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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한국의 DDT 저항성 몸니와 살충제 저항성 지식의 형성†

Abstract

DDT exemplifies success and failure of modern science and technology. Once it was heralded as technological wonder that will deliver human from misery of insect-borne infectious disease. However DDT took dramatic downturn after failure in global malaria eradication program initiated by World Health Organization, with advent of DDT-resistant strain of mosquitoes. Although insecticide resistance has been know since late 19th century, the definitions and mythologies for finding resistance has not been settled until 1950s. This paper argues that discovery of DDT-resistant strain of body lice in prisoners of war camp in Korea during the Korean War provided essential knowledge and opportunity for advancing insecticide resistance studies.
Since 1945 to the end of Korean War, US Army sprayed thousands of tonnes of DDT on Korean body and soil. DDT was only went into wide field application since 1943, was still a very new technology. The ways to deliver and utilize DDT was still under the investigation. And Korea, especially during the War, was ideal place to construct such knowledge and place it in the application. The main focus was to control public health threats, such as louse-borne typhus fever. Korean soldiers and prisoners of war exposed to regular dose of DDT, which soon gave rise to DDT-resistant strain of body lice. It was the first major outbreak of insecticide-resistance appeared in insect that has major public health importance. Until early 1950s, mechanisms of resistance, or even definition of insecticide resistance was unclear. Researchers in US Army and Department of Agriculture rushed to find the ways to quantify insecticide resistance. Network of laboratories, connecting Korea-Japan-US, had to devise new laboratory methods to rear, and test body lice. These body lice later migrate to laboratories in US, providing valuable asset for future insecticide resistance research in US. At the same time, laboratory methods of testing resistance in body louse became a standard across the globe, setting new research agenda through World Health Organization. This shows flow of knowledge, along with migration of body louse, during the Korean War. At the same time, this case show who new knowledge is constructed through the expense of involvement of minority populations, such as natives, soldiers, and prisoners of war.

1. 서론

역사상 최초로 상용화된 유기합성살충제 DDT1)는 이차대전 이후 핵폭탄에 비견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동시에 과학기술의 힘을 전세계에 알린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다. 인간은 핵폭탄이라는 전대미문의 파괴적인 힘을 얻은 것과 동시에, DDT라는 살충제를 통해 전염병이라는 인류의 천형을 벗어날 수 있는 힘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DDT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차 대전 종전 후 광범위하게 살포된 살충제들이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1960년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통해 알려지며, DDT는 현대 과학기술 발전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임경순, 1996: 99-100). 또한 말라리아와 같은 곤충매개질환을 DDT와 같은 저가의 살충제를 이용해 박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1955년 DDT 살포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시작한 세계말라리아박멸사업(Global Malaria Eradication Program)은 살충제 저항성 모기의 등장과 함께 불과 10년 만에 실패로 끝을 맺었다(Packard 2007: xiv-xv).
현대 과학기술사에서 그 흥망성쇠를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DDT는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주목 받아왔다. DDT와 관련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분야는 환경사이다. DDT와 같은 살충제의 남용이 생태계의 광범위한 파괴를 불러오고 있음을 밝힌 1962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발간은 학계 뿐 아니라 대중적인 관심으로 이어지며 세계적인 환경운동을 촉발시켰다(카슨, 2011). 환경사 분야의 후속 연구들은 인체에 완전히 무해하며 놀라운 살충 효과를 보이는 ‘현대 과학의 기적’인 DDT의 모습이 정부와 전문가들의 주도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DDT의 생태적 영향이 이미 1950년대부터 잘 알려져 있었으나, 전후 농업생산성 증대를 위한 기업과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며 그 활용 범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위험은 과소평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Whorton, 1974; Dunlap, 1981).
DDT가 의학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은 이차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국제적 보건의료 사업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인 기술 중 하나라는 점 때문이다. 말라리아의 역사를 다룬 패커드(Packard, 2007:150-216)는 냉전이라는 지정학적 배경에서 1955년부터 1965년까지 전개된 세계말라리아박멸사업을 분석하며,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DDT와 같은 신기술이 국제사업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반대로 질병 예방을 위한 지역사회 개발 등의 근본적인 조치들은 배제되었음을 비판했다. 동시에 DDT라는 단일한 기술적 해법에 사업이 치중되며 DDT 저항성 모기의 출현이라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은 세계보건기구의 가장 야심찬 사업 중 하나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한국 의학사에서도 DDT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임하(2020)는 미군정기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미군에 의해 전염성 질병의 통제 목적으로 “전 한반도의 DDT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세밀하게 살폈다. 당시 한반도의 주요 감염병을 매개하는 모기, 몸니, 진드기 등이 DDT 살포의 대상이 되었다(이임하, 2020: 133-170). 여인석(Yeo, 2015: 35-65)은 미군정기 말라리아 관리 사업에서 DDT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분석하였으며, 다른 전염병 부분에서도 한국전쟁을 전후해 DDT 살포가 발진티푸스, 일본뇌염을 옮기는 매개 곤충 관리에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음이 밝혀져왔다(대한감염학회, 2018: 33-36; 여인석, 2020: 242-248).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피란민과 귀환자들, 전쟁포로와 군인들을 대상으로 검역이라는 명목의 DDT 살포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질병 통제의 목적을 지닌 것과 동시에 미국의 과학적, 기술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더럽고 병든 아시아인의 몸을 정화’하는 사물이기도 했다(Aldous, 2011: 102).2)
이러한 선행연구들은 DDT가 어떻게 활용되었고, 또한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앞서의 연구들, 특히 의학사 분야에서의 연구들이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부분은 DDT가 군대를 넘어 민간에까지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1945년의 DDT는 대단히 새로운 기술이었다는 점이다. 1943년 미군에 의해 질병 통제 목적으로 DDT가 처음으로 대량 살포되기 시작했음을 고려하면, 해방 후 한국에서 DDT는 현장에 적용된지 불과 2년여 밖에 지나지 않았다(와이즈너, 2022: 115). 특히 식물성 혹은 무기물에 기반한 원료가 아닌 유기합성용제로 만들어진 살충제는 DDT가 역사상 최초였으며, 동시에 질병 관리 사업에서 살충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 역시 이차대전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DDT와 같은 유기합성살충제라는 기술, 그리고 그 활용과 결과에 대한 지식은 1950년대까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코니스(Conis, 2022: 324-326)는 미국 DDT의 문화사를 추적하며 “과학의 기적”으로 묘사되던 DDT가 『침묵의 봄』 발간으로 한순간에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몰락하는, 즉 DDT를 시작부터 일종의 완성된, 혹은 안정화된 기술이자 사물로서 다루는 전통적인 서술을 문제 삼았다. 1944년 DDT 개발 및 활용 초기부터 인체 축적 및 장기노출에 따른 독성이 이미 학계에 충분히 알려져 있었으나, 전시 총동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부가 이를 의도적으로 묵살했음을 지적했다. 또한 『침묵의 봄』의 발간이 환경운동에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1960년대 후반 전세계적인 DDT 사용 금지라는 광범위한 합의와 제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는 DDT와 같이 특허가 만료되어 저소득국가에도 보급될 수 있는 저가의 살충제를 보다 고가의 새로운 살충제로 교체하고자 하는 농약 회사들의 이해관계와 지지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어, 과학의 기적에서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이어지는 DDT를 둘러싼 단선적 역사 서술의 문제를 드러냈다.
이임하(2020: 151-152)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한국전쟁 시기는 이러한 광범위한 DDT 살포가 이루어지는 보건의료 사업 현장임과 동시에,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DDT가 매우 광범위하게 활용되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 이 시기의 DDT라는 기술은 이미 완전히 안정화된 일종의 ‘블랙박스’로 간주되곤 했다.3) 따라서 DDT의 활용,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계속해서 도전받아 왔고 변화하는 과정에 있었음을 포착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DDT가 한반도 전역에 배포되고 사용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전 한반도의 DDT화”는 보건학적 차원에서의 실행이 아닌, 여전히 불안정한 기술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방 직후부터 한반도에서 그렇게 많은 DDT가 사용되었다면, 그 사용 과정에서 생산된 지식과 경험들은 과연 미군, 나아가 국제적인 살충제 연구 및 지식 형성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또한 한반도에서 생산된 DDT 관련 지식들은 과연 이후 공중보건 차원에서의 살충제 사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논문에서는 한반도에서 DDT가 활용되었던 시기가 세계적으로도 DDT 사용의 초기 단계였음에 주목한다. DDT의 제조와 살포 방법, 이후 살충제에 대한 곤충들의 저항성 획득까지 합성살충제에 관련된 지식들은 완전히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DDT라는 새로운 기술의 지식들을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독특한 지정학적 배경에서 미군이 어떻게 확보했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그 주요한 사료로서 미군이 발간한 연구 보고서들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식들을 확보했고, 또한 어떻게 확보하고자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한반도에서 유기합성살충제라는 새로운 기술과 과학기술적 사물이 집중적으로 적용되고, 그 생태적 결과물로서 저항성 곤충이 나타나는 과정을 추적한다. 또한 저항성 곤충에 대응하기 위한 현장 연구로 축적된 지식들이, 미국과 한반도를 넘어 국제적인 저항성 연구와 개념의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DDT 개발과 초기 활용 경험의 축적

한반도에서 상업적으로 제조된 살충제가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이 시기에는 제충국(pyrethrum)이라는 생물학적 제제가 주로 사용되었다.4) 제충국은 국화과에 속하는 식물에서 추출할 수 있는 물질로, 꽃에 살충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그 꽃을 분말로 만들면 살충 효과를 보였다(히펠, 2022: 238). 원산지는 페르시아와 달마시아 지역으로, 1860년대 미국과 유럽으로 전파되어 주요한 살충제로 자리 잡았다. 일본은 1881년 영국에서 종자를 들여와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1910년대 제충국 재배에 적합한 환경을 지닌 북해도에서 생산을 시작하며 1930년대 세계에서 가장 큰 제충국 생산국이 되었다(채의수 외, 2014: 40). 일본산 제충국의 가장 큰 수출처는 미국으로, 전간기 미국의 제충국 수요 90%는 일본에서 조달되었다(Gnadinger, 1936: 17).5)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제충국이 군수물자 중 하나로 분류되며 일본에서 생산된 제충국은 대부분 일본군에 비축되었다. 더불어 예부터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보건문제 중 하나로 간주되었던 발진티푸스(typhus fever)의 매개체인 몸니(Pediculus humanus humanus)를 제충국으로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6)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과 일본의 교역이 단절되자 제충국을 대체할 살충제가 필요해졌으며, 미 국방부는 전선에서 병사들을 곤충 매개 질환에서 보호할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1941년 미국 국방부와 농림부는 공동으로 올랜도에 위치한 미국 농림부 산하 미국 곤충 및 식물 검역소 올랜도 연구소(Orlando Laboratory of Bureau of Entomology and Plant Quarantine, 이하 올랜도 연구소)7)에 자금을 투자해 전쟁 중 흔히 발생하는 곤충 매개 질환에 대해 군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 스위스에서 개발된 DDT였다.8)
1942년 11월 연합군이 알제리로 진주하자 새로운 연구 공간이 열렸다. 지중해 인근에서 알제리는 티푸스 유행이 가장 심한 지역 중 하나였으나, 당시 도입된 백신은 예방효과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Stapleton, 2005: 529-530). 1943년 7월 록팰러재단 연구진은 알제리의 한 감옥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직접 DDT의 효과를 측정했다. DDT는 기존에 주로 사용되었던 영국제 제충국과 그 효과성을 비교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높은 살충력과 지속성을 보였다.9)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군이 탈환한 나폴리에서 발진티푸스가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43년 12월부터 1월까지 나폴리 전역에 살충제 분무반이 설치되었고, 6-20명으로 구성된 분무반은 하루 5,000명 이상을 처리했다. 1944년 3월까지 총 225만 명 이상이 살충제 분무를 받았다(Leary et al, 1946: 68-69). 연합군은 먼저 비축하고 있던 제충국을 활용해 방역 사업을 시작했고, 1943년 12월 유행이 한풀 꺾여가던 시점에 DDT가 도입되었다. 나폴리 방역 사업 초기에 도입된 살충제는 영국제 제충국이었다. 연합군 방역 담당자는 제충국이 먼저 “유행의 허리를 끊어” 놓았고 DDT가 도입된 것은 그 이후라고 회고했지만(Harris, 1957: 422), 나폴리 발진티푸스 차단의 공은 DDT에게 돌아갔다. 새로운 기술력의 승리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연합군의 의도였다(Bailey, 2022: 251-252).
실험실과 현장에서 모두 확인된 바대로 DDT의 살충 효과는 놀라웠지만 문제는 공급이었다. 새로 개발된 물질이었기 때문에 이를 생산할 수 있는 업체가 많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는 DDT는 군에서의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다. 1943년 11월 미군이 화학회사에 요청한 공급량은 월간 175톤에 달했지만, 실제 생산량은 10%에 불과한 17.5톤에 불과했다(Russell, 2001: 147). 미국 정부는 특허를 한시적으로 개방해 전쟁 물자로 공급하는 DDT에 대해서는 특허권 행사를 정지시켜주었다. 이에 미국 굴지의 화학 기업들 뿐 아니라 영세한 공장들도 생산에 뛰어들어 1944년에는 11개 기업 14개 공장에서 DDT가 생산되었다. DDT의 제조 공정 자체는 비교적 단순해 간단한 시설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Conis, 2022: 51-53). 1943년 말부터 미국 곳곳의 생산 공장에서 DDT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전량 군에서 매입했다.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군에서의 수요를 전부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DDT 판매는 민간에 허용되지 않았다(Leary, 1946: 61). 1945년 6월 종전 직전 미국 내 월간 DDT 생산량은 1,500톤에 달했다(Russell, 2001: 161).
이차대전 중 비축된 미군의 DDT 중 상당량은 해방 직후 한국과 일본 등 미군정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10) 특히 말라리아나 발진티푸스는 미군에게 전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즉각 대응해야 할 질병으로 간주되었다. 각각의 질병은 모기와 몸니로 옮겨지는 곤충매개질병이었으므로, DDT는 곧 핵심적인 보건학적 도구가 되었다.11) 이차대전 종전 후 1945년 10월 1일부터 1946년 12월 31일까지 미군 해상 수송 작전을 통해 태평양 지역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인구만 650만 명에 달했다(MacArthur, 1966: 191-193). 해방 후 재조일본인이나 재일한국인들은 귀환 중 입출국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DDT 살포와 백신 접종을 받아야 했다(김정란, 2021:8). 이차대전 중 나폴리에서 활용된 이후 전후 서구에서는 상대적으로 드물어진 DDT의 인체 직접 살포가 한국과 일본에서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보건의료 사업을 통해 막대한 양의 DDT가 사용되었고 미군을 통해 과실수에 사용할 수 있는 분량도 일부 배포되기 시작하며, 한국에서도 DDT는 일상적인 물품이 되었다(허검, 1946: 59). 미군과 민사처의 계획은 남한 전체 가구의 10%에 DDT 잔류 분부를 수행하고, 전 인구의 20%가 최소 2회에 걸쳐 50g씩 DDT 살포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12) 가정 내에 살포하는 경우에는 등유에 DDT를 녹여 사용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등유에 희석된 DDT를 발진티푸스 방제용으로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희석 및 살포 과정에서 화재가 날 수도 있었으며, 기름에 용해된 DDT의 경우 사람의 체내로 쉽게 흡수되었기 때문에 중독의 위험도 있었다.13) 하지만 물에 녹지 않는 DDT의 화학적 특성상 사람들에게 직접 살포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활석(talc)에 DDT를 혼합하여 분말 형태로 분무하는 방법이 널리 활용되었다.14)
한국과 일본은 전후 미군에 남아 있었던 막대한 DDT 재고를 처리하는 역할을 했다(Conis, 2022: 54-55).15) 1950년 미군에서 조사한 내역에 따르면 미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공급된 DDT는 대부분 1944년에서 1946년까지 이차대전 종전을 전후하여 생산된 오래된 재고품들이었다.16) 더불어 1945년을 전후로 DDT 보급 초기에 생산된 원료들은 품질관리에 문제가 있었다. 생산 및 보관에 대한 표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생산 업체에 따라 품질에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1949년까지 점진적으로 원료 물질의 함량, 성상 및 표준적 품질 검사법이 개발되었다(WHO, 1950: 4-8). 동시에 한국과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미군은 이차대전 이후 DDT 연구를 내부적으로 지속해갈 수 있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대규모 수송 작전을 수행하며 수백만 명의 귀환자 전원을 대상으로 한 DDT 살포는 기존에는 시행된 적 없는 규모의 적용 사례였다.17)
미군정기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DDT는 계속해서 널리 사용되었지만, 한국전쟁의 발발은 DDT의 수요와 활용을 폭발적으로 확대시켰다. 특히 대규모 포로수용소는 발진티푸스가 퍼지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발진티푸스 예방을 위한 몸니 통제는 미군 관리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으며 정기적인 DDT 살포가 시행되었다(성강현, 2021: 201-202). 대부분의 포로들은 입소 시에 DDT 살포를 받고, 이후 월간 최소 1회 이상의 DDT가 살포되었으며, 매번 50g 이상의 5% DDT를 살포하도록 했다.18) DDT의 잔류 효과가 매우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용소 내 포로들과 몸니들은 계속해서 막대한 양의 살충제에 노출되어 있었던 셈이었다.

3. 한국 DDT 저항성 몸니의 출현과 실험 기법의 발전

1950년 11월 부산의 포로수용소에서 다량의 DDT 살포에도 몸니들이 잘 죽지 않는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존 문헌에 보고되었던 것보다 DDT 살포 이후 몸니가 사멸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19)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51년 1월 포로수용소에서 사용하는 DDT 분말의 농도를 5%에서 10%로 높이기로 결정했다.20) 처음에 미군은 생산연한이 오래된 재고 DDT의 품질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가능한 최근에 생산된 일본산 DDT 분말을 다시 공급받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실험실에서는 일본에서 다시 생산된 DDT 분말이 몸니에 효과적이라고 언급했지만, 실제 포로수용소에 사용되었을 때는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미국, 일본, 호주에서 생산된 DDT의 샘플을 채취해 미국 의무본부에 보내 효과 확인을 요청했다. 더불어 한국 몸니의 특성 때문인지 확인하기 위해 본토의 연구 시설로 몸니 알들을 수집해 보냈다.21) 특히 미국에서 생산된 DDT 중 다수는 이차대전 중 태평양의 섬들에 보급되었던 것을 그대로 회수해 사용하고 있던 것으로, 보관 및 운송 과정에서 물이 스며들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보고에 따르면 오래된 DDT 중에는 여전히 눅눅한 것들이 많아 사용 전에 꼭 말려서 쓰라는 권고가 포함되기도 했다.22) 하지만 이렇게 젖어있던 DDT 역시 미국에서 한번도 살충제에 노출된 적이 없었던 몸니에는 높은 살충 효과를 보였다. 즉 불완전한 보관 상태에도 불구하고 높은 살충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는 DDT의 잔류 능력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살충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몸니들이 DDT에 저항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미군이 수행한 연구의 결론은 한국의 포로수용소에서 DDT 살포가 24시간 이내에는 몸니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DDT는 즉각적인 살충 효과를 내는 살충제가 아니었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비정상적으로 긴 생존시간이었다. 현장 연구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DDT만으로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몸니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이에 연구진은 한국에서 최대한 많은 저항성 몸니를 채집해, 보다 나은 실험장비가 있는 일본과 미국에서 사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렇게 일본과 미국에서 키워진 한국산 저항성 몸니를 대상으로 새로이 개발되고 있던 살충제들의 효과를 시험하고, 저항의 기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23)
1950년 말에서 1951년 초까지 미8군 산하 의무부대에서는 자체적으로 몸니의 DDT 저항성을 측정하는 실험들을 우선 진행했다. 함대제1전염병관리부대(Fleet Epidemic Diseases Control Unit No.1), 제37예방의학중대(37th Preventive Medicine Company), 제207말라리아조사파견대(207th Malaria Survey Detachment)가 각기 조사 업무를 수행했다. 포로수용소에서 이루어진 현장 연구는 미국 연구자들에게 통제된 환경에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1950년 포로수용소에서만 3,432,000명에게 10% DDT 분말을 살포해 여기에 사용된 DDT 분말만 134톤에 달했다.24)
제207말라리아조사파견대에서 먼저 DDT 분말에 따른 살충력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DDT는 총 24개의 각기 다른 제조사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조 시기와 국가도 천차만별이어서 미국에서 제조된 것은 1943년에서 1945년 사이, 영국에서 제조된 것은 1946년산이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제조사의 살충 효능을 검증하기 위해 별도의 실험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헝겊 시험(patch test)이라 이름 붙여진 이 방법은 약 1인치 가량의 정사각형 옷조각에 DDT를 적신 후 손가락으로 튕겨 분말이 조각에 고르게 분포하도록 했다. 이 조각을 배양접시에 올려둔 다음, 한국인들에게서 수집한 몸니를 각 10마리씩 올려두었다[그림 1]. 이를 캔으로 만든 임시 사육기에 넣고 체온에 가까운 온도를 유지하며, 매 12, 18, 24, 36, 48, 60시간마다 죽은 몸니의 숫자를 확인했다.25) 실험 결과에 따르면 10% DDT 분말을 살포했을 때 모든 몸니가 사멸하기까지 약 34.8시간이 걸렸다. 이는 기존 결과보다 약 11.4시간이 늘어난 결과였다.26)
보다 나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던 제37예방의학중대에서는 1950년 12월 29일부터 별도의 현장 연구를 진행했다. 257명의 새로 입소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외부에서 새롭게 유입된 몸니들도 DDT에 대한 저항성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실험이었다. 품질 문제를 제외하기 위해 미국에서 새롭게 생산된 10% DDT 분말을 살포했지만, 86시간 이후에도 감염률은 26.8% 밖에 낮아지지 않았다. 새로 입소한 사람들에서 채집된 몸니 역시 DDT에 잘 사멸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한반도 전역에 DDT 저항성 몸니가 유행하고 있음을 의미했다.27)
1951년 4월 미군 의무단은 여러 관찰 및 실험 결과를 종합해 보았을 때 한국에 저항성 몸니가 출현한 것이 분명하다고 미8군 본부에 보고했다.28) 이 보고에 따라 미군은 포로들에 대한 DDT 살포를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했다.29) 1951년 6월 18일 미군 연구진은 미8군 본부에 지금까지의 개발된 실험 방법과 한국 몸니의 DDT 저항성 내용을 종합한 보고서를 제출했다.30) 1950년 12월부터 1951년 상반기까지 수행된 이 연구는 크게 3개의 현장 실험과 4개의 실험실 내 연구들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현장 연구는 막대한 양의 DDT를 일시에 살포할 경우 살충효과를 향상시킬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1951년 4월 10일 13시에서 17시 30분 사이 460㎏ 분량의 10% DDT가 수용소 전체에 살포되었다. 생산 지역이나 유통기한의 문제를 배제하기 위해 미국에서 새로 생산하여 직접 수송 받은 DDT 분말이 사용되었다. 모든 포로들을 숙소에서 소개시켜 길에 세워두고,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옷가지 전체에 분말을 살포했다. 이틀 뒤 연구진은 무작위로 선별한 사람들에서 몸니를 채집해 감염률을 살펴보았는데, 여전히 74.4%가 몸니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31) 즉 살포량이나 농도를 높이더라도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두 번째 현장 연구에서는 DDT 조성에 따른 살충 효과를 알아보았다. 분말형의 DDT와 등유에 희석한 DDT에 각기 수집한 몸니들을 노출시켜 보았다. 등유에 희석하는 방식이 조금 더 높은 살충력을 보여주었지만, 분무 후에도 여전히 절반의 사람들이 몸니에 감염되어 있어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즉 제형의 변화와 관련 없이 기대만큼의 살충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었다.32) 세 번째 현장 연구는 분무 주기에 따른 살충 효과를 비교하였는데, 지정된 기간 동안 살충제 노출 총량은 동일하되 분무 주기만 각각 3일과 5일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무 주기의 차이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3)
여전히 저항성 획득 기전이나, 이러한 저항성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이를 위한 실험실 연구를 구성하는 것은 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당시 살충제 저항성 곤충에 대한 정의나 이해가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적 기법들도 충분히 개발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군 연구진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 기법을 개발해야 했다. 미군 연구자들은 미국과 일본, 한국을 잇는 연구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DDT의 화학적 조성 등 다량의 장비를 필요로 하는 기초 연구는 미국 올랜도 연구소가, 몸니의 동정(identification)과 기존 실험실 사육 곤충들과의 비교 연구는 일본 내 미군 실험실이, 한국 몸니의 채집과 사육, DDT 저항성 연구는 한국의 미군 연구자들이 진행하는 방식이었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1951: 47).
1951년 6월 미국 올랜도 연구소 소속 곤충학자 세 명이 한국에 정식 파견되었다(Journal of Economic Entomology, 1951: 352). 미군과 연계하여 의학적으로 중요한 곤충들에 대한 살충제의 효과를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핵심적으로는 한국에서 발견된 살충제 저항성 몸니를 확보하고 그 저항성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미8군 연구진은 올랜도 연구소의 기술 지원을 바탕으로 실험실 내 연구를 위한 기법을 개발했다. 소매 시험(sleeve test)이라 불린 이 방법은 실제 사람에 달라붙어 있는 몸니를 대상으로 살충제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그림 2]. 먼저 헝겊 실험처럼 작게 자른 옷가지 위에 일정 숫자의 몸니를 올려두고, 확인을 요하는 농도의 DDT를 살포한 후 몸니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스타킹을 잘라 만든 주머니로 해당 부위를 덮는 방식이었다. 비교적 단순한 시험법이었지만 인간과 기생충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중에 살충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현실을 잘 반영하는 실험 방법으로 간주되었다.34)
실험 연구들은 첫 번째로 저항성 몸니를 사육할 경우 평균 생존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았다. 상대적으로 장비가 열악한 일선 방역 부대에서 수행한 실험에는 여러 제약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채집한 몸니들을 살려두는 것이었다. 사람에 붙어 살아가는 몸니는 인간의 체온 덕분에 대체로 일정한 온도에서 살아갔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분리하여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경우 급격한 온도차로 애써 수집한 몸니가 전부 죽는 경우도 있었다.35) 한국의 현장 연구에서 몸니 채집과 사육에 대한 경험을 쌓은 미국의 연구자들은 이후 몸니 사육에 대한 표준적인 사육 방법론을 개발할 수 있었다(Smith et al., 1954: 127). 이어 기존 헝겊 실험을 통해 인간과의 상호작용이 없는 상태에서 몸니가 DDT에 얼마나 저항성을 보이는지를 알아보았다. 세 번째 실험은 소매 시험을 통해 몸니와 인간이 상호작용 하는 가운데 몸니의 DDT 저항성이 숙주와 분리되어 있을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지 확인했다. 네 번째 실험은 DDT 이외 다른 살충제에는 한국의 몸니들이 얼마나 높은 저항성을 보이는지 알아보았다.36)
현장과 실험실에서의 연구를 종합해 보았을 때, 한국의 몸니는 DDT의 생산지나 시기와 관계없이 높은 저항성을 보였으며, 0.1% DDT에 적셔진 천조각에 사육할 경우 저항성의 상실 없이 계속해서 사육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다른 살충제들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제충국에는 여전히 높은 민감도를 보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37) 파견된 농림부 연구진의 연구에서 1% 린덴38) 분말과 제충국 분말이 여전히 효과를 보이는 것을 확인했으나, 린덴 분말은 아직 인체 안전성을 검증받지 않은 상태였다.39)
한편 한국에서는 포로수용소 내부 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의 몸니들이 저항성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기존과 같은 DDT 살포로는 발진티푸스를 예방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해졌다. 본격적인 유행 시기가 닥쳐오기 전에 새로운 살충제를 배포해야 했다. 일차적으로 일본을 통해 다시 공급되기 시작한 제충국이 활용되었다. 1951년 10월 일본에서 몸니 방제에 사용할 소량의 제충국 분말이 도착했다. 10월 30일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첫 제충국 분무가 시작될 때 감염률은 58%에 달했으나, 사흘 뒤에는 1.5%까지 낮아졌으며, 11월 2일 두 번째 분무 이후에는 0.5%로 떨어졌다.4) 이후 살충효과를 높이기 위해 DDT를 제충국과 혼합하여 살포하는 방식도 적용되었다.41)
한국에서 포로수용소를 중심으로 DDT 저항성 몸니의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자, 미국 농림부는 린덴의 인체 안전성 시험을 서둘렀다.42) 1951년 11월 농림부는 1% 린덴 분말이 DDT와 같은 형태로 분무 되었을 때 대체로 무해하다고 평가했고, 곧바로 12월 1일 약 50톤 분량의 1% 린덴 분말이 한국에 도착했다. 인체에 1% 린덴 분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한국의 포로수용소가 처음이었다.43) 포로수용소에서 첫 현장 적용이 이루어진 이후 미군과 한국군, 기타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몸니 방제 사업도 린덴으로 교체되어갔다.44) 1951년 11월에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진행되었다(이임하, 2020: 156-157). 1952년부터 몸니 방제를 위한 살충제는 DDT에서 린덴으로 빠르게 교체되었다.45) 린덴은 DDT 저항성 곤충에게도 높은 살충력을 보여주었으나, DDT에 비해 제조 공정이 복잡하고 이에 따라 가격이 높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다량의 살충제가 필요한 항공 살포나 가정 내 잔류 분무에는 여전히 DDT가 활용되었고, 사람의 몸에 직접 살포하는 경우에만 린덴이 활용되었다.
더불어 군인들과 포로들 사이에서 살충제에 대한 신뢰가 낮아진 것도 문제였다. 1951년에 걸쳐 여러 차례 DDT 분말 살포가 이루어졌으나 몸니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한국군과 포로들 사이에서는 살충제가 별 효과가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첫 번째 린덴 살포 직후 “모든 포로들이 죽은 몸니를 양말 한가득 들고 왔다”는 보고가 있었지만,46) DDT의 낮은 효과를 수개월간 경험한 이후 살충제 분무 사업에 대한 참여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Marshall, 1956: 81).
1952년 1월 한국 몸니의 DDT 저항성에 대한 보고가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되었다(Hurlbut et al, 1952). 미8군 산하 함대제1전염병관리부대, 제37예방의학중대 소속 예방의학자들이 저자로 참여했다. 약 한 페이지 분량의 이 짧은 보고에서, 저자들은 상용 DDT 중 가장 높은 농도인 10% DDT 분말을 사용했음에도, 1951년 겨울부터 봄까지 한국군 내에서 지속적으로 몸니 감염률이 높아지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 논문에는 실험에 사용된 DDT의 농도와 한국 몸니를 대상으로 한 살충력, 그리고 미국 올랜도 연구소에서 보유 중인 몸니의 민감도를 비교 제시했다. 이 연구의 가장 큰 함의는 과거 실험실 환경에서 선택 교배를 통해서만 확인되었던 곤충의 저항성 획득이 자연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4. 한국 DDT 저항성 몸니와 살충제 저항성 개념의 국제적 정립

이미 1944년 미군은 곤충학자들에게 의뢰해 DDT가 사람이나 동물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을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이 연구에서 DDT가 해충의 천적을 선택적으로 죽여 오히려 농업 생산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거나, 체내 지방과 우유에 DDT가 축적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Draize et al., 1944: 1503).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위험성 논의를 이분화시켰다. 민간에서의 상시적인 접촉과 군인들이 전선에서 일시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 미군의 주장이었다(Conis, 2022: 28-29).
DDT의 생산량이 늘어나며 1944년 태평양 전선에서는 DDT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으며,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새로운 섬에 진주하기 전에 먼저 비행기로 DDT를 최대한 살포한 후 상륙하는 전술이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DDT가 완전히 안전한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도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살충 효과를 위해 사용되는 농도에서는 사람에게 큰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사이판과 같은 섬에 다량으로 DDT를 살포한 뒤 상륙한 군인들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Curran, 1945: 441). DDT의 강력한 살충 효과는 섬의 곤충 뿐 아니라 소형 파충류나 조류까지 말살시켰다.
이 때문에 이차대전 종전 직후 DDT는 핵폭탄에 비견되었다(Curran, 1945: 432). 전쟁 중 일어난 눈부신 과학기술적 발전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했지만, 핵폭탄이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살충 능력 때문에 생태계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차대전 종전 이후 보건의료 분야뿐 아니라 농업 전반, 지역적으로도 세계 곳곳에서 DDT가 사용되며 점차 DDT가 생각처럼 만능이 아닐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의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Stafford, 1944). 특히 살충제로서의 효과에 있어서는 만능으로 여겨졌던 DDT가 실패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는 그러한 의문들을 더욱 강화시켰다.
살충제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하나는 섭취하여 살충 효과를 발생시키는 방식(stomach poison)이고 다른 하나는 접촉만으로도 살충 효과를 보일 수 있는 방식(contact poison)이다. DDT는 두 가지 방식 모두를 통해 효과를 발휘하며, 외부 환경에서 잘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장기간 살충 효과를 낼 수 있었다(쉐파아드, 1962: 439). DDT 사용 초기부터 농업 부분의 주요 해충인 깍지벌레와 같은 곤충에는 DDT가 별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Babers, 1949: 1-2). 하지만 특정 곤충 종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진화적 선택 압력으로 저항성 개체들이 선별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종이나 변종에 선천적으로 저항성이 존재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처럼 저항성에 대한 이해가 제한적이었던 것은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살충제 저항성 곤충이 보고되는 사례도 적었고, 그에 따라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항성 곤충(resistant insect)이라는 개념이 사례와 함께 처음 보고된 것은 1908년 미국에서였다. 1880년대부터 살충제로 쓰여온 무기물 기반인 석회유황합제(lime-sulfur) 살포 후에도 과실수 해충인 산호세깍지벌레(San Jose Scale)가 잘 사멸되지 않는 것이 관찰되었다. 산호세깍지벌레는 그 이름처럼 두터운 외피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접촉독으로 작용하는 석회유황합제가 잘 흡수되지 않는 것이 원인이라고 추측했다. 이후 1944년까지 총 12종의 살충제 저항성 곤충들이 보고되었다(Brook, 1974:29-30).47)
1940년대까지 살충제 저항성 곤충에 대한 이해는 특별히 튼튼한 개체나 종이 있다고 생각하는 수준이었다(Forgash, 1984: 179-180). 산호세깍지벌레처럼 두터운 껍질을 가지고 있어 접촉독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경우, 혹은 곤충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행동 습성 때문에 살충제 섭취를 피해 섭취독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방식 등이었다. 즉 살충제 저항성은 살충제 살포라는 외부적인 진화적 압력이 작용하여 저항성을 개체들이 선택되는 형태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해당 곤충 종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특성이나 습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관점이 일반적이었다(WHO, 1957: 7-8).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곤충들의 살충제 저항성을 회피하는 것은 살충제의 제형이나 살포 방식으로 바꾸는 것으로 충분했다.
DDT 저항성 곤충들에 대한 초기 보고들 역시 이러한 관점을 지지했다. 연합군은 유럽 탈환 후 발진티푸스 뿐 아니라 말라리아나 기타 전염병의 통제를 위해 광범위하게 DDT를 살포했다. 특히 다량의 DDT가 살포된 곳은 당시 위생상 문제로 여겨졌던 파리의 주요 서식처인 쓰레기장이었다. 개방된 공간에 다량의 살충제가 살포되며 곤충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농도, 즉 치사량 이하의 살충제에 노출되었고, 이에 따라 DDT에 저항성을 지닌 파리들이 그리스에서 보고되기 시작했다(Parkin et al., 1946: 149). 1946년 그리스에서 DDT에 강한 저항성을 지닌 집파리들을 포집한 결과, 이들은 다른 개체들과 상당히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DDT 저항성 집파리들은 다리 색이 훨씬 짙었고 외피도 훨씬 두꺼웠다. DDT가 접촉독으로 작용하려면 살포된 곳에 앉은 곤충의 다리를 통해 흡수되어야 하는데, 외피가 두껍다면 그 흡수량과 속도가 훨씬 늦어질 것이었다(Brook, 1974: 31-32).
저항성 집모기는 1948년부터 보고되었으나 이 중에는 “행동학적 저항성”을 가진 종들도 포함되었다. DDT를 이용한 모기 방제는 주로 건물 내부 벽에 일정량의 살충제를 살포하고, 실내에 들어온 모기가 벽에 앉으면 DDT가 흡수되어 살충 효과를 보이는 잔류분무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는 인간을 흡혈하는 모기들 중 많은 종류가 흡혈 직후 벽에 앉아 휴식기를 가진다는 행동 특성을 고려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일부 모기 종들은 실내에 잘 들어오지 않거나, 들어오더라도 벽에 앉지 않고 흡혈 후 곧바로 실외로 빠져나가 휴식을 취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종에서 잔류분무 방식은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또 이런 모기들은 대부분 매우 낮은 농도의 DDT에도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며, 접촉과 동시에 그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행동을 보였다. 즉 DDT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행동양식도 저항성이라는 큰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었다(Busvine, 1957: 11-13). 1949년 그리스에서 수행된 DDT 살포 후 생존한 모기들에 대한 연구도 해당 모기종의 행동학적 특성이 살충제의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WHO, 1957: 15).48)
살충제 저항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1949년 5월 미국 농림부는 국방부의 요청을 받아 살충제 저항성에 대한 기존 문헌 조사를 수행했다. 해당 보고서는 “저항성 곤충”이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단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에는 저항성에 대한 용어조차 완전히 확립되지 않아 저항(resistance), 내성(tolerance), 면역(immune)과 같은 용어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높은 농도의 살충제에도 생존할 수 있는 곤충들을 저항성 곤충으로 정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유전적으로 획득한 성질인지, 단순히 곤충의 습성에 따라 살충제와의 접촉이 적어져서 나타나는 현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Babers, 1949: 1). 즉 자연선택에 따라 개체가 선별되는 과정이 저항성 획득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기전이 행동학적인 것인지, 아니면 생리학적으로 살충제를 분해하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기전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아직도 밝혀져야 할 것이 많다는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Babers, 1949:20-21). 특히 실제 자연 환경에서 곤충들이 얼마나 저항성을 보이는지, 또한 이를 실험실에서 증명할 수 있는 표준화된 시험법이 없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더불어 전쟁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곤충 매개 전염병이 빠르게 감소하며, DDT를 적용해볼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것도 연구 기회를 축소시켰다. 서구에서는 보건위생학적 문제에서 DDT의 사용량이 감소하며 그 관심도 낮아졌다. 이차대전 끝 무렵 태평양 지역 미군 말라리아 담당관이 발간한 안내서에는 저항성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 등장할 뿐이었다. 독일 바퀴벌레가 미국 바퀴벌레보다 DDT에 잘 견디는 편이며, 이는 잔류 분무 농도를 높이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외 주요 질병 매개 곤충에 대해서는 저항성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49) 그러던 중 해방 이후 한반도와 일본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DDT 살포는 연구가 수행되는 공간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1951년 한국에서 발견된 DDT 저항성 몸니는 살충제 저항성에 대한 이해를 크게 변화시켰다. 먼저 한국에서 발견된 저항성 몸니는 기존의 저항성 곤충들과 달리 외형적으로나 행동학적으로 다른 개체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50) 즉 “행동학적” 혹은 “외형적”으로 살충제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생리적 기전을 바탕으로 살충제 저항성을 획득했음을 의미했다. 동시에 살충제 저항성이 생리적으로 곤충에 내재해 있는 것이라면, 살충제의 제형이나 살포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는 더 이상 살충 효과를 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Brook, 1974: 43).
미국 국방부의 의뢰를 받아 전미연구평의회(National Research Council)는 농림부와 공동으로 전국의 곤충학자들과 신시내티 대학에서 “살충제 저항성과 곤충 생리”를 주제로 학회를 개최했다. 개회사에서는 DDT를 포함한 유기합성 살충제의 광범위한 사용 이후 살충제 저항성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방법론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살충제 저항성으로 질병 매개 곤충의 통제가 어려워지며 중요한 공중보건학적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치명적인 타격”으로 한국에서 발견된 DDT 저항성 몸니를 사례로 들었다(NRC, 1952: 1).51)
1951년 미국 농림부에서 발간한 살충제 저항성 연구 동향 보고서는 한국의 저항성 몸니에 대한 보고를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수집된 저항성 곤충에 대한 자료를 담고 있었다. 특정 곤충종이 저항성을 가지고 있음을 섣불리 단정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1949년의 조심스러운 접근과 달리, 1951년 보고서는 각 사례 보고의 신뢰도나 실험 방법에 문제가 있지만 저항성 곤충의 등장은 이제 확고한 사실이라고 명시했다. 특히 보고서는 “DDT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해 다른 살충제를 사용할 때는 보다 조심해야 할 것”이라 결론내렸다(Babers, 1951: 28).
동시에 한국에서 공급된 DDT 저항성 몸니가 올랜도 연구소 내에 안정적으로 사육되기 시작하여 실험 재료가 확보되자 미국 내에서의 연구도 활성화되었다. 1951년 미국 농림부 연구자들에 의해 한국에서 채집된 몸니는 미국으로 옮겨져 사육되었다. DDT에 대한 저항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산 몸니들은 0.01% 농도의 DDT에 적셔진 천에서 키워졌다. 한편 올랜도 연구소 자체에서 1942년부터 사육하고 있던 몸니들은 살충제와 아무런 접촉 없이 키워졌다(Cole, 1955:704). 이후 올랜도 연구소를 중심으로 미국의 곤충학계에서 한국산 DDT 저항성 몸니는 살충제 저항성 연구의 표준적인 생물 중 하나가 되었다(Burden, 1956; Cole, 1957; Bigley, 1960).
미국 국방부에서 저항성 연구에 본격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며 살충제 저항성 기전 및 예방에 대한 연구가 늘어난 것도 중요한 변화였다. 1954년 3월 국방부에서 추가 자금 지원을 받아 올랜도 연구소는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1954년 국방부에서 이 연구소에 집중적인 지원을 결정한 주요한 근거는 한국에서 경험한 저항성 몸니의 등장이었다. 국방부 차관은 개소 이후 보낸 축사에서 한국 저항성 몸니의 등장은 “당면한 위협”이고, “한국에서의 경험”이 새로운 시설과 장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과거 올랜도에 위치한 작은 실험실이었다면 족히 일 년 이상 걸렸을 새로운 살충제의 개발이, 확장된 연구소에서는 불과 3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지속적인 확대 발전을 요청했다(Worthley, 1954: 372).
한국에서 미군에 의해 이루어진 DDT 저항성 몸니 연구의 사례는 이후 살충제 저항성의 국제적 정의를 표준화시키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세계보건기구의 살충제전문가위원회(Expert Committee on Insecticides)는 본래 살충제의 제조와 사용의 표준화와 인체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성되었다(WHO, 1950: 3-5). 하지만 1953년에 들어서는 몸니와 모기를 포함한 다양한 질병 매개 곤충들의 살충제 저항성에 대한 연구로 그 초점을 전환했다. 국제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표준화된 살충제 저항성의 정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WHO, 1957: 13-14). 당시까지 축적된 몸니와 모기 등의 사례를 바탕으로 세계보건기구는 1953년 살충제 저항성이란 “정상 곤충 집단의 대다수를 사멸시킬 수 있는 농도에 견딜 수 있는 능력이 획득되어 유전”되는 현상이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WHO, 1954: 7). 여기서는 “능력이 획득”된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즉 본래 집단에 존재했던 행동학적, 외형적 특징이 아닌 살충제라는 압력에 적응하기 위해 “획득”된 형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DDT 저항성 몸니 연구는 국제적인 활동으로도 확대되었다. 1953년부터 1956년 6월까지 세계보건기구는 DDT 저항성 몸니의 현황을 확인하기 위해 51개국이 참여한 대규모 사업을 수행했다(Wright et al., 1957: 9). 이 연구에서 활용된 시험법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개발된 몸니 저항성 실험 방법이었다. 연구 과정에서 올랜도 연구소의 기술 지원으로 개발된 실험 키트 520개가 전세계 보건부에 배포되었다. 이 실험 키트는 기본적으로 1951년 한국에서 개발된 소매 시험법을 정교화, 표준화한 것이었다. 총 37개국의 몸니들을 분석한 결과 여전히 한국과 일본의 몸니는 세계적으로 비교해 보았을 때도 가장 높은 저항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Wright et al., 1957: 11-13). 가장 낮은 저항성을 보이는 것은 1942년 DDT 상용 이전 채집되어 계속해서 실험실 내에서만 키워진 올랜도 연구소의 몸니들이었다. 연구소의 몸니는 낮은 DDT 농도에서도 85%~100%가 사멸한 반면, 한국의 몸니는 상용 DDT 중 가장 높은 농도인 10% DDT 분말에서도 25%만이 사멸했다.
한국에서 수집된 몸니들이 어떻게 저항성을 획득하는지, 또한 획득한 저항성을 잃게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연구들도 계속되었다. 한국의 몸니는 1942년 DDT 개발 이전 채집되어 실험실 내에 사육되고 있던 계통보다 최소 100배 이상 높은 저항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리 높은 저항성을 가지고 있는 몸니라 하더라도 DDT에 노출되지 않은채 약 15세대가 지나면 약 75%의 저항성을 상실했다. 반대로 DDT에 한번도 노출된 적이 없는 몸니들도 낮은 농도에 DDT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약 25세대 이후 높은 수준의 저항성을 획득했다. 몸니가 알에서 깬 후 약 일주일이면 성체가 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DDT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반년 이내에 강한 저항성을 나타낼 수 있음을 의미했다(Eddy, 1955: 1035-1038).
DDT 저항성 몸니는 한편으로는 중요한 보건학적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방대한 연구 자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의 전쟁포로 수용소를 중심으로 개발된 저항성 몸니 연구와 그 실험 방법론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살충제 저항성 연구가 수행되는 데 있어 중요한 실천적,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살충제 저항성이라는 비교적 낯선 개념은, 한국의 포로수용소를 중심으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었던 DDT 저항성 몸니를 만나 빠르게 재정립되었다. 결국 한국의 DDT 저항성 몸니는 세계적으로 살충제 저항성이라는 개념과 연구 방법론을 진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셈이다.

5. 결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포로수용소라는 독특한 공간을 만들었고, 이 폐쇄된 공간에서 개별 사례에 대한 추적 조사를 진행하며 미군 연구자들은 DDT 저항성에 대한 다양한 실험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DDT, 특히 저항성과 관련된 지식이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고립된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집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당시 유사하게 광범위한 DDT 살포가 이루어진 일본에서는 왜 DDT 저항성의 문제가 두드러진 문제가 되지 못했는지도 설명해준다. 일본의 경우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살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DDT의 효과에 대해 추적하고 측정하기는 어려웠다. 그에 반해 상주 연구 및 관리 인력이 있는 포로수용소는 이러한 대규모 연구 자원이 수집이 가능한 최적의 환경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집중적인 살포로 강화된 진화적 압력은 한국 몸니가 강력한 DDT 저항성을 획득하게 했다.
한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수집된 몸니와 DDT 저항성에 대한 자료는 이후 기존의 저항성 개념을 전복시키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DDT 저항성 몸니가 발견된 후 한국에서 인체를 대상으로 한 방역용 살충제가 DDT에서 린덴으로 빠르게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DDT가 한국에서 결코 안정화된 기술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질병 관리 사업에 활용되었던 DDT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전쟁 시기 한국에서 ‘시험’되었던 다양한 의학 기술들이 궁극적으로 생산하고자 했던 지식이 무엇이었을지 되묻게 한다.
DDT를 둘러싼 이러한 불안정성은 DDT라는 기술의 블랙박스를 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기합성살충제에 대한 저항성이란 개념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는 미국 농림부와 세계보건기구 등 살충제 사용과 관련된 주요 연구 집단들이 살충제 저항성 연구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한때 과학의 기적처럼 보였던 DDT와 이어 개발된 수많은 유기합성살충제들이, 실제로는 언제든 인간이 뒤처질 수 있는 해충과의 진화적 군비경쟁에 놓여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몸니가 미국으로 옮겨가 살충제 저항성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국제적으로 새로운 연구 동향을 창출할 수 있었다는 점과는 별개로 한국에서 이러한 지식과 연구 자원들이 어떻게 수집되고 활용되었는지는 보다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몸니들은 한국인 ‘자원자’들에게서 수집되었으며, 소매 시험과 같이 대상자가 불편을 겪을 수 있는 실험들은 미군이 아닌 한국군이나 포로들을 대상으로 수행되었다. 특히 의학 지식의 발전이 소외된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관찰에 의존해왔다는 비판에 비추어 보았을 때(다운스, 2022: 305-307), 한국전쟁기 ‘발전’해왔던 의학연구에 참여한 대중, 군인, 포로 대한 보다 세심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Notes

1) DDT는 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의 약자로 1875년 오스트리아의 화학자 오트마 자이들러(Otmar Zeidler)에 의해 처음 합성되었으나, 살충효과가 알려진 것은 1939년 스위스의 화학회사 가이기(Geigy) 연구원인 폴 뮐러(Paul Muller)에 의해서였다. 이 공로로 194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세계에서 첫 번째로 광범위하게 사용된 유기합성살충제이며, 이후 유사한 유기염소계(organochloride) 살충제들이 개발되었다(히펠, 2021: 239-241).

2) 한편 DDT가 유기합성살충제로는 최초로 개발, 사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목적으로 빠르게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차대전 이후 축적되어 온 화학전 역량에 힘입은 바가 컸다. 러셀(Russell, 2001), 히펠(2020: 229-263) 등 전쟁사 및 화학사 분야의 연구들은 유기용제를 적극 활용했던 화학전 연구 과정에서 개발된 항공 살포 기술, 분무 장치 등을 군대 내 유기합성 살충제 활용에 도입하였으며, 나아가 이후 민간의 농업 및 보건 분야 활용 역시 이러한 장치들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DDT를 포함한 유기합성 살충제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했다.

3) 기존의 연구들에서 하나의 완성된 기술로서 DDT를 다룬다는 점에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에서 사용하는 블랙박스의 개념을 차용하였다. 블랙박스는 DDT와 같은 행위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성공한 결과만이 부각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실패들은 드러나지 않게 되어, 실제로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드러나지 않고 단일한 대상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홍성욱, 2010: 15-35).

4) 이차대전 이전에는 식물성 원료 기반의 살충제와 함께 파리스 그린(Paris Green)과 같은 비소계 살충제나 기타 독성 무기물을 기반으로 한 살충제들이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기 독성 물질을 기반으로 한 살충제들은 인체 독성도 높았기 때문에 사람도 함께 살충제에 노출되어야 하는 보건학적 용도로 사용되기는 어려웠다(Brooks, 2017: 23).

5) 1935년 기준 일본의 연간 제충국 생산량은 약 15,000톤에 달했다.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는 제주도에서도 제충국 생산을 적극 권장했고, 정부와의 계약 재배를 통해 전량 수매되었다(강만익, 2011: 208).

6) 발진티푸스는 몸니가 옮기는 리케차(Rickettsia prowazekii)에 의해 발생하는 전염성 질환으로, 몸니가 쉽게 전파될 수 있는 감옥, 군대 등 인구 밀집 지역에서 빠르게 유행한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중 전투보다 발진티푸스에 의해 사망한 군인이 더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군대에서 주요한 보건 문제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일차대전 중 약 3천만 명의 환자가 발생해 그 중 3백만 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Zinsser, 2012: 167-170).

7) 1913년 설립된 미국 곤충 및 식물 검역소는 미국으로 수입되는 각종 농산물의 검역과 해충 관리를 담당하는 검역 및 연구 담당부서였다. 검역과 해충관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충제 개발 및 효과를 평가하는 역할 역시 검역소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그 중 1941년 미국 국방부의 자금 지원으로 신규 살충제 개발만을 전담할 목적으로 설립된 현장 연구소가 올랜도 연구소였다(US Congress, 1950: 623). 1951년 올랜도 연구소에서 질병 매개 곤충을 연구하는 부서는 별도의 인수영향곤충연구소(Insect Affecting Man and Animals Research Laboratory)로 분리되었다(Worthley, 1954: 372).

8) 1939년 폴 뮐러가 DDT의 살충효과를 확인한 이후, 스위스의 화학회사 가이기는 1940년 DDT에 대한 특허를 스위스에서 획득했다. 이후 가이기는 판로 개척을 위해 1942년 독일과 미국 양측 지부에 모두 DDT 샘플을 보냈으나, 독일에서는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1942년 8월 가이기는 뉴욕 지사에 100㎏의 DDT를 배송했다. 이 샘플 중 일부가 올랜도 연구소에 전달되었고, 1943년 1월 연구진들은 DDT가 지금까지 시험해 본 어떤 후보 물질보다도 강력한 살충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Dunlap, 1982: 61-62). 뿐만 아니라 DDT는 강력한 잔류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살포한 뒤 수십 일이 흐른 뒤에도 DDT와 접촉한 모기를 죽일 수 있었다(Russell, 2001: 124-125).

9) Soper, Fred, "Report on Work with Louse Powders at the Prison Maison Carree, Algeria," The Fred. L. Soper Papers.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Bethesda.

10) 구체적인 DDT 살포 사업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한국의 사례는 이임하(2020), 일본의 사례는 Aldous(2011). 한반도 말라리아 관리 사업에 DDT가 활용된 사례에 대해서는 Yeo(2015)를 참고하라.

11) 일본에서 진행된 발진티푸스 방역 사업에서는 DDT와 함께 제충국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DDT와 제충국을 혼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가능하면 미국산으로 대체하기 보다는 일본 본토의 자원을 활용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1946년 8월 제충국 생산량은 1,819,000 갤런에 달했으며, 분무기 역시 일본에서 자체 생산되었다. 티푸스 방역 과정에서 몸니 방제를 위해 DDT가 널리 사용되었고 큰 호응과 관심을 얻었던데 반해, 모기 및 파리 방제에 있어서는 1946년까지 주로 제충국만 언급되었다. 제충국 생산을 DDT가 초과하게 되는 것은 1947년 말의 일이었다(Aldous et al., 2011: 78-80).

12) MacLaren, “Insect and rodent control activities of UNCACK (Extract from the medical bulleting of the US Army Far East May 1953 Vol1 No6 Medical Section HQ-AFFE).” Unclassified Subject Files, ca. 1955 – 11/03/1961. RG469. NARA. 이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자료는 국립중앙도서관 영인본을 활용하였다.

13) Headquarters XXIV Coprs, “Cir No. 132, HqUSAFIK, 22 Nov 47,” XXIV Corps ETMD 1947, RG112, NARA. pp. 4.

14) 흔히 흰색 분말 형태로 나타나는 DDT 제형이 이렇게 활석에 DDT를 혼합하여 제조한 형태였다. 제조시 공업용 DDT는 100% 농도의 결정으로 공급되며, 이를 등유나 기타 유제에 혼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사람의 피부에 닿는 제형은 분말을 주로 사용하며, 가정 내 잔류 분부나 항공 살포는 등유에 희석한 것을 사용한다(USDA, 1948: 2-8).

15) 한국에서는 계속해서 제조에 어려움이 있어 대부분의 DDT를 미국이나 일본에서 공급 받았다. 공업용 DDT(Technical DDT)라 불린 순수 DDT 원자재는 주로 미국에서 공급되었으며, 이를 희석 및 재가공하는 작업은 주로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활석에 혼합한 DDT는 부피와 무게가 크게 늘어나, 이렇게 가공된 분말을 미국에서 공수하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었다(Sams, 2016: 85). 해방 직후에는 DDT를 가공할 수 있는 농약 공장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후가공은 일본에서 이루어져, 한국으로 다시 공급되었다. 1947년 한국의 중앙화학연구소에서 DDT를 제조했다는 기사가 남아 있으나, 실제 한국에서 DDT 원료가 합성되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DDT, 시험제조에 성공, 기계와 원료의 수입을 요망, 부원한 장래에 공업화」, 『공업신문』, 1947년 5월 18일.)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DDT 분말의 부자재인 고품질의 활석이 한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DDT 원료 합성이 아닌 수입 원료를 활석과 혼합하는 공정에 성공했다는 것으로 보인다(「DDT 원료 다수 채취」, 『부녀일보』, 1946년 11월 5일.).

16)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26 May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1. RG112, NARA. pp. 28-29.

17) 이 시기 일반 도심지나 수용소를 대상으로 한 항공살포는 농업 부문과 달리 모기와 같은 주요 질병 매개 곤충에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모기는 대체로 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몸니와 같은 곤충들은 사람의 옷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항공살포로 뿌려지는 DDT가 닿기 어려운 곳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방역조가 직접 분무기를 가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나 전투 지역에서는 항공살포가 효과를 보일 수 있지만, 도심지 살포 빈도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후반까지 항공살포가 계속되었던 것은 방역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한국의 정치인들은 미군 수송기가 도시 상공을 가로지르며 DDT를 살포하는 것이 주민들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미군에게 항공 살포 협조를 계속해서 요청했다. MacLaren. “Insect Problem and Related Disease Control in Korea,” Unclassified Subject Files, ca. 1955 – 11/03/1961, RG469, NARA.

18)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MED-35 (22 Jan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0, RG112, NARA. pp. 13.

19) EUSAK, “Annual Report of Army Medical Service Activities,” (8th Army) Far East 1950, RG112, NARA. p. 47.

20)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MED-35 (22 Jan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0, RG112, NARA. pp. 13.

21) EUSAK, “Annual Report of Army Medical Service Activities,” (8th Army) Far East 1950, RG112, NARA. pp. 47.

22)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MED-35 (22 Jan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0, RG112, NARA. pp. 14.

23)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MED-35 (22 Jan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0. RG112, NARA. pp. 33.

24) EUSAK, “Annual Report of Medical Service Activities for the Year 1951 (22 Feb 1951),” (8th Army) Far East 1951. RG112, NARA. pp. 67-68.

25)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26 May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1 RG112, NARA. pp. 28.

26)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26 May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1. RG112, NARA. pp. 28-29.

27)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26 May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1, RG112, NARA. pp. 29-30.

28)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29 Jul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1, RG112, NARA. pp. 30.

29)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29 Jul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1, RG112, NARA. pp. 31.

30) Hurlbut S. “DDT Resistance in Korean Body Lice (18 June 1951),” 727.4 U.S. Army Operational, Tactical, and Support Organizations, RG338, NARA. pp. 1-16.

31)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MED-35 (22 Jan 1951),”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0. RG112, NARA. pp. 31-32.

32) Hurlbut S., “DDT Resistance in Korean Body Lice (18 June 1951),” 727.4 U.S. Army Operational, Tactical, and Support Organizations. RG338, NARA. pp. 4-5.

33) Hurlbut S., “DDT Resistance in Korean Body Lice (18 June 1951),” 727.4 U.S. Army Operational, Tactical, and Support Organizations. RG338, NARA. pp. 5-7.

34) Hurlbut S., “DDT Resistance in Korean Body Lice (18 June 1951),” 727.4 U.S. Army Operational, Tactical, and Support Organizations. RG338, NARA. pp. 11-15.

35)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22 Jan 1954),”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3. RG112, NARA. pp. 16.

36) Hurlbut S. “DDT Resistance in Korean Body Lice (18 June 1951),” 727.4 U.S. Army Operational, Tactical, and Support Organizations. RG338, NARA. pp. 9-14.

37) Hurlbut S. “DDT Resistance in Korean Body Lice (18 June 1951),” 727.4 U.S. Army Operational, Tactical, and Support Organizations. RG338, NARA. pp. 16.

38) 린덴(lindane)은 DDT에 이어 개발된 합성 유기염소계 살충제이다. 벤젠헥사클로라이드(benzene hexachloride)를 정제한 것으로 DDT와 마찬가지로 환경 잔류 기간이 길어 1979년부터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사용이 금지되었다(환경보전협회, 1989: 18).

39) EUSAK, “Annual Report of Medical Service Activities for the Year 1951 (22 Feb 1951),” (8th Army) Far East 1951. RG112, NARA. pp. 66.

40) EUSAK, “Annual Report of Medical Service Activities for the Year 1951 (22 Feb 1951),” (8th Army) Far East 1951, RG112, NARA. pp. 67.

41)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for the month of November 1951 (1 Jan 1952),”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1, RG112, NARA. pp. 29.

42) 1952년과 1954년 미국 농림부에서 펴낸 살충제 사용 권고에 대한 공보물에서는 가정 내 모기나 몸니 방제용 살충제로 DDT와 메톡시클로르(Methoxychlor)라는 합성 유기염소계 살충제만을 권고하고 린덴은 누락하였다. 대신 가정용이라도 사람과 살충제 분말이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는 개미, 파리 등에 대해서는 린덴을 사용을 권고했다. 이를 통해 미국 내에서는 직접 접촉에 대한 린덴의 인체 안전성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상태로 한국에 광범위하게 살포되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USDA, 1952: 16; 1954: 16).

43) EUSAK, “Annual Report of Medical Service Activities for the Year 1951 (22 Feb 1951),” (8th Army) Far East 1951. RG112, NARA. pp. 66.

44) UNCACK. “Monthly Summary November 1952,” United Nations Civil Affairs Activities in Korea, Monthly Summary, June-September 1952, RG407. pp. 55.

45) EUSAK, “Essential Technical Medical Data Report for the month of December 1951 (22 Jan 1952),” ETMD Far East 8th U.S. Army 1951, RG112, NARA. pp. 29.

46) Medical Section. “Annual Report Medical Service Activities, 1 January 1951-31 December 1951 (Jan 6 1953),” (Far East Command) Far East 1951, RG112, NARA. pp. 69.

47) 살충제 저항성에 대한 보고가 적었던 것은 DDT 개발 이전까지 주로 사용되었던 제충국 등의 식물성 원료의 살충제가 다양한 활성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곤충들이 상대적으로 저항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었다. 제충국은 6가지 이상의 활성 물질이 살충 효과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반해 DDT 등의 유기합성살충제는 단일 성분으로 이루어져있어 곤충들이 상대적으로 저항성을 획득하기가 용이하다(Duchon et al., 2009: 516-517).

48) Livadas, Gregory, “The secretary of the expert panel on Malaria (18 Dec 1951),” WHO Archive. pp. 2.

49) Chief Malariologist, “Malaria? Vol. II No.8. (31 July, 1945),” AFPAC. p. 4.

50) Hurlbut S. “DDT Resistance in Korean Body Lice (18 June 1951),” 727.4 U.S. Army Operational, Tactical, and Support Organizations. RG338, NARA. p. 10.

51) 1952년 2월 영국왕립열대의학학회도 살충제에 대한 학회를 열고, 살충제 저항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곤충들이 DDT에 대한 저항성을 보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항성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한국에서 나타난 저항성 몸니가 보건위생에 있어 중요한 도전을 제기할 것임을 강조했지만, 한편으로는 저항성 몸니의 출현이 광범위한 DDT 사용의 결과물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Harrison, 1952: 258-259).

그림 1.
헝겊 시험(patch test)은 DDT에 적신 옷감 위에서 몸니가 얼마나 생존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시험법이었다.
Fig 1. Patch test was the laboratory method to quantify the survival rate of body lice on DDT soaked clot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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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소매 시험을 위해 옷조각을 팔 위에 올려둔 모습
Fig 2. Piece of clothing was placed on the arm for Sleeve test.
kjmh-31-3-757f2.jpg

References

1. 허검, 「DDT 이야기」, 『현대과학』 3 (1946), 59쪽.

2. 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 Annual Historical Report 1951 (U.S. Army, 1951).

3. Babers, Frank, Bureau of Entomology and Plant Quarantine. Development of Insect Resistance to Insecticides (United States Department of Agriculture Bureau of Entomology and Plant Quarantine, 1949).

4. Babers, Frank, Bureau of Entomology and Plant Quarantine. Development of Insect Resistance to Insecticides (United States Department of Agriculture Bureau of Entomology and Plant Quarantine, 1951).

5. Blanton Franklin·Tani Tadashio, Typhus Control at Ports in Japan and Korea after World War II, Journal of Economic Entomology 44-5 (1951), pp. 812-813.
cross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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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Hygienic Masks in Colonial Korea  2022 April;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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