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약원방(御藥院方)』의 간행과 원대 관방 의학의 변화†
The Publication of Yuyaoyuanfang (御藥院方) and Transformations of Yuan Official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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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Mongol conquest of Eurasia in the thirteenth century facilitated the movement of people, materials, and knowledge across vast regions. Medicine was no exception. In response to the practical demands of military campaigns and imperial rule, Mongol rulers actively incorporated medical personnel and knowledge from conquered regions. After the fall of the Jin dynasty, North Chinese medical institutions and traditions became an important foundation for the organization of medical administration under Mongol rule. This article examines the Yuyaoyuanfang (御藥院方) as a key text that reveals the character of official medicine in the Yuan dynasty and the reconfiguration of Jin-Yuan medical knowledge.
Although the structure of the Yuyaoyuanfang closely resembles that of the Taiping huimin heji jufang (太平惠民和劑局方), the representative official formulary of the Northern Song, its prescriptions were not simply copied from the Song model. Rather, the text selectively incorporated and reorganized prescriptions from the Jin imperial pharmacy, Song and Jin medical formularies, Jin-Yuan physicians, Daoist secret recipes, and the practical needs of Yuan court medicine. The independent section on facial and cosmetic preparations, “Ximian yaomen” 洗面藥門, further shows that Yuan official medicine included not only the treatment of disease but also concerns with bodily care, beauty, and longevity.
An examination of the prescriptions, especially those in the “Zhifeng yaomen” 治風藥門, shows that the Yuyaoyuanfang incorporated earlier medical traditions while also reflecting new developments in North Chinese medicine after the Jin period. Some prescriptions are related to texts such as the Shengji zonglu (聖濟總錄), while others show connections with Jin physicians such as Liu Wansu and Zhang Yuansu. At the same time, many prescriptions preserve authoritative names from earlier formularies while altering their ingredients, indications, or methods of preparation. These cases of identical names with different formulas demonstrate that the Yuyaoyuanfang was not a mere compilation of earlier medical texts, but an official formulary that selectively transformed and standardized medical knowledge within the institutional framework of Yuan official medicine. In this sense, the Yuyaoyuanfang is a representative source for understanding the transmission, selection, and reconfiguration of East Asian medical knowledge under Mongol rule.
1. 머리말
13세기 몽골제국의 건설은 유라시아 규모의 광범위한 인적ㆍ물적 교류와 지식의 이동을 촉진시켰다. 특히 몽골 통치하에서 각 지역의 의학 지식의 전파ㆍ교류 및 집적의 양상이 나타났다. 몽골의 군사적 팽창에 수반하여 사상자 치료를 위한 의술은 몽골제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몽골은 생태 환경이 상이한 복속 지역의 각종 질병에 직면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의료 지식을 중시했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약용 식물의 활용, 샤머니즘적 치료 의식 등 고유의 치료 방식이 있었지만, 정복 전쟁 과정에서 접한 중국, 티베트, 인도, 위구르, 시리아, 아랍 등의 다양한 의학 전통 또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러한 지식은 몽골인들의 정복 활동 과정에서 제국에 편입된 의료 인력을 통해 전해졌다. 몽골에서 ‘오토치(otochi)’로 불렸던 의료 인력들은 칭기스칸 가문의 주치의로서 군사 원정에 동행했고, 자신들의 진단, 치료법, 약을 가지고 제국 내에서 빈번하게 이동했다(올슨, 2025: 224-225).
몽골이 초원 지역을 넘어 가장 먼저 마주한 적대 세력은 화북 지역과 일부 초원 지역을 지배하에 두고 있던 금(金)이었다. 몽골과 금의 전쟁은 1211년 몽골군의 본격적인 남하로 시작되었으며, 1215년 몽골군이 중도(中都)를 함락함으로써 전세가 기울었다. 이후 금은 개봉으로 남천하면서 저항했으나, 결국 몽골의 지속적인 공세로 1234년에 멸망했다. 당시 금의 멸망을 가져온 것은 몽골군의 공세만이 아니었다. 역병(疫病)이 곳곳에서 발생해 금의 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1232년 3월 금의 피난 정부가 수도로 삼았던 변경(汴京)에서는 큰 역병이 돌아 사망한 자가 백여만에 달했으며1), 여기에 기근까지 더하여 백성들의 생존에 큰 위협이 되었다. 다음 해 몽골군이 변경을 포위했을 때, 기근과 역병으로 사망한 자가 백여 만에 달했다고 전해진다.2) 전염병의 위험에 몽골군도 예외 없이 노출되었다. 1241년 금의 잔여세력을 소탕하던 경조행성(京兆行省) 다루가치 추르차카이[純只海]가 군사를 이끌고 회주(懷州) 지역에 이르렀을 때 ‘대역(大疫)’을 만나 병사들이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전해진다.3) 당시 수춘(壽春)(현안휘성 소재) 지역을 포위하고 있던 몽골군의 장수 이정(李楨)은 군대를 성 아래에 오래 주둔시키면, 여름의 비로 인해 역병이 발생하여 불리해질 것이라고 보고하여 군대를 후퇴시키기도 했다.4) 우구데이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의료 인력을 확보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금에서 활동하던 의료 인력들을 모아 기존 금에 있던 관직인 태의대사(太醫大使)직에 임명하게 했으며5) 이들을 통해 금의 의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금대는 의정 제도, 의학교육, 민간 의학 전반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금의 의학은 이론과 임상 치료를 풍부하게 만들어 후대 의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원ㆍ명ㆍ청대로 이어지는 의학교육과 의사 제도의 전환점이 되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금대에는 소위 ‘금원(金元) 사대가’로 불리는 의학자들이 활동하여 금대 의학을 기초로 원대 의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의학 이론은 『내경(內經)』과 『상한론(傷寒論)』의 기본 및 임상 이론을 토대로 각의가(醫家)들이 임상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더하여 장부학설(臟腑學說), 육음병변설(六淫病變說), 약리학설(藥理學說) 등의 분야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후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홍원식, 2001: 295-297).
몽골 카안의 후원하에 몽골제국의 의관(醫官)에 임명된 금의 의료 인력들은 보다 체계적인 의정 제도 수립에 기여했고, 1241년에 태의원(太醫院)이 설립되었다.6) 다음 해 의관들은 금대의 의서를 참고하여 제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의서를 신속히 간행했는데, 『어약원방』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어약원(御藥院)은 금의 어용(御用) 의약 관리 기구로 의서의 명칭과 이에 수록된 금대의 방제를 통해 금대 어약원의 의방(醫方)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몽골 제국에서 『어약원방』은 몽골 황실뿐 아니라 제국의 지배층과 의료인들 사이에서도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25년 후인 1267년 쿠빌라이의 명으로 태의원 소속 허국정(許國禎)은 몽골제국의 성립 이후 축적된 의학 지식을 반영하여 『어약원방』 증보(增補) 본을 간행했다. 『어약원방』은 내과, 외과, 부녀과, 아동과, 오관과 등 병증에 따라 분류하여 각종 질병에 처방된 약의 제조법과 효능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어 원제국 전기 의학 지식의 축적과 발전 현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어약원방』은 동아시아 의서의 편찬에도 영향을 끼치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1406년 명에서 간행된 『보제방(普濟方)』뿐 아니라 조선에서 편찬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류취(醫方類聚)』에도 『어약원방』의 처방전이 수록되었다. 고려기에 처음 소개된 『어약원방』은 세종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주목되었다(三木榮, 1956: 259). 당시 여러 제도 정비를 위해 상정소(詳定所)에서 원ㆍ명대 서적을 비롯한 중국의 서적 목록을 왕에게 올릴 때, 『어약원방』은 『의학직지(醫學直指)』, 『맥찬도(脈纂圖)』, 『맥직지방(脈直指方)』, 『화제방(和劑方)』을 비롯한 25종의 의서에 포함되어 있었다.7)
이후 조선에서는 이를 간행하였는데 15세기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사신간어약원방(癸巳新刊御藥院方)』과 16세기 중종(中宗) 연간에 간행된 『신간혜민어약원방(新刊惠民御藥院方)』이 있으며 각각 갑진자본(甲辰字本)과 을해자본(乙亥字本)으로 알려져 있다. 『어약원방』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1315년 이전이지만, 당시의 판본은 남아있지 않다(楊東方, 2024: 4). 이후 1798년에 조선에서 전해진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계사신간어약원방』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관정본(寬政本)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일본 정가당미술관(靜嘉堂美術館)의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신간혜민어약원방』이 있으며 정가당본(靜嘉堂本)으로 불린다. 이는 청대 장서가인 육심원(陸心源)의 장서였던 것으로 이후 일본에 유입된 것으로 파악되며(송지청ㆍ엄동명, 2020: 35), 을해자본과 동일하게 20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을해자본이 같은 계통의 원대 판본을 바탕으로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어약원방』의 여러 판본이 조선과 일본에서 수 세기에 걸쳐 간행된 것은 명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서도 여기에 담긴 의학을 중시했음을 의미한다.
『어약원방』은 현재 서로 다른 원대 판본에 연원을 둔 것으로 보이는 4종의 판본이 남아 있다. 조선과 일본에서 각각 제작된 『계사신간어약원방』 갑진자본과 관정본은 모두 11권으로 동일하며, 후대에 간행된 관정본이 간행 형태와 내용 뿐 아니라 오류까지 갑진자본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관정본이 조선의 갑진자본을 저본으로 간행되었다는 견해가 있다(송지청ㆍ엄동명, 2020: 34). 또한 『신간혜민어약원방』 을해자본과 정가당본도 모두 2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일한 계통의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8)
『어약원방』은 의학 지식의 전승과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되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어약원방』은 당대의 풍부한 임상의학을 바탕으로 편찬되었으며, 몽골 통치자에게 진상된 각종 진귀한 약재들을 반영하고 있고 다양한 방제와 복용 방식이 정리되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대대로 전해졌다가 소실된 『비보방(秘寶方)』, 『필용방(必用方)』 등의 일부 방제를 수록하고 있어 의학 지식 보전의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명청(明淸)대 간행된 의서 『의학입문(醫學入門)』, 『의종금감(醫宗金鑑)』 등의 의서에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의학 지식의 후대 전승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周益新, 2007). 이렇듯 원대 의학 지식의 유통과 전승 측면에서 『어약원방』의 중요성이 주목되었고, 이후로도 판본 현황과 유통에 관한 연구들이 이어졌다(楊東方, 2024; 徐麗麗, 2023; 송지청ㆍ엄동명, 2020; 엄동명, 2012; 周益新, 2007). 또한 『어약원방』에 대한 판본 검토를 비롯하여 관련 의서들에 대한 문헌학적 연관성을 살펴본 연구도 있다(覃想佩, 2024). 이외에도 『어약원방』의 특정 지식에 주목한 연구들이 있다. 『어약원방』의 편목을 구성하고 있는 담음문(痰飮門) 혹은 인후구치문(咽喉口齒門), 세면약문(洗面藥門) 등의 특정 질환 및 관련 의방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송지청, 2020; 張健華ㆍ寥氷靈, 2013; 엄동명, 2012; 任娟莉ㆍ 高少才, 2010). 이외에 몽골제국 시기 약재 교류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어약원방』에 수록된 외래 향약(香藥)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王亞芬, 1995; 求芝蓉, 2020; 조원, 202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대 간행된 『어약원방』은 금원대 의학의 풍부한 의학 지식을 담고 있으며 동아시아 의학 지식의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어약원방』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그 성격에 대한 규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몽골제국 시기 의서로서 이 의서가 담고 있는 시대적 의미와 특징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다. 본 연구에서는 금원 의학 지식이 응축된 산물이자, 원대 관방 의학의 특징을 드러내는 의서로서 『어약원방』을 검토하여 그 성격과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9) 이를 위해 우구데이 시기부터 몽골 통치자들의 의학에 대한 관심과 의정 제도를 살펴보고, 관방 의서인 『어약원방』에 수록된 의학 지식의 연원과 그 특징을 검토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어약원방』 전편의 모든 방제를 계량적으로 전수 대조하는 방식보다는, 치풍문을 중심으로 치상한문과 세면약문 등 관련 편목의 구성과 수록 방제의 특징, 아울러 방제 내부에 남아있는 금대 연호ㆍ인명ㆍ조제 등의 기록을 함께 검토했다. 이를 통해 이 의서가 어떠한 의학적 전통을 선별하고 집성하였는지를 해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아울러 몽골제국 시기 황실에서 이루어진 정복 지역 의학 전통과 그 지식에 대한 선별과 수용에 대해서도 함께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몽골제국 시기 동아시아 의학의 일면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원 제국 의정 제도의 정비와 의적(醫籍)의 정리
우구데이 시기 금의 멸망으로 화북에서 몽골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의료 기구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는 금대 화북 지역에서 의업(醫業)에 종사하는 자들을 모아 태의라는 직책을 두고 이들을 총괄하는 태의대사(太醫大使)를 임명하여 태의원의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10) 그에 앞서 연경(燕京)을 비롯한 화북 10로(路)에는 혜민약국(惠民藥局)을 세웠다. 혜민약국은 백성에게 약을 제공하고 빈민(貧民)을 치료하는 기구였을 뿐 아니라, 관전(官錢)을 출자해 운영하고 약재를 판매하거나, 약을 구비하는 일종의 관영 약국이었다. 이때 태의원의 의관들이 혜민약국을 관할했으며 금대 화북 지역에서 의업에 종사하던 의원들이 두루 중용되었다(조원, 2021). 이처럼 우구데이 시기부터 몽골 조정이 황실 의정과 정복 지역의 의료 인력 관리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세계를 정복했지만, 그들의 군사적 팽창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질병의 관리는 상당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몽골제국에서 의정 제도가 완비된 것은 쿠빌라이 통치 시기였다. 1260년 쿠빌라이가 제위에 올라 중국에 기반하여 중원의 농경지대와 몽골 초원지대를 통합하는 제국을 이상으로 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해갔다. 그는 선대 몽골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의정을 중시하여 태의원을 세우고 북중국의 의학 지식 및 의료 인력 관리를 지시했다. 제위에 오른 직후인 1262년 각 로에 의학을 세웠고, 대도(大都)와 성도(成都)에 혜민약국을 설치하여 대도시를 중심으로 의료 서비스 제공과 더불어 약재를 판매하는 영리사업을 진행했다. 1266년에는 태의원에 명하여 각 로의 의호(醫戶)와 혜민약국을 관할하게 했다. 의호는 몽골제국 시기 직종, 종족 등을 반영한 호적 관리제도인 “제색호계(諸色戶計)”에 포함된 각 지역의 의료 종사 인구이다(劉岳超, 2019; 김대기, 2017: 461-462). 태의원은 금대 의학 기구를 답습한 것이었지만 그 위상과 기능에서 차이가 있었다.11) 금대의 태의 원은 조회(朝會)와 연향(燕享)을 담당하는 선휘원(宣徽院)의 관할하에 있었고, 오직 황실만을 위해 봉사하는 기구로서 의정 전반을 관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위상이 크게 높지 않아 태의원 장관은 정5품(正五品)에 제수됐다. 이에 반해 원 초에 세워졌던 태의원은 지방의 의료 인력 및 교육, 그리고 약재 관리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역의 의정을 관할했다. 1276년에 이르러 쿠빌라이는 이를 우구데이 시기부터 설치되어 황실의 어용 기구 역할을 했던 태의원과 합병했다. 통합된 태의원은 선휘원의 관할하에서 상의감(尚醫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285년 태의원으로 명칭이 복원되었고 정3품(正三品)으로 격상되었다.12) 전국의 의정을 관할하는 행정 기구로서의 태의원은 황실 의료 업무를 전담했던 기존의 태의원과 분리되어 있었으나 이후 신설된 태의원에서 그 기능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합한 것이다.
한편, 1270년 쿠빌라이는 아랍 및 네스토리우스 의학을 포함하는 서아시아 의학을 중시하여 이를 총괄하는 기구인 경사의약원(京師醫藥院)을 설립했고, 이슬람의 천문학과 의약에 해박한 이사 켈레메치(Isa Kelemechi)를 장관으로 임명하여 이 기구를 관장하게 했다(조원, 2021: 41; 김호동, 2006). 이후 이 기구는 광혜사(廣惠司)로 개칭되었으며 태의원과 동일하게 정삼품(正三品)의 기구로서 어용회회약물(御用回回藥物)의 조제 및 처방을 통해 카안의 케식[宿衛]과 대도에 거주하는 자들 가운데 신분이 낮고 가난한 자[孤寒者]들의 치료를 담당했다. 산하에는 대도와 상도에 세워진 회회약물원(回回藥物院)이 있었다.13) 이처럼 원 제국에서 의정은 금에서 계승한 중국 의학과 서아시아 의학의 두 계통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중국 의학을 전담했던 기구가 태의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정 제도 정비의 일환으로 의적의 수집, 정리, 교감은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북송 시기부터 활발히 이루어졌다. 송 황제는 명하여 전국의 의서를 수집하도록 했고,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온 의약 서적들의 교정 작업과 유실된 의적의 정리ㆍ복원이 이루어진 후 판각하여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송 조정에서는 여러 방서들을 편찬했는데 대표적으로 『신의보구방(神醫普救方)』,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간요제중방(簡要濟衆方)』, 『경력선구방(慶曆善救方)』,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 『성제총록(聖濟總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이렇게 간행한 관찬 의서들을 판각하고 반포하여 널리 보급하는 데에도 주력했다(李泰宰, 2006: 128-130).
금은 북송을 멸망시킨 후 의서를 비롯한 대량의 서적들의 관리에 주의를 기울였고, 자연스레 금 조정에서는 북송의 의서와 의학 지식을 수용하게 되었다. 특히 금 조정에서는 전문적인 역사(譯史) 기구, 즉 번역 기구를 두어 의서들을 여진 문자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를 관방의 의학 교재로 활용했다. 북송으로부터 전승한 의학 지식을 토대로 금 조정에서도 침구 의서인 『동인수혈침구도경(銅人腧穴針灸圖經)』을 편찬했고, 북송 말년에 편찬되었으나 간행되지 못했던 『성제총록』을 다시 간행하게 하고 의학 교재로도 보급했다(丹波元簡, 2019: 20). 이외에도 『부광주후방(附廣肘後方)』, 『정화본초(政和本草)』, 『상한직격(傷寒直格)』, 『상한명리론(傷寒明理論)』, 『상한론주해(傷寒論注解)』, 『상한류증(傷寒類證)』 등의 의서들이 간행되고 의학 교재로 활용되었다(劉玉洁, 2023: 28-29).
『비서감지(祕書監志)』에 따르면, 원대 황실과 중앙정부의 문서 및 서적 관리를 담당했던 비서감(秘書監)에서는 모두 14부 171책(冊)의 의서, 8부 152책의 방서(方書)를 소장하고 있었다.14) 이 서적들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떤 책인지 알 수 없고, ‘금과 송으로부터 전해지고 사방에서 구한 서적들’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비서감지』에는 유일하게 한 권의 의서를 기록하고 있는데, 특필(忒必) 『의경(醫經)』13부다. 이는 아랍ㆍ페르시아어로 ‘의학’을 의미하는 ‘ṭibb/ṭabb’을 한자로 음사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지만, 이븐 시나의 『의학 정전(Qānūn fī al-ṭibb)』으로 추정된다(올슨, 2025: 240).
원 조정에서도 의서를 간행했다. 처음으로 편찬된 의서가 방제집인 『어약원방』이었다. 1267년 쿠빌라이는 태의원에 명하여 『어약원방』을 증보(增補)하여 간행하게 했다. 중국 의학에 대한 관심으로 쿠빌라이는 1270년대에 위구르인 안장에게 『난경(難經)』과 『본초(本草)』를 몽골어로 번역하게 했다.15) 1288년 쿠빌라이는 『어약원방』 간행을 주도했던 허국정과 한림승지(翰林承旨) 살리만에게 명하여 각 지역의 의학교수(醫學敎授)들을 모아 『본초(本草)』를 증수(增修)하도록 명했는데,16) 이를 통해 기존에 있던 『본초』라는 의서가 존재했으며 이에 대한 증수본 간행을 명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宮海峰ㆍ包莹, 2022: 66). 이후 원 조정에서 태의(太醫) 선발을 위해 의학 시험이 마련되면서 『소문(素問)』, 『난경』, 『신농본초(神農本草)』, 『상한론』, 『천금익방(千金翼方)』, 『성제총록』을 교재로 채택하여 의학 교본으로 삼았다.17) 이외에 원 중기에는 풍부한 의학 사상과 지식이 반영되어 있는 약선서(藥膳書) 『음선정요(飮膳正要)』가 간행되었다. 이는 1330년 태의원 소속의 홀사혜(忽思慧)가 편찬한 의서로 몽골 카안을 위한 다양한 요리와 요리법들이 소개되어 있으면서 당대의 의학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의 식치(食治) 사상을 바탕으로 1부에서는 양생(養生)의 원리와 금기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2권과 3권에서는 다양한 식재의 효능과 성격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조원, 2017).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원 제국에서도 몽골 통치자들은 의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의정 제도를 정비해갔으며, 그 일환으로 의서의 편찬과 간행을 추진했다. 그러나 전대에 비해 그 수량이 많지 않았으며, 이 의서들은 몽골 통치집단을 위한 황실 의학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 주목된다.
3. 『어약원방』 간행과 편목 체계의 특징
3.1. 쿠빌라이 시기 『어약원방』의 간행과 편찬 목적
1267년 쿠빌라이는 태의원 소속의 허국정에게 명하여 『어약원방』을 증보하여 간행하게 했다. 『어약원방』의 간행을 주관한 허국정은 산서(山西) 강주(絳州) 출신으로 조부(祖父) 대부터 금에서 관직을 역임하면서 대대로 의업에 종사했다. 그는 경사(經史)뿐 아니라 의술에 뛰어났으며 쿠빌라이의 잠저(潛邸) 시기에 발탁되어 후방 부대에서 모든 약을 관리했고 쿠빌라이의 모친 소르칵타니 베키를 비롯하여 쿠빌라이의 병을 치료하여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원사(元史)』에 기록된 한 일화에 따르면, 쿠빌라이가 쿠미스를 과음하자 허국정이 쓴 약을 바쳤지만 이를 거부하여 병이 재발했고, 결국 약의 효능을 진언했던 허국정에게 칠보(七寶)와 말안장을 하사했다.18) 허국정의 어머니 한씨(韓氏) 역시 소르칵타니베키를 모시면서 의술을 행했을 뿐 아니라 각 나라에서 진상한 음식과 술을 관장했다. 쿠빌라이가 즉위한 후 그는 태의원제점(太醫院提點)에 제수되었고, 이후 예부상서(禮部尚書)를 거쳐 한림집현대학사(翰林集賢大學士)의 고위관직에까지 올랐다. 한림학사는 학술 기구인 한림원 관찬 서적의 편찬을 주관하는 직책이었으나, 재직 당시 『본초』 증보본 편찬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통해 여전히 의정에 간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허국정의 역할은 몽골 카안의 핵심 측근 세력인 케식을 연상케 한다. 케식은 몽골제국 시기 카안에게 절대 충성하는 친위 집단으로 기본적으로 칸을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동시에 칸과 관련된 각종 가사 업무도 맡았다. 가령, 카안의 측근에서, 관복(冠服), 궁시(弓矢), 음식(飮食), 문사(文史), 거마(車馬), 여장(廬帳), 부고(府庫), 의약(醫藥), 복축(卜祝) 등을 담당했다.19) 카안의 일상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이들은 칸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제국의 정치, 군사, 외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으며 제국 내에서 카안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엘리트 집단으로 변모해갔다(김석환, 2023: 151-153, 157). 허국정은 북방 한인으로 패망한 금의 관원 가문 출신이었지만, 쿠빌라이와 그 일족에게 의술을 행하여 두터운 신임을 얻고 해박한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원 제국의 의정 제도 정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원 제국 시기 관찬 의서의 간행을 주관하는 데 그가 적임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 제국에서 『어약원방』의 증수본을 간행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한림학사(翰林學士) 고명(高鳴)이 쓴 『어약원방』 서문은 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조(聖朝)는 삼대의 상생양(相生養)의 도(道)20)로서 백성을 어짊과 장수로 이끌었다. 혈(血)과 기(氣)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질병이 없을 수 없다. 이에 의사(醫師)를 두어 의정을 관장하게 했으니 이는 주(周)의 제도를 본받되 더욱 완비한 것이다. 의술이란 원래 효력이 나타난 처방으로 옛 사람이 보물처럼 간직한 것은 더욱이 얻기가 어렵다. 이에 태의제점(太醫提點) 영록(榮祿) 허공(許公)이 두세 명의 동료 관원들과 함께 어약원(御藥院)에서 임인년(壬寅年)에 간행한 방제 의서의 서판(書板)을 가져다가 그 오류를 바로잡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소실된 것을 찾아 덧붙였다. 장차 널리 전파하고 배포하여 사람들이 마치 양의(良醫)를 곁에 둔 것과 같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기울인 정성을 훌륭하다고 여겨 이를 기록하였다. 중경(仲景)의 『상한론』에서 처방(處方)에 관해 논증한 후에, 후세에 이 처방을 의서로 편찬하기를 무려 수백 가에 이르렀으며, 어약원(의 것)에 이르러서는 가장 완비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여러 학파의 장점을 취합하고, 가감하여 선택했다. 탕약의 배합이 고르고 조화로워 조금의 흠결이나 어그러짐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황제내외경(黃帝內外經)』, 『편작팔십일난(扁鵲八十一難)』과 표리를 이루니 그 효과가 어찌 얕겠는가!21)
고명은 『어약원방』 서문에서 편찬 목적과 그 가치를 밝히고 있다. 먼저 『어약원방』의 편찬이 원 제국의 의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고명은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의방들을 찾아내어 이 의서를 정리했고, 이는 장차 널리 전하고 배포하여 의학 지식을 보급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고명은 이 의서의 간행이 표준화된 방제의 배포라는 공적인 목적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몽골 황실 내부에서의 실제적인 필요로 편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이 의서의 편찬 경위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는 태의제점 영록 허공 즉, 허국정이 두세 명의 태의원 관원들과 함께 이를 편찬했다고 하면서 우구데이 시기의 황실 어용 의학 기구 어약원의 방제서를 바탕으로 오류를 수정하고, 새로운 부분을 보완하여 편찬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원대 어약원은 각 지역에서 향공(鄕貢)한 약재와 해외 여러 나라에서 진상한 진귀한 약재를 관리하고 탕약을 조제하고 달이는 일을 관장하는 기구였는데,22) 『어약원방』이 간행될 당시에는 어약원이라는 기구가 아직 설치되지 않았었다. 『어약원방』의 서문에 언급된 어약원은 우구데이 시기 화북에 의정을 정비하던 당시, 금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한 어용 약물 관리 기구였던 것으로 생각되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금대 어약원은 1194년에 세워졌으며 상식국(尚食局)과 함께 선휘원(宣徽院)에 예속되어 황제를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어약원 관원은 황제에게 약을 진상하고 복약을 시중드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의료 행위를 하지 않고, 태의원 의관의 지시에 따라 처방에 맞는 약을 고르고, 탕약을 달여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劉玉洁, 2023: 13). 우구데이 시기의 어약원도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기구의 정비보다 황실 전용 의방의 구비가 더 시급했고, 이에 따라 금대 황실의 비방을 수록하고 있는 의서를 보완ㆍ증보하여 간행하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242년 처음으로 간행된 『어약원방』은 금대 어약원에서 축적된 황실 의방과 비방을 바탕으로 한 의서였을 것이다. 이후 1267년 간행된 증보본은 원 제국 이후 새롭게 축적된 의방과 임상 경험을 추가하여 원 제국의 현실과 수요에 맞게 편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이 의서에 영향을 끼친 주요 의서를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이다. 주지하다시피 『상한론』은 후한 말에 편찬된 의서로 외감열성병(外感熱性病)과 각종 내과 잡병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병증 확인 방식과 치료법이 수록되어 있으며 후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송대에 이르기까지 임상 지식이 축적되어 질병의 발생과 발전 과정에 대한 인식과 치료 및 방제의 측면에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상한론』을 기반으로 임상의학의 지식이 축적되고, 임상에 편리하도록 이를 정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금원대에도 이러한 경향이 이어졌다. 금원대의 의학 이론의 발전은 고명이 서문에서 언급한 『내경』과 『상한론』의 기본 이론과 임상 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각 의학파들이 각자의 임상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배합하여 계통화함으로써 임상에 적용할 수 있게 했다(홍원식, 2001: 236-237, 297). 고명의 『상한론』에 관한 언급은 이러한 의학 발전의 흐름을 배경으로 한다.
3.2. 『어약원방』 편목 체계의 특징: 『태평혜민화제국방』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어약원방』은 병증(病證)과 질환 부위에 따른 풍부한 방제들을 수록하고 있다. 각 장을 살펴보면 치풍약(治風藥), 치상한(治傷寒), 치일절기(治一切氣), 치담음(治痰飮), 보허손(補虛損), 치적열(治積熱), 치습리(治濕痢), 치잡병(治雜病), 치인후구치(治咽喉口齒), 치안목(治眼目), 세면약(洗面藥), 치창양상절(治瘡瘍傷折), 치부인제질(治婦人諸疾), 치소아제질(治小兒諸疾)의 14문(門)으로 구성되어 있고 치적열과 치습리가 한 권으로, 치안목, 세면약, 치창양상절이 한 권으로, 치부인제질, 치소아제질이 한 권으로 합쳐져서 모두 11권(卷)이다.23) 이렇게 11권 14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에 수록되어 있는 방제의 수를 모두 합치면 1072개이다.24) 『어약원방』의 편목은 병증과 질환 부위 및 대상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이 가운데 치풍약, 치상한, 치일절기, 치담음, 치적열, 치습리, 치잡병은 병증에 따른 분류에 해당한다. 인후구치, 안목, 부인제질, 소아제질은 질환 부위와 환자군에 따른 분류로 송대부터 독립된 의과(醫科) 영역으로 분화되었다. 이처럼 『어약원방』은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오관과(五官科)를 망라하고 있으며 여기에 두발ㆍ피부 관리와 미용에 관한 지식도 포함하고 있다. 각 문에는 각 질환에 대해 환약(丸藥), 탕약(湯藥), 산약(散藥), 단약(丹藥), 연고[膏], 장(漿)의 형태로 방제가 제시된다. 이와 같은 『어약원방』의 편목 구성은 송대에 편찬된 『태평혜민화제국방』(이하 『화제국방』)의 체제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그리고 송ㆍ금ㆍ원대 의방 가운데 이와 동일한 편목 구성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의서의 체제상 연관성은 주목할 만하다. 『화제국방』은 북송 말부터 편찬ㆍ증보 과정을 거쳐 1151년경 완성된 송대의 의방으로 모두 10권 14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오관과에 해당하는 병증에 대한 788개의 처방전을 수록하고 있다.25)
『태평혜민화제국방』과 『어약원방』 편목 구성 비교
Table 1. Comparison of the structure between Taiping huimin heji jufang and Yuyaoyuanfang
『어약원방』과 『화제국방』의 편목 구성을 비교해보면 몇 가지 차이가 확인된다. 먼저 『화제국방』의 「치일절기문」은 『어약원방』에서 「치일절기상문」과 「치일절기하문」으로 나뉘어 각각 권3과 권4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어약원방』에는 『화제국방』에 보이는 「치고냉문」과 부록인 「산도」, 「제탕」, 「제향」이 수록되어 있지 않은 반면, 『화제국방』에는 없는 「세면약문」이 별도로 편성되어 있다. 각 편목에 수록된 방제 수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가 나타난다. 『어약원방』의 「치일절기상문」과 「치일절기하문」을 합하면 『화제국방』의 「치일절기문」보다 52개 많은 방제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어약원방』의 「치담음문」은 『화제국방』보다 60개, 「보허손문」은 『화제국방』 「치제허문」 보다 46개, 「치잡병문」은 96개, 「치인후구치문」은 128개 더 많은 방제를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약원방』이 『화제국방』의 기본 편목 체계를 계승하면서도, 원대 황실 의료의 필요에 따라 일부 편목을 확대하거나 새롭게 조정했음을 보여준다.
『화제국방』 「치일절기문」에는 108개의 방제가 수록되어 있는 반면, 『어약원방』의 「치일절기상문」과 「치일절기하문」에는 모두 160개의 방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두 의서에서 명칭이 일치하는 방제는 18개에 불과하다. 이외에 명칭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동일 계통의 유사 방제로 볼 수 있는 사례가 3개 확인되는데, 『화제국방』 「치일절기문」의 ‘침향강기탕(沉香降氣湯)’26)과 『어약원방』의 ‘침향강기산(沉香降氣散)’27) 및 ‘침향강기환(沉香降氣丸)’28)이 그 예이다. 이는 『어약원방』이 『화제국방』의 편목 체계를 계승하면서도, 실제 수록 방제의 구성에서는 상당한 변화를 보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화제국방』「치일절기문」과 『어약원방』에 동일한 명칭으로 수록된 방제라 하더라도 실제 약재 구성이나 조제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어 주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두 의서에 공통적으로 수록된 ‘목향빈랑환(木香檳榔丸)’이다. 두 처방은 목향(木香), 빈랑(檳榔), 청피(靑皮), 지각(枳殼)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화제국방』의 ‘목향빈랑환’에는 욱리인(郁李仁), 조각(皂角), 반하곡(半夏曲), 행인(杏仁)이 들어가는 반면,29) 『어약원방』의 ‘목향빈랑환’에는 진피(陳皮), 광출(廣朮), 황련(黃連), 황백피(黃柏皮), 향부자(香附子), 대황(大黃), 흑견우(黑牽牛)가 포함되어 있다.30) 두 처방은 동일한 명칭과 일부 공통 약재를 공유하지만, 전체 약재 구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는 동일 명칭의 방제라 하더라도 실제 처방 내용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명이방(同名異方)의 사례로, 다른 장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발견된다. 이는 『어약원방』이 『화제국방』의 방제명을 일정하게 계승하면서도, 실제 처방 구성에서는 약재 조합을 달리하여 재편했음을 보여준다.
『어약원방』과 『화제국방』의 권1에 수록된 치풍 장에서도 두 의서의 체제상 유사성과 실제 방제 구성의 차이가 함께 확인된다. 『어약원방』 「치풍약문」에는 풍증(風證) 치료에 관한 방제가 총 88개 수록되어 있고, 『화제국방』에는 89개의 방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두 의서에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방제명은 ‘대통성백화사산(大通聖白花蛇散)’, ‘마사환(摩挲丸)’, ‘청신산(清神散)’, ‘조각환(皂角丸)’, ‘통관산(通關散)’, ‘영사단(靈砂丹)’ 6개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들 방제 역시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수록된 것은 아니다. ‘대통성백화사산’, ‘마사환’, ‘조각환’ 등은 약재 구성과 조제 방식이 대체로 일치하여 동일 방제 또는 이본 관계로 볼 수 있지만, 『어약원방』에 수록된 해당 방제에서는 약재 구성에 다소간의 변화가 확인된다. ‘대통성백화사산’의 경우 공통적으로 천마(天麻), 적전(赤箭), 해동피(海桐皮), 두중(杜仲) 등 13개의 약재가 들어가는데,31) 『어약원방』에서는 여기에 호골(虎骨), 방풍(防風), 고본(藁本), 후박(厚朴), 목향, 육계(肉桂), 국화(菊花), 만형자(蔓荊子), 강활(羌活), 우슬(牛膝), 비해(萆薢)의 새로운 약재를 대폭 추가했다.32) 한편, ‘청신산’과 같이 동일한 명칭을 공유하면서도 약재 구성과 주치가 달라지는 사례도 확인된다. ‘청신산’의 경우 『화제국방』과 『어약원방』 모두 강활(羌活), 방풍, 박하(薄荷), 형개수(荊芥穗)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어약원방』의 ‘청신산’은 『화제국방』에 보이는 단향(檀香), 인삼(人蔘), 석고(石膏)를 사용하지 않고, 왕과(王瓜), 천궁(川芎), 향부자(香附子), 백지(白芷), 세신(細辛), 감초(甘草)를 더하고 있다. 또한 두 처방은 모두 어지러움[頭昏目眩], 코막힘과 목잠김[鼻塞聲重]을 다스린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화제국방』이 ‘풍옹(風壅), 담연(痰涎)’ 등 보다 넓은 풍담 증상을 다루는 반면33), 『어약원방』은 ‘풍을 맞아 생긴 어지럼증[當風眩暈]’, ‘얼굴과 눈 주위의 떨림[面目瞤動]’, ‘의식 혼미[神志不淸]’와 같은 구체적인 풍증성 증상을 명시하고 있다.3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약원방』은 『화제국방』의 편목 체계와 일부 방제명을 계승하였지만, 실제 수록 방제의 구성에서는 선별과 변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한 방제명 아래에서도 약재 구성과 치료 대상이 달라지는 동명이방의 사례가 발견된다는 점은, 『어약원방』이 송대 관찬 의방의 체제를 단순히 전재한 것이 아니라 원대 황실 의료의 필요에 맞게 방제 내용을 재편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어약원방』이 『화제국방』과 유사한 체례를 갖추었음에도 실제 수록 방제에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제국방』은 북송 시기 태의국에서 편찬한 관찬 의서로, 송 조정에서 전국의 비방과 효험이 있는 처방을 수집하여 이를 정리하고, 표준화하여 제시한 방제서(方劑書)이다. 1078년 신종(神宗) 연간에 처음으로 편찬되었으며, 휘종(徽宗)대에 증보되었다. 1208년 남송 말기에는 보완된 『증주태평혜민화제국방(增註太平惠民和劑局方)』이 간행되기도 했다. 『화제국방』은 10권 14문의 간명한 편목 구성에 풍부한 방제를 갖추고 있어 금과 원의 방제서 편찬에 유용한 틀을 제공했다. 북송 멸망 이후에도 『화제국방』은 금 조정에서 중시되었고 약의 제제(製劑) 기준으로서 활용되었다.
그런데 『화제국방』의 의학적 권위가 곧 그 방제 체계의 전면적 수용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청대 이 의서에 수록된 제제약은 “매운맛이 강하고 자극적이며 향이 진한 약재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는 반면 인체를 손상시키는 경우도 많았으며, 주진형(朱震亨) 역시 이를 강하게 배척했다”35)고 평가되었다. 원 중후반기에 활동한 주진형의 『화제국방』 비판은 병인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고정된 처방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국방의학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유사한 증후라 하더라도 병인과 체질, 허실의 차이에 따라 치료가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화제국방』의 방제 체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이러한 입장은 송대 의가들 사이에서도 이미 나타났으며, 국방의학의 처방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에 대한 경계로 이어졌다(민병희, 2023: 1094-1095).
이러한 맥락에서 『어약원방』은 『화제국방』의 편목 체계를 계승하면서도, 그 방제를 그대로 전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어약원방』은 『화제국방』의 형식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고정 처방의 기계적 적용을 피하고 원대 황실 의료의 필요에 맞게 방제를 선별ㆍ변형ㆍ재편했다. 『어약원방』이 『화제국방』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직접 수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 편찬 내용에서 고정 처방의 기계적 적용이라는 중국 관방 의학의 한계를 일정하게 넘어서는 방향을 보여준다.
4. 『어약원방』에 반영된 송ㆍ금 의학과 원대 관방 의학의 변화
4.1. 금대 어약원 방제의 계승과 도교적 비방의 수용
『어약원방』의 일부 방제에도 조제 경위와 과정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어약원방』의 출처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어약원방』 권6 「보허손문(補虛損門)」에 수록된 ‘양초환(兩炒丸)’의 조제법 말미에는 약의 효능과 복용법을 설명한 뒤 “대안(大安) 3년(1211년) 7월 23일, 본원(本院)의 유중반(劉仲班)이 의부사(儀付使)의 양초환을 받아 점검하고, 따뜻한 생강탕과 함께 복용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36) 여기에 ‘본원’은 금대 ‘어약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유중반은 금 위소왕(衛紹王) 연간에 어약원에서 이 방제의 검토와 조제에 관여한 인물로 보인다. 또한 의부사는 『금사(金史)』에 보이는 태의부사(太醫副使) 의사안(儀師顏)으로 추정된다.37)
『어약원방』의 다른 방제에서도 금의 연호와 의정 기구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어약원방』 권5 「치담음문」 ‘소담환(消痰丸)’에는 “정우(貞祐) 원년(1213) 윤9월 4일, 문동이기환(文童利氣丸)을 소담환으로 고쳤다”38)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어약원방』에 보이는 금대 연호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은 흥정(興定) 5년(1221)39)으로, 몽골이 수도 중도(中都, 베이징)를 함락하자 금 조정이 개봉(開封)으로 천도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어약원방』에 금 말기의 구체적인 연호와 일자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구데이 시기 간행된 『어약원방』이 금대 어약원 또는 금 황실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던 방제 기록을 바탕으로 편찬되었음을 보여준다.40)
『어약원방』에는 방제명에 특정 인명이 언급된 사례들이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어약원방』 방제의 출처와 배경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41) 『어약원방』 권3 「치일절기문상」에 수록된 ‘두한림지실환(杜翰林枳實丸)’, ‘철옹신선생교감단(鐵甕申先生交感丹)’, 권4 「치일절기문하」의 ‘자주장칠랑가등향병자(磁州張七郎家橙香餅子)’, 권6 「보허손문」의 ‘왕예단사(王倪丹砂)’, ‘철옹선생경옥고(鐵甕先生瓊玉膏)’, ‘능양자목향환(凌陽子木香丸)’, 권7 「치적열문」의 하란선생해독환(賀蘭先生解毒丸), 권9 「치인후구치문」의 ‘진희이쇄아약(陳希夷刷牙藥)’, 권10 「세면약문」의 ‘한시랑신험염자방(韓侍郎神驗捻髭方)’의 9종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방제명에 포함된 인명과 지명은 『어약원방』의 방제가 궁정 의관, 도사, 문인, 지역 인물, 혹은 가전 비방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집ㆍ전승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가운데 다른 의서에서도 동일한 방제명이 확인되는 것은 ‘철옹신선생교감단’, ‘철옹선생경옥고’, ‘왕예단사’, ‘진희이쇄아약’으로 ‘철옹신선생교감단’과 ‘철옹선생경옥고’는 남송대 편찬된 홍준(洪遵)의 『홍씨집험방(洪氏集驗方)』에 수록되어 있고, ‘왕예단사’는 『성제총록』에 수록되어 있으며, ‘진희이쇄아약’은 북송 시기 석문영(釋文瑩)의 『옥호청화(玉壺清話)』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자주장칠랑가등향병자’의 경우 방제명이 장칠랑이라는 인명과 함께 자주(磁州)라는 지역명이 명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특정 지역과 인물에 관련된 민간 처방, 혹은 가전(家傳) 처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 ‘두한림지실환’, ‘능양자목향환’, ‘하란선생해독환’은 다른 의방에서 동일한 방제명을 확인하지 못했으며 방제명에 보이는 인물들의 구체적인 신원 역시 파악하기 어렵다.
이 9종의 인명 방제 가운데 일부에서는 도교적 처방의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왕예단사(王倪丹砂)’이다. 이 방제에는 도교의 연단술(煉丹術)과 행단법(杏丹法)이 의학적 배경으로 제시되어 있다. 『어약원방』의 관련 기술에 따르면, 이 약은 “심장을 크게 보하고, 정혈(精血)을 이롭게 하며, 누질(瘻疾)을 치료하고, 근골을 튼튼하게 하여, 오래 복용하면 죽지 않는다.” 또한 이 약을 둘러싼 일화도 함께 기술되어 있다. 당대 창주(滄州) 무예현(無棣縣)의 현령(縣令) 왕예는 관상가로부터 이듬해 정월 을묘일에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그에게서 단사 연성법[煉丹砂法]을 전수받아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처남 역시 행단법(杏丹法)을 얻어 왕예에게 전해주었고, 결국 왕예와 행단을 전한 모두가 신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2) ‘철옹선생경옥고’ 역시 도교적 양생술과 불로장생 사상이 반영된 방제이다. 이 약의 효능으로 “흰머리가 검게 변하고, 노쇠한 몸이 젊음으로 돌아가 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걸을 수 있다”43)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단순한 질병 치료를 넘어 장생(長生), 환춘을 지향하는 도교적 이상을 보여준다.
‘진희이쇄아약’에 나와 있는 진희이(陳希夷)는 송 초기에 활동했던 저명한 도사(道士) 진단(陳摶)이다. 이 처방은 「치인후구치문」에 수록되어 있으며 치아를 건강하게 하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검게 하는 효능을 지닌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치아 건강 유지와 백발 방지에 중점을 둔 이 약은 시의 형식을 빌려 그 약재와 효능이 설명되어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처방 말미에 보이는 “누가 세상에 이러한 신선의 처방(仙方)이 있는 것을 알겠는가?”라는 구절은 이 방제가 도교적 양생술과 관련된 비방이었음을 드러낸다. 북송 시기 승려 석문영(釋文瑩)의 『옥호청화(玉壺清話)』에도 이 방제가 시의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어약원방』 편찬자가 기존의 전승 형태를 유지한 채로 이 방제를 채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처방의 말미에는 실제로 효험을 보았다는 사례도 소개하고 있다. 금대 유덕관(祐德觀)이라는 도관의 경벽허(景碧虛) 선생이 이 약을 늘 사용했고, 팔십이 넘었음에도 마치 동자(童子)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태의원의 의사안 역시 이 자를 알았다고 덧붙였다. 또한 금 선종(宣宗) 연간인 정우(貞祐) 2년 섬서안무사(陝西安撫使) 노와(老瓦)가 치통으로 고생하다가 이 약을 사용하여 나았다고 했다. 이를 통해 『어약원방』의 방제 가운데 금대 도관의 도사들과 관원들이 이러한 비방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약원방』에 언급된 인물들은 대부분 원대 『어약원방』에 수록된 방제의 유래를 밝히거나 효험을 기록했던 인물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당, 송, 금대에 활동했다. 특히 금대 태의원과 어약원 관원이었던 의부사와 유중반은 도관과 비방으로 전해져 있던 의방들을 알고 있었고, 이를 수집하여 황실 의학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한대 이래로 중국의 황제들은 불로장생을 이상으로 여기며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단약을 복용했다는 일화들이 전해 내려온다. 일찍부터 도교 의학이 황실에서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금원대 의학에서 도교 의학의 수용은 당시 통치자들의 도교에 대한 관심과 화북 지역에서 도교의 발전을 배경으로 한다.
도교의 발전은 여진의 화북 통치 시기에 이루어졌다. 금 초기 하북 지역에 진대도교(眞大道敎)ㆍ전진교ㆍ태일교(太一敎)와 같은 새로운 교파가 출현해 금대부터 원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이계지, 2014: 617). 이러한 도교의 발전에는 여진족 통치자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금 장종(章宗) 연간에는 중국의 황제들이 불사를 후원하듯이 장종이 여러 차례 도교 영수들에게 궁관(宮觀)을 지어 하사하며(王德朋, 2004), 도교의 성장에 기여했다. 또한 금대 화북 지역에서 의학의 발전도 도교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금원대 의학을 주도한 주요 학파 가운데 하나인 하간학파(河間學派) 역시 도교의 주요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을 발전시켰다. 하간학파를 이끌었던 유완소(劉完素)는 그의 저작 『소문현기원병식(素問玄機原病式)』에서 오운(五運), 육기(六氣)에 따른 병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질병이 육기가 화화(火化)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중요한 관점을 남겼으며 이후의 ‘온병학설(溫病學說)’에 기초를 닦았다.44) 유완소와 장원소(張元素)의 의학사상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오운육기는 도교 사상의 중요한 개념이다. 도교 경전 『음부경강의(陰符經講義)』에 “천상의 방위에 따라 오운육기를 추론하고, 악고(握固)하여 조화를 이루며, 탄지(弹指)하여 기운을 조절하고, 관찰하여 음양의 변화를 알아낸다”45)라는 표현이 있는데, 유완소는 『소문현기원병식』서문에서 자신의 ‘운기론’이 바로 도교의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명확하게 밝혔다.46) 이렇듯 금대의 주요 의학 학파 사상의 주요 기반이 되는 개념이 바로 도교에서 연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몽골 통치자들도 도교에 대한 후원을 이어갔다. 칭기스칸이 전진교 도사 구처기(邱處機)를 만나 ‘양생의 도(道)’에 대해 듣고자 한 것은 생사와 장수에 대한 그의 관심 때문이었다. 칭기스칸과 구처기의 만남은 당시 칭기스칸의 측근이자 어의였던 유중록(劉仲祿)의 주청으로 성사되었다.47) 유중록은 본명이 유온(劉溫)으로, 금대 삭주(朔州) 마읍(馬邑) 출신이며 의술에 뛰어난 인물이었다.48) 그는 전진교 거사(居士)로도 알려져 있어,49) 의학과 도교 양쪽에 모두 깊이 관련된 인물이었다. 이는 몽골제국 초기부터 북중국 출신의 도교적 배경을 지닌 의자(醫者)들이 몽골 통치자의 측근에서 활동하며 황실 의학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도의(道醫)로 불릴 수 있는 이들은 금원대 북중국에서 유통되던 도교적 양생술과 비방을 몽골 황실에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약원방』에 도교적 비방과 양생 처방이 수록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금대 도관과 민간의 비방이 몽골 황실 의료 체계 안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4.2. 『어약원방』에 반영된 송ㆍ금 의학 전통의 변용과 원대 황실 방제의 재편
우구데이와 쿠빌라이 시기를 거쳐 두 차례 간행된 『어약원방』은 금대 어약원에서 사용하던 황실 의방을 바탕으로 편찬한 의서였다. 그런데 금대 어약원의 방제집이 별도로 간행되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그 원본 역시 전해지지 않기에 원대 『어약원방』의 편찬 과정에서 어떠한 방제가 기존 금대 어약원의 것을 계승한 것이고, 어떠한 방제가 새롭게 추가되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어약원방』에는 당ㆍ송을 거쳐 금에 이르기까지 북중국에서 축적된 임상의학 지식과 금원대 의학계의 새로운 치료 경험이 함께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이에 『어약원방』 「치풍약문」에 수록된 방제를 중심으로 선행 의서와의 관계를 검토하고자 한다.50)
이하에서는 『어약원방』 권1 「치풍약문」에 수록된 88개의 방제 가운데 『어약원방』 편찬 이전에 간행된 의서에 동일한 명칭으로 기록된 사례들을 검토했다.51) 「치풍약문」의 방제명을 기준으로 송ㆍ금대 주요 의서와 대조하되, 이를 다시 동일 방제와 동명이방으로 구분하여 『어약원방』이 선행 의방을 어떤 방식으로 계승하고 변형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어약원방』권1 「치풍약문」의 방제와 동명의 방제가 수록된 의서는 다음과 같다.
위의 표에 따르면 『어약원방』 「치풍약문」의 방제와 동일한 명칭의 방제들은 주로 송대와 금대의 의서에서 확인된다. 동명 방제가 수록된 선행 의서로는 북송 시기의 관찬 의방인 『태평성혜방』, 『성제총록』, 『화제국방』과 사찬 의서인 『왕씨박제방』, 남송대의 『홍씨집험방』, 『삼인극일병증방론』, 금대의 『황제소문선명논방』, 『소문병기기의보명』, 『의학계원』 등이 있으며, 당대의 『비급천금요방』에서도 한 개의 동명 방제가 확인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동일한 처방명이 곧 동일한 약재의 사용과 조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선 시대의 의서 가운데 확인된 49개의 동명 방제 가운데 약재와 조제 방식이 『어약원방』과 동일한 것은 20개이고, 나머지 30개는 명칭만 같을 뿐 실제 구성과 조제법이 다른 동명이방에 해당했다. 『어약원방』「치풍약문」과 동일한 방제를 가장 많이 공유하는 의서는 『성제총록』으로 동명의 방제 26개 가운데 실제로 동일한 방제는 11개이다.
『어약원방』 「치풍약문」과 가장 많은 동명 방제를 수록한 『성제총록』은 북송 휘종(徽宗) 대에 완성되었으나 간행이 채 되기 전에 정강(靖康)의 변이 발생하여 출간되지 못했다. 이후 이 의서는 금 대정(大定)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간행되었다. 『성제총록』은 무려 200권에 달하는 방대한 관찬 의약 총서로, 약 2만 개의 방제를 수록하고 있다. 이 의서는 금대 의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원대 태의 선발 시험의 의서로 사용될 정도로 의학적 권위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원 전기 황실 방제집 편찬에서도 『성제총록』의 방제가 중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대 당시 『성제총록』이 지닌 권위에도 불구하고 『어약원방』의 편찬자들은 『성제총록』에 수록된 치풍에 관한 방제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했다. 또한 동일한 처방명을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약재와 조제 방식의 방제를 제시한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청신산’을 살펴보면, 『어약원방』에서 수록된 ‘청신산’은 왕과(王瓜), 천궁(川芎), 향부자(香附子), 방풍, 박하엽(薄荷葉), 백지(白芷), 형개(荊芥), 강활(羌活), 세신, 감초를 사용하여 바람을 맞아 생긴 어지럼증과 안면 경련, 코막힘 등을 치료하는 ‘기혈 소통’을 위한 약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52) 『성제총록』의 ‘청신산’은 궁궁(芎藭), 사초근(莎草根), 석고, 용뇌(龍腦)를 사용하여 뇌풍으로 인한 극심한 두통과 눈의 피로, 신체 통증을 다스리는 ‘청열 진정’을 그 효능으로 언급했다.53) 이는 원대 황실 의방의 편찬자들이 기존 의학 전통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대의 새로운 의학 지식과 임상 경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드러낸다.
『어약원방』 「치풍약문」에는 금대 의학 문헌과 동일하거나 근연한 방제가 수록되어 있어, 원대 황실 의방 편찬이 금대 의학 전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금대 하간학파 및 역수학파 계열 의학 문헌, 곧 『황제소문선명논방』, 『소문병기기의보명』, 『의학계원』 등에서도 동일한 방제가 『어약원방』에 수록되어 있으며, 『황제소문선명논방』과 『의학계원』에서 각각 3개와 2개의 동일 방제가 확인된다. 그런데 『어약원방』과 『황제소문선명논방』에 동일하게 수록된 동일 방제일지라도 미세한 차이가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어약원방』 편자들의 방제 수록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환골단(換骨丹)’의 사례는 『어약원방』이 금대 의학 문헌의 방제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궁정 의방의 형식에 맞게 재정리한 양상을 보여준다. 유완소의 『황제소문선명논방』과 『어약원방』의 ‘환골단’은 괴각(槐角), 상백피(桑白皮), 천궁(川芎), 창출(蒼朮), 백지(白芷), 만형자(蔓荊子), 인삼(人參), 위령선(威靈仙), 하수오(何首烏), 방풍, 고삼(苦參), 오미자(五味子), 향부자(香附子), 사향(麝香), 마황(麻黃), 주사(硃砂) 등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마황을 대량으로 달여 농축액을 만든 뒤 다른 약재 가루를 섞는 조제 방식도 공유한다. 따라서 두 처방은 동일 계통의 방제로 볼 수 있다. 다만 『황제소문선명논방』에는 용뇌(龍腦)와 목향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어약원방』에는 이 두 약재가 빠져 있다.
더 주목되는 차이는 방제의 서술 방식이다. 『황제소문선명논방』은 ‘환골단’을 380세의 ‘남산(南山) 장선옹(張仙翁)’이라는 신선의 비전으로 소개하고, “입과 눈이 비뚤어지고, 반신을 쓰지 못한다[口眼喎斜, 半身不遂]”는 식으로 증상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반면 『어약원방』은 “혈체가 흐르지 않고, 위기가 막혀 통하지 않는다[療血滯而不流, 衛氣遏而不通]”고 하여 병리 기전을 중심으로 방제를 설명한다. 이는 『어약원방』이 금대 의학 문헌의 방제를 단순히 전재한 것이 아니라, 도교적 비전의 신비적 서술을 덜어내고 원대 궁정 의료에서 활용할 수 있는 표준화된 방제로 재정리했음을 보여준다.
위의 표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어약원방』 「치풍약문」의 방제 가운데 『성제총록』과 유완소의 『황제소문선명논방』에 모두 수록된 방제들이다. 이하에서는 『성제총록』, 『어약원방』, 『황제소문선명논방』에 모두 수록된 석고산과 신성산을 비교하여 표로 정리했다.
『어약원방』, 『성제총록』, 『황제소문선명논방』에 수록된 석고산, 신성산 방제 비교
Table 4. Comparison of Shigaosan (石膏散) and Shenshengsan (神聖散) Prescriptions in Yuyaoyuanfang, Shengjizonglu, and Huangdisuwen xuanming lunfang
이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어약원방』 「치풍약문」에 수록되어 있는 ‘석고산’과 ‘신성산’의 방제는 『성제총록』의 방제와 약재 구성 및 주치가 거의 일치하며, 『황제소문선명논방』에 수록된 동명 방제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석고산의 경우, 『황제소문선명논방』에서도 이것이 풍으로 인한 두통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설명하면서 ‘맑은 콧물과 눈물이 흐르며 통증이 그치지 않는 증상’과 같이 주치가 보다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또한 약재 구성에서도 『어약원방』과 『성제총록』에 수록된 선복화(旋覆花), 백부자(白附子), 세신이 누락되어 있다. 반면 신성산의 경우 세 의서가 모두 동일한 약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황제소문선명논방』에서 그 효능과 병증을 보다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석고산과 신성산의 경우 『어약원방』이 『성제총록』에 수록된 방제와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약원방』이 『성제총록』의 치풍 방제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성제총록』에는 치풍 관련 방제 가운데 ‘천마환’이라는 명칭을 가진 처방이 모두 22종 수록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어약원방』 「치풍약문」의 천마환과 약재 구성이 일치하는 처방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어약원방』의 편찬자들이 『성제총록』의 권위 있는 방제 전통을 참고하면서도, 실제 편찬 과정에서는 필요에 따라 방제를 선별하고, 경우에 따라 다른 약재 조합과 제제 방식을 변용하여 활용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어약원방』 「치풍약문」에는 선행 의서에서 동명 방제가 확인되지 않는 처방들도 적지 않다. <표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행 의서에서 동명 방제가 확인되지 않는 34개 방제, 동명 방제는 있으나 약재 구성과 조제법이 다른 30개 방제를 합하면, 『어약원방』 「치풍약문」에는 현전하는 송ㆍ금대 주요 의서에서 동일한 형태로 확인되지 않는 방제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방제는 원대 황실 의료 현장의 임상 경험과 조제 지식이 반영되어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는 현전하지 않는 다른 의방 전통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약원방』 「치풍약문」 방제와 동명 방제 수록 의서
Table 3. Formulas in the “Treatise on Dispelling Wind” Section of Yuyaoyuanfang and Medical Texts Containing Formulas of the Same Names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이러한 출처 미상의 방제들은 『어약원방』이 단순히 기존 의서의 방제 지식을 집성한 책이 아니라, 기존 전통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원대 의료의 새로운 의학적 성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의서였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약원방』 「치풍약문」은 송ㆍ금대 의방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원대 궁정 의료의 필요에 맞게 방제를 새롭게 재편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편목에는 사향, 용뇌, 우황, 서각, 영양각(羚羊角), 진주, 금박(金箔), 은박(銀箔), 주사, 웅황(雄黃), 수은(水銀), 분상(粉霜), 이분(膩粉) 등 고가의 동물성ㆍ광물성 약재와 귀중 향약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또한 탕, 환, 산, 단,고, 전(煎), 주(酒), 비축산(鼻搐散) 등 다양한 제형이 활용되며, 밀환(蜜丸), 주사의(朱砂衣), 금박의(金箔衣), 석뇌유환(石腦油丸), 생강즙제(生薑汁製), 우담제(牛膽製), 주침(酒浸), 초쉬(醋淬), 면호환(麵糊丸) 등 복잡한 조제법도 확인된다. 이는 『어약원방』이 단순히 약재와 효능을 나열한 처방집이 아니라, 약재의 독성 처리, 보존성, 복용 편의성, 효능의 안정화까지 고려한 궁정 의방집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치풍약문」에는 가감박하전환(加減薄荷煎丸), 증손방풍통성산(增損防風通聖散), 용뇌청격탕(龍腦清膈湯), 사갈속명탕(蛇蠍續命湯), 갈초갈반하환(蠍梢半夏丸), 호골목과환(虎骨木瓜丸), 궁궁천마환(芎藭天麻丸) 등 기존 처방 계열을 바탕으로 특정 약재를 가미하거나 치료 방향을 강화한 방제들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례들은 『어약원방』이 송과 금대 의방 전통을 단순히 전재한 것이 아니라, 기존 처방명과 조제 원리를 활용하면서도 원대 궁정 의료의 조건에 맞게 약재 조합과 제형을 선별하고 변용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어약원방』 「치풍약문」의 특징은 기존 의방 전통의 계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궁정 의료의 맥락 속에서 표준화하고 고급화한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방제의 변용뿐 아니라, 『어약원방』에서는 편목 구성에서도 원대 황실 의료의 수요가 반영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면약문」의 독립적인 편성이다. 「세면약문」은 송대 관찬 의방에서 확인되지 않는 편목으로, 세면ㆍ피부 관리, 두발 관리와 염색 등 미용과 양생에 관련된 방제를 수록하고 있다. 이는 『어약원방』이 질병 치료를 위한 처방뿐 아니라 황실 구성원의 일상적 신체 관리와 양생에 관한 약물 지식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면약문」에는 세면약 10개, 두발 및 두피 관련 약 7개, 모발 염색약 5개, 손 세정 관련 약 2개, 목욕 후 사용하는 약 1개가 수록되어 있다.54)
『어약원방』 「세면약문」에서의 ‘어전세면약’, ‘황후세면약’, ‘곽향산’, ‘동과세면약’ 등은 몽골 황제와 황후를 비롯한 황실 구성원이 궁정 생활에서 사용하던 세면ㆍ미용 관련 방제이다. 『어약원방』의 「세면약문」이 금대 어약원에서 이미 전승되던 방제인지, 우구데이 시기 『어약원방』 초간 과정에서 편입된 것인지, 혹은 쿠빌라이 시기 증보 과정에서 추가된 것인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이 편목의 존재는 금원대 황실 의학이 질병 치료에만 국한되지 않고, 피부와 두발 관리를 비롯한 미용과 양생을 포함하는 신체 관리의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방제는 송ㆍ금대 주요 의방에서 동일한 형태가 확인되지 않아 그 출처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곽향산’이라는 동일한 방제명이 『성제총록』에 수록되어 있지만, 『성제총록』의 ‘곽향산’은 미용과 관련된 세면약이 아니라 풍증을 치료하는 치풍 방제로 소개되어 있어 그 성격이 다르다. 이들 세면약 방제의 출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하나의 가능성은 도교적 비방의 유입이다. 「세면약문」에 수록된 ‘신선옥녀분’, ‘한시랑신험염자방’의 방제명에 ‘신선(神仙)’, ‘신험(神驗)’과 같은 표현이 보이는데, 이들 방제가 도교의 양생론 및 불로장생 사상과 결부되어 금원대 황실 의학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겠다. 「세면약문」의 편성은 『어약원방』이 질병 치료 중심의 기존 국방의학을 넘어, 황실 구성원의 일상적 신체 관리와 미용, 양생의 영역까지 포괄하는 궁정 의방집으로 재편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어약원방』이 중국 관방 의학의 전통을 단순히 계승한 의서가 아니라, 몽골 통치 시기의 의료 환경과 몽골 통치 집단의 필요에 맞추어 새롭게 재구성된 의서였음을 드러낸다.
5. 맺음말
13세기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정복은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방대한 지역에 걸친 인적ㆍ물적 자원의 이동과 지식의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몽골 통치자들은 군사 원정과 통치 과정에서 직면한 다양한 질병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정복 지역의 의료 인력과 의학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금의 멸망 이후 화북 지역의 의료 인력과 의학 전통은 몽골제국의 의정 제도 정비와 황실 의료 체계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어약원방』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편찬된 의서로서, 원대 관방 의학의 성격과 금원 의학 지식의 재편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어약원방』의 편목 구성은 북송대 관찬 의방인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체례와 유사하다. 그러나 실제 방제 구성에서는 『화제국방』의 처방을 그대로 전재하지 않고, 금대 어약원 방제, 송ㆍ금대 의방 전통, 금원 의가들의 처방, 도교적 비방, 그리고 황실 의료의 실제 수요를 반영하여 방제를 선별하고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어약원방』은 『화제국방』으로 대표되는 송대 국방(局方)의학의 체례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원대 관방 의학의 조건 속에서 재편한 당대 최신의 의방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선’, ‘신험’과 같은 표현이 포함된 방제명을 통해 도교적 양생술과 비방에 대한 관심이 원대 관방 의학의 일부로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약원방』에 수록된 방제의 연원을 검토해보면, 이 의서가 당ㆍ송대 의방을 비롯하여 금대 의학의 성과를 수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치풍약문」의 방제 가운데 『성제총록』과 관련된 방제와 동일한 방제가 일부 수록되어 있으며, 유완소, 장원소 등 금대 의가들의 방제와 유사한 방제도 발견된다. 이는 『어약원방』이 북송 관찬 의방의 전통을 참고하였고, 금대 이후 북중국에서 발전한 새로운 의학 이론과 임상 경험을 부분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약원방』은 기존 의서의 방제를 단순히 집성한 문헌은 아니었다. 다수의 방제에서 동일한 방제명을 유지하면서도 약재 구성, 주치, 조제 방식이 달라지는 양상이 확인된다. 이러한 동명이방의 사례들은 『어약원방』의 편찬자들이 선행 의방의 권위 있는 명칭 체계를 활용하면서도, 실제 처방에서는 황실 의료의 필요와 임상 경험에 따라 선별하고 변용하여 제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치풍약문」에는 선행 의서에서 동일한 명칭을 확인하기 어려운 방제들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어약원방』이 금대 의학뿐 아니라 원대 의료 현장에서 축적된 새로운 조제 경험과 임상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드러낸다. 『어약원방』에서는 앞선 시대의 관방의서에서 발견되지 않는 「세면약문」이 수록되어 있다. 「세면약문」에는 두발, 피부, 세안, 염모 등 미용과 양생에 관련된 방제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금원대 황실 의학이 질병 치료뿐 아니라 신체 관리, 미용 및 양생에 관한 방제까지 포괄했음을 보여준다.
『어약원방』은 북중국 의학의 전통을 단순히 계승한 의서가 아니라, 송대 관찬 의방의 체례, 금원 의가들의 임상 지식, 도교적 비방, 황실 의료의 실제 수요를 원대 관방 의학의 틀 안에서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재구성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몽골 통치하에서 정복지의 의학 지식이 단순히 보존ㆍ전승되는 데 그치지 않고, 원 조정의 제도적ㆍ임상적 요구 속에서 새롭게 선별되고 표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어약원방』은 원대 관방 의학의 형성과 금원 의학 지식의 전승ㆍ변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나아가 몽골제국 시기 동아시아 의학 지식의 유통과 재편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관방 의서라고 할 수 있겠다.
Notes
『古今圖書集成ㆍ方輿彙編ㆍ職方典』 卷389, 「開封府部ㆍ紀事」, “春三月, 汴京大疫, 死者百餘萬”
『金史』 卷64, 「宣宗皇后傳」, p. 1533, “壬辰、癸巳岁,河南饥馑,大元兵围汴,加以大疫,汴城之民死者百余万.”
『元史』 卷123, 「純只海傳」, p. 3030, “遷京兆行省都達魯花赤.至懷, 值大疫,士卒困憊, 有旨以本部兵就 鎭 懷孟”
『元史』 卷124, 「李楨傳」, p. 3051, “十三年,師圍壽春,天雨不止,楨言於察罕曰,‘頓師城下,暑雨疫作,將有不利.且城久拒命,破必屠之,則生靈何辜。請退舍數里,身往招之.’”
『至正集』 卷44, 「大都三皇廟碑」, p. 229, “羅天下醫, 置太醫大使, 佩金符”
『至正集』 卷44, 「大都三皇廟碑」, p. 229, “辛丑, 立太醫院, 總其政”
『朝鮮王朝實錄』 「世宗實錄」 卷47, 世宗 12년 3월 18일.
『어약원방』 4 판본의 체례 비교는 송지청ㆍ엄동명, 「4종 『御藥院方』에 대한 비교연구-治小兒諸疾門을 중심으로-」, 『大韓韓醫學原典學會誌』 33-2 (2020) 참조.
『어약원방』 정가당본은 판식과 권말의 패기를 근거로 원대 복건 건양(建陽)의 우씨(虞氏) 서방(書坊)에서 간행된 것으로 파악된다. 정가당본은 원대 민간 서방에서 간행된 유일한 원간본으로, 판각이 정교하고 일부 방제의 탈문이나 약물 용량의 측면에서 내용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다만 「강목(綱目)」과 실제 편목 구성에 차이가 있으며, 「강목」에 제시된 편목명과 본문의 편목명 사이에도 일부 불일치가 확인된다. 한편, 三木榮은 『계사신간어약원방』의 계사(癸巳)를 1293년으로 판단하여 이를 이른 판본으로 보았다(三木榮, 1956: 259). 본고에서는 『계사신간어약원방』 갑진자본(甲辰字本) 영인본(曹洪欣, 2005)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신간혜민어약원방』 정가당본은 개별 방제의 내용과 판본 간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대조본으로 참고하였다.
『至正集』 卷44, 「大都三皇廟碑」, p. 229, “昔者壬辰, 太宗皇帝慮人有札瘥夭死也,羅天下醫, 置太醫大使, 配金符, 辛丑, 立太醫院, 總其政” 우구데이 시기 태의원이 송ㆍ금과 같은 규모의 정식 의정기구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화북 지역의 의료 인력을 관리하고 황실의 의료 활동과 약학 지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세운 기구로 볼 수 있겠다. 이를 통해 몽골 카안이 의료를 상당히 중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金史』 卷37, 「百官二」, p. 1260.
『元史』 卷88, 「百官四」, p. 2220; 『至正集』, “世祖皇帝,中統庚申,給銀章,又別置太醫院. 丙子,合二爲一. 戊寅冠以禮部尚書. 癸未,改尚醫監,秩正四品.乙酉,複太醫院,秩正三品.”
『元史』 卷88, 「百官四」, p. 2221.
『祕書監志』 卷6, p. 110.
『新元史』 卷192, 「安藏傳」, p. 774.
『元史』 卷13, 「世祖十」, p. 271.
『至正條格』 卷31, 「醫藥」,‘科目’條, pp. 120-122.
『元史』 卷168, 「許國禎傳」, pp. 3962-3963.
『元史』 卷99, 「兵志二」, p. 2524.
오행(五行) 간에 차례대로 서로 생성하고, 자라게 하며, 촉진하는 관계의 원리.
『御藥院方』「御藥院方序」, pp. 2-3: “聖朝以三代相生養之道,域民於仁壽.唯血氣之屬,不能無病.又立醫師,掌醫之政令,如周制而加詳焉.醫之術固,大概已效之方,為前人所寶藏者,尤為難得.太醫提點榮祿許公,暨二三僚友,取御藥院壬寅所刊方書板,正其訛,補其缺,求其遺亡而附益之.將宏肆流傳,俾人人如在良醫左右.余嘉其用心從而敘述之.自仲景《傷寒論》 論證處方之後,後世以方為書者,無慮數百家,至御藥院號稱大備.蓋褒集諸家之善,而增損持擇.雖湯液齊和,昭然無纖芥畸件!殆與『黃帝內外經』,『扁鵲八十一難』相表裡,其功用豈淺淺哉!”
『元史』 卷88, 「百官四」, p. 2221.
『御藥院方』에 모든 병의 시초가 되는 풍(風)을 다스리는 치풍, 상한(傷寒)을 다스리는 치상한, 기(氣)와 관련된 일체의 질병을 다스리는 치일절기, 체내에 진액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해 생긴 병증을 다스리는 치담음, 인체의 허증을 치료하는 보허손, 열이 쌓여 생긴 병증이나 습이 생겨 생긴 이질을 치료하는 치적열과 치습리, 사지관절 통증, 타박상을 비롯하여 피부 종기 등 각종 질병에 대한 처방을 담고 있는 치잡병, 인후와 구강 관련 질환에 대한 치인후구치, 안과 질환과 관련된 치안목, 피부 질환 및 신체 관리 및 양생과 관련된 세면약, 종기ㆍ골절 치료를 위한 치창양상절, 부인과의 질병을 다스리는 치부인제질, 소아 질환 치료에 관한 치소아제질로 나뉘어 있다.
『신간혜민어약원방』 20권과 『계사신간어약원방』 11권은 기본적인 편목 구성에서 상당한 공통성을 보이지만, 권차와 일부 편목의 구성 및 방제 배열에서는 차이가 확인된다. 기존 연구에서는 두 계통의 수록 방제에 실질적인 증감은 크지 않은 것으로 지적하였다(覃想佩ㆍ鄢梁裕ㆍ 崔爲, 「日本靜嘉堂藏元刊本『新刊惠民御藥院方』版本考」, 『浙江中醫藥大學學報』 48-2 (2024) 참조). 한편 정가당본 『신간혜민어약원방』은 서두의 「강목(綱目)」과 실제 목록 및 본문의 편목 구성에 차이가 있고, 「강목」에 제시된 편목명과 본문의 편목명 사이에도 일부 불일치가 확인된다. 다만 현존 『어약원방』 판본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가 서로 다른 원대 저본에서 비롯된 것인지 후대의 재간ㆍ편집 과정에서 형성된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분명하지 않다. 11권 14문의 비교적 정연한 편목 체계로 전하는 『계사신간어약원방』 갑진자본을 중심으로 『태평혜민화제국방』과의 편목 체계를 비교하겠다.
『太平惠民和劑局方』, p. 2.
『太平惠民和劑局方』 卷3, 「治一切氣」, p. 102.
『御藥院方』 卷3, 「治一切氣門上」, p. 149.
『御藥院方』 卷4, 「治一切氣門下」, p. 250.
『太平惠民和劑局方』 卷3, 「治一切氣」, p. 134.
『御藥院方』 卷3, 「治一切氣門上」, p. 192. 정가당본의 해당 방제 역시 약재 구성과 조제법은 갑진자본과 동일하며, 조제법의 서술에서 갑진자본의 “上爲細末”이 정가당본에서는 “右件八味爲細末”로 기술되어 있는 문구상의 차이만 발견된다.
『太平惠民和劑局方』 卷1, 「治諸風」, pp. 23-24.
『御藥院方』 卷1, 「治風藥門」, pp. 105-106.
『太平惠民和劑局方』 卷1, 「治諸風」, pp. 25-26.
『御藥院方』 卷1, 「治風藥門」, p. 56.
『四庫全書簡明目錄』 卷10, 「子部五ㆍ醫家類」, p. 385.
『御藥院方』 卷6, 「補虛損門」, “大安三年七月二十三日,本院劉仲班取覆過儀付使兩炒丸,溫生薑湯送下.”
『金史』 卷64, 「后妃下」, p. 1530.
『御藥院方』 卷5, 「治痰飮門」, “貞祐元年閏九月四日,文童利氣丸改消痰丸.”
『御藥院方』 卷6, 「補虛損門」, “興定五年正月二十六日,權直長張古當面調和得藥,稠難濾,本方用酒半斤,又添訖半斤,以後,如合藥後,升酒作一升.”
『신간혜민어약원방』을 소장했던 청대 장서가 장금오(張金吾)는 『어약원방』에 기록된 금말 연호 사용에 주목하여 『어약원방』이 금말 어약원의 방서를 구본(舊本)으로 하여 내용이 더해졌다고 보았다(張金吾, 『愛日精盧藏書誌』卷8)
『어약원방』에 수록된 방제의 인물에 관해서는 覃想佩가 그의 논문에서 검토한 바 있다. 이 내용을 참고하여 본고에서 관련 논의를 전개했다(覃想佩, 2024: 25-28).
『御藥院方』 卷6, 「補虛損門」 ‘王倪丹砂’, “王倪者,丞相遵十二代孫,明文九年為滄州無棣令. 有一人善相, 見倪曰: 公死明年正月乙卯, 我有藥可以不死也. 能從我乎? 倪再拜稱幸, 乃出煉丹砂法餌之. 開元元年, 倪妻之弟亦遇異人, 授以杏丹法, 曰: 吾聞王倪能煉丹砂, 願以此易. 倪以杏丹賜其子辨, 而倪與授杏丹者後皆仙矣.”
『御藥院方』 卷6, 「補虛損門」 ‘鐵甕先生瓊玉膏’, “發白變黑,返老還童,行如奔馬”
程雅君, 『金元四大醫家與道家道敎』, p. 41.
『陰符經講義』, “能按天象方隅推五運六氣, 握固以養和,彈指以攝化, 診視以知陰陽”
劉完素, 『素問玄機原病式』: “運氣者, 得于道同, 盖明大道之一也.”
釋祥邁,『大元至元辯僞錄』卷2.
釋祥邁,『大元至元辯僞錄』卷2.
『長春眞人西遊記校注』, pp. 2-3.
본 장에서 『어약원방』 권1에 해당하는 「치풍문(治風門)」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풍(風)’이라는 개념의 의학적 중요성과 광범위성 때문이다. 한의학에서 '풍'은 질병 발생의 주요 외인(外因)이자 내인(內因)으로 인식되며, 중증 질환부터 감기, 관절통 등 다양한 질환의 병리적 기전을 설명한다. 따라서 '치풍문'에 수록된 방제들은 『어약원방』이 다루는 질병과 치료 사상의 일면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이것이 역사적 의학 전통의 계승 양상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으리라 보았다. '풍'에 대한 치료는 고대부터 꾸준히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으며, 각 시대별, 의학 유파별로 다양한 치료법과 방제가 발전해왔다. 「치풍문」을 분석함으로써, 한대부터 금원대에 이르기까지 『어약원방』이 어떠한 의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통합했는지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 문헌을 집성한 데이터베이스 ‘中醫笈成’의 ‘宋金元醫方’ 목록에 수록된 의방을 대상으로 『어약원방』 「치풍약문」의 방제를 검색하여 관련 의방의 수록 현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였다. 중복 검색된 의방은 해당되는 각 의방에 모두 기재하였다. 「宋金元醫方」, 中醫笈成, https://jicheng.tw/tcm/book. 검색일: 2026.2.10.
『御藥院方』 卷1, 「治風藥門」 ‘清神散’, p. 56.
『聖濟總錄』 卷15, 「腦風」 ‘清神散’
『御藥院方』 卷10, 「洗面藥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