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동원은 「한국 근대 시기 대상 의사학 연구의 지형」의 ‘위생에 대한 연구 지형’에서 한국 근대 위생에 관한 논저를 망라하고 있다(신동원, 2023: 191-193).
2) 위생 정책을 도시 ·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찰한 연구로는 구경모, 김영미, 김은진, 박윤재, 이연경 · 김성우 등의 연구가 주목되며(구경모, 2010; 김영미, 2007; 김은진, 2020; 박윤재, 2019; 이연경 · 김성우, 2012), 박윤재는 이러한 연구사를 통합 정리한 「한국 근현대 도시위생사 연구의 성과와 전망」을 기술하였다(박윤재, 2020b).
3) 유종원은 조선총독부 통계자료(1929-1939)를 통해 한국인들의 한국어 신문 구독률이 가구당 3-5%이고, 일본어 신문 구독률은 1-2%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특히 전라남도와 같은 지방은 이러한 전국 구독률의 절반 정도로 낮다는 점을(유종원, 2022: 181-182) 지적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활자 미디어를 넘어선 미디어의 역할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보인다.
4) 이 연구는, 보편적 · 사회적 담론으로 발전한 위생개념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확산된 과정속 (신규환, 2022)에 한국과 일본이 있고, 1877년 김기수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일본 근대제도를 둘러본 것에서 한국의 위생개념이 형성되었다는 신동원의 논의를 바탕으로(신동원, 1997) 일제강점기 통치 주체인 일본의 위생전람회의 개최의 궤적 속에서 근대 한국 위생전람회의 제상을 탐구한다.
5) 관련 연구로는 요시다 미쓰구니(吉田光邦)와 요시미 야(吉見俊哉)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요시다 미쓰구니는 『도설 만국박람회사(圖說萬國博覽會史)』(京都: 思文閣出版, 1985a), 『개정판 만국박람회(改訂版萬國博覽會)』(東京: NHKブックス, 1985b), 『만국박람회연구(萬國博覽會研究)』(京都: 思文閣出版, 1986) 등의 연구를 통해 기술사적 입장, 건축사와 디자인사, 상업 발달사의 관점에서 고찰하였고, 요시미 야는 『박람회의 정치학, 시선의 근대(博覧會の政治学ーまなざしの近代)』(東京: 中公新書, 2001)를 통해 박람회에 모인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경험의 역사(전시품이 표상하는 세계상과 그 수용 방식)를 파악했다.
6) 이러한 박람회 참가를 통해 메이지 정부가 목표로 삼은 것은 다음 5가지였다. “① 정예의 양질 물품을 수집 · 전시하여, 일본 국토의 풍양(風様)과 사람들의 솜씨를 해외에 알릴 것, ② 서양 각국의 물산과 학예의 정밀함과 뛰어남을 보고 배우고, 기계 기술을 전수받을 것, ③ 일본에도 박물관을 창건하고, 박람회를 개최할 기초를 갖출 것, ④ 각국에서 일본의 제품이 일상용품이 되어 수출 증가를 가져올 실마리를 찾을 것, ⑤ 각국의 제품 원가, 판매가와 결핍 수요의 물품을 조사하여, 앞으로의 무역 이익으로 삼을 것”이었다(田中邦男 · 平山成信, 1897: 11-13).
7) 이처럼 만국박람회는, 유럽 사회가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장 정확한 것으로 여겼던 근대 시기, 가시성에 대한 신앙을 그대로 체현하는 방식으로 만들어 낸 이벤트였다. 박람회에 전시된 일본 전통미를 살린 오브제는 근대 유럽 시선의 욕망을 객관화한 대상이었다(村上宏昭, 2016: 83).
9) 이 활동사진에 대하여, “인간의 오감 중 가장 정확하고 미세한 감각을 전하는 것은 눈이다. (중략) 백 장의 포스터보다 한 편의 필름을 영사하면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든다. 이 사실은 명백하다. 활동사진으로 사람을 모으고 흥미를 일으킨 다음 사회교화로 유도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당시 파급력이 막강한 미디어였다(山根幹人, 1923: 55, 73).
11) 영국은 과거 개최 만국박람회(1851, 1862)에서 빅토리아 왕조의 경제적인 번창을 과시하고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영국제국이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되어 ‘세계의 경찰관’ 역할을 했던 시기, 열강끼리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했던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의 절정을 구가했는데, 1870년대를 기점으로 불황에 빠지고 영국의 해외경제 패권에 대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도전이 강해짐에 따라 피지배지의 저항이나 식민지쟁탈전이 격심해져 제국 체제 유지 확대가 갑자기 불안해져 갔다. 이러한 위생박람회와 같은 전문박람회 시리즈가 1880년대 중반 영국에 출현한 배경은 영국의 제국주의 구가에 대한 위기의식과 맞물려 있다(平田諭治, 2003: 64-65).
12) 1911년은 일본에서 ‘일본사회법인박람회협회’가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山本光雄, 1970: 173).
13) 이 박람회는 1911년 5월에서 10월까지를 회기로, 55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아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전시는 크게 대중부문 · 과학부문 · 역사부문 · 산업부문의 4부 구성으로 되었고, 각 부문에 주거 식수 · 식량 · 감염증 등의 테마를 취급하는 부스나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과학부문에는 ① 빛 · 공기 · 토지 · 물, ② 도시 건설 · 가옥과 주택 · 조명 · 환기와 난방 · 급수 체제 · 도시 청소 · 매장 방법, ③ 영양론 · 고기 섭취 · 유제품 섭취 · 야채류와 기호품 · 식량 연구, ④ 의복 · 입욕 · 신체 훈련, ⑤ 생리학과 노동의 위생학 · 업무용 독물 · 특수한 직업위생 · 노동 복지, ⑥ 미생물학과 기생충학 · 면역학과 예방 접종 · 감염증 동물 역병 · 역병 박멸· 소독, ⑦ 간호 · 구명, ⑧ 유아 보호 · 학교위생 · 청소년 보호, ⑨ 도로와 철도 · 선박 교통 · 숙박시설, ⑩ 육군 · 해군, ⑪ 열대 위생, ⑫ 통계로 구성되었고 이외 5개의 특별 그룹으로, ① 결핵, ② 암, ③ 성병, ④ 알코올 중독, ⑤ 치과 질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村上宏昭, 2016: 91, 102).
14) Internationale Hygiene-Ausstellung, “Katalog der von der Kaiserlich Japan Regierung ausgestellten Gegenstände, Japan Kaiserlich Pavillon” invaluable.com, 18 Nov 2023. https://www.invaluable.com/auction-lot/katalog-japanischer-pavillon-beig-347-c-d214ed9af2?objectID=183630270&algIndex=archive_prod&queryID=64c3b0bb263e4f113adae52647614e64. Accessed 13 Dec 2024.
15) 이러한 인형은 일본의 쇄국 체제 속에서도 외국과의 교류 통로였던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인이나 의사들이 종종 수집했다. 마쓰모토 기사부로(松本喜三朗, 1825-1891), 야스모토 가메하치(安本亀八, 1826-1900)는 이러한 인형 제작 명장으로 여겨져 해외에서 인기를 얻었다. 에도시기나 메이지 시기 이 인형들의 사실적이고 정교함에 매료된 서구인들은 일본을 방문하여 이를 주문하여 소장하기도 했다(石原あえか, 2014: 30).
16) 이 박람회는 1877년 8월 21일-11월 30일까지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열렸다. 「내국권업박람회」의 출품자는 주로 전국 각지의 상공업자층이었는데, 이 시기 박람회의 주요 인기 물품은 약품, 도자기, 직물, 생사, 양품, 문구, 통계나 이학기기, 제사기계, 인쇄기계, 증기기관이나 군함의 모형, 선풍기 등이었다(吉見俊哉, 2001: 126-127).
17) 엑스포지숑을 「박람회」라고 번역한 메이지 시기의 신문기자 구리모토 조운(栗本鋤雲)이 막부 말기에 프랑스 공사(公使) 로슈로부터 만국박람회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약품회(薬品會)를 떠올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에도시기에는 각지로부터 물산을 모아 전시하는 행사가 에도나 오사카의 박물학자들에 의해 자주 열렸다. 그 효시는 1757년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가 스승 다무라 란스이(田村藍水)를 모임의 우두머리로 하여 개최한 약품회이다. 이 약품회는 21명이 180종의 약품을 출품했다. 1758년에는 다무라를 주최자로 제2회 물산회가 열려 출품인 34명 231종의 출품물이 있었다. 1759년에는 겐나이 자신이 주최하여 제3회, 1760년에는 마쓰다 조겐(松田長元)을 중심으로 제4회 물산회가 열렸다. 1762년에는 제5회 동도약품회(東都薬品會)가 겐나이에 의해 개최된다. 이때 출품된 물품은 1300여 종(약물 및 천연산물)으로 큰 규모였다. 출품자도 에도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국적으로 출품하였다. 이후 1780년대에도 다무라 란스이의 아들 모토나가(元長)와 문하생 기리야마 소테쓰(桐山正哲)에 의해 에도에서 수차례 열렸으며, 19세기 이후는 교토의 야마모토 보요(山本亡羊), 오사카의 이와나가 겐소도(岩永玄昌堂), 나고야의 이토 게이스케(伊藤圭介), 에도의 이가쿠칸(医學館)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약품회나 물산회가 거의 매년 개최된다. 이 약품회는 어디까지나 민간 박물학자들의 행사이며 광범위한 대중동원의 문화장치의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吉見俊哉, 2001: 142-143).
18) 메이지 초기 서양의학에 근거한 의사의 양성 · 의료제도의 확립을 긴급한 과제로 삼아, 1874년에 「의제」가 정해졌다. 한편, 각종 감염병 예방 대책도 급한 과제였다. 일본의 위생 관계 제도 · 규칙이나 지방에 있어서 위생행정 제도는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대유행한 1879년부터 본격적으로 정해져 콜레라가 유행할 때마다 정밀한 내용으로 개변되었다. 1900년경에는, 위생 관계의 법률 · 규칙이 거의 정돈되어, 촌락에 이르기까지 위생행정의 틀이 생겼다. 이와 같은 메이지 정부의 위생보급 활동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이 완벽하게 정비되지 않은 다이쇼기 이전 단계까지 사립위생회의 활동은 적극 장려되었던 것이다(中澤恵子, 2014: 50).
19) 이 단체는 급속하게 유행하는 콜레라에 대한 대책이 중앙의 지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판단하에 민간과의 협력 체제를 이루며 계몽활동을 위해 조직된 반관만민(半官半民)의 조직으로 1883년에 창설되었다. ‘강한 국가 형성을 위한 건강한 국민이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 일반 사람들에게 위생사상을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한 이 조직은, 의사를 중심으로 교원 등 계몽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田中聡, 2003: 109-110).
20)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국가적 행사로서 내국권업박람회는 6회 개최가 무기한 연장되어 사무국이 폐지됨에 따라 1903년 5회를 마지막으로 개최가 종결되었다(山本光雄, 1970: 42).
21)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제공하는 디지털화 자료의 OCR텍스트화 사업의 성과물인 전문 텍스트를 활용한 서비스를 이용하여 논자가 텍스트 데이터로부터 출판 연대별 출현 빈도를 시각화한 자료이다.
22) 대표적으로 야마코시공작소(山越工作所)가 있는데, 이 공작소 경영자 야마코시 조시치(山越 長七)는 1877년 동경제국대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해부학사 이마이 아즈미(今井東)에게 교육을 받아 인체 해부 및 모형제작을 연습하고 이를 습득하여 1880년 인체 해부 표본 제작회사를 설립하고 각 대학과 병원 관청 학교 등에 납품하였다(吉村浩一, 2014: 101).
23) 전시 내용은, ① 생육부(임신, 임산부의 섭생법, 육아의 마음가짐) ② 생리부(국가와 개인 건강, 인체 골격, 인체 근육, 인체 피부, 인체 혈액, 인체 심장, 인체 폐장, 인체 위장, 인체 신장, 인체 신경계, 치아와 충치) ③ 보건부(주거지와 가옥의 관계, 공기와 햇빛, 토지와 물을 불결하게 하는 원인, 공기를 불결하게 하는 원인, 의복의 목적과 위생상의 주의, 물과 위생, 음식물, 소화와 조리, 기호품, 음식 기구, 청량음료수, 균류, 착색료, 이발 위생, 중독) ④ 방역부(소화기의 해부, 병독 전파자, 폐결핵, 트라홈, 한센병, 광견병, 화류병, 소독용품) ⑤ 의치부(인체기생충, 각기병 및 그 예방, 응급처치, 일반적 간호의 마음가짐)로 구성되어 있다(阿野蘇堂, 1915: 1-92).
24) 하나, 사람들은 지키라 위생을, 건강은 부귀의 어머니가 된다. 지켜서 소홀함이 없게 하라/ 둘, 언제나 집 청소를 하여 먼지가 쌓이지 않게 하고, 공기가 잘 통하게 하라/ 셋, 몸의 청결에 신경써서 깨끗한 의복을 입고, 손톱과 발톱을 깨끗하게 하라/ 넷, 야간에 덧문를 열어 놓아 잘 때 몸이 차가워지지 않게 신경써라/ 다섯, 항상 식사는 적당히 하여 폭식 폭음을 주의하라, 간식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섯, 무리한 일을 하지마라, 병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시간을 정하여 기상과 취침을 하라/ 일곱, 물에서 잡은 생선은 굽거나 쪄서 먹는 것이 좋다. 양치하는 물도 주의하라/ 여덟, 병이 들면 그대로 놔두지 말고 직접 의사에게 보이고 민간 치료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홉, 아이 어른 차별 없이 병은 간호가 제일이요, 간호는 의사의 명령에 따르라/ 열, 부도 지위도 풍월도 생명이 있고 나서 존재하는 것이다. 반드시 위생에 주의하라(阿野蘇堂, 1915: 86).
25) 이러한 위생전람회의 테마는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신경쇄약이나 자살자들 증가가 사회적 문제일 때는 「정신위생전람회」, 건강 붐 속에서 중장년의 건강법이나 불로장생법이 화제가 되었을 때는 「초로장지전람회」, 기생충예방법 공포의 해에는 「인체유해동물전람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1934년의 「구료사자료전람회」에서는 일본에서도 고대부터 박애 정신이 있었다는 것을 전시하였고, 1935년 「도시위생전람회」에서는 에도시대의 상하수도와 온천 등을 부각하여 도시문제의 해답을 전통에서 찾으려 했다. 1936년 「호르몬 비타민전람회」 같은 경우는 민간 의료의 재평가하는 차원의 전람회였는데, 몽매한 지식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1937년 일본관광협회와 공동개최한 「관광일본 공중위생전람회」는 외국인 접대와 외국인의 취향, 기차 안에서의 매너 등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것은 1940년 개최 여정인 올림픽에 준비하는 차원이기도 했다. 중일 전쟁 장기화로 올림픽 개최가 어렵게 된 1940년 11월 10일에는 기원 2600년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는 데, 이때 적십자박물관에서는 「위생일본 회고전람회」를 열어, 일본 고래 위생의 역사를 사료, 그림, 인형 디오라마들을 엄청난 준비과정을 거쳐 전시하기도 했다(田中聡, 1994: 201-203).
26) 이 위생이라는 단어는 기존의 양생이라는 단어와 질적으로 다르다. 양생이란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믿는 것을 소중하게 돌보려는 것이며, 위생은 생명의 유지에 해가 있는 것을 박멸해, 병원이나 병소로 보이는 것을 논리적으로 추구하여, 미리 소멸하려는 의지적 태도에 속한다(高取正男, 1976: 186).
27) 일본 내무성 『아동의 위생(児童の衛生)』 발간사에는, “구미 선진국에서는, 이전부터 아동 위생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쇄신과 개선에 노력해 왔기 때문에, 그 효과로 유아사망률이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세계 대전 후, 모든 나라가 국민의 위생 상태를 한층 더 양호하게 할 것을 고심하고, 제2 국민의 육성 양호를 점점 중요시하게 되었다. (중략) 도쿄 교육박물관에서 「아동 위생전람회」를 개최해, 아동에 관한 위생 사상의 보급을 꾀하고자 한다.”고 되어 있다(内務省, 「発刊の辞」, 『児童の衛生』(1921), (大竹聖美, 2023: 7)의 글에서 재인용).
28) 「오늘부터 시작되는 아동위생전람회로부터(今日から始まる児童衛生展覧会)」, 1920년 10월 24일; 「아동위생전람회로부터 유아사망률(児童衛生展覧会から幼児死亡率)」, 1920년 11월 11일; 「노동계급의 아이가 없는 것은 유감, 아동위생전람회에서(労働階級の子供の少ないのは 遺憾と児童衛生展覧会で)」, 1920년 11월 10일; 「아동위생전람회로부터 아동의 요구(児童衛生展覧会から児童の要求)」, 1920년 11월 4일, 등 다수 확인된다.
29) 『朝日新聞』 기사도 역시 이 아동전람회가 아동의 보호자가 직접 참가하는 것을 매우 의미있게 보도하고, 많은 전람회 개최 환영 기사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각하여 번창하는 아동검사, 내무성도 이 기운을 타고 매일 밀려드는 아동전으로(親達が眼ざめて繁昌の子供検査 内務省も大気乗りで毎日押返す児童展に)」, 1920년 10월 27일; 「오늘도 화제: 도쿄 시내에 화물저택, 가와구치(河口)의 반박, 결핵 치아 데이, 데라우치(寺内) 1주기, 유학생 조선인대운동회, 꽃 전차(사진)(今日の話題, 東京市内に化物屋敷 河口師の反駁 結核齲歯デ- 寺内伯一周忌 留学鮮人大運動会, 花電車 <写>)」, 1920년 10월 28일; 「투서, 아동위생전람회(鉄箒, 児童衛生展覧会)」, 1920년 10월 29일; 「투서, 아동전람회 환영(鉄箒, 児展歓迎)」, 1920년 11월 8일 등 관련 기사가 10건이 넘는다.
30) 『朝日新聞』에서도 1920년 이후 구강위생전람회(1923년 4월 12일자), 시민위생전람회(1924년 6월 13일자), 출산과 육아 위생전람회(1926년 2월 20일자), 민족위생전람회(1928년 5월 1일자), 공기전람회(1929년 11월 17일자) 등의 전람회 개최 보도를 확인할 수 있다.
31) 한국의 근대적 박람회 개최에 관한 연구는 한국의 세계박람회 참가 역사와 그 의미, 한국에서 개최된 물산공진회에 대한 소개 등 제국주의 장치 효과에 대해 2000년대 이후 활발하게 연구되었다(김영나, 2000; 김태웅, 2002; 박성진, 2003; 박천홍, 2003; 신주백, 2004; 염복규, 2018; 주윤정, 2003; 최석영, 2001; 최정무, 2000; 朴美貞, 2010; 李泰文, 2003; 山路勝彦, 2008). 이러한 연구를 통해 박람회 건축물의 구성과 전시 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박람회가 일본의 경제 문화의 발달 사항을 피식민자에게 과시하는 행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행 연구는 주로 경성에 집중한 박람회 문화공간에 주목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박람회 문화와 밀접하게 연계된 위생전람회가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양상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32) 그 후 1883년 민영익을 비롯한 조선보빙사(報聘使) 일행이 미국 보스턴 기업 박람회를 관람하였다. 이는 국제사회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인의 근대적 삶으로의 변화에 대한 의지도 불러일으켰다. 이 이후 한국의 본격적인 국제박람회 참가는 1893년의 시카고 세계박람회부터였다. 이 국제대회에 참가한 한국은 홍보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진보적인 산업발달 결과물이 없었기에, 곡물과 식품, 남녀의복, 일상용품과 수공예품, 조총과 투구 및 갑옷, 400년이 된 호준포 등을 출품했다. 한국은 이 대회 참가 의의를 독립국(중국에서 일본에도 속하지 않은)이라는 것을 알리는 데에 두고, 앞서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과는 다른 전통문화의 특징이 드러나는 물품으로 한국이라는 국가를 전하고자 했다. 1900년의 파리 박람회에는 민영찬이 주도하여 프랑스인의 자본을 바탕으로 대한제국관을 조성하였다. 참여한 품목은 비단, 도자기 장롱 자개장, 병풍, 금속제품, 그림, 책 등과 프랑스인이 모은 한국 관련 개인 소장품 등이었다(이각규, 2010: 5-53).
33) 1903년 오사카 내국권업박람회의 ‘학술인류관’에는 타이완, 류큐, 아이누인 등과 함께 한국 여인 2명(기생)이 전통의상 차림으로 한국식 주거 앞에 앉아 있었다. 1907년 도쿄 권업박람회의 ‘조선관’도 부속으로 오락이나 여흥을 목적으로 설치한 수정관에 한국 남녀가 전시되었다(이각규, 2010: 70, 75). 이는 기존 세계박람회를 통해 서양인의 ‘눈의 욕망’을 체득했던 일본이 자국의 권업박람회에서 ‘인종 전시’라는 차별적 시선이 작동하는 공간에 한국인들을 밀어 넣고 식민 욕망을 과시한 것이다.
34) 부산에서 개최된 「일한상품박람회」는 일본의 공산품 한국의 특산품이 전시되었는데, 이 박람회에 77,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참가하여 대규모 행사로 진행되었다(국학자료원, 1999: 894).
35) 이 박람회는 “거류지 개발 촉진, 일반의 지식 진보 향상, 한일 양 국민의 융화 친목”을 그 개최 취지로 내세우고 있다(京城府, 1930: 586).
37) 이 박람회에는 한국 각지 및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 북경 등에서 동종업계의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각종 산업관련자를 비롯하여, 요식업, 종교, 언론, 의학 · 약학 대회가 개최되었다(朝鮮總督府, 1916: 287-318). 이 조선물산공진회 주최 측은 “이 호기회를 이용하여 각종 대회가 한양 성내에서 개최되고 방문하는 자가 끊이지 않는다”(朝鮮總督府, 1916: 287)며 공진회와 더불어 개최된 각종 대회를 소개한다.
38) 의생 제도는 1914년부터 시행되었다. 의생들을 자신들의 애매한 위치를 매우 초조하게 여겼고, 1915년의 경성공진회를 계기로 전선(全鮮)의회를 구성하였다(1917년 5월 17일 해산). 전선의회에서는 회장에 지석영(池錫永), 부회장에 최동섭(崔東燮), 총무에 김수철(金壽哲), 임원에 조병근(趙炳瑾), 경도학(景道學), 김영훈(金永勳) 등을 선임하였다(정지훈, 2004: 231).
39) 한국 각 지방의 한방의생들은 공진회도 구경하고 총독부의원도 방문하였고, 의생대회 발기에 앞서 조직에서는 지방의 의생들에게 철도 할인권도 보내주었다(『매일신보』, 1915년 10월 14일). 의생들은 의생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의생대회결의안에 보이는 3대 과제는, ① 의생대회를 조직하고, ② 의학회보를 발행하며, ③ 약재수용(需用)의 개량(『매일신보』, 1915년 10월 27일)을 꾀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항목인 약재의 수급과 사용의 문제가 중요시된 부분을 보아, 일본인들의 학술적 발표와 질문의 장이었던 일본인들의 의학대회와는 대조적으로 의사로서의 생계를 어떻게 이어갈지에 초점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40) 각 기사는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는데 그 제목은, 「醫生大會 발기, 공진회를 기회삼아」, 1915년 9월 17일; 「醫生大會와 賜金」, 1915년 10월 27일; 「醫生大會, 寺內正毅(총독) 임장)」, 1915년 10월 24일; 「醫生大會와 결의안」, 1915년 10월 27일; 「醫生大會준비: 회장은 창덕궁 내 비원, 철도는 할인권을 발송」, 1915년 10월 14일; 「醫生大會 절차」, 1915년 10월 9일; 「全鮮醫生大會」, 1915년 10월 6일; 「全鮮醫生大會」, 1915년 9월 27일; 「社說: 告 醫生大會」, 1915년 10월 27일로, 수차례에 걸쳐 광고하였으며, 철도할인권을 발송하는 등 그 모집에 열심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醫生대회 발기-공진회를 기회삼아」를 보면, 의생대회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대회는 경성 한방의인 최동섭 등을 중심으로 의생대회가 발기되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 훈화하고, 강화회(講話會)가 열렸는데, 사토(佐藤)가 소독 및 방역에 대해, 모리야스 렌키치(森安連吉)가 감염병에 대해, 무로야 슈타로(室谷脩太郞)가 최근의 외과학에 대해, 지석영이 한약학의 유래와 발전에 대해, 조병근(趙炳瑾)이 의학과 생명에 대해, 지의찬(池義燦)이 의계 습관 개량에 대해 강연하였다. 강연 내용은 의학대회에 비해 추상적이며 계몽운동에 가깝다.
41) 이 조선전람회에는 ‘전조선약업대회’(경성약업조합)은 개최되었으나, 의학대회도 의생대회도 개최되지 않았다(朝鮮博覧會京城協賛會, 2017: 1-360).
43) 근대 한국의 위생경찰 관련 역사적 계보는 정근식의 연구에 자세한데,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의 위생업무는 독립적인 위생행정 기구가 아닌 경찰이 담당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이 식민지형 위생경찰 제도의 특징이다. 1919년 이후에는 지방제도 개편을 통해 경무부 위생과 과장에 원칙적으로 의사가 임명되었고, 지방의 위생 문제는 경무국장의 지시와 매년 경무국에서 열리는 도 경찰 부장회의의 결정에 따라 도 경찰부 위생과가 업무를 수행했다(정근식, 2011: 239-240, 248-249).
44) 그 외에는 적십자 애국부인회,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자혜의원(함남, 대구), 신문사(경성일보), 오노다(小野田)시멘트 위생조합, 충남도농회(道農會) 및 축산조합연합회, 평양의학전문학교, 강원도결핵예방협회 등에서도 개최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5) 신문기사에는 거의 모든 기사에 이 일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이들의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다. 예를 들어 “일반의 위생사상 향상”(『매일신보』, 1922년 8월 19일), “일반의 주의를 환기”(『京城日報』, 1925년 6월 18일), “일반에게 편의”(『朝鮮新聞』, 1926년 10월 1일), “일반인의 인기”(『매일신보』, 1927년 6월 20일), “일반인의 마음에 깊이 주의를 끈 것”(『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일반인으로부터 다대한 호평”(『朝鮮新聞』, 1933년 9월 28일), “일반의 관람에 기여”(『매일신보』, 1936년 9월 10일) 등 대중 관람자가 주요 타깃이었다.
51) 경기도 위생과가 개최하는 위생전람회에 스오 마사스에의 실명이 종종 등장한다. 그는 1909년 아이치 현립의학전문학교(愛知県立医学専門学校)를 졸업하고 개업하였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16년 시가(滋賀)현 기사 위생 주사(技師衛生主事), 1919년 아이치현 기사 학교 위생 주사 등을 역임하며 야학으로 설계, 제도, 건축을 배울 정도로 의사를 넘어선 정치를 꿈꾸었다. 결국은 출세를 위해 한반도 행을 택했고 식민지 위생행정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다. 그의 출세욕은 성공의 가도를 달리며 유럽의 위생 시찰(1926년 9월-1927년 7월), 개성 자혜병원 의관, 경기도 마약 중독 환자 치료소 등을 관리하는 역할 끝에 소록도갱생원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생전람회 구체적인 개최 상황과 경기도 위생과의 스오와 관련된 논고는 현재 준비 중이다.
57) 광주를 비롯하여, 강진, 광양, 고흥, 곡성, 구례, 나주, 담양, 순천, 여수, 영광, 영암, 목포, 보성, 장성, 장흥, 해남 및 당시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였던 제주도까지 위생전람회가 개최된 것을 알 수 있다.
60) 이러한 위생전람회 개최 장소로서 학교는 주로 초등교육기관, 즉 소학교(이리소학교-『釜山日報』, 1925년 11월 25일), 청주소학교-『朝鮮新聞』, 1926년 10월 1일)나 보통학교(보성군공립보통학교-『매일신보』, 1924년 3월 21일), 홍원공립보통학교-『中外日報』, 1927년 8월 6일)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 고등보통학교(평양남신정 제2여자보통고등학교-『매일신보』, 1922년 8월 19일), 고등여학교(목포고등여학교-『매일신보』, 1926년 11월 10일) 등에서도 개최되었다. 개최 지역은 앞서도 살펴본 바 있지만 전국 각지와 더 작은 단위의 소도시까지도 선정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61) 1920년 사이토 미노루(斎藤実)총독의 시정(施政)연설의 키워드가 ‘내선융화(内鮮融和)’였는 데, 이는 일본에 ‘조선문화’와 ‘조선인’을 이해시키는 형태로(박광현, 2013: 78) ‘중심과 주변으로 구성된 하나의 일본’을 구축하고자 하는 문화정치의 취지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62) 「위생포스터 전(衛生ポスター展)」, 『朝鮮新聞』, 1939년 2월 6일; 「병도 경성을 청산, 전염병 퇴치를 위해 도와 부가 협력하여, 다음 달 조선 최초 위생주간」(病都京城を淸算, 傳染病驅逐の 爲道と府が協力して, 來月朝鮮初めて衛生週間), 『京城日報』, 1933년 7월 16일.
67) 「파노라마로 위생사상을 선전, 조선박람회에 출품하다, 경찰국 위생과의 시도」, 『京城日報』, 1929년 3월 28일; 「전남도 위생과에서 화류병 예방 선전」, 『釜山日報』, 1932년 3월 26일.
68) 「영화와 강연의 밤 개최, 위생사상을 선전」, 『매일신보』 1938년 2월 6일; 「장질부사 예방코자 위생 당국 총동원, 예방약과 선전영화를 가지고」, 『조선중앙일보』, 1935년 9월 8일; 「방역 주간 제 3일 위생시설 개선일, 변소와 위생통을 수리하라, 활동사진 무료 공개」, 『매일신보』, 1934년 6월 6일; 「衛生活動写真會」, 『매일신보』, 1921년 7월 9일; 「衛生活動写真會」, 『朝鮮新聞』, 1925년 8월 2일; 「京畿衛生課 活寫衞生宣傳 모의 환자와 發疹病豫防」, 『중외일보』, 1927년 3월 12일; 「映畵와 講演의 밤 開催: 衛生思想을 宣傳 忠南道衛生課에서」, 『매일신보』, 1938년 2월 6일.
69) “밤에는 활동사진이 매일 밤 계속 있어서 전체 관람자는 낮에 관람하러 오는 사람만 계산한 것으로 밤은 따로 계산하는데, 매일, 밤 만여 명에 달하는 중으로, 스오 위생과장의 말에 의하면, 밤에 활동사진을 영사할 때에는 일본과 조선인이 반씩이나 낮에는 일본인이 십분의 일밖에 안 된다고 말하더라”(『매일신보』, 1921년 7월 5일).
70) 지방 소도시 위생전람회에서 상영된 활동사진의 대중 동원 차원의 막강한 능력에 대하여는, 1920년대 초기 기사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장성(長城)경찰서(『매일신보』, 1922년 12월 16일), 진해경찰서(『朝鮮時報』, 1923년 3월 17일), 황해도 경찰부 위생과에서 주최하고 해주(海州)에서 열린 위생전람회(『매일신보』, 1923년 10월 29일) 평남 강동(江東)경찰서(『京城日報』, 1924년 4월 10일) 등, 관련 기사가 1940년대 개최까지 꾸준히 보인다. 위생전람회 개최에 활용되었던 선전 장치 및 영화에 관한 구체적 연구는 현재 준비 중이다.
73) 삼림조합연합회가 주관하여 황해도에서 개최한 위생전람회 같은 경우, 참가하는 6개(殷栗, 安岳, 信川, 載寧, 鳳山, 黃州) 지방이 각 지방의 특성에 맞게 전시실을 디자인했으며, 여기에는 위생품 전시와 더불어 “국화품평회, 불꽃놀이, 보물찾기, 아동작품 발표, 수렵대회, 연료절약경기회, 임업 강연, 임업활동사진 영사” 등을 펼쳤다고 보도된다(『朝鮮新聞』, 1930년 10월 26일; 『釜山日報』, 1932년 10월 7일).
74) 인용문에서도 이러한 측면이 보일 뿐 아니라, 가축위생에 대하여는 위생전람회에 “방역실, 가정실, 학교위생실, 가축위생실, 체육위생실, 중독실, 특별실로 나누어 각 실 모두 풍부한 참고품”을 진열(『朝鮮時報』, 1934년 8월 1일)하는 식으로 삽입되었고(『釜山日報』, 1926년 3월 30일; 『朝鮮新聞』, 1940년 1월 13일), 아예 적 극적으로 도농회(道農會) 및 축산조합연합회가 주최가 되어 위생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朝鮮新聞』, 1930년 10월 14일).
75) 목포에서 개최된 위생전람회는 농어촌의 특성을 살려 수산과 축산 회장을 설치하며, 비행기와 군함까지 동원되었던 공진회와 함께 개최되기도 했다. 전남 목포와 같은 소도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전람회 기사로, 「목포만(木浦灣) 앞을 압도하는 2대 공진회장: 기일의 절박과 함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하다」, 『釜山日報』, 1926년 10월 23일; 「목포만 앞을 압도하는 2대 공진회장: 기일의 절박과 함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하다, 수산과 축산의 상세 제2회장에 집주되다」, 『釜山日報』, 1926년 10월 24일; 「목포만을 압도하는 2대 공진회장; 기일의 절박과 함께 인기 최고조에 달하다; 비행기와 군함(軍艦) 특파(特派): 교육품전람회, 위생전람회: 운임 할인 기차기선증 발급」, 『釜山日報』, 1926년 10월 27일 등 연달아 나오는 기사를 통해, 지역 전체가 동원된 행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77) “충청북도 위생과 주최 위생전람회는 (중략) 창고 132평을 채우는데, 보건위생에 관한 각종 모형과 표본, 전염병과 그 외의 각종 모형과 표본, 가축전염병의 표본, 미신 치료 용구, 특별실로 화류병, 피임 용구, 각 월별 태아 표본, 소독약과 그 외 약품, 한약, 특히 결핵 예방에 관한한 구역을 설치하기로 되었다”(『매일신보』, 1936년 10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