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1945-1948) 주요 정치집단과 미군정의 의료보장체계 구상†
Abstract
The liberation period in Korea was when creative imagination and various debates existed about plans for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ystems. Among them was the debate over the national health security underlying the social safety net. Although the US influenced the Korean health security after liberation, major political groups on the Korean peninsula also expressed various opinions. However, previous studies have shown little interest in national health security, which operates the public health and medical care systems. To overcome these limitations, this study focuses on the ideas on national health security presented by major political groups, analyzing the reply proposal of “Jŏnpyŏng” and the health care proposal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hich has not been reviewed before.
The opinions of major political groups including the right-wing Im-hyŏp and left-wing Min-chŏn diverged on national health security issue regarding insurance coverage, measures to secure financial resources, items of insurance benefits, and measures to stabilize the supply and demand of medical personnel. The claim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can be understood by “Labor Problems and Policies in Korea (Korean Subcommittee),” “Korean Labor Report (Stewart Meacham),” and “Proposed Political Platform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Sub-commission #2).”
The major political groups 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agreed on the need for social protection against death, old age, disability, disease, injury, and unemployment. All of them claimed national health security, in which the roles of the private sector and the government were mixed, should be gradually introduced. The major political groups, in particular, proposed to (1) set workers as beneficiaries of insurance, (2) share financial resources jointly among the state, employers, and workers, and (3) promote the expansion of the number of doctors and medical institutions and prefer cooperative operations of the hospitals established in small administrative units.
This paper argues that the ideas on national health security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did not completely deviate from the global trend immediately after World War II when countries tried to expand the number of people covered by national health security and strengthen its coverage. Although these ideas were not fully reflected in the Constitution of 1948, it is significant in that the Constitution codified for the first time the state’s responsibility for those who have no ability for living due to their health conditions.
색인어: 의료보장체계, 의료보험, 보건의료체계, 미군정, 해방기(1945-1948)
Keywords: health security, health insurance, health care system,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 Liberation Period (1945-1948)
1. 머리말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일본의 항복은 한반도를 해방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해방기는 혼란스러웠으나,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국가의 이름을 무엇으로할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치, 경제, 사회 체계 전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가 풍성했던 시기였다. 독립 후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간의 미군정 시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오늘날 한국의 모습을 갖추는 중요한 토대이다. 그 당시 논쟁 중에는 사회안전망의 기본 구성요소인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것도 있었다.
기존 연구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 의료·의학이 미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의료체계”, 남한은 “미국식 의료체계”라는 이분법적 구분으로 남북한의 의료체계를 파악하기도 하였고( 여인석 외, 2012: 304), 신좌섭은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의 의료는 대미종속의 과정을 겪어왔”으며, 한국의 의료·의학은 “미국의 모방”에 불과하다며 한국 의료·의학계가 맹목적으로 미국을 추종하였음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신좌섭, 2000: 212-213). 이는 부분적으로 사실이나, 일제하 보건의료체계와 운영방식의 상당 부분 역시 여전히 한국의 보건의료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해방 직후부터 분단이 고착화되기 전까지 해방공간에서 여러 정치·사회단체 사이에 보건의료와 관련한 다양한 주장 또한 존재했다.
해방기 의료보장체계 논의는 세계사적 흐름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위 선진국들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의료보장제도가 이미 실시되고 있거나 개혁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독일의 비스마르크식 사회보험 방식, 영국의 베버리지식 국영의료방식, 러시아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국가의 세마쉬코 방식과 레닌의 노동자 보험 원칙 등이 그것이다. 미국의 의료보장체계는 지역사회 자선 체계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연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국가 운영 방식의 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비록 지금의 미국은 의료재의 생산과 분배의 대부분을 민간에 맡기는 자유주의 모델 의료보장제도를 취한 국가이지만, 전후 당시는 트루먼 대통령이 국가건강보험제를 국정 핵심과제로 설정할 만큼 국가 주도의 의료보장체계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지홍, 2020: 202; Rayack, 1967: 178).
해방 직후와 미군정기 보건의료부문의 논쟁들을 살펴봄에 있어 특별히 의료보장체계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의료보장체계는 한 나라의 보건의료체계를 작동시키는 규칙과 재원을 제공하는 핵심적인 정책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의료보장정책은 한 나라의 정치적 지향, 경제, 노동정책 등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 1) ‘보건의료체계’ 보다 국가의 의료 체계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의료보장체계’ 관점은 그것의 작동 원리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의료보장정책이 일개 정책을 넘어서 누구(대상)를 어떤 재원을 활용하여(재정), 어느 수준만큼(급여 수준), 누가(책임운영주체), 어떻게(의료서비스) 보장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도화한다는 특성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국내 의료보장사 연구는 해방기 논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1963년 의료보험법 제정( 강명세, 2006: 6-34; 김영범, 2002: 18; 박지용, 2013: 525; 이규식, 2019: 521) 혹은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한 의료보험 강제실시를 실질적인 의료보험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 박찬웅, 1998: 801; 정철, 2011: 33)가 대부분이었다. 일부 법 제정과 시행 이전의 의료보장 역사를 살펴보는 시도가 있으나 2) 해방기 의료보장체계 논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없다.
최근 김진혁은 보건의료체계 논쟁이 기존에 알려진 이용설과 최응석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이용설과 최응석의 주장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US-Soviet Joint Commission)(이하 미소공위) 3) 답신안에 반영되어 있음을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확인하였다( 김진혁, 2021). 그러나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분석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 해방기 남한의 강력한 권력 자원인 국가기구를 독점한 미군정의 구상( 윤홍식, 2017: 186)과 영향력 있는 좌파 세력이었던 조선 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이하 「전평」)의 답신안이 4) 제외된 채 기술되었다. 이 같은 한계로 인해 해방기 주요 이해관계 집단의 주장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의료보장제도를 둘러싼 논의와 정책안에 대한 배경분석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 글은 기존 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보건의료체계를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의료보장제도를 중심으로 해방 이후 주요 핵심 정치집단의 구상을 다루었다. 나아가 기존 연구에서 검토되지 않았던 「전평」의 답신안과 미군정의 의료보장안을 포함하여 분석함으로써 해방기 의료보장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를 보다 완결된 형태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상과 같은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방 직후 주요 4개 단체의 미소공위 답신서를 수록한 『臨時政府樹立大綱』 과 「전평」 답변서 등 주요 정치집단의 답변서, 연합군 최고 사령부(SCAP,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노동자문파견단(Labor Advisory Mission) 소속 조선 분과위원회(Korean Subcommittee) 보고서 “조선의 노동문제와 노동정책(Labor Problems and Policies in Korea)”과 조선 주둔 미군총사령관 존 하지의 노동 고문 스튜어트 미챔(Stewart Meacham)의 “조선노동보고서(Korean Labor Report)”,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 제2분과위원회(Sub-commission #2)가 작성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강에 대한 상정안(Proposed Political Platform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등을 근거로 해방 직후 여러 단체들과 미군정의 구체적인 의료보장안을 비교하였다. 최종적으로는 1948년 제헌헌법에 주요 단체의 논의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혹은 연결되지 못하였는지를 살핀 다음 이러한 연속과 단절의 역사가 한국 의학사·의료보장사에서 가지는 함의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국내외 상황에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이 연구는 분석 기간을 남한의 정부를 수립한 해인 1948년까지로 한정하였다. 또한 분단 후 북한 지역은 소련 관할에서 남한과는 매우 다른 정치 환경에서 제도들이 만들어져 갈 수밖에 없었기에 이 연구는 남한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2. 주요 정치집단의 의료보장체계 논쟁
1) 답신안의 제출 경위와 의료보장체계 관련 질의
미소공위의 질의서가 배포될 당시는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극적으로 제2차 미소공위 개최가 결정된 상황이었다. 많은 이들이 제2차 미소공위에 기대를 걸었고( 정용욱, 2003: 360), 설의식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비록 미소 간 어느 정도 굴곡과 갈등이 있음을 인정하였지만, 결국 “대세의 소향(所向)대로 낙착(落着)될” 것이라 하면서 회의 결과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드러내었다( 설의식, 1947: 1).
미소공위는 1947년 6월 11일 미소공위 공동성명 11호(Joint Communiqué No. 11)를 통해 남·북조선 제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할 대상에 대한 규정을 발표하였다. 공동성명 제11호는 이전 미소공위 공동성명 제10호에서 말한 “광범위한 기초에서 협의하자는 원칙” 5)에서 나아가 구체적인 사항을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질의서 작성의 목적은 신탁통치에 앞서 향후 수립할 조선 민주주의임시정부(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6)의 헌장(憲章) 및 정강(政綱)에 관한 조선인들의 의견을 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7) ( 국사편찬위원회, 1971). 미소공위는 질의서에 대한 답신안을 통해 남북한 통일 정부에 대한 민의를 듣고자 한 것이다( 심지연, 1989: 80).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질의 내용은 공동결의 제5호(Joint Commission Decision No. 5)와 공동결의 제6호(Joint Commission Decision No. 6)에 각각 제시되어 있다. 공동결의 제5호는 미소공위를 통해 탄생시키고자 하는 임시정부의 헌법(헌장)에 대한 내용으로 민권, 임시정부 형태 등의 질문을 포함한 총 6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1971). 8) 공동결의 제6호(Joint Commission Decision No. 6)는 임시 정부의 정책에 관한 질의를 담고 있으며 일반정책·경제정책·산업조직 등 7개 항목과 그에 부속된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동결의 제5호가 임시정부의 전체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뼈대였다면, 공동결의 제6호는 그 뼈대를 기반으로 하여 시행되는 여러 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미소공위의 의료보장 관련 주요 질문은 공동결의 제6호에 포함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다. 먼저 ‘(4) 노동, 임금, 그리고 사회보장(Labor, wages and social security)’의 세부 조항 중 “ㄹ) 사회 보험에 관한 정책 여하(What should be the policy with respect to social insurance?)”와 “ㅁ) 노동능률 증진에 관한 정책 여하(What should be the policy with respect to increasing the efficiency of labor?)”가 있다. 다음으로 ‘(7)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교육과 문화 정책’의 하부 조항인 ‘4) 사회 보건: 9) 보건 사업을 여하히 조직할 것인가’(Public Health: How should health protection be organized)가 있다.
남한의 4개 주요 정치 단체, 즉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10)(이하 「임협」), 「민주주의민족전선」 11) (이하 「민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12) (이하 「입의」), 그리고 「시국대책협의회」 13) (이하 「시협」)의 답신안은 『임시정부수립대강』을 통해 알 수 있다. 언론인 설의식(薛義植) 14)은 그가 설립한 새한민보사를 통해 1947년 7월 소책자 『임시정부수립대강』을 발행하였다. 15) 해당 자료는 미소공위 공동결의 제5, 6호에 따른 질의에 대한 네 개 주요 정치 단체의 답신서를 수록하고 있다. 설의식은 각 단체가 대변하는 정치 세력도 적어 놓았는데 「임협」을 우익측(右翼側), 「민전」을 좌익측(左翼側), 「시협」을 중간측(中間側), 「입의」을 과정측(過政側) 16)이라 하였다. 각 정치 세력을 골고루 배치한 것은 각 진영에 따른 입장을 균등하게 제시하기 위함이며 각 정파의 주요 세력을 선택한 것은 대표성을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
해방 후 2개월 만에 50만의 조합원을 모아 당시 영향력 있던 좌익계열 노동조합인 「전평」의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주장은 1947년 7월 18일 『전국노동자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민족전선, 1988: 93). 하지만 모든 질의에 대한 답신안이 실린 것은 아니며 ‘(4) 노동, 임금, 그리고 사회보장’에 대한 답신만 제시되어 있어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에 대한 「전평」의 입장은 일부만 파악 가능하며 이것은 동시에 좌익계열 노동단체의 주요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주요 정치 단체별 의료보장체계 구상 내용 및 분석
답변서 내용 중 의료보장 관련 문항을 분석하기 전에 이 연구에서 사용할 의료보장의 의미에 대해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의료보장의 초기 형성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료보장이 현재 사회보장의 구성요소인 사회보험, 사회부조, 사회서비스라는 개념적 틀 하에서의 하부 구성요소 중 하나로 편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7) 시기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의료보험, 의료보호(의료급여), 의료서비스 간 경계는 희미해진다. 초기에는 민권, 노동·보건의료 등과 같은 개념과 제도들 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제도적 분화의 정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보험의 초기 역사를 탐색할 때는 자크 동즐로(Jacques Donzelot)가 정의한 사회보장의 정의를 원용하여 18) 의료보장을 ‘사회구성원의 건강 상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계나 제도들의 총체’라는 느슨한 정의를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부 제도의 구별이 명확히 전제되는 기술에 대해서는 현재의 사회보험, 국영의료체계 등의 기준을 적용하여 분석하였다. 구체적으로 주요 단체의 답신을, 세계보건기구가 사회의료보험(의료보장체계)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로 정의하고 있는 (1) 적용 대상, (2) 재정, (3) 보험 급여, (4)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로 구분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9)
(1) 적용 대상: 누구에게 의료보장을 제공할 것인가?
다섯 단체 모두 육체노동자를 의료보험 대상자로 여기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입협」, 「시협」, 「입의」는 일본의 “건강보험법”을 도입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건강보험법은 대상자를 노동자로 한정한다. 20) 그러나 「민전」과 「전평」은 육체노동자뿐만 아니라 사무직 노동자도 보험 대상에 포함하여 육체노동자만의 보험제도를 주장하였던 다른 단체와 차별된다. 더 나아가 「민전」은 보험 대상자를 도시 근로자를 넘어 농민까지 확대하는 것을 고려하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건강보험법”의 대상자가 현재 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전 국민 대상의 “국민건강보험법”과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사업적 의료기관 확충”을 주장한 것과 시대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임협」이 말하는 ‘건강보험법’은 전체 국민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중심의 의료보험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입협」을 제외한 세 단체는 의료보험의 적용에 있어 보편적 원칙을 지향하였다. 「시협」과 「입의」는 ‘강제 보험’을 명시하여 모든 육체노동자가 보험의 대상이라 보았고 「민전」과 「전평」도 마찬가지로 ‘의무적 사회보험’을 주장하여 예외 없는 적용을 구상하였다. 다만 「전평」은 보험료를 6개월 이상 납부한 이를 대상으로 보험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납부 기간에 따른 보험 적용에 제한을 두었다. 이와 달리 「입협」은 강제 가입 규정을 언급하지 않았다.
「민전」은 노동자의 경우 강제 가입을 주장한 것과 달리 농민의 경우 협동조합에 의한 임의 가입 원칙을 주장했다. 「민전」의 답신안 작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최응석의 글을 통해 농촌에 적용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협동조합 성격을 더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데 21) 이에 따르면 농촌협동조합은 사회보험이 아니므로 “가입조건은 강제적이 아니며, 임의적이며 탈퇴의 자유도 있”다( 최응석, 1946: 34). 농민의 임의 가입 방식을 지향한 이유는 당시 농민이 상당히 궁핍하였기에 가입을 강제할 경우 보험료 납부로 인해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 재정: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답신안을 제출한 정치 단체 중 재원에 대해 언급한 단체는 「임협」, 「시협」, 「민전」, 「전평」이며 「입의」는 재원과 관련한 언급이 없었다. 「임협」은 국가·경영주·노동자가 보험료 납부를 적당한 비율로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한 「임협」, 「시협」, 「입의」은 사회사업 목적의 의료기관과 같은 자선사업적 의료기관의 확충 방법으로 “건강보험법의 현실화”를 주장하였다. 건강보험법에 의한 보험료를 통해 부족한 병원 건립비를 충당하려고 했던 것인데 이들은 건강보험 재정을 의료보장체계 구축과 운영에 사용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전」의 경우, 기업소(국가기업소·협동조합기업소·개인기업소)와 피보험자(노동자·사무원)가 수익의 적당한 비율로 보험료를 납부하는 재원 마련 방법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우파 세력인 「입협」이 국가의 책임을 언급하였음을 주목한다면, 「민전」이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부담만 명시하고 국가의 부담은 주장하지 않은 것은 의외다. 그러나 「민전」은 다른 단체와 달리 소매업이나 소자본의 기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산업을 국유화 하거나 공영(共營)으로 할 것을 가정하였다. 따라서 「민전」은 답신안에 국가기업소의 사용자가 국가인 상황에서 국가의 책임을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전평」의 경우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보험료 부담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5개의 단체 중 가장 구체적인 재정 조달 방식을 제시하였다. 이때 부담 주체에 따라 지불하는 보험료에 차이가 있었다. 소비조합 사회기업소, 사무소 및 단체의 경우 피보험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의 최대 8%까지, 개인 기업소 및 고용주는 임금의 최대 12%까지 보험료로 지불하여야 했던 한편, 피고용자인 피보험노동자 및 사무원은 임금의 1%만 납부하면 되었다. 「전평」의 보험료 규정은 1946년 6월 24일에 발표된 “북조선 로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로동법령”과 상당히 유사하다. 지불 책임 주체와 임금 대비 보험료 지출 비율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전평」이 정치적, 사상적으로 이북의 사회주의 세력과 친연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좌·우파 단체 모두 국가, 노동자, 사업주가 적당한 비율로 보험료를 부담한다는 데 큰 입장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민전」과 「전평」이 피고용자에게도 보험료를 징수하려고 한 것은 보험 재정을 위한 지출은 모두 국가나 고용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레닌의 사회보험 원칙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Lenin, 1963: 476). 물론 「전평」의 사례에도 보듯이 피고용자의 부담은 고용자에 비해 대폭 적기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레닌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 점은 좌파 단체도 의료보장제도 도입 초기 과정에서 많은 재정이 소요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현실과 타협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보험 급여: 무엇을 보장해줄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보험) 급여’의 ‘급여’의 의미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인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이나 급료’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보장에서 ‘급여’란 의료보장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가입자(대상자)에게 부여되는 현물(보건의료서비스)이나 현금(돈)을 의미한다( 김창엽, 2009: 228). 우익 단체인 「임협」, 「시협」, 「입의」은 보험 급여 범위를 노동자의 사망, 노쇠, 폐질(廢疾) 22), 질병, 상해, 실업으로 정하였다. 오늘날 이들은 하나의 보험이 아니라 산재보험, 의료보험, 노령연금 등 개별 제도로 세분되어 있지만, 의료보장의 초기 역사에서는 의료보험을 포함하는 하나의 포괄적인 보험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좌익 단체인 「민전」과 「전평」의 경우도 급여 내용에 노동자의 실업, 질병, 노동으로 인한 불구와 질병, 양육자 상실을 적시하여 의료보험, 산재보험, 연금, 실업보험에 해당하는 급여를 의료보장 내역에 포함하였다. 또한 「민전」과 「전평」은 앞의 우익 단체와 달리 생활보조금, 장례 비용 보조금, 연휼금(年恤金) 23)과 같은 현금 급여 방식을 추가로 제시하여 보장 방식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민전」이 “노동으로 인한 불구자나 직업으로 인한 질병”에 국한한 것과 달리 「전평」은 “질병, 부상, 불구 등으로 인하야 일시적으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노동자”에 대한 급여도 언급함으로써 노동으로 인한 질병이나 불구가 아닌 것도 포함하여 보장 범위를 확대하였다.
좌익 단체가 보험 급여에 있어서 우익 단체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여성 노동자에 대한 보장을 명확히 하였다는 점이다. 「민전」은 “임신에 의한 휴가 밋 해고로 인한 실업시의 보조금”을, 「전평」은 “임신 및 해산에 의한 휴가 시의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하여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건강과 고용 안전성을 보장하려 하였다. 이러한 좌파 단체의 주장은 노동자를 위한 국가 보험의 원칙으로 임신과 출산 중에 있는 노동자 여성에 대한 특별 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레닌의 원칙과 친연성을 지닌다( Lenin, 1963: 476). 비슷한 시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도 1946년 6월 24일에 발표한 의무사회보험제 조항에서 임신 및 해산으로 인한 휴가 시 보조금 지급을 규정하였다. 24) 이를 통해 당시 사회주의 계열 정치 단체가 여성 노동자에 대한 급여 조항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4)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 의료서비스는 누가 제공할 것인가?
의료보장체계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이다. 의료서비스 제공 주체는 크게 의사와 같은 ‘보건의료 종사자(개인)’와 병원과 같은 ‘보건의료 조직(기관)’으로 나뉜다( 김창엽, 2009: 113-114).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의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필요하며 특히 당시 한반도의 의료인력이나 병원이 매우 부족하였기에 해방기 주요 단체도 의료인과 의료기관 확충 방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다만 「전평」의 경우에는 “4) 사회 보건: 보건 사업을 여하히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답신안은 확인할 수 없는 관계로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에 대한 「전평」의 견해는 의료보장체계 관리와 운영에 대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25) 따라서 의료서비스 제공체계에 한해서 「임협」, 「시협」, 「입의」, 「민전」(이하 네 단체)의 답신안을 중심으로 서술하기로 한다.
의료인 확충 방안
해방 직후 의료인과 병·의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의사와 병·의원의 공급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공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군정청 보건후생부장에 있었던 우익 계열의 이용설은 병원과 시설이 구비된다고 하더라도 의사가 충분하지 못하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의학교를 충실히 하여 의사를 상당수 배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남북조선의 8개의 의학교에서 매년 7-8백 명의 의사가 배출되므로 10년 이내에 조선의 의사 수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26) 하지만 최응석은 이용설의 낙관적 전망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당시 의사 1인당 인구수가 일본의 경우 1천 명, 미국 6백 명, 소련 1천 명인 것을 감안하였을 때 지금의 의사 배출 방식을 유지한다면 조선은 10년 후에도 의사 1인당 인구수가 인구 3천 명 당 의사 1명에 불과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27)
이용설과 최응석의 의료인 공급 방식에 대한 의견 대립은 우익 단체인 「임협」과 좌익 단체인 「민전」의 답신안에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의사 확충 방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임협」과 달리 「민전」은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하였는데, (1) 의학교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한 학교 증설, (2) 급속한 의사 양산을 위한 “자학(自學)의사의 국가시험제도를 실시”가 그것이다.
게다가 「민전」의 답신안에 따르면 의사의 수효뿐만 아니라 개인 개업의의 도시 집중을 막고 이를 균포(均布)하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편중된 의사에 대한 「민전」의 문제의식은 「민전」 답신안 작성 조직에 가담하여 정책 구상에 관여한 최응석의 다른 글 28)에도 발견된다. 그에 의하면 1945년 6월 기준 경성부 내에 조선 전체 의사의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수가 있으며 이로 인해 농촌의 의사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고 지적하였다( 최응석, 1946: 34).
의료 기관 확충 방안
“4) 사회 보건”에 대한 답신안 내용이 동일하였던 우파 성향의 정치 단체인 「임협」, 「시협」, 「입의」뿐만 아니라 좌익 세력의 「민전」도 보건의료 제공 기관인 병원의 수를 늘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민전」을 제외한 세 단체는 의료공급기관 정책 추진을 시급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는데, 실제로 “의료기관의 계획”과 “1면 1 보건소 설치”를 “점진적”으로 진행하기를 원했다.
네 단체는 모두 병원 건립을 기본적으로 정부의 몫으로 보았으며 민간에 의한 병원 소유보다는 국가나 공공기관의 소유를 지향하였다. 우파 단체는 의료공급체계가 기존의 도립병원에서 더 나아가 군립병원까지 확장해야 함을 표명하였고, 「민전」은 최응석의 의견을 반영하여 국가의 의료제도를 ‘국립병원-협동조합병원-개인개업의원’과 같이 삼원 체제로 분리하여 운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영전·김진혁, 2014: 491, 500). 최응석은 조선의 부족한 의료 인프라로 인해 개인개업의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이를 전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영병원이나 공공병원에서 일정 시간 근무를 하고 퇴근 후에 개업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종의 제한적 개인개업의를 구상하였다. 또한 점진적으로 개인개업의는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였다. 29)
게다가 네 단체는 모두 식민지 시기의 기존 병원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민전」이 식민지 시기에 건립된 관립병원과 공립병원을 새로운 국가에서 운영할 병원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파 단체가 말한 식민지 시기 도립병원의 하부 병원을 군립병원으로 한다는 주장과 큰 틀에서 유사하다. 즉 「민전」과 우파 단체의 의료공급체계 구상은 식민지 시기의 보건 체계를 유지 및 발전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네 단체 모두 농촌이나 군지역 의료공급기관의 운영방식으로 조합과 같은 상호부조 방식의 운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우익 계열의 「임협」은 의료공제조합을, 좌익은 공급자와 수혜자의 동시 참여를 전제하는 협동조합방식을 주장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
3. 미군정의 의료보장체계 구상
미군정의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구상은 미군정 외부 인사인 고문이 미군정에게 제출한 두 편의 보고서와 미소공위의 미국 측 제2분과위원회가 작성한 한 건의 상정안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당시 북위 38도 이남의 한반도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미군정은 남한의 노동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를 초청하였고 이 과정에서 두 편의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그중 하나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SCAP,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노동자문파견단(Labor Advisory Mission) 소속 조선 분과위원회(Korean Subcommittee) 보고서 “조선의 노동문제와 노동정책(Labor Problems and Policies in Korea)” 30)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 주둔 미군총사령관의 노동 고문 스튜어트 미챔(Stewart Meacham)의 “조선노동보고서(Korean Labor Report)” 31)이다. 한편 미군정은 남북한의 정치 단체가 공동결의 제6호에 의거한 질의에 답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강에 대한 상정안(Proposed Political Platform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32)에서 새롭게 들어설 임시 정부 정책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 이를 통해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미군정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1) 조선 분과위원회 보고서, “조선의 노동문제와 노동정책”
1946년 4월 조선의 미군정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노동법 입안을 위해 자문을 요청하였다( 박지향, 1992: 127). 이에 1946년 6월 2일부터 6월 13일까지 파견단 중 폴 스탠치필드(Paul L. Stanchfield) 33)와 윌리엄 맥퍼슨(William H. McPherson) 34)으로 구성된 조선 분과위원회(Korea Sub-Committee)가 파견되어 (남)조선의 노동문제에 대해 조사하였다( 권헌규, 2016: 170-171). 약 2주간의 짧은 조사 기간이었지만 조선분과위원회는 6월 11일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의 각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인 홍윤옥과 김구(金龜)와 대담하기도 하며 실태 조사에도 힘썼다. 35)
1946년 6월 18일에 분과위원회는 조사를 마치고 연구 결과물과 그에 따른 권고 사항을 보고서로 만들었다. 그 보고서가 바로 “조선에서의 노동문제와 노동정책”이다. 짧은 조사 기간 탓에 당시 조선에서 매우 시급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에만 집중하였는데, 분과위원회는 노사 관계(labor relations)와 근로보호법 제정(protective labor legislation)을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하였다.
의료보장체계 도입과 관련한 언급은 보고서 내용 중 ‘산업 재해와 질병에 대한 보상(Compensation for Industrial Accident and Disease)’이라는 세목에서 확인된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의료보장 도입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사용자 책임을 강조하였고 이에 의거하여 법 제정에 필요한 연구와 계획이 완료되는 대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어야 함을 권고하였다.
“모든 민주국가에서 산업재해(industrial accident)나 질병(disease)으로 인해 필요한 의료비를 부담하고, 그러한 고용의 중단(interruption of employment)에 따른 임금 손실의 일부를 보상하며, 고용으로 인한 사망(death)이나 영구장애(permanent disability)를 보상하는 것은 사용자(employer)의 책임으로 간주한다”(저자 강조)
분과위원회는 구체적인 의료보장체계도 제안하였다. 모든 민간 기업과 공공 기업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공동 출자(equitable pooling of risks)에 근거한 보험에 가입해야 함을 권고하였고, 궁극적으로 해당 보험 체계를 통해 고용주가 근로자에 대한 보상을 제공할 것을 기대하였다. 또한 정부가 운영을 도맡는 정부 운영 보험 시스템(governmentally operated insurance system)을 고안하였다. 다만 일부 대기업의 경우 해당 기업의 자산이 노동자의 사고로 인해 고용주가 지급해야 하는 보상금을 의미하는 ‘잠재적 부채(potential liabilities)’를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면, 대기업이 운영하는 “자가 보험(self-insure)”을 허용하였다.
분과위원회의 권고 사안을 종합해볼 때, 분과위원회는 조선의 노동법 개혁이 시급하고 노동자 보호를 위해 의료보장체계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였다. 분과위원회가 구상한 의료보장체계의 형태는 원칙적으로 보험자는 정부, 보험계약자는 민간·공공 기업, 피보험자는 노동자, 성격은 강제 가입이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대기업은 자체적인 보험 체계를 운용할 수 있게 하여 완전한 국가 운영 방식의 의료보장체계가 아닌 민간 보험을 허락한 체계, 즉 민간 방식과 정부 방식이 혼재된 의료보장체계를 구상하였다. 이는 민간과 정부 운용 보험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노동자가 실제로 어떤 보험 급여를 받을 것인지는 기업체마다 다를 수 있으며 이는 노동자 간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2) 미챔의 “조선노동 보고서”
조선 주둔 미군 총사령관인 존 하지(John Hodge) 장군에게 노동보고서를 제출한 스튜어트 미챔은 남조선에 오기 전, 미국 연방노동관계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의 지역 사무국장(regional director)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1946년 11월 12일 미국 육군성(War Department)에 의해 하지 장군의 노동 고문으로 임명받았다. 36) 미챔은 1946년 12월에 한국에 도착하였고 이후 1947년 7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약 7개월의 기간 동안 하지의 노동 고문으로 일하였으며 그해 7월 미국에서 조선의 노동 상황을 다룬 보고서인 “조선노동보고서”를 제출하였다. 37) 그는 (남)조선에 체류하면서 조선의 상황 특히 노동 및 정치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였고 당시 서로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던 두 노동단체인 「전평」과 대한노총을 접견하기도 하였다.
미챔의 의료보장체계 도입과 관련한 언급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도입에 있어 국가의 역할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그의 보고서의 내용 중 “2. 계획의 필요성(Need for a Program)”에서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미챔은 조선의 가난한 경제력을 고려할 때 산업 근로자들에게 부상, 질병, 실업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하기 위해 당시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미챔은 지금 환경에서 실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책은 도입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빵 반 덩어리라도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half a loaf is better than none)”라는 미국의 속담을 인용하였는데, 비록 초기에 불완전한 정책이 시행되더라도 그것은 이후 확대된 정책의 기초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군정의 점진적 의료보장도입체계 입장은 다른 미군정 문서에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미챔은 노동부 조직과 그 산하에 일하는 사회보장 담당 공무원이 의료보장체계를 담당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의료보장체계 도입에 있어 국가의 개입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미챔이 구상한 노동부 조직안을 살펴보면 “건강(보건), 안전, 아동 노동(Health, Safety and Child Labor)” 부서와 “사회보장(Social Security)” 부서가 노동부 하부 조직으로 편입되어 있다. 이 두 부서는 근로 기준국(Labor Standards)을 상위 기관으로 하는 지휘 계통 체계를 가졌다. 하지만 미챔이 노동부 산하에 사회보장 부서를 둔 것의 의미가 단순히 행정 관할 구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가가 의료보장체계를 도입하고 운영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할 수 있다. 하지만 미챔이 구상한 사회보장 담당 공무원(Social Security Officer)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 대목에서 미챔이 국가 주도의 사회보장 프로그램 수립을 지향하였음을 가늠할 수 있다. 미챔은 노동부의 일부 조직에 미국인을 임명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산업 건강과 안전 고문(Industrial Health and Safety Advisor)”과 “사회보장 담당 공무원(Social Security Officer)”은 미국인이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사회보장 담당 공무원의 역할은 조선의 풍습과 역량을 조사한 다음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이에 필요한 행정기구 조직(organization of administrative machinery)을 수립하여 산업 노동자의 안전(security)과 유고 시에 보상(compensation)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즉 미챔은 조선인들만의 역량으로는 적절한 사회보장 정책과 제도를 세울 수 없다고 보아 사회보장 프로그램 수립에 미국인을 고용함을 주장하였다. 국가 통치를 감당하기에 조선인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미군정 측의 일관된 의견이었는데 미군정은 조선인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유지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38) 이것은 미군정이 신탁 통치를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3) 미소공위 제2분과위원회의,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 정강에 대한 상정안”
1947년 8월 1일에 제출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강에 대한 상정안”에서 미래 정부의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미군정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상정안은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 대표 위원의 회람을 위한 목적으로 미국 측 제2분과위원회(Sub-commission #2)에 의해 작성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의 질문에 대한 미국 측 입장의 답신안을 내부에서 미리 만들어 대표에게 참고 용으로 제출한 것이다. 제2분과위원회는 미소공위에서 다뤄지는 내용 중 미소공위의 결과로 세워질 임시정부의 조직 그리고 정치 강령의 구조 및 원칙과 관련한 부분을 담당하였으며 제2분과위원회의의 단장은 존 웨커링(John Weckering) 준장이었다. 39)
상정안의 내용 중 “3. 산업조직(Organization of Industry)”에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미군정의 입장이 드러난다. 미군정은 일반 사보험 회사와 정부 주도 보험 제도가 공존하는 방식을 구상하였다. 상술하자면 민간 보험 회사는 허가제에 의해 운영되며 정부의 감독하에 있어야 하는 반면에, 정부 주도 보험은 사회보험제(a system of social insurance)여야 하며 농업 인구와 노동 인구를 보호하기 위한 질병, 노령, 사고, 실업을 보장할 것을 기획하였다. 이때 정부 주도 보험의 운영은 공공기관(public institutions)에 맡길 것을 제안하였다. 즉 미군정은 다른 일반 위험에 대해서는 민간 보험회사가 영업을 할 수 있지만, 질병, 노령, 실업과 같이 공공성이 큰 보장 내역에 대해서는 정부에 의한 사회보험 방식이 더 적절하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상정안이 구상하였던 의료보장체계는 정부와 민간 운영 방식이 혼합된 의료보장 시스템을 기획하였던 조선 분과위원회 보고서의 내용과 유사하다.
또한 “사회보험에 관한 정책 여하” 항목에서 미군정은 “완전한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의료보장체계는 단시간 내에 구현될 성격의 정책이 아니라고 밝혔다. 다만 우선순위는 근로자가 사고로 인한 소득 상실에 대한 보상을 중심으로 하는 근로보상법에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미챔의 노동 보고서와 유사하며 의료보장체계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 미군정의 입장임을 보여준다.
원래 답신안의 질의 중 의료보장체계의 의료서비스 제공에 대한 부분은 “4) 사회 보건: 보건 사업을 여하히 조직할 것인가’(Public Health: How should health protection be organized)”였으나 미군정의 상정안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부분이 “4. 보건과 복지(4. Public Health and Welfare)”로 간소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와 같은 질의의 차이는 답변의 차이로 이어졌다. 미군정은 답신안을 제출한 다른 정치세력과 달리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지 않고 조선의 보건 수준이 향상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인 행정 업무의 효율성만을 거론하였다. 효율적 행정은 더 많은 예산을 확충할 수 있게 해주며 결과적으로 공중 보건 향상, 유행병과 질병에 퇴치, 노약자·고아·불구자·정신이상자에 대한 지원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4. 해방기 의료보장체계 구상의 수용과 좌절
1) 주요 정치 세력 간 의료보장체계 구상의 특징: ‘차이’보다 큰 공동의 지향
제2차 미소공위 주요 정치·사회 단체에 정치(권력 구조), 경제(토지 개혁)에 대한 답신문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우익 계열인 「임협」, 「입의」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통령제 방식의 민주공화제를 주장한 것과 달리, 「민전」과 「전평」은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제안하였다. 또한 「민전」은 수상제(내각합의제)에 기반한 인민민주주의적 공화제를 천명하였다. 미군정의 경우 국가 원수와 부원수를 입법부에서 임명 및 탄핵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40) 토지 개혁의 경우 「임협」, 「입의」는 지주의 토지를 정부가 매수하여 농민에게 유상분배하자고 주장한 반면, 「시협」은 “체감매상(遞減買上)과 무상분배”를, 「민전」은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주장했다. 미군정의 경우 장기간에 걸쳐서 보상하는 방식의 유상매수와 토지를 받은 이가 지정된 기간 동안 정부에 곡식을 납부하는 방식의 유상분배를 주장하였다. 41)
의료보장과 관련한 답변도 적용 대상의 범위, 재원 확충 방안, 보험 급여 항목, 의료인 수급 안정화 대책 등에서 정파 간 차이가 있음을 앞에서 이미 확인하였다. 그 외에도 의료보장체계 정책에 대한 타국과의 친연성도 달랐고 의료보장체계 도입 속도에 대한 차이도 있었다. 「민전」과 「전평」과 같은 좌파 단체의 주장의 경우 이북의 사회보험 법령, 레닌의 노동자 보험 원칙과 유사한 국가 주도의 의료보장체계를 구상하였는데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레닌과 세마쉬코의 원칙 42)으로 대표되는 소련의 의료보장 모델을 지향한 것과 관련 있다. 좌파 정치단체 간의 정책적 유사성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경영의 기준으로 삼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그 이념을 이미 구현한 모범 국가로 여긴 것과도 연관된다. 반면에 「임협」의 ‘건강보험법’과 ‘의료공제조합’과 같은 구상은 식민지 본국인 일본에서 실시하였던 정책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김진혁, 2021: 531-532). 미군정 내부의 주장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특히 미챔의 보고서의 의료보장체계안의 경우 다른 미군정 내의 주장에 비해 구체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국가의 역할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챔이 보수적 성향인 하지 장군의 직속 노동 고문이었기에 지나친 주장을 삼가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실제로 하지 장군은 미챔의 보고서 발표 이후 그의 보고서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43) 그렇지만 미군정은 결국 큰 틀에서 조선 분과위원회의 보고서와 미챔의 보고서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미소공위 제2분과위원회의 보고서가 이보다 앞서 발표된 두 보고서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서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가 주도 의료보장체계 도입 속도에 대한 집단 간의 의견 차이도 발견되는데 미군정과 우익은 대개 점진적으로 도입하기를 원하였다. 미챔의 보고서와 제2분과위원회의 상정안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군정은 조선에 의료보장체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조선의 경제적 상황을 비춰봤을 때 어렵다고 보아 점진적으로 의료보장체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에 동의하였다. 실제로 미군정은 의료보장체계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법령을 제정하지 않았다. 미군정청 보건후생부장이었던 이용설도 미군정의 입장과 유사한데 이는 그가 미군정에서 근무한 영향일 수도 있다. 다만 이용설은 “국영은 극히 곤란” 44)이라고 하며 의료국영화를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였지만 의료국영화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그대신 의료의 상업화를 걱정하였다( 여인석 외, 2012: 310). 전우용은 이를 두고 “좌우익 모두, 의학은 치료의학에서 예방의학을 거쳐 건강관리 의학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으며, 또한 원칙상 모든 국민이 빈부와 거주지역의 차별 없이 ‘균등한’ 의료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의료국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도 찬성하였다. 차이는 ‘속도’와 ‘시점’에 있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전우용, 2011: 79-79).
그러나 세부 구상의 표현과 일부 내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과 한반도 이남의 주요 정치 단체는 모두 노동자의 사망, 노쇠, 폐질, 질병, 상해, 실업에 대한 사회적 보장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였다. 특히 한국인 좌우파 정치 단체는 (1) 노동자를 피보험자로 설정하고 (2) 국가, 사용자, 노동자가 공동으로 재원 분담하며, (3) 의사와 의료기관 수의 확대를 추진하며 소규모 행정 단위에 설립된 병원은 조합 방식의 운영을 선호하는 등 의료보장체계의 기본 요소들에 대해 큰 의견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국가 주도 의료보장체계에 대해조차 좌우익의 이견은 크지 않았다.
게다가 의료보장체계에서 민간 개입을 일부 허용한 부분도 대부분 정치집단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미군정은 원칙적으로 강제 가입을 기반으로 하는 의료보장체계를 구상하였으나 일부 대기업에 자율적인 의료보장을 허용하거나 농민과 노동자의 질병, 노령, 사고, 실업 이외의 영역은 사보험에 맡기는 정책을 제안함으로써 민간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미군정이 말한 대기업에 의한 보험과 사보험의 허용은 이남의 정치집단이 주장한 조합에 의한 보험 방식과 각론에서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임협」의 자조적 노력에 의한 의료공제조합을 허용, 「민전」의 협동조합병원과 개인개업의를 허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의료보장 체계에서 민간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입장은 서로 동일하다. 특히 「민전」은 민간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은 소련 모델을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여 정책을 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 주도의 의료보장체계 도입에 대한 주요 정치집단의 일치된 입장은 일견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당시 이념 대립이 극심하였던 해방 공간을 고려해 볼 때 이에 모두 동의한 것은 의외의 반응이다. 이는 메카시즘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공포가 극심하였던 당시 미국 국내 상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 의료보험 도입을 주도한 사회보장국(Social Security Board) 직원은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미연방수사국(FBI)의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며( Blumenthal, 2009: 80), 공화당 상원의원 로버트 테프트(Robert Taft)는 국가 의료보험은 자신이 의회에서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였다( United States, 1946: 47). 게다가 당시 미국은 국가 주도의 의료보장체계를 가진 국가도 아니었다. 45) 이러한 측면에서 미군정 내에서 국가에 의한 의료보험 도입에 찬동한 것도 의외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미국 국내 정치 상황을 같이 고려할 때 이해 가능하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국가적 의료보험 도입에 적극적인 민주당 정권이었고 이에 따라 자유주의 성향의 스탠치필드와 미챔과 같은 이들이 미군정에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보고서에서 국가 개입의 의료보장 모델이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된 이유 중 하나다.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좌우파 정치 단체의 의견이 유사한 것은 당시 조선인들이 선호하던 정치체제와도 관련 있어 보인다. 1946년 7월 미군정은 서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호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였다. 설문 결과에 의하면 좌파의 64%, 우파의 69%, 중도파의 77%가 각각 사회주의를 지지할 정도로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반면에 자본주의에 대한 선호도는 좌파 5%, 우파 25%, 중도파 10%로 우파의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높기는 하지만 사회주의와 비교하였을 때 선호도가 낮았다. 46) 조선인들이 정치적으로 대부분 사회주의를 선호하였던 것과 유사하게 의료보장체계에서도 ‘의료국영화’와 같은 사회주의적 정책을 대다수가 옹호하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후술할 내용처럼 이러한 경향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적인 사회보장 강화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
2) 해방기 정치집단 의료보장 구상의 연속과 단절: 세계사적 흐름에서 구상의 의미와 미군정 법령 제97호와 제헌헌법에서의 반영
1940년대만 하더라도 국가에 의한 의료보장체계를 이미 도입한 선진국도 그 적용 대상을 대부분 근로자에 국한하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여러 국가들은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의료보장체계 개혁을 단행하였다. 세계보건기구헌장(1946), 세계인권선언(1948)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유엔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는 의료보장을 노동자의 권익보호 넘어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사회권으로 확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 이를 제도화하고자 하였다.
개별 국가로 세분화해서 보면 먼저 영국에서 1942년 11월 20일 보험 적용 대상의 보편적 원칙을 주장하는 베버리지 보고서 47)가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는 건강보험 적용 대상의 원칙으로 선별적 적용이 아니라 보편적 적용 원칙을 긍정하였고 영국이 1948년 보험 적용 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규식, 2016: 312). 일본의 경우 1938년 보험 적용 대상자를 확대하여 농민과 자영업자도 포함하는 “국민건강보험법”과 같은 확대된 의료보장체계를 전쟁 전에 이미 마련하였지만, 전후 베버리지 보고서에 영향을 받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 도입을 위해 개혁을 재차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1946년 3월 ‘사회보험조사회’가 설립되었고 1947년 8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초청된 사회보장행정부(社會保行政府)의 윌리엄 완델(William Wandel)을 단장으로 하는 사회보장조사단이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吉原健二·和田勝, 2020: 118). 하지만 일본이 곧바로 전국민의료보험을 구현한 것은 아니며 1961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한편 미국은 현재 의료보장의 대부분을 국가가 아닌 민간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정부가 적극적으로 전국민의료보험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세계 주요 국가의 전후 의료보장체계 개혁을 참고해봤을 때, 해방기 국내 여러 정치·사회 단체가 보여준 의료보장 구상은 해방기 의료보장체계 논쟁이 세계적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미군정과 좌·우파 주요 정치집단의 답신안에서는 보험 적용 대상이 주로 노동자로 국한되어 있었다. 이것은 의료보장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처지에서 최선의 방책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사정에서 이북에서는 경제적·제도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47년부터 노동자, 사무원과 그 부양가족을 대상으로 국가사회보험법을 실시하였다. 비록 전쟁 승리를 목적으로 북한 주민의 사기를 제고하기 위한 수단적 측면도 있지만 북한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1953년 1월 1일부터 국영의료체계 기반의 전 국민을 대상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시행했다. 48) 반면에 한국은 1963년에 의료보험법을 도입하였고, 1977년에 의료보험을 부분적으로 실시하였으며, 1989년에 가서야 전국민의료보험이 가능하였다.
한편 해방기 정치집단의 구상은 이후에 성안된 법령에 영향을 주었지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렴 과정에서 굴절이 있었다. 미군정의 조선분과위원회의 제안은 미군정령 제97호(Ordinance Number 97)에, 좌우파 한국인의 의료보장 구상은 제헌헌법(制憲憲法)에 각각 일부 반영되었다.
첫째, 노동법 입안을 위해 초청된 조선분과위원회가 보고서를 제출한 이후 실제로 한 달 뒤 1946년 7월 23일 미군정 법령 제97호, “노동문제에 관한 공공정책공포: 노동부 설치(Public Policy in Labor Matters Declared; Department of Labor Established)”가 제정되었다( 박지향, 1992: 127). 법령은 독립된 노동부를 세우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그중 의료보장체계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제2조 노동부 설치 조목에서 노동부의 역할로 “조선의 임은(賃銀) 노동자의 복지를 조성, 증진, 발전시켜”야 함을 명시하여 노동자의 사회보장을 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같은 조의 (가)항에 따르면 노동부는 고용 조건과 “노동의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감독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라)항에서는 “노동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하여 군정청이 군정장관에게 노동법을 추거(推擧)해야 함을 적시하여 이후 의료보장체계가 포함된 완성된 형태의 노동법을 구상하였음을 볼 수 있다.
법령 제97호는 보고서에서 조선의 “노동, 산업, 농업에서 민주적인 조직의 발전을 장려”하는 것과 관련하여 “거의 진전이 없었다”라고 비판한 것을 미군정이 수용하여 “자율적 노동조합”의 긍정하는 조문을 작성하였다는 의의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분과위원회의 주장을 대폭 축소하여 반영하였으며 특히 의료보장체계의 경우가 그렇다. 이 점은 앞서 4장 1절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하지와 같은 미군정 내 보수파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는 의료보장체계의 형태와 구체적 적용 방식이 권고되었지만 제97호 법령에서는 노동부의 업무와 일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의료보장체계를 거론하였을 뿐 그것을 구현할 구체적인 방법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다만 박지향은 이를 두고 제97호 법령은 미군정 내 강경론자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박지향, 1992: 129-130). 또한 의료보장체계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법령 제97호는 이전에 의료보장체계에 대한 법적 근거가 전혀 없었지만 이 법령을 통해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의의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둘째, 좌우파 정치집단의 의료보장체계 논쟁은 대한민국 정부의 최초의 헌법인 제헌헌법 제19조에 일부 반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제헌헌법은 유진오가 주축이 되어 작성하였다( 이영록, 2006: 121). 유진오는 그가 헌법 초안을 작성할 때 참고로 삼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밝혔는데 여기에는 “1947년 제2회 미소공위에 제출된 자문 5, 6호에 대한 각 정당 및 사회단체의 답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진오, 1980: 22). 이를 통해 제헌헌법 제19조는 좌·우파 측 정치 단체 모두가 공통되게 주장하였던 사회보험의 도입 취지에 공감한 것은 확인되나 보장 적용 범위가 축소된 형태로 제시되었고 실제로 이 부분은 헌법 제정 과정인 제헌헌법 독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유진오가 작성한 제19조 초안에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국회의원 27명이 대표 제출자 전진한 49)을 필두로 헌법안 제2독회에서 수정동의안을 제출하였다. 전진한은 수정동의안을 제출하면서 “실업보험이라는 사회보험”이 필요하므로 조문에 ‘실업’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자는 것이 수정동의안의 취지라고 밝혔다. 제헌국회에서 전진한의 주장은 해방기 그가 위원장으로 있던 대한노총이 1947년 3월 당면 행동 강령으로 “실업보험과 질병보험제 실시”를 제시하였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채규항, 1947: 116-120). 여기에 더하여 조봉암 50)은 전진한의 수정안 제출 취지를 보충 설명하면서, 원안은 “노약, 노령, 질병”에 한정되어 “일반 양로원”에 불과하다며, 직무 중 부상이나 병이 생기는 경우에 대한 보완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옥주 의원은 이미 원안에 “질병, 기타 근로능력의 상실”이라는 말로 실업에 대한 부분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이후 표결 결과 대다수가 수정동의안에 반대하여 결국 부결되었다. 이에 따라 실업과 산업재해를 명시한 문안이 제19조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51) 하지만 유진오는 그가 직접 작성한 제헌헌법에 대한 해설서에서 “본조는 소위 사회보험 제도를 국가가 설치할 것을 규정”한 것이라고 적어 제19조에 담긴 사회보험 도입 취지를 분명히 하였다( 유진오, 1953: 86). 결국 제헌헌법은 해방기 정치집단이 공통된 의견을 보인 실업과 산업 재해에 대한 보장이 뚜렷하게 반영되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지만 해방기 주요 정치 세력이 의료보장의 대상자를 대부분 노동자에 국한 것과 달리 제헌헌법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의의도 동시에 존재한다. 무엇보다 해방 전부터 논의된 의료보장체계 도입에 관한 주장이 52) 해방기 의료보장체계 논쟁을 거쳐 건강상의 문제로 생활 능력이 없는 이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최초로 성문화한 제헌헌법으로 일부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만 유진오가 해방 직후의 논의보다 소략한 보장 내역을 담은 조문을 제시한 이유에는 그가 헌법의 역할을 “입법 규정의 기본방침을 지시”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사항은 이후 법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관련되었을 수 있다( 유진오, 1953: 86).
5. 해방기 의료보장 논쟁의 의사학적 함의: 다양한 의료보장 구상의 각축장으로서의 해방공간
이 글은 해방기 한반도 남한 지역을 중심으로 보건의료체계의 운영 기준과 재원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의료보장체계에 관한 다양한 집단들의 구상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해방공간은 의료보장체계 구상을 둘러싸고 다양한 정치집단들이 각축을 벌였던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좌우파 정치 단체의 의료보장체계 구상은 각론에서 차이가 발견되지만 정치적 지향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을 위한 국가 차원의 의료보장체계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은 유사하였다. 더욱이 당시 한반도 이남을 통치하고 있었던 미군정 내부에서도 국가 주도 의료보장체계 도입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해방기 여러 정치 집단이 동의하였던 실업과 질병에 대한 보장을 포함하는 의료보장체계 구상이 제헌헌법에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지만 건강상 문제로 인해 생활능력이 없는 이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최초로 헌법에 성문화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해방기 한반도의 의료보장체계 논쟁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의료보장 대상자를 확대하고 보장을 강화하려는 전세계적 움직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다만 이미 의료보장체계를 제도적으로 도입한 국가가 의료보장 적용 대상의 범위를 전 국민으로 확대하려는 경향과는 달리 미군정과 주요 정치 단체는 노동자 중심의 부분적인 의료보장체계를 점진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해방기의 ‘점진적’ 실현 기조는 실제로 이후 한국 의료보장체계 역사에 반영되었다. 1948년 제헌헌법이 제정되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시행에 필요한 의료보험법은 1963년이 되어서야 제정되었고, 그마저 제정 과정에서 강제 실시 조항이 빠짐으로써 결국 의료보장제도의 실행은 1977년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53) 의료보장체계 구현에 있어 미군정과 1948년 제헌헌법 제정 이후 수립된 한국 정부의 소극성은 당시의 한계이기도 하며 동시에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조선의 현실이기도 했다. 의료보장제도 실시의 지연은 국민들이 의료비가 없어 의료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고통을 상당 기간 감당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이 글은 해방 공간에서 이루어진 논쟁들을 발굴하고 분석함으로써 의료보장제도를 만들고자 했던 정치집단의 구상들을 밝혔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그간 한국 의료보장체계의 역사를 의료보험법 제정(1963)이나 시행(1977) 이후를 위주로 다루었던 기존 논의의 범위를 확장하였으며 이는 향후 한국 의료보장사 관련 논의를 더 풍성히 하는 일에 기여할 것이다. 해방기의 의료보장체계 구상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의료보장체계 도입 과정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미국 국내의 의료보장체계 도입 논의와 미군정 내부의 그것이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 미군정 내부의 논의가 이후 한국의 의료보장체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에서 다루기로 한다.
Table 1.
The Comparison of Ideas of Main Political Groups for the National Health Security
단체명 |
보험적용대상 |
재원 |
보험 급여 |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 |
임시정부수립대책 협의회(「임협」) |
노동자 |
- 국가, 경영주, 노동자가 보험료 납부를 적당한 비율로 부담 |
노동자의 사망, 노쇠, 폐질(廢疾), 질병, 상해, 실업 |
보건의료 종사자(개인) |
- 특별한 정책을 제시하지 않음 보건의료 조직(기관) |
- 도립병원의 하부조직인 군립병원 설치 |
- 건강보험법의 도입으로 재원 확보 |
- 군 지역의 경우 의료공제조합으로 운영하여 반관반민 방식 공급체계 지향 |
- 1면 1보건소 설치 |
- 사회사업적 의료기관 확충 |
시국대책협의회(「시협」) |
모든 노동자 (강제 보험) |
건강보험법의 도입으로 재원 확보 |
「임협」과 동일 |
「임협」과 동일 |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의」) |
「시협」과 동일 |
「시협」과 동일 |
「임협」과 동일 |
「임협」과 동일 |
민족민주주의전선(「민전」) |
모든 육체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의무보험), 농민(임의가입) |
기업소(국영 포함)와 피 보험자가 수익의 적당한 비율로 보험료 납부 |
실업, 질병, 장례, 노동으로 인한 불구와 질병, 임신, 양육자 상실과 같은 경우에 생활보조금, 장례 비용, 연휼금과 같은 현금 급여 |
보건의료 종사자(개인) |
- 자학(自學)의사의 국가시험제도를 실시 |
- 의학교 수를 늘릴 것 |
- 개인 개업의의 도시 집중 현상을 막고 이를 균포할 것 |
보건의료 조직(기관) |
‘국립병원-협동조합병원-개인개업의원’ 체계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
국영, 공영, 사영을 물론하고 모든 기업소 급의 노동자와 사무원에게 의무적 사회보험(단, 보험료를 6개월 이상 납부한 이로 제한) |
(1) 국가, 소비조합 사회기업소, 사무소 및 단체는 산업에 따라 지불하는 임금의 (?)% 내지 8% 납부 |
1. 질병, 부상, 불구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노동자 및 사무원들에게 대한 보조금 |
- 사회보험료를 통한 노동자 및 사무원을 위한 각종 후생 사업과 문화 사업 실시 |
2. 임신 및 해산으로 인한 휴가 시의 보조 |
(2) 개인 기업소 및 고용주는 그들이 지불하는 임금의 1% 내지 12%의 범위에서 납부 |
3. 실업자에 대한 보조금 |
4. 의료상의 원호금 |
- 피보험자가 사회보험 관리에 참여(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피보험자가 보험의 규정과 급여 범위에 관여) |
5. 장례 시에 비용 보조금 |
(3) 피보험노동자 및 사무원들은 임금의 1% 납부 |
6. 노동으로 인한 불구자나 직업으로 인한 병에 의하여 근무할 수 없게 된 자들에게 연휼금 |
7. 양육자를 상실한 유가족들에게 연휼금 |
Table 2.
The Comparison of Positions of Imhyŏp, Minjŏn, US Military Government on Political, Economic and National Health Security Policies
|
「임협」 |
「민전」 |
미군정*
|
정치(권력 구조) |
대통령제 민주공화제 |
수상제(내각합의제) 기반 인민민주주의적 공화제 |
국가 원수와 부원수를 입법부에서 임명 및 탄핵 |
경제(토지 개혁 정책) |
유상매수, 유상분배 |
무상몰수, 무상분배 |
유상매수, 유상분배 |
의료보장체계 |
국가 개입 허용 여부 |
O |
O |
O |
민간 개입 허용 여부 |
O |
O |
O |
적용 대상 |
노동자 |
노동자, 사무원, 농민 |
노동자 |
재원 |
국가, 경영주, 노동자가 보험료 납부를 적당한 비율로 부담 |
기업소(국영)과 피보험자(노동자)가 수익의 적당한 비율로 부담 |
모든 민간 기업과 정부 운영 기업이 참여하는 공동출자 자금 |
보험 급여 |
사망, 노쇠, 폐질(廢疾), 질병, 상해, 실업 |
실업, 질병, 장례, 노동으로 인한 불구와 질병, 임신, 양육자 상실 |
산재, 질병, 실업, 사망, 영구 장애 |
의료서비스제공체계 |
도립병원과 군 지역의 의료공제조합 |
국립병원-협동조합병원-개인개업의원 체계 |
정부에 의한 의료 서비스 제공 제계 |
친연성 |
일본 |
소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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