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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1); 2022 > Article
선진 기술을 향한 열망과 적정성의 역전: 1960–80년대 한국의 복강경-미니랩 기술 경쟁†

Abstract

This article examines the technological competition between laparoscopic sterilization and mini-laparotomy from the 1960s to the 1980s in South Korea and analyzes the motives of obstetricians and gynecologists for participating in the Family Planning Program. Obstetricians and gynecologists were key actors in implementing the Program in the front line, but there is not enough research on why they became involved in the Program. Preceding studies describe the doctors as those who internalized historicism combined with population problems and devoted themselves to the cause of the state. However, it is difficult to find concerns about the nation’s future in the oral statements or memoirs of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Program.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fact that laparoscopic sterilization, a complex and expensive technology, proliferated, rather than simple and inexpensive mini-laparotomy in South Korea, a low-income country where the Family Planning Program was implemented. This study also argues that behind this reversal of appropriateness lay the desire for advanced technology of elite obstetricians and gynecologists that cannot be reduced to the cause of the state.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벌어졌던 복강경과 미니랩(mini-laparotomy) 사이의 기술 경쟁을 통해 당대의 산부인과 의사 집단이 가족계획 사업에 참여한 동기를 되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동시대에 진행되었던 기술 추격의 목표와 경로를 다시 묻는다. 많은 연구가 보여주듯, 이들은 가족계획 사업의 핵심 행위자였다. 보건사회부와 보건사회국의 의사 출신 관료, 그리고 의과대학에서 예방의학을 연구하던 여러 교수가 가족계획 사업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진두지휘했다면, 대학 병원의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와 개원가의 많은 이들은 사업의 기술적 수단을 연구하는 동시에 일선의 실천을 담당하였다.
이들 산부인과 의사가 가족계획 사업에 참여한 동기는 무엇인가. 한 가지 답은 이들이 국가의 연장(延長) 또는 국가와 공모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사는 출산율 감소라는 국가의 대의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하였으며, 그러하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사업에 헌신하였다는 해석이다. 이를테면 “인구가 우리나라처럼 많으면서 못 살고 있는 우리 한국의 처지는 늘 가슴 아프게 나의 마음을 조여들게 만들고만 있었다”는 당시 보건사회부 의정국장 이종진(李宗珍, 1916–1994)의 회고에서 국가와 개인은 쉬이 구분되지 않는다(대한가족계획협회, 1991: 347).1)
가족계획 사업에 대한 연구를 양분하는 정책사 연구와 여성사 연구 모두 이러한 관점을 공유한다. 먼저 사업의 한 가지 축인 국가 기구 및 반관반민 기구에 초점을 맞춘 전자의 흐름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여러 의사의 회고를 수집하여 제시함으로써, 국가와 의사를 동일시하는 해석의 원형이 되었다(공세권 외, 1981; 대한가족계획협회, 1991;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여성사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정책사 연구 과정에서 수집된 여러 의사의 회고는 여성사 연구에서도 활발하게 인용되었으며, 의사는 여기에서도 자신의 행위자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국가의 의지에 따라 피임 기술을 보급하고 적용하는 존재로 그려졌다(배은경, 2012; 조은주, 2018).
그렇다면 무엇이 의사와 국가를 하나로 묶어주었을까. 조은주는 인구 문제와 결합한 ‘역사주의’를 지목한다(조은주, 2018: 139–171). 역사주의는 디페시 차크라바르티가 정리한 개념으로, 근대성이 ‘유럽에서 먼저’ 발흥하고, ‘나중에 다른 곳’으로 확산되어 나간다는 일종의 단선적 발전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차크라바르티, 2014: 52). 여러 연구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해방 이후 한국의 엘리트 사이에는 이와 같은 생각이 만연하였다. 전근대적이고 식민적인 과거와 현재를 극복하고, 하루빨리 서구 근대라는 미래를 성취해야 한다는 일종의 ‘변방 콤플렉스’ 탓이었다(강정인, 2004; 이상록, 2007).
조은주의 지적처럼, 의사 집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이들은 인구 이론을 매개로 역사주의를 내면화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워런 톰슨(Warren Thompson, 1887–1973), 프랭크 노트스타인(Frank W. Notestein, 1902–1983)과 같은 여러 인구학자는 인구변천 이론을 정식화했다. 근대화 정도에 반비례하는 출생률의 수준에 따라 국가 간에 일련의 발전 단계를 나누어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Notestein, 1945; Thompson, 1946). 이들은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저소득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신맬서스주의적 개입, 즉 인위적인 출생률 조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Davis, 1946; Notestein, 1948).2)
이와 같은 인구학자들의 주장은 냉전의 분위기에서 빠르게 확산하였다. 자유 진영의 많은 이들은 인구 증가와 근대화의 둔화를 공산주의와 한데 엮어서 생각하였다. 저소득국의 높은 출생률을 그대로 둔다면 경제 발전이 늦어지거나 불가능해지고, 결국 이것이 사회 불안으로 이어져 공산화로 귀결되리라는 전망이었다. 이에 따라 저소득국의 인구를 조절하기 위하여 민간 재단과 각국 정부가 여러 원조 기구를 설치하였고, 이에 힘입어 세계 각국에서 유례없는 규모의 인구 조절 운동이 벌어졌다(Critchlow, 1995; Frey, 2011).
이러한 세계 질서 속에서 한국의 일부 엘리트 의사는 해외 유학과 연수 등을 통해 서구의 인구 이론을 습득하였고, 인구 문제와 결합한 역사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조은주, 2018: 139–171). 인구변천 이론이 가정하는 바와 같이 출생률을 기준으로 시간 축을 정렬할 수 있다면,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향하기 위해서는 가족계획 사업이 필수적이었다. 요컨대 변방 콤플렉스와 역사주의를 공유했던 엘리트 의사 집단은 인구 이론을 통해 출생률과 근대화를 한데 엮어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와 혼연일체가 되어 가족계획 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산부인과 의사 집단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시 사업에 참여했던 많은 산부인과 의사의 구술에서는 출생률에 대한 염려를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3) 오히려 후술할 서울적십자병원 산부인과의 배병주(裵炳胄, 1922–2013)는 그런 “그럴싸한 얘기”를 “역사적인 가치가 없는” “헛소리”라 일축했다(황진주 외, 2018: 63, 65). 정책사 연구에 담긴 구술도 다르지 않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학교실의 곽현모(郭顯模, 1926–2014)는 대한가족계획협회 관계자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인구’나 ‘출생률’과 같은 단어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대한가족계획협회, 1991: 352–355). 산부인과 의사가 가족계획 사업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구 문제가 아닌 다른 지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가족계획 사업의 진행과 함께 벌어진 미니랩과 복강경 기술의 경쟁은 산부인과 의사의 동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미니랩과 복강경은 난관 불임 수술을 시행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후술하겠지만 난도와 비용, 설비 등의 측면에서 미니랩은 복강경을 압도하는 기술이었다. 미니랩 수술은 별다른 훈련 없이도 집도할 수 있었고, 수술에 필요한 기구 역시 1960년대 당시 이미 국산화가 완료되었을 정도로 간단하고 저렴했을 뿐 아니라, 수술실과 같은 시설이 없이도 무리 없이 집도할 수 있었다. 반면 복강경 수술은 숙련된 의사라고 해도 오랜 기간 별도의 훈련을 받아야 했으며, 기구 또한 고가였고, 수술실 등을 갖추지 않으면 집도 자체가 불가능했다.
비싸고 복잡한 복강경과 저렴하고 간단한 미니랩의 경쟁은 예상과 달리, 전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견 불합리해 보이는 사태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조망되지 않았던 산부인과 의사 집단의 이해관계가 놓여있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이 글은 먼저 미니랩과 복강경 기술 각각의 도입과 확산 과정을 살핀 다음, 두 기술의 경쟁에서 복강경이 승리했던 이유를 돌아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산부인과 의사가 가족계획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동기를 규명하고, 당대에 벌어졌던 기술 경쟁과 추격의 의미를 되묻는다.

2. 도입: 인구 조절을 위한 두 가지 기술

1) 미니랩: 저소득국에서 개발되고 확산한 적정 기술

미니랩 또는 최소개복술은 난관 불임 수술을 시행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름과 같이 복부를 작게 절개하여 난관을 잘라 묶거나 소작하는 방식이다. 미니랩이 개발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난관 불임 수술은 배를 크게 열어야 가능한 수술이었다. 그러나 미니랩의 등장과 함께 상황은 달라졌다. 새로운 수술법은 복부 치골 상부에 2 cm에서 3 cm의 작은 절개창을 내고, 그 틈으로 난관을 꺼내어 조작하는 방식으로 집도되었다. 장점은 분명했다. 크게 절개하지 않기에 통증이 적고 회복이 빨랐으며, 따라서 오랜 기간 입원해야 하는 기존의 수술과 달리 단기간의 입원 또는 외래로도 수술이 가능했다. 이에 더해 수술실 등의 기반 시설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미니랩은 간단한 처치실만 있어도 가능한 수술이었고, 따라서 농촌 지역의 의원급 의료기관에서도 손쉽게 집도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미니랩의 장점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미니랩 난관 불임 수술을 처음 개발한 이는 일본의 우치다 하지메(內⽥⼀, 1921–1996)였다. 1950년대 당시 일본에서는 가족계획 사업이 한창이었다.4) 사업의 시행을 위해 여러 산부인과 의사가 피임 기술의 연구에 나섰고, 우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개복 수술이 전후 일본의 상황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난관 불임 수술의 개선을 모색했고, 미니랩은 그러한 고민의 결과였다. 자신이 개발한 방법에 자신감을 얻은 우치다 하지메는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 3회 세계산부인과학회(World Congress of Obstetrics and Gynecology)에 참석하여, 이른바 우치다 술식(術式)을 발표하였다(Uchida, 1961; Powell, 2011).
우치다의 발표 이후,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저소득국의 여러 산부인과 의사가 미니랩을 도입하였다. 한국에서는 서울적십자병원 산부인과의 배병주가 대표적이었다. 일본의 연구를 접한 그는 1966년부터 미니랩 난관 불임 수술을 시작하였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치다 술식을 개선하기도 했다. ‘배병주 술식’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신 마취가 아닌 국소 마취로 수술을 시행한다는 점이었다. 하루 이상의 입원이 필요한 전신 마취와 달리, 국소 마취는 “입원할 필요 없이 4–5시간 안와(安臥)하여 휴식을 취하고 불안 감, 현훈, 토기 등이 가라앉고, 맥박, 호흡, 체온, 혈압에 이상이 없고 출혈이 없”다면 곧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배병주, 1977). 대규모로 시행해야 하는 가족계획 사업에 적합한 특성이었다.
또 하나는 자궁거상기(⼦宮擧上器)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우치다 술식은 자궁 경부를 통해 퀴레트(curette)를 삽입하여 자궁을 고정한 뒤, 절개창으로 작은 갈고리를 넣어 난관을 밖으로 꺼내고, 그런 다음 난관을 잘라 묶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갈고리를 넣어 난관을 꺼내는 두 번째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배병주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궁 경부에 끝이 구부러진 막대를 삽입하여 자궁을 들어 올림으로써 난관을 복벽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배 씨 자궁거상기’를 이용한다면, 구태여 난관을 복부 깊은 곳에서 꺼낼 필요가 없었다. 배병주는 서울적십자병원을 찾은 25명의 환자에게 이러한 방법을 시험해보았고, 이후에도 반복해서 같은 방식으로 미니랩 수술을 집도하였다(배병주, 1975).
그러나 이와 같은 개선에도, 미니랩은 가족계획 사업의 수단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의사가 부족했다. 배병주가 미니랩을 시작했던 1966년 당시, 한국의 산부인과 의사는 390명뿐이었다(보건사회부, 1967: 20–21).5) 전국 단위의 사업을 시행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숫자였다. 또다른 이유는 대안 기술의 존재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한국 정부는 자궁내 장치를 도입하여 해마다 적게는 22만 건, 많게는 39만 건의 실적을 거두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117–118). 사업을 관리하던 여러 관료의 입장에서, 이미 궤도에 올라탄 사업의 방향을 굳이 수정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에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경구피임약이라는 더욱더 간편한 방법까지 들어올 예정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배병주의 사회적 위치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학교실이 배출한 ‘제1호 박사’였지만, 모종의 이유로 학교를 떠나 1959년 서울적십자병원 산부인과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황진주 외, 2018: 70). 일부 의과대학에 속한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가족계획 사업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던 상황에서, 이는 사업에 대한 영향력의 상실을 의미했다. 이에 더해 배병주는 미니랩의 경험을 논문으로 정리하여 발표하지도 않았다. 까닭은 분명치 않다. 배병주는 소속을 옮긴 이후에도 『대한의학협회지』, 『최신의학』, 『대한산부인과학회잡지』 등의 학술지에 꾸준히 논문을 게재했지만, 미니랩에 대해서는 증례 보고 논문조차 쓰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여러 이유로 말미암아, 미니랩은 널리 알려질 수도, 설령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확산하기 힘든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배병주는 미니랩을 향한 일념을 꺾지 않았다. 여성에게도 남성의 정관 불임 수술과 같은 영구적인 피임 기술을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배병주, 1977: 196). 경구피임약은 약의 복용을 멈추면 피임 효과가 중단되고, 자궁내장치 역시 반영구적이라는 말과 달리 탈락률이 높아 사실상 일시적 피임 기술에 가까웠다. 여기에 두 기술은 통증이나 출혈과 같은 다양한 부작용을 노정하기도 했다(배병주, 1975: 308).6) 실제로 이러한 한계로 말미암아, 자궁내장치와 경구피임약의 확산세는 1970년 이후 정체하였다. 대안이 필요했던 정부는 결국 난관 불임 수술로 사업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미니랩의 확산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복강경이라는 다른 대안이 마련된 결과였다.

2) 복강경: 고소득국이 개발한 저소득국을 위한 기술

복강경 수술은 난관 불임 수술을 시행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배를 작게 절개한 뒤 복강경을 통해 속을 관찰하며 긴 형태의 수술 기구를 이용하여 난관을 절제 또는 소작하는 방식이다. 복강경 자체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었다. 복강경은 이미 20세기 초에 개발되어, 유럽을 중심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다만 20세기 중반까지 복강경은 내과와 산부인과 등에서 복강과 골반강 내를 들여다보는 진단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직접 수술을 집도하는 등의 치료 목적에는 쓰이지 않았다(Litynski, 1997a; 1997b).
진단 목적에 국한되어 사용되던 복강경은 196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치료 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프랑스의 라울 팔머(Raoul Palmer, 1904–1985)와 독일의 한스 프랑겐하임(Hans Frangenheim, 1920–2001)은 1950년대 말부터 복강경의 발전과 활용 방안을 함께 연구하며, 난관 불임 수술과 같은 침습적 처치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있던 프랑스와 독일 부퍼탈은 가톨릭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고, 그러한 탓에 난관 불임 수술의 집도가 불가능했다. 팔머와 프랑겐하임은 자신들에게 복강경 술기를 배우던 영국의 패트릭 스텝토(Patrick C. Steptoe, 1913–1988)에게 수술의 시행을 권하였고, 1964년 스텝토는 영국 로열 올덤 병원(Royal Oldham Hospital)에서 처음으로 복강경을 이용한 난관 불임 수술을 집도하였다(Edwards and Steptoe, 1980: 73–75; Edwards, 1996: 217–220).7)
스텝토의 성공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도 복강경 난관 불임 수술을 도입하였다. 선봉에는 존스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학교실의 클리퍼드 윌리스(Clifford R. Wheeless Jr., 1938–)가 있었다.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에 고무된 윌리스는 1969년 존스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내원한 여성을 대상으로 복강경 수술을 시행하였고, 이에 더해 수술을 더욱더 간단하고 저렴하게 만드는 데 골몰하였다. 이후 윌리스는 전신 마취를 부분 마취로 전환하고 절개창의 개수를 줄임으로써, 복강경 수술의 기술적 난도를 개선하였다(Wheeless, 1969; 1972a; 1972b).
윌리스가 복강경에 주목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간단하고 저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복강경은 미니랩에 비해 복잡하고 비싼 기술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에게 비교의 기준은 미니랩이 아닌 기존의 개복 수술에 놓여 있었다. 이들 대다수는 미니랩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우치다는 1961년의 국제 학회 발표 이후 영어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영미권의 의학자에게 우치다의 연구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더해 스텝토의 성공이 알려지면서, 서구 산부인과학계 전체가 복강경의 가능성에 경도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복강경은 기술적 난도나 경제성으로 볼 때 개복 수술과 미니랩의 사이에 놓인 기술이었지만, 미니랩이 인식의 바깥으로 밀려나며 더없이 안전하고 간단하며 저렴한 수술로 자리매김하였다.
복강경 수술이 난관 불임 수술을 시행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부상하면서, 냉전의 세계 질서 속에서 저소득국의 인구 조절 사업을 주도하던 미국 정부는 복강경의 확산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1972년 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가 복강경 연구를 주도하던 존스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에 연구 용역을 의뢰하였고, 윌리스를 비롯한 여러 산부인과 의사는 저소득국의 환경에 맞추어 복강경을 더욱더 안전하고 저렴하게 만드는 데 몰두하였다. 개복 수술보다는 나았지만, 복강경은 여전히 기대만큼 안전하지도 저렴하지도 않은 기술이었으며, 이는 저소득국으로의 확산을 가로막는 중대한 결함이었다. 수년의 개선 작업을 거치며, 복강경의 안전성과 경제성은 저소득국에 적합한 수준으로 크게 개량되었다.8)
그리고 이러한 개선 작업에 힘입어, 복강경은 한국을 포함한 여러 저소득국으로 빠르게 확산하였다. 국제개발처의 후원으로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Johns Hopkins Program for International Education in Gynecology and Obstetrics, JHPIEGO)이 시작되었고, 1973년부터 1983년까지 전 세계에서 모두 2,901명의 의사가 존스홉킨스대학교의 교육을 거쳤다. 이들에게는 1,621대의 복강경 수술 세트도 무상으로 기증되었다.9) 가족계획 사업이 한창이던 한국에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장윤석(張潤錫, 1931–),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의 강신명(姜信明, 1922–2006),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곽현모 등이 먼저 시범 사업에 참여하였고, 정식 사업이 시작된 1975년에는 모두 119명이 교육을 받았다. 스텝토가 최초로 복강경 수술을 시작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처럼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에는 난관 불임 수술을 시행하는 두 가지 기술이 도입되었다. 미니랩이 이제 갓 성장을 시작한 전후 일본에서 개발되어 한국으로 직접 수입되었다면, 복강경은 서구 학계에서 개발되어 저소득국의 환경에 알맞게 개량된 이후 한국으로 이전되었다. 다시 말해, 미니랩은 저소득국 사이에서 직접 개발되고 유통된 기술이었고, 복강경은 고소득국에서 개발하여 저소득국으로 원조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로의 차이는 두 기술의 경쟁에 큰 영향을 끼칠 참이었다.

3. 경쟁: 출생률 저하를 위한 기술, 기술 추격을 위한 기술

1) 복강경의 승리: 적정성의 역전

복강경의 도입에 따라, 난관 불임 수술의 방법은 세 가지가 되었다. 기존의 개복 수술이 대규모 가족계획 사업에 활용될 수 없음을 고려한다면, 실제로는 미니랩과 복강경의 두 가지 선택지가 있던 셈이었다. 당시 한국의 상황에 알맞은 선택지는 물론 미니랩이었다. 간단하고 저렴하다는 면에서 미니랩은 복강경을 압도했다. 수술의 기본을 익힌 이라면 누구나 간단한 기구와 짧은 훈련만으로 시행할 수 있었던 미니랩에 비교하면, 복강경 수술은 기구 자체도 비싸고 복잡할뿐더러 훈련에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진행된 수년의 개량 작업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은 역으로 복강경의 낮은 경제성과 높은 난도를 방증했다. 여기에 배 씨 자궁거상기를 비롯한 기구 전체가 국산화되었다는 사실은 미니랩의 경제성을 배가하였다.10)
국제적 분위기 역시 미니랩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국제개발처와 존스홉킨스대학교는 복강경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복강경 교육과 기증에 소비되는 비용 탓이었다. 정식 사업이 시작된 1975년 7월부터 1976년 6월까지,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은 장비 구매에만 120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11) 복강경 무상 기증 정책을 철회할 수도 있었지만, 수원 국가 대부분이 복강경을 구입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는 교육의 효과를 모두 무위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로그램의 첫해를 정리하는 보고서에는 “앞으로의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은 복강경 훈련과 분리될 필요가 있다”는 문장이 실렸다(Burnhill and Moulding, 1976: 24).
복강경을 향한 회의론 속에서, 서구 사회의 많은 이들은 미니랩에 눈을 돌렸다. 때마침 저명한 국제 학술지 『피임』(Contraception)에 미니랩의 성과를 보고하는 논문이 발표된 결과였다. 태국 마히돌대학교 라마티보디병원에서 근무하던 비툰 오사타논즈(Vitoon Osathanondh)가 쓴 글이었다. 내용 자체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부분 마취나 자궁거상기의 사용은 배병주가 선취한 것이었고, 300례의 증례 역시 21,000례에 가까운 우치다의 경험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오사타논즈 역시 자신의 방법이 “산부인과 의사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것이라 썼다(Osathanondh, 1974: 260). 하지만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구 산부인과 학계는 복강경을 향한 회의론이 팽배하던 시점에 마침 영어로 발표된 오사타논즈의 논문을 접한 이후에야, 비로소 미니랩의 존재를 인지했다.12)
국제개발처와 존스홉킨스대학교는 즉각 국제교육 프로그램의 재편에 나섰다. 이들은 먼저 방글라데시에서 미니랩을 활용한 대규모 사업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부작용은 거의 없었고, 수술의 효과도 분명했다. 복강경 사용이 불가능한 “기초적인 설비만 있는 환경에서 환자를 입원시키지 않고” 난관 불임 수술을 시행할 가능성이 다시금 증명되었다. 더 나아가, 방글라데시의 사례는 비단 의사뿐만이 아니라, 의사가 아닌 의료 인력 역시 미니랩을 집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의 시범 사업을 주도하던 공중보건 활동가 자프룰라 차우두리(Zafrullah Chowdhury, 1941–)는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 『랜싯』(Lancet)에 투고한 논문에서, 훈련받은 비의료인이 의사보다 오히려 양호한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썼다(Chowdhury and Chowdhury, 1975). 이는 미니랩이 의료인이 부족한 저소득국에 더없이 알맞은 기술임을 의미했다. 존스홉킨스대학교는 1976년, “복강경 불임 수술 교육은 비용, 복잡성, 프로그램 유지의 어려움 문제로 중단되어야” 하며, “앞으로는 미니랩을 교육해야 한다”고 결정했다(Burnhill and Moulding, 1976: 7).
미니랩이 복강경의 대안으로 부상하면서, 한국에서도 대한불임시술관리협회를 중심으로 미니랩의 확산을 시도했다. 문제의식은 동일했다. “고가의 복강경 장비를 전국의 시술 의사 전부가 구입하여 불임 시술을 실시토록 하는 것은 커다란 어려움이 있”기에, “지방의 의사를 대상으로 고가의 장비가 없이도 시술이 가능한” 방법을 교육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였다(배병주 외, 1998: 143). 1977년부터 미니랩 훈련 사업이 개시되어 경북대학교병원, 전남대학교병원, 부산대학교병원에서 교육이 진행되었고, 1978년부터는 국제불임시술협회(International Project of the Association for Voluntary Sterilization, IPAVS)의 지원으로 사업이 확대되기도 했다. 이전부터 미니랩을 연구하고 집도하던 배병주 그리고 복강경의 대가로서 미국에서 미니랩 수술을 새로 배워온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곽현모 등이 여러 대학 병원의 교원과 개원의에게 수술법을 교육하고, 이들이 다시 교관이 되어 희망자를 훈련하는 방식이었다(대한가족계획협회, 1991: 352–355; 배병주 외, 1998: 143–157).
그러나 미니랩의 등장에도 복강경의 확산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미니랩은 복강경의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미니랩 수술이 시작된 1977년에는 전국에서 난관 불임 수술이 모두 181,445건 시행되었는데, 이 가운데 복강경을 이용한 수술은 81.3%였고 미니랩 수술은 18.2%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심해졌다. 1978년에 시행된 난관 불임 수술 193,398건 가운데 복강경 수술과 미니랩 수술은 각각 89.3%와 10.4%였고, 1979년에는 균형이 더 기울어져 복강경이 92.3%, 미니랩이 7.4%에 해당했다(박찬무·황영환, 1980).13) 복잡한 장비와 긴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미니랩 수술이 고가의 장비와 오랜 훈련을 요구하는 복강경 수술을 대체하지 못한, 적정성의 역전이었다.14)

2) 선진 기술을 향한 열망

적정성이 역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산부인과 의사 대다수가 미니랩이 아닌 복강경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출생률 저하라는 국가의 대의만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국산화가 완료된 저렴한 미니랩과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값비싼 복강경 가운데, 저소득국 한국의 가족계획 사업에 적합한 기술은 당연코 전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살펴본 대한불임시술관리협회의 글처럼 미니랩은 시설이 열악한 지방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술이기도 했다. 병의원 대다수가 도시에 집중된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난관 불임 수술을 전국 규모로 확산하기 위해서는 복강경이 아닌 미니랩이 필요했다. 출생률 저하가 최우선 과제였다면 복강경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미니랩의 도입이 복강경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미니랩 보급 사업이 복강경 보급 사업보다 늦게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두 사업 간의 시차가 없었다면, 두 기술이 경쟁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미니랩이라는 새로운 대안이 부상한 이후, 존스홉킨스대학교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을 담당하던 이들은 복강경을 향한 기대를 거두었다. 장비 구매나 유지 보수에 들어가는 비용 탓에 저소득국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미니랩 보급 사업이 먼저 시작되었다면 한국을 비롯한 저소득국에 복강경 기술이 이전되지 않았을 것을, 다시 말해 경쟁 자체가 없었을 것을 의미했다. 물론 이것이 사태의 전모를 해명해주지는 않는다. 미니랩 수술은 복강경 수술에 비하여 별다른 훈련이나 장비가 필요하지 않은 방식이었고, 그러하기에 복강경에서 미니랩으로의 전환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실마리는 미니랩의 도입과 보급 사이의 시간적 간극에 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1966년에 도입된 미니랩은 11년이 지난 이후에야 비로소 가족계획사업에 포함되었다. 배병주를 제외한 한국 산부인과 학계가 서구 학계를 통해 비로소 미니랩의 존재를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미니랩 보급 사업이 시작되던 당시 이미 배병주라는 미니랩의 대가가 있었지만, 곽현모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니랩 기술을 교육받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심지어 당시 기사는 아예 배병주를 지워버리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김승욱(金勝煜, 1930–2016)이 미니랩을 “처음 도입”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15) 기자의 실수였을 가능성은 작다. 김승욱은 1977년 복강경과 미니랩의 효과를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도 배병주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김승욱, 1977).
이는 한국 산부인과학계의 지향이 한국이 아닌 서구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국의 여러 엘리트 의학자는 대개 미국을 위시한 고소득국의 선진 의료를 경험한 이들이었다. 미군정기부터 시작된 유학과 연수는 이후 미국중화의학기금회(美國中華醫學基⾦會, China Medical Board)와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를 통해 본격화되었고, 이들 사업은 한국의 엘리트 의학자가 외국의 의료 및 의학 교육 체계를 경험하는 주요한 계기로 작동하였다.16) 해외 연수가 가져온 효과는 분명했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이들은 자신이 보고 배운 바에 따라 한국의 의료 체계와 의학 교육 체계를 바꾸고자 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바이러스병연구소 이호왕(李鎬汪, 1928–)의 말처럼 “기초교실의 실습과 교과과정[은] 완전히 미네소타 대학 교과과정으로 변화”하였고, 임상 역시 마찬가지였다(이왕준, 2006: 94).
문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였다. 미국 연수를 통해 마주한 ‘이상적인’ 환경은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비뇨기과학교실의 주근원(朱槿源, 1918–2012)은 미국에서 전립선 수술을 “매일 6–7건씩 시행”하였으나 “귀국 직후에는 장비가 없어서 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이왕준, 2006: 93–94).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안과학교실의 최억(崔檍, 1923–2017) 역시 “안과에는 여러 가지 기계가 필요”하지만 “한국에는 이러한 장비들이 없”었다고 술회했다(연세대학교 의사학과, 2012: 114). 임상의학뿐만이 아니었다. 기초의학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앞서 언급한 이호왕 연구진 또한 실험 장비의 부족으로 유행성 출혈열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다(신미영, 2017). 게다가 이러한 장비는 대개 고가인 탓에, 쉽게 결재를 받기도 힘들었다(연세대학교 의사학과, 2010: 131–132). 인적 자원의 성장을 기반 시설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연구와 진료를 포기할 수도 있었고, 혹은 기반이 있는 곳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이들은 도미를 선택했다(최제창, 1996: 362; 370).17)
이러한 현실에서 가족계획 사업과 존스홉킨스대학교를 통한 복강경의 도입은 서구에서 보고 배운 의료를 무상으로 실현할 기회를 의미했다. 한국의 여러 의학자는 이미 서구 의학계의 연구를 통해 복강경이 진단과 치료에 폭넓게 쓰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외국의 학술지에서는 이미 복강경을 이용한 진단과 불임 수술 등을 논의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도 극소수나마 이르게는 1950년대 후반부터 복강경 진단을 시행해보던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18) 복강경의 너른 확장성은 난관 불임 수술에 국한된 미니랩의 협소한 활용도와 구별되는 분명한 장점이었다. 때마침 시행된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은 복강경을 기증받고 술기를 훈련할 기회였다. 여기에서 한국의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할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가 진단과 치료에 전천후로 사용될 수 있는 선진 기술인 복강경이 아닌, 미니랩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이들의 이상은 한국의 현실에 가까운 태국이 아닌 한국의 미래가 되어야 할 미국에 있었다. 물론 비툰 오사타논즈처럼 저소득국의 환경을 역으로 이용하여 서구 학계의 연결망에 편입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소위 선진 의학을 꿈꾸던 한국 의사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미 존스홉킨스대학교를 통하여 선진 기술과 장비를 갖출 수 있었던 한국 의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연수 과정에서 보고 배운 미국의 의료를 한국에서 그대로 실현하는 편이 더욱더 유리한 전략이었다.
이는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1976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제14회 미국 가족계획연맹의사회(Association of Planned Parenthood Physicians) 연례 회의에서 한국의 사례를 정리하여 발표한 도로시 글렌(Dorothy N. Glenn)은 미니랩을 향한 유인이 크지 않다고 진단하였다. “대학원 수준의 보수 교육 과정”을 통하여 “최상급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복강경과 달리, 미니랩의 경우에는 별다른 이득이 없다는 계산이었다. 글렌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한국의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는 미니랩과 같은 간단한 기술을 시술하는 한낱 “밭갈이 말”(plow horse)보다 복강경이라는 선진 기술을 실행하는 “탁월한 사냥꾼”(superb hunter)이 되려 했다(Glenn, 1976: 36–38).19) 저소득국이기에 눈앞의 현실에 집중해야 했지만, 오히려 저소득국이기에 선진 기술을 향한 열망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였다.
선진 기술을 선택함으로써 세계 의학계의 주류에 가까워지겠다는 한국 엘리트 의학자의 전략은 실제로 성공으로 이어졌다.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 교육 프로그램은 미국과 한국, 양국 의학자의 이해가 중첩된 결과였다. 미국의 여러 의학자는 복강경 난관 불임 수술의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임상례를 축적해야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족계획 사업의 수요가 적고 규제가 엄격한 미국에서는 충분한 자료를 기대하기 힘들었다.20) 방법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린 ‘수술실의 확장’이었다.21) 수술법을 표준화하여 보급하고 규격화된 양식으로 결과를 보고받을 수 있다면, 손쉽게 증례를 확보하고 효과를 증명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은 시범 사업 단계부터 기술 수원 국가의 임상 자료를 수집하였다.22)
한국의 의학자 역시 적지 않은 수확을 거두었다. 복강경 수술의 표준화로 이어진 양국의 연결망 속에서, 한국의 의학자는 선진 기술을 이전받는 동시에, 막대한 임상례를 생산하는 권위자로 대접받았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곽현모가 대표적이었다. 곽현모는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던 1975년 11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 열린 제2차 세계부인과내시경학회(International Congress of Gynecologic Endoscopy)에 참석하여 윤인배 등이 발명한 ‘팔로프 고리’(Falope ring)에 대한 임상 연구를 발표하였다.23) 곽현모의 발표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복강경 수술이 아직 시험 단계였음에도, 곽현모가 발표한 3,044건의 실적은 “전 세계적으로 …… 능가하는 기관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기 때문이었다(곽현모, 1977: 192).24) 체계적으로 정리된 다량의 경험을 바탕으로, 곽현모는 세계 의학계의 이목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한국의 여러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는 국제개발처와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의 교수 요원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복강경 수술을 교육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장윤석을 “에이시언 코디네이터”로 임명하고, “유에스 엠버씨[의] 테이크 케어” 아래 “파푸아뉴기니[의……] 트레이닝”을 맡기는 식이었다(황진주 외, 2018: 215–216). 곽현모 역시 병원장에게 “왜 환자 안 보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냐”는 핀잔을 들을 만큼, “USAID[국제개발처]에서 지원하는 펀드로 …… 저개발국에 가서 강연회[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연세대학교 의사학과, 2011: 114). 수많은 임상례를 바탕으로 복강경 수술의 숙련도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한국은 한 해에만 적어도 18만 건, 많게는 33만 건의 복강경 수술을 집도하는 국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이전받던 곳에서 그것을 다시 이전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선진 기술을 채택하여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려던 전략의 성공이었다.
개원가의 산부인과 의사 역시 복강경 보급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복강경이 새로운 기술을 향한 열망을 채워주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복강경 난관 불임 수술의 보급이 시작된 1975년, 정부는 난관 불임 수술 한 건당 3,500원의 시술비를 책정하였다.25)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시장이 열린 셈이었다. 많은 산부인과 의사가 블루오션을 개척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물론 복강경의 가격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수준이었지만, 앞으로 거두어들일 이익이 더 크리라는 계산이었다.26) 1977년 한국에 수입된 복강경은 모두 313대였고, 이 가운데 외원 없이 의사 개인이 구입한 것만 모두 241대에 달했다(이용선·조남훈· 이규식, 1977: 124). 당시 한국 산부인과 의사의 수가 960명이었음을 고려할 때(보건사회부, 1978: 34–35), 1/3 정도가 복강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부의 지원은 이러한 경쟁을 부채질했다. 반관반민 기관이었던 대한불임시술관리협회는 1976년부터 정부가 배정한 복강경을 점검하고 수리하였는데, 1980년부터는 보수 사업의 범위를 민간 병의원으로 확장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를 거치지 않고 개인이 직접 산 복강경도 무상으로 관리 받을 수 있었다(배병주 외, 1998: 227–228). 이후 정부는 1982년 7월부터 복강경에 대한 관세를 감면하고, 불임 수술에 대한 조세를 완화하기도 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298–299).27) 복강경 구매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크게 완화함으로써, 복강경의 보급을 촉진하는 조치였다.
물론 사태를 뒤집어보려던 이들도 있었다. 복강경 구매에 부담을 느끼던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은 새로 시작된 미니랩 보급 사업을 통해 경쟁에 참여하려고 했다.28) 하지만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 집단이 만들어놓은 2년의 시차는 결정적이었다. 난관 불임 수술이라는 새로운 시장은 이미 복강경 설비를 갖춘 민간의 중대형 병원이 잠식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환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고, 승합차를 동원해서 농촌 지역의 여성을 병원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29) 미니랩의 강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대한불임시술관리협회가 쓴 바와 같이 미니랩은 복강경이 시행될 수 없는 지방을 위한 기술이었지만, 승합차를 이용한 공간의 압축은 복강경의 적용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장하며 미니랩이 필요한 공간을 사실상 소거하였다.30)
정부는 어떠했을까. 복강경의 수입으로 유출되는 외화를 생각한다면, 이미 국산화가 완료된 미니랩을 확산하는 편이 국가 경제에 유리했다.31)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는 복강경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정부 예산이 아닌 민간 자본이 투자되었다는 점, 사업의 방향성에 영향을 주던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가 대부분 복강경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 유치를 둘러싸고 경쟁이 벌어질 만큼 복강경 수술이 이미 확산하여 가족계획 사업 실적 자체에는 별다른 해가 없었다는 점 등이 주요 원인으로 추정된다. 만약 선진 기술의 도입이 인구 문제의 해결에 방해가 되었다면, 다시 말해 복강경이 빠르게 확산하지 못해 사업의 진행에 지장을 주었다면, 정부의 대응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십만 건에 달하는 복강경 난관 불임 수술의 높은 실적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하였고,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 집단은 별다른 방해 없이 선진 기술을 향한 열망을 구현할 수 있었다.
한국의 여러 엘리트 의학자는 이 모든 결과를 미리 내다보았을까. 다시 말해 그들은 미니랩이라는 저소득국의 기술이 아닌 복강경이라는 서구의 기술을 선택함으로써, 주류 의학계의 연결망으로 편입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였을까.32)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시행한 국제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에는 이를 예견하거나 기대했던 사람과 그러지 못했던 사람이 뒤섞여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강경의 가능성은 분명해졌다. 곽현모의 사례는 저소득국의 의학자라고 하여도, 임상례를 충분히 확보한다면 얼마든지 주류 의학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미니랩을 선택할 이유는 모두 사라졌다. 세계적인 학자로 발돋움하거나 세계 학계와 접속하기를 조금이라도 원한다면, 응당 한국의 오늘에 알맞은 기술인 미니랩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줄 복강경을 선택해야 했다.

4. 나가는 말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산부인과 의사가 가족계획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요컨대 이는 가족계획 사업이 기술 추격의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의 축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떤 이들에게 근대화된 미래, 근대화된 조국은 낮은 출생률을 의미했겠으나, 또 어떤 이들에게 이는 선진 기술을 뜻했다. 국제학회 참관과 유학, 연수 등으로 고소득국의 진료 및 연구 환경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여러 엘리트 의학자는 보고 배운 바를 그대로 실현할 수 없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기술 수준으로 정렬되는 또 다른 형태의 역사주의를 내면화하였다.
그러하기에 미니랩과 복강경의 기술 경쟁은 후자의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출생률을 기준으로 근대화의 정도를 가늠한다면, 저소득국 한국에 알맞은 기술은 단연 미니랩이었다. 간단하고, 저렴하며, 의료 시설이 부족한 농촌에서도 쉽게 시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니랩이 전후 일본에서 개발되어, 한국과 태국에서 발전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제반 요건이 좋던 유럽과 미국 등지의 의학자가 개복 난관 불임 수술의 대안으로 복강경을 집어 들었다면, 우치다 하지메, 배병주, 비툰 오사타논즈는 어려운 여건에 알맞은 미니랩을 개발하고 개선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니랩은 저소득국의 환경에서 비롯한, 저소득국의 현실에 알맞은 기술이었다. 인구 문제를 해결하여 근대화된 내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복강경이 아닌 미니랩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인구 문제가 아닌 기술의 발전 수준으로 시간 축을 재설정한다면, 답은 달라질 수 있었다. 사업의 방향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던 한국의 여러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는 미니랩에 덧씌워진 저소득국의 흔적을 거부하고, 고소득국의 기술인 복강경을 원했다.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은 이와 같은 선진 기술을 향한 열망을 구현할 통로였다. 이들은 연수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글로나 보던 복강경 기구를 얻고 익힐 수 있었으며, 세계적인 의학자와 직접 교류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미 복강경이 가져다준 새로운 기술 추격의 가능성에 눈을 뜬 이들에게, 미니랩은 성에 차지 않는 기술이었다.
가족계획 사업이 열어젖힌 기술 추격의 길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주지하듯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족계획 사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출생률로 표상되는 근대화의 한 축이 완료되었기 때문이었다. 1984년을 기점으로 출산율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인 2.1명을 밑돌기 시작했고, 일각에서는 이제 저출산을 걱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어놓기도 했다(인구정책50년사 편찬위원회, 2016: 113–121). 가족계획 사업이 없었다면 복강경의 대규모 도입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에서, 이는 기술 추격의 핵심 동력이 꺼져버렸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기술 발전이라는 또 다른 축에서 한국의 근대화는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수술 현미경이나 체외수정과 같은 새로운 재생산 기술이 개발되면서, 또 다른 추격의 목표가 등장한 결과였다. 한국의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 집단은 이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에서 다루고자 한다.

Notes

1) 이종진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의사 출신 관료로, 이후 국립의료원 원장과 대한가족계획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다른 이들의 회고도 마찬가지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보건사회부 보건국장으로 가족계획 사업의 실무를 담당했던 윤석우(尹錫宇, 1926–2011)는 “국민의 생활 안정과 풍요한 경제사회 문화사회의 복지혜택을 누리려는 낙토의 실현”을 위해 사업에 참여했다고 술회했다(대한가족계획협회, 1991: 356).

2) 다만 여러 인구학자가 처음부터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1945년만 하더라도 노트스타인은 “삶의 수준을 향상하고, 보건을 개선하며, 교육을 증대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는다면, 출생률이 자연스럽게 낮아질 것이라 주장하였다(Notestein, 1945: 57). 독립변수인 근대화를 추진함으로써 종속변수인 출생률을 조절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불과 3년 후인 1948년이 되자, 그는 “출생률 감소를 가져올 수 있는 지역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농경 사회에서 출생률을 줄일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서구 사회에서 일어났던 점진적인 도시화의 결과를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다”(Notestein, 1948: 253). 높은 인구성장률이 경제 성장을 막는다면 출생률의 감소를 기대할 수 없게 되고,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기만 할 것이었다. 인구 문제가 경제 성장을 막고, 이것이 근대화를 늦추어 출생률 감소가 둔화되면서 다시 인구 문제가 심화하는 악순환이었다. 출생률은 이제 근대화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종속변수가 아니었다. 높은 출생률과 이에 따른 높은 인구성장률은 근대화의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독립변수가 되었다. 킹슬리 데이비스(Kingsley Davis, 1908–1997)의 견해도 마찬가지였다. 1944년만 해도 “빠르고 균형 잡힌 근대화가 높은 인구성장률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던 데이비스는 불과 2년 만에 “경제 발전만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입장을 선회하였다(Davis, 1944: 278; 1946: 243). 사이먼 스즈레터는 이러한 입장 변화를 중국의 공산화가 가져온 심리적 충격의 결과로 해석한다(Szreter, 1993).

3)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구술사료선집(황진주 외, 2018), 그리고 같은 기관에서 진행한 일련의 인터뷰가 대표적이다(연세대학교 의사학과, 2009; 2011).

4) 일본에서 인구 담론이 확산하고 인구 조절 사업이 실행되는 국제, 국내 정치적 맥락은 후지메 유키(2004), Homei(2016), 김인수(2018)를 참고하라.

5) 2019년 현재 한국의 산부인과 의사는 모두 6,969명이다(보건복지부, 2020: 184–185).

6) 국립가족계획연구소가 1970년에 발간한 두 편의 보고에 따르면, 자궁내장치 시술 이후 동통, 출혈 등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는 전체의 42%에 달했고, 경구피임약 역시 오심 및 구토, 출혈 등으로 복용을 중단하는 경우가 전체의 4.7% 정도였다. 가족계획 사업이 매해 몇십만 명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몇만에서 몇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여성이 새로운 피임 기술의 부작용에 그대로 노출된 셈이었다(김태룡, 1970: 35–39; 조경식, 김응석, 김응익, 1970: 40).

7) 스텝토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팔머는 우리 영역[산부인과학]에 복강경을 도입하였고, 프랑겐하임은 기구를 발전시켰으며, 스텝토는 사용법을 가르쳤다”(Edwards and Steptoe, 1980: 75).

8) 복잡한 부품은 간단한 부품으로 교체되었고, 위험한 방식은 안전한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먼저 단순화와 경량화를 위해 복잡한 렌즈 장치 대신 소아용 구불창자내시경이 설치되었고, 복강을 부풀리는 기복 장치와 전력 공급 장치도 작게 개선되었다. 이에 더해, 장기 손상의 가능성이 있던 단극 겸자(unipolar forceps) 전기 소작 방식은 자납식 소작(contained cautery), 양극 겸자(bipolar forceps), 내응고(endocoagulation), 훌카 클립(Hulka clip), 팔로프 고리(Falope ring) 또는 윤인배 고리(Yoon’s ring)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9) 존스홉킨스 산부인과 국제교육 프로그램의 초창기 운영 상황은 일차년도 보고서인 JHPIEGO(1975)에 담겨있다. 다만 베이츠 번호가 없어 인용이 쉽지는 않다. 상기한 정보는 JHPIEGO(1975), Part 2, Section II, A, 5, 1을 참고하라. 이 외에도 프로그램이 시작된 이듬해에 발간된 Burnhill and Mouding(1976), 프로그램 10주년을 기념하여 그간의 경험을 간략하게 정리한 Castadot et al(1986)도 참고할 수 있다.

10) 배병주는 ‘배 씨 자궁거상기’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고(배병주, 1976), 국내 공장에서 이를 생산하였다. 제품을 생산한 업체는 덕품의료기공업으로 추정된다(식품의약품안전청 의약품안전국 의약품심사부 의약품기준과, 1979).

11) JHPIEGO(1975), Part 1, Section II, pp. 35–36.

12) 배병주는 1974년 오사타논즈의 연구가 발표된 이후, 뒤늦게 논문을 발표하여 자신이 오사타논즈에 앞서 자궁거상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5년에 「복식소절개난관불임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대한산부인과학회잡지』에 논문을 게재하고, 1976년에는 멕시코에서 열린 제8회 세계산부인과학회에 참가하여 ‘배병주 술식’을 발표했다(배병주, 1975; Bai, 1976). 그러나 그의 독창성을 인정해주는 이는 없었다. 우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사타논즈의 글이 발표된 이듬해에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여 『미국산부인과학회지』(American Journal of Obstetrics and Gynecology)에 논문을 투고했으나, 이는 고유한 연구를 의미하는 ‘원저 논문’(original article)이 아니라 임상 경험을 소개하는 ‘임상 의견’(clinical opinion)으로 분류되었다(Uchida, 1975). 우치다는 이후에도 오사타논즈의 전사(前史) 내지 기원으로 정리되거나 때로는 무시되곤 했다. 이를테면 국제개발처 인구국에서 근무하던 산부인과 의사 조지프 스파이델(J. Joseph Speidel)이 정리한 미니랩의 역사에서 우치다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Speidel, 1976).

13) 복강경과 미니랩 외에도 ‘이외’의 방법으로 시행된 난관 불임 수술이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매년 0.5%, 0.3%, 0.3% 존재하는데, 이는 분만이나 제왕절개 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진행된 개복 난관 불임 수술로 추정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복강경 수술의 유행을 미니랩의 확산을 가로막았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 165).

14) 적정성의 역전이 한국 특유의 현상인지 또는 일본과 태국 등지에서도 반복된 현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태국의 경우 처음에는 복강경이 유행하였으나, 이후 미니랩이 복강경의 자리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Intaraprasert, et al., 1988; Intaraprasert, et al., 1996). 이는 한국과 태국의 경제 상황이 빚어낸 차이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로 보강할 것이다.

15) 「미니랩방식 불임시술 국내 처음 도입 성공」, 『경향신문』, 1975년 4월 3일, 5면. 아예 김승욱이 미니랩을 개발했다고 보도한 기사도 있었다. 「새로 개발된 여성불임술」, 『중앙일보』, 1975년 2월 13일, 4면.

16) 1950년대 중반까지는 록펠러재단과 한미재단, 세계보건기구 등의 지원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후에는 마찬가지로 록펠러재단에서 운영했던 미국중화의학기금회와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지원이 대다수였다. 지원 대상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였다. 초기 보건학에 집중되었던 유학과 연수는 이후 임상의학과 기초의학 등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이루어졌던 유학에 대해서는 장영민(2016), 권영훈(2017), 이동원(2020) 등을, 이후의 미국중화의학기금회와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이왕준(2006), 여인석(2015), 김성은(2019) 등을 참고할 수 있다. 물론 지원을 받지 않고 사비로 유학을 떠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박지영·황교련(2021)을 살필 수 있다.

17) 이러한 예는 의학 외의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화학자 이태규(李泰圭, 1902–1992)와 리승기(李升基, 1905–1996) 역시 기반의 미비로 연구가 어려워지자, 각각 도미와 월북을 선택하였다(김근배, 2008).

18)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의 고광도(⾼侊道)가 대표적이다. 소화기내과 교수였던 고광도는 일본에서 복강경을 들여와 간과 담도의 종양 등을 진단하는 데 사용하고, 경험을 정리하여 발표하였다(고광도, 1968; 1969). 그러나 당시만 해도 복강경은 매우 값비싼 도구였고, 그런 탓에 대개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실제로 고광도를 제외하고, 복강경의 사용을 보고한 이는 없었다. 존스홉킨스대학교를 통해 복강경이 도입되기 전까지 복강경의 임상적 의의는 대개 가능성의 수준에서만 언급될 뿐이었다.

19) 글렌은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뿐 아니라, 일선 개원의 역시 선진 기술을 향한 선망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보았다. “의사 특유의 새로운 기술을 향한 열망” 탓에 미니랩 시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복강경 수술에 쓰이는 값비싼 장치를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리라는 예상이었다.

20) 한국은 가족계획 사업 초기부터 미국에서 여러 재생산 기술을 지원받았다. 1960년대에 대규모로 보급되었던 리페스 루프(Lippes loop)나 경구피임약이 대표적이다. 이들 기술은 안전성이 온전히 증명되기도 전에 한국을 비롯한 저소득국으로 확산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 각지의 인구 조절 사업은 거대한 임상시험의 장이기도 했다. 재생산 기술의 확산 이면에 놓인 고소득국과 저소득국 간의 권력 불균형에 대해서는 Briggs(2002: 109–141), Marks(2001: 89–115)를 참고하라.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문제이다.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은 임상시험의 구조적 폭력성을 분석하고,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원용하여 이를 생명자본과 잉여건강이라는 개념으로 정치하게 풀어낸다(라잔, 2009).

21) 브뤼노 라투르가 사용한 ‘실험실의 확장’에서 빌려온 표현이다(라투르, 2003).

22) JHPIEGO(1975), Part 2, Section I, 1.

23) 복강경 수술의 안전성을 개선하기 위해, 1973년 당시 존스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 복강경 불임클리닉(Laparoscopic Sterilization Clinic) 소장이었던 윤인배(尹仁培, 1936–2014), 그리고 같은 대학의 시어도어 킹(Theodore M. King, 1931–2002)과 윌리스 등이 개발한 기술이다. 겸자로 난관을 당겨 고리를 만들고, 여기에 실리콘 고무줄을 걸어 지속적인 압력을 유도함으로써 난관을 괴사시키는 방식이었다. 전기나 열에 의한 부상의 가능성이 없고, 수술의 난도가 낮다는 장점이 있었다(Yoon, Wheeless, and King, 1974; Yoon, King, and Parmley, 1977). 윤인배는 새로운 방식으로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Yoon, 1975).

24) 같은 내용은 가족계획연구원의 이름으로 발간된 『여성불임술』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문장의 유사성에 비추어볼 때, 실제 집필을 곽현모가 담당했으리라 판단된다(가족계획연구원, 1978: 43).

25) 「올해 가족계획 사업은 이렇게」, 『가족계획소식』 9 (1975.2), 1쪽.

26) 1977년 당시 복강경의 가격은 400달러 수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 1,034달러의 38.7%에 해당했다. 복강경의 가격은 Wheeless(1975)가 제시한 값을 기준으로 하였다.

27) 복강경 난관 불임 수술의 확산이 시작된 시점에 비하여, 관세 감면이 늦어진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가족계획 사업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고려할 때, 새로운 정책의 시행 역시 1982년에 시작될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의 개시에 맞추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1981년 5월과 11월에 발표된 경제기획원과 보건사회부의 인구 정책 기획안 역시 제5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는 1982년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다(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 1981; 가족계획연구원, 1981). 이렇게 준비된 인구 정책은 1981년 12월, 이른바 ‘49개 시책’으로 정리되어 발표되었다. 내무부와 국방부, 보건사회부 등 정부 전 부처가 참여하는 종합 대책이었으며, 재무부 역시 불임 수술 수용자에 대한 우선 융자 조치에 더하여 본문에서 언급한 복강경 등에 대한 관세 감면 조치 등을 내어놓았다. ‘49개 시책’의 상세한 내용은 한국인구보건연구원(1984: 13–14)을 참고하라.

28) 미니랩 수술을 교육받은 이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모두 210명이었다(공세권 외, 1981: 176). 물론 이 가운데에는 이미 복강경을 들여놓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29) 「현장 고발: 복강경 수술」, 『함께가는여성』 14 (1988.10.), 10–12쪽. 배병주(1988)도 같은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러나 정부는 중대형 병원 간의 환자 유치 경쟁을 외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를테면 1977년 7월 주부클럽연합회와 대한가족계획협회, 가족계획연구원이 참여한 좌담회 ‘인구 정책 현황과 앞으로의 방향’에서, 서울시 용산구 보건소 소장 박보훈(朴寶薰)은 “지정 [의]원 자체에서 동원된 기동력[이] 시술 실적을 높이는 데 ……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고 발언했다(박보훈, 1977: 40–41).

30) 1980년 당시 미니랩과 복강경을 시행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각각 629개소, 567개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복강경이 난관 불임 수술의 다수를 차지한 이유였다(공세권 외, 1981: 128).

31) 국산화를 통해 외화 유출을 줄이고, 외국에 대한 기술 의존을 벗어나 기술 자립에 도달해야 한다는 정부의 방침은 1960년대 이후 여러 산업 분야 전반을 관통하는 대원칙이었다. 경운기, 전기밥솥, 중경수로 핵연료, 폴리에스터 필름 등의 국산화 과정에 대해서는 차례로 Choi(2017), 최형섭(2019), 박예슬(2021), 임재윤(2016) 등을 참고할 수 있다. 의료 분야에서 추진된 국산화에 대한 연구로는 박정제, 정준호(2021)가 대표적이다. 국산화 개념 자체의 역사적 변천에 대해서는 최형섭(2021)을 보라. 특이하게도 복강경은 국산화가 늦은 기술 가운데 하나이다. 복강경의 국산화는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의 연구를 통해 규명할 것이다.

32)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 집단의 모습은 선진 기술에 가닿기 위한 동시대인의 전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연구자가 보여준 바와 같이, 우장춘(禹長春, 1898–1959), 현신규(玄信圭, 1911–1986), 이호왕, 김정룡(金丁龍, 1935–2016) 등 저소득국 한국의 여러 과학자와 의학자는 기반의 한계로 연구 활동에 적지 않은 제약을 받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이들은 연수나 유학을 통해 서구의 기술을 학습하거나, 학계를 주도하던 서구 의학자와 연결망을 구축하였으며, 한국만의 환경에 주목하고 이를 역으로 활용하기도 했다(신미영, 2017; 2020; 김근배, 2004; 2011; 선유정, 2005). 복강경은 이 모든 것이 응축된 사례였다. 인구 문제가 불거지던 한국의 상황은 복강경의 기술 연수를 가능케 했고, 이렇게 시행된 복강경의 기술 연수 과정은 한국의 엘리트 의학자가 미국의 엘리트 의학자와 연결망을 형성할 기회였다. 한국의 엘리트 산부인과 의사는 이러한 상황과 연결망을 활용하여, 국제 산부인과학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그림 1.
우치다 술식(좌)과 배병주 술식(우).
Figure 1. Uchida technique(left) and Bae technique(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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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복강경 난관 불임 수술을 집도하는 모습과 복강경 수술 기구.
Figure 2. Laparoscopic tubal sterilization and laparoscopic surgical instruments.
kjmh-31-1-263f2.jpg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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