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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근대 동아시아 위생 개념의 확산과 공공의료 담론의 형성†

Abstract

If public health can be defined as “all activities to ensure universal medical use of the people and protect and promote health,” it can be said that public health emerged in the process of developing the concept of hygiene in East Asia. While traditional hygiene emphasized individual curing and longevity, modern hygiene was the state in charge of individual body and discipline. East Asian countries had to practice modern tasks in the field of hygiene and medical care in line with the construction of modern countries, and it was considered legitimate for modern countries to intervene in individual bodies. As the demand for modern national construction became stronger, interest in public health rather than personal hygiene increased.
In East Asia, a new interpretation of the concept of hygiene began in Japan. Sensai Nagayo(1838-1902) newly defined the concept of ‘sanitation’ to justify the physical intervention of the modern state in Meiji period. The concept of ‘public health’ began to be used in earnest in 1890, when Ogai Mori(1862-1922) translated Western-style health protection measures for the public as public health. Since then, public health has evolved into a universal social discourse in Japan. Japan’s public health expanded to colonial Joseon, Taiwan, and China. Japan’s victory in the Sino-Japanese War led East Asian countries to believe that hygiene was the root of the Japanese nation’s power.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China began to imitate the case of Japan while promoting modern education reform and institutional reform. Japanese-style ‘public health’ was transplanted into various hygiene laws and sanitary equipment.
In Korea, modern hygiene was introduced and spread from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and the concept of ‘public health’ in Japan was mainly spreading. Public health in Japan was vaguely defined as an activity to protect and promote the health of the people, but in practice, it was focused on improving quarantine and environmental infrastructure. In response, the concept of American-style public health, which values prevention and treatment at the same time, has already begun to emerge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 East Asia in the 1920s and 1930s, Japanese-style public health and American-style public health discourse competed, and measures to solve medical inequality were discussed in earnest. Interestingly, in common in East Asian countries, Actual Medical Expenses Campaigns to improve medical access at low cost and social medicine to universally provide prevention and treatment to the people have drawn attention. This was also a phenomenon caused by intensifying medical inequality as rapid urba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progressed in East Asian countries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Although it was impossible to resolve social contradictions or move toward fundamental reform of the national medical system due to the nature of the private movement, the actual medical movement further imprinted the need for public health care in the country and society. Social medicine studied the effects and relationships of the social environment on diseases and health, and studied ways to promote public health by using preventive medicine and therapeutic medicine. If social medicine was supported by state power, it was possible to go forward with practice such as State Medicine like China, otherwise it would only be a civilian movement such as the People’s Health Movement, as in colonial Korea.
Liberation and the Korean War were a dramatic turning point in American-style health that led to Japanese-style hygiene.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there was a discussion between the left and right camps over medical nationalization to enhance the publicity of medical care. The medical community was sympathetic to the nationalization of medical care, but due to the lack of medical personnel and financial resources, specific alternatives could not be proposed. As American-style health studies gradually expanded their influence after the Korean War, American-style public health, which emphasized prevention and treatment activities, became established, and efforts were made to establish a health center system.

1. 머리말

한국에서 ‘공공의료(公共醫療)’라는 용어 자체는 1934년 1월 1일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하는데, 의료의 공공성보다는 ‘공공 의료기관’과 같은 의료시설의 소유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었다.1) 1980년대 초까지도 공공의료라는 용어는 주로 공공 의료기관이라는 형태, 즉 의료시설의 소유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김창엽, 2020: 380). 오늘날 ‘공공의료’라는 말을 흔히 쓰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공공보건의료’인데, 2000년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2000. 1. 12)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르면, ‘공공보건의료’는 “국가·지방자치단체 또는 공공단체가 설립한 공공보건의료기관이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공공의료의 기능이나 역할보다는 여전히 설립 주체 중심의 소유관계를 중시한 규정이라고 볼 수 있다. 2012년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2012. 2. 1)이 개정되어, 공공보건의료는 “국가·지방자치단체 및 보건의료기관이 지역·계층·분야에 상관없이 국민의 보편적인 의료이용을 보장하고 건강을 보호·증진하는 모든 활동”으로 수정되었다. 개정된 법률은 공공의료의 기준을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는 내용으로 변경했지만, 여전히 세부 조항에서 공공 의료기관이나 보건소가 제공하는 의료로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공공의료는 단순히 소유자 혹은 설립자인 공공 의료기관에서 행하는 의료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최근에는 의료의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시각에서 공공의료의 기능과 역할이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박윤형, 2004: 12-13; 이은혜, 2020: 48-54). 말하자면 공공의료는 좁은 의미에서는 설립 주체의 소유관계를 나타내고, 넓은 의미에서는 행위 주체의 공적인 역할과 기능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넓은 의미의 공공의료는 “국가 또는 사회가 공적 재정을 바탕으로 의료에 관한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여 국민에게 보편적인 의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공공의료의 근대적 기원은 개항기 시료환자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했던 관공립병원이나 선교병원의 의료활동 등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이러한 의료활동은 시혜적·종교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상징적 조치였을 뿐이고 공공의료가 제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의료의 공공성을 제도화하기 위한 고민은 일제하 ‘실비진료운동’이나 ‘노동병원’ 설립운동 등에서 구현되고 있었다(정일영 외, 2016; 신규환, 2017; 이순영, 2019). 다만 이러한 운동들은 단속적인 것이어서 공공의료로서 제대로 정착될 수는 없었지만, 해방 이후 의료상업화의 극복과 의료공공성의 제고라는 의학계의 논쟁을 지속시킨 기폭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신규환, 2018a; 김진혁, 2021). 최근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에서 의료의 공공성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공공의료라는 용어가 상용되고 있지만,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성과가 없었다. 더욱이 ‘공공의료’라는 용어 자체가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 등에서 공유되고 있는 만큼 동아시아에서 공공의료가 어떤 계기로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보는 일은 공공의료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공공의료(public healthcare)’의 역사는 19세기 후반 ‘위생(衛生)’의 근대적 번역에서 시작·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메이지시기 일본에서 창안된 위생은 점차 개인 분야와 공공 분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20세기 전반에는 위생 개념의 확장에 따라 공중위생, 공공위생, 공의 등 관련 개념이 등장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공중보건, 공공위생, 공공의료 등의 용어가 폭넓게 사용되었다. 위생 개념의 분화와 발전 가운데 동아시아 각국에서 위생 개념은 서로 다른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이를테면 현재 각국 정부의 보건의료 담당 부서 명칭으로 한국은 보건복지부(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일본은 후생노동성(Ministry of Health, Labor and Welfare), 중국은 위생부(Ministry of Health) 등이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 위생이 여전히 보건의료를 포괄하는 최상위 관념으로 존속되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과 일본에서 위생은 청결 정도의 수준으로 격하되어 있으며 보건과 의료가 위생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일본에서 위생론은 19세기 후반 근대적 위생론이 대두하기 전, 과도기적 형태로 전통적 양생론에 기반하여 서양의 위생을 일정하게 흡수해 나가고 있었다(成田龍一, 1995: 376-382).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 1838-1902)는 독일식의 국민에 대한 건강보호 관념을 ‘위생’이라는 용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구미시찰을 통해서 영미식 자치 모델로 위생행정을 운용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고토 심페이(後藤新平: 1857-1929) 역시 이를 토착화시키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笠原英彦, 1996; 1997; 2002; 2003). 말하자면 메이지 초기의 위생관료들은 독일식의 의사행정(醫事行政)과 영미식의 위생행정을 구분하고 있었다(신규환, 2018b). 의사행정이란 의학교육, 의료면허 등에 관한 업무를 말하는 것이고, 위생행정이란 방역, 공중위생, 식품위생, 환경위생 등에 관한 업무를 말한다.
중국에서 위생론의 도입과 발전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외에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다(飯島渉, 2000; 劉士永, 2001; 雷祥麟, 2004; Rogaski, 2004; 余新忠, 2005; 張仲民, 2009). 대표적으로 위신중(余新忠)은 청일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일본의 위생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으며 점차 위생 개념이 민간사회에 스며들게 되었다고 주장했다(余新忠, 2005). 이이지마는 일본의 위생 제도와 법령이 중국 등에 미친 영향 등을 검토하였고(飯島渉, 2000), 로가스키는 톈진(天津)의 사례로 일본의 위생이 중국에 도입되고 과정을 살폈다(Rogaski, 2004). 국내에서는 신규환이 중의의 위생론과 서의의 위생론을 비교하였는데, 처음에는 주로 개인위생에 치중되어 있다가 점차 공중위생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갔다고 주장했다(신규환, 2020a). 조정은은 상하이의 『위생백화보』의 사례를 통해 20세기 초 일본의 위생 관념이 중국사회에서 대중적인 위생 인식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조정은, 2018).
한국에서 위생론의 도입에 대해서는 신동원, 박윤재 등의 연구가 있다. 신동원은 근대적 위생론이 1880년대 개화파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들에게 위생은 근대적 부국강병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고 지적하였다(신동원, 1997: 51-53). 박윤재는 개화파에게 위생은 부국강병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절실한 과제로 부각되었다고 지적하였다(박윤재, 2005: 30-31).
지금까지 동아시아 각국의 위생론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 동아시아에서 위생과 공중위생 또는 위생과 공공의료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 글은 일본에서 위생 개념의 번역과 도입과정을 살펴보고, 중국에서 위생 개념이 개인(개인위생), 사회(공중위생, 사회의학), 국가(국가의료, 공공의료)적 차원의 관심과 어우러져 어떻게 연계되었는지, 한국에서 위생 개념이 공중위생과 공중보건 또는 공공의료 등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 살펴봄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위생과 공공의료 담론의 형성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각국의 근대적 위생행정 및 공공의료를 주도한 인물들과 정책부서의 개인 저작물, 단행본, 정부 간행물, 신문·잡지류 등에 등장하는 위생 및 공공위생에 관한 담론을 분석해 보았다. 이 글이 다루는 시기는 위생 개념이 등장하는 19세기 후반부터 공공의료 담론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30년대까지로 한정하고자 한다.

2. 일본의 위생 개념과 공중위생

먼저 ‘공공의료(public healthcare)’의 핵심 구성요소인 ‘health’에 대해서 살펴보자. health의 번역어로 건강, 위생, 보건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지만, ‘건강(健康)’ 개념은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주로 건장(健壯), 건미(健美), 용건(勇健)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건강 개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오사카의 난학자이자 데키주쿠(適塾)의 설립자인 오가타 고안(緖方洪庵: 1810-1863)이 「병학통론(病學通論)」(1849)이라는 저서에서 영어의 health에 해당되는 네덜란드어의 gezondheid를 건강(健康)이라고 번역하면서 “사람 몸의 기능이 결여되지 않고, 혈액순환에 정체가 없고, 운영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말하자면, 오가타 고안이 이해한 건강은 “생리적인 안정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데키주쿠에서 사숙했던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 1838-1902)도 이러한 건강 개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나가요 센사이는 구미 제국에 대한 해외시찰을 통해 영미의 sanitary나 health와 독일의 ‘gesundheit(건강보호)’는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의 gesundheit는 단순히 생리적인 안정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의 건강에 개입하여 국민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나가요 센사이는 기존의 건강 개념에는 일본의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국가 개입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건강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위생(衛生)’이었다(劉士永, 2001: 44-45).
‘위생(衛生)’이란 『장자(莊子)』 「잡편(雜篇)·경상초(庚桑楚)」에 처음 등장했는데, 주로 자연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순응하는 일종의 양생법으로 개인의 건강과 수양을 강조하기 위한 용어였다(신규환, 2020a: 43-48). 나가요 센사이는 전통적인 위생 용어에 국가의 국민에 대한 신체 개입을 정당화하는 개념을 덧붙였다. 이제 위생은 단순히 개인적인 건강 유지나 장수를 위한 신체 단련의 의미보다는 근대적 국가건설에 필요한 건강한 국민의 양성과 보호를 위해 국가가 국민의 신체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나가요 센사이는 국가가 개인의 건강에 개입하는 행위를 위생이라는 용어로 재창안하여, 국가의 국민에 대한 신체 개입을 정당화하였다. 그 이후 동아시아 각국에서 위생은 단순히 개인의 건강과 수양이 아닌 개인의 건강에 대한 국가적 개입을 의미하는 용어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나가요 센사이가 국가적·사회적으로 위생을 말할 때, 개인보다는 public의 일본식 번역어인 ‘공중(公衆)’이라는 개념을 강하게 내포하게 되었다(김영희, 2015: 165-167). 그러나 나가요 센사이는 아직 ‘공중위생(公衆衛生)’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1874년 「의제(醫制)」 76조 반포로 일본은 근대적 위생행정의 실시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고, 1875년 「의제」 55조의 수정·반포로 독일식 의학교육과 영미식 위생행정을 분리시키고, 위생국 설치를 통한 근대적 위생행정을 본격화하였다. 「의제」 55조 중 제2조는 위생의 범위를 “인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사무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일본의 위생행정에서 인민의 건강과 질병의 치료가 핵심 업무였던 만큼 공중위생의 관리와 향상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가요 센사이의 자서전인 「송향사지(松香私志)」에 의하면, “아직 국가 공중(國家 公衆)의 관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상태여서, 국민건강보호라고 하는 것은 상하의 마음에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했다(小川鼎三·酒井ソヅ 校注, 1980: 137). 이것은 위생국이 개설되어 위생행정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국가나 국민 모두에게 위생에 대한 인식은 일천한 상황이기 때문에, ‘공중위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나가요 센사이는 1876년 미국의 위생행정을 시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다음 해 일본의 위생행정을 미국식으로 개조할 목적으로 「위생의견(衛生意見)」을 내무경(內務卿)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에게 제출하였다. 그의 「위생의견」에 따르면, 위생사무는 개달위생법(介達衛生法)과 직달위생법(直達衛生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개달위생은 의료제도에 관한 것이고, 직달위생은 방역행정과 공중위생 등 위생행정에 관한 것이었다(長與專齋, 1877). 그는 직달 위생의 향상을 위해서는 미국식의 자치위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신규환, 2018b: 14-17). 나가요 센사이는 직접적으로 공중위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미국식의 ‘직달위생’을 강구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감염병 관리 등 공중위생의 증진을 도모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창안된 위생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한 것으로서 개인과 사회 양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 메이지시기 대표적인 문인이자 의사였던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는 『공중위생약기(公衆衛生略記)』 (1890)라는 저서에서 독일식의 공중에 대한 건강보호를 ‘공중위생’이라고 번역하였다. 위생은 더 이상의 개인의 몫이 아니었고, 국가 주도로 국민의 건강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미였다. 메이지시기 일본에서는 공중위생학이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서 성장할 정도로 공중위생은 점차 보편적인 사회 담론으로 진화하였다(丸井英二, 2012).2)
메이지시기 이래로 급성감염병과 만성감염병에 대처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기 때문에, 공중위생은 주로 감염병 관리와 상하수도 인프라 관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공중위생에서 감염병 관리를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3) 그러나 1910년대 도시근대화의 급진전과 도시노동자의 급성장 속에서 계층간 의료불평등은 심화되고 있었다. 1911년 정부는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더불어 도시노동자들의 불만을 완화시킬 수 있는 <공장법(工場法)>을 제정하여, 노동자의 질병·부상에 공장주(工場主)의 책임을 부여하고 장시간 노동시간에도 제약을 가했다. 또한 정부는 은사재단 제생회(恩賜財團 濟生會)를 설립하여 극빈층에 대한 무료 진료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부 활동에 호응한 스즈키 우메시로(鈴木梅四郎: 1862-1940) 등과 같은 민간의 유력자들은 질병으로 인한 차상위 계층의 빈곤화를 방지할 목적으로 도쿄 신바시에 사단법인 실비진료소(社團法人 實費診療所)를 설치했다.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중하층민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도였다. 의사회(醫師會)는 경영상의 이유로 민간의 실비진료운동에 반대했지만, 의료의 사회화라는 사회적 요구와 더불어 실비진료운동은 여론의 지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실비진료운동은 의료불평등이라는 사회적 과제를 민간 차원에서 해소하고자 한 방안이었다(西村万里子, 1990: 142; 新村拓 編, 2006: 258-260; 平川則男, 2021: 1-3).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은 미증유의 산업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계의 호황은 물가앙등을 야기했고, 국민들은 고물가로 생활난에 빠져들었다. 1920년대 관동대지진(1923년)과 금융공황(1927년), 세계공황(1929년) 등으로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격화되는 등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 정부도 사회갈등의 완화와 공중위생의 증진을 위해 <공장법>을 시행(1916년)하고, <군사구호법>(1917년), <건강보호법>(1922년) 등을 공포하였으며, <결핵예방법>(1919년), <화류병예방법>(1927년) 등을 반포하였다. 일본 정부는 1930년 내무성에 위생기술관 훈련기관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35년에는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도시보건관과 농촌보건관을 설치하는 등 공중위생의 증진 방안을 모색했다. 1938년에는 국립공중위생원(國立公衆衛生院, 현 국립보건의료과학원)이 설립되면서 공중위생의 제도화가 확립되었다. 말하자면 1920-30년대는 공중위생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모색되고 있었지만, 의료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사회의학적 대안은 제시되지 못했다(橋本正己, 1967; 西村万里子, 1990; 龍澤利行, 1994). 의료불평등의 문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민간의 실비진료운동은 더욱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스즈키의 실비진료소 설치 운동은 도쿄 신바시뿐만 아니라 요코하마, 아사쿠사, 간다, 오사카 등지로 확대되었고, 25년간 진료환자는 총인원 3,60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鈴木梅四郎 監修, 1935: 102).
일본에서 공중위생의 획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식 공중보건의 영향을 받은 이후로 평가된다. 일본정부가 국민에게 ‘공공의료’를 제공하여 국민건강을 증진시키겠다는 목표는 1947년 <보건소법> 개정 이후 등장하였다. 일본에서 보건소는 이미 일본적십자사가 1914년에 설치한 바 있다. 1937년 <보건소법>의 반포로 지자체에 보건소가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결핵 박멸과 모자보건이 주요한 사업 목표였고, 식품위생과 급성감염병은 경찰의 관할이었다. 1947년 <보건소법> 개정으로 보건소가 공중위생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고, 국민에게 공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건소는 질병 예방, 건강 증진, 환경 위생 등 지역 공중위생 활동의 중심이 되는 공적 기관으로 지역주민들의 생활과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大瀧敦子, 2013; 池上直己 編, 2014: 216-220; 平川則男, 2021: 1-7).4)

3. 중국의 공공위생과 국가의료

중국에서 근대적 위생행정은 19세기 중반 조계(租界)와 식민지에 설치된 열강의 위생 조직과 방역 활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상하이 공공조계 공부국(工部局)과 홍콩 식민당국 등이 시행한 위생행정을 들 수 있다. 이들 식민당국의 초기 위생행정은 주로 식민지 운영을 담당하는 공무 인원만을 위한 것이었으나, 19세기 말 이래로 식민지 위생행정은 점차 식민주민을 위한 공적인 의료를 강화시키고 있었다(羅振宇, 2014).
중국 사회에서 근대적 위생행정이 본격적인 관심받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1894-95)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홍콩에서 페스트가 유행한 시기이기도 하고, 중국이 청일전쟁의 패배로 새로운 근대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인들은 일본과 구미의 위생행정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변법개혁 시기에는 제도국(制度局)의 설치를 통해 일본식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중국에서 근대적 위생행정이 시작된 것은 1899년 의화단운동의 발생과 이를 진압하기 위해 8개국 연합군이 톈진·베이징 등을 점령한 후 도시관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路彩霞, 2010: 88-138).
1901년 청조는 신축신정(辛丑新政)을 통해 근대적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 중심은 교육개혁과 군사개혁에 있었고, 교육개혁 가운데 근대적 위생교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3년 발표된 <학당장정(學堂章程)>에는 소학교의 격치(格致)나 중학교의 박물(博物) 과목에서 위생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다수의 일본 위생교과서가 번역·편역되었는데, 교육부가 심의한 위생교과서는 점차 개인위생뿐만 아니라 ‘공중위생(公衆衛生)’을 포함했다(신규환, 2020a: 54-55). 일본의 정신의학자인 구레 슈조(吳秀三: 1865-1932)가 지은 생리위생학 교과서를 편역한 『중학생리위생학교과서(中學生理衛生學敎科書)』(1906)가이 시기의 대표적인 위생교과서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제11장 「전체(全體)의 생리에 관하여」에서는 체온, 신진대사, 전신 제기관(諸器官)의 조정, 전신의 위생을 다루었다. 그 중 제4장 ‘전신의 위생’에서는 건강한 신체를 위해서는 의복, 음식, 주거 등에서 청결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공중위생(公衆衛生)’ 항목을 설정하여 “사람들은 서로 모여서 사회를 조직하고 국가를 건설한다. 고로 우리가 각기 신체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한 마땅히 일가, 일향, 일국 등 사회상의 위생에 유의해야만 건강을 도모할 수 있다. 특히 전염병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서술하였다(吳秀三著, 華申祺·華文祺譯, 1906). 이처럼 신정시기 생리위생학 교과서는 주로 인체 생리학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지만, 감염병 예방을 통한 ‘공중위생’의 증진을 위한 개인의 의무사항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付馨悅·張大慶, 2021: 59-66).
청조의 근대적 위생행정은 1905년 신설한 순경부(巡警部) 경보사(警保司) 산하에 위생과(衛生科)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음 해인 1906년에는 순경부가 민정부(民政部)로 개편되었고, 위생과는 위생사(衛生司)로 승격되었다. 위생사는 “방역위생을 담당하고, 의약을 검사하고, 병원 설치 등의 업무를 관리·감독”하도록 했다. 이러한 정부 기구와 명칭은 모두 일본의 사례를 모방한 것이었다(余新忠, 2016: 67). 청조는 중앙의 위생행정 모델을 일본의 사례에서 구하고 있었지만, 형식적인 형태만 갖추었을 뿐이고 실질적인 위생행정을 전개하지는 못했다.
청조가 근대적 위생행정과 방역행정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게 된 것은 1910-11년 만주지역에서 페스트가 크게 유행한 것과 관계 깊다. 청조는 더 이상 방역행정을 지방정부나 민간에 위임하지 않고, 중앙정부가 파견한 인물이 직접 관리하도록 했다. 영국 캠브리지대학 의학박사 출신인 우롄더(伍連德: 1879-1960)를 하얼빈에 파견하여 만주 지역에서 페스트 방역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만주 폐페스트에 대한 법적 규정은 대부분 선페스트 관련 일본식 법령을 모방한 것이었다(신규환, 2020b: 208). 당시 청조는 근대국가뿐만 아니라 위생행정에 있어서도 일본식 모델을 선호했기 때문에, 법령 자체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조는 일본식의 법령을 모방하는 데 급급했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 이후 성립한 중화민국 정부도 일본식 위생행정을 정착시키고자 했다. 1912년 1월, 쑨원(孫文: 1866-1925)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파들은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임시대총통 쑨원) 수립을 선포하고, 내각을 구성하였다.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내정 전반을 담당하는 내무부를 설치하고 총장에 청더취안(程德全)을 임명하였다. 내무부 산하에 위생국이 설치되어 위생행정 전반을 담당했다. 초대 위생국장은 린원칭(林文慶)으로 그는 1910-11년 만주 페스트 유행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된 경사임시방역사무국(京師臨時防疫事務局)의 의관장(醫官長)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각성 연합으로 이루어져 실권이 없었고, 각종 사안에 대해서도 통일적인 견해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청군(淸軍)과 혁명군(革命軍)과의 대립 속에서 청조의 전권을 위임받은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남북의화(南北議和)를 제안해왔고, 각성 대표들은 위안스카이가 공화제를 찬성하면 그를 총통으로 추대하는 것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쑨원은 국내에 정치적 기반과 군사적 기반이 없었으므로 전면전을 통한 혁명의 완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쑨원은 위안스카이가 청조의 퇴위와 공화정 선포에 동의한다면 총통직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1912년 3월,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고, 신정부를 조직했다. 내무부 총장에 차오빙쥔(趙秉均)이 임명되었고, 「내무부관제수정초안(內務部官制修正草案)」(1912. 6)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내무부는 민치사(民治司), 직방사(職方司), 경정사(警政司), 토목사(土木司), 예속사(禮俗司), 위생사(衛生司) 등 6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위생사(衛生司)를 조직하고 우청(伍晟)을 사장(司長)에 임명했다. 위생사는 ① 전염병·지방병의 예방, 종두 및 기타 공중위생(公衆衛生)에 관한 사항, ② 차선검역(車船檢疫) 사항, ③ 의사·제약사 업무에 관한 감독 사항, ④ 약품 및 매약 영업에 관한 검사 사항, ⑤ 위생회(衛生會)·위생조합(衛生組合) 및 병원에 관한 사항 등을 담당하도록 하였다.5) 여기서 ‘공중위생’, ‘위생조합’ 등의 용어나 제도는 일본에서 감염병 유행시 방역행정을 전개할 때 사용하는 용어였다. 이로 볼 때,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을 모델로 하는 위생행정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3년 12월, 위생사가 일단 폐지되었고, 위생행정은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고적사(考績司)가 담당하게 되었다. 1916년 3월, 내무부는 중국 최초의 「전염병예방조례(傳染病豫防條例)」를 발표하였는데, 이 법령 역시 일본의 「전염병예방령(傳染病豫防令)」(1897)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하면서 리위안훙(黎元洪) 대총통, 돤치루이(段祺瑞) 총리의 새로운 정부는 내 정부 산하에 위생사를 부활시키고, 탕야오(唐堯)를 사장에 임명하였고, 후임에는 류다오런(劉道仁) 등이 임명되었다. 부활된 「내무부관제수정초안」(1916. 9)에 의하면, 위생사의 업무 범위를 ① 전염병, 지방병의 예방, 종두 및 기타 공중위생 사업, ② 검역, ③ 의사 및 약제사 업무의 감독, ④ 약품 및 약품판매에 대한 검사 ⑤ 위생회, 지방 위생조합, 병원 등에 관한 사항 등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사실상 1912년의 관제 내용이 그대로 부활되었음을 알 수 있다(飯島渉, 2009). 이후 공중위생이라는 용어는 20세기 전반까지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20세기 초반 중국으로 이식된 일본의 ‘공중위생’은 주로 감염병 관리와 상하수도 등 위생 인프라의 구축 등이 위주였다.
현재 중국에서는 공중위생보다는 공공위생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 ‘공공위생’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25년 5월 베이징에 ‘공공위생사무소’를 설치하여 위생실험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베이징의 위생실험은 미국 록펠러재단과 베이징협화의학원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록펠러재단은 1915년 차이나 메디컬 보드(China Medical Board)를 설립하여 런던선교회의 협화의학원을 인수하고, 베이징협화의학원(Peking Union Medical College)을 설립하여 기존 선교의학과는 차별화된 높은 수준의 과학적 의학을 중국에서 실현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착수했다(조정은, 2020). 베이징협 화의학원에는 당대 최고 수준의 의학자들이 모여들었고, 예방의학교실의 존 그랜트(John B. Grant: 1890-1962, 중국명 蘭安生)는 중국의 위생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급진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에서 훈련받은 황쯔팡(黃子方: 1899-1940) 등과 함께 ‘공공위생사무소’를 설치하고 ‘공공위생’의 증진시키기 위한 위생실험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목표로 한 실험은 단순한 공중위생의 증진이 아니라 위생의료 수준의 전반적인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일본의 공중위생이 감염병 관리와 상하수도 위생인프라의 구축에 중점을 두었다면, 베이징의 공공위생은 위생구사무소를 중심으로 인구 관리, 감염병 관리, 환경 위생, 위생 교육 등 예방의학과 치료의학을 동원하여 의료불평등을 해소하고 위생의료 전 분야의 전반적인 향상을 꾀하고 있었다(蘭安生, 1925).
그랜트와 함께 베이징에서 공공위생 실험에 나섰던 황쯔팡은 한발 더 나아가 ‘의학국가화(醫學國家化)’를 추진하면서 ‘국가의료(state medicine)’를 표방하였다. 국가의료는 “개인의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예방 및 치료의학의 모든 가능성을 공동체의 모든 성원에게 부여하는 것, 즉 국가가 사회적 예방의학과 임상적 치료의학, 의료인, 모든 형태의 설비 제공 등 모든 의료 업무에 대해 책임지는 것”으로 정의된다(黃子方, 1927: 1-5, 37-41). 국가의료의 주창자였던 황쯔팡이 베이핑시정부의 초대 위생국장에 등용되면서 국가의료는 더욱더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1920년대 베이징에서 추진된 공공위생은 감염병 관리와 상하수도 관리 등을 통해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국민에게 무상으로 보편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의료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의도를 포함한 것이었다. 황쯔팡은 이러한 공공위생의 목표를 ‘의학국가화’라고 정의하였고, 1930년대 베이핑시정부는 ‘의료평민화’라는 보다 현실적인 프로젝트를 실천하고자 했다(신규환, 2020a).
1930년대 상하이에서도 위생사무소를 중심으로 한 위생실험을 통해 공공위생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상하이에서 공공위생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후훙지(胡鴻基: 1894-1932)와 리팅안(李廷安: 1898-1948)이었는데, 이들 모두 베이징의 위생실험에도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후훙지는 베이징의학전문학교(北京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한 후 1924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보건대학원에서 공공위생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25년 베이징에서 제일위생구사무소가 설치되어 위생실험을 진행될 때, 후홍지는 제1계 계장을 담당하였다. 그는 1926년 상하이 송호상부(淞滬商埠) 위생국 부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상하이특별시정부가 성립되자, 초대 위생국장으로 부임하였다. 후훙지는 1932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상하이의 초기 위생국 활동을 주도하였다. 후훙지 이후 위생국장에 오른 이가 리팅안이었다. 리팅안은 베이징협화의학원(北京協和醫學院) 졸업 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공위생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26년 베이징 제일위생구사무소의 보건과장을 담당하였고, 1929년 상하이 위생국 제4과 과장을 담당하였다. 그는 1932년에 위생국장에 올라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때까지 상하이의 위생행정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위생월간(衛生月刊)』이라는 잡지에서 상하이시의 공공위생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를 전개하기도 했다. 리팅안은 「상하이시의 공공위생행정(上海市之公共衛生行政)」(1934)이라는 글에서, 상하이시의 공공위생 상황의 열악함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위생국을 중심으로 7개 분야에 걸쳐 위생행정을 실시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것은 공공위생행정, 환경위생의 개량, 전염병의 관리, 생명통계의 작성, 위생교육의 실시, 보건 및 의약의 감독과 진료시설의 구축, 위생시험소의 운영 등의 분야였다. 위생국의 위생행정은 위생구사무소를 중심으로 전개할 예정이었다. 1934년 현재 상하이시 17개구 중에서 단지 5개구(南市, 閘北, 高橋, 吳淞, 江灣)에만 위생구사무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시정부는 계속해서 위생구사무소를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상하이도 베이징과 마찬가지로 위생구사무소 중심의 위생행정을 확대·강화해 가면서 공공위생의 증진을 도모했던 것이다.6)
위생구사무소 중심의 공공위생 증진 방안이 중국 전체에서 동시에 실시된 것은 아니지만,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난징 등 선진 도시에서 시작되어 점차 내지 도시로 확장되는 추세였다. 1920-30년대 중국에서는 ‘공공의료’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 없이 ‘공공위생’의 증진 방안을 통해 시민에 대한 의료불평등을 해소하고 공적 의료서비스를 강화할 수 있었다. 국가의료의 주창자들은 공공위생을 제고시킨다는 목표하에 의학국가화와 의료평민화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실제로는 공공의료의 이상적·현실적 목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의학국가화가 국민에게 완전한 무상의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의료평민화는 완전한 무상의료까지는 아니지만, 진료비와 약제비를 최소화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의료혜택을 최대한 확대하겠다는 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중국의 의료평민화 운동은 1920-30년대 일본과 한국에서 의료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시행된 실비진료운동, 경비진료소 설치안 등과 유사한 맥락을 지닌 것이었다.

4. 한국의 공공의료 담론의 형성과 논쟁

개항 이후 한국에서도 위생 개념이 도입되면서 근대적 위생행정 체계를 갖추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1880년대 개화파들은 도로 환경의 개선 및 상하수도 건립을 통한 위생 인프라의 설치를 통해 근대적 위생행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박영효(朴泳孝: 1861-1939) 등은 치도론(治道論)을 내세워 국가 개입을 통해 공중위생의 향상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서유견문』에서 위생행정을 총괄할 수 있는 위생관사(衛生官司)의 설립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위생행정을 본격화하여 근대적 국가건설이 가능하다고 보았다(신동원, 1997: 64-72, 176-186; 박윤재, 2005: 25-37, 68-81).
1894-95년 갑오개혁기에 이르면서 조선 정부는 교육개혁을 실시하였다. 개혁을 주도했던 학부(學部)는 1개의 사범학교와 5개의 소학교를 설립하고 근대적인 위생 교육을 시행하였다. 「소학교교칙대강」(1895. 8)에 의하면, 소학교 교과목은 수신, 작문, 산술, 지리, 역사, 이과, 체조, 외국어 등이었는데, 이과(理科) 과목에서 ‘인체의 생리와 위생의 대요’를 배우도록 했다. 「중학교관제」(1899. 4)와 「중학교규칙」(1900. 9)에서는 중학교 심상과(4년제)와 고등과(3년제) 모두 ‘인체의 생리와 위생의 대요’를 포함한 박물(博物) 과목을 이수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사범학교령 시행규칙」(1906. 9), 「고등학교령 시행규칙」(1906. 9), 「보통학교령 시행규칙」(1906. 9) 등에서도 이과 혹은 박물 과목에서 인체의 생리와 위생의 대요를 배우도록 했다. 말하자면, 소학교와 고등여학교 등에서는 이과 과목에서, 고등학교 등에서는 박물 과목에서 생리 및 위생 분야를 가르치도록 한 것이다(전민호·신현정, 2020: 236-239).
1906년 이후 학교 교육에서 위생교육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중등생리위생교과서』가 다수 번역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임경재(任璟宰)가 번역한 『중등 생리위생학』(1907)에서는 제10장에서 ‘공중위생’을 다루고 있고, 공중위생이 다루는 범위는 전염병, 음식물, 의복, 주거의 청결, 상하수도 설비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염병 예방과 방역에 관한 내용이 가장 중시되었다(임경재 역, 1907). 이후 『생리위생학』 교과서에서는 개인위생과 공중위생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고, 공중위생에 관한 내용은 학교 교육에서 보편화되고 있었다(전민호·신현정, 2020: 239-249).
1910년 일제는 한국병합을 통해 식민통치를 본격화하였고, 의료와 위생은 근대 문명의 아이콘이자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다. 식민지 사회에 의료혜택을 제공한다는 목표로 식민당국은 중앙과 지방에 의학 교육기관과 관공립 병원을 설치하여 식민지인을 회유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식민지 위생 수준의 향상을 위해 경무국에 위생과를 설치하여 각종 위생활동을 실시하였다. 식민당국은 식민지의 공중위생 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목표로 이른바 위생경찰과 공의(公醫)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박윤재, 2009). 일제 식민당국의 식민지 위생의료체제는 중앙과 지방 소재에 중대형 관립병원을 설치하여 의료의 공적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공언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재정 자립의 문제 등으로 1920년대부터는 시료환자보다는 수익성 있는 일반환자 중심으로 의료서비스를 전환해 나갔다. 의료자원의 도시집중화 가운데, 의료의 상업화는 심화되고 농촌의료는 더욱 피폐해졌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는 경무총감부 사무분장을 통해서 경무총감부 아래에 위생과를 설치하고, 위생과 아래에 보건계와 방역계를 두었다. 보건계는 상하수도·음식·약품 취체, 의사 및 간호사·산파 업무의 취체, 공중위생에 관한 취체 등을 담당하고, 방역계는 감염병과 지방병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7) 말하자면 일제 식민당국은 위생과를 통해서 공중위생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위생과 아래에 보건계를 두었고, 보건계가 공중위생을 담당하게 하는 등 ‘위생’과 ‘보건’의 위계가 분명치 않았다. 사회적으로도 ‘공중위생’과 ‘공중보건’이라는 용어가 병행되어 사용될 정도였다.8)
식민지시기 학계와 민간에서도 공중위생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이 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위생학교실 교수였던 김창세(金昌世, 1893-1934)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위생학교실 이인규(李仁圭: 1908-?) 등의 활동을 들 수 있다. 김창세는 1916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졸업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도미하여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서 “녹두콩에 대한 화학적·생물학적 연구”로 한국 최초의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25년 10월부터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세균학 및 위생학교실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식 공중보건을 제도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다(신규환, 2012). 이인규는 1931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 위생학교실에 들어가 1938년 “조선 학령아동 신체 발육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위생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9) 그는 1931년 민중보건운동 단체인 ‘보건운동사’의 건립과 활동에 참여하면서 민중보건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창세가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밝힌 ‘공중위생’ 논의의 핵심은 ‘민족위생론’과 ‘육체적 민족개조론’이었다. 그는 민족위생론에서 민족의 발전과 장래를 위해서 민족의 건강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역사적으로 건강한 민족이 강력하고 우월한 문명을 만들었고, 나태하고 병적인 민족은 박약해지고 민족의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나라가 고구려 이래로 강한 민족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런 민족이었기에 적은 국토를 가지고도 근육 만능시대를 지나오면서 많은 역경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폐결핵과 십이지장충 환자가 많아지고 민족의 장래를 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보았다. 민족의 건강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민족의 미래를 밝히기 위한 가장 급선무의 과제였다. 이를 위해 민족적 위생 관념을 철저하게 보급해야 하며, 우선은 간단한 위생 지식부터 알아 실천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0)
민족적 육체개조론 역시 이와 같은 주장이었다. 역사상 세계를 정복한 위대한 민족은 모두 기력과 체력이 건장한 민족이었으며, 민족의 몰락은 안일한 생활로 인한 체력과 정신력의 퇴화 때문이었다. 서양 각국이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은 그들이 체력적으로 우월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본인보다도 체력적으로 건장한데, 조선인은 일본인보다도 열악한 조건에 있었다. 구미인들이 체력적으로 건장한 것은 근본적으로 위생법칙을 따르는 습관 때문이고, 일본인들의 건강상태가 크게 개선된 것은 영양과 운동과 위생의 결과였다. 반면 조선 민족의 체력은 날로 쇠퇴하고 있어서 조선 민중은 육체의 개조가 시급하였다. 이러한 육체의 개조는 개인보건과 민중보건으로 나눌 수 있고, 민중보건은 아동위생, 영양위생, 성생활, 오락, 휴식, 흡연, 음주, 공중위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육체의 개조는 어느 정도는 개인이나 단체의 힘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었다.11)
그는 식민하에서 국가의 힘에 의존할 수 없는 이상, “개인과 단체의 힘으로 할 만한 사업도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조선 민중의 건강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무엇보다 급선무는 공중위생에 대한 관념과 지식을 보급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공중위생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12) 그렇지만 김창세는 식민지의 공중위생 수준을 제고시키기 위해서는 경찰력을 동원한 강제적 방식의 위생 활동에 반대하였으며 식민당국에 협력하거나 의존할 생각은 갖지 않았다. 김창세는 1926년 9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화의학회 제18차 회의에서, “지금까지는 총독정치의 특색인 강압적 즉 경찰권으로 위생을 강제하였으므로 일반에 보급되지 못하였을 뿐더러 오히려 많은 반감을 샀지만, 지금은 조선의 형편이 위생을 강제할 때가 아니라 공중에게 위생교육을 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고 하였다.13) 또한 그는 록펠러재단의 재정지원을 받아 독자적인 위생실험실을 조직하여 위생실험을 전개하고자 했다. 결국 록펠러재단은 효과적인 위생실험을 위해서는 정부 당국의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식민당국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김창세의 요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양성한 첫 위생학자인 이인규는 1930년대 보건운동사의 창립, 조선체육협회 창설, 과학지식보급회의 설립 등으로 위생지식의 대중화와 공중위생의 증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인규는 보건운동사의 민중보건운동에 가장 많은 열정을 기울였다. 1930년대는 보건운동사뿐만 아니라 조선보건협회, 민중보건협회 등이 설립되면서 사회운동으로서 보건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박지영, 2019).
문화의 발달과 생활의 복잡화하는 것이 정신신경병 및 호흡기병을 만연시키는 한 원인인 것은 물론이나 보건상태의 여하가 더 중대한 원인이 된다. 통계에 의하여 볼진대 노쇠병으로 사망하는 장수자는 매년 감소되며 평균 사망 연령은 점점 저하하는 반대로 민족적 악유전소질은 민족 중에 만연하여 정신병 신경병 및 호흡기병(주로 폐병)은 격증하는 형세이다. 이 사실을 보아 우리는 민족적 생명에 대하여 우려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대책을 강구치 아니하고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민족적 보건운동을 촉진하여서 건강한 민족이 되어야 맹렬한 생존경쟁 중에서 능히 낙오하지 아니하고 융성한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14)
이인규는 민족 구성원 개인에 대한 건강 증진과 집단적 차원의 건강 증진을 나누어, 각각을 보건운동과 우생운동으로 구분하였다. 민족의 보건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보건운동과 우생운동이 모두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15) 민족의 보건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로 이인규는 평균 사망연령, 사인통계, 아동의 발육 및 성장 등을 꼽았다. 이인규는 특히 아동의 발육 및 성장 문제에 주목했다. 식민지시기 아동의 발육 및 성장은 결국 빈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개인적인 역량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박지영, 2019).
말하자면 김창세의 미국식 공중보건이나 이인규의 민중보건운동 등은 식민지 사회에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공중위생의 주도권을 가지려는 식민당국과 타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김창세는 식민지 조선을 떠나 중국과 미국 등지에서 현장 운동가로 활동하였고, 이인규 역시 위생학 전문가로서 식민당국의 정책에 관여하지 않고 민간의 위생운동가로 활약하다가 개원의사로 활동하였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위생학자로서 민족의 건강과 보건의 증진 방안을 모색했고, 공중위생의 향상은 그러한 방안 중의 일부였다. 1920년대 미국식 공중보건을 전공한 김창세는 ‘공중위생’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지만, 위생보다는 보건을 상위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1930년대 일본식 공중위생을 전공한 이인규는 당시 활발하게 진행되던 보건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위생’보다는 ‘보건’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16)
일제시기 민간영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보건운동의 이면에는 의료자원의 과도한 도시집중, 도농격차의 심화, 사회적 불평등 등으로 인한 심각한 의료불평등이라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적지 않은 의료인들이 의료상업화의 심각성에 적지 않은 공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개원의사조차도 의료국영화만이 이러한 의료상업화와 의료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하였다(신규환, 2017: 234-235).
1920-30년대 의료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실비진료 운동과 경비진료소 설치안이었다. 1920년대 전반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 실비진료소 설치를 제안했던 것은 식민당국이었다. 경기도 내무국은 향후 추진해야 할 과제로 실비진료소 설치안을 제기했다. 그러나 언론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실비진료소 설치는 중산층에게나 도움이 되지 빈곤층에는 별다른 실효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실비진료는 박리다매를 통해서 수익을 내는 구조였기 때문에, 의료에 대한 관심도가 높거나 의료 이용자가 많아야 그 실효성이 보장될 수 있었다. 지방 단위에서 시도된 실비진료는 주민들의 호응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실비진료소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경성부조차도 실비진료소 설치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자, 경성 주민들의 의료접근성 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경성의사회는 담합을 통해 고가의 진료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비난 여론이 되어 돌아왔다. 이에 경성의사회는 진료비를 낮추기도 하였고, 일부 한국인 의사들은 실비진료를 시작하기도 했다. 저비용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실비진료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 7월, 물산장려회 총회가 제기한 실비진료소 설립안을 시작으로 실비진료 문제가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1931년 3월, 오화영 등 44명의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은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경성실비진료소 설립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였고, 기존 의료기관과 달리 약값은 절반, 진료비는 무료로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당시 언론은 의약의 공영화라는 이상적 목표에 선행하는 구체적 사업의 진보라며 반색했다(최규진·하세가와 사오리, 2020).
1931년 5월, 종로에 사회영(社會營) 중앙실비진료원이 개설되었고, 오화영과 이원재가 각각 원장과 부원장을 맡았다. 중앙실비진료원은 100일만에 11,300명의 환자를 진료했을 정도로 민간의 호응을 얻었으며, 1년간 약 5만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이것은 웬만한 도립의원의 진료성적을 상회하는 성과였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조선보건협회 실비진료소, 전치실비진료원(全治實費診療院)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고, 영리를 목표로 했던 개업의사조차도 실비진료를 한다며 광고를 내야 했을 정도로 실비진료는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1932년 7월, 중앙실비진료원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면서 실비진료 운동을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실비진료원의 화재로 실비진료 운동이 좌초될 위기에 있었지만, 실비진료 운동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은 적지 않았다. 경성 주민들은 약간의 의료비 절감만으로도 대중들의 의료 접근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경성부의 경비진료소 설치안이 대중적 지지를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이순영, 2019).
세계대공황 이후 등장한 사회적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경성부는 경성전기가 내놓은 사회사업 기부금으로 경비진료소의 개설을 추진하였다. 이 방안은 당시 민간에서 활발해진 실비진료 운동의 영향과 관련이 깊었다. 경성부가 굳이 관립병원이나 부립병원을 제쳐두고 경비진료소라고 이름 붙인 데에는 개업의원보다 더욱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기존 수익형 진료를 추구했던 관공립병원과는 차별화하겠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성부는 연수입 500원 미만(호별세 면세자)의 중산계급 이하 계층을 경비진료소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대략 경성부민의 60%가 그 대상자들이었다. 경성부는 중산계급에게는 저렴하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빈곤층에게는 무료진료를 계획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경비진료에는 실비진료와 더불어 무료진료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성부의 경비진료소 설치안은 곧바로 내외의 비판을 받았다. 부의회(府議會) 의원들은 면세자 기준으로 경비진료소를 이용하게 될 경우 대부분 면세자인 일본인들은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경성의사회도 경비진료소가 운영될 경우 개업의원들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비판했고, 차라리 경비진료소가 아닌 극빈자를 위한 무료진료소를 설치하라고 주장했다. 한성의사회도 조선인들은 극빈하여 경비진료소조차 감당할 수 없으니 무료진료소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에서도 경비진료소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본인들만 혜택을 주게 될 것이고, 가난한 조선인에게는 치료의 기회가 제공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이순영, 2019).
경비진료소 설치안은 민족간 경제수준과 의사 사회의 이해관계가 걸린 첨예한 사안이었다. 반대파는 부의회 의원과 개업의 집단을 중심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했는데, 경성부의 경비진료소 설치안은 점차 언론와 여론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기존 관공립병원의 시료사업이 점차 축소 일로에 있었고, 무료진료소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비진료소 대신 무료진료소를 설치하라는 개업의 집단의 주장이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성부로서도 시료 진료 위주의 의료사업은 적자운영이 불가피하지만, 경비진료는 이용자만 많다면 적자운영도 피해 나갈 수 있는 사업이었다. 또한 여론의 지지를 얻은 언론들은 개업의사들에게 경성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경비진료 먼저 실시하라고 압박했다. 경비진료소 건립 반대파의 주장은 개업의사의 이익을 우선하기 위한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대다수 경성주민을 위한 경비진료소 설치안은 여론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1932년 11월 부의회를 통과하였다.
경비진료소는 본관 1개소(을지로 훈련원 자리)와 분관 3개소(경성 북부, 서부, 용산) 등으로 나누어 설치하고, 700평 규모의 본관에는 5개과(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와 46병상을 배치할 예정이었다. 아울러 한 해 평균 12.7만 명으로 유료 환자 5.6만 명(44%), 무료 환자 7.1만 명(56%)을 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경비진료소는 1933년 1월 경성부청 2층에 임시 진료소를 열고, 진료 첫 해, 37,718명을 진료하였다. 경비진료소가 계획했던 유료 환자 22,133명(58%), 무료환자 15,585명(42%)으로 목표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1934년에 을지로에 48병상 규모의 본관이 완성되고, 7개과(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가 설치되었다. 용산에도 분원이 설치되는 등 경비진료소가 모두 일본인 거류지에 설치되었다. 경성부는 경비진료소의 이용객의 자격을 연수입 500원 미만으로 제한하고자 했으나 실제로는 적용하지 못했고, 경비진료소의 명칭이 저급한 감을 주어 환자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1934년부터는 경성부립의원(京城府立醫院)으로 변경되었다(이순영, 2019).
경성부의 경비진료소 건립안은 식민당국, 의사단체, 언론, 여론 등 이해 당사자들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식민지 보건의료상황에 대한 다양한 인식 차이를 보였지만, 경성부민들의 건강 유지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의 유지를 위해 저비용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1930년대 실비진료운동과 경비진료소 설립안은 1940년대 의료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의료국영론’으로 불씨를 이어갔다. 그 대표적인 논객이 우익과 좌익의 의료인식을 대변했던 이용설(李容卨:1895-1993)과 최응석(崔應錫: 1914-1998) 등이었다. 이용설은 의료국영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지 않았으며, 의료국영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의료시설과 전문과목 담당의사의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용설은 의료국영론을 실시하기보다는 민간에서 종합병원을 많이 건설하여 종합화·대형화를 추진하고, 의사양성 확대, 해외유학 알선, 자격시험 강화 등 미국식 의료제도를 적극 도입하여 의료상업화를 극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현실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좌익 진영의 인물들 역시 의료국영론을 지지했는데, 최응석은 전면적이고도 엄격한 의료국영화가 아니라 점진적이고 유연한 의료국영화를 위해 국영병원, 협동조합병원, 개인개업의 등을 세 축으로 하는 의료국영론을 제시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영리적 개인개업의는 없어져야 할 존재로 여겼지만, 유연한 의료국영화를 위해서는 모든 개인병원을 폐쇄하고 개인개업을 금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민이 무상의료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책임하에 개인개업의가 의료의 인민화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의료국영론을 중심으로 수렴되었던 것이다(신규환, 2017; 김진혁, 2021).

5. 맺음말

공공의료가 “국민의 보편적인 의료이용을 보장하고 건강을 보호·증진하는 모든 활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동아시아에서 공공의료는 위생 개념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인 위생이 개인의 양생과 장수를 강조했다면, 근대적 위생은 국가가 개인의 신체와 훈육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 각국은 근대국가 건설에 발맞춰 위생의료 분야에서도 근대적 과제를 실천해야 했으며, 근대국가가 개인의 신체에 대해 개입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근대적 국가건설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개인위생보다는 공중위생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위생 개념의 새로운 해석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메이지시기 나가요 센사이는 근대국가의 신체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생’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나가요는 공중위생의 관리와 향상을 국가적 과제로 생각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공중’이라는 관념조차 형성되지 않은 시기여서 공중위생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 대신 ‘직달위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감염병 관리와 상하수도 관리 등을 목표로 삼았다. ‘공중위생’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 모리 오가이가 서양식의 공공에 대한 건강보호 대책을 공중위생이라고 번역하면서부터였다. 그 후로 일본에서는 공중위생이 보편적인 사회담론으로 진화해 나갔다. 일본의 공중위생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 중국 등지로 확대되어 갔다.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는 동아시아 각국으로 하여금 일본 국가의 강력함의 근원이 위생에 있다고 믿게 했다. 20세기 초 중화민국 정부는 근대적 교육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사례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각종 위생법령과 위생기구에 일본식 ‘공중위생’이 그대로 이식되었다.
1920년대 베이징에서는 사회의학과 국가의료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일본식 ‘공중위생’이 아닌 미국식 ‘공공위생’이 전개되었다. 공중위생과 공공위생은 표면상 글자 한 자 차이에 불과했지만, 공공위생은 의료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무상의료에 기초한 ‘의학국가화’에서 의료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의료평민화’까지 다양한 함의를 포괄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는 공공위생의 확대와 강화를 통해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고, 그 구체적 성과가 1930년대 베이징에서 ‘국가의료’로 구체화되었다. 국가의료는 “개인의 지불 능력에 상관없이, 예방 및 치료의학의 모든 가능성을 공동체의 모든 성원에게 부여하는 것”이었고, 베이징에서 추진된 공공위생은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국민에게 무상으로 보편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베이징에서 국가의료의 경험은 중국혁명을 통해 농촌과 전국 각지로 확대되어 나갔고, 공공위생은 공공의료의 개념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1880년대 이래로 급진개화파를 중심으로 위생인프라의 개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일본의 영향을 받아 위생에 관한 논의가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일제하 식민당국은 공중위생을 제도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위생과 보건이 혼용되었고, 의료의 도시집중화와 상업화가 지속되면서 의료의 상업화에 대한 반성과 의료의 공공성을 제고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까지 근대적 위생이 도입·확산되었으며, 주로 일본의 ‘공중위생’ 관념이 확산되고 있었다. 일본의 공중위생은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활동으로 모호하게 규정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방역과 환경 인프라의 개선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에 맞서 일제하에서 이미 예방과 동시에 치료를 중시하는 미국식 ‘공공위생’ 또는 ‘공중보건’ 개념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미국식 공중보건 개념은 기존 상하수도 인프라 관리와 감염 관리에 집중했던 일본식 공중위생에서 벗어나 인구관리를 위한 공적 의료서비스를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하에서 민간의 지지를 받는 ‘보건’이 식민권력이 주도하는 ‘위생’을 압도하기는 어려웠다.
1920-30년대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식 공중위생과 미국식 공공위생 담론이 각축하면서 의료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시기였다. 흥미롭게도 동아시아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저비용으로 의료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비진료운동과 국민들에게 예방과 치료를 보편적으로 제공하기 위한 사회의학 등이 주목받았다. 이것은 20세기 전반 동아시아 각국에서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의료불평등의 심화로 초래된 역설적 현상이기도 했다. 실비진료운동은 민간운동의 특성상 사회모순을 해결하거나 국가 의료체제의 근본적 개혁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국가와 사회에 공공의료의 필요성을 더욱 각인시켜 주었다는 성과를 남겼다. 1930년대 동아시아에서 사회의학은 사회환경이 질병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관계를 연구하고, 예방의학과 치료의학을 활용하여 공공의 위생과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였다. 사회의학이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게 되면, 중국과 같이 의학국가화 등의 실천으로 나갈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 식민지 조선에서처럼 민중보건운동 등과 같은 민간운동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해방은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중위생의 발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일본에서는 <보건소법>의 제정 등으로 미국식 보건의료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주민들에게 기존의 방역과 위생인프라뿐만 아니라 공공의료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중국에서는 신중국 성립 이후 베이징의 국가의료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작업이 전개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은 미국식 보건이 일본식 위생을 전도시킨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해방 직후 의료의 공공성을 제고하기 위한 의료국영화를 둘러싼 좌우 진영의 논의가 있었다. 의료계는 의료국영론에 공감하고 있었지만, 의료인력과 재원 부족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식 보건학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는 가운데 기존의 공중위생은 ‘공중보건’으로 새롭게 번역되었고, 보건소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공공의료 담론에 관한 본격적인 분석은 차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Notes

1) 「중대시기에 직면한 통제도정의 체육계」, 『동아일보』(1934. 1. 1), 3면.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생성(厚生省) 산하에 공중보건국(公衆保健局)이 설립되면서 공중보건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공중위생이라는 용어가 상용되고 있다.

3) 근대 일본에서 공중위생의 시작을 다카키 가네히로(高木兼寛: 1849-1920)의 각기병 논쟁과 그의 의료활동으로 보기도 한다(多田羅浩三, 2018).

4) 1947년 개정된 <보건소법>에 따르면, 보건소의 활동 범위는 1) 지역보건에 관한 사상의 보급과 향상, 2) 인구동태 통계 및 기타 지역보건에 관련되는 통계, 3) 영양의 개선 및 식품위생, 4) 주택, 수도, 하수도, 폐기물의 처리, 청소 및 기타 환경의 위생, 5) 의사(醫事) 및 약사(藥事), 6) 보건사(保健師), 7) ‘공공의료’ 사업의 향상 및 증진, 8) 모성 및 영유아, 노인의 보건, 9) 치아보건, 10) 정신보건, 11) 치료방법이 확립되지 않은 질병 및 기타 특수한 질병에 의한 장기 요양이 필요한 자의 보건, 12) 에이즈, 결핵, 성병, 전염병 및 기타 질병의 예방, 13) 위생상의 시험 및 검사, 14) 기타 지역 주민의 건강의 유지 및 증진 등을 포괄하였다.

5) 「內務部官制修正草案(1912. 6)」, 「神州日報」(1912. 7. 14).

6) 李廷安, 「上海市之公共衛生行政」, 『衛生月刊』 4-1, (1934), 20-24쪽.

7) 「朝鮮總督府警務總監部事務分掌規程」, 『朝鮮總督府官報』(1910. 10. 1).

8) 「공중위생의 실제」, 『동아일보』(1931. 1. 1), 3면.

9) 「이인규씨 학위논문 통과」, 『동아일보』(1937. 10. 30), 2면.

10) 김창세, 「민족위생을 개론함」, 『시조』(1926. 1).

11) 김창세, 「민족적 육체개조운동」, 『동광』 창간호, (1926. 5).

12) 김창세, 「공중위생과 우리의 책임」, 『세부란스교우회보』 7, (1926. 6).

13) “Proceedings of Conference”, The China Medical Journal 40-9, (Sep. 1926), pp.859-860; 「공중위생의 보급은 강제보다 교육」, 『동아일보』(1926. 9. 17), 2면.

14) 이인규, 「조선 민중 보건상태의 통계적 관찰」, 『보건운동』 1-1, (1932. 2), 6쪽.

15) 이인규, 「보건운동과 우생운동을 일으키자」, 『보건운동』 1-1, (1932. 2), 7-8쪽.

16) 개념사적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공중’과 ‘위생’은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 ‘공공’, ‘보건’과 경쟁하다가 점차 공중에서 공공으로, 위생에서 보건으로 전환되었다고 생각된다.

References

1. 『東光』, 『東亞日報』, 『保健運動』, 『時兆』, 『神州日報』, 『衛生月刊』(上海), 『朝鮮總督府官報』.

2. The China Medical Journal.

3. 蘭安生(J. B. Grant)著, 『北京公共衛生芻議』(北京: 中央防疫處, 1925).

4. 社團法人實費診療所 編輯部, 鈴木梅四郎 監修, 『社團法人實費診療所の歴史及事業 第3巻』(東京:社團法人實費診療所, 1935).

5. 小川鼎三·酒井ソヅ 校注, 『松本順自傳·長與專齊自傳-松香私志-』 (東京: 平凡社, 1980).

6. 吳秀三著, 華申祺·華文祺譯, 『中學生理衛生學敎科書』 (上海: 文明書局, 1906; 1909).

7. 任璟宰 譯, 『中等 生理衛生學』 (京城: 徽文館,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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