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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2(1); 2023 > Article
근대기 의료 윤리로서의 ‘인술’의 재탄생†

Abstract

“Medicine is an art of benevolence [Kr. 인술 Insul, Ch. 仁術 Renshu].” This slogan is widely accepted in East Asia, and at least in South Korea, it is generally regarded as an innate medical ethic. However, the original meaning of ‘In’ (仁, Ch. Ren), which means ‘benevolence,’ ‘humanity,’ or simply ‘love for one another,’ is a Confucian virtue emphasized by Mencius. It is unclear when this Confucian term became the representative medical ethic in South Korea. The term “medical ethic” was not coined until the 19th century in the West (Robert Baker and Laurence B. McCullough, eds. 2009). We often use the terms ‘Insul,’ ‘affection,’ ‘Hippocratic Oath,’ and other related concepts interchangeably, but these words come from different times and have different ideological implications (Shin 2000). This paper examines how ‘Insul’ has been recreated under the tensions between Western and Eastern Medicine in modern Korea.
The arrival of Western medicine caused an existential crisis in traditional Korean medicine. The status of TKM doctors was demoted by the ‘Uisaeng Regulation’ in 1913 by the JGGK, which aimed to establish a unicameral medical system based on Western medicine. In response, the scientification of Eastern medicine became an inevitable task, and Eastern medicine had to maintain its identity while also modernizing itself to avoid being absorbed into Western medicine. Until the late Joseon period, ‘Insul’ was rarely used in medicine but rather for political practices. Medical practice was a peripheral way of conducting Ren (仁), the Confucian benevolence. However, TKM rediscovered the concept during the modern era. With the Convention of Korean Uisaeng in October 1915, the TKM community actively used ‘Insul’ as their identity. At this convention, Governor General Terauchi Mastake used the term to mean traditional medicine and implied that without scientification, ‘Insul’ would be disused. This address was immediately and widely quoted in TKM journals. TKM doctors and adherents interpreted his address to mean that if they could achieve scientification of TKM, their medical ideal (Insul) would be used in the future. Soon, a number of articles on ‘Insul’ as a medical ethic were published in newspapers and journals.
From the mid-1920s, regardless of whether the doctors practiced East or West medicine, people started to claim that only those who pursued ‘Insul’ were true medical personnel, and they used this as a criterion for evaluating medical doctors. The people’s demand for ‘Insul’ influenced medicine in general, and Western doctors also linked their medical practices to ‘Insul.’ This is an interesting example of the localization of Western medicine in Korea. Through the rivalry relationship or interaction between East and West medicine that took place in modern Korea, ‘Insul’ gradually became a representative term of Korean medical ethics since the mid-1920s. The process took place gradually over a decade, and it has now become firmly established throughout medicine in Korea.

1. 머리말

‘의는 인술(仁術)’. 적어도 현대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의료인이든 비의료인이든 이 명제가 한국의 의료 윤리를 나타낸다는 것에 큰 의구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비해 ‘인술’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고 하지만(박윤재, 2021: 267), 서울대학교가 2019년 개원한 ‘대한외래’는 ‘인술제중(仁術濟衆)’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참인술을 가르치는 열린 교육, 윤리관을 앞세운 인간적인 교육 이념’을 소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또한 경향 신문에는 “의술 인술”이라는 코너가 정기적으로 연재되며 한국의 명의들을 소개하고 강원도민일보는 ‘강원인술대상’을 만들어 시상하고 있다. 특히 소위 의료의 ‘선한 영향력’을 강조할 때 ‘인술’은 마치 세트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인술제중’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용어는 유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띄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의는 인술’이라는 명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근대기 서양의학의 도입은 한국의 의료지형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동서 의학의 공존이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발전 양상을 보였다. 1876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서양식 의사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으로 들어오고, 1885년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세워진 이후 20세기 초반 조선의 의학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근대기 서양 의학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지식인들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서양 의학의 승리와 한의학의 쇠퇴를 예견하였다. 일본은 일찍이 한방의학보다 서양의술을 택해 서양 의학을 공부한 의사에게만 ‘의사’의 자격을 주었고,1) 한국을 식민지화한 이후 조선에도 같은 제도를 이식하려고 했으며 1913년 11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 100호로 「의사규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가 현저히 부족하여 이것만으로는 의학적 치료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고 교육을 받은 의사를 양성해내는 교육기관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 ‘의생제도’를 통해 한의학 의사들을 ‘의생’으로 그 지위를 격하하면서 의술의 범위를 좁히며 서양 의사와 전통 의사들 사이에 차별을 두면서 두 가지 의료 행위를 인정했다(이종형, 1977: 284; 여인석 외, 2002: 40–43).
박윤재는 인술이 전근대 시기에 만들어진 중세적 의료관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박윤재, 2021: 267) 엄밀히 말한다면 ‘인술’이란 전통적 유교관의 이미지를 가져와 동서양의 의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하는 현대의 의료 윤리로 재탄생된 용어라 할 수 있다. 개념사적으로 접근하자면 어떤 개념은 불변하는 실재가 아니라 유연하고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인술’ 개념 역시 당시 한국의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나인호, 2011). 신동원도 일찍이 현대 한국의 의료 윤리를 이해하는 데 역사적 접근이 매우 중요함을 지적하며, ‘인술’, ‘의도’, ‘자비심’, ‘박애와 자선’, ‘히포크라테스 정신’, ‘환자 권리 장전’, ‘생명 윤리’ 등의 단어가 모두 역사적·사상적 배경을 가진 것들임을 환기시켰다(신동원, 2000: 163).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의학이 들어와 공식적 의료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서 의료 윤리는 전통적인 것이 그 의학을 포섭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것이 오늘날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의료 윤리의 실체라고 지적한 바 있다(신동원, 2000: 177). 여기에서 지적되었듯이 언듯 비슷해 보이는 이들 용어들은 사회적 맥락과 사상적 맥락에 따라 모두 다른 함의를 보인다.
지금까지 많은 수의 서양의학의 의료윤리서는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읽혀지고 있었지만 그 역사에 등장하는 기독교적 윤리·도덕담론이 얼마나 현대 한국인들에게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맹점을 인지하고 앨버트 존슨은 A Short History of Medical Ethics(이재담 옮김, 『의료윤리의 역사』, 로도스, 2014)에서 한 챕터를 “인도와 중국의 의료윤리”에 할당했다(앨버트 존슨, 2014). 앨버트는 “의료에 있어서의 도덕은 훨씬 더 광범위 한 것”이며 “의료행위에 대한 개인이나 단체의 반응을 포함”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검토해 봐야할 것이 ‘인술(仁術)’의 의미일 것이다. ‘의는 인술’이란 명제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인술=의술’이라는 개념으로 고정되고 정착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인술’이 근대 서양의학과 한의학에서 의료윤리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양상에 대해서 검토한다. ‘인술’이 동서의료계 양 방향에서 의료윤리로서 적극적이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용어가 되는 것은 1910년 중반에서부터 1930년대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의학은 근대의 헤게모니에 맞서 스스로를 변모시키면서도 서양 의학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해방 후 한의계의 한의학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태도는 이러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며, 조선의 것이라는 의미의 ‘동의’가 강조된 것,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주목받은 것과 조헌영이 주장했던 ‘통속한 의학’이나 ‘민중의술화’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하나의 실천적 방법이었을 것이다 (Shin, 2006; 김지미, 2018; 김성수, 2020). 이러한 맥락에서 한의학은 ‘과학적’인 지식과 체제로 무장한 서양 의학과 병존하려고 하며 존폐의 위기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켜 가야할 것’과 ‘이루어 나가야할 것’의 표상으로 ‘인술’을 제시한다.
서양 의학이라고 상황이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의학과 등 교육기관에서 서양식 의사들이 배출되었고, 경성에는 수많은 병원과 전문의가 존재하였고, 이러한 근대지식의 수용과 제도적 변화로 인해 한의학은 사라지고 서양 의학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한의원을 찾는 사람들의 수는 줄지 않았으며 서양의료보다 한방의료를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이꽃메, 2018: 145–146). 여전히 많은 수의 일반인들이 서양식 의원보다는 한의원을 찾는 경우가 많았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서양식 의사들도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장원아, 2021: 48).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양의학은 지역화, 대중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보이는데, 의료 윤리로서 한국 사회가 요구하고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술’을 표방하는 것 역시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근대기 서양 의학이 들어오면서 전통 의학의 근대화 및 새로운 의학에 대한 수용과 인식, 그리고 저항과 경쟁의 과정에서 전통적 가치인 ‘인술’은 의료계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재탄생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났으며 시대별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한국 사회에서 ‘인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술’의 쓰임과 그 함의를 시대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는 첫 단계로, 근대 초기부터 1930년초반까지를 중심으로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인술’이 근대 의료계에서 의료 윤리를 대표하는 슬로건으로서 재탄생되어 한국 사회에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유교적 의미의 ‘인술’과 동아시아 의서에서 보이는 ‘인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인술’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1.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이라는 뜻으로, ‘의술’을 이르는 말. 용법: 인술을 베풀다. 인술을 펼치다 2. 어진 덕을 베푸는 방법”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현대에서 ‘인술’이라고 하면 대부분 첫 번째 의미를 떠올리며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들의 마음가짐 또는 치료 행위와 연관시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서는 인술은 두번째의 의미로 더욱 자주 쓰였다. 즉 ‘인술을 펼쳤다’라고 말한 부분이나 정약용의 『목민심서』 권5 제9부 형전(刑典) 육조(六條) 2 제5장 금포(禁暴)에서 “사람들이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후에라야 홀아비ㆍ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니 횡포를 금하는 일은 인술(仁術)이다”라고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인술’은 『맹자』 「양혜왕」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안타까워 하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에 대해서 맹자는 이 “왕의 차마 못하는(王之不忍)” 마음이야 말로 “인을 행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是乃仁術也)”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의료계에서 말하는 인술은 “의는 인을 행하는 방법[인술]이다(醫乃仁術也)”라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맹자의 말에 ‘의(醫)’를 끼워넣은 표현인 것이다.
이 표현이 언제 누구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메이지기 일본의 의사였던 키무라 노부자네(木村信実) 역시 자서 『의업론』에서 ‘인술’에 대해서 맹자에서 출발하여 그 어원을 찾는다. 그는 내경에는 ‘의는 인술’이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지만 의서에서 최초로 보이는 것은 서춘보(徐春甫)의 『고금의통』에서 “의본인술(醫本仁術)”이라는 네 글자가 보이는 것이며 육선공(陸宣公), 즉 육지(陸贄, 754-805)의 말을 빌어서 사용되었다고 고증했다(木村, 1903: 88-89). 한국에서도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의술이 유교적 성격을 강하게 띄기 시작하는데(신동원, 2003: 145) 조선 후기에 황도현이 편찬한 『의종손익』에서도 맹자의 ‘인술’과의 연결을 암시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2)
육선공이 말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것에 마음을 두기 때문에, ‘의술은 인술’이라고 한다[故曰醫乃仁術]. 병이 생겼을 때 치료를 청하는 것은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는 상황에서 구원을 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의술은 인자한 방술(方術)이므로, 모름지기 열 일을 제쳐놓고 가서 구해주는 것이 옳다. (『의종손익(醫宗損益)』 권1)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는 상황”은 맹자의 사단론의 ‘측은지심’의 설명 중 유명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예시를 연상시킨다. 즉, 의술은 다른 이를 측은이 여기고 구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유교에서는 의술을 이러한 ‘인’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서 인식했고, 조선 시대에서도 역시 의학을 인민애물의 실현으로 이해했다(김준형, 2019: 77). 원나라 주진형(朱震亨)이 1347년에 지은 『격치여론』 자서에서 “옛 사람은 의학을 우리 유학(儒學)의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한가지로 여겼다”(한의학대사전, 1998에서 재인용)고 한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유교적 입장에서 의학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보호하고 효도를 극진히 하기 위한 ‘효’와 ‘인’을 행하기 위한 하나의 지엽적 방법이었고(김호, 2000: 150-151) 이를 확대해 치정자가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펼치는 방편 중의 하나였다. 중국 의서에 나타난 ‘인술’ 역시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어떤 처방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려주어 사람들이 요절하지 않은 채 각자의 천수를 누리도록 만든다면 이 또한 인술(仁術)의 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 『동씨소아반진비급방론(董氏小兒斑疹備急方論)』)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는 처음으로 의원(醫院)을 두시고 의학(醫學)을 다시 설치하시어 인심(仁心)과 인술(仁術)이 온 천하에 넘쳐났으며, 세종 숙황제께서는 이미 『의방선요(醫方選要)』를 간행하시고 나서 또 『위생이간(衛生易簡)』을 간행하시어 인정(仁政)과 인성(仁聲)이 온 나라 먼곳까지 가득합니다. (『본초강목(本草綱目)』권1, 上)
황빈(黃㻞)은 자(字)가 초상(楚祥)이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의었는데, 모친은 그를 유학(儒學)에 종사하게 했으며 그도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했으나, 얼마 후 “의술은 인술이라[醫, 仁術也], 만약 이것에 정통하면 역시 사람을 구제하기에 족하니, 어찌 반드시 벼슬을 해야만 뜻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의술명류열전(醫術名流列傳)」, 『고금도서집성의부전록(古今圖書集成醫部全錄)』)
옛날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정도(正道)를 막았는데 맹자가 말씀으로 밝혀 물리쳐서 환하게 터놓았다. ……[주석으로 의서의] 오류를 바로잡았으니, 『활인서』는 마땅히 동장오(童壯吾:童養學)를 충신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의술은 인술이다[夫醫乃仁術]. …… 그래도 훗날 명석한 사람이 다시 나의 오류를 바로잡고, 뒤이어 내가 주석을 보충하고 의혹을 분변한 것처럼 작업하기를 기다린다. (『동씨양학상한활인지장보주변의(童氏養學傷寒活人指掌補注辨疑)』, 『의적고(醫籍考)』 권31)
이렇듯 의술은 어진 덕을 베푸는 하나의 방편일 뿐, 인술이 곧 ‘좋은/어진 의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인술’은 어진 의술을 포함한 어진 행위 일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비단 직접적으로 치료를 하는 것뿐 아니라 의서를 편찬하고, 이것의 오류를 잡아 내는 것 또한 의학을 통한 ‘인술’의 실천이었다. ‘어진 행위’는 ‘개개인을 살리는 것’에서 확대되어 ‘천하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 그 궁극적 지향점이었으며, 이는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자를 보면 애처롭게 여겨 돌봐주는 개인단위에서 의서를 편찬하여 더욱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까지가 ‘의는 인술이다’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였다.
한국에서도 조선시대까지 ‘인술’ 단어 자체가 직접적으로 ‘어진 의술’을 나타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구급이해방』 서문에서 “의는 곧 인술이다(醫乃仁術也)”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 있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 정신이 각종 의서의 제목과 서문, 기관의 명칭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광제(廣濟), 제중(濟衆), 인제(仁濟)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의며, 『의방유취』(1445)에서 “의사의 도덕, 윤리에 대해 논함(論大醫精誠)”에서 ‘의도(醫道)’, ‘의덕(醫德)’ 등으로 의료 윤리를 함의했다(신동원, 2000: 173; 2003: 134-136). 앞에서 살펴봤듯이 ‘인’은 의술의 성격과 의의를 직접적으로 나타내기 보다는 윤상(1373-1455)이 「향약구급방 서」에서 “그 어짐이 백성에 미치는 바가 깊다(其仁之及於民也深矣)”라고 언급한 것처럼 유교의 이상적인 통치 기술의 연장선상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인술’을 검색해 보면 총 9건이 검색되지만 이중에서 의학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기사는 단 한 건도 없다. 승정원일기에서 인술을 검색하면 총 36건의 ‘인술’이 검색되는데, 이 또한 의술과 관련된 내용은 극히 드물며 의술과 관련된 이야기라 하더라도 반드시 맹자의 언설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데, 에도시대의 한방의였던 오다이 요도(尾台榕堂, 1799-1871)는 “왕응전(王應電, 『동문비고(同文備考)』의 편자)에 따르면 의는 인술이라 했다. 내가 생각건데 인술을 칭하기에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 마음은 인(仁)을 주로 해야할 것이다”(松田邦夫, 1994에서 재인용)고 한 것에 볼 수 있듯이, 의술을 행하는 마음의 발단이 ‘인’에서 출발하긴 하였으나 의술을 인술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직 넓은 의미에서 인술을 볼 때 그 지엽적인 실천의 한 방안(one of them)으로 의술을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의술을 이야기할 때는 비단 ‘인’ 혹은 ‘인술’만이 언급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인(活人)’ 이나 ‘박시제중(博施濟衆)’ 혹은 줄여서 ‘제중’, ‘의도(醫道)’ 등의 용어들이 의술을 대표하는 용어로 빈번히 사용되었던 점도 잊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이들 중에서도 왜 ‘인’일까? 그것은 ‘인’이 함의하는 보편적이면서 강력한 윤리도덕 이념과 더불어 해석의 유연성에 있을 것이다. 공자는 ‘인’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효(孝), 혜(惠) 등 무수히 많은 덕목들과 연관지어 그 방법론을 전했기 때문에 후세 유학자들에 따라서 ‘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인’은 때로는 기독교의 사랑과 박애와 유사점을 지니며, 때로는 불교의 자비와도 유사한 점이 있었다(줄리아 칭 외, 1993).
개항기 서양 의학이 들어오면서도 “박애와 자선” 정신을 표방할 때 이러한 유교의 ‘인’ 사상의 일부 담론과 유사한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신동원, 2000: 175) 초기 서양 의학의 슬로건이었던 ‘백성을 구제하거나(제중)’ ‘은혜를 베푸는 것(惠民)’ ‘자비나 은혜(慈惠)’ 혹은 ‘빈민구제’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인술’을 위치시키는 것에 상대적으로 큰 무리가 뒤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유교의 ‘인’은 기혈 순환이 잘되어 편안한 상태, 이상적인 몸 상태를 은유하기도 했다. 이것은 주로 의서에서 “신체가 불인(不仁)”하다는 부정 표현으로 쓰여 신체가 마비되거나 뻣뻣한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세종 22년에 김종서가 상언하면서 “이제 불행하게도 풍병[風疾]을 얻어 반신(半身)이 불인(不仁)하와, 뜸뜨고 약 먹은 효력도 없이 병의 증상이 날로 더하여 가, 여생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사오니”(세종실록 22년 1월 7일)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인’은 그 자체에 의료 윤리의 슬로건으로 사용될만한 사상적, 역사적 바탕을 가지고 있던 글자였다. 근대 국가가 설립된 후 ‘인술’은 본래의 제왕학적인 의미에서 멀어지게 되고 철학적인 윤리·도덕의 개념으로 남게 되었다. 그 빈자리에 동서의학계는 자신들의 의술을 대표하는 슬로건으로서 ‘인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3. 한의학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슬로건으로서의 ‘인술’

서양 의학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기존 한의학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의학의 과학화는 피할수 없는 과제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한의학은 자신들만의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박윤재는 “한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 의학의 장점으로 간주되었던 교육제도, 시험제도 면허제도 동 보편적 측면들을 수용하면서 종래 한의학이 안주해 왔던 의학체계에서와는 다른 형태로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적 의학체계의 한 부분으로 재구성되어야 했던 것이다”(박윤재, 2005: 109)라고 당시의 한의학계가 처한 상황과 이에 대한 대응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한의학에서만 시도된 일방적 소통이었고, 중립적인 의견으로서 서양 의학을 보편성으로, 한의학을 특수성으로 보아 서양 의학에서 한의학적 지식을 흡수하는 입장이 있기도 했다(여인석, 2007: 167). 이렇듯 일부의 한약 사용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제외하고 서양 의학이 한의학의 지식 체계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김성수는 1910년대부터 한의학 단체가 만들어지고, 학술지가 간행된 것들을 “한의계가 자신의 권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김성수, 2020: 227). 그리고 그 전략으로 조선의 명의들을 재조명하면서 그 역사성을 강조하려고 하고, ‘동의’라는 용어를 쓰면서 조선의 것을 강조하고, 서양 의학과의 접목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한의학이 서양의학의 우위에 있다는 주장도 등장한다. 조헌영이 내과 진료적 우수성을 통해 한의학의 의술적 우수성과 그 이론적 배경이 되는 음양오행론을 강조하는 것, 또한 민중성을 한의학의 장점으로 부각시킨 점 등이 그것이다(박윤재, 2008). 이처럼 한의학계의 정체성과 권위찾기를 위한 시도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졌는데, ‘의(醫)’를 의학, 의술, 의도(즉 의료윤리) 세 가지로 세분화 해 볼 수 있다면(오모다카, 1999: 127), ‘인술’의 강조는 한의들이 의료 윤리의 축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고 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술했듯이 ‘의는 인술’이라는 표현은 유교적 가치관 하에서 의료 행위를 펼치는 것을 의미하며 동아시아에서 고전 인용의 형식으로 종종 차용되는 표현이었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고전 인용의 방식으로 ‘인술’을 종종 사용했다. 한 예로 근대기 유교적 바탕 위에 서양식 의학 교육을 받은 구도 다케키(工藤武城, 1878-?)는 자신의 글 「경성의 의계(京城の醫界)」에서 “예로부터 의자(醫者)는 ‘의는 인술’이라는 신조를 굳게 지켰다”고 언급한 바 있다 (工藤, 1909: 65). 하지만 이때까지 ‘인술’은 ‘박시제중’ 이나 ‘광제’, ‘의도’ 등에 비해 사용되는 빈도가 적었다. 대한제국기의 의료 단체 관련 기사부터 살펴 보면 동제학교 취의서 및 찬성문 등에 ‘자선사업(慈善之事業)’, 구제자선지업(救濟慈善之業)’3)의 표현이 등장하지만 ‘인술’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한제국시대의 의학 임병후(林炳厚), 김해수(金海秀) 등이 발기하여 세운 대한의사총합소 관련 기사에도 “이 시대에 의도(醫道)의 발전과 약성의 연구를 부득이하게 일층 확장한 후에야 동포 생명을 널리 구제[廣濟]”해야 한다고 표현되어 있으며,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취지서에 '의도를 새롭게 밝혀낸다[發明醫道]’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의도’가 두 번 언급될 동안 ‘인술’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4) 1910년대 초기에도 의료인에게 당부하는 논설들이 몇 차례 발표되었지만, ‘인술’을 촉구하는 표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인술’이 한의계에서 슬로건적인 성격을 띄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생대회’부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1915년 10월 23일과 24일 양일간 창덕궁 비원 광장에서 전선의생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전국 의생 700여명이 모인 대규모 행사로 데라우치 총독을 비롯해 정무총감, 30여명의 친일 귀족 조선인들과 일본인으로는 차관, 이왕직박물관사무관, 경기도 경무부장, 총독부의관 등 수십명이 참석하였다.5) 대회 기념 훈시에서 데라우치 총독은 ‘인술’이라는 표현을 두번이나 강조해서 사용하였으며, 대회 결의안에서 의생들은 ‘일대인술(一大仁術)’에 전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동양(東洋)의 의술(醫術)은 그 연원(淵源)한바가 원(遠)히 신농씨(神農氏)로브터 창(創)하야 이후(爾後) 수천년(數千年)의 경험(經驗)과 명의(名醫)의 연찬(硏鑽)과에 의(依)하야 행림(杏林)이 점영(漸榮)하야 금일(今日)에 태(迨)한 고(故)로 한의(漢醫)의 술(術)이 자유기장(自有其長)하다하나다 연(然)이나만근(輓近)에 의술(醫術)이 대진(大進)하야 생리(生理)의 학(學)이 익익(益益) 정미(精微)에 입(入)하고 심온(深薀)한 학리(學理)는 고묘(高妙)한 기술(技術)과 상사(相竢)하야 일진월보(日進月步)의 추세(趨勢)에 재(在)하니 차시(此時)를 제(際)하야 종(從)히 구법(舊法)을 묵수(墨守)하고 신지식(新智識)을 구(求)치 아니하면 경(竟)히 세운(世運)에 후(後)하야 인술(仁術)이 기용(其用)을 주(做)치 못함에 지(至)할지라. … 신지식(新智識)을 구(求)하야 한의(漢醫)의 단소(短所)를 보(補)하고 예의(銳意)로 인술(仁術)의 정신(精神)를 관철(貫徹)케 하지아니함이 가(可)치 아니한지라 (「寺内總督訓示」, 『매일신보』, 1915년 10월 24일, 2면)
정신(精神)를 성성(惺惺)하고 심지(心志)를 긍긍(兢兢)하야 생명(生命)을 보호(保護)하는 일대인술(一大仁術)에 대(對)하야 개량전진(改良前進)키로 상호경성(互相警省)할 차기회(此機會)에 태(迨)한 금일(今日)이라. (「決議案」, 『매일신보』, 1915년 10월 27일, 2면)
여기서 데라우치는 ‘인술’을 ‘한의학’을 표상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에 ‘인술’이 가지는 함의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조선총독부 경무 당국이 의생들에게 서양 의료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출간(김남일, 2011: 172)한 『의방강요』의 상권 서문에 육군 군의총감인 하가 에이지로(芳賀榮次郎, 1864-1953)가 쓴 서문에도 “영약(靈藥)은 독이 될 수 있고 인술은 해가 될 수 있다. 먼저 양약의 그 성질과 용법을 깊이 이해한 후에 써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며 ‘인술’을 ‘한의학’의 은유로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芳賀, 1917: 2).
근대 한의학계에 ‘인술’이 간헐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첫 의생대회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총독에 의해 직접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의생들에게 미치는 말의 무게와 영향은 상당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근대화하지 않으면 의생들이 추구하는 의술[인술]은 쓰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데라우치와 하가의 발언은 결국 당시 의생을 서양식 학문으로 재교육해서 점차적으로 한의를 줄이려고 하던 일본 정부의 서양 의학 일원화 정책 방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박윤재, 2002: 151-156). 즉, 일본에서 의료 근대화에 성공한 것과 같이 전통 의학[구법]을 배운자들이 ‘신지식’을 반드시 익혀서 ‘문명화된’ 서양 의학으로 ‘개량’되기를 촉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데라우치의 발언 의도보다 한의학계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했는가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의학계에서는 훈시의 내용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며 한의학의 존속을 위해 극복해야할 사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6) 이후 이 훈시는 한의학 잡지 등에서 반복적으로 실리면서 강조 되었는데, 『의약월보』 휘보에 전문이 실렸으며 전선의회에서 발행한 『동의보감』에서는 전문과 함께 회중기사에 1회 “구법(舊法)을 묵수(墨守)하고 신지식(新智識)을 구(求)치 아니하면 경(竟)히 세운(世運)에 후(後)하야 인술(仁術)이 기용(其用)을 주(做)치 못”함을 설명하며, 신학문을 배운 후에야 ‘인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였다(64).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한번 이 글을 인용하면서(67) 글을 끝맺고 있다 (『동의보감』: 64-67). 참고로 한의학 잡지 『동의보감』 제1호 한권에만 총 10번의 ‘인술’이 등장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17년 『동서의학보』 7호에 실린 논설 「신지식(新智識)을구(求)라」에서 다시금 인용하여 구법[한의학]과 신지식[서양의학]을 모두 구하는 ‘인술’의 길로 나아가야함을 촉구하고 있다. 한의학계는 ‘인술’을 중심에 둠으로서 신지식을 얻고 발전해 나가더라도 그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계속성을 강조했다. 즉, 한의학계는 스스로를 변화하고 진보하는 과정 안에 두며, 이때 ‘인술’은 현재 한의학을 표상함과 동시에 앞으로 ‘완성될 한의학’, 즉 한의학이 중심이 된 ‘과학화할 의학(술)’의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게 된다.
오인(吾人)은 기능(技能)의 정묘(精妙)를 사(竢)하야 자격(資格)을 고(高)케할지라 「차시(此時)를 제(際)하야 종히 구법(舊法)을 묵수(墨守)하고 신지식(新知識)을 구(求)치아니하면 경(竟)히 세운(世運)에 후(後)하야 인술(仁術)이 기용(基用)을 주(做)치 못함에 지(至)함이라」하신 구어(句語)가 실(實)로 간독(懇篤)하도다. (구신생(求新生), 1917: 2)
전선의생대회에서의 논의는 그 이후 의생들의 나아가야 할 방향의 지침이 되었다. 『동서의학연구회월보』의 창간호 축사에서는 ‘인술’이 두차례 등장하고, 1921년에 열린 개성의생회강연회의 안내에서는 ‘인술의 정신을 관철’해야한다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며, 이를 위해 ‘지키고 가져가야할 것[인술]’과 ‘바꿔야 할 것[과학화]’를 위해 노력해야함을 주장한다.7) 이런 과정을 통해 한의학계에서 ‘인술’은 자신들의 의술[한의학]의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임과 동시에 서양 의학의 장점을 흡수하여 새롭게 탈바꿈해야할 한의학의 최종 지향점이자 이상향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자리잡게 됐다.

4. 서양 의학의 ‘인술’ 담론: 지역화하는 의료 윤리

한의학계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과학화’와 ‘근대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반면, 서양 의학계는 자신들의 승리를 낙관했다. 근대 서양 의학의 세균학, 기생충학 분야 등의 발전은 질병퇴치에 대한 큰 믿음을 불러 일으켰고, 실험적 연구에의 강조는 나름대로 의사들에게 과학자적 지위와 대중적 존경의 기반을 마련해주면서 의료 사업에의 새로운 낙천주의적 흐름을 유도하게 되었다(Doyal, 1983: 239-290). 일찍이 도얄이 지적한 것처럼 서양의 과학적 의료로 인간의 질병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기 시작했고, 일본은 근대화의 표상으로 서양 의학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여 조선에서 의료, 보건, 위생을 식민지의 제도 속에 포섭시키려 하였다(신동원, 2002). 이런 서양 의학의 채택은 가난하고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구제할 구세제민의 길로 제시되었고, 서양 의학을 공부한 의사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독립운동과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했다(장원아, 2021: 21). 이처럼 근대 서양의료의 혜택을 받은 그들에겐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대중을 계몽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과학으로 무장한’ 서양 의학을 공부한 자들에게는 한의학이라는 것은 미신적이며 심리적인 것일 뿐 제대로 된 의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청화의원의 의사로 근무하던 김은선(金殷善)은 한 대담에서 “한의(漢醫)들은 도학자(道學者)나 선술객(仙術客)갓흔 풍도(風度)를 가지고 환자의 마음을 위압(威壓)하게 되며 부질업시 신념(信念)을 가지게 하고 또 진찰하는게 철학적이여서 환자로 하야금 일종 미신적 신망을 가지게 하야 환자(患者)에게 저윽히 안위(安慰)를 주는 까닭으로 의외로 약효를 보게 되는게지요”(별건곤, 1930: 90)라고 한의학의 실치료 효과 자체를 완전 부인하였다. 선교사로 조선에서 활동한 길모어(George William Gilmore, 1858-1933)는 “우리 의사들(서양 의사)의 능력과 선생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서 양약에 대한 반대와 미신은 사라질 것이다”고 예견하기도 했다(G.W. 길모어, 1999: 75-76).
조선의학회 총회에서 데라우치의 훈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전망과 기대가 잘 드러난다. 조선의학회 제5회 총회는 1915년 10월 10일에 개최되었는데, 조선의생대회가 개최되기 2주가 못되는 시간차로 먼저 개최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생대회에서의 훈시와 그 어조와 메시지가 사뭇 대비된다.
대저 조선에 있어서 의술은 심히 유치해서 위생의 도가 아직 열리지 않았으나 메이지 40년 3월 고 이토총감 위생구료의 급무를 인지하고 대한병원을 창설함에 이르러 처음으로 의술 혁신에 착수해 … 각자는 더욱더 경험을 쌓고 학리(學理)를 연구해서 같은 마음으로 협력해 조선 의계의 발달을 도모함으로서 폐하의 제생(濟生)의 대어심에 따라 받드는 것[大御心ニ副ヒ奉ラサル]이 가능할 것이다.(寺内, 1916: 2-4)
데라우치는 제6회 조선의학회 총회에도 축사를 발표했는데, 여기서도 역시 ‘문명의술의 혜택[文明醫術ノ惠澤]’이나 ‘학리의 연구’, ‘선진’, ‘진보’ 등의 표현으로 그 근대성을 강조하고 있다(데라우치, 1917: 1-3). 이런 태도는 다음 총독인 하세가와에게서도 보이는데 그는 제8회 총회에서 “사회(社會)의 건전(健全)한 발달(發達)은 의도(醫道)의 성쇄(盛衰)에 사(俟)하는 사(事)이 다(多)하니 각위(各位)는 극(克)히 그 중임(重任)에 원(願)하고 문명(文明)의 학리(學理)를 천명(闡明)히하야”라고 하며 ‘발달’과 ‘학리’ 등의 표현을 그대로 이어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8)
하지만 ‘과학적인 연구’에 기반한 낙천적인 미래 전망과 진보에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서양 의학을 공부한 조선인 의사들의 삶은 예상만큼 순탄하지는 않았다. 일반인들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제한적이나마 선택할 수 있었고, 서양식 병원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도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서양 의학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제도를 통한 한의학과의 차별 대우등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서의들은 일본인 서의들과의 경쟁 뿐만 아니라 전통 한의학과의 경쟁까지 겹쳐져 극심한 경쟁에 시달려야 했다(이꽃메, 2006: 235; 여인석, 2018: 54). 일본의 의학 정책이 조선의 식민화에 목적을 둔 것이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양의 의학은 점차 조선화해 갔으며(박윤재, 2005: 6), 1920년대 초반에는 양약과 한약을 병용하게 하거나 병실을 온돌방으로 하는 등 현지화하려는 노력을 보였고(박윤재, 신동환, 1998), 조선의사협회는 1930년대에 ‘통속의학강연회’를 열면서 대중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서양 의학이 ‘인술’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대중화의 맥락에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 ‘인술’과 서양 의학을 연결해서 사용한 전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어 자체가 가지는 고전적 의미로 인해서인지 ‘과학’, ‘진보’를 통한 ‘박애’나 ‘자애’, ‘박시제중’ 등의 비해 서양의학의 윤리적 측면을 대표하는 슬로건으로는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1923년 조선의사협회9)가 발기할 당시에는 ‘인술’이 ‘진보발전’과 병기돼서 등장한다. 기사를 살펴보면 자신들의 의료적 행위가 ‘인술’임을 주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학적이지 못해 사람을 죽도록 만드는 ‘복서무격(卜筮巫覡)’한 것은 ‘인술’이라할 수 없고 질병을 진단하고 원인을 제거하는 자신들의 의료야말로 ‘인술’을 펼치는 ‘박시제중’의 의술이라는 요지이다.
인(人)의 생명(生命)을 증구(拯救)하고 질병(疾病)을 소제(消除)하야 일개인(一個人)이라도 요알(夭閼)이 무(無)하도록 주의(主意)하는 인술(仁術)인대 그의 진보발전(進步發展)을 만연(漫然)히 방임(放任)하야 고석(古昔)에 의술(醫術)을 복서무격(卜筮巫覡)과 동일(同一)히 인정(認定)하든 상태(狀態)를 불변(不變)치 못하면 차(此)가 엇지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유일(唯一)한 목적(目的)으로 인(認)하는 본의(本意)라하리요 (「조선의사협회(朝鮮醫師協會)의발기(發起)」,『조선일보』, 1923년 5월 5일)
‘인술’은 이제 ‘고금’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그 자체로 등장하게 되고 그 함의는 다르더라도 서양의학이든 한의학이든 상관없이 모든 의학적 행위의 최고 윤리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다. 군산예수교병원을 소개할 때 “하나님의 도를 펴치는 한편으로 인술의 길로 가난한 병자를 하루가치 치료”했다고 소개하는 것이나,10) 1930년 전북에서 공의 및 각처위생주임 타합회가 열렸을 때 경찰부장의 훈시를 “공의(公醫)는 인술(仁術)로서 의치(醫治)의 중임을 맡으라”는 제목으로 싣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11) 이 훈시에서는 ‘학리’의 연구나 ‘제생구치(濟生救治)’ 등의 표현이 등장하지만 ‘인술’이 기사의 제목으로 제시되었는데, ‘인술’이 다른 의료 윤리를 포섭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5. 한국 사회의 ‘인술’ 요구와 대중화

이렇게 근대기 양 의학계에서 자신들의 의술이 ‘인술’임을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인술’은 본래의 보편적 윤리·도덕의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점진적으로 한국의 의료 윤리와 의사다움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인술’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는 성공적으로 자리잡고 점점 그 쓰임이 많아졌던 것에 비해 일본에서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기간 동안 ‘인술’이 거의 쓰이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초기 일본신문에서도 ‘인술’이 의료와 관련해서 언급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양상은 한국과 Modern Korea 다르다. 『아사히 신문』의 경우 1879년 창간기부터 2022년까지 ‘인술’에 관한 기사는 총 263건인데, 근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점점 줄어들기 시작해 1879년부터 1939년까지가 47건이고 그 중 1930년대에는 단 7건에 그친다. 게다가 1940년부터 1990년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34건만이 검색된다.12) 반면 『요미우리 신문』의 신문의 경우 1881년의 첫 기사를 시작으로 1989년까지 72건만이 검색되고 1990년부터는 관련 기사가 없다. 이것은 1965년에 창간한 『중앙일보』에서만 현재까지 총 828건의 기사가 검색되고 1988년 창간한 『한겨레』에서 현재까지 101건이 검색된 것과 대조된다.13)
이처럼 ‘인술’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의료윤리이며 비슷한 전개를 보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나라마다 조금씩 상황이 다르다. 앞서 살펴본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인술’의 제1의미로 ‘의술’을 제시하고 있지만 중국의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인술’에 대해 1. 인정의 책략을 펼치는 행위[施行仁政的策略] 2. 의술을 지칭[指医术]이라고 명시되어 있다.14) 그리고 일본의 『대한화사전』에서는 1. 인의 도를 행하는 방법[仁の道を行ふ手だて], 2. 의술(医術)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大漢和辭典(축약판), 1968 제2쇄). 이와 같이 중국과 일본에서 역시 ‘인술’의 제 1의 사전적 의미는 유교적 정치방법임을 생각해볼 때 ‘의는 인술’이 가장 넓고 당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술’ 개념이 근대에 새롭게 부각되고 대중화되었다는 것은 당시 신문기사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에는 최초의 근대 신문인 독립신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총 98종의 신문이 디지털화되어 제공되고 있는데, 여기서 ‘인술’을 검색하면 1924년 이전까지 단 1건만이 검색되었다. 여기에 1915년 의생대회 관련 기사 안에 ‘인술’이 포함된 기사 기사 제목에는 나오지 않지만 ‘인술’을 포함하는 기사를 추가하면 1910년대에는 4건의 기사를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에서 제공하는 1900년부터 해방 전까지 ‘인술’에 관한 기사와 추가적으로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인술’에 관련한 기사 건수를 1936년까지15) 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16)
이 표는 ‘인술’이 한국의 의학윤리의 대표 용어로 자리한 시기가 1920년 중후반부터이고 그 10년 후인 1930년 후반부터 빈번하게 사용된 것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인술’이 양 의료계에서 모두 쓰이기 시작한 것과 시기적으로 유사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술’은 양 의료계에서 자신들의 의료를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증명하는 하나의 전략으로 쓰였고 이것이 대중의 인식되고 사회에 효과적으로 스며들어가면서 ‘인술’은 의료의 이상적인 모습이자 대중의 기대를 나타내는 표현이 되었다.
이렇게 ‘인술’이 지면이나 강연을 통해 대중에게 노출되고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후 대중은 ‘인술’로서의 의술의 실천적인 성격을 의학계 전반에 요구하기 했다. 즉, ‘인술’은 형이상학적 의료 윤리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의료행위-무료 진료 등의 선행-으로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인술의 양날의 검처럼 대중들에 의해 때로는 의사들의 선행을 칭송하는 기준으로, 때로는 의사들의 악행을 비판하는 기준으로 쓰였다.17) ‘인술’은 의사들의 실제적 의료 수준 및 의학 지식과는 별개로 의사들의 의사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고 한의, 서의 양의료계와 의사들에 대한 불만은 ‘인술’이라는 의사가 가져야하는 자세 반하는 행위를 지탄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1924년 2월 11일 총독부병원에서 외래진료실의 낙성식에서 ‘인술’을 언급한 기사 (「仁術を誤る勿れ」)와 같은 해 3월 28일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의약업자의 폭리」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학계의 ‘인술’을 요구하며 ‘인술’의 의무를 병원과 의사들에게 촉구했고 ‘인술’을 화두에 올렸다. 이에 대해 한 의사는 이러한 도덕적 잣대와 요구가 과한 것을 지적하며 의사도 명의 한노동자일뿐이라 반박했지만18) 의료에 종사하는 자는 ‘인술’을 행해야 한다는 시대적 분위기를 거스리기는 힘들었다. 같은 해 4월 28일 『동아일보』의 한 기사에는 “의가 인술이라함은 고금에 통한 철칙이다”라며 ‘인술’이 강조되었고 1926년 2월 8일 『조선일보』에 실린 한 약방의 광고는 “의는 인술이라 세상을 위하야 사람을 위하야!”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기까지에 이른다.
의(醫)를직(職)으로하는자(者) 또한일영리(一榮利)일뿐이다. … 인술(仁術)의 명(名)이잇고 또박시제중(博施濟衆)의칭(稱)이잇는 것이다. 엇지햇든의(醫)를업(業)하는자(者) 인명(人命)의지존(至尊)함과 남의병고(病苦)의견댈수업슴에대(對)하야 골수(骨髓)로부터나아오는 동정(同情)과밋구제(救濟)의감격(感激)이잇서야할것이다 (「왈가왈부(曰可曰否) (一)」, 『조선일보』, 1926년 8월 13일)
박시제중(博施濟衆)이란방(榜)써부치기는 감초(廿草) 건강(乾薑) 두돈오푼하는한약국(漢藥局)의일이지마는 의료기관(醫療機關)에종사(從事)하는사람들의 배스심조흔생각은 이러한제중사업(濟衆事業)한다는자처(自處)이다 그러나 제중인술(濟衆仁術)은 다그만두더라도때로박절(迫切)한짓만은 그만두어주는것이조흘출생각한다 (「병원치료거절(病院治療拒絶)」, 『조선일보』, 1927년 1월 27일)
의(醫)는인술(仁術)이라하야 사회적(社會的)으로우대(優待)하며 기대(期待)하는바이니 의사(醫師)는모름직이 그책임감(責任感)이 엄슬수없다 (「의료기관(醫療機關)의책임(責任)」, 『동아일보』, 1931년 5월 21일)
‘인술’이라는 구호 아래에서는 의생과 의사의 구분 없이 ‘훌륭한 의사은 곧 인술을 펼치는 의사’라는 인식이 1920년대를 거치며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굳혀졌다. 근대기 한의계에서 주목했던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을 살펴보면 한교연이 쓴 1914년의 서문에는 ‘인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고 이제마 스스로도 ‘인술’을 언급한적이 없다. 또한 1918년에 이능화가 출판한 『조선불교통사』 속에서 이제마를 소개한 「사상학설인품성정」에서 역시 인의예지를 논하지만 ‘인술’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1939년의 『조선명인전에서』 이능화는 이제마를 “선생의 서(書)는 인술”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1936년에 이민봉이 사상의학의 경험 단방을 정리해서 편찬한 『금궤비방』의 서문에서 안장호는 책의 목적을 “이 책이 인술에 보탬이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대중적으로 높아진 ‘인술’의 인식과 상징을 역으로 차용한 것이다.
이광수의 소설 『사랑』(1938)에 나오는 순옥의 병원 서술은 그당시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병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어머니나 누나의 애정으로 자식이나 동생을 간호하듯이”(이병훈, 2016에서 재인용) 환자를 대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유교적 질서인 친한 이[친족]을 친하게 여긴[親親] 후에 이를 미루어 인을 이웃과 백성에게 미치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은 모두 서양식 병원이었으나, 한의를 찾아가든 서의를 찾아가든 대중은 의료 행위의 윤리적 본질에 있어서는 공통된 요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료활동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동서의학연구회는 1925년 을축년대홍수의 이재민들을 찾아 무료로 진료하는 활동을 하고, 서양 의사들의 단체인 한성의사회 역시 이재민을 찾아 무료 진료를 하고 약을 보급 하는 등 공공 의료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장원아, 2021: 51).
…대중의여론을도외시하고 오직 자긔네들의 리기적욕심아래반대운동을한다는것은 의사라는 자긔의입장으로서의 운동에지나지아니하고 부민의리익을위하야는 하등의문제가되지아니하는것으로 차라리이런긔회에 개업의 전체가진료비의 경각을도하고 경비진료소의 설치를 성원하야양자가서로 인술(仁術)노서의 본질적기능을 발휘하라는것이다. (「이 사회(機會)에 잇서 인술(仁術)로서의 본질을 발휘하도록 하라는 부민(府民)의 소리놉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 28일)
‘인술’로 대표되는 대중으로부터의 의료인들의 실천 요구에 의사들로부터 “세상이 인술을 핑계로 의술을 구속하려 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1920년대 후반부터 무료나 저가 진료가 더욱 줄어들었으나(박형우, 박윤재, 2020) 그럴수록 의료의 사회적 기여와 윤리적 태도를 촉구하는 대중의 요구는 ‘인술’이란 상징을 내세우며 더욱 거세졌다. 양 의료계에서 슬로건으로 사용된 ‘인술’은 대중들의 요구를 표현하는 용어로 재생산되고 대중화되며 점차 한국의 의료 윤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사회 전반에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해방 후 의료계의 담론에서 잘 나타난다. 『동양의학』 4·5월호에 실린 의사 및 의업 법안 초안 총칙을 살펴보면 제2조 “의사 및 의업자의 정신”에 3가지를 들며 그 첫째로 “애국애민의 정신을 배양하여 광제창생의 기백을 양성하게할 것”, 둘째로 “민족고유의 인술을 계승하여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 것”을 마지막으로 “자유와 공정을 존중하여 의술발전에 용진무퇴의 인격을 가지게할 것”(김영진, 1950: 5)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인술’이 민족을 대표하는 의료윤리로 뿌리깊게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인술’이 의술을 대표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는 근대의 한국어(조선어)사전들이다. 선교사 게일(J.S. Gale)이 1897년에 초판한 한영사전 『Korean English dictionary』 및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편찬한 한영자전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에 ‘인술’ 항목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다만 ‘인’을 “仁 (어질) Inward or spiritual love; humanity; kindness; mercy. A kernel”라고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Gale, 1987: 58-64; 859). 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출판한 『조선어사전』에서는 ‘인술’이 등장하는데 “인술이라는 명사는 인혜(仁惠)를 행하는 기술”이라는 단일 의미만을 명시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1920). 하지만 1938년에 출판된 최초의 한국어 사전인 『조선어사전』에서는 ‘인술’ 항목에 “인덕을 베푸는 도리, 「의술(醫術)」의 딴이름”이라고 등재되었고(문세영, 1938: 1148) 해방 이후에 출판된 『조선말 큰사전』에는 “인(仁)을 행하는 권도(權道)의 법’이라는 본래의 의미 다음에 “‘의술(醫術)’을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이란 뜻으로 일컫는 말”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조선말 큰사전, 1957: 2473-2474).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추가적 의미였던 ‘인술=의술’이 첫 번째 의미로 등재돼 ‘인술’ 개념의 대표적 의미로 자리잡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결과는 전통적 의료 윤리 중 하나였던 ‘인술’이 동아시아에서 같은 지위를 형성하고 발전해온 것이 아니며, 한국의 경우 근대를 지나면서 현대의 의료윤리로서 재탄생되고 재해석되어 현대까지 이어졌음을 시사한다.

6. 맺음말

“의는 인술이다”라는 표현에서 출발해서 오늘날 한국의 의료 윤리로 자리잡은 ‘인술’은 의술에 대한 한국인들의 오랜 관념과 인식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인’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의는 인술(醫乃仁術也)’은 맹자가 말한 ‘인을 행하는 방법[是乃仁術也]’ 이라는 표현에 ‘의(醫)’를 삽입해 만든 표현이었다. 그리고 근대기 이전까지 ‘인술’은 맹자의 말에 근거하여 치정자들을 중심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즉, ‘인술’은 유교적 세계관의 정치적, 제왕적 윤리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백성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은 이러한 ‘어진 정치’를 펼치는 수백가지의 방편 중 하나로서나 언급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중국 의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의술을 ‘인술’과 연관짓는다면 생명을 살리는 일은 의술을 통해 궁극적인 ‘인’을 실천하는 행위의 한 단서라 볼 수 있다. 우리는 현대 서양식 의료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그 의료 윤리도 같이 받아들여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서양의 의료윤리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적인 덕(virtue)과 박애 사상 등에 기초하고 있으며(래난 길론, 2005; 베른하르트 헤링, 2006) 그 뿌리로 들어가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상당히 상이한 부분이 많다. 이런 새로운 개념들은 조선으로 들어올 때 현지화되고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로 번역되어 수용되어 왔다. 중국 고전에서 가져와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 시키는 것은 근대어 번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경제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줄여 만들어진 말임이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하지만 경제와 ‘인술’이 다른 점은 후자가 전통적 의료 윤리에 근간을 두고 서양의 의료 윤리를 포섭하는 개념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이 논문은 ‘인술’이 전통적인 의료 윤리에서 현대의 의료 윤리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검토하였다. 고전 인용의 형태로 의(醫)와 결합하여 가끔씩 등장하던 ‘인술’ 개념은 근대기에 다양한 함의를 가지며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었다. 그 중에 1915년의 ‘조선의생대회’는 ‘인술’이 한의계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적극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데라우치 총독은 훈시에서 ‘인술’을 의생들이 추구하는 의료, 즉 한의학을 표상하는 의미로 사용하며 ‘신지식’을 얻지 못하면 ‘인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질적으로 서양 의학을 배우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압박에 가까웠지만 의생들은 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여 ‘인술’을 지키기 위해 과학화를 이뤄야하며 그렇게 이뤄낸 한의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렇듯 근대기 한의계의 ‘인술’ 제창은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서양 의학과의 경쟁에서 한의학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변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의학계는 서양 의학의 과학적인 면을 수용하면서도 전통적 의료 윤리관을 의료 행위의 근본에 두어 한의학을 중심에 세운 과학적 의학(의술)을 지향함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권위를 유지시키며 발전해 나가려 했다.
‘인’이 내포하고 있는 윤리, 도덕적 가치와 실천적 성격은 의술에 대한 조선 대중의 인식과 기대와 부합했다. 여기서 ‘의’가 단지 학문이나 기술의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좁은 의미에서 ‘의학’은 medical sciences이며 그 실천적 응용은 ‘의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환자들이 접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의술’이었으며, 대중들은 의사됨을 판단할 때 ‘과학성’이나 ‘근대성’을 그 판단 기준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자의 선한 의도가 얼마나 그 행위에 나타나 있는가에 집중했다. 서양 의학이 들어올 때 자신들의 ‘올바름’과 ‘의사다움’을 절대적인 과학적 우위에 세웠지만 그것은 대중의 의료에 대한 신념이나 요구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회의 ‘인술’에 대한 요구는 서의들에게도 ‘의사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고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서의들 역시 ‘인술’을 자신들의 의료행위를 대중들에게 선전하는 표현으로 쓰기 시작했다. 과학적이지 않은 의술은 해가 되는 것이고, 과학적인 자신들의 의술이야 말로 ‘인술’이라고 주장하면서 한의학과는 전혀 다른 목적과 입장에서 ‘인술’을 해석하고 사용하였다. 이렇게 한의학에서‘인술’을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로 내세웠으며, 서양의학은 ‘조선’이라고 하는 지역과 민심에 녹아들어가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인술’ 용어를 채택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의료 행위에 덧씌워나갔다. 이는 서양 의학이 조선으로 들어와 지역화하는 하나의 양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9)
근대기 한국을 무대로 벌어진 이런 동서의학의 경합-혹은 교섭-을 통해 ‘인술’은 1920년 중반부터 한국 의료 윤리의 대표 슬로건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과정은 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났고, 의료계 전반에 자리잡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인술을 이야기할 때 ‘고금에 이르기를’ 이라는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인술’은 역사적 의미를 벗고 지금 여기서 ‘의(醫)’가 추구하고 향해야할 의료윤리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사회에 성공적으로 자리잡힌 ‘인술’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함의를 지니며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그 중 하나는 일제의 의료 총동원 때 ‘인술보국’이나 ‘인술부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일본 제국이 유교에 기반을 한 ‘인술’의 윤리적 프레임을 황도 유도로 치환하여 천왕과 국체를 위한 선전 용어로 이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Notes

1) 명치 2년(1869) ‘醫道改正御用掛’. 여기에서는 편의로 서양의학을 공부한 의사들을 서의, 한의학을 공부한 의사들을 한의라고 칭하였다. 일본은 기존 한의를 새로운 제도 안에 포함시켜 영구 면허를 주면서도 신규면허를 발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한의를 줄여나갔다(신동원, 2002: 344-345).

2) 이 논문에서 인용된 고전 의서의 한국어 번역은 한의학고전DB를 참고로 했다.

3) 「同濟學校瓶說」, 『만세보』, 1906년7월1일, 3면; 「同濟學校贊成文」, 『대한매일신보』, 1906년8월 8일, 3면.

4) 「大韓醫士總合所趣旨書」,『대한매일신보』, 1909년10월22일, 3면.

5) 「決議案」,『매일신보』, 1915년 10월 27일, 2면.

6) 혹은 극복이 강제되는 상황이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일제가 의료가 국가 주도 사업의 하나로 편입시키고 국가가 자격증을 발부하는 상황에서, 한의사들은 이 ‘제도권’ 안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방향을 찾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라우치 총독의 발언은 한의들에게 위기감을 주는 동시에 제도권으로 편입될 유일한 틈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7) 「개성의생회강연회(開城醫生會講演會)」, 『동아일보』, 1921년11월2일, 3면.

8) 長谷川好道,「總督祝辭」, 『매일신보』 , 1918년 6월 4일, 1면. 제4회 총회(1915년)에서 제10회 총회까지(1921년) 총독부터 경성의사회장 등의 축사가 매년 이어졌지만 ‘인술’이 등장한 것은 제 6회 총회 때 조중응(趙重應, 1860-1919)이 쓴 축사가 유일하다. 조중응은 “인세 상의 호사업(好事業)이 허다하나 그 중에 직접으로 제중활인(濟衆活人)하는 술업(術業)은 醫術이라, 그래서 자고로 의술을 칭하여 인술(仁術)이라 하는 것이다”고 하며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활인제중(活人濟衆)하는 인술의 자우혜택(慈雨惠澤)”의 보급을 바란다고 쓰고 있다(조중응, 「祝辭」, 『朝鮮醫學會雜誌』17, 1917, 3-4). 이는 ‘인술’을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기 보다는 당시 의료 윤리를 나타내는 표현을 모두 가져와 쓰고 있으며 내포하는 의미 또한 전통적 의미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일본인 관료와 다르게 조선인인 조중응만이 ‘인술’을 사용했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9) 이후 조선의사간친회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1930년에 조선의사협회로 다시 발족 후 회지 『조선의보』를 발행했다.

10) 「위대(偉大)한제생사업(濟世事業)」, 『동아일보』, 1927년8월25일, 5면.

11) 「공의(公醫)는 인술로서 의치(醫治)의 중임을 맡아야: 고(高)전북경찰부장 훈시」, 『부산일보』, 1930년 10월 15일, 5면.

12) 『아사히 신문』에서는 현대로 들어오면서 고전 인용의 형식으로 재등장하기 시작하는데, 1990년대부터 ’인술’이 언급되기 시작해 1990년대에 48건, 2000년부터 2022년까지 143건이 검색된 점은 흥미롭다.

14) 百度百科 “仁术”, https://baike.baidu.com/item/%E4%BB%81%E6%9C%AF?forcehttps=1%3Ffr%3Dkg_hanyu, 검색일: 2022년 12월 5일.

15) 1937년부터는 1945년까지 인술에 관한 기사는 수백건으로 급증하는데 이는 이렇게 정착된 ‘인술’의 개념을 다시 일본이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부터 의사들의 동원을 위해 ‘인술부대’ ‘인술보국’ 등의 선전 구호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문에서 더욱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16) 네이버의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는 본문도 검색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확도가 높지만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에서는 제목이나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에 추가로 찾아낸 기사를 더한 것이기 때문에 검색에서 빠진 기사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 둔다. 현재 의료 관련 기사 내용을 확인해가며 관련기사를 추가중에 있다. 마지막 검색일: 2023년 3월 2일.

17) 대중은 ‘인술’을 기준점으로 돈이 없는 환자를 거부하거나 과도한 진료비를 청구한 의사와 병원을 비난하는 한편 반대의 경우를 인술을 펼치는 의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그 예로 여운형 「貧困한 重病者의 診療를 拒絶 딸을업은 老親은 街頭에 彷徨 無慈悲한 仁術?」 (『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6일); 「貧困한 사람인줄 알고 危急患者治療拒絶 드듸여 病者는 거리에서 死亡 仁術저바린 惡德醫師」 (『매일신보』1937년 10월 5일); 「醫は仁術! 龍山に一美譚」 (『조선신문』, 1926년 11월 20일); 「仁術을 善用하는 醫師 貧患者를 施療 공주제중의원장량재준씨가 惡德醫師와 好對照」 (『매일신보』, 1933년 11월 15일); 「貧民に無料で豫防注射を實施: 「醫は仁術」の實踐者」(『조선신문』, 1934년 7월 20일); 여운형 「仁術의 實行者 韓醫生의 頌德碑」 (『조선중앙일보』, 1934년 12월 9일); 「仁術美談: 自身의 “피”를 輸血하야 入院中幼兒를 回生 아무도 몰내 위독한 아이를 구해 大學病院 갸륵한 醫師」 (『매일신보』1937년 6월 16일) 등의 기사가 있다.

18) 「좀혹평(酷評)이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3일, 1면.

19) 이는 현대에까지 의사들에게 군자와 같은 이상성을 요구하는 등 의료인을 윤리적으로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권복규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는 선하거나 이상적인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없는데 한국에서는 “의사가 아닌 많은 이들에게, 의사는 병을 앓고 있으므로 약자인 ‘환자’에 대해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희생을 감수해내야 하는 존재이며, 여전히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기득권층이고,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수준의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이러한 프레임을 비판했다(권복규, 2012: 135-136).

Table 1.
The number of newspaper articles related to ‘Insul’.
년도 기사수 년도 기사수
1900년대 1 1930 11
1910년대 4 1931 10
1921 1 1932 12
1924 5 1933 12
1925 1 1934 15
1926 7 1935 22
1927 5 1936 32
1928 5 1937년 이후 생략
1929 6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00-1945)

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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