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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4(3); 2015 > Article
구도 다케키(工藤武城)의 ‘의학’과 ‘황도유교’에 관한 고찰*

Abstract

This paper reviews Kudoh Takeki’s activity critically during the colonial Korea period, regarding his research on Medical Science and Japanized Confucianism. He managed ‘The Seoul Gynecological Hospital’for approximately 35 years in the Chosŏn period as a Japanese resident with Chosŏn status. He published medical knowledge about obstetrics through more than 280 articles, and attempted to improve the hygiene and health of ‘Korean Women’.
He tried to complete his will toward ‘One Unity of Chosŏn and Japan’by terminating the Chosŏn culture ‘gene’as an intention. The purpose would enlighten Chosŏn by Japanese blessing. This paper aims to confirm his intention by two aspect of analysis by ‘Medical Science’as an occupation and ‘Confucianism’and the background of his thought.
The content of Kudoh Takeki’s research in Chosŏn regarding Medical Science-Confucianism is described as below.
First, the purpose and mission of Kudoh Takeki regarding Chosŏn was analyzed. The papers revealed the Kudoh Takeki mentioned only the ‘HusbandMurders of Corean Women’, which was defined by Kudoh Takeki as ‘A Special Crime of Corea’. This paper examined his intensions. Second, writings by Kudoh Takeki were listed to verify the ‘medical’field and ‘non-medical’field according to the subject. No list of contents was found for his more than 280 articles or essays in magazines/newspapers/publications, and these papers only described the Kudoh paper “A Special Crime of Corea”and studied the separate book publication by Kudoh THE GYNAECOLOGICAL RESEARCH OF HUSBANDMURDERS OF COREAN WOMEN, A SPECIAL CRIME OF COREA.
Third, the genealogy of Confucianism of Kudoh Takeki was analyzed as his background of mental·thought by his hometown and the school he graduated from. The people from Kumamoto and Seiseiko school who were influenced by ‘Yi Toegye(李退溪)’of Chosŏn Confucianism were more active than general Japanese.
Fourth, the practical activity of Kudoh Takeki in Chosŏn was described. The paper revealed that his brother Tadaske and Shigeo also stayed in Chosŏn to act as an important assistants for the Colonial Chosŏn Government-general. Kudoh was an important man in Japanese society in Chosŏn, acting as a member of 「Group of Same Origin」 and ‘Chosŏn Association of great Asia’which was an important organization assisting Colonial Chosŏn Government-general and was a representative position in Seoul district of Bukmichang-jeong(now Bukchang-dong)
Fifth, Kudoh Takeki’s precise activity to terminate Chosŏn cultural ‘gene’and lead to enlightenment was analyzed by an examination of his Medical Science as an occupation and Confucianism as a background of his thought.
Even he attempted to enlighten the brutal Chosŏn people in cultural aspects but it was only a tool to assist the colonial policy of Japan by emphasizing ‘Kyoikuchokugo(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to implant the Kodo-Seishin(Imperial Spirit). Analyzing the relationship of Kumamoto Practical Party with Yi Toegye, the intention of a deep connection toward ‘One Unity of Japan and Chosŏn’by colonial policy was revealed.
In conclusion, the paper revealed the Japanese modernization frame to complete ‘One Unity of Japan and Chosŏn’and ‘Make people to obey the Japan Emperor’by enlightening the dark Chosŏn and merging them with Japan as Kudoh intended.

1. 머리말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在朝日本人) 의사 구도 다케키(工藤武城, 1878-?)의 근대 의학 연구가 황도유교(皇道儒敎)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고찰한 것이다[1]. 이를 통해서 식민지 조선에서 ‘부인(婦人)’ 분야의 연구를 주도한 구도가 왜, 어떻게 제국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해 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구도는 위생(衛生) 정책을 포함하여 근대 과학적 지식체계에 기초한 ‘의학’의 차원, 그리고 국가가 표상하는 지식체계에 입각하여 사회·문화·풍속을 포함한 ‘정신’의 차원에서 한국 부인의 의료와 조선문화의 ‘유전자(遺傳子)’를 혁신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명분으로 ‘조선’이란 공간에 자신이 활동할 근거지를 마련하고, 거기에 일본 제국이 추구하는 ‘지적(知的)’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일조한다.
구도는 1905년 12월경에 ‘한성병원 산과부인과 부장에 초빙되어’(川端源太郎, 1913: 152; 朝鮮公論社, 1917: 307) 식민지 조선의 땅을 밟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관보(제5284)>에 따르면, 일본적십자사(日本赤十字社)에 대한 협조와 공로가 인정되어 유공장(有功章)을 받았다(1944년 9월 13일). 이 기록으로 보아 해방 전까지 그는 조선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구도 다케키의 모습
Figure 1. Picture of Kud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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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조선에 온 시기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민간뿐만 아니라, 지방 차원에서도 ‘이민론(移民論)’을 왕성히 펼치던 때이다. 구도의 출신 지역인 구마모토(熊本)는 조선 진출에 열심이던 지역이다(高崎宗司, 2002: 14; 박양신, 2004: 159). 유럽에서 터득한 첨단 지식을 새로운 개척의 땅 조선에서 부인들을 위해 펼친다는 ‘어떤 사명감’(ヒマラヤ山人, 1909: 65)에다, 독일 의학 박사를 식민지에 초빙하여 이민을 강조하기 위한 식민지 정책자의 목적이 합치하였던 것이 그가 조선으로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볼 수 있다.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근대적 지식의 전면을 치장한 과학-합리라는 명분은 당시 제국 일본의 첨단 무기였고, 그런 무기를 소지한 지식인들은 의기양양 식민지 공간에서 활동하기 마련이었다. 이것은 구도가 조선에 온 지 이른 시기에 자신의 사명을 내비친 다음과 같은 글에서 잘 드러난다.
  • 지리적인 위치와 여러 강국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악정(惡政)에 시달린 국가와 개인이 존립에 신의(信義)니 정도(正道)니 하는 것은 자살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약소국이며 악정에 시달린 백성에게는 허례, 기만, 시기와 의심 등은 없어서는 안 되는 무기이다…… 나는 응용의학의 하나인 임상산과부인과를 전공하고 내방(內房)에 출입하는 일이 잦고, 숨김없는 한국인의 성질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그들은 성격이 비겁하고 게으르며, 신의가 없고, 시기와 의심이 많고, 신뢰의 미덕이 부족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주위의 사정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게 한 유전의 결과이기에 참으로 불쌍한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만일 사정이 허락되어 한국에 계속 머물게 된다면 찬찬히 이 유전(遺傳)을 소멸시켜 문명의 빛을 받게 하고, 날로 발전하는 의학을 가급적 빨리 보급시켜 은혜를 입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工藤武城, 1908: 20-21. 밑줄은 인용자).

다시 말해서 ‘어둠=조선’을 ‘빛=일본’쪽으로 계몽·교화, 편입시키겠다는 것이다. 또한 피식민지인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대등한 입장이 아니라, 식민지 종주국민으로서 조선인을 “은혜적”으로 대하고자 했던 것이다(박양신, 2004: 170). 여기에 구도의 우월의식과 차별의식이 드러나 있다.
이처럼 이른 시기에 식민지 조선에 온 구도는 개업의로서 의료활동을 펼치는 한편 재조일본인 사회를 대표하는 잡지와 신문 등에 280편 이상의 논문과 단문의 글을 싣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 대해서 지금까지 여러 연구가 있어왔는데, 크게 세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첫째, 여성문제의 측면에서 다룬 논문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제하 조혼문제를 둘러싼 범죄(김경일, 2007), 여성 주체에 대한 인식 문제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경우(장용경, 2007)를 들 수 있다. 둘째, 의료 및 의학 지식을 둘러싼 논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도의 ‘부인과학적 지식’과 조선 부인의 ‘남편살해’를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 및 제국주의의 논리를 비판적 시각에서 논한 논문(홍양희, 2013; Park, 2013)을 들 수 있다. 셋째, 구도 다케키와 관련한 일반논문을 들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근·현대기 퇴계상에 관한 성찰을 다루면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기도 하였고(최재목, 2008), 남편살해의 양상에 대한 지식인의 논의가 언급되기도 하였다(전미경, 2010). 구도의 논저들은 ‘의학’ 관련뿐만 아니라, ‘비의학’ 관련 측면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의학과 황도유교의 연관성을 논의한 연구는 없다. 지금까지의 구도 관련 연구는 부인과 전문의사로서 그가 이루었던 ‘의료’ 및 ‘의학’관련 분야에 집중되어 왔다.
따라서 본 논문은 지금까지의 선행연구들을 바탕으로 하여 먼저 그의 부인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조선에서의 지위와 활동, 나아가서 ‘비의학’관련 자료를 통하여 구도의 활동 전체상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어서 그의 ‘의학’과 ‘황도유교’의 관련성을 검토함으로써 식민지 정책에 협력하는 한 방식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서 구도 다케키라는 인물이 자신의 권리 추구는 물론 중·상층 재조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했는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2. 이력 및 조선에서의 활동

1) 이력 및 활동

구도 다케키의 이력과 활동에 대해서 식민지 조선에 오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제강점기 조선 활동 이전의 이력이다. 그는 메이지 11(1878)년 구마모토 현(熊本縣)의 사족(士族) 출신으로 구도 다다지로(工藤唯次郞)의 장남으로 태어났다(京城新聞社, 1936: 63). 그의 아버지는 다마나 군(玉名郡)의 요코시마(橫島) 촌장을 8년간 역임한 지역의 유지였다(橫島町史編纂委員會, 2008: 1334). 구도는 청소년 시기에 보수적인 학교인 세이세이코(済済黌)를 다녔고, 19세가 되는 1897년에 나가사키 의학전문학교(長崎醫學專門學校)에서 4년간 수학하였다(大蔵省印刷局, 1901: 413). 1901년에는 동향 출신으로 독일 유학의 경험이 있는 하마다 겐타츠(濱田玄達1855-1915)의 조수를 맡는 한편 유학준비를 목적으로 외국어학교를 다니기도 하였다. 참고로 하마다는 <일본부인과학회>를 창립한 인물로 궁내성 어용계(宮內省御用掛, 황실에 봉사하는 직책)를 맡기도 하였다(石戸頼一, 1893: 343-344; 花房吉太郎·山本源太 編, 1892: 145-148; 朝日新聞社編, 1994: 1337). 1903년에 그는 당시 일본의 정치와 행정에 많은 영향을 미친 독일로 유학하여, 뷔르츠부르크대학 부인과 교실에 들어가서 다음 해 7월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1905년 4월에 베를린대학 부인과로 옮겨 태생학, 여자비뇨기학을 배우는 한편 어학에 대해 관심이 있어 ‘라틴어’등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의 조선에 건너온 구도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의학 및 의료관련 활동 둘째, 재조일본인 유지(有志)로서의 활동 셋째, 저술 및 문예 활동이다.
첫째, 본업인 의료 및 의학관련 활동이다. 1905년 12월에 한성병원(漢城病院) 산과부인과(産科婦人科) 부장으로 초빙되어 경성에 온 그는 두 차례의 원장대리를 맡기도 하였다(川端源太郎, 1910: 91-92). 그러나 그곳에서의 의료활동은 자신의 뜻과 맞지않아, 1907년 11월에 북미창정(北米倉町; 현, 북창동[北倉洞]) 94번지에 개인병원인 경성부인병원(京城婦人病院)을 개업하였다. 그 후, 2년 남짓 프랑스 파리대학 퀴리라듐 연구실에서 공부한 시기(1913.7-1915.12)를 빼고는 줄곧 부인 및 1남 3녀와 경성에서 지냈다(朝鮮公論社, 1917: 307)[2].
그는 경성에 거주하는 개업의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조직된 경성의사회(京城醫會)에서 활동하였고(박윤재·박형우, 2001), 1941년에는 총후(銃後) 의료사업 협력을 위한 경기도의사회(京畿道醫師會)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매일신보, 1941년 11월 27일 자).
둘째, 재조일본인 유지(有志)로서의 활동이다. 구도는 한일병합 이전부터 조선에 건너와 재조일본인 사회의 자치기구였던 경성거류민단(京城居留民團)의 일원으로 1913년에는 제4회 거류민회의 의원을 역임하였으며(천지명, 2013: 266), 민단이 해체된 후에는 경성부 북미창정의 총대(總代)를 맡기도 하였다(京城新聞社, 1936: 63). 병원 의사이며 지역 유지로서 경성 도시계획연구회원으로 참가(京城都市計劃硏究會, 1936: 324-325)하는 등 그는 재조선 일본인 사회에서 지위가 높았으며, 그의 활동 범위 또한 매우 넓었다. 1926년 국제정보사에서 발행한 『조선신궁기(朝鮮神宮紀)』의 ‘재조선 명사의 감상’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포함한 일곱 사람의 감상문이 나오는데, 그 중 한사람으로 구도가 등장할 정도이다. 또한 인맥도 넓어 한 때 제8대 조선 교구장이 되어 반세기 가량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 가톨릭계의 책임자로서 활동했던 프랑스 선교사 뮈텔과도 친분이 있었다. 말하자면 구도는 당시 경성에 거주하는 재조일본인 사회를 대표할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924년에 ‘아시아 민족의 결합과 내선의 융화 및 사상의 선도’ 등을 목적으로 하는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에 이름을 올렸고, 1934년 <경성일보> 3월 3일 자에 따르면 ‘황도정신의 고취와 아시아 제국의 친선단결’을 위한 ‘조선대아시아협회’의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도정신에 기초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상무이사로서 문교보국(文敎報國)을 꽤 하였음을 <매일신보> 지면(1941.11.27/1941.12.18)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저술 및 문예 활동이다. 구도는 잡지와 신문에 기고 및 저술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구도는 대학에서 의학을 가르치는 학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립의 개인병원을 경영한 개업의였음에도 부인 및 여성과 관련된 의학 방면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사회, 문화와 관련된 분야에도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등, 식민지 조선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 접근을 시도하였다.
지금까지 조사한 구도의 잡지/신문/저서는 280편 이상이 된다. 이 가운데 ‘의학’관련은 151편(부인과학·여성관련 분야 109편, 기타 의학분야 42편), ‘비의학’관련은 134편(종교·사상·문화 분야 106편, 정치·사회·국가 분야 28편)이다(부록1을 참고).
이상의 자료목록에 나타난 저술활동을 보면 ‘비의학’ 분야에서의 활동도 ‘의학’ 관련 못지않게 많았다. 그 가운데 정치·사회적인 문제 보다는 비교적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에 관한 관심이 조금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의학’분야라 하더라도 많은 부분 ‘부인과학자적 시각’에서 조망한다는 전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구도는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3]라는 잡지에 가장 많은 글을 실었고, 거의 매년마다 빠짐없이 저술활동을 하였다[4].
Table 1.
Takeki Kudoh’s magazine/newspaper/book Title in Subject (Medical Science:151; Non Medical Science:134)
의학 관련(151) 산과부인과(여성관련)분야 기타 의학분야

109 42

비의학 관련(134) 종교/사상/문화 분야 정치/사회/국가 분야

106 28

(본 표는 구도 다케키 논저를 필자가 구분, 정리분한 것임: 논문은 연재 횟수대로 계산, 책은 한권에 1로 계산하였음. 제목 중심으로 분류)

1922년부터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문화통치’아래 ‘경성의 천지를 진선미화(眞善美化)’하여 ‘조선문화의 진전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매년 1회씩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구도는 단문의 시(詩)를 쓰는 취미를 갖고 있었으며, 동양화 및 서예 작품을 전시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성부가(京城府歌)’를 작곡한 오바 유노스케(大場勇之助)와 함께 일제의 식민통치에 부응하는 ‘신체제 음악’을 통해 전쟁 협력을 선전하는 ‘조선음악협회’의 임원(이사)으로 ‘음악보국’에도 힘썼다(성대경, 2009: 314-315). 이렇게 재조일본인 유지로서 다방면으로 활동한 그에 대하여 ‘히마라야 산인(山人)’은 ‘총독부의 인물-학자다운 인물’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구도를 소개하고 있다.
  • 의학박사 구도 다케키는 경성부인병원 원장이며 부인병의 의사로서 상당한 기량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는 상당한 박학자이며, 정치가이며, 경제가이며, 철학가이며, 과학자이며, 문학자이며, 무엇이든지 불가능이 없는 남자이다(ヒマラヤ山人, 1914a: 72).

그림 2. 구도 다다스케의 모습
Figure 2. Picture of Tadas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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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다케키는 전공인 부인과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다방면으로 식민지 조선 사회에 개입하였다. 구도는 가족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도 식민지 조선에 건너와 각자 활동하면서 상호 협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구도의 활동에 적잖은 도움을 준 형제들을 여기에 참고하고자 한다.
그들은 첫째 동생인 구도 다다스케(工藤忠輔, 1882-1917)와 둘째 동생인 구도 시게오(工藤重雄, 1884-?)이다(다다스케와 시게오 저술 목록은 부록2 참고). 구도 다다스케는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 독법과(獨法科)를 1911년에 졸업하자마자 조선에 건너와, 조선총독부 사법부에서 일 년 남짓 일하다가 1913년 10월에 경성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朝鮮公論社, 1917: 307)[5]. 그는 한때 형 구도가 의학소송을 당했을 때 소송대리인을 맡기도 하였다(법원 도서관, 2008: 551-557). 그는 앞서 언급한 경성 명치정(明治町, 지금의 명동[明洞])의 뮈텔주교로부터 세례(세례명:바오로)를 받았으며, 지병인 폐병으로 일찍 사망하였다(뮈텔주교, 2002: 127, 154, 160, 162). 그도 형 못지않게 식민지 조선사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다다스케에 대하여 『조선급만주』의 ‘경성변호사계의 인물’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 구도 다다스케: 구마모토의 남자로 경성부인병원 원장인 구도 박사의 동생이다. 명치 44년에 제국대학 독법과(獨法科)를 졸업하고, 곧 바로 조선에 건너와 총독부 사법부에 들어갔으나 중용되지 않아서 관을 사직하고 변호사를 개업했다. 어학에 재능이 있어서 주로 서양인 방면의 사건을 많이 취급하고 있다. 연구적이고 비상한 독서가이면서 다재다능의 사람으로 법률 이외의 정치, 문예, 종교에도 취미가 있고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다. 대단히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진실한 면이 있다. 나이도 1882년생으로 서른 한 두 살이다. 그러나 폐가 좋지 않아 입을 닫고 있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ヒマラヤ山人, 1914b: 74).

그림 3. ‘겸겸당’점주 구도 시게오
Figure 3. Storekeeper Shigeo Kudoh of Keke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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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시게오도 역시 법학사(法學士)로서 세이세이코(濟濟黌)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인물이다(鹿島浩, 1912: 29-33). <매일신보>(1920.1.26; 1920.2.7)에 의하면 법학사로서 시게오는 조선에 ‘법률’관련 신문·잡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아(東亞)와 법정(法政)>이라는 제호로 발행 신청을 한 적이 있다. ‘철우거사(鐵牛居士)’라는 불명을 갖고 잡지 『조선불교(朝鮮佛敎)』에 많은 기고를 하였으며, 경성 본정(本町, 지금의 충무로[忠武路])에서 각종(各宗) 불교서적을 판매하는 겸겸당(謙謙堂)이라는 서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朝鮮佛敎社, 1924a: 12; 1924b: 16; 1924c: 2; 1924d: 12; 1924e: 12). 또한 청일전쟁 시기에 한국을 방문하여 기록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KOREA AND HER NEIGHBOURS을 초역(抄譯)하기도 하였다(『三十年前の朝鮮』 1925). 이 때 당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이완용(李完用)의 제자(題字)를 받는 등, 총독부 고위 관리들과의 친분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다다스케와 시게오는 그의 형 구도 다케키가 식민지 조선에서의 의료 이외의 활동, 특히 ‘법률’, ‘어학’, ‘종교’문제 등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의 조선 진출은 총독부 당국자와 관리를 제외한 대다수의 일본인 민간 이주자들이 식민지 개발을 통하여 일확천금을 노리고 조선에 들어 온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구도와 그 형제들은 일본인 이주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재조일본인 사회에서의 지위와 종주국 식민자로서의 간섭없는 권리와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 인물로 보인다. 이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모토 아래 일본인 자치기구였던 거류민단을 해체하고자 했던 총독부 당국의 조치에 대하여, 구도는 ‘조선인과 같은’대우를 받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는 ‘생물학상의 선천성’을 들어 총독부의 융화·동화 정책을 반대하였다(一記者, 1919: 75). 또한 같은 재조일본인들의 눈에는, 그는 신사풍의 용모에다 교양있고 명석한 두뇌의 이미지가 있으며, 다소 야심과 이욕이 강한 인물로서 사람을 백안시하는 고만한 태도가 있었다. 아울러 매일 아침 원시적인 심신단련법이라하여 나체로 실외를 소요하거나, 양복을 벗고 오래된 목면 기모노를 걸치고 시끄럽게 교외로 산책하는 등(ヒマラヤ山人, 1909: 66; 瓢斗口生, 1919: 68),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여유있는 일본인으로 비쳐졌다. 여기서도 종주국 식민자로서 영민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 인물의 일단을 엿볼 수가 있다.
구도의 이력과 조선에서의 활동은, 자치기구인 거류민단 활동을 포함하여 적어도 1910년대까지는 개인의 ‘입신양명’을 우선하는 입장에서, 때로는 총독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거류민단 해체 이후로 점차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안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보인다. 구도는 식민지 일본인으로서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협력 속에 자신의 전공지식을 기반으로, 재조 일본인 사회의 여론과 피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총독부 당국의 지배 논리를 강화하는데 일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2) 가계와 사상적 계보

구도 다케키는 앞서 이력에서 보았듯이 ‘구마모토(熊本)’태생이며, 보수적인 ‘세이세이코(済済黌)’출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구도라는 인물 이해를 위해서 그의 출신지역이 가진 학문적 배경을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그는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세이세이코(현 구마모토현립 세세코고등학교)라는 지역의 사립학교를 나왔다. 학교명은 『시경(詩經)』의 한 구절인 ‘훌륭한 많은 인재로 말미암아 문왕도 편안하시도다(濟濟多士文王以寧)’에서 택하였다. 그들은 졸업생을 ‘다사(多士)’라고 불렀으며, 유교적 요소가 강한 ‘삼강령’을 교육방침의 중심에 둔 학교였다[6]. 이 학교의 창립자는 삿사 토모후사(佐々友房, 1854-1906)라는 인물이다. 그는 에도시대 구마모토 지방의 학교(藩校)인 시습관(時習館)[7] 출신자로 이른바, ‘학교당(學校党)’이라 불리는 보수 좌막파(佐幕派)의 사상 그룹에 속해 있던 인물이다.
그는 국가의 유용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황실중심, 국가주의’를 건학 정신으로 한 ‘동심학사(同心學舍)’(1879년)를 구마모토에 세웠으며, 이 학교가 ‘세이세이코’(1882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학교당’의 계보를 잇는 현실주의적 보수파 사족(士族) 그룹으로써, 국권주의 정치단체인 ‘구마모토 국권당(熊本國權党)’(1889년)을 조직한 인물이기도 하다(國史大辭典編纂委員會, 1983: 882; 朝日新聞社編, 1994: 746)[8]. 그는 장래에 조선·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질 것을 예견하고 ‘대륙진출’에 관심이 많았으며, 양국의 ‘어학교육’에도 힘을 쏟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그의 일생은 시종 국권주의에 종사하였다. 세상에서 보수적 정치가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역경에 처한 경우가 많았다. 평생 대륙 발전에 뜻을 두었고, 그 목적을 위해서 후진을 돕고 노력하였다. 구마모토(熊本)가 조선과 중국을 향해 뛰어난 지사(志士)를 배출한 것은 그의 영향이 크다(稲葉継雄, 2001: 96).

이후 구마모토 현에서는 삿사 토모후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현비(縣費)로 조선유학생을 파견하였다. 파견된 유학생들은 조선어뿐만 아니라, 한문·영어·수학을 배웠으며 조선의 사정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3년 과정을 마치고, 계속하여 조선에 남아 통역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그들 유학생 감독으로는 삿사 토모후사의 동생인 삿사 마사유키(佐々正之) 등이 맡았다(京城府, 1934: 714; 1936: 660).
이처럼 조선 진출에 열심이었던 세이세이코는 창립자인 삿사 토모후사의 영향 아래, 구마모토 출신을 구한국에 많이 진출시켰다. 그들의 정신적 배경에는 ‘황실중심, 국가주의’적 이념을 강하게 나타냈다. 예를 들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련된 민간인 48명 중에 21명이 구마모토 현 출신자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稲葉継雄, 2001: 9)[9].
구도와 구마모토 지방의 유학생 파견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으나, 서로 간에 밀접한 관련성은 추측할 수 있다. 첫째, 세이세이코 출신이라는 점 둘째, 같은 동향의식 내지는 구마모토 지역을 대표한다는 엘리트 의식을 서로가 갖고 있었다는 점 셋째, 구도가 거처하던 경성부인병원(北米倉町, 현 중구 북창동)과 경성내의 구마모토 지역민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낙천굴(樂天窟)의 대화정(大和町, 현 중구 필동)과의 거리가 가까웠던 점도 그들 사이에 교류와 협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예를 들어, ‘제2기 유학생’(熊本県派遣朝鮮語留學生)으로 조선에 파견된 나카무라 켄타로(中村健太郞)는 1899년부터 약 3년간의 과정을 마치고(中村健太郎, 1969: 11-15), 조선에 남아 <경성일보> 및 <매일신보>의 간부로 근무한 인물이다. 구도는 두 신문에 글을 기고할 뿐만 아니라, 1924년에 그와 함께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한 「동민회(同民會)」에서 역원으로 함께 활동하였다. 또한 나카무라가 편집발행으로 있는 『조선불교』에 구도와 그의 동생 시게오가 투고하기도 하는 등 함께 동역하는 관계를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구마모토 유학생들이 조선 문화 전반에 있어서 보여준 관심과 활동은, 구도가 조선에서 한국문화와 한국부인의 특성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가진 것과 상통한다. 이는 그들이 단순한 관심 이상의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메이지(明治) 시대를 통해 구 막번체제는 폐하여 졌으나, 같은 지역공동체 의식과 사족 의식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구마모토가 지역 레벨에서 식민지 개발에 앞장선 것은 메이지 유신에 늦게 합류한 것을 만회하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高崎宗司, 2002: 14).
다음으로, 구도의 가계와 구마모토 학통 및 학풍의 관련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구도는 히고(肥後, 오늘날 구마모토[熊本]) 출신이며, 집안은 도쿠가와(德川) 막부 중기의 유학자인 오츠카 타이야(大冢退野, 1678-1750) 학문의 감화를 깊이 받은 가문이었다.
  • 나는 서쪽 변경의 히고(肥後. 현 구마모토-인용자)라는 가난한 마을 타마나(玉名)에서 태어났다. 고향 마을에 타이야(退野) 선생이라 불린 한 석학이 있었다. 내 아버지는 그 문하의 제자(門弟)였고, 선생 후손의 아이들은 모두 내 고향 학교 동창들이다(高田誠二· 藤原一毅, 1934: 1-2).

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오츠카 타이야(大冢退野)로부터 시작된 구마모토의 학통은 번의 학교인 ‘시습관’을 통해 이어져 오는데, 중요한 것은 그 학통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다름 아닌 조선의 대유(大儒) ‘퇴계 이황(1501-1570)’이라는 것이다. 오츠카 타이야는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통하여, 유학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평생의 배움을 얻었다고 하였다. 당시 시습관의 2대 학장을 지냈던 야부 코잔(薮弧山, 1735-1802)은 유학의 계보를 공자(孔子)→이퇴계(李退溪)→타이야(退野)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을 정도였다(高田誠二·藤原一毅, 1934: 3).
이처럼 퇴계 이황을 사숙한 오츠카 타이야는 퇴계의 ‘퇴(退)’를 따서, ‘타이야(退野)’라고 자신을 불렀다(工藤武城, 1925: 6). 구마모토의 학통에서 퇴계 이황의 영향에 주목하고, 이를 언급한 구도 다케키 자신도 이러한 인연으로 퇴계의 『주자서절요』 및 퇴계 서적을 읽었다. 뿐만 아니라, ‘애연가(愛硯家)’였던 구도는 퇴계의 ‘벼루’와 퇴계의 ‘필적’및 퇴계의 ‘초상화’를 소장하는 등, 퇴계 이황에 대한 관심과 존경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工藤武城, 1925: 4-7; 1934: 1-14; 1936: 37-61).
이처럼 구마모토로 전해진 퇴계의 학통은 오츠카 타이야와 번교·시습관을 통해서 이어져 오다가, 막말 이후에는 시습관의 봉건적인 교학과 일본 내의 정치적 상황 등의 영향으로 구마모토에도 학문과 정치사상 등에 따라 크게 두 개의 사상조류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앞서 세이세이코와 관련하여 언급했듯이, 학문과 사상면에서 관념적·비실질적·수구적인 입장을 지니며 시습관의 계통을 잇는 ‘학교당(學校党)’이며, 또 하나는 시습관의 보수적인 학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증성·합리성을 바탕으로 실제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자는 ‘실학당(實學党)’으로 대별할 수 있겠다.
실학당 계열이 바로 오츠카 타이야의 학풍을 이어받고, 퇴계 이황을 모범으로 치국안민(治國安民)·이용후생(利用厚生)·실천궁행(實踐躬行)의 학문을 종지로 삼고,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내면을 높이고 진실을 찾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요코이 쇼난(橫井小楠,1809-1869)이다(高田誠二·藤原一毅, 1934: 4-5). 그는 오츠카 타이야를 ‘진정한 유학자’로 높이고, 퇴계의 가르침을 ‘처세의 방침’으로 삼았던 막말·유신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와 함께, 메이지 천황의 측근으로써 시강(侍講, 천황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일)을 맡았으며, 일본 교육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교육칙어(敎育勅語)」를 기초한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 호는 토야[東野], 1818-1891)를 들 수 있다. 모토다 나가자네는 시강으로서의 각오를 “퇴계의 정풍(正風)에 속하는 타이야와 히라노 신엔(平野深淵)의 학통”에 의해 임할 것임을 밝혔다(高田誠二·藤原一毅, 1934: 7-8). 이처럼 퇴계 이황의 영향은 구마모토 내의 ‘히고(肥後) 실학당’ 혹은 ‘구마모토(熊本) 실학당’으로 이어졌으며, 그 계보는 오츠카 타이야→요코이 쇼난→모토다 나가자네로 나타낼 수 있다.
요코이·삿사·모토다와 교육칙어 초안을 만들 때 모토다에 협력한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1844-1895. 구도의 숙부), 이들은 모두 시습관 출신들이다. 특히 구도의 할아버지의 형(즉, 대백부)인 기노시타 사이탄(木下犀潭, 1805-1867)9)은 시습관 학장을 지냈으며, 문부대신을 지냈던 이노우에 코와시와 조선 공사(公使)로 경성에 온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1842-1917, 경성의 죽첨정[竹添町]은 그 거주지의 흔적)는 그의 문하였다.
즉, 퇴계 학통을 일본에 전한 오츠카 타이야 문하의 제자였던 그의 아버지(工藤唯次郞), 그리고 구마모토 번교·시습관의 책임자였던 그의 큰할아버지(木下犀潭), 메이지 헌법을 기초하고 교육칙어 기초에 협력한 그의 숙부(井上毅), 이러한 지연과 학연과 인맥의 관계망으로 인하여 구도는 자연스럽게 양 쪽(=학교당, 실학당)의 영향을 모두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보 속에서 구도는 두 가지 사유의 경향성을 지닌다. 첫째는 ‘번(藩)’을 중시하는 보수좌막파(保守佐幕派)의 사상그룹에서 출발한 ‘학교당’으로부터는 ‘구마모토번(=지역) 의식’을, 둘째는 ‘실학당’으로부터는 ‘의학’이라는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학문 태도를 얻는다. 그런데 이 보수적이고 실용적인 두 측면은 일제 군국주의가 총력전 체제로 진행될수록 ‘국체(國體)에 충성’하는 방향으로 수렴된다. 사실 구마모토 지역에 있어서는 학문경향과 정치적 노선에 따라 학교당과 실학당은 서로 대립을 보였으나,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는 총독부의 식민지 정책 하에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稲葉継雄, 2001: 122).
구도가 보는, 퇴계 학문의 일본 영향에 관한 문맥은 구도 이전에 이미 형성된 언설이었다. 구마모토 출신으로 병합 후 조선에 와서 경성일보를 발간한 도쿠토미 소호(徳富猪一郎)의 저서에도 비슷한 문맥을 언급하고 있다(徳富猪一郎, 1932: 97-101). 그 보다 앞서 처음 등장하는 곳은 1930년 마츠다 코(松田甲)가 「일본주자학자의 이퇴계관」을 언급하는 곳에 보인다(松田甲, 1930: 93-117). 그는 “요즘 내선동화를 말하는 사람에게는 등한히 할 일이 아니다”(松田甲, 1930: 93)라고 퇴계 이황을 주목하였으며, “오늘날 내선(內鮮) 제도의 공통적인 것으로 자제를 교육하고, 특히 시세의 추이로 볼 때 도덕 함양을 가장 중히여기는 지금……마땅히 교화자료(敎化資料)로서 선전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였다(松田甲, 1930: 117). 이렇게 볼 때 구도가 내선융화·내선일체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작업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칙어와 구도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유교 방면의 탐색’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겠으나, 우선 여기서 구마모토에 끼친 퇴계 이황의 학통과 그의 가계와의 관계를 그의 저서(工藤武城, 1934; 1936)를 통해 정리하면 [그림 4]와 같다.
그림 4. ‘구도 다케키가 말하는’퇴계의 학통 및 가계의 관계도
Figure 4. Toegye Academic Tradition and Kumamoto Practical School and Kudoh Family relations Di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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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학과 황도유교 탐색

1) 의학 방면의 탐색

여기서는 우선, 구도 다케키가 경영한 병원의 외적인 모습, 매스컴에 비쳐진 구도와 병원에 대한 평가, 구도의 ‘위생’과 ‘암’치료에 대한 의학지식 보급 등을 간단히 확인하고, 이어서 그의 대표적인 의학 관련 논문에 대하여 탐색하고자 한다.
구도가 경영하는 경성부인병원은 환자의 요양을 위한 시설도 갖춘, 규모가 꽤 큰 병원 이었다. 그는 여러 잡지와 신문에 병원광고를 싣기도 하였다. <매일신보(每日申報)> 1933년 3월 23일 자(또는 1934년9월19일) 광고란을 보면 “京城婦人病院 附屬 姙娠相談所 라줌科=癌(암)과 院長 工藤武城 女醫徐廷兒”로 나온다. 이로 보아 조선인 여의(女醫)를 한 명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의하면 동경 메이지학원(明治學院)과 대한의원(大韓醫院) 부속 의학교 졸업생인 한민제(韓民濟)라는 조선인도 고용한 적이 있다. 참고로 한민제는 “한국기독교의 개척자”로 불리는 한석진(韓錫晋)[10]목사의 장남이다.
그림 5. 경성부인병원 정원에서 요양하는 환자들
Figure 5. The relaxing patients in the garden of the Kudoh Seoul Gynaecological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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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매일신보>(1913.5.4)에는 경성부인병원 원장 ‘工藤武吉’(工藤武城의 오자로 보인다-인용자)의 병원 경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언급되어 있다. 당시 외국의술에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조선부인들을 위해서, 구도는 환자의 ‘위생’과 조선부인 환자를 다수 ‘치료’할 목적으로, ‘진찰권을 발행하여 진찰료와 약값을 반액으로 할인’하는 결정을 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병원장의 ‘자선심을 사람마다 칭송’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로 보아 병원 경영도 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는 ‘한국부인’ 연구를 위해 안성맞춤인 경성의 ‘한성병원(漢城病院)’에 왔으나, 병원에 찾아오는 부인은 ‘마늘 냄새나는 한국부인’이 아니라, ‘화장 냄새 풍기는 일본부인’이 대부분이어서 실망하였다고 한다. 결국 개인병원을 개원하였는데, 당시의 경성에서는 실력으로도 뛰어나 대한병원(大韓病院)과 한성병원은 그를 스카웃하고자 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성의 부인들 가운데서 그를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 잡지 기자는 그를 소개하기도 하였다(ヒマラヤ山人, 1909: 65). 조선 부인의 내참을 바라는 그의 바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13년 그의 저서 『부인의 양생(婦人之養生)』에 실린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 기모노를 입은 일본 부인들과 드레스를 입은 외국인 여성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부인이 그의 병원을 많이 이용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아마도 그 당시에 병원이란 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조선 사람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드물었을 것이다. 외국인 환자의 경우는 프랑스 선교사 뮈텔 주교와의 친분으로 인해 수녀들이 구도 병원을 많이 이용하였다(뮈텔주교, 1998b: 126-127, 474-475; 2002: 15-16, 60; 2008: 425, 427).
구도의 의학관련 지식은 대부분 ‘일어’로 보급되었다. 이는 재조일본인 사회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12년에는 ‘조선부인의 위생사상 결핍’으로 인하여, 억지죽음이 많은 것을 염려한 ‘이태왕 전하(고종, 인용자 주)의 명을 받아’, 『부인의 조섭』이라는 책을 한글로 출판하였다. 여기서 구도는 “여러가지 미신(迷信)과 부인의 생리(生理)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공연히 겁을 내는 사람을 안심케”하고, “부인병과 임신과 기타 산욕 등에 관한 지식”을 조선에 넓히고자 하였다(工藤武城, 1912: 서문 및 서언). 이 책은 4판이나 일본어로 간행된 『부인의 양생(婦人之養生)』(1907년)이라는 원고의 한글판이었는데, 알기 어려운 의학상의 용어를 피하고, ‘비근(卑近)’하고 ‘통속적’으로 쓰여 졌다.
완고한 유학자(儒學者)의 입장에서 보면 무례하고 방자한 느낌을 주는 삽화가 많이 들어 있다. 그러나 저자인 구도는 “오로지 학문을 충실하게 설명”하고, “세상에 부모되고 남편되고, 기혼자와 미혼자를 불문하고 모든 부인”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工藤武城, 1912: 2). 여기에는 그가 부인과 의사로서 부인과학 지식을 펼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더욱이 부인과 의사는 물론, 산파조차 일손이 부족하며, 변두리의 가정인 경우 더욱 비참했던 것이 조선의 형편이었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구도의 저서는 ‘일반인과 전문의와 산파가 없는 곳’에 ‘쉽게 이해되도록’, 100개에 가까운 삽화를 곁들여 ‘가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工藤武城, 1928: 8).
또한 구도는 1931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지면을 통하여 「암과 라듸움」(4.3-4.8)이라는 제목으로, 조선부인이 암(癌)으로 인하여 죽는 수효가 년 4만여 명에 달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약 세 배가량 많다고 지적한다. 자궁암과 같이 만약 생식으로 인해서 생기는 암만을 비교해보면, 여자는 남자의 11배 이상으로 수많은 암이 여자를 괴롭히는 무서운 병이라고 하였다. 결혼한 사람이 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잘 걸리며, 임신한 부인이 더 많이 걸린다고 주의를 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암 치료에는 수술치료와 광선(=방사선) 치료의 두 가지가 있는데, 구도는 라듐광선을 이용하는 것이 암 치료에 효과적임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구도는 ‘최신의 부인과학적 지식’이라는 문명의 빛을 조선에 전파하고 보급하였다. 그의 의학 지식과 의료 행위의 혜택은 재조일본인 사회를 중심에 두었다고 할지라도, 피식민지 조선인에게도 적잖은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학 지식’의 보급은 구도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어둠의 조선을 계몽하여 제국일본에 편입시키려는 총독부의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는 자치기구였던 경성거류민단의 해체(1914년)와 3.1 독립운동을 전후하여 점차 식민지 정책에 ‘협력’하는 관계로 기울어졌다.
그렇다면 그의 대표적인 의학 논문을 통해 이러한 ‘협력’적인 관계, 즉 식민지 정책으로 어떻게 편입해 가는가를 확인해 보자. 무엇보다도 구도의 글 중에서 당시에 가장 주목을 끈 글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朝鮮)』에 실린 「조선 특유의 범죄」(1929.3-1929.12)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논문이라 할 수 있다. 구도는 ‘조선부인의 남편살해에 대한 부인과학적 고찰’이라는 부제로 7회 연재하였는데, 이를 정리하여 1933년 3월에 『조선 특유의 범죄 남편살해범의 부인과학적 고찰(朝鮮特有の犯罪本夫殺害犯の婦人科学的考察)』이라는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서 그는 조선 여자의 살해범 수가 일본 내지 여자의 9배이며, 대만여자의 30배에 가까운 수치를 보이며, 그 외의 프랑스와 독일 등의 여러 나라의 경우에도 남자 100명 당 많게는 15명, 적게는 8명에 지나지 않음에 비해, 유독 조선에서는 88명이라는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특히 구도가 주목한 것은 조선여자의 살해범 가운데 ‘남편(本夫) 살해범’을 빼면, 조선에서의 남녀 살인범의 비율은 100명에 10명꼴이며, 이것은 일본 내지부인보다 낮은 비율이다. 따라서 조선여자의 남편살해범은 범죄 통계학상에서 볼 때, 달리 그 비류를 찾을 수 없는 ‘조선 특유의 범죄’로 규정하였다(工藤武城, 1933: 197).
구도는 이처럼 ‘통계’와 ‘비교’자료를 이용하여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통계를 이용한 비교 방식은 단지 구도 뿐만이 아니다. 총독부의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으며, 조선총독부 촉탁의 관원들에게 흔한 조사방법이었다. 보고서의 제목들도 보통 ‘○○로 본 조선’(…による/…に見る) 또는 ‘조선에 있어서 ○○’(に於ける)라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의 지식인과 대중들을 계몽, 교화하기 위한 객관성 확보의 유용한 도구였다고 볼 수 있다. 구도는 총독부 소속은 아니었으나, 총독부 관리들로부터 ‘특별한’편의를 제공 받았다(工藤武城, 1933).
조선부인의 남편살해에 주목한 것은 구도 이전에도 있었다. 1917년 당시 사법부장관으로 있던 고쿠분 산카이(國分三亥)가 「조선 부인의 남편 살인죄(朝鮮婦人の本夫殺罪)」라는 글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고쿠분은 결론적으로 ‘남편 살인죄(本夫殺罪)’는 조선인의 성격, 교육, 풍속, 관습 및 혼인에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말하자면, 조선부인이 지능이 떨어지고, 교육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잔인성이 있으며, 또한 ‘조선부인이 어릴 때부터 색정이 발달하고 정조를 지키는 것이 견고하지 않다’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하였다.(國分三亥, 1917: 6-23)
이러한 견해의 바탕위에 구도는 좀 더 엄밀하게, 범죄 주체인 부인의 ①과 거의 질환·신체·용모·성질 ②환경·유전 ③초경(初經)과 결혼연령 ④미산(未産)·경산(經産)·산아 수의 관계 ⑤성욕상태 ⑦부인과질환 ⑨남편의 정신·신체·성욕의 이상 ⑩공범의 유무 ⑪범죄시의 월력(月曆)과 기온의 관계 ⑫월경·임신·수유와 범죄의 관계 등을 논하였다. 여기서 구도는 조선부인의 남편살해라는 현상은 ‘선천성 범죄’로서의 특징[11]인 누범(累犯)이 없고, 평소 잔인성의 모습도 발견되지 않았고, 유전적인 관계도 없다고 보았다. 남편살해는 ‘기회성 범죄’중에 제한된 ‘지방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난 범죄로 판단하였다. 즉, 그것은 곧 조선 특유의 결혼 풍속과 관습이 낳은 병폐로서, 한 마디로 ‘조혼(早婚)’의 문제였다고 보았다.
조혼의 병폐와 폐습에 대해서는 개화기 때부터 1920-30년대까지 여러 차례 꾸준히 지적되어왔으나, 어디까지나 고쳐야할 구습과 생리적·도덕적 차원에서 논했다. 그러나 1920-30년대는 조혼, 축첩, 가부장제 등 구시대 인습과 자유연애, 연애지상주의, 남녀평등 등 서구에서 도입된 신문화가 혼재되어 가정윤리가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전봉관, 2014: 146). 이러한 과도기 속에 조혼으로 인한 가출, 방화, 자살, 살인이라는 사건이 자주 신문지상에 소개되었다. 여기에 구도는 조혼으로 인한 병폐 중 ‘남편살해’라는 가장 극악한 결과만을 들어 ‘조선 특유의 범죄’로 연결시켰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는 구도의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本夫殺害의 社會的 考察」(1933.12.9.-1933.12.24)이라는 글을 실어, ‘조혼의 폐해’와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범죄자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 보다는, 구제도와 관습에 따른 것으로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살해’가 ‘조혼’에 따른 ‘조선 특유’의 범죄라고 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라는 것은 의문이다. 첫째는, 통계자료의 근거로써 ‘범인을 접하는 여감 단속(女監取締)’(工藤武城, 1933: 110)에게 의탁하여 결과를 산출하는 방식 등은 과연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둘째, 남편살해의 원인인 ‘조혼’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국민건강을 헤치는 악풍으로 지적이 되어왔으며, 어느 정도 세계 각국에 공통하는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만약 ‘남편살해’가 “조선 특유의 범죄”라는 꼬리표를 붙인다면, 에도시대에 생활고로 산아(産兒)를 죽이던 “마비끼(間引き)”, 세계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다고 저자 자신도 걱정한 낙태(落胎)로 인한 “사산(死産)譠)[12]”등은, 구도의 논리대로라면 “일본 특유의 범죄”라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구도의 ‘조선 특유의 범죄관’에 나타난 연구조사에 대해서는 재조일본인 내에서도 의문을 가졌다.
  • …씨(구도-인용자)의 조사에 대한 약간의 의문점은 조선총독부 조사에 나타난 조선인 여자 범죄자 육백 명에 대하여 조사인원은 겨우 10%에 지나지 않는 점이다. 즉, 씨의 조사로 전체를 예단하기는 무리인 것이다. … 씨의 조사에 나타난 (조선부인의) 반항성, 집요, 흥분성, 순종적이라고 하는 내용과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 우선 혼란스럽다. … 이 조사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바로 전체를 추단하고자 하는 씨의 태도에(물론 우리는 씨의 설을 하나의 연구로 밖에 보지 않는다) 적잖은 우려를 느낀다. … 범죄자의 잔인성 유무를 논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인 자체가 이미 잔인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이상, 이를 범한 범죄자에게 그 유무를 묻고, 게다가 행동과 의사표시에 가장 제약을 받는 감방에서 여죄수를 조사대상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조사 그 자체를 간수에게 행하도록 한 점은 엄밀한 의미에서 대단한 모순이며 염려스러운 점이다(岩本萬翠, 1937: 64-65).

뿐만 아니라, 남편살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유의 하나로써, ‘여자의 인격무시’를 또한 조선 특유의 풍속과 습관으로 구도는 말하고 있다.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으나, 원문인용에 있어서 남녀 모두를 뜻하는 노비(奴婢)를 구도는 ‘여자노비’만을 뜻하는 비녀(婢女)로 인용하는 잘못을 여러 군데서 범하고 말았다(工藤武城, 1933: 170-171). 한편 구도는 남편 살해범을 도별(道別)로 구분하여 ‘일본내지에 가까울수록 적다’라는 결론을 통하여 일본인의 인종적 우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보였다[13].
  • …대체적으로 남쪽지방에 적고 북쪽지방으로 올라갈수록 증가하며, 경상남도와 황해도를 대비하면 약 10배의 비율에 달한다. 환언하면, 일본내지에 근접할수록 적고, 만주국에 가까울수록 많다. … 근래 혈액형학이 진보함에 따라 남부조선(한강 이남-인용자)은 일본내지의 형에 가깝고, 북상할수록 그 유사농도가 감소한다고 한다. 여자 살해범의 수도 이와 같아, 장래 혈액형학·유전학·인류학·민족학의 진보에 따라 이 관계가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工藤武城, 1933: 26).

구도는 남편살해를 ‘민족병’이라 하였다(工藤武城, 1933: 211). 이와 더불어, 조선에서 자신의 사명을 내비친 글을 보면, 한국민족은 “겁이 많고 게으르며, 불신적이며, 시기와 의심이 많고, 신뢰의 미덕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이러한 ‘민족의 유전을 소멸’하고, ‘문명의 빛’을 입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민족의 우량종을 보존하고, 거기서 태어난 아동을 전국민적으로 힘을 합쳐 애호할 것”(工藤武城, 1930a: 10)을 주장한 민족우생학적인 관점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는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범죄자와 정신병자’의 경우는 ‘산아제한’혹은 ‘산아금지’를 거리낌 없이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工藤武城, 1930c: 24). 단, 개인의 안일과 경제적인 문제로 산아를 제한하는 것은 반대하였으며, ‘국력’의 관점에서 “진보한 과학을 극단적으로 응용”하여 ‘양질의 혈통’을 많이 낳기를 희망하였다. 심지어는 아동을 ‘국유화’하여 민족의 힘을 향상하고자 하는 바람도 드러냈다[14]. 이것은 인구증산정책이 국력으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며, 식민지 조선인으로 하여금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양성’하고자 하는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도는 피상적으로는 ‘통계’와 ‘비교’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보다 이해하기 쉽고 객관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외투(外套)를 입히긴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피식민지의 문화적 야만성을 드러내고, 내지(일본)와의 차이를 비교해 보임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조선 부인의 남편살해’를 처음 언급했던 고쿠분 산카이는 사법부 수장이 되기 이전, 고등법원검사장 시절에는 ‘아편과 코카인 주사를 맞고 쾌락을 탐하는 일’과 ‘과부를 약탈하여 부인으로 삼는 일’도 조선 특유의 범죄라 하였다(國分三亥, 1912: 43-44). 이렇게 볼 때, ‘조선 특유’라는 수식어도 식민지 정책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식민지 지배자측의 관용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구도와 같은, 과학으로 무장된 지식인을 통하여 식민지하의 조선은 ‘여성 범죄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지식인들은 그들의 논리에 수긍하고 전파하며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2) 유교 방면의 탐색

구도 다케키에게 학문적·사상적·교양적 배경이 되는 유교와, 그 외 관련성에 대한 연구는 그를 이해하는 한 방편이 된다. 또한 그가 식민지 조선을 이해하고 제국일본에 협력하는 중요한 매개이기도 하다. 구도의 ‘정신적’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구마모토의 유학적 계보 속에는 주자학적 요소와 실학적 요소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천황중심·국가주의와 결합된 유교 이해의 제요소들을 바탕으로 구마모토 학맥을 형성한 것은 이미 서술하였다.
앞서 의료 방면의 탐색에서 자신의 전공인 부인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식민지 정책에 어떻게 협력해 갔는가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비전공인 유교 방면의 탐색을 통해서 좀 더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황국신민화를 선전하는 구도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전자가 의료를 통해 ‘육체적’ 지배를 정당화하였다고 한다면, 후자는 문교(文敎)를 통해 ‘정신적’ 지배를 정당화 하고자 한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구도의 일상의 취미와 문예 활동을 단서로 하여 ‘정신적’지배를 살펴 보고자 한다.
부인과 의사인 구도의 일상에서 유학자(儒學者)적인 취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한시(漢詩) 짓기’와 ‘글쓰기’에 뛰어 났으며, ‘국화 가꾸기’를 즐겼다. 또한 오래된 벼루를 수집하는 ‘고연(古硯) 마니아’였으며, 역사를 좋아하는 ‘역사광’이었다(工藤武城, 1925: 5). 전공서적은 물론이고, 다방면의 독서를 즐기는 ‘독서도락가’이기도 하였다.
구도는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서법(書法)’에 대해서도 ‘추사 김정희’와 ‘조선 서도(書道)의 법맥’을 논할 정도로 나름의 감수성과 교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工藤武城, 1941: 20-22).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초서체’와 ‘해서체’로 된 작품을 전시하여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같은 ‘서(書)’부분에 공헌한 자 20여명이 모여 ‘단청동호회(丹靑同好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15].
그림 6. 구도의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 「초서지가(草書之歌)」(좌), 「추풍(秋風)」(우)
Figure 6. The 2nd Chosŏn Art Exhibition Work 1923, Sosho no Uta(left) Aki no Kaze(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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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주 한시를 지었다. 퇴계 이황의 서적을 읽고 자신의 출신 지역의 학맥과 퇴계 학통과의 관련을 초서체와 행서체를 섞어 쓴 필적을 남기고 있다(工藤武城, 1936: 61). 벼루 수집가였던 구도는 어느 날 퇴계가 쓰던 벼루를 구하고서, “책상 곁에 놓고 아침 저녁으로 애용”할 정도로 애착을 갖고 있었다(工藤武城, 1940: 3). 그는 그것으로 「퇴계가 아끼던 벼루에 대한 감상(題李退溪遺愛硯)」[16]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칠언절구의 한시를 남겼다(工藤武城, 1936: 61).
그림 7. 퇴계가 아끼던 벼루에 대한 감상(題李退溪遺愛硯)
Figure 7. Poem about Toegye’s favorite ink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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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에서 퇴계의 학문이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구도는 유학자적 취미라 할 만한 여유를 식민지 조선에서 즐겼는데, 그 자신은 유학자 중에서 퇴계 이황에 대해서만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오직 “퇴계의 학문만이 쉼 없이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도왔다”고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유학자에 대한 존경을 드러낸 그였지만 결코 조선유학자 일반이 아니며, 조선에 끼친 유교적 문화와 윤리 모두를 긍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의학방면의 탐색’에서 언급한 조선 특유의 범죄 문제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구도는 조선 특유의 범죄, 즉, 조선이라는 ‘지방적’ 범죄의 원인으로서 “예부(預夫=兒童婚)·예부(預婦=幼女婚)의 조혼, 매매혼(賣買婚), 사역혼(使役婚), 비녀(婢女), 유교 중독 등 여자의 인격무시, 이혼의 불가능 등이다”라고 하였다(工藤武城, 1933: 219). 한마디로 그는 ‘조선의’ 유교 문화와 관습에 따른 영향’이라고 그는 본다.
  • 이러한 사회병의 증상을 초래하는 원인은 조선 특유의 관습과 풍속, 즉 특종의 결혼방식·조혼·이혼의 불가능, 여자의 인격무시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회악에 대하여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단지 윤리만으로 이를 억압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유교 특히 주자학파의 보급이 가장 완전한 조선에서 세계에 유(類)가 없는 이런 종류의 범죄와 같은 현상을 보이는 것만 봐도 그 효과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工藤武城, 1933: 211)

즉 구도는 유교의 가르침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지역의 유교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 『조선 특유의 범죄 남편살해범의 부인과학적 고찰』이었다. 책에서는 가장 근본적으로 “부인생리(婦人生理)의 지식을 보급하고 국가조직의 단위인 혼인생활을 생리적인 도리에 따르도록 함에 있다고 믿는다”라고 끝맺고 있다. 이것은 조혼이 남편살해라는 범죄로 이어졌으며, 거기에는 조선의 유교적 원리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구도는 전공인 부인과 지식은 물론이고 유교적 교양 및 인문학적 견식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유교 및 불교가 조선의학에 끼친 영향」이라는 글에서 유교가 조선의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함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진보와 추이에 대해서는 닫혀있으며, ‘독창적인 점이 하나도 없음’과 동시에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여 ‘완전히 화석화 되어’버렸다고 보았다(工藤武城, 1911). 이 부분도 앞서 『조선 특유의 범죄 남편살해범의 부인과학적 고찰』에서 그가 조선의 유교문화를 비판한 점과 맥을 같이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를 앞세우는 것은 다만 ‘내선융화(內鮮融和)의 표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강해수, 2004: 239).
『일본의 교육정신과 이퇴계』라는 책의 서문에서, 구도는 주자학을 국가 지도정신으로 채택한 조선은 예의, 형식, 명분을 더욱 고조함으로써 치국의 방편으로 삼았으나, ‘곡학아세의 부패한 유학자’와 ‘붕당(朋黨)의 싸움’을 양성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형식도덕의 완고하고 협소(頑陋)한 모양을 이루어 폐해가 백출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진단하였다(工藤武城, 1934: 13). 유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화석화되고 정체화된 ‘조선의 유교문화의 병폐’를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유학적 계보에 나타난 구도의 학맥에서 언급한 시습관(時習館)의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참된 주자학, 실제적인 학문을 살려 보자는 실학당의 입장과 유사한 점을 읽을 수 있다.
구도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소장한 ‘퇴계초상(退溪肖像)’에 나타난 이미지와 관련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유교의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문인적 이미지가 아닌 젊고 강인하며 ‘엄격하고 무인적(武人的)’인 이미지로서의 일본적 유교(최재목, 2008: 13)를 지향한 점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뜨뜻미지근한 유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충분히 일본의 국수에 동화된 국민정신 국민도덕을 계발하고 함양해 온 황도적 유도(皇道的儒道)’로 대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高橋亨, 1939: 27). 왜냐하면 퇴계에 대한 구도의 관심과 언급은 오직 ‘교육칙어(敎育勅語)’와 관련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퇴계의 서적을 읽고 쓴 「독이퇴계집(讀李退溪集)」[17]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면, 퇴계의 영향이 일본에 들어와 그것이 일본정신에 주조된 ‘교육칙어’를 통해서 다시 조선을 새롭게 회생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보였다.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8. 독이퇴계집(讀李退溪集)
Figure 8. Reading Toegye’s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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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일본의 교육정신과 이퇴계』(1934년)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일 것이다.
  • 다행스럽게 조선의 십팔유현(十八儒賢) 가운데 빼어난 퇴계의 학통이 일본에 들어왔고, 여기에 타이야(退野)와 토야(東野)가 새로운 생명을 담아서 교육성교(敎育聖敎, ‘교육칙어’를 뜻함-인용자)를 이루었다. 이것이 팔도 방방곡곡의 민중을 구하고 계림(鷄林)을 회생시키는 바탕이 된 것이다[18](工藤武城, 1934: 14).

이 말을 시로 나타낸 것이 「독이퇴계집」이다. <교육칙어>의 정신은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국의 ‘국체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며, 그것을 ‘도울 신민을 양성’하는 것을 기본바탕으로 삼는다. 이것을 소위 ‘황도정신’이라 부르며, 그 황도정신 위에 유교적 덕목들을 올려놓은 것으로 교육칙어는 형성되어 있다. 구도는 여름철 더위를 이기는 방법에 대하여 ‘어제(御製, 천황이 지은 글-인용자)를 삼가 읊으면서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천직에 힘쓸 뿐’(工藤武城, 1917: 74)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천황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부인과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구도가 <교육칙어>에 대한 얼마만큼의 존경과 열심을 갖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는지는 다음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 나는 교육칙어가 세상에 나온 이러한 경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무한한 감사로 여기고, 매일 아침 이를 배독하는 일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영국과 미국에 가면 영어로 번역하고, 프랑스에 있으면 불어로 번역하고, 독일에 있으면 독일어로 번역하여 그 국민에게 읽혀주었다. 그들도 장래에 일본 국민이 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장래 세계는 반드시 일본의 황도(皇道)에 의해 통일되는 시대가 올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 신념하에 매일 아침 국어의 칙어를 배송하고 다음으로 조선어와 중국어로 하고 끝나면 세계의 대표언어인 영어, 불어, 독어로 배송한다(工藤武城, 1936: 53-54 밑줄은 인용자).

심지어 구도는 ‘라틴어’번역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명동의 로마가톨릭교회의 뮈텔 신부에게 도움을 청한 적도 있었다(工藤武城, 1936: 54). 뿐만 아니라 불란서동호회(佛蘭西同好會)에 가입한 것으로 보아 ‘불어’에 대한 관심도 드러내었다(매일신보, 1931.1.30).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구도 역시 일본적 유교, 즉 황도유교(皇道儒敎)에 동조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퇴계의 학풍이 일본 및 구마모토의 학통에 끼친 역사적 사실은 틀림없는 것이나, 구도가 퇴계를 필요로 한 것은 식민지 조선의 국민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한 정책인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필요성에 동조한 결과이다.
퇴계와 관련된 구도의 언설은 결코 순수하게 퇴계를 찬양하고 있다기보다, ‘조선의 방방곡곡의 민중을 구하고 조선을 회생시킬’, ‘거룩한 가르침’(聖敎)인 「교육칙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정책에 순응시키고자 한 의도에서 나왔다. 그가 총력전 체제로 이어지는 비상시국에 ‘황도정신에 기초하여 유도(儒道)의 진흥을 도모’하고자 설립된 <조선유도연합회>에 상무이사(常務理事)로 이름을 올린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매일신보, 1941.12.18).
의학 방면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구도는 남편살해와 같은 조선 특유의 범죄가 일어나는 원인으로 ‘조혼’과 ‘여자의 인격무시’를 들었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조선의 ‘남성’중심 사회를 비판한다. 나아가서 이러한 조선사회의 문화·관습에 영향을 끼친 것은 결국 ‘주자학’이라 규정하고, 주자학적 유교 문화의 조선사회는 ‘독창적인 것이 전혀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의 논리적 귀결로써, 그는 독창적이고 세계적인 문화·학술은 일본화된 유교(황도유교)라고 보았고, 이것을 조선인들에게 주입하고자 하였다. 구도의 황도유교적 이해는 조선사회가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 ‘천황’의 지배하에 들어가야 된다는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 여성의 남편살해가 ‘일본 내지(內地)에 가까울수록 적다’라는 구도의 묘한 논리와 연결된다. 결국 ‘황국신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조선 여성은 조선 남성에게 몸과 마음을 맡길 것이 아니라, ‘교육칙어’를 내면화하여, 천황에게 순종과 복종을 바칠 것을 강요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황조신(皇祖神)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을 제신(祭神)으로 삼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의 천좌제(遷座祭)와 관련해서 올린 축문에 분명히 드러난다. “신의 가호가 맑은 거울 속에 있듯(神守如在明鏡中), 광채가 팔도를 비춤에 막힘이 없으리(光照八道無障塞)”라는 축문의 일부를 보면, 구도는 ‘황실의 신(神)이 조선국을 보호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橫田康, 1926: 17). 또한 1929년에 그가 역원으로 활동한 「동민회(同民會)」에서는 ‘동민(同民)정신의 함양과 부식’을 위해 ‘동민총서’가 발간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의학상에서 내선(內鮮)의 교섭’을 논하면서 아마테라스오미가미와 함께 경성신사(京城神社)에 모신 두 신, 오오아나무치노가미(大穴牟遲神)와 스쿠나히코나노가미(少彦名神)를 조선의학과 일본의학의 공통된 의조(醫祖)로 역설하면서 ‘일본과 조선은 원래 한 가족이다(桑槿元來是一家)’라고 하였다(工藤武城, 1929: 서문, 50).
이렇듯 구도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정책에 자신의 부인과학 지식과 황도유교를 교묘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의료보국(醫療報國)’과 ‘문교보국(文敎報國)’에 협력하였던 인물이었다. 그가 조선에 와서 행한 퇴계 관련 모든 활동은 퇴계가 ‘교육칙어’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퇴보적이고 형식적이며, 완고하고 왜소한 유교문화 탓에 조선의 회생은 어렵다고 보았다. 그 대안은 오직 ‘황도정신’으로 새롭게 주조하는 것이었다. 황도정신으로 만들어진 교육칙어만이 조선을 회생시킬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의 퇴계 선양은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4. 맺음말

구도 다케키(工藤武城)는 1905년 조선에 건너와 경성부인병원(京城婦人病院) 산과부인과 의사로서 뿐만 아니라, 재조일본인 사회의 유지로서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비중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연구는 그의 의학 부분에만 집중이 되어 왔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가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구도의 ‘의학’과 ‘황도유교’의 관련성에 집중하여 논의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구도는 경성부인병원 의사로서 ‘의학’관련 분야만이 아니라 ‘비의학’분야를 포함하여 280편 이상의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글쓰기는 ‘의학·의료’, ‘재조일본인 유지’, ‘저술·문예’활동 관련으로 구분되며, 이를 통하여 그는 조선문화의 ‘유전(遺傳)’을 바꾸고자 하였다.
둘째, 구도는 의사로서 조선의 부인들이 처한 환경에 대하여 동정적인 입장을 보여주었고, 최신 부인과학적 지식을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였다. 유교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남성중심 사회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병원비 할인 및 부인과의 의학지식 전달에도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대표적인 『조선 특유의 범죄 남편살해범의 부인과학적 고찰』등에서 보인 통계와 비교 자료를 활용한 그의 설명 방식에는 모순이 적지 않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위생’, ‘분만’, ‘인구’, ‘아동’, ‘우생’, ‘산아제한’ 등의 소재를 다루는 그의 글을 종합하면, 그는 결국 ‘일제의 이익’편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본의 ‘부국강병’을 위한 방편으로써 ‘우량아’를 보호하며, 일제를 향한 충군애국의 ‘황국신민’을 많이 생산하는데 시선이 향해 있었다.
셋째, 구도는 ‘천황중심·국가주의’를 건학정신으로 삼은 세이세이코(濟濟黌) 출신이며 또한 그의 가계는 퇴계를 모범으로 삼는 구마모토(熊本) 실학당의 치국안민·이용후생·실천궁행적인 학문경향의 계보를 잇는다. 따라서 그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사상조류를 동시에 이어 받았다. 이러한 유교적 이해의 경향은 부인과 의사라는 그의 직업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여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었던 그가 조선의 남존여비로 인한 여자의 인격무시, 부인의 생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결혼정책 등의 병폐를 모두 조선의 완고·고루(頑陋)한 유교 문화에 돌리는 것은 결국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조선의 유교문화에 부인과 의사라는 전문적 지식을 통해서 메스를 대었던 것은 구도의 ‘의학’과 ‘황도유교’의 관련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 특유의 범죄 남편살해범의 부인과학적 고찰』과 같은 타이틀은 언뜻 보면 조선부인의 잔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남성우월주의로 인한 어긋난 조선의 남성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동시에 ‘조선부인’이 고루한 유교문화의 ‘남성’중심에서 탈각하여 근대적 합리적 사회인 일본의 ‘천황’지배하에 진입해 가야 함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구도는 ‘내선일체’를 수월하게 추진하는 최적의 중개물로서 퇴계라는 표상을 활용하여 조선인을 회유하고자 하였다. 그 핵심은 바로 ‘황도정신’에 입각한 일본적 유교 즉 ‘황도유교’로 조선의 유교문화를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천황중심’이라는 제도와 ‘교육칙어’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하여 조선민족의 ‘정신적 유전자’를 개량하여 일제의 문명적 틀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구도는 ‘국가주의적 의식’이 강한 구마모토 출신으로 청·일, 러·일 전쟁 시기에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이런 분위기와 정신적 바탕 위에서, 당시 일제가 추진하던 식민지 조선 개발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며 혜택을 충분히 누렸다. 일제가 추진하던 ‘황국신민화’·‘내선일체’라는 기획 안에서 그의 의료 및 의학 활동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구도는 흥미롭게도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적지 않은 글들을 남겼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일제의 보이지 않는 종교 통치의 아젠다에 붙들려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다음 기회로 돌린다.

Notes

1) 구도 다케키는 이하 ‘구도’로 표시한다(단, 각 장과 절의 시작 부분 등 필요시에는 풀네임을 사용). 황도유교(皇道儒敎)는 ‘황도유도(皇道儒道)’또는 ‘황도유학(皇道儒學)’으로도 불렸다(정욱재, 2009: 228).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유교’, ‘유도’, ‘유학’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구도는 일제강점기 피식민지 국가의 국호를 ‘조선 특유의 범죄’또는 ‘한국부인 연구’ 등의 제목에 나타나듯 ‘조선’과 ‘한국’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도 기본적으로 ‘조선’을, 직접적 인용이나 필요에 따라 ‘한국’으로 사용하였다.

2) 구도의 양행(洋行) 기간 동안 경성부인병원은 나가사키 의학전문학교 후배로 1913년에 조선에 온 사카이 이치로(酒井一郞)가 대신 병원에 근무하였다(朝鮮新聞社編, 1935: 210). 그 후, 사카이는 경성 영락정(永樂町: 현, 중구 저동)에 병원(酒井婦人科病院)을 개설하는 한편 경성의사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阿部薰編, 1935: 377).

3) 『조선급만주』는 그 전신인 『조선(朝鮮)』까지 포함해서 34년간이나 발행된 식민지 조선의 최장수 종합잡지이다. 1908년 3월 창간된 『조선』은 1912년 1월(통권 47호)부터 잡지명을 『조선과 만주』로 개제하여 1941년 1월(통권 398호)까지 발간되었다. 『조선』의 초기 편집주간을 맡았던 기쿠치 겐죠(菊池謙譲)는 구마모토(熊本) 출신이며, 동향 출신으로 대표적인 우익의 한 사람인 도구토미(德富蘇峰)가 경영하는 민우사(民友社)와 <國民新聞>특파원으로 언론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후 동향 출신 아다치 겐조(安達謙蔵, 1864~1948)가 국수주의 단체인 구마모토 국권당(熊本國權党)을 조직하고 <한성신보(漢城新報)>를 창간한 이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킬 때 가담한 인물이다. 아마도 구도 다케키가 『조선급만주』라는 잡지에 글을 싣게 된 계기에는 같은 구마모토 출신이라는 연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임성모, 2007: ⅷ-ⅸ; 최혜주, 2008; 84-85).

4) 구도의 ‘비의학’부분과 관련해서는 『朝鮮佛敎』(朝鮮佛敎社)에 많은 글을 싣고 있는데, 불교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5) <조선총독부관보>에 따르면 구도 다다스케는 1911년 8월 30일에 총독부 소속으로 서임되었고(제303호), 1912년 6월 7일에 휴직 하였다(제535호). 또한 변호사 명부는 1912는 10월 21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등록하였다(제70호).

6) 세이세이코의 삼강령(三綱領)이란, ‘윤리를 바르게 하고, 대의를 밝힌다’(正倫理明大義). ‘염치를 중히 여기고, 원기를 떨친다’(重廉恥振元氣), ‘지식을 연마하고, 문명에 힘쓴다’(磨知識進文明). 참고(鹿島浩, 1912)

7) 에도(江戶) 중기의 熊本藩의 6대 번주(藩主)인 호소카와 시게가타(細川重賢, 1721-1785)가 문무양도의 인재등용을 위해 1755년에 설립한 번의 학교.

8) ‘구마모토 국권당’결성의 중심인물은 삿사토모후사(佐々友房), 아다치 겐조(安達謙蔵), 후루쇼 가몬(古荘嘉門)이다.

9) 그의 아들인 키노시타 히로지(木下広次, 1851-1910)는 교토제국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낸 인물로 그의 부인은 구도 다케키의 숙모(즉, 어머니의 妹)이다.

10) 한석진(1868-1939)은 한국 장로교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목사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다. 그는 주체성이 강하여 “한국인 교회”로 불리는 安洞敎會(혹은 安國洞敎會)의 초대 목사이기도 했다. 이 “安洞敎會”는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감화를 받은 김창제(金昶濟), 박승봉(朴勝鳳)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교회였으며, 훗날 김교신 등의 한국 무교회주의자 모임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이덕주, 1988: 161-162; 노평구, 2001: 275; 2002: 17)

11) 『朝鮮特有の犯罪 本夫殺害犯の婦人科学的考察』에서 구도는 ‘근대 범죄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탈리아의 체자레 롬브로조(Cesare Lombroso)의 학설을 많이 언급하며 설명하고 있다. 롬브로조의 ‘선천성 범죄’의 특징은 위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 ①정신·신체가 남자형에 유사 ②월경이상·골격·연부조직의 기형 ③좌우비대칭 ④성욕상태의 이상 등을 구도는 들고 있다.

12) 구도는 일본의 연 출생아 150만 가운데 死産이 10%에 해당하는 15만 명에 이른다고 하였고, 특히 범죄적 유산이 많음을 걱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工藤武城, 1923: 10-15; 1927: 43-49 참고.

13) 이와 관련해서는 홍양희, 2013: 605-608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구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14) 구도의 이러한 주장은 미국의 여성 사회개량가인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 1883-1966)의 산아제한 운동의 영향과 함께 1920-30년대 개인주의와 경제적 빈곤의 문제로 산아제한 담론이 제기된 점, 그리고 일본의 유아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점 등이 그로 하여금 양질의 인구증산을 주장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요지의 글들은 工藤武城, 1922; 1923; 1927; 1930a; 1930b; 1930c; 1931 등이 있다.

15) <매일신보>(1922.1.17.)에 의하면, ‘단청동호회’는 ‘조선예술계에 공헌한 자들의 집합’이라고 한다. ‘조선예술계에 공헌한 자들’이란 <조선미술전람회> ‘서(書)’부분에 당선된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시필(試筆)하기도 하였다.

16) 같은 시가 다른 곳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데, 처음 나온 시기는 1925년 11월의 「교육칙어의 원천과 조선」 (工藤武城, 1925)에서 나왔으며, 다시 1934년 9월에 출판된 『일본의 교육 정신과 이퇴계』의 권두에 사진으로 실려 있다. 위의 사진은 『일본의 교육정신과 이퇴계』에 실린 것이며 원문과 번역은 인용자가 따로 쓴 것이다. 1925년에 언급된 시는 다음과 같다. “硯池湧出退溪流 滾滾今猶不暫休 何幸四民蒙德澤 垂倫王道及千秋”

17) 이 시에 구도는 작은 글씨로 ‘양야(兩野)는 오츠카 타이야(退野)와 모토다 토야(東野)를 말하며, 퇴계의 학문을 높였다. 모토다는 메이지 천황 때, 시강직을 받들어 교육칙어를 기초하였다’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부상(扶桑)’은 전설에 ‘해가 돋는 동쪽 바다’이며, 그 나라를 ‘동쪽 바다 속에 있다는 상상의 나라’로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보이며, ‘優詔’는 ‘교육칙어’를 나타낸다. 그리고 ‘계림(鷄林)’은 원래 경주(慶州)의 옛 이름이며, 신라의 다른 이름으로써,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조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된 「퇴계가 아끼던 벼루에 대한 감상(題李退溪遺愛硯)」과 마찬가지로, 1925년에 처음 쓴 시와 약간의 글자 차이가 있다. 1925년에는 1행에 ‘퇴계수주박상심해(退溪水注搏桑深海)’로 되어있고, 나머지는 동일하다.

18) 퇴계와 구마모토 실학당과 관련해서는, “오츠카 타이야, 요코이 쇼난, 소위 구마모토 실학당의 계보에 이어지는 모토다가 이퇴계를 존경했다 하더라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있고 나서의 이야기다”(井上厚史, 2010: 66)라고 한 것은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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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田甲, 「儒教より観たる内鮮関係の二三例」, 『朝鮮』 86 (1922), pp. 138-144.

松田甲, 「教育に関する勅語と李退渓」, 『文教の朝鮮』 62 (1930), pp. 97-106.

井上厚史, 「近代日本における李退渓研究の系譜学」, 『総合政策論叢』 18 (2010), pp. 61-83.

川端源太郎, 『京城と内地人』 (京城: 日韓書房, 1910).

青柳綱太郎, 『朝鮮統治論』 (京城: 朝鮮研究会, 1923).

青柳綱太郎, 『大京城』 (京城: 朝鮮研究会, 1925).

Park Jin-Kyung, “Husband Murder as the ‘Sickness’ of Korea: Carceral Gynecology, Race, and Tradition in Colonial Korea, 1926-1932” Journal of women's history 25 (2013), pp. 11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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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Jin-Kyung, “Bodies for Empire: Biopolitics, Reproduction, and Sexual Knowledge in Late Colonial Korea” JKorean J Med Hist 23 (2014), pp. 21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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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부록1
부록1-①
구도 다케키(工藤武城)의 ‘의학’관련 목록 Takeki Kudoh List of medical science
No 제목 출전(발행) 년도
1 古代希臘女科学的知識ノルンドシャウ 『中央婦人科学雑誌』 (中央婦人科学会) 1904.8
2 子宮筋繊維腫性線腫ノ組織的及臨床的研究 『長崎医学専門学校研瑶会雑誌』 (長崎医学専門学校研瑶会) 1905.10
3 『婦人之養生』(1版) 京城婦人病院 1907
4-10 韓国婦人の研究(7회) 『朝鮮』(2호-8호)日韓書房 1908.4-10
11 卵巣皮様嚢腫ノ組織発生ノ研究 『長崎医学専門学校研瑶会雑誌』 (長崎医学専門学校研瑶会) 1910.4
12 生化学より観たる恋愛 『朝鮮』(41호)(朝鮮雜誌社) 1911.7
13 姙産婦の亡者を弔ふ 『朝鮮及満州』(53호) 1912.6
14 『婦人의 調攝』 京城婦人病院 1912
15 『婦人之養生』(2版) 京城婦人病院 1913
16 生化学より観たる亞米利加問題 『朝鮮及満州』(72호) 1913.7
17 『助産婦學講義錄』 京城婦人病院 1914
18 医学より観たる男女の別 『朝鮮及満州』(82호) 1914.5
19 生物学より観たる国と人と其未来 『朝鮮公論』 (통권14호) 1914.5
20 基督の眼に暎じたる生殖観 『朝鮮及満州』(84호) 1914.7
21 婦人科的に観察せる日本の将来 『朝鮮公論』 (호24호) 1915.3
22 性的方面より観らろ内官 『朝鮮及満州』(100호) 1915.11
23 女子同性慾の猖獗に就て 『朝鮮及満州』(102호) 1916.1
24 科学者より女子に対する要求 『朝鮮公論』 (36호) 1916.3
25 芸妓検黴問題-拾粋士の意見:女の生殖器は非常に複雑だ(工藤武城) 『朝鮮公論』 (40호) 1916.7
26 再大和民族ニ於ケル分娩率ニ就テ 『醫學中央雜誌』 (237호) 醫學中央雜誌社 1916.7
27 長谷川新總督に対する声:衛生機関の問題 『朝鮮及満州』(113호) 1916.11
28 生物学より見たる世界各国人種の優勢 『朝鮮及満州』(145호) 1919.7
29 各国人口増殖策と我国の婦人病 『朝鮮及満州』(155호) 1920.5
30-42 婦人に関する法医学(13회) 『警務彙報』(182.183.185.187호) 1920.7-12
43-44 婦人科より観たる婦人の犯罪(2회) 『警務彙報』 (199호) 1921.12
45 手術に対する婦人の態度 『朝鮮及満州』(170호) 1922.1
46 産兒制限の可否ー婦人病学の立場より考察してー 『朝鮮及満州』(173호) 1922.4
47 『婦人之養生』(3版) 京城婦人病院 1922
48 施療産院の設立を提唱す 『朝鮮社会事業』(3권7호) 1923
49 婦人科より見たるラジウムの概論と歴史 『朝鮮及満州』(190호) 1923.9
50-66 難産과 安産(17회) <毎日申報>(毎日申報社) 1923.11.25-1924.3.30
67 性慾變調による女子の残虐性 『朝鮮及満州』(213호) 1925.8
68 自然に親しみ自然に抵抗するが衛生の要諦 『文教の朝鮮』 1926.8
69 女性犯罪としての堕胎 『朝鮮及満州』(232호) 1927.3
70 『婦人之養生』(4版) 京城婦人病院 1928
71 婦人生殖器の反射現象 『朝鮮及満州』(250-251호) 1928.9-10
72 『医学上より観たる内鮮の関係』 京城:同民会出版部 1929
73-74 女教員保姆の妊娠中の心得(2회) 『文教の朝鮮』 (41-42호) 1929.1-2
75 医学より見たる日本の人口問題 『朝鮮社會事業』(제7권제3호) 1929.3
76-82 朝鮮特有の犯罪-朝鮮婦人の本夫殺害の婦人科學的考察-(7회) 『朝鮮』(166-7호,169-172호,175호) 朝鮮総督府 1929.3-12
83 妊娠と結核 『朝鮮及満州』(256호) 1929.3
84-85 売笑行為の婦人科学的観察(2회) 『警務彙報』 (277-278호) 1929.5-6
86 婦人科学上より見たる女性観 『朝鮮及満州』(266호) 1930.1
87-89 朝鮮婦人嬰兒殺害の婦人科学的考察(3회) 『朝鮮』(177-179호) 1930.2-4
90 世界の種々相と遺伝学 『朝鮮及満州』(270호) 1930.5
91 児童愛護の根本問題 『朝鮮社会事業』(8권5호) 1930
92 女子参政権と分娩率 『朝鮮及満州』(271호) 1930.6
93 ヒステリーについて 『朝鮮及満州』(271호) 1930.6
94 医学より観たる人口調制 『朝鮮社会事業』 (8권9호) 1930
95 婦人科より見たる女子の競技 『文教の朝鮮』 (61호) 1930.9
96 婦人科学より観たる真の児童愛護 『朝鮮社會事業』 (9권5월호) 1931
97-100 암과 라듸움(4회) <毎日申報> 1931.4.3-8
101 人類の逆淘汰 『朝鮮及満州』(284호) 1931.7
102-103 底野迦(2회) 『医文学』 1931.8월, 10월
104 生命と健康 『朝鮮及満州』 (290호) 1932.1
105 遺伝と疾病 『朝鮮及満州』(291호) 1932.2
106-107 消毒法に就て(上·下) 『朝鮮及満州』(292호, 294호) 1932.3월,5월
108 初生兒に対する注意 『朝鮮及満州』(299호) 1932.10
109 胎児の異状 『朝鮮及満州』(301호) 1932.12
110 人工栄養法 『朝鮮及満州』(303호) 1933.2
111-117 朝鮮特有の犯罪本夫殺害犯の婦人科学的考察(7회) 『朝鮮』(213호-219호) 朝鮮総督府 1933.2-8
118 『朝鮮特有の犯罪本夫殺害犯の婦人科学的考察』 京城婦人病院 1933.3
119 朝鮮特有犯罪の医学観 『朝鮮総攬』朝鮮総督府 1933.3
120-122 衰老亞細亞の現症と豫後(3회) 『朝鮮及満州』(317호-319호) 1934.4-6
123 医学から観た往古の日鮮関係の一考察 『朝鮮及満州』(323호) 1934.10
124-135 内鮮医学と世界医学との交渉(12회) <京城日報> 1935.3.26.-4.16
136 朝鮮医薬としての大小便等 寺田壽夫編, 『隨筆朝鮮』下卷, 京城雜筆社 1935.10
137 婦人科より見た母性保護問題 『朝鮮及満州』(336호) 1935.11
138 保健思想の普及に就て 『朝鮮都市問題會議錄』 1936
139 都市問題と医学 『朝鮮公論』(280호) 1936.7
140 社会婦人科学の観点より朝鮮婦人の犯罪を論ず 『朝鮮』 (257호) 1936.10
141 外国人の観たる朝鮮婦人 『同胞愛』(15권제3월호) 1937.3
142 都市保健問題と市民農園 『朝鮮及満州』(353호) 1937.4
143-144 医薬の祖神少名昆古那尊と古代の内鮮関係(2회) 『朝鮮及満州』(354-355호) 1937.5-6
145 母と乳 『同胞愛』(15권7월호) 1937.7
146-147 支那を毒せる英国の阿片政策(2회) 『朝鮮及満州』(362-363호) 1938.1-2
148 醫學坐右銘 『鮮滿醫學時報』(2권1호) 鮮滿醫學時報社 1938
149-151 断種法を縛る是非(3회) <京城日報> 1938.4.21.-1938.4.23

(목록은 필자가 수집하여 정리한 것임)

부록1-②
구도 다케키(工藤武城)의 ‘비의학’관련 목록 Takeki Kudoh List of Non-Medical Science
No 제목 출전(발행) 년도
1 夏の夜 『朝鮮』(6호)(日韓書房) 1908.8
2 名士の朝鮮観 『朝鮮』(7호)(日韓書房) 1908.9
3-4 景福宮(2회) 『朝鮮』(23호-24호)朝鮮雜誌社 1910.1-2
5 美神の都ワイマ-ルに於ける両詩聖 『朝鮮』(34호)朝鮮雜誌社 1910.12
6 歌劇タンホイゼル 『朝鮮』(35호)朝鮮雜誌社 1911.1
7 儒教及び佛教が朝鮮医学に及ぼせる影響 『朝鮮』(37호)朝鮮雜誌社 1911.3
8 印度の夏 『朝鮮』(42호)朝鮮雜誌社 1911.8
9 民団自治政と公民の覚悟 『朝鮮及満州』(69호) 1913.4
10 面白い列国の気分 『朝鮮及満州』(77호) 1913.12
11 北米合衆国民族問題の真相 『朝鮮及満州』(78호) 1914.1
12 民族の植民的移動に関する科学的所見 『朝鮮及満州』(80호) 1914.3
13 雜感数題 『朝鮮及満州』(81호) 1914.4
14 人類の誇大妄想狂 『朝鮮公論』(16호) 1914.7
15 夏の思い出:宙璃翡湖畔の緑蔭と牛津大学校庭の涼風 『朝鮮及満州』(85호) 1914.8
16 世界戦と日本に於ける外国語の将来 『朝鮮及満州』(87호) 1914.10
17 世界大戦と日本の科学 『朝鮮公論』(19호) 1914.10
18 文字を透して見たる佛蘭西 『朝鮮及満州』(89호) 1914.12
19 グー論 『朝鮮及満州』(90호) 1915.1
20 剪燈夜話 『朝鮮及満州』(96호) 1915.7
21 人生を如何に観ろか: 人生は苦楽相半ばするものである 『朝鮮及満州』(97호) 1915.8
22 釈尾旭邦を論ず 『朝鮮及満州』(100호) 1915.11
23 科学者の眼に映ずる嫉妬観 『朝鮮公論』 (34호) 1916.1
24 夏と女 『朝鮮公論』 (41호) 1916.8
25 菊花小話 『朝鮮及満州』(112호) 1916.10
26 暑中と吾輩 『朝鮮及満州』(122호) 1917.8
27 独逸の春と情趣 『朝鮮及満州』(131호) 1918.5
28 朝鮮騒擾事件と官民の所感 『朝鮮及満州』(142호) 1919.4
29 人大殺戮 『朝鮮及満州』(147호) 1919.9
30-31 터-, 헐버트 君에게與 (2회) <每日申報> 1919.9.8-9
32 国旗不掲揚問題:反日本的風潮 『朝鮮及満州』(148호) 1919.10
33-34 平井法学士のヤソ教論を読む(2회) 『朝鮮及満州』(149-150호) 1919.11-12
35 文緑役と朝鮮のヤソ教 『朝鮮及満州』(152호) 1920.2
36-37 若返り法如是観(2회) 『朝鮮及満州』(166-167호) 1921.8-9
38 釈尾君と君の主宰する雑誌(十五周年記念호発刊に対し今昔の感なき能はず) 『朝鮮及満州』(168호) 1921.11
39 先師汲世老大師の事ども 『朝鮮及満州』(178호) 1922.9
40-41 国際語之構成及其主張(2회) 『朝鮮及滿洲』(180호-181호) 1922.11-12
42 最近の思想運動に対する一考察 『朝鮮及満州』(198호) 1924.5
43 私の禮拝 『朝鮮佛教』(3호) 1924.7
44 差別と平等 『朝鮮佛教』(4호) 1924.8
45 桂門担板會湯席上吟(次韻 工藤担雪) 『朝鮮佛教』(5호) 1924.9
46 横着な居候 『朝鮮佛教』(6호) 1924.10
47 第五回(六回)担板會席上口占 『朝鮮佛教』(8호) 1924.12
48 第九回担板會席上口占 『朝鮮佛教』(12호) 1925.4
49 わたくしの幸福論 『朝鮮佛教』(13호) 1925.5
50 佛国人の朝鮮統治観(工藤訳) 『朝鮮及満州』(211호) 1925.6
51 奉祝朝鮮神宮鎮座祭 『朝鮮佛教』(18호) 1925.10
52 教育勅語の源泉と朝鮮: 李退渓-退野-東野-明治天皇 『朝鮮佛教』(19호) 1925.11
53 心中論 『朝鮮及満州』(216호) 1925.11
54 社会教化上広く人に読書を薦めんと思ふ良書 『朝鮮社會事業』(4권1호) 1926.1
55-56 体験と感話 有難し(2회) 『朝鮮佛教』(21-22호) 1926.1-2
57 春祝朝鮮神宮遷座祭 『朝鮮神宮紀』 (横田康編, 國際情報社) 1926.2
58 怪を怪とせずんば怪自ら消ゆ 『朝鮮佛教』(30호) 1926.10
59 忘我忘機の愛硯趣味 『朝鮮佛教』(35호) 1927.3
60 聖観世音菩薩奉安開眼 『朝鮮佛教』(36호) 1927.4
61 如何にして能率を増進し得るや 能率増進 『朝鮮社會事業』(5권6호) 1927.6
上に関する経験
62 アイタアイタの三昧境に入れ 『朝鮮佛教』(39호) 1927.7
63 在鮮名士の勉強法と運動法 『朝鮮公論』(173호) 1927.8
64 朝鮮仏教の将来 『朝鮮佛教』(45호) 1928.1
65 幾ら暗黒を汲出しても光明は得られぬ 『朝鮮佛教』(45호) 1928.1
ー福道茶話ー
66 観音如是観 『朝鮮佛教』(50호) 1928.6
67 菊の話 『朝鮮及満州』(251호) 1928.10
68 私の心身休養法 『朝鮮社會事業』(6권10호) 1928.10
69 泉石を眺めつつ工藤ドクトルと語る 『朝鮮及満州』(252호) 1928.11
70 思想善導に関する方策(朝鮮に於て) 『朝鮮社會事業』(6권11호) 1928.11
71 達磨如是観 『朝鮮佛教』(55호) 1928.12
72 蛇漫談 『朝鮮及満州』(255호) 1929.2
73 花祭偶語 『朝鮮佛教』 (60호) 1929.5
74 二千万民衆に信仰を与へよ 『朝鮮佛教』(65호) 1929.10
75 朝鮮と云ふ所は 『朝鮮及満州』 (263호) 1929.10
朝鮮の回顧
朝鮮の有望なる事業
朝鮮の将来と希望
76 花卉を愛する心 『朝鮮及満州』(270호) 1930.5
77 百萬を如何に使ふか 『朝鮮公論』 (231호) 1932.6
78 朝鮮の貢女 『朝鮮及満州』(302호) 1933.1
79 濱田玄達先生の思出話 『産科と婦人科』(診断と治療社) 1934.2
80 工藤武城先生校閲並序 『日本の教育精神と李退渓』高田誠二, 藤原一毅(朝鮮事情協会) 1934.9
81 三典之歌 『朝鮮佛教』(103호)朝鮮佛教社 1934.10
82 ミューテル大僧正 『隨筆朝鮮』上卷, 京城雜筆社 1935.10
83-88 机邊一瞥(6회) 『京城雜筆』 (47호-52호) 1935.12-1936.5
89 勅題海上雲遠 『朝鮮佛教』(118호) 1936.1
90 わが人生訓 『京城雜筆』 京城雜筆社 1936.1
91-102 やまと歌(12회) 『京城雜筆』 京城雜筆社 1936.1-12
103 撫硯閑話 『朝鮮の教育研究』 (94호) 朝鮮初等教育研究会) 1936.7
104 凉台漫語 『京城雜筆』 京城雜筆社 1936.9
105 教育勅語渙発当時を億ふ 『文教の朝鮮』(136호) 1936.12
106-107 時局と人口問題(2회) 『朝鮮及満州』(359호-360호) 1937.10-11
108-110 支那事変を語る座談会(3회) 『朝鮮及満州』(360호-362호) 1937.11~1938.1
111-115 早婚に因る朝鮮の社会相(5회) 『同胞愛』(16권1,2,4,10,12호) 1938.1-2월, 4, 10, 12
116-118 支那及び支那人を語る座談会(3회) 『朝鮮及満州』(363호-365호) 1938.2-4
119 古提灯 『京城雜筆』(236호) 1938.10
120 送寺田雅兄北京行(漢詩) 『京城雜筆』(238호) 1938.12
121 金剛山 『觀光朝鮮』(2권6호) (경성:일본여행협회조선지부) 1939
122 支那譯日本文閑話 『京城雜筆』 (250호) 1939.12
123 朝鮮の女奴隷制度と其現代に及せる世相 『조선철도협회회誌』 (19권11호) 1940
124-126 朝鮮假名交文小史(3회) 『京城雜筆』(255호-257호) 1940.5-7
127-132 机邊一瞥(6회) 『京城雜筆』 (262호-267호) 1940.12-1941.5
133 随筆 香港の思ひ出 『文教の朝鮮』(196호) 1942.1
134 名士にものを聴く 『朝鮮公論』(348호) 1942.3

(목록은 필자가 수집하여 정리한 것임)

부록2
부록2-①
구도 다다스케(工藤忠輔)의 논저 List of Published Articles by Kudoh Tadasuke
N0 제목 출전(발행) 년도
1 朝鮮に於ける法律教育のプログラム 『朝鮮』(43호) 1911.9
2-3 新領土に於ける教育家と法曹(2회) 『朝鮮』(44호-45호) 1911.10-11
4-5 法律統一史論(2회) 『朝鮮及満州』(47호-48호) 1912.1-2
6 朝鮮に於ける墳墓と法律 『朝鮮及満州』(67호) Feb 1913
7 法律上の墳墓 『朝鮮及満州』(68호) 1913.3
8 国際司法より見たる朝鮮 『朝鮮及満州』(72호) 1913.7
9 加州に於ける日本人の社会 『朝鮮及満州』(74호) 1913.9
10 波瀾統治に関するガイゼルの演説とタイムスの評論 『朝鮮及満州』(75호) 1913.10
11 人種問題に手古摺らぬ国家は無い 『朝鮮及満州』(78호) 1914.1
12 独逸に於ける植民地司法統一運動 『朝鮮及満州』(79호) 1914.2
13 新しい人の新しい文芸修業 『朝鮮及満州』(80호) 1914.3
14 朝鮮に於ける公益法人に就て 『朝鮮及満州』(83호) 1914.6
15 在鮮母国人の迷信を排斥す 『朝鮮及満州』(84호) 914.7
16 メートル科, 金属線電燈及保険金不受領問題 『朝鮮及満州』(85호) 1914.8
17 法律上より見たる男女の区別 『朝鮮及満州』(86호) 1914.9
18 学問と芸術の自作自給」 『朝鮮及満州』(88호) 1914.11
19 京城と都市的設備:私の注文は鎌倉式に 『朝鮮及満州』(98호) 1915.9
20 文献以外にも朝鮮を研究せよ 『朝鮮及満州』(100호) 1915.11
21 白耳義外交文書第二巻を読みて 『朝鮮及満州』(101호) 1915.12
22 大正五年の年頭に臨み寺内伯に注文す:総督が悪いか家来が悪いか 『朝鮮及満州』(102호) 1916.1
23 真面目に支那語支那文を研究せよ 『朝鮮及満州』(104호) 1916.3
24 旭町の三人斬性慾倒錯狂 『朝鮮及満州』(109호) 1916.8
25 暑中と吾輩(僕の銷夏法は名著を読む) 『朝鮮及満州』(122호) 1917.8

(목록은 필자가 수집하여 정리한 것임)

부록2-②
구도 시게오(工藤重雄)의 논저 List of Published Articles by Kudoh Shigeo
N0 제목 출전(발행) 연도
1 朝鮮不良少年論 『朝鮮公論』(36호) 1916.3
2 鮮人の騒擾観 『朝鮮公論』(통권73호) 1919.4
3 仏教的社会主義宣伝運動の必要 『朝鮮公論』(통권77호) 1919.8
4 京城の社会事業に就ての私の考 『朝鮮社会事業』(9호) 1923
5 佛教と社会主義 『朝鮮佛教』(2호-4호) 1924.6~8
6-8 魂의 問題(3회) 每日申報 1924.8.15-17
9 漸滅せんとする帝國に物価調節の一策 を建ず 『朝鮮及満州』(206호) 1925.1
10 成佛の時節 『朝鮮佛教』(10호) 1925.2
11 佛徒の眼の着け所 『朝鮮佛教』(11호) 1925.3
12 佛教本来の面目を発揮せよ 『朝鮮佛教』(13호) 1925.5
13 『三十年前の朝鮮』 バド·ビショップ著;工藤重雄訳,京城:東亜経済時報社, 1925
14 京取と仁取の将来に就て 『朝鮮公論』(147호) 1925.6
15 我等の標語 『朝鮮佛教』(14호) 1925.6
16 錯覚世の中 『朝鮮佛教』(28호) 1926.8
17 取引所論 秘密은 不可, 一切公開가 當然 私 議的合倂極反對 <東亞日報> 1926.8.4
18 無趣味の趣味 『朝鮮佛教』(35호) 1927.3
19 朝鮮を救ふは資本に非ず技術なり 『朝鮮社会事業』(5권6호) 1927.6
20 朝鮮仏教の将来 『朝鮮佛教』(45호) 1928.1
21 『露西亜帝政没落史:ロマノ‐フ家最後とボ ルセビキ‐未来物語』 世界興亡史論(18권) 平凡社, ヱドモンド·ヱ-ワルシュ著;工藤重雄訳 1932
22 御親閱拜受感想 『文教の朝鮮』(167호) 1939.7

(목록은 필자가 수집하여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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