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서ㆍ남해안 병원선 순회 진료의 연착륙과 그 의료사적 함의†

The Gradual Establishment and Historical Implications of Hospital Ship Mobile Medical Services along Korea’s Western and Southern Coasts in the 1960s–1970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6;35(2):539-574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6 August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6.35.539
*Full-time Researcher, Institute for Women’s History of Medicine, Korea University
신창훈*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현대사 전공
†이 논문은 202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25S1A5A2A03012096). 또한 이 연구는 2025년 대한의사학회 가을철 정기학술대회(2025년 11월 7일, 인제대학교 해운대백병원)에서 먼저 발표되었다.
Received 2026 June 16; Revised 2026 July 31; Accepted 2026 August 03.

Abstract

The term muui (doctorless) refers to a state of absolute deprivation of medical care. In modern Korean history, chronic shortages and regional disparities of medical resources resulted in the widespread existence of muuichon (doctorless village). In response, the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implemented a series of policies and initiatives, including the establishment of a public health center system and the mobilization of public doctors. Yet the very term muuichon also suggested that the problem of public health was inseparable from that of space. Above all, there was a distinct spatial hierarchy of medical accessibility, extending from the capital, Seoul, to major cities, smaller cities, rural villages, and, finally, to remote mountainous and island regions. Among these areas, the islands along the western and southern coast faced significant geographical obstacles, making even minimal access to medical services exceedingly difficult.

Hospital ships emerged as a historical product of this intertwined medical–spatial context. By the mid-1960s, as the public doctor mobilization program came to an end, local health authorities and private medical institutions in island regions devised a plan to construct specialized ships equipped with medical facilities and dispatch them to circulate among muuido (doctorless island). Consequently, Korea’s first hospital ships, Gyeonggi and Badaui Byeol, began operations and helped fill the gap left by the absence of medical institutions in island regions. In doing so, they moved beyond conventional approaches tied to fixed administrative boundaries and pioneered a healthcare delivery system adaptable to the region’s distinctive spatial characteristics. Moreover, this system demonstrated its effectiveness by requiring relatively modest expenditures while extending medical services to islands throughout the region.

During the 1970s, the central government also came to recognize the advantages of this system and sought to institutionalize mobile medical services aboard hospital ships. In the mid-to-late 1970s, in particular, President Park Chung Hee spearheaded the construction of numerous hospital ships, thereby establishing the material foundation for the system. In 1978, the island regions along the western and southern coasts were reorganized into nine medical service districts, each assigned one or two hospital ships under the newly established Hospital Ship Medical Service District System. As a result, the system followed a reversed trajectory in which an initiative first pioneered at the local level was subsequently integrated into and institutionalized at the national level. This process exemplifies a dimension of dynamism in South Korean medical administration that cannot be fully captured through a state-centered perspective or adequately explained by structural accounts based solely on budgets or fiscal considerations. Yet, in the final phase of institutionalization, President Park Chung Hee intervened directly to bring the matter to a definitive conclusion, thereby also reinforcing the image of his rule as benevolent.

1. 머리말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섬사람들은 영세한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고 있거니와 쪼들리는 살림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아이들 교육문제, 의료, 생필품의 구득(求得) 등등 온갖 생활면에 있어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1)

‘의료균점’, ‘의료균등’, ‘의료공공성’, ‘공공의료’ 등으로 일컬어져 온 일련의 포괄적 논의들이 있다. 어느 하나 쉬이 개념을 정의하기도 논점을 특정하기도 힘든 복잡다단한 성질의 화제이다. 하지만 그 저변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제만큼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보편의 합의로 남아있는 듯하다. 바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의료 혜택만큼은 빈부, 연령, 지역, 성별 여하를 막론하고 공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너른 시선으로 조망하면 20세기 한국 의료의 역사는 이 최소의 상(像)에 다가서는 여정을 하나의 줄기로 하였다.

단적으로는 이른바 “무의촌(無醫村)”의 난제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無醫”는 어떠한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결핍의 상황을 지시했다. 그러한 연유로 무의촌을 해소하여야 한다는 당위 자체에는 이견이 없었으며, 다만 그에 다다를 방법론의 차원에서 여러 논의와 실천이 교차하였다. 최근에 제출된 여러 연구 성과들은 보건소, 공의(公醫), 공중보건의사 등의 개별 소재를 중심으로 각각의 전개 과정을 검토하였다(강재구, 2023; 정무용, 2023; 신창훈, 2023).

본 논문은 접근을 다소 달리하여 “無醫”의 수식 대상인 “村”의 맥락에 강조점을 두고자 한다. ‘無醫’와 ‘村’의 결합은 그 자체로 의료균점의 문제가 공간의 문제와 상호 긴밀히 착종되어 있었던 당대의 현실을 함의한다. 예컨대 한 선행 연구에서는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도농 격차가 무의촌 문제를 정체 혹은 심화 시켰던 1950년대의 양상을 확인한 바 있다(김진혁, 2025). 이는 1950년대와 그 이후는 물론 지금 시점에서도 숙고를 요하는 논점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공간적 위계의 맥락을 한층 세밀하게 더듬어 도시와 농촌의, 그리고 무의촌과 非무의촌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서울-대도시-중소 도시-농어촌-산간 벽지ㆍ도서(島嶼)로 이어지는 수직적 배열을 타진할 것이다. 같은 도시라 하더라도 서울, 대도시, 중소 도시의 의료 여건은 서로 판이할 수밖에 없으며, 마찬가지로 산간 벽지ㆍ도서의 실정도 농어촌 일반과 동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도서 지역의 경우에는 고유의 물리적 특성이 자명한 만큼 다른 어느 공간에 견주더라도 근본적으로 양상을 달리하였을 소지가 다분하다.

본 논문이 서ㆍ남해안 도서 일대를 주목하는 연유는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다. 주지하듯이 이 지역은 20세기의 대부분을 의료 일체와 동떨어진 채로 퇴락하였으며,2) 그 바탕에는 본연의 공간적 제약이 자리하였다. 이 두 개의 맥락을 하나의 시선 속에 아울러 상세히 들여다본다면 한층 치열하면서도 공간의 특성에 부합하는 고민과 실천을 포착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연구 대상으로는 병원선(病院船)을 선택하였다. 현시점의 서ㆍ남해안 도서 지역은 1차 의료 기능의 상당 부분을 병원선 순회 진료에 의존하고 있는데, 관련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인천광역시, 충청남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소속 병원선 총 5척이 연인원 약 20만 명을 순회 진료하였다(국회입법조사처, 2022: 30).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어느 일순간에 완성된 틀이 아니었다. 역사적인 관점으로 주시하면 무의도(無醫島)의 열악한 현실을 둘러싼 중장기적 문제의식과 실천이 꾸준히 이어졌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를 에워싼 당대의 맥락과 접합하며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형태로 일단락되었다. 이어지는 본론에서는 그 과정을 면밀히 확인하고 역사적 함의를 도출하도록 하겠다.

2. 1960년대 병원선 순회 진료의 시작: ‘1面1醫’의 여백과 대안

도서 지역의 의료 여건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열악하였다. 이는 굳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실태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결국 관련 통계를 확인하여야 한다. 1967년 1월 26일 내무부는 ‘낙후지역 종합개발 관계관 회의’를 개최하였는데(엄민영, 1967), 이를 전후하여 전국 2,438개 도서에 대한 전수 조사도 병행하였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702개 유인도에 총 115만 1,42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의도는 그중 569개였으며, 나머지 130여 개의 섬에는 병원 4개, 의원 63개, 한의원 52개, 보건소ㆍ보건지소 31개 등 도합 150개가 소재하였다. 이는 전국 총계 의료기관 10,965개의 1.4%를 점하는 수치였다.3) 종합하면 당대의 무의도 거주 인구는 최소 수십만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1년 1월에는 주무 부처인 보건사회부가 무의도 현황을 재집계하였다. 관련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로는 전국의 무의도 거주 인구가 도합 67만 3,632명이었다.4) 그런데 보건사회부가 별도로 공표한 1970년 말 기준 전국 무의면 인구는 총 636만 5,336명이었으며, 치과의사, 한의사까지 전무한 “순무의면(純無醫面)”으로 한정할 시에는 총 525만 5,307명이었다(보건사회부, 1970: 188-189). 종합하면 당대의 무의도 거주 인구는 최소 60만 명 이상이었으며, 비중상으로는 전체 무의면 인구의 약 10.6%, 순무의면 인구의 약 12.8%를 점하였다. 서ㆍ남해안에 맞닿지 않은 강원, 충북, 경북의 무의면 인구를 제외할 시에는 비중이 각각 15.2%, 17.7% 가까이 이르렀다.

큰 틀에서는 무의도를 무의면의 일개 부분 집합으로 간주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위의 통계에서 드러났듯이 ‘無醫’는 비단 도서 지역뿐만 아니라 당대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 해소책에 있어서만큼은 일반의 무의면과 양상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무의도 특유의 실정이 엄연하였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견지되어 온 의정 당국의 정책 기조는 ‘1面1醫’, 즉 1개 면에 최소 1명의 의사를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간의 연구 성과에서 주목한 공의, 공중보건의사, 보건소ㆍ보건지소 등은 바로 이를 목표로 한 일련의 제도적 접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面1醫는 그 효용 여하와 별개로 위로부터의 행정적 관점을 그대로 투사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1面1醫의 청사진은 논리상 의사 1인의 배치를 곧 無醫 상태의 해소로 등치하였고, 실제로도 이 기준을 적용하여 전국 무의면 현황을 집계하였다. 하지만 면 단위의 행정 구역이 실제의 생활 권역과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러한 경우에는 설령 1面1醫의 요건을 갖추더라도 현실과 동떨어진 명목상의 ‘有醫’에 그칠 소지가 농후하였다. 이를테면 대한의학협회 공보간행이사 김사달(金思達)은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며 ‘무의지역’을 면 단위가 아닌 “인구 분포와 지역거리 본위”로 재편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현행 말단 행정구역인 면 단위에 치중하여 면마다 명색만의 의사를 충당하면 지역사회의 의료가 해결”될 것이라는 전제 자체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5)

그림 1.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신안군 도초면 관내도

Figure 1. Map of the Docho-myeon, Sinan-gun, Jeonnam-Gwangju Special Metropolitan City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신안군 도초면, 「관내도」, 신안군 누리집. https://www.shinan.go.kr/home/www/about/village_info/village_info_07/village_info_07_04/page.wscms. 검색일: 2026.8.7.)

도서 지역은 그러한 명목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공간이었다. 편의상 지금의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신안군 도초면을 예시로 삼아 살펴보면,6) 도초면 주민 대다수는 서로 약 8km 떨어져 있는 도초도와 우이도에 나뉘어 거주하여 왔다.7) 1面1醫의 틀을 적용한다면 도초도에 보건지소가 들어선 1974년 이후로는 도초면 전체가 ‘有醫’의 기준을 충족하였다(강봉임, 2018: 263).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도초도에 한정하여 실제와 부합할 뿐 우이도 주민의 입장에서는 큰 효용이 없었다. 실제로 우의도는 1986년에 이르러 뒤늦게 보건진료소를 구비함으로써 무의 상태에서 벗어났다(보건사회부, 1988: 228).

병원선은 바로 이 틈새 속에서 도서 지역의 의료 공백을 해소할 차선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본 논문에서 상정하는 병원선은 ‘도서 지역을 정기 순회하는 의료 목적의 특수 선박’이다. 이 틀에 따르면 오직 도서 지역 순회 진료에 목적을 두어 건조 혹은 개조된 전용 선박이어야만 온전한 의미의 병원선이라 할 수 있다. 1959년 9월 3일자 『부산일보』에 보도된 바로는 통영적십자병원이 내부에 “병원시설을 장치”한 “이동병원선”을 이미 운용 중이었다.8) 하지만 함께 실린 사진상으로는 선박 자체가 극히 협소하여 소형 보트로 추정되며, 활동 내역도 해당 기사 외에는 일절 확인되지 않는다. 이상의 정황을 종합하면 통영적십자병원의 ‘이동병원선’은 일종의 간이 선박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 2.

통영적십자병원 이동병원선

Figure 2. The Hospital Ship of the Tongyeong Red Cross Hospital

(「인술은 고도에도」, 『부산일보』, 1959년 9월 3일, 4면)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일반 여객선을 개조하여 1964년 1월 15일자로 취역한 배수량 27톤급 선박 ‘경기’를 병원선의 효시로 상정할 것이다. 경기호는 경기도청이 약 17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취역한 국내 최초의 순회 진료 병원선이었다. 경기호의 선내에는 입원실, 처치실 등이 구획되어 있었으며, 의료 인력으로는 인근 도립병원과 보건소에서 차출한 의사 1인, 간호사 2인 및 검사원 1인 등이 승선하였다.9) 본래의 취지가 그러하였듯이 경기호는 관내 옹진군, 부천군 소재 도서 등을 순회하며 진료 및 방역 활동을 전개하였다.10) 취역 첫해인 1964년에는 총 19회 출항하여 도서 주민 약 2,900명을 진료하였으며,11) 그 이듬해에는 총 28회로 횟수를 늘려 약 6,500명이 혜택을 입었다.12) 이러한 일반 진료뿐만 아니라 가족계획사업, 장티푸스 방역 사업 등도 유연하게 병행하였다.13)

언론에 보도된 경기호의 연간 운영 예산은 1966년도 기준 1,656,200원, 1967년도 기준 2,016,600원이었다.14) 해당 시점의 「공의 보수 및 여비 규정」에서 명시한 법정 급여는 월 최소 4,000원에서 최대 16,000원이었다. 그러므로 경기호의 1966년도, 1967년도 운영비는 중간값 10,000원 기준으로 각각 공의 약 14명, 17명의 연간 인건비와 비슷하였던 규모라 할 수 있다.15) 물론 실제의 공의진료소 및 보건지소 운영에는 여비, 약품비, 시설 유지비 등의 고정 지출이 뒤따랐다.16) 게다가 경기도 소재 무의도는 1971년 초 시점에도 총 55개에 달하였던 만큼 1964년 경기호 취역 당시에는 그 이상으로 산재하였을 개연성이 농후하다.17)

보다 결정적으로는 초기 비용상의 차이가 현격하였다. 1967년도 기준 보건지소 신축비는 20평 표준에 평당 단가 37,500원을 적용하여 1개소당 총 750,000원으로 책정되었다.18) 이를 대입하면 보건지소 3개소를 신축하는 비용만으로도 경기호 건조비 170만 원을 크게 웃돌았던 셈이다. 공의진료소 신축도 대체로 비슷한 규모의 지출을 요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경상남도 사천군(現사천시) 곤명면은 1965년경에 총액 50만 원을 들여 공의진료소를 신축한 바 있었다.19) 요컨대 병원선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요하되 그 편익은 관내 도서 전체에 골고루 미치는 방편이었고, 그것이 곧 보건지소, 공의진료소에 비교 우위를 갖는 지점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병원선은 도서 주민의 관점에서도 이점이 뚜렷하였다. 위의 의료기관들은 본인이 거주하는 도서에 소재한 것이 아니라면 통원 자체에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게다가 공의진료소는 환자로부터 일정한 진료비를 징수하였던 만큼 경제력 여하에 따른 진입 장벽도 분명하였다. 보건소의 경우에는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그나마 저렴하였던 것 같다(강재구, 2023: 258-260). 하지만 그마저도 늦어도 1965년 하반기 무렵부터는 일반 시ㆍ도립병원과 동일한 수가를 적용하고 진찰비를 부과하였다.20) 이와 달리 병원선은 도서 주민들을 직접 방문하고 또 무료로 진료하였다.21)

물론 의료 혜택의 측면에서는 간헐적 방문에 그치는 병원선과 지역에 상주하는 일반의 의료기관을 동일 선상에 두고 논할 수 없다. 그러나 1島1醫는 커녕 1面1醫조차 난망하였던 당대의 사회경제적 여건, 그리고 이마저도 상대적으로 효용이 적었던 도서 지역의 실정을 감안하면, 주민들의 생활 반경 내에서 별도의 비용 소요 없이 1차 의료를 접할 수 있게 한 병원선의 존재는 분명 긴요하였다. 시선을 넓히면 자체 병원선을 운용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난 것도 그러한 공공의료적 의의를 방증하였다. 예컨대 1964년 4월에는 경상남도 충무시보건소에서 10톤급 병원선 ‘섬돌보기’를 진수하였는데,22) 집계상으로는 연평균 약 3,700명의 도서 주민을 진료하였다.23)

그림 3.

가톨릭중앙의료원 병원선 ‘바다의 별’

Figure 3. Badaui Byeol, the Hospital Ship of the the Catholic Medical Center

(「병원선 ‘바다의별’ 취항」, 『조선일보』, 1964년 11월 6일, 3면)

같은 해 11월에는 가톨릭중앙의료원이 경기도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의료 봉사를 도맡아 오던 베네딕트 즈웨버(Benedict A. Zweber, 한국명: 최분도) 신부의 주도하에 36~39톤 규모의 병원선 ‘바다의 별’을 진수하였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바다의 별의 모체는 미군대한원조프로그램(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AFAK)에서 기증한 주한미군 해군 함정이었고, 이를 병원선으로 개조하는 비용은 해외 교우들이 보내온 성금으로 충당하였다. 주된 활동 지역은 백령도, 연평도, 덕적도를 비롯한 옹진군, 부천군 소재 15개 도서였으며,24) 의료 인력은 외과의, 내과의, 산부인과의 각 1명과 약사 1명, 간호사 2명이 승선하였다. 선내 시설로는 진료실, 응급실, 수술실, X선 촬영실 및 6개 병상 등을 구비하였다.25)

바다의 별은 ‘母병원’과의 연계하에 중층적인 진료 체계를 선보였다. 가톨릭 중앙의료원은 바다의 별 건조와 더불어 ‘기지 병원’ 건설을 함께 추진하였고,26) 얼마 지나지 않아 덕적도 소재 유베드로병원의 개원으로 소기의 결실을 맺어 일반 환자는 병원선 내에서 자체 진료하고 중환자는 기지 병원으로 이송하여 진단하는 체계가 제 궤도에 올랐다.27) 이는 1차 의료의 현장이자 2차 의료에의 이송 수단으로서 이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병원선 본연의 장점에 주목하여 그를 한층 정교하게 구현한 산물이었다.

이렇듯 민간의 의료기관과 의정 당국이 제각기 병원선을 진수하여 순회 진료를 본격화한 사실은 그 자체로 병원선의 실용성을 시사하였다. 또한 1964년 2월에는 한국반공학생총연합회가 공보부의 후원하에 50톤급 병원선 건조를 목표로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는데,28) 이 역시 병원선의 정책적 효용이 공인되는 흐름을 방증했다. 단, 그 시점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리적인 설명이 요청된다. 즉, 1964년에 들어서 민관을 막론하고 동시다발적으로 병원선 건조를 타진하고 또 실행에 옮겼다면, 이를 결정적으로 추동한 1960년대 초중반의 특정한 맥락을 탐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본 논문은 1961년 5.16 쿠데타 이래의 의사 동원을 각별히 주목하고자 한다. 선행 연구에서 확인하였듯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9월부터 1965년 5월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병역 미필 의사 약 1,000여 명을 강제 동원하여 그중 700여 명을 전국 무의면에 공의로 배치하였다. 선박 개조 혹은 건조에 소요되는 기간과 그 이전의 심의 과정까지 감안하면 늦어도 1963년에는 병원선 관련 구상이 이미 구체화 단계에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교롭게도 해당 시점은 의사 동원의 최절정기에 해당했다. 1963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제1차 동원 인원 107명, 제2차 동원 인원 460명을 포함하여 최소 600여 명의 공의가 무의면에서 근무중이었다(신창훈, 2023: 1054-1055).

공의 동원의 경험이 도리어 병원선의 등장을 추동한 이 역설적 정황은 크게 두 가지의 정합적 설명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첫째, 공의 강제 동원마저도 도서 지역에서만큼은 온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전라북도 옥구군(現 군산시) 선유도, 전라남도 영광군 안마도,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도의 경우에는 행정상으로만 공의가 발령되었을 뿐 실제로는 당사자가 현지에 부임하지 않아 무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29) 특히 선유도를 위시한 고군산군도 일대는 공의 개인 차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통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접근이 더뎠는데,30) 이 사례들은 공히 최말단, 최하위 공간의 의료 실태를 한층 강렬하게 환기하였다. 즉, 의사 동원 이전에는 도서 지역과 일반의 농어촌이 동일한 범주의 무의면으로 통칭되었다면, 의사 동원은 농어촌 일반과는 상황을 달리하는 도서 지역의 한층 열악한 여건을 부각하였다.

둘째, 의사 동원은 어디까지나 시한부의 특단임이 자명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9월 제4차 소집을 끝으로 의사 동원을 일단락하였다. 이에 의사 동원은 제4차 소집 인원이 만기 해제된 1965년 5월 23일부로 완전히 종료되었고, 실질적으로는 제2차 소집 인원 약 600여 명이 동원 해제된 1964년 6월부로 사양세에 접어들었다(신창훈, 2023: 1054-1055). 대체로 짐작 가능한 바와 같이 이는 무의면의 재판(再版)을 야기하였다. 충청남도 서산군(現 서산시)을 예로 들면 17개 면, 26만여 군민의 1차 의료를 동원 만료되지 않은 공의 단 4명이 오롯이 감당해야 했으며, 관내 도서의 상황은 그 이상으로 심각하여 일제히 무의 상태로 회귀하였다.31) 소결하면 1960년대 초중반은 어느 견지에서 살펴보더라도 도서 지역의 의료 현실에 초점을 맞춘 중장기적 후속 대책을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었다.32)

보다 너른 시선으로 조망하면 진료 목적의 전용 선박을 건조하여 순회케 한다는 발상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박은 애초부터 고정된 상수(常數)였다. 선박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도서 지역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선박을 활용한 순회 진료 또한 꾸준히 이어졌다. 이를테면 의료반이 해군의 협조하에 군함을 이용하여 도서 지역을 순회하였으며,33) 이와 별개로 해군 자체적으로도 그러한 대민 활동을 전개하였다.34)

아울러 당대 한국 사회에는 전적으로 의료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설계, 운용되는 ‘병원선’의 개념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주지하듯이 한국전쟁 당시에 ‘헤이븐’(USS Haven)을 비롯한 미국 병원선 3척과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MS Jutlandia)가 인천, 부산 일대에서 의료 활동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이창영, 2022: 113-116). 이뿐만 아니라 한국 해군 또한 520톤급 수송선 ‘영등포’를 개조하여 전상 장병과 그 가족들을 진료하는 병원선으로 활용하였는데(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346-347),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활동을 지속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35) 물론 전시에 쓰인 군용 병원선과 본 논문에서 주로 다루는 민용 병원선을 그대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개념과 실용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만큼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의료 시설을 내장한 특수 선박, 그리고 그를 활용한 순회 진료는 1960년대 초중반 시점에 쉬이 착안 가능하였던 구상이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통영적십자병원 이동병원선이 이를 간소하게나마 구현한 선례이기도 했다. 마침내 의사 동원 해제를 전후하여서는 현장의 의정 당국과 민간 의료기관이 병원선을 도입함으로써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곧이어 중앙정부도 병원선을 유효한 정책 수단으로 공인하였다. 1965년 11월 보건사회부는 한미재단으로부터 약 15만 달러를 원조받아 100톤급 병원선 1척을 건조하여 전남 도서 지역에 배치하는 안을 타진하였다. 한미재단 측 관계자가 전라남도 현지를 방문하여 관련 조사를 진행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협의에 어느 정도 진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36) 원조 자체는 한미재단 측에서 지원 방침을 철회하여 무산되었다.37) 하지만 보건사회부는 본래 상정하였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정부 재원을 조달하여 병원선을 건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1967년도 보건사회부 예산 최종안은 전라남도 병원선 건조 명목으로 비용 1,000만 원을 책정하였다.38)

유관 부처인 내무부 또한 같은 기조를 견지하였다. 내무부는 1967년 1월 초 순경에 도서 지역 지원 방침을 자체적으로 성안하여 보건사회부 측에 전달하였는데, 보도된 바로는 병원선 운영을 주요 시책으로 포함하였다.39) 이뿐만 아니라 1967년 1월 26일에는 내무부 지방국장의 주재하에 “낙후지역(도서 낙도 및 접적수복지구) 종합개발 관계관 회의”가 열렸다.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열린 이 회의에는 내무부, 보건사회부, 건설부, 수산청, 대한적십자사 등의 고위 당국자와 도서 지역을 관할하는 도지사, 군수가 대거 참석하여 정부 측의 방침과 현지의 건의 사항을 공유하고 이른바 “낙도종합개발5개년계획” 수립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보건사회부 기획관리실장, 지방의정과장, 대한적십자사 보건부장이 임석한 가운데 도서 지역 의료망 확충을 주요 의제로 다루었으며, 특히 대한적십자사는 회의 부수 일정으로 목포시 인근의 무의도 3개소를 2박 3일간 순회 진료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병원선 관련 논의도 공론화되었다. 강진군수 김문수(金汶洙)는 도서 지역 양호교사 파견, 매약상(賣藥商) 배치와 더불어 병원선 투입을 건의하였고(엄민영, 1967), 보건사회부도 병원선 1척을 건조하여서ㆍ남해안 무의도를 순회케 하는 데 동의했다.40)

그림 4.

전라남도 병원선 ‘전남보건’

Figure 4. Jeonnambogeon, the Hospital Ship of Jeollanam-do Province

(「전남보건호 취항」, 『후생일보』, 1968년 5월 6일, 9면)

여기서 언급된 건조 예정의 1척은 시점상 1967년도 보건사회부 예산안에서 관련 비용을 책정한 바 있는 병원선을 가리켰다. 마침내 1967년 5월 보건사회부가 전라남도에 병원선 건조비 1,000만 원을 교부하였고,41) 전라남도는 이듬해 5월 3일자로 43톤급 중형 병원선 ‘전남보건’을 취역하였다.42) 전남보건호는 배수량 기준으로 섬돌보기는 물론 경기호와 바다의 별을 모두 능가하는 당대 최대 규모의 병원선이었으며, 그에 걸맞게 선내에 진료실, 방사선실, 수술실, 약제실 등을 구비하였다.43) 중장기적인 견지에서는 중앙정부의 주도로 예산을 편성하여 병원선을 건조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는데, 이는 그 자체로 지방의 의정 당국과 민간 의료기관 차원에서 선도하였던 시책이 중앙정부 차원의 국책으로 격상되는 상향의 궤적을 표상하였다.

3. 1970년대 병원선 순회 진료의 제도화: 서ㆍ남해안 도서 지역 의료체계의 재편

1968년 5월부로 전남보건호가 취항하자 전국적으로는 경기호와 바다의 별을 포함하여 총 3척의 중형 병원선이 확보되었다. 이에 보건사회부는 각 병원선으로 하여금 서ㆍ남해안 무의도를 순회케 하는 한편, 현지의 보건소를 통해 병원선의 진료 및 방역 활동을 지원하였다.44) 보도된 바에 따르면 경기호가 진료한 연인원은 1969년 3월부터 8월까지 총 14,731명이었다.45) 바다의 별과 전남보건호의 순회 실적도 대체로 이와 엇비슷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여기에 더하여 병원선 3척이 보건사회부의 지시하에 특정 권역으로 집결하여 방역 임무를 합동 수행하였던 사례 또한 확인된다.46)

1970년대 초에 들어서는 서ㆍ남해안 5道가 각각 1척을 운용하는 체계가 마련되었다. 보건사회부는 1971년도 대통령 신년 업무 보고를 통해 병원선 2척 증선을 공식화하였으며,47) 내부적으로도 연내에 이를 매듭지어 곧바로 투입하기로 방침을 세웠다.48)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전국 단위의 “국민보건의료망” 구축안을 마련하여 무의면 대책 전반을 다시 가다듬었는데, 도서만큼은 일반의 보건의료망과 계통을 달리하여 병원선이 1차 의료를 전적으로 도맡는 특별 지구로 설정하였다.49) 1971년 4월부로 43톤급 병원선 ‘복십자’, 50톤급 병원선 ‘전진’이 연달아 취역하자 보건사회부는 이를 포함한 병원선 5척을 일괄 재배치하여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에 각 1척을 할당하였다.50)

그림 5.

대한결핵협회 기증 병원선 ‘복십자’

Figure 5. Boksipja, the Hospital Ship donated by the Korean National Tuberculosis Association

(「이런 일 저런 일」, 『대한뉴스』 제824호, 1971년 4월 21일. 출처: KTV 국민방송)

이렇듯 보건사회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병원선 건조, 배치를 결정하고 실제 운용에까지 깊이 관여하는 양상은 그 자체로 병원선 순회 진료의 정책적 위상을 방증했다. 그런데 그 행간에서는 하나의 중대한 모순이 엿보였다. 위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보건사회부는 전국 단위의 병원선 순회 진료 체계를 기획하였다. 그런데 재정 투입은 도리어 지지부진하였다. 복십자호와 전진호만 하더라도 각각 대한결핵협회와 일본 가족계획협력재단이 자체 예산으로 건조하여 한국 정부에 기증한 병원선이었다.51) 보건사회부는 각 병원선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만을 부담하였을 뿐 정작 건조 자체에는 예산을 투입하지 않았다.52)

대한결핵협회와 일본 가족계획협력재단이 병원선을 건조하여 기증한 배경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도서 지역은 일반의 진료, 보건, 방역은 물론 결핵 예방, 가족계획사업 등의 주요 현안에 있어서도 부진을 면치 못한 최하위의 공간이었다. 예컨대 1964년 말 기준 경기도 부천군 백아도, 문갑도 주민의 결핵 유병률은 과반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 바 있었다.53) 물론 의정 당국도 그러한 실태를 익히 인지하고 있었고,54) 그 연장선에서 ‘결핵 검진 병원선’ 건조 방침을 확정하였다.55) 가족계획사업의 양상도 대체로 비슷하여 도서 지역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미 병원선을 활용하여 계몽, 시술 등의 실무를 수행하였으며,56) 이에 전진호 또한 진료, 방역의 기능에 더하여 가족계획사업까지 두루 포괄하였다.57) 바꾸어 말하면, 병원선은 의정 전반에 걸쳐 범용성을 주지하였고 보건사회부는 이 교집합을 매개로 삼아 별도의 예산 지출 없이 2척을 증원하였다.

결과적으로 보건사회부가 직접 예산을 편성하여 건조한 병원선은 1960-70년대 전반을 통틀어 전남보건호가 유일하였다. 앞서도 확인하였듯이 병원선 건조에 드는 비용이 정부 재정에 무리를 가할 정도로 막대하지는 않았다. 비교 사례를 들면 수산업협동조합(이하 ‘수협’)이 자체 예산을 들여 중대형급 병원선 ‘척양’, ‘새어민’, ‘새수협’을 연달아 진수하였다. 척양호는 1974년 7월 취역 시점 기준으로 최대 규모인 배수량 약 68톤급의 중형 병원선이었으며,58) 1975년, 1977년에 각각 진수한 새어민호, 새수협호는 이를 다시 능가하여 130톤급에 달하였다.59) 그중에서도 특히 새수협호는 1960-70년대를 통틀어 최대 배수량의 병원선이었는데, 알려진 건조 비용은 약 1억 5,000만 원이었다.60)

그림 6.

수산업협동조합 병원선 ‘척양’(左), ‘새어민’(右)

Figure 6. Cheogyang(Left) and Saeeomin(Right), Hospital Ships of the National Federation of Fisheries Cooperatives

(「이런 일 저런 일」, 『대한뉴스』 제994호, 1974년 8월 3일; 「목포항 새어민호 건조식」, 『대한뉴스』 제1050호, 1975년 9월 30일. 출처: KTV 국민방송)

1977년도 보건사회부 예산안 총액은 527억 2,678만 원이었으며, 그중 보건 부문에 할당된 액수는 331억 9,300만 원이었고,61) 국회 보건사회위원회는 보건 부문에서 약 7,600만 원을 삭감하여 타 부문으로 이관하는 선에서 총액 조정 없이 최종안을 의결하였다.62) 새수협호 건조 비용 1억 5,000만 원을 이 최종안에 보건 부문 예산 총액의 약 0.45%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듯 역산한 바로는 병원선 건조에 투입할 재정 여력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보건사회부는 재정 역량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방관적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대한적십자사 병원선 ‘백련’, ‘무궁화’의 사례도 이를 재차 방증했다. 대한적십자사는 1976년과 1977년에 각각 70톤급 병원선 백련호, 125톤급 병원선 무궁화를 진수하였다. 건조에는 전자가 약 7,000만 원, 후자가 약 1억 4,000만 원을 소요하였는데, 대한적십자사 명예 총재인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하사금”을 전달하여 비용 대부분을 충당케 했다.63) 이 하사금의 정확한 출처는 불명이다. 다만 전후의 맥락을 고려하면 정부 예산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자금으로 추정 가능하다.

1978년도 취역 병원선 5척의 건조 경위 역시 유사하였다. 박정희는 1977년도 보건사회부 신년 보고를 청취한 후 곧바로 병원선 추가 건조를 지시하고 불우이웃돕기 성금 잔여액 7억 원을 재원으로 전용케 했다.64) 결국 1970년대를 통틀어 정부가 취역한 병원선 7척은 예외 없이 박정희가 직권으로 건조를 지시하고 또 그가 하사 혹은 전용한 특별 자금으로 경비를 충당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병원선 건조에 드는 지출은 대통령이 곧바로 교부 가능할 정도의 소규모 비용이었으며, 그렇기에 보건사회부 예산만으로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산하여도 무리가 아니다. 정리하면 보건사회부는 병원선 순회 진료의 효용 자체는 긍정하여 주요 시책으로 채택하였으나, 재정 투입만큼은 여력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소극적인 기조로 일관하였다. 이에 병원선 순회 진료의 제도화 시점도 1970년대 후반으로 늦춰지게 되었다.

그림 7.

대한적십자사 병원선 ‘백련’(左), ‘무궁화’(右)

Figure 7. Baengnyeon(Left) and Mugunghwa(Right), Hospital Ships of the Republic of Korea National Red Cross

(「대한적십자 병원선 백련호」, 『대한뉴스』 제1133호, 1977년 5월 11일; 「대한적십자 제2호 병원선인 무궁화호 취항식」, 『대한뉴스』 제1160호, 1977년 11월 24일. 출처: KTV 국민방송)

물론 대통령이 병원선 건조비를 직접 ‘하사’함으로써 연출되는 정치적 효과는 분명하였다. 특별 하사금을 지급할 정도로 의지가 확고하였다면 보건사회부 정규 예산 혹은 추가 경정 예산에 관련 비용을 책정하여 정책을 추진하더라도 큰 난항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병원선을 사적으로 희사하는 것과 다름없는 방식을 택하였는데, 이는 스스로의 선의와 결단으로 도서 지역 주민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최고 통치자의 상(像)을 환기하였다. 실제로 박정희는 재임 기간 전반에 걸쳐 그러한 통치 관행을 반복하였다. 그는 교육, 현양, 원호 등의 여러 사회사업과 그 관계 기관에 수시로 하사금을 전달하였으며,65) 각종 복지시설과 의료기관도 그 수혜를 입었다.66) 따라서 병원선 건조 비용을 하사 혹은 전용케 하였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배경을 가늠할 수 있다.

단, 그 시점이 1970년대 중후반에 집중되었던 것은 별도의 설명을 요한다. 먼저 큰 틀에서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맥락이 바탕에 자리하였던 것 같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운동을 국책 사업으로 강력히 추진하였고, 박정희 개인 또한 이에 큰 관심과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병원선 순회 진료도 때로는 그 맥락 속에서 호명되고 의미를 부여받았다. 이를테면 해군은 그간 정례적으로 전개하여 온 도서 지역 진료 활동을 1972년부로 “새마을운동대민진료사업”으로 개칭하였으며,67) 같은 해에 보건사회부가 파견한 병원선과 산간 벽지 진료반도 “새마을순회진료반”으로 명명되었다.68) 여기서 더 나아가 병원선 순회 진료 자체를 새마을운동의 하위 사업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69)

엄밀히 말하면 “새마을” 자체가 기의상 ‘무의촌’의 대립항격에 해당하였다. 농어촌의 무의 상태를 일소하지 않고서는 새마을운동의 근본 취지를 달성할 수 없다는 인식이 초창기서부터 팽배하였으며,70) 이는 실제의 “새마을사업4개년계획”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주요 항목으로 다루어졌다.71) 그러므로 새마을운동의 열풍 속에 도서 지역 의료망 확충이 현안으로 부각되고, 다시 그 연장선에서 박정희가 병원선 건조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흐름을 상정할 수 있다. 실제로 1976년 말에는 박정희가 직접 임석한 가운데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를 열고 ‘낙도 및 벽지 개발 강화’를 차년도 역점 사업으로 확정하였는데,72)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병원선 추가 건조를 지시한 시점도 1977년 초였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1970년대 중후반의 국면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의료사적 맥락이 병원선 순회 진료의 제도화를 견인하였다. 주지하듯이 박정희 정권은 1977년 7월부로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여 종업원 500인 이상의 사업장에 의무 적용하였고(봉원오, 2025: 147-148), 이어서 1978년 11월에는 「국민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 입법을 매듭지어 현행 공중보건의사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신창훈, 2023: 1066-1067). 이 일련의 조처들은 의료보장의 확충이 주된 국정 현안으로 급부상한 1970년대 중후반의 돌출적인 흐름을 반영하였는데, 실제로 박정희는 1975년 말의 전면 개각을 전후하여 의료보장제도 실시를 결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황병주, 2011: 444).

병원선 순회 진료가 제도화의 전기를 맞이하였던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았다. 박정희는 보건사회부에서 성안한 「국민보건 향상을 위한 의료시혜확대방안」을 1976년 9월 11일자로 재가하였다. ‘의료시혜확대방안’의 요체는 “의료보호제도”와 “의료보험제도”로 대별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전자는 전국을 42개 “진료지구”로 구획하여 각 지구별로 “생활무능력자”, “저소득자”를 비롯한 “의료보호대상자” 전용의 1ㆍ2차 진료 체계를 마련하는 것을 주된 골자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일선의 보건소ㆍ보건지소와 거점격의 시ㆍ도립병원 또는 민간 지정병원이 단위 진료지구의 1ㆍ2차 진료를 각각 담당하고, 생활무능력자는 1ㆍ2차 진료 비용 전액을, 저소득자는 1차 진료 비용 전액 및 2차 진료 비용의 30%를 국비로 부담하는 체계였다(보건사회부, 1976: 2-4). 이는 1977년 1월 1일부로 공식 시행에 들어갔다.73)

병원선 순회 진료는 계통상 의료보호제도의 부속 정책으로 위치지어졌다. 보건사회부는 의료보호제도 시행을 전후하여 도서 지역 및 산간 벽지 대상의 순회 병원선ㆍ진료반 운용 계획을 함께 언급하였다.74) 하지만 ‘의료시혜확대방안’ 자체는 산간 벽지에 관한 별도의 논의 혹은 시책을 다루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의료보호제도는 산간 벽지에도 여타 지역과 동일한 진료 체계를 적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26개 무의 도서군은 ‘의료시혜확대방안’ 내에서도 일반 진료지구와 성격을 달리하는 “취약지역”으로 명시되었으며, 병원선 역시 보건지소와 더불어 해당 지역의 1차 진료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규정되었다(보건사회부, 1976: 17, 26-27). 거슬러 올라가면 보건사회부는 1971년에도 “국민보건의료망” 구축과 연동하여 전국 보건소ㆍ보건지소 체계 재정비를 추진한 바 있었는데, 이 역시 낙도 지역만큼은 보건의료망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되 병원선을 상시 가동함으로써 공백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취하였다.75)

1976년도 전국 병원선 운영 현황

Table 1. Status of Hospital Ship Operations in Korea, 1976

의료보호제도 시행 이후로는 그간의 병원선 순회 진료를 ‘병원선진료지역제’로 수렴, 조정하는 과정이 뒤따랐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늦어도 1971년 하반기 무렵에는 서ㆍ남해안 5도가 각각 병원선 1척을 운용 중이었으며, 1976년 시점에는 이 5척뿐만 아니라 수협 및 대한적십자사 소속의 3척까지 도서 지역을 정기적으로 순회 진료하였다.78) 보건사회부에서 자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전자가 순회하는 649개 도서에는 총 70만 871명이, 후자가 순회하는 345개 도서에는 총 38만 3,752명이 거주하였다.

박정희가 병원선 추가 건조를 지시하고 재원을 할당하자 보건사회부는 곧바로 배수량 120톤급 병원선 ‘경남보건’, ‘번영’, ‘비둘기’, ‘새전남’, ‘충남’을 발주하였다. 이 5척은 이듬해 1월 20일자로 일괄 취역하여 각각 경상남도, 전라북도, 경기도, 전라남도, 충청남도에 배정되었다.79) 이로써 도 단위로는 최소 2척의 병원선을, 전국 단위로는 수협 병원선 3척, 대한적십자사 병원선 2척을 포함하여 총 15척의 병원선을 유기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림 8.

보건사회부 병원선 ‘경남보건’, ‘번영’, ‘비둘기’, ‘새전남’, ‘충남’

Figure 8. Gyeongnambogeon, Beonyeong, Bidulgi, Saejeonnam and Chungnam, Hospital Ships of the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공보처 홍보국, 1978)

보건사회부는 병원선 5척의 취역에 앞서 “낙도진료종합계획”을 기획하는 한편,80) 서ㆍ남해안 5도 보사국장 회의를 열어 현지의 건의 사항을 청취하고 운영 방침을 조율하였다.81) 얼마 지나지 않아 이는 “병원선진료지역제”로 집약되었고,82) 서ㆍ남해안 5도도 그 연장선에서 도 단위의 병원선 운영 계획을 수립하였다.83) 병원선진료지역제는 서ㆍ남해안 도서 지역을 총 9개의 진료구역으로 재편하여 구역별로 1~2척의 담당 병원선을 배치하고 거점 병원을 지정하였다. 담당 진료구역의 1차 진료는 물론 중환자를 거점 병원으로 이송하는 역할까지 병원선이 도맡는 체계였다.

양적인 측면에서는 그간의 ‘1道1船’을 ‘1道2船’으로 증강함으로써 각 도의 역량을 고르게 제고하였다. 단, 경기도와 전라남도에 한해서는 각각 2~3개의 권역으로 재차 세분화하고 병원선을 추가 배치하였다. 전자는 백령도에서 덕적도에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관할하였고, 후자는 전체 도서 인구 약 61만 명 중 40만 명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안배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최종적으로는 1978년 3월 29일자로 보건사회부령 제256호 「병원선 운영, 관리 규정」을 제정하였고,84) 이어서 서ㆍ남해안 5도가 각각의 병원선 관련 조례를 순차적으로 개정하였다.85) 이로써 병원선 순회 진료가 하나의 완결된 제도로 비로소 안착하였다.86)

병원선진료지역제 시행 개요

Table 2. Overview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Hospital Ship Service Area System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병원선 순회 진료가 서ㆍ남해안 무의 도서의 의료 공백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대책인 것은 아니었으며, 병원선진료지역제 자체로 한정하더라도 이상과 현실 사이의 편차는 불가피하였다. 본 논문은 자료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병원선의 주된 이용층인 도서 주민들의 인식 혹은 관점을 상세히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가능한 범위에서나마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군 소재 도서의 실태를 살펴본 바로는 운영상의 미비점이 적지 않았다. 연간 방문 빈도는 도서당 1~3회에 불과하였으며, 사전 홍보는 미흡하였고, 단시간 내에 1~200명에 달하는 환자를 취급해야 했기에 진찰도 약식에 가까웠다(정한영ㆍ이기형ㆍ박성혜, 1982: 258-262).88)

그러나 도서 주민, 병원선 담당 실무자, 학계 전문가를 막론하고 제도 자체의 축소 혹은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병원선 방문 횟수와 현지 기항 기간을 늘려 순회 진료의 밀도를 높일 것을 제언하였다(정한영ㆍ이기형ㆍ박성혜, 1982: 262-265).89) 또한 흑산군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등지에서 병원선 이용 주민을 대상으로 “도움 정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큰 도움이 된다” 및 “조금 도움이 된다”고 응답한 인원이 각각 28%, 38.8%였던 반면 “도움이 안된다”고 응답한 인원은 13.1%에 불과하였다(정한영ㆍ이기형ㆍ박성혜, 1982: 261). 이에 비추어 보면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도 병원선 순회 진료의 효용을 긍정하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1960-70년대 병원선 순회 진료의 연착륙 과정이 남긴 몇 가지 시사점을 짚고자 한다. 첫째, 병원선은 일정한 면적의 행정 구역 단위로 의료망을 확충하는 데 부심하였던 일반의 도식을 비껴갔다. 도서 본연의 물리적 제약은 이동성에 초점을 맞춘 선박 기반의 독특한 의료 체계를 고안케 하였고, 서ㆍ남해안 도서 지역은 그에 따라 복수의 병원선 진료구역으로 재편성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의료망은 때로는 공간의 특성에 부합하는 형태로 변주되어야 했으며, 마찬가지로 그 혜택이 미치는 범위는 전달 체계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는 유연해져야 했다.

둘째, 예산 혹은 재정 본위의 설명 방식에 반례(反例)를 제시하였다. 예산은 의정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규정력을 지나치게 비약한다면 능동적 실천에 의한 변모의 여지 자체를 소거하는 닫힌 결론만을 답습하게 된다. 병원선은 이를 직간접적으로 반증하였다. 서ㆍ남해안 도서 현지의 관서와 의료기관은 재정상의 한계가 엄연하였던 1960년대의 악조건 속에서도 나름의 발상으로 병원선 순회 진료를 기획하였고, 반대로 보건사회부는 예산상의 소요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병원선 순회 진료를 제도화하였다.

셋째, 중앙 본위의 틀만으로는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 당대 의정의 역동적인 여백을 드러내되 그 한계도 함께 노정하였다. 대체로 근현대 한국의 의정은 시기와 분야를 막론하고 중앙에서 지방으로 관철되는 하향적 의사 결정을 따랐다. 하지만 병원선 순회 진료는 정반대의 추이를 그려 지방에서 중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로를 밟았다. 정책 자체는 서ㆍ남해안 도서 현지에서 자체적으로 완성하여 이미 상용화된 것이었으며, 중앙의 역할은 단지 이를 공인, 확대하여 국가적 차원의 제도로 갈무리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 마지막 국면에서만큼은 최상위의 통치 권력이 직접 개입하여 전기를 마련하고 더 나아가 매조지하는 양상이 뚜렷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병원선 진료지역제 자체가 박정희 개인의 ‘시혜’와 결부된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의료 복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의 시혜성을 과시하는 주된 소재 중 하나였으며, 1970년대는 바야흐로 박정희 1인의 통치를 체제화한 ‘유신’의 시대였다. 병원선 순회 진료의 제도화에는 이렇듯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하였던 당대의 맥락이 개재되어 있었다.

4. 맺음말

육지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엄격한 의미의 섬은 그간의 연륙교, 해저터널 건설 및 간척 사업에 힘입어 완만히 감소하였다. 보건지소 또한 1960-70년대에 비해서는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도 서ㆍ남해안 소도의 상당수가 보건지소조차 갖추지 못한 실정이다. 2026년 4월 기준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유인도 430여 개 중 240여 개가 무의도로 파악되었으며, 이 도서들은 1차 진료를 병원선에 대체로 의존하고 있다.90) 도서 지역의 열악한 의료 실태도, 그 대책격의 병원선 순회 진료도 공히 현재진행형이다.

본 논문은 역사적 관점에서 그 연원과 과정을 탐색하였다. 그 결과 1960-70년대 전반에 걸친 하나의 서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의료의 공간적 위계를 상정한다면 도서 지역은 단연코 최하위에 자리하였다. 도서 지역의 의료 현실은 일반 농어촌의 무의면에 견주어도 극히 열악하여 최소한의 의료 접근마저 요원한 실정이 깊고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를 일반론에 기대어 설명하면 인력과 재원의 결핍으로 표상되는 시대적 한계가 도서 지역의 의료 위기를 재생산하였다. 하지만 당대의 실상에 한층 밀착하자 그 공간적 특성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도서 지역의 고유한 맥락이 엄연하였다.

병원선 순회 진료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관통하며 한국 사회에 연착륙하였다. 이로부터 다시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큰 변화 없이 그 틀이 유지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병원선은 공간의 특성에 부합하는 1차 의료로서 본연의 효용을 입증하여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이를 대체할 획기적인 대안이 나타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당분간은 병원선이 서ㆍ남해안 무의도서의 1차 진료를 도맡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렇듯 중장기적이고 너른 흐름도 결국은 하나의 단상(斷想)과 그를 에워싼 역사적 맥락이 결합한 산물이었다. 의료 시설을 장치한 선박에 의료인을 탑승시켜 도서 지역을 순회케 한다는 발상은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으며, 군용 병원선의 의료 활동, 선박 기반의 순회 진료와 같은 당대 한국 사회의 근연한 경험들이 그에 구체성을 더하였다. 물론 그것을 현실의 제도로 구현하는 여정은 지난하였다. 하지만 병원선 순회 진료는 끝내 소기의 목표에 다다랐고, 이에 그 역사적 함의도 조금은 더 두터워졌다.

본 연구는 1960-70년대 병원선 건조와 상호 작용한 또 하나의 추이까지는 미처 살펴보지 않았다. 바로 그 산업적 저변에 해당하는 국내 조선업의 성장 및 조선술의 발전이다. 한국 조선업체들은 1977년을 시작으로 리비아, 쿠웨이트 등이 발주한 병원선 건조 사업을 다수 수주하였다.91) 시점상 그간의 병원선 건조 경험이 바탕에 자리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러한 정황이 어느 정도 엿보인다.92) 하지만 이를 엄밀히 논증하려면 결국 현대 한국 조선업의 역사 전반을 아우르는 경제사적, 기술사적 접근을 병행하여야 한다. 어느 하나 가벼이 다룰 수 없는 작업인 만큼 관련 검토는 후속 연구의 몫으로 남기도록 하겠다.

Notes

1)

「낙도의 주민도 우리 국민이다」, 『경향신문』, 1965년 11월 25일, 2면.

2)

본 논문에서는 「동ㆍ서ㆍ남해안 및 내륙권 발전 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 제36423호, 타법개정: 2026년 6월 23일, 시행: 2026년 7월 1일) 제3조의 “서해안권”, “남해안권” 지정 범위를 준용하여 現 인천광역시, 경기도, 충청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전남광주특별시,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관할의 해안 지역을 “서ㆍ남해안”으로 통칭하였다.

3)

「낙도백서」, 『조선일보』, 1967년 1월 26일, 6면; 「낙후지역보건에 적신호」, 『후생일보』, 1967년 2월 1일, 1면.

4)

「2개 병원선을 운항」, 『의협신보』, 1971년 1월 25일, 1면; 「병원선 4척 5월부터 운항」, 『매일경제』, 1971년 2월 2일, 7면; 「무의도서진료강화」, 『후생일보』, 1971년 3월 19일, 1면.

5)

김사달, 「무의면해소를 위한 제시」, 『후생일보』, 1967년 1월 2일, 6면.

6)

<그림 1>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신안군 누리집에서 제공하는 도초면 관내도를 일부 편집하고 도초도, 우이도의 위치를 빨간색 원으로 표시한 것이다.

7)

도초면의 관할 구역은 1963년에 흑산면 우이도리를 편입한 것을 끝으로 지금까지 변동이 없었고, 다만 1969년 무안군-신안군 분군 조치에 따라 상위 행정구역이 무안군에서 신안군으로 변경되었다. 신안군청, 「연혁 및 일반현황」, 신안군 누리집. https://www.shinan.go.kr/home/www/about/village_info/village_info_07/village_info_07_02/page.wscms. 검색일: 2026.8.7.

8)

「인술은 고도에도」, 『부산일보』, 1959년 9월 3일, 4면.

9)

「달리는 병원선 등장」, 『의사시보』, 1964년 1월 16일, 2면; 「경기호 첫 출항」, 『의사시보』, 1965년 3월 1일, 1면.

10)

「병원선 경기호 연평도로 출항」, 『의사시보』, 1965년 4월 26일, 2면; 「병원선 경기호 연평어장순진」, 『의사시보』, 1966년 6월 6일, 7면; 「병원선 운영을 강화」, 『후생일보』, 1967년 1월 20일, 4면 등. 지금의 옹진군 덕적면, 영흥면, 북도면 등은 본래 경기도 부천군(現 부천시) 관할하에 있었으나 1973년 7월부로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또한 옹진군은 본래 경기도 소속의 지방자치단체였으나 1995년 3월부로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11)

「3천여명을 진료」, 『의사신문』, 1964년 12월 21일, 7면.

12)

「3월부터 순회진료」, 『의사시보』, 1966년 2월 17일, 1면.

13)

「피임법 등을 계몽」, 『의사신문』, 1964년 9월 28일, 19면; 「병원선 취항」, 『후생일보』, 1969년 6월 13일, 3면.

14)

「병원선 운영을 강화」, 『후생일보』, 1967년 1월 20일, 4면.

15)

「공의 보수 및 여비 규정」(보건사회부령 제130호, 일부개정: 1964.4.11., 시행: 1964.4.11.), 제2조.

16)

이를테면 1967년도 보건사회부 예산안은 전국 보건소 189개소의 연간 운영비로 37,085,200원을 책정하였다. 이를 1개 보건소 단위로 환산하면 약 20만 원이었다. 「1966년도 예산안(보건사회부 소관)」,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제6대국회 제58회 제15호), 1966년 11월 15일, 8쪽.

17)

「2개 병원선을 운항」, 『의협신보』, 1971년 1월 25일, 1면. 해당 기사 본문에서는 “강원” 권역에 무의도서 55개가 소재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맥락상 이는 ‘경기’를 오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18)

「1971년도 예산안」,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제7대국회 제75회 제5호), 1970년 11월 2일, 13쪽.

19)

「곤명면에 보건소신축」, 『의사시보』, 1965년 9월 27일, 7면.

20)

「보건소수가표」, 『의사시보』, 1965년 7월 5일, 4면.

21)

「피임법 등을 계몽」, 『의사신문』, 1964년 9월 28일, 19면; 「닻 올린 병원선 바다의 별」, 『의사신문』, 1964년 11월 9일, 13면; 「경기호 첫 출항」, 『의사시보』, 1965년 3월 1일, 1면; 「섬돌보기호성과 다대」, 『의협신보』, 1968년 2월 5일, 5면 등.

22)

「이동병원선 첫 출항」, 『의사시보』, 1964년 3월 12일, 9면.

23)

「섬돌보기호 성과 다대」, 『의협신보』, 1968년 2월 5일, 5면.

24)

「병원선 ‘바다의 별’ 취항」, 『조선일보』, 1964년 11월 6일, 3면; 「닻 올린 병원선 바다의 별」, 『의사신문』, 1964년 11월 9일, 13면; 「섬사람돌보기 3년」, 『경향신문』, 1964년 11월 14일, 8면.

25)

바다에 뜬 병원」, 『동아일보』, 1964년 11월 7일, 6면; 「닻 올린 병원선 바다의 별」, 『의사신문』, 1964년 11월 9일, 13면; 「병원선 ‘바다의별’」, 『가톨릭신문』, 1964년 12월 6일, 3면.

26)

전홍규, 「병원선 바다의별호 처녀 진료기(중)」, 『의사신문』, 1964년 11월 26일, 16면.

27)

「바다의 별…유베드루병원」, 『의협신보』, 1967년 8월 14일, 9면.

28)

「의사없는 섬에 병원선 보내자」, 『조선일보』, 1964년 2월 6일, 7면; 「병원선띄우기 운동에 협조를」, 『부산일보』, 1964년 2월 8일, 3면.

29)

「삼해의 낙도순방 (5) 선유도」, 『경향신문』, 1961년 7월 9일, 석3면; 「‘함흥차사’ 벽촌의 공의」, 『동아일보』, 1962년 7월 30일, 조3면; 「한국의 서자…안마군도」, 『조선일보』, 1962년 8월 19일, 석3면.

30)

「해상교통 마비로 순회진료 못해!」, 『의사시보』, 1962년 2월 19일, 6면.

31)

「‘무의촌’ 와들와들」, 『조선일보』, 1964년 6월 16일, 3면.

32)

국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진도만 하더라도 최소한 1969년 초까지는 도내에 무의면이 남아 있었다. 해당 면의 실정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공의가 잠시 부임하되 장기 정착하지 않고 곧 섬을 떠나는 상황이 되풀이되는 실정이었다. 「무의촌 위해 사재 털고 독지의사 못내 기다려」, 『후생일보』, 1969년 4월 4일, 9면.

33)

「섬 어린이들 생활실태」, 『경향신문』, 1958년 8월 27일, 석3면; 「낙도에 7년만의 인술방문」, 『동아일보』, 1962년 8월 18일, 조3면.

34)

「무료치료」, 『조선일보』, 1956년 8월 21일, 석3면; 「머큐롬도 없는 낙도」, 『조선일보』, 1965년 9월 16일, 7면; 「낙도 순회 진료 해군서」, 『의협신보』, 1969년 9월 8일, 3면; 「서해낙도민 진료」, 『후생일보』, 1971년 6월 16일, 2면; 「낙도에 의약품을 해군 대민진료팀서 호소」, 『의협신보』, 1972년 6월 29일, 4면 등.

35)

「해군병원선 3주년 기념」, 『부산일보』, 1954년 2월 13일, 2면.

36)

「병원선 배치」, 『동아일보』, 1965년 11월 17일, 3면.

37)

「지방병원 발전안에 동의해와」, 『의사시보』, 1966년 2월 7일, 1면.

38)

「1967년도 예산안(보건사회부ㆍ원호처 소관)」,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제6대국회 제58회 제21호), 1966년 11월 22일, 1쪽.

39)

「의료계획을 제출」, 『후생일보』, 1967년 1월 16일, 3면.

40)

「낙도백서」, 『조선일보』, 1967년 1월 26일, 6면.

41)

「낙도순회 진료선 8월초 진수 활동」, 『동아일보』, 1967년 5월 27일, 7면.

42)

「전남보건호 취항」, 『후생일보』, 1968년 5월 6일, 9면.

43)

보사부서 천만원」, 『경향신문』, 1967년 5월 27일, 7면; 「전남지방섬마을 병원선 순회진료」, 『경향신문』, 1968년 3월 5일, 3면.

44)

「병원선 취항」, 『후생일보』, 1969년 6월 13일, 3면.

45)

「진료목표초과」, 『의협신보』, 1969년 9월 1일, 3면.

46)

「낙도방역반 구성 병원선 세척 파견」, 『동아일보』, 1969년 9월 13일, 7면; 「낙도ㆍ선원진료나서 병원선 3척 동원」, 『경향신문』, 1969년 9월 13일, 7면.

47)

「유망기업엔 신용대부」, 『조선일보』, 1971년 1월 14일, 1면.

48)

「2개 병원선을 운항」, 『의협신보』, 1971년 1월 25일, 1면.

49)

「보건지소 477곳 신설」, 『경향신문』, 1971년 3월 12일, 7면.

50)

「20일 취항식 거행 결협진료선 복십자호」, 『의협신보』, 1971년 4월 8일, 5면; 「‘전진호’ 취항」, 『후생일보』, 1971년 4월 26일, 1면.

51)

「2월말에 완공 결핵병원선」, 『의협신보』, 1971년 2월 1일, 3면; 「20일 취항식 거행 결협진료선 복십자호」, 『의협신보』, 1971년 4월 8일, 5면; 「진료선 ‘전진호’ 취항」, 『매일경제』, 1971년 4월 23일, 3면.

52)

「2천여만원 요구」, 『의협신보』, 1970년 12월 17일, 2면; 「2천3백만원 요구」, 『후생일보』, 1971년 1월 27일, 1면; 「보사부서 부담확약」, 『의협신보』, 1971년 3월 25일, 4면.

53)

전홍규, 「병원선 바다의별호 처녀진료기(완)」, 『의사신문』, 1964년 12월 3일, 16면.

54)

「낙도결핵사업 강화키로」, 『의협신보』, 1969년 12월 15일, 1면.

55)

「결핵병원선 건조」, 『의협신보』, 1970년 4월 13일, 5면.

56)

「5개도서 순회 진료」, 『의사시보』, 1963년 8월 22일, 10면; 「피임법 등을 계몽」, 『의사신문』, 1964년 9월 28일, 19면; 「3월부터 순회진료」, 『의사시보』, 1966년 2월 17일, 1면.

57)

「진료선 건조 기공식」, 『의협신보』, 1971년 2월 18일, 9면; 「순회진료선 기증한 일 사세가와씨 내한」, 『조선일보』, 1971년 4월 23일, 7면.

58)

「선박수리선 운항」, 『매일경제』, 1973년 11월 12일, 7면; 「수협 공제병원선 출항」, 『경향신문』, 1974년 7월 27일, 2면.

59)

「수협병원선 ‘새어민호’ 출항」, 『동아일보』, 1975년 9월 23일, 2면; 「‘새수협’호 취항식」, 『매일경제』, 1977년 9월 20일, 7면.

60)

「병원선 ‘새수협’호 취항」, 『동아일보』, 1977년 9월 20일, 2면.

61)

「1977년도 예산안」,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제9대국회 제96회 제8호), 1976년 10월 28일, 15쪽.

62)

「1977년도 예산안(계속)」, 『보건사회위원회회의록』(제9대국회 제96회 제17호), 1976년 11월 12일, 2-3쪽.

63)

「조크ㆍ폭소 만발한 노천식당」, 『경향신문』, 1975년 5월 19일, 1면; 「적십자병원선 백련호 취항식」, 『의협신보』, 1976년 8월 16일, 13면; 「18개 도서주민에 의료혜택」, 『의협신보』, 1977년 11월 7일, 13면.

64)

「의료보호 문제점 교육 통해 시정토록」, 『의협신보』, 1977년 2월 10일, 3면; 「낙도민의 의료시혜 위해 연내에 병원선 5척 건조」, 『동아일보』, 1977년 3월 15일, 7면; 「낙도주민 진료 위해 병원선 5척 연내 취항」, 『경향신문』, 1977년 3월 15일, 7면.

65)

「안의사동상 옮겨 음악당 동쪽으로」, 『조선일보』, 1966년 10월 2일, 7면; 「문경교 문희관 낙성」, 『조선일보』, 1966년 12월 13일, 7면; 「세병관에 불」, 『경향신문』, 1967년 1월 12일, 3면; 「빠리장서기념비건립 기공」, 『동아일보』, 1972년 11월 15일, 7면; 「도산공원 재개방」, 『조선일보』, 1975년 6월 25일, 7면; 「충승한국인위령탑제막」, 『경향신문』, 1975년 9월 4일, 7면; 「수용시설 37개소에 대통령 하사금 전달」, 『동아일보』, 1976년 9월 7일, 6면; 「‘곤경의 독립유공’…“이제는 외롭지 않다”」, 『동아일보』, 1977년 3월 4일, 7면; 「경제요철」, 『경향신문』, 1978년 4월 4일, 3면; 「박대통령, 충렬사 준공식 참석」, 『매일경제』, 1978년 11월 24일, 7면 등.

66)

「광부 전용 새마을회관 개관」, 『경향신문』, 1975년 8월 26일, 7면; 「나병원 노령환자 병동 준공식」, 『경향신문』, 1975년 12월 16일, 7면; 「박대통령이 하사금 사회복지 시설에」, 『매일경제』, 1975년 12월 25일, 7면; 「소아마비 복지시설 정립회관 기금 전달」, 『조선일보』, 1976년 7월 23일, 7면; 「박대통령 하사금을 전달」, 『매일경제』, 1979년 2월 23일, 7면 등.

67)

「낙도에 의약품을 해군 대민진료팀서 호소」, 『의협신보』, 1972년 6월 29일, 4면; 「낙도주민들 무료진료」, 『의협신보』, 1972년 7월 6일, 2면; 「낙도주민진료계획 해군의무감실서」, 『의협신보』, 1972년 7월 17일, 5면.

68)

「전국에 순회진료반」, 『부산일보』, 1972년 11월 9일, 7면.

69)

「한지의사 30명 배치키로 도서지역에」, 『의협신보』, 1973년 3월 5일, 5면; 「병원선운영지침 보사부에서 지휘」, 『의협신보』, 1976년 3월 15일, 13면.

70)

「농어촌환경의 개선」, 『동아일보』, 1972년 1월 18일, 3면; 「‘새마을사업’에 성과를」, 『조선일보』, 1972년 1월 19일, 2면.

71)

「새마을 4개년계획 확정」, 『동아일보』, 1972년 9월 22일, 2면.

72)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 『조선일보』, 1976년 12월 11일, 1면.

73)

「전국을 55개 진료권으로 형성」, 『동아일보』, 1976년 11월 1일, 7면.

74)

「생보자 치료 국가 부담」, 『조선일보』, 1976년 9월 14일, 1면; 「어떻게 혜택을 받나」, 『동아일보』, 1977년 1월 18일, 4면.

75)

「보건지소 477곳 신설」, 『경향신문』, 1971년 3월 12일, 7면.

76)

관련 자료에 따르면 충청남도는 1971년 무렵부터 배수량 6톤급의 병원선 ‘섬돌보기’를 운용하였다. 이 병원선이 본문에서 언급한 바 있는 경상남도 충무시보건소 소속의 ‘섬돌보기’와 동일 선박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낙도 순회진료 마비」, 『후생일보』, 1971년 9월 20일, 9면; 「충청남도병원선운영조례」(충청남도조례 제678호, 제정: 1973년 2월 2일, 시행: 1973년 2월 2일); 「충남병원선 올해도 잘 부탁해!」, 『충청뉴스』, 2019년 1월 7일, https://www.cc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5603. 검색일: 2026.4.9.

77)

관련 자료상으로는 배수량 45톤급의 병원선 ‘섬돌보기’를 신규 건조한 내역이 확인되지 않는다. 앞서 확인한 바로는 1968년 5월 취역한 보건사회부 병원선 전남보건호가 배수량 43톤급으로 알려졌으며, 보건사회부는 1971년 4월부로 복십자호, 전진호를 각각 전라북도, 전라남도에 배정하고 해당 지역의 기존 병원선을 타 지역으로 재배치하였다. 정황상 1971년 4월경에 전남보건호를 경상남도 소속으로 이관하면서 선명(船名)을 ‘섬돌보기’로 변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8)

「병원선운영지침 보사부에서 지휘」, 『의협신보』, 1976년 3월 15일, 13면; 「올들어 5만6천명 진료」, 『매일경제』, 1976년 8월 4일, 7면; 「백련호 귀항」, 『의협신보』, 1976년 9월 30일, 7면; 「백련호 진료 실적 총 6388명」, 『의협신보』, 1976년 12월 6일, 7면.

79)

「5도 도서주민 진료 위한 새 병원선 5척 취항식」, 『의협신보』, 1978년 1월 23일, 5면; 「병원선 올해 15척 운영」, 『의협신보』, 1978년 1월 23일, 17면.

80)

「낙도민의 의료시혜 위해 연내에 병원선 5척 건조」, 『동아일보』, 1977년 3월 15일, 7면; 「낙도 주민 진료 위해 병원선 5척 연내 취항」, 『경향신문』, 1977년 3월 15일, 7면.

81)

「병원선 운영 협의」, 『부산일보』, 1977년 3월 18일, 7면.

82)

「병원선 진료 지역제 실시」, 『매일경제』, 1977년 8월 17일, 7면.

83)

「병원선운영계획 시도에 제출 지시」, 『의협신보』, 1977년 11월 17일, 3면.

84)

「병원선 운영, 관리 규정」(보건사회부령 제256호, 제정: 1978년 3월 29일, 시행: 1978년 3월 29일).

85)

「경기도병원선운영조례」(경기도조례 제895호, 전부개정: 1978년 6월 19일, 시행: 1978년 6월 19일); 「충청남도병원선운영조례」(충청남도조례 제1067호, 일부개정: 1978년 6월 22일, 시행: 1978년 6월 22일); 「경상남도병원선운영조례」(경상남도조례 제978호, 일부개정: 1978년 7월 3일, 시행: 1978년 7월 3일).

86)

전라북도, 전라남도는 비슷한 시점에 개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원선 운영조례 전문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후자는 옛 「전라남도병원선운용조례」에 1978년 6월 22일자 시행 부칙이 남아있어 개정 사실을 입증한다. 또한 전자의 경우에는 1973년 1월 27일자로 전라북도조례 제601호 「전라북도병원선운영조례」를 제정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전라북도도 타 도와 보조를 같이하여 1978년 6~7월경에 병원선 운영조례를 개정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전라북도병원선운영조례폐지조례안 검토보고서」, 『교육복지위원회회의록』(제7대전라북도의회 제212회 제1호), 2004년 11월 24일; 「전라남도병원선운용조례」(전라남도조례 제5437호, 일부개정: 2021년 11월 4일, 시행: 2021년 11월 4일).

87)

1978년 7월 3일자로 개정된 「경상남도병원선운영조례」는 경상남도 소속의 병원선으로 “경남 보건1호”와 “경남보건2호”를 명시하였다. 따라서 보건사회부령 제256호 「병원선 운영, 관리 규정」상의 “경남보건호”는 1호와 2호를 일괄하여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그중 한 척은 1978년 1월 20일자로 취역한 ‘경남보건’임이 확실하며, 다른 한 척은 앞서 언급된 45톤급 병원선 ‘섬돌보기’를 다시 개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경상남도병원선운영조례」(경상남도조례 제978호, 일부개정: 1978년 7월 3일, 시행: 1978년 7월 3일).

88)

김선희, 「‘섬개구리’ 5년 (26) 질병과 교통난」, 『조선일보』, 1975년 3월 16일, 4면.

89)

김선희, 「‘섬개구리’ 5년 (26) 질병과 교통난」, 『조선일보』, 1975년 3월 16일, 4면.

90)

「섬 주민 의료공백 해소 ‘병원선’ 부상…법ㆍ제도 개선 요구 확산」, 『한국농어민신문』, 2026년 4월 28일, 7면.

91)

「삼성물산, 리비아에 병원선 수출」, 『경향신문』, 1977년 7월 20일, 2면; 「트리폴리博 한국관 인기」, 『매일경제』, 1979년 3월 9일, 6면; 「경제 칵테일」, 『조선일보』, 1979년 4월 10일, 2면; 「불황의 이방지대 조선업계」, 『부산일보』, 1980년 5월 20일, 4면.

92)

1977년 7월 삼성물산이 리비아 항만청으로부터 수주한 70톤급 병원선 12척은 부산조선이 건조를 담당하였는데, 부산조선은 이에 앞서 대한적십자사 병원선 백련호를 건조한 바 있었다. 공교롭게도 백련호 또한 70톤급의 병원선이었다. 「병원선 백련호 진수」, 『부산일보』, 1976년 7월 21일, 7면; 「삼성물산, 리비아에 병원선 수출」, 『경향신문』, 1977년 7월 20일, 2면; 「리비아에 병원선 수출 부산조선, 70톤급 12척」, 『부산일보』, 1978년 8월 29일, 3면.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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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뉴스』(출처: KTV 국민방송).
3. 공보처 홍보국, 「병원선전경」 (소장: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T0062145, 생산일: 1978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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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신창훈, 「1950~1970년대 무의촌(無醫村) 문제의 ‘한국적’ 타개와 징병제의 착종」, 『의사학』 32-3 (2023), 1043-1073쪽.
19. 이창영, 「한국전쟁기 병원선의 파견과 활동」, 『인문사회과학연구』 23-1 (2022), 105-129쪽.
20. 정무용, 「1950~60년대 無醫村 문제와 공의 배치」, 『남도문화연구』 49 (2023), 145-173쪽.
21. 황병주, 「1970년대 의료보험 정책의 변화와 복지담론」, 『의사학』 20-2 (2011), 425-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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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통영적십자병원 이동병원선

Figure 2. The Hospital Ship of the Tongyeong Red Cross Hospital

(「인술은 고도에도」, 『부산일보』, 1959년 9월 3일, 4면)

그림 3.

가톨릭중앙의료원 병원선 ‘바다의 별’

Figure 3. Badaui Byeol, the Hospital Ship of the the Catholic Medical Center

(「병원선 ‘바다의별’ 취항」, 『조선일보』, 1964년 11월 6일, 3면)

그림 4.

전라남도 병원선 ‘전남보건’

Figure 4. Jeonnambogeon, the Hospital Ship of Jeollanam-do Province

(「전남보건호 취항」, 『후생일보』, 1968년 5월 6일, 9면)

그림 5.

대한결핵협회 기증 병원선 ‘복십자’

Figure 5. Boksipja, the Hospital Ship donated by the Korean National Tuberculosis Association

(「이런 일 저런 일」, 『대한뉴스』 제824호, 1971년 4월 21일. 출처: KTV 국민방송)

그림 6.

수산업협동조합 병원선 ‘척양’(左), ‘새어민’(右)

Figure 6. Cheogyang(Left) and Saeeomin(Right), Hospital Ships of the National Federation of Fisheries Cooperatives

(「이런 일 저런 일」, 『대한뉴스』 제994호, 1974년 8월 3일; 「목포항 새어민호 건조식」, 『대한뉴스』 제1050호, 1975년 9월 30일. 출처: KTV 국민방송)

그림 7.

대한적십자사 병원선 ‘백련’(左), ‘무궁화’(右)

Figure 7. Baengnyeon(Left) and Mugunghwa(Right), Hospital Ships of the Republic of Korea National Red Cross

(「대한적십자 병원선 백련호」, 『대한뉴스』 제1133호, 1977년 5월 11일; 「대한적십자 제2호 병원선인 무궁화호 취항식」, 『대한뉴스』 제1160호, 1977년 11월 24일. 출처: KTV 국민방송)

그림 8.

보건사회부 병원선 ‘경남보건’, ‘번영’, ‘비둘기’, ‘새전남’, ‘충남’

Figure 8. Gyeongnambogeon, Beonyeong, Bidulgi, Saejeonnam and Chungnam, Hospital Ships of the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공보처 홍보국, 1978)

표 1.

1976년도 전국 병원선 운영 현황

Table 1. Status of Hospital Ship Operations in Korea, 1976

병원선 소속 배수량(톤) 진료 도서수 거주 인구(명) 정박지
경기 경기도 27.09 38 15,271 인천항
섬돌보기76) 충청남도 7.57 59 11,600 대천항
복십자 전라북도 43.15 30 14,000 -
전진 전라남도 50.6 387 560,000 목포항
섬돌보기77) 경상남도 45 135 100,000 충무항(現 통영항)
소계 총 649개 도서, 70만 871명
척양 수산업협동조합 68.49 150 175,176 부산항
새어민 129 150 178,326
백련 대한적십자사 70 45 30,250 인천항
소계 총 345개 도서, 38만 3,752명

(보건사회부, 1976: 28)

표 2.

병원선진료지역제 시행 개요

Table 2. Overview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Hospital Ship Service Area System

진료 구역 소속 도서 거주 인구 담당 병원선 거점 병원
백령 권역 백련도, 교동도 등 21개 도서 37,655명 백련 인천적십자병원
옹진 권역 영종도, 대부도 등 41개 도서 37,856명 비둘기, 경기 인천도립병원
충남 권역 원산도, 삽시도 등 52개 도서 12,162명 충남, 섬돌보기 홍성도립병원
전북 권역 개야도, 비안도 등 28개 도서 11,875명 번영, 복십자 군산도립병원
신안 권역 지도, 도초도 등 147개 도서 162,171명 새전남 목포적십자병원
진도 권역 평일도, 진지도 등 127개 도서 217,337명 무궁화, 척양 순천도립병원, 익산적십자병원
여수 권역 거금도, 금오도 등 90개 도서 29,517명 전진 순천도립병원, 목포적십자병원
남해 권역 청선도, 욕지도 등 77개 도서 48,333명 경남보건87) 마산의료원
거제 권역 미륵도, 가덕도 등 48개 도서 58,848명 마산의료원, 부산적십자병원
소계 총 631개 도서, 615,754명
기타 •새어민: 울릉도 등 경북 권역 2개 도서 순회 진료
•새수협: 우도, 추자도 등 제주 권역 9개 도서 순회 진료

(「병원선 올해 15척 운영」, 『의협신보』, 1978년 1월 23일, 17면; 「병원선 운영, 관리 규정」(보건사회부령 제 256호, 제정: 1978년 3월 29일, 시행: 1978년 3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