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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5(1); 2016 > Article
대한의원 본관의 건축 과정과 건축 계획적 특성

Abstract

This paper explores the introduction process of Daehan Hospital from Japan as the modern medical facility in Korea, and the architectural planning characteristics as a medical facility through the detailed building process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The most noticeable characteristic of Daehan Hospital is that it was designed and constructed not by Korean engineers but by Japanese engineers. Therefore, Daehan Hospital was influenced by Japanese early modern medical facility, and Japanese engineers modeled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on Tokyo Medical School main building which was constructed in 1876 as the first national medical school and hospital. The architectural type of Tokyo Medical School main building was a typical school architecture in early Japanese modern period which had a middle corridor and a pseudo Western-style tower, but Tokyo Medical School main building became the model of a medical facility as the symbol of the medical department in Tokyo Imperial University. This was the introduction and transplantation process of Japanese modern ‘model’ like as other modern systems and technologies during the Korean modern transition period.
However, unlike Tokyo Medical School main building,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was constructed not as a wooden building but as a masonry building. Comparing with the function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its architectural form and construction costs was excessive scale, which was because Japanese Resident-General of Korea had the intention of ostentation that Japanese modernity was superior to Korean Empire.

1. 서론

한반도에 근대적인 의료 시설이 도입된 것은 1876년 개항과 함께 개항장에 설립된 일본인 중심의 외국인 병원이었고, 점차 한성과 평양 등 주요 도시에 선교 병원이 설립되면서 확산되어 갔다. 1885년 미국 선교회의 도움으로 조선정부에서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한 이후(이경록 외, 1998: 2-7; 신동원, 2005: 2-6), 1899년 내부의원(內部醫院), 1905년 적십자병원 등을 설립하면서 국립 의료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조우현·박종연·박춘선, 2002: 27-36). 이러한 의료 시설의 도입 과정에서 병원 시설은 주로 기존의 한옥을 개조해서 사용하였고, 구 세브란스 병원 등 극히 일부의 사립 병원만이 근대적인 건축형식으로 신축되었다(한동관 외, 2011: 400-404). 이때의 구 세브란스 병원을 비롯한 근대적인 건축형식의 병원은 안타깝게도 현존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기록도 많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906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에 개원한 대한의원은 본관 건물이 현존하고 있으며[1],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건축 도면과 함께 관련 기록이 상당수 남아 있기 때문에 근대 초기에 도입된 병원 시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의원은 통감부의 주도로 이전의 관립 의료 시설인 광제원, 적십자병원, 의학교, 그리고 일본인 소유의 한성병원을 통합하여 새로운 식민지적 성격의 관립 의료시설 겸 의학교로 설립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의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을 거쳐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이어지며, 국립 의료 시설 겸 의학 교육 시설의 기능을 해 왔다. 한국 근대 이행의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화 의도에 따라 설립된 배경을 갖고는 있지만, 대한의원은 한국 의학사에서 근대적인 의료 시설이 도입된 가장 이른 시기의 물리적인 실체로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건축사 분야에서도 대한의원은 식민지적 근대로 이행하는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에서 일본식 근대적 건축기술의 도입으로 건축된 대표적인 시설로서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통감부의 주도로 설치된 탁지부 건축소에서 시행한 가장 이른 시기의 건축공사로서, 국가 주도의 본격적인 일본식 근대 건축이 도입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한국 의학사와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대한의원이지만, 대한의원의 건축물에 대해서는 주로 통사에서 개괄적인 건축 개요를 서술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의학사에서는 한국 근대 의학사와 서울대 병원사 등에서 건축과정과 건축물의 현황이 기술되어 있고(서울대학교병원, 1993: 83-84; 신동원, 1997: 344, 354-357; 박윤재, 2005: 190-191; 황상익, 2013: 729-733; 서울대학교병원사 편찬위원회, 2015: 62 등), 건축사에서는 한국 근대건축사 또는 한국 근대 병원건축사 등에서 도면과 사진으로 확인되는 건물의 규모와 평면 공간의 배치 등이 기술되고 있다(윤일주, 1972: 83-85; 오종희·권순정, 2003: 32-34; 한동관 외, 2011: 404-407 등). 이러한 연구의 한계는 지금까지 몇몇 사진 자료 외에는 대한의원의 건축적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대한의원의 건축도면이 공개되었고[2], 이를 통해 대한의원의 건축적인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의료 시설에 대한 건축사적 연구는 의료 시설의 기능이 물리적인 건물로 구현되는 양상을 확인하는 연구이며, 시대에 따른 건축적 변화를 통해 의료 시설의 기능 변화와 그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건축적 특성과 변화를 통해 의료 시설의 시대적 특성과 변화 양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대한의원 본관의 계획과정과 공사과정을 통해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료시설인 대한의원의 건축적 특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연구의 대상은 현존하고 있는 대한의원 본관으로 한정하여 건축적 특성을 살필 것이고, 설계와 공사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는 대한의원 전체로 확대하여 함께 다루겠다. 대한의원은 본관을 비롯하여 병실, 의학교, 관사, 기타 부속시설 등을 함께 계획하였기 때문에 설계와 공사의 과정을 전체 대한의원 공사의 맥락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또한 연구의 범위는 1906년 대한의원의 설립을 준비하던 시기, 그리고 1906년에서 1908년까지의 공사기간을 포함하여 대한의원 본관의 건축적 특성을 확인하겠다.
대한의원의 건축 형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한의원의 건축을 계획하고 시행한 인물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선행연구와 비교하여 대한의원의 건축과 관련된 인물을 살펴 본 후에, 이들이 대한의원 건축을 계획하고 공사를 시행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다. 그리고 일본에서 대한의원과 같은 기능의 건축이 도입되고 정착되는 과정을 확인하고, 대한의원의 건축 계획 과정에서 모델로 삼은 일본의 건축 사례를 살펴 대한의원의 건축적 기원을 확인하겠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의원 본관이 의료 시설로서 계획된 건축적 특성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대한의원 건축 계획의 주체

1) 탁지부 건축소의 조직

조선시대의 건축조직은 공조(工曹)의 선공감(繕工監)이었으나, 갑오개혁 이후 왕실을 담당하는 궁내부와 정부를 담당하는 내각으로 국가조직이 분리되면서 국가의 건축활동 역시 두 기관에서 각각 나누어 담당하였다. 내각에는 공무아문(工務衙門) 건축국(建築局)을 비롯한 각부에 건축과 수리를 담당하는 기구가 조직되었다가(이규철, 2014: 61), 1906년 9월 “건축공사의 시행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계산하고, 건축공사 사무의 통일도를 높이기 위해 전문적인 공사집행기관을 특별히 만들 필요가 있어” 탁지부에 건축소를 신설하고 내각의 건축기구를 통합하였다(度支部建築所, 1909: 1). 이는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해 탁지부에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太郞)가 부임해 오고, 이어서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 정부의 여러 시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탁지부 건축소의 건축공사 현황(표 1)을 살펴보면, 각부청사와 같은 행정시설보다는 관사, 경찰서, 재판소, 감옥 등의 시설이 집중적으로 신축되거나 증·개축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관사는 제1차 한일협약과 1907년 7월의 한일신협약에 따라 정부 각부와 그 소속기관에 새로 부임한 외국인 고문관, 그리고 일본인 행정직과 기술직 관원을 위한 시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경찰서, 재판소, 감옥 등은 대한제국의 경무, 사법, 행형의 업무를 1907년 이후 통감부에 이관하면서 식민 통치를 위해 점차 확충된 시설들이다. 따라서 탁지부 건축소는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식민 통치 시설을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에 설치한 건축 조직으로 볼 수 있다.
표 1. 탁지부 건축소의 건축공사 현황 (1905-1909.6., 단위: 원)
Table 1. Construction Work by Takjibu Geonchukso(度支部 建築所) (1905-1909.6., unit: Won)
시설 1905 1906 1907 1908 1909
각부 청사 - 13,050.000 68,099.370 15,970.510 63,688.400 160,808.280

관사 4,906.500 50,589.405 135,409.627 154,402.010 79,150.460 424,458.002

재판소+감옥 - 40,459.060 - 34,312.630 77,514.665 152,286.355

경찰서 1,200.000 - - 15,408.620 275,322.560 291,931.180

학교 - 46,119.480 61,632.000 9,482.000 15,837.650 133,071.130

의원 8,487.670 7,133.630 198,198.463 36,428.775 5,092.256 255,340.794

기타 시설 3,955.000 57,939.575 96,543.933 135,418.220 71,856.707 365,713.435

잡공사 11,631.050 27,763.710 17,341.250 9,244.480 42,636.945 108,617.435

500원 미만 4,124.710 11,610.956 18,958.842 29,515.395 11,866.619 76,076.522

34,304.930 254,665.816 596,183.485 440,182.640 642,966.262 1,968,303.133

* 『건축소사업개요 제1차』의 “집행공사 일람” 내용을 시설에 따라 연도별로 정리한 표이다(度支部建築 所, 1909: 91-114).

* 기타시설은 광통관, 인쇄국, 홍삼과, 재무청사, 권업모범장, 연와제조소, 창고, 세관청사 등을 합한 것이다.

* 500원 미만 항목 이외의 시설은 모두 500원 이상의 공사에 대한 내역이다.

* 1905년과 1906년의 기록은 건축소가 신설되기 이전에 내각 각부에서 시행한 공사현황이다.

이러한 탁지부 건축소의 성격은 조직구성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906년 9월 탁지부 건축소가 처음 만들어지면서, 탁지부 협판 유정수를 건축소장으로 임명하고 한국인 사무관과 기사(技師)를 두었다. 그러나 보촉 사무관(補囑事務官) 오타 토쿠타로(太田德太郞)와 보촉 기사(補囑技師) 쿠니에다 히로시(國枝博)를 함께 임명하여 처음부터 일본인 사무관과 기사가 건축소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이후 1908년 1월에는 탁지부 차관 아라이 켄타로(荒井賢太郎)가 건축소장을 겸직하면서 일본인 기술인력이 건축소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건축실무를 총괄하는 공사과장에는 기사 사카이데 나루미(坂出鳴海), 건축계장에는 기사 쿠니에다 히로시, 영선계장(營繕係長)에는 기사 카츠마타 로쿠로(勝又六郞)가 임명되었다[3]. 사카이데 나루미는 일본의 대장성 기사 출신으로[4], 세관공사부(稅關工事部) 공무국장(工務局長)을 겸하면서 대한제국 정부의 건축공사와 항만 시설의 공사를 함께 책임지고 있었다. 카츠마타 로쿠로 역시 대장성 기수(技手)와 세관공사부 출신으로 토목과 건축 시공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건축소에서는 건축공사의 시행과 감독의 업무를 담당하였다[5]. 또한 동경제국대학 건축과와 대장성 속(屬) 출신인(朝鮮公論社, 1917: 309)[6] 쿠니에다 히로시는 건축공사의 계획과 설계를 담당하였고, 탁지부 건축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참여했던 유일한 일본인 기술인력이다[7]. 건축계와 영선계에 속해 있던 또 다른 기사는 조한철(趙漢喆)과 마부치 유타카(馬淵豊)로서 각각 통역관과 일본 체신부 기사 출신이기 때문에(국사편찬위원회, 1972: 805; 統監官房人事課, 1909: 附錄5), 건축 실무의 주된 업무보다는 보조 업무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탁지부 건축소에서 시행한 건축공사는 쿠니에다 히로시가 전체 계획과 세부 설계를 책임지고, 이를 바탕으로 카츠마타 로쿠로가 건축공사의 시공과 감독을 책임지는 체계에 의해 시행되었다(표 2).
표 2. 탁지부 건축소의 조직도 (1908.1.)
Table 2. Organization of Takjibu Geonchukso(度支部 建築所) (1908.1.)
建築所長: 荒井賢太郎 (度支部 次官 兼)
工事課長: 技師 坂出鳴海 庶務課長: 事務官 八木親豊
營繕係長: 技師 勝又六郞 建築係長: 技師 國枝博 經理係長: 事務官 太田德太郞 庶務係長: 事務官 朴正銑
技師 趙漢喆, 技師 馬淵豊 技手 十六名, 雇 十六名 主事 三名, 雇 三名

(內閣記錄課, 1908: 223; 度支部建築所, 1909: 224)

2) 대한의원의 건축 계획과 관련된 일본인 기술인력

통감부 설치 이후 당시 한성에 있던 한성병원, 적십자병원, 광제원, 의학교 부속병원 등을 통합하려는 논의를 시작하여, 1906년 7월 이후에는 대한의원을 설립하여 기존의 의료기관을 통합하고자 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육군 군의 총감인 사토 스스무(佐藤進)가 대한의원의 설립을 주도하였고, 그는 7인의 ‘대한의원 창립위원회’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협의하여 실행하였다[8]. 여기에는 탁지부 건축소의 건축계장인 기사 쿠니에다 히로시가 유일한 건축 기술자로서 포함되어 있었다[9]. 대한의원의 건축계획과 시공을 담당할 탁지부 건축소의 대표 자격으로 대한의원 창립위원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1906년 7월에 내한한 사토 스스무가 대한의원의 창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세부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지만, 대한의원의 건축에 대한 설계 계획안은 이미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7월 5일에 사토 스스무를 방문해서 “모범 대병원의 설계도와 부속서류”를 보여주었고 사토 스스무의 생각보다도 “다소 큰” 규모였다는 기록(松下童兒, 1906: 15)이 확인되며, 같은 7월에 사토 스스무가 신축 병원에 대하여 “본원 및 병실, 기타 병원에 속한 직원과 간호부 등의 숙사 건축에 소요되는 총 예산이 약 20만원 이상에 달하고, 이에 대한 부지는 적어도 7, 8천평을 요하며 그 도안(圖案)은 대략 결정되어” 있다고 언급한 기록(時事新報, 1906: 19)도 확인된다. 이는 대한의원의 본관과 병실, 부속 시설에 대한 규모가 사토 스스무가 대한제국에 오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가 진행되어 건축도면까지 만들어져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즉, 늦어도 1906년 6월에는 대한의원의 설계 초안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고, 다만 부지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배치계획만 미완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또한 쿠니에다 히로시가 대한의원 창립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그가 대한의원의 건축계획을 총괄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1905년 동경제국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일본 대장성의 임시직인 속(屬)을 거쳐, 1906년에 탁지부 건축소 기사로 부임한 실무의 경험이 전무한 신참 기술관료였다. 더구나 대한의원은 병원과 의학교의 기능이 복합된 근대적인 시설로서, 부지 약 3만평에 30만원의 비용이 소요되는 당시로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대형 건축사업이었다[10,11]. 따라서 쿠니에다 히로시가 1906년 7월부터 대한의원 창립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활동을 하였고, 1906년 9월 이후에는 탁지부 건축소의 건축계장으로서 대한의원 건축계획의 책임을 맡아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경력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후속 건축 계획의 진행에서 다른 조력자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대한의원의 설계 책임자에 대하여 선행연구에서는 “야바시”(황상익, 2013: 725, 734), 또는 “건축소 기사 야바시 겐끼찌”(Wikipedia, 2015.12.25.)라고 언급하고 있다[12]. 야바시 켄키치(矢橋賢吉)는 일본 대장성 대신관방 영선과기사 겸 대장성 임시건축부 제1과장으로서(印刷局, 1907: 81, 213)[13], 탁지부 건축소에서는 촉탁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統監府, 1910a: 34). 야바시 켄키치의 대한제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1906년에 대한의원 건축공사 임시감독으로서 대한제국에 건너갔다. 그 다음해에도 방문했다.”라는 출처미상의 기록만 확인된다(Wikipedia, 2015.12.25.). 이 기록에 따르면, 야바시 켄키치는 탁지부 건축소의 촉탁으로서 1906년의 ‘대한의원 부지지균공사’와 1907년의 대한의원 본관, 병실, 부속 공사의 감독관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14]. 그런데 공사의 감독관은 일반적으로 설계를 담당한 기관에서 파견하고, 공사를 진행하면서 필요한 추가 도면의 작성이나 설계변경 등을 설계 담당자와 협의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그리고 탁지부 건축소의 기술직 관료인 공사과장 사카이데 나루미, 영선계장 카츠마타 로쿠로, 그리고 건축계장 쿠니에다 히로시는 모두 대한제국에 오기 전에 대장성의 대신관방 영선과와 임시건축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탁지부 건축소가 일본 대장성 건축조직의 하위조직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영향 관계에 있었다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탁지부 건축소 설립 이전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대장성 건축조직에 의뢰하여 설계를 진행하였고, 실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야바시 켄키치 등이 탁지부 건축소 소속으로 공사를 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야바시 켄키치가 대한의원의 설계를 직접 담당했다는 확증은 없지만, 대한제국의 재정기관인 탁지부의 건축조직이 아니라 일본의 재정기관인 대장성의 건축조직에서 대한의원의 건축계획을 시행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대한의원의 실시설계 단계에서는 대한의원 신축의 전반적인 의사결정을 담당하고 있는 대한의원 창립위원회의 검토와 승인이 필요했다. 대한의원 창립위원 7인 중 한 명인 탁지부 건축소 건축계장 쿠니에다 히로시는 대한의원의 신축공사와 관련된 사항을 일주일에 두 차례 열린 대한의원 창립위원회에서 다른 위원들과 의견을 조율하여 결정하였다[15]. 그는 일본 대장성의 설계 초안을 바탕으로 부지의 선정과 이후의 배치 계획 및 설계 변경 등 대한의원 신축의 실시설계를 진행하였고, 그가 책임지고 있는 탁지부 건축소의 건축계에서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대한의원과 관련된 건축도면을 작성했을 것이다[16]. 또한 대한의원의 실시설계는 대한의원의 설계를 주도한 일본 대장성의 건축조직에서 파견된 탁지부 건축소 촉탁 야바시 켄키치의 도움 또는 지시를 받았을 것이고, 공사의 진행은 야바시 켄키치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다.
한편, 1906년 야바시 켄키치가 탁지부 건축소의 촉탁으로 위촉된 이후, 1908년부터는 대장성 대신관방 영선과 과장 겸 임시건축부 부장인 기사 츠마키 요리나카(妻木頼黄)가 탁지부 건축소의 공사고문으로 위촉되었다[17]. 이미 일본 정부의 재정 담당 기관인 대장성의 건축조직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던 탁지부 건축소에, 대장성 건축조직의 수장인 츠마키 요리나카와 건축 설계를 책임지고 있는 야바시 켄키치가 각각 고문과 촉탁으로 직접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또한 탁지부 건축소의 건축계장인 쿠니에다 히로시는 츠마키 요리나카, 야바시 켄키치와 함께 동경제국대학 건축과 동문이면서, 야바시 켄키치와는 같은 기후현(岐阜県) 출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학연과 지연의 관계는 일본 대장성 건축조직이 탁지부 건축소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늠케 한다. 대한의원 건축설계에 있어서도 직책상 담당자는 건축소 건축계장인 쿠니에다 히로시이지만, 야바시 켄키치와 츠마키 요리나카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장성 건축 조직의 주요한 설계 담당자인 야바시 켄키치는 1906년 대한의원 계획 초기부터 설계의 자문과 건축공사의 감독관으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츠마키 요리나카 역시 대장성 건축조직의 수장으로서 대한의원의 건축 계획에 관여해 오다가 1908년부터는 공사고문으로서 이후의 건축에 직접 자문을 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3 대한의원 본관 신축공사

1) 부지의 선정

통감부의 설치 이후, ‘시정개선’의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의료 분야의 개선책으로서 대한의원의 설치를 추진하였다. 먼저 1906년 4월 9일 <제3회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내부 소관의 광제원과 학부 소관의 의학교 및 부속병원을 적십자병원에 통합하기로 결정하였고(金正明, 1962: 178-179), 6월 25일 <제6회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는 일본 육군 군의 총감 사토 스스무에게 장소의 선정, 병원의 건립, 병원의 조직 등을 위임하기로 하였다(金正明, 1962: 220-221). 이에 따라 사토 스스무는 7월 4일 내한하여 탁지부 건축소 기사 쿠니에다 히로시를 포함한 대한의원 창립위원회를 조직하여 병원의 건축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統監府, 1906: 2; 松下童兒, 1906: 15)[18]. 7월 12일 <제8회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는 적십자병원을 확대하는 계획 대신에 ‘대한병원(大韓病院)’이라는 새로운 병원을 신축하는 것으로 변경하였고(金正明, 1962: 262-263), 통감부와 대한제국 정부 사이에 병원 부지에 대한 이견으로 병원 신축의 계획이 지연되고 있었다(金正明, 1962: 264-266)[19].
병원 부지가 확정된 시기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7월 중에는 결정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은 1906년 7월에 한성부 기사 김한표(金漢杓)가 측량한 대한의원 부지인 함춘원(含春苑)과 마등산(馬登山) 일대의 측량도로서[20], 대한의원의 부지를 확정한 이후 부지의 소유관계와 지형 등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상 부지의 서쪽에는 창경궁이 위치하고 있고, 북쪽에는 1900년에 경모궁(景慕宮) 자리로 이전한 궁내부 소속의 영희전(永禧殿)이 위치하고 있다[21]. 대한의원의 부지로서 측량된 지역은 민유지와 관유지가 붉은색과 갈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앙의 관유지가 마등산이고, 서북쪽의 관유지가 함춘원이며, 마등산과 창경궁 사이에는 책응소(策應所)라는 군부(軍部) 소관의 시설이 존재하고 있다. 함 춘원, 마등산, 책응소 등의 관유지만으로는 대한의원의 부지로서 부족하기 때문에(佐藤進, 1906: 1), 주변의 민유지를 9월에 25,655.80원의 비용으로 매입을 하고, 본격적인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다[22]. 1906년의 대한의원 부지 측량도와 1908년의 대한의원 부지평면도(그림 2)를 비교해 보면, 부지 중앙의 마등산과 그 북쪽의 민유지에 대한의원의 본관과 병실이 계획되었고, 책응소의 위치에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가 계획되었다.
그림 1. 마등산 실형도(馬登山實形圖)
Figure 1. Surveyed map of Madeu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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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08년 대한의원 부지 평면도
Figure 2. Site Plan of Daehan Hospital in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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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의원 공사의 예산과 일정

대한의원 부지가 확정된 이후, 탁지부 건축소의 건축계장 쿠니에다 히로시는 야바시 켄키치와 함께 일본 대장성의 기본계획에 따라 대한의원 신축공사의 구체적인 시행 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대한의원 신축공사 예산으로 10만원을 책정하였지만 세부계획을 세우면서 20만원이 증액되어 1906년 8,797원, 1907년 284,769원으로 총 293,566원의 예산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度支部, 1910: 27, 245)[23]. 대한의원 본관, 병실 7동, 관사를 비롯한 기타 부속건물의 신축에 소요된 최종 공사비는 예산을 다소 초과하여 308,133.316원이 지출되었다(度支部建築所, 1909: 45-46)[24]. 표 1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대한의원 신축공사비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탁지부 건축소에서 시행한 건축공사 예산의 10.4%에 해당되며[25], 단일시설로서는 탁지부 건축소의 최대 공사비가 투입된 대형 건축사업이었다.
대한의원 신축공사는 9개의 세부 공사로 구분되어, 각각을 전문 시공업체에 하청을 맡기고 탁지부 건축소에서 이들 공사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표 3)[26]. 세부 공사의 내용을 확인해 보면, 1906년에서 1908년까지 이어진 대한의원 신축공사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축 부지를 정리하여 전체 부지의 지형을 완성하는 ‘대한의원 부지 지균공사(大韓醫院敷地地均工事)’, 병실 부분의 건축공사인 ‘대한의원 병실 기타공사(大韓醫院病室其他工事)’, 본관 부분의 건축공사인 ‘대한의원 본관 기타신축(大韓醫院本館其他新築)’, 병실과 본관을 연결하는 복도와 부속시설, 그리고 관사와 기숙사 등을 건축하는 ‘대한의원 문위소, 간호부 기숙사, 부속식당, 욕실 및 복도, 제1, 2호 관사 신축공사(大韓醫院門衛所看護婦寄宿舍附屬食堂浴室及廊下第一,二號官舍新築工事)’ 등이다. 그리고 나머지 공사는 주요 공사의 후속 공종으로 전기, 설비, 토목 공사 등이다.
표 3. 1906-1908년 대한의원 신축공사의 내용
Table 3. Contents of the Daehan Hospital Construction in 1906-1908
공사명 계약일 기공일 준공일 공사기간 청부금액(원) 청부인
大韓醫院敷地地均工事 1906.09.05 1906.09.05 1907.03.31 208일 7,133.630 阿川重郞
大韓醫院病室其他工事 1907.01.28 1907.01.28 1907.09.30 246일 69,842.140 石井周平
大韓醫院本館其他新築 1907.03.25 1907.03.25 1908.05.31 433일 85,045.558 大倉粂馬
大韓醫院構內古屋模樣替工事 1907.03.14 1907.03.14 1907.05.02 50일 4,500.000 金田春吉
大韓醫院蒸氣溫水供給調理給水工事 1907.04.25 1907.04.25 1907.05.30 36일 17,246.728 高田愼藏
大韓醫院門衛所看護婦寄宿舍附屬食堂浴室及廊下第一,二號官舍新築工事 1907.07.09 1907.07.09 1907.10.31 115일 16,166.100 金田春吉
大韓醫院官舍敷地土工工事 1907.08.16 1907.08.16 1907.10.10 56일 984.000 金田春吉
大韓醫院溫水裝置附屬工事 1907.09.04 1907.09.04 1908.05.30 269일 629.500 高田愼藏
大韓醫院表門外三廉新築工事 1907.09.23 1907.09.23 1908.06.15 266일 3,784.937 藤田菊太郞

(度支部建築所, 1909: 94)

1906년 9월부터 시작된 대한의원 공사는 1907년에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統監府, 1906: 3), 8월 준공 예정이었던 병실 공사가 석재 공급의 문제와 고종 퇴위 이후의 의병 문제로 1개월 지연되어 9월 30일에 준공되었고[27], 이후 본관 공사는 더욱 지연되어 1908년 5월에 준공되었다. 대한의원 본관과 같은 시기에 비슷한 형식과 규모로 신축된 의정부 청사가 대한의원 본관보다 169일이나 짧은 기간에 완공된 것과 비교해 보면[28], 대한의원 본관 공사는 5개월 이상 공사가 지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대한의원 본관의 공사는 지연되고 있었지만, 병실 공사가 완공되었기 때문에 병실 건물에 병원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29] 1907년 11월부터 병원 업무를 시작하였다(統監府, 1910b: 166)[30]. 본관 공사의 지연으로 본관 공사의 부속공사는 1908년 10월까지 계속되었고, 개원식은 1908년 10월 24일에 개최되었다(統監府, 1910b: 166)[31].

3) 대한의원 본관의 설계변경

대한의원 창립의 실무 책임을 맡은 사토 스스무는 처음의 대한의원 본관 계획으로 “본관 2층에 의학교 생도의 교장(敎場)을 설치”하고자 했지만, “교장은 별동으로” 독립시키는 계획으로 “설계상의 큰 변화”가 있었다(佐藤進, 1906: 1-2). 병원과 학교의 기능이 복합된 건축을 계획하였다가, 학교 기능을 독립시키고 병원 기능 중심의 건축 으로 설계를 변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08년에 완공된 대한의원 본관의 평면은 여전히 병원건축보다는 학교 건축에 적합한 평면 형식이고[32], 2층에는 5개의 교실이 표기되어 있다. 이후 1909년 5월에 대한의원 의학교가 신축되기 전까지 약 1년간은 의학교의 기능을 겸하는 평면 구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3]. 이는 대한의원의 초기 계획이 학교 건축의 평면 형식에 병원과 학교의 기능을 적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의학교 신축으로 대한의원 본관의 설계변경을 하면서도 건물의 구조는 변경하지 않은 채 공간 구성만 변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토 스스무가 언급한 대한의원 본관의 초기 계획안에 대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대한의원 의학교의 평면과 대한의원 본관의 평면을 비교해서 대한의원 계획의 초기안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의학교의 평면은 중앙부와 양 단부로 구분하여 기능이 나누어져 있다. 1층 중앙 부분은 교수 및 학생의 공간과 일반사무 공간이고 2층 중앙은 강당으로, 모두 관리 및 공용의 공간이다. 양 단부는 좌우 대칭이며 1층과 2층도 같은 구성으로 교실, 기계실, 준비실이 함께 짝을 이루고 있다. 교실은 일반 강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기계실과 준비실은 실험 및 실습과 관련된 공간으로 생각된다. 즉 의학교육의 특성상 강의용 교실 이상으로 실습공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실험실습 공간은 조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채광에 가장 유리한 건물의 양 단부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한의원 본관 2층이 의학교의 기능으로 계획이 되었다면, 대한의원 의학교 건물보다 규모는 작더라도 유사한 공간구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그림 3의 대한의원 2층 평면을 살펴보면, 좌우 전면에 위치한 원장실과 고문실은 대한의원에서 중요한 공간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들 기능보다는 실험과 실습 공간으로 더 적절해 보인다. 대한의원 본관의 초기안에서는 2층 좌우에 교실과 실험 및 실습 공간이 구성되고 원장실과 고문실 등은 1층이나 2층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학교의 신축이 결정되면서 실험 및 실습 공간이 관리 공간인 원장실과 고문실로 변경된 것으로 보이고, 1909년 5월 의학교가 신축된 이후에는 교실 공간도 회의실, 서무과, 식당, 소아과 등의 공간으로 전용(轉用)되어 사용되었다[34].
그림 3. 대한의원 본관 평면도
Figure 3. Plan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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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대한의원 의학교 평면도
Figure 4. Plan of Daehan Hospital Medical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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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한의원의 부지 선정 이후에도 대한의원 본관의 배치는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은 채, 부지 지균공사가 먼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5는 대한의원 본관과 병실이 위치한 지역의 지균공사 경계를 조정하기 위한 도면으로, 지균공사가 진행중인 상황을 잘 보여준다. 도면에는 병실 북쪽 지균공사의 범위를 계획보다 넓히고, 동쪽과 남쪽은 계획보다 줄이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병실과 본관의 배치에 맞추어 지균공사의 범위를 변경하는 것으로서, 지균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시기에 대한의원의 본관과 병실의 위치가 다소 변경되어 확정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06년 7월에 부지를 확정한 이후 8월까지의 기간은 대한의원의 세부 건축계획이 만들어지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우선 전체 배치의 개략적인 계획을 세우고 전체 지형을 만드는 지균공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한의원의 세부 건축계획은 지균공사를 진행하면서 설계도면으로 만들어졌고, 본관과 병실의 배치가 확정되면서 초기의 지균공사 범위를 수정한 것이다. 대한의원 부지 지균공사는 대한의원 본관과 병실이 계획된 지역부터 시행되었고, 이와 더불어 진행된 본관과 병실의 건축 설계에 따라, 1907년 1월말에는 대한의원 병실 기타공사, 3월말에는 대한의원 본관 기타 신축공사를 차례로 시작하였다.
그림 5. 대한의원 본관 및 병실 배치도
Figure 5. Site Plan of Daehan Hospital and it’s 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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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한의원 본관 기타 신축공사

대한의원 본관은 병실보다 늦은 1907년 3월에 공사를 시작하였고, 1907년 연내에 완공하려는 목표를 초과하여 1908년 5월까지 14개월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그림 6, 그림 7)[35]. 공사 지연의 이유로는 1907년 7월의 고종 퇴위 이후 의병이 일어나 본관 공사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시기에 의정부 청사의 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어 완공된 것을 보면 의병 문제와는 관계가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36]. 오히려 여러 대형 건축사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탁지부의 건축 재정 또는 공사 인력이나 자재의 수급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탁지부 건축소는 1906년 9월에 설립되자마자 각종 청사, 관사, 학교, 경찰서, 재판소 등의 시설을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대한의원과 인쇄국 등 특수 목적의 시설도 건축하고 있었다. 특히 1907년에는 의정부 청사, 평리원, 탁지부 인쇄국, 공업전습소, 재정고문관 관사 등의 시설과 함께 대한의원을 신축하면서 벽돌과 목재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대한의원 병실 공사의 경우에도 석재의 공급에 문제가 있어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대한의원 본관 공사의 주요 재료인 벽돌은 탁지부 건축소의 연와제조소에서 공급하였는데, 1907년 4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여 초기에는 공급이 매우 부족하였다. 1907년 연와제조소에서 생산한 벽돌 1,892,996장은 대한의원, 의정부 청사, 평리원, 공업전습소, 인쇄국 등에 공급되어 재고가 거의 남지 않았고, 84만 여장으로 가장 많은 벽돌을 필요로 했던 대한의원 공사는 1907년 10월 이후에야 마지막 물량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 6. 1907년 초 공사개시 직후의 대한의원 본관
Figure 6.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After the Construction Start in Early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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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1908년 초의 공사중인 대한의원 본관
Figure 7.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Under Construction in Early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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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는 530만 장이 넘는 벽돌을 생산해서 연와제조소의 공급물량이 점차 안정적으로 되어 갔지만, 1907년 벽돌 공급의 부족은 대한의원 공사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7]. 따라서 대한의원 공사에서 먼저 착공한 대한의원 병실 기타공사는 큰 무리없이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지만, 대한의원 본관 기타 신축공사는 10월 이후에나 벽돌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체 공기의 지연은 불가피했다.
대한의원 본관의 공사는 오쿠라 쿠메마(大倉粂馬)가 경쟁입찰을 통해 도급을 맡았으며, 청부금액은 85,045.558원이었다. 구조적으로는 벽돌벽으로 하중을 지지하는 연와조(煉瓦造) 2층 건물이고, 217.222평의 규모이다(度支部建築所, 1909: 45-47). 벽체는 벽돌이지만, 바닥, 지붕, 창호 등은 목재이고, 외부의 벽체 돌림띠와 포치, 시계탑 등에는 석재 마감도 포함되어 있다. 공간 구성은 정남향인 1층의 전면에 진료실과 시험실 등을 배치하고 후면에는 사무공간을 배치하였으며, 가장 뒤쪽으로는 약국을 배치하였다. 특히 수술실과 시험실은 양쪽 단부에 돌출된 공간에 배치하여 자연광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층은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의학교 신축 이전까지 의육부의 교육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양쪽 단부에는 대한의원의 가장 높은 권력자의 공간인 원장실과 고문실이 위치하고 있고 그 주위가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중앙의 공간은 응접실과 사무공간으로 사용되었다.

4. 대한의원 본관의 건축 계획적 특성

1) 대한의원 본관의 건축적 모델

대한의원 본관의 건축에서 가장 주목되는 특징은 일본 대장성 출신의 건축 기술 인력에 의해 계획되고 공사가 진행된 점이다. 대한의원 신축공사의 실무 책임자인 쿠니에다 히로시, 전체 공사의 총괄 기획자인 야바시 켄키치, 공사 자문을 맡은 츠마키 요리나카 등은 모두 동경제국대학 출신으로 최신의 근대적인 건축 교육을 받았고, 일본의 관영 건축을 선도하는 대장성 건축기술 관료였다. 따라서 이들이 대한의원을 계획하는 데 있어 당시 일본의 유일한 관립 의학 교육시설이면서 병원시설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구 동경의학교)를 참고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근대적인 의료와 의학교육은 1861년 종두소(種痘所)를 의학소(医学所)로 개칭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관립 병원 겸 의학교의 역할을 했던 의학소는 수차례 명칭이 변화하다가 1874년 동경의학교(東京医学校)를 거쳐 1877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가 되었다[38]. 동경의학교 시절인 1876년에는 근대적인 형식의 병원과 의학교가 공부성 영선국(工部省営繕局)에 의해 건축되었다(菅野誠, 1973: 170). 병원과 의학교는 동쪽과 서쪽에 별도의 영역에 구분되어 배치되었고[39], 주변에 기숙사와 부속시설 등이 위치하였다(그림 8). 의학교의 본관은 동쪽 영역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중앙에 시계탑을 갖는 의양풍(疑洋風)의 목조 2층 건물로서 동경의학교의 상징적인 외관을 띠고 있었다(그림 9)[40]. 동경의학교 본관과 같이 의양풍의 탑을 갖는 건축 형식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마츠모토(松本)의 카이치 학교(開智学校, 1875) 이후 일본 학교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日本建築学会, 1972: 1145). 1873년 일본 문부성에서 만든 『소학교 건설도(小学校建設図)』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학교의 평면 형식은 「일자형 교사 건축도(一字刑校舎建築図, 그림 11)」로서, 카이치 학교 이후 대부분의 학교 건축에 적용되고 있었다. 동경의학교의 본관도 중복도의 일자형 평면으로 이와 같은 일반적인 학교의 평면 형식이다(그림 12)[41]. 동경의학교 본관의 경우에는 공부성 영선국에서 계획을 담당했지만, 교육시설인만큼 문부성(文部省)의 독일인 건축가 브라운이 설계와 공사 과정에 참여하여 서양풍 교육시설의 모습을 갖추었다(西村公宏, 1995: 95-96). 그러나 탑과 구루마요세(車寄) 형식의 포치(porch) 등 세부장식은 전통적인 일본 건축의 기법을 따르며 일본 의양풍 건축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藤森照信, 2009: 95-98).
그림 8. 1880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전도
Figure 8. Site Plan of the Medical Department in the University of Tokyo in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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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동경의학교(東京医学校) 본관
Figure . Main Building of Tokyo Medical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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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카이치 학교(開智学校)
Figure 10. Kaichi Elementary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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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소학교 건설도(小学校建設図)』의 「일자형 교사 건축도(一字刑校舎建築図)」
Figure 11. Linear Plan Type in Elementary School Ty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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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1880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평면도
Figure 12. Plan of the Medical Department in the University of Tokyo in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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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계탑을 갖는 학교 평면의 동경의학교 본관의 건축 형식은 대한제국의 대한의원과 대만의 적십자병원(일본 적십자사 대만지부 의원)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대만 적십자병원은 대만총독부와 대만총독부 의학교에서 운영하였고, 의학교의 부속의원으로 사용되었다. 대한의원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은 1905년 신축 당시부터 1908년 의학교 건물을 별도로 신축할 때까지 대만총독부 의학교의 교육시설로 함께 사용되었으며(福永肇, 2014: 320-323), 시계탑을 갖는 2층 건물의 형식을 갖고 있다[42]. 그런데 대한의원과 대만 적십자병원은 교육시설이 아니라 의학교와 병원을 겸하는 시설로 계획이 되었고, 이러한 기능에 대한 모델로서 동경의학교의 부속병원 대신에 동경의학교 본관의 건축 형식이 채택되었다. 일본 내에서는 동경의학교 본관의 건축 형태가 이후의 의학 교육 시설이나 병원에 적용된 사례가 없고, 동경의학교 부속병원의 평면 형식이 일반적인 병원의 건축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대만과 대한제국에서는 의학교와 병원으로 함께 사용된 시설에서 병원 시설의 전형 대신에 교육 시설의 전형인 동경의학교 본관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더구나 대만과 대한제국에서는 두 시설 모두 교육시설이 나중에 독립되면서 공교롭게도 병원 시설이 교육 시설의 전형적인 건축 형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일본 의양풍의 학교 건축으로서 계획된 동경의학교 본관의 건축 형식이 이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교육과 의료를 포함)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고, 이러한 상징의 건축 형식을 대만과 대한제국의 국립 의료시설로서 차용한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계획된 건축으로서 건축의 기능보다는 일본의 국립의료시설로서의 상징적 의미에 따라 건축 형식이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13. 대한의원 본관
Figure 13.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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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대만총독부 의학교(臺灣總督府醫學校)겸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 (왼쪽 시계탑 건물)
Figure 14. Building used the Medical School and Red Cross Hospital in Taiwan (left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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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도시샤 대학 쇼에칸(同志社大学彰栄舘)
Figure 15. Shoekan in Doshish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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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축 구조와 재료의 특성

대한의원 본관과 대만 적십자병원은 기능과 건축의 형식이 유사하지만, 건축구조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동경의학교 본관이나 대만 적십자병원은 벽체의 구조가 목조이고 지붕 위에 올려진 탑도 의양풍의 목구조이지만[43], 대한의원 본관은 벽체와 탑이 모두 벽돌조이다. 일본에서 대한의원 본관과 같이 벽체와 탑이 모두 벽돌조인 학교 건축 또는 병원건축은 1883년에 건립된 도시샤 대학 쇼에칸(同志社大学彰栄舘)이 유일하다. 건축구조가 벽돌조로 변화하면서 탑을 가진 학교건축이나 병원건축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벽돌조의 건축에서는 전체적인 규모가 증가되고 건물도 높아졌으며, 벽돌에 의한 건물 입면의 디테일이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 따라서 벽돌이라는 재료만으로도 충분히 상징성을 부여하거나 서양식 건축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벽돌조의 건축에서 탑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샤 대학 쇼에칸과 대한의원 본관과 같이 벽돌조의 건물에 시계탑이 올려지면서 이전의 목조 건축에 올려진 의양풍의 탑과는 위치와 기능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 동경의학교 본관과 같이 목조 지붕에 올려진 탑은 지붕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건물의 벽체와는 관계없이 목조 지붕 구조에 연결되어 올려져 있었다. 그래서 이 탑은 시계와 서양풍 외관 등의 장식적인 효과 외에 건축 구조적인 기능을 할 수 없었다(그림 16). 하지만 벽돌조의 시계탑은 교회 건축의 종탑과 같이 건물 전면에 위치하여, 1층부터 시계탑 상부까지 벽체가 지속되는 안정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다. 대한의원 본관의 경우에 1층의 현관, 2층의 응접실 공간 벽체가 상부의 시계탑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시계탑 벽체의 좌우에 계단실을 갖고 있어 수직 동선의 이동 통로인 건물의 코어 기능까지 겸하고 있다(그림 3, 그림 17).
그림 16. 카이치 학교(開智学校) 단면도
Figure 16. Section of Kaichi Elementary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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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대한의원 본관 단면도
Figure 17. Section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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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원의 벽돌조 구조 형식은 동경의학교 본관이나 대만 적십자병원과 비교해서 벽돌이라는 재료의 특성에 따라 보다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코어 기능을 겸한 시계탑을 통해 보다 기능적으로 완성도 높은 건축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벽돌조의 시계탑을 가진 대한의원 본관은 대한제국 정부의 중심시설인 의정부 청사보다도 큰 규모의 공사였다. 의정부 청사와 대한의원은 1907년에 벽돌조 2층의 거의 동일한 면적으로 신축되었지만, 공사 금액에 있어서는 대한의원 본관이 훨씬 큰 규모였다[44]. 대한의원 본관은 병원 시설로서 의료와 관련된 특별한 설비가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에 공사비가 다소 증가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의정부 청사에 없는 시계탑이 있었기 때문에 공사비가 크게 증가한 것이다. 또한 1908년 목조 2층의 학부(學部) 청사, 1909년 벽돌조 2층의 내부(內部) 청사와 농상공부(農商工部) 청사 등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 관청과 비교해 보아도 대한의원의 공사비가 4배 이상의 규모이다[45]. 같은 시기의 일본과 대만의 국립 의료시설이 목조 건축이었고 학부 청사와 같이 대한제국 정부의 관청 시설도 목조로 신축하는 상황에서, 대한의원 본관이 대한제국 최고의 정부 시설로 신축되는 의정부 청사보다도 1.4배 이상의 공사 규모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한의원 본관의 지붕은 아연철판이었고, 실내의 바닥은 대부분 미송(米松)이지만 외과실과 현관은 시멘트, 수술실은 대리석을 바닥 재료로 하였다(度支部建築所, 1909: 47). 철판 마감의 지붕, 시멘트와 대리석 마감의 실내 바닥 등은 대한의원 본관 이전에 일반인들이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건축 재료였고, 벽돌로 된 건물의 외벽은 명동성당이나 당시 한성의 중심지였던 경운궁 주변에서 간혹 볼 수는 있었지만 서양식 또는 이국적인 모습으로 일반인에게 비춰졌을 것이다. 이처럼 과도한 대한의원 본관의 건축 규모와 형식은 건축사적인 의미에서 대한제국에 근대건축이 도입되는 주요한 경로로 파악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근대 건축의 도입이 매우 특별한 의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선행연구에서 대한의원에 대해 평가한 것처럼 통감부 시정의 상징물로서 선진적인 일본 근대를 후진적인 조선에 시혜한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신동원, 1997: 356; 박윤재, 2005: 191).

3) 평면 및 입면의 구성과 건축 설비의 특성

일본에서 동경의학교 이후 일반적인 병원의 평면 형식은 파빌리온 플랜(pavilion plan)으로 정착이 되었다(青木正夫·新谷肇一, 1972; 新谷肇一, 1974)[46]. 동경의학교 부속병원과 같이 진료실과 병실이 정남향으로 배치되고 북쪽에 복도가 위치하여 자연광을 최대한 많이 받도록 고려한 배치 방식이다(그림 18). 19세기 후반 일본 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전기 설비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명을 주로 자연 채광에 의존하였고, 환기와 자연광 등의 위생적인 환경을 위해서도 이러한 파빌리온 플랜의 병원 건축이 일반적인 형식이었다. 그러나 대한의원 본관은 동경의학교 본관을 따라 중복도의 일자형 학교 건축의 평면 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그림 19), 병원의 기능을 위해서는 평면과 입면의 구성에서 건축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림 18. 1880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평면도
Figure 18. Plan of the University of Tokyo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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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 대한의원 본관 1층 평면도
Figure 19. First Floor Plan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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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대한의원 본관은 남향을 하고 있지만 중복도의 평면을 갖고 있어서 후면에 위치한 공간은 북향을 하게 된다. 따라서 외과, 안과, 내과, 이비인후과와 같은 진료실과 수술실, 실험실 등 조명이 필요한 공간은 모두 남향을 할 수 있는 전면에 배치하여 자연 채광에 유리하도록 배치했고[47], 비교적 조명이 덜 중요한 관리 시설은 후면에 배치하였다. 다만, 부인과 진료실은 다른 진료실과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서 후면에 배치되었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후면의 동쪽 끝에 배치하여 북쪽과 서쪽 두 면으로 채광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전면부의 배치에서도 특별히 조명이 중요한 수술실과 시험실은 두 면에서 채광을 할 수 있도록 양쪽 끝에 배치하였다.
대한의원 본관의 평면구성에서 수술실, 진료실, 시험실 등의 배치를 특별히 고려하였지만, 입면구성에서 보다 분명하게 병원시설로서의 건축 계획의 모습이 드러난다. 대한의원 본관에서 1층의 층고는 5,284mm, 2층의 층고는 4,568mm로 716mm의 차이가 있다[48]. 즉, 1층이 2층보다 716mm 높게 계획된 것이고, 이는 창문의 크기에 반영되어 1층의 창이 2층보다 높게 계획된 모습이 입면에서 확인된다(그림 21). 각 공간의 창 높이를 확인해 보면, 1층과 2층의 차이 뿐 아니라 1층의 각 공간에서도 창 높이의 차이가 확인된다(표 4). 2층의 원장실, 고문실, 교실 등의 창 높이는 모두 2,142mm인데, 1층의 진료실은 2,617mm로 475mm 더 높게 계획되었다. 또한, 후면에 배치된 부인과 진료실은 다른 진료실과 달리 측면에 2,671mm의 높은 창이 설치되어 북향의 악조건을 보완하도록 했다. 한편 전면의 양 측면에 배치된 수술실과 시험실은 2,996mm의 높은 창이 설치되어 충분한 채광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특히 수술실의 측면에는 가장 높은 3,263mm의 창이 설치되어 수술실의 특수한 기능에 따라 보다 많은 채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그림 20). 이처럼 2층에 비해 1층에 475~1,121mm나 높은 창이 설치된 것은, 대한의원 본관이 1층은 병원, 2층은 의학교라는 복합 시설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1층에는 의료의 기능을 충족하기 위한 특별한 입면구성을 계획한 것이다. 일자형의 평면이지만 입면의 구성이 달라지는 양쪽 수술실과 시험실은 전면으로 조금 돌출시켜 입면을 분절하였고, 이를 통해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입면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양쪽 단부의 높아진 입면이 자연스럽게 변화되도록 구성하였다. 이처럼 현대의 의료 시설과 비교하여 열악한 대한의원 본관의 전기 설비는 평면과 입면의 구성을 통해 자연 채광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해결하고자 했다.
표 4. 대한의원 본관의 창 높이 (단위: mm)
Table 4. Height of Windows in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unit: mm)
구분 수술실 시험실 기타 진료실 부인과 진료실 2층
창 높이 2,996 2,996 2,617 2,671 2,142
3,263 2,617 2,617

(문화재청, 2002: 139-140)

그림 20. 대한의원 본관 수술실
Figure 20. Operating Room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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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 대한의원 본관 정면도(좌)와 좌측면도(우)
Figure 21. Front Elevation(left) and Left Elevation(right)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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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에 필요한 설비로서 자연 채광 외에도 대한의원 본관에는 “각실에 환기구(レヂスター)를 설치하여 자연환기(ナチュラルベンチレーション)”가 가능한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度支部建築所, 1909: 47). 현재의 의료 시설에서 사용하는 적극적인 공조 시스템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지붕 위에 두 개의 흡출기(空気抜)를 설치하여 각 실의 환기가 가능하도록 계획한 시스템이었다(그림 22). 또한 급수 설비는 현재와 같이 중앙 공급 시스템이 아닌 각 진료실과 수술실 등에 개별 급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908년에 완공된 대한의원 본관에는 상수도 설비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그림 23과 같이 각 실에 노출된 작은 물탱크와 급수 및 배수 설비를 설치하여 진료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였다[49].
그림 22. 대한의원 본관 지붕 흡출기(空気抜)
Figure 22. Roof Ventilator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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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3. 대한의원 본관 부인과실
Figure 23. Gynecology Room of Daehan Hospital Main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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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원 본관의 신축 이후 1909~1910년경에는 대한의원 병실 서쪽에 발전소를 신축하여 전기 설비를 갖추었고[50], 1908년 서울에 상수도가 공급된 이후 1909년에는 대한의원에도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졌다[51]. 이러한 전기와 수도 등의 설비 인프라가 갖추어지면서 점차 대한의원에도 전기와 급수 설비를 활용한 보다 효과적인 의료 장치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5. 결론

이 연구에서는 현존하는 최초의 근대적 의료시설로서 대한의원이 일본을 통해 도입되는 과정을 확인하였고, 대한의원 본관 건축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의료시설로서의 계획적 특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한의원의 건축 과정에서 확인되는 가장 큰 특징은 대한의원이 일본인 기술인력에 의해 계획되고 공사가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통감부 설치 직후 대한제국의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시대적 배경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대한의원 설립 계획은 식민지 의료 정책의 일환이었고, 일본 정부의 재정기관인 대장성의 건축조직에서 구체적인 건축계획을 주도하였다. 이후 설계를 구체화하고 공사를 진행하는 실무는 대한제국 정부의 탁지부 건축소에서 담당했지만, 탁지부 건축소 역시 대장성 출신의 일본인 기술인력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대장성의 초기 계획이 발전되어 진행될 수 있었다. 대한의원 이후 탁지부 건축소는 대장성 출신의 일본인 기술인력이 그대로 남아 대한제국 정부의 건축조직을 구성하였고, 조 선총독부의 건축조직으로 이어져 한반도에 식민 통치 시설의 건축을 주도하였다. 대한의원을 통해 일본의 건축조직을 대한제국에 이식하여 식민지 건축 조직으로 정착시킨 셈이다.
대한의원은 탁지부 건축소가 시행한 단일 시설 공사에서 최대 공사비가 투입된 대형 건축사업이었다. 1906년 7월 경에 창경궁과 영희전에 면하고 있는 함춘원, 마등산, 책응소 등의 관유지를 중심으로 하는 부지를 선정하고 9월부터 토목공사를 시작하였다. 토목공사 중에도 대한의원의 실시설계와 설계변경이 계속되었고, 1907년 1월에는 병실 공사, 3월에는 본관 공사를 시작하였다. 대한의원 본관 공사는 건축 재정이나 벽돌 등의 자재 수급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어 1908년 5월까지 지속되었고, 1907년 11월에 먼저 공사가 완료된 병실 건물에서 병원 업무가 시작되었다. 대한의원 전체의 공사 일정은 매우 급하게 진행이 되었지만, 대한의원 본관은 병원과 의학교의 복합시설로서 많은 재정과 시간을 투입하여 고급 건축기술로 신축되었다.
대한의원 본관은 일본 최초의 관립 의료 시설인 동경의학교의 본관을 모델로 삼았다. 동경의학교 본관은 의학교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중복도의 일자형 평면과 의양풍의 탑을 갖고 있는 일본 학교 건축의 전형적인 건축 형식이었다. 동경의학교 본관이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의 상징적인 건물로서 대한제국의 국립 의료시설인 대한의원 본관의 모델로 선택된 것이다. 이는 한국 근대 이행기에 도입된 여러 근대적 제도 및 기술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거쳐 근대적인 완성 ‘모델’이 도입되고 이식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대한의원 본관은 동경의학교 본관과 달리 목조가 아닌 벽돌조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벽돌조의 시계탑 건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한의원 본관은 구조적·기능적으로 실험적인 건축이었다. 이는 같은 시기 대한제국의 정부청사, 일본의 병원 건축 등과 비교해 보아도 건축 형식과 공사비에서 매우 과도한 규모였고, 일본의 우월한 근대를 과시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한편, 대한의원 본관의 학교 건축 형식이 의료 시설로서의 기능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평면과 입면, 건축 설비를 통해 보완하고 건축적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다. 평면에서는 수술실과 진료실 등을 남쪽에 배치하였으며, 입면에서는 창의 크기와 위치를 조정하여 최대한의 자연 채광을 통해 열악한 전기 조명 설비를 극복하도록 했다. 또한 환기와 급수의 설비를 통해 의료 시설로서의 위생에 필요한 시스템을 갖추었다.
이 연구에서 확인한 대한의원 본관의 계획 과정과 특성은 일본에 의한 서구의 모방을 거쳐, 일본인에 의해 근대적 시설이 도입되는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향후 대한의원 전체의 건축과정과 조선총독부 의원으로 변화하면서 점차 확대되어 가는 양상을 살펴 근대적 국립 의료시설의 변화 양상을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밝혀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의료는 가장 이른 시기에 적극적으로 도입된 기술 분야였고, 의료 시설은 근대적 기능에 맞추어 가장 먼저 변화한 건축 형식 중 하나였다. 건축을 형태(형식), 의료를 기능(내용)이라 할 수 있는 의료시설은 의학사와 건축사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보다 풍부한 연구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있을 것이며, 새로운 관점과 연구의 지평을 점차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Notes

1) 대한의원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존재한 시설로서, 1910년 이후에는 여러 명칭으로 변화해 왔다. 이 연구에서는 시기에 따라 “대한의원”과 다른 명칭을 구분하여 사용하겠지만, 건물을 지칭할 경우에는 시기와 관계없이 “대한의원”의 명칭을 사용하겠다. 또한, 대한의원의 건축물 중에서 현존하는 사적 248호 “서울 대한의원”은 “대한의원 본관”으로 대한의원의 다른 시설과 구분하여 사용하겠다.

2) 국가기록원에는 대한의원 관련도면 92매(본관, 병실, 기타 병원 시설 포함), 대한의원 관사 관련도면 5매, 대한의원 의학교 관련도면 17매가 소장되어 있다. 국가기록원에서 발간한 도면 해제집에서는 대한의원 관련 도면이 107매로 기록되어 있지만(전봉희 외, 2010: 39-40), 이중 15매는 1910년 이후 총독부의원의 도면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대한의원의 청사진 도면 6매가 소장되어 있는데(전봉희·이규철·서영희, 2012: 540-550), 모두 국가기록원의 원본 중 일부 도면을 청사진으로 제작한 복제본 도면이다.

3) 이상의 탁지부 건축소의 직원 구성은 『建築所事業槪要 第一次』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度支部建築所, 1909: 223-224).

4) 사카이데 나루미는 일본 대장성 임시건축부의 요코하마 지부에서 기사로 근무하였다(印刷局, 1906: 218; 統監官房人事課, 1909: 附錄5).

5) 카츠마타 로쿠로는 일본 대장성 대신관방 영선과에서 기수로 근무하였다(印刷局, 1906: 81; 印刷局, 1906; 川端源太郞, 1940: 82)

6) 쿠니에다 히로시의 대장성 속의 경력은 <通牒 乙第十二號>(『度支部來去案 二』(奎17766), 1907.3.14.)에서 인용하였다. 쿠니에다 히로시(1879-1943)는 기후현(岐阜県) 출생으로 동경제국대학 건축과를 졸업(1905)했다. 이후 통감부 기사로 한국에 와서 탁지부 건축소 기사와 조선총독부 기사를 지내며, 조선총독부 청사 등을 비롯한 주요 관청 건축의 계획과 시공 업무를 맡았다. 1918년에 퇴직하고 오사카에 쿠니에다 공무소(國技工務所)를 열고 건축활동을 계속했다(Wikipedia, 2015.12.25.).

7) 건축소 업무의 내용에 대해서는 <건축소분과규정> 참조(『대한제국 관보』, 1907.3.23.).

8) 이 위원회는 1908년 10월 대한의원 개원식때까지 유지되었고, 대한의원의 낙성(洛城)에 따라 대한의원 창립위원의 해임이 결정되었다(<照覆 第六百十號>, 『起案』(奎17746), 1908.10.29.). 한편, 선행연구에서는 ‘대한의원 창설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지만(신동원, 1997; 박윤재, 2005), 이 논문에서는 당시의 기록에 사용된 ‘대한의원 창립위원(회)’의 명칭으로 고쳐서 사용하겠다.

9) 이상의 대한의원 설립의 과정은 신동원의 연구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신동원, 2005: 338-344). 다만, 건축 관련 기사가 2명이라고 한 것은 통감부 기사인 의사 코야마 젠(小山善)을 건축기사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대한의원 창립위원회의 7인에 대한 이력은 황상익의 연구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황상익, 2013: 720-725).

10) 탁지부 건축소에서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시행한 건축사업 중에서 대한의원이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었다. 다른 건축사업은 인쇄국이 202,003.614원, 광통관이 84,458.731원, 의정부청사가 81,034.503원 등으로, 대한의원에 훨씬 못미치는 규모였다(度支部建築所, 1909: 35-91).

11) 대한제국의 화폐는 1905년 화폐정리사업으로 ‘2元=1圜’으로 교환하여 주로 환(圜)의 단위가 사용되었다(오두환, 1991: 261). 또한 이 환의 단위는 일본의 엔(円)과 동일한 가치로 만든 화폐로서, 대한제국의 정부 문서에서는 엔(円) 또는 원(圓)으로도 기록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단위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1905년 이후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환(圜), 원(圓), 엔(円)의 단위를 통일하여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위인 원(圓)으로 표기하겠다.

12) 두 문헌 모두 출처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13) 임시건축부 제1과는 건축공사의 계획 및 설계, 시공 및 감독, 부지측량 등을 담당하는 부서이다(大藏省 臨時建築部, 1909: 1). 야바시 켄키치(1869-1927)는 기후현(岐阜県) 출생으로 동경제국대학 조가학과(造家学科, 건축과의 전신)를 졸업(1894)했다. 공수학교(工手学校, 공학원대학의 전신) 교수와 일본 대장성 건축기사로 활동하였다(Wikipedia, 2015.12.25.).

14) 『建築所事業槪要 第一次』의 1906년과 1907년 공사기록 참조(度支部建築所, 1909: 94).

15) 사토 스스무는 대한의원 창립위원회가 일주일에 두 번 반드시 회의를 해서 대한의원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결정했다고 했다(佐藤進, 1906: 3).

16)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대한의원 관련 도면 중 일부는 일본 대장성 건축조직에서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7) 1905년 이후 대장성 대신관방 영선과 과장과 임시건축부 부장을 겸하면서 대장성 건축조직의 책임자로서 역할을 했다(大熊喜邦 외, 1916: 1-2; 印刷局, 1907: 81, 213). 츠마키 요리나카(1859-1916)는 에도 출신으로 공부대학교 조가학과(工部大学校 造家学科, 동경제국대학 건축과의 전신)에 입학했지만, 중도에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학에서 건축학 학사를 취득(1884)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일본 정부의 건축기술직 관료로서 일본의 관청 건축을 주도하였다.

18) 사토 스스무가 대한제국에 온 날짜가 『韓國施政一斑』(1906)에는 7월 3일, 『同仁』(1906)에는 7월 4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同仁』에는 다른 정보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 기록이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19) 이상의 통감부에서 기존의 병원을 통합하여 새로운 병원의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은 선행 연구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배규숙, 1991: 46-51; 신동원, 1997: 338-345; 박윤재, 2005: 175-192).

20) 『마등산실형도』는 현재까지 확인된 측량 도면 중에서 한국인 측량기술자에 의해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도면으로서도 의미가 있다(이규철, 2010: 200).

21) 대한의원이 경모궁 터 또는 영희전 터에 신축되었다는 선행연구도 있지만(이태진, 2007: 91; Wikipedia, 2015.12.25.), 1906년 당시에는 영희전(경모궁 터) 남쪽의 부지를 선정하여 대한의원을 신축하였다. 영희전은 대한의원이 조선총독부 의원으로 개칭된 이후인 1911년에 조선총독부 의원으로 이관되어 일부 시설이 도서실과 표본실 등으로 사용되었고, 1913년 정신병동이 영희전 부지에 신축되면서 영희전 영역의 건물이 철거되기 시작하였다(朝鮮總督府醫院, 1915: 2).

22) 한성부에서 측량도를 작성하여 내부에 보고하고 민유 가옥과 토지를 매입한다는 신문기사를 통해, 그림 1의 측량도면과 도면에 표기된 민유지의 매입을 확인할 수 있다(『대한매일신보』, 1906.9.23.).

23) 1906년 12월에 작성된 『韓國施政一斑』에서는 28만원의 건축 예산으로 기록되어 있고(統監府, 1906: 3), 『建築所事業槪要 第一次』에는 30만원으로 기록되어 있어 다소 차이가 있다(度支部建築所, 1909: 45).

24) 대한의원의 공사비를 집행한 탁지부 건축소의 『建築所事業槪要 第一次』의 기록이지만, 여러 문헌에서 대한의원의 공사비에 대한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다. 『韓國施政年報』에서는 건축비 293,566원으로 기록되어 있고(統監官房, 1908: 382), 『韓國財政施設綱要』에서는 공사비 308,103원으로 기록되어 있다(度支部, 1910: 245).

25) 표 1은 대한의원에서 시행한 건축공사의 청부공사 금액으로서, 1906년과 1907년의 의원시설이 대한의원 신축공사에 해당된다. 표 1 전체 공사비에 대한 1906년과 1907년의 대한의원 신축공사비의 비율이 10.4%이다.

26) 1906-1907년의 대한의원 공사비는 약 30만원 정도로 확인되지만, 표 3의 청부공사 전체 금액은 205,332.093원으로 차이가 있다. 이는 탁지부 건축소에서 대한의원 신축공사를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표 3의 청부금액은 청부업체가 시행한 공사에 소요된 비용만을 표기한 것이다. 이 비용 외에도 설계, 견적, 공사자문, 공사관리, 직영공사 등에 필요한 경비가 전체 공사비에 포함되며, 예산 편성에 따라 부지매입비와 토지가옥 보상비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27) <照會 第百十六號>, 『各部通牒』(奎17824), 1907.8.26.; <照覆 第八十二號>, 『起案』(奎17746), 1907.9.6.

28) 의정부 청사는 완공 이후 탁지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벽돌조 2층의 연면적 217.6평의 규모로서, 1907년 4월 1일부터 12월 20일까지 264일의 공기(工期)로 건축되었다. 대한의원 본관은 벽돌조 2층의 연면적 217.222평의 규모이다(度支部建築所, 1909: 37, 92, 94).

29) 대한의원에 필요한 설비비 64,011원이 예비비 예산에서 지출되었다(<奏本 第三百六十一號>, 『奏本』(奎17703), 1907.6.27.; <指令 第二百十四號>, 『度支部來去案』(奎17766), 1907.6.29.; <通牒 第九百九十二號>, 『各部通牒』(奎17824), 1907.7.4.).

30) 11월 9일과 10일에 마등산(馬登山)에 신축한 대한의원으로 이전하였다(<公函 第百號>, 『照會』(奎17823), 1907.11.6.).

31) 1907년 11월에 일부 신축된 대한의원으로 이전했다는 기록을 대한의원 본관의 완공으로 간주한 연구도 있지만(신동원, 1997: 354), 이때 완공된 건물은 병실 건물이고 본관은 1908년 5월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32) 대한의원 본관의 평면형식과 병원 기능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4장 참조.

33) 대한의원 의육부 졸업식이 대한의원에서 거행되었다는 기사가 1908년 1월과 7월에 확인되며(『황성신문』, 1908.1.28., 1908.7.9.; 신동원, 1997: 374 재인용), 『大韓醫院開院式紀念寫眞帖』에서는 대한의원 본관 2층 탈의실 옆 교실의 사진도 확인된다(大韓醫院, 1908: 28).

34) 1909년 의학교 신축 직후의 상황은 확인되지 않고, 1912-1913년 총독부 의원 시절의 공간 구성이다(朝鮮總督府醫院, 1915: 233). 1911년 본관의 증축 이후의 상황이어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35) 그림 6은 대한의원 본관의 공사를 시작한 직후의 모습으로, 공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비계(飛階)가 보이고 그 뒤로는 지붕이 완성된 병실과 지붕 공사중인 병실도 확인된다. 그림 7은 대한의원 본관의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모습으로, 미국 뉴저지 럿거스 대학 도서관(Rutgers University Libraries)의 그리피스 컬렉션(William Elliot Griffis Collection)에 포함된 사진이다(이경민·양상현·문병국, 2015: 7-8, 15).

36) 선행연구에서는 1907년 7월 의병이 일어나 공사가 지연된 것으로 판단하였다(신동원, 1997: 354). 하지만 이때의 영향으로는 대한의원 병실 기타공사가 1개월 지연되어 완공된 정도의 영향이었고(<照會 第百十六號>, 『各部通牒』(奎17824), 1907.8.26.; <照覆 第八十二號>, 『起案』(奎17746), 1907.9.6.), 본관 공사가 지연되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37) 탁지부 건축소의 연와제조소에서 각 시설에 공급한 벽돌의 물량과 연와제조소의 월별 생산량은 『建築所事業槪要 第一次』를 참고하였다(度支部建築所, 1909: 234-235).

38) 1869년 대학동교(大学東校), 1871년 동교(東校), 1872년 제1대학구 의학교(第一大学区医学校) 등으로 개칭되었다(東京大学医学部, 1967: 231).

39) 1874년 신축 당시에 의학교와 병원은 각각 현재의 동경대학 의학부 부속병원과 동경대학 의학부의 위치로, 서로 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40) 의학교 본관은 1911년 동경대학 혼고 캠퍼스의 아카몬(赤門) 옆으로 다소 축소되어 이축되었고, 사료편찬부와 영선과 등으로 1965년까지 사용되었다. 1965년부터 1969년에는 다시 해체되어 코이시카와 식물원(小石川植物園)으로 이축되었고, 현재 동경대학 종합연구박물관 코이시카와 분관(東京大学総合研究博物館小石川分館)으로 사용되고 있다(東京大学総合研究博物館, 2016.1.20.).

41) 그림 12에서 본관은 중앙 상단의 중복도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은 실습 교장 등의 부속 시설이다.

42) 대만 적십자병원에 대한 자료는 그림 14의 사진 이외에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의원과의 유사성 또는 관련성에 대해서는 추가로 연구가 필요하다.

43) 대만 적십자병원의 재료가 확인되는 자료는 없지만, 시계탑이 벽체가 아닌 지붕 중간에 위치한 점에서 이전의 목조 건물에 존재한 탑의 형태와 동일하다.

44) 의정부 청사는 벽돌조 2층의 연면적 217.6평의 규모로서, 59,763.140원의 공사비로 건축되었다. 대한의원 본관은 벽돌조 2층의 연면적 217.222평의 규모이고 공사비는 85,045.558원이었다(度支部建築所, 1909: 37, 92, 94).

45) 학부 청사 19,800.000원, 내부청사 24,500.000원, 농상공부 청사 21,700.000원 등의 공사비이다(度支部建築所, 1909: 93).

46) 파빌리온 플랜은 핑거 플랜(finger plan), 스트리트 플랜(street plan)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블록 플랜(ブロックプラン)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47) 그림 20의 수술실 사진을 비롯하여 『大韓醫院開院式紀念寫眞帖』에 실려 있는 수술실과 진료실의 사진에서 창문을 통한 자연 채광 외에 특별한 조명 설비를 찾을 수 없다(大韓醫院, 1908).

48) 대한의원 본관의 층고는 해당층의 바닥에서 상층부의 바닥까지의 높이로 계산하였다. 1층 바닥은 지면에서 +816mm, 2층 바닥은 +6100mm, 시계탑 계단실 바닥은 +10,688mm이다(문화재청, 2002: 249).

49) 그림 23의 부인과실 뿐만 아니라 『大韓醫院開院式紀念寫眞帖』의 수술실, 외과실, 내과실, 안과실, 이비인후과실, 환붕실 등의 사진에서 환기구와 급수 및 배수 설비가 확인된다(大韓醫院, 1908: 19-25).

50) 발전소의 위치와 신축시기는 대한의원 개원식의 배치도(大韓醫院, 1908: 4)와 1911년, 1913년의 조선총독부의원 배치도(朝鮮總督府醫院, 1913: 233; 朝鮮總督府醫院, 1915: 223)를 비교해서 확인하였다.

51) 대한의원의 수도 포설비로서 예비금 3,823원이 지출되었다(<指令第八十七號>, 『度支部去文』(奎21199), 1909.2.26.; <奏本第七十三號>, 『奏本』(奎17703), 1909.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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