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농촌의료와 농민의 ‘건강권’: 농어촌 의료보험과 의료보험 시정운동을 중심으로†

Rural Medicine and the Farmers’ “Right to Health” in 1980s South Korea: The Rural Health Insurance and the Health Insurance Reform Movement†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6;35(2):635-688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6 August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6.35.635
*Research Fellow, Institute for Women’s History of Medicine, Korea University
정다혜*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현대의료사 전공
†이 논문은 202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5S1A5A2A03012096).
Received 2026 June 26; Revised 2026 July 16; Accepted 2026 July 31.

Abstract

The history of Korean health security is usually told as a compressed achievement, from workplace insurance in 1977 to universal coverage in 1989 and unified National Health Insurance in 2000. Departing from that framework, this article places the Rural Health Insurance of 1988, which extended coverage to farming and fishing villages, within the longer history of rural medical marginalization since liberation, in which the equitable distribution of medical care remained an unmet task across regimes. It asks how farmers’ health briefly emerged as a social category and was then reduced to a dispute over insurance administration.

The program rested on weak foundations. Rural facilities built up since the late 1970s functioned poorly, and the regional-insurance pilots begun in 1981 had stalled under chronic deficits by 1985. Implementation was nevertheless advanced to 1988 amid agrarian crisis and the pressures of democratization. Resistance was immediate and widespread, the first occasion on which the affected population itself demanded institutional reform. Farmers contested not only premiums but their assessment, referral districts imposed on a scarce supply, the undemocratic insurance societies, and the hazards of farm labor, from pesticide poisoning to “farmer’s syndrome,” which lay outside the industrial accident insurance covering wage workers. Joined by health professionals and the urban poor, these grievances were articulated as a claim to a “right to health.”

The claim receded almost as quickly. The article attributes the retreat to conditions rather than movement failure: a coalition of such breadth required a common agenda, and the administration of insurance determines how contributions are levied and pooled, not where medical care exists. Concentration on integration was reasonable under those conditions, yet it left the distribution of medical resources and farmers’ health unaddressed. Universal coverage is read here not as a completed institution but as the history of a problem posed, transformed, and unresolved.

1. 들어가며

1989년 7월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19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된지 26년,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직장의료보험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지 12년 만이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전국민 대상 의료보험을 실시하기까지 독일이 127년, 벨기에 119년, 오스트리아 79년, 일본 36년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서 “사회보장 선진국들에 비해 아주 짧은 기간에 달성한 쾌거”라고 자평하였다.1) 한국은 단기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 실시에 성공했고, 직장 의료보험과 지역 의료보험을 통합하여 2000년 국민건강보험 체제를 수립해 지금까지 제도를 이어오고 있다.

단기간에 이룬 성취이지만, 그 과정이 정부의 정책 의지대로 순탄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피고용자를 대상으로 한 직장 의료보험이 본격화된 지 11년 만인 1988년 1월부터 농어촌 지역을 대상으로 한 농어촌 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지리적ㆍ경제적으로 의료 접근성이 낮은 농민들은 의료보험을 오랫동안 요구해왔다. 하지만 막상 농어촌 의료보험이 실시되자 농민들은 반발했고, 그간 농민들이 겪어 온 농촌 소외 및 차별의식과 연계되어 의료보험 거부운동이 벌어졌다. 농민들의 의료보험 투쟁에 보건의료운동 단체를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결합하면서 의료보험 거부운동은 ‘의료보험 시정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는 안정적인 근로소득이 보장된 사업장과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장 제도를 대표적인 소외계층이었던 농어민에게 확대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건강보장(Universal Health Coverage)의 중요한 계기였다. 그만큼 농어촌 의료보험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과 이후 이어진 의료보험 시정운동은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동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국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 연구들에서 농어촌 의료보험은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과 2000년 국민건강보험 체제로 이어지는 제도화 과정의 일부로 이해되거나 기존 조합주의 보험 운영에 문제를 제기한 통합운동의 계기로서만 다뤄진다.

농어촌 의료보험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연구사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의료보험 연구는 주로 한국 복지정책의 특성을 규명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를 위해 국가의 발전모델과 노동, 기업의 관계에 주목하며 1977년 직장 의료보험 실시를 둘러싼 배경과 의미를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들 연구는 의료보험을 둘러싼 사회적 투쟁이 미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로 의료보험이 실시될 수 있었던 배경을 분석하였다. 주로 노동계급의 역량으로 성취한 선진 복지국가들과 비교하며 한국의 의료보험 실시과정에서 나타난 정부 주도적 특징을 ‘발전국가’의 성격으로 이해하였다(정무권, 1993; 2007; 강명세, 2006; 김순양, 2014). 의료보험이 1970년대 내자동원 등 정권의 정치경제적 위기 타개책으로서 기능했음을 분석하기도 하였다(김도균, 2018).

역사학계에서는 정책 변화뿐만 아니라 담론 및 의료보험의 사회적 효과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졌다. 1970년대 사회개발론이 경제개발과 결부되면서 복지담론으로 제기되었고, 의료보험은 사회개발과 복지국가의 제도적 실천의 상징이었다는 점이 규명되었다(황병주, 2011). 또한 의료보험 실시과정에서 대기업도 호응하면서 의료보험 제도가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로도 기능했음을 드러냈다(문민기, 2017). 1963년 「의료보험법」 제정부터 2000년 국민건강보험으로의 통합과정까지를 역사적으로 정리한 연구에서도 한국의 복지제도의 특성을 보여주는 의료보험제도의 발달 과정에서 1977년 의료보험 실시의 배경이 된 1976년 「의료보험법」 2차 개정을 ‘결정적 국면’으로 꼽았다(조영재, 2008).

농어촌 의료보험의 경우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과정에서 나타난 농민들의 저항을 주로 통합일원화 요구의 맥락에서 이해해 왔다(이종찬, 1997; 김연명, 2000; 백승호, 2001; 임성근, 2010; Kim & Lee, 2022). 민주화와 복지정치의 관계를 주목한 연구에서는 민주화 이후 이루어진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와 2000년 통합 건강보험으로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농민들로부터 촉발한 의료보험 시정 운동을 1987년 민주화로 확보된 정치적 공간에서의 사회운동의 동학으로 이해한다(Wong, 2004; 최성수, 2006). 이러한 맥락에서 보건의료 전문가 집단의 역할에 주목하는 연구들도 있다(신영전, 2010; 최규진, 2017). 조셉 해리스(Joseph Harris)는 태국ㆍ브라질ㆍ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사례를 비교하여 개발도상국에서 진보적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민주화 국면에서 대중적 사회운동과 결합하면서 보편적 건강보장의 제도적 확대를 이끌었다고 보았다(Harris, 2017). 전문가들은 운동에 기술적 언어와 정책 대안을 제공하고, 운동은 전문가들의 개혁안에 정치적 동력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진보적인 보건의료 운동 단체들은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 전부터 제도의 문제를 지적하였고, 농민들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시작으로 농어촌 의료보험 시정운동과 1990년대 의료보험 통합 일원화 운동에 참여한 것이 한국 건강보험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편 의료보험 정책 결정자들과 건강보험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경험에 기반해 건강보험의 역사를 다룬 연구서 및 자료집, 구술집들이 출간되었다(이광찬, 2009; 비판과 대안을 위한 건강정책학회, 2010;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9; 윤충로 외, 2023). 이들 저서는 주로 당시 관료와 전문가 집단의 경험들에 기반하고 있고, 건강보장 ‘쟁취’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이 중 건강보험운동 구술에 참여한 유남선은 농민운동가이자 1988년 의료보험 시정운동 당시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인물로서 의료보험 투쟁을 1970-80년대에 누적되어 온 농민 문제와 농민 투쟁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윤충로 외, 2023: 10-68). 기존 농어촌 의료보험을 전국민 의료보험으로 가는 제도화 과정으로 본 것에 비해, 그는 농민운동가로서 당시 농촌의 의료 현실과 농민들의 요구에 주목했다. 실제로 농민운동사에서 농어촌 의료보험 시정운동은 농민운동 고양기에 전개된 농민 생존권 투쟁의 일환으로 여겨진다(한국가톨릭농민회, 1999; 엄영애, 2007). 그런 의미에서 농어촌 의료보험은 단순히 보험 모델을 둘러싼 저항으로 볼 수 없으며, 당대 농어촌의 경제적 현실과 의료소외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온 사건이었다.

이 글은 보편적 건강보장 ‘쟁취’ 혹은 ‘달성’의 관점을 벗어나 농어촌 의료보험을 누적되어 온 농촌의 의료소외와 농민들의 요구라는 관점에서 의료보험의 실시와 저항 및 대응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농어촌 의료보험은 노동자 중심의 의료보험을 확대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역의료보험의 한 형태이기도 하지만, 도시 자영자와 다른 농어민의 특성,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와 구분되는 보건의료적 조건이 함께 고려되어 실시되어야 했다. 해방 이후 보건의료 정책에서 끊임없이 농어촌의 의료시설 및 인력 부족 문제가 제기되었고 ‘의료균점(醫療均霑)’이 정권을 막론한 과제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농어촌 의료보험은 농어촌에 대한 보건의료와 농어민 의료보장의 정책적 방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제도였다.

본 논문에서는 농어촌 의료보험을 통합운동의 전사(前史)나 복지정치의 한 국면으로 다뤄온 기존 연구와 달리, 해방 이후 지속되어 온 농촌 의료소외의 역사 속에 놓고 농민의 건강 문제가 어떻게 대두되었다가 제도 논쟁 속에 수렴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동시에 이 문제를 개방농정과 농가부채 등으로 농촌 위기가 격화되는 한편 민주화운동이 고양되던 1980년대 한국사의 흐름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 과정과 의료보험 시정운동을 농민들의 의료문제 해결 요구에 대한 반응이자 농민 ‘건강권’ 요구가 대두되고 또 주변화되는 과정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것이다.2) 이때 ‘건강권’은 농민들이 처음부터 주장했던 요구라기보다 농촌의 오래된 의료소외가 의료보험을 계기로 발생한 저항을 거치며 개념화된 하나의 범주로 다룬다. 농민들이 의료 문제를 둘러싸고 제기한 이질적이고 다층적인 불만과 요구는 보건의료단체 등 여러 사회운동과 연대한 의료보험 시정운동 과정에서 ‘건강권’이라는 언어로 표현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오랫동안 농민들이 요구해 온 제도였던 농어촌 의료보험은 왜 실시와 동시에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는지, 의료보험을 둘러싼 다층적인 농민들의 요구가 어떤 조건에서 통합주의라는 하나의 의제로 수렴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농촌의 고유한 의료 문제는 어떠한 위치에 놓였는지 등을 논할 것이다. 이 글은 농촌 의료소외가 건강권으로 대두되고 다시 의료보험 관리방식 논쟁으로 수렴되어 간 이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전국민의료보험의 성립을 제도의 ‘완성’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고 변형되어 간 역사로 읽고자 한다.

2. 농촌의 의료소외와 농촌 의료개선 정책의 한계

1) 1970년대 후반~1980년대 농촌지역 의료인력 및 시설 확대 정책

1976년 9월 보건사회부는 「국민보건 향상을 위한 의료시혜확대방안」을 발표하였다. “전 국민의 의료보장기반을 확립함으로써 국민보건향상을 도모”한다는 목적하에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해서는 의료시혜를 확대하고, 기타 국민에 대해서는 의료보험을 통해 의료비 부담을 분산, 경감시키는 방안을 제도화하겠다는 계획이었다.3) 이를 뒷받침하는 「의료보험법」 개정안이 1976년 10월에 정부안이 국회에 제출된 후 큰 논란 없이 12월에 통과되어 공포되었다. 의료보험의 제도화 계획은 1977년부터 시작되는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도 포함되었다. 정부는 ‘사회보장의 기반확립’을 위한 방안으로 기업체(제1종)와 지역단위의 자율적 조합(제2종) 형식으로 운영되는 의료보험제도를 수립ㆍ실시할 것을 명시했다(대한민국정부, 1976: 111).

이에 따라 1977년 7월부터 500인 이상 사업장의 의무가입을 시작으로 하여 의료보험 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한국에서 의료보험 제도를 실시하려면 사회보장의 취지와 의료비용 상승을 고려해 도시 저소득층과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이 우선 실시되어야 한다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보건경제학자의 지적이 있었지만(Jeffers, 1976), 국고 부담의 한계를 들어 부담을 분담할 수 있는 대기업을 우선으로 적용 대상으로 삼았다. 대신 생활보호대상자로 대표되는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공적부조 형태의 의료 보호 제도를 실시하여 의료비 부담을 경감하기로 했다.4) 제도 설계 과정에서는 조합주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일본의 건강보험제도를 참고하였다. 하지만 「공장법」이나 「광업법」에 적용되는 하층 도시노동자에 대한 강제 가입으로 시작해 의사들의 이농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농어촌민에 대한 건강보험으로 확대해 나간 일본의 방식과는 그 원칙과 우선순위에서 차이가 있었다(新村拓, 2011).

정부는 의료보험 실시로 예상되는 의료수요 증가에 대처하는 한편,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도시와 농촌간의 보건의료 격차를 해소해야 했다. 이를 위한 기본 정책은 농어촌의 보건의료 시설과 인력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저렴보건의료제도’로 표현된 저비용-고효율의(cost-effective) 일차보건의료체계를 농어촌 우선으로 구축하고자 했다. 이는 공공보건의료를 위한 시설과 인력을 확충하는 안으로, 최소한의 질병 예방과 기본적인 치료가 가능한 체계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읍ㆍ면단위까지 일차보건의료 시설인 보건지소를 확충하고 1978년 12월 병역법 개정과 더불어 「국민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공중보건의사 제도를 통해 보건소 및 보건지소에서 일할 의사를 확보하였다(신창훈, 2023). 그리고 1980년 12월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해 벽지 지역에 보건진료소를 설치하고 제한적인 일차진료가 가능한 간호사를 보건진료원(현 보건진료 전담공무원)으로 양성, 배치하였다(정다혜, 2022). 1979년 말에는 세계은행(World Bank)과 인구차관 협정을 맺고, 1980년대부터 모자보건센터를 설치하여 조산사를 배치하고 이들이 농어촌의 안전분만을 비롯한 모자보건사업을 담당하도록 하였다(정다혜, 2025b).

둘째로, 2ㆍ3차 후송병원을 농어촌에 확보하는 정책이었다. 민간 의료기관 중심의 의료 시장에서 의료시설에 대한 강제적인 지방분산 정책이 현실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1977년 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의료보험 확대를 대비해 비도시 지역에도 병원급 의료기관이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의료보험이 실시된 지 3개월 만에 시정연설을 통해 “국민보건의 증진을 위해” 의료보호 및 의료보험제도를 단계적으로 확충하는 한편 공단지역과 취약지역, 농어촌에 대한 의료망을 확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5) 이를 위해 정부는 차관을 도입하여 시ㆍ도립병원을 신축하거나 기존 시ㆍ도립병원을 현대화하고, 민간병원 설립을 지원하기로 하였다(홍창희ㆍ박승만, 2023). 정부가 보다 주력한 사업은 시ㆍ도립병원 확대보다는 민간병원 건설이었다. 공업단지와 ‘의료취약지구’에 병원을 확대하기 위해 대기업에 병원 건설을 권유하는 한편,6) 해외 차관을 통해 민간병원 건설 자금을 지원했다. 이때 ‘의료취약지구’란 의료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와 거리가 멀고 의료자원이 부족한 농어촌 지역을 의미했다.

1977년 4월 30일 보건사회부는 전국 공업단지에 80~150병상, 의료시설이 부족한 의료취약지구에는 50~80병상 규모의 민간병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7) 정부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공단지역 병원은 대도시의 민간 종합병원, 사립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설치하고, 의료취약지구 병원의 경우 지역 내 여러 전문의사 등으로 구성되는 연합병원 형태로 의료법인을 설립하기로 추진 방향을 설정했다. 의료취약지구 병원의 시설 건축비는 장기저리 특별융자로 지원하고, 의료장비 구입비는 장기저리 재정차관을 도입하여 지원하기로 하였다(보건사회부 의정국관리과, 연도미상: 5).8) 이를 위해 서독 재건은행(Kreditanstalt für Wiederaufbau, KfW)과 일본 해외경제협력기금(Overseas Economic Cooperation Fund, OECF)의 차관을 도입했다. 1978년 13개 공업단지, 12개 의료취약지구에 대한 병원 건설사업을 시작으로 1982년까지 전국에 총 77개 민간병원 건설 사업에 정부의 정책융자와 차관이 투여되었다.9)

하지만 농촌 지역에 의료인력과 시설을 확충하려는 사업들은 기대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우선 농촌 일차보건의료 체계 구축의 경우 외형적으로는 양적인 측면에서 공중보건의사와 보건진료원을 단기간에 배치하는 성과가 있었다. 정부는 병역제도를 활용해 1983년에 전국 보건지소에 공중보건의 배치를 완료해 무의촌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으며, 간호학생에게도 공중보건 장학제도를 확대해 보건진료원을 확보한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10) 하지만 공중보건의 배치 과정에서 각 개인의 전공이나 보건소 시설을 고려하지 않고 배치하였고, 이에 대한 공중보건의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그간 익힌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임상실습 기회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11) 공중보건의에 대한 주민들의 만족도도 낮았다. 주민들은 공중보건의사를 ‘학생의사’ 혹은 ‘실습을 위해 파견나온 사람’이라고 인식했다(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농촌분과, 1993: 95-96). 1986년 조사에 따르면 지역의료보험 시범사업 지역을 제외한 곳에서 공중보건의의 1일 평균 진료 건수는 3-4건에 불과했다(박정한ㆍ천병렬ㆍ우극현, 1986). 병역 대체의 성격으로 인한 공중보건의사의 잦은 교체는 보건소ㆍ보건지소의 열악한 시설에 더해 공공 일차보건의료 기관에 대한 신뢰도를 낮추는 요인이 되었다.

보건진료원 양성은 의료기관이 없는 벽지에 간호사가 의사를 대신해 공공보건의료기관에서 일차적인 진료와 건강관리를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보건진료원은 지역적ㆍ업무적 제한 범위가 컸고, 후송 등을 위한 공중보건 의사와의 협력관계가 원활히 구축되지 않았다. 임시직 처우의 불안정성과 지역사회 정착과정에서의 갈등 문제도 사업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정다혜, 2022). 모자보건센터의 경우 조산사를 중심으로 운영한다는 점에서 농촌 의사 부족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졌으나, 센터 대부분이 조산사 고용의 어려움, 운영비 부족, 이용률 저조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정다혜, 2025b).

농촌지역 2ㆍ3차 병원 건설을 염두에 둔 차관지원 병원건설 사업 또한 결과가 미약했다. 1983년 11월까지 57개 병원이 완공되었으나 20개 병원은 미완공이거나 착공을 못하고 있었다. 완공된 57개 병원 중에서도 7개 병원은 병원 운영자 문제로 사업지정이 취소되면서 개원하지 못했다.12) 개원한 병원 상당수도 자금과 의료인력 부족으로 운영난에 시달렸다. 25개 병원의 경우 OECF 차관으로 도입하는 의료장비의 수입 관세 30%를 내지 못해 총 380만 달러(약 30억원) 어치의 의료장비가 수년간 세관 창고에 방치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13) 초기 적자운영을 감수할 수 있는 자금 능력이 없는 채로 병원 건립에만 몰두하고, 구체적인 의사 확보 대책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역별로 차관 지원 민간병원의 운영 격차가 확연했다. 1988년 1월 차관병원들의 운영실태를 조사한 결과 대도시에 건립한 17개 병원은 모두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었다. 그러나 중소도시에 건립한 20개 병원 중에는 6개만이 운영되고 있었고, 농촌지역에 설립한 23개 병원의 경우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병원은 단 두 곳에 불과했다.14) 대도시 공단지역에 건립한 병원들은 대학부속병원으로서의 위상과 도시의 성장과 인근지역을 포함한 의료수요의 증대에 더불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박지영, 2025; 정다혜, 2025a). 반면 중소도시와 농어촌의 경우 인구당 병상수를 기준으로 병원규모를 설정하였으나 충분한 의료인력 확보와 의료수요 예측 모두에 실패했다. 정부는 뒤늦게 농어촌지역개발기금 융자를 통해 차관병원들의 원리금 상환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대부분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했다(홍창희ㆍ박승만, 2023: 76).15)

2) 농어촌 의료보험 시범사업의 전개와 한계

농어촌의 의료인력과 의료시설을 확충한 것이 물리적 인프라 측면에서 도시와 농촌의 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이었다면, 경제적 접근성의 측면에서 중요한 사업은 농어촌 지역까지 의료보험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시도는 지역 단위 의료보험을 결성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지역단위 의료보험조합 중에 처음으로 정부 인가를 받은 곳은 1968년에 부산에서 창립된 ‘부산청십자 의료보험조합’으로, 1969년에 인가를 받았다(봉원오, 2025). 이를 계기로 1970년에 「의료보험법」이 개정되면서 이전까지 근로자에게만 해당했던 의료보험이 ‘자영자’를 대상으로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여러 지역에서 의료보험 조합 결성이 추진되었는데, 정부 인가 획득에 성공한 조합은 대부분 농어촌 의료보험조합이었다.

1970년대에 결성된 농촌지역 의료보험조합 중 상당수는 지역사회의학(community medicine)을 표방하며 여러 의과대학과 의료기관들이 농촌 지역에서 지역사회보건사업(community health project)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상 지역 주민들의 경제적인 의료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주도해 지역사회 보건사업이 실시된 강원도 춘성에서는 ‘춘성의료보험조합’, 가톨릭 의과대학이 충남 서산에서 실시한 곳에는 ‘삼화의료보험조합’이 결성되었다.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참고하여 농촌형 의료보험 조합을 만든 경우도 있었다. 경남 거제ㆍ전북 옥구ㆍ충북 증평 지역에서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었다.16) 이처럼 일부 지역에서 농어민 대상의 의료보험이 실시되었지만 1976년 말 「의료보험법」 개정에서 직장의료보험(제1종)이 대기업부터 당연적용을 확대하기로 한 반면, 농어민과 같은 ‘자영자’ 의료보험조합은 임의적용하는 것으로 머물렀다. 1978년 현재 인가받은 의료보험조합 중에서 국가보조금을 받고 있는 곳은 대도시 지역인 부산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유일했다.17)

1970년대 제2종 의료보험조합 현황(1978년 기준)18)

Table 1. Status of Type II Medical Insurance Cooperatives in the 1970s (as of 1978)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민심 유화책의 일환으로 19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차원에서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시혜 확대방안」을 발표했다. 의료보호 대상에서 제외되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계획으로, 의료보험 적용범위를 100인 이상의 사업체 근로자들에게 확대하고 의료보호 대상자를 확대하여 1981년부터 전 인구의 36%에 의료혜택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19) 국보위는 이와 같은 방안을 발표하면서 농어촌 주민에게도 “값싸고 질 높은 의료를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20)

두 달 뒤인 1980년 10월에는 보다 구체적인 농어촌 의료보험 확대 방안을 발표했다. 1981년부터 농어촌지역 의료보험 시범사업을 시작해 점차 사업 범위를 확대하면서 1985년까지 농어민, 자영민의 30%, 1987년 60% 등으로 의료보험 적용 범위를 늘리고 1991년에는 농어민, 자영민 90%까지 의료보험을 적용한다는 계획이었다.21) 시범사업 확대와 사업지역의 단계적인 확대 계획은 1981년에 작성된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도 반영되었다(대한민국정부, 1981: 115).

이와 같은 일련의 의료보험 확대 발표는 1977년 의료보험 실시 이후 지역간ㆍ계층간 의료 격차가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1977년 의료보험 실시 당시 보험수가 대비 일반수가가 1.4배 수준이었는데, 이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면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대단위 사업장 노동자와 그들의 피부양자 가족들과 그렇지 못한 집단의 의료비 부담 격차가 증대되었다. 농어촌은 의료시설과 의료인력에서도 격차가 큰데, 대다수의 농민들은 의료보험 적용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농어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81년부터 ‘농촌지역 제2종 의료보험 시범사업’ 실시계획이 수립되었다. 시범사업의 기본 목표는 ①지역적 특성에 적합한 보험운영체계를 개발하고 ②주민 부담능력 측정 및 분담방법을 개발하는 것, ③공중보건의료제도와의 연계운용을 통해 생활권별 진료전달체계를 확립하고 ④도시지역의 요양취급기관 신규지정 제한을 통해 의료공급의 지역적 분산을 유도하는 것이었다.22) 시범사업에서의 국고지원은 예산 범위 내에서 운영비 전액을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23) 시범사업의 중점은 합리적인 보험료 부과 및 징수방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급여생활자가 아닌 농어민과 자영자는 소득파악이 어렵고 급여에서 공제하는 보험료 원천징수가 불가능하다는 특성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보건복지70년사편찬위원회, 2015: 9). 또한 직장 의료보험처럼 보험료를 절반 이상 분담할 주체가 없기 때문에 보험료 책정과 재정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1차 시범사업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전북 옥구군ㆍ강원 홍천군ㆍ경북 군위군에서 실시하였다. 이들 지역은 1978년부터 국책기관인 한국보건개발연구원(KHDI)이 주도하여 지역사회 보건사업에 해당하는 ‘마을건강사업’을 3년간 실시한 곳이었다. 특히 옥구는 1973년부터 의료보험조합을 운영해온 경험이 있어서 다른 시범사업 지역에도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1982년에 선정된 2차 시범사업 지역은 기존 세 개 지역에 3개 지역을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새롭게 추가된 경기 강화군은 ‘도서어촌형’ 지역으로, 연세의대 주도로 지역사회 보건사업을 실시하면서 ‘봉화의료보험조합’을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고, ‘평야농촌형’으로는 충북 보은군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도시지역 지역의료보험 실시를 준비하면서 ‘중소도시형’에 해당하는 곳으로 전남 목포시도 시범사업 지역으로 포함되었다. 2차 시범사업 지역 선정기준에는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다. 계획 단계에서는 보건진료소가 설치된 지역 중에서 소득수준, 인구이동률, 직업분포, 의료시설, 의료보험 적용실태, 지방자치단체의 협조태세, 새마을사업 추진상태, 모자보건센터 건립 지역 등을 고려하여 선정하기로 하였다.24) 하지만 실제 선정에서는 한국인구보건연구원의 추천 지역, 내무부 새마을사업 우수도시 지역, 의료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지역, 소득수준이 비교적 높은 지역, 유형별로 1개 지역, 도별로 1개 지역을 선정한다는 원칙으로 바뀌었다.25) 의료자원의 분포와 지역민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기보다는 위로부터의 동원이 비교적 용이한 지역이 선택되었다.

하지만 이들 시범사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초기에는 낮은 보험료 징수율이 문제가 되었다. 목포의 경우 기존에 지역사회보건사업과 같은 시범사업이 실시된 적 없는 곳이었는데, 별다른 설명없이 당연 적용 방식으로 보험료가 고지되자 개별적으로, 혹은 마을단위로 집단적으로 피보험자증 및 고지서를 반납하고 조합사무실로 항의하는 주민들이 몰려와 수일간 농성을 벌였다(의료보험연합회, 1997: 384-385). 다른 지역에서도 만성적인 체납 문제가 조합 운영의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전반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이해가 확대되면서 만성적인 체납은 점차적으로 개선되었고, 조합의 자율적인 관리 능력 또한 향상되었다고 평가되었다.26) 하지만 보험 급여액과 보험료 징수액 사이의 괴리로 인한 재정적자는 갈수록 확대되었다. 보험료 징수 증가로 보험료 수입이 증가하는 속도보다 보험급여 지출의 증가 폭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표 2].

조합별 재정현황(1985년 4월말 현재)

Table 2. Financial Status by Cooperative (as of end of April 1985)

전문가들은 대상 지역민들의 의료 이용 횟수와 의료기관 유형에 대한 예측 실패로 보험료가 낮게 책정되었고 이에 따라 보험료 수입이 급여 지출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보았다(이규식ㆍ김경숙ㆍ김기옥, 1986: 220). 계획 당시에는 보건소와 보건진료소 등의 공공보건기관 이용률을 1차 시범지역 75%, 2차 시범지역 48.5% 정도로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공보건기관 이용률이 낮았고 민간병원과 종합병원 이용률이 예상보다 높았다(김행영ㆍ양수석, 1983: 38-43; 이규식ㆍ김경숙ㆍ김기옥, 1986: 68-71). 무엇보다 1종 보험에서는 고용자 측에서 보험료 일부를 지불하고 정부가 해당 기업에 세제 혜택 등을 주고 있는 데 비해 2종 보험에서는 대상자들에게 걷은 보험료 수입만으로 재정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1종 보험과 같은 수준으로 보험료를 징수했을 때 적자에 훨씬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험료 부담능력이 낮은 많은 농민들이 보험료를 미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재정 적자는 쉽게 해결되기 어려웠다.27) 그 결과 1985년부터 사업 지역을 전국 농어촌의 30%로 확대하려는 계획은 취소되었고, 기존 지역에서 사업을 연장하면서 지역 실정에 맞게 보험 모형을 보완해 나가기로 했다.28)

강화군에서 의료보험 시범사업을 주도한 연세대 예방의학교실은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 지원을 통한 적자 해소가 필수적이며 장기적으로는 기존 직장(1종) 의료보험과 지역(2종) 의료보험을 일원화하여 지역별로 운영될 수 있는 시범사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유승흠, 1984: 22-23). 직장 노동자 중심의 의료보험과 지역 의료보험의 통합 문제는 이미 지역의료보험 시범사업을 준비하던 1980년대 초부터 논의된 바 있었지만, 대통령비서실에서 통합유보 입장을 내비치면서 조합 방식으로 시범사업이 실시되었다.29) 이후에도 보건사회부와 민정당이 주도하여 국회에서 의료보험 통합법안 마련을 추진하였으나, 대통령비서실에 파견된 복지관료들과 갈등 끝에 통합은 무산되었다(조영재, 2008).

이렇게 지역의료보험 시범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되지 않고 의료보험 적용 지역 확대에 제동이 걸린 가운데 정부는 의료보험조합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소득층 의료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의료보호 대상자를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30) 그러나 지역의료보험 운영에서 가입자 전액부담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국고 보조를 최소 원칙으로 상정한 상황에서 재정대책이 충분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의료보호 대상자 확대안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증가하는 의료수요와 의료보험 재정 적자 증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 후반 이래 전개된 정부의 농촌 보건의료 정책은 공공 일차보건의료망의 확충과 의료취약지구 민간병원 건설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었고, 1981년부터는 농촌지역 의료보험 실시를 위한 시범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세 축은 모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농촌 의료 인프라 확대 정책은 시설ㆍ인력의 부실, 주민의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채 부침을 거듭하고, 지역의료보험 시범사업의 경우에도 만성적 재정 적자 문제를 해소하지 못했고 보험료 부과의 형평, 진료전달체계의 확립, 의료공급의 지역적 분산과 같은 과제들 또한 대부분 해결하지 못하였다(이규식ㆍ김경숙ㆍ김기옥, 1986). 이는 1988년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 국면에서 그대로 농민들의 불만으로 표출되었다.

3. 1988년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의 정치적 배경

농촌의 보건의료 접근성 향상을 위한 인력과 시설의 확충, 의료비 부담 경감을 위한 의료보험 시범사업은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1980년대 농촌 경제는 크게 악화되었다. 이미 1960-1970년대 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국민 총생산액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2년 43.3%에서 1982년 18%로 크게 감소하였고, 시ㆍ도간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농가인구는 줄고 농가부채는 증가하였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편, 1984: 179-194). 여기에 정부가 1977년부터 물가상승 억제를 명목으로 농업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농가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1978년 2월 「수입자유화 기본방침」을 확정해 주곡(主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에 대한 수입을 확대하는 ‘개방농정’ 실시를 공포했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1: 2). 수입자유화 초기에는 상당 품목의 수입이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입개방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불안감은 커졌다(정영일, 1986: 118).

1980년대 들어 신군부 정권은 새로운 농촌개발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기존 수입개방 정책을 유지하는 가운데 주곡 증산 위주에서 복합영농, 농촌 공업화 등 농외 소득원 개발을 통해 농업구조를 개선하고 영농후계자를 육성하는 등 ‘종합개발농정’을 전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의료ㆍ교육ㆍ교통ㆍ주거 등의 농어촌 생활 환경도 개선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1; 박진도, 2007: 432).

개방농정, 종합개발농정을 내세운 농업정책은 본질적으로 농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고물가ㆍ고임금 성장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이었다. 1969년부터 계속된 이중곡가제로 대표되는 저곡가 정책은 농가소득을 보장한다는 목표에서 진행되었지만 농촌 빈곤문제는 오히려 심화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는 매년 추곡수매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1983년에는 추곡수매 가격이 동결된 데 이어 다른 농축산물 가격까지 폭락하면서 농민들에게 ‘악몽’으로 남았다(김현식, 1984: 74-81). 이에 농민들은 농가부채 해결, 농지세 등 부당한 수세징수 해결 등을 요구하는 농민운동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농민들이 소를 거리로 몰고 나오는 ‘소몰이 투쟁’이 벌어지고 정부의 소 수입 정책을 비판하며 농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31) 정부의 축산 진흥 정책에 따라 소 입식자금을 지원 받아 소를 사육하는 농가가 증가했는데, 정부가 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면서 소값이 폭락해 소 사육 농가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1986년 한미 통상협정 타결은 농산물 시장 개방을 둘러싼 농민들의 불안을 한층 고조시켰다. 저곡가와 농가부채, 농산물 개방의 위협 속에 농촌 경제의 위기감은 임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처럼 농가 경제가 갈수록 피폐해져가는 데 반해 도시와의 생활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었고, 의료보험은 도시와 농촌을 가르는 대표적인 차별의 요소처럼 그려졌다. 아래에서 묘사하고 있는 서사는 의료보험 문제에 대한 당시 농민들의 인식을 잘 드러낸다(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1984: 15).

농민: “의료보험이 뭔데라?” ……

간호사: “그럼 의료보험이 없군요. 의료보험이 없으면 돈이 많이 들것인데요.”

농민: “그럼 우리도 의료보험 하나 해줏쇼.”

간호사: “내가 해줄 것 같으면 백번이라도 해 주지요. 그런 것은 정부에서 한께 우리는 못해요.” …… “농사 짓는 사람은 안돼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나 월급을 타는 사람이 아니면 안됩니다.”

농민: “그런 사람들이야 돈이 많이 있은께 그런 것 없어도 괜찮을 것인디 으째서 그런 사람들은 해주고, 우리같은 농삿꾼들은 진짜 돈이 없는 사람들인디 우리같은 사람들한테는 안해준다. 정부는 순 있는 놈들만 살리고 우리 같이 농사나 지어먹고 못사는 놈들은 병원에도 다니지 말고 다 죽으라는 짓거리들인가요 잉”

정치적으로 여당 지지가 강했던 농민들의 저항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은 1985년 총선을 앞두고 연초 국정연설을 통해 농어민과 도시자영민에게 단계적으로 의료보험을 확대 실시하고, 의료보호의 내실화를 통해 의료보장 기반을 다져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32) 곧 이어 민주정의당(민정당)은 2월 총선을 앞두고 “88년 복지한국”을 표방하며 농어촌종합개발 확대와 함께 적어도 1988년까지는 전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도록 하겠다고 발표하여 구체적인 시기를 제시했다.33) 의료보험 시범사업이 부진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목표인 1991년보다 목표를 앞당긴 것이었다. 이에 대해 총선 한 달 전에 창당해 대항세력으로 민정당을 위협한 신한민주당(신민당)뿐만 아니라 민주한국당(민한당), 한국국민당(국민당) 등의 ‘관제 야당’까지 민정당을 비판했다. 정부의 지난 집권 기간 동안 사실상 농정이 부재했다는 것이었다. 여러 야당은 농촌부채 경감 또는 탕감, 농어촌 소득증대와 함께 농어민 의료보험 실시할 주체가 본인들임을 내세웠다.34)

총선 결과 민정당은 여당에 유리하게 짜여진 선거제도 덕분에 가까스로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했지만, 정권이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음이 드러났다. 1985년 5월과 10월 국회본회의 경제분야 대정부 질의에서도 농촌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농어촌 의료보험을 언제 실시할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때 경제기획원장관 신병현은 시범사업에서 발생하고 있는 적자 문제를 해결하면서 실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적어도 제6차 5개년 계획기간, 즉 1991년까지는 도입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35) 민정당 또한 농어촌 복지시책의 일환으로 농어민 의료보험 전면확대를 최대한 앞당겨 실시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국회 전체의 정부 압박과 농민들의 요구는 날로 거세졌다. 정부는 의료보호 대상자 확대와 저소득 영세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부조 제도 신설로 의료보험조합 적자문제 해결을 꾀했으나 역부족이었다.36)

1986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1989년에 가서 대통령 선거방법 변경을 논의해야 한다며 직선제 개헌 유예 입장을 밝혔다.37) 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거세지는 가운데 1986년 7월, 민정당은 기존에 1991년에 도입하기로 한 농어촌 의료보험을 1988년부터 실시하고 도시 영세민 및 자영사에 대한 의료보험을 1989년부터 실시하여 국민개보험을 달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38)

이 발표가 나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정부가 직접세 형태의 의료보장세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대한의학협회(의협)와 야당인 신민당, 여당인 민정당이 1ㆍ2종 보험의 통합일원화를 주장하고 한국노총과 경제인연합회, 기존 의료보험조합 운영자들이 일원화에 반대하는 가운데 제시된 대안이었다.39) 의료보장세 신설은 정부의 재정 투입 부담을 줄이기 위한 시도였지만, 이후 정책 추진으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1988년으로 앞당겨진 농어촌 의료보험과 본래 계획보다 2년 앞당겨진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1986년 8월 전두환 대통령은 ‘하계 특별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기자회견은 개헌 압박 속에 본인에게 부여된 임기를 정확히 마치고 퇴임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개헌과 민정당 차기 대통령 후보 문제와 같은 정치 이슈에 답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복지 정책도 대거 발표하였다. 최저임금제, 국민연금제의 조속한 실시를 내세우면서 1989년까지 의료보험을 통한 의료보장을 추진할 것을 다시 강조하였다.40) 당시의 정치적 국면을 고려할 때 이같은 사회보장제도의 추진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간선제 폐지와 개헌 여론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조치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곧이어 9월 1일 정부는 국민복지증진대책(이하 「복지대책」)을 발표하였다. 「복지대책」에는 의료보험ㆍ국민연금ㆍ최저임금제를 골자로 하는 사회보장제도 확충과 도시영세민 등 저소득층 생활향상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료보험은 1988년에 농어촌 지역, 1989년에 도시 지역순으로 확대하되, 보험 운영에 대해서는 시장ㆍ군수가 보험료를 책임 징수하면서 운영은 조합별로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조합주의 방안과 공ㆍ교보험 및 직장보험과 통합일원화하는 방안을 모두 열어두었다(경제기획원ㆍ보건사회부ㆍ노동부, 1986: 11-13). 구체적인 시기를 확정하고 1년 반 앞으로 다가온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조합이냐 통합이냐의 실시방안은 여전히 확정되지 않았다.

농어촌 의료시설과 인력 보강 방안도 포함되었다. 보건소 및 보건지소를 신ㆍ개축하고 병원이 없는 군지역 보건소의 시설장비를 집중보강하는 한편 공중보건의를 1990년까지 인턴 수료자로 배치하면서 공중보건의 처우개선을 위해 기본급 외에 성과금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와 더불어 민간병원의 대도시 건설을 억제하고 중소도시에 병원 개설시 세제ㆍ금융상 혜택을 부여하기로 했다(경제기획원ㆍ보건사회부ㆍ노동부, 1986: 50).

저조했던 이전 정책을 의식해서인지, 이를 실행하기 위한 추가적인 대책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먼저 9월 말 경제기획원은 농어촌 의료인력 확보를 위한 대도시 의료기관 개업 억제책을 발표했다.41) 대도시에서 개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소도시에서 5년, 혹은 군 단위 지역에서 3년 이상 근무를 의무화하고, 이를 위해 대도시의 전문의 개업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1985년 1월에 보건사회부령으로 「지역별 의료기관 개설허가 제한 등에 관한 규칙」이 공포되어 대도시 지역에는 병원 신설과 병상의 증설이 금지되어 있었다(보건복지70년사편찬위원회, 2015: 9-10; 정다혜, 2024: 271-274). 1985년의 규칙이 의료시설 개설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1986년의 대책은 의료인의 비 대도시ㆍ농어촌 지역 근무 의무라는 조건까지 더해졌다는 점에서 인력에 대한 규제까지 더한 강력 조치였다.

의협은 진료비 지불 보장을 근거로 정부가 의료보험을 통합일원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조합 재정 파탄 등을 이유로 진료비 지불이 연체되거나 제대로 받지 못하는 위험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재정 운영이 원활한 조합은 낭비적 진료를 받고 농어촌 조합은 재정 파탄을 초래해 사회계층간 불평등이 생길 것이므로 정부가 의료보험 재정 통합일원화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진료비를 지불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의료보험연합회와 의료보험관리공단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의료기관에 대한 진료비 심사기구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42) 이런 가운데 대도시 의료기관 개업 허가제까지 발표하자 의협은 “의료제도의 혼란과 와해가 우려된다”며 즉각 반대의사를 밝혔다.43) 또한 “전문의의 대도시개업을 제한할 경우 전문의 자격증을 반납하는 극한 행동도 불사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44)

이러한 가운데 정부는 10월 22일 ‘의료취약지구 의료시설 및 인력보강대책’을 확정했다. 농어촌 의료취약지역 39개군에 농어촌 의료보험이 실시되는 1988년 3월까지 민간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신규 병원 시설과 장비에 대한 장기저리 융자와 공중보건전문의 배치, 세제 지원 등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이었다.45) 강도만 높아졌을 뿐 시설과 인력을 농어촌으로 유인한다는 방식은 동일했다. 보건사회부는 의협 반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경제기획원 계획안의 시행에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를 1년여 앞둔 시점까지 농촌의 의료공급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46)

그러한 가운데 1987년 2월, 정부는 의료보험을 조합체제로 운영하겠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그간 민정당, 의협, 사회보장학회 등에서 통합주의를 주장해왔으나, “우리 실정에는” 각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조합을 관리하는 조합주의 방식이 바람직하므로 이를 채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47) 이를 위해 7월 이전까지 전국 134개 농촌지역 군에 군수 책임 아래 의료보험조합을 구성하고, 조합장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발표 이후 정부의 방향성을 둘러싼 여러 논쟁이 오갔다. 정부의 정책방향이 기존 정책을 다시 천명한 것일 뿐이며 보험재원 조달 문제, 농어촌 공공의료시설 이용률 제고 문제 등은 해결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48) 조합주의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았기 때문에 전국민의료보험 시행방식을 둘러싼 공청회도 개최되었다.49) 공청회에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의 연하청은 현재 공무원ㆍ교원 의료보험 조합과 직장조합 모두 적자가 예상되고 있으며, 통합방식이 될 경우 조합방식의 강한 연대의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의료비 증가가 가속화될 것이라며 조합주의의 타당성을 설명했다. 또한 그는 현 제도의 수정과 보완이 위험부담이 적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 김영모는 사회보장 성격의 통합주의를 주장하며 적자 문제는 조합방식이든 통합방식이든 똑같이 제기될 수 있으며, 통합방식이 연대의식을 약화시킨다는 근거가 없다고 반박하였다. 통합주의를 주장했던 민정당에서도 정책토론회를 갖고 의료보험 운영방식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50) 이처럼 정부의 의료보험 실시방향을 둘러싼 타당성 논쟁이 계속되었지만 1987년 4월 20일, 정부와 민정당은 전국민의료보험 추진방안을 확정하였다. 그들은 지역별로 조합운영 방식으로 의료보험관리 운영을 추진하되, 장기적으로 통합일원화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하였다.51)

한편 농민들은 이와 같은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 계획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당사자인 농어민의 민주적인 의사 수렴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1987년을 전후로 출범하기 시작한 지역 농민회에서는 농축산물 가격 보장, 농가부채 탕감, 농협민주화 등과 함께 국가부담의 농민 의료보험을 주장했다.52) 농민단체는 기존 시범 사업과 마찬가지로 재정독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농촌 병원 유무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로 행정단위별로 묶어 군단위로 조합을 설립하는 정부의 방식은 농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53)

농민들의 불만을 반영하듯 1987년 대선 국면에서 후보들은 앞다투어 농어촌 의료보험 공약을 제시했다. 평화민주당(평민당) 김대중 후보는 농어촌 부채 탕감과 함께 농어촌 의료보험 50% 보조를 공약했고, 김종필 또한 농어촌의 보험료 부담을 50% 이하로 내리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54) 결과적으로 1987년 12월 대선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농어촌 의료보험은 이전 정부에서 추진한대로 1988년 1월부터 실시되었다. 전문가 집단부터 정치 집단, 농민단체까지 다양한 의견 집단의 의견이 충분히 조율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촌 문제 해결이라는 정치적 압박과 정권의 정당성 확보라는 과제 속에서 급속하게 추진된 것이다.

이처럼 농어촌 의료보험은 그 필요성에는 다수가 공감하고 있었으나, 제도 시행은 시범사업의 성과 위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해결의 쟁점들을 그대로 안은 채 정치적 시간표에 맞추어 실시되었다. 보험료 부과의 형평성, 진료권 설정, 조합 운영방식, 농촌 의료시설의 부족 등 정책 수립 단계에서 제기되었던 의문들은 해소되지 않은 채 실시 일정만이 앞당겨진 것이다.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를 앞두고 이미 언론에서도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의약분업, 의료전달체계, 보험취급 요양기관 지정 등에 대한 쟁점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의료보험이 실시되면 적자 운영이 불가피해 의료기관에서 농어민 보험 환자를 꺼릴 수 있고, 의료기관 또한 부족해 농어촌 주민들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55)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제도 시행 직후 농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으로 분출되었다.

4. 농민 건강권의 대두와 주변화

1) 농어촌 의료보험 거부운동과 농민 건강권 제기

1988년 1월, 농어촌 의료보험이 전국 농어촌 군단위에서 실시되면서 첫 보험료 납부일이 1월 말로 고지되었다. 그동안 농민들은 “고된 농사일로 몸에 병이 나도 우리 농민들은 병원에 쉽게 갈 수 없으며, 병원에 간다해도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와 살림이 절단날 정도로 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농민들을 위한 농촌 의료보험의 필요성을 외쳐왔다.56) 그러나 막상 ‘농어촌 복지 향상’을 내세우며 실시된 농어촌 의료보험은 농민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농민들이 오랫동안 요구한 것은 도시의 직장의료보험 대상자와 같은 방식의 의료보험 혜택이었으나 실제로 주어진 것은 도시와는 다른, 차별적이라고 여겨지는 제도였다.

가장 먼저 농민들의 반감을 산 것은 보험료였다. 시범사업 단계에서 부담능력에 상응하는 부과방식을 개발하지 못한 결과는 실시 첫 달에 곧바로 드러났다. 농민들은 기존 1종 의료보험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험료 부과기준을 납득할 수 없고 너무 비싸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고흥군에 사는 한 농민은 농어촌 의료보험이 재산비례ㆍ소득비례 보험료에 더해 가구당 기본보험료, 가족 인원당 보험료까지 부과하는 방식이어서 월 소득액의 9~12%를 의료보험료로 내야 했다. 그는 공무원ㆍ교원이나 직장의료보험 대상자의 보험료 부담이 월 소득액의 2~3%인데 반해 가난한 농민들이 오히려 몇 배나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한다며 부당함을 호소했다.57)

이러한 불만은 농촌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인 보험료 납부 거부 및 의료보험증 반납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의료보험조합, 읍ㆍ면 사무소에는 부당한 징수에 항의하는 농민들로 가득차기도 했다. 저항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도(道)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시행 첫 달에만 전남 완도군에서 1,000여 가구, 경기 남양주군 700여 가구, 강원 명주군(현 강릉시) 1,300가구, 삼척군 530여 가구 등이 의료보험증을 반납했다.58) 전북 임실군에서는 1만여 가구 가운데 1,600가구가 도시지역 친척집으로 주민등록을 옮기는 ‘이전 투쟁’을 벌였다.59)

개인적 수준에서 산발적으로 이의신청이 진행되던 운동은 군단위ㆍ면단위의 의료보험 대책위원회 결성으로 이어져 본격적인 의료보험료 납부 거부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농민단체가 있는 지역에서도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충북 영동군에서는 “영동농민 의보카드 반납대회”를 개최하고, 5개 면에 의료보험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전국 곳곳에서 “부당 의료보험 거부대회”가 열렸다.60) 전남 무안군에서는 전국 최초로 여성 농민들이 주도하여 ‘무안군의료보험 여성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의보제도 개선을 위한 여성농민대회”를 개최하고, 의료보험 현물납부 투쟁을 전개했다(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2020: 94). 충북 괴산군 농축산물생산자협의회는 “부당의료보험료 시정 결의대회”를 열고 3,000여 명의 서명이 첨부된 시정 요구서와 자진 반납한 의료보험료 고지서 510매를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발송하는 방식으로 정부에 압박을 가했다.61) 농민들은 의료보험 부담을 농가부채와 같은 농촌경제 상황과 연결시켰다. 그것은 “마을마다 의료보험, 집집마다 부채증가”, “껍데기는 의료보험, 알맹이는 의료수탈”, “생색은 정부가, 부담은 농민이”와 같은 구호들로 표현되었다.62)

그림 1.

농민들의 의료보험 운동 구호를 표현한 그림

Figure 1. Illustration Depicting Slogans of the Farmers' Medical Insurance Movement

(「우리가 잘한 일과 잘못 했던 일 –의료보험 개혁 운동을 살펴 보면서-」, 「흙의 소리」 3, 1988년 6월 15일, 2면)

농민들은 의료보험료뿐만 아니라 의료전달체계와 진료권의 강제 구획 문제에도 불만을 표출했다. 정부는 농어촌 의료보험의 의료전달체계를 마련하면서 가입자가 우선 군 내부의 보건소ㆍ보건지소ㆍ보건진료소ㆍ의원 등 1차 요양기관에서 진료를 받고, 인접 시ㆍ군의 2차 요양기관, 도내 대학병원 등의 3차 요양기관으로 단계적으로 거치도록 했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시설도 부족하고 기술도 떨어지는 농촌 보건소ㆍ의원의 실정을 생각하면” 진단이 잘못될까 두렵고, “같은 병으로 1차ㆍ2차ㆍ3차를 거치면서 병원비는 세 번 부담해야 한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63) 의료시설이 부족한 농촌에서 공공보건의료시설 중심의 1차 의료기관을 거쳐야만 하는데, 농민들은 농촌의 1차 의료기관을 신뢰하지 못했다. 인접 지역의 병원도 제한적으로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는 데, 이는 기존의 직장 의료보험에서는 적용되지 않던 원칙이라는 점에서 차별적으로 인식되었다. 직장 의료보험 가입자는 “경기도나 서울 어디서나” 1ㆍ2ㆍ3차 의료기관을 제한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반면 농어촌 가입자는 군 단위로 진료권과 의료전달체계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농촌만 1ㆍ2ㆍ3차로 나누어 자유로운 의료시설 이용을 제한한다”는 차별로 받아들여졌다.64)

진료권 문제가 단순한 행정상의 불편을 넘어 강한 반발을 불러온 데에는 구조적 배경이 있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공공 일차보건의료기관은 양적인 확대와 인력 배치에 그쳤고, 1차 기관과 2ㆍ3차 기관 간의 후송체계나 원칙도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정부가 시도한 농촌의 2ㆍ3차 의료기관 확보책 또한 대도시 개업제한의 실효성 문제, 차관병원 부실운영 등으로 사실상 실패한 상황이었다. 의료 인프라가 도시에 편중된 조건은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진료권만을 행정구역 단위로 강제 구획하자, 농민들은 부족한 의료자원에 대한 접근권마저 행정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로 받아들였고, 도시 직장 가입자와 비교되는 차별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진료권 설정은 의료공급자, 즉 의사집단과의 충돌로도 확산되었다. 초기에는 군 내에서 진료가 어려운 환자들이 인접 2차 진료기관에 가려면 조합에서 임의로 지정한 2차 병원을 이용해야 했다. 조합의 일방적인 선별 지정에 도시지역 의사회는 반발했고, 의료보험 진료를 거부했다. 예를 들어 제주도 의사회는 군의보조합으로부터 받은 요양취급기관 지정증을 반납했고, 경북 칠곡군의 한 농민 또한 대구의 종합병원에서 “군 조합측이 일방적으로 지정한 요양취급기관 지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보험진료를 거부당했다.65) 이에 보사부는 1차 진료기관 범위를 군내의 모든 병ㆍ의원 및 보건기관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조합과 의료단체가 도(道)와 협의하여 인접 시ㆍ군의 ‘동일 생활권’ 내 의원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또한 2차 진료기관은 도내 의료기관 중 1차 및 3차 진료기관으로 지정되지 않은 모든 의료기관과 다른 시ㆍ도 의료기관중 의사회 등 관련단체와 협의하여 지정한 의료기관이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3차 진료기관 또한 대학병원등 대규모 종합병원 중 의료보험연합회가 병원협회와 협의지정토록 했다.66) 이와 같은 변경안을 발표했지만, 농어촌 의보 가입자들이 진료기관 선택권과 진료 지역 범위에서 제도적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진료권 지정은 재정 운영의 합리성 등을 이유로 실시되었지만, 부족한 농촌 의료 인프라 문제를 오히려 부각하고, 행정구역 단위로 농민의 의료 접근권을 일방적으로 한정하는 것의 정당성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건의료운동 단체에서도 의료시설과 의료인력의 대도시 편중현상을 그대로 둔 채 생활권 중심으로 진료권을 제한하고 단계 진료를 강제적으로 규정하여 진료비 청구 증가를 막고자 하는 것이 문제이므로 1ㆍ2ㆍ3차로 제한된 진료권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7)

농민들이 의료보험을 거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의료보험조합의 비민주성과 이로 인한 신뢰 부족 때문이었다.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 단계에서 의료보험조합은 관 주도로 설립되었고, 조합장은 직선이 아닌 임명으로 정해졌다. 의료보험조합 이사 또한 대부분 민정당 인사나 전직 공무원, 군 출신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68) 농민들은 의료보험조합에 ‘농민 수탈 창구’로 전락한 농협ㆍ축협만이 참여하는 것을 볼 때 의료보험조합이 농민의 실질적인 참여를 배제하고 있으며 농민의 의사를 반영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였다.69) 조합이 농민의 건강과 복리 증진보다는 정부 여당의 사후 대책에 목적이 있다고 본 것이다. 김제군 기독교농민회에서는 “농어촌 의료보험은 농민수탈 기관”이라고 주장했다.70)

농민들의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불신은 조합체제 변화 요구로 나타났다. 초기 조합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크게 두 방향이었다. 하나는 개별 조합을 민주화하자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1988년 1월 중순 충북 영동군 농민회에서는 “8만 영동농민의 주장”이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내고, 조합원의 자치적 운영방식으로 조합이 민주화되어야 하며 민정당 전ㆍ현직 간부는 조합 운영위원회에서 즉각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합원의 가입과 탈퇴를 보장하고 조합비 또한 새로 선출된 운영위원과 조합원 대표가 협의하여 결정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공개적 운영, 대표성 확보 등을 통해 기존 의료보험조합을 민주적인 조합으로 운영해나갈 것을 주장하는 흐름이었다.

또 다른 방향은 기존 조합들을 모두 해체하고 통합 일원화 하여 하나의 행정 단위에서 관리하자는 주장이다. 특히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는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 전부터 조합주의로 실시되는 “반농민적 농촌의료보험”을 반대하고 통합주의를 통해 “실질적인 농촌의료보험”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합주의는 “잘사는 사람은 잘사는 사람끼리, 못사는 사람은 못사는 사람끼리 부담하여 의료혜택을 불평등하게 받는 제도”이며 통합주의는 “잘사는 사람은 의료비를 많이 내고, 못사는 사람은 적게 소득재분배 기능을 내면서 의료혜택은 똑같이 받는 제도”로 구분하고, 통합관리로 개편할 것을 촉구했다.71)

농민들이 제기한 여러 쟁점은 의료보험 시범사업 기간동안 목표했던 내용, 즉 지역적 특성에 맞는 보험운영 체계의 개발, 주민 부담능력의 측정과 분담방법 개발, 진료전달체계의 확립, 의료공급의 지역적 분산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시행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이는 보험료 부과의 형평성, 진료권 설정과 단계 진료의 강제, 의료자원의 도시편중, 군 단위 조합의 획일적 설치와 비민주적 운영 등의 문제제기로 드러났다. 주목할 것은 농어촌 의료보험에 대한 농민들의 여러 방식의 항의는 일종의 생존권 투쟁이자 그간의 농촌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서 표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당사자 집단이 의료보장 제도를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농민들의 의료보험 거부투쟁은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만했다.

의료보험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은 농민단체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운동을 전개해나가던 단체들, 농민과 같이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서 다음 보험 대상자가 될 도시빈민단체 등이 결합한 연대운동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농어촌 의료보험 문제에 여러 사회단체들이 결합하면서 농어촌 의료보험 문제는 ‘농어민 건강권’ 차원으로 확장되어 다뤄졌다. 1988년 4월 16일 여러 농민단체와 보건의료 단체, 빈민운동 단체, 진보적인 농어촌 문제 연구소 등이 참석한 농어촌 의료보험 관련 토론회는 “농어민 건강권 확보를 위한 대토론회”라는 제목으로 개최되었다.

개별적으로 제기되던 농민들의 구체적인 불만이 ‘건강권’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은 여러 단체가 공동 주최한 이 토론회를 통해서였다. 그간 농민들이 낸 유인물과 성명서는 보험료와 진료권, 조합 운영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했을 뿐 이를 권리의 언어로 총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농민운동이 여러 사회단체와 연대하는 과정에서 건강을 기본권으로 보는 관점이 전면화되기 시작했다. 건강권 논의는 의료의 사회화 담론과 더불어 1970년대 이후 국내 보건의료 담론에서 이미 제기되고 있었다(정다혜, 2024). 이러한 맥락에서 농어촌 의료보험으로 촉발된 농민 문제는 의료보험이라는 특정 제도에 대한 요구를 넘어 농민이 처한 노동ㆍ생활ㆍ의료의 조건 전반을 권리의 언어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72)

토론회에서 가톨릭여성농민회의 한금식은 건강권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언급하고, 현재 국가의 식량을 책임지고 있는 농민의 건강이 중요하고 보호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저농산물 가격 정책으로 인해 부채에 짓눌려 기본적인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농민들은 병원을 드나드는 것을 사치로 여기게 되어 웬만하면 참고, 진통제로 통증을 달래며 병을 키워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농업이라는 산업 특성상 농민들은 농약중독, 농기계 등으로 인한 재해 사고에도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농민들이 겪는 재해가 농업이라는 직업에 결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노동자들과 달리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농민들이 일종의 직업병처럼 오랫동안 농업에 종사하면서 생긴 육체적ㆍ정신적 장애를 이르는 ‘농부증’을 겪고 있다며 농민들의 열악한 건강 상태를 설명했다.73) 특히 여성 농민들은 이러한 농부증에 더해 잦은 유산과 산후조리로 인한 부인병 등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땅한 치료를 못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농부증과 여성 농민의 건강 문제는 1970년대부터 예방의학계에서 주목해온 것인데, 이 토론회에서 농민 당사자의 언어로 제기된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농민들이 병원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교통이 불편한 현실에서 의료보험에 기대를 걸었던만큼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 이후 실망은 더 크게 다가왔고 “또 한 번 속았구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며, “이제는 속지 않겠다는 결의로” 농민에게 맞는 올바른 의료제도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선언했다.74)

의료인 단체는 의료인의 전문성을 토대로 농어촌 의료보험이 제기한 농어민 건강권 확보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빈민의료협의회의 양요환은 현재와 같은 의료보험 구조에서는 통합일원화 방식이 채택되더라도 농어민의 부담은 과중할 것이며, 보험료 인하와 본인부담금 축소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료의 상품화가 현행 의료제도의 근본문제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한국의 의료가 “농약중독이나 직업병 등 민중이 구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질환에 대한 연구, 투자”보다는 “구매력 있는 계층”의 질환과 ‘사치성 의료’가 더욱 중요시되어 예방보다는 이윤이 보장되는 치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상품화된 의료에 접근성을 높이는 의료보험만으로 농어민의 건강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우선 농어민의 부담을 줄인다는 측면에서 통합일원화 방식을 획득해내어 근본적인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75)

이처럼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와 이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은 보험료 형평성과 같은 재정 문제와 농촌 병의원 시설 확충이라는 의료공급 문제, 의료보험조합의 민주성 문제와 더불어 농어민들이 겪고 있는 고유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료제도의 개선까지 광범위한 의제들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반의 저항이 즉각적이고 산발적인 것이었다면, 점차 전국 단위로 확대해 나가면서 조직적 대응으로 변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이 제기해온 것이 도시보다 몇 배 비싼 보험료, 같은 병으로 세 번 부담해야 하는 진료비, 농민이 배제된 조합 운영과 같이 경험에 밀착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불만들은 ‘건강권’이라는 권리의 언어로, 농민의 노동ㆍ생활조건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건강권이 전면에 등장한 4월의 토론회는 농어촌 의료보험을 둘러싼 사회운동이 본격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서울 종로성당에서 토론회를 마친 후 참가자들은 안국동 민정당 당사까지 행진을 시도하였고,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76) 토론회를 기점으로 농민단체는 전국단위 운동으로 ‘전국의료보험 대책위원회 구성을 위한 소위원회’를 결성하고 매달 1회 신문을 내기로 했다.77) 그 이후 농어촌 의료보험에 대한 대응은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결합한 연대체를 통한 ‘의료보험 시정운동’으로 전개되었다.

2) 의료보험 시정운동의 전개와 농민 건강권 논의의 주변화

1988년 1월부터 의료보험 거부운동을 시작으로 전개된 농민들의 의료보험에 대한 저항은 정치적 국면에 영향을 미쳤다. 그 해 4월 말에 실시된 총선을 앞두고 모든 정당들은 의료보험 문제를 공약했다. 평민당은 농지경작에 따른 철저한 소득비례식 부담원칙으로 의료보험료를 책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고, 통일민주당(민주당)과 민정당, 신민주공화당(공화당)도 의료보험 실시와 농어촌 의료보험 개선을 내세웠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09: 74).

총선 국면에서 정부는 그간의 농민들의 저항을 의식하고, 농어촌 의료보험에 대한 재정지원을 기존 35%에서 50%까지 확대하겠다고 발표하였다.78) 관리운영비를 제외하면 실제 재정지원은 21.5%에서 39.6%로 확대하는 것이었지만 농민들이 요구해온 직장 의료보험과 같은 보험료 50% 지원을 수용한 것처럼 비춰졌다. 하지만 그 달 말에 실시된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수립되었다

총선 3일 후 보건사회부는 장관 직속 자문기관으로 ‘국민의료정책 심의위원회’를 발족하고 조합주의 방식을 전국적인 통합일원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포함한 의료보험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을 맡은 이두호 보사부차관은 “의료보험 제도가 농어민ㆍ도시영세민 등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고 있는” 조합주의 의료보험방식 문제를 비롯해 주요 정책을 백지 상태에서 종합적으로 재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과감하게 기존 정책을 수정ㆍ보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79) 현재 실시되고 있는 농어촌 의료보험뿐만 아니라 이듬해 실시될 도시지역 의료보험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며, 농민들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의 몇 달에 걸친 운동들이 있었기 때문에 농민단체, 빈민단체를 포함한 여러 사회단체들은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한 달 뒤 보사부는 도시지역 의료보험 실시 계획을 발표하면서 당초 방침대로 조합주의로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80)

농민단체를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은 정부가 의료보험제도의 근본적 개선에 의지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보다 전국적이고 집단적 차원으로 의료보험 시정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하였다. 이는 1988년 6월 28일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이하 의보대책위)” 결성으로 이어졌다. 의보대책위는 전국 군단위 의료보험대책위와 농민단체, 보건의료인단체, 빈민단체를 망라한 48개 시민ㆍ사회 단체가 결합한 위원회로서, 의료보장을 주제로 한 최초의 사회운동 단체들의 연대체였다.81) 의보대책위에 참여한 보건의료 단체들은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 초기부터 문제점을 지적하고, 여러 대안을 제시한 바 있었다.82) 도시빈민운동 단체 또한 곧 실시될 도시지역 의료보험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여러 단체들과 연대하여 의료보험 제도를 개선할 필요성이 있었다.

의보대책위는 결성 선언문에서 “우리는 건강한 생활을 보장 받을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무시당한채 의료행위가 상품화 되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현재의 의료보험조합이 가난한 자를 치료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농어민과 빈민을 수탈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료보험제도의 개선을 위해 “광범위하고도 조직적인 통합일원화 쟁취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의보대책위는 조합방식 의료보험제도가 폐지되고 통합일원화를 이루는 것을 “모든 국민의 건강 보장”의 전제로 삼고, 이를 위한 투쟁을 선포했다.83)

4월까지의 단계가 농어촌 의료보험 문제에 여러 단체들이 연대하는 형태였다면, 의보대책위는 농민단체와 도시빈민운동 단체, 보건의료인 단체가 전국민의료보험에 대처하는 성격을 띠었다. 이 과정에서 농어민 건강권은 보편의 건강권으로 조정되었고, 통합일원화로 의료보험제도를 개선한다는 목표가 수립되었다. 여러 부문의 단체가 함께 운동을 벌여나가면서 농촌 의료 인프라의 부족이나 진료권 설정, 농부증과 농업재해와 같이 공통의 의제로 삼기 어려운 농촌 문제는 부차화되었고, 통합일원화 쟁취가 단일 목표로서 강조되었다. 연대체 결성이라는 조건에서 농어민의 처지에 초점을 둔 문제는 운동의 전면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조합 민주화와 통합운영으로 방향성이 나뉘어있던 의료보험조합 운영에 관한 농민들의 주장은 이미 1988년 3월 즈음에는 통합운영 쪽으로 수렴되어 갔다. 개별 조합의 민주화는 134개 군마다 상이한 조건에서 분산적으로 싸워야 하는 의제이지만, 통합일원화는 전국의 농민들을 하나의 구호 아래 결집시킬 수 있는 단일 목표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전국 단위의 연대 운동으로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지역에 기반한 농어촌 의료보험뿐만 아니라 직장 의료보험과 공무원ㆍ교직원 의료보험, 직종ㆍ직업별 의료보험 등 보험료 산출 방식과 이용방식에 차이가 있는 각 집단마다 처해있는 입장이 다른 여러 의료보험들의 문제를 하나로 묶을 전략이기도 했다.

이미 1980년대 초부터 관료집단 내부와 국회, 전국의료보험연합회ㆍ경제단체 등에서 통합주의와 조합주의를 둘러싼 갈등을 거치며 조합주의는 현상 유지의 기득권 중심인 정책으로, 통합주의는 사회보험의 기능을 살려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지만 “정권을 불안정하게” 할 수도 있는 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이광찬, 2009: 72-109). 이 과정에서 통합주의는 단순한 보험 관리방식이 아니라 형평성, 민주화, 사회정의 등의 당시 사회운동의 가치와 구호가 함께 덧붙여진 일종의 가치로 의미화되었다.

통합주의에 대한 학계의 입장차는 뚜렷했다. 7월 들어 사회복지학 교수 11인은 「전국민 의료보험을 위한 통합일원화 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하였는데, 한 달 뒤인 8월에는 보건학ㆍ경제학ㆍ경영학 전공 교수 32인이 「한국의료보험의 발전방향에 대한 제언」을 발간하여, 통합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출했다(이규식, 2000a: 70).

정부는 8월 25일, 국민의료정책심의위원회 주최로 “의료보험 관리체계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각계 연구자 및 관계자 300여 명이 모였고, 의보대책위에서도 농민과 의료인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 공청회에서 서울대 보건대학원의 문옥륜은 조합주의를 옹호하면서 “조합주의 방식이야 말로 가장 민주적인 제도로 급여관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어 보험재정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84) 또한 지금과 같은 이원체계 운영이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며, 무엇보다 “의료보험의 목적은 의료보장에 있지 소득재분배에 있지 않다”면서 “통합일원화 논쟁은 소득재분배 효과라는 허상에 의해 잘못 이끌어져 왔다”고 비판했다. 또한 통합운영은 “지역간 의료 이용도의 차이가 심해 적게 이용하는 농촌주민들이 더욱 불리하다”고 주장했다.85)

이에 대해 한림대 사회복지학과의 차흥봉은 현행 제도는 일본의 잘못된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것이며 조합간 격차로 인해 사회보장제도로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며 “의료보험의 통합방식만이 국민의료의 균점과 부담의 사회적 공정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86) 그리고 의료보험의 일원화 방안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기는 빈부격차의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체제를 유지ㆍ발전시켜 나가자는 사회보장제도의 원리를 제대로 실현해 보자는 것”이라며 통합 필요성을 강조했다.87)

공청회에 참석한 의보대책위 소속 농민들은 질의 시간을 활용해 농촌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조합주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리고 통합의료보험이 이미 1982년에 국회를 통과했던 이력이 있는만큼 국민적 합의에도 도달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통합일원화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8) 농민들은 “없는 농민들끼리 뜯어먹는 조합주의식 의료보험이 아니라 소득 재분배와 건강권의 제도적 보장이 가능한 통합주의식 의료보장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89) 농민단체에서 소득 재분배와 건강권은 통합주의의 언어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의보대책위는 1988년 9월 이후 정기국회를 앞둔 통합일원화 입법운동에 집중했다.90) 농민단체는 의보대책위의 입법운동에 동참하면서도 현장 투쟁을 이어갔다. 농민들에게는 당장의 보험료와 진료 접근이 문제였고, 이에 대응하는 지역별 항의 시위, 집회, 방문투쟁 등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1월에 시작한 투쟁이 여름을 경과하면서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고, 병원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보험료 납부 거부를 중단하고 어쩔 수 없이 밀린 보험료를 한꺼번에 내고 치료를 받는 농민들도 있었다.91) 농촌의 사회정의와 농민 건강권은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적 사회운동으로 확장하는 고리였지만, 입법운동 중심의 의료보험 시정운동 국면에서 농촌 의료 인프라 문제, 포괄적 의미의 농민 건강과 같은 농민에 한정된 문제는 유예되었다. 의보대책위의 입법운동은 현장 중심의 농민들의 운동 동력이 점차 약화되어가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1988년 10월, 의보대책위는 평민당과 민주당이 주장해온 단순통합법안 대신, 의료보험 통합일원화, 소득별 누진율 적용한 보험료 부과, 의료보호와 의료보험의 통합, 10% 이하의 본인부담금, 진료일수 제한 폐지 등을 골자로 한 「국민의료보장법(안)」을 채택하고 국회 입법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92) 운동의 중심이 전문가가 주도하는 입법투쟁으로 옮겨가면서, 운동의 언어와 의제는 더욱 제도 설계의 층위로 집중되었다.

통합주의 입법안은 의보대책위뿐만 아니라 여러 조직들에서 제출되었다. 의협은 관리통합과 더불어 요양기관계약제, 보험수가심의회 신설, 진료비심사원 신설, 의료분쟁보상금제도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의료보험법개정안」을 마련했다(이규식, 2000b: 71). 민주당과 평민당도 각각 의료보험통합법안을 제출하였다. 여러 통합일원화 방안이 제출된 것은 단일한 이해가 모이는 전략이기도 했지만, 상이한 이해들이 만나는 최소공배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에게 통합은 보험료의 형평과 소득재분배를 의미했다면, 도시 빈민들에게는 곧 실시될 도시지역 의료보험의 개선을 의미했다. 반면 의협은 진료비 지불 보장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요양기관 계약제와 진료비 심사기구 통합을 함께 관철시키고자 했다. 농촌 의료 공급의 구조 재편을 요구하는 쪽과 그와 무관하거나 반대하는 쪽에서 모두 관리운영 방식이라는 측면에서는 통합일원화로 이해가 모일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정부는 특별시나 직할시의 지역조합을 1개의 광역조합으로 하는 법안을 제출하였고 민정당 및 공화당 또한 현행 의료보험법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안을 제안하였다. 여러 안들이 제출된 가운데 정기국회에서는 법안 처리에 이르지 못한 채로 임시국회로 넘어갔다. 1989년 2월 10일 임시국회에서 의료보험관리체계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하였으나 역시 의견 일치에 도달하지 못했고, 심의는 또다시 지연되었다.

이러한 국면 타개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이미 1989년 초부터 지지부진한 국회를 비판하며 의료보험 거부 투쟁을 다시 전개하고 있었다. 조합마다 1년 새에 부쩍 오른 보험료에 저항하며 지역별로 의료보험 증 반납, 보험료 납부 거부운동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93) 이러한 상황에서 임시국회까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전국농민협회 소속 농민들은 1989년 2월 24일부터 공화당 당사를 점거하면서 의료보험 수가 인하와 통합법안 통과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94)

농민들의 당사 점거는 야당 합의를 도출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3월 4일, 3개 야당 당수들은 긴급 회동을 갖고 의료보험 통합법안을 비롯한 쟁점 법안들을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89년 3월 8일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서 기존 평민당, 민주당, 정부안, 의협의 발의안을 단일안으로 작성하여 통합일원화 운영과 보험료 누진율 적용 등을 골자로 한 「국민의료보험법」이 상정되었다.95) 그리고 3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여당인 민정당까지 찬성 입장을 표하면서 만장일치로 법안이 가결되었다.

「국민의료보험법」 통과에 가톨릭농민회 등 농민운동 단체들은 지지성명을 냈다. 사회보장에 대해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문제제기를 이루어내고 운동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였기 때문이다. 의보대책위는 새로운 법안이 “국민대다수의 부담을 줄이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한 발자국 진보된 내용”으로 “농어민의 피어린 요구가 어느정도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법안 통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조직적으로 표출되었다.96) 전국의료보험조합은 합동으로 주요 일간지에 통합법안 반대 성명서를 게재하였다. 여러 언론사 또한 소득이 노출되어 있는 봉급생활자와 농민들의 보험료 부담이 오히려 증가할 것이라며 성급한 법안 통과를 비판하는 기사를 냈다.97)

여론을 주시하면서 보건사회부의 문태준 장관은 통합방식 개정에 유감을 표하며 “새 의보법은 일부 농민단체 회원들이 야당 당사를 점거하고 국회상임위원장실에까지 몰려와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의 압력을 가한 끝에 나온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민정당조차 “농민과 저소득층을 위한다는 명분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비판하였다.98)

이러한 갈등 국면에서 3월 16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의료법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이 의결되었다.99) 법안에 대한 반대여론이 비등하고 있고 봉급생활자 및 농어민이 손해를 보게되는 등 시행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이유였다.100) 재의요구안 의결 후에 문태준 장관은 “앞으로 통합주의를 고집하는 사람은 엄중문책하겠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101)

정부의 재의요구안 의결에 농민단체 및 보건의료단체, 그리고 노동단체들은 잇달아 거부권 결정 취소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102) 특히 직장의료보험 가입자인 노동조합들도 “보사부는 근거도 없이 노동조합과 농ㆍ어민을 이간질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직장의료보험 대상자인 노동자도 농ㆍ어민과 함께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103)

결과적으로 3월 24일 노태우 대통령은 끝내 국민의료보험법 등 4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국회에 환부하였다. 임시국회에서는 다시 의료보험 법안을 두고 논의에 들어갔으나, 기존 통합주의 법안을 골자로 하되 경과기간을 다소 연장하는 안과 현행 조합주의 원칙을 당분간 계속하면서 통합의보 시범지역에서 먼저 사업을 실시하자는 안 등을 두고 끝내 절충에 실패하면서 7월 임시 국회로 법안 처리가 넘겨졌다.104) 그러면서 1989년 7월 도시지역의료보험은 예정대로 조합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전국민의료보험 실시 이후에 의료보험 시정운동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도시빈민운동 차원에서도 시정운동이 전개되었고, 농민운동 차원에서도 의료보험 시정운동이 1990년대 초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105) 하지만 전국적 차원에서 의료보험 통합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1990년대 문민정부 집권 이후로 미뤄지게 되었다.

의보대책위를 중심으로 일련의 의료보험 통합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어촌 의료보험 문제는 전국적인 차원의 사회운동 의제로 확장되었다. 의료보험 시정운동 이후 전국민의료보험 실시 국면에서 농어촌의 보건의료 문제는 더 이상 ‘건강권’이라는 포괄적 차원에서는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 농어촌 의료보험을 둘러싸고 제기되었던 농어촌의 보건의료 인력 및 시설 등의 인프라 문제, 진료권 설정이 초래한 의료전달체계의 허점, 농업 종사자로서 겪고 있는 농민의 취약한 건강 문제 등은 본격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의료보험 적용과 보험 재정 운영방식의 문제로 논의가 수렴되었다.

이러한 수렴에는 두 층위의 조건이 작용했다. 하나는 여러 부문의 단체가 연대하는 과정에서 공통의 의제가 요구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의료보험의 관리운영론 자체가 지닌 한계였다. 공통의제 설정의 한계는 시정운동이 전개되던 당시 운동 내부에서도 감지되었다. 농민들이 제기한 여러 건강 문제가 통합 일원화라는 관리방식의 문제로 좁혀지고 있다는 자기비판이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106) 다만, 이 비판은 통합일원화로의 의제 집중을 ‘선택’에 의한 축소로 보지만, 그러한 집중은 여러 부문의 연대가 성립하기 위해 요구된 조건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의료보험이라는 형식 자체가 지닌 한계였다. 의료보험 관리방식은 재원을 누가 얼마나 부담하고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지, 그 재원으로 이용할 의료가 어디에 얼마나 존재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조합을 통합하더라도 군내에 2차 의료기관이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며, 진료권의 강제 구획이 농민에게 차별로 경험되는 구조도 해소되지 않는다. 농약중독이나 농기계 재해와 같이 애초에 급여의 대상으로 상정되지 않은 건강 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의료보험이라는 제도 형식이 흡수할 수 있는 건강권의 범위는 필연적으로 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두 조건은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짜여 있던 논쟁의 구도 위에서 작동했다. 1980년대 초부터 정부와 조합주의 옹호론자들은 여러 쟁점을 보험 재정의 안정과 수급 효율의 언어로 환원했고, 의협은 진료비 지불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대응하였다. 이러한 구도에서 의료보험 시정운동 또한 형평과 민주, 권리의 언어를 통합주의의 틀로 묶어 표현하였다. 농어촌 의료 문제는 민간 중심의 의료 공급과 중산층부터 확대된 수익자 부담의 의료보험 구조 속에 놓여있던 담론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농민들은 과도한 보험료 부담 해소와 도시 직장가입자와의 형평이라는 요구에 대한 직접적인 해법이자, 134개 군에 흩어진 저항을 하나의 입법 의제로 결집할 언어로서 통합일원화를 능동적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그러한 능동적 과정에서 농촌 고유의 의제인 농민 건강권의 내용은 주변화되었다. 통합일원화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재원의 부담과 배분 문제에 한정되었고, 농촌의 부족한 의료시설과 인력, 진료권 설정이 낳은 접근의 제약, 농업노동에 결부된 건강 문제는 통합일원화의 틀 안에 수렴되지 못한 채 부차적인 의제로 밀려났다. 농어촌 의료보험을 계기로 드러난 농촌 의료의 문제는 제도화의 과정에서 여전한 과제로 남았다.

5. 맺음말

한국 의료보장의 형성 과정은 흔히 1977년 직장 의료보험에서 1989년 7월 전국민 의료보험, 그리고 2000년 통합 국민건강보험으로 이어지는 전국민 의료보장의 압축적 성취 서사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글은 농민들의 요구와 농민 건강권이라는 차원에서 의료보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1988년 농어촌 의료보험 실시와 이에 따른 농민들의 저항, 그리고 의료보험 시정운동은 당사자 집단인 농민이 처음으로 직접 나서 의료제도의 개선을 요구한 사례였다. 그 과정에서 의료보장을 중심으로 연대체가 결성되고 사회 운동이 전개되었다. 농민들의 의료보험에 대한 집단적 저항은 도시-농촌 간 보건의료 인력 및 시설의 격차와 도시민과 농민의 사회ㆍ경제적 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농민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전개될 수 있었고, 농민들의 고유한 건강 문제가 제기되었다.

1970년대 후반 이후의 농촌 보건의료 정책은 일차보건의료 중심의 공공 인력ㆍ시설 확충과 의료취약지구 민간병원 건설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양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농민 신뢰의 확보와 의료시설의 안정적 운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81년부터 실시된 제2종 의료보험 시범사업 또한 만성적 재정 적자에 시달리며 1985년 사업 확대가 사실상 철회되었고 의료보험 확대는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5년 2ㆍ12 총선의 정치적 충격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정권의 위기 속에 1986년 9월 「국민복지증진대책」이 발표되었고, 본격화된 정치적 압박 속에서 농어촌 의료보험은 1988년에 실시되는 것으로 앞당겨졌다. 1988년 농어촌 의료보험은 시범사업의 성과 위에서 체계적으로 마련된 제도라기보다, 1977년 의료보험 실시 이후 심화되는 도-농간의 의료 이용 격차와 축적된 농촌 보건의료의 부진, 그리고 농민들의 사회ㆍ경제적 위기에 따른 저항의 고조라는 상황 속에서 정권의 정당성 확보 과제가 교차하는 가운데 실시된 것이었다.

1988년 1월부터 실시된 농어촌 의료보험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은 즉각적이고 광범위했다. 농민들의 요구는 보험료의 산술적 인하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보험료 부과방식의 형평성, 행정구역 단위로 강제된 진료권 설정에 대한 비판, 군 단위 의료보험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비판, 농촌 의료시설의 절대적 부족 해소, 그리고 농약중독ㆍ농기계 재해ㆍ농부증과 같은 농민 노동ㆍ생활조건에 결부된 고유의 건강 문제를 아우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건강권’으로 묶여 표현된 종합적 요구였던 것이다. 의료보험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한 농민들의 운동은 농민의 건강권 문제로까지 확대되었고, 보건의료단체 및 빈민운동 단체와의 연대로 이어졌다.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의 결성은 그 결실이었다.

의보대책위 결성 이후에는 보험료 부과방식과 관리운영 일원화에 동력이 집중되었다. 농민ㆍ도시빈민ㆍ보건의료인 등 여러 집단의 연대가 성립하기 위해 공통분모 의제가 요구되었다는 점이 직접적 계기였다면, 의료보험이라는 제도 형식이 재원의 배분에는 답할 수 있어도 의료공급의 지역적 분포나 농업노동의 건강 위험에는 답할 수 없었다는 점은 그 구조적 조건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부터 관리방식을 축으로 짜여 있던 담론 지형이 이를 뒷받침했다.

농민 건강권의 대두와 주변화는 의료보험이라는 제도가 1980년대의 농민 문제와 접합되고 분리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농어촌 의료보험은 농민을 처음으로 의료보장의 대상으로 포함한 계기였고 농민 문제를 건강과 권리의 언어로 사고하게 한 국면이었다. 농민들의 의료보험에 대한 저항은 단순한 사회 보장의 측면이 아니라 저곡가와 농가부채, 개방농정과 이농으로 드러나는 농촌 문제 전반의 구조적 문제가 응축되어 표출되는 매개였다. 농민들에게 부당한 보험료는 농촌경제의 위기이자 도ㆍ농 차별의 표지였고, 진료권의 강제와 농촌 병원의 부재는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의료소외를 확인하는 경험이었다. 농부증과 농약중독 등은 농업노동 자체가 초래한 건강 문제임에도 도시노동자들의 산재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던 건강 문제였다. ‘건강권’은 이러한 문제들을 묶어 낸 언어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반복해 제기되어 온 ‘의료균점’의 과제, 곧 의료자원의 지역적 분배와 농민 건강의 보장이라는 과제는 의료보험 관리방식 논쟁에 자리를 내주며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제도적 성취를 위해 택한 방식이 농민들의 문제를 제도의 언어 안으로 좁히기도 한 것이다.

통합관리체제로의 이행은 1990년대 노동운동 진영이 사회연대 성격의 의료보험 운동에 적극 결합하면서 새롭게 의료보험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990년대 의료보험 운동은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의지가 결합되면서 1999년 「국민건강보험법」 제정과 2000년 국민건강보험 출범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90년대 의료보험 운동의 의제가 또 다시 ‘통합 대 조합’의 양자 구도로 수렴되면서 의료자원의 지역적 분배, 농민의 노동ㆍ생활조건에 결부된 건강 문제, 가입자의 자치적 참여와 같은 의제는 의료보험 외부의 의제로 분리되었다.

1988년 농민들이 의료보험을 매개로 제기했던 의료공급의 사회적 균등 분배와 농민 건강의 보장 문제는 오늘날 공공의료와 건강보험, 지역보건의료가 분절된 채로 다뤄지는 정책적 역사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한다. 본 연구는 1980년대 후반을 중심으로 농어촌 의료보험과 시정운동의 맥락에 집중하였지만, 1990년대 전국민의료보험 실시 이후의 농어촌 보건의료 문제는 별도의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이후 농어촌 의료보장의 구조 변동과 농민 건강권 논의의 행방, 통합 건강보험 체제 아래 변화한 도시-농촌의 의료자원 격차 문제, 여성농민ㆍ이주노동자 등 농촌 내부의 다층적 건강권 문제의 역사는 농촌보건의료 문제의 현재적 기원으로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Notes

1)

「전국민 건보 독(獨) 127년... 한국은 12년 걸려」, 『후생신보』, 2009년 6월 26일.

2)

건강권(right to health)은 1946년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서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누리는 것”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과 1966년 사회권규약이 이를 이어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통용된 개념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의료의 사회화 담론과 더불어 건강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는 건강권 논의가 제기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보건의료운동이 본격화되면서 특정 집단의 구체적 요구를 지칭하는 실천적 언어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3)

보건사회부, 「국민보건향상을 위한 의료시혜 확대방안」, 1976. 국가기록원 소장(관리번호: BA0840381).

4)

보건사회부, 「국민보건향상을 위한 의료시혜 확대방안」, 1976.

5)

「박대통령 시정연설 요지」, 『경향신문』, 1977년 10월 4일.

6)

「아산사회복지 25일 발족」, 『동아일보』, 1977년 7월 30일; 「기업이윤을 진료사업에」, 『매일경제』, 1978년 3월 9일; 「신안 대우병원 개원」, 『동아일보』, 1979년 3월 17일.

7)

「81년까지 13개 공단 및 의료취약지구에 병원 25개를 신설」, 『동아일보』, 1977년 4월 30일.

8)

의료취약지구 병원의 경우 병상당 400만 원의 병원 운영자금을 동원하고 군 단위 지역 교통이 편리한 곳에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사람에게 국내 은행융자와 의료장비 도입용 차관을 제공하여 건설하도록 했다. 「천억 융자ㆍ차관혜택 농어촌 민간병원 부실」, 『동아일보』, 1983년 11월 15일. 구체적으로 병원을 건립하고자 하는 사람은 도지사의 단일 추천을 받아 병원설치희망 신청서와 의료법인 설립증서와 병원설치 운영계획서, 지원자금 상환계획서, 해당지역 군수의 의견서를 함께 보건사회부장관에게 제출해야 했다(보건사회부 의정국관리과, 연도미상: 10).

9)

1978년 계획에서 병원건설 예정지로 발표된 ‘의료취약지구’ 12곳은 인제, 양평, 영덕, 의령, 문경, 보령, 정읍, 보성, 하동, 평창, 해남, 함평이었는데, 세부 지역은 이후 타당성 조사를 거치며 일부 변경되었다. 「81년까지 13개 공단 및 의료취약지구에 병원 25개를 신설」, 『동아일보』, 1977년 4월 30일.

10)

「보사부 업무 보고 요지」, 『동아일보』, 1983년 2월 12일.

11)

「마구잡이 「공중보건의」배치 “실적행정”에 의료인력 낭비」, 『조선일보』, 1983년 10월 25일.

12)

「천억 융자ㆍ차관혜택 농어촌 민간병원 부실」, 『동아일보』, 1983년 11월 15일.

13)

「수입 의료기재 세관서 낮잠 3년」, 『동아일보』, 1984년 6월 1일.

14)

「정부지원 농어촌병원 경영난」, 『매일경제』, 1988년 1월 19일.

15)

「경영난 농어촌병원 지원」, 『매일경제』, 1987년 11월 5일.

16)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모델로 설립된 지역 중에 거제는 ‘거제의료보험조합’으로 인가를 받았고, 증평의 경우 메리놀수녀회가 주도하면서 ‘증평메리놀의료보험조합’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옥구 또한 정부 시범사업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옥구청십자의료보험조합’에서 ‘옥구의료보험조합’으로 개칭했다.

17)

정부는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에 보험가입 가구당 급여비 월 100원과 사무비 80원가량을 보조하였는데, 부과된 보험료의 10% 정도였다.

18)

1970년대 인천, 수원, 제주, 영덕, 경주, 동해, 대전, 대구, 옥천 등에서 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었으나 설립인가를 받지 못했다.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한 의료보험조합은 목록에서 제외하였다. 백령의료보험조합은 대한적십자사 주도로 조직된 것으로, 정부 방침에 따라 결성된 것이었다(황병주, 2011: 436).

19)

「의료보험 100인이상 사업체로 확대」, 『동아일보』, 1980년 8월 18일, 7면.

20)

「저소득층 의료혜택 확대」, 『경향신문』, 1980년 8월 18일, 7면.

21)

「농어촌 의보 내년부터 단계실시」, 『조선일보』 1980년 10월 16일.

22)

보건사회부, 「농촌지역 제2종 의료보험 시범사업 실시계획(안)」, 1981. 1. 1쪽. 국가기록원 소장(관리번호: DA0577505).

23)

보건사회부, 「농촌지역 제2종 의료보험 시범사업 실시계획(안)」, 1981. 1. 2쪽.

24)

보건사회부, 「농촌지역 제2종 의료보험 시범사업 실시계획(안)」, 1981. 1. 2쪽.

25)

서울특별시, 직할시 및 제주도는 제외하고 시범사업이 이미 실시되고 있는 도 지역이나 도청 소재지, 신설시 등도 제외하였다. 보건사회부, 「2종 의료보험 추가시범사업계획」, 1982. 4. 2쪽. 국가기록원 소장(관리번호: DA0578524).

26)

보건사회부, 「의료보험의 과제 및 대책」, 1985. 7., 12쪽.

27)

「저소득층 3백만에 「의료보호」」, 『동아일보』, 1985년 6월 8일, 1면.

28)

보건사회부, 「의료보험의 과제 및 대책」, 1985.7., 12쪽.

30)

「저소득층 3백만에 「의료보호」」, 『동아일보』, 1985년 6월 8일, 1면.

31)

「수급 차질이 몰고온 소값파동」, 『동아일보』, 1985년 12월 24일, 5면. 1986년 3월 11일 영농후계자 오한섭은 소값 폭락으로 빚을 지자 “정부의 소 수입으로 농민들이 죽어간다. 정부가 농민의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하였다. 「“소파동때 빚 아직도 못같아. 과다도입 장본인 문책해야”」, 『동아일보』 1988년 3월 22일, 11면.

32)

「전대통령 국정연설 전문」, 『경향신문』, 1985년 1월 9일, 4면.

33)

「도표로 본 88년 복지한국. 민정당, 정책 목표ㆍ국민생활의 비전 제시」, 『매일경제』, 1985년 1월 17일, 3면.

34)

「선거공약, 여(與) 생활향상ㆍ야(野) 정치 역점」, 『경향신문』, 1985년 1월 26일, 3면.

35)

「제12대 국회 제125회 제14차 국회본회의」, 『국회회의록』, 1985.5.30.; 「제12대 국회 제128회 제15차 국회본회의」, 『국회회의록』, 1985.10.26.

36)

「저소득층 3백만에 「의료보호」, 『동아일보』, 1985년 6월 8일, 1면; 「「의료부조제」 내년실시」, 『조선일보』, 1985년 11월 6일, 11면.

37)

「86년도 국정연설」, 1986.1.16., 대통령기록관 웹사이트. https://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 검색일: 2026. 4. 21.

38)

「전국민의보 89년 실시」, 『조선일보』, 1986년 7월 2일, 1면.

39)

「의료보장세 신설방침」, 『경향신문』, 1986년 7월 17일, 1면; 「의료보장세냐 의보일원화냐」, 『동아일보』, 1986년 7월 30일, 9면.

40)

「하계 특별기자회견」, 1986.8.11. 대통령기록관 웹사이트. https://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this_id3. 검색일: 2026. 4. 21.

41)

「의원개업 신고제 허가제로 바꾼다」, 『경향신문』, 1986년 9월 30일, 11면

42)

「의보일원화 논의 “진통”」, 『매일경제』, 1986년 9월 13일, 11면.

43)

「전문의와 의료제도」, 『조선일보』, 1986년 10월 3일.

44)

「전문의 지방도시 근무 의무화 88년부터‥‥신고제서 허가제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1일 11면.

45)

「39개군에 민간병원 88년까지 유치」, 『경향신문』, 1986년 10월 23일, 7면; 「39개군 민간병원 유치」, 『매일경제』, 1986년 10월 23일, 11면.

46)

「제동많아 변질잦은 기획원정책」, 『조선일보』, 1986년 11월 2일, 3면.

47)

「의보, 조합 독립운영제 확정」, 『조선일보』, 1987년 2월 18일, 1면.

48)

「선행여건의 선결을」, 『조선일보』, 1987년 2월 18일, 3면.

49)

「89년 전국확대 「방향설정」을 위한 긴급 좌담 - 의료보험, 「통합」이냐 「조합」이냐」, 『동아일보』, 1987년 2월 21일, 9면.

50)

「민정, 농어촌의보 방법 토론회」, 『조선일보』, 1987년 2월 28일, 1면.

51)

「지역의보 「조합운영」 확정」, 『동아일보』, 1987년 4월 20일, 1면.

52)

상주농민회, 「굳세게 전진하자! - 상주 농민회 창립선언 -」, 1987.2.2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213853).

53)

「농촌의료실정과 농촌의료보험제도」, 『농민신문』, 1987년 7월 10일.

54)

「대권주자 군중집회 공약대결」, 『동아일보』, 1987년 10월 17일, 1면; 「우리는 공약(公約)ㆍ저쪽은 공약(空約) 뜨거운 공방」, 『경향신문』, 1987년 11월 26일, 3면.

55)

「농어촌의보 부실화 우려」, 『동아일보』, 1987년 10월 5일, 11면.

56)

「농촌의료실정과 농촌의료보험제도」, 『농민신문』, 1987년 7월 10일.

57)

「너무많은 농촌의보료 형평원칙 어긋난다」, 『조선일보』, 1988년 1월 27일, 9면.

58)

「의보한달... 농어촌이 앓는다」, 『동아일보』, 1988년 2월 1일, 11면; 「농어촌의보 “중증열병”」, 『매일경제』, 1988년 2월 1일, 11면.

59)

「의보한달... 농어촌이 앓는다」, 『동아일보』, 1988년 2월 1일, 11면.

60)

「전국도처에서 부당 의료보험 거부대회 열려」, 『농민신문』, 1988년 3월 25일.

61)

괴산 농축산물생산자협의회ㆍ부당의료보험 시정대책위원회, 『부당의료보험소식』 제2호, 1988.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864557).

62)

화성군 농민협회, 「호외: 농촌의료보험은 불공평하다!」, 198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861422); 「농어촌의료보험의 문제점과 농민의 대응책은 무엇인가?」, 『농민신문』, 1988년 2월 1일.

63)

화성군 농민협회, 「호외: 농촌의료보험은 불공평하다!」, 1988.

64)

화성군 농민협회, 「호외: 농촌의료보험은 불공평하다!」, 1988.

65)

「농어촌 의보 시작부터 차질」, 『조선일보』, 1988년 1월 6일, 11면.

66)

「1차진료기관 범위 확대」, 『경향신문』, 1988년 1월 7일, 10면; 「농어촌의보 1차진료 인접 시군 병원도 허용」, 『매일경제』, 1988년 1월 7일, 11면.

67)

건강사회 구현 약사협의회 준비위ㆍ기독청년의료인회, 「농어촌 의료보험에 관한 우리의 입장」, 1988. 2. 2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083427).

68)

「농어민의료보험시정운동에 대한 평가」, 1988.10.15. 4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044670).

69)

무안군 의료보험 여성 대책 위원회, 「성명서 – 반농민적 의료보험 제도에 의해 부과된 보험료 납부 거부한다」, 1988. 2. 1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

70)

김제군 기독교농민회, 「지역의료보험 문제있다」[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세상이야기』, 1988.3.25., 48쪽 재수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864068)].

71)

「농촌의료실정과 농촌의료보험제도」, 『농민신문』, 1987년 7월 10일.

72)

농민단체로는 가톨릭여성농민회, 전국농민협회,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가 참석하였고, 건강사회실현약사협의회, 교회빈민의료협의회,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기독청년의료인회, 천주교도시빈민회가 참석하였다. 『농어민 건강권 확보를 위한 대토론회 – 올바른 농어촌 의료보험제도의 쟁취를 위하여』, 1988.4.1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216334).

73)

농부증(農夫症, Farmer’s Syndrome)은 장기간의 농업노동으로 인한 요통, 견통, 수족저림, 야간 호흡곤란 등의 복합 증상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예방의학계를 중심으로 농촌 주민의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지표로 활용되었다(남택승, 1976; 맹광호, 1980; 문강 외, 1993).

74)

한금식, 「농촌현실과 농민건강」, 『농어민 건강권 확보를 위한 대토론회 – 올바른 농어촌 의료보험제도의 쟁취를 위하여』, 1988.4.16.

75)

양요환, 「현행 의료제도의 문제점」, 『농어민 건강권 확보를 위한 대토론회 – 올바른 농어촌 의료보험제도의 쟁취를 위하여』, 1988.4.16.

76)

유남선 구술(윤충로 외, 2023: 37).

77)

「우리가 잘한 일과 잘못 했던 일 –의료보험 개혁 운동을 살펴 보면서-」, 『흙의 소리』, 1988년 6월 15일, 2면.

78)

「농어촌의보 50%지원」, 『동아일보』, 1988년 4월 2일.

79)

「의보 전국통합 일원화추진」, 『동아일보』, 1988년 4월 30일, 11면. 「“의료보험 빈곤층이 더 불리”」, 『한겨레』, 1988년 6월 30일, 7면.

80)

「도시지역의보 내년 7월 실시」, 『조선일보』, 1988년 5월 29일, 15면.

81)

참여단체는 한국가톨릭농민회, 가톨릭여성농민회, 전국농민협회,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8개 도 집행위원회, 37개 군 의료보험대책위원회, 건강사회실현약사협의회, 교회빈민의료협의회, 기독청년의료인회, 청년치과의사회, 보건과사회연구회, 연세민주치과의사회, 천주교도시빈민회 등이었다.

82)

건강사회구현약사협의회와 기독청년의료인회는 1988년 2월에 “농어촌 의료보험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여 의료보험조합 해체와 통합관리, 도시근로자 기준에 따른 보험료 산정, 1ㆍ2ㆍ3차로 제한된 진료권 철회 등을 주장했다(건강사회구현 약사협의회 준비위ㆍ기독청년의료인회, 「농어촌 의료보험에 관한 우리의 입장」, 1988.2.24.). 1987년 11월에 결성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는 농어촌의료보험 문제가 농민들의 보험료 부담 문제를 인식시키는 데에는 기여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보험시행의 틀을 파악하지 못해 취약한 의료시설과 인적자원, 의료전달체계 구축의 의미와 문제점 등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대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일간지에 비친 보건의료소식」, 『인의협 회보』, 1988.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565206)].

83)

전국의료보험 대책위원회, 「선언문 –전국의료보험 대책위원회를 결성하며-」, 1988.6.2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206291).

84)

「의료보험 공청회 양측 주장 팽팽」, 『동아일보』, 1988년 8월 25일, 11면.

85)

「의료보험 공청회 ‘현행방식지지’ㆍ‘통합 일원화’ 맞서」, 『한겨레』, 1988년 8월 26일, 7면.

86)

「의료보험 공청회 양측 주장 팽팽」, 『동아일보』, 1988년 8월 25일, 11면.

87)

「의료보험 공청회 ‘현행방식지지’ㆍ‘통합 일원화’ 맞서」, 『한겨레』, 1988년 8월 26일, 7면.

88)

1980년대 초 보건사회부와 민정당이 마련한 통합법안은 국회 논의 단계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본고 2장 참조). 농민들의 이 발언은 사실 확인이라기보다, 당시 운동 진영에서 통합 의제가 이미 정치적 승인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득재분배 통합일원화 의료보험을” -보사부주최 공청회에서 농민들 강력주장」, 『농민신문』, 1988년 9월 5일, 1면.

89)

「우리가 잘한 일과 잘못 했던 일 –의료보험 개혁 운동을 살펴 보면서-」, 『흙의 소리』, 1988년 6월 15일, 2면.

90)

의보대책위 내부에서 통합일원화와 조합주의 논쟁에서 벗어난 새로운 의료보장 방식 도입이 제안되기도 하였다. 인의협에서는 조세를 재원으로 하는 일원화된 의료보장방식을 제안했다. 인의협 산하 의료보험 소위원회의 조흥준은 1980년 이래로 진행된 소위 ‘조합’, ‘통합’ 논쟁이 농어촌 지역의료보험을 계기로 재연되고 있지만 많은 논점에도 불구하고 쟁점과 논리가 큰 차이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현재의 논쟁에서는 의료보호에 대한 언급도 없고 한국의 사회ㆍ경제ㆍ정치적 조건에 대한 검토에 기반한 장기적인 대안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조흥준, 「한국 의료보장이 나아갈 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강한 삶을 위한 의료제도-의료보장과 의료보험 심포지엄 자료집』, 1988.9.3., 25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052566)].

91)

유남선 구술(윤충로 외, 2023: 47-48).

92)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 「국민의료보장법(안) 채택 대회」, 1988.10.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00966445).

93)

「‘농촌의료보험 거부’ 재연 조짐」, 『한겨레』, 1989년 2월 9일, 11면.

94)

「당사농성잇달아 곤욕」, 『경향신문』, 1989년 2월 28일, 3면; 「농촌 의료보험수가 인하 촉구」, 『한겨레』, 1989년 3월 1일, 11면.

95)

법안에는 의보대책위에서 주장해온 보험료의 누진적 적용, 지역의보 피보험자의 소득에 따른 차등부담, 상병수당, 건강진단의 보험급여화 등이 포함되었고, 민간의료기관의 계약제, 보험수가조정위원회 설치, 보험급여비용심사원 설치 등 의협의 의견도 반영되었다.

96)

「“의보법 농민입장 반영”」, 『동아일보』, 1989년 3월 10일, 15면.

97)

「「숨은부자」 보험료 봉급자가 낼 판」, 『동아일보』, 1989년 3월 9일, 3면; 「의보법 개정안의 문제점」, 『조선일보』, 1989년 3월 9일; 「새 의료보험법안 파문」, 『매일경제』, 1989년 3월 10일, 3면. 통합방식에 긍정적인 기사에서도 이번 법안 처리를 두고 충분한 공시나 검토기간, 여론 수렴 없이 정치인들이 인기영합적으로 신중하지 못하게 통과시켰다고 평가하였다. 「입법권능과 인기영합」, 『경향신문』, 1989년 3월 10일, 2면.

98)

「“의보법 농민입장 반영”」, 『동아일보』, 1989년 3월 10일, 15면.

99)

이 국무회의에서는 국민의료보험법 외에도 지방자치제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조합법 등에 대한 재의요구권이 의결되었다.

100)

「통합의보 사실상 폐기」, 『매일경제』, 1989년 3월 17일, 15면.

101)

김동권, 「의보법안 합의와 거부」, 『매일경제』, 1989년 3월 21일, 3면.

102)

「정부 거부권 결정 취소를, 농민ㆍ의사ㆍ약사 10개단체」, 『한겨레』, 1989년 3월 19일, 11면.

103)

「통합의보 거부땐 항의운동, 병원ㆍ사무금융ㆍ보험 노련」, 『한겨레』, 1989년 3월 25일, 11면.

104)

「보안ㆍ노동법 등 절충실패」, 『동아일보』, 1989년 5월 25일; 「「중진회의 논의 주요법안 쟁점 점검」, 『한겨레』, 1989년 5월 25일.

105)

부여군 농민회 의료보험대책위원회, 「부여군농민회 의보대책위원회 결성하다」, 『의료보험시정운동』, 1991.1.1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815629); 아산온양농민회, 「농민 여러분! 의료보험 현물납부와 야적투쟁에 동참합시다」, 1992.12.1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등록번호; 00801135).

106)

「농어민의료보험시정운동에 대한 평가」, 1988.10.15. 5쪽. 저자가 불명확한 이 글은 인의협 소속 고경심이 쓴 것으로, 이듬해 출판물로 간행되었다(보건과사회연구회, 『한국의료보장 연구』 (청년세대, 1989)에 재수록되었다. 글에서는 “농민의 열악한 건강 상태에 대한 문제 제기, 의료시설의 불균등 분포,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비판, 농약중독, 농부증, 농업재해 등의 많은 문제제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수용하지 못하고 의료보장의 차원에 국한시켜 통합일원화 보험체계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인양 오도”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오히려 의료보험 시정운동이 “농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의 열기를 제도틀 속에 가두어 냉각시킨 격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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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농민들의 의료보험 운동 구호를 표현한 그림

Figure 1. Illustration Depicting Slogans of the Farmers' Medical Insurance Movement

(「우리가 잘한 일과 잘못 했던 일 –의료보험 개혁 운동을 살펴 보면서-」, 「흙의 소리」 3, 1988년 6월 15일, 2면)

표 1.

1970년대 제2종 의료보험조합 현황(1978년 기준)18)

Table 1. Status of Type II Medical Insurance Cooperatives in the 1970s (as of 1978)

도별 조합명 인가일자 가입현황 (명) (1976년 12월 현재)
부산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 1969. 10. 1. 19,255
전북 옥구청십자의료보험조합 1973. 10. 10. 6,974
강원 춘성의료보험조합 1974. 6. 5. 7,132
경남 거제의료보험조합 1974. 9. 20. 4,077
경기 백령의료보험조합 1974. 12. 6. 9,990
강원 영동의료보험조합 1975. 2. 10. 4,947
충북 증평의료보험조합 1975. 7. 28. 1,434
충남 삼화의료보험조합 1977. 8. 13. 3,500
계 8개 조합 57,309

표 2.

조합별 재정현황(1985년 4월말 현재)

Table 2. Financial Status by Cooperative (as of end of April 1985)

구분 계 1차
2차
홍천 옥구 군위 강화 보은 목포
보험료(A) 11,685 2,320 1,701 1,175 2,052 1,268 3,169
급여비(B) 17,380 3,252 2,510 1,655 2,846 1,742 5,375
적자(A-B) △5,695 △932 △809 △480 △794 △474 △2,206
재정대여(C) 3,874 675 642 341 504 251 1,461
실 미지급액(A-B+C) △1,821 △257 △167 △139 △290 △223 △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