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陀羅尼(혹은 摠持, dhāranī), 眞言(mantra), 呪(vidyā)는 원래 별개의 어원을 지녔지만, 통상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Shinohara, Koichi. 2014: 324). 이 글에서는 사료에서 ‘주문’이라고 언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라니’를 사용한다.
3) 고려시대 불교 승려의 치유에 대해서는 (김영미, 2010: 165-177; 김수연, 2021: 1-34; Kim, 2000: 43-70) 참조.
7) 승재색 <다라니·만다라>에 대해 언급한 연구는 (최성은, 2008: 118; 정은우·신은제, 2017: 116; 손희진, 2021: 46-53; 엄기표, 2023: 189-192)이 있다. 이 가운데 승재색 <다라니·만다라>에 대해서는 손희진의 글이 가장 상세하다.
8) 잘 알려진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제작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복장물 납입의 가장 이른 사례는 985년 일본 <교토 세료지석가여래입상>이다. <세료지석가여래입상>에 관한 최근 연구 성과는 (데시마 다카히로[手島 崇裕], 2020: 40) 참고. 우리나라에서는 불상에 복장을 납입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문헌 사료는 1313년에 國淸寺의 석가여래좌상을 조성하면서 민지가 지은 閔漬, 「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 『東文選』 “腹藏諸物欲安置”가 있다.
9) 물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을 필사하거나 목판으로 찍어 탑 안에 봉안한 사례는 이미 <황복사지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탑이 아닌 불상 내부에 복장물로 봉안된 사례에 주목한 것인데, 불상 내부에 복장물을 봉안하려면 내부의 공간을 확보해야 하므로 가장 쉬운 것은 역시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불상이었다.
14) 『高麗史節要』 권20, 충렬왕 4년 10월, “新置必闍赤, 以朴恒金周鼎廉承益李之氐等爲之.” 비칙치는 왕권 강화를 위해 충렬왕대에 측근 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사행정의 핵심 기능을 맡은 기구이다. 비칙치에 대해서는 (이정훈, 2018b: 345-382) 참조.
15) 1277년에 정5품 정랑을 지냈고(이 글의 각주 11과 사료 2 참조), 1291-1295년에 염승익이 찬성사 지위에 있었음은 이 글의 제3장 ‘1292년 염승익 제작 <보협인다라니·만다라>’ 및 이 글의 <표1> 참조.
20) 7축으로 이뤄진 <감지은자 『묘법법화경』> 사경은 1915년에 개성시 덕암동에 있던 <개성 남계원터 칠층석탑>(이하 <남계원탑>)을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권희경, 2003: 1-22)[그림 5]. 1283년 7월 6일 충렬왕은 염승익에게 <남계원탑>을 수리하게 했는데, 염승익은 탑을 수리한 후 안에 <감지금니 『묘법법화경』>을 사경해 넣은 것이다. 남계원 석탑을 수리하라고 한 내용은 『高麗史』 권29, 세가 권제29, 충렬왕 9년 7월 “命廉承益·孔愉, 修玄化寺, 又修南溪院·王輪寺石塔.”
21) 이 불화에 대해서는 (김정희, 2001: 144-146) 참조.
25) 승재색은 신문색과 마찬가지로 관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승재색은 經像修補都監이 승재색으로 이름을 바꾼 것인지 아니면 경상수보도감 아래에 별도로 승재색을 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동일 기관 혹은 유관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최연식, 2023: 154).
26) <강릉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고려 후기 추정)과 <상원사 문수동자상>(1466년)은 서로 제작 시기가 다르지만, 1599년에 조각승 원오에 의해 함께 중수되었으며, 두 상 모두 1292년 <다라니·만다라>가 발견되었다. 이 문수보살상의 복장 유물에 대해서는 (유근자, 2022: 476-523) 참조.
27) ① 兼으로 읽은 연구는 정은우·신은제, 2017: 116, ② ‘청렴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본 연구는 (손희진 2021: 50) 참조.
28) ③의 견해는 (남권희, 1991: 60; 2002: 318) 참조.
29) 강석은 성은 廉이 아니라 康이며, 경상수보도감에 7번째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그의 직위는 內侍左右衛保勝郞將이다. 경상수보도감에 염승익은 2번째 이름이 적혔으며, 正議大夫千牛衛攝上將軍判大僕寺事이다(이 글의 표1 참조). 한편 익명의 심사자 가운데 ‘관직명+성’으로 표현된 다른 사례가 있다면, 함께 제시해 주면 좋겠다는 지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찬성사염’과 마찬가지로 ‘관직명+성’으로 이뤄진 또 다른 사례는 찾기 어려웠다. 다만 염승익의 경우 그가 당시 워낙 유명한 인물이어서 ‘찬성사염’이라고만 적어도 충분히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름이 『고려사』에만 26회, 『고려사절요』에도 21회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31) 1291년 허공의 墓誌石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묘지석의 크기는 가로 63.5cm, 세로 79cm, 두께 3.5cm이며, 소장품 번호는 신수 5867이다. 1295년 「麟角寺普覺國師碑」는 현재 군위 인각사에 있다.
32) 찬성사는 정2품에 해당하며, 1275년에 평장사를 찬성사로 고쳤다. 『고려사』 志 卷第三十 百官一 “贊成事成宗置內史侍郞平章事·門下侍郞平章事. 文宗定門下侍郞平章事·中書侍郞平章事, 各一人, 又於中書門下各置平章事, 並秩正二品. 忠烈王元年, 改爲僉議侍郞贊成事·僉議贊成事.”
33) 「文敬公之墓誌」, “評娵賛成事上将軍廉公承益之女.” (김용선, 2006: 660).
34) 민지, 「군위인각사보각국사탑및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고려시대 사료 DB, https://db.history.go.kr/goryeo/gskoCompareViewer.do?levelId=gsko_001_0760, 검색일: 2024.12.18.
36) 염승익이 1292년에 판감찰사를 지냈음은 『高麗史節要』 권21, 충렬왕 18년 4월 “判監察事 廉承益,” 1295년에 판감찰사사를 지냈음은 『高麗史節要』 권21, 충렬왕 21년 1월 “判監察司事 廉承益” 참고.
37) 1292년 염승익이 判監察司事였기 때문에 <다라니·만다라>의 제작자가 염승익이 아니라 鄭可臣(1224-1298)으로 본 연구는 (손희진, 2021: 50의 각주 115) 참조. 찬성사가 다른 관직과 겸직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찬성사는 判監察司事, 判版圖司事, 世子貳師와 겸직으로 ‘찬성사 판감찰사사’, ‘찬성사 판판도사사’, ‘찬성사 세자이사’로 불린다(『고려사』 권 31 세가 권제31 충렬왕 23년 8월). 印侯(1250-1311) 역시 찬성사와 판감찰사사를 겸직하여 ‘重大匡 僉議侍郞贊成事 判兵曹·監察司事’였다(『高麗史』 世家 卷第三十三忠宣王 卽位年 7月). 한편 익명의 심사자 가운데 한 분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 찬성사와 판감찰사사를 겸직한 인물들은 대체로 두 관직명이 함께 기술되어 있는데, 염승익은 ‘찬성사 판감찰사사’가 아니라 ‘판감찰사사’만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이다. 이에 대해 관직명을 모두 기술한 경우는 “누구누구를 임명하다”와 같은 공식적인 인사 기록인 반면, 임명 관련 기록이 아닌 경우에는 대표 관직명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염승익의 관직명을 언급한 기사는 1292년 “사건이 발각되었음에도 다행히 모면하고는 판감찰사 염승익에게 붙어,” 1295년 “판감찰사사 염승익이 병이 들어서 면직되었다”와 같이 사사로운 기록이어서 전체 직명을 모두 서술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표 1] . 원간섭기 감찰사의 지위 상승과 역할에 대해서는 (이정훈, 2018a: 5-39) 참조.
38) 정2품 판감찰사와 정2품 찬성사는 계급 서열에 큰 차이가 없어 겸직이 가능하지만, 근시는 정4품으로 찬성사와 겸직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앞선 연구자의 의견대로 ‘찬성사 겸 근시강석’으로 읽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 글의 각주 27 참조.
39) 고려 후기 충렬왕, 충선왕대의 독특한 복수 관직, 동시 복무 관행에 대해서는 (이강한, 2019: 293-341) 참조.
41)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발견된 1007년 <보협인다라니경>에 대해서는 (서병패, 2009: 75-79) 참조.
42) <개심사 아미타상>은 제작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바닥 봉함목에 적힌 묵서를 통해 1280년 승재색에서 중수한 사실이 밝혀졌다. <개심사 아미타상>에 대해서는 (최성은, 2008: 111-151) 참조.
43) 1276년 <다라니·만다라>는 <개심사 아미타상> 이외에도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에서 발견되었다.
44) 글의 끝부분에 수백명의 동지 이름이 手決로 적혔는데, 1/3 지점에 염승익의 수결이 보인다. 염승익의 수결을 찾아 알려준 최연식 교수께 이 글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46) 1292년 승재색 <다라니·만다라>의 명문에 등장하는 염승익을 비롯한 11명에 대한 분석, 그리고 염승익이 발원한 불교미술 등에 대해서도 「1292년 승재색 제작 <보협진언·팔엽삼십칠존만다라>와 염승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예정이다.
48) 고려시대 의학 처방에 따른 실질적인 의료 행위에 대해서는 (이현숙, 2007: 7-45; 이경록, 2022a: 123-151; 2022b: 235-265). 특히 중세 민간 의료인을 영리적 의료행위자인 業醫와 비영리적 의료행위자인 知醫 구조로 이해한 연구 성과가 주목된다 (이경록, 2022b: 235-265).
49) 신라인들의 『무구정경』 선호에 대해서는 (박광연, 2023: 28-36).
50) 『寶篋印經』은 동일 경전이 1022A,1022B 두 권이 있으며, 이 가운데 범자 다라니가 나오는 경전은 1022A이다. 이 글에서는 중국과 한국에서 유통됐던 T1022A본의 경문을 인용하였다.
51) 『무구정경』과 『보협인경』을 비교하여 『무구정경』은 망자의 왕생을 기원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협인경』은 현세의 안정을 희망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본 연구는 (곽승훈, 1996: 135) 참조.
52)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보협인경』은 모두 全文을 한자로 찍은 것이어서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다라니·만다라>와는 차이가 있다. 월정사의 『보협인경』은 2004-2006년 보존처리 후 분리를 시도했으나 경전 종이가 너무 얇아 해체를 중단한 상태이다.
53) 『寶篋印經』(T19 1022A: 712a05-08), “若有善男子善女人, 安此法要, 安置此陀羅尼於塔像中者, 我等十方諸佛, 隨其方處恒常隨逐, 於一切時, 以神通力及誓願力加持護念.” T는 『大正新脩大蔵経』 즉 Taishō Tripi aka의 약어이며, 순서대로 권, 경전번호: 쪽수를 가리킨다.
58) 다라니의 배치, 진언의 이름 등을 세심하게 밝혀준 방정란 선생님께 이 글을 빌어 감사드린다. 이 내용 역시 필자의 별도의 논문에서 상세히 밝힐 예정이다. 한편 <다라니·만다라>에 추가된 「육자대명진언」 「결정왕생정토진언」, 「상품상생진언」은 망자 추선을 위한 성격이 분명한데 치유와 관련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심사자의 의견이 있었다. 위의 세 진언은 고려 후기에 유행했는데, 대표 사례는 고려 후기의 문신 양택춘(梁宅椿, 1172-1254)의 묘지명 뒷면에 새겨진 「상품상생진언」, 「육자대명왕진언」, 「결정왕생정토주」가 있다(허흥식, 1984: 143-148). 염승익은 <보협인다라니·만다라>를 제작하면서 당시 유행했던 위의 세 진언을 포함하여 그 효과를 배가하려 했으며, 살아있는 자의 치유 목적과 함께 망자의 극락왕생을 염원했을 것이다. 치병과 정토왕생을 함께 기원하는 약사신앙에 대해서는 이 글의 다음 각주 참조.
59) 시대를 막론하고 治病, 長命, 淨土(=極樂)往生은 약사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다. 『佛說藥師如來本願經』, T14 0449:406b “若欲往生西方極樂世界阿彌陀如來所者 由得聞彼世尊藥師 琉璃光如來名號故 於命終時 有八菩薩乘空而來 示其道徑 即於彼界種種異色波頭摩華中 自然化生.”
60) 팔엽삼십칠존만다라의 도상에 대해서는 (손희진, 2021: 6-31).
61) 이전 연구에서는 ‘금강계만다라’라고 불렀으나, 중앙의 만다라를 금강계와 태장의 결합이라고 본 연구는 (이선용, 2018: 263-264; 손희진, 2022: 99-131)이 있다.
63) 『高麗史』 권123, 열전 제36, 嬖幸 廉承益, “公主病, 命脫衰入內, 設法席, 穿掌祈佛.”; 『高麗史』 권31, 세가 권제31, 충렬왕 23년 5월 “壬午, 公主薨于賢聖寺, 王移御僉議府.”
64) 불상 조성 이후 여러 차례 개금이 이뤄지면서 처음에 총 몇 매의 ⓒ<다라니·만다라>를 납입했는지 분명히 알기 어렵다. 개금 과정에서 최초 복장물이 교란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알려진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모두 64장이 발견되었다.
67) 익명의 심사자로부터 염승익의 <보협인다라니·만다라> 제작과 주술 치유가 유명해지기까지 역사적 맥락을 다루어 주어야 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즉 신라의 혜통 및 밀교의 전통적 질병치료가 어떻게 유구하게 내려왔는지에 대한 설명, 신라 통일기 밀교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흥륜사의 呪師라는 존재, 그리고 주술적인 방식으로 질병을 고치는 방식이 약과 침뜸을 사용하는 의승들의 치료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해왔음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없어 아쉽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며 주어진 지면 내에서 염승익의 주술 치유에 집중하다 보니 역사적 맥락을 짚지 못했음을 밝혀 두며, 후속 논고에서 이를 보완하도록 하겠다.
69) 불복장 안에 의복을 넣는 관습의 원인에 대해서는 (김연미, 2017: 165-196) 참조.
70) 손희진은 14종 265매로 파악했다(손희진, 202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