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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송대(宋代) 전염병과 의료적 대응 - 주술적 치료의 배격과 의약적(醫藥的) 치료의 보급 -†

Abstract

The efforts of the state and the literati, such as the implementation of beneficent politics(仁政) and the rectification of folk customs, led to the alteration of the medical environment throughout the Song period. Epidemics with a severe impact that occurred frequently were what started the transition. Urbanization, increased transit accessibility, and population growth have all contributed to the emergence of epidemics. In addition, a disease that was indigenous to southern China, where regional development and population expansion were focused, started to spread widely. When an epidemic spread, the local population occasionally received medical care, but most of the time they relied on spiritual care from the neighborhood shaman or spirit medium. Spiritual treatment is utilized to treat malignant infectious diseases, even though professional doctors primarily focus on treating patients with traditional medicine.
By editing and releasing publications on medicine at the national level, the Song dynasty government and intellectuals encouraged the development and transmission of efficient treatment procedures to advance medical practices. Meanwhile, folk remedies or medical prescriptions discovered by renowned scholars like Su Shi(蘇軾) and Shen Kuo((沈括) were included in the medical book and made available to the general public. Although there was a difference of opinion between the Song government and intellectuals, they commonly rejected shamanistic treatment and pursued the spread of medicine treatment through the transmission of codified medical knowledge.
In the end, the spread of the epidemic and the subsequent transmission and development of Song dynasty medicine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emergence of codified medicine treatment, but this was not solely to advance medical knowledge; it also served to further their political and ideological objectives. As a result, the following Jin(金) and Yuan(元) dynasties’ physicians instantly criticized the Song dynasty’s medical advancements. It is indisputable, however, that the medical development of the Song dynasty had a considerable influence on later Chinese medical practice in that it established the ideological superiority of formal and orthodox therapy over traditional and heterodox spiritual care.

1. 머리말

전통시대 중국의 여러 자연재해 중에서도 전염병1) 재해는 대규모적인 인명피해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전염병 재해는 단독으로 발생하는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가뭄, 기근, 홍수, 지진과 같은 다른 자연적인 재해나 전쟁과 동반해서 일어났기에 그 지속적인 과정과 참혹한 결과에서 비롯된 공포와 충격은 다른 자연적 재해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후경이 건업을 포위한 이래로 성 중에는 종병(腫病, 종기가 생기는 병)이 많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계속 이어졌는데 더 이상 판목이 없어서 기둥을 쪼개서 관을 만들었다. 운룡문과 신호문 밖에서부터 버려진 시신들이 겹쳐 쌓여 있었고 피가 흘러나와 더 이상 길을 지나갈 수 없었다. 후경은 성에 들어오게 되자 시신들을 모아서 불 질렀고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악취를 수십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본래 성에는 남녀가 십여만 명을 헤아렸지만, (성이) 함락하게 되자 남아 있는 자들은 겨우 이 삼천 명에 불과하였고 또한 모두 질병을 앓고 있었으니 대게 하늘이 그들을 저버린 것이다.”2)
위 사례는 위진남북조 시기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전염병 창궐의 참혹한 결과가 전쟁의 성패를 바꾸어 놓았음을 보여주고 있다.3) 한편 『위서(魏書)』의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위진남북조 시기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전염병의 창궐을 영적인 세계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은 오행론(五行論)적 사고를 바탕으로 전염병과 같은 자연재해의 원인을 자신들의 정치적 실정이나 태만 또는 궁정에서 벌어졌던 비도덕적인 행위에서 찾았다.4) 따라서 정부에서는 국정운영의 책임감과 더불어 전염병 재해의 창궐로 인해 야기될 비판을 무마하고자 의료진의 파견과 의약품 및 식량의 보급과 같은 구휼 활동을 통해 그 피해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전염병을 경험한 일반 대중들 역시 인간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상관관계 속에서 전염병의 발생을 이해하였다. 여귀(癘鬼)라고 통칭하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영적인 존재는 흔히 제 명을 살지 못하고 후손으로부터 제사를 받지 못하는 불우한 영혼이라고 알려졌는데, 이들은 지상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 전염병을 퍼뜨린다고 알려졌다.5)
근대 서구의학이 도입되기 전에 중국의 공식적인 의가(醫家)들은 전염병의 병인(病因)에 대해서 황제(黃帝)에 의해 체계화되었다고 알려진 고전적인 이론에 기반하여 분석하였다. 비록 당 전반기인 고조 무덕 7년(624)에 태의서(太医署)가 설치되어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의학교육이 시행되었지만(김호, 2012), 소위 신의(神醫)라고 호칭되는 저명한 의가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의학 종사자들은 여전히 민간의 영역과 공식적인 영역을 넘나들면서 비전(祕傳)을 통해 의술을 전수 받았고 스스로 의가로서의 정체성 역시 불명확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의가들은 전염병에 대한 병인 분석과 치료는 전수 받은 의방(醫方)에 근거하였지만, 부분적으로는 악령적 존재에 의한 병의 발생과 이에 대한 주술적 치료에 대해서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송대(960-1279)에 이르러 영적인 세계와의 상관관계에 기반한 전염병의 병인 분석과 주술적인 치료가 집중적으로 공격받아 배격되고 후한대(後漢代) 장중경(張仲景, 150-219)의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과 같은 고전적인 이론에 기반한 의약 처방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송대의 새로운 접근은 의가들에 의한 의학적 지식의 축적과 관련 자연철학의 점진적인 발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주로 송 정부와 사인(士人)에 의해 주도된 유교적 인정(仁政)의 실현과 민간의 풍속 교정이라는 경세적(經世的) 목적에 의해 추동된 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한편, 본 연구에서 인간의 다양한 질병 중에서 전염병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송대 지배층에 의해 주도된 새로운 의료적 대응이 사회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동반하는 전염병과 밀접한 관련 속에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인구의 급속한 증가, 지역간 교류의 확대, 상업적 도시의 성장 등으로 특징되는 송대 중국 남부지역의 사회경제적 발전으로 인하여 역사의 무게 중심이 그 이전까지 주된 역사적 공간이었던 중원지역을 벗어나 남부지역으로까지 이동하였다. 특히 중국 남부의 인구증가와 거주지역의 확대는 새로운 역학적 변경(epidemiological frontier)을 형성하였고(Asaf, 2007: 54), 새로운 환경에 직면한 사람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면역력을 갖추기 전까지 콜레라, 이질, 말라리아 등의 다양한 풍토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도 지역간 교류의 확대나 상업적 도시의 성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전염병의 창궐 빈도와 그 범위를 크게 변화시켰다. 당시 빈번하게 대규모로 발생하는 전염병에 대해 중국 남부 지역민들은 무격(巫覡)이나 여러 민간 종교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주술적인 치료나 관습적인 의약 처방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송대 정부와 유교적 사인들의 주요한 개혁 대상이 되었다.
중국 의학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전환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송 조정과 사인들의 의학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은 지금까지 다양한 차원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우선 송대 사인들의 의학적 개입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들은 소위 ‘유의(儒醫)’로 자처하면서 의술을 직접 익혀 병자들을 치료하거나 민간에서 비전으로 전해지고 있던 의학지식을 발굴하고 이를 출판 보급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최해별, 2018; Furth, 2006; 易素梅, 2016). 한편 다양한 질병 중에서도 특히 전염병과 관련해서, 송 조정은 이전 왕조와는 달라진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에 의해 진행된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防治)의 조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그 시스템이 비교적 효율적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韓毅, 2015). 송 조정은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와 관련된 의학지식을 민간사회에 보급하고자 크게 노력하였고, 특히 ‘傷寒論’이라는 특정한 의학적 이론을 강조하고 이를 공식화하고자 하였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Goldschmidt, 2007). 더욱 포괄적인 관점에서 한대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 전염병의 진단과 치료법의 변천 과정에 주목한 연구는 소위 ‘상한’으로 대표되는 계절적 기후 병인에 의한 신체의 기능적 장애에서 찾는 경우와 실체를 지닌 오염물질 또는 악령적 존재에서 찾는 경우가 공존해왔고 송 조정과 사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공식적으로는 전자의 우위가 확고해졌음을 밝히고 있다(Hinrichs, 2015). 본고에서는 기존에 진행된 연구성과들을 바탕으로, 송대에 전염병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진행된 새로운 현상을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주도한 국가권력과 지식인 지배계층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비록 송대 정부와 사인들의 대응이 의학적 관점에서는 진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이러한 점은 후대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Leung, 2003), 그들이 진정 의도하였던 것은 풍속 교정의 차원에서 주술적 치료나 관습적인 의약 처방을 배격하고 국가적이고 유학적 관점에서 적합한 의약적 치료의 보급이었다.

2. 송대 사회적 환경 변화와 전염병

송대는 소위 ‘강남(江南)’으로 불리는 양자강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남부 지역의 개발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범위와 속도로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인간 거주영역의 급속한 확대와 교통의 발달 그리고 인구가 밀집된 상업적 도시의 발전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전염병의 창궐과 같은 역학적 환경을 조성하였다. 최근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국 역사상의 전염병 관련 사료의 데이터베이스화 사업과 지리적 시각화 사업은 이러한 설명을 적확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6) 각 시대별 전염병 발생 현황 분석과 관련된 연구 중에서 송대 발생하였던 전염병을 살펴보면, 우선 북송시기(960-1127)의 168년 동안 적어도 59번의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하였는데, 평균 2.85년마다 한 번씩 발병한 것이었다(龚胜生, 刘卉, 2011). 다음으로 남송시기(1127-1279)에는 적어도 81차례의 전염병이 발생하였고, 1.87년마다 한 번씩 발병하였음을 알 수 있다(龚胜生ㆍ龚冲亚ㆍ王晓伟, 2015). 이러한 연구에 근거한다면, 남송시대는 북송시대에 비해 강역이 축소됨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발생이 더욱 빈번하였다. 이러한 전염병 발병 횟수와 빈도뿐만 아니라, 그 연구들은 전염병 발생의 지역적 분포 역시 명확한 변화가 발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북송시대에는 주로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전염병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양자강 델타지역과 수도 개봉지역이 가장 높은 빈도를 보여주고 있었고 이밖에도 오늘날의 성도(成都), 서안(西安), 낙양(洛陽), 장사(長沙)에서 전염병 발생의 심각성이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당시 전염병의 발생이 해당 지역의 인구밀도나 인구 유동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높은 인구밀도는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가 쉽게 많은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고, 주민들의 지역 간 이주뿐만 아니라 내륙 수운을 비롯한 다양한 교통로가 확충되면서 인구의 유동성이 증가한 것은 전염병 발생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한편 남송시대에도 유사한 원인으로 전염병 발생 빈도의 지역적 편차가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경제 및 행정 중심지의 이동으로 인하여 북송시대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즉 오대시기 이래 급속한 경제적·문화적 발전을 거듭한 복건(福建)지역이 남송대에 이르러 전염병 발생의 새로운 중심지로 등장하였다.7) 중원을 금나라에게 상실하고 중국 남부로 국가를 옮겨왔던 남송대에는 241개 현에서 전염병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 71.31%가 상대적으로 인구가 조밀한 절서·복건·회서(淮西)·절동(浙東) 등 동부 여러 로(路)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염병 발생의 심각도는 동부 연해에서 서부 내륙으로 갈수록 점차 감소하였고, 동남부 지역인 절서로(浙西路)는 전국에서 전염병 발생이 가장 심각한 지역이었다. 한편 시기적으로는 북송대와 남송대 모두 기온이 온화해지는 봄과 여름에 전염병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던 반면에 가을과 겨울철에는 전염병의 발생 빈도가 비교적 낮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온난한 기후가 중요한 변수임을 알려주는데, 가혹한 추위가 거의 없고 온난한 기후가 더 오래 지속되는 남부지역이 전염병 창궐에 더 유리한 환경이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기존 연구 결과에 근거해 본다면, 송대 남부지역의 인구 증가와 거주지역의 확대는 새로운 역학적 변경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절강지역을 비롯한 중국 동남부지역은 건조하고 한랭한 북부나 서부에 비해 온화한 기후와 울창한 산림 그리고 강과 호수 그리고 바다와 같은 자연환경에 인접해 있었기에, 본래 이 지역에 풍토병(endemic)이 상존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남부의 환경에 처음으로 노출된 북부에서 온 이주민들은 수세대에 걸쳐 면역이 형성되기 이전까지 여러 다양한 전염성 질병에 빈번하게 고통받았다. 또한 기존의 남부 주민들 역시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농지 면적의 확대와 도시의 건설 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전염병에 노출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전염병이 환경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였음을 경험적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가시적으로 형상화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8) 그 결과 중국 남부 주민들은 인간과 접촉함으로써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알려진 물매(物魅) 또는 정괴(精怪)라고 불리는 자연적이면서도 가시적인 영적 존재를 형상화하고 이에 대해 두려움과 경외심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9)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과 경외심은 오통(五通)신앙과 같은 토착적인 신앙의 발전과(Von Glahn, 2004) 무속적인 치료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켰다.
송대 이전의 왕조들은 중국 남부의 민간 풍속에 대해 간헐적으로 통제하였지만, 대체적으로는 주요 통치영역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 역사의 무게중심이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남부 지역으로 점차 이동하게 되면서 송대 지배층은 천하의 풍속을 균질화(homogenization)한다는 야심적인 아젠다를 제시하였다. 우선 송 조정과 사인들은 그 가장 핵심적인 분야로서 주민들의 공중보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주술적인 치료를 배격하고 그 대안으로서 정규적인 의료 교육의 확대와 의약적 치료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3. 전염병에 대한 의학적 진단과 치료법: 두 가지 접근법

고대 중국인들이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전염병의 창궐과 관련된 기사들은 끊임없이 사서에 등장하였다. 이에 대한 의료적 치료법 역시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로까지 그 연원(淵源)이 소급될 정도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록 중국 사료 속에서 발견되는 전염병을 지칭하는 추상적인 용어들만으로는 그 구체적인 병의 증상과 병명을 파악하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10) 그 병인 분석에 있어서는 크게 계절적 기후 병인에 의한 신체의 기능적 장애에서 찾는 경우와11) 실체를 지닌 오염물질 또는 악령적 존재에서 찾는 두 가지 접근법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12) 그런데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두 가지 접근법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널리 알려진 의가들 조차도 두 가지 접근법에 기반한 처방을 모두 사용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의 의서에도 두 가지를 함께 수록하였다.
우선 중국의 고전적 병리학(病理學)을 제시한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일반적으로 질병의 발생 원인을 기의 계절적 순환이 왜곡되었거나 결여되었거나 지나친 결과라고 설명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온열질환을 비롯한 여러 전염병은 기후 불규칙성의 산물로 보았으니, 계절에 맞지 않는 또는 극단적인 온도, 대기 중의 습도, 바람에 의해 생성되었다.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음양응상대론(陰陽應象大論)」에 따르면, “음을 거듭하면 반드시 양이 되고, 양을 거듭하면 반드시 음이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겨울에 추위에 상하면 봄에 반드시 온병(溫病)을 앓고, 봄에 풍사에 상하면 여름에 반드시 손설(飱泄)을 앓으며, 여름에 더위에 상하면 가을에 반드시 해학(痎瘧)을 앓고, 가을에 습사(濕邪)에 상하면 겨울에 반드시 해수(欬嗽)를 앓게 된다.”라고 하였다.13) 이처럼 바람이나 추위와 같은 특정한 기후의 영향이나 더 일반화된 유해한 기운이 기공과 구멍을 통해 신체에 침입하게 됨으로써 온병(溫病) 즉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치유법으로서 『황제내경』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면 모두 쉽게 전염되어 어른이나 아이를 막론하고 증상이 같다고 하면서 이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정기(正氣)가 내부에 존재하여 사기(邪氣)가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14) 따라서 『황제내경』은 온병과 같은 전염병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병인에 대한 분석보다는 일반적인 질병의 발병원리에 기반한 치유에 중점을 두었다.
『황제내경』과 같은 맥락에서 후한대 관료 겸 의학자 장중경은 전염병의 대표적인 공통 증상으로 외감열성(外感熱性) 질병인 상한(傷寒)의15) 치유에 집중하여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작성하였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나의 종족이 본디 많아서 200명에 이르렀으나, 건안 기년이래 10년도 되지 않아 죽은 자가 3분의 2나 되었고, 상한병이 열에 일곱이나 되었다.”라고 하여16) 자신의 가족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책 저술의 동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상한의 병인으로서 외부 요인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데, 삼음삼양(三陰三陽)의17) 생리적 양식에 따른 상한 병리학의 무수한 변화를 분석하고, 맥박의 징후들, 통증의 강도, 질, 위치, 그리고 발열, 오한, 땀의 시기에 미세한 차이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Hinrichs, 2015: 24-25). 비록 각 계절성 질환의 특징에 대해 광범위한 일반화를 하였던 『황제내경』에 비해서 장중경은 개별 증상에 대한 치료의 미묘한 분화를 끌어냈지만, 발열과 통증을 공유하는 계절성 전염병을 증상 별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일반대중에게 계절성 전염병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질병이었다. 또한 관료 겸 의사였던 장중경과 같이 황실이나 지배 엘리트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의학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후한 당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의례뿐만 아니라 고전 의학 이론의 기초가 되는 우주론에서 중심이 되는 연간 순환의 개념에서 벗어나 사고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상한증의 분석에 있어서 계절적 기후 요인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계절적으로 확산한 기는 기후가 잘못되어 발생하는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재난에 더 가까운 범주였다. 한나라의 정치 이론에서, 이것은 잠재적으로 황실의 변덕스러움이나 태만을 가리켰다. 따라서 그것들은 예측할 수 있었고 만약 계산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학사상 『상한잡병론』이 지닌 여러 중요성 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인 측면은 바로 특정 원리에 바탕을 둬서 한 개인에 의해 체계적으로 구성된 최초의 임상의학서였다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 출현했던 의서들의 경우에는 여러 약의 내복과 외용, 침구, 훈증(燻蒸), 입욕(入浴), 관수(灌水), 엄법(罨法), 외과수술부터 주술에 이르는 다양한 대중 민간요법의 무질서한 집성에 지나지 않았던 반면에, 장중경은 외과적 수술이나 주금(呪噤)과 같은 주술적인 요법을 배제하고 하나의 원리에 따라 임상 의학서를 체계적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야마다 게이지, 2002: 169-171).
비록 장중경이 『상한잡병론』의 저술을 통해 ‘상한’ 이론을 집대성하였지만, 이론의 치밀성과 증후에 따른 병변(病變)의 성질과 부위의 설명은 미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치료 원칙과 방약(方藥)이 질병의 증후와 이론적으로 완벽히 연계되지 않아 진정한 의미에서 ‘변증론치(辨證論治)’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18) 또한 조문 별로 정리되어 있어 계통성이 적은 까닭에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후한대 이후에도 ‘상한’에 대한 관심은 제한적이지만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수대(隋代, 581-618) 태의박사(太醫博士)인 소원방(巢元方)은 양제(煬帝) 대업(大業) 6년(610) 편찬된 그의 병인학 연구인 『제병원후론(諸病源侯論)』에서 계절성 질환의 기후 병인을 매우 정교화하고 체계화하였다. 그는 기후적 병인 중에서 상한을 가장 우위에 두었는데, “한사(寒邪)에 감촉된 증상을 상한이라고 한다. 네 계절의 사기에 상하여도 모두 병이 되지만 유독 겨울의 상한이 제일 심한 것은 사나운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한사에 적중되어 바로 병이 된 것을 상한이라 하고, 바로 병이 되지 않고 그 한독(寒毒)이 피부와 뼈속에 숨어 있다가 봄이 되면 온병으로 변하고, 여름이 되면 서병(暑病)으로 변한다.”라고19) 하여 겨울의 기는 특히 독성이 강해서 휴면상태의 독소로 남아 있다가 상한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장중경이 상한의 다양한 병리학적 과정을 신중하게 분석한 곳에서, 소원방은 외부 병인을 우선시하고, 계절적 장애의 다른 변종들 사이의 구별에 초점을 맞추었다. 비록 이후 당대(唐代, 618-907) 손사막(孫思邈, 581?-682?)의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과 왕도(王燾)의 『외대비요(外臺祕要)』가 ‘상한’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세밀한 범주적 구별에서 소원방의 연구에 필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고대시기부터 중국 의학에서는 급속도로 다수의 사람에게 전파되어 상한의 병증과는 같게 보기 어려운 급성 열성(熱性) 전염병에 대해서 전혀 다른 문법의 언어로 그 병인을 설명하고 있었다. 즉 수대의 소원방 그리고 당대의 손사막과 왕도 모두 외감열성 질병으로서 ‘상한’ 이외에도 ‘온병’이나 ‘천행(天行)’의 병인과 치료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 우선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인은 특별한 목적을 띠지 않은 일종의 “나쁜 기”의 형태로 “계절적으로 확산”(時行)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계절적 전염병”(時疫)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계절적 순환과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전염병의 경우 “하늘에 의한 확산”(天行)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도교 경전과 같은 종교적 문헌에서는 “천행”이라는 표현이 전염병을 지칭할 때 더욱더 일반적이었고 하늘의 뜻을 수행하는 의인화된 악령적인 존재의 역할을 상정하였다. 또한 이는 민간의 무속에서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전염병을 의미하는 한자인 ‘역(疫)’에 대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백성들이 모두 앓는 것[民皆疾也]’이라고 풀이하였는데, 이는 전염병이 발생하면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아무런 대책 없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한편 후한대에 편찬된 『석명(釋名)』 「석천(釋天)」에서는 ‘역’이란 ‘역(役)’ 즉 일을 부리는 것으로서, 어떤 귀(鬼)가 행하는 ‘요역(徭役)’으로 정의한다.20) 이를 종합하자면 ‘역’이란 여귀(厲鬼)가 발호하여 영내의 거의 모든 사람이 앓게 되는데 이는 마치 백성들이 요역을 수행하듯이 모두 고생하는 질병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이현숙, 2007: 4).
상한과 같이 기후적 병인을 중시하였던 소원방 역시 비록 의인화된 악령적 존재를 설정하는 것까지는 나가지 않았지만, 예외적으로 피해 범위와 증상이 심각한 악성 전염병의 경우에 대해서 종교적 언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는 역려병후(疫癘病候)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 병은 시기적인 기(氣)·온(溫)·열(熱) 등의 병과 서로 유사한데, 대개 한 해 동안 절기가 조화롭지 못하고 寒暑의 기후가 고르지 못하여(乖候) 혹은 폭풍과 폭우(疾雨)가 있거나 안개와 이슬이 걷히지 못하면 곧 많은 백성들이 질역에 걸린다. 그 병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대체로 모두 (증상이) 유사한데, 마치 사나운 귀신(鬼厲)의 기가 있는 듯하기 때문에 역려병(疫癘病)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21) 또한 이에 대한 치료법으로서 그 귀신과 같은 병인들을 회피하거나 내쫓거나 파괴하는 것을 권장하였다. 한편 고전 의학에서 전염병의 범주에 들어가는 장(瘴)은 설문해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그것은 그리스어에서 지저분하고 불쾌한 공기나 기운·냄새를 의미하는 ‘miasma’와 유사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땅에서 발생하는 불순하거나 오염된 기와 관련이 있다. ‘장’과 ‘기’가 결합된 단어인 ‘장기(瘴氣)’에 대해서 소원방은 『제병원후론』 「장기후(瘴氣候)」에서 중국 남령산맥(南嶺山脈) 이남을 지칭하는 영남(嶺南)지역 즉 오늘날의 광동성, 광서성, 해남도 지역과같이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毒氣)라는 오염물질을 상정하고 설명한다.22) 즉 그는 ‘장기’와 같은 중국 남부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는 풍토병에 대해서 ‘상한’과 그 증상은 유사하지만 그 병인이 한사와 같은 계절적 기후 병인이 아니라 독기와 같은 실체적인 오염물질로 인한 것으로서 상한과는 다른 처방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송대에 본격화되는 중국 남부지역의 개발과 새로운 역학적 변경의 형성에 앞서 소원방은 그 지역 풍토성 전염병의 증상과 치료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었다.
당대 손사막 역시 전염병에 대한 소원방의 포괄적이고 절충주의적인 입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는 『비급천금요방』에서 『상한잡병론』을 수록하여 장중경의 ‘상한’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으로, ‘살귀소약방(殺鬼燒藥方)’·‘호두살귀환(虎頭殺鬼丸)’·‘벽온살귀환(辟溫殺鬼丸)’과 같이 역기(疫氣)로 인해 발생하는 온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처방인 ‘벽온방(辟溫方, 辟瘟方)’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한다. 더 나아가 그는 악령적인 힘을 물리칠 수 있는 방약(方藥)의 활용까지도 포괄적으로 수록하였다. 그는 방약의 효용을 주장하기 위해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활용하였는데, “한나라 때인 건녕(建寧) 2년(169년)에 목성(太歲)은 유(酉) 위치에 있었다. 전염병이 퍼졌고, 극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천성(四川省) 청성산(青城山)에서 온 젊은 서생 계회(季回)가 있었다. 동쪽으로 남양(南陽)을 지나 서시(西市) 문으로 들어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역병에 걸린 것을 보고 가방에서 약을 꺼내 한 알씩 나누어 주었다. 그 영약(靈藥)을 입에 대자 병이 모두 치료되었다. 시중에 있던 수백 수천에 이르는 역귀(疫鬼)가 약을 나눠주는 서생을 보자 모두 겁에 질려 달아났다. 그들의 귀왕(鬼王)이 그 서생을 보고는, 그가 도법(道法)을 가지고 있어 약을 나누어 주자 사람들을 감응시켜 악귀들이 그들이 왔던 길로 도망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서생에게 가서 도법을 받고자 하였다. 그 서생은 「나는 도법이 없고, 오직 내 가방 안에 있는 약만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는 이에 주머니 안에 있던 약을 귀왕에게 바쳤는데, 귀왕이 그 약을 알아보고는 놀라서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리고는 목숨을 구걸하면서 도망쳤다. 이 방약을 갖고서, 산에 들어가면 호랑이, 늑대, 곤충, 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물속에 들어가면 물괴, 교룡(蛟龍), 신(蜃, 이무기)들을 물리칠 수 있다.”라고 하였다.23)
결국 상한과 같은 계절적인 기후 병인에 의한 전염병과 달리 단시간 내에 다수의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악성 전염병의 병인에 대해서 고전적 의학에서는 실체적인 오염물질이나 악령적인 병인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그 악성 전염병은 ‘상한’의 경우처럼 정기를 발현하여 사기의 침투를 막는 신체적 기능의 조화와 향상만으로는 치료될 수 없었기에 그 치료법으로는 의약의 처방뿐만 아니라 악한 요소의 신체 침투를 막거나 신체에서 몰아내는 구마적(驅魔的) 방식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런데 전염병의 진단과 치료법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접근법의 공존은 송대에 이르러 새로운 성격의 정부와 새로운 사인 지배층의 등장으로 인하여 중대한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4. 송대 주술적 치료의 배격과 의약적 치료의 보급

송대 환경의 변화는 빈번한 전염병의 창궐을 초래하였다. 특히 북송 인종(仁宗재위 1022-1063) 동안 눈에 띄게 증가하였던 전염병의 창궐은 정부에게 적극적인 조치를 마련하도록 요구되었다.24) 북송 조정은 태의국(太醫局)의 의관(醫官)을 파견하여 전염병의 종류를 파악하도록 하고, 이어서 의약품과 구호활동을 위한 자금 수송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예를 들어, 1051년에 정부는 현과 지방 관리들에게 백성들의 질병을 완화하기 위해 처방전(方劑)을 무료로 제공하고 배포하도록 명령했다. 1057년에는 전염병과 싸우기 위해 모든 현과 주에 매년 자금을 지출할 것을 명령했다(Goldschmidt, 2007: 76). 한편 지방 관리들은 송대 전염병 퇴치의 말단 역량으로서 이재민 구제, 의료 치료, 사회관리 강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철종(哲宗) 원우(元祐) 4년(1089) 7월 소식(蘇軾, 1036-1101)이 항주 자사로 이제 갓 부임하였을 때 가뭄이 들었고 이어서 기근이 발생하고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우선 소식은 조정에 청하여 상공미의 1/3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고 도승첩(度僧牒)을 판매하여 이것을 쌀로 바꾸어서 기근을 구제하였다. 또한 상평창의 쌀을 방출하여 죽과 약제를 만들고 마을마다 관리와 의원(醫員)을 보내어 병을 치료하도록 하여 수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다. 소식은 “항주는 물길과 육로가 만나는 곳으로서 역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다른 곳보다 항상 많다.”라고 말하고 여유돈 2천관을 모으고 주머니 속 황금 오십량을 들여서 병방(病坊, 병을 치료하는 장소)을 만들고 전량(錢糧)을 축적하여 앞으로 있을지 모를 전염병을 대비하였다.25) 소식의 모범적인 사례 이외에도, 북송대에 이르면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지방정부 차원의 방역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전염병을 대비하기 위해서 의료시설을 확충하고 의약품 구입을 위한 자금을 비축해두는 등 다양한 대비책이 갖춰지고 있었다.
이 밖에도 북송 초기 송 조정은 공중 보건 향상을 위한 조치로써 의학 서적의 출판과 의학 지식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송 조정은 일찍이 여러번 조서를 내려 의학 서적을 수집하였으며 책을 헌납한 사람에게는 많은 우대와 편리를 주었다.26) 그러나 1040년대 동안 지역의 여러 현(縣)에서는 의학 서적의 부족을 토로하면서 추가적인 의학 서적을 제공해줄 것을 청원했다. 인종 황제는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1048년 의관에게 『경력선구방(經歷善救方)』이라는 제목의 의학처방서를 만들 것을 명령하였다.27) 이 의서에 담긴 지식에 대한 접근성을 보다 향상하기 위해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나 범사도(范師道, 1005-1063)와 같은 지방관들은 그 의방을 비석에 새기기도 하였다(최해별, 2018: 107). 1051년, 인종은 “수도나 궁궐밖에는 좋은 의사가 없기 때문에 전염병에 걸리면 백성을 구할 수 없다”고 우려했고, 이에 따라 문관직을 맡고 있는 의사 주응(周應)에게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 편찬하여 출판하라고 명령하였다.28) 그 결과로 나온 문헌이 『간요제중방(簡要濟衆方)』이었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종대 정부의 조치는 부분적인 성과만 달성하였는데, 이러한 의학서적들이 지방 현청에만 보급되었고 그 아래로는 전달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057년도에 이르러 일련의 고대 의학 문헌을 수정하고 출판하는 전문적인 전담기관인 교정의서국(校定醫書局)이 설치되었다. 교정의서국에서는 당시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과 유신(儒臣) 및 의관들을 함께 모아 의서의 내용과 문자를 정확하게 교정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황제내경』, 『상한잡병론』, 『금궤요략(金匱要略)』, 『맥경(脈經)』,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비급천금요방』, 『황제침구갑을경(黃帝鍼灸甲乙經)』, 『외대비요』 등을 교정하여 출간하였다(왕소영ㆍ최환수ㆍ김용진, 2004). 특히 교정의서국의 의서 교정 출판에서 후대 가장 주목받는 것은 『상한잡병론』의 부활이었는데, 이전의 번잡했던 『상한잡병론』의 판본을 엄밀한 교정을 통해 모범판본을 확정하여 상한치료를 위한 의료 처방을 정형화시킴으로써 더욱 표준적인 의학지식의 보급을 지향하였다. 사실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은 서진(西晋) 시대(265-317) 왕숙화(王叔和)의 『맥경(脈經)』을 비롯해서 소원방, 손사막 그리고 왕도 등의 의서에 수록되었지만, 송대 이전 그것에 관한 의학계의 관심은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교정의서국에서 1066년 약간의 주석이 달린 교정판을 발행하게 되면서 상한론에 관한 관심을 촉발했다.30) 상한론 부활의 배경은 몇 가지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데, 우선 상한론의 계절적 순환과 신체기능의 장애를 연결한 관점은 송대 사인들의 우주론적 사고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또한 상한론은 전염병의 창궐이라고 하는 참혹한 현상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송대 사인들에게 자신들의 관점에서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그 처방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Goldschmidt, 2007: 57-58).
게다가 후한대 장사(長沙) 태수(太守)를 지냈던 관료로서 전염병 창궐로 인한 민간의 고통 해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장중경의 일생은 당시 사인들이 흠모했던 이상적인 사인의 표상이었다. 장중경은 서문에서 자신의 개인사로 인하여 『상한잡병론』을 저술하게 되었노라고 밝혔는데, 다른 한편으로 관료로서 그리고 의가로서 당시의 의료 환경에 대한 개선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지금의 의사들을 보면, 경전의 깊은 뜻을 구하여 아는 바를 넓히려 생각하지 않고 각기 집안의 기술만을 전승받아서 시종 옛것만 따른다. 질병을 살피고 병을 묻는데 있어 오로지 말재주에만 힘쓰고, 환자를 상대함은 잠시만 하고 편하게 탕약을 처방한다. 촌맥을 짚어보지만 척맥에 이르지는 않고, 손의 맥은 파악하지만, 다리의 맥은 살피지 않으며, 인영맥과 부양맥 등 삼부액을 살피지 않고, 맥박과 호흡이 50회를 채우기도 전에 판단하며, 수명이 짧아지는데도 진단을 결정하지 못하고 구후는 애초에 비슷하지도 않으며, 얼굴의 각 부위(明堂·闕庭)는 모두 살피지 않으니, 이른바 대롱으로 천하를 보는 격일 뿐이다. 무릇 생사를 구별하는 안목을 갖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31)
즉 장중경은 기존의 의가들이 가업으로 의술을 세습하기만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아 그 의료 수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더 많은 의가 지망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표준적인 의학지식을 성문화하여 널리 보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장중경의 의료 정책적 관점을 자신들의 사상적·정치적 입장에서 지지하고 실현하였던 것이 바로 송대 정부와 사인들이었다.
상한론의 부활을 촉진한 또 다른 자극은 송나라의 초기 수십 년 동안 행해진 일련의 정치적 캠페인으로부터 왔는데, 송 정부와 사인들은 의료적 치료를 받지 못했던 민간에서 전염병 환자들을 방치하거나 무속적인 치유에 매달리는 관습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무속적인 치유에 대한 맹목적 숭배를 남방의 풍속이라고 정형화시켜 설명하였고, 특히 이러한 풍속을 교정하는 것을 그 의료정책의 가장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Hinrichs, 2003: 22). 송대 이전에도 무속적 치료의 풍속을 교정하는 조치는 여러 차례 시행되었지만, 송 정부의 경우에는 무격의 행위에 있어서 일반적인 민간 의례와 관련된 것이 아닌 특정한 치료적 행위에 초점을 맞춰서 이를 불법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32) 의서교정국에서 『상한잡병론』을 1066년에 새롭게 교정 출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070년경에 이르러 상한론은 공식적으로 무속 치료의 대안으로서 주목받았다. 예를 들어 북송대 건주(虔州, 오늘날 江西省 赣州市)의 자사였던 류이(劉彝, 1015~1091)는 상한론에 기반한 『정속방(正俗方)』을 편찬하여 무속적인 치료를 근절하고 정통적인 의학에 의한 치료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33)
소위 유의(儒醫)라고 통칭되는 사인 의가들의 출현은 송대의 두드러진 중요한 사회 현상이었다(최해별, 2018; Furth, 2006). 그들은 의학적 지식을 생산하고 또 천하에 보급함으로써 풍속의 교정과 더불어 소위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 즐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고 하는 유교적 지식인들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였다. 확대된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되어 새로운 정치사상으로 교육된 송대 사인들은 정부의 관리로서 혹은 지역의 지도자로서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전면적 사회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들의 개혁 대상은 정부의 공식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민간의 관습적이고 영적인 영역을 포괄하였다(김한신, 2015). 전염병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송대 중앙조정과 지방관리들은 과거 어느 왕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적극적으로 재해의 상황에 개입하였다.34) 그들은 전염병과 같은 자연재해의 발생을 황제 개인의 정치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고대의 상관론적 사유에서 점차 벗어나 눈앞에 닥친 자연재해는 황제와 사인 공동의 책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김한신, 2021). 특히 사인들은 직접 유의를 자처하거나 또는 의학적 지식을 담론의 장에서 공유함으로써 관습적인 질서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당시 존경받는 사인들에 의한 의학지식의 전승은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의학지식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앞서 항주(杭州) 지주(知州)로서 재직하던 시기(1089-1091)에 창궐하였던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던 소식은 사인으로서 의학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그는 평소 도교의 양생법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고 있었고, 민간의 유효한 의방을 수집하고 이를 널리 전파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황주(黃州) 지주 시절(1080-1084) 유협(游俠)을 자처하는 소곡(巢谷)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성산자방(聖散子方)』이 여러 대규모 전염병(大疫)의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세상을 구하고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보물 [濟世衛家之寶]’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소곡이 그 약방을 은닉하고자 하였던 것에 반대하여 자기 친구이자 저명한 의가였던 방안시(龐安時, 1042-1099)에게 전하여 그의 『상한총병론(傷寒總病論)』에 실리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그 약방이 널리 활용되고 사라지지 않기를 기대하였다. 이후 소식은 항주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도 비교적 저렴한 약재를 사용하는 이 약방으로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고 극찬하였다. 그런데 소식 사후 후대 의가들이 공통으로 『성산자방』의 처방이 지닌 여러 심각한 결함과 부작용에 대해 경고하였지만,35) 소식에 대한 후대인들의 숭배로 인하여 그 처방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는 70년이 지난 후에도 견고하게 유지되었다(易素梅, 2016: 87-88). 결국 소식과 같은 존경받는 사인들에 의해 전파되고 의서에 수록된 약방은 그들의 의학적 전문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송대 사인 편찬의 의서 중에는 상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있었으니, 『소심내한양방(蘇沈內漢良方)』(이하 『소심양방(蘇沈良方)』으로 호칭)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소식의 『소학사방(蘇學士方』과 심괄(沈括, 1031-1095)의 『良方』을 후대에 함께 묶어 편찬한 것으로서, 특히 심괄의 경우 비교적 엄밀한 검증을 통해 그가 수집한 의방들을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소심양방』의 서명은 소식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대부분 심괄이 수집하고 정리한 의방에서 차용한 것으로서, 그는 「原序」에서 소위 ‘양방(良方)’ 즉 ‘좋은 의방’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질병진단, 질병치료, 음용약(飮藥), 처방, 기타약]는 대강에 불과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책에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상세하니. 어찌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의학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매우 오랫동안 처방하여 좋은 처방을 하고 있었음에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상에서 의방으로 알려진 것 중에는 그 치료 효과를 칭송함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천금(千金)』과 『주후(肘後)』와 같은 부류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말이 넘쳐난다. (이는) 사람들이 감히 믿지 못하게 만드니, 내가 ‘좋은 의방(良方)’이라는 일컫는 것은 반드시 그(의방의) 효과를 목도(目睹)하고서 비로소 저술한 것으로서 듣는 것만으로는 예단(預斷)하지 않는다.36)
그는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과 같은 관찬 의서(官修方書)나 『외대비요』와 같은 국가에서 교정한 의서들에 대해서도 일일이 그 효능을 검증하여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면 수록하지 않았다. 특히 심괄의 기준에서 관찬 의서는 진실하고 검증된 병레(病例)를 보충하지 않고, 문헌의 출처와 차이점을 분석하지 않고, 곧바로 원서의 자구(字句)와 편차(編次)를 고친 것에 불과하였기에 불신하게 되었다. 반면에 도가(道家)류의 서적이나 도서나 필기소설 등에 수록된 의방에 대해서는 민간에서 검증을 거쳐 효과를 목도할 수 있었기에 수록할 수 있었다.37) 이밖에도 심괄은 외과적 치료나 침구(針灸)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개방적으로 포용하여 수록하고 있다. 비록 도가의 영향으로 신선보익(神仙補益)하는 양생(養生)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술적 치료에 대해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전염병(瘟疫)의 경우에도 의약적 접근을 강조한다.38)
결국 송대 조정과 사인의 의료에 관한 관심과 개입은 상호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사인 개인 사이에도 입장 차이가 크게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으로 비전(祕傳)을 통한 의학지식의 전승이 아니라 성문화된 의방의 편찬에 집중하고 있었다. 또한 이전의 주술적인 치료를 배격하고 의약적 치료를 강조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한편 송대 전염병에 대한 무속적인 인식은 여전히 계층의 고하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인식의 근저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상생활에서 민간의 무격이나 도교 구마사(驅魔師)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의존도는 더욱 증가하였다. 심지어 전문적인 의가들도 주로 남방에서 발생하는 악성 전염병의 경우 의료적 차원에서 액막이나 구마의식과 같은 주술적인 치료법을 여전히 활용하였다.39) 그럼에도 송대 정부와 사인들에 의한 천하의 풍속을 하나로 한다는 캠페인의 결과, 온병이나 천행과 같이 전염병의 병인으로서 외부의 오염물질 또는 악령적 기와 같은 존재의 침투를 상정하는 병리학적 해석은 대체로 비정통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특히 정부의 공식적인 권위와 저명한 사인의 사회적 위상은 관습적이고 비정통적인(heterodox, 陰, 邪) 주술적 치료에 대해 공식적이고 정통적인(orthodox, 正) 의방에 의한 치료의 관념적 우위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영적인 치료법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진언(陳言)과 같은 송대 의가들 조차도 세습이나 비전에 의한 폐쇄적인 의학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의서의 편찬과 교육을 통한 의학 지식의 대중적 전파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장중경이 지적한 바와 같이 친족 내의 세습이나 비전에 의한 관습적인 의학기술의 습득은 송대 공식적인 의학계에서 그 위상의 심각한 손상을 가져왔고, 정규적인 의료 교육과 성문화된 의학지식의 전승이 점차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易素梅, 2016: 96).

Ⅴ. 맺음말

송대 정부와 유교적 사인들에 의해 추진된 의방의 수집과 성문화된 의학지식의 전승은 이후 금대(金代, 1115-1234)와 원대(元代,1271-1368) 의가들로부터 비난받기도 하였다. 소위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로 지칭되는 금대와 원대의 이름난 의가들인 유완소(劉完素)·장종정(張從正)·이고(李杲)·주진형(朱震亨)은 공통으로 송대 사인들에 의해 제시된 의약 처방 중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상한론에 기반한 송대의 주류 의약 처방은 너무 오래된 것으로서 당시 새롭게 출현하는 질병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친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송대 소위 유의로 불리는 자들은 의약의 처방에만 집중할 뿐 주변 환경적 요인과 음양변화 원리를 결합한 ‘오운육기(五運六氣)’와 같은 의학 이론에 무지했다고 비판받았다.(Leung, 2003) 그들의 비판을 통해 북송대 사인들의 의방에 대한 다소간의 결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지만(역소매, 2016), 후대의 비판 속에서도 의학지식이 주로 가족간의 세습이나 비밀리에 전수되었던 송대 이전의 관습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주술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심괄의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임상적 경험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풍조가 두드러졌고, 외과적인 시술과 같이 고대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221) 명의인 편작(扁鵲) 이래로 중시됐던 의학 지식은 주류에서 벗어나게 되어 민간의사 즉 초의(草醫)의 영역으로 강등되었다.
송대 의학적 환경의 변혁은 송대 정부와 사인의 인정 실현과 민간 풍속 교정이라는 새로운 경세관(經世觀)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그 상황을 촉발했던 것은 송대 빈번하게 발생하고 궤멸적인 피해를 주었던 전염병이었다. 송대 인구의 증가와 교통망과 도시의 성장은 전염병이 창궐하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고, 인구 증가와 지역 개발이 집중된 중국 남부지역에서 상존하였던 토착적인 풍토병은 광범위한 지역에 확산하기 시작하였다.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면 일반 대중들은 의학적인 치료를 받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격에 의한 영적인 치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 전문적인 의가들도 고전적인 의학에 의한 치료를 위주로 하였지만, 이와 더불어 악성 전염병에 대한 치료에 있어서는 영적인 치료도 병행하였다. 송대 정부와 사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국가적 차원의 의서의 교정과 출판 그리고 사인들에 의한 효과적인 의방의 발굴과 보급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국가적 권위를 지닌 의방이나 소식이나 심괄과 같이 존경받는 인물에 의해 발굴된 민간 의방이 의서에 수록되어 민간에 보급되었다.
결국 전염병의 창궐에 의해 촉발되었던 송대 의학의 전승과 발전은 주술적이고 관습적인 치료에 대한 의약적 치료의 관념적 우위를 확고하게 하였으나, 그것은 순수하게 의학 지식의 축적과 발전이라기보다는 경세적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그리고 유교적 윤리관에 기반한 취사선택의 결과였다. 따라서 후대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고, 진정한 의학의 발전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다시금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Notes

1) 사전에서는 전염병(epidemic)을 특정 시기에 인구나 지역사회에 만연하고 영향을 받는 지역에 일반적으로(평상시에) 존재하지 않는 특정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광범위한 질병으로 정의한다. 전염병은 일반적으로 특정 인구 또는 특정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또는 정기적으로 발견되는 풍토병(endemic)과 대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전염병이라는 용어의 일반적인 사용을 모두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전염병’이라는 표현 대신에 공식적으로 ‘감염병’이라는 표현을 선호하고 있다. 비록 공식적인 표현은 ‘감염병’이지만 여전히 ‘전염병’이라는 표현과 혼용해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감염병이라는 용어는 전통시대의 다양하고 시대에 따라 개념 자체가 상이한 질병들을 포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경록은 ‘유행병’(流行病, epidemic disease)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한다(이경록, 2021: 3-5). 반면에 본고에서는 독자들에게 보다 익숙한 표현인 ‘전염병’이라는 용어를 편의상 사용하도록 한다.

2) “自景圍建業,城中多有腫病,死者相繼,無復板木,乃刳柱為棺。自雲龍、神虎門外,橫屍重沓,血汁漂流,無復行路。及景入城,悉聚尸焚之,煙氣張天,臭聞數十里。初,城中男女十餘萬人,及陷,存者纔二三千人,又皆帶疾病,蓋天亡之也.” 『魏書』 卷98, 島夷蕭衍傳.

3) 서양에서도 전염병은 전쟁의 성패를 갈라놓았다. 투키디데스의 임상기록으로 알려진 기원전 430~429년 아테네에서 발생했던 미지의 전염병으로 아테네 농민군의 25%가 병사하였고,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맥닐, 2005: 127).

4) 北周 武帝 保定 3년(563)의 기사로서 2월 북주 무제의 조서를 살펴보면, “삼가 생각하건데, 태조 문황제께서는 昊天에 대해서 삼가 순종하였고 많은 정무를 정성껏 돌보셨고 曆法과 육가 중에서 음양(가)을 가장 으뜸으로 여겼다. 나와 같은 어리석은 자에게 이르러서는 그대로 실행할 수 없으니 그 불안함을 생각하고 밤에도 근심하고 경계하였다. 근래에 조정에서 기인하여 많은 일이 갑자기 발생하여 조화를 어그러뜨리고 질서를 무너뜨리니 선조의 뜻을 저버렸다. 바람과 비가 때를 잃어버리게 되자 역려가 거듭 창궐하였고 곡식이 잘 자라지 않고 만물이 성장하지 못하니 짐이 심이 그것을 걱정한다.”라고 하였다. “伏惟太祖文皇帝,敬順昊天,憂勞庶政,曆序六家,以陰陽為首。洎予小子,弗克遵行,惟斯不安,夕惕若厲。自頃朝廷權輿,事多倉卒,乖和爽序,違失先志。致風雨

5) “(절강) 縉雲 사람인 同知樞密院事 管師仁이 (벼슬을 하지 않은) 士人이었을 때에, 정월 초하루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수많은 大鬼 무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모습이 매우 獰惡하였고 그들에게 꾸짖어 물었다. (行疫使者)가 대답하여 말하길: 「우리들은 疫鬼로서 새해 첫 날에 인간 세상에 병(疫)을 퍼뜨리려고 한다.」하고 하였다. 관시인이 말하길: 「우리 집에도 퍼뜨릴 것인가?」라고 물으니 말하길: 「그대의 집은 아니다.」라고 하였고, (이에) 「어찌하여 (우리집은) 면할 수 있었는가?」라고 하니, 말하길: 「혹은 삼세가 덕을 쌓거나, 혹은 집안이 장차 흥하려고 하거나, 혹은 육식을 하지 않거나 하는 경우 이러한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된다면 곧 우리는 (그집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 집에는 疫患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그 행역사자들을) 볼 수 없었다.”“管樞密. 縉雲管樞密(師仁)為士人時,正旦夙興,出門遇大鬼數輩,形貌獰惡,叱問之。對曰:「我等疫鬼也,歲首之日,當行病(葉本作「疫」。)於人間。」管曰:「吾家有之乎?」曰:「無之。」曰:「何以得免?」曰:「或三世積德,或門户將興,或不食牛肉,三者有一焉則我不能入,家無疫患。」(上九字葉本作「我不敢犯其家言舉」。)遂不見.” 『夷堅志』 丁志 卷2, 管樞密.

6) 중국 학계에서는 1930년대 이래 중국의 고대 전염병 재해 사료에 대한 과학적 가치를 탐색해왔다. 이러한 전통은 2012년 중국사회과학기금(国家社科基金)의 주요 프로젝트인 “중국 전염병 역사지도 연구 및 편집”으로 이어졌다. 현재 중국 전염병 관련 역사 데이터를 수집 및 DB화하는 프로젝트는 화중사범대학교(華中師範大學校)에서 총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화중사범대학교의 공승생(龔勝生)과 장도(張濤) 등이 주도한 사료의 정리 및 DB화 결과 기원전 770년 전부터 서기 1949년까지 총 2,700년 동안의 중국 사료 9,045종에서 데이터를 발췌하여 정리한 『중국 3천년 전염병 사료 총집(中国三千年疫灾史料汇编)』(山东: 鲁书社, 2019) 5권이 출간되었다. 단순히 전염병의 발생에 대한 기록뿐만이 아니라 전염병의 발생 시기 및 발생 지역, 전염원, 전염병 재해 유행 결과, 전염병 재해종류를 포괄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이와 같이 광범위한 데이터의 수집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 전염병 재해 지리 연구(中国历史疫灾地理硏究)』(山东: 山东画报出版社, 2021) 6권를 발표할 예정이고, 향후 이러한 자료들의 지리적 시각화 작업으로서 A3크기의 컬러 지도로서 총4종류 8세트로 375장의 지도를 수록한 <중국 전염병 재해 역사 지도집(中国历史疫灾地图集)>도 간행해 중국 역대 전염병 발병의 시공간적 자료를 제공할 예정이다(张涛, 2021).

7) 龔勝生 등의 연구에서도 복건지역의 인구는 북송대에도 상당히 높게 나타나지만, 아마도 북송대까지 이 지역에서의 전염병 발생 정도를 알려주는 地方志와 같은 자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전염병 발생 빈도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龚胜生ㆍ刘卉, 2011; 龚胜生ㆍ龚冲亚ㆍ王晓伟, 2015).

8) 林富士의 설명에 의하면, 송대 이후에 중국 남부지역에서 민간의 巫覡이 모시고 있는 신격이 기존의 형이상학적인 존재에서 형상을 갖춘 자연적이고 가시적인 영적 존재로 점차 변화하고 있었다(林富士, 2013).

9) 洪邁(1123-1202)의 『夷堅志』에 실려 있는 고사를 보면, 송대 이후 강남지역 민간에서 크게 번성하였던 민간신인 五通神이 본디 物魅 또는 精怪와 같은 자연적인 존재에서 출발하여 영적인 존재로 신격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大江(장강) 이남의 지역에는 대부분 산지이고 세속에서는 귀신에 제사지낸다. (그들이 받드는) 神怪는 특히 기이하여 대부분 巖石과 樹木으로 叢詞를 삼아 촌락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그 신을) 양절로와 강남동로 동쪽에서는 오통이라고 한다; 강서와 閩에서는 木下三郞이라고 불렀다; 또한 木客이라고도 하였다; 다리가 하나인 경우 獨腳(외다리) 오통이라고 하였다.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그 실체는 곧 하나였다. 전해지는 기록을 살펴보자면, 그들은 소위 木石의 괴이한 외발 도깨비(罔兩) 또는 山㺐(작은 도깨비)라고 하였다. 李善 註解의 『東京賦』(東漢 張衡 저작의 詞賦)에서: 野仲(악귀)과 游光(악귀)은 형제가 여덟 명이었는데 항상 인간들에게 괴이한 피해를 주었으니 모두 이러한 物魅이다. 그들은 (형태를) 변화시키거나 괴이한 말로 사람을 유혹하니 대체로 북방 지역의 여우 도깨비(狐魅)와 유사하였다. 혹은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었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을 숭모하고 받듦으로써 생각지 못한 행운을 기원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 뜻을 어기게 되면, 곧 (그가 가져다준 행운)을 (도로) 빼앗아서 다른 곳으로 갔다. 한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강과 호수에서 목재를 매매하고 있었는데, (오통)이 은밀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자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물러나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정성껏 제사하여 받들기만 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음란함을 좋아하여 때로는 사대부 美男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바에 따라 형체를 변화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원숭이·삽살개(尨)·청개구리 (등으로 변화하여) 그 형체는 일정하지 않았고, 대개 민첩하고 강력하였으며 얼음처럼 차가웠다. 陽物이 장대하여 부녀자가 그를 만나면 몹시 고통스러워 하였고 수척해지고 얼굴빛을 잃었으며 기력이 사라졌고, 어떤 경우에 그 여성들은 巫者로 변화하여 사람들을 仙人이 되었다고 여겼고 불행하게 얻은 병을 仙病이라고 일컬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3일내지 5일부터 열흘이나 한달 동안이나 뻣뻣하게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여 마치 죽은 것처럼 있다가 다시 소생하게 된 경우에는 스스로 말하길 자신이 화려한 집의 동굴같이 큰 방에 있었는데 貴人들의 환대를 받았다고 하였다. 또는 계속 사라졌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는 (오통신을) 만나고 미쳐서 정신이 무너지고 어지러워져서 치료할 수 없게 되었다. 음란하게 포섭된 자들이 모두 다 좋은 여자들은 아니었다. 신이 말하길 전생의 계약이 있으니 그것이 없으면 (그 여자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교제가 끝나면 먹물같은 액체가 (여인의 몸속에) 남겨졌다. 대부분 감응하여 임신하게 되니 (여자들을 유혹하는) 기이한 아름다움은 수많은 방법을 갖고 있었다.” “大江以南地多山,而俗禨鬼。其神怪甚佹異,多依巖石樹木為叢祠,村村有之。二浙江東曰五通;江西閩中曰木下三郎;又曰木客;一足者曰獨腳五通。名雖不同,其實則一。考之傳記,所謂林石之怪夔罔兩及山㺐是也。李善注東京賦云:野仲游光,兄弟八人,常在人間作怪害,皆是物云。變幻妖惑,大抵與北方狐魅相似。或能使人乍富,故小人好之,致奉事以祈無妄之福。若微忤其意,則又移奪而之他。遇盛夏,多販易材木於江湖間。隱見不常,人絕畏懼,至不敢斥言,祀賽惟謹。尤喜淫,或為士大夫美男子,或隨人心所喜慕而化形。或止見本形,至者如猴猱,如尨,如蝦蟆,體相不一,皆趫捷勁健,冷若冰鐵。陽道壯偉,婦女遭之者,率厭…苦不堪,羸悴無色,精神奄然,有轉而為巫者,人指以為仙,謂逢忤而病者為仙病。又有三五日至旬月,僵臥不起,如死而復蘇者,自言身在華屋洞戶,與貴人歡狎。亦有攝藏挾去,累日方出者。亦有相遇,即發狂易,性理乖亂,不可療者。所淫據者,非皆好女子。神言宿契當爾,不然,不得近也。交際訖事,遺精如墨水。多感孕成胎,怪媚百端” 洪邁 『夷堅志』 丁志 卷19, 江南木客.

10) 전통시대 동아시아 史書에서 전염병을 지칭하는 표현으로는 疫病, 疫疾, 疫癘, 時疫, 瘴疫, 瘴癘, 溫疫(瘟疫), 惡疫, 毒疫 등이 주로 발견되는데, 그 표현들에는 공통적으로 ‘疫’·‘瘟(溫)’·‘癘’·‘瘴’라는 한자와 결합되어 표현된다. 우선 ‘疫’과 ‘瘟(溫)’은 보통 “전염병(epidemic)”으로 번역되며, 영어 단어처럼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염병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대부분의 중국 醫書들은 전염병의 발생을 疫, 大疫, 瘟疫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질병의 정확한 진단이나 원인이 되는 병원체를 명시할 필요 없을 경우의 전염병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다. 전염병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疫이 특정한 病因(pathogenesis)이 없는 일반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주로 의사들인 책의 저자들에 의해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Goldschmidt, 2007: 53-109).

11) 중국 전통 의학에서는 기후의 변화나 생활환경이 신체에 주는 영향을 매우 중요시한다. 대자연과 인간과는 자연의 변화를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燥), 화(火(熱))의 6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고 그것이 인간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주는가를 관찰하고 있다. 육기(六氣)는 계절이 변화하면서 자연에 존재하는 여섯 가지 기운으로 인체의 면역력(正氣)이 약해지거나 계절의 변화가 심하면 인체에 침입하여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자가 된다. 이것을 육음(六淫)이라고 한다. 육음 중에서도 으뜸은 한사(寒邪)로서 인체에 침입하면 양기를 쉽게 상하고 기와 혈액 순환의 장애를 일으켜 여러 가지 다양한 질병을 유발한다. 특히 겨울에 한사(寒邪)를 감수하여 발생하는 외감열성병(外感熱性病)을 ‘傷寒’이라고 지칭한다.

12) 이러한 두 가지 요인과 관련해서, Hinrichs는 한대부터 송대까지의 온열 장애, 온열병(溫病) 그리고 온열 전염병(溫/瘟疫)에 대한 의학저술들을 통해 기능적-구성적[functionalconfigurational] 병리학과 존재론적-오염주의적 [ontological-contaminationist] 병리학 사이의 차이와 그 배후에 있는 사회정치적 이해관계를 탐구한다(Hinrichs, 2015: 19).

13) “故重陰必陽,重陽必陰。故曰:冬傷於寒,春必溫病;春傷於風,夏生飱泄;夏傷於暑,秋必痎瘧;秋傷於濕,徘生欬嗽.” 『黃帝內經素問』, 陰陽應象大論.

14) “黃帝가 말씀하길: 「내가 듣기로 5가지 전염병(五疫)이 이르면 모두가 서로 전염되기 쉬어 어른이나 아이를 막론하고 증상이 서로 같다고 하였는데, 치료(救療)를 베풀지 않으면서도 어찌해야 가히 서로 옮겨 쉬이 전염되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기백이 말하길: 「서로 전염되지 않는 경우는 正氣가 몸속에 있어 邪氣가 간여할 수 없어 그 독기를 피하게 되는데, 鼻孔[天牝]를 통해 [邪氣가] 들어왔다가 다시 [비공을 통해] 나가게 되고, 기[正氣]가 뇌에서 나오니 사기가 간여하지 못합니다. 기[정기]가 뇌에서 나오게 하려면 곧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마음이 해와 같다[해처럼 양기가 충실하다]고 상상합니다.” “黃帝曰: 「余聞五疫之至, 皆相染易, 無問大小, 病狀相似, 不施救療, 如何可得不相移易者?」 歧伯曰: 「不相染者, 正氣存內, 邪不可干, 避其毒氣, 天牝從來, 復得其往, 氣出於腦, 即不邪干. 氣出於腦, 即室先想心如日.」” 『黃帝內經素問』, 刺法論.

15) 겨울에 한사(寒邪)를 감수하여 발생하는 외감열성병(外感熱性病). 『黃帝內經素問』의 「熱論篇」에서 열을 동반하는 감염증을 지칭하는 용어인 ‘傷寒’은 중국의 전통 내과 의사들이 전염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때 사용하는 병리학적 용어이다. 그것은 사실 서양 의학 용어로 빠른 발병과 진행으로 특징지어지는 특정 외인성 급성 전염성 열성 질환에 해당하며 치료하지 않을 경우 환자의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더 넓은 질병군을 가리킨다. 자연적으로 전염병과 전염성이 강한 질병은 傷寒 범주에 포함된다. 상한의 정의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송나라 이전의 의학 문헌들은 종종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중국 의학에서는 사실 상한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정의가 있다. 첫 번째, “일반적인” 정의는 급성 전염성 열병 장애에 대한 서구의 정의와 일치한다. 중국 의학에서는 겨울의 추운 날씨의 해로운 영향 때문에 생겨나고 다르게 진화하는 여러 특정한 병명을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 정의는 겨울에 나타나지만 다른 계절에는 나타나지 않는 특정한 하위 집합만을 가리킨다. 병이 다르게 진행되어 다른 계절에 발현될 때, 각각의 발현에 다른 이름이 붙는데, 봄에는 “온열 질환” (溫病), 여름에는 “열성 질환” (熱病)이다(Goldschmidt, 2007: 55). 韓醫學에서의 전통적인 상한 인식에 대해서는 이경록의 연구를 참조할 것(이경록, 2012).

16) “余宗族素多, 向餘二百. 建安紀年以來, 猶未十稔, 其死亡者, 三分有二, 傷寒十居其七.” 『傷寒卒病論』, 序.

17) 태음(太陰), 소음(少陰), 궐음(厥陰) 등 3개의 음(陰)과 태양(太陽), 양명(陽明), 소양(少陽) 등 3개의 양(陽)을 말하는 것으로, 육기(六氣)와 관계된 것을 뜻하는 용어임

18) 辨證論治란 ‘證을 변별하여 치료를 논한다’는 의미로서, 중의학에서 질병을 인식하고 치료하는 기본 원칙이다. 즉 그것에 따르면, 환자로부터 얻은 질병의 원인이나 부위, 성질, 신체적 여건 등의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살핀 후 치료를 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복잡한 증상들이 나타나더라도 하나 하나의 증상에 집착하기보다는 이들 증상들 간에 어떠한 연계성이 있으며, 그 연계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추적하게 된다.

19) “봄기운은 따뜻하고, 여름기운은 더우며, 가을기운은 시원하고 겨울기운은 차다. 이것이 사계절의 정기(正氣)이다. 겨울에는 매우 춥고 모든 만물이 깊이 잠기니 사람이 몸을 굳게 지키면 한사에 상하지 않는다. 寒邪에 감촉된 증상을 상한이라고 한다. 네 계절의 사기(邪氣)에 상하여도 모두 병이 되지만 유독 겨울의 상한이 제일 심한 것은 사나운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한사에 적중되어 바로 병이 된 것을 상한이라 하고, 바로 병이 되지 않고 그 한독(寒毒)이 피부와 뼈속에 숨어 있다가 봄이 되면 온병으로 변하고, 여름이 되면 서병(暑病)으로 변한다. 서병은 온병보다 열이 심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중에 봄여름에 반드시 온병을 앓는 사람이 있는 것은 모두 겨울에 추위를 무릎썼기(觸冒) 때문이지 계절적 유행병(時行)의 기는 아니다.”“春氣溫和, 夏氣暑熱, 秋氣淸涼, 冬氣冷冽. 此四時之正氣也. 冬時嚴寒, 萬類深藏, 君子固密, 則不傷於寒. 夫觸冒之者, 乃名傷寒. 其傷於四時之氣, 皆能爲病, 而惟傷寒最毒者, 以其有殺厲之氣也. 中而卽病者, 爲傷寒, 不卽病者, 其寒毒藏於肌骨中, 至春變爲溫病, 至夏變爲暑病, 暑者, 熱重於溫也. 是以辛苦之人, 春夏必有溫病者, 皆由其冬時觸冒之所致, 非時行之氣也.”『諸病源侯論』 卷之七, 傷寒病諸候 上.

20) “疫, 役也. 言有鬼行役也” 『釋名』, 釋天.

21) “其病與時氣、溫、熱等病相類,皆由一歲之內,節氣不和,寒暑乖候,或有暴風疾雨,霧露不散,則民多疾疫。病無長少,率皆相似,如有鬼厲之氣,故云疫癘病.” 『諸病源侯論』 卷之十, 疫癘病諸候.

22) “영남(嶺南)의 청초장(靑草瘴)과 황망장(黃芒瘴)은 영북(嶺北)의 상한(傷寒)과 같다. 남쪽 지방은 따뜻하므로 태음(太陰)의 때(겨울)에도 초목(草木)이 누렇게 시들어 떨어지지 않고 겨울잠 자는 곤충들이 숨지 않는다. 여러 가지 독이 따뜻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까닭에 영남은 중춘에서 중하(음력 2월에서 5월)까지는 청초장이 유행하고, 계하에서 맹동(음력 6월에서 10월)까지는 황망장이 유행한다. 쓰는 약과 사람의 체질을 헤아려 보면 영남에서도 상한하기는 하되 절기(節氣)가 대부분 따뜻하므로 찬 약을 쓰더라도 영북보다는 덜 차게 쓰며, 때로 더운 약을 쓰더라도 또한 그 중량을 줄여 3분의 1을 쓴다. 다만 이 병은 겉으로 증상이 더디게 나타나기는 하나 경락(經絡)을 통하여 전해지는 점은 상한과 같다. 그러나 음양(陰陽)이 병들어 표(表)와 이(裏)가 같이 나타나면 모름지기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명히 알아내야 하며 탕약이나 뜸으로 함부로 치면 안 된다.” “夫岭南靑草黃芒瘴, 猶如岭北傷寒也. 南地暖, 故太陰之時, 草木不黃落, 伏蟄不閉藏. 雜毒因暖而生, 故岭南從仲春訖仲夏行靑草瘴. 季夏訖孟冬, 行黃芒瘴. 量其用藥體性, 岭南傷寒, 但節氣多溫, 冷藥小寒於岭北, 時用熱藥, 亦減其錙缽, 三分去二. 但此病外候小遲, 因經絡之所傳, 與傷寒不異. 然陰陽受病, 會同表裏, 須明認患源, 不得妄攻湯艾. ” 『諸病源候論』 卷之十, 瘴氣候.

23) “漢建寧二年,太歲在酉,疫氣流行,死者極眾。有書生丁季回從蜀青城山來,東過南陽,從西市門入,見患疫癘者頗多,遂於囊中出藥,人各惠之一丸。靈藥沾唇,疾無不瘥。市中疫鬼數百千餘見書生施藥,悉皆驚怖而走。乃有鬼王見書生,謂有道法兼自施藥,感眾鬼等奔走若是。遂詣書生欲求受其道法。書生曰,吾無道法,乃囊中之藥呈於鬼王,鬼王睹藥,驚惶叩頭乞命而走。此方藥帶之入山能辟虎野狼蟲蛇,入水能除水怪蛟蜃.” 『備急千金要方』 卷2, 辟溫·雄黃丸.

24) “일찍이 수도에 큰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에, 인종은 태의에게 약을 조제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코뿔소 뿔(犀角) 두 개를 쪼개라고 지시하고 그것을 감독했다. 그 중 하나는 通天犀였고 李舜이라는 내시가 인종에게 황제의 예복을 위해서 남겨둘 것을 간청하였다. 인종은 「어떻게 진기한 물건은 소중히 여기면서 백성을 천하게 여길 수 있겠느냐”고 하고 마침내 그(통천서)를 분쇄하였다.” “嘗因京師大疫,命太醫和藥,內出犀角二本,析而視之。其一通天犀,內侍李舜舉請留供帝服御。帝曰:「吾豈貴異物而賤百姓?」竟碎之.” 『宋史』 卷178, 食貨 上6.

25) “既至杭,大旱,饑疫並作。軾請於朝,免本路上供米三之一,復得賜度僧牒,易米以救飢者。明年春,又減價糶常平米,多作饘粥藥劑,遣使挾醫分坊治病,活者甚眾。軾曰:「杭,水陸之會,疫死比他處常多。」乃裒羨緡得二千,復發槖中黃金五十兩,以作病坊,稍畜錢糧待之.” 『宋史』 卷 338, 蘇軾傳.

26) 대표적으로는 송 태종 太平興國 6년(981) 12월에 반포된 「訪求醫書詔」를 통해 많은 돈과 벼슬을 걸고 의서를 널리 구하였다. 『宋大詔令集』 卷219, 訪求醫書詔.

27) “이에 앞서 인종이 제위에 있으면서 병자들이 方藥이 없어 고통받는 것을 가엾이 여겨 『慶曆善救方』을 반포하였다. 雲安軍(현재 중경시 운양현) 자사 王端는 관에서 돈을 지급하고 약을 조제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마침내 천하에 실행하도록 하였다.” “先是,仁宗在位,哀病者乏方藥,為頒慶曆善救方。知雲安軍王端請官為給錢和藥予民,遂行於天下.” 『宋史』 卷 178, 食貨 上6.

28) “皇祐中,仁宗謂輔臣曰:「外無善醫,民有疾疫或不能救療。其令太醫簡《聖惠方》之要者頒下諸道,仍敕長史按方劑以時拯濟。令醫官使周應編以為此方。三年頒行。” 『文獻通考』 卷222, 醫家.

29) “乙亥,頒簡要濟眾方,命州縣長吏按方劑以救民疾.” 『宋史』 卷12, 仁宗本紀 4.

30) 오카니시 다케토(岡西爲人)가 송나라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모든 의학 기록물을 분석한 『宋以前醫籍考』(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58.)에 따르면, 북송대에 이르러 傷寒에만 전념한 편찬물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송본이 간행되기 전의 8개 문헌에서 24개 문헌으로). 이러한 급격한 증가에 대한 한 가지 상상할 수 있는 설명은 북송 시대의 인쇄술의 발전과 의학 교육 시스템의 확립이다. 그러나 다른 의학 장르에 속하는 텍스트 수가 상한관련 서적처럼 극적인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쇄술과 의학교육 시스템의 발전은 그 원인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한마디로, 이러한 상한 관련 의서 출판의 증가는 송나라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가 1065년 이후 훨씬 더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Goldschmidt, 2007: 58-59).

31) “觀今之醫, 不念思求經旨, 以演其所知, 各承家技, 終始順舊. 省病問疾, 務在口給, 相對斯須, 便處湯藥. 按寸不及尺, 握手不及足, 人迎、趺陽, 三部不參, 動數發息, 不滿五十. 短期未知決診, 九候曾無髣髴, 明堂·闕庭, 盡不見察, 所謂窺管而已. 夫能視死別生, 實爲難矣!” 『傷寒雜病論』 序.

32) 북송 인종시기 潤州(지금의 江蘇 鎮江) 자사였던 蘇頌(1020-1101)은 남부지역의 풍속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吳와 楚의 풍속은 대체로 귀신이 가져다주는 화복(禨祥)을 믿고 음사를 중시하였는데, 潤州는 그 사이에 위치하여 (그 풍습이) 더욱 심하였다.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근심이 생기면 먼저 의사를 보러가지 않고 우선 무당을 보러간다. 더욱 해로운 것은 많은 무당들이 재화를 그러모으고 흙으로 신상을 만드는데, 그 모습이 외발 도깨비(䕫), 㺐, 傀鬽, 泆陽(표범 머리에 말꼬리의 모양을 한 짐승), 彷徨과 같았고 (무당은) 그 신상들을 모아서 叢詞에 모셔 놓고는 귀신들을 불러일으켜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귀신을 가장하여 군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이하고 요사스러우며 간교한 사람들은 마음대로 사사로이 이익을 불리는데 공공연히 길에서 행하니, 생각건대 법률에서 금지하고 경계하는 바이다. (윤주의) 풍습이 참으로 조악하고 비루하였다.”라고 하였다. “吳楚之俗,大抵信禨祥而重淫祀,潤介其間,又益甚焉。民病且憂,不先醫而先巫。其尤蠧者,羣巫掊貨財,偶土工,狀䕫、㺐、傀鬽、泆陽、彷徨之象,聚而館之叢…祠之中,鼓氣燄以興妖,假鬼神以譁衆。竒衺譎觚之人,殖利擅私,公行于道,顧科禁莫之警也,甚矣!風俗之窳薄” 蘇頌, 『蘇魏公文集』 卷64, 潤州州宅後亭記.

33) “유이가 건주 자사로 재임함에 세속에서 巫와 귀신을 숭상하고 의약은 사용하지 않았다. 유이는 『정속방』을 저술하여 가르쳤고 淫巫 3천 7백 家를 철폐하고 의약으로 업을 바꾸도록 하니 풍속이 마침내 변화하였다.” “知虔州,俗尚巫鬼,不事醫藥。彝著正俗方以訓,斥淫巫三千七百家,使以醫易業,俗遂變.” 『宋史』 卷334, 劉彝傳.

34) 북송대는 특히 사회 개혁과 의료 구호, 교육 및 출판 분야에서 국가 프로그램의 확장을 주도한 행동주의의 정치 문화로 유명했다. 이는 의료 구호에 있어서, 통일된 의학지식의 보급을 통해 여전히 반(半) “야만적”으로 간주되었던 남쪽의 무속적 치료 관습을 교정하려는 노력으로 수렴되었다. 한편 남부의 무속적 관습의 교정에 대한 송 정부와 사대부 문인 지배층의 태도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달리 나타나게 된다. 북송시대 제국 전체의 관습통합을 위한 노력은 주로 국가중심적인(state-centric) 접근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정부 주도의 의료적 구호, 교육과 출판을 통한 의료 지식의 보급과 같은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에 남송대에 이르면 문인 지방관을 중심으로 지역의 문인 사대부들이 주도하는 지역 중심적인(local-centric) 형태로 지역의 무속적 관습에 대한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교정이 주류를 이루었다(Hymes and Shirokauer, 1993: 1-59).

35) “선화 년간(1119-1125) 이후 이 약이 경사에서 성행하였는데, 태학의 학생들이 그것을 매우 깊이 신봉하여 (복용하다가) 사망한 자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지금 의가에서 깨우쳐주니 비로소 폐기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宣和後, 此藥盛行於京師, 太學諸生信之尤篤, 殺人無數. 今醫者悟, 始廢不用.” 『避暑錄話』 上卷.

36) “此五者, 大概而已. 其微至於言不能宣, 其詳至於書不能載, 豈庸庸之人, 而可以易言醫哉? 予治方最久, 有方之良者, 輒爲疏之, 世之爲方者, 稱其治效, 嘗喜過實, 千金肘後之類, 猶多溢言. 使人不敢複信, 予所謂《良方》者, 必目睹其驗, 始著於篇, 聞不預也.” 『蘇沈內漢良方』 原序.

37) “잡기전이나 소설 중에도 많은 의방이 있으니 서적에 저술되어 있다면 반드시 좋은 증험이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 에 수록하니 『北夢瑣言』에는 火燒瘡方法이 기록되어 있다.” “雜記傳小說中有數方, 既著於書, 必有良驗. 今錄於此,《北夢瑣言》,記火燒瘡方法.” 『蘇沈內漢良方』 卷第十.

38) “人家에서는 이 약 없이는 急難을 대비할 수 없기 때문에 瘟疫이 유행할 때 특히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복용하기에 적합하다.” “人家不可無此藥以備急難, 瘟疫時, 尤宜服之, 闢疫尤驗.” 『蘇沈內漢良方』 卷第五.

39) 송대 醫家이자 의료 저술가였던 陳言(1161-1176)은 “병자들에게 오한과 신열이 날마다 발생하고 꿈이 불길하여 자주 두려워하는 것은 鬼瘧이라고 한다. 마땅히 禁避(액막이)와 厭禳(구마의식)의 방법을 사용해야한다. 병자가 오한이 일었다가 신열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증상은 남방에서 이러한 병이 많이 발생하는데 그 병명은 瘴瘧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전염병의 치료를 위해 액막이나 구마의식을 사용할 것을 정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病者寒热日作,梦寐不祥,多生恐怖,名曰鬼疟。宜用禁避厌禳之法。病者乍寒乍热,乍有乍无,南方多病此,名曰瘴瘧。”『三因極一病證方論』 卷之六, 疟病不内外因证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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