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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8(3); 2019 > Article
보구녀관(普救女館)의 명칭과 표기에 관한 재고찰

Abstract

This study aims to correct the Chinese characters of 普救女館 (Po Goo Nyo Goan) and its Korean pronunciation by re-examining the circumstances around the establishment of this hospital, and to discover its naming principle which is associated with the Confucian political philosophy of the Joseon Dynasty. Although 普救女館 is the first modern women’s hospital in Korea, most historical studies of this institute have been conducted on limited documents and records. Many published studies use the incorrect names in many ways, so the correct name of the hospital is still in confusion.
普救女館, however, was named with four or five of the Chinese characters given by the Joseon government (King Gojong (高宗)) at the time of its establishment. The Joseon government gave the name of Seonnyeoboguwon (善女普救院) to the first modern women’s hospital established by Mary Scranton, the name of which was changed to 普救女館.
Some records left by the female missionary doctors who worked in 普救女館 show the romanization and meaning of the name of the hospital. The romanization of 普救女館 clarified the Korean pronunciation of “女 (nyeo)” at that time. English translation name of the hospital has always shown that the place provided “extensive” medical treatment to women. It proves the fact that the first Chinese character of the name is “普”, not “保” which is expressed in many documents today.
The hospital was named according to Confucian ideals just like the other modern hospitals established around the same time, such as Jejungwon (濟衆院), Gwangjewon (廣濟院), Gwanghyeyeowon (廣惠女院). The Joseon government commonly used similar Chinese characters during the naming of these hospitals, characters that imply the ideal of the good Confucian king’s favor for many people of Joseon. 普救女館 was unique in having the character “館(gwan)” in its name, not “院(won)” as in other hospitals. It seems to stem from the characteristic of “women’s hospital.” Po Gu Nyo Goan, the unprecedented women’s hospital, was probably imagined as a hospitable accommodation where women provided kindness to people in need. This may have been the reason why “館”, which has the meaning of accommodation, was chosen instead of “院” that primarily meant medical facilities.
Correcting the name of 普救女館 helps to eliminate the confusion in current historiography and to promote the understanding of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is hospital.

1. 머리말

보구녀관(普救女館)은 1887년 10월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으로 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및 의료원의 전신이다.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1832-1909) 선교사는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기를 기피하였던 조선 여성들에게 의료를 제공하고자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이하 W.F.M.S.)[1]에 여성병원 설립자금과 여성 의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W.F.M.S.는 후원금과 선교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62-1930)[2]를 조선에 파송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스크랜튼 여사는 정동 이화학당 인근에 병원 부지를 마련하여 보구녀관을 설립하였다. 1893년 3월 중순 W.F.M.S. 소속의 볼드윈 부인(Lucinda B. Baldwin)이 낸 기부금으로 동대문에 볼드윈진료소가 설립되어 W.F.M.S.는 서울에서 두 진료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볼드윈진료소는 보구녀관의 제5대 관장인 릴리안 해리스(Lillian A. Harris)가 한국에 오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었는데, 입원 병실의 증설 요구가 거세지자 1908년부터 공사에 착공하였다. 1912년 새로운 병원 건물이 준공되었고 볼드윈진료소는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변모하였고, 정동의 보구녀관은 동대문 부인병원과 합병되어 일제 시기 동안 산부인과 전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W.F.M.S.의 보조 없이도 병원의 자체적 운영이 가능해지자 1942년 이화재단기금 설치를 위하여 매도하였으나, 해방 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의 설립으로 부속병원이 필요해지면서 1945년 이화여대 측은 병원을 다시 매수하고 그해 12월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지정하였다.
보구녀관은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여성병원이자 의학교육 및 간호교육기관이었으며 의료선교의 장이기도 하였다. 특히 여성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어, 여성 의사들이 관장을 역임하며, 여성 환자들을 주로 진료하고, 여성 의료인력을 양성하는 공간의 설립은 한국 근대사상 경이로운 사건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1903년부터는 마가렛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 1871-1945)가 보구녀관 내에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면서, 한국 최초의 여성 의학교육뿐만 아니라 간호교육의 효시로도 자리매김하였다. 보구녀관은 일제 강점기 초까지 운영되었다가 1912년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합병되면서 그 명맥을 계속 이어 나갔다. 즉 보구녀관의 역사적 의의는 전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시간적 차원과 개화기 조선의 공간적 차원이 중첩되는 지점에 위치하면서 의학사·간호사·교회사·여성사 등 한국 근대사의 다양한 결을 보여주는 제분야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배가된다.
보구녀관은 이화여대 의과대학 및 이화여대 간호대학 차원에서 주로 다루어지면서 이화여대 의대·의료원의 기원이자 한국 여성 의학교육·간호교육의 첫 산실로서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다(이화여자대학교 간호대학사 편찬위원회, 1986;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 2002;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2005). 보구녀관의 활동상에 관하여서는 「보구여관(保救女館)의 설립과 활동」(이방원, 2008),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1903-1933)의 설립과 운영」 (이방원, 2011) 등에서 단독 주제로서의 학문적 검토가 이루어졌다. 이방원은 보구녀관을 거쳐 간 여러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보구녀관 건물의 규모, 내부 구성, 의료진 및 조사, 의학교육 등 다양한 방면을 망라하여 조사하였고 박에스더의 생애에 초점을 맞춘 연구에서도 보구녀관을 중점적으로 조명하는 등 보구녀관 그 자체의 역사적 자취를 복원하는 데에 주력하였다(이방원, 2018). 한편 간호학계와 신학계에서도 보구녀관의 설립을 근대기의 중요 사건 중 하나로서 계속 주시하여 온 바 있다(장병욱, 1979; 민경배; 1982; 조선간호부회, 1984; 이덕주, 1991; 2017; 옥성득, 2012). 상기 연구 성과들은 보구녀관의 기본적인 골자를 확인하고 개화기 한국 의료에 대한 이해를 보다 넓히는 데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선행 연구들은 기존의 성과를 답습하여 거의 동일하게 재생산하는 방향으로만 전개되다 보니 연구 초기 개념 정립의 미진함도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상기하였듯 보구녀관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나타났으나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보구녀관의 공식 명칭을 확립하는 단독 연구나 앞서 소개한 많은 선행연구 내에서 병원 명칭에 대한 치밀한 규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사료에 근거한 명칭과 표기의 확립은 가장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계속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특히 보구녀관의 공식 명칭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지칭되어 왔던 사실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동시기에 설립된 여러 병원들 중에서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여성병원”이었던 보구녀관의 독보적인 위상에 비하여 그 명칭 자체는 상대적으로 혼란스럽다. 해방 후 보구녀관은 특별한 근거 없이 “보구여관”으로 지칭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답습하여 2010년대 이후까지도 한국 의학사·간호학사·교회사·여성사 연구에서 “보구여관”이라고 기재되고 있다(이배용·이현진, 2008; 이덕주, 2009; 옥성득, 2012; 최혜정, 2014; 이화여대 산부인과학교실, 2017; 이방원, 2018). 물론 “보구녀관”으로 기재된 연구가 없지는 않으나(이상규, 1993; 이꽃메, 2002; 이만열, 2003; 박형우, 2006; 김문실, 2008, 여인석 외, 2018) “보구여관”에 비하여 그 수가 매우 적은데다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높은 대중도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웹 백과사전에서 “보구여관”을 쓰고 있어 한글 표기면에서 통일성 없이 혼란만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보구녀관의 한자 표기도 통일되지 않아 선행 연구마다 제각기 다르게 나타났는데 연구자에 따라 보구녀관의 한자 표기를 “普救女館”과 “保救女館” 중에서 채택하여 표기하였다. 그런데 “普救女館”으로 표기한 경우는 대개 1990년대까지의 연구로 그 수가 적은 편이다(민경배, 1982: 198; 조선간호부회, 1984: 279-286; 기창덕, 1997: 11). 반면 “保救女館”으로 표기한 경우는 전자에 비해 그 수가 많으며, 197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기간의 연구들이 포함되어 있다(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교육국, 1975: 169; 장병욱, 1979: 151; 전종휘, 1987: 5-9; 이덕주, 1991: 67; 이상규, 1993: 334; 이만열, 2003: 57, 414; 이방원, 2008; 옥성득, 2012: 199). 앞서 소개한 한글표기를 “보구녀관”으로 쓴 연구들도 한자 표기를 병기한 경우 “保救女館”으로 쓰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에는 “普救女館”보다 “保救女館”이 학술적·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보구녀관의 명칭을 제대로 확립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역사 서술을 이어 나간다면 기존의 연구보다 확대 발전된 문제제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보구녀관을 둘러싼 새롭고 다채로운 논의들을 펼치기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의 질문으로 회귀하여 이를 확실히 매듭지어야 하는 시점으로 여겨진다. 즉 보구녀관의 정확한 명칭과 표기는 무엇이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보구녀관의 명칭 및 표기는 어떠한 상호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다시금 고찰하는 단계가 요구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보구녀관 설립을 전후한 시기의 정황을 재검토하여 보구녀관의 올바른 명칭과 표기를 정립하고, 그의 명명에는 조선의 유학적 정치 관념이 결부되어 있었음을 밝혀내고자 한다. 우선 2장에서는 당시 조선 정부 측의 문헌과 선교사들의 글, 신문기사 등의 사료에서 등장한 보구녀관 명칭을 살펴봄으로써 보구녀관의 올바른 한자 표기를 규명할 것이다. 3장에서는 병원의 올바른 명칭과 표기가 “보구여관(保救女館)”이 아닌 “보구녀관(普救女館)”이었음을 확립하기 위한 또 다른 근거로서 제3의 언어를 활용하였다. 즉 영어 사료에 등장하는 보구녀관의 로마자 표기와 영어 번역명을 조명하여 “보구녀관”이라는 명칭과 널리 보(普)를 쓰는 한자 표기의 당위성을 밝힐 것이다. 4장에서는 보구녀관과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근대 서양식 병원들을 비교하고 이들이 모두 동일한 유교적 명명 원리를 바탕으로 이름 붙여졌음을 규명한다. 더불어 개화기 조선의 근대병원들이 대부분 “원(院)”이었던 것과 달리 보구녀관은 “관(館)”이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차이가 생겨난 배경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보구녀관의 올바른 명칭과 표기를 정립함으로써 보구녀관의 역사적 정통을 바로 세우는 동시에 의학사·간호사·교회사·여성사 등 한국 근대사의 다방면에 있어서 향후 보구녀관 연구에서 보다 확장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데에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을 것이다.

2. 보구녀관의 한자 표기

1890년 1월 보구녀관의 초대 관장이었던 메타 하워드는 W.F.M.S.의 기관지 The Heathen Woman’s Friend에 보구녀관의 사진과 소개문을 투고하였다(그림 1). 해당 글에서 메타 하워드는 “보구녀관”이라는 명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조선의 왕은 이 장소가 고통 받는 한국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열린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을 통해 네 개의 한자로 이루어진 명칭을 하사하여 사의를 표현하였는데, 편액으로 만들고 왕실의 색깔로 채색하여 대문 위에 걸 준비를 마쳤다. 그리하여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병원이 국왕의 윤허를 받았음을 안다[3].
메타 하워드는 보구녀관 설립 당시 고종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하 외아문)을 통하여 네 글자의 명칭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외아문 측의 기록은 하워드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다음은 1888년 12월 2일(음력 10월 29일[5])과 6일(음력 11월 4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이하 『외아문일기』)의 한 부분이다.
가. 스크랜튼이 여의원 편호를 특별히 내려달라 청하니 선녀보구원(善女普救院) 다섯 자로 하였다[6].
나. 스크랜튼의 청에 답하여 여의원 편호를 선녀보구원 다섯 자로써 하고, 이렇듯 이름을 지어줄 것에 응하였으니 마땅히 내걸어야 할 것이다[7].
『외아문일기』에 따르면 조선 정부에서는 네 글자가 아니라 “선녀보구원(善女普救院)”이라는 다섯 글자를 내려주었다. “선녀보구원”의 뜻은 “착한 여인이 널리 구하는 집”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서 착한 여인이란 스크랜튼 여사와 더불어 메타 하워드 등의 여의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부에서 하사한 명칭에서부터 “보호하고 구하다(保救)”가 아닌 “널리 구하다(普救)”가 등장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처음에 외아문을 통해 하사받은 “선녀보구원”이라는 명칭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보구녀관”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자세한 변천 경위는 추적하기 어렵다. 보구녀관의 초대 관장인 메타 하워드는 1887년 10월 31일 시병원(施病院) 내에서 환자 진료를 처음 시작하였고[8] 보구녀관 독립건물에서의 진료는 1888년 11월부터 였다[9]. 즉 보구녀관 건물이 갓 지어진 무렵인 1888년 12월 초순 고종은 스크랜튼의 청에 응하여 외아문을 거쳐 병원 이름을 하사하였고,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890년 1월에는 이미 고종에게 하사받은 네 글자로 제작한 편액을 내걸고 있었던 사실만은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메타 하워드는 상기 기사에서 “Po Goo Nijo Goan”이라고 4음절의 명칭이었음을 영문으로 분명히 표기하였다(Howard, 1890: 174)[10].
1892년 8월자 The Korean Repository에서도 “여성병원(Woman’s Hospital)”을 “普救女館”이라는 한자 표기로 설명하고 있다(그림 2). The Korean Repository는 1892년 1월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 부부가 창간한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로, 주로 한국의 정치·경제·문화·풍속 등을 소개하는 글을 게재하여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에 대하여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감리교회의 8회 연례회를 소개하는 기사 중에서 “여성병원(Woman’s Hospital)”이 입원 51례, 왕진 110례, 외래 3,831례 등 모두 4,022례의 환자를 돌보았고 그 명칭은 한자로 “普救女館”이었음을 명확히 기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감리교 선교사 조지 존스(George H. Jones, 1867-1919)[11]가 1900년 창간한 『신학월보(神學月報)』 1901년 7월호에 실린 사설 「감샤황은」에서는 “普救女院”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서울 정동 우리 보구녀원(普救女院)에서 한 늙고 병든 사람을 먹이고 입히더니 하루는 이 노인이 정동 서대문 앞에 우연히 이르러 궐내를 들여다보더니 그때 문을 지키는 순검과 병정이 그 늙고 병든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궐내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아니하거늘 이에 이 노인이 문 안으로 들어가 역사하는 것도 구경하며 궁궐의 화려함도 보다가 겁 없이 점점 들어가……[12]
이는 당시 보구녀관을 지칭할 때 “보구녀원”이라는 명칭도 혼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보구녀원”은 앞의 두 글자가 “보구녀관”과 동일한 한자와 음을 가지고 있고, 외아문에서 하사하였다고 기록한 “선녀보구원”과도 유사한 명칭이다. 즉 정동에 있는 여성병원에 대하여 선녀보구원과 명칭이 비슷한 “보구녀원”이나 병원 현판에 적힌 “보구녀관” 두 명칭이 혼재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월보』의 해당 기사 외에 “보구녀원”이라는 명칭을 사료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외아문이 하사한 “선녀보구원”이 “보구녀관”으로 변모한 경위와 유사한 이유로 “보구녀원”도 공식 명칭으로의 정착에서 탈락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선녀보구원”, “보구녀원”의 원(院)과 “보구녀관”의 관(館)이 함의하는 바의 차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후술하겠다.
“보구녀관(普救女館)”이라는 명칭은 다른 사료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제국신문(帝國新聞)』 1904년 11월 24일자에는 보구녀관을 보수한 후 사람들에게 공개한다는 기사 및 광고가 실려 있다[13]. 해당 사료에서 병원의 한자명은 등장하지 않지만 “보구녀관”이라는 한글 표기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성심보구(誠心普救)」라는 기사의 표제로 미루어 볼 때, 보구녀관의 한자 표기는 당연히 “普救女館”이었을 것이다.
1906년 2월 13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서는 “음력 정월 20일 하오 1시부터 5시까지 본 병원을 관광”시켜 주겠다는 “정동 보구녀관(貞洞 普救女舘)”의 광고가 실려 있다(그림 3). 해당 광고는 광고주가 보구녀관 자신 이었으므로 가장 정확한 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대한매일신보』의 다른 기사들에서 “보구녀관(普救女舘)”, “보구병원(普救病院)”이라는 명칭으로 보구녀관을 지칭하고 있으며 기사상의 모든 명칭은 하나같이 “普救”를 포함한다(그림 4). 이때 “舘”은 관(館)의 옛 표기이므로 양자는 동일한 글자다. 요컨대 당시의 많은 사료에서 보구녀관을 지칭하는 표현에 “普救”를 썼고, 무엇보다도 당시 보구녀관이 스스로를 “普救女舘”이라고 밝혔으므로 현대 보구녀관의 한자 표기도 “普救女館”으로 통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고 하여 “保救女館”이라는 표기가 일제 강점기에 전혀 쓰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1926년 10월 17일자 『동아일보(東亞日報)』는 보구녀관의 제3대 원장인[14]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 Hall, 1865-1951)[15]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 기사는 홀의 생애를 다루면서 그녀가 조선에 건너와 “保救女舘”이라는 여자병원을 설립하였다고 서술하였다[16]. 그러나 『동아일보』는 “保救女舘”와 “普救女舘”을 무분별하게 혼용하고 사실과 다르게 서술하는 등 일관성과 정확성 측면에서 신뢰할 만하다고 볼 수 없다. 조선 군대 해산의 전말에 관해 쓴 1926년 12월 14일자 기사에서는 “普救女舘” 간호부라는 표현이 등장하다가도[17] 1939년 1월 1일과 3일 기사에서는 “保救女舘”으로 표기하면서 보구녀관을 로제타 홀이 개원하였다고 언급하였다[18]. 보구녀관의 설립자를 스크랜튼, 또는 하워드가 아닌 로제타 홀로 서술하는 것은 명백한 내용적 오류다. 즉 “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은 해방 전 사료 중 『동아일보』에서만 등장하였고, 그조차도 “普救女館”과 혼재되어 쓰였으므로 신뢰성이 떨어지는 표기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보구녀관은 외아문으로부터 하사받은 네 개 혹은 다섯 개의 한자로 된 이름에서 기원하였고, 조선 정부의 기록에는 “善女普救院”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분명히 나타나 있다. 당시 대다수의 사료들은 이 병원의 이름을 “보구녀관”으로 지칭하며, “普救”라는 한자로써 표기하고 있다. “保救女館”은 오직 『동아일보』의 일부 기사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으나 보구녀관에 대한 서술 자체의 오류도 발견되는 만큼 당시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상기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보구녀관의 공식 한자 표기는 “普救女館”이어야 옳다.

3. 보구녀관의 로마자 표기와 영어 번역명

보구녀관의 한자 표기를 확인하면서 당시 언론 매체의 보도에서 “여관”이 아닌 “녀관”이라는 한글 표기를 사용하였음은 이미 상술하였다. “보구녀관” 은 이미 설립 당시부터 통용하였던 한글 표기이고, 사실상 현대 한국어의 두 음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데다[19] 연음법칙의 적용 사례도 아니다[20]. 한글은 표 음문자이므로 개화기의 한글 사료만으로도 보구녀관의 표기와 발음이 동일 하였던 사실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이를 더욱 확실하게 뒷받침하기 위 하여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인 로마자의 표기를 확인하는 방법을 활용하고자 한다. 보구녀관의 로마자 표기를 확인함으로써 “보구녀관”이라는 명칭의 당 위성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보구녀관 영어 번역명의 의미도 함께 살펴본다면 표의문자인 한자의 올바른 표기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영어 사료에서는 보구녀관을 어떠한 표기로써 기록하고 있는가? 우선 앞서 소개한 1890년 1월호 The Heathen Woman’s Friend에서 초대 관장 메타 하워드는 보구녀관을 “Po Goo Nijo Goan”이라는 로마자 표기로 기재하였으며, 그 의미는 “House for Many Sick Women”이라고 언급하였다(그림 5). 즉 “Po Goo Nijo Goan”은 당시 보구녀관의 발음을 로마자로 쓴 것으로, ‘ij’를 현대의 철자에 대응하는 ‘y’로 치환하면[21] “Po Goo Nyo Goan”이 된다. 만약 보구녀관을 [보구여관]으로 발음하고 있었다면 로마자로는 “Nyo Goan”이 아니라 “Yo Goan” 혹은 “Yeo Goan”으로 썼을 테고 굳이 ‘n’을 첨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메타 하워드의 로마자 표기는 설립 당시 병원명의 한글 표기 그대로, 보구녀관을 [보구녀관]으로 발음하였던 사실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다.
한편 “House for Many Sick Women”이라는 영어 번역명은 “많은 아픈 여성들을 위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워드가 보구녀관의 초대 관장으로서 병원명이 가지는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영어로 치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편 Sick Woman이 아니라 Many Sick Women이라고 단어의 복수형을 명시하여 한국 여성들에 대한 구제활동을 보다 광범히 전개하겠다는 본래의 의미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이러한 영어 번역명은 보구녀관이 “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 한자 표기로 “普救女館”이었음을 확증하여 준다.
메타 하워드는 본국으로 귀국한 이후인 1896년, 왕진을 나가면 사람들로부터 지극한 환대를 받았던 조선에서의 옛 기억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보구녀관의 영어 번역명을 기록하였다.
한국 의사들은 남자는 남자를, 여자는 여자를 치료합니다. 병원을 열자 국왕께서 내게 “많은 아픈 여성들을 치료하는 집(The House where Many Sick Women are Cured)”이라는 이름을 지어 보내주셨습니다. 왕실에서 파견한 호위군이 내가 국왕의 은총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모든 집의 문을 열어주어 나는 서민 가정뿐 아니라 양반 귀족의 집에서도 환영을 받았습니다. …… 나는 왕족 못지않은 환대를 받았고 그것은 진정한 애정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입니다[22].
1896년 메타 하워드의 회상에서 보구녀관은 “The House where Many Sick Women are Cured”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많은 아픈 여성들을 치료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1890년의 “The House for Many Sick Women”과 유사하지만 그보다 더 구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존에는 여성 환자들을 위한다는(for) 정도로만 단순하게 표현하였다면, 이때는 여성 환자들을 위한 치료(cured)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의미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며, “Many Sick Women”이라는 복수형 단어들을 활용하여 보구녀관을 구성하는 한자의 의미를 번역하였다는 점은 양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1899년 보구녀관의 제4대 관장인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는 한국 내 W.F.M.S.의 연례회의 보고서(이하 Annual Report)에서 “Po Ku Nyo Kwan”이라고 표기한 보구녀관 보고서를 게재하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보구녀관의 로마자 표기는 제목 그대로 “Po Ku Nyo Kwan”이고, 영어 번역명은 “Salvation-for-all-women Institution”이었다(그림 6). 이후 1903년 Annual Report에서 커틀러는 병원의 명칭 표기를 “Po Ku Nyo Koan”이라고 고쳐 썼고(그림 7), 1904년 마가렛 에드먼즈와 함께 쓴 보고서에서도 동일한 표기를 고수하였다(그림 8). 1906년 커틀러와 에드먼즈는 “Po Ku Nyo Koan”으로 제목을 붙인 보고서를 게재하였는데, 보고서의 첫 단락은 다음과 같다.
“모든 여성을 위한 구제기관(Salvation For All Women Institution)”은 한국의 서울에 있는 우리 W.F.M.S.의 병원 입구에 걸린 본래 이름의 뜻이다[23].
상기한 커틀러와 에드먼즈의 보고서에서 나타난 보구녀관의 로마자 표기를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당시 보구녀관은 한글 표기 그대로 [보구녀관]으로 발음되었다. 보구녀관의 영문 표기는 시기별 혹은 선교사별로 철자가 조금씩 다르나, 외국어에 대한 로마자 표기법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던 당시에 모음(wa/oa, u/oo)이나 자음 ‘ㄱ’의 거센 정도(g/k) 표시의 차이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 하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으며 심지어 현재도 비슷한 현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면 하워드와 동일하게 알파벳 ‘n’을 사용하여 [녀]로 발음되었음을 명확히 표시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n’ 표기를 통하여 자음 ‘ㄴ’의 발음을 살리는 공통점은 당시 영어 사료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고, 이는 “보구여관”이 아닌 “보구녀관”으로서 통용되고 있었던 사실을 재차 증명한다.
둘째, 이들의 표기는 메타 하워드의 그것에 비하여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 “Salvation”은 문맥상 “구제”로 번역하였으나 실제 의미는 기독교에서 일컫는 종교적인 “구원”을 뜻한다. 이러한 단어를 병원의 명칭으로서 직접적으로 명시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해석된다. 즉 선교사가 세운 병원으로서, 의료선교를 수행하는 장소임을 보다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1887년 메타 하워드가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까지만 하여도 노골적인 기독교 선교는 조선 정부에 의하여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초기 선교사들도 교육과 의료 사업에 진력하였을 뿐 선교 자체를 앞세우지는 않았다[24]. 따라서 그녀가 보구녀관의 명칭을 번역할 때 종교적인 개념을 부가하지 않고 “House for Many Sick Women”이라고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교육과 의료 사업을 통하여 기독교는 점차 조선 사회에 전파되어 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점차 변화하게 되었고 보구녀관 설립 초기보다 다소 완화된 분위기에 발맞춰 커틀러는 메타 하워드와는 다르게 보구녀관의 영어 번역명에 종교적 개념을 부가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커틀러의 번역명에서 “All Women”이라는 복수형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보구녀관의 한자 표기는 지킬 보(保)가 아닌 널리 보(普)였음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다. “All Women”은 이전 메타 하워드에 의한 번역명에서 “Many Sick Women”보다 확장된 범위의 여성들을 지칭한다. 즉 “Many Sick Women”에서 더 나아간 “All Women”이라는 표현은 본래의 명칭 중 널리 보(普)를 “All”에 대응하여 번역한 결과로 보아야 훨씬 자연스러울 것이다. 만약 역사적으로 올바른 한자 표기가 “保救女館”이라면, 구할 구(救)를 “Salvation”로 대치하였듯 지킬 보(保)의 의미에 부합하는 영어 단어를 대입 하였어야 한다. 하지만 메타 하워드부터 커틀러에 이르기까지 보구녀관의 영문 번역명에서 지킬 보(保)의 의미를 살리지 않았던 여러 사례들을 고려한다면, “保救女館”은 역대 관장들에 의하여 공인된 표기가 아님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보구녀관에 대한 다양한 로마자 표기와 영어 번역명을 통하여 보구녀관의 명칭 및 한자 표기의 역사적 당위성을 검증하였다. 개화기 당시 보구녀관의 여러 관장들은 보구녀관의 명칭을 로마자 표기할 경우 모음이나 자음 ‘ㄱ’의 알파벳 철자 면에 있어서 조금씩 달랐지만 여자 녀(女)의 발음에 대해서는 반드시 ‘n’을 활용하여 “Nyo”로 썼다. 이는 표음문자인 한글의 특성상 표기와 발음이 정확히 일치함을 당시의 로마자 표기로써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보구녀관의 번역명은 관장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Many, Women, All 등 항상 복수형 단어를 사용하여 널리 보(普)의 의미를 구현하였고, 지킬 보(保)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가 포함된 번역명은 찾을 수 없었다. 보구녀관의 초대 관장 메타 하워드가 종교적인 함의조차 내포하지 않고 명칭의 순수한 의미 그대로를 번역해 사용한 “House for Many Sick Women”의 의미를 상기한다면, 보구녀관의 한자 표기는 “普救女館”이 되어야 옳을 것이다.

4. 보구녀관의 유교적 명명 원리: 동시기 근대 병원과의 비교

앞서 보구녀관은 조선 정부로부터 하사받은 네 글자(혹은 다섯 글자)로부터 비롯된 명칭이고 그 중 하나가 널리 보(普)이므로 이제껏 통용되어 왔던 “保救女館”은 “普救女館”으로 시정되어야 함을 각종 사료를 통하여 밝혔다. 이는 병원 이름을 받은 쪽의 입장에서 그것을 어떠한 용례로써 실제로 쓰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시각을 전환하여 병원의 이름을 준 쪽, 다시 말해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왜 조선 정부는 병원의 명칭에 쓰이는 글자로서 수많은 한자 가운데서도 널리 보(普)를 하사하였던 것일까? 또한 조선 정부가 보구녀관의 명칭에 함의하였던 바는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보구녀관을 비롯한 당대 서양식 근대병원들의 명칭이 붙여지는 경과를 추적함으로써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었던 제중원(濟衆院)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중원은 보구녀관보다 약 2년 앞선 1885년 4월 10일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의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가 설립한 병원이다. 원래 이 병원은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나 불과 일주일 만에 제중원으로 개명되었다. 1880년대 중반 외국인 선교사의 주도로 설립되어 조선 정부가 이름을 지은 병원이라는 점에서 보구녀관과 비슷하나, 제중원은 정부에 의하여 개칭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널리 은혜를 베푸는 기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명칭은 조선 정부가 이전에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던 기관인 혜민서(惠民署)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작명하였다(신동원, 1995: 205). 1885년 4월 12일(음력 2월 29일) 『고종실록』의 기록 중 광혜원 설치에 대해 논하였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이미 혁파하였는데 이는 조정에서 널리 구제하는 뜻에 있어서 아주 결함이 됩니다. 별도로 원(院) 하나를 설치하여 광혜원(廣惠院)이라 칭하고, 외서(外署)에서 전적으로 관할하게 하는 동시에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의 차출과 일체 사무의 처리는 모두 해당 아문(衙門)에서 초기(草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25].
『고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정부에서는 혜민서의 부재는 “널리 구제하는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별도의 기관을 설치하고 광혜원이라는 명칭을 쓰고자 하였다. 즉 광혜원의 “광혜(廣惠)”는 혜민서를 연상시키는 은혜 혜(惠)를 활용하면서도 “널리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아 두 개의 한자로 작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광혜원”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초대 원장 알렌은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혜민서라 하는데, 이에 소속되었던 관리들만 해도 천여 명이었고 그들은 직장을 잃어버린 데 대해 불평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병원을 개설하기 위하여 혜민서를 폐지하였는데, 새로 개설된 병원 명칭 또한 광혜원 혹은 개화된 미덕의 집(virtue civilized house)이다[26].
알렌은 혜민서가 혁파된 이후 새로이 설립된 병원의 명칭 “또한(also)” 광혜원이며, 그 의미는 “개화된 미덕의 집(virtue civilized house)”이라고 설명하였다. 혜민서를 계승하고자 설립한 근대식 병원이었으므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라는 혜민서의 의미와 비슷하게 “널리 은혜를 베푸는 곳”의 광혜원이라 명명하였던 조선 정부의 사고과정은 쉽게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고종은 약 2주 만에 광혜원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27]. 1885년 4월 26일(음력 3월 12일) 『고종실록』에서는 “외아문에서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칭하였다”고만 간단히 언급할 뿐이고 명확한 변경 취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28]. 이렇듯 사료로써 명확히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제중원” 명칭 자체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전격 개칭된 이유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1886년 2월 1일 『한성주보(漢城周報)』 제2호에서는 제중원의 위상에 대하여 “이는 곧 국가에 어진 정치를 베푸는(發政施仁) 한 단서요, 또한 널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博施濟衆) 공덕”이라고 서술하였다[29]. 상기한 구절에서 “발정시인(發政施仁)”과 “박시제중(博施濟衆)”은 각각 『맹자』와 『논어』에서 등장하며 전통적 대민정책의 주요 방침으로 광범하게 활용되어 왔다(이경록 외, 1998: 10). 그 중에서도 특히 박시제중의 “제중”을 따 와서 “제중원”이라는 병원 명칭을 작명한 것이다. 제중원의 어원이 된 박시제중의 구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이 『논어』에 나타나 있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博施]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濟衆] 어떻겠습니까? 인정(仁政)[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답하시기를, “어찌 인정에 비하겠느냐? 필시 성정(聖政)[聖]이라 해야 할 것이다.”[30]
박시제중이란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고 많은 이를 구제한다”는 유교적 정치이념이었다. 이를 행할 수 있는 자는 마땅히 성스러운 임금(聖王)으로서 칭송될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한편 1799년 정조대에 임금의 명을 받은 강명길(康命吉, 1737-1801)이 『제중신편(濟衆新編)』이라는 의서를 편찬한 바 있었고, “제중단(濟衆丹)”이라는 이름의 환약이 조제되기도 하였던 사실로부터 알 수 있듯[31] 당시 의료계에서도 “박시제중”은 익숙한 관용구였다(신동원, 1995: 206). 따라서 병원의 명칭에 박시제중을 활용하여 “제중원”이라고 작명한 자체만으로 이미 “뭇사람들을 구제하는 기관”이라는 단순한 해석을 넘어서, 이 기관이 의료구제의 성격뿐만 아니라 성왕(고종)의 시혜를 함의하고 있음을 당시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시사할 수 있었다. 즉 서양의학을 통한 유교적 의미의 백성 구제까지 내포하는 명칭으로서 제중원이 선택되었으리라 생각된다(주진오, 1997: 5).
요컨대 “제중원” 명칭으로의 개칭은 이 병원이 조선 정부의 전통적인 구료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설립되었음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표방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당시 의료선교사들이나 백성들에게 병원 명칭의 변화가 큰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종과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새로 설립되는 서양식 병원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표현하는 일환이었다(신규환·박윤재, 2015: 27-28). 아울러 근대화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유교의 경향을 고수하였던 조선 정부의 양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광제원(廣濟院)을 들 수 있다. 1899년 설립된 내부병원(內部病院)은 1900년 6월 30일 칙령 제24호 「병원관제 중 개정건」에 따라 보시원(普施院)으로 개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제원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보시원과 광제원은 각각 “널리 베푸는 곳”, 그리고 “널리 구제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제중원과 연결 지어 분류한다면 보시원은 광혜원과, 광제원은 제중원과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자는 조선 정부 측의 시혜 자체만 내포한다면 후자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의료적 시혜”임을 드러낸다. 청의서에 의하면 광제원으로의 재개명은 “질병을 치료하여 중생을 구제하는(醫疾濟生)”[32] 병원 설립의 취지에 광제원이 더 잘 어울린다는 이유로 시행하였다. 한편 “광제(廣濟)”라는 표현은 1790년 이경화(李景華, 1721-?) [33]가 향약(鄕藥)의 사용법을 정리하여 편찬한 『광제비급(廣濟秘芨)』이라는 의서의 명칭과 앞서 언급하였듯 정조대에 조제한 “광제단”이라는 환약의 이름에서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정부가 명명한 내부병원의 새로운 명칭들도 제중원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조선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유교적 맥락 하에서 만들어진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조선 정부가 보구녀관의 명칭으로서 널리 보(普)를 선택하였던 데에는 유교적 시혜의 관념을 바탕으로 하여 병원의 명칭을 짓는 유교적 명명 원리가 크게 작용하였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을 “널리 은혜를 베푸는 곳(廣惠院)”이었다가 “뭇사람들을 구제하는 곳(濟衆院)”으로 개칭하고, 내부병원의 이름을 “광제원(廣濟院)”으로 바꾸는 등의 사실을 고려할 때, 한국 최초의 서양식 여성병원의 명칭에 넓을 광(廣), 무리 중(衆)과 유사한 널리 보(普)를 써서 “널리 여성을 구제하는 곳(普救女館)”으로 명명한 것은 당대의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수긍된다. 광혜원(제중원), 광제원, 보구녀관 등은 모두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 또는 구제를 베풀어야 한다는 조선 정부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서로 일맥상통하는 명칭이었다. 조선 정부는 서양식 근대병원이 새로운 의료로써 “널리”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기대하면서, 병원의 의료구제를 조선 정부가 베푸는 은혜와 동일시하고 또 동일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선 정부가 명명하지는 않았으나, 유교적 명명 원리에 의한 병원 명칭의 또 다른 사례로 광혜여원(廣惠女院)을 들 수 있다.34) 보구녀관의 제3대 관장이었던 로제타 홀은 남편 윌리엄 홀이 1894년 서울에서 사망한 후 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조선에 돌아와 1898년 6월 18일 선교지 평양에 새 여성병원을 개원하였다. 평양군수는 이 병원에 “광혜여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로제타 홀은 “광혜여원” 명칭의 의미를 “Women’s Dispensary of Extended Grace”라고 영문 번역하였고, “광혜”를 “널리 퍼진 은총(extended grace)”으로 번역함으로써 기독교적 색채를 덧입혔다. 그러나 1890년대의 평양군수가 서양 기독교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광혜”라는 표현을 활용하였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다시 말하면 앞서 다룬 여러 병원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 사회에 보편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던 유교적 관념을 전제로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광혜여원의 사례를 통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서양식 병원에 대하여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유교적 시혜 관념을 전제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당시 조선에서 지킬 보(保)는 주로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되어 온 글자였고, 의료와 연관되어 쓰인 관행은 없었다. 예컨대 중국에서 시행하였던 일종의 자치경찰제인 보갑(保甲)이나 조선시대에 군역으로 집을 떠난 가장을 대신해 남은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던 보인(保人), 기병에 소속되어 군포를 바치는 기병보(騎兵保) 등 지킬 보(保)는 대개 군사적인 의미의 단어에서 자주 활용되었다. 보구녀관의 명칭에 지킬 보(保)를 쓰더라도 그럴듯한 의미로 해석되기는 하지만, 해당 한자를 군사적 용어에서 주로 활용하였던 당시의 관행상 고종과 조선 정부가 병원의 이름으로 지킬 보(保)를 채택하고 하사하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한편 당시 병원의 명칭과 관련하여 보구녀관의 “관(館)” 사용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화기 조선의 여러 서양식 근대병원들은 대부분 “원(院)”을 활용하였으나 보구녀관만은 유일하게 “관(館)”을 썼다. 물론 외아문에서 하사하였다고 기록된 “선녀보구원”이나 『신학월보』의 기사에 등장한 “보구녀원”에서는 “원”을 쓰고 있지만, 이 명칭들은 끝내 소멸하였고 종국에 정착한 명칭은 “보구녀관”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동시기 설립된 다른 병원과 달리 보구녀관만 “관”으로 남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고민할 여지를 남기나, 이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료는 전무하다. 다만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관”과 “원”의 용례와 보구녀관이 함의하는 특수성을 고려함으로써, 보구녀관 명칭이 당시의 여타 병원들과 차이를 보이게 된 이유를 추정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의료시설들은 대개 “원”을 활용하여 명명하였다. 예컨대 지방의 의학교육 및 구료기관을 의원(醫院)으로 불렀고, 도성의 구료시설인 활인서(活人署)는 본래 활인원(活人院)이었다가 개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개항 이후까지 이어졌다. 1876년 개항 후 일본 정부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위생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개항장마다 관립병원을 설립하였다. 1877년 부산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시작으로 1880년 원산 생생의원(生生醫院), 1883년 인천 일본영사관 부속의원과 서울 일본관의원35) 등 여러 병원들이 생겨났는데 이들 역시 “원”을 쓰고 있다. 또한 개항 후부터 1910년까지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던 수많은 선교병원들도 보구녀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보구녀관 설립연도인 1887년을 기준으로 전후한 시기인 1885년부터 1900년까지 설립된 주요 선교병원들을 교파별로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상기한 “원”의 용례와 관련하여 근대 일본에서 “원”은 경제, 의료, 교육 등 제반 측면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수용하여 국가나 단체의 보호 아래 그들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공간에 대한 번역어로써 공통적으로 적용된 바 있다. 이러한 “원”의 함의를 전제로 하여, 중국의 서적을 통해 처음 일본에 전래된 “병원(病院)”이라는 단어도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영어 “hospital”과 “infirmary”의 번역어로서 “환자를 수용하여 치료하는 공공 의료시설”의 의미를 부여받았다(김영수, 2017: 34-43).
반면 조선시대에 “관”은 공무를 위해 여행하는 외국 사신, 고관이나 귀빈의 왕래 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한 접객용 숙박시설을 의미하였다. 예컨대 명의 사신은 태평관(太平館), 모화관(慕華館), 남별관(南別館)에서, 왜의 사신이나 상왜(商倭)는 동평관(東平館)에서, 여진족 사신은 북평관(北平館)에서 숙박하며 접대를 받았다. 개항 이후부터는 일반인 대상의 숙박시설이 “여관(旅館)”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당시 “관”은 숙박이 가능한 공간이라는 의미가 강하였다. “원”도 역원(驛院)의 개념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공무 여행자의 숙식 제공을 위해 주요 도로에 설치된 공공시설을 지칭하기도 했다.36) 그러나 관영숙소로서 제공되다 보니 이용자가 국한되어 “원”은 점차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다(오정환, 1992: 14).
“관”의 용례에 의하면 보구녀관은 환자들에게 숙식 제공이 가능한 입원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점에서 “관”을 사용하기에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보구녀관에 입원시설이 존재했던 사실만으로 “원”이 아닌 “관”으로 정착했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당시 설립되었던 병원들 중 보구녀관만 입원시설이 갖춰져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중원만 하더라도 수술이나 장기적인 치료를 요하는 환자를 위하여 입원병동을 별도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신규환·박윤재, 2015: 32-33). 즉 단순히 입원시설의 유무만으로 “관”과 “원”으로 구분하여 명명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보구녀관 명칭의 “관” 사용은 여성병원이라는 특징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보구녀관은 그 이름에서부터 명확히 드러나듯이 여성 중심의 병원이었다. 여성을 위해 설립된 이 병원은 여성 및 유·소아 환자들을 대상으로 여성 의사들이 진료를 보는 “여성적” 공간이었다. 또한 보구녀관은 온돌식 입원실을 갖추어 입원 환자의 편안한 잠자리를 보장해 주었고(박정희, 2015: 161) 여성 의사들은 단순한 진료만이 아니라 환자들의 의복과 식사까지 세심하게 챙겨주기도 하였다. 보구녀관이 “여성적” 공간이었음을 상기할 때, 이러한 면모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관과 자연스럽게 조응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즉 유례없는 “여의원(女醫院)”이었던 보구녀관은 아픈 이들에게 친절과 온정을 베푸는 공간으로서의 측면이 다른 병원에 비해 더 두드러졌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귀빈의 숙박과 환대를 제공하는 시설로 통용되었던 조선시대 “관”의 의미와 결부되면서, “보구녀원”보다는 “보구녀관”이 병원의 공식적인 명칭으로서 당시 조선 사회에 정착케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5. 맺음말

보구녀관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여성병원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매우 제한적으로 수행되었다. 한정된 몇몇 사료들이 마치 정본인 것처럼 통용되면서 그 명칭에 있어서도 혼란이 지속되었으며 수많은 기록과 문서들이 여전히 “보구여관”, 또는 “保救女館”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관련 사료들을 정치하게 검토하면 지금까지 무심코 통용해 왔던 보구녀관의 명칭과 표기가 모두 오기(誤記)였음을 알 수 있다. 보구녀관은 설립 초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한자를 사용한 “普救女館”으로 명명되었고, 각종 사료에서 스스로를 “보구녀관”으로 명확히 밝혔으며, 보구녀관의 관장들이 남긴 영문 표기와 번역명으로도 올바른 명칭 및 표기를 다시금 입증할 수 있었다. 보구녀관은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서양식 근대병원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명명 원리에 의하여 이름 지어졌고, 병원의 명칭에서 유교적 시혜의 의미를 내포하는 한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보구녀관은 개화기 설립된 서양식 병원들이 “원”으로 명명된 데 반해 유일하게 “관”으로 명명되었다. 그 이유는 사료로써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여성병원이었던 특성상 다른 병원들에 비하여 ‘숙박과 환대의 제공처’라는 인상이 부각되면서 조선시대 “관”의 용례와 결부되었던 것으로 추론한다. 보구녀관의 “관” 명명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후속연구를 통하여 규명할 필요성을 느끼는 바이다.
모든 역사 연구의 바탕은 분명한 사료에 입각한 확실한 명칭의 사용임은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모든 개념과 명칭은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중원과 보구녀관은 “병원(病院)”이라는 일본식 명칭이 한국에 전파되기 전인 1880년대에 설립되었다. 상기하였듯 “병원”도 종래의 “원(院)”에 병인을 돌본다는 의미를 붙인 조어다. “원(院)” 또는 “관(館)”도 조선시대에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 또는 구료시설이나 의료기관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서양의 “hospital” 역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생겨난 기관이다. 제중원, 광제원, 보구녀관 등의 명칭은 명명자가 새로운 시설이나 기관에 조우하였을 때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념들을 적용하여 만든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선교의사들은 조선 정부의 공인 하에 활동하기를 원했고, 그것이 없으면 사실상 선교 활동 자체가 어려웠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활용하면서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길 원했지만 당시 정부의 요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개념과 세계관은 유학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당대 여러 병원들의 명칭은 선교의사와 조선 정부가 각자 추구하는 가치의 합치점에서 기존 개념을 적절히 활용하여 도출된 것이므로, 이들 명칭의 정립은 병원 자체가 가진 역사를 바로 세우고 병원과 연계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가치판단을 적확히 이해하게 되는 토대로서 매우 중요하다.
한편으로 “보구녀관” 명칭은 당시 중요기관의 이름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보편명사인 여자 녀(女)가 포함되어, 조선 여성의 근대화 과정에서 소기의 성과를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전근대까지 여자 녀(女)는 대개 부정적 의미거나 남성에게 종속되는 표현으로만 사용되었고, 여성(女性)이라는 보편명사가 없어서 여성의 건강문제는 오로지 “부인(婦人)”의 문제로 여겨졌다. 여성차별적인 시대 분위기를 타파하고 여성을 위한 기관임을 분명히 드러낸 “보구녀관” 명칭은 한국 근대 여성사상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구녀관의 명칭 확립은 여성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제분야에 걸쳐 있는 병원의 특성상, 향후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생산적 논의를 가능케 하는 자양분으로 작용할 것이다. 즉 보구녀관의 올바른 명칭과 표기 확립은 역사서술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다방면에 걸쳐 있는 보구녀관에 대해 추후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사전작업이다.

Notes

1) W.F.M.S.의 우리말 명칭은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북감리교회 여성 해외 선교협의회’, ‘북감리교 여선교부’ 등 다양하다. W.F.M.S.는 1869년 3월 23일 보스턴의 트레몬트 스트릿 교회(Tremont Street Church)에 모인 파커 부인(Mrs. Parker) 등 8명의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설립한 선교회였으며, 그 목적은 교회 여성들이 힘을 모아 저개발국 여성을 위한 독신 여성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하는 것이었다(Frances J. Baker, The story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69∼1895 (Cincinnati: Curts&Jennings, New York: Eaton&Mains, 1898), pp.13-21.). 감리교 선교회(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는 이미 1819년 ‘여성부 (Woman’s Auxiliary)’가 설치된 바 있었다. W.F.M.S.는 감리교 선교회를 모선교회(Parent Society)로 존중하였으나 실제 운영은 독립적이었고, ‘여성’에 의한 해외 여성선교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로 지칭하는 편이 적절하다.

2)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62-1930)는 1862년 6월 13일 미국 미시간주의 알비온 (Albion)에서 태어나 1884년 알비온대학(Albion College)을 졸업한 후 시카고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Chicago)에 진학하여 1887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한 해에 그녀는 조선 선교에 지원하여 최초의 조선 선교 여의사로서 파송되었고 보구녀관의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였으나 과로로 인해 병에 걸려 1889년 말 귀국하였다. 1890년 W.F.M.S.의 선교사를 사임하고 이후 알비온에서 개원한 최초 여의사가 되었다. 1913-1914년에는 알비온 최초의 여성 보건국장으로 일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미시간주 칼라마주(Kalamazoo)에서 사망하였다. (Hobart&Mather, Biographical review of Calhoun County, Michigan (Chicago: Hobart&Mather, 1904), pp.439-440)

3) “As soon as the King of Korea heard that this place had been opened for the relief of the suffering women his country, he showed his gratitude by sending, through the Foreign Office, a name consisting of four Chinese characters, framed and painted in the royal colors, all ready to be hung over the great gate. So, all that pass by know that the institution has the King’s approval.” Meta Howard, “The W. F. M. Hospital in Seoul, Korea,” The Heathen Woman’s Friend 21-7 (1890. 1), pp.173-174. 여기서 The Foreign Office는 고종 19년(1882)에 설치되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의미한다.

4) 현 로마자표기법에 의하면 보구녀관 명칭의 로마자 표기는 “Bogunyeogwan”으로 쓰는 편이 맞다. 선행연구에서 보구녀관의 로마자 표기는 사료상에 나타난 표기들 중 하나인 “PoKuNyoKwan”을 사용하거나(김성은, 2007; 이방원, 2008; 이방원, 2011; 윤선자, 2014; 양현혜, 2015; 이덕주, 2017) 현 로마자표기법과 근접하게 “Bokunyokwan”으로 쓰는 경우(이꽃메, 2019)로 나뉘었다. 즉 양적 측면에서 볼 때 후자보다는 전자와 같이 사료에 근거한 표기가 보다 일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3장에서 후술하겠지만, 사료상에서 보구녀관의 로마자 표기는 시기별로, 선교사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며 다양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현 로마자표기법과 다소 맞지 않더라도 철저히 사료를 기반으로 한 선행연구의 표기 경향을 수용하되, 보구녀관 명칭의 연원을 확인하는 작업인 만큼 사료상 여러 표기들 가운데서도 공식적인 첫 로마자 표기를 근거로 하여 “Po Goo Nyo Goan”으로 통일할 것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5) 본 논문에서 등장하는 연월일은 기본적으로 양력을 채택하되, 음력인 경우에는 별도로 표기한다.

6)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卷2, 高宗 25年 10月 29日 戊子, “時奇蘭敦函, 請女醫院扁號特賜事, 善女普救院五字.”

7)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卷2, 高宗25年 11月 4日 戊子, “函覆時奇蘭敦, 女醫院扁號,以善女普救院五字, 玆應盛求囑書, 揭扁爲宜事.”

8)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the year 1888, Annual Report 69 (1889. 1), pp.339-340.

9) 시병원은 스크랜튼 여사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1856-1922) 선교사가 정동에 지은 병원이다. 시병원의 한 쪽 구역은 여성 환자의 진료를 위한 공간이었으나 남성 의사인 스크랜튼에게 진료받기를 꺼렸던 조선 여성들을 위하여 스크랜튼 여사는 하워드 도착 이전부터 별도의 여성병원을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하여 하워드가 그 계획을 바탕으로 보구녀관이 설립되었다. 보구녀관 초대 관장으로서 하워드의 첫 진료는 시병원에서 이루어졌고, 약 1년 후인 1888년 11월이 되어서야 독립된 건물로 옮겨 진료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현재 이화의료원은 보구녀관 독립건물 설립일이 아닌 하워드가 처음 진료를 개시하였던 이 날을 개원기념일로 삼는다.

10) “…The name is Po Goo Nijo Goan, or House for Many Sick Women.” Meta Howard, “The W. F. M. Hospital in Seoul, Korea,” The Heathen Woman’s Friend 21-7 (1890. 1), p.174.

11) 조지 존스(George H. Jones, 1867-1919)는 1867년 8월 14일 미국 뉴욕주 모호크(Mohawk)에서 태어나 1887년 테네시주 해리슨(Harrison)의 아메리칸대학교(American University)를 졸업하였다. 존스는 졸업한 해에 미 감리교 해외선교부의 선교사를 자원하여 1888년 5월 조선에 도착하였고, 배재학당의 수학 교사로 근무하였다. 1892년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잠시 조선을 떠나 있을 때 약 1년간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892년부터 인천과 강화 지역을 중심으로 황해도 연안, 해주, 경기도 김포등지에서 활발한 선교를 전개하였고, 1900년부터 감리교 기관지인 『신학월보』의 편찬 책임자로 나서는 등 근대 한국 감리교의 형성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2) kjmh-28-3-685i1.jpg

13) 「誠心普救」, 『제국신문』, 1904. 11. 24; 「廣告」, 『제국신문』, 1904. 11. 24.

14) 보구녀관의 제2대 관장은 남성 선교사 스크랜튼(Scranton)과 맥길(McGill)이다. 이들은 하워드가 귀국하고 로제타 홀이 파송되기 전까지 보구녀관의 진료를 잠시 담당하였다. 이둘을 제외한 보구녀관의 역대 관장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15)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1865년 9월 19일 미국 뉴욕 주 리버티(Liberty)에서 태어나 1889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학교(Woman’s Medical College of Pennsylvania)을 졸업하였다. 의사가 되고 나서부터 뉴욕에서 빈민 구제에 힘쓰다가, 1890년 미국 감리교의 선교의사로서 조선에 파송되어 보구녀관에서 의료사역과 여성 의학교육에 진력하였다. 1891년 윌리엄 홀(William J. Hall, 1860-1894)와 결혼하였고 남편과 딸이 병사한 이후에도 조선에서 정력적인 의료 사역활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귀국하여 1951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16) 「조선에몸을밧친 홀부인의륙십평생」, 『동아일보』, 1926. 10. 17.

17) 「主人公李秉武도 인제는 黃泉길에 (六)」, 『동아일보』, 1926. 12. 14.

18) 「三代女性이본文化半世紀」, 『동아일보』, 1939. 1. 1; 「三代女性이본文化半世紀」, 『동아일보』, 1939. 1. 3.

19) 두음법칙 중 ㄴ 두음법칙에 따르면 모음이 ‘ㅣ, ㅑ, ㅕ, ㅛ, ㅠ’일 때 ‘ㄴ’은 첫소리에 나타나지 않고 ‘ㅇ’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법칙은 발음과 표기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된다. 대표적인 예로 ‘女子’는 ‘ㄴ’이 첫소리에 오므로 ‘여자’로 쓰고 읽어야 하지만, ‘男女’는 첫소리에 온 것이 아니기에 ‘남녀’로 쓰고 읽는다. 보구녀관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된다. 즉 첫소리에 ‘ㄴ’이 오지 않았으므로 ‘보구녀관’으로 표기하고 발음하는 편이 옳다.

20) 연음법칙에 의하면 받침이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 어미, 접미사와 결합하면 본래의 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로 옮겨 발음된다. 이 법칙은 오로지 발음에만 적용되며 표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컨대 ‘分野’는 앞글자의 ‘ㄴ’ 받침이 뒤의 ‘야’로 옮겨져 [부냐]로 발음하되 ‘분야’로 표기한다. 그러나 보구녀관은 ‘女’의 원래 발음과 표기가 ‘녀[녀]’로, 앞의 받침으로 인해 ‘여’의 발음이 [녀]로 바뀐 것을 표기까지 잘못 적용시킨 경우가 아니다. 즉 네 글자의 한자를 원래 음 그대로 읽고 표기한 명칭일 뿐이다.

21) ‘ij’는 현대 영어에서 철자로 사용하지 않는 표기법이다. 다만 대개의 경우 ‘y’ 철자를 발음 기호 [j]로 표시하여 발화하는 점으로 보아 ‘ij’는 현대의 ‘y’와 가장 가까운 발음으로 추측된다. 또한 현대 네덜란드어에서는 ‘ij’ 철자를 통용하고 있는데, 네덜란드어의 조어 방식에 따라 ‘ij’를 이름에 쓴 사람이 미국에서는 ‘y’로 바꿔 쓰는 사례가 많다. 이를 고려하더라도 ‘ij’를 ‘y’로 치환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22) “The Korean doctors are men for men and women for women. When I opened my hospital the King sent me a name for it, which signifies ‘The House where Many Sick Women Are Cured.’ A soldier from the royal body-guard was granted me previously so I had every mark of His Highness’ favor. This opened all doors, and I was welcomed in the homes of the nobility, as well as the humble.…Altogether, the treatment I received was more than royal, as it was prompted by genuine affection.” Northwestern University, Alumnae of the Woman’s Medical College of Chicago 1859- 1896 (Chicago: H.G. Cutler, 1896), p.144.

23) “ “Salvation For All Women Institution” is the meaning of the native name hanging over the entrance to our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s Hospital in Seoul, Korea.” Cutler, Mary M., Edmunds, Margaret J., “Po Ku Nyo Koan,”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8 (1906), p.8.

24) 1886년 한-불 수호통상조약의 체결 이후 천주교 포교의 자유가 승인되었지만 여전히 정정이 불안하였기 때문에 1887년까지도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의지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데에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25) 『高宗實錄』 卷22, 高宗22年 2月 29日 己亥, “議政府啓 惠民, 活人兩署, 旣已革罷矣. 其在朝家廣濟之意, 殊涉欠缺. 另設一院, 以廣惠稱號, 令外署專管, 堂郞差出及一竝事務, 竝令該衙門草記稟處何如? 允之.”

26) 일기 원문은 다음과 같다. “It was called Hay Min So 惠民署. It had over 1,000 officers attached and these are now complaining because their positions are taken away. All of this was abolished to make way for the new hospital, which has a new name also Kwang Hay Won 廣惠院 or virtue civilized house.”(김원모, 2017: 463)

27) 제중원으로 명칭을 변경한 일자에 대해서는 1885년 4월 21일(음력 3월 7일)로 보는 설도있다. 이광린은 『통서일기(統署日記)』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4월 21일에 제중원으로 개칭 되었다고 주장했다(이광린, 1986; 최재건, 2016).

28) 『高宗實錄』 卷22, 高宗22年 3月 12日 辛亥,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以 “廣惠院改稱濟衆院”啓.”

29) kjmh-28-3-685i2.jpg

30) 『論語』 卷6 雍也篇,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31) 『正祖實錄』券48, 正祖22年 4月 25日 己未, “今下別製濟衆丹一千錠, 廣濟丹三千錠, 淸心元一百丸, 分給守宰等處.”

32) 「勅令 病院官制 中 改正에 關한 請議書」, 『各部請議書』, 光武 4年 5月 8日.

33) 이경화(李景華, 1721-?)는 김포 이씨 11세손으로 자는 원량(元亮)이며 평안도 성천 출신으로 추정된다. 영조대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생의 한계로 인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일생을 의업에 종사하였던 유의(儒醫)였다.

34) 보구녀관과 마찬가지로 광혜여원도 “광혜녀원”이 올바른 명칭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본 지면은 보구녀관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고 있고, 관련 사료를 통하여 실제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에 편의상 통용되는 명칭인 “광혜여원”으로 기재하였다.

35) 일본관의원은 재조선 일본인의 위생 보호를 명목으로 설립된 병원 중 하나로, 1883년 서울 일본공사관 옆에 지어졌다.

36) 숙박시설을 의미할 경우 원(院)은 관(館)보다는 공공시설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기원은 대개 고려시대의 사찰을 전용한 것이었다고 한다(최연식, 2016:1-34).

그림 1.
1890년 당시의 보구녀관 건물
Figure 1. Po Goo Nyo Goan[4] building in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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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보구녀관 한자 표기
Figure 2. The marking in Chinese character of Po Goo Nyo Go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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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대한매일신보』의 광고
Figure 3. Advertisement from 『The Korea Dail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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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대한매일신보』의 기사
Figure 4. Article from 『The Korea Dail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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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보구녀관의 로마자 표기와 번역명 ①
Figure 5. Romanization and English translation name of Po Goo Nyo Goan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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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보구녀관의 영문 표기와 번역명 ②
Figure 6. Romanization and English translation name of Po Goo Nyo Goan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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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커틀러의 보고서
Figure 7. Report written by Mrs. Cut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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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커틀러와 에드먼즈의 보고서
Figure 8. Report written by Mrs. Cutler and Mrs. Edmu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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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1885년부터 1900년까지의 교파별 선교병원
Table 1. Missionary Hospitals by denomination from 1885 to 1900
교파 병원명 지역 설립연도
미국북감리회 시병원 서울 1885
보구녀관 서울 1887
기홀병원 평양 1892
광혜여원 평양 1894
미국북장로회 제중원 서울 1885
제중원 대구 1898
미국남감리회 구세병원 원산 1900
미국남장로회 야소병원 군산 1895
야소병원 목포 1895
야소병원 전주 1896
영국성공회 성누가병원 인천 1891
성마태병원 서울 1892
성베드로병원 서울 1892
캐나다장로회 구세병원 원산 1899

(조우현 외, 2002: 27; 이만열, 2003; 여인석 외, 2018: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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