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학에서의 인삼활용과 한계, 1660-1900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The Medicinal Usage and Restriction of Ginseng in Britain and America, 1660-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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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article demonstrates the medicinal usage of ginseng in the West from 1660 to 1914. Asian[Korea] ginseng was first introduced into England in the early 17th century, and North American ginseng was found in the early 18th century. Starting from the late 17th century doctors prescribed ginseng to cure many different kinds of ailments and disease such as: fatigue general lethargy, fever, torpidity, trembling in the joints, nervous disorder, laughing and crying hysteria, scurvy, spermatic vessel infection, jaundice, leprosy, dry gripes and constipation, strangury, yellow fever, dysentery, infertility and addictions of alcohol, opium and tobacco, etc. In the mid-18th century Materia Medica began to specify medicinal properties of ginseng and the patent medicines containing ginseng were widely circulated.
However, starting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medicinal properties of ginseng began to be disparaged and major pharmacopoeias removed ginseng from their contents. The reform of the pharmacopoeia, influenced by Linnaeus in botany and Lavoisier in chemistry, introduced nomenclature that emphasized identifying ingredients and active constituents. Western medicine at this period, however, failed to identify and to extract the active constituents of ginseng. Apart from the technical underdevelopment of the period, the medical discourses reveal that the so-called chemical experiment of ginseng were conducted with unqualified materials and without proper differentiation of various species of ginseng.
1. 들어가며
과연 서양 사람들도 과거에 인삼을 복용했는가? 이 질문은 인삼의 의학적 활용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가장 근본적으로 제기되는 의문이다. 인삼은 이미 17세기 초 세계 무역시장에 등장했다. 근대 초 중상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유럽 국가들에게 중요한 자원이었던 향신료와 약재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1617년에는 일본에 체류하던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이 본국에 고려인삼을 보내 상품가치를 타진했는가 하면, 아프리카의 희망봉에서는 인삼과 유사한 약초를 얻기 위해 네덜란드와 영국 상선들이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Foyster, 1900: 18). 해외로 진출한 유럽인들은 상품가치나 의학적 가치가 높은 식물들을 자신들의 땅이나 식민지에 이식해 재배하려 했고 그런 야욕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식민플랜테이션의 건설과 새로운 식물학의 발달로 이어졌다(Chakrabarti, 2010: 42, 111, 171; Schiebinger and Swan, 2005: 2-3).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의 왕립학회와 프랑스의 왕립과학원에서는 인삼의 식물학적 특성과 효능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또한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약초재배원에서는 아시아에서 들여온 인삼을 재배하려는 노력이 펼쳐졌다.
유럽 땅에서의 인삼재배는 결코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18세기 초 북미대륙에서 우연히 인삼이 발견되었다. 중국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예수회 수사 자르투(Pierre Jartoux, 1668-1720)가 만주에서 본 인삼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적이 있는데(Jartoux, 1713; 237-247), 그 책을 읽은 예수회수사 라피토(Joseph François Lafitau, 1681-1746)가 1716년 캐나다 몬트리올 인근에서 비슷한 식물을 발견하여 교단에 보고했던 것이다(Lafitau, 1718). 곧 프랑스와 영국 상인들의 주도로 북미대륙의 인삼이 채취되어 중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American Indians)이 동원된 ‘인삼찾기 광풍(a rage after Ginseng)’이 일어났다(Kalm, 1770: 116-117; Dillwyn, 1843: 37). 북미삼 무역은 18세기 중반까지 당시 대중국 무역의 선두주자였던 영국이 주도했으며, 북아메리카 동북쪽 항구에서 일단 영국이나 프랑스의 항구로 보내진 뒤 다시 광저우(廣州)로 이동하는 긴 여정을 거쳤다. 그런데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후 중국과 직접교역을 꾀하면서 영국의 대중국 인삼무역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1784년 미국이 중국에 보낸 최초의 상선 <중국황후(Empress of China)>에 실린 가장 중요한 상품은 다름 아닌 인삼과 모피였고, 인삼은 전체 선적의 60%를 차지했다.
인삼이 이처럼 중요한 세계사적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학 전반은 인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인삼에 대한 학술적 접근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공계 분야의 주도로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s)의 활성효과 등 약리작용에 관한 연구에 집중되어왔다.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인문사회학적 인삼연구는 주로 동아시아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동아시아 인삼의 교역, 삼업, 무역정책 등의 분야를 다루어 왔다(설혜심, 2016: 273-278). 최근 글로벌사(Global History)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서구의 산업화와 근대화의 원인을 식민지로부터 수입한 동식물이나 사치품의 영향에서 찾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Berg, 2004; Chakrabarti, 2010), 그런 연구에서도 아직 인삼을 거론하지 않아 인삼의 중요성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2012년 월리스(Patrick Wallis)는 근대 초 영국으로 수입된 약재(medical drugs)의 소비를 통해 유럽 의료의 변화를 살펴보는 연구를 내놓은 바 있는데, 인삼은 구체적인 분석에서는 제외된 채 유럽에 수입된 의료품(medical items)의 하나로써 목록에만 올라있을 뿐이다(Wallis, 2012: 41).
그런데 2015년부터 서양역사 속에서도 인삼의 족적을 추적하는 일련의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혜심은 17-19세기 영미권에서 발행된 책과 논문, 그리고 신문기사를 분석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서구사회에서의 인삼무역의 중요성과 인삼담론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해부한 바 있다(설혜심, 2015; 2016; Sul, 2017). 또한 이혜민은 프랑스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본초학이 발달해 간 맥락 속에서 17-18세기 인삼에 대한 프랑스 지식사회의 관심과 연구물을 분석했다(이혜민, 2016). 2017년에는 미국 하버드 대학 과학사학과 교수 쿠리야마(Shigehisa Kuriyama)가 인삼이 세계적인 교역품이 되어간 과정을 개괄하면서 인삼수요가 컸던 일본이 중국과 조선에서 인삼을 들여와 재배하여 동아시아에서 인삼생산국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주장했다(Kuriyama, 2017). 이들 연구는 인삼교역과 인삼에 대한 서구의 지식과 이미지라는 영역에서 인삼의 위치를 되살려내고 있지만 서두에서 제기한 의문인 인삼이 과연 서구의 의료에 실제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공백은 사실 인삼이 동양의 전유물로 인식되게 된 중요한 원인이자, 왜 서양에서 인삼의 소비가 활성화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핵심적인 열쇠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이 글은 17세기 인삼이 유럽에 소개된 이후 서양 의료에서 실제로 사용된 구체적 사례들을 복원한다. 인삼을 처방한 의사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임상에서의 인삼활용을 증명하고, 약물학서, 본초학서와 약전에서 정의한 인삼의 의학적 효능을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인삼활용의 전통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학의 주류에서 인삼을 배척해 나간 양상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분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서양에서 인삼과 큰 연관성을 지닌 미국과 영국을 주목한다. 영국은 왕립학회의 기관지 『철학회보』(The Philosophical Transactions)의 창간호(1665)에서부터 인삼을 주목했으며, 18세기 초반 미국에서 인삼이 발견되자 영국과 미국의 지식인들은 상호 활발하게 교류하며 인삼을 연구하고 교역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동서양의 인삼교역은 영국이 주도했는데, 18세기 후반부터는 독립국가 미국이 서구 최대의 인삼생산국이자 수출국으로 부상하며 영국의 자리를 대체해 갔다. 하지만 두 나라는 의학과 약학 분야에서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문화적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은 영국에서 인삼이 ‘과학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1660년대부터 본격적인 화학약품(chemical drug) 중심의 약전(pharmacopoeia)이 등장하는 20세기 이전인 1900년까지의 긴 흐름을 다루는 것이다.
2. 인삼의 실제 처방과 인삼함유 매약
인삼은 영국의 왕립학회의 기관지 『철학회보』의 창간호에 소개되면서 영국 과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는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Thévenot, 1665: 249)[1,].1680년이 되면 영국의 한 의사가 인삼을 이용해 성공적인 치료를 했다는 임상사례집이 출판되었다. 심슨(William Simpson)이 쓴 『동인도에서 수입한 닌징이라 불리는 뿌리에 대한 고찰』(Some Observations Made Upon the Root Called Nean, or Ninsing, Imported from the East-Indies)이 그것이다. 요크셔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던 심슨은 중세 이래 지속되어오던 갈레노스 의학에 반대하며 파라켈수스가 이끌던 ‘새로운 화학철학(new chemical philosophy)’의 방법론에 심취한 젊은 의사였다. 인체를 소우주로 보면서 질병을 장기의 화학적 불균형으로 풀이하는 새로운 화학철학은 다양한 광물질(minerals)을 새로운 약재(medicinal drug)로 주목하고 있었다. 심슨은 온천수에 함유된 광물질의 의학적 효용을 둘러싸고 당대의 저명한 의사들과 1660년부터 무려 20년간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설혜심, 2001: 153-156). 당시 부유한 환자들을 유치할 수 있었던 온천요법과 더불어 그가 새롭게 주목한 약재는 인삼이었다. 심슨은 스스로가 인삼을 사용해 환자를 치료한 사례를 7쪽 가량의 팸플릿으로 펴냈는데, 왕립학회 회원인 콜웰(Mr. Colwell)에게 보낸 편지를 발췌한 형식의 선전물이었다. 이는 지방인 요크셔에 거주하던 심슨이 수도 런던에서 펼쳐지던 인삼에 관한 최신 논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심슨은 선물로 받은 인삼 한 꾸러미(parcel of ginseng)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한 결과 “놀라운 성공”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Simpson, 1680: 3). 인삼은 그가 오랫동안 매달려온 스카버러(Scarborough) 온천수 다음으로 “세계 최고의 약”이며, 폐질환에 관해서는 온천수보다 효과가 더 좋다고 밝히기도 한다. 또한 교황이나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같은 저명인사들이 인삼을 높이 평가하며 큰 효험을 본 약재라고 소개한다. 여기 언급된 교황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보일은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자제로 어릴 적부터 유럽 곳곳을 널리 돌아다녔기 때문에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인삼을 경험했을 가능성도 있다. 심슨은 보일이 자신에게 “인삼이 수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늘이 보내준 약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썼다(Simpson, 1680: 7).
심슨은 자신이 실제로 환자들에게 인삼을 처방해 성공한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했는데,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심슨은 이 팸플릿에서 특히 인삼이 폐결핵에 특효라고 강조한다. 폐결핵을 불러오는 원인과 무엇이든 간에 인삼이 아주 효과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개선한다는 것이다(Simpson, 1680: 6).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건대, 심슨은 인삼을 사용하여 주로 폐질환과 전반적인 기력저하, 고열과 통증을 개선하는 데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심슨이 사용한 인삼은 동아시아산 인삼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초반 북미대륙에서 인삼이 발견되면서 북미산 인삼을 이용한 치료사례들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북미산 인삼을 최초로 의료에 적용한 유럽인들은 프랑스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1697년 최초로 왕립과학원(Académie Royale des Sciences)에서 인삼에 대한 소고가 발표되었는데 그 후 학자들은 꾸준히 인삼을 연구하여 1718년 출판된 『왕립과학원사』(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를 통해 당대 인삼탐구를 종합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은 프랑스 국왕의 주치의였던 사라쟁(Michel Sarrazin, 1659-1734)이다. 그는 1697년 캐나다령 프랑스(퀘벡)에 파견되어 1700년에경 다수의 식물표본을 프랑스로 보냈는데, 그 가운데 북미산 인삼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라쟁은 사실상 최초의 북미삼 발견자였지만 1716년 인삼에 대한 보고서를 예수회 교단에 보냈던 라피토에게 그 공을 빼앗겼던 셈이다.
사라쟁은 프랑스 왕립과학원과 교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북미산 인삼을 이용해 환자를 치료했던 사례들을 적어 보냈다. 첫째, 전신부종(anasarca)에 시달리는 환자를 인삼으로 만든 음료로 치료했고, 둘째, 인삼을 잘 끓여서 습포제(cataplasm, 濕布劑)로 사용하여 오래된 궤양을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았으며, 셋째, 인삼을 달인 탕약(decoction)으로 목욕을 하거나 주사기로 체내에 주입해서 창상(wound, 創傷) 치료에 큰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Vaillant, 1717: 707). 앞서 언급했던 심슨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부종이나 창상 등 다른 질환이 언급된다는 사실과, 습포제나 목욕제, 주사액 등 인삼을 약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흥미롭다.
18세기 중반이 되면 인삼으로 치료했다는 질병의 종류가 더욱 다양하게 나타난다. 스웨덴 출신의 탐험가이자 식물학자인 캄(Peter Kalm, 1716-1779)은 1749년 캐나다 퀘벡과 몬트리올 지역에서 인삼채취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격했다. 캄은 인삼이 중국으로 수출되기도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천식치료, 건위제(stomachics, 健胃劑), 그리고 임신을 촉진하는 데 사용된다고 기록했다(Kalm, 1770: 116). 1788년에는 영국 런던의 왕립의과대학이 출판한 약전에서 데커(F. Dekker)라는 의사가 경련과 발작환자에게 반복적으로 ‘эi’[1 scruple, 20grain]을 투여해서 성공적인 치료를 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2,]. 한편, 인삼을 사용해서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생식기궤양을 앓던 중년 남성에게 독미나리(hemlock)과 인삼으로 만든 탕약을 처방했으나 오히려 궤양이 커졌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Schwediauer, 1784: 98-99), 성병에 감염된 중년남성에게 황산아연(white vitriol)과 인삼을 처방하고 찬물목욕을 시켰으나 효과가 없었다고도 한다(Wallis, 1790: 53-54). 비록 실패한 사례들이지만 인삼이 생식기 질환 치료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오스트리아 왕비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치의였던 벨칭젠(Count Belchingen)은 인삼의 효능을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1786년 영국의 내과의사 코프(A. Cope)와 함께 번역해 펴낸 『인삼차의 효능과 성분에 대한 소고』(Essay on the Virtue and Properties of the Ginseng Tea)는 영국과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Belchingen and Cope, 1786). 차의 수입이 늘면서 심각한 무역 역차에 고민하던 영국과 미국에서 북미산 인삼으로 만든 인삼차를 마시자는 주장이 애국담론과 맞물려 크게 환영받았던 탓이다(Carey, 1790: 126-127; Adair, 1775: 362; Carver, 1779: 4-5)[3]. 벨칭첸은 차의 부작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대체품인 인삼차야말로 모든 허약함을 치료할 강력한 치료제이며 선원들에게 괴혈병을 막아줄 예방약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삼차를 이용한 치료 사례 12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며 그 모든 경우에서 “오직 인삼차로만 행복하게 건강을 되찾았다”고 적었다.
이 가운데 오몬드 가에 사는 귀부인의 사례에서는 인삼차를 복용한 뒤 4인치 가량의 커다란 기생충 한 마리와 130마리에 달하는 기생충을 코로 배출했다는 내용이 덧붙여 있다. 기생충은 유럽의학에서 신체적 쇠약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중요한 원인으로 다뤄져 왔는데 인삼의 처방과 기생충 배출을 연관 짓는 기록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흥미로운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19세기가 되면 영국보다는 미국에서 출간된 의학담론에서 인삼활용의 구체적 사례들이 더 많이 나타난다. 그 이전에는 북미산 인삼무역을 영국이 독점하다시피 했었지만 미국이 독립한 후 인삼을 직접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운송비 부담에 따른 가격경쟁력에서 밀리게 된 영국은 결국 인삼무역에서 손을 떼게 된다. 영국은 인삼보다 더 큰 이익을 주는 아편무역으로 방향을 선회했다(Evans, 1985: 22). 인삼에 대한 논의가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타나게 되는 현상도 이런 상황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830년 필라델피아에서 출간된 약초학 매뉴얼에 따르면, 캐나다의 아메리카 인디언과 미국 의사들이 인삼을 사용하여 천식, 허약한 위장, 쇠약, 뼈의 통증, 성병, 결석 등을 치료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삼 팅크가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데 사용되었다는 내용도 눈길을 끈다. 구체적으로 컬터(Dr. Culter)와 그린웨이(Dr. Greenway) 같은 의사가 오랫동안 인삼을 사용해서 성공적인 치료를 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경련, 현기증과 신경통, 마비 및 심지어 이질(dysentery)에 탁월한 치료제였다고 강조한다. 두 의사는 10-20그레인 정도의 적은 용량의 인삼을 사용해서도 뚜렷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또한 트로이에 사는 의사 헤일즈(Dr. Hales)는 인삼을 강장제 및 열병회복에 사용해 만족할 만한 효과를 보았는데, 독특하게도 인삼의 뿌리뿐만 아니라 잎도 사용했다(Rafinesque, 1830: 57).
20세기 전환기에 미국의 의사 클로스(J. Q. A. Clowes)는 스스로가 수년 동안 인삼을 사용해 치료한 사례들을 적었다. 극심한 류머티즘을 앓던 중년 남성이 여러 의사를 전전했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자신을 찾았는데 몇 주동안 치료했지만 환자는 낫지 않았고 허리와 장에 통증까지 생겼다. 클로스는 인삼을 처방했고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삼을 사용한 뒤 환자가 돌아와서는 지난번 약이 너무 잘 들어서 이번에도 같은 것으로 다시 처방해 달라고 말했다. 나는 인삼이 류머티즘을 치료하는데 있어 건강한 위액분비를 촉진하여 소화액의 원만한 흐름을 돕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인삼이] 관절의 신경을 괴롭혀 류머티즘 염증을 일으키는 과다한 산의 분비를 중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Koehler, 1912: 13).
클로스는 인삼을 잘 익은 파인애플 쥬스와 함께 투여할 경우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펩신(pepsin)의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흔히 경험하는 소화불량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삼을 좋은 와인과 적확한 양으로 잘 조합하면 격렬한 위통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삼 재배자 가운데 만약 소화불량이나 위장장애를 앓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갖고 있는 약[인삼]을 중국인에게 다 팔지 말고 본인이 섭취하라고 처방하고 싶다”고 썼다(Koehler, 1912: 14).
인삼은 주로 뿌리를 이용해 가루나 침제(infusion, 浸劑), 탕약, 농축액 형태의 약을 만들었다. 18-19세기 유럽 약전에서 인삼의 용량은 가루인 경우 적게는 10-20그레인으로부터(Hill, 1751: 591) 좀 더 강하게는 20-30그레인(Buchan, 1838: 677), 혹은 20-60그레인(Willich, 1804: 157)을 처방하도록 권장되었다. 유명한 본초학자 힐(John Hill, 1716?-1775)은 인삼으로 만든 침제는 보통 1-2드램(dram, 1/8 fluid ounce)에서부터 1파인트까지 처방된다고 기록했다(Hill, 1751: 591). 그런데 약학박사인 라피네스크(C. S. Rafinesque)는 인삼을 가루로 만들어 동량의 꿀이나 사탕을 섞어 사용해 왔다고 밝히며, 그렇게 만든 약이 위장장애와 신경계통의 치료와 원기회복에 효과적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Rafinesque,1830: 57). 인삼 가루를 약으로 쓴 의사들은 같은 양의 꿀이나 설탕, 혹은 “오렌지껍질, 생강, 감초, 계피, 복숭아 씨앗”을 섞어 사용했다고 한다(Rafinesque, 1830: 56). 앞서 살펴본 사례에서 엿볼 수 있듯이 간혹 인삼의 잎을 사용하는 의사들도 있었다. 특히 캐나다 지역과 미국의 필라델피아, 켄터키, 버지니아 등 인삼이 많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인삼의 잎을 이용해 약차(藥茶 혹은 茶劑)를 만들어 썼다(Rafinesque, 1830: 57).
환자에게 내려진 인삼 처방은 보통 탕약이나 농축액 형태가 빈번했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있었다(Aikin, 1785: 80). 런던에서 활동했던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우드빌(William Woodville, 1752~1805)은 인삼을 약으로 쓸 때 가장 권장할 만한 방식은 뿌리를 달인 탕약(decoction)이라고 주장했는데, 수분기가 충분한 탕약이야말로 농축액과 더불어 인삼의 좋은 성분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Woodville, 1810: 151). 당시 약물학서와 본초학서적들은 탕약을 만드는 법을 자세히 소개하곤 했다(Alleyne, 1733: 72; WNott, 1794: 41-42; Pomet, 1748: 195)[4].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인삼뿌리 1드램을 썰어서 1/4파인트 물에 넣고 끓여 2온스가 될 때까지 졸인다. 그 다음 설탕을 조금 섞는다. 탕약이 차가워지자마자 마시고, 같은 용량을 아침저녁으로 반복한다. 한번 끓인 인삼은 두번째로 탕약을 만들 때 사용해도 되는데, 왜냐하면 언제나 두 번 끓이는 것은 허용되기 때문이다(Goldsmith, 1819: 792).
인삼팅크를 만드는 법도 나타나는데, 특히 중국산 인삼과 북미삼을 분명히 구별하면서도 약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두 종류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점이 눈에 띈다.
진짜 중국 인삼 혹은 북미삼을 말린 뒤 거칠게 가루로 빻아서 다섯배 무게의 알코올에 담가 8일간 둔다. 마개로 꽉 막은 병에 담아 어둡고 시원한 곳에 두고 하루에 두 번 흔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팅크를 부어서 거르면 연한 레몬 빛이 도는 투명한 액체가 되는데 인삼뿌리와 같은 향이 나고 첫 번째 맛은 쓰지만 다음에는 달콤 쌉싸름해지고 산성반응(酸性反應)이 있다(Millspaugh, 1887: 70-72).
영국에서는 최소 18세기 중반부터 인삼으로 만든 완제품 형식의 의약품을 시중에서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매약(賣藥), 즉 의사의 처방 없이 구할 수 있는 약물로 유통되었다. 매약은 중세 말부터 존재했던 특허제도에 근거해서 상표를 등록해 독점권을 보호받고자 했던 약이라서 특허약(Patent Medicine, 特許藥)이라고도 불린다. 18세기가 되면 영국과 미국에는 이런 약들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돌팔이들이 들고 다니며 팔았는가 하면 신문광고나 전단지를 통해 널리 홍보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앤토니 박사(Dr. Anthony)의 아일랜드 알약(Irish Pills)>이라는 약은 적극적인 광고로 유명했는데, 인삼 성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특별히 위장병 치료에 특효가 있다고 선전되었다(Devlin, 1790). 한편, 1787년 『타임즈』(The Times)지에는 심각한 히스테리를 낫게 한다는 인삼차 광고가 실렸는가 하면, 심지어 인삼추출물로 만들었다는 안약도 대대적으로 광고되었다.5) 또한 1790년에는 “지난 5년간 신경증에 시달리는 5만 명의 환자들이 인삼차만으로 증상이 완화되었다”는 내용의 광고성 기사가 나타나기도 했다.6) 19세기 중반에는 눈에 띠는 독특한 제품이 나타났는데, 런던의 외과의사 고스(Dr. Morace Goss)가 내어놓은 <인삼연고>였다. 이 제품은 ‘불임, 불안, 성기능 장애’ 치료에 효과적인 제품으로 엄청나게 홍보되었다[7].
미국에서는 19세기 중엽 인삼제품을 광고하기 위한 고급스런 팸플릿이 배포되기도 했다. <코나인 박사(Dr. Conine)의 인삼과 아욱 시럽>을 선전하기 위해 보스턴의 한 제약회사가 펴낸 『인삼[북미삼]의 흥미로운 역사』(Interesting History of the Panax: Quinquefolium)가 그것이다(Wilson, Fairbank & Co., 1851). 코나인 박사는 중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를 여행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동양에서 인삼이 누리는 명성이며 인삼발견의 역사 등이 상세히 개괄되어 있다. 책자의 앞부분에는 제품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데 이 시럽이 지금까지 대중이 경험한 어떤 약보다 효과가 좋을 것이라면서 위장기능장애와 폐기능 장애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질환에 특효라고 선전했다. 뒷부분에는 실제로 이 약을 사용한 사람들의 경험담이 실려 있는데, 격렬한 기침, 발작, 각혈, 목과 위에서 토해내는 가래 등을 진정하고 치료하는데 큰 효험을 보았다는 증언들이다(Wilson, Fairbank & Co., 1851: 14-16).
3. 약물학(藥物學)에서 규정한 인삼의 효용
17세기 유럽에는 아시아와 아메리카대륙, 심지어 아프리카에서까지 들여온 약재가 넘쳐났다. 차크라바티(Pratik Chakrabarti)는 이 시기 유럽에 그 이전보다 최소 25배가량 많은 약재가 유입되었다고 분석하면서 그 결과로 유럽의 약물학(Materia Medica)이 급격하게 팽창했을 뿐만 아니라 약물학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Chakrabarti, 2010: 171). 약물학의 발달은 약전(pharmacopoeia, 藥典)과 약재의 카탈로그(catalogue)의 출판을 부추겼고, 수입된 약재들은 유럽의 지식세계를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유럽의 약물학은 외국산 약재를 ‘토속전통(native tradition)’이라고 부른 범주에 포함시켰는데, 인삼은 그런 토속 약재 가운데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약초였다. 인삼에 대한 설명에는 중국에서 엄청나게 숭앙받는 약초로, 황제가 독점하며 만병통치약으로 쓰인다는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8) 『필라델피아 의학사전』(The Philadelphia Medical Dictionary)을 비롯한 많은 약물학 관련서적들은 아시아삼과 북미삼의 구별 없이 인삼을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종(species)”이라고 설명한다(Coxe, 1808: no page).
18세기 중반부터는 약물학에서 인삼의 의학적 효능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즉, 단순히 만병통치약이라고 기술하기보다는 인삼이 치료 효과를 발휘하는 특정 질환들을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유명한 본초학자이자 약국경영자, 극작가로도 활동하며 수많은 저서를 내놓은 힐은 인삼을 “유럽의 의사들이 경련과 현기증, 그리고 모든 신경장애에 훌륭한 약이라고 평가하며 원기회복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 가운데 최고의 하나로 추천한다”고 기록했다(Hill, 1751: 591). 이 내용이 실린 힐의 『약물학사』(History of the Materia Medica)가 교과서처럼 회자되었던 만큼이나 이 내용은 이후 출판된 다른 약물학 관련 문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9]. 한편, 인삼차 홍보에 열을 올렸던 벨칭젠은 인삼이 “모든 쇠약증에 최상의 치료제”라고 주장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은 증상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달, 담즙이상성 질환, 나병(leprosy), 괴혈병, 악성괴혈병(malignant scurvy), 폐결핵성 쇠약, 전반적인 허약체질, 여성의 쇠약, 탈수와 변비, 배뇨곤란, 열병, 오줌소태, 선원들과 더운 기후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괴혈병, 황열병, 탈수 등의 장애(Belchingen and Cope, 1786: 7).
18세기 후반 영미권에 널리 퍼진 엘리엇(John Elliot)의 포켓판 약물학서는 인삼을 자극제(stimulant)적인 성질을 가진 약초로 분류하면서 인삼이 강장제, 통증완화제, 진경제(antispasmodic, 鎭痙劑)로 사용된다고 기술했다(Elliot, 1791: 12-13, 78, 91). 그런데 다른 저자들은 그런 완화와 진경효과 때문에 인삼을 각성제보다는 오히려 완화제(demulcents)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Ewell, 1827: 673; Bigelow, 1818: 94; Barton, 1818: 201). 인삼의 대표적 효과가 각성이냐 진경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지만 이 약초가 원기회복, 특히 위장에 활력을 주고 전반적인 원기를 증진하는 데 매우 효과가 있다는 점에는 일반적으로 동의했다(Pomet, 1748: 194; Rafinesque, 1830: 57; Quarterly Journal of Agriculture, 1841, 131). 같은 맥락에서 수종증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소화력을 촉진하기 위해 인삼처방이 권해지기도 했다(Wallis, 1778: 293). 좀 더 광범위하게는 당시 의학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중시되었던 준비단계, 그리고 건강유지를 위해 정기적으로 실시했던 정화작용(purgation, 방혈 혹은 하제를 이용한 설사 등) 후의 원기 보충을 위해 인삼을 처방하라는 지시도 나타난다[10].
그런데 인삼의 효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강정제(aphrodisiac, 强精劑, 혹은 최음제)로서의 특질이다. 사실 인삼은 당시 유럽에서 성욕을 증진하는 최음제로서 그 명성이 자자했고, 영국의 의사들도 이를 인지하고 있던 바였다(Cullen, 1772: 276; Wright, 1966: 292; Hill, 1751: 591; Hanbury, 1770: 690). 힐은 『약물학사』에서 인삼이 “동양에서는 여자를 너무 밝힌 나머지 발기부전이 된 남자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명시한 바 있다(Hill, 1751: 591). 그런데 약물학서나 약전에서는 인삼의 강정제적 성격은 크게 논의되지 않고 오히려 간혹 그 효과를 부정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자로, 유명한 철학자 흄(David Hume)의 주치의였던 쿨렌(William Cullen, 1710-1790)은 엄청난 강정제라는 인삼의 특성을 부정했다(Cullen, 1772: 276). 쿨렌은 다른 약물학서를 통해 자신이 알고 지내는 한 중년신사가 몇 년 동안 날마다 이 뿌리를 상당히 많이 씹었는데도 생식기능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Cullen, 1789: 161). 이런 논의는 대중적 차원에서의 인삼에 대한 인식과 의학계의 이론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약물학 담론들이 인삼을 해독제(antidotes to poison)로 규정하곤 했다는 사실이다. 1811년에 출간된 미국의 본초학서에서는 인삼을 해독제로 분류한 바 있다(Titford, 1811: 25). 1830년의 약물학서에서도 인삼으로 만든 팅크제로 술주정뱅이를 해독하는 사례를 다뤘는가 하면(Rafinesque, 1830: 57), 1841년의 논문에서도 인삼이 상습적인 차와 아편의 복용으로 인해 발생한 독한 부작용을 해소해 준다고 주장했다[11,]. 차나 아편, 알코올뿐만 아니라 담배도 해독해야 할 대상이었다. 워싱턴 D. C.에서 활동하던 의사 이웰(James Ewell)은 인삼이 담배로 인해 망가진 체질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훌륭한 담배 대체재’라고 정의했다(Ewell, 1827: 674). 실제로 이 시기 북미 여러 지역에서 인삼은 담배와 마찬가지로 ‘씹는 간식(a masticatory)’의 하나로 애용되었고 약국에서 파는 인삼의 주 용도가 담배를 대체할 주전부리였다는 주장도 있다(Rafinesque, 1830: 57; Ewell, 1827: 674; Barton, 1818: 201; Bigelow, 1818: 95). 인삼은 몸에 해로운 담배와는 달리 오히려 건강을 증진하기 때문에 최상의 대체품이라고 평가되었는데, 그 효과를 최대한 누리려면 인삼을 씹어 생긴 침까지도 꼭 삼켜야 한다는 지침도 나타났다(Ewell, 1827: 674).
이 시기 영미권 약물학이 기술한 인삼의 해독제적 특질은 최근에 제기된 쿠리야마의 주장을 재검토하게 하는 부분이다. 쿠리야마는 일본이 18세기 중반부터 인삼재배에 성공한 뒤 중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후반이 되면 중국시장에서 그 수요가 북미산 인삼을 앞지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삼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 이유가 저렴한 가격뿐만 아니라 만주나 고려 인삼이 갖지 못한 효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이 바로 해독제로서의 성분이었다고 주장한다. 아편중독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중국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해결책을 신선한 일본삼에서 찾았다는 것이다(Kuriyama, 2017: 70). 일본삼의 수요가 폭증했다는 주장도 사실관계를 검토해야 할 부분이지만, 오직 일본삼만이 해독제적 성격을 지녔다는 주장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만주삼과 고려삼, 북미삼을 별다른 구별 없이 다룬 영미권의 약물학에서조차 이미 인삼의 해독제적 효능이 다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리야마의 주장은 정보의 부족 혹은 민족주의적 편견에서 나온 오류로 보인다.
한편, 인삼은 다른 수입약재(foreign drug)의 대체품으로써 그 용도를 인정받기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근대 초 유럽에서 대체 약제, 특히 해외산 약초의 대체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향신료와 약재가 보석만큼이나 귀한 자원이었던 중상주의 시대에서 대체품의 발굴은 교역을 독점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고 의학이 지속적으로 발달할 토대를 만드는 기본 요건이었다.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지로 부상하던 런던에서는 이름을 날리던 약제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들여온 엄청난 식물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효과를 내는 약초를 찾느라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Chakrabarti, 2010: 171).
인삼은 우선 감초(liquorice)의 대체재로 거론되었다. 인삼의 맛과 특성이 다른 어떤 약보다 감초에 가깝기 때문에 감초추출물이나 감초알약 대신 인삼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Bigelow, 1818: 94; Coxe, 1818: 406). 회향(fennel) 또한 그 의학적 성분과 효능에서 인삼과 유사하다는 기술이 다수 나타나는데, 이는 거꾸로 값비싼 인삼 대신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자라던 흔한 회향을 이용하여 비슷한 효과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Lewis, 1782: 142; Quincy, 1782: 64; Rutty, 1776: 56-57). 더욱 중요하게는 인삼이 기나피(Peruvian bark, cinchona)의 대체재로 규정되었던 사실이다. 키니네의 원료가 되는 기나피는 16세기 후반 남미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설사와 말라리아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게 되었고, 이미 17세기 유럽에서도 말라리아 치료에 사용된 바 있다. 그런데 18세기에는 기나피가 통풍치료에도 특효약으로 알려지면서 그 수요가 더욱 커졌다. 의사들은 기나피를 구하기 어렵다면 인삼을 대체품으로 쓸 수 있다고 추천하곤 했으며, 인삼을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기나피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Wallis, 1778: 213).
한편,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삼의 화학적 성분(chemical constituent)을 분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시기는 아직 초보적 단계이지만 근대약학이 시작되는 시기로, 모르핀, 키니네, 니코틴, 코카인, 스트리크닌(strychnine)등의 중요한 화합물들이 원재료로부터 분리되고 심지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때이다(Petryna, Lakoff and Kleinman, 2006: 2). 이제 약물학 연구자들은 인삼의 맛을 보고, 향을 맡아 특성을 찾았던 과거의 관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물이나 알코올에 담가 추출한 성분을 분석하거나 기름을 짜서 불에 붙여 보는 등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했다(Bigelow, 1818: 94; Balfour, 1857: 1401).
최초로 인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은 라피네스크(Constantine Samuel Rafinesque, 1783-1840)로 알려진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유럽 여러 곳에서 거주했던 라피네스크는 미국에 정착한 후 서구세계에 널리 알려진 식물학자이자 동물학자가 되었다. 그는 “인삼은 내가 많은 실험을 한 식물 중 하나이다”라고 말했다(Rafinesque, 1830: 56). 그가 인삼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2천 년 동안의 실험을 통해 ‘만병통치약’임이 입증된 중국의 인삼과 북미대륙에서 흔히 나는 북미삼이 과연 같은 효능이 있는지가 궁금해서였다. 1830년 출판된 그의 저서는 당시의 맥락에서 인삼에 대한 화학적 분석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엿보게 한다.
[인삼의] 뿌리는 상쾌한 장뇌와 같은 냄새가 난다. 맛은 달콤하고톡 쏘며 약간 향긋한 쓴 맛이 있다. 인삼은 신선한 상태나 마른 상태 모두 매우 온건하고 잘 맞는 각성제다. 또한 신경진정제, 강장제, 피로회복제, 원기회복제, 완화제, 감미료, 거담제, 건위제, 혈액희석제, 하제(下劑) 등등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인삼의 활성성분은 장뇌와 흡사한 특별한 물질 때문인데, 나는 그것을 파나신(Panacine)이라고 부르겠다. 희고, 톡 쏘는 성분으로 알코올과 물에 녹으며 장뇌에서보다 더 분명히 나타난다. 인삼은 또한 휘발성 기름, 당분, 점액(mucilage), 수지(rasin, 樹脂) 등의 성분도 함유하고 있다(Rafinesque, 1830: 55).
그런데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갸리그(Samuel S. Garrigues, 1828-1898)가 라피네스크의 인삼분석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갸리그는 필라델피아 약국경영자의 아들로 약사수업을 받은 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1854년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미국삼에 대한 화학적 고찰」(Chemical Investigations on Radix Ginseng Americana)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었다. 이 학위논문은 인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 세계 최초의 논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1736년 파리의과대학에서 생바스트(Lucas Augustin Folliot de Saint-Vast)가 「인삼, 병자들에게 강장제 역할을 하는가?」(An infirmis à morbo viribus reparandis Gin Seng?)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했고, 그 논문이 서구 대학시스템 안에서 생산된 최초의 논문으로 알려진다(Saint-Vast, 1736). 하지만 생바스트의 논문은 약초에서 의학적으로 유용한 성분을 추출할 수 있다는 ‘의화학’적 논문이기는 하지만 아직 화학식 등이 도입되지 않은 18세기 초의 상황에서 성분(ingredient)에 대한 뚜렷한 논의가 없고, 오히려 인삼의 효능에 대한 근거를 중국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가져오는 등, 아직은 ‘화학적’인 분석논문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반면, 갸리그가 대학에 몸담은 시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화학적 분석이며 화학식이 크게 발달하고 있어서 ‘근대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갸리그는 논문의 서두에서 라피네스크가 인삼에서 ‘휘발성 기름, 당분, 점액, 수지 등’은 발견했지만 더욱 중요한 성분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그런 미흡함이 곧 자신을 이 주제를 파고들도록 만든 원인이었다고 말한다(Garrigues, 1854: 7). 그러면서 그는 인삼을 찬물에 우리는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실험한 결과 라피네스크가 말했던 당분은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상당량의 알부민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시료를 이용한 다양한 화학적 실험법을 통해 전혀 새로운 두 성분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성분들에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1. Panaquilon(C24H25O18) 2. Panacon(C22H19O8)(Garrigues, 1854: 14). 갸리그의 논문은 근대화학의 발달과정과 인삼의 화학적 분석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별도의 연구를 통해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1905년에는 미국에서는 미시건 대학교 의과대학의 동종요법학과(Homeopathic Department) 연구자 집단이 진행한 흥미로운 실험보고서가 출판되었다[12,]. 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인삼은 탁월한 원기증진제로, 특히 노쇠에 따른 기능저하를 개선하는데 특효약이라고 전제한 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미시건 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의 하네만 대학(Hahnemann College of the Pacific)이 공동으로 펼친 실험의 결과를 보고한 내용이었다. 20세기 전환기 미시건 지역은 미국에서 인삼채취와 재배를 주도하던 곳으로 인삼과 관련된 산학협력 프로젝트가 활발했다. 하네만 의과대학이 공동으로 참여한 이유는 하네만 대학의 특성과도 관계가 있다. 동종요법의 창시자인 독일의 의사 하네만(Christian Friedrich Samuel Hahnemann, 1755-1843)의 이름을 땄을 정도로 동종요법에 큰 관심을 두었던 이 대학은 미국 여러 곳에 의과대학과 병원을 운영하며 실험적인 의술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알려진 인삼’(Koehler, 1912: 10)을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13].
정확한 실험의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이 실험에는 미시건에서 9명, 샌프란시스코에서 8명이 참여했다. 17명의 피실험자 가운데 7명의 실험결과는 부정확성 혹은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실험에 참여한 미시건 대학의 듀이(W. A. Dewey)박사는 “한때 인삼이 의학적 효능이 없다고 말해졌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고 아마도 편견에 의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인삼이 과거에 누렸던 명성이 온전히 과학적 근거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Koehler, 1912: 9-10). 과거 인삼은 주로 일반적인 기력저하를 개선하고 성욕을 촉진하는데 사용되었는데, 동종요법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도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거 빈약했던 인삼의 효능에 대한 이해가 이제 좀 더 확고한 과학적 근거를 갖추고 지식을 확장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삼은 분명히 뇌척수 억제제(cerebro-spinal depressant), 신경작용요소(nervous element)가 지배적일 경우 최대 효과가 있으며 정신적 영역이 관여된 경우 [그 효과가] 더욱 확연하다. 우리는 정신과 성적 영역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지를 알고 있는데 성적 심리(sexual mind)에 장애가 있는 경우 이 약이 최상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실험결과를 통해 비록 원하는 모든 효과는 아닐지라도 [인삼을] 지금껏 알려져 온 것보다는 훨씬 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약에 위치시키는 바이다(Koehler, 1912: 10).
앞서 언급했듯이 인삼의 강정제로서의 효능은 서구의 정통 의학담론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20세기 전환기에 이루어진 이 실험에서 주목하는 것은 성적 능력과 인삼과의 상관관계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의학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요소가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 이 또한 추후에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겠다.
4. 약전에서 퇴출된 인삼?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삼은 근대 초 영미 의료영역에서 이미 친숙한 약재이자 처방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인삼의 활용은 더 활성화되기는커녕 다른 수입 약재들에 비해 그 입지가 위축되어갔다. 뿐만 아니라 인삼은 동양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화되면서 오늘날 서구 의학사에서 인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문화적 차원과 의학의 영역에서 공히 인삼을 경원시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서구문화가 인삼에 동양성을 부여하고 거리두기를 했던 양상은 기존 연구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설혜심, 2015; 2016; Sul, 2017) 이 글에서는 의학 분야에 집중하여 인삼을 배척해 간 현상과 원인을 살펴보기로 한다.
3장에서 언급했듯이 영미권의 약물학서는 인삼의 효능을 구체화 해 나갔는데, 18세기 후반부터는 같은 장르의 문헌에서 인삼의 효능을 폄하하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이를 대변하는 가장 두드러진 담론은 서구 약전에서 인삼이 퇴출되었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유명한 식물학자 커티스(William Curtis, 1746-1799)는 1783년에 발행한 약초 카탈로그에서 인삼을 “약초의 하나로, 런던과 에든버러 약전에는 들어있지 않다”고 기술한 바 있다(Curtis, 1783: 44). 커티스의 식물학서들은 당대 큰 호응을 불러일으킨 선구적인 저술로서 상당한 파급력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의 발언은 이후 다른 문헌들에 계속 복제되고 전파되었다. 19세기 초에 발간된 여러 약물학서에서도 인삼을 “과거에는 영국의 약물학에서 다루었던 식물이나 지금은 아마도 빠졌을 것”이라는 내용이 나타나며, “영국 약전에는 없지만 프랑스 약전에서는 인삼을 아직도 포함시키는데 그 이유가 [그것을 발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권위를 존중해서일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Ainslie, 1826: 154).
하지만 이런 주장들이 완벽하게 사실은 아니다. 커티스의 발언 이후인 1788년 출판된 『영국 왕립의과대학 신 약전』(The New Pharmacopoeia of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에서도 인삼을 매우 효과적인 약으로 자세히 묘사한 바 있고,[14,] 1797년판 『에든버러 신 약전』(The Edinburgh New Dispensatory)에서도 여전히 인삼을 다루었기 때문이다(Lewis, 1797: 165). 미국에서는 1818년에 출간된 『약물학』(Compendium Florae Philadelphicae)에 인삼이 실려 있었고(Barton, 1818: 200), 심지어 1887년에 발간된 본초학서에서도 “미국 약전(the U. S. Pharmacopeia)의 최종개정판에서는 더이상 싣지 않으나 다른 약전에서는 간단히 언급된다”는 내용이 발견된다(Millspaugh, 1887: 70). 즉, 1887년 개정되기 이전의 판본, 즉 1882년판 약전까지는 인삼을 계속 다루어왔고,[15] 1887년 당시에도 인삼을 다루고 있는 다른 약전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18세기 말 서구 약전에서 인삼이 완전히 퇴출되었다는 커티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그 후 약 백여 년 동안 인삼은 약전에서 계속 다뤄졌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발언이 나타났을까.
이 혼란은 부분적으로는 약전을 둘러싼 정의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시각에서 약전이란 의약품의 균질성을 보전하기 위해 제법, 성상, 성능, 품질과 저장방법 등에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전반기까지도 약전이란 사실 약을 다루는 광범위한 출판물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런 약전들은 대부분 약사가 아닌 의사들에 의해 출판되었고 아직 법적 구속력이 있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약전은 지역별로 생산되고 국지적으로 통용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약전은 일종의 개혁을 거치면서 사법적 권위를 가진 근대국가에 의해 승인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즉, 국가 차원의 약전(national pharmacopeia)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1780년대 영국에서는 에든버러 왕립 의과대학의 주도로 런던과 에든버러에서 출판되고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읽혔던 약전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818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약전』(Codex Medicamentarius Sive Pharmacopoea Gallica)가 국가의 승인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칙령에 의해 학계차원의 의학과 시중의 약 제조 관행을 결합시키며 공동의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사례를 참조하여 미국에서는 1820년 『The Pharmacopoeia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를 출간했다. 영국은 런던, 에든버러, 더블린의 약전을 통합하여 1864년 『The British Pharmacopoeia(BP)』을 출범시켰다(Sonnedecker, 1993: 151).
이런 과정은 무분별하게 존재하던 약전에 공적인 기준을 부여하는 작업이었다. 흔히 ‘표준화(standardization)’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약전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비이성적(irrational)’이라는 기준 하에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많은 약을 제외하게 되었고, 수십 종의 약재와 벌꿀 등을 섞은 테리아카(theriaca) 조제약은 간소화되거나 아예 약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직도 약의 원료로는 식물성 약재가 지배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약전의 개정에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인물로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가 거명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식물은 생장과정에 따라 약효도 다르고 약으로 조제하는 방법도 매우 다양했기 때문에 표준화를 위해서는 유효성분만을 주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도 정확할 일이었다(BMJ, 1885: 1026). 여기에 근대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의 영향을 받아 명명법이 개선되고 구체적인 유효성분(active principle)을 규명해가게 된다. 라부아지에의 명명법은 그 이전까지 별다른 기준 없이 사용되던 화합물의 명명법과는 달리 원소들의 이름이 곧 화합물의 구성성분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화합물을 기호로 나타내고 화학반응을 방정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당시 가장 정확하고도 정밀한 ‘과학적 언어’로 치부되었다. 1790년대가 되면 영국의 주요 약전에는 공공연하게 라부아지에의 이름을 공저자로 올리거나, 그의 화학적 방법론에 따라 개편된 약전이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다. 이 개혁은 기존 약전에 포함되었던 많은 식물들을 약전에서 배제하는 한편 식물의 전반적인 특성을 개괄하기보다는 유효성분만을 기록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BMJ, 1885: 1025). 하지만 아직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실험방법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식물의 유효성분을 규명하는 일은 무척이나 복잡하고도 불분명한 기술에 가까운 상태였다(Sonnedecker, 1993: 158).
이런 상황에서 인삼은 ‘광의의 약전’에는 계속 나타나지만 주요 약전에서는 제외되거나, 설사 수록될지라도 그 효능이 폄하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구 약전에서 인삼의 효능에 대한 내용 대부분이 인삼이 중국에서 누려온 엄청난 명성에 빗대어 기술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즉, “중국인은 인삼에 아주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믿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그 효능이 미미하다”는 식으로 말이다(Brookes, 1773: 42; Rhind, 1841: 529). 이처럼 영미권 의학 담론이 인삼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영국의 경우에는 미국이 인삼교역에 진출함으로써 영국이 인삼수급에 어려움을 겪게 된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영국에서는 인삼 값이 폭등했을 뿐만 아니라 구하기도 힘들었다. 쿨렌은 단적으로 “인삼은 너무 비싸서 우리가 약으로 쓸 수가 없다”고 기술했을 정도였다(Cullen, 1789: 161). 따라서 대내외적 상황으로 인해 수급에 제약을 받게 된 약재에 대해 거꾸로 효능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며 자존감을 지키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거꾸로 미국은 인삼이 지천에서 발견되는 ‘너무 흔한 것’이라서 약재로의 사용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 실제로 19세기 초 콕스(John Redman Coxe)라는 의사는 『미국 약전』(The American Dispensatory)에서 “중국에서는 인삼이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지만 미국인들은 정 반대로 이를 하찮게 여긴다. 왜냐하면 자기들 숲에 가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Coxe, 1818: 406). 라피네스크도 같은 맥락에서 인삼이 값이 싸고 흔하다는 이유로 무시된다고 불평하며 약재로써 인삼에 더 큰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호소했다(Rafinesque, 1830: 54).
그런데, 2-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영미 의학계가 인삼에 대한 정보나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임상에서도 인삼은 약으로 처방되었고 매약의 형태로도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약전의 개혁과정에서 인삼의 입지가 위축되어간 것 또한 사실이고, 인삼의 활용 또한 기나피 같은 다른 약제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를 의학적 차원에 국한시켜 분석해 보자면 당시 서구 의학계가 인삼에서 충분이 만족스러울만한 유효성분을 찾아내지 못했던 탓으로 보인다. 1820년대 서구사회는 기나피에서 키니네를, 커피에서 카페인을, 토근(ipecacuanha, 吐根)에서 에메틴(emetine)을, 아편에서 모르핀을, 담배에서 니코틴을 추출해 내며 열광했지만 인삼에서는 결정적인 활성성분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라피네스크나 갸리그가 인삼을 ‘화학적’으로 분석했지만 그 결과조차도 당시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했거나 큰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서구 의학계는 왜 인삼에서 만족할 만한 유효성분을 추출하는데 실패했는가? 물론 실험기술의 미발달과 같은 기술력의 부족도 큰 원인이었겠지만, 여기서는 영미 의학계가 남긴 인삼담론을 통해 당시 맥락에서 문제가 되었던 요소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
서구 의학계가 인삼의 유효성분 추출에 실패한 데는 무엇보다도 실험대상인 인삼, 즉 샘플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병통치약’으로써의 효능을 기대했던 실험자들은 그 신화의 주체인 동아시아삼이 아니라 북미삼, 심지어 인삼과 비슷한 유사식물을 이용해 실험을 진행하곤 했다. 17세기 초 유럽에 처음 들어온 인삼은 고려인삼이었고, 18세기 초까지도 인삼에 대한 과학계의 논의는 동아시아삼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초 북미삼이 발견된 이래 서구의 식물학자들은 인삼의 종류를 구별하려고 했고, 아시아산, 북미산, 일본산 등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구분법이 나타났다. 1753년에는 린네가 캐나다산 인삼을 두릅나무과(Araliaceae)의 Panax(만병통치약) genus(속) quinquefolius(다섯 잎)으로 규정했다. 결국 1842년 러시아 식물학자 마이어(Carl Anton Meyer)가 인삼에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면서 북미삼과 아시아삼을 분명하게 구별하게 된다.[16] 하지만 의료시장이나 의학계에 그런 구별법들이 널리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약국에서는 종종 인삼과 유사한 태국산 닌시(Siam Ninsi)가 섞여있거나 인삼으로 둔갑하기도 했다(Balfour, 1857: 1401)”는 증언이나, 만주나 한국에서 온 것으로 믿어졌으나 실제로는 일본에서 재배되는 닌시(Ninsi)가 우리에게 진짜 인삼으로 잘못 알려졌다는 증언은 이런 상황을 증명한다. 의사이자 식물학자였던 심스(John Sims, 1749-1831)는 다른이들의 실험을 언급하며 수입한 인삼이 아무런 효능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가짜 인삼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Sims, 1811: no page). 뿐만 아니라 인삼은 너무 비싸서 잘 처방되지 않기 때문에 약제사들이 사둔 인삼이 종종 너무 오래된 것이라서 효능을 잃는다는 불평도 발견된다(Stillingfleet, 1759: 179). 이런 상황에서 약물학서는 여러 종류의 인삼을 구별하지 않은 채 그 효능을 기술하는가 하면, 약전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인삼을 언급하는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인삼의 효능을 긍정적으로 설파한 문헌들 대부분은 아시아삼과 북미삼이 똑같은 식물이거나, 동일한 효능을 지닌 것이라 주장했다(Ewell, 1827: 672; Goldsmith, 1819: 791; Bigelow, 1818: 93; NIPS, 1846: 554). 더블린에서 출판된 루이스(William Lewis)의 『약물학 실험의 역사』(An Experimental History of the Materia Medica)에서는 “미국산 인삼과 난징(南京)으로부터 받은 인삼을 비교해 보면 외형적으로나 내적인 질에서도 어떤 차이도 관찰되지 않는다”고 쓰고 있을 정도다(Lewis, 1769: 393). 북미삼이 중국에서조차 진짜 중국삼으로 받아들여진다거나, 중국식의 우수한 가공(curing)을 거치지 않아도 그 효능을 인정받는다는 주장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심지어 닌진(Ninzin)이라고 불린, 인삼보다 열등한 성분을 지닌 유사식물의 원산지조차 미국과 중국이라고 규정했다(Lewis, 1769: 393). 1798년 출간된 미국의 백과사전은 Panax Ginseng을 다섯 종류로 나누며 북미삼과 만주삼을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는가 하면(Akin, 1798: 689-690), 1846년에 발간된 미국과학진흥협회(National Institution for the Promotion of Science, NIPS) 회의록에서조차도 북미삼의 원산지가 만주와 미국이라고 쓰고 있다(NIPS, 1846: 554).
이런 담론은 다분히 아시아삼과 북미삼을 동일시해야 할 목적성이 불러온 고의적 왜곡이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북미삼이 발견된 이래 아시아삼과 북미삼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연구나 문헌들이 이미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한국과 중국의 인삼은 희고, 건조된 상태에서 주름이 있으며, 표면이 전분과 비슷한 고운 가루로 뒤덮여 있다. 만주산과 다우리아(Dauria: 몽골·러시아·중국 국경지역)산 인삼은 노란빛이고 호박(琥珀)과 비슷한데, 건조된 상태일 때는 평평하고 매끈하다”[17]와 같은 기술이 그것이다. 19세기 초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영국에 수입된’ 인삼을 묘사한 문헌도 있는데 내용만 보더라도 아시아삼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커봤자 작은 손가락만한 굵기로, 3-4인치 정도의 길이인데, 종종 한쪽 끝이 갈라져 있다; 가로로 주름이 져 있으며 안쪽에는 심지 같은 것이 들어있고 안팎으로 노란 색을 띠며 뇌두가 있다(Goldsmith, 1819: 791-792).
그런데 동아시아삼과 북미삼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비판한 이들도 있었다. 라피네스크는 “거의 모든 식물학자들이 오늘날 중국과 미국삼이 같은 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가지가 다를 뿐만 아니라 미국삼만 보더라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다(Rafinesque, 1830: 53). 그는 중국의 의학저술가들도 중국인삼이 최소한 열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명한다면서 인삼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의학계 인사들 사이에서도 이 식물의 가치와 성분을 두고 이견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삼 가운데 최고의 종류는 아마도 다른 성분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비싸서 우리는 사용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키니네나 다른 약에 지불하듯이) 중국인들이 1파운드에 100달러나 지불한다는 사실을 비웃을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인삼[북미삼]도 그에 필적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데 노력해야 한다(Rafinesque, 1830: 54).
라피네스크의 이런 호소야말로 인삼에서 대표적인 유효성분을 규명하기가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방증하는 발언이다. 그는 “우리의 미국삼은 너무 약하기 때문에 1온스 정도까지 그 용량을 많이 사용해야만 한다”라면서 동아시아삼과 북미삼 성분에 차이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Rafinesque, 1830: 57). 이런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인삼의 효능이 미미하다는 서구 의학계의 주장은 임상이나 실험에서 동아시아삼보다 성분이 약한 북미삼을 사용한 결과였을 수 있다.
한편, 라피네스크는 서구 의사들이 인삼의 효능을 폄하하게 된 또 다른 이유로 너무 어리거나 나쁜 뿌리를 사용한 탓이라고 주장했다(Rafinesque, 1830: 57). 이 주장은 북미삼을 실험대상으로 삼은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북미삼 가운데서도 상태가 나쁜 삼을 사용했다는 비판이다. 그가 말하는 나쁜 인삼, 즉 질이 낮은 인삼은 주로 적절치 않은 시기에 채취한 인삼을 가리키는데, 이 문제는 라피네스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꽤 오래 전부터 지적해 왔던 사실이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캐리(Matthew Carey, 1760-1839)는 미국이 중국으로 수출한 인삼들이 썩어서 불평이 제기되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인삼채취는 10월의 가장 건조한 날씨에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인삼은 작렬하는 태양과 열기가 없는 날 캐야하며, 씻어서도 안 되고 캐는 즉시 잘 관리하지 않으면 효능을 잃는다는 것이다. 캐리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백인들이 시냇가에서 인삼을 씻는 모습을 보며 크게 웃어젖히곤 했다는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Carey, 1790: 576-577). 인삼에 대한 백인들의 지식 수준이 아메리칸 인디언들보다 훨씬 떨어졌다는 말이다. 다른 문헌들도 여름에 서둘러 인삼을 채취하는 관행을 비판하곤 했는데, 야생삼의 씨가 충분히 성숙해서 땅에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채취하는 바람에 북미대륙에서 인삼이 결국 멸종될 것이라고 경고했는가 하면, 아직 인삼이 성장하고 있는 여름에는 뿌리에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어야만 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충분한 약효를 지니지 못한 상태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Nash, 1898: 9).
그런데 북미삼의 효능 자체가 약하다고 생각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북미삼이 동아시아삼과 다른 종류여서가 아니라 생장환경, 특히 토양과 가공방법, 특히 건조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삼과 중국삼은 유사성이 크지만 생장환경과 건조법이 이 뿌리의 효능에 다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동양의 인삼의 유용성을 논한 문헌들의 신뢰한다면 더욱 그렇다(Millspaugh, 1887: 70).
사실 건조법은 북미삼의 수출과 관련해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주제였다. 중국으로 수출된 북미삼은 아시아삼에 비해 형편없는 가격으로 거래되었는데, 미국인들은 북미삼이 중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가 열등한 건조방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인삼은 높은 이익을 내는 중요한 수출품이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더 높은 가격에 팔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던터라 인삼의 가공법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초반 수출용 북미삼 가운데 가공삼(clarified ginseng)은 건조막삼(crude ginseng)에 비해 최소 두배의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의사들은 인삼 가공이 가져올 경제적 이익보다는 그것이 약효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에서 가공삼(clarified ginseng)을 만드는 방법은 흔히 인삼을 끓인 뒤 껍질을 벗기는 작업으로, 그 과정에서 뿌리가 투명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런데 이 가공마저도 12뿌리 가운데 한 뿌리 정도만 가능했다는 기록도 있다(Willich and Mease, 1804: 158). 그런 가공방식은 동아시아의 인삼 가공법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단순한 것이었고, 그 사실을 영미 의학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미 17세기 후반 영국의 왕립학회와 프랑스의 왕립과학원에서 인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이래 중국의 인삼 가공법에 관한 내용들이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는 인삼을 캔 후 약 10-15일간 땅에 묻어 보관하거나, 잘 씻어서 표면을 솔로 닦아내고, 훈증한다는 이야기는 많은 문헌에서 다루고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 복잡한 가공법도 속속 소개되었다.
중국에서는 인삼뿌리를 씻고 쌀이나 수수를 달인 물에 담근 뒤 그런 액체를 끓일 때 나는 증기를 쏘인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인들은 자연 상태의 건조법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투명한 인삼을 얻는다(Rhind, 1841: 529).
중국의 가공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미권에서는 그런 방식을 실제로 적용하지 못했거나, 적용했다 할지라도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힐이 “우리는 결코 중국인들처럼 인삼을 가공할 수 없다(Hill, 1758: 17)”는 자조적인 기록을 남긴 이래 영미권 인삼담론에서 건조법의 개선이나 발달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라피네스크는 인삼에서 충분한 유효성분을 추출해내지 못한 것이 자신들의 무지 탓이라고 인정했다(Rafinesque, 1830: 54). 이 말은 이미 1713년 영국 왕립학회에서 논의되었던 “유럽의 의사들도 인삼의 성분을 정확히 알아서 정확한 양을 처방한다면 큰 혜택을 줄 것(Jartoux, 1713; 237-247)”이라는 명제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현실화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발언이기도 하다. 17세기 인삼과 조우한 유럽은 실제 의료에서 다양하게 인삼을 활용했지만, 유효성분 추출이라는 단계에서 실패했고, 이는 결국 인삼의 활용이 위축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5. 나가며
오늘날 동양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인삼은 서양에서도 이미 17세기부터 의료에 사용되었다. 이 글에서는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영미권 의사들이 환자에게 인삼을 처방했던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인삼은 폐질환과 허약, 열병, 부종, 천식, 위장장애, 성기의 질환, 신체마비, 관절통, 황달, 히스테리, 이질, 불임 등의 다양한 증상과 질환을 개선하고 치료하는 데 쓰였다. 인삼은 농축액, 침제, 탕약, 차, 가루, 알약, 알사탕, 습포제, 안약, 연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약으로 만들어져 사용되었으며 18세기 중엽부터는 인삼을 함유한 매약이 시중에 나돌고 있었다.
유럽은 해외팽창과정에서 세계 곳곳에서 들여온 식물을 포괄하며 약물학을 확대해갔는데, 인삼은 중국에서 숭앙받는 ‘만병통치약’으로써 가장 주목받는 외국산 약재 가운데 하나였다. 영미권의 약물학 문헌들은 인삼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들을 구체적인 정리했는가 하면 각성제, 진통제, 강정제로서의 인삼의 특질에 대한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인삼은 알코올, 차, 아편, 담배의 해독제로 인정받았고 감초, 회향, 기나피 등을 대체할 수 있는 약재로 거론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인삼이 함유한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1854년에는 북미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박사학위논문이 출간되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는 인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동시에 인삼의 효능을 폄하하고 주요 약전에서 퇴출하려는 움직임이 목도된다. 인삼의 입지가 위축되어간 데는 약전의 개혁이 큰 원인을 제공했다. 약전의 개혁이란 표준화와 유효성분의 규명을 강조하는 변화였는데, 이 과정에서 영미권의 의료계는 인삼의 유효성분을 추출하는 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주류 의학계에서 인삼을 배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문헌들을 분석해 본 결과 실험과정에서 다른 종류의 인삼을 구별 없이 사용했거나 채취와 보관 등에서 품질관리가 부실했으며, 건조법에 대한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 충분한 유효성분을 추출할 수 없었던 한계가 드러난다.
서구 의학계에서 인삼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18세기 후반은 인삼 교역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동서양 인삼교역의 주축이었던 영국이 주도권을 잃고 서구 최대 인삼생산국인 미국이 그 위치를 대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이 인삼수급에 어려움을 겪게 된 반면, 미국은 오히려 풍부하다는 이유로 인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비난까지 받으면서도 인삼을 수출하기에 바빴다. 그런 맥락에서 추후 서구 의학계에서 인삼활용이 위축되었던 상황과 세계 인삼교역지형의 변화 사이의 상관관계, 특히 북미에서 인삼의 내수가 가져올 수 있던 이익과 수출로 인해 얻었던 이익과의 대차대조를 둘러싼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Notes
영국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펼쳐진 인삼에 대한 논의는 John H. Appleby, “Ginseng and the Royal Society,” Notes and Record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37-2 (1983)를 참조하라.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 The New Pharmacopoeia of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 trans. Thomas Healdes [3rd ed.] (London, 1788), p. 30.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 Medical Transactions, 3 vols. (1768-1775), vol. 3 (1775), pp. 9-20에서도 이 내용이 자세히 나타난다.
The London Encyclopaedia, or Universal Dictionary of Science, Art, Literature, and Practical Mechanics, 22 vols. (London: Thomas Tegg, 1829), vol. 16, p. 531에도 나타난다.
“Case, 719th,” The Times, 25 Apr. 1787.
“Advertisement,” The Times, 31 Aug. 1790.
“Advertisements & Notices,” Reynold's Newspaper, 13 May, 1855; 20 May, 1855; 27 May, 1855; 3 Jun. 1855.
이는 잘못된 정보로, Shiu Ying Hu는 영어로 출간된 모든 인삼관련 문헌들이 인삼이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는 것과는 달리, 인삼은 매우 제한적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다 (Hu, 1976).
예를 들어 Temple Henry Croker, Thomas Williams and Samuel Clark et al., The Complete Dictionary of Arts and Sciences, 3 vols. (London, 1764-1765), vol. 2 (1765), s. v. “foeniculum” and “ginseng”을 보라.
The London Practice of Physic (London, 1769), p. 84, 126.
“Miscellaneous Notices,” The Quarterly Journal of Agriculture 11 (1840-1841), p. 131.
A. E. Ibershoff, “An Original Proving of the Drug by the University of Michigan Society of Drug Provers. Compiled by A. E. Ibershoff, M. D. (1905),” in John Henry Koehler, Ginseng and Goldenseal Growers Handbook (Wausau, Wis.: P. F. Stolze, 1912).
인삼이 사람의 형상을 닮았다는 인식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북미대륙의 인디언들 사이에도 퍼져있었다. 이로쿼이족(Iroquois)은 인삼을 Garangtoging이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어린이(child), 혹은 사람의 다리나 허벅지를 의미했다. Peter Kalm, Travels into North America, trans. John Reinold Foster (London, 1770), vol. 3, p. 115; J. F. Lafitau, Mémoire...concernant la précieuse plante du gin-seng de Tartare, découverte en Canada (Paris, 1718).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 The New Pharmacopoeia of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London, trans. Thomas Healdes [3rd ed.] (London, 1788), p. 30.
The Pharmacopoeia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ixth decennial revision] (New York: W. Wood, 1882).
Panax quinquefoliate는 북아메리카에서 자라고, Panax trifoliate 는 북미와 캐나다에서 발견되고, 진짜 인삼(고려인삼, Panax ginseng C. A. Meyer)은 헤이룽 강 중간, 동쪽으로는 사할린 섬과 일본, 남쪽으로는 한국 남부와 중국의 산시성과 허베이 성에 난다고 말했다.
The Chemical Gazette, or, Journal of Practical Chemistry 1-9 (1843), p.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