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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8(1); 2019 > Article
사회주의 진영의 북한 의료지원과 교류(1945-1958): ‘소련배우기’와 ‘주체적’ 발전의 틈새에서†

Abstract

This study focused on the socialist camp’s North Korean medical support and its effects on North Korean medical field from liberation to 1958. Except for the Soviet assistance from liberation to the Korean War, existing studies mainly have paid attention to the ‘autonomous’ growth of the North Korean medical field. The studies on the medical support of the Eastern European countries during the Korean War have only focused on one-sided support and neglected the interactions with the North Korean medical field. Failing in utilizing the materials produced in North Korea has led to the omission of detailed circumstances of providing support. Since the review of China’s support and the North Korea-China medical exchanges has been concentrated in the period after the mid-1950s, the impacts of China’s medical support on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period and the post-war recovery period have not been taken into account.
In terms of these limitations, this study examined the medical activities by the Socialist camp of the Eastern European countries in North Korea after the Korean War. The medical aid teams from Hungary, Romania, Bulgaria, Czechoslovakia, Poland, and East Germany that came to North Korea in the wake of the Korean War continued to stay in North Korea after the war to build hospitals and train medical personnel. In the hospitals operated by these countries, cooperative medical care with North Korean medical personnel and medical technology education were conducted. Moreover, medical teams from each country in North Korea held seminars and conferences and exchanged knowledge with the North Korean medical field staffs. These activities by the Socialist countries in North Korea provided the North Korean medical personnel with the opportunity to directly experience the medical technology of each country.
China’s support was crucial to North Korea’s ‘rediscovery’ of Korean medicine in the mid-1950s. After the Korean War, North Korea began to apply the Chinese-Western medicine integration policy, which was performed in China at that time, to the North Korean health care field through China’s medical support and exchanges. In other words, China’s emphasis on Chinese medicine and the integration of the Chinese-Western medicine were presented as one of the directions for medical development of North Korea in the 1950s, and the experiences of China in this process convinced North Korea that Korean medicine policy was appropriate. The decision-makers of the North Korean medical policies, who returned to North Korea after studying abroad in China at that time, actively introduced the experiences from China and constantly sought to learn about them.
This study identified that a variety of external stimuli had complex impacts on the North Korean medical field in the gap between ‘Soviet learning’ in the late 1940s and the ‘autonomous’ medical development since the 1960s. The North Korean medical field was formed not by the unilateral or dominant influences of a single nation but by the stimulation from many nations and the various interactions in the process.

1. 머리말

역사적으로 의료발전은 여러 전통이 교차, 상호작용하며 이루어졌다. 북한의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북한은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외부 영향과 그에 의한 변화라는 서술구도를 자주성의 격하로 간주하였고, 일제 식민지 경험, 남한, 미국의 영향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진영 내에 속한 국가들의 영향도 북한의 공식적인 보건의료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홍순원, 1981). 이에 따라 북한의 자체 실시와 성과가 아닌 것도 내적 역량에 의한 활동과 사업으로 일괄 서술되었다.
북한의 ‘고립적’ 의료 발전에 대한 공식서사 비판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이뤄졌다. 첫째,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국가건설과정에서 보건의료체계의 형성과 이에 미친 소련의 영향력을 주목한 연구가 있다(황상익·김수연, 2007; 김진혁, 2014). 해방 직후 3년 사이의 사상성 고조와 소련의 영향력 확대는 의과대학의 교수임용과정에서도 확인되었다(김근배, 2015). 이 연구들을 통해 ‘소련배우기’의 전 사회적인 열기 속에서 소련의료체계도 수용되었음이 밝혀졌다. 1950년대 소련의 영향과 관련해서 북한의 기생충 박멸운동에서 소련의 ‘데바스따찌야(Девастация)’ 경험의 활용과 전개를 살펴본 연구(곽희환·정준호·김옥주, 2018)와 북한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파블로프 학설이 활용되었음을 지적하는 연구(한선희·김옥주, 2013)도 진행되었다. 다만, 한국전쟁 이후 소련의 지원에 관한 연구들에서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중국의 영향은 고려되지 않았다.
둘째, 동유럽 국가의 지원에 관한 연구는 1950년대 북한의 전후 재건이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긴밀한 협력과 긴장관계를 동반하면서 진행되었다고 파악했다(Armstrong, 2005). 아고브의 연구는 사회주의 진영의 의료지원에 대해 인도주의적 지원(Humanitarian aid)의 맥락에서 사실관계를 정리하였고(Agov, 2010), 불가리아와 폴란드 의료지원 관련 연구도 제출되었다(김종석, 2014; Daniel Rupanov, 2017; Baev & Kim, 2017). 헝가리병원의 경우, 설립 이후부터 1953년까지를 중심으로 한 병원운영에 대한 회고가 소개되었다(야노스 본타, 1991). 하지만 이상의 연구들은 지원 자체에 천착했고 지원에 따른 영향은 연구의 초점이 아니었다. 또한 북한 내부에서 생산한 자료를 검토하지 않아 상세한 지원현황을 누락한 한계를 가졌다.
셋째, 중국의 지원에 대한 검토는 1956년에 본격화된 북한 한의학의 재편을 다루면서 1950년대 말 북한과 중국 간 교류를 살펴본 연구가 진행되었다(김근배, 1999; 신동원, 2003a; 신동원, 2003b; 최선주, 2005). 이 연구들은 북한의 한의학 재편과정에서 중국의 경험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지만, 북중의학교류 시작의 맥락은 검토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중국학계의 연구에서도 전근대와 1980년대 이후의 북중의학교류를 주제로 한 연구들이 확인될 뿐,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기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한국전쟁 이전 시기 중국 동북지역 연변 소재 용정의과대학과 북한과의 특수관계에 주목하여 의료인력 사이의 연계를 검토한 연구가 있다(문미라·신영전, 2017; 김선호, 2017a)[1].
이 글에서는 이상의 연구들을 토대로 1940년대 후반 ‘소련배우기’와 1960년대 이후 ‘주체적’ 의료발전의 틈새에서 북한의료에 끼어들어온 여러 갈래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주로 소련, 한국전쟁 이후는 소련, 중국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대북한 의료지원 현황과 그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이와 같이 접근함으로써 한 국가에 주목하여 기존의 연구를 심화하거나 공백지점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들을 활용하여 북한의료가 어떠한 외부 자극을 받으며 형성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의료체계 형성과정에서 특정 국가의 지배적인 영향력만을 강조하는 것을 피하고 전체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본 연구가 다루는 시기는 해방 이후부터 북한에 주재하였던 동유럽 의료단과 중국인민지원군이 모두 철수한 시점인 1958년까지다. 본 연구는 특히 기존 연구에서 검토되지 않았던 『로동신문』을 통해서 동유럽 각국 지원단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인 지원 횟수, 규모, 내용들을 확인하여 서술하고, 그간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던 사회주의권 국가의 대북한 의료지원 관련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일부 추가적인 사실관계 및 북한 의료시설에 대한 평가는 CIA 보고서와 소련대사관 문서 등을 통해 파악하였고, 공식간행물 『인민보건』을 통해서 전쟁 이후 북한 의료정책의 방향을 분석하였다.

2. 해방 이후 소련의 의료지원

해방 직후 북한은 일제의 행정 공백에 대처해야 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선전포고 이후 북한으로 진주한 소련25군사령부에 이어 9월 19일 북한지도부의 핵심을 구성한 김일성부대도 뒤따라 입북했다. 북한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에 친화성을 가진 기존 지역인사들을 중심으로 지역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가 자발적으로 구성되었고, 일부 도(道)에서는 보건과도 개설되어 긴급한 보건사안에 대처했다.
하지만 북한지도부는 행정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소련군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소련군은 민정기관을 설치하고 전문요원을 배치하였다. 각 부서에 배속된 전문요원들은 북조선행정10국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지도했다. 제25군사령부 보건지도부에는 V. S 자베르쉰스키(Завершинский) 중좌, 교관 L. V 제니소프 소좌 외 1인이 배치되었고, 지역 도·시·군 경무사령부의 군사위원은 해당 지역에서 자문역할을 담당했다(기광서, 1998: 135, 137, 142)[2]. 민정기구와 지역 경무사령부는 행정기구와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부문별·지역별 전문 지원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행정체계는 소련식으로 구조화되었다. 보건의료 분야의 경우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보건국 부국장에 소련계 리동화를 임명하여, 보건국 내에 소련의 영향력이 미치게 하였다(서동만, 2005: 191).
행정체계와 마찬가지로 보건의료 분야 역시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일제의 의료자원 공백이 분단으로 인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의료기관의 성장, 무의면 퇴치사업의 진척, 전염병 연구소 설치, 제약공장의 확대, 의학교육기관의 발전 등 주요한 보건의료 성과는 소련의 지원에 의해 성취되었다[3]. 해방 후 북한의 의료시설, 환자치료, 예방의학 부문의 성장을 통계화한 <표 1>은 북한의료의 급속한 발전을 보여준다. 병원과 진료소 등 의료시설의 증가는 의료수혜 인원과 지역을 늘렸고, 이것은 직접적으로 환자수의 증가와 무의면 감소율로 나타났다.
특히 1946년 여름 콜레라 유행에 대한 대처는 소련 방역활동의 ‘선진성’을 입증했다. 당시 파견되었던 소련적십자방역대는 1948년 4월 귀국 이전까지 전 지역에서 방역활동을 전개했고[4], 1947년, 1948년 중국 동북지역에 발생한 페스트 유행에도 대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49년 9월 북한에 일본뇌염이 유행하자 소련은 야·엔·샤뽀알을 비롯한 병독학자와 신경임상가 5명을 파견하였고 환자 치료와 방역활동을 직접 지도했다. 이후 2차로 소련의학 한림학원 기생충학부 뻬·아·뻬뜨리쉐파를 비롯해 6명의 학자들이 일본뇌염 치료와 방역사업을 지도하고 뇌염 혈청과 백신을 지원했다(조선중앙통신사, 1952: 380).
소련은 자체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기도 하였다. 소련적십자병원은 1947년 2월 1일 진남포, 개성을 비롯한 6개 도시에서 설립·운영되었고(ЦАМО, 1946: 27), 이후 평양과 신의주 등 3개 도시에서 추가적인 개원을 준비하였다. 당시 북한에서 소련의사는 가장 최신의 의료를 선보였고, 북한주민들도 이들에게 직접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소련의사들은 의과대학과 함께 선진적인 의료기술을 전수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1949년 11월 12일 15개 소련 적십자병원의 모든 보건시설과 약품은 북한정부에 무상으로 양도되었다(조선중앙통신사, 1952: 380).
소련은 전염병연구소, 흥남제약을 비롯한 제약공장, 의료기구제작소 등의 의료인력 양성에도 기여했다. 예컨대 1946년 2월 5일 북한에서 전염병연구소가 개소하자 소련의 크로루(Kurutu) 여사와 지데유(Cheiiru)라는 두 세균학 전문가가 방문해서 콜레라와 기타 예방약 제조방법을 전수하였다. 연구소는 장티푸스, 콜레라 혼합백신, 디프테리아혈청, 백일해 백신, BCG백신 등 14종의 백신을 생산했다(一記者, 1949: 66-7). 1949년 소련은 약품 86종, 의료기구 88종, 시약 127종을 추가적으로 지원했다(조선중앙통신사, 1952: 380).
더불어 소련은 북한의사들의 소련 단기연수 및 유학 프로그램, 학술교류활동을 지원하여 양국 간의 보건의료 지식을 전수·확산하도록 했다[5]. 1945년 두 명의 북한의사가 소련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946-1947년 간 수십 명의 북한의사들이 연구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후 수십 명의 의대생들이 ‘선진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소련으로 떠났다[6]. 1946년 9월 리동화(李東華)를 단장으로 한 30명의 의학도들은 소련 모스크바중앙의사강습소에서 연수를 했고, 저명한 평가를 받던 비시네브스키, 말리꼽스끼, 봅시 박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보건의료제도에 대한 소개와 연수 후기를 묶은 책을 발간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북조선인민위원회 보건국, 1947). 이 책은 소련의 보건사업 개관, 의학연구, 의학교육, 의료사업제도, 임산부 보건, 생리학 학파 등의 주제로 구성되었고 파견되었던 의사들이 직접 집필하였다.
1949년 초에는 외과학 박사 아루뚜난(Archunin) 교수를 포함한 11명의 의학교수가 북한에 파견되어 교수활동과 병원 운영에 참여하였다. 그는 본인의 전문인 외과수술 방법을 학생들에게 전수했고 학사논문도 지도했다. 1949년 12월 25일 제1차 전국외과학대회의 개최는 아루뚜난 교수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암에 대한 연구들을 발표하였다. 1950년 2월에는 니꼬라엔꼬 교수가 평양의과대학에 파견되어 미생물학을 강의하였고, 그 영향으로 관련 학사논문이 제출되었다(조선중앙통신사, 1952: 379). 이와 함께 소련의 보건 관계 잡지, 신문 등의 출판물 공급이 확대되어, 1949년 조소경제문화협정 체결 이후 1년간 50여 종, 1만 5천여 부가 번역되어 소개되었다(리병남, 1950: 4).
위에서 언급한 제1차 전국외과학대회는 북한-소련-중국 사이의 공식적인 의학교류의 기능을 가졌다. 암과의 투쟁,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의 연구·치료, 외상과 골수염 및 그 치료 등을 주제로 열린 이 대회에는 아루뚜난 교수뿐 아니라 중국의학자 5명도 초청되었다[7]. 참석한 중국학자는 주택소(북경의원 외과 주임), 오계평(북경대학 의학원 외과부교수), 양극근(심양중국의과대학 부속의원 부원장), 왕소부(심양중국의과대학 부속의원), 정철호(연변대학 의학부 외과주임)이었다. 제1차 전국외과학대회의 개최와 중국의학자의 참가 소식은 중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다[8]. 북한을 방문한 중국의학자들은 대회 폐막 후에도 계속해서 북한에 남아 북한 각지에 건설되고 있던 병원과 요양소 등 의료보건시설을 시찰하였다. 주택소는 『로동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보건의료제도가 “과거 일제 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민적 보건제도로 개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소감을 밝혔다[9].
북-소-중 의학교류의 장이었던 제1차 전국외과학대회의 개최는 북한의 외과학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장기려는 “제1차 전국외과학대회의 성과에 기초하여”를 발표하며 결성보고를 하였다. 외과학회 중앙위원회 위원에는 리동화 이하 13명의 외과의사들이 선출되었고, 명예위원에는 소련의사 아로즈얀이 추대되었다[10].
해방 직후 북한에서 소련식 의료체계의 정착은 빠르게 이뤄졌다[11]. 이것은 사회주의 의료의 이상인 전 인민을 위한 단계적 무상치료제 실시, 무의면 퇴치의 구현으로 나타났으며, 구체적으로는 종합진료소 폴리클리닉크·외래진료소 암블라토리 확대 설치, 펠셀(조의사) 제도 등의 운영을 통해 가시화되었다(국사편찬위원회, 1997: 187-8). 요컨대 북한은 보건의료체계, 병원 운영, 교육 등의 측면에서 소련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이로써 사회주의 의료의 ‘찬란한 미래’를 그려보기에 충분한 동력을 만들어갔다.

3. 동유럽 국가의 의료지원과 지식교류

1949년을 기점으로 남북 접경지대에서 군사충돌이 급증하였다. 몇몇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근거로 내전(內戰)적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1950년 이전에 이미 개시되었다고 지적하였다(Cumings, 1986; 정병준, 2006)[12]. 북침에 따른 반격을 공식적인 시나리오로 하는 북한은 전쟁 준비를 외부로 노출시키지 않고자 하였으나 준비는 일찍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약 1년 전인 1949년 7월 15일,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한 전 사회적 대중동원을 목적으로 하는 조국보위후원회가 조직되었고(문미라, 2018), 현대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의료부문에서도 의료인의 일상이 전쟁 준비로 재조직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군의의 역할과 같은 군진의학에 대한 글이 『인민보건』에 기고되었으며, 아르뚜난 교수는 전시외과 강의를 하였다(민족보위성 군의처, 1950: 38)[13].
북한지도부의 초기 예상과 달리 한국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다. 조선인민군은 미공군의 공중폭격을 받으면서도 남진(南進)했지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반격을 맞았다. 북한지도부는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진영 내 동유럽 국가들은 모두 신생독립국이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전장(戰場)과의 거리로 인해 전투병력의 직접파견은 어려웠다[14].
이들 국가들은 중국에서 전개된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爲國)’이라는 기치의 지원캠페인과 비슷한 프로그램을 개최하면서 물자 및 비전투 인력 지원의 열기를 높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와 같이 분단의 운명을 맞은 동독은 “한국을 돕는 것이 독일을 돕는 것(To help Korea is to help Germany)”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활동을 전개했다[15]. 분단과 냉전의 전선이 일치했던 동독은 북한에 심리적 유대감을 쉽게 가질 수 있었다. 분단되지 않은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도 한반도와 지정학적 유사성에서 기인하는 동질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16]. 즉, 추축국 권역에 대한 전후 재편, 진영을 떠나 열강에 둘러싸여 있었던 역사적 조건, 사회주의 진영 위계 내 종속적 위치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북한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줄여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의 ‘돌격대’ 칭호를 자처했던 북한에 대한 지원 열기가 고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의 현실과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도서, 다큐멘터리, 그림 등의 매체를 활용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아래 <그림 2>의 극장 배경에서 볼 수 있는 “한국에서 손 떼!(Ruce pryčod Koreje!)”라는 구호는 체코슬로바키아 각 기업소, 제조소, 농촌 등에서 개최한 항의규탄대회에서 일상화되었다. 이 같은 집회에는 총 9만 2,000여 명의 노동자와 기술자가 참가했고 북한 지원을 위한 생산경쟁 3,200여 건이 체결되었다. 공장들에서는 원조기금으로 총액 494만 2,359코루나가 모금되었다[17].
북한에 대한 전쟁지원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의료분야의 지원도 논의되었다. 군 전투력의 보전·강화와 후방 민간인들의 원만한 전선 지원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전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기민한 보건의료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돌보는 것과 더불어 한 국가의 노동력과 전투력을 유지·신장하는 기능을 갖는 보건의료는 전쟁 시기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황상익, 2006: 36). 여전히 보건의료 분야의 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던 북한으로서는 다른 국가들의 도움이 더욱 절실했다.
1951년 2월 13일 주중북한대사 리주연과 중국 외무상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의료인력과 의약품, 고아의 양육에 대한 도움을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 요청했다. 리주연은 베이징(北京)에서 동유럽 국가 대사들을 대상으로 한 원조 요청과 그 가능성을 타진했고 이어진 동유럽 순방에서 재정상 최창익은 관련 지원협정을 체결했다(Agov, 2010: 113-4). 그 결과 지원이 논의되고 있던 일부 국가들인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포함해서 동유럽 6개국(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의 대북한 의료지원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을 살펴보기 전에 한국전쟁 이전부터 의료지원을 해왔던 소련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8년 12월 말 북한에서 철수한 소련적십자의료지원단은 전쟁 기간 군부대의 이동이 전염병을 수반하면서(김진혁, 2017) 시급한 방역활동이 요청되었고 재파견되었다. 1951년 3월 신의주에서 활동한 소련 의료단은 같은 해 7월 평양으로 이동해서 지하에 중앙방역소를 재건했다[18]. 이후 두 그룹으로 나눠져 한쪽은 원산으로 이동하였고 나머지는 평양에 남아서 120명의 의사들을 교육하면서 외과수술을 집도했다(Agov, 2010: 114). 아울러 도 방역소와 전염병원, 위생화학연구소 등에서 선발된 북한의료인력을 대상으로 와시꼬브 박사, 요르낀 박사, 기바르쩨-쩨 여사가 역학, 소독학, 세균학 등을 강의했다[19].
1955-1956년에도 소련은 1,7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의약품과 의료기기 지원을 이어갔다(Agov, 2010: 202). 정전(停戰) 이후 소련적십자 병원을 다시 개업해서 운영했던 소련 의료단은 51만 5,000여 명의 외래환자를 받고 8,300여 명의 입원환자를 완치하는 가운데, 200여 명의 의료인력을 직접 육성하는 성과를 거두고 1957년 4월 29일 귀국했다[20].
전체 8차례 적십자의료단을 파견했던 헝가리의 제1차 의료단 입북 일자는 1950년 7월 29일로 동유럽 국가들 중 가장 빨랐다[21]. 의료단은 환자 1,000여 명 수용 규모의 의료시설을 운영하기 위한 의료기구, 의약품을 가지고 입국했다[22]. 1951년 8월, 이들은 의사 20명, 간호사 10명, 북한인 조수 100명과 함께 평안남도 만경대 부근에 배치되어 조선인민군을 치료했다. 헝가리 의료단은 1952년 6월까지 구급차가 딸린 진료소를 운영하며 2,000여 명의 병사들을 치료했다. 이들이 사용한 장비와 약품은 모두 헝가리에서 공수한 것이었고, 이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1952년 6월 헝가리 의료단은 20명씩 세 팀으로 나눠 평안북도에서 북한 민간인과 조선인민군에 대한 의료활동을 전개했다[23]. 이들은 자신이 운영한 병원을 국가지도자의 이름을 딴 라코쉬 마티스병원(Rakosi Matyas Hungarian Hospital, 이하 라코쉬병원)이라고 명명했다. 라코쉬병원은 1957년까지 운영되었다. 1953년 10월 24일 미군의 첩보에 따르면, 이 병원은 우수한 설비와 치료 덕택에 조선인민군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민간인환자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았다고 한다(Headquarters Combined Command for Reconnaissance Activity Far East, Security Information, 1953b: 1). 의료단은 라코쉬병원 운영만이 아니라 각지 결핵병원과 각 군을 순회하면서 의료기술에 대한 도움을 주었으며, 황해제철소, 곡산광산, 홀동광산의 노동자에 대한 검진사업을 실시하였다[24]. 총 8차례에 걸친 헝가리 의료단 파견의 결과, 황해북도 중앙병원(사리원) 내과는 뢴트겐 진단과 각종 수술이 가능하게 되었고 종양치료시설도 준비되었다.
헝가리 의료단의 구성 변화와 주요활동은 시기에 따라 의료활동의 초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외과의사가 주축이 된 제1차 의료단(1950.7.29-1951.8)은 외과수술에 주력하였고, 제3차 의료단(1952.1-1952.10.28)까지 3,000여 회의 대수술과 50,000여 회의 처치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파견된 제8차 의료단(1956.2.14-1957.6.22)은 내과전공의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병원 및 산업현장을 순회하였다. 전선이 고착화되고 전후 복구에 초점이 맞춰짐에 따라, 의료단은 전상자 치료와 더불어 병원 소재 담당지역에 있는 산업현장 노동자의 건강관리, 만성전염병 치료지원 등으로 활동내용을 확대했던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이후 라코쉬병원에서는 정기적으로 의사교육과 간호사 양성이 이뤄졌다(김진숙, 2018: 135). 헝가리 의료단은 시설 및 비품을 북한에 이전하는 의정서를 조인하고 1957년 6월 20일 귀국했다(조선중앙통신사, 1958: 356; 헝가리 의료단의 전체 활동은 <부표 1>).
총 7차례 적십자의료단을 파견했던 루마니아 의료단은 1951년 4월 27일 입북 이후 남포 제1병원(400병상)을 운영했다. 1954년에는 33명(19명의 의사, 9명의 간호사, 5명의 기타인력)으로 구성된 다섯 번째 의료단이 입북했다. 또한 800만 루블에 상당하는 비용을 들여 평양에 병원(320병상)을 설립하였다(Agov, 2010: 204). 헝가리 의료단과 마찬가지로 루마니아 의료단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외과의사 중심의 의료단 구성에서 벗어나서 내과, 산부인과, 신경과, 소아과, 비뇨기과 등 각 전문의들의 비중을 늘려나갔고 공장과 농촌지역 순회진료를 실시하였다.
1955년 북한은 소아전염병과 장내성전염병(腸內性傳染病) 확산 방지 대책을 세우고 말라리아기생충증, 폐디스토마증에 대한 조사와 예방조치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김진혁, 2017: 74-5). 이와 관련하여 루마니아 의료단 소속으로 북한에서 활동했던 소아과 의학전문학교 교수 꼴리쉬 게오르기(제5차 의료단: 1954.6.11-1955.7.14)는 아동건강사업을 실시했고, 신경외과 렌께 호르비트(제3차 의료단: 1952.12.8-1953.7.7; 제7차 의료단: 1956.7.24-1957.7.26)는 북한의 뇌디스토마에 대한 연구와 관련 치료를 하며 기생충질환 대책을 제안했다. 루마니아 의료단은 제7차 의료단을 마지막으로 1957년 7월 26일 일체 시설을 이관하기로 조인하고 귀국하였다(루마니아 의료단의 활동은 <부표 2>)[26].
총 4차례 적십자의료단을 파견했던 불가리아는 1951년 2월 22일 구호를 목적으로 250개 침상 외과병원 규모의 약품과 자재를 발송하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보다 많은 50명의 의료진 파견을 결정했다. 이후 화차(貨車) 8대 분량의 의료자재와 약품이 도착했는데, 이는 두 개의 종합병원을 건설할 수 있는 물자에 달했다[27]. 이어서 제1차 의료단(1952.2-1954.4.11)과 함께 45대 차량 분량의 각종 의약품과 기자재 등이 도착했다. 스페인내전에 병원장으로 참전했던 미쳬브(Konstantin Michev)를 단장으로 한 제1차 의료단은 평안남도 박천 소재 제51야전병원(1,000병상), 평안남도 숙천 제55야전병원(2,000병상), 제53야전병원(2,500병상)에 배속되었다. 불가리아 기록에 따르면, 부상당한 북한 군인과 관료 중 40%가 불가리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1953년부터는 중국인민지원군도 치료했다고 밝혔다. 1954년 4월에는 27명의 의사를 포함한 47명의 제2차 의료단(1954.4.3-1955.6.7)이 파견되었다(Baev & Kim, 2017: 6-9).
제1차 불가리아 의료단은 후방병원과 야전병원에서 전상자 치료에 주력하여, 탄알이나 파편에 맞아 생긴 세균감염증인 화기성골수염(火氣性骨髓炎) 환자들을 주로 치료하였다. 이후 전후 복구에 발맞춰 제2차 의료단은 두 개 그룹으로 나누어, 하나(단장: 미뜨로프)는 평안북도 중앙병원을 복구하고 다른 하나(단장: 찌흘로브)는 자강도 중앙병원에서 산부인과, 소아과, 신경과 등 다양한 분야를 진료하면서 의료기술을 전수했다. 자강도 병원에서는 특히 불가리아 의료단에 의한 백내장수술과 무통분만법을 이용한 해산 및 건강검진사업이 실시되었다. 의료단 활동은 병원에서 근무했던 북한 의료인력에 대한 교육도 포함하였으며, 평안북도 중앙병원(300병상)을 복구하는 데도 기여했다. 불가리아 의료단은 1957년 3월 29일 제4차 의료단(단장: 지미또르 마리노브)을 위한 환송회 이후 최종 철수하였다(불가리아 의료단의 활동은 <부표 3>)[28].
총 6차례 적십자의료단을 파견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우선 육군이동외과병원을 북한에 보냈다. 파견대 29명은 1952년 4월 중순 평안남도 석암 제56야전병원에 도착하여 활동을 시작했다(Jaroslav Olša, jr, Accessed 19 June 2018: 247). 각종 수술실을 설치하여 외과수술을 주로 하였던 제1차 의료단은 기술을 전수하면서 식도 성형술, 폐 절제술 등과 같은 고난도의 수술을 실시했다(배송봉, 1957: 21).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의료품이 부족하였지만 국영의료회사는 1만 코루나에 달하는 약품을 북한에 선물로 보냈다[29]. 전후 복구 시기에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병원(함경북도 중앙병원)을 재건하기도 하였다[30].
1954년 12월 파견된 체코슬로바키아 제4차 의료단은 치료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난치병이었던 식도암·자궁암수술도 병행했다. 이들은 북한의 의료인들과 협력 하에 지방 풍토와 주민들의 체질을 연구하고 치료하였으며[31]. 의학 꼰페렌찌야(конференция, 학술회의)를 통해 식도암수술, 폐 절제 및 적출수술, 뇌수술 등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대수술 방법을 북한의료진들에게 전습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의료단은 전체 파견기간 동안 임상시험용 시약 100여 종, 각종 약품 1,300여 종, 뢴트겐 8대, 24대의 위생선전차와 트럭을 비롯한 수많은 기자재를 발송하였다(체코슬로비키아 의료단의 활동은 <부표 4>)[32].
제1차 폴란드적십자의료단은 의사 36명, 간호사 1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53년 4월부터 자강도 희천 소재 폴란드병원에서 전쟁부상자를 치료했다. 정전협정 이후인 1953년 11월 이 병원의 자재 상당수는 북한정부에 넘겨졌고 남은 의료자재는 함흥으로 운반되었다. 함흥에서 폴란드병원은 매일 1,000명을 진료할 수 있는 규모(280병상)로 성장하였고, 함흥의과대학(이하 함흥의대)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1955년 8월 2일 이들 중 일부는 함흥의대에 의료자재를 양도하고 귀국했다. 그 이후에도 16명의 폴란드의사들은 함흥의대에 남아 북한의사들을 양성하였고, 350명의 학생과 120명의 의사들이 폴란드 의료단에 의해 의료훈련을 받았다(김종석 2014: 173-4).
1953년에서 1956년 사이 북한에서 근무한 폴란드 의료인력은 총 180명에 달했다. 폴란드병원에서는 1954년 1월부터 1955년 8월까지 1만 2,000여 명의 입원환자가 치료를 받았고, 37만 명의 외래환자가 다녀갔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활동이 폴란드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의료품 부족을 겪던 폴란드 국내 상황을 고려하여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김종석, 2014: 174-5). 폴란드는 1957년 8월 3일 제5차 의료단의 귀국과 함께 지원을 마감했다(폴란드 의료단의 활동은 <부표 5>)[33].
동독은 1952년 네 개의 이동병원을 제공했다. 전쟁 이후에는 피부과 진료장비를 지원했고 함흥에서 결핵예방진료소와 병원을 설립했다(Agov, 2010: 203-4)[34].
위에서 보듯이 동유럽 국가들의 의료지원은 치료행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이 북한에서 활동했던 1951년 중반 시점에는 야전병원에서의 부상자 치료가 중심이었으나, 전후 복구가 전면화되는 1953년 정전협정 이후부터는 북한주민들의 건강관리에 주력하여 지역 노동자와 주민들에 대한 건강검진과 각 지역 순회진료 등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동유럽 국가의 의료단은 의료기반시설의 재건에도 나섰다. 1953년 6월 소련 대사 수즈달례프(С.П. Суздалев)는 의료지원 국가들에게 북한의 각 도에 병원 하나씩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같은 해 8월 외무상 남일은 분산되어 있던 병원들을 평양 소련병원(700병상),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의 전문치료병원(500병상)으로 재조직할 것을 요청하였고(국사편찬위원회, 2013: 31, 53) 이들 국가들은 각 도의 거점병원을 설립했다.
아울러 각국 병원에서 이루어진 북한의료인과의 협진과 의료기술에 대한 교육은 북한의료인들에게 각국의 의료방식을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이들 국가의 의료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다. 예를 들면 헝가리 의료단에서는 다음 세대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론실습 외에도 위생전문가, 간호원, 연구조교를 위한 토요일 아침강의를 개최했고, 이를 통해 북한의 의과대학 학생, 간호원, 연구조교들은 총 128시간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수강한 모든 의료인들은 이후 시험에 응시하여 자격증을 취득했다(야노스 본타, 1991: 244). 1956년 7월 24일부터 약 1년간 북한에 체류했던 루마니아 제7차 의료단의 비뇨외과 전문의 오쓰까르 프란께도 매주 2회 이상 북한의사들을 위한 강의를 진행했다.
나아가 재북한 동유럽 의료단은 북한의료진 및 타국 의료단과의 학술교류를 진행하였다. 의료단은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개최하여 북한에서의 임상사례와 연구를 공유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26-27일 개최된 과학회의에는 북한의사들과 주재 의료단원들이 참석해 자신들의 사업을 보고하였다. 조선인민군의 첫 번째 외과학술대회는 1952년 8월 25-28일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총 17회의 강의와 36개의 연구발표가 진행되었다. 연구발표내용은 임상사례 복부수술, 정형수술에 대한 것이었다(야노스 본타, 1991: 244).
이듬해인 1953년 8월 개최된 외과학술대회에서는 치료경험 공유와 임상회의가 이뤄졌고, 이 자리에서 불가리아 의료단은 북한 약재로 만든 신약 30여 개에 대한 발표를 하기도 하였다[35]. 1956년 5월 황해북도 중앙병원에서 개최된 혈액학 꼰페렌찌야는 이 병원에 주재하던 헝가리 의료단 성원들 및 북한 각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의료단원 90여 명이 참가하였고, 다른 학술대회와 마찬가지로 북한의료진과 외국의료단원의 임상연구가 발표되었다[36].
이같이 북한 의료인력에 대한 교육과 학술교류가 활성화되었던 이유는 북한에서 정책적으로 보건간부양성을 위해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 제 국가의 의료단을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선진임상의학’을 학습하여 부족한 전문의를 양성하려는 목표가 설정된 것이다(리병남, 1956: 58, 69)[37]. 전문의 부족은 북한내각과 조선노동당 상무위원 등 고위급 인물들이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소련을 방문한 사례가 다수 나타났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52년 5월 김일성의 만성축농증을 치료를 위해 소련정부에 의사 파견을 요청한 일도 있었는데(국사편찬위원회, 2013: 12), 이는 이비인후과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수준 높은 의료기술을 갖춘 의사의 부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중앙정부진료소의 소련고문은 김일성과 상무위원들의 주치의와 같은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국사편찬위원회, 2014: 43, 182).
그렇다면 동유럽 의료는 소련과 어떤 차이를 가졌는가. 1967년 커먼웰스재단(Commonwealth Foundation)의 지원으로 동유럽 현장조사 경험을 책으로 남긴 와이너맨(Edwin R. Weinerman)[38]은 이들 지역의 의료교육이 서구의 것과 유사하다고 언급하였다. 다만 교육의 방식은 소련식이기보다 여전히 독일방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사회주의 국가 건설 이후 20년 동안 영국(British), 스칸디나비아, 미국식 체계로 특징되는 개혁을 거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Weinerman, 1969: 29-30). 소련식 의료체계에 강한 영향을 받지 않았음과 동시에 서유럽 자본주의 방식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국가들의 보건의료체계 속에 사회주의 국가 설립 이전의 전통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동유럽은 미국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의 지역의료보호 계획에 따라 재정지원을 제공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들은 이 지역에서 공산주의와 독일제국주의의 영향을 차단하려고 하였고, 록펠러재단의 사회위생과 공중보건 프로그램이 적용되었다. 그것은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인력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새로운 기관에 대한 직접적인 재정지원 및 여러 장학금, 연구비지원을 통해 지역공중보건 책임전문가 그룹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Marius Turda, 2011: 213-4).
이러한 재단의 후원은 1943년 미국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al Service)에서 생산한 불가리아 정보문서인 재니스 38(JANIS 38, Joint Army-Navy Intelligence Studie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록펠러재단에 의해서 소피아(Sofia)에 위생연구소가 설립되었고, 농촌건강 설명사업이 실시되었다. 다만 불가리아의 의료장비는 대부분 독일제였는데, 의사들이 독일 소재 의과대학 출신이기도 했지만 특별조항에 따라 독일과 무역이 이뤄졌기 때문이었다(The Medical Intelligence Branch, 1943: 4-5). 이상의 상황을 종합할 때 동유럽 의료는 소련식 의료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상황에서, 독일식 의료의 강한 전통을 배경으로 서구의료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동유럽 의료가 한국전쟁으로 인한 의료지원을 계기로 북한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동유럽 국가의 의료교육은 북한지역 내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지원에 관한 협정은 유학생 프로그램을 포괄했고 의과대학 학생들도 그 대상이었다. 북한은 1951년부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로 유학생을 파견했고, 1952년부터는 동독, 중국, 헝가리, 불가리아, 몽고에 유학생을 보냈다(강호제, 2007: 94). 유학생들은 각국의 의료를 소개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이러한 까닭에 의료단의 철수가 곧 교류 중단을 의미하지 않았다.
또한 의료단 철수 이전 북한은 동유럽 국가들과 제도적으로 보건협정을 체결하였다[39]. 1956년 6월 4일 프라하에서 체결된 북한-체코슬로바키아 사이 보건협정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①예방치료, 위생방역, 보건선전사업 그리고 의료기구 및 의약품 사용법에 대한 경험 교환, ②상대방 의학에 관한 학술대회 자료 교환 및 상대방 대표 초청, ③상대방 대학에서 대학생, 의사, 보건인력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교류, ④상대방 국가에서의 환자 치료 협조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40].
이 국가들의 영향은 북한의 의학잡지 『인민보건』의 일부 호수에 게재된 사회주의 국가들의 보건의료제도에 대한 기사나 이들 국가들에서 열린 학회 참관기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소련의 영향이 유학생의 규모뿐 아니라 번역출간물 등에서 단연 첫 번째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에 복간된 1957년 발행호부터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동유럽 국가 관련 연구논문과 각주가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이 잡지에 게재된 연구논문과 각주의 출처를 정리한 다음의 <표 2>는 이런 경향을 정리한 것이다.
1957년 복간되었던 『인민보건』은 각 호수별로 논문에 딸린 각주의 양적 편차가 컸지만, 동유럽 국가의 연구논문들이 다수 게재되는 경향성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일부 연구들은 동유럽 의료단 구성원의 지도에 의해서 제출된 학위논문이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의료단이 체류하며 활동을 전개한 지역에서 북한의료진과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물이 논문으로 게재되는 경우가 많았다. 출간된 논문의 주제들은 주로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의 ‘인민보건사업에 대한 결정’에서 강조된 만성전염병, 노동환경·임산부 관계 질병 퇴치에 걸쳐 있었다[41]. 이처럼 북한의료진들과 동유럽 의료지원단 사이의 지식교류는 일방향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상호영향을 주면서 사회주의권 의학교류와 지식의 공동생산으로까지 나아갔다.
1950년대 후반 이후에도 이들 간의 관계는 이어졌다. 1956년 이후 매년 개최된 사회주의 진영 국가 보건상회의는 각국의 보건사업에 대한 경험을 교환하는 자리이자 진영 내 국가 간 협조 관련 사안이 논의되는 장이었다(편집부, 1959: 28-31). 1960년대는 중소관계 악화의 영향으로 인해 동유럽과의 의료교류를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1973년 북한이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및 불가리아의 역학조사, 폴란드의 일반면역학, 루마니아의 식품위생 관리 교육을 받기 위한 연수생을 파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World Health Organization Regional Office for South-East Asia, 1977: 119-200). 이는 북한과 동유럽 국가 간의 보건의료적 연계가 일시적이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의료교류는 국가 대 국가로서의 관계를 넘어 대학과 학제 간의 관계로 심화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루마니아와 북한의 신경외과 학계의 교류는 전문의 양성을 통해 학맥(學脈)으로까지 뿌리를 내렸던 사례였다. 1953년 루마니아 신경외과팀을 이끌었던 아르세니(Constantin Arseni)[42] 교수는 평안남도 중앙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박춘호(Chun Ho Park)에게 의학지식과 기술을 전수하였고 그는 북한의 첫 번째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 한편 루마니아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질병으로 인해 귀국한 최일로(Il Ro Choi)는 아르세니교수의 통역을 도우며, 박춘호와 아르세니의 지도를 받았다. 최일로는 북한의 신경외과학회 초대 회장, 평양의과대학 신경외과장이 되었다. 2015년 현재 로영한(Younghan Roh) 평양의과대학 신경외과장은 바로 최일로 교수의 지도를 받은 인물이다(Park, Roh, Lee-Park & Park, 2015: 855).
인적네트워크를 매개로 한 의학지식의 전수는 이 사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식민지시기 독일 유학 경험을 가진 이들이 교수진으로 일부 배속되었던 함흥의대와 청진의대의 경우, 동독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의료단이 이 지역에 체류하면서 교류를 어렵지 않게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부터 지속된 유학생 파견은 이들이 복귀한 이후 개별 대학과 이 같은 교류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매개로써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위협이 된다고 간주된다면 교류는 장려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사회주의 국가 간 관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1956년의 헝가리혁명은 동유럽 의료단 철수의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고, 북한에서 헝가리와의 접촉은 의도적으로 차단되었다[43].

4. 중국의 의료지원과 한의학의 ‘재발견’

북한과 중국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서로에게 필요한 의료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북한은 중국공산당의 국공내전을 지원하기 위해 의사들을 중국 동북지역에 파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평양의과대학병원에 재직 중이었던 최창수였다. 그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중국 동북인민해방군 리홍광지대에 파견되어 위생부 의무과장으로 근무했다(김선호, 2017b: 135-6). 또한 해방 이후 용정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리기봉, 려창범, 김기철도 조선인민군 군의(軍醫)로 배속되어 활동했다(문미라·신영전, 2017: 250-1; 김선호, 2017a: 398). 이처럼 전쟁 전부터 지리적으로 북한과 밀접한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의료인력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었다.
중국의 의료지원은 한국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중국은 전쟁 초기부터 의생부(醫生部)・항미원조총회(抗美援朝總會)・적십자회총회 등의 기구를 통해 각 성시(省市)의 의료인력을 동원했다. 베이징, 상하이(上海), 텐진(天津), 선양(瀋陽) 등지에서는 지원의료대, 수술대, 공공위생대와 방역대를 조직하여 북한 및 중국 동북지방으로 파견했다. 1951년 10월 통계에 따르면, 중국 각 성시에서 북한으로 파견한 의료대는 50여 그룹에 달했고, 정전 때까지 중국 전역에서 모집된 6,000여 명의 인원이 의료대로 참가했다(朱繼光, 2011: 79). 이같이 큰 규모의 의료대가 파견됨에 따라 중국 의료인력이 북한에 들어와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이 북한의 신문에 빈번하게 게재되었다[44].
1951년 3월 19일에는 중국 적십자회 국제의료방역복무대(대장: 주립신) 150명이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들은 베이징, 상하이, 난징(南京), 광둥(廣東), 한커우(漢口) 등 중국 각지에서 선발된 보건의료 종사자들이었다. 중국에서 모집한 총 인원은 191명이었으나 이 가운데 41명은 “모 방면의 후방병원”으로 배치되고 나머지 150명이 북한에 들어왔다[45]. 치료 및 방역의약품 상자 300개, 현미경 7대, 자동차 6대를 비롯한 기자재를 가지고 입북한 국제의료방역복무대는 야전병원에 6개 대대, 후방의 방역사업에 5개 대대로 편성되었고[46], 3월 29일부터 각 야전병원과 후방의 도시・농촌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다[47].
국제의료방역복무대는 후방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치료와 방역사업을 전개하였다. 1951년 3월 29일부터 나흘 동안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을 방문한 국제의료방역복무대는 외과의사 황초한 등 1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위화면 일대 각 농촌을 돌면서 1,500여 명에게 종두를 놓아주는 한편 46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4월 4일 옥상면을 찾은 내과의사 리유, 간호원 임지근, 량해동, 뢰조미 등은 중환자의 가호(家戶)를 직접 방문하여 진료했다. 이들은 북한주민들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조선어와 풍속을 배우기도 하였다. 의주군 일대에서 3,500여 명의 환자를 진찰・치료한 국제의료방역복무대 일행은 4월 28일 주민들의 환송 속에 창성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48].
국제의료방역복무대는 1951년 11월 15일 귀국하였다[49]. 그러나 그 이후에도 중국 의료방역대 조직과 파견은 이어졌다. 예컨대 1952년 2월 26일 중국중화의학회 총회에서 미군의 세균전 실시에 대응한 항미원조방역대 조직에 대한 호소가 발표된 이후, 베이징, 상하이, 텐진 등지의 의과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북한에 파견되었다. 이때 베이징대학 의학원에서 조직된 인원만 2백여 명에 달했다[50].
무엇보다 중국 연변지역 조선인[51] 사회의 북한에 대한 지원은 북한의 전시 보건의료체계 형성・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 발발 이후 보건인력 수요는 늘어갔으나, 새로운 인력을 배출하는 것은 교육기관 구축과 교육과정 이행 등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었다. 이미 의학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데다 언어적으로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는 연변의 의료인력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였다. 옌지시(延吉市) 전시간호학교는 1950년 11월부터 1951년 9월 말까지 강습반을 개설하고, 연변 조선인 여성 간호원 1,000여 명을 양성하여 각 야전병원에 보내는 역할을 담당했다(리해식, 1994: 210). 그밖에도 연변을 비롯한 만주 전역에는 북한 ‘후방병원’이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인민군 부상병과 북한주민들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문미라, 2017: 270).
중국 내에서 조직되어 북한으로 파견된 의료대 외에 중국인민지원군에 배속된 의무부대들도 북한에서 활동했다. 예컨대 1950년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한 이후 제3차 전역이 끝난 1951년 1월 8일 시점까지[52], 중국인민지원군에는 매 군단(軍團)당 300개의 병상을 갖춘 세 개의 의료소가 편제되어 있었다. 또한 중국은 전쟁 기간 동안 북한을 야전구(野戰區)로, 중국 동북지방을 후방구(後方區)로 지정하고, 야전구는 다시 작전구(제1선 작전군의 구역), 병참구(작전군 구역 후방부터 북중 국경까지의 광대한 구역)로 나누어 병참구에 자신들이 운영하는 병원(병참의원)을 설치하였다(朱克文·高恩顯·龔純 主編, 1996: 470-1). <그림 5>는 제3차 전역이 완료된 시점에 북한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인민지원군의 병참의원 배치도인데,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17개의 병참의원이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전선에 인접한 황해남도 연산군 고사동에 위치한 중국인민지원군 병원에는 1953년 5월 현재 1,500여 명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고, 이들 중 절반은 외과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이 병원에는 100명의 의사들과 중국과 북한의 간호사 각각 20명이 함께 근무하였다[53]. 중국인민지원군은 정전 이후에도 전후 복구를 위해 34개 사단이 체재하였다[54]. 지역 기층의 복구사업에까지 배치된 이들은 지역에서 대민접촉에 노출되었고 말단에서의 교류도 지속되었다.
앞서 동유럽 국가들의 의료지원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쟁은 북한에서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 간 의학지식 교류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전후 복구 기간 여러 국가에 소속된 지원단의 북한 체류는 북한의료인들에게 이들의 의학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정전 이후인 1953년 11월 23일 체결된 북한-중국 간 조중경제문화협정도 기본적으로 학술교류에 관한 협력을 포함하였다(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2005: 773).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매년 나흘간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의학회에도 북한에 체류 중인 각국 의료단이 참석하였다. 북한 과학원과 보건성이 공동 주최한 이 행사는 북한의 의과대학 및 연구소의 의학자, 연구사 등 600여 명이 참석하는 대형 학술대회였다.
1954년 제1회 조선의학회에는 내과, 결핵과, 의과, 산부인과, 안(眼)이비인후과, 피부성병과 등 의학 각 부문 등에 걸쳐 136개 제목의 보고가 이뤄졌고, 이 중에는 소련을 비롯한 북한 주재 적십자의료단 소속 국가 의학자들의 연구 34편도 포함되었다[55]. 제2회는 제1회와 비슷한 규모로 외부 발표는 23개였다[56]. 제3회차에는 중국에서 파견된 의학자대표단(단장: 진심도)도 참석했다[57].
북한도 1956년 7월 23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전국의학대회에 의학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대회는 중화의학회, 중국약학회, 중국생리과학회, 중국미생물학회, 중국해부학회를 중심으로 개최되었고 특히 한방분야의 대표들이 많이 참가했다. 전체 참가 인원은 학회 대표들 1,000명과 옵저버들이었다. 중화의학회 대표 부련장박사는 “이 회의가 서방의학 의사들과 한방의사들 간 전례 없는 단결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개회사를 하였고, 개막식에는 소련, 루마니아, 북한, 인도네시아, 홍콩, 마카오 등의 대표단이 참석했다[58]. 이후에도 중국 방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컨대 1957년 4월 18일 중국 국가위생부의 초청으로 보건인력 대표단(단장: 보건부상 류기춘)이 한 달 간 의학연구, 치료예방, 의학교육 기관을 참관하는 일정으로 파견되었다[59].
1954년에서 1956년 사이 북중 간 의학교류는 북한의료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1950년대 북한에서 한의학의 급격한 위상 향상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며 그 영향을 받게 되었던 점과 관련이 있다(김근배, 1999: 197). 중국은 1950년 8월 국가위생부가 개최한 제1차 전국위생회의에서 ‘중서의(中西醫) 단결’을 국가 위생공작의 중요 정책으로 결정한 이후(潘荣华·杨芳, 2004: 24), 서양의료와 중의학의 통합을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1954년 열린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당시 중국 전역에 산재하고 있던 10만 명의 중의를 교육·활용해야 한다는 방침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중의연구원 건립, 중의에 대한 연수, 중의의 업무 확대 등이 추진되었다(陈可冀·陈士奎, 2002: 24).
1950년대 중반 중국에서 추진된 중서의 통합방침의 핵심은 ‘서의가 중의를 배우는 것(西医学习中医)’에 있었다. 이러한 정책적 기조 아래에서, 중국 각지에서는 과거의 중의사 멸시 현상이 적극적으로 변화되었고 중의에 대한 관리가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서의의 중의 학습 활동이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다(张红兰, 2014: 24). 1955년 12월에는 중의연구원 정식 설립되었고, 이와 동시에 중의연구원 제1기 ‘서의의 중의 학습 연구반(西医学习中医硏究班)’이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대량의 고등의학원 졸업생과 임상경험을 갖춘 서의를 흡수해 중의를 학습하게 함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 첫 번째로 중서의가 결합한 의학자가 탄생하였다(陈可冀·陈士奎, 2002: 24-5).
이와 같은 중국의 중의학 강조와 중서의 통합노선은 1950년대 북한에 주어진 의학발전 방향 중 하나로서 제시되었다. 북한은 1956년 4월 제3차 노동당대회 결정을 통해 한의학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였다. 한의학을 ‘민족의 유산으로서 미래를 위해 계승하고 활용하자’는 취지였다(김근배, 1999: 196). 조선노동당대회 결정을 구체화한 내각명령 제37호 「한의학을 발전시키며 한방치료사업을 개선 강화할 데 관한 명령」은 한의학 연구사업을 서양의학과의 긴밀한 연계 아래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①서양의학 분야에서 한의사들이 소유하고 있는 치료 및 처방 경험을 면밀히 연구함으로써 한의들에게 이론 및 기술적 도움을 제공할 것, ②이와 동시에 의학교육 또는 재교양사업을 통하여 광범위한 의료종사자들에게 한의학의 우수한 이론과 기술을 보급할 것, ③한의학 연구와 치료사업을 관장하기 위해 보건성 내 해당 지도부서를 설치하며 한의학기술협의회를 조직할 것 등의 과업을 제기하였다[60].
북한에서 한의학 활용 정책을 전면화한 이유는 한의사들을 대중 보건사업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國土統一院 調査硏究室, 1988: 332). 노동당대회 결정에 따른 방침은 1956년 8월 30-31일 개최된 전원회의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한의사의 활동을 제한했던 규정을 폐지하고 이들에게 필요한 약재를 공급할 것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의사들에 대한 세금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1998: 793). 이를 통해 한의사들을 국가치료기관에 적극적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것이다. 1956년 이전까지 한의사들의 활동은 북한에서 규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거치며 의료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한의학은 의료수요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자 대중적인 의료활동을 전개하기에도 유리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 한의학을 국가의료기관에 편입시키고, 한의학 전문연구기관을 세운다는 것은 엄청난 전환이었다. 식민지시기는 물론 남한도 한의학에 대해 이런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같은 정책을 펼친 국가는 세계적으로 중국이 유일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1950년대 중국의 중의학 제도는 북한에 한의학 옹호 논리를 제공했고, 교류의 형식을 통해 북한 한의학 발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북한 한의학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풍부한 영감을 주었다(신동원, 2003b: 157-8). 북한의 의료정책 결정권자들은 중국의 경험을 배울 것을 끊임없이 역설하였다. 이를테면, “선진 중국에서 중의와 서의를 통일 발전”시킨 것을 배운다면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북한도 “우리 한의들이 서의를 도입하며, 서의는 한의를 도입하여 우수한 통일체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김승연, 1957: 78).
중국에서 중의학을 학습하여 귀국한 후 보건성 의무국 부국장에 임명된 김효선은 중국의 중의학정책을 북한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에서의 중의(한의) 정책과 그의 성과」라는 글을 두 차례 연재하면서, 중국의 중의정책 기본 방향, 중의에 대한 관리체계, 서의들의 중의학습, 중의학 교육체계, 중의학 연구사업 등을 소개하였다(김효선, 1957b: 14-8; 1958: 5-8). 이 글은 한의학 연구사업이 “전인미답의 길이며 어려운 사업”이지만, “중국에서의 중의학의 발전을 위한 사업에서 거두고 있는 성과가 큼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자신감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끝마치고 있다. 북한의 한의학정책이 올바르다는 확신의 근거를 중국의 중의학정책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김효선은 한의학과 중국학의 질병 치료에 대한 이론과 방법론을 분석함으로써 ‘신의학’이 해결하지 못한 질병 치료의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김효선, 1957a: 26).
이후 북한에서는 각 병원에 한방과가 설치되었고, 한방의와 서양의의 협진 아래 환자들에 대한 한약, 침, 뜸 등의 치료법이 적용되기 시작했다[61]. ‘신해방지구’ 개성에서 국가의 도움 아래 운영된 개인 한방치료소 30여 개의 존재는 발전하는 의료의 모습으로 제시되었다(리병남, 1956: 60). 1958년 무렵부터는 한의사들의 협동화사업이 전개되었고, 한의의료기관의 한의종합의원으로의 재편도 본격화되었다. 1960년 6월 북한 전역에는 182개 한의종합의원이 존재하였고, 평양시 한방병원을 비롯하여 11개의 한방병원과 238개의 한방과가 조직되어 있었다. 더불어 한의사 양성을 위해 개성의학전문학교에 한의학과를 조직하여 매년 중급한의사 160명을 양성하였고, 1960년부터는 평양의학대학 특설학부에 한의과를 조직하여 매년 120명의 한의사를 배출하였다(김효선, 1960: 12).

5. 맺음말: 다양한 의료의 개입

북한의 의료체계는 일제식민지 시기 방식의 의료에 대한 정리, 사회주의 선진국가 소련으로부터의 제도 이식, 1950년대 후반부터 한의학적 전통의 활용 및 병용이라고 하는 흐름으로 형성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한국전쟁 시기 다른 국가들의 의료지원과 그 영향은 북한의료의 지향이 여러 가지 논의 속에서 혼재되고 조정되어 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북한에서 공식 간행된 보건의료 역사에 대한 정리는 이를 검토할 여지를 차단하였다. 아울러 이 같은 인식은 1960년대 이후 북한의 중소분쟁 속에서 발현한 자주노선, 1990년대 전후 공산권 붕괴 이후 나타난 국제적 고립이라는 현실에 기반하여, 북한의료 발전의 궤적 또한 단선적으로 파악하도록 하는 배경을 제공하였다.
이 연구는 공식화된 북한의 기존 서술을 비판하고 북한 의료발전을 국제적 교류의 관점에서 재구성해야 함을 제기하며, 해방 이후부터 사회주의 각국 의료단이 철수하는 1958년까지 북한의료의 역사를 재정리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보건의료체계의 복구와 급속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재편에 수반되는 의료적 수요에 대한 해결, 1950년대 한의학적 전통의 ‘재발견’과 의료체계 내로의 전면적 도입·통합을 비롯한 북한의료의 ‘전통’이 북한의 내적 능력을 통해서만 성취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다방면에서 이뤄진 국제의료지원을 간과한 결과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는 북한 의료체계 형성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련, 중국, 사회주의 여러 국가들의 의료지원을 검토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을 가진 북한은 일제식민지 유제(遺制)를 소련의 방식으로 빠르게 대체하였다. 해방 직후 북한 전역에 불어 닥친 ‘소련배우기’의 열기를 떠올려보면, 북한의료의 기본적인 바탕이 소련방식에 기초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역사적으로 전쟁이 의료발전에 역설적으로 기여했던 것처럼, 1950년 한국전쟁은 북한이 여러 국가의 의료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사회주의 진영 각국에서 파견한 의료단은 자재까지도 자국에서 가져와 그들 국가의 이름을 붙인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 의료단들은 일차적으로 치료활동을 하는 한편 북한 의료인력과도 협진하였고 이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였다. 또한 학회를 조직하여 치료사례를 공유하고 북한 국내외에서 의료인력에 대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사회주의 진영의 대북한 의료지원은 국제적인 의료지식의 교류와 협력의 공간으로 기능하였고, 나아가 학맥 네크워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다양한 사례를 파악함으로써 보다 종합적인 이해로 나아가는 것은 후속과제이지만, 루마니아와 북한의 신경외과학계 사례가 보여주듯이 전문의학 각 분야는 동유럽 국가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편 동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의학발전의 궤적은 소련의 의학계와 이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역의 의학지식에 제한되지 않았다. 심지어 세계적인 신경외과학계의 권위자 쿠싱(Harvey W. Cushing)의 제자들은 북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북한의 전문의학계에 개입된 서구의료의 영향은 새로운 검토가 필요한 지점이자 북한의료의 질적 수준을 새롭게 재평가할 수 있는 부분 또한 남겨준다. 다만, 북한의료 전반에 대한 동유럽 국가들의 영향은 1960-1970년대까지 시기를 확장하여 북한 의료지식의 정립과정을 파악할 때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중국 의료단의 경우 북한에 체재한 시기는 길지 않았지만, 중국과의 학술교류를 가능하게 하였고 중국방식의 의료모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의료단 철수 이후에도 인적·학술적 교류로 지속되었다. 특히 중국의 지원은 1950년대 중반 북한이 한의학을 ‘재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북한은 당시 중국에서 추진된 중서의 통합정책의 경험을 자신의 보건의료 분야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의 중의학 강조와 중서의 통합노선은 1950년대 북한에 주어진 의학발전 방향 중 하나로서 제시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의 경험은 북한의 한의학정책이 올바르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요컨대 중국의 중의학은 북한의료가 지향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를 보여주었고, 그 영향 속에서 1960년대 이후 북한의 ‘주체적’ 한의학 발전을 이뤄갈 수 있었다.

Notes

1) 다음의 연구도 북한의 전후 복구 가운데 이뤄진 의료지원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였다(이종석, 2000; 박영실, 2012; Shen & Xia, 2012).

2) 영문 또는 노문 병기가 어려운 이름은 북한 자료에서 확인되는 대로 옮겼다.

3) 「민주보건의 비약적 발전(리병남)」, 『로동신문』, 1948.8.23.

4) 소련적십자방역대는 1946년 12월부터 1947년 7월 사이 91개 도시와 134개 군, 879개 농촌마을에서 6,672,355명(545,788호)에 대해 검병(檢病)과 질병 치료를 했고, 175개 강연회와 618회 집회를 개최하여 521,985명에게 보건해설과 선전사업을 실시했다(국사편찬위원회, 2002: 117-8).

5) 1949년 2월 체결된 조소경제문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진행된 문화 및 교육분야 협력 강화에 대한 논의는 북한과 소련 간의 활발한 의학교류를 가능하게 했다(박종효, 2010: 305).

6) CIA, Report USSR Sends Bacteriologists to North Korea, 1950.8.24.

7) 이 대회에서는 17개의 연구논문이 16명의 발표자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아루뚜난 교수가 두 개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그 외 이름이 알려진 발표자들은 허신, 전영을, 양진홍, 장기려, 최응석, 안경림 등이었다. 연구발표 제목과 발표자는 『조선중앙연감』(조선중앙통신사, 1951: 380)에서 확인할 수 있다.

8) 「朝鲜平壤开外科医学大会, 中苏医学家应邀与会」, 『人民日报』, 1950.1.6. 북한을 방문한 중국의학자 가운데 단장 격이었던 주택소는 당시 중국에서 높은 위상을 가졌던 외과의사였다. 1926년 중산대학 의학원을 졸업한 주택소는 해방 이전부터 중국공산당 중앙 지도자들의 건강 관련 업무를 책임졌고, 군대에서 활동할 의학간부를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주택소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는 韦英思, 2018 참조.

9) 「인민보건제도에 배운 바 크다 -래조 중의 중국외과학자 주택소 교수 담-」, 『로동신문』, 1950.1.9.

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과학회 결성」, 『로동신문』, 1949.12.30. 외과학회 제1차 중앙위원회는 리동화를 위원장, 장기려, 리호림을 부위원장, 안경림을 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외과학대회는 1949년 7월 보건성 학술위원회에서 학회규약이 검토되었고 전국외과학대회에 개최에 맞춰 창립되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건성 학술위원회, 1949: 78).

11) 소련의 의료체계는 기본적으로 세마쉬코(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емашко, 1874-1949)가 입안한 국가계획에 의한 예방의학 중심의 보편적 무상의료 모델을 기초로 하였다. 이후 몇 차례 변형을 거치지만 소련 의료체계의 기본적인 원형은 세마쉬코에서 출발하고, 북한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였다(N.A. 세마쉬코, 2017).

12) 커밍스는 일찍이 해방 이후 한반도 전체가 줄곧 내전과 같은 상황이었음을 지적했고, 정병준은 1949년 급증하기 시작한 남북 접경지대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근거로 한국전쟁의 내전적 성격이 이미 전쟁 발발 이전에 형성되고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13) 「알주난 박사 전시외과 강의」, 『교원신문』, 1949.10.13.

14) 한국전쟁은 북한이 동유럽 국가들 수교한 이후 불과 2년이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발발했다. 북한은 1948년 10월 16일 폴란드공화국, 1948년 10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1948년 10월 26일 루마니아공화국, 1948년 10월 30일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 1948년 11월 11일 헝가리공화국, 1948년 11월 29일 불가리아공화국, 1949년 5월 17일 알바니아공화국, 1949년 11월 7일 독일민주주의공화국과 각각 수교를 체결하였다(박태호, 1985: 60).

15) 이는 서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시기 서독은 남한에 대한 의료지원을 결정하였고 1954년 전후 복구 과정에서는 부산에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조성훈, 2018; Schomman, 2018: 64).

16) 1950년부터 1958년까지 유엔총회 폴란드 사절단이었던 외교관 보단 레반도프스키(Bohdan Lewandowski, 1926.6.29-2013.3.25)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어있던 폴란드의 처지를 중국과 일본 사이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회고했다(보단 레반도프스키, 1991: 79).

17) 「체코슬로바키야 인민들의 거대한 원조」, 『로동신문』, 1952.5.9.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 원호를 위한 물자로 외투 1만 벌, 면직 내의 4,462착, 모직 양복지 7,687미터, 의약품 상자 253개 등을 발송하기도 하였다(Jaroslav Olša, jr, Accessed 19 June 2018: 247).

18) 1953년 7월 시점 미군의 첩보에 따르면, 평양의 소련병원은 무상치료의 원칙을 지키고 있고 모든 환자를 수용하기 때문에 항상 분주하다고 보고되었다(Headquarters Combined Command for Reconnaissance Activity Far East, Security Information, 1953b: 1)

19) 「전염병 예방 및 방역일꾼 교양사업에 거대한 성과」, 『로동신문』, 1951.8.4.

20) 「쏘련 적십자 의료단 평양시 환송 대회 진행」, 『로동신문』, 1957.4.25.

21) 1950년 6월 전쟁이 개시된 직후 헝가리공산당 서기장 라코쉬 마티스(Mátyás Rákosi)는 대북지원이 헝가리의 의무라고 강조했고(야노스 본타, 1991: 239), 의료단을 신속하게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6,000여 명의 노동자도 파견했다(CIA, Report Recruitment of Hungarian Internees for Work in North Korea, 1954.3.11).

22) 「웽그리야 의료단원들」, 『로동신문』, 1956.4.4.

23) CIA, Report Foreign Aid to North Korea, 1952.9.21.

24) 「웽그리야 의료단원들」, 『로동신문』, 1956.4.4.

25) 이 책의 사진은 헝가리국영통신 자료를 수집한 김보국이 제공한 것이다.

26) 「루마니아 적십자 의료단의 시설 및 비품을 우리나라에 이관」, 『로동신문』, 1957.7.27; 조선중앙통신사(1958: 360).

27) 「불가리아 인민들로부터 보내온 다량의 원호 의료기자재 도착」, 『로동신문』, 1951.10.6.

28) 「귀국하는 제4차 볼가리야 적십자 의료단을 위한 환송회 진행」, 『로동신문』, 1957.4.1.

29) CIA, Report Export of Motor Vehicles, Medicines and Drugs to Communist China and North Korea, 1951.2.2.

30) CIA, Report Living Conditions in North Korea. 1954.3.10.

31) 「체코슬로바키야 적십자 의료단원들 조선인민의 치료예방 사업에 헌신」, 『로동신문』, 1955.7.7.

32) 「체코슬로바키야 의료단원들의 고귀한 방조」, 『로동신문』, 1957.3.23.

33) 「제5차 파란 적십자 의료단 귀국」, 『로동신문』, 1957.8.4.

34) 동독은 북한 대외원조 총액에서 소련과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적극적으로 전후 복구를 지원했다. 1962년 종료된 함흥시 재건은 이들이 맡은 대표적인 프로젝트였다. 동독은 장기간의 자원 투입이 요구되는 도시 재건사업의 실시와 서독과의 경제건설 경쟁,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북한에 대한 추가적인 원조를 꺼려했다(김보미, 2013: 313-314, 323; 국사편찬위원회, 2013: 425, 445).

35) 의료단은 불가리아 복귀 이후 군사의료학술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수술과 처지 경험에 대한 공유와 함께 북한에서 습득한 한의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일부 보고서들은 북한지역 약초 16가지가 들어간 36가지 한약의 사용에 대해 설명하였다(Daniel Rupanov, 2017: 49; Baev & Kim, 2017: 7).

36) 「황북도 중앙병원에서 혈액학 꼰페렌찌야 진행」, 『로동신문』, 1956.5.30. 헝가리 의료단은 귀국 일주일 전인 1957년 6월 14-15일 제3차 의학 꼰페젠찌야를 마지막으로 개최했다(편집부, 1957: 82).

37) 1956년에는 특히 이비인후과와 산부인과 전문의 부족 문제가 지적되었다.

38) 와이너맨(1917-1970)은 1942년 조지타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48-1950년 캘리포니아대학 의료경제학 조교수, 1962-1970년 예일대학 의료공중보건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밖에 미국공중보건학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지역의료정책 계획과 집행에 참여하였다. 1970년 항공기 테러로 사망하였다(Falk, 1970: 169-72).

39) 「우리나라와 웽그리아간의 1965~1966년도 문화협조계획서 실행을 위한 금년도 보충 의정서와 량국 보건성들간의 1966년도 보건 및 의학 부문의 협조계획서 조인」, 『로동신문』, 1966.4.20.

40) 「우리나라와 체코슬로바키야 간에 보건협정 조인」, 『로동신문』, 1956.6.6. 협정 체결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보건대표단은 평양의과대학을 방문해서 자국에서 발송한 서적들이 비치된 대학 도서관을 둘러보기도 하였다(「체코슬로바키야 보건일군 대표단 평양시내 각 보건, 문화기관 참관」, 『로동신문』, 1956.6.24).

41) 동유럽 국가 의료진의 북한의료진과의 공동연구논문 주제를 국가별로 살펴보면, 루마니아는 상해(傷害) 치료, 여성노동자 암 검진, 빈혈, 폐결핵 등, 불가리아는 골절 치료, 임신중독 치료, 회충증, 체코슬로바키아는 홍역, 백일해, 결핵, АКТГ(임상실험), 소아마비 등이었고, 폴란드 의료진의 지도논문은 결핵성 뇌막염이었다.

42) 아르세니(1912-1994)는 루마니아 신경외과의 창시자로 불리는 바그다자르(Dumitru Bagdasar, 1893-1946)와 함께, 설립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신경외과 병원을 운영했던 인물이다. 바그다자르는 보스턴의 신경외과 쿠싱(Harvey W. Cushing (1869-1939) 교수에게, 아르세니는 바그다자르에게 사사받았다. 루마니아 의료단으로 두 차례 파견된 렌께 호르비트(Lenke Horvath, 1917-1991)도 쿠싱에게 사사받았다(D. Mohan, I. Luca Husti, H. Moisa, A.V. Ciurea & H.C. Mult, 2014: 705-6).

43) 1950년대 후반 북한의 명령으로 헝가리에서 복귀한 북한 대학생들은 헝가리 인사들과 접촉할 수 없었고, 1950년대 초 헝가리 군병원에서 근무했던 5명의 의사들도 1969년 북한을 다시 방문했을 때 과거 병원 동료들을 만날 수 없었다(야노스 본타, 1991: 249; Ruzsa Katalin, 2017: 99-100).

44) 「중국 적십자 국제의료방역복무대 일행 150명 래조」, 『로동신문』, 1951.3.24; 「중국 적십자회 국제의료방역복무대 평남도 각지에서 맹활동」, 『로동신문』, 1951.5.22; 「중국 적십자회 국제의료복무대 최전선에서 맹활동」, 『로동신문』, 1951.6.2; 「중국 호남성 외과의료대 조선으로 출발」, 『로동신문』, 1951.6.22 등.

45) 「중국 적십자 국제의료방역복무대 일행 150명 래조」, 『로동신문』, 1951.3.24.

46) 「조선인민을 방조하여 온 중국 적십자회 국제의료방역복무대를 환영!: 보건성에서 환영회 개최」, 『로동신문』, 1951.4.7.

47) 「중국 의료방역대를 각지 인민들 열렬히 환영」, 『로동신문』, 1951.4.3.

48) 「중국 적십자회 국제의료복무대 각지에서 맹활동」, 『로동신문』, 1951.5.12.

49) 「중국 국제의료방역복무대 많은 성과 남기고 귀국」, 『로동신문』, 1951.11.20.

50) 「중국 의료방역대 조직」, 『로동신문』, 1952.4.22.

51)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한인계(韓人系) 중국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 개념에는 ‘조선족=중국인’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연변에 거주한 조선인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이전 시기까지 소급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되어 ‘조선족’이라는 용어가 중국에서 정식으로 통용되기 시작하였지만, 연변 조선인의 정체성 재정립은 행정구역 설립과 동시에 진행되지는 않았으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 시기 연변 조선인 사회의 의료지원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조선족’보다는 ‘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52) 중국은 자신들이 참전한 한국전쟁 당시 전투를 제1차에서 제5차 전역까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저, 2005).

53) CIA, Report Hospitals in North Korea, 1953.9.15.

54) 이들 중 19개 사단은 1954-1955년 사이 세 차례에 걸쳐 철수하였으나 나머지 병력(25만명)은 1958년까지 잔류했다(이종석, 2000: 205).

55) 「조선의학회 진행」, 『로동신문』, 1954.12.20.

56) 「제二차 조선의학회 진행」, 『로동신문』, 1955.11.2.

57) 「제3차 조선의학회 진행」, 『로동신문』, 1956.10.29.

58) 「북경에서 전국의학회의 개막」, 『로동신문』 1956.7.26.

59) 「중국을 방문하는 우리나라 보건일군 대표단 출발」, 『로동신문』, 1957.4.19.

60) 「한의학을 발전시키며 한방치료사업을 개선 강화할 데 관한 내각명령 시달」, 『로동신문』, 1956.4.26.

61) 「평양 시내 각 병원에 한방과를 설치」, 『로동신문』, 1957.1.20.

그림 1.
평양 소재 소련적십자병원
Figure 1. Soviet Red Cross Hospital in Pyong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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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체코슬로바키아 국립극장에서 개최된 북한 지지집회
Figure 2. Support Meeting for North Korea in Czechoslovakia National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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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헝가리 의료단의 진료 및 의료기술 전수
Figure 3. Treatment and Teaching by Hungarian Medical 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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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헝가리 의사들의 귀국(1957.6.20)
Figure 4. Return of Hungarian Doctors (1957.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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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1951년 북한 소재 중국인민지원군의 병참의원 배치도
Figure 5. Military Logistics Clinics of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in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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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중국인민지원군 의사의 진료
Figure 6. Treatment of the Doctor’s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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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Health and Medical Statistics in North Korea, 1945-1948 (단위: %)
연도 1945 1946 1947 1948(상반기)
구분
의료시설 병원 100.0 202.4 314.3 338.1
 침대 100.0 178.9 300.6 333.0
결핵요양소 100.0 200.0 200.0 200.0
 침대 - 100.0 127.8 170.5
진료소 100.0 251.4 1,197.3 1,456.8
예방시설 - 100.0 600.0 833.3
연구시설 - 100.0 200.0 300.0
치료인원 입원환자 100.0 179.6 304.4 213.1
외래환자 100.0 217.2 623.6 435.3
예방주사 종합백신 - - 100.0 115.1
콜레라백신 - 100.0 79.5 92.2
두묘 - 100.0 237.4 207.5
광견병백신 - 100.0 1,706.8 2,408.11
무의면 감소율 100.0 76.0 47.0 31.0
Table 2.
Source of Papers, Articles and Footnotes in Inminbogun (Number)
연월(호수) 1949.3-1950.4(6권) 1957 (12권) 1958 (12권) 1959 (11권) 1960 (12권)
각주 출처
북한 27 18 1 1
영미권 2 2 6
1(번역논문)
일본 18 26 10
소련 7 73 57 4 7
25(번역논문) 10(번역논문) 13(번역논문) 7(번역논문) 20(번역기사)
20(번역기사) 2(번역기사) 2(번역기사) 6(번역기사) 10(번역논문)
1(공저논문)
중국 5 3 2(번역논문) 7(번역기사)
6(번역논문) 2(번역논문) 1(번역기사) 6(번역논문)
2(번역기사)
헝가리 3개 2(번역논문)
루마니아 5(공저논문) 1 1(번역기사) 4(번역기사)
1(연구논문)
불가리아 3(공저논문) 1 1(번역기사) 1(번역기사)
1(연구논문)
1(번역기사)
체코슬로바키아 6(공저논문) 2
폴란드 1(지도논문) 1(번역기사)
동독 9 3 1(번역기사)
1(번역논문)
1(번역기사)
기타 5(독일 2, 프랑스 2 외 1)

※ 주1) 공저논문은 북한의료진과 함께 집필한 연구논문임.

※ 주2) 1959년 이후 참고문헌이 각주형태로 제시된 경우는 거의 없음.

※ 주3) 1959년 8월호는 소재가 확인되지 않아 집계에서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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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부표 1.

헝가리적십자의료단 파견과 활동(황해북도 중앙병원 재건, 사리원)

차수 입북 일시 귀국 일시 단장 활동 내용
제1차 1950.7.29 1951.8월 이전 단빌 오또,* 네멧쉬· 아우렐 •부단장 부다페스트 의과대학 디낼·읏도 교수
•외과의사 6명, 내과의사 1명, 뢴트겐 기사 1명, 조수 2명, 간호사 3명 등 15명으로 구성
•1년간 1,300여회 대수술, 17,000여회 처치, 4,000여 명 부상병 치료, 54,000여 그램 수혈(5,000여 그램은 의료단원 헌혈)
제2차 1951.8월 전후 1952.1월 전후 바린드· 쉐-레쉬 또는 쉐레위미린뜨** •‘라꼬쉬병원’이라는 명칭의 등장(제1차 의료단은 ‘○○야전병원’에서 진료)
•보건간부 양성(북한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학술강의, 실습 등)
제3차 1952.1월 중순 1952.10.28 (환송식) 야노쉬 •2년간 3,000여회 대수술, 50,000여회 처치, 12,000여건의 뢴트겐 진찰, 372,000그램 수혈(1952년 8월 시점)
•신경기능 장애로 인한 불구 환자 200여 명에게 재활치료 실시
제4차 1952.10월 전후 미상 민체프 미하일 미상
제5차 미상 미상 라따와리 마스로 미상
제6차 1954.3월 1955.3.17 임레 히르웬베르 •의사, 뢴트겐 의사, 간호원 및 기타 인원 35명으로 구성
•제2그룹은 1954.7.2 입북, 1955.8.2 전후 귀국(8.2 환송식)
•황해북도 중앙병원에서 활동
제7차 1955.3.11 1956.2.23 바카츠 리보르 •단장은 부다페스트 의과대학 학장
•제1그룹은 의사 8명과 간호원 및 기타 9명으로 구성
•제2그룹은 1955.8.2 전후 입북(8.2 환영식)
•황해북도 중앙병원에서 활동
제8차 1956.2.14 1957.6.22 쎄데르께니 야노쉬 •결핵내과, 사지내과, 흉부내과 등 전문의사 7명 및 전체 11명으로 구성
•결핵병원들과 도내 각 군의 병원들을 순회하면서 의료기술적 도움 제공
•황해제철소, 곡산광산, 흘동광산 등 생산직장을 방문하여 집단검진사업 진행
•황해북도 중앙병원에서 활동

※ 주1) 각국 의료단 활동 표는 1950-1960년 『로동신문』 기사를 참조하여 작성(이하 모든 부표에서 동일).

※ 주2) 각 의료단의 활동일자는 입북·귀국일시이나, 일자가 불명확한 경우 환영식 또는 환송식 일자로 기 재(이하 모든 부표에서 동일).

* 부단장 부다페스트 의과대학 디낼·읏도 교수와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음. 1956년 4월 4일 기사에는 제1차 의료단 단장 이름이 ‘단빌오또’라고 나와 있음(「웽그리야 의료단원들」, 『로동신문』, 1956.4.4).

**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있음.

부표 2.

루마니아적십자의료단 파견과 활동(평안남도 중앙병원 재건, 남포)

차수 입북 일시 귀국 일시 단장 활동 내용
제1차 1951.4.27 1951.11.14 추라이 이온 (의학박사) • 6개월간 활동. 단장 1명, 외과의사 7명, 뢴트겐기사 1명, 간호원 13명 등 총 22명으로 구성
• 동반한 루마니아 인민대표단이 가져온 피복, 구두, 의약품 등 각종 의료기구는 1천 545톤에 달함(의약품과 의료기자재는 차량 30대 분량)
• 전상자 치료와 후방 인민들을 대상으로 한 위생방역사업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단장 이하 전 의료단원에게 국기훈장 및 공로메달 수여
제2차 1951.11.25 (환영식) 1952.11.8 (환송식) 치셀·솔탄 • 외과의사 8명, 내과의사 2명, 간호원 9명, 기타 의무인력 4명으로 구성
• 조영기 원장이 지도하는 조선인민군 후방병원에 배치
• 뢴트겐 진단 권위자인 호란 교수는 하루에 120명까지 진단하는 한편 북한 의료진에게 뢴트겐 강의를 진행
• 북한 의료진과 실험사업 협업
• 병원 주변 인민학교 및 초급중학교 아동들에 대한 건강진단사업을 조직 전개(탁아소 설립사업 대체).
• 최신식 기자재(차량 3대 분량)를 갖춘 병원 운영
제3차 1952.12.8 (환영식) 1953.7.7 야·니· 니꼴라이 • 단장 야·니·니꼴라이, 기술부 단장 깔므· 씰비루를 비롯하여 각 과별 전문의사와 간호원들로 구성
• 방대한 양의 의료기자재와 의약품을 가지고 입북함
• 조영기 원장이 지도하는 조선인민군 후방병원에 배치
• 단장 이하 전 의료단원에게 국기훈장 및 공로 메달 수여
제4차 1953.6.28 1954.6.13 (환송식) 만링 꼰스단찐 • 외과, 내과, 산부인과 등 전문의사와 기사들로 구성
• 각종 의약품과 의료기자재, 병실 건축용 자재를 가지고 입북
• 남포시 제1인민병원 복구 : 의료시설, 의약품, 목재, 유리, 수도, 전기시설 등을 제공(남포 제1병원에서는 외래환자의 치료는 물론 노동자, 군무자, 농민, 사무원 등 입원환자들에 대한 무상치료 실시)
• 남포시 위생방역사업에도 페니실린 등을 비롯한 물질적 원조 제공
• 주변 공장, 농촌을 돌며 순회진료 실시
• 단장 이하 전 의료단원에게 국기훈장 및 공로 메달 수여
제5차 1954.6.11 1955.7.14 베데우 꼰스딴찐 • 의사 30여 명, 간호원 9명, 기타 인원 5명으로 구성
• 남포시 제1인민병원(후에 평안남도 중앙병원)에서 사업
• 소아과 의학전문학교 교수 꼴리쉬 게오르기는 북한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한 사업에 집중
제6차 1955.7.8 미상 빠브로브 세르지우 • 의사 26명, 간호원 및 기타 인원 14명으로 구성됨
• 평안남도 중앙병원에서 사업
• 폐 절제술, 뇌 수술 등을 실시
• 평안남도 각지 병원들과 진료소들을 순회하면 서 현지 의료진을 도움
• 공장과 공산, 학교 및 아동보호기관들에 대한 집단검진사업 실시
제7차 1956.7.24 1957.7.26 (환송식) 프란께 오쓰까르 • 의사 등 12명으로 구성
• 내과, 외과, 신경과, 소아과 등 10개 분과 배속
• 비뇨외과 전문의 오쓰까르 프란께는 입북 2개월만에 10여 명의 비뇨외과 환자들에 대한 수술을 완료하고, 매주 2회 이상 북한 의사들을 위한 강의 진행
• 신경외과 렌께 호르비트(제3차 의료단 구성원, 재파견)는 북한의 뇌디스토마를 연구하면서 11명의 뇌수술 환자를 직접 치료
• 간장질환, 기생충 질환에 대한 치료대책 제기
부표 3.

불가리아적십자의료단 파견과 활동(자강도 중앙병원 재건, 강계)

차수 입북 일시 귀국 일시 단장 활동 내용
제1차 1952.2. 1954.4.11 미체브 • 47명으로 구성
• 불가리아 적십자사중앙위원회에서 차량 45대 분량 의 의약품과 의료기자재, 환자용 침구, 식료품 등 과 함께 파견
• 정달헌 원장이 지도하는 조선인민군 후방병원과 평안북도 일대에서 조선인민군 전상자 치료사업 추진
• 화기성 골수염 환자 등을 치료
제2차 1954.4.3 1955.6.7 (환송식) 1그룹: 미뜨로브 또는 부로쓰 꼬브 • 외과박사 부로쓰꼬브를 비롯하여 각 부문의 전문 의료인력 51명으로 구성
• 평안북도 중앙병원을 복구하여(3백여 대의 침대와 12개의 까비네트 완비) 이곳에서 의료사업
• 의사 14명, 간호원 및 기타 인원 등 25명으로 구성된 제2그룹(단장 : 찌흘로브)은 1954.7.9 입북하여 자강도 중앙병원에서 의료사업
• 외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신경과 등의 분야 를 진료
2그룹: 찌흘로브 • 급성맹장염 수술, 신경 및 물리치료, 뢴트겐을 이용한 진단 등을 통해 13만여 명의 환자 치료
•특히 산부인과 관련 치료(해산 및 질병 치료)에 큰 업적
•북한 의사들과의 의학기술 교류 및 ‘간’ 병원들에 대한 기술전습
제3차 1954.6. 1956.1. 미상 • 자강도 중앙병원에서 사업
• 백내장 수술을 비롯한 안과 환자들에 대한 치료, 무통분만법을 적용한 해산, 중이염 환자 치료
• 주변 공장과 강계육아원, 희천, 만포, 초산, 장강 등 각 군들을 순회하면서 건강검진 실시
제4차 미상 1957.4.29 (환송식) 지미또르 마리노브 미상
부표 4.

체코슬로바키아적십자의료단 파견과 활동(함경북도 중앙병원 재건, 청진)

차수 입북 일시 귀국 일시 단장 활동 내용
미상 1952 미상 • 의사 등 30명으로 구성됨(Jaroslav Olša, jr는 29명으 로 표기)
• 8개 차량의 의료기자재 및 의약품을 가지고 입북
미상 1953.3월 1954.5.12 (환송식) 쁘라쟈크 • 전상자들과 후방 인민들에 대한 치료사업및 전후 복 구사업 원조
• 내과, 외과, 신경과, 소아과 등 10개 분과 배속
제4차 1954.12월 1956.1.5 로봅스끼 베드리호 • 함경북도 중앙병원에서 치료예방사업
• 현대적 의료시설을 갖추고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의 분야에서 북한 의료진과 협력하며 외래 및 입원환자 치료
• 식도암, 자궁암 등을 비롯한 난치병 진료
• 시내 각 직장 및 학교들에서 위생방역사업 지도
• 북한 의료진의 자질 향상을 돕기 위한 기술지도사업 진행
제5차 미상 1956.12 슈미뜨 애밀 • 전쟁으로 파괴된 함경북도 중앙병원의 설비와 의료 시설들을 조사하고 복구를 원조
• 이를 통해 외래환자용 결핵 치료시설과 함께 결핵과, 내과, 피부과, 성병과, 전염병과 등 조립식 병동과 부대 건물 복구·신축 → 함경북도 중앙병원은 16개의 각종 분과와 5백 대의 입원침대를 완비한 임상병원으로 발전(1956년 12월 현재)
• 북한 의료진과 협력하여 수많은 외래환자 치료 및 수 천 건의 대수술 실시
• 각종 의학 꼰페렌찌야를 통해 북한 의료진들에게 식도암 수술, 폐 절제 및 적출 수술, 뇌 수술 등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대수술 방법 등을 전습
• 수시로 도내 각 공장, 기업소, 학교를 순회하면서 근로자들과 학생들에 대한 집단검진 실시
제6차 미상 1957.12.14 오또갈 룬다 미상
부표 5.

폴란드적십자의료단 파견과 활동(함경남도 중앙병원 재건, 함흥)

차수 입북 일시 귀국 일시 단장 활동 내용
제1차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제2차 1953.12월 1954.8.22 얀 오쌰쯔끼 • 47명으로 구성됨
제3차 1954.8월 미상 수하네고 게오르그(외과의사) • 각 전문 부문 의사 33명과 간호원 및 기타 인력 25명으로 구성됨
• 함흥의과대학병원에서 함흥지역 공장, 기업소의 노동자 및 주변 농민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여 의료사업 실시
제4차 1955.7월 1956.8.2 쓰쩨판 흐멜렙스키 • 함흥에 체류하며 사업
• 선진 의학기술 전습과 과학연구사업 원조
제5차 1956.8월 전후 1957.8.3 미상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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