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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9(3); 2020 > Article
미키 사카에의 연구와 생애를 통해 본 한일 의학 관계사†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life and research of Miki Sakae, a historian of Korean medicine,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tudy of medical history in Korea and Japan. Miki’s investigation and research on old medical books conducted in colonial Korea became the starting point and foundation for the study of the history of Korean medicine. However, due to the peculiarity of being ‘a Japanese who studied the history of Korean medicine,’ there was no sufficient research on him.
The gist of his research can be summed up as: ‘You cannot talk about Japanese and Chinese medicine without knowing the medicine in the Korean Peninsula.’ This was a challenge to the Japanese medical history circles that tended to understand and interpret the history of medicine centered on their own country. Miki defines the Korean Peninsula as an important place in East Asian medicine, based on the understanding that medicine does not spread from one center to other places, but moves and mixes with other systems of medicine like water flows and creates new things through it. By paying attention to the medical interrel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which had continued from the ancient times, Miki recognized that the problem of disease is a problem of culture and people. In particular, focusing on infectious diseases in Korea, he attempted to prove the influence and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Since Miki lived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was a physician who majored in Western medicine, his study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 was rather limited. However, despite the Japanese medical community’s indifference after the defeat in the Second World War, he did his best to introduce the value of traditional Korean medicine to the academic community in Japan and left meaningful data to the future generations. This study focuses on medical studie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history of Korea-Japan relations that Miki pursued, and explores the changes in his attitude toward Korean medicine, the patterns of exchanges that is found in the history of Korean-Japanese medicine he studied, as well as the spread of infectious diseases.

1. 서론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학지(學知)가 일본 제국주의 지향에 입각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내면화하기 위한 보조선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관련 연구도 적지 않다[1]. 그러나 최근 일제강점기를 식민/피식민의 권력/저항, 지배/피재배 등의 이분법적 구조로 규정하는 연구와 달리, 당시 생을 영위했던 ‘사람’에 주목하여 시대의 다양성을 바라보는 연구가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크 카프리오(Mark E. Caprio, マーク, 2019)나 후지타니 다카시(Fujitani Takashi, 후지타니, 2019) 등의 연구는 한국의 식민지 시기의 사각지대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들은 일제 정책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한국인에 주목하여, 당시 한국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일본의 정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한 것에 대해 고찰했다[2]. 한편 우치다 준(内田じゅん)은 19세기 말부터 한반도에 진출한 재조일본인에 주목했다. 그는 ‘제국의 브로커’라는 관점에서, 재조일본인들이 일본의 국가권력을 끌어들이는 방식과 이를 위해 당시 한국인들과 맺는 협력 혹은 배제적 환경을 살펴보고 있다(우치다, 2020).
재조일본인들은 식민지 거주 일본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들의 삶의 궤적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잊고 싶은 과거 속 유물처럼 여겨지기 쉬웠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학문 활동을 했던 일본인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을뿐더러 이들의 활동은 대개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패전 이후의 연구 활동 단절로 연구적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성’에 대해 한국의학 사료를 가지고 부단한 조사와 연구를 실시한 미키 사카에(三木榮, 1903-1992)라는 재조일본인에 주목한다.
미키 사카에는 1928년 경성제국대에 부임한 후, 1935년부터 도립수원의원장을 지내다 1944년 일본으로 귀환한 내과 의사이자 의사학 연구자이다. 그의 의사학 연구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상황이 만들어낸 것으로, 이 시기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한정되거나 패전에 의해 단절되지 않고 연속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미키의 한국의사학 연구의 중심은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인의 삶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관계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목적성을 가지거나 주관적 사고에 바탕을 둔 연구가 아니라, 사료를 통해 관계성을 증명해가는 그의 연구 방식은 일제강점기나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변함없는 맥락에서 한국의사학 연구를 추진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미키 사카에에 관한 연구는, 한국의 고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의학의 역사에 대한 기록인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3]에 대한 개관과 그의 생애에 대한 소개 정도이다. 신동원은 한국의사학이라는 학문분야를 미키가 개척했고, 그의 해석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의사학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를 가진다는 점을 인정한다(신동원, 2005: 75-91).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키가 동아시아의사학의 정리 방편으로 한국의사학에 접근한 점과 한국의사학을 사대주의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한 점, 그리고 개항 이후 한국의학 발전은 일본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한 점을 들어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의사학 분야 권위자인 김두종의 인생과 의학적 성취에 대해 비교하며 그 업적의 공과에 대해 언급했다(신동원, 2012: 83-113). 그리고 김호는 한국의학 관련 서적을 만들게 된 미키의 개인사와 연구 논문 소개, 그리고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 개관을 통해 미키연구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해주고 있다(김호, 2005: 101-122). 한편 일본에서는 시라이 준(白井順)에 의한 미키의 의학 사상과 문고의 조사 내용 등을 확인할 수 있다(白井順, 2009: 5734-5742; 2011: 495-528).
미키는 1992년 12월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같은 해 5월에 후학들이 미키의 자택을 방문했다. 이때 미키가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의학사에 있어 한국과 일본의 ‘관계성’이었다. 미키의 꾸준한 연구성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일본학계에서는 한국의학의 일본과의 관계성에 대해 외면했다. 미키는 임상의로서 실제 ‘조선’에서의 경험과 역사적 기록을 면밀히 고찰한 ‘조선전염병사(콜레라, 마진 등의 한일관계사)’를 일본에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안타깝게 여겼다. 또 그는 『향약집성방』(1433), 『의방유취』(1477), 『동의보감』(1613)과 같은 “대의서(大醫書)”가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일본의 의학은 조선의 의학”이라며, “조선반도 의학을 모르고서는 섬나라 일본 및 대륙 중국의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후학들에게 재차 강조했다(長門谷洋治, 1993: 247-248). 이를 통해 한일 의학의 관계성을 밝히고 소개하는 것이 그의 평생의 과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학들은 미키의 용모가 한국 노인처럼 보였다고 언급하고, 그의 집 거실에 허준의 초상이 걸려 있을 정도로 그의 연구 인생의 대부분이 한국의사학을 대변한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의 한국과 일본 의학의 관련사에 대한 연구에는 주목하지 않았다[4].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미키의 의학 연구의 핵심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미키가 가장 흥미와 열정을 가지고 연구했던 ‘조선전염병사’를 통해 드러나는 한일 간의 관계성, 실제 일본인 미키의 연구 인생이 대변하는 한국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이러한 의학연구를 바탕으로 형성된 미키의 의학 사상에 대해 살펴본다.

2. 질병의 흐름, 의학문화의 흐름

1) 미키의 한국 감염병사 연구

문화를 매개로 한 사람들의 관계와 질병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미키가 가장 흥미를 가지고 조사 연구했던 분야는 감염병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조선전염병사’ 연구는 미키가 단순한 서지적 연구에서 벗어나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람과 질병의 연결고리와 여기에서 파생되는 사상과 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게 된 근거였다.
  • 동아시아에서 반도 조선과 섬나라 일본 사이의 전염병 유행전파에 대한 고찰은 가장 흥미 있고, 역(疫)학 상 중요한 지식을 제공한다(三木榮, 1968: 349).

미키는, 한나라의 운명과 개인의 생명은 감염병에 크게 좌우되며, 이에 관한 연구는 자신의 연구 중 “가장 흥미 있고 중요한 연구”라고 강조했다(三木榮, 1956: 158). 실제로 감염병 관련 연구는 ‘조선질병사’ 연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마진이 22-23년을 주기로 한국과 일본에 동시기 대유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펄쩍 뛸 정도로 기뻤다”고 한다(三木榮, 1956: 159). 덧붙여서 이헌길(李獻吉)의 독자적인 치료법을 기록한 『마진방(痲疹方)』은 이 분야에 있어 획기적인 서적이라며, 마진에 대해서는 “압도적으로 조선이 우위”에 있었다고 언급한다[5]. 미키는 ‘일선마진사’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역병전파통칙(疫病伝播の通則)’을 세웠다.
  • ○ 병의 원인균이 일정한 곳에 서식하면서 온도 습도 계절 등에 맞추어 증식하고 적당하게 전염력을 강화하여 밖으로 드러날 호기를 얻어 전염이 시작된다(전염의 1조건).

  • ○ 이것이 전염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인류가 다수 집단이어야 하고 전파에는 교통의 빈번성이 큰 역할을 하며 여기에는 직접성 근접성이 중요하다(전염의 2조건).

  • ○ 과거 용이하게 전염된 것도 후에 면역이 생기면 발생률이 감소하고 과거에 대유행을 일으켰어도 현재 그 병의 원인에 대한 치료 및 예방위생학이 발달한 곳은 유행을 막을 수 있지만 그렇지않으면 다시 유행한다(전염의 3조건) (三木榮, 1968: 349-359).

미키는 한국의 감염병사를 밝히는 것은 동아시아의 문화 및 사람의 이동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단편적 기술에 그치는 한국의서의 의학정보를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이조실록』 등의 역사서를 통해 보완했다(三木榮, 1940: 23). 1940년 1-11월 게재한 「조선전염병사(朝鮮傳染病史)」와 패전 후 저술한 「조선질병사(朝鮮疾病史)」(1-4),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의 「조선질병사」 부분은 미키가 고찰한 한국 감염병사의 구체상을 보여준다. 1940년의 「조선전염병사」가 한중일 비교 연표 형식이라면, 「조선질병사」에서는 감염병의 종류를 구분하여 연대순으로 기술하고 이에 대한 미키의 해설이 첨가된다. 미키는 한국 유사 이래부터 한일병합까지의 질병사를 다루며 한국과 관련된 중국 및 일본의 질병관계도를 함께 제시했다.

2) 고대-근대시기에 이르는 감염병 한일 관계사

의학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던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의 역사서에 특필되는 것은 ‘역병(疫病)’이었다. 미키는 “역병은 급격하게 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사회에 엄청난 공포를 주었기에 나라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三木榮, 1954a: 52)”며 한국의 역사서에서 역병에 대한 기술이 빈번한 것에 대해 설명한다.
‘역(疫)’은 널리 유행하는 감염병으로, 이 병은 고대로부터 존재했고, 중국은 『주례(周禮)』, 『여씨춘추(呂氏春秋)』, 『예기월령(禮記月令)』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주(周)시대에 유행했다.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대 한국의 ‘역병’ 유행은 백제 온조왕(溫祚王) 4년이고, 이에 이어 신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19년, 신라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9년이다(三木榮, 1954a: 56). 그 후 통일신라 말기까지 조그마한 유행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많은 사람을 위협한 수많은 ‘역병’의 유행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상대의 기록에서 보이는 ‘역병’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말라리아, 설사, 두창(痘瘡), 마진(痲疹) 등 다양한 종류를 포괄하고 있었다. 6세기 중후반 일본에서 ‘역병’이 일어난 기록이 있는데, 미키는 백제에서 불교 전래를 위해 사람과 불상 등이 이동한 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고찰한다(三木榮, 1954b: 47; 1991b: 3-4). 그리고 8세기 일본에 두창이 유행했는데, 『본조세기(本朝世紀)』(1150-1159), 『속고사담(続古事談)』(1219), 『개낭초(蓋囊鈔)』(1445)를 통해, 이는 신라의 사람과 물건이 일본으로 들어가면서 유행한 것이라고 파악한다[6]. 즉 문화와 사람의 흐름은 질병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8세기 중반, 9세기 초 일본에서 일어났던 ‘역병’ 또한 반도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미키는 ‘역병’의 일본 전래가 한반도에서 규슈(九州) 북부로 가거나 중국에서 직접 규슈로 가거나 했다는 두 가지 설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역병’은 사람끼리의 전파가 유력하기 때문에 지역적 근접성이나 교통의 빈번성이 중요 조건이라고 지적하며(三木榮, 1954b: 48-49), 대륙의 직접 전파 보다는 반도를 통한 전파에 그 무게를 싣고 있다.
고려시대는 신라의 지식을 계승하고 송나라 의학의 영향이 강했다. 문종(文宗) 때부터 의종(毅宗) 말기까지 상당히 풍부한 자료가 중국에서 유입 사용되어 의학이 융성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전 자료는 빈약하다. 미키는 유일한 현전 자료가 고종(高宗, 1214-1259) 시기에 만들어진 『향약구급방』인데 이를 통해 당시 주요 병명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극소수이지만 『고려사』나 그 외 문헌의 ‘역병유행사’를 통해 고려시대의 질병사와 주변국가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三木榮, 1955: 26, 32).
열람할 수 있는 자료가 풍부했던[7] 조선시대 감염병사는 미키의 감염병사 기술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특히 일본으로의 전파가 집중적으로 소개된다[8]. 그는 여기에서 두창의 근원지와 이것의 한반도를 거친 일본으로의 전파, 마진의 한일 관계사, 일본에서 유행한 콜레라 유입의 역사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한다.
  • 조선전염병사에 대해 명확히 밝히는 것을 통해 동아시아 전염병 유행의 양상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일본 분세이(文政) 5년(1822년-필자주) 콜레라의 제 1차 대유행은 「이조실록」을 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조선반도에서 쓰시마를 거쳐 시모노세키로 전염되어 전국으로 퍼진 것을 알 수 있다. 반도의 콜레라 유행사가 완전히 불명했기에 일부 학자들이 나가사키(長崎)침입설을 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 또한 반도에서 유행한 마진(痲疹)은 일본에서의 마진 유행과 그 연도가 완전히 일치하여 그들의(조선-필자주) 유행사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에도시기의 마진 유행은 대부분 반도에서 들어온 것이다. 유행성 감기(感冒), 두창(痘瘡), 우역(牛疫) 등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관련성이 인정된다[9].

일본 의사학계에서는 콜레라가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 전체로 유행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미키는 이 질병이 뱅갈 지방(1817)-버마 타이 말라카반도(1819)-자바섬 등의 남양제도, 중국의 광동지역, 영파, 절강(1820)-중국 북경 및 중국전체에 퍼져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평양, 경성, 경상도(1821)-겨울을 지나 다시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 전체에 대유행한 후, 일본의 쓰시마, 시모노세키(下関)로 이어진 유행양상을 밝혀냈다(三木榮, 1991b: 13). 이 외에도 흥미로운 자료들이라며, 조선에서 유행했던 유행성독감, 성홍열, 유행성외척수막염, 매독, 임질, 한센병 관련 기록들을 소개한다(三木榮, 1956: 160).
미키는 한국의학의 발전 원인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의학을 받아들이고, 자국의학과 대륙의학을 종합하여 의학서를 번역 연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국 내에서 많은 의서를 간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하면 일본의학은 “훨씬 뒤떨어진 수준”이었다고 평가한다(三木榮, 1991a: 190). 또한 임진·정유난 때 일본군이 조선에 침입하자마자 조선의 문예기술을 탐냈고, 회군 때에는 특히 서적을 주로 가져갔으며[10], 그 중 의학서는 일본의학을 연마하는 데에 기초로 활용하여 에도(江戸) 초기 의학발달에 기여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이조실록』에 기술된 일본과의 의약교섭의 역사뿐만 아니라(三木榮, 1991a: 136-137), 한국산 약재의 일본으로의 도래(三木榮, 1991a: 329-333), 강항의 『간양록(看羊祿)』 및 일본의 『일본의학사(日本醫學史)』, 『황국명의전(皇國名醫傳)』, 『일선사화(日鮮史話)』, 『행림잡화(杏林雑話)』, 『의잉(醫賸)』, 『명의약전(名醫略傳)』, 『일본박물학연표(日本博物學年表)』, 『침구극비전(鍼灸極秘傳)』, 『속중국의학서목록(続中國醫學書目)』, 『방장의학사(防長醫學史)』, 『조선약명해(朝鮮薬名解)』, 『의가인명사전(醫家人名辞書)』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 시기 한국(및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귀환한 중국인)과 일본의 의학 교류 및 관계된 인물들을 소개한다[11].
미키는 이러한 의료문화 교류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는,
  • 인적 유전(流伝)의 면에서는 낙랑 대방 시대 및 삼국정립시대에 수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특히 텐지(天智)천황 때에 백제 고구려의 망명자가 많이 일본으로 귀화했고, 이들 귀화인은 문화개발 산업발달에 더욱 박차를 가해 엄청난 문화 흥륭을 초래했다. (……) 특히 기술-의학이 이들 귀화인 및 그 자손 중의 의인(醫人)에 의해서 개발 발전되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三木榮 1991a: 36-37, 하선은 필자에 의함. 이하 동).

    라고 언급하며 의학 분야의 ‘사람의 흐름’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들이 일본의 ‘기술 의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도에서 열도로 흐르는 의학문화의 흐름은 근대 이후 역전된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이 맺어지는 시점에서 수호조규부록 및 통상장정의 조인을 위해 조선을 방문한 외무대신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가 조선에서는 이미 소실된 『의방유취(醫方類聚)』(266권 264책, 복각판)를 선물했다는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三木榮, 1991a: 268). 전쟁을 통해 뺏긴 한국의서가 외교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후 경제적 돌파구를 찾기 위한 일본인들의 한국 유입사례는 늘어났고, 감염병 유행 또한 빈번해 졌다[12].
미키는 1879년 3월 일본 애히메(愛媛) 현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유행한 후 한반도로 유입된 것을 확인하였다. 같은 해 6월 부산에서 콜레라가 유행하여 점점 북상하였다. 이 시기 부산에서 처음으로 마에다 겐기치(前田献吉)에 의해 방역 작업이 실시되었는데, 그는 동래부사 윤치화(尹致和)에게 부탁하여 절영도(絶影島)에 소독소(消毒所)와 피병원(避病院) 설립의 허가를 얻어 운영하였다(三木榮, 1991a: 266).이후 1886년, 1890년에도 한반도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마에다에 의해 만들어졌다가 폐쇄되었던 피병원 병사가 다시 증축되기도 했다.
미키는 갑오개혁(1894) 이후 한국이 근대 의학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가장 표면화된 것이 ‘악성유행성전염병’에 대한 ‘방알법(防遏法)’이었고, 이것의 실행에는 일본과 구미의 개입이 상당하며, 근대 한국의학 개발에 큰 자극이 되었다고 전한다(三木榮, 1991a: 265). ‘전염병예방제규칙’이 공포된 1895년은 한반도에 콜레라가 대유행했는데, 이는 청일전쟁 때 만주에 있던 일본군에 의한 전파였다고 한다. 이후 1902년 중국에서 콜레라가 한반도로 들어와 유행했을 때는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방알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관립병원인 광제원(廣濟院)에서 방역을 위한 임시 위원을 차출하여 구료를 담당했던 것에 대해, 미키는 종두법 보급과 함께 특필해야할 사항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미키의 의학사 기술에는 조선 말기 이후 한국의학의 일본으로의 영향에 대한 내용은 없다. ‘의료 문화’로 여겨지던 한국 전통의학은 일본 전통의학과 함께 수면 아래로 잠겼다. 개항 이후 한국→일본으로의 영향은 멈춰지고 말았지만, 일제강점이라는 상황 아래에서도 통치 권력의 사각지대는 존재했고, 의료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전통의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때로는 이것이 일본인들이 예상치 못한 의료적 효과를 보기도 한다(慎蒼健, 2010: 18-19). 그리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1920년대는 전통의학 기반의 의료기관 설립의 차원에서 사립 피병원 건립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박윤재·신동환, 1998: 37-45). 또한 당시 도심 외부나 농촌의 한국인들은 서양의학적 치료보다는 여전히 전통의학 치료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키는 이러한 실체적 한국인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미키의 일제강점기 한국의학사 기술에는 서양의학을 선취한 일본의학이 조선으로 유입되는 ‘역전 현상’, 감염병에 대한 일본의 ‘검역 단속의 강화’가 주로 다루어진다[13]. 미키의 일제강점기 의학사 기술의 기준은 서양의학이었다. 따라서 신동원에 의해 비판을 받는 것처럼, 한국 근대의학의 형성과 발전을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가두었던 것이다. 이 지점이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 서양의학 전공자인 미키의 한계였다. 그러나 미키의 연구 인생에 있어 ‘의학문화의 한일 관계성’은 떼어낼 수 없는 과제였기에 패전 이후 이에 관해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다음 절에서는 연구자로서 미키 인생이 가지는 한국의학과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본다.

3. 미키의 한국의학 연구의 과정

처음 미키(<그림 1>)의 조선에서의 의학사 연구의 성격은 여느 재조일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엘리트 지식인의 식민지 파견은 중앙(동경)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거리감, 일본 열도가 아닌 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이라는 소외감을 유발했다. 따라서 미키는 경성제국대 부임과 동시에 ‘일본인이 조선에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그는, “1928년 봄 규슈대학에서 경성대학 내과교실로 전근한 이후에, 조선으로 온 이상 하릴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조선의학사 연구를 이뤄보고자 하는 뜻을 세웠다”(三木榮, 1991a: 1)고 한다. 그의 말투에는 자의적으로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과 당시 이 곳은 그가 내과의사로서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는 뉘앙스가 비친다.
미키는 자신의 관심과 ‘조선’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을 살려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는 학생시절 조부의 영향으로 고의서(古醫書)를 봤던 경험이 있어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규슈의대 학부시절 의사학 관련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성제국대로 가기 2년 전 1926년에 일본의사학회에 가입하였다. 당시 일본의사학 분야의 대가로는 『일본의학사(日本醫學史)』(1904), 『일본질병사(日本疾病史)』(1912)를 저술한 후지가와 류(富士川游, 1865-1940)가 있었고 후학들은 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三木榮, 1987:73).
미키는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서 보게 된 조선판 『신응경(神鷹經)』을 근거로, 박사학위를 받기 전년인 1931년 10월, 『중외의사신보(中外醫事新報)』에 「조선판 신응경을 통해 본 일선의학의 교섭」을 발표한다[14]. 이는 그의 한국의 학사 관련 첫 논문이다. 여기에서, “『신응경』은 조선과 일본의 의약교섭상에 중요한 문헌”이라며 한국과 일본의 ‘관계성’에 주목한다(三木榮, 1931: 491). 이 연구를 시작으로 일본에 한국의서를 꾸준히 소개하고, 의학의 흐름을 통한 양국의 관계성을 파악해 갔다(이후, 미키 연구의 원어표현과 발표순서 등은 결론 뒤에 첨부한 <표 2> 참고).
미키는 박사 학위 취득 후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월까지 본격적으로 「조선의적고(朝鮮醫籍考)」라는 제목으로 한국의서를 『중외의사신보』에 소개하였다(4년 간 수집한 자료를 15회에 걸쳐 해설과 함께). 이후 찾게 된 자료는 한국에서 거주했던 1944년까지 보충하는 형태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일본의 의사학 잡지에 소개했다. 『중외의사신보』는 1941년에 『일본의사학잡지(日本醫史學雑誌)』로 개제하였고, 이는 미키의 연구 성과를 일본 의사학계에 소개하는 주요 통로였다[15]. 여기에 게재된 미키의 논문은 다른 학자가 아직 보지 못한 자료를 처음 보는 그의 흥분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한국의사학 분야가 완전한 미개척지이고 연구가 “전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시작한 것은 조선의 풍속, 습관 그리고 일반 역사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근무하면서 만주 등의 도서관이나 일본 궁내성도서료(宮內省圖書寮), 내각문고, 제국도서관, 동양(東洋)문고, 정가당(靜嘉堂)문고, 봉좌(蓬左)문고, 교토대학도서관, 다케다교우서옥(武田杏雨書屋) 등을 방문하여 한국의서를 탐독하였다(三木榮, 1987: 73).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따로 소개해야할 정도로 한국의서는 일본에 많았다[16]. 한국 정착을 계기로 시작한 한국의학 연구가 이를 위해 더 많이 일본과 중국을 방문해야하는 아이러니에 부딪혔고, 의사로서 미키의 일본 출장은 연구를 위한 자료조사를 겸하는 것이 되었다. 그의 한국의사학 연구를 위한 자료 열람 및 수집의 과정 자체(나라 간의 이동)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성을 만들어가는 행위였다.
미키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의서의 내용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다. 1935년 5-7월, 미키는 일본과 조선에서 각각 『동경의사신지(東京醫事新誌)』와 『중외의사신보』, 『경성일보』에 지석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종두법 실시 과정을 소개한다. 그리고 1937년 9월 「의방유취」를 『조선(朝鮮)』(281호)에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재판의학(1938), 『향약집성방』(1940, 1942)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발표한다. 또한 앞서 언급하였듯이, 1940년 1월부터는 11회에 걸쳐 『중외의사신보』에 「조선전염병사」를 게재하여 한국 감염병사 연표와 이와 관련된 ‘조선방역사’에 대한 내용도 실었다.
미키는 1944년 아버지의 병 때문에 일본으로 귀환한 후 잠시 징집되었다가, 징집 해제 후 귀향하니 집이 없어졌고, 소개지(疎開先)에서 무직으로 식량을 구하면서 『조선의학사』 집필에 몰두했다(三木榮, 1956: 151). 패전 후 일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학술지는 정간되어 있고, 연구 성과를 소개할만한 장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자비출판을 시도했다. 1948년 3월 자비로 『조선의서지 종서』를 출판했고, 1949년 6월에는 오사카부립도서관을 통해 『조선의학연구도서』를 간행했다. 그리고 1950년 10월에는 ‘조선민족과 의문화’에 대한 강연내용을 자비 출판하였다.
한편 그의 대표 연구서인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는, 원고를 1948년에 완성하여 일본 문부성(文部省)에 출판비 보조신청을 했지만 실패했다. 또한 구라모토사(倉元社)나 이와나미(岩波) 출판과 같은 대형출판사에도 문의를 했으나 번번이 창피만 당하고 돌아왔다. 결국 자가출판(自家出版)하기로 결정하여 1955년 100부를 공판(孔版)본으로 제작하였다(三木榮, 1956: 151). 이는 1963년 개정하여 활판으로 간행했다. 미키는 스스로 일본 의사학계에서 주변부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17].
  • 내 책의 출판은 모두 자비출판이다. 처음에는 원조를 위해 유력자에게 찾아가기도 했지만 이 세계에도 학벌이나 세력(영향)권이라는 게 있는데, 내 경우는 그게 없었기에, 모아 놓은 고서를 팔아 출판비용을 충당했다. 여기에는 아내의 아낌없는 자금조달과 내조가 컸다. 완성된 책은 도움을 준 출판사나 고서점을 이용하여 판매했으나 출판하기 위해 든 비용의 절반이라도 들어오면 만세를 부를 지경이었다(三木榮, 1987: 76).

미키가 꾸준히 언급해왔듯이 조선의학사 연구의 핵심은 ‘조선의 의학을 모르고서는 일본의 의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不通朝鮮醫學, 不可以説日本及中國醫學)’로, 한국의학의 고유성과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영향력이었다. 다른 나라의 의학사 연구서이자 일본의 의학을 이해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책이라고 주장하는 이 저서의 내용을 일본 문부성은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일까. 한편 이와나미 서점도 일본의학사의 주요 흐름에 균열을 주는 내용, 즉 일본과 중국의학을 이해하는 데에 조선의학이 불가결하다는 내용의 이 책을 출판하기에는 미키가 가진 배경(즉, 규슈의대 출신에 조선에서 내과의로 근무한 경력 등)이 불완전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미키는 『조선학보(朝鮮學報)』(朝鮮學会)의 창간 때(1951년 5월)부터 활약했는데, 그는 이 학술지의 첫 호에서 한국의서를 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1950-60년대에 걸쳐 조선의학 관련 연구논문을 꾸준히 게재하였다. 조선학회 회보를 보면, 1951년 4월과 11월에 ‘조선의육(醫育)사 및 질병사’에 대한 연구 발표를 통해 조선의학 연구에 있어서 독보적인 성과를 소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10-12월에 걸쳐 『동경의사신지』에 「동아시아 역학변천고」(1)-(3)」를 게재했다. 그리고 1953년 조선학회에서 ‘동아시아에서의 콜레라 전파사-조선유행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연구발표를 하고, 같은 해 10월 「이조에서의 콜레라 유행」을 『조선학보』에 게재했다. 이를 통해 일본의학사에서 통설로 자리 잡힌 감염병의 전파경로에 대한 기존학설을 뒤엎었다(三木榮, 1953: 155-173). 또한 미키는 1954년 3월 『일본의사학잡지』 복간과 동시에 첫 호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질병사」(1)-(4)를 연속하여 게재하였고, 동학회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미키는 일생에 걸쳐서 의사학 분야에 매진했고, 독보적인 연구 성과 제출을 통해 적극적인 학술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사학계는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 미키 인생의 마지막 해, 그의 집을 방문한 나가토야(長門谷)는 조선의학사연구 사료에 대해, “미키선생님 만의 귀중한 자료(三木先生ならでは貴重な資料)”라는 표현을 한다(長門谷洋治, 1993: 246). 마치 자신과는 동떨어진 학문세계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리고 미키의 사후, 동경대 출신의 의사이자 의사학자인 오쓰카 야스오(大塚恭男)도 미키가 자주 조선의학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한방진료를 하고 있는 관계상 중국의학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는 있는데,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하는 조선의학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大塚恭男, 1993: 258)고 한다. 오쓰카는 동양의학 연구 활동을 지속해왔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993년의 시점에서도 그가 조선의학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마야나기 마코토(真柳誠)는 미키로부터 “학은(學恩)”을 입었다고 언급한 동양의학사 학자이다. 그는 미키의 저서를 보고 “논고의 광범위함과 치밀함에 바로 빠져들게 되었다(真柳誠, 1993: 54)”고 전한다[18]. 그러나 이러한 그 역시 중국-일본 관련 자료 중심의 연구를 꾸준히 해왔고, ‘조선’과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마야나기가 입은 ‘학은’은 미키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한일 의학의 관계성’에 관한 내용이기보다는,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연구 자세와 방법”(真柳誠, 1993: 58)이었던 듯하다.
미키는 학벌이나 파벌에 밀리고, 자신의 학설을 인정해 주지 않는 학계의 주류를 의식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인 의학연구를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 간행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학계를 의식하는 듯한 심경(다음 인용의 괄호 안)을 표현하면서도 이 저서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했다.
  • 의학은 자연 과학적이어야만 하지만 개인 및 그 집단의 질병제거를 대조(對照)하기 때문에 좌우로 치중되기 쉽다. 내가 취한 것은 중정(中正)이라고 생각되는 것(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치체제 사회사상을 반영하여 이것이 배양해낸 의학에 대한 기록을 전하려고 했다(三木榮, 1956: 152).

그는 자신의 연구 태도를 ‘중정(中正)[19]'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는 일제강점기나 패전 이후에도 변함없이 연구를 지속하는 동인(動因)이었다. 일본 의사학계에서는 미키가 실시한 에도시대의 후세야 소테키(伏屋素狄)의 의학자료 발견과 조사에 대해 “전후 일본의학사에 있어서 가장 질 높은 연구 성과”로 평가한다(蒲原宏, 1993: 253). 그러나 미키는 후세야 소테키와 관련한 연구실적들을 자신의 대표연구로 생각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까지도 후학에게 한일의학 관계사 연구에 대한 열정과 확신을 드러냈다.
미키의 『조선의학사』와 『조선의서지』는 1960년 영문으로 번역되어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Uppsala Universitet)으로 보내졌다. 연구초기의 중국 및 일본 우위의 관점에서 시작한 의학연구는 동아시아의 관계사를 들여다보며 한국의학이 동아시아 의학의 ‘관계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라는 것으로 변화되었고, 나아가 한국전통의학의 고유성과 우수성을 드러내는 기술을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내용은 서양으로 전해졌다. 다음절에서는 그의 한국의학에 대한 생각의 변화 과정과 연구말기의 사상적 정립에 대한 영향을 살펴본다.

4. 한국의학에 대한 자세 변화와 의학 사상 정립

미키가 한국의사학 연구를 처음 시작하면서 가졌던 태도는 일본의학 우위의 관점에서 한국의학을 부감(俯瞰)하는 형태였다[20]. 당시 일본의사학의 주류였던 후지가와 류의 ‘중국 종속적 조선의학’이라는 흐름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한국의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생각에는 변화를 보인다. 의학서 서지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단계인 1942년 11월, 「『향약집성방』고(상)」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한다.
  • 조선의학사 상 최고봉을 이루는 문헌이다. 이것은 의학사 상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사 상, 더욱 넓게는 일반 문화사 상에서도 대서특필되어야할 것이다. 내게 조선의서 중 어떤 책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본서와 「의방유취」 「동의보감」을 들 것이다. (……) 「향약집성방」은 그 서명에서도 드러나듯이 조선색이 풍부하고 더구나 그 속에 고려의방(醫方)을 포함하고 있으며 고유한 조선의 책으로서 가장 특징적이다. 의학자 박물학자뿐만 아니라 일반문화사 연구자에게도 앞의 두 책보다는 높이 평가되고 동경(憧憬)의 감정까지도 들게 하는 책이다. (……) 과감하게 이 책을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같은 연구자에게 이 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三木榮, 1942a:478-489).

여기에서 미키의 ‘조선 의학문화’에 대한 우위 인정과 존경심, 그리고 이 책을 후학에게 알리고자하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의학서 서지작업에서 출발한 그의 연구는 의학과 관련된 조선 문화의 특출함을 인식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어서 기고하는 「『향약집성방』고(하)」에서도 이 책이 조선에 있어서 획기적인 책이라고 소개한다(三木榮, 1942b: 531-542). 처음 식민지 부임 후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고자 조선의학서를 탐구했던 시기나(1932년), 상관의 명령에 의해 시작한 「조선전염병사」 1회 차 기술 때(1940년 1월), “조선 문화는 일본 및 중국에 비해서 낮다[21]”고 평가했던 것과 다른 견해이다.
일본이 전시체제에 더 주력하게 되는 1942년 시점에서 『향약집성방』에 대해, ‘조선색이 풍부하고 동경의 감정까지 불러일으킨다’고 소개한다. 중국의학의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했던 한국의학 연구는 지석영, 이헌길,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동의보감』 등에 접하며 한국의학의 심부, 즉 한국인의 삶에 적용된 의학을 알아가는 것을 통해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쪽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22].
미키는, “조선의학은 단순한 중국의학의 모방이 아니라 반도 고유의 의학(鄕方), 반도에 유전한 대륙의학(事大醫學), 고유한 반도의학과 대륙의학이 섞여 만들어낸 의학의 공존”으로 이루어졌다고 파악한다(三木榮, 1956: 152-153). 그는 한국의학에 민족의 고유성과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영향으로 인한 혼종성이 공존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한국의 의학은 의학 그 자체만 가지고 논할 것이 아니라 이것과 결합하고 있는 사회 각 방면의 세부 사항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키의 관계적 의학 연구는 한국의학연구 후반부까지 한일 간의 의학 교류를 문화적 이해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한중일 의학 교류사 조감」에서, “문화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섬나라 일본은 선진국인 중국대륙에서부터 현교인 조선반도를 매개로하여 문화를 수입했고 (……) 서양문화가 이입됨에 따라 역전 복잡화되었고 (……) 의학도 마찬가지”(三木榮, 1961: 66)라며, 동서양 의학의 “문화적 깊은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이 글에서 미키가 특히 강조하는 점은 한국 문화의 심층부였다. 그는, “조선 문화는 표층적으로 중국문화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그것은 맞지 않다. 조선반도는 중국과 다른 지리풍토, 특히 구성하는 민족에 의해서 고유문화가 고대부터 존재”(三木榮, 1961: 67)하고 의학도 이에 준한다고 하며, 중국의학과 차별성을 지닌 ‘조선의학’에 대해 강조한다. 또한 다양한 문화적 교류와 인적 흐름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의학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언급한다.
한편 미키는 한국의학 연구 후반기에 『동의보감』의 사상과 허준에 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처음 소개한 『동의보감』 관련 연구는 1960년 7월 「조선도교의학-동의보감으로 보다」(『조선학보』 16)이다. 여기에서,
  • 종래의 의론(醫論)이 가진 공상적인 부분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의(醫)가 진정한 의가 되게 하기 위해 궁극적인 이치를 잘 파악하여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 의계의 전 지식을 결집하고 그 해명에 도교의 실용주의를 채용했다(三木榮, 1960: 75).

고 하며, ‘진정한 의(醫)’를 실현하기 위해 채용된 도교 실용주의에 주목한다.
미키는 1976년 가을, 홍콩 중국의학연구소 소장 진존인(陳存仁)으로부터 허준의 채색 화상사진을 받았다(<그림 2>). 그는 오랜 한국의학연구 기간 동안 본 적이 없던 허준의 화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어 기뻤다는 심경을 밝히며, 1977년 『조선학보』(83)에 「대의(大醫) 허준의 화상, 약력과 학업」이라는 제목으로 사진과 글을 게재했다. 여기에서 보이는 허준은 한국에서 제공하는(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과 다르다[23]. 현재 한국 자료에서 확인되는 허준 화상의 대부분은 동의보감을 안고 있는데, 중국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이 그림은 홀(笏)을 들고 있는 모습이고, 이목구비의 인상도 다르다. 미키는 여기에서 조선의 수많은 의학자들을 기술하면서도 쓰지 않았던 ‘대의(大醫)’라는 표현으로 허준을 극찬한다. 그러면서,
  • 난해한 일반 한방의학의 학설에 의거하지 않고 도교를 신봉하되 애매한 것을 취하지 않고 도가의 진수인 후생실용주의를 일관되게 의학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 (……)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사이에 동양의 한 귀퉁이에서 독자적인 능력으로 이루어 냈다는 것은 경탄할만하며, 허준과 같은 걸출한 의학자였기에 가능했다. (……) 한반도의 고유 의서와 자기학설을 담아 일체화된 의서로 완성했다(三木榮, 1977: 96-97).

고 언급한다. 미키는 허준의 걸출함에 감탄했을 뿐 아니라, 허준의 의학에 대해, 한국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실행으로서의 의(醫)’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후 1979년, 미키는 일본 호루푸출판사(ほるぷ出版社)에서 간행한 『세계인명사전』 「조선」 부분의 ‘허준’에 대해 기술한다. 그리고 『조선학보』와 같은 조선학 전문학술지에서 벗어나 일본의학 잡지인 『일본의사신보(日本醫事新報)』에 「대의 허준의 화상」(1984.7), 「대의 허준의 학문적 업적과 인륜시」 (1987.11), 「허준의 이념 ‘도’ 정신신체의학」(1988.8)이라는 제목으로 허준의 의학 사상을 일본 학계에 알린다.
그의 조선의사학연구 말기의 ‘의학사상’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들어서 미키가 의학의 개념을 정립하는 시기 강조했던 것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미키의 『체계세계의학사』(體系世界醫學史, 1972, 醫藥學出版)는 그가 생각하는 동서양 의학의 본질을 망라한 것인데, 서양의학사에 관한 지식은 아치와 고로(阿知波五郎)의 도움을 받았다[24]. 미키는 이 저서를 소개하는 강연에서, 의학은 각 시대나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서양의학이나 동양의학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근본에 있는 의학과 의술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의학사 연구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학문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질병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는 실용적 학문이며, 윤리적 학문이자 통합적 학문이라고 말했다[25]. 즉, 의학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며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재탄생되고, 사람과 지역을 연결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키는 의학사 연구의 근본 목적은 의학 의료의 본연의 모습, 즉 본질을 실증적으로 명확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 의사학 연구의 참 목적은 의학 의료의 본연의 모습--본질을 실증적으로 명확히 하는 것 외에 없다.(……) 의사학은 엄정한 학문으로 전의학(全醫學) 분과의학(分科醫學)을 통솔하고 대소(大所)로 향하는 큰 길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의사학 연구의 책임은 무겁다. 여기에는 「의(醫)」의 기원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변천과정을 명확하게 하고 본의(本義)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간단하게 「의」의 본질은 「자연의 생명력을 소중히 하고, 의료 윤리 하에 심신의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三木榮, 1987: 75).

이와 같이 미키는 의학의 본질을 ‘의 윤리(醫倫理)’와 상통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병을 치료하는 것 자체에 의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여겼다(三木榮, 1978: 209). 『체계세계의학사』를 통해 그가 정의한 의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그는 의학을 과학으로서의 의학(기초의학)/ 기술로서의 의학(임상의학)/ 실행으로서의 의학(응용의학)으로 대별하고, 이 중에서 의료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실행으로서의 의학’이라며, 의료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三木榮, 1971: 3-4). <그림 3>의 화살표의 방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의학을 세 갈래로 정의하고, 그 중 실행으로서의 의학은 ‘의도(醫道)’가 우선적으로 기반이 되어야만 질병을 가진 사람과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질병현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구조이다(동그라미 표시는 필자). 미키는 ‘의 윤리’가 실천되는 장에서는 사회와 개인 상호간에 생명 경외에 근거한 인간애, 인류애까지도 필요로 한다고 언급하며, ‘의도’ ‘의 윤리’가 없는 의학은 의학이 아니라고 단언한다[26]. 그는 의학 실천의 대상, 즉 사람에 주목하였고, 그 근간에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미키의 ‘질병에 앞서 환자를 위하는 마음’은 돌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가 열심히 자료조사를 하던 1940년의 시점에서도 그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이 남겨져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키는 1940년 ‘조선전염병사’를 11개월에 걸쳐 기술하였다. 11회에 걸쳐 소개되는 ‘조선전염병사’는, 1회의 개관부분을 빼고는 연대별로 왕의 이름과 발생한 감염병에 대한 역사적 기록만 간략하게 표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단 한 곳, 즉 8월호 영조(英祖)시기의 연표 다음에 시 한편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일본 도쿠가와(徳川) 시대 중기 어의(御醫)였던 미스미 료케(三角了敬)의 가훈이다.
  • 사람의 생명은 매우 소중하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슬퍼하고, 생을 돌보지 않는 자는 없다. 그 때문에 의(醫)라고 하는 것은,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아야 하고, 항상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과 말투로, 정성을 다하여 대하고, 전심을 다하여 진료하며, 절대로 싫어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의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천명을 지키는 기술이다(三木榮, 1940h: 327).

이미 이 시기 미키는 ‘의학의 근본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라는 선학의 뜻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한국의학이 기존의 의학에 더하여 수입, 혼합, 변형, 적용을 거쳐 한국인의 삶에 알맞게 실질화되는 과정을 조사 연구했던 것이다. 이는 허준의 “의(醫)가 진정한 의가 되게 하기 위해 궁극적인 이치를 잘 파악”(三木榮, 1960: 75)했던 의학정신을 극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허준 의학이 채용했던 ‘치료에 앞서 환자의 마음을 살피는 것 = 활인심법(活人心法)’이 반영된 도교적 후생실용주의 사상은 인간(환자) 생명에 대한 존중, ‘의도’ ‘의 윤리’를 추구하는 미키의 의학 사상에도 녹아있는 것이다.

5. 결론

한국의 의학 관련 연구에 미키 사카에가 종종 언급되기는 하지만 단편적이고, 그가 가장 중심에 두었던 한국과 일본의 의학 관계사, 그리고 이것이 바탕이 된 미키의 의학 사상에 대한 부분은 잘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도 피식민/식민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생산된 지적 결과물, 타국인에 의한 한국역사 혹은 자국인에 의한 타국의 역사 연구라는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미키가 식민지 위생행정의 일환으로 도출한 연구 성과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현직 의사로서 피식민지인의 실체적 삶보다는 한국의학에 관한 고서 탐구와 한일 의학의 영향관계를 규명하는 데에만 열정을 쏟았다는 한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이룬 한국의사학 연구 성과는 당시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던 한반도의 의학문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미키는 한국의학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성을 밝히고자 했던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한국의학 연구의 불모지에서 드러낸 학문적 열정과 정밀한 조사로 점철된 미키의 연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이들이 형성해 내는 문화가 질병 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연구에 있어서 ‘중정(中正)을 유지했다’는 그의 확신은 일제강점기나 패전 이후라는 전혀 다른 시대 상황 속에서도 같은 학문을 추구했다는 것으로 증명해 냈다.
마지막으로, 미키는, 그의 의학의 본질에 대한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전통의학의 근간에 있는 속성, 즉 받아들이고, 결합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실용적 치료에 접근한 측면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환자 치료에 적용하는 정신적 토대--‘실천으로서 의학’ 즉, 질병보다 환자의 마음, 의 윤리의 개념--로 승화하는 것을 통해 전통의학이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Notes

1) 국가권력의 명령 하에 식민지로 향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지식은 그 대부분이 한국(인)에 대해, 원시적이거나 ‘조선색’이 강조된 이국적인 풍취를 드러내는 경향이 강했다. 설령 내선일체라는 통치방침 속에서 ‘동화(同化)’가 이야기되더라도 그것은 일본인의 희생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고, 양국의 역사적 연관성도 일본 역사에 종속적인 형태로 묘사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식민지 제국일본의 지와 권력』 (松田利彦編, 2019)에 그간의 ‘식민지 권력과 지’ 관련 연구가 망라되어 있다.

2) 한편 윤해동(尹海東, 2004)은 식민지 권력에 포함되지 않는 회색지대를 형성하는 한국대중의 모습을 탐색하며 일제강점기를 이해하는 폭을 넓혔다. 또한 조경달(趙景達, 2008)과 조형근(2013)도 마찬가지로 일제의 권력이 다 수렴하지 못했던 한국인의 모습을 고찰하고 있다.

3) 이 책의 편집 순서와 구분은 한국 왕조의 흥망을 기준으로 일반적인 문화의 변천 과정에 따라 하였고, 거기에 각 왕조의 왕대의 성쇠에 맞추어 기술하였다. 서술방법은 상대 문헌은 일괄적으로 나열하듯 서술하고, 중세 이후는 각 왕대에 따라서 일반문화와 의학에 관한 개설을 하고, 각 의약 주요 관계사항을 덧붙여 설명하는 형태를 취했다.

4) 나가토야(長門谷)는 1992년 미키의 자택 방문 시, 거실의 벽면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大醫 허준 像’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미키의 동글동글한 얼굴이 “한국의 노인의 모습을 방불케한다”는 인상을 전한다(長門谷洋治, 1993: 246).

5) 미키는 『마진방』은 논리가 체계적이고 정확하여 반도의 마진을 논하는 자는 모두 이 책을 따라야 할 정도로 획기적인 서적이라고 언급하며, 중국 명나라의 치료법을 참고하되 자기경험을 토대로 만든 독자적인 서적이라고 언급한다(三木榮, 1991b: 48).

6) 미키는 근원지가 인도인 두창이 천평(天平) 7년(735년-필자주)과 9년 일본에서 유행했던 사실에 대해, 이는 서역지방을 거쳐 중국의 서북지역으로 전해진 다음, 요동반도(혹은 산동)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게 되고, 이것이 쓰시마를 통해 일본 전역에 퍼진 것으로 분석한다(三木榮, 1956: 158-159).

7) 임진년(1592년-필자 주) 이전의 조선 의서가 많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아시카가문고(足利文庫), 가나자와문고(金沢文庫)에도 조선시대의 책이 많이 있었는데, 특히 양안원(養安院)에는 조선의 의서가 많았다고 한다.

8) 조선시대의 감염병사 기술은 『보충수정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1991)를 참고하였다.

9) 이는 1948년 3월, 미키에 의한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 「종서(綜序)」의 기록이다(三木榮, 1991a: 3).

10) 예를 들어 일본에는 임진왜란 때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가져간 의서가 양안원 장서(養安院藏書)로 다수 소장되어 있다. 양안원은 에도 초기 의사였던 마나세 쇼린(曲直瀬正琳)의 원호(院号)로, 이를 따서 붙여진 것이다. 그 외에도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가져간 『의방유취(醫方類聚)』, 우에스기(上杉) 가문의 『제생구방(濟生救方)』등이 있다(三木榮, 1991a: 188-189).

11) 일본 역사서에 기록된 상대 한국의학의 전파 양상에 대하여는, 서기재의 「‘문화의 이동’으로서의 한일의학 교류사: 미키 사카에의 의학적 세계관과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를 통해」(2020: 103-125)에 자세하다.

12) 신동원(1989)의 「조선말의 콜레라 유행 1821-1910」에는 90년 간 중국과 일본을 통해 유행한 한국 콜레라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다.

13) 미키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접어든 한반도 의학에 대한 연구는 다음 고에서 살펴본다.

14) 미키는 이 논문을 통해 『신응경』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다음, 일본의 의승(醫僧)인료신(良心)이 이 책과 팔혈구법(八穴灸法)을 조선으로 전했다는 내용을 고증한다(三木榮 1931: 491-498).

15) 사립장진의회(私立獎進醫会)의 기관지로서 『중외의사신보(中外醫事新報)』가 발행된 이래, 1915년 일본의사학회가 새로이 발족하여 이 『중외의사신보』를 기관지로 삼았다. 이후 1941년부터 『일본의사학잡지(日本醫史學雑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1년 발행 내용에는 후지가와 류 사후, 다음 해인 관계로, 후지가와 관련 원고가 많다. 이 잡지는 1944년까지 발간되었고 1945년 1월 발간한 내용을 뺏기고 휴간에 들어갔다.

16) 미키는 1934년 「궁내성도서료 및 내각문고 소장 조선의서(宮內省圖書寮及び内閣文庫藏の 朝鮮醫書)」(『東京醫事新誌』2867号)를 발표 했고, 오사카 부립도서관의 「양안원장서목록」에 게시된 의서와 교우서옥 소장(杏雨書屋藏)의 「관의가보(官醫家譜)」(양안원)에 게재되어 있는 한의서들을 합쳐서 1951년 「양안원장 조선의서 목록」을 만들었다.(三木榮, 1951: 263-270). 여기에는 조선의서와 중국의서의 조선판, 의약관련 조선본 목록이 제시되어 있다(三木榮, 1991a: 188).

17) 미키는 자신이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규슈의 의대에 들어갔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 성과를 드러내는 데 있어 “학벌 등의 장벽”이 있었다고 말한다(蒲原宏, 1993: 253).

18) 마야나기는 동아시아의학사 연구자로, 미키에게 경도된 후 그의 자료를 꼼꼼하게 읽은 연구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미키를 방문하여,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의방유취』의 사진을 보았고, 『의방유취』를 선물로 준 것에 대해 조선 측에서 미야모토에게 보낸 감사 편지의 사진을 찍어와 학술지에 소개했다(真柳誠, 1993: 57-58). 그는 1985년 『조선의사연표』가 공간(公刊)되었을 때 『과학사연구(科學史硏究)』에 소개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대(1994), 경희대(2003)에서 개최한 학회의 초청강연에서 「한국 전통의학의 일본으로의 영향(韓國伝統醫學の日本への影響)」, 「한국 전통의학 문헌과 한중일의 상호 전파(韓國傳統醫學 文獻と日中韓の相互傳播)」에 대한 강연을 했다. 또한 서울대학 규장각 등의 고의서 조사연구(2003), 국립중앙도서관의 고의서 조사연구(2004, 2008)에 참여하기도 했다.

19)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 것, 혹은 그런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유의어로는 중용(中庸), 方正(방정), 적정(適正), 진정(真正), 순정(純正) 등이 있다.

20) 그의 초기의 연구 논문은 중국에 종속되어 독립적이지 못했던 한국의 국가적 상황을 언급하고 의학 분야에서도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三木榮,1932: 465).

21) 미키가 도립수원병원 재임 시, 조선의학상 위생행정상 근거로 삼을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상관이 자신에게 ‘조선전염병사’에 대해 조사 하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전염병사」의 서두에는 이 연구가 일본제국주의 확장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三木榮, 1940: 20-23).

22) 『향약집성방』에 대한 자료 소개는 1940년 11월부터 실시하고 있다. 1940년 11월 서물동호회(書物同好會)의 「회보」(會報)에서 「『향약집성방』 현재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 이후 1942년 4월 「『향약집성방』 해설」도 이 책의 기본적 사항을 소개하고 난 다음의 평가이다.

23) 한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허준의 영정은, 한의사이자 화가인 최광수씨가 1988년 제작한 작품으로, 1991년 국가지정표준영정으로 지정되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24) 아치와 고로는, 미키가 종종 친한 친구이자 서양의학사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언급한 존재이다(三木榮, 1971: 2). 아치와는 『근대일본의학-서양의학수용의 궤적(近代日本の 醫學―西洋醫學受容の軌跡)』(1982, 思文閣出版)을 통해 서양의학의 일본으로의 영향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25) 미키가 말하는 의학사는, 의학이 인류의 공유재라는 이념 하에, 자연계·인간계에 나타난 의학·의술·의료의 사적(事蹟)을 탐구하고, 이것을 기록하고 체계를 세워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를 연결하는 실리법칙을 탐구하는 것이었다.이는 연구 및 진료 상의 지침이 되는 역사적 자료이자 의학 본체의 역사이고, 전(全)의학의 통합지식으로, 여기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은 의도(醫道)라고 주장한다(三木榮, 1971: 7-8).

26) 그는 1979년 1월 『일본의사학잡지』에 「의의 핵심은 윤리(醫の中核は倫理)」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27) 이 표는 『조선학보』 총목차, 『중외의사신보』, 『일본의사학잡지』, 『일본의사신보』, 일본의사학회(日本醫史學会)자료실, 및 김호(2005)의 논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그림 1.
미키 사카에
Miki Sak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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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보국숭록대부 양평군 허준 상(輔國祟祿大夫 陽平君 許浚像)
Portrait painting of Heo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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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미키 사카에의 「의학의 체계(醫學の体系)」
Miki Sakae's 「System of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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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한일 간의 의학상 교류 인물
People who have medically exchanged between Korea and Japan
이름 행적
1 구야마 도우세이(九山道清, 귀화 명, 본명 미상) 사가(佐賀)에 거주. 의약관련 저술 및 수많은 환산원단(丸散円丹- 동그란 형태의 환약)의 약 처방을 만듦.
2 정죽오(鄭竹塢) 조선의 학자. 의학으로 하스이케 번(蓮地藩)의 나베시마 나오즈미(鍋島直澄)를 섬겨서 땅을 하사받음.
3 장고(張膏) 명나라 사람으로 여겨짐 포로로 일본으로 건너가 기쓰모토 류(橘本流)의 안과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히데요시의 허락을 받아 조선으로 귀국함.
4 맹이관(孟二寬) 명나라 장병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의관으로 활동.
5 이경택(李慶宅, 일본명은 高 本慶宅) 일본으로 끌려 간 포로 중 이종한(李宗閑, 경상남도 인동(仁同)의 현감)이 자기 아들 경택을 가신으로 섬길 수 있도록 의뢰하여 경택은 의학을 배워 나중에는 시의(侍醫)가 됨.
6 강항(姜沆) 진주 사람으로 포로가 되어 후시미(伏見)에서 4년간 지내다 조선으로 돌아감. 옥중에서 죄수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적은 『간양록』을 저술하고, 일본에 주자학을 전했으며, 요시다 소준(吉 田宗恂)의 저서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작성함.
7 김덕(金德) 포로로 사쓰마(薩摩)에 끌려간 본초(本草)에 뛰어난 조선의 의사.
8 김덕방(金德邦) 조선의 관의. 나가타 도쿠혼(永田徳本)에게 침구술의 비법을 전수함. 일본의 침구술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 내용이 나중에 기무라 모토사다(木村元貞)의 『침구극비전(鍼灸極秘傳)』에 실림.
9 임이관(林二官) 이관(二官)은 외국 관리라는 의미, 명나라 사람으로 추측됨. 귀에 관한 질병에 대해 능통함.
10 이가(李家) 조선의 장군 이복남(李福男)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을 포로로 데리고 와 이가(리노이에)라는 성을 하사함. 이성현의 두 아들이 의업에 종사하고 자손 대대로 의술을 가지고 모우리(毛利) 가문을 섬김.
11 박씨(朴氏, 朴方貫) 조선 통역관(귀화 포로)의 자손인 박방관(朴方貫)이라는 인물, 본초학자 소한(曽槃)에게 본초학을 배워 소한이 권유하여 간세이(寬政) 9년(1797년) 『동의보감』에 수록된 약명언문에 음훈을 달아 일본어로 해석하여 『조선약명해(朝鮮藥明解)』를 저술함.
12 에무라 무네토모(江村宗具) 의학을 하타 소우하(秦宗巴)에게 배우고, 가토 기요마사를 섬김. 전쟁 때 조선으로 간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음.
13 마나세 겐사쿠(曲直瀬玄朔) 일본의 명의, 이주(李朱) 의학을 널리 펼침. 임진왜란 때 종군의가 되어 모우리(毛利耀元)의 병을 고쳤고, 수많은 의서 중 조선에 관한 내용도 있음.
14 고우노 덴지(河野治伝) 일본의 의사로, 조선에서 「삼인방(三因方)」을 얻어 가지고 와 나가사키에서 의업을 펼침.
15 사카 조케이(坂淨慶) 유명한 의사 집안(坂 가문) 사람으로 분로쿠(文禄)난(임진왜란) 때 히데요시를 치료한 기록이 있음. 조선에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음.
16 린사이(琳斎) 임진년 가을에 조선 왕자(臨海君)를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음.
17 요시다 소준(吉田宗恂) 그의 저서 『역대명의전략』에 강항의 서문을 실음.
18 이리에 요리아키(入江頼明) 히데요시의 의관에게 침술을 배우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람 오림달(吳林達)의 치료법을 알게 되어 이리에류(流) 침과(鍼科)의 원류가 됨.
Table 2.
미키 사카에의 한국의학사 관련 연구목록[27]
Miki Sakae's Research List on Korean medical history
연도 논문・저서 제목(원어) 수록 학술지 저서 출판처 비고
일제강점기 연구결과물
1 1931.10 조선판 『신응경』을 통해 본 조선과 일 본의 의학교섭(朝鮮版『神鷹經』を通して見た日鮮醫學の交渉) 『中外醫事新報』 (1176호) 조선관련 첫 연구
2 1932.11-1935.1 조선의적고(朝鮮醫籍考) 『中外醫事新報』 (1189호~) 15회에 걸쳐 수록
3 1934 궁내성도서료 및 내각문고 소장 조선 의서(宮內省圖書寮及內閣文庫藏の 朝鮮醫書) 『東京醫事新誌』 (2867호)
4 1935.5 조선종두사화(朝鮮種痘史話) 『東京醫事新誌』 (2928호) 1935년은 지 석영선생이 타개한 해임
5 1935.6 조선종두사(朝鮮種痘史) 『中外醫事新報』 (1220호)
6 1935.7 조선종두사화 지석영 선생을 그리며 (朝鮮種痘史話 池錫永先生を偲んで) 『京城日報 朝刊』
7 1935.11.122. 조선의적고 보유(1-4)(朝鮮醫籍考 補 遺 其一~其四) 『中外醫事新報』 (1225,1226, 1238, 1257호) 4회에 걸쳐 수록
1936.12
1938.7
8 1936.3 『산림경제』고(『山林經濟』考) 『朝鮮』(262호)
9 1936.5-7 경기도 도립 수원의원 25년사(京畿道立水原醫院 二十五年史) 『中外醫事新報』 (1231-1233호)
10 1936.10 경기도 도립 수원의원 기념 전람회 목록-조선의서 등(同右記念展覽會目錄-朝鮮醫書など) (京畿道立水原)醫院版
11 1937.9 『의방유취』(『醫方類聚』) 『朝鮮』 (281호)
12 1938.1 조선의 재판의학(朝鮮の裁判醫學) 書物同好會 「冊子」
13 1938.3 『사마방목』에 대하여(『司馬榜目』に就いて) 書物同好會 「會報」(3호)
14 1940.1-11 조선전염병사(朝鮮傳染病史) 『中外醫事新報』 (1275-1285호) 11회에 걸쳐 수록
15 1940.12 『향약집성방』 현재본(『鄕藥集成方』 現在本) 書物同好會 「會報」 (10호)
16 1941.6-7 조선의서지 약해(朝鮮醫書誌 略解) 『臨床文化誌』
17 1942.2-3 조선의적고 보유 5(상)(하)(朝鮮醫籍考 補遺 其五(上)(下)) 『日本醫史學雜誌』 (1300,1301호) 2회에 걸쳐 수록
18 1942.3 『산림경제』를 통해서 마에마선생을 그리다(『山林經濟』を通して前間先生を偲ぶ) 書物同好會「會報」 (15호) 미키는 서물 동호회의 주요필진이었다(이현희 2015: 284).
※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는 조선 고서적에 정통하고 미키와 같은 서적 동호회에서 『산림경제』를 함께 살펴 본 인물이다.
19 1942.4 『향약집성방』해설(『鄕藥集成方』解説) 京城杏林書院現代版付刊
20 1942.11-12 『향약집성방』고(상)(하)(『鄕藥集成方』攷(上)(下)) 『日本醫史學雜誌』 (1309-1310호) 2회에 걸쳐 수록
21 1943.12 『고사촬요』에 실린 「팔도책판」 중의 의서(『攷事撮要』に載せられた「八道 冊版」中の醫書) 書物同好會 「會報」 (19·20호 합본)
22 1944.1-2 조선의적고보유 6(상)(하)(朝鮮醫籍考 補遺 其六(上)(下)) 『日本醫史學雜誌』 (1323, 1324호) 2회에 걸쳐 수록
일본 패전 이후 연구 결과물
23 1948.3 조선의서지 종서(朝鮮醫書誌綜序) 自家孔版
24 1949.5-6 조선 매독 전래사 고(1)(2)(朝鮮梅毒 傳來史考) 『東京醫事新誌』 2회에 걸쳐 수록
25 1949.6 『조선의학연구 도서』(朝鮮醫學硏究 圖書) 大阪府立圖書館刊行
26 1950.10 조선민족과 의문화(朝鮮民族と醫文化) 自家孔版 大阪適塾에서 한 강연
27 1,951.411 <대회연구발표>조선의육사 및 질병사(〈大会研究発表〉朝鮮醫育史及疾病史) 「조선학회 회보(朝鮮學報 會報)」에는 제 4월 21 일, 11월 10일에 같은 제목으로 발표 1950년 10월 조선학회는 발회식을 하고, 1951년 5월에 『조선학보』 창간함(朝 鮮學 会, 2019: 156)
28 1951.5 양안원 장서 중의 조선의서(養安院藏 書中の朝鮮醫書) 『朝鮮學報』(1호)
29 1951.10-12 동서역학변천고(東西疫學變遷考) 『東京醫事新誌』
30 1953.3 동아시아에서의 콜레라 전파사-조선 유행을 중심으로(東亜に於けるコレ ラ伝播史―朝鮮の流行を中心として) 『朝鮮學報』 「會報」 발행일은 없음
31 1953.10 이조에서의 콜레라 유행(「李朝におけ るコレラの流行」) 『朝鮮學報』(5호)
32 1954.8 중국·조선·일본의학 대조 조감연표도 (中鮮日醫學對照鳥瞰年表圖) 朝鮮醫學史付刊前刷本
33 1955.2 <연구발표요지> 신라의 의학교육에 대하여(〈研究発表要旨〉新羅の醫 學敎育について) 『朝鮮學報』 「會報」 발행일은 없음
34 1955.3 조선의 대표적 고의서(朝鮮の代表的 古醫書) 『實驗治療』(176호)
35 1955.4 조선의육사-신라 고려 이조(朝鮮醫 育史-新羅·高麗 ·李朝) 『日本醫史學雜誌』 (1338호) 특별강연요지 의 형태
36 1954.3/7. 1955.3/9 조선질병사(1)-(4)(朝鮮疾病史 (一)- (四)) 『日本醫史學雜誌』 (1335-1337,1339호) 복간 첫 호부터 4회 걸쳐 게재
37 1955.8 사백년 전 뛰어난 농양수술(조선) (「四百年前すぐれた膿瘍手術」(朝鮮)) 『實驗治療』 (280호)
38 1955.12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朝鮮醫學史 及疾病史』) 自家孔版
39 1956.10 『조선의서지』(『朝鮮醫書誌』) 自家孔版
40 1956.12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 간행에 대하여(『朝鮮醫學史及疾病史』の刊行に ついて) 『朝鮮學報』 (10호)
41 1957.3 『사마방목』에 대하여(『司馬榜目』に 就いて) 『朝鮮學報』 (11호)
42 1959.4 『아시아 역사사전』 「조선의학」 (『アジア歴史事典』「朝鮮醫學」) 平凡社
43 1959.10 조선의학교육사(朝鮮醫學敎育史-百 濟·新羅·高麗·李朝) 『朝鮮學報』 (14호)
44 1960.5 일본조선중국 의학사 조감연표도(日鮮中醫學史鳥瞰年表圖) 自家出版
45 1960.7 조선도교의학-동의보감으로 보다(朝 鮮の道教醫學― 「東醫宝鑑」から見る) 『朝鮮學報』 (16호)
46 1960.7 『조선의학사(朝鮮醫學史)』와 『조선의서지(朝鮮醫書誌)』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일본 텐리대학(天理大學)대학에서 스웨덴 웁살라 대학으로 보냄 ※1953-1963년까지 텐리대학 출판부에서 『朝 鮮學報』 간행)
47 1961.10 일본 조선 중국 의학교류사 조감(日 鮮中醫學交流史鳥瞰) 『朝鮮學報』 (21·22호합본)
48 1963 『조선의학사 및 질병사』 (『朝鮮醫學史 及疾病史』) 大阪富士精版印刷 개정판, 총서 (總序)의 영문번역 부록 수록
49 1963.10 1883-1885년 인천의원기록에 대하여(明治16-19年 仁川醫院記錄について) 『朝鮮學報』 (29호)
50 1964.12 조선 일본 의학 관계-조일문화(朝鮮日本醫學關係-朝日文化) 『朝鮮畵報』
51 1965.1 조선우역사고(朝鮮牛疫史考) 『朝鮮學報』 (34호)
52 1966.10 비평 소개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간행 『의방유취』(批評·紹介 慶熙大學校醫 科大學刊行 『醫方類聚』) 『朝鮮學報』 (41호)
53 1968.7 허준의 전염병학(許浚の傳染病學) 『朝鮮學報』 (48호)
54 1968.10 일선마진유행전파사(유행주기법칙) (日鮮痲疹流行傳播史(流行週期則)) 『朝鮮學報』 (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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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1973.12 『조선의서지』(수정증판본)(『朝鮮醫書誌』(增修本)) 大阪府東大阪印刷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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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1978.9 『세계인명사 사전』 「조선-허준·노중례」(『世界人名事事典』「朝鮮-許浚·盧重禮」) ほるぷ出版社
59 1984.1 아쉬운 『조선의사연표』의 미간(心残 り『朝鮮醫事年表』の未刊) 『日本醫事新報』 호수 미상
60 1984.7 대의 허준의 화상(大醫 許浚の畵像) 『日本醫事新報』 호수 미상
61 1985.8 『조선의사연표』(『朝鮮醫事年表』) 思文閣出版社
62 1986 조선의사연구 60년(朝鮮醫史硏究 六十年) 『日本醫事新報』 호수 미상
63 1987.11 대의 허준의 학문적 업적과 인륜시 (大醫 許浚-學績と人倫詩) 『日本醫事新報』 3316호
64 1988.8 허준의 이념 「도」 정신신체의학(許浚 の理念「道」精神身體醫學) 『日本醫事新報』 3356호
65 1990.6 반도한의학과 섬나라일본의학(半島 韓醫學と島國日本醫學) 『日本醫事新報』 3453호

(朝鮮學会, 2019: 1-155 외 다수, 각주 2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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