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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미군 제406의학종합연구소의 위상과 역할, 1946-1953†

Abstract

In 1946, the U.S. Army established the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as the central medical research institute for their new Asia-Pacific-occupied area. The primary mission of the 406th medical laboratory was to supplement the epidemiologic, sanitary, and diagnostic services available in other medical facilities and hospitals, and to investigate outbreaks of disease and conditions which affect or may affect the health of the people in the occupied area. At the time of its establishment, the 406th laboratory had considerable difficulties securing researchers, but it solved the related problems by actively cooperating with Japanese medical researchers and research institutes. According to the statistics in 1947, the 406th laboratory consisted of 46% of its total research personnel, Japanese researchers. The 406th medical laboratory’s professional research departments included the department of Pathology, Serology, Bacteriology, Medical Zoology, Chemistry, Virus and Ricketts, Entomology (established in 1949), and Epidemiology (established in 1951). All research departments played a central role in the Asia-Pacific region in their professional fields. For example, the department of Pathology functioned as the “histopathology center of all hospitals in Japan, Korea, and the Mariana-Bonin Command” under the provision of “Army Regulation 40-410,” and the department of Chemistry was called an “analytical chemistry laboratory for the Far East Command” because it performed various chemical experiments for many medical facilities in the area with insufficient research facilities.

1. 머리말

이 글은 1946년 신설되어 미군의 극동지역 중핵 의학연구소 역할을 수행한 미군 제406의학종합연구소(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이하 ‘406연구소’)를 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의 새로운 점령지역에 중심적 군의학연구소를 수립한다는 결정은 전후 극도로 열악했던 현지 의료 환경을 고려해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 1945년 8월 말부터 일본 본토와 한반도에 무혈입성한 미군 장교와 사병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우려한 현지상황들 중 하나는 그곳에 만연한 전염병 감염의 공포였다.
전쟁기에 빠르게 퍼졌던 전염병은 전후의 불결, 무질서, 빈곤을 기화로 더욱 대규모로 창궐하기 시작했다. 이질로 인한 일본인 사망자들은 1945년에 2만 명을 기록해 전해의 두 배 가까운 수치를 기록했고, 1945~48년 사이에는 6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 유행성 발진티푸스, 홍역, 디프테리아, 뇌염 등에 걸렸다. 공식적 기록에 의하면 이들 중 9만 9,654명이 목숨을 잃었다(존 다우어, 2009: 120). 같은 시기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를테면 1946년 38선 이남 지역의 한국에서도 15,644명의 사람들이 콜레라에 감염되어 10,181명이 사망하고(사망률 65.1%), 20,810명이 천연두에 감염되어 4,234명이 사망하는(사망률 19.8%) 비극적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최충익, 2015: 123). 따라서 미 육군은 이렇듯 불안정한 극동지역이 빠르게 사회적 안녕을 회복하고, 미군 병력의 건강 또한 온전히 유지할 수 있도록 체계화된 중심적 의학연구소 건립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군의 아시아 점령지역 중핵 의학연구소라는 406연구소의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그의 설립 과정과 주요 역할을 보여주는 연구 논저는 전적으로 부재한 상황이다. 406연구소 운영 주체였던 미군이나 미국학계는 물론, 연구소의 소재지인 일본, 그리고 미군점령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에서도 지금까지 이 연구소 자체를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논저는 존재하지 않는다.1) 이 같은 연구 현황은 이 글의 본문에서 제시할 406연구소의 중요한 위상과 역할에 비추어 보자면 꽤나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기존 연구에서 406연구소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하거나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406연구소의 존재에 주목한 가장 대표적 연구성과는 한국전쟁기 미국의 생물학전 수행 가능성을 연구한 스티븐 엔디콧(Stephen Endicott)과 에드워드 헤거먼(Edward Hagermann)의 공저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이다. 이 저서는 “406부대의 가장 큰 과제는 곤충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406부대 설립과 존재의 이유 자체가 미군의 생물학전 수행을 위한 매개 곤충 및 설치류 숙주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 있었다고 주장한다(스티븐 엔디콧・에드워드 해거먼, 2003: 219~235). 그러나 이 글의 본문에서 자세히 후술되겠지만, 406연구소는 곤충 연구뿐만 아니라, 미군 병력의 건강 유지와 점령지역 전염병 통제 등을 위한 매우 다양한 의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곤충학과 자체가 406연구소 수립 후 3년이 지난 1949년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신설되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곤충 연구는 406연구소 연구활동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또한 당대 일본과 한국에서 유행했던 일본뇌염이나 유행성 출혈열 연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406연구소의 중요성을 강조한 또 다른 연구자로는 다름 아닌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인 한탄 바이러스(Hantan virus)를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한국의 생물학자 이호왕을 들 수 있다. 1971년 이호왕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은 1969년을 마지막으로 소위 ‘한국형 출혈열’ 연구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고, 그동안 이에 대한 다수의 연구는 일본에 있는 406연구소에 의해 진행되어 왔다고 한다(이호왕, 1971: 16). 그는 1999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도 406연구소의 유행성 출혈열 연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기도 했다(이호왕, 1999: 69~70). 여기에 더해 최근 이호왕의 학문적 성장 과정을 연구한 과학사학자 신미영 또한 자신의 논문을 통해 이호왕과 406연구소 출신 연구자들의 개인적 인연, 1950년대 후반 이래 406연구소의 일본뇌염과 유행성출혈열 연구활동 등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신미영, 2015: 43~195). 그러나 이호왕과 신미영의 논저 또한 본고의 분석 대상인 406연구소의 설립 배경이나 인적‧조직적 구성, 연구활동의 전체상과 성격 등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실상 이상의 내용이 그나마 406연구소의 존재와 가치에 주목한 대표적 기존 연구논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06연구소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연구소의 역할과 성격이 당대 미국의 군진의학(military medicine)이나 한국전쟁기 의무정책 등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 군진의학의 역사와 한국전쟁기 의무정책의 관점에서 기존 연구사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406연구소에 관한 연구는 미국 군진의학사 연구와 일정한 상관관계를 지닐 수 있다. 미 육군 군진의학의 발달 과정에 대해서는 20년간 미 육군군사연구소에 재직하면서 1775년 이래 미국 의무부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그려낸 메리 질렛(Mary C. Gillett)의 네 권의 저서들, 그리고 미 육군부 의무감실의 책임 하에 공식 편찬된 제2차 세계대전기 의무부대들의 활동에 관한 역사 시리즈를 대표적 연구논저로 꼽을 수 있다(Gillett, 1987; 1990; 1995; 2009; Department of the Army, 1955). 한국전쟁기에 대해서는 미 육군군사연구소 의학역사과장으로 재직했던 코우드리(Albert Cowdrey)의 저서가 대표적 연구서로 간주된다. 그런데 코우드리의 책은 한국전쟁기 전황에 따른 미국 의무활동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만, 일본 소재 406연구소의 한국전쟁기 전염병 관련 심층연구활동이나 혈액 조달‧공급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Cowdrey, 1987).
다음으로 406연구소는 미군정기부터 한국전쟁기에 이르는 한국 의학사의 관점에서도 흥미롭게 조망할 수 있다. 실상 한국의학사 연구에서 해방 이래 1940~50년대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이후의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의학 연구가 본격화된 시기는 1960년대 이후로 간주하면서, 1950년대를 사실상 한국의학사의 공백기로 남겨두곤 했다(이동원, 2020: 343; 신미영, 2022: 174~175). 그러나 2020년을 전후하여 이임하, 이동원, 한봉석, 박지영 등의 역사학자들이 미군정기와 한국전쟁기 공중보건과 의학의 발달 과정에 관한 논저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그 연구 공백을 빠르게 메워가고 있다. 이를테면 이임하는 한국전쟁기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의 전염병 예방 활동에 주목했고(이임하, 2020), 이동원은 한국전쟁 전후 한국 보건의학계와 보건학의 형성 과정을 분석했다(이동원, 2020). 한봉석은 한국전쟁기 미 제8군 전시 의료지원의 연구분야와 이동외과병원의 활동 내용을 분석했고(한봉석, 2021), 박지영은 해방 후 미국의 공중보건 개념과 일제시기 이래의 의학적 식민유산이 혼합되어 한국 공중보건 체계가 성립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제시했다(Park, 2022).
위와 같은 미군정기와 한국전쟁기 한국의학사와 관련된 최근 연구들은 406연구소의 역사적 위상과 역할을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준다. 이 글의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되겠지만, 406연구소는 한국의 다양한 보건‧의료기관에서 수행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의학적 연구‧분석활동, 이를테면 새로운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 연구, 새로운 약품의 효능과 안정성 평가, 사체 부검 등의 활동을 대행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06연구소는 한국의 열악한 의학 연구환경 속에서 수행할 수 없는 각종 실험을 대행하곤 했던 것이다.
이렇듯 본 연구는 기존의 미국 군진의학 연구, 혹은 미군정기와 한국전쟁기의 한국 의학사 연구성과들과 일정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하지만 이상의 여러 기존 논저들에서도 제406의학종합연구소의 존재는 사실상 망각되어 있다. 반면에 406연구소는 그 설립의 주체, 배경, 연구인력의 구성, 주요 연구내용 등의 측면에서 의학사적으로는 물론, 냉전정치사적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의학연구조직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그 인적 구성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연구인력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대는 일본, 한국, 오키나와, 마리아나-보닌제도를 전반적으로 망라하는 미군의 핵심 의학연구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1년 전 적국 국민이었던 일본인 연구자들로 그 인적 구성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있었다. 게다가 본문에서 자세히 보여주겠지만, 이 일본인 연구자들은 결코 연구소의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보조원의 역할에 머문 사람들도 아니었다. 이 글은 이렇듯 특별한 연구인력 구성의 배경과 영향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논문은 이 같은 내용의 규명을 위해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미국립의학도서관(National Library of Medicine), 미육군 우수의료센터 스팀슨 도서관(Stimson Library, U.S. Army Medical Center of Excellence), 캐나타 요크대학교 도서관 등에서 1946~53년 406연구소의 설립과 운영 과정을 보여주는 당대 문서들을 수집・분석했다. 특히 필자는 1947년부터 한국전쟁기까지 매년의 구체적 연구활동을 보여주는 「연간역사보고서」(Annual Historical Report)를 통해 그 조직의 설립 과정, 내부 구성, 주요 연구활동의 성과와 한계 등에 대해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406연구소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연간역사보고서는 연구활동에 수반하는 다양한 행정적 절차, 일상적 실험, 전염병학적으로 중요한 데이터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다양한 연구실과 행정실을 책임지는 장교와 민간인들에 의해 공동집필되었고, 연구소의 모든 층위에 있는 수많은 개인들의 노력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iii). 406연구소는 연간역사보고서에 대해 “군사연구소 기능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가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사료적 가치까지 평가해 두기도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i). 이 글은 406연구소 스스로 “명백히 무수히 많은 수집 자료들”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고 자평하는 「연간역사보고서」를 비롯한 당대의 역사적 자료에 기초해, 이 연구소의 설립 배경, 운영 방식, 주요 연구성과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극동지역 핵심 군의학연구소의 신설과 일본 연구자들의 활용

미군의 핵심 의학연구소 신설에 대한 요구는 새로운 점령지역 내의 심각한 의학 문제 해결의 필요성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당대 기록에 의하면, 극동 지역 중심 의학연구소 수립을 가장 먼저 제안한 인물은 미태평양군 의무감실 예방의학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제임스 시몬스(James Stevens Simmons) 준장이었다. 시몬스는 1946년 1월 9일자 서한을 통해 미군의 새로운 극동 점령 지역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중앙연구소”(central laboratory)를 신설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제안했다.2)
시몬스는 1915년 펜실베니아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1차대전기 육군의무대예비군 중위로 임관되면서 의무장교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1차대전기 시몬스는 육군의무학교에서 군예방의학 분야를 연구했고, 이후에는 미국 국내와 해외의 다양한 군의학연구소를 신설‧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그는 필리핀과 파나마 운하지대의 뎅기열과 말라리아 연구에서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유명해졌고, 2차대전기에는 세계 곳곳의 연합군 병력의 건강 보호를 위한 예방의학서비스 조직을 신설‧감독했는데, 이는 “예방의학 분야에서 역사상 최대의 캠페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시몬스는 이와 같은 군과 의학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듀크대학교, 펜실베이나대학교, 하버드대학교 등에서 명예박사와 저명한 학술상을 수상했고, 1946년 군 전역과 동시에 하버드보건대학원 원장으로 임명되었다.3)
이렇듯 미군 내의 다양한 의학연구소 신설과 예방의학 분야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던 시몬스 준장이 하버드보건대학원장 부임 직전인 1946년 1월에 극동지역 핵심 의학연구소 수립을 제안한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특히 일본 본토의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SCAP) 내에서 시몬스의 제안에 대한 실질적 검토의 책임을 진 인물이 크로포드 샘스(Crawford F. Sams) 공중위생복지국장(Chief, Public Health and Welfare Section)이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의 특별한 인연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샘스는 시몬스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멘토”(mentor)로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샘스는 1931년 월터리드 육군의과대학에서 시몬스를 “예방의학 분야의 멘토”로서 처음 만났고, 그의 자서전을 통해 시몬스를 “평생의 친구이자 나의 가장 존경하는 멘토들 중 한명”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했다(Sams, 2015: xiii, 3). 샘스는 이 같은 멘토의 구체적 제안이자, 혼란한 점령지역 의료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연구센터 설립 제안에 대해 매우 신속하게 호응했다.
1946년 1월 9일 시몬스 준장이 미군의 새로운 점령지역인 일본, 한국, 오키나와, 마리아나-보닌제도를 전반적으로 커버할 수 있는 중심적 연구소 설립을 제안한 직후, 극동지역 장교들은 이에 관한 일련의 회의들을 신속하게 진행했다. 그리고 불과 4개월도 지나지 않은 1946년 5월 7일자 미8군 본부의 「명령서한 5-16」에 의거하여,4) 1946년 5월 10일 제406의학종합연구소를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406연구소는 창설 직후 임시적으로 요코하마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 실험실을 도쿄에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6년 9월 30일에 이르러서야 도쿄 중심가에 위치한 마루노우치(丸の内) 지구의 ‘미쓰비시 히가시 빌딩 No. 7’으로 완전 이전할 수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ii).
제406연구소의 기본 임무는 미군의 새로운 점령지역인 일본, 한국(38선 이남 지역), 마리아나-보닌제도의 모든 민간‧군 병원과 의료시설에 대한 중심적 연구 지원 센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406연구소는 극동지역에 위치한 여타 소규모 군 의학실험실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전염병, 위생, 진단 실험을 추가적으로 지원하고, 소규모 민간병원이나 의료 장비를 완벽히 갖추지 못한 의료시설의 의학적 결정을 대행하는 업무도 수행하게 되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iii, 46;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i). 미군의 강력한 폭격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었던 일본, 오키나와, 마리아나-보닌제도는 상당수의 병원과 의료시설이 파괴된 상황이었고, 일본의 오랜 식민지배를 거친 한국 또한 상대적으로 매우 낙후한 의학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406연구소는 미군 군사력 유지에 필수적인 의학적 문제들에 대비하고, 미군에게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현지 민간인들의 질병 치료를 위한 의학적 실험 결과 제공을 기본 임무로 간주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i).
406연구소 설립 4년 후에 발발한 한국전쟁 또한 연구소 핵심 임무의 내용・성격・업무량 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406연구소의 임무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단순한 전염병 연구와 위생・진단 실험 결과 제공의 차원을 넘어서, 실제 전쟁 중인 유엔군 병력의 전투력 유지를 위한 의학적 지식의 급속한 신장과 확산에 집중되었다. 전쟁 이전에는 주로 전염병학적으로 중요한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 그리고 극동지역의 특별한 질병과 그에 대한 치료법 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에는 교전 지역의 요구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면서, 진단서비스를 통한 전방부대 지원, 부상자들을 위한 혈액의 조달과 공급, 의학연구인력의 전장 배치, 전장에 새롭게 등장한 전염병의 원인 규명과 백신 개발 등이 406연구소의 핵심 임무로 부각되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i).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406연구소에 부가된 새로운 중요 임무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제4장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그런데 애초 미 점령군의 주요 리더들 중에는 위와 같은 극동지역 중핵 연구소 신설의 필요성에 대해 대부분 공감하면서도, 그 실질적 조직 과정에 대해서는 적잖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미태평양육군 의무감 조셉 마틴(Joseph I. Martin) 준장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마틴 준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사’(personnel) 문제가 새로운 중핵연구소 수립 과정에서 명백한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시 말해 극동지역의 새로운 핵심 연구소에서 일할 의무장교와 훈련된 사병들, 실험실에서 일할 과학자들의 모집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ii).
마틴 준장의 지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일련의 미군 동원 해제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매우 당연하고 현실적인 우려였다. 전쟁 기간 동안 미 육군 의무부는 전례 없는 규모로 성장하면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완전한 종전 이전 시점부터 의무부의 주요 인력들은 빠르게 민간 생활로 복귀하고 있었다. 전후 기간 동안 육군 소속 의사, 간호사, 과학자, 의학행정가, 훈련된 사병들의 손실은 대출혈에 가까웠다. 육군은 1945년 6월부터 1950년 6월 사이에 전쟁기 장교 병력의 86%, 사병 병력의 91%를 상실했다(Albert Cowdrey, 1987: 7-8).
반면에 같은 시기 육군은 여전히 대규모의 의료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전쟁기 부상자들에 대한 돌봄이 여전히 필요한 병원들에서도, 전염병 위협에 노출된 난민들 보호와 통제를 위해서도, 그리고 심지어 수백만 명의 병력들에 대한 신체검사를 수행해야 하는 동원해제본부에서도 의료 인력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에 반해 뇌 전문 외과의사들로부터 의료기사들에 이르기까지, 민간인 생활로의 복귀는 그들에게 훨씬 더 많은 돈과 자유와 전문가로서의 성장 기회를 약속하고 있었다(Albert Cowdrey, 1987: 9). 전후 연구에 의하면, 민간인 의사들은 이 시기 국가 소득 최상위 3% 등급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젊은 의사들은 전쟁기 군의 비인격적인 집단주의적 전통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5) 이 같은 현실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의학연구소에서 일할 우수한 의사와 과학자들을 대거 신규 모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었다. 이미 극동지역의 모든 군의학 병원과 연구시설들은 일정 수준의 자격을 갖춘 연구인력의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8: 5).
406연구소 신설을 주도한 사람들은 극동지역 중핵 의학연구소 설립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위와 같은 의료연구인력 모집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꽤나 과감한 결정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미군 부대 내에 극동지역 현지의 의사와 과학자들을 대규모로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달리 말해 미군의 핵심 군의학연구소 내에 새로운 점령지의 현지 전문가들을 대거 수용한다는 과감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종전 후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과거의 적을 오늘의 동지로 적극적으로 포용한다는 결정이었다.
이 같은 계획은 다소 무모해 보이기는 했지만, 전후 극동지역의 극도로 열악한 의료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꽤나 현실적인 대안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미 점령군은 극동지역 고유의 질병과 의학적 환경에 보다 해박한 지식을 지닌 현지 의학 전문가들의 활용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당시 미군은 2차대전기 중국 지역에서 인간 생체실험까지 자행한 일본군의 생물학적 지식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 은밀한 정보의 취득 방식에 대해 애타게 고심하고 있었다.6)
406연구소 자체 기록에 의하면, 1947년 말 연구소 구성원들의 국적은 104명의 미국인—22명의 미군 장교, 14명의 미 육군부 소속 민간인, 68명의 미군 사병— 외에, 98명의 일본인과 10명의 기타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체 212명 구성원 중에서 일본인이 약 46%를 차지했다. 그 상세한 국적을 알 수 없는 10명의 기타 외국인까지 합하면, 406연구소는 전체 구성원의 절반(50.9%)이 외국인으로 구성된 매우 특이한 미군부대였던 것이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8: 11;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ii).7)
심지어 406연구소는 적절히 훈련받은 미국 국적의 장교나 사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주요 연구활동의 상당 부분을 일본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의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06연구소 연구활동을 설명하는 당대 글에서도 <그림 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인 과학자들의 연구 모습이 전면에 배치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사진 해설문은 “일본인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406연구소의 “중요한 보완적 존재”(important complement)로 묘사했지만, 당대의 자체 보고서는 406연구소가 “감독받지 않는 일본인이나 여타 외국인들의 업무에 너무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Far too much reliance is being placed upon the work of unsupervised Japanese or Foreign nationals)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8: 6).
406연구소를 통한 미군과 일본인 의학 연구자들의 협력관계 구축은 실상 위와 같은 연구소 내부적 협력관계의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406연구소는 일본인 전문연구인력 직접 채용의 차원을 넘어, 일본 내의 다양한 민간병원과 의학연구기관의 일본인 연구원들과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를테면 1948년 406연구소 의학동물학부(Medical Zoology Section)는 일본의 주혈흡충병 연구의 일환으로 매달 2천 마리의 달팽이를 채집하여 그들에 대한 구충제 통제 가능성을 조사했는데, 실제 구충제 샘플들에 대한 실험은 406연구소와 일본 국립공중위생원(国立公衆衛生院), 야마나시복지보건부(山梨福 祉保健部)의 공동연구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해당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실험실 선별시험을 주도한 연구원은 일본 국립공중위생원의 미토마(Y. Mitoma)와 이시이(N. Ishii) 박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06연구소에 의해 발의된 실험이었지만, 실제 수행 주체는 연구소 바깥의 두 일본인 연구자들이었던 것이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2-3). 의학동물학부는 1950년에도 일본 국립공중위생원, 도쿄의 기타사토연구소(北里研究所), 야마나시현립의학연구소(山梨県立医学研究所)의 일본인 기생충학자들과 또 다른 “공동연구”(collaboration)를 수행했다고 밝히고 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29).
이렇듯 406연구소와 협력 관계 속에서 공동연구를 수행한 일본인들의 구체적 실명은 406연구소에서 발간한 여러 의학 논저들의 저자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406연구소 의학동물학부장 로렌스 릿치(Lawrence Ritchie)는 일본 국립공중위생원의 요코가와(M. Yokogawa)와 기타사토연구소의 나가노(K. Nagano)와 함께 극동지역 기생충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 연구는 아사쿠라(S. Asakura), 히시누마(Y. Hishinuma), 시미즈(M. Shimizu)의 “기술적 도움”(technical assistance) 하에 진행될 수 있었다. 406연구소의 세균학부 또한 오카베(K. Okabe)라는 이름의 일본인 연구자와 함께 이질균 연구를 수행하여 면역학 저널에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249).8) 1950년 406연구소 곤충학부가 발간한 연구보고서는 세이치 토시오카(Seiichi Toshioka)라는 일본인의 리뷰를 받은 후 미국 의학 저널에 투고되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250).9) 이 외에도 406연구소의 출판 목록에는 코바야시(H. Kobayashi), 엔도(T. Endo), 타나베(H. Tanabe), 무라쿠니(R. Murakuni) 등과 같은 다수의 일본인 저자명이 등장한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248-249;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288-289).
그런데 흥미롭게도 406연구소 출판 목록에는 다수의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으로 추정 가능한 이름도 등장한다. 한국인 연구자 최영태(Young Tai Choi)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최영태 박사가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한 연구성과는 406연구소 바이러스・리케차질병과(Department of Virus and Rickettsial Disease)의 한국에서의 일본B형뇌염에 관한 논문이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250). 이 논문은 1950년 당시 406의학연구소장이었던 헐링호스트(Robert L. Hullinghorst) 중령, 406연구소 바이러스・ 리케차질병과장 번스(Kenneth F. Burns) 소령과 함께 집필되었다. 저자 정보에 의하면, 최영태는 한국 보건부(Health Ministry) 소속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실제 당시 대한민국 초대 보건부 방역국장은 최영태(崔永泰) 박사였다.10)
고(故) 최영태 박사는 한국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과 산업보건분야 발전에의 공헌으로 잘 알려져 있는 연구자이다. 그는 193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오사카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모교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미생물학 교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과도정부와 대한민국 초대 방역국장직을 역임하고 있었다(대한산업보건협회, 1992: 4-13). 따라서 1950년 406연구소가 한국 내 전염병에 대해 연구하면서 최영태 박사에게 공동연구를 의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06연구소는 그 내부적 연구인력 채용 과정은 물론, 외부 협력연구 과정에서도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극동지역 현지의 연구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심지어 406연구소의 외부 연구협력 요청 대상에는 일본의 평범한 고등학교 생물학 교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406연구소는 일본B형뇌염과 모기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면서, 일본의 메지로고등학교(目白高等学校), 니치다이고등학교(日大高等学校), 도쿄고등학교(東京高等学校), 하쿠오고등학교(白鴎高等学校)의 4개 생물학 교실 학생 100명(학교별 25명)에게 인간흡혈채집(human biting collections)을 요청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감독 하에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 모기 채집을 실시했고, 406연구소는 수컷 모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채집 방법(흡혈)이 충실했을 것으로 평가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170). 이렇듯 406연구소의 일본인들을 향한 연구협력 요청은 실로 전방위적이었다. 406연구소는 1950년 연구활동에 관한 「연간역사보고서」를 통해 야마나시현립의학연구소, 기타사토연구소, 오카야마의학대학(岡山医学大学), 도쿄대학교(東京大学), 토호대학교(東邦大学), 우에노동물원(上野動物園) 등에 직접적인 감사의 말을 전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i). 위의 다양한 연구협력 사례들을 통해 볼 때, 이 같은 감사의 말은 단순한 인사치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3. 개별 연구부서들의 위상과 주요 활동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406의학종합연구소는 1946년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 점령지역의 복잡한 의학문제 해결의 필요성 속에서 신설된 이 지역의 중핵의학연구소였다. 406연구소는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극동지역 병원들과 의학실험실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전염병, 위생, 진단 실험을 추가적으로 지원하고, 의료 장비를 완벽히 갖추지 못한 의료시설들의 의학적 결정을 대행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간주하고 있었다. 특히 미군의 군사력 유지에 필요한 의학적 문제들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 같은 임무는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더욱더 중요해지면서 연구소 주요 업무들 또한 전쟁 전후로 적잖은 변화를 겪었다. 이번 장에서는 406연구소의 조직 구성과 부서별 주요 연구활동을 중심으로, 앞서 언급한 ‘중핵 연구소’로서의 역할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더불어 한국전쟁의 발발이 406연구소 조직 구성이나 부서별 연구내용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겠다.
406연구소는 1946년 5월 최초로 수립될 시기에는 1개의 행정부서와 6개의 전문 연구부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구소의 초대 사령관은 윌리엄 타이거트(William D. Tigertt) 중령이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8: 11). 타이거트 중령은 1940년 미국 텍사스 육군병원에서 군 경력을 시작한 의학박사로서, 406연구소 지휘관 취임 이전부터 태평양 지역 미군 의학 실험실을 통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신설 당시 406연구소의 전문 연구부서는 바이러스・리케차부(Virus and Rickettsial Section), 세균학부(Bacteriology Section), 의학동물학부(Medical Zoology Section), 혈청학부(Serology Section), 병리학부(Pathology Section), 화학부(Chemistry Section)의 6개 부서로 구성되어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8: the last page).
이 같은 구성은 1949년 곤충학부(Entomology Section)의 신설에 의해 총 7개 연구부서로 늘어났고(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0a: 162),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전체 조직을 행정부(Administration Section), 병참부(Logistics Section), 전문연구부(Professional Section)의 3개 부서로 나눈 후, 기존의 모든 연구부서들을 전문연구부 밑의 ‘과’(department) 체제로 재편했다. 이 같은 조직 개편은 아마도 “연구소의 임무와 책임이 모든 측면에서 증가”(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i)한 1950년의 현실을 반영한 듯하다. 실제 406연구소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부상자들을 위한 혈액의 조달과 공급, 의학연구인력 전장 배치 등과 같은 병참‧행정 부분의 업무량 폭증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1951년 406연구소는 한국의 전장에서 발생하는 특정 전염병에 대한 전문적 조사와 실험 결과 제공을 위해 전염병학과(Epidemiology Department)를 추가적으로 신설하기도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1). 이상의 조직 변화를 반영한 한국전쟁기 406연 구소의 조직도는 아래의 <그림 2>와 같다.
그러면 이제 406연구소의 개별 연구분과들의 위상과 주요 연구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각 연구분과의 구체적 활동은 극동지역 중핵 연구소로서 406연구소의 위상을 생생하게 보여줄 것이다.
우선 병리학과부터 살펴보자. 병리학은 병의 성립 원리와 본질을 연구하는 의학분야로서, 우수한 실험기기와 연구진을 갖춘 406연구소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더 강조된 연구분과였다. 실제 406연구소 병리학과는 「육군 규정 40-410」(Army Regulations 40-410)과 1947년 「극동군 GHQ 회람 69」(GHQ, FEC Circular 69)를 통해, “일본, 한국, 마리아나-보닌제도 사령부에 위치한 모든 병원들의 조직병리학과 센터 역할을 수행”(functions as a histopathology center for all hospitals in Japan, Korea, and the Marians-Bonin Command)할 것을 직접적으로 지시 받았다. 미군은 406연구소 병리학과로 하여금 극동 점령지역의 “모든 병원들”에 대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법령으로 강제하기까지 했던 것이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84).
406연구소 병리학과의 주요 활동 및 여타 의료기관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위와 같은 중심적 역할의 내용과 성격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전 시기 406연구소 병리학과의 반복적 일상업무는 ‘인간 신체에 대한 부검’, ‘외과수술 표본 검사’, ‘기타 검사’ 등으로 크게 삼분되었다. 이를테면 1948년에는 인체 부검 393건, 외과수술 표본 검사 2,709건, 기타 검사 2,245건 등 총 5,347건의 검사를 수행했고, 한국전쟁기인 1951년에는 인체 부검 807건, 외과수술 표본 검사 7,206건, 기타 검사 571건 등 총 8,584건의 일상적 검사업무를 진행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84;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74). 특히 1950년에는 전투 중 부상에 의해 사망한 시신 125구와 절단된 사지 75개를 제공받아 그에 대한 완전한 부검이나 조직 검사를 실시하기도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127). 이렇듯 1950년 부검을 위해 제공된 미군 ‘전투부상 사망자’ 시신의 수(125구)만 보아도, 406연구소에 대한 신뢰와 의존도가 얼마나 컸는지 확인할 수 있다.
406연구소 병리학과와 여타 의료시설 사이의 인적교류나 연락방식은 406연구소의 위상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준다. 병리학과가 일본의 지방 의료기관 종사자들을 위해 매주 개최한 임상병리검토회(CPC, clinicopathological conference)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임상병리검토회는 도쿄 지역의 두 병원에서 매주 진행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발표된 사례 평가 자료는 일종의 교육 자료로서 일본 내의 병원들은 물론 한국의 의학기관과 병원들에도 배포되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149;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116;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3: 214).
심지어 406연구소 병리학과는 1952년 12월 일본인 병리학자들과 도쿄에서 미일병리학자협회(Society of Japanese and American Pathologists)의 조직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406연구소는 일상적 회의를 통한 미・일 병리학자들의 단순 업무협력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인적 네트워크의 형성과 중장기적 지역 의학 발전까지 도모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1953년 1월 27일 협회의 개회 세미나가 열렸는데, 11명의 406연구소 병리학자들과 12명의 일본인 병리학자들, 2명의 요코스카해군병원 병리학자들이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3: 214). 406연구소 병리학과는 극동지역 병리학 분야의 리더 역할을 자임하면서, 일본 현지 연구자들과 중장기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406연구소 혈청학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혈청학과 또한 미군 점령기 일본의 특수한 상황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 연구부서였다. 점령 초기 일본에서 406연구소 혈청학과의 역할이 주목받은 이유는 미 점령군 내의 급속한 매독 확산과 관련되어 있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46년 미 8군 부대원의 70%가 매독에, 50%가 임질에 감염되었을 정도로 미 점령군의 성병 감염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급부상했다. 일본 점령 초기, 미군은 특수위안시설협회(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를 통한 병사들의 공적 매춘 행위를 허가했지만, 1946년 1월 해당 지령을 철폐해야 할 정도로 미군의 성병 피해는 심각한 것이었다(존 다우어, 2009: 156).
이에 미 점령군은 “일본 내의 모든 병원들”(all hospitals in Japan)로 하여금 매독 양성 의심 판정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혈청을 “어떤 경우에든”(on any cases) 406연구소 혈청학과에 의무적으로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미군에 직접적 타격을 주고 있던 매독의 확산을 막겠다는 점령군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406연구소는 당시 미군 병력 유지에 매우 중요했던 성병 검사에 있어서도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실제 혈청학부는 1948년에만 63,237건에 달하는 매독 혈청 검사를 진행해야만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35).
혈청학과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또 다른 중요 역할을 부여받았다. 전쟁 부상자들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혈액의 조달과 공급의 역할을 총괄적으로 지휘하게 된 것이다. 당시 406연구소는 독립 부서로서 혈액 조달을 담당하는 혈액은행저장창고부(Blood Bank Storage Depot and Shipping Section)와 혈액 분배를 담당하는 혈액은행저장창고운송부(Blood Bank Storage Depot and Shipping Section)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406연구소 혈청학부가 이 독립부서들에 대한 지휘와 전반적인 혈액 운영실태 점검을 책임지게 되었던 것이다. 전장에 공급되는 혈액은 미국 본토와 일본에서 조달되었는데, 1951년의 경우 혈액은행에 접수된 혈액의 약 76%인 129,209파인트의 혈액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았고, 나머지 24%에 해당하는 38,772파인트의 혈액을 일본에서 조달받았다. 406연구소는 혈액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대민 홍보활동은 물론, 혈액 재고의 유지를 위한 다양한 조치도 지속해야만 했다. 406연구소는 전쟁기 병력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혈액 조달과 공급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282-287).
406연구소의 또 다른 연구전문부서인 화학과 또한 “극동군사령부의 화학 실험실”, “극동군사령부의 분석적 화학 실험실” 등으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극동지역에서 또 다른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46;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159). 화학과의 업무는 그 기능적 측면에서 임상화학, 식품화학, 독성학, 물 분석, 알레르기 조사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를테면 화학과는 임상화학 부분과 관련하여, “실험장비가 충분하지 않은 병원 단위들”에 의해 제출된 임상표본(혈액, 소변, 척수액, 대변) 분석 업무를 수행했다. 실제 표본은 “인근 병원들”로부터 매우 자주 제공되었다. 또한 화학과는 독물학 분야와 관련하여 일본, 한국, 마리아나-보닌 제도로부터 제출된 부검 조직에 대한 독물 분석을 수행했는데, 실제 가장 많은 검사 표본은 연구소 내의 병리학과에 의해 제공되곤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46). 화학과는 다양한 음식물과 주류에 대한 성분 검사도 수행했는데, 한국전쟁기에는 “구내식당 스타일의 형편없는 공정라인”에서 제작된 포로 배급식량에 대한 영양성분, 칼로리, 오염 여부 등을 검사하기도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173).
406연구소 화학과는 “극동군사령부의 화학 실험실”로서 화학적 실험을 통한 다양한 허가 및 판정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1948년 일본의 국회의원들은 미국의 대규모 DDT 사용에 대응하여 일본산 살충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지지했는데, 해당 일본산 살충제 7종에 대한 평가 업무 또한 406연구소 화학과에 일임되었던 것이다. 화학과는 해당 살충제에 대한 분석 이후, 그 모든 제품들이 일본 의원들의 주장과는 달리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의 제품이라고 최종적으로 판정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50). 406연구소 화학과는 일본 의회 주장과 관련된 화학적 실험과 판정 업무까지 수행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406연구소 세균학과에 대해 살펴보겠다. 세균학은 기본적으로 세균의 종류, 형태, 성질, 분포, 변이 등을 연구하는 학문분야로서, 406연구소 세균학과는 진단의학세균학, 물과 음식의 세균학, 분변 연구, 결핵 진단, 생물검정, 생물제제 생산 등의 하위 업무분과들로 구분되었다. 세균학과는 1948년 한 해 동안 25,379건의 표본에 대한 일상적 진단 업무를 수행했는데, 여기에는 17,778건의 물 샘플, 559건의 얼음 샘플, 1,948건의 유제품 샘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 2천 개의 대변 표본과 1,037건의 결핵 의심 표본도 연구용으로 제출되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57).
한국전쟁 이전 시기 세균학과 활동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업무들 중 하나는, 1946년 일본 교토 지역의 어린이 62명이 디프테리아 백신 접종 이후 사망한 사건에 대한 조사 활동이었다. 당시 SCAP의 공중위생복지국과 일본 국립공중위생원은 오사카적십자연구원의 잘못된 변성독소 생산에 의해 이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지만, 그를 입증하는 데는 실패한 상황이었다. 이에 교토군정팀은 406연구소 세균학과에 사망한 62명의 어린이들 중 54명에 대한 임상병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디프테리아 변성독소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실험을 진행해 줄 것을 의뢰했다. 406연구소 세균학과는 그 같은 요청에 호응하여, 기니피그 동물실험을 비롯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사건의 정확한 원인 규명을 시도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67-68). 이 같은 연구활동 또한 이 지역에서 406연구소의 중요한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전쟁기 세균학과는 다른 분과들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업무상의 변화를 겪었는데, 가장 큰 변화는 포로수용소 내의 북한군과 중국군 포로들 사이에 세균성이질이 대규모로 급속히 확산된 현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세균학과 연구원들은 연구소에 제출된 배양균으로부터 총 25개 유형의 시겔라균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연구 과정에서 1951년 한 해 동안 7명의 연구원들이 세균성이질에 감염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이들은 해당 업무에 고도로 숙련된 연구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사건을 겪었다고 한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143-145).
다음으로는 406연구소 의학동물학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의학동물학과의 가장 보편적인 일상업무는 미 점령군 병력, 혹은 미군에 의해 고용된 현지인들에 대한 대변 검사였다. 일본인과 한국인들의 기생충 감염 비율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기생충 억제 활동 또한 점령군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의학동물학과는 1948년에만 19,760건의 대변 표본 검사를 실시했는데, 기생충 검사를 받은 일본인의 74.3%, 점령군인의 35.2%가 연충류 및 원생동물 기생충에 감염되었을 정도로 감염률은 매우 높았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1). 의학동물학과의 업무는 다른 연구분과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다양해졌는데, 일제시기 이래 한반도 남부지역의 풍토병으로 알려진 말라리아 감염에 대응하는 것이 의학동물학과의 대표적 신규 연구 업무로 부가되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57-58).
마지막으로 바이러스・리케차과와 1949년에 신설된 곤충학과, 한국전쟁기에 신설된 전염병학과를 함께 묶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이 세 연구분과는 내용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기 406연구소의 연구활동에 관한 본고의 다음 장을 통해 그 연구 사례가 보다 상세히 제시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바이러스・리케차과는 1948년 일본, 한국, 괌 등의 지역에서 일본B형뇌염, 털진드기병, 발진티푸스 등이 유행함에 따라 그 업무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실제 1948년 406연구소 바이러스・리케차과는 SCAP 공중위생복지국의 요청에 따라 전체 33개 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발진티푸스 혈청진단 보체결합실험을 실시했고, 최근 4년 동안 일본뇌염 백신을 접종받은 일본 어린이들의 항체 반응을 총괄적으로 평가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88-151).
1949년 신설된 곤충학과는 바이러스・리케차과 업무의 연속선상에서 모기 및 기타 곤충들과 일본뇌염 유행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심화연구를 수행했다. 앞서 일본 4개 고등학교 생물학 교실 학생들에게 인간흡혈채집을 요청한 분과가 바로 이 곤충학과였다. 곤충학과의 가장 대표적인 일상업무는 연구 대상 곤충의 채집과 식별 작업이었는데, 1950년 한 해 동안 519,201건의 모기 성충 식별, 596건의 모기 유충 식별, 5,015건의 파리 식별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 중 9,423마리의 모기들은 즉각적인 바이러스 분리 검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바이러스・리케차과로 이송되었다. 이렇듯 바이러스・리케차과와 신설 곤충학과는 그 연구 대상과 내용이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160).
그런데 한국전쟁 기간 중 바이러스・리케차과와 곤충학과는 이전의 일본B형뇌염이나 발진티푸스 연구보다 훨씬 중요한 새로운 연구대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는 전쟁에 참여한 유엔군 병사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하고 있던 원인 불명의 괴질인 ‘유행성 출혈열’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미군 전염병 연구자들은 출혈열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설치류, 혹은 그 설치류의 체외기생충을 새로운 괴질의 주요 매개체로 추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이러스・리케차과와 곤충학과에게는 유행성 출혈열 연구의 일환으로서 진드기, 벼룩, 이, 파리와 같은 설치류 체외기생충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게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선 지역 유엔군 병력 사이에서 원인 모를 괴질로 소문나기 시작한 전염병의 원인과 전파경로를 파악하는 중요한 업무가 두 분과에 새롭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406연구소는 전장의 새로운 전염병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1951년 전염병학과까지 신설하게 되었다. 전염병학과의 신설과 한국의 새로운 괴질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4. 대표 연구 사례: 한국전쟁기 유행성 출혈열 연구

한국전쟁기 전선 부근의 유엔군 병력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유행성 출혈열은 급성 발열, 요통, 출혈, 신부전 등을 초래하는 인수공통 바이러스 감염증이다. 1976년 제2종 전염병 유행성 출혈열로 지정되었고, 1983년 WHO에 의해 ‘신증후군 출혈열’(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 HFRS)로 공식 명명되었다.12) 국내에서는 주로 늦가을에 유행하는 풍토성 발열 질환으로서, 현재도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15,000명의 환자가 발생할 정도로 공중보건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질병이다.
본 장은 1946~53년 제406의학종합연구소의 대표적 연구활동 사례로서 이 질병에 대한 연구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유행성 출혈열 연구 활동을 대표적 연구 사례로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전쟁기 406연구소는 다른 분야의 연구역량을 확연히 줄이면서까지 유행성 출혈열 연구에 집중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그에 대한 연구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둘째, 유행성 출혈열 연구 과정은 병리학과, 세균학과, 혈청학과, 곤충학과, 화학과 등 사실상 406연구소 내 모든 연구분과들의 상호 협력 체계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셋째, 유행성 출혈열은 당시 “서구의학계에는 낯선”(unfamiliar to Western medicine) 괴질로서(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256), 그 연구 과정에서 406연구소 내부적으로 제시된 다양한 의학적 가설, 실험을 통한 증명 과정 등을 보다 생생히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상과 같이 406연구소 연구활동의 특징을 보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행성 출혈열’ 연구 과정을 그 대표적 연구 사례로 보여주고자 한다.
우선 한국전쟁기 406연구소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현재적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비교・검토할 수 있도록, 질병의 연구사(硏究史), 원인, 감염경로, 주요 증상 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유행성 출혈열은 1913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한 병원에서 그에 대한 최초 기록이 발견된다. 이후 블라디보스톡과 아무르강 유역에서 계속 발생했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1940년대 소련과 중국의 국경지역에 주둔한 일본군과 소련군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이호왕, 1971: 13; 이재광・황상익, 2004: 170-171). 이 질병은 한국전쟁기 이래 미 육군의 막대한 연구지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중반까지 그 원인균 분리에 실패했으나, 1976년 한국학자 이호왕에 의해 괴질의 원인이 한탄 바이러스(Hantan virus)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다양한 역학적 특징들이 알려지게 되었다(이재광・황상익, 2004: 164).
한탄 바이러스는 주로 들쥐의 72~90%를 차지하는 ‘등줄쥐’(Apodemus agarius)의 배설물에 의해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외로 분비된 건조된 바이러스가 먼지와 함께 공중에 떠다니다가 주로 호흡기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된다. 한국에서는 주로 ‘건조한 시기’인 5~7월, 10~12월에 많이 발생한다. 바이러스 노출 후 2~3주 동안 증상이 없는 잠복기를 거쳐 1~2일 간의 오한, 쇠약감, 식욕부진 등의 전구증상이 나타난 뒤, 갑자기 발열, 오한, 두통, 구토, 복통, 요통, 기타 위장관 증상 등이 나타난다. 3~7일 지속되는 발열기 이후에는 결막 충혈, 입천장 및 겨드랑이 등에 점상출혈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후 저혈압기와 신부전으로 인한 핍뇨기, 발병 10일경에 시작되는 이뇨기를 거쳐 회복기에 도달한다. 현재도 한국에서는 매년 약 400~500명의 감염 건수가 신고되며, 중증 신증후군 출혈열의 경우에는 쇼크와 신부전을 유발하면서 10%의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포털, 2022).
기존 연구는 1951년 최초 발생한 유엔군 감염자수를 800여명으로 제시하고 있지만(이호왕, 1971: 13), 406연구소 보고서는 그 구체적 감염인원을 1,045명(1951년 봄/여름 91명, 1951년 가을/겨울 954명)으로 명시하고 있다. 특히 1951년 봄/여름에는 무려 16.5%(91명 중 15명 사망)에 달하는 높은 사망률까지 기록했다(406th Medical General Library, 1953: 2). 이렇듯 많은 질병 감염자수와 높은 사망률은 당시 미군에게 실질적인 병력상의 타격을 주고 있었다. 한국전쟁기 유엔군사령관 통역관이었던 조성식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유엔군사령관을 비롯한 전투부대 지휘관들이 전투 중에 발생한 부상자 수보다 “괴질”에 걸린 환자 수가 더 많아 날마다 대책회의를 열 정도였다고 한다(이호왕, 1999: 31). 따라서 이 중대한 문제의 원인 규명 임무가 극동지역 중핵 의학연구소인 406연구소에게 하달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406연구소는 1951년 중반 이후부터 유행성 출혈열 연구에 모든 연구분과들의 역량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새로운 질병의 등장은 여타 연구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원인 규명에 “최대한의 노력”(maximum efforts)을 쏟아 부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i). 더불어 406연구소는 새로운 전염병 관련 자료의 체계적 통합과 분석을 위해 전염병학과를 신설하는 결정까지 내리게 되었다.
1951년 신설된 전염병학과는 유행성 출혈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발병한 천연두, 말라리아 등에 대해서도 함께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구분과였다. 그러나 1951년 10월경 유행성 출혈열 관련 사례들이 급증하게 되자, 전염병학과는 즉각적으로 해당 질병 관련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 업무에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선 전염병학과는 중앙 집중화된 데이터 수집의 필요성 속에서 일본 내의 병원들로 후송된 모든 유행성 출혈열 환자들의 자료 수집을 위한 ‘무선보고체계’(radio reporting system)를 만들었고, 한국 내 의료시설에 수용된 유행성 출혈열 환자들에 대해서는 주한 미8군 의무감실의 정기보고서를 통해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이 같은 수단들에 의해 수집된 자료들은 환자들의 이름, 계급, 군번, 인종, 국적, 한국 입국 날짜, 발병 시작일 등의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후 이 환자들은 전염병적 관점에서 자세한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일본으로 후송되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18).
같은 시기 406연구소의 병리학과도 유행성출혈열의 발병기전 분석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병리학과는 1951년 한 해 동안 유행성출혈열로 인정된 60건의 사체를 부검했다. 병리학과는 부검 결과, 사망 사례의 평균적 질병 지속 기간은 8일이었고, 쇼크와 요독증이 가장 빈번한 사망의 이유였다고 보고했다. 임상적으로는 재귀열, 바일병, 급성 사구체 신염, 말라리아 등과 혼동될 수 있는 특징적 패턴이 이어지는데, 이들 중 ‘랩토스피라증’(leptospirosis)과 가장 큰 혼동을 준다고 분석했다. 더불어 병리학과는 출혈 증상이 없는 환자들에 대한 추가적 검토의 필요성을 요청하면서, “유행성 출혈열”이라는 명칭이 “부적절한 명칭”(misnomer)일 수도 있다는 흥미로운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이유로 병리학과는 이 질병에 대해 “병인이 밝혀지지 않은 감염병(유행성출혈열)”[Infectious disease, etiology undetermined (Epidemic Hemorrhagic Fever)]이라고 독자적으로 호명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94-98).
앞서 병리학과가 거론한 ‘랩토스피라증’은 유행성 출혈열과 유사하게, 감염된 동물(주로 쥐)의 소변에 의해 전파되고, 9~10월에 자주 발생하며, 7~12일의 잠복기 이후 갑자기 시작하는 발열, 두통, 오한, 근육통, 황달, 신부전 등이 주요 증상으로 나타나는 질병이다(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연도미상). 이 같은 내용이 유행성 출혈열과 여러모로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406연구소 연구원들도 그 연구 초기에는 랩토스피라증과 관련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곤 했다.
예컨대 이 시기 세균학과는 한국 내 질병 만연 지역의 야생 설치류에서 랩토스피라균을 찾아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수행했다. 세균학과는 약 100마리의 동물들을 검사했고, 그들의 조직을 랩토스피라 검사용으로 배양했다. 그리고 그 중 2건에서 랩토스피라균을 분리할 수 있었다. 세균학과는 이 랩토스피라균을 계대배양하여 새롭게 감염된 기니피그와 햄스터들에 대한 병리학적 연구를 수행했는데, 그들의 폐, 간, 신장에서 주요 병리학적 병변을 발견할 수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98). 같은 해 세균학과는 유행성 출혈열 환자들로부터 160개의 혈액 샘플을 수령하여 375개의 배양균을, 그리고 65개의 소변 샘플에서 186개의 배양균을 운영할 수 있었다. 비록 일부 혈액 배양균이 세균오염되긴 했지만, 이 모든 배양균들은 랩토스피라증 음성을 나타냈다. 이렇듯 세균학과는 여러 반복적 실험 끝에 랩토스피라가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일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배제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152-153).
바이러스・리케차과 또한 “서구의학계에는 낯선”, 혹은 “서구의학계에서 보아온 어떤 독립체와도 다른” 이 질병의 해명에 상당한 연구역량을 집중해야만 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세균학과의 랩토스피라균 발견을 위한 합리적 실험이 실패에 이르게 되자, 바이러스・리케차과 또한 병인학적 매개체 분리를 위한 실험 방향을 새롭게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러스・리케차과는 8건의 해당 질병 환자 부검에서 확보한 간, 신장, 지라의 조직유화액을 흰쥐, 기니피그, 토끼, 원숭이에 접종했지만, 어떤 전염 가능한 실험적 질병도 규명해내지 못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2: 266-267).
이 시기는 설치류의 체외기생충이 유행성 출혈열의 매개체일 수 있다는 의심이 강했던 때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 곤충학과 업무는 설치류의 분포・발생률・생명활동에 대한 연구활동과 함께, 그 체외기생충의 수와 분포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관계를 추적하는 연구에 상당 정도 집중되었다. 곤충학과 또한 여타 연구분과와 마찬가지로, “출혈열 연구의 긴급성”으로 인해 이 연구에 대한 우선적 처리를 강요당했다. 그리고 실제 곤충학부는 1951년 11월과 1952년 4월 한국에서 수집된 진드기, 벼룩, 이 등의 설치류 체외기생충들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에 종사하게 되었다. 곤충학과는 1952년 초 이러한 연구의 직접적 결과로서, 당시 출혈열 분포의 경계로 알려진 지역 내의 설치류 체외기생충 동물상이 그 바깥 지역의 동물상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같은 결론은 설치류 체외기생충이 유행성 출혈열과 무관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고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3: 57, 69-75).
이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951년 중순 이후 406연구소의 여러 분과들은 다양한 가설과 실험들 속에서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을 규명해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대표적 설치류인 등줄쥐를 주요 발생원으로 추정하거나, 설치류 체외기생충의 매개체 가능성을 배제해 나가는 과정 등은 연구소 나름의 중요한 성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더불어 406연구소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을 밝혀내는 데는 실패하긴 했지만, 그 질병의 임상적 발현 과정을 상세히 밝혀냄으로써, 1952년 가을 유행기에는 사망률을 4.2%까지 확연히 낮추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3: 4). 한국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을 맞아 406연구소는 극동지역 중핵 연구소로서 나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5. 맺음말

1946년 신설된 미군 제406의학종합연구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의 새로운 점령지역인 일본, 한국, 오키나와, 마리아나-보닌제도를 망라하는 극동지역의 중핵 의학연구소 역할을 수행했다. 406연구소는 그 의학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에 의해 그 역할과 성격이 제대로 분석된 적이 없었다. 이에 이 글은 406연구소의 설립 배경, 내부의 인적・조직적 구성, 개별 연구분과들의 위상과 주요 연구활동, 한국전쟁기 조직 구성 및 주요 역할의 변화와 대표적 연구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406연구소 설립은 1946년 1월 미태평양군 의무감실 예방의학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제임스 시몬스 준장의 “중앙연구소”(central laboratory) 신설 제안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시기에 참혹할 정도로 피폐해진 이 지역의 의료・보건 상황을 고려하면, 이 같은 중앙연구소의 신설은 매우 당연한 정책 수순처럼 보였다. 실제 미점령군 내부 논의 과정은 매우 빠르게 진척되었고, 1946년 5월 미8군의 「명령서한 5-16」에 의해 공식적 신설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극동지역 중핵 의학연구소 신설 과정이 별다른 논쟁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연구소 인사(personnel) 문제, 즉 이 연구소에서 일할 신규 인력의 채용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중요하게 거론되었던 것이다. 실제 전후 기간 동안 다수의 육군 소속 의사와 과학자들은 본국에서의 더 많은 돈과 자유를 찾아 민간인 생활로 빠르게 복귀하고 있었다. 때문에 아시아 주둔 미군이 우수한 의학 연구인력을 대거 신규 채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에 가까워 보였다. 이에 미군은 점령지 현지의 아시아 연구자들, 즉 불과 1년 전 적으로 대립했던 일본인 의학연구자들을 미군 부대 내에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실제 1947년 말 406연구소의 자체 통계에 따르면, 연구소 전체 212명의 연구인력 중 약 46%에 달하는 98명이 일본 국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406연구소는 일본 국립공중위생원이나 도쿄의 기타사토연구소, 야마나시현립의학연구소, 도쿄대학교 등 연구소 바깥의 일본 연구단체들과도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406연구소의 조직 구성과 부서별 활동 내용은 연구소의 중심적 역할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406연구소는 1946년 최초 수립 시기에는 6개 전문 연구부서(professional sections) 체제로 시작하여, 한국전쟁기 총 8개 연구분과(professional departments) 구조로 확장되었는데, 개별 연구분과들은 법률적・현실적 조건에 의해 모두 자기 분야에서 아시아 지역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406연구소 병리학과는 「육군 규정 40-410」과 「극동군 GHQ 회람 69」를 통해, “일본, 한국, 마리아나-보닌제도 사령부에 위치한 모든 병원들의 조직병리학과 센터 역할을 수행”할 것을 직접적으로 지시받았고, 혈청학과는 미 점령군인들의 성병 감염이 매우 심각한 현실적 문제로 급부상한 상황 속에서, “일본 내의 모든 병원들”로부터 매독 양성 의심 판정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혈청을 수령・분석하는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 외 406연구소의 여타 연 구분과들도 모두 자기 분야에서 위와 같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본고의 마지막 장에서 살펴본 한국전쟁기 유행성 출혈열 연구 또한 위와 같은 극동지역의 긴급하고 중요한 임무수행의 연속선상에서 그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406의학연구소의 설립과 운영은 미국의 동아시아 점령 및 냉전 정치사적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미국은 20세기 초부터 소위 ‘과학적 의학’이 그들의 점령지에서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카네기 재단과 록펠러 재단의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의학연구소’ 수립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이종찬, 2004: 127~133). 실제 406연구소의 설립 과정에 개입한 샘스 GHQ 공중위생복지국장은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정수”(the essence of democracy)인 의학기술의 보급에 의해 일본인의 평균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공연히 강조하고 있었다(Sams, 1952: 564~565). 406연구소의 신설은 냉전이라는 국제질서의 급속한 재편 상황 속에서, 미국이 과학적 지식생산을 통해 극동아시아의 최전선을 어떤 방식으로 구축하려고 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406연구소와 관련된 추후의 중요한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Notes

1) 406연구소는 일본에서 ‘第406医学総合研究所’로 공식 표기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대표적 학술논저 검색 사이트인 CiNii (https://cir.nii.ac.jp/)와 일본 국회도서관 홈페이지(https://ndlonline.ndl.go.jp/)에서 ‘第406医学総合研究所’ 및 ‘406部隊’ 등의 연관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불과 2건의 타블로이드 잡지 기사만이 발견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건의 잡지 기사 또한 406연구소와 한국전쟁기 세균전의 관계에 대한 검증되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음모론적 기사에 불과했다. 해당 잡지기사는 다음과 같다. 「アメリカ細菌部隊の正体を探る―神奈川県相模原「406」部隊の任務」, 『週刊読売』(1965. 9); 「米細菌戦部隊406部隊と旧日本軍731部隊が朝鮮戦争で協同した細菌戦の系譜」, 『財界にいがた』(2020. 7).

2) James Simmons, “Letter from Brigadier General James S. Simmons,” 9 January, 1946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ii에서 재인용)

3) https://www.ncpedia.org/biography/simmons-james-stevens [William Powell ed., Dictionary of North Carolina Biography: Volume 6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16)에 수록된 내용]

4) Headquarters Eighth Army, “Letter Order Number 5-16,” May 7, 1946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49: ii에서 재인용).'

5) 미국 의료계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조할 수 있다. Paul Starr, The Social Transformation of American Medicine (New York: Basic Books, 1982).

6)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중국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세균전 실험과 전후 미국의 관련 정보 획득 시도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이 자세하다. Sheldon H Harris, Factories of Death (Routledge, 2002).

7) 406연구소 내의 일본인 수는 1947년 98명에서 1949년 89명으로 약간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전체 구성원의 50%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0b: 1).

8) 실제 학술지에 수록된 두 연구의 논문 정보는 다음과 같다. L. S. Ritchie, G. W. Hunter III, C. Pan, M. Yokogawa, K. Nagano, J. T. Szewczak, S. Asakura, Y. Hishinuma, M. Shimizu, “Parasitological Studies in the Far East VIII. An Epidemiologic Survey of the Tone River Area, Japan,” Japanese Journal of Medical Science and Biology 6-1 (1953), pp. 33-43; R. P. Elrod, K. Okabe, A. C. Sanders, R. L. Hullinghorst, “The Group Phase of Shigella Paradysenteriae Type W: Its Isolation from Man,” The Journal of Immunology 65-4 (1950), pp. 375-382.

9) 해당 보고서는 『미국열대의학저널』(American Journal of Tropical Medicine)에 투고되었으나, 실제 게재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3년 뒤 이 보고서의 검토자였던 세이치 토시오카가 오히려 관련 연구성과를 미국학계에 성공적으로 발표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406연구소의 관련 보고서와 1953년 토시오카의 논문 정보는 다음과 같다.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The Bloodsucking Insects, Mites and Ticks of Korea: And their Relation to Disease Transmission,” (1950); E. W. Jameson, Jr. and Seiichi Toshioka, “Shunsennia tarsalis, a new genus and species of chigger from Korea (Acarina: Trombiculidae),” Proceedings of the Biological Society of Washington 66 (1953), pp. 88-92.

10) 406연구소와 최영태 박사의 공동연구 논저는 다음과 같다. R. L. Hullinghorst, K. F. Burns, Young Tai Choi, et. al., “Japanese B Encephalitis in Korea: The Epidemic of 1949,” 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145-7 (1951), pp. 460-466.

11) “Dr. W. D. Tigertt, medical professor at UM, dies at 76,” The Baltimore Sun, Jan. 22, 1992; “Obituaries: Dr. W.D. Tigertt, Army doctor, professor,” The Evening Sun, Jan. 22, 1992.

12) 이 질환은 한국전쟁기에는 주로 미군에 의해 ‘유행성 출혈열’(epidemic hemorrhagic fever)로 호명되었고, 현재도 통상적으로 ‘유행성 출혈열’, ‘한국형 출혈열’(Korean hemorrhagic fever)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 당시의 역사성을 반영하여 ‘유행성 출혈열’과 ‘신증후군 출혈열’을 문맥에 맞게 혼용하도록 하겠다.

그림 1.
제406의학종합연구소의 일본인 연구원들
Figure 1. Japanese Researchers at the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kjmh-31-3-721f1.jpg
그림 2.
한국전쟁기 미군 제406의학종합연구소의 조직도
Figure 2. Organization Chart of the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of the U.S. Army during the Korean War
kjmh-31-3-721f2.jpg

References

1. “Dr. W. D. Tigertt, medical professor at UM, dies at 76,” The Baltimore Sun, Jan. 22, 1992.

2. “Obituaries: Dr. W.D. Tigertt, Army doctor, professor,” The Evening Sun, Jan. 22,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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