 목록에 있다. 의협 기획이사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주요 의료원의 원장이거나 의과대학의 학장이었다. 4년제 의학전문학교를 설치한다는 구상은 일정 부분 그것을 운영할 교육 기관과 의료 기관, 교원 등을 전제하는데, 그들을 대표하는 이들이 강한 거부 의사를 표명한 것이었다. 특히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권이혁이 나머지 사립 의과대학의 학장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은 국립 의과대학을 동원하는 전략조차 불투명함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재필과 홍종관의 해명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건사회부는 반대를 무릅쓰고 정책을 집행할 수단 자체를 갖추지 못했다.

이렇게 무의촌 해결을 위한 두 가지 정책은 모두 소정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월남 의료인과 동원 한의사 인력을 활용하여 의사와 한지의사를 배출하겠다는 시도는 낮은 합격률과 합격자의 근무지 무단이탈, 의사 단체의 지속적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상기한 바 355명의 신규 인력을 배출하고도 무의촌 해소는 193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책 실패를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였다. 물론 정책 자체의 지속성도 부재했다. 가용한 예비 인력은 한정되었고, 그러하기에 모두를 동원한다고 해도 다음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후 의학전문학교를 부활하려고 했지만, 역시 의사 단체의 반발로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이번에도 문제는 대안이었다.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4. 새로운 대안과 부분적 성공: 메덱스 제도의 변용과 보건진료원 제도의 시행, 1975–1980

4.1. 메덱스 프로그램의 기원

자격시험과 의학전문학교가 기각된 1975년 11월,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었다. 여러 예비 인력을 대상으로 자격시험을 시행하거나, 4년제 의학전문학교를 시행하는 등의 방식은 어찌 되었든 의사에 해당하는 인력을 양성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답은 아니었다. 의협의 비판처럼, 그리고 실제 벌어진 일처럼 자격시험이나 의학전문학교를 통해 배출된 의사나 한지의사가 기존의 의사와 그리 다르지 않은 행동 양태를 보인다면, 아예 다른 유형의 인력이 답일 수 있었다. 하나의 참고점은 법조계였다. 법조 분야에서는 변호사가 폭넓은 법률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나, 법무사, 변리사, 노무사 등이 각자의 영역에서 세부 업무를 맡아 처리한다. 의료계에서도 이와 같은 체계를 도입하여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새로운 직역을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메덱스(MEDEX)’였다.

메덱스 프로그램은 1960년대 미국에서 의료 인력, 특히 농어촌 지역의 일차 의료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였다. 당시 미국의 인력 부족은 복합적 요인에서 비롯했다. 먼저 의료 수요가 증가했다. 인구 증가와 경제력 상승, 의료를 향한 신뢰 상승 등으로 수요가 늘어났고, 이에 더해 1965년 노인을 위한 메디케어와 저소득층을 위한 메디케이드가 도입되면서 의료 서비스를 향한 수요는 다시 한번 팽창했다. 문제는 공급 부족이었다. 당시 많은 의사는 일차 의료보다는 전문의가 되는 길을 선택하고, 경제적 보상을 위해 도시로 이동했다. 일반의는 수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부족했다(Cawley & Golden, 1983: 69–82; Bello-Kaplan, 1991: 8–27).

이러한 상황에서 의료 경험을 갖춘 예비 인력이 대안으로 부상했다. 베트남 전쟁 등에서 복무하고 제대한 의무병 자원이 대표적이었다. 고도의 의료 훈련과 실무 경험을 갖춘 수만 명의 인력이 존재했지만, 문제는 제도의 부재였다. 비의사 인력을 활용하여 보건의료 체계에 투입하는 외국의 사례를 참고한다면, 일반의 부족 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다. 19세기부터 시작되어 소련으로 이어진 러시아의 펠셰르/준의사(фельдшер, feldsher), 20세기 중국의 ‘맨발의 의사(적각의생)’, 그리고 19세기 프랑스의 보건 장교(officier de santé)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 외에도 피지, 파푸아뉴기니, 푸에르토리코, 쿠바, 케냐 등에서 비의사 인력을 활용하고 있었다(Cawley & Golden, 1983: 69–82; Bello-Kaplan, 1991: 8–27).

그렇게 1969년 메덱스 프로그램이 창설되었다. 프로그램의 중심에는 하와이대학교 교수 리처드 스미스(Richard A. Smith, 1932–2017)가 있었다. 평화봉사단과 공중보건국 등에서 활동하며 의료 소외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스미스는 비의사 인력의 활용을 제도화하고자 했다. 시작은 워싱턴 지역이었다. 연방 정부의 자금 지원과 지역 의료 기관의 협력을 받아 워싱턴대학교에서 본격적인 요원 훈련이 시작되었고, 이후 메덱스 프로그램은 다른 대학과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하였다. 주목할 점은 의사 단체 역시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스미스가 의사 단체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의사의 권위나 경제적 이익을 위협하지 않도록 메덱스 요원의 역할을 제한적으로 설계한 결과였다(Cawley & Golden, 1983: 69–82; Bello-Kaplan, 1991: 28–40).

4.2. 메덱스 프로그램의 한국 도입

미국에서 메덱스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대 초중반, 미국 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는 한국에서의 시행 가능성을 타진했다. 논의의 시작은 1972년 12월이었다. 한국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무의촌을 해결하고자, 140개 군에 하나씩의 군립병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예산 확보를 위해 대한국제경제협의체(International Economic Consultative Organization for Korea, IECOK) 파리 회의에 참석하여, 차관을 요청하였다.

차관의 실행을 결정하기 위해, 1973년 11월 미국 국제개발처 조사단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의 보건의료 현황을 파악한 조사단은 큰 비용이 드는 군립병원 대신 비용 절감형 보건의료체계를 확립할 것을 권했다. 농어촌의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병원 설립보다는 다른 방식의 일차 의료가 더욱 효과적이라는 이유였다. 국제개발처는 1974년 11월 다시 한번 조사단을 파견한 다음, 1975년 9월 5년 간의 시범사업과 제도 수립에 쓰일 500만 달러의 차관(489-U-092) 제공을 확약하였다.62)

차관 제공이 확정되고 두 달이 지난 1975년 11월, 리처드 스미스가 한국을 찾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대한보건협회가 주최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열리는 심포지엄 “우리나라 의료전달제도와 새로운 보건요원의 활용”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63) 실제 목적은 달랐다. 스미스에게는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정권 수뇌부와 의료계에 비의사 인력을 활용해야 하는 필요성을 각인하고 설득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차관이 이미 체결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정권 수뇌부의 입장은 정해져 있었다. 스미스와 만난 자리에서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있던 강경식(姜慶植, 1936–)은 의사 인력을 활용한 무의촌 해결은 실현 가능성이 낮고, 비의사 요원을 활용하는 방식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밝혔다.64)

문제는 의료계였다. 대한보건협회와 보건사회부, 경제기획원이 사전 조율하여 마련된 심포지엄에서 의협은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의협 회장 손춘호(孫春昊, 1927–2006)는 심포지엄이 시작하기도 전, 개회사를 통해 “현재의 의료보건제도를 개선, 발전시켜 나가야 하며, 의협은 어떠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도 반대한다”고 발언했다. 이어지는 토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양재모(梁在謨, 1920–2018), 의협조사연구위원 주영재(朱永在, 1917–2008) 등은 모두 제도 도입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러한 태도는 『의협신보』로도 그대로 이어져, 의협은 전면광고가 실린 1, 2면을 제외하고 사실상 표지에 해당하는 3면에 메덱스 제도에 반대한다는 대형 기사를 실었다. 대한보건협회가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는 『동아일보』 보도와 달리, 『의협신보』는 협회장 권이혁의 입장을 “참고가 되므로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정도로 정리했다.65)

심포지엄에서 벌어진 충돌은 앞으로 계속될 정부와 의협의 입장 차를 예고했다. 의협은 1975년 11월 20일과 24일, 기관지 『의협신보』를 통해 메덱스 제도를 다시금 맹공격했다. 의협의 논리는 몇 가지로 정리되었다. 먼저 일차 의료는 손쉬워 보여도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며, 따라서 메덱스 제도는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의학은 “하루가 새롭게 발달”하기에 “계속적인 보수 교육과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의사가 갖추어야 할 의학 지식의 양이 많아”졌으며, 그러하기에 “의학 지식과 경험이 많은 의사라 하더라도 완벽할 수가 없”었다. 의협은 메덱스 제도를 공격하기 위해 평소 지면에서 보기 힘든 자기비판을 하기도 했다. “S의대 병원의 오진율[도] 30%라는 통계가 밝혀져 일반이 충격을 받은 일이 있”을진대, “의학적 지식이 극히 낮은 새로 급조되는 진료원”인 메덱스 요원의 오진율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66)

이러한 논리는 농촌을 위한 제도인 메덱스가 외려 농촌을 차별하는 제도라는 공격으로 이어졌다. “생명이란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존귀한 것”인데, “도시에서는 주로 종합병원 병의원 등 높은 수준의 의료 혜택을 받”으나 농촌에서는 “메덱스의 손에서 치료를 받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진료의 계급성을 조성”하는 일”이라는 논리였다. 그러한 점에서 “도농간의 이질 수혜”를 제도화하는 메덱스는 “인명 경시[를] 조장하는 모순 제도”였다.67) 이러한 이유를 바탕으로 의협은 “저질 의료[를] 양산”하여 “의료 질서 혼란만 초래”하는 메덱스 제도를 도입하기보다는 “기존 의료 인력 및 시설의 적절한 활용을 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68) 사립의대의료원장회의 등도 의협에 힘을 보탰고, 의협은 시도지부협의회 회의를 통해 메덱스 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실력 행사를 결의했다.69)

의협의 강경한 반대 앞에서, 대한보건협회 회장 권이혁은 입장을 번복했다. 권이혁은 『의협신보』 기자와 만나 대한보건협회는 “메덱스에 대한 어떤 공식 태도를 표명한 일도 없고 표명할 성질의 문제도 아니며 더구나 이를 주장하고 건의한 사실이 없다”고 발언했다.70) 과거 의학전문학교 제도 논의 당시 고재필이 보였던 태도의 반복이었다. 일간지 보도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낮았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개 행사였고, 제도 도입을 단순히 검토만 하는 자리라기에는 심포지엄의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 행사에는 의협은 물론 대한약사회, 대한간호원협회(현 대한간호협회, 이하 간협) 관계자, 그리고 상기한 리처드 스미스와 세계보건기구 주한대표가 모두 참석했다. 권이혁의 발언 정정은 사실을 바로잡기보다는 입장을 철회하고 앞으로는 메덱스를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후퇴 선언에 가까웠다.

물론 의료계 내부에도 메덱스 제도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가톨릭대학 의학부 이태준(李泰後)이 대표적이었다. 이태준은 산업의학을 전공하다 지역사회의학으로 관심을 확장한 인물로, “지역사회보건의 개발, 의료혜택의 균점이라는 점에서 최근 소개된 메덱스 제도에 기본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다. 다만 별도의 요원을 양성하기보다는 이미 “간호원이나 조산원, 가족계획요원, 보건소 요원, 결핵 요원 등 단일 의료 목표만을 위한 의료요원이 상당수에 달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단기교육을 통해 다목적 의료요원인 메덱스로 발전적 전환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이태준은 “돌팔이 의사들의 역할을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실정”이므로 “차라리 이들에게 보충교육을 시켜주고 또 메덱스의 장점인 의사의 지도감독 아래에서 기초적인 의료 활동을 양성화 하는 것이 의료의 질을 오히려 높이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71)

이러한 이태준의 입장은 간호학계의 조건부 찬성과도 상통했다. 보건학 박사이자 당시 간협 이사였던 김모임(金慕妊, 1935–2024)은 메덱스 제도에 찬성하면서도, 간호사 인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의사가 일차 의료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지만 “훈련된 간호원, 보조원의 1차 의료는 질적 저하 등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활용되고 있지 못한 간호원 인력이 많은 점을 고려한다면 메덱스 제도는 보건요원의 활용과 국민보건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72) 또한 이는 간호사를 의사의 보조자가 아닌, 지역사회 건강관리자라는 독립된 전문인으로서 확립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정다혜, 2022: 103–104). 국제 기구 역시 이러한 방향에 찬동했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리처드 스미스는 한국에는 “한국적 해법”이 필요하다며 김모임의 발언에 힘을 실었고,73) 차관을 확약한 미국 국제개발처 역시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는 남성이 아닌 여성 인력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정다혜, 2022: 103).

4.3. 보건진료원 시범사업과 시행

1975년 12월, 정부는 시범사업 시행을 발표했다. 미국 국제개발처 차관을 활용하여, 1976년 15명을 시작으로 1981년까지 1,597명의 진료보조원을 양성하여 전국 농어촌에 배치한다는 계획이었다. 농어촌의 경우 “질병의 50–75%가 진료보조원 수준[의] 교육을 받은 요원에 의해 예방되고 치료될 수 있”으며, “진료보조원의 양성 비용은 의사 1인 교육비 총액의 15분의 1” 수준이기에, 비용 효과 측면에서 뛰어나다는 설명도 함께였다.74) 1976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정희는 “유류 파동 이후 …… 국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어떤 정책 구상이 있”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세법 개정, 주택 정책, 전기 및 통신 인프라 확장 등을 이야기하고 여기에 “싼 비용으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국민 의료 제도를 확립해 나가는 문제들을 지금 검토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내년부터 이것이 정책에 반영되어 실시될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제도 시행을 사실상 공식화했다.75)

박정희의 공식화 이후, 시범사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76년 4월 전체 보건 의료 기획을 총괄하고 시범사업을 전담하는 기구인 한국보건개발연구원이 설치되었고,76) 같은 해 9월 마을건강시범사업이 시작되었다. 사업의 형태는 간협과 리처드 스미스, 미국 국제개발처 등의 의견에 따라, 간호사를 보건진료원으로 활용하는 형태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리고 1977년 7월, 여러 지원자 가운데 선발된 이를 대상으로 3개월의 이론 강의, 3개월의 임상 실습, 6개월의 현장 실습 교육이 개시되었다. 교육에는 태국에서 개발된 교재와 메덱스 프로그램에서 사용된 교재 등을 한국 실정에 맞게 번역하고 편집한 자료가 사용되었다.77)

시범사업의 결과는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보건진료원이 제공한 진단 및 치료 과정의 적정성은 82.4%, 특히 치료 과정의 적절성은 93.7%로 매우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의료 사고 역시 발생하지 않았으며, 비용 측면에서도 보건소 중심의 기존 체계에 비해 50% 절감을 달성했다(김진순, 2021: 8).78)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예정된 시범사업을 중단 없이 진행했고, 이후 전두환 정부는 시범사업을 정식 제도로 전환하고자 새로운 법을 제정하였다. 기존의 「의료법」으로는 간호사의 일차 진료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건진료원의 자격과 의료 행위의 범위 등을 법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었다.79) 1980년 12월 이른바 ‘농특법’으로 불리는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며, 보건진료원은 정식 제도로 자리잡았다.

의협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상기한 이태준이나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허정(許程, 1932–) 같이 메덱스 제도에 찬성하는 인물도 있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80) 대다수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고, 그러한 탓에 보건사회부는 시범사업이 확정된 시점에도 의협의 반발을 의식했다. 박정희의 연두기자회견 이후 석달이 지난 1976년 4월, 보건사회부 장관 신현확(申鉉碻, 1920–2007)은 “메덱스를 채택한 미국 서부 지역처럼 지역이 넓지도 않고 의사수가 많기 때문에 이 제도를 직수입하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는다”면서도, 필요하다면 “제도의 장점은 도입하겠으나 간호원, 조산원에게 진료 업무를 맡기지는 않겠다”고 발언했다.81) 이후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는 ‘TK의 대부’가 이미 확정된 시범사업의 내용을 거짓으로 둘러댄 셈이었다.

이후 시범사업이 정식 제도로 전환되던 당시에도, 의협은 보건진료원에게 허가된 의료행위의 범위를 두고 공격을 계속했다. 당시 인력개발부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던 남철현(南喆鉉, 1940–)의 회고에 따르면, 여러 쟁점이 있었다. 의협은 보건진료원의 외상 치료 범위를 깊이 1cm 이내로 규정해야 하며, 항생제와 주사제의 사용을 허용할 수 없고, 주 6일 진료 역시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보건사회부는 실무에서 외상의 깊이를 하나하나 잴 수는 없으므로 ‘경미한 상처’로 한정하고, 약품은 필수적인 52가지만을 다루게 하며, 6일 가운데 4일은 보건 교육에 할당하여 진료는 2일로 제한하는 합의안을 제시했다(남철현, 2011).

그러나 의협의 반발은 오래가지 못했다. 군부에 뒤이어 들어선 신군부는 “국보위의 힘”으로 의협의 반발을 제압했다(남철현, 2011). 전두환 정권은 보건진료원 제도의 확산을 위해, 훈련 기간을 1년에서 6개월(이론 8주, 임상 12주, 현지 4주)로 단축하고, 훈련 기관을 지역별로 대거 보충하였다. 그렇게 1981년부터 1986년까지 6년 간 2,284명의 보건진료원이 배출되었다(김진순, 2021: 9–11).82) 여기에 1979년부터 의사 인력의 무의촌 배치를 강제할 수 있는 공중보건의사 제도가 시행되면서, 1983년 무의촌은 공식적으로 해소되었다.83)

4.4. 보건진료원 제도를 향한 회의

그렇다면 보건진료원의 제도화로 의료인 공급과 관련한 논의는 모두 종결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의사가 아닌 의료인의 활용에 의문을 품었다. ‘농특법’의 입법은 이러한 의구심이 압축적으로 제기되는 계기였다. 물론 보건진료원 제도에 찬성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의사 출신의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이병주(李炳主, 1912–1996)는 “요새 간호원은 상당히 실력이 있”으니 보건진료원 제도가 “국가적으로 퍽 좋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84) 어떤 이들은 보다 파격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이를테면 경제학자 출신의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한기춘(韓基春, 1929–2011)은 간호사뿐 아니라 모자보건요원, 결핵 요원, 약종상, 침구사 모두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반대 의견도 강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의사를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업가 출신 의원 유옥우(劉沃祐, 1914–1984)는 차라리 “지금 의과대학이 6년인데 그 절반 정도의 …… 전문학교”를 세워서 “한지의사와 같은 그러한 성격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경제제2위원회 위원장 고재청(高在淸, 1928–2014) 역시도 보건진료원이 “경미한 의료행위를 한다 했는데 그 경미한 것이 과연 어떤 것”이며 “거기에 따르는 부작용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시범사업의 주무 부서인 보건사회부의 입장조차도 분명치 않았다. 장관 천명기(千命基, 1930–1999)는 “간호원 자격을 획득하자면 간호대학이나 전문대학을 나와가지고 일정한 시험을 쳐서” 되는만큼 “상당한 교육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 발언하며, 일견 보건진료원 제도를 옹호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보건진료원 제도가 일종의 임시 대책이라는 의견도 함께 제시하였다. 일단은 보건진료원 제도를 운영하지만 “항구적인 무슨 대책을 세워 가지고 간호원보다는 어떤 의사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유옥우의 의견에 천명기는 “전적으로 찬동”한다고 발언하였다.85)

농특법의 논의 과정은 보건진료원 제도를 둘러싼 당대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1980년 당시 보건진료원 제도는 이미 시범사업 수준에서 성공을 거두고, 정책의 효용이 증명된 상황이었다. 국제 사회의 지원과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는 전문가 단체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여러 국회의원은 물론 제도 시행의 주체인 보건사회부 장관까지 보건진료원 제도에 온전한 신뢰를 보이지 못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는 의료계의 반발도 반발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정책적 상상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다수의 인식은 여전히 의료 인력 부족 문제는 의사를 충원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이처럼 보건진료원 제도는 어렵게 도입되었음에도, 온전한 해결책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유옥우와 천명기의 발언에서 보이듯, 시범사업이 가시적인 성과를 드러낸 1980년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시선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이는 시범사업이 진행 중이던 1970년대 중후반에는 보건진료원을 향한 신뢰가 더욱 약했을 것임을 의미했다. 보건진료원 제도는 시작 단계에서 이미 한계를 부여받았다. 문제는 미래의 불확실성이었다. 불과 몇 년 후인 1983년 무의촌이 해소될 것이었지만, 1970년대 중후반 당시 이는 오지 않은 미래였다. 오히려 미래는 불투명했다. 공중보건의사 제도는 아직이었고, 보건진료원 역시 대안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여전한 문제와 대안의 부재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무언가 다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5. 과거로의 회귀와 결정적 분기: 의과대학의 연이은 신설, 1978–1988

5.1. 새로운 대안의 필요성

1970년대 후반, 보건사회부를 비롯한 여러 정부 관료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기존의 대책은 대체로 실패했다. 먼저 자격시험은 사실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월남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의사 시험은 극소수의 합격자를 배출했을 뿐이었고, 한지의사 시험은 업무 지역을 벗어난 도시에서의 편법 영업으로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무의촌을 향한 이들도 있었으나, 문제는 나이였다. 1977년 당시 전국 한지의사 464명 가운데 70세 이상은 26명, 60대는 171명, 50대는 163명이었다. 40대와 30대는 97명과 7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지의사의 신규 공급이 중단되었음을 고려하면, 이는 한지의사 대부분이 이른 시일 내에 은퇴할 것임을 의미했다. 실제로 10년이 지난 1987년 한지의사는 98명으로 감소했다.86)

보건진료원 제도의 미래 역시 불투명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의사가 아닌 의료인을 활용하는 방식을 두고,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만연했다. 다만 어떤 측면에서 온전히 근거 없는 우려는 아니었다. 신현확이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의료보험은 사실상 확정된 미래였다. 문제는 보건진료원의 업무 영역이었다. 1977년에 시작된 의료보험은 500인 이상 대기업 노동자를 대상으로 했고, 이들은 대부분 농어촌이 아닌 도시 거주자였다. 의료보험의 시행으로 증가할 의료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보건진료원이 아닌 의사가 필요했다. 물론 보건진료원의 활동 영역을 도시로 확대하는 방법도 가능했지만, 다수의 생각은 아니었다. 의협의 반대가 명약관화할 뿐 아니라, 보건진료원에 대한 신뢰 역시 낮았다.

설상가상 상황은 악화하고 있었다. 의과대학을 증설했지만, 인력 공급은 충분치 않았다. 공급 부족을 악화한 가장 큰 요인은 도미였다. 1965년부터 1977년까지 모두 3,888명의 의사가 미국을 향했고, 이는 1977년 등록된 의사 수 18,913명의 20.6%에 달하는 규모였다. 심지어 가장 많은 이가 미국을 향한 1971년의 경우, 의과대학 졸업생(667명)보다 미국으로 건너간 인력(965명)이 더 많았다.87) 의과대학을 통한 의료인 공급은 기능을 상실했다. 도미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이민 금지 등을 시도했으나, ‘수련의 파동’으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국 미국 정부의 이민 정책 변화로 도미는 일단락되었으나, 상황은 언제건 달라질 수 있었다(장원모ㆍ박승만, 2025).

5.2. 조건부 면허와 공중보건장학 제도

의사 공급이 적정 수준을 밑돌자, 보건사회부는 임시 처방을 시행하였다. 하나는 조건부 면허 제도였다. 1976년 2월 보건사회부 장관 신현확은 연두순시한 대통령 박정희에게 “무의촌 일소”를 위해 국가시험에서 낙방한 사람을 활용하겠다고 보고하였다. 별도의 시험을 시행하여 합격한 이에게 조건부 면허를 부여하고, 2년 동안 지정된 곳에서 진료하도록 강제하는 제도였다.88) 같은 해 4월, 보건사회부는 「의사의 조건부 면허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여 제도의 법적 뒷받침을 마련했다. 보건사회부 장관은 “합격자 결정방법을 의료행위를 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갖추었다고 인정되는 한도에서 따로 정할 수 있”었다(제2조 제2항).89) 합격의 기준을 유연하게 설정하여, 별도 시험에서 일정 수준의 성적만 거두면 바로 동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특정의(特定醫)’ 제도의 시작이었다.

1976년 6월 첫 번째 시험이 시행되었다. 첫 번째 시험에는 140명이 응시하여, 115명이 합격하였다. 이것 자체로는 유의미한 숫자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지속 가능성이었다. 정부는 합격 인원을 최대한으로 확보하기 위해, 정부 수립 후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인원 모두가 응시할 수 있도록 자격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너른 응시 자격이 더 많은 합격자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졸업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이들은 합격의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첫 해 합격자 가운데 1976년 졸업자 56명과 1975년 졸업자 31명, 1974년 졸업자 9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19명으로 전체의 16.5%에 지나지 않았다.90) 게다가 의과대학 졸업 당해에 특정의 시험에 응시한 이들조차도 합격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1976년 의사 국가시험 불합격자 139명 가운데 특정의 시험에 합격한 이는 56명에 그쳤다. 제도의 유용성을 의심케 하는 결과였다.

특정의 제도에 더해, 보건사회부는 장학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다. 1976년 4월, 신현확은 의과대학 학생에게 등록금과 숙식비를 포함한 전면 국비 장학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2년에서 5년 간 무의촌 근무를 강제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같은 해 12월 국회를 통과한 「공중보건 장학을 위한 특례법」으로 제도화되었다.91) 다만 여기에도 여러 한계가 있었다. 먼저 장학 제도는 어디까지나 인력 배치 정책에 해당했고, 그러한 점에서 의사 공급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또한 특정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무의촌을 겨냥한 제도였기에, 의료보험 시행으로 인한 도시 지역의 수요에는 대응할 수 없었다. 가장 큰 한계는 실효성이었다. 졸업 이후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이 예정된 이들에게, 장학 제도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1977년부터 1996년까지 모두 768명이 지원했다는 사실에 미루어볼 때, 지원자는 연 38.4명 수준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에 가까웠다(지역발전위원회, 2015: 3).92)

5.3. 의과대학 증설로의 회귀

이러한 임시 처방에 더하여, 보건사회부는 가장 익숙한 1960년대 중반의 해결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의과대학 증설이었다. 정책의 적절함을 떠나 의사 공급 자체를 늘린다는 목표만 놓고 보자면, 의과대학 증설만 한 방법은 없었다. 정부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부 투자의 최소화였다. 사보심의 계산처럼, 의과대학 신설에는 막대한 양의 재정 투입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사학의 의과대학 설치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전반의 보건의료 정책 기조와도 일치했다. 의료보험을 사회보험 형식으로 설계하여 민간 재원을 동원한다거나, 차관을 알선하여 민간 병원 설치를 유도하는 것과 같이, 정부는 의학 교육의 빈자리 역시 민간으로 채우려 했다.

또 하나는 지역 안배였다. 박정희 정권은 표면적으로나마 지역 균형 개발을 표방했다.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의 정치적 불만, 1.21 사태가 부각한 서울의 안보적 취약성, 해방 이후 한국의 개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국제기구의 요구 등이 맞물린 결과였다. 1964년 「대도시 인구집중 방지책」을 시작으로, 1971년의 「국토종합개발계획(1972–1981)」, 1977년의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계획」이 발표된 까닭이었다. 이러한 균형 발전의 논리는 교육에도 적용되었다. 학교는 인구 집중 유발 시설로 지목되었고, 이에 따라 1971년 고등교육정책심의회 고등교육분과위원회에 대학개혁소위원회가 설치되어, 1974년에는 지방대학 특성화 사업, 1977년에는 사립대학 지방 분교 설립이 시작되었다(김승정, 2024).

지역 안배의 논리는 의과대학 설립에도 적용되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의과대학 분포를 보면, 수도권에 해당하는 경기도는 제외하더라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남도, 제주도 등 의과대학이 부재한 지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의과대학의 부재는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부재, 더 나아가 졸업생의 지역 안착을 통한 의료 공급 확충의 부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지역 불균형을 심화하는 중요한 요인이었고, 그러하기에 의과대학 유치는 지역의 숙원 사업인 경우가 많았다. 의과대학을 정식으로 설치할 수 없다면 분교라도 설치해 달라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93) 그런 의미에서 의과대학 설치는 지역의 의료 인프라를 확충하는 동시에 지역의 인심을 달래는 수단이었고, 박정희 정부는 비수도권의 의과대학을 우선 인가하였다.94)

5.4. 사학의 적극적인 응답과 의과대학의 잇따른 신설

의사 단체는 이번에도 거세게 반발했다. 1976년 보건사회부 내에서 의과대학 증설 논의가 시작되자, 의협은 『의협신보』 등을 통해 바로 증설에 반대하는 기고와 사설을 실었다.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의사가 충분하다는 논리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 조그마한 땅 위[에] 의과대학이 6개나 신설되었”으며, 이제 “미국 유학이라든가 인턴 레지던트의 미국 병원 취직도 옛날 같지 않아 쉬운 일이 아니”니 굳이 의과대학을 신설할 이유는 없다는 이유였다.95) 이러한 반발을 의식한 탓인지, 1976년 12월, 문교부는 대학 입학 정원을 발표하며 의과대학 신설은 없다고 부연하기도 했다.96)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77년 12월, 문교부는 의과대학 두 곳의 신설을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의료 시혜 혜택을 뒷받침하기 위해 의료 취약 지구”에 의과대학을 증설할 필요가 있으며, 이에 따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원주분교(1977년 인가, 1978년 개교, 현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1977년 인가, 1978년 개교)을 인가한다는 내용이었다.97) 한 번 시작된 의과대학 신설은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1978년 10월에 확정된 1979년도 대학 정원에는 영남대학교(1978년 인가, 1979년 개교)와 계명대학교(1978년 인가, 1979년 개교), 인제대학교(1978년 인가, 1979년 개교) 의과대학 신입 정원이 포함되었다.98)

의협의 반대에도 빠르게 의과대학이 신설된 배경에는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사학의 이해가 놓여있었다. 당시 사학이 의과대학 설립을 원한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하나는 대학의 위상 제고였다. 의과대학 신설은 여전히 학교의 이름값을 올리는 지름길로 여겨졌고, 그러한 이유로 일부 사학은 과거 조선대학교, 한양대학교, 경희대학교와 마찬가지로 기반 시설 없이 바로 의과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영남대학교가 대표적이었다. 영남대학교 의과대학은 인가 이듬해인 1979년 신입생의 입학과 함께 부속병원 건설에 돌입하여, 첫 임상실습이 시작되는 1983년 병원을 개원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위상 제고에 더해, 의과대학과 병원 운영의 상승효과였다. 이미 자리 잡은 병원을 기반으로 의과대학 신설을 추진한 대학의 경우, 여러 장점을 누릴 수 있었다. 이미 확보한 임상 교원을 학교 운영에 그대로 활용함으로써 신설에 뒤따르는 신규 채용 부담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병원과 학교를 연계하여 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있었으며, 이에 더해 졸업생을 전공의로 흡수함으로써 병원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원주기독병원을 바탕으로 의과대학 설립을 인가받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원주분교, 순천향병원과 순천향대학교, 동산병원과 계명대학교, 백병원과 인제대학교 등이 여기에 해당했다.

이러한 상승효과는 반대의 전선을 흩트렸다. 어떤 이들에게 의과대학 신설은 손실이 아닌 이득이었고, 그러하기에 의사 집단 내부의 단일대오는 쉽게 유지될 수 없었다. 물론 1960년대 당시에도 중앙대학교나 충남대학교, 전북대학교 등의 사례가 있었으나, 차이는 1970년대 들어 의과대학 신설로 이익을 보는 병원의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사립 의과대학을 통해 의사 단체의 반대를 우회할 수 있었다. 정부에게 사립 의과대학을 통한 증원은 재정을 투입하지 않으며 의사 공급을 늘일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의사 단체의 반대 전선을 약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학의 의과대학 신설은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보건의료 정책과 교육 정책은 박정희 정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부 투자를 최소화하고 민간 자원을 동원하는 보건의료 부문의 정책 기조가 그대로 유지되었고, 수도권보다 지방대학을 장려한다는 교육 정책도 지속하였다. 신군부는 수도권 내 대학 신설과 증원을 금지하고, 수도권 대학의 지방 이전과 지방대학 설치를 장려했다. 이에 더해 사교육 부작용을 해소하겠다는 미명 아래 진행된 ‘교육 포퓰리즘’ 정책의 일환으로, 의과대학 신설을 가속하는 동시에 의과대학에도 졸업정원제를 적용하여 입학 정원을 최대 130%까지 늘여놓았다(의료정책연구원, 2024: 4–9).

신군부 시기에도, 사학이 의과대학을 설치하려는 동기 자체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저 기존에 운영하던 병원에 의과대학을 더해, 상승효과를 추구한 경우였다. 고신대학교는 복음병원을 바탕으로 의과대학을 신설했으며(1980년 인가, 1981년 설립), 원광대학교는 의과대학 설립과 동시에 씨그레이브재단의 이리종합병원을 인수하였다(1980년 인가, 1981년 설립). 한림대학교는 기존의 한강성심병원, 강남성심병원에 더해 춘천성심병원을 개원하며 의과대학을 설립했고(1981년 인가, 1982년 설립), 울산대학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에서 운영하던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을 교육협력병원으로하고 현대조선 부속병원으로 출발한 해성병원을 부속병원으로 지정하는 형태로 의대를 설립하였다(1987년 인가, 1988년 설립).99)

일단 의과대학을 설립함으로써 위상을 제고하려는 흐름도 그대로였다. 다만 차이는 이러한 경우가 전체 신설의 절반 수준으로 증가했으며, 임상 실습이 시작되는 시점까지도 병원이 마련되지 못한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동아대학교의 경우 1985년 의예과 신설 이후 신입생이 본과 4학년에 진급한 이후인 1990년에야 부속병원을 개원했고, 단국대학교의 경우에도 1988년 입학한 1기생이 졸업한 이후인 1994년 비로소 부속병원을 개원했다. 인하대학교는 부속병원 확보가 가장 지체된 곳으로, 1985년 신입생을 받은 이후 11년이 지난 1996년에야 부속병원을 완공했다. 다른 곳은 사정이 나았다. 아주대는 1987년인가 이후 1991년 부속병원을 완공했고, 동국대는 1986년 신설 이후 1988년 포항기독병원을 인수하고 1991년 경주병원을 개원했다. 건국대 역시 1986년 신입생 입학 이후 1990년 신라병원을 인수하여 부속병원을 갖추었다.

신군부 시기의 또 다른 차이는 재벌의 진출이었다. 앞서 언급한 울산대학교에 더해, 인하대학교와 아주대학교가 대표적이었다. 한진그룹은 1968년 인하공과대학을 인수하고 1984년 의과대학 신설을 인가받아 이듬해 신입생을 받았으며, 대우그룹도 1977년 아주공과대학을 인수하고 이후 1987년 의과대학 신설을 인가받았다. 이 외에도 기존에 의과대학이 부재하던 지방 국립대에 의과대학이 신설되는 경우도 있었다. 부산을 제외하면 의과대학이 없던 경상남도의 의사 인력 양성을 위해 경상대학교 의과대학이 설치되었고(1980년 인가, 1981년 설립), 같은 이유에서 충북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1984년 인가, 1985년 설립).

5.5. 의과대학 신설의 명과 암

군부와 신군부의 의과대학 신설 정책은 의도한 성과를 거두었을까. 일단 의사 인력 공급의 측면에서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의과대학 신설은 의사 국가시험 응시자와 합격자 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보자. 먼저 1965년부터 1971년까지 6개 의과대학이 설치된 첫 번째 시기이다. 신설된 의과대학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된 1971년부터 1977년의 시기를 보면, 응시자는 1971년 759명에서 1977년 1,220명으로 총 60.7%, 합격자는 1971년 658명에서 1977년 1,138명으로 총 72.9% 증가했다.

의사 국가시험 응시자 및 합격자: 1975–1995

Table 5. Examinees and Successful Candidates of the National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1975–1995

두 번째 시기는 군부 말기인 1977년부터 신군부가 종결되는 1988년까지 17개 의과대학이 설치되는 시기이다. 이때 신설된 의과대학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되는 1983년부터 1994년까지의 시기에는 응시자와 합격자 수가 더욱 가파르게 증가했다. 응시자는 1983년의 1,449명에서 1994년의 2,981명으로 총 105.7%, 합격자는 1983년의 1,403명에서 1994년의 2,905명으로 107.1% 증가했다. 특히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집중적으로 신설된 10개 의과대학이 동시다발적으로 졸업생을 배출한 1983년부터 1989년의 시기는 응시자와 합격자가 각각 117.9%, 합격자 109.1% 증가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의과대학 신설은 부족한 의사를 빠르게 충원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한계도 분명했다. 먼저 지역 안배의 측면이다. 군부와 신군부 모두 균형 개발을 내세웠지만, 의과대학 신설은 여전히 불균형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박정희 시기에는 강원도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원주분교, 충청남도에 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이 설치되었으나, 영남대학교, 계명대학교, 인제대학교와 같이 영남에 지원을 집중하는 양상 역시 계속되었다. 한 지역에 의과대학을 3개 이상 설치한 도시는 서울 이후 대구가 처음이었다. 전두환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지역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었으나 호남 지역 신설은 원광대학교 하나뿐이었고, 영남에는 고신대학교, 울산대학교, 동아대학교, 동국대학교, 경상대학교가 집중적으로 신설되었다. 이에 더해 강원도와 제주도에는 국립대학교에도 의과대학이 설치되지 않았다. 강원대학교가 1978년에, 제주대학교가 1982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역 안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에 더해 여러 지방 의과대학은 의과대학 인가 이후, 수도권을 중심으로 의과대학을 운영함으로써 지역 안배 정책을 우회하기도 했다. 의예과 과정은 지방에서 운영하고, 의학과 교육과정은 수도권에서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우회 운영은 결과적으로 지방보다는 수도권에 설치된 부속병원에 투자가 집중되고, 졸업생 역시 임상 실습으로 익숙해진 수도권에 남는 결과로 이어졌다. 의과대학 교육과 전공의 교육이 지역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의과대학과 병원 운영이 지역 의료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방식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교육부가 시정 명령을 내리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질 정도였다.100)

정부 투자의 부재도 지속하였다. 1965년 경희대학교를 시작으로 1988년 아주대학교, 단국대학교까지 모두 23개 의과대학이 신설되었으나, 이 가운데 국립대는 충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충북대학교, 경상대학교 등 4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앞서 언급한바, 정부 투자를 최소화하는 정책 기조 탓이었다. 여기에 의과대학 신설을 향한 사학의 강한 의지가 더해지면서, 사립대로 의과대학을 충원한다는 정책은 아무런 저항 없이 원활하게 시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과대학은 사립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고, 이는 의료 서비스의 민간화(김창엽, 2019; 홍창희ㆍ박승만, 2023)와 맞물려 의료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민간의 비중이 국공립을 압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심히 조율되고 기획된 증설도 아니었다. 상기한바, 부속병원 없이 일단 의과대학부터 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시기 신설된 11개 의과대학 가운데 4개 의과대학이, 전두환 시기 신설된 11개 의과대학 가운데 5개 의과대학이 여기에 해당했다. 이는 의학 교육의 질은 도외시하고, 일단 의과대학을 새로 올리는 데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표 3>에서 보이듯, 신설 의과대학은 교육에 필요한 교수진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조율과 기획의 부재 속에서, 정부는 의과대학을 빠르게 확충할 수 있었고, 사학은 시설 투자를 뒤로 미루고 의과대학을 손쉽게 유치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기획의 부재는 의도된 것이었다.

의과대학 교수진 규모: 1970, 1979, 1984

Table 3. Medical School Faculty Size, 1970, 1979, 1984

성과와 한계 모두에서, 이 시기는 중요했다. 다른 경로에 대한 정책적 상상력을 소거하고, 의과대학, 특히 사립 의과대학 신설이라는 하나의 경로만을 남기고 확정했다는 점에서, 1961년부터 1988년까지의 28년은 이후 시기에 대한 규정성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다른 종류의 인력을 활용하는 여러 방식은 모두 기각되었고, 의료인 부족은 의사 충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고가 자리 잡았다. 더 나아가 정부 투자를 최대한 억제한다는 정책 기조 속에서, 의학 교육을 민간에 맡기는 방식이 고착화되기도 했다. 현대 한국의 의사 인력 공급을 규정하는 두 가지 원칙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6. 나가는 말: 고착된 경로, 지워진 상상력

한국 근현대 의료의 큰 숙제 가운데 하나는 의료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의료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무의촌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그러한 절대적 부족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더욱 열악한 지역이 존재했다. 반면 의료 수요는 끝없이 성장했다. 경제 성장으로 주머니 사정이 나아지고, 의료보험의 시행으로 병원의 문턱이 낮아진 결과였다. 그렇다면 미충족된 수요를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지역의 의사 인력을 무의촌으로 재배치하는 방법이 활용되기도 했으나, 동원에 뒤따르는 반발 탓에 오랜 지속은 불가능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모색되고 시도되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의과대학을 신설하여 의사 공급 자체를 늘이는 방법이 추진되었으나, 의사 단체의 저항으로 중단되었다. 다음으로 시도된 방법은 월남 의료인과 같은 예비 인력을 정식 인력으로 전환하는 자격시험과 빠르게 의사를 양성하는 4년제 의학전문학교였다. 다만 후자는 의협의 반대 등으로 시행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전자는 유효한 방법이 아니었다. 메덱스 제도를 변용한 보건진료원 제도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러나 의사가 아닌 의료인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은 여전했고, 의료보험의 시행에 뒤따르는 도시의 의료 수요 증가를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부상하지 못했다. 이처럼 여러 대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한결같이 의과대학과 병존하는 경로가 되지 못한 채 기각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증설을 통한 의사 공급 증가라는 해결책으로 복귀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다른 종류의 인력을 활용한다는 정책적 상상력이 제시되고 전개된 시기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상상력이 소거되고 하나의 경로가 확정되는 결정적 국면이었다.

더 나아가, 의료인의 부족을 빠른 의사 충원으로 해결한다는 생각은 정부 투자를 최소화한다는 정책 기조와 결합하여, 사립 의과대학으로 의사를 양성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군부와 신군부 시기 신설된 23개 의과대학 가운데 19개가 사립인 까닭이었다. 사학 역시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의과대학 설치는 학교의 위상을 제고하고, 병원의 인력 확보를 용이하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신속하게 의과대학을 확충한다는 정부 정책과 의과대학 인가를 지상 과제로 삼은 사학의 목표가 중첩되며, 단기간에 많은 수의 의과대학이 신설되었다. 다만 문제 역시 없지 않았다. 지역 안배 원칙이나 의학 교육의 질 확보와 같은 사안은 주변화되었고, 의료 부문에서 차지하는 민간의 비중은 더더욱 커졌다.

이렇게 확정된 경로, 즉 의료 수요의 미충족을 의사 인력의 증원으로 해결하며, 이를 위해 의과대학, 특히 사립 의과대학을 신설한다는 방식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은 모두 10개 의과대학을 신규 인가했으며, 이 가운데 국립대학은 강원대학교와 제주대학교 두 곳이 전부였다. 이전에 시도되었던 다른 대안이 시도되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경로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과 그러한 과정에서 시도된 대안의 접근은 모두 망각되고 봉인되었다. 사학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정부 재정을 최소화할 방법이 마련된 상황에서, 굳이 다른 길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지역 의료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 결과였다. 2024년 보건복지부는 지역 의료 해결을 위해 한지의사 제도의 부활을 검토했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명예교수 허정은 지면을 통해 한지의사 도입을 제안하며 정부의 입장에 힘을 실었다.101)

물론 이러한 의견은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대개는 의과대학 신설이나 증원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식을 반복했다. 윤석열 정부의 증원 기획이 대표적이었다. 2,000명 씩 5년 간 10,000명을 증원함으로써, “의료 취약지구에서 활동하는 의사인력을 전국 평균 수준으로 확보”하고 “급속한 노령화 등으로 늘어나는 의료 수요”에 대응하겠다는 정책이었다.102) 문재인 정부나 이재명 정부의 증원 기획은 조금 달랐다. 군부나 신군부처럼 의사 수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지역 의료가 해결되리라 가정했던 윤석열 정부와 달리, 처음부터 지역 의료에 초점을 맞춘 인력 양성 방안을 모색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정책의 상상력이 의사라는 특정 직군을 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시도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어쩌면 역사는 반복된다. 과거 박정희 정권 시기 여러 정책이 의사 단체의 반발에 마주해 좌초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의 공공의대 정책과 윤석열 정부의 증원 정책은 의사와 의과대학 학생의 단체행동 앞에 표류했다. 이재명 정부의 지역의사제에 대항하는 단체행동은 아직 시도되지 않았으나, 이는 반복된 단체 행동에 대한 피로감 탓이지 의협의 영향력 자체가 감소했기 때문은 아니다. 여전히 집단적 반발의 가능성은 상존하고, 이러한 구조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기는 다시 한번 규정성을 발휘한다. 민간에 의존하는 의료 체계이기에, 민간의 단체행동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박승만, 2025). 한 번 만들어진 경로는 쉽게 이탈될 수 없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는 일은 구조의 견고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현실의 우연성과 역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의료 수요의 미충족을 의사 인력의 양성으로 해결한다는 방식이 하나의 상식이 되기 전까지, 정부는 다양한 인력을 활용하고자 했다. 물론 모든 시도가 성과를 거두지는 않았으나, 그중에는 보건진료원처럼 제도 안착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다. 지금의 상식이 특수한 역사적 경로가 만들어낸 결과라면, 과거와 달라진 현재의 구조 속에서 새로운 경로가 만들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한 과정에서 역사는 제한된 상상력을 확장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며, 과거는 그렇게 또 다른 미래의 바탕이 된다.

Notes

1)

대통령비서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장군 담화문집』 (서울: 대통령비서실, 1965), 17쪽; 「국가재건최고회의 1962년도 시정방침」, 『조선일보』, 1962년 1월 5일, 3면.

2)

구체적인 법조문은 다음과 같다. 「국민의료법」, 법률 제221호, 1951년 9월 25일 제정, 시행. 제17조 제1항. 주무부장관은 국민보건의 향상을 도모함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의료업자를 2년이하의 기간을 정하여 그 지정한 장소에서 지정한 업무에 종사케 함을 명령할 수 있다; 「의료법」, 법률 제1035호, 1962년 3월 20일, 전부개정, 시행. 제21조 지정업무종사명령 제1항. 보건사회부장관은 국민보건의 향상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원 또는 간호원에 대하여 2년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그 지정하는 장소에서 지정하는 업무에 종사할 것을 명할 수 있다.

3)

「한의도 동원키로」, 『조선일보』, 1963년 1월 30일, 7면.

4)

「한의에 새 의학교육」, 『동아일보』, 1962년 4월 3일, 3면; 「예방의약교육 실시 한의 삼백 명에」, 『동아일보』, 1963년 3월 27일, 7면; 「한의사 3백 명 동원」, 『경향신문』, 1963년 3월 22일, 7면.

5)

「의료법」, 법률 제1690호, 1965년 3월 23일 일부개정, 1965년 5월 24일 시행; 「새해 전원 해제: 무의촌에 동원된 한의」, 『조선일보』, 1964년 12월 20일, 7면.

6)

다만 지정업무종사명령을 별도의 조로 명기한 이전의 「의료법」과 달리, 1973년의 「의료법」은 특정업무종사명령을 제11조 면허의 조건 및 등록에 종속된 항으로 배치하였다. 「의료법」, 법률 제2533호, 1973년 2월 16일 전부개정, 1973년 8월 17일 시행. 제11조 제1항. 보건사회부장관은 보건의료시책상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제5조 내지 제7조의 규정에 의한 면허에 있어서 2년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특정지역 또는 특정업무에 종사할 것을 면허의 조건으로 붙일 수 있다.

7)

정밀한 방법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의료 이용량과 의사 생산성을 고려한 인력 추계는 199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0).

8)

보건사회부, 『보건사회백서: 국민보건과 사회복지』 (서울: 보건사회부, 1965), 46–47쪽.

9)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58회, 제5호, 1966년 9월 16일, 7–11쪽.

10)

인가 연도는 다음 기사를 종합하였다. 「새로 대학 정원을 조정, 각의 의결」, 『조선일보』, 1966년 12월 7일, 3면; 「내년에 6개 대학 신설」, 『조선일보』, 1967년 11월 25일, 1면; 「새해 대학정원 1,575명 늘려」, 『조선일보』, 1970년 12월 23일, 1면. 의과대학 설립 연도는 학교에 따라 의예과가 아닌 의학과 설치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어 혼선이 발생한다. 여기에서는 의예과 입학이 시작된 연도를 설립 연도로 통일하였다.

11)

1970년 정원에 중앙대학교와 전북대학교가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신설이 아닌 인가 기준으로 집계한 결과로 보인다.

12)

당시 충청남도 지역 내부의 요구에 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사랑의 인술 40년’ 충청권 대표 병원으로 자리매김」, 『충청투데이』, 2012년 10월 25일, 11면; 「지역민-언론 ‘염원’ 한목소리 … 개척, 자주정신 담긴 배움터로」, 『대전일보』, 2016년 8월 26일, 41면. 전라북도의 경우에는 본문에서 인용한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50년사』를 참고하라.

13)

「신입생 모집 중지 경고」, 『조선일보』, 1970년 11월 19일, 7면.

14)

「의학계에 스카웃 열풍」, 『경향신문』, 1970년 7월 17일, 7면.

15)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사회개발: 제1집 기본구상(시안)』 (서울: 보건사회부, 1968), 367–371쪽. 사보심은 각주를 통해 이러한 추계의 근거로 의사는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연 10% 증가시킨다는 단서를 붙여놓았는데, 실제로는 복리를 단리로 계산한 착오에 해당한다. 복리로 계산하면, 1970년 14,241명, 1975년 22,935명, 1980년 36,937명, 1985년 59,488명이 되어, 1985년 기준 19,888명의 차이를 보인다.

16)

사회보장심의위원회, 『15개년 보건계획(1차 시안), 1972–86)』 (서울: 보건사회부, 1969), 322–329쪽.

17)

사회보장심의위원회, 『15개년 보건계획』, 329–332쪽. 여기에서 사보심은 간호사, 치과의사, 약사, 위생요원의 수요와 공급을 추계하면서도 “조산원, 한의사, 영양사, 통계사 등과 의료보조원법에 의거한 임상병리사, 엑스선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치과기공사, 위생시험사, 그리고 접골사, 안마사와 같은 의료유사업자 등”에 대한 추계는 제시하지 않았다. 당시 이들에 대한 장기 사업계획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5개년 보건계획』, 366–367쪽.

18)

과학기술처, 『장기인력수급추계 및 정책방향: 1967–1986』 (서울: 과학기술처, 1968), 97–99쪽.

19)

「국회 문교공보위원회회의록」, 제58회, 제20호, 1966년 11월 22일, 39쪽; 「국회 문교공보위원회회의록」, 제59회, 제5호, 1967년 1월 28일, 3쪽. 전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설립을 위한 예산 자체는 1966년 국회 문교공보위원회에서 이미 편성된 바 있었다. 이는 설립의 지연이 행정부의 판단임을 의미했다. 「국회 문교공보위원회회의록」, 제58회, 제21호, 1966년 11월 23일, 1쪽.

20)

「70년도 예산안」, 『중앙일보』, 1969년 11월 26일, 2면; 「새로운 창조에의 도전, 한국의 재발견: 6 사회복지」, 『경향신문』, 1970년 1월 26일, 3면.

21)

「의대 증설반대: 먼저 실험요건 갖춰야」, 『의협신보』, 1967년 3월 27일, 1면; 「의대증설 반대성명」, 『의협신보』, 1967년 8월 21일, 1면; 「의대증설 왜 반대하나: 의과대학 증설계획에 대한 성명서」, 『의협신보』, 1967년 8월 21일, 11면.

22)

「의과대학 증설에 대한 반대성명서」, 『의협신보』, 1968년 2월 5일, 2면.

23)

「두 의료법에 반발」, 『조선일보』, 1966년 1월 16일, 7면; 「의료유사업자법-보건소법 개정 반대 인술 극한투쟁」, 『조선일보』 1966년 7월 5일, 7면; 「직업: 9 의사」, 『경향신문』, 1968년 8월 5일, 5면.

24)

「의대 증설 왜 반대하나: 의과대학 증설계획에 대한 성명서」, 『의협신보』, 1967년 8월 21일, 11면. 대한의학협회대의원총회 명의의 성명서 역시 대동소이하다. 「의과대학 증설에 대한 반대 성명서」, 『의협신보』, 1968년 2월 5일, 2면.

25)

「의과대학 실태조사」, 『의협신보』, 1969년 1월 30일, 3면.

26)

「시설 못 갖춘 의대는 폐쇄」, 『의협신보』, 1969년 2월 6일, 3면.

27)

「18일 간의 족적결산, 사학특감 그 공과」, 『동아일보』, 1969년 2월 6일, 3면.

28)

「시설 못 갖춘 의대는 폐쇄」, 『의협신보』, 1969년 2월 6일, 3면.

29)

「3개의대 기한부 폐쇄키로」, 『의협신보』, 1969년 3월 13일, 1면.

30)

「문교부 경고 ‘의대 시설 3년째 안 갖춘 3개 대학 신입생 모집 중지’」, 『동아일보』, 1970년 11월 19일, 7면.

31)

「미수복지 등에서 귀순한 의약업자에 관한 특별조치법」, 법률 제1796호, 1966년 7월 14일 제정, 시행. 여기에는 체제 선전의 의도도 함께 담겨 있었다. 당시 보건사회위원장 대리를 맡은 민주공화당 의원 정헌조(鄭憲祚, 1919–1985)는 특별조치법을 통해 “귀순해 온 의약업자의 자격을 가진 자에게 원호의 특례를 강구함으로써 그들의 생활안정을 기하고 나아가서는 공산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귀순할 의욕을 고취”할 수 있다고 발언했고, 조창대 역시 특별조치법이 “무의면 일소책”인 동시에 “이북에서 나온 사람들을 혜택을 줄 수 있는” “일거양득”의 방법이라 주장했다. 『국회회의록』, 제6대 국회, 제57회, 제12호, 1966년 6월 29일, 5–7쪽.

32)

「응시 자격 631명 발표: 귀순의약업자시험」, 『의협신보』, 1967년 6월 19일, 2면. 그 외 응시자는 치과의사 32명, 한의사 52명, 약사 16명, 간호사 14명, 조산원 11명.

33)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서울: 보건사회부, 1968), 54-55쪽.

34)

「의사국시 19명이 합격: 귀순의료업자는 5명뿐」, 『의협신보』, 1967년 8월 7일, 1면; 「한지의사 합격자 발표」, 『의협신보』, 1967년 9월 4일, 1면.

35)

「한지의 84명 합격, 합격률 28%로 저조」, 『의협신보』, 1968년 4월 8일, 3면.

36)

「24% 합격률 보여 한지의사 합격자 발표」, 『의협신보』, 1969년 4월 14일, 5면. 당시 언론은 합격자 50명 가운데 46명이 무의촌에 배치되었다고 보도했다. 4명이 배치되지 않은 이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무의면에 배치, 한지의 합격자 46명」, 『의협신보』, 1969년 8월 14일, 1면.

37)

「한의사, 한지한의사 및 입치영업자에 관한 임시조치법」, 법률 제2102호, 1969년 1월 29일 제정, 시행; 『국회회의록』, 제7대 국회, 제67회, 제42호, 1968년 12월 29일, 70–72쪽. 원안에서는 제한 기한이 3년이었으나 최종안에서 2년으로 축소되었다.

38)

누계가 발표되지 않아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 일단 1970년 5월의 보도에서 의사와 한지의사 합격자 누계가 각각 54명과 205명으로 확인되었다. 여기에 1970년 12월에 치러진 한지의사 시험에서 234명이 응시하고 79명이 합격하였으며, 1971년은 1월 시행한 한지의사 시험에서 월남 조의사 101명, 동원한의사 158명이 응시하여 각각 13명과 4명, 총 17명이 합격하였다. 같은 해 2월에 시행한 의사 시험에는 월남 의료인 응시자가 없었다. 「귀순의약업자 특혜 폐지키로」, 『조선일보』, 1970년 5월 15일; 「79명 합격: 한지의사 국시」, 『의협신보』, 1970년 12월 17일, 2면; 「귀순의 국시 무의미 입증: 합격률 나빠 예산만 낭비」, 『의협신보』, 1971년 2월 4일, 2면; 「제26회 의사국시 87% 합격」, 『의협신보』, 1971년 3월 8일, 2면.

39)

「귀순한지의 특별국시 합격자 한 명도 없어」, 『의협신보』, 1972년 1월 6일, 3면.

40)

1974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한지의사 534명 가운데 서울과 부산에 영업하는 것으로 확인된 이만 121명과 29명이었다. 「면허 지역 허가 재조정 필요」, 『의협신보』, 1974년 6월 24일, 4면;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서울: 보건사회부, 1974), 180–181쪽.

41)

「근무 지역 이탈 한지의 엄단: 보사부 지시 면허취소 상신토록」, 『의협신보』, 1971년 9월 13일, 3면; 「이중면허 막아야: 동원한의법 악용 우려」, 『의협신보』, 1970년 4월 20일, 1면.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의협과 대한한의사협회가 면허 가운데 하나만 활용하여 개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건의했으나, 보건사회부는 한지의사 지역만 지킨다면 이중 개원이 가능하다는 유권 해석을 내어놓았다. 「이중직업 묵인 처사: 의계 2중면허 소지 허용에 반발」, 『의협신보』, 1970년 3월 16일, 1면; 「의료 질서 역행 보사부 유권 해석: 동일 장소 이중 개설 가능」, 『의협신보』, 1971년 4월 12일, 1면.

42)

「오경옥 씨 등 8명 구속: 귀순의약업자 자격 위조 사건」, 『의협신보』, 1967년 8월 7일, 1면.

43)

「국가시험 권위에 찬물 끼얹어: 귀순의법 자체의 맹점 노출」, 『의협신보』, 1969년 12월 4일, 7면; 「6명 권고사직, 귀순의사 시험 부정」, 『경향신문』, 1970년 3월 18일, 7면; 「의사고시에 부정」, 『동아일보』, 1970년 5월 14일, 7면; 「한지의사 낙방 30명 데모, ‘의사시에 부정’」, 『동아일보』, 1971년 7월 31일, 8면; 「가짜 의사 16명 구속: 월남한 의약업자 면허 부정 사건」, 『경향신문』, 1972년 8월 24일, 7면; 「거듭되는 의료 면허의 부정」, 『동아일보』, 1972년 8월 26일, 3면.

44)

「의료제도에 혼란 없길: 명 회장, 귀순의료업자국시에 언급」, 『의협신보』, 1967년 6월 22일, 1면.

45)

「귀순의료업자 시험은 엄격히: 기본 정신 위배 없도록」, 『의협신보』, 1967년 7월 6일, 1면.

46)

「의가낙수: 말썽난 귀순업자 자격 문제」, 『의협신보』, 1967년 8월 7일, 3면; 「귀순의료인 자격증 위조: 그 저변」, 『의협신보』, 1967년 8월 10일, 8면; 「국가시험 권위에 찬물 끼얹어: 귀순의법 자체의 맹점 노출」, 『의협신보』, 1969년 12월 4일, 7면; 「예상한 부작용 … 귀순의약업자법」, 『의협신보』, 1969년 4월 24일, 6면; 「여기 문제점이 있다: 귀순의약업자 특별조치법」, 『의협신보』, 1969년 4월 24일, 7면

47)

「의협서 5명 추천: 귀순업자 심사위원」, 『의협신보』, 1968년 12월 5일, 2면; 「귀순의료업자 자격심사위 구성」, 『의협신보』, 1968년 12월 19일, 2면; 「귀순의법 개정 건의: 응시대상자 엄격히 심사토록」, 『의협신보』, 1969년 5월 1일, 1면; 「귀순의법 개정 작업에 착수: 국가고시 관리 강화하기 위해」, 『의협신보』, 1969년 5월 15일, 2면; 「서류 심사에만 의존 말도록: 의협 귀순의법 시행에 건의」, 『의협신보』, 1970년 2월 2일, 1면; 「의협 건의 참작: 귀순의약업자 응시 자격 심사에」, 『의협신보』, 1970년 2월 12일, 2면.

48)

「두 번만 응시토록: 귀순의 신청도 1년 내에」, 『의협신보』, 1969년 5월 19일, 1면.

49)

「귀순의법에 비난성 높아: 의사국시 합격률 평균 10%에도 미달」, 『의협신보』, 1969년 9월 29일, 1면.

50)

「의사국시부정사건 보사부서 자체 조사: 귀순의의 의사국시 중지론도」, 『의협신보』, 1969년 4월 21일, 2면; 「귀순의법 폐기 마땅」, 『의협신보』, 1970년 1월 26일, 3면.

51)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53회, 제18호, 1965년 12월 10일, 1, 9쪽.

52)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53회, 제18호, 1965년 12월 10일, 9, 5쪽.

53)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 제53회, 제18호, 1965년 12월 10일, 7쪽.

54)

이는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권이혁(權彛赫, 1923–2020)이 초대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55)

「파행하는 의무 행정: 동원한의사에 한지의 자격 부여」, 『의협신보』, 1968년 2월 19일, 3면; 「첫 상임이사회 개최: 동원한의 자격부여 반대 등 논의」, 『의협신보』, 1968년 5월 2일, 1면; 「동원한의 한지의제 저지에 총궐기: 보건관계법안 특별위 구성코 요로에 건의서 제출키로」, 『의협신보』, 1968년 6월 20일, 1면.

56)

「동원한의법 의료체제 오도 우려: 철회 건의안 곧 제출」, 『의협신보』, 1968년 7월 1일, 1면; 「시론: 동원 한의에게 한지의사 자격 부여란, 한의사로는 무의촌 해결 불능한 이유」, 『의협신보』, 1968년 7월 25일, 10면.

57)

「의료법 62조를 발동? 한의협, 동원한의법 시행 거부로」, 『의협신보』, 1969년 7월 31일, 3면.

58)

「보사부 보고 의학전문교제 추진」, 『경향신문』, 1974년 1월 29일, 1면; 「의학전문교 부활 방침」, 『동아일보』, 1974년 1월 29일, 1면.

59)

「긴급공청, 의학전문교제 이렇게 본다」, 『경향신문』, 1974년 1월 30일, 3면.

60)

「사설: 의전제 부활은 부당하다」, 『의협신보』, 1974년 2월 4일, 4면.

61)

「의전 부활 등 사실무근: 고 보사부장관 밝혀」, 『의협신보』, 1974년 2월 4일, 3면.

62)

Korea Health Development Institute, Consolidated Quarterly Progress Reports on the Korea Health Demonstration Loan Project (Project # 389-22-590-710, AID Loan # 489-U-092) (Seoul: KHDI, 1980), pp. 3–4; Korea Health Development Institute, KHDI Report, 1976–1977 (Seoul: KHDI, 1979), p. 5.

63)

「메덱스 제도 도입을 주장」, 『동아일보』, 1975년 11월 15일, 7면; 「”의사 독점 진료시대는 지났다” 새 의료제도 메덱스」, 『조선일보』, 1975년 11월 16일, 7면; 「메덱스 과연 실시해야 하나?」, 『의협신보』, 1975년 11월 20일, 8–9면.

64)

USAID, MEDEX Project Planning, Quarterly Report, Sept. 1975 to Dec. 1975 (PN-AAB-603), Appendix B. Health Manpower Development Staff, Second Quarterly Report.

65)

「메덱스 실시 절실하지 않다: 의료전달제도 공개토론회 개최」, 『의협신보』, 1975년 11월 17일, 3면. 다만 당시 한국보건개발연구원 초대 원장으로 내정되어 있던 서울대 보건대학원장 박형종(朴亨鐘, 1930–2022)만은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 하며 전체 보건정책 속에 포함시켜 다루어져야 한다”고 발언했으며, 이후 한국보건개발연구원 초대 원장이 되어 보건진료원 시범사업을 주도했다.

66)

「분사대: 1차 진료」, 『의협신보』, 1975년 11월 20일, 3면.

67)

「메덱스 제도의 허구성: 파괴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위험 내포」, 『의협신보』, 1975년 11월 20일, 7면.

68)

박성태, 「의료 질서 혼란만 초래: 의학계 메덱스에 반대 의견」, 『의협신보』, 1975년 11월 24일, 3면. 그 외에도 『의협신보』에는 다음의 기사가 실렸다. 「사설: 메덱스를 반대한다」, 「메덱스: 부작용이 두렵다」, 『의협신보』, 1975년 11월 24일, 4, 8–9면; 「의가낙수: 메덱스 제도를 반대키로」, 『의협신보』, 1975년 12월 1일, 5면; 주영재, 「의료균점과 가정의 제도: 메덱스는 돌팔이 양성화 초래」, 『의협신보』, 1975년 12월 22일, 10면; 이경성, 「메덱스 제도는 불가」, 『의협신보』, 1975년 12월 25일, 12면.

69)

「메덱스 제도에 반대: 사립의대의료원장회의 밝혀」, 『의협신보』, 1975년 12월 1일, 4면; 「메덱스 제도화 저지키로: 의협 제6차 시도지부협의회」, 『의협신보』, 1975년 12월 4일, 4면; 「메덱스 반대 재확인: 사립대의료원장회의 “의료 질서 혼란 초래”」, 『의협신보』, 1975년 12월 11일, 3면.

70)

「메덱스 도입 건의한 일 없다: 일부 보도 해명, “토론회 열었을 뿐”」, 『의협신보』, 1975년 11월 20일, 3면.

71)

「의료계에 찬반 회오리 메덱스 제도: 찬성 의료혜택을 폭 넓게」, 『동아일보』, 1975년 11월 22일, 5면.

72)

「의학계의 큰 쟁점: 메덱스제 도입 국내외 전문가들 의견을 듣는다」, 『경향신문』, 1975년 11월 17일, 5면.

73)

USAID, MEDEX Project Planning, Quarterly Report, Sept. 1975 to Dec. 1975 (PN-AAB-603), Appendix B. Health Manpower Development Staff, Second Quarterly Report.

74)

「보사부 확정: 진료보조원제 실시 내년부터」, 『경향신문』, 1975년 12월 17일, 7면.

75)

문화공보부, 『박정희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1976.1.15.』 (서울: 문화공보부, 1976), 28–30쪽.

76)

한국보건개발연구원은 1975년 12월 국회에서 설치가 의결되어, 1976년 4월 정식으로 출범했다. 『국회회의록』, 제9대 국회, 제94회, 제19호, 1975년 12월 17일, 11–12쪽; 「한국보건개발연구원법」, 법률 제2857호, 1975년 12월 31일 제정, 1976년 1월 11일 시행. 한국보건개발연구원은 이후 1981년 가족계획연구원과 통합하여 한국인구보건연구원으로 개편되었고, 1990년 사회보장심의위원회를 흡수하여 한국보건사회연구원으로 재개편되었다.

77)

시범사업 지역으로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산악형인 강원도 홍천군, 평야형인 경상북도 군위군, 도서 및 평야형인 전라북도 옥구군 등 3개 군이 최종 선정되었다. Korea Health Development Institute, KHDI Report, 1978–1979 (Seoul: KHDI, 1979), pp. 24, 38–39.

78)

Korea Health Development Institute, Overview and Evaluation of KHDI Health Project (Seoul: KHDI, 1980), p. 15.

79)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 법률 제3335호, 1980년 12월 31일 제정, 시행.

80)

허정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다음 칼럼이 대표적이다. 허정, 「맨발의 의사」, 『동아일보』, 1976년 7월 13일, 5면.

81)

「국비의사 양성키로」, 『조선일보』, 1976년 4월 22일, 7면. 신현확의 발언은 본디 후술할 조건부 면허와 공중보건장학 제도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82)

지역별 훈련 기관은 다음과 같았다. 경기도, 강원도, 제주도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충청북도는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충청남도는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전라북도는 전북대학교 의과대학과 예수간호전문대학, 전라남도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경상북도는 경북대학교 보건대학원, 경상남도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83)

보건사회부는 1974년을 끝으로 『보건사회통계연보』에 무의촌 통계를 싣지 않았다. 다만 무의촌의 완전 해결을 전망하는 1982년 보건사회부의 보고와 무의촌이 모두 해소되었다는 1983년의 보도를 볼 때, 실제로 1983년 통계상 무의촌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보사부 국회에 보고 무의촌 내년 완전해소」, 『동아일보』, 1982년 10월 18일, 2면; 「’유의촌’ 마을의 구실하게 구급 체제로」, 『경향신문』, 1983년 11월 29일, 3면.

84)

이병주가 의협과 다르게 보건진료원 제도에 찬성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1967년부터 이미 정치인으로 살아갔기 때문일 수도 있고,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기에 민간요법 치료사(Heilpraktiker)가 합법화된 독일 문화에 익숙해서 였을 수도 있다.

85)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제2위원회회의록』, 제13호, 1980년 12월 23일, 10–12쪽.

86)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서울: 보건사회부, 1978), 50–51쪽; 『보건사회통계연보』 (서울: 보건사회부, 1988), 105쪽.

87)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서울: 보건사회부, 1971), 354–355쪽.

88)

「박 대통령, 보사부 순시서 지시: 근로자 처우, 환경 개선 최선」, 『경향신문』, 1976년 2월 10일, 1면; 「박 대통령 조건부 면허로 무의지역 일소」, 『매일경제』, 1976년 2월 10일, 1면.

89)

「보사부, 별도 합격 기준도 규정: 조건부면허의규칙 마련」, 『동아일보』, 1976년 4월 27일, 7면; 「의사의 조건부 면허에 관한 규칙」, 보건사회부령 제519호, 1976년 4월 24일 제정, 시행.

90)

「’76년 뉴스를 결산한다: 특정의 배출, 의료법 제정」, 『의협신보』, 1976년 12월 20일, 8면.

91)

「의대생에 전면 국비 장학제」, 『동아일보』, 1976년 4월 21일, 7면; 「공중보건 장학을 위한 특례법」, 법률 제2911호, 1976년 12월 22일 제정, 1977년 1월 1일 시행.

92)

1977년 첫해에는 168명이 지원했다. 다만 이는 전 학년을 대상으로 한 결과였다. 「공중보건 장학생 168명을 확정」, 『의협신보』, 1977년 4월 14일, 4면.

93)

「길 따라 사람 따라 새 국토 풍물지: 43 원주, 원성, 횡성」, 『조선일보』, 1977년 11월 19일, 3면.

94)

박정희 정부가 일본의 1현 1의대 정책을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1973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1918–1993) 내각은 각 현마다 의과대학을 하나씩 설치한다는 정책 기조를 수립하고, 실제로 1973년 아사히카와의과대학(旭川医科大学), 야마가타대학(山形大学) 의학부를 시작으로, 1980년까지 16개 의과대학을 신설하였다(橋本鉱市, 2008). 당시 정부가 직접적으로 일본의 정책을 참고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일본의 의료 정책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가능성이 낮지 않다.

95)

김재호, 「의가춘추: 의대증설」, 『의협신보』, 1976년 10월 4일, 6면.

96)

「의과대학 신설 일절 불허: 문교부 77학년도 대학 입학 정원 조정」, 『의협신보』, 1976년 12월 23일, 3면.

97)

「78학년 대학 정원 조정: 야간대 신설은 불허」, 『경향신문』, 1977년 12월 28일, 7면.

98)

「모두 18만 1,925명으로 79학년 입학 대학 정원 4만 9,490명 늘려」, 『경향신문』, 1978년 10월 7일, 1면; 「교육 보편화에 한 걸음: 대학 진학률 18%서 22%로 대학 정원 대폭 증원」, 『경향신문』, 1978년 10월 7일, 7면.

99)

신군부 시기의 의과대학 신설 인가에 관해서는 다음 기사를 종합하였다. 「경상, 고신, 원광 의대 신설」, 『조선일보』, 1980년 9월 30일, 7면; 「82학년도 전국 대학 입학 인원」, 『동아일보』, 1981년 10월 8일, 10면; 「내년 대학 입학생 졸업 정원 5천 8백 80명 증원」, 『조선일보』, 1984년 10월 7일, 1면; 「86년 졸업 정원 확정 내년 대학 정원 동결」, 『동아일보』, 1985년 10월 30일, 1면; 「대입 정원 1만백4명 줄어」, 『동아일보』, 1987년 10월 19일, 1면.

100)

「“실습은 서울서” … 잘 키운 의대생, 수도권 준 지방대」, 『중앙일보』, 2024년 10월 10일.

101)

「정부, 지역의료 활성화 방안으로 지역 한정하는 ‘한지의사’ 법안 활용 검토」, 『메디게이트 뉴스』, 2024년 5월 16일; 「허정 교수의 보건학 60년: ’한지의사’도 생각해 보자」, 『보건뉴스』, 2024년 10월 21일, 5면.

102)

보건복지부, 「의사인력 확대방안 긴급 브리핑: 19년간 묶여있던 의대 정원 과감하게 풀고, 2025년부터 2,000명 증원」, 보도자료, 2024년 2월 6일.

References

1. 『국회회의록』.
2. 『국가보위입법회의회의록』.
3. 『경향신문』, 『대전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조선일보』, 『중앙일보』, 『충청투데이』.
4. 『메디게이트뉴스』, 『보건뉴스』, 『의협신보』.
5. 과학기술처, 『장기인력수급추계 및 정책방향: 1967–1986』 (서울: 과학기술처, 1968).
6. 대통령비서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장군 담화문집』 (서울: 대통령비서실, 1965).
7. 문화공보부, 『박정희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1976.1.15.』 (서울: 문화공보부,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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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무의면과 무의면 거주민: 1955–1974

Table 1. Doctorless Townships and Their Residents, 1955–1974

연도 면수 읍면 총수 대비 인구 대 전국 인구 대 읍면 인구
1955 777 52.0% 6,626,219 30.8% 40.8%
1956 807 54.0% 7,065,954 34.1% 45.5%
1957 793 53.0% 6,880,881 32.3% 44.4%
1958 251 16.9% 6,711,407 30.6% 41.5%
1959 780 52.6% 7,352,913 32.0% 44.2%
1960 722 48.7% 7,362,177 29.4% 40.9%
1961 676 45.5% 5,643,839 21.9% 31.4%
1962 413 27.8% 4,014,241 15.1% 25.9%
1963 455 31.0% 4,334,301 15.9% 24.5%
1964 528 36.0% 5,665,116 20.2% 29.6%
1965 649 44.3% 7,503,267 26.1% 38.7%
1966 690 47.1% 7,551,069 25.7% 38.9%
1967 742 50.6% 7,915,931 26.3% 40.8%
1968 645 44.0% 6,858,433 22.2% 35.4%
1969 641 43.5% 6,647,896 21.1% 35.0%
1970 673 45.7% 6,365,336 19.7% 34.4%
1971 536 36.4% 5,068,207 15.4% 27.4%
1972 549 37.3% 5,239,439 15.6% 28.6%
1973 541 37.0% 5,197,820 15.2% 28.6%
1974 602 41.3% 5,625,095 16.2% 30.8%

(보건사회부, 1958–1975)

표 2.

의과대학 정원: 1948–1986

Table 2. Medical School Admission Quotas, 1948–1986

의과대학 1948년 1970년 1978년 1982년 1986년
가톨릭 100 100 100 100
건국 40
경북 80 120 140 160 160
경상 80 80
경희 80 80 120 120
계명 80 80 80
고려 60 100 100 120 120
고신 80 80
동국 50 50
동아 50 50
부산 80 120 160 160
서울 120 160 160 200 200
순천향 100 100 100
연세 70 120 120 150 150
연세 원주 80 100 100
영남 80 80 80
원광 80 80
이화 40 60 60 80 80
인제 80 100 100
인하 50
전남 70 100 140 160 160
전북 60 100 120 120
조선 80 80 140 140
중앙 60 60 90 90
충남 80 100 120 120
충북 50 50
한림 80 80
한양 100 120 140 140
총계 440 1,300 1,900 2,790 2,880

표 3.

의과대학 교수진 규모: 1970, 1979, 1984

Table 3. Medical School Faculty Size, 1970, 1979, 1984

의과대학 1970년
1979년
1984
기초 임상 총계 기초 임상 총계 기초 임상 총계
가톨릭 30 93 123 77 185 262 69 278 347
경북 21 33 54 25 48 73 27 68 95
경상 14 6 20
경희 5 1 6 - - - 24 81 105
계명 15 80 95
고려 24 36 60 32 59 91 29 94 123
고신 24 48 72
부산 15 33 48 24 38 62 27 53 80
서울 40 84 124 40 85 125 55 131 186
순천향 6 49 55 32 96 128
연세 38 81 119 93 137 230 75 189 264
연세 원주 14 41 55
영남 16 60 76
원광 7 35 42
이화 12 32 44 21 41 62 18 48 66
인제 15 106 121
전남 18 49 67 19 49 68 30 62 92
전북 18 27 45 20 43 63
조선 18 0 18 29 36 65 28 42 70
중앙 22 44 66 18 50 68
충남 20 38 58
한림 16 84 100
한양 - - - 21 29 50 36 103 139

표 4.

한지의사 수: 1949–1980

Table 4. Limited-Area Physicians, 1949–1980

연도 등록 수 연도 등록 수
1949 703 1965 390
1950 706 1966 384
1951 788 1967 445
1952 695 1968 513
1953 696 1969 553
1954 698 1970 528
1955 706 1971 618
1956 713 1972 628
1957 714 1973 605
1958 720 1974 534
1959 708 1975 540
1960 701 1976 515
1961 701 1977 508
1962 702 1978 502
1963 408 1979 500
1964 400 1980 490

(보건사회부, 1958–1981)

표 5.

의사 국가시험 응시자 및 합격자: 1975–1995

Table 5. Examinees and Successful Candidates of the National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1975–1995

연도 응시자 합격자 연도 응시자 합격자
1967 1009 723 1982 1436 1376
1968 815 660 1983 1449 1403
1969 1027 619 1984 1616 1551
1970 814 631 1985 1767 1606
1971 759 658 1986 2138 2065
1972 744 658 1987 2635 2599
1973 797 761 1988 2825 2698
1974 878 764 1989 3157 2933
1975 1009 870 1990 3108 2798
1976 1089 920 1991 3196 2964
1977 1220 1138 1992 3135 2914
1978 1230 1162 1993 3182 3111
1979 1264 1162 1994 2981 2905
1980 1370 1269 1995 2971 2807
1981 1406 1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