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E-Submission | Sitemap | Editorial Office |  
top_img
Korean J Med Hist > Volume 32(1); 2023 > Article
근대 중국 우두(牛痘)의 역사: 백신 기술과 도구 그리고 현지화†

Abstract

This paper examines how smallpox vaccination has been implemented in China from a technological perspective. It is an attempt not only to investigate the impact of technology and instruments on medical advances, but also to deepen the understanding of modern Chinese society through smallpox vaccination.
Smallpox vaccination helps people develop immunity to smallpox by inoculating into them pus from cowpox which is an infectious disease that affects cows. In 1805, Alexander Pearson succeeded in smallpox vaccination using the arm-to-arm transfer method for the first time in China thanks to the arrival of the vaccine in Macao. As Pearson and Quixi, who followed in the footsteps of Pearson, used the arm-to-arm method, they did not have much interest in vaccine containers. However, the vaccine administration technique changed: the vaccine obtained from people was inoculated into cows, and then again, into people. It thus resulted in the manufacturing of various vaccine containers including glass vials and tubes. The development of tools contributed to the expansion of cowpox vaccination.
In addition, cowpox vaccines were imported directly from foreign countries. Advertisements which remain to date indicate that vaccines were widely imported. Pharmacies promoted vaccines, contending that the sale and import of vaccines was for the Chinese people.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voices against imported vaccines, saying that they were expensive and foreign-made. Under the banner of patriotism and nationalism, people demanded that vaccines be made in China, which led to the production of vaccines in large cities such as Shanghai and Beijing. Along with the aforementioned efforts to obtain vaccines, techniques for smallpox vaccination can also be understood in the Chinese context. For exampl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maintains that acupuncture can be used as a vaccination lancet. Since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already embraced the use of cowpox for protection against smallpox, they advocated using acupuncture instead of western instruments in order to expand the influence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he belief that inoculation should be done into acupuncture points in the upper arms shows the significant influence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On the other hand, Chinese people being reluctant to leave vaccine marks show the general view of what was considered as beautiful at the time, rather than the Chinese traditional perspective.
Consequently, smallpox vaccine techniques in China, while following the technological advancement in general, could not help but be adapted to the Chinese context under the influence of modern Chinese society. Thus, smallpox vaccine techniques provide clues for understanding modern Chinese society. As such, historians who conduct research mainly with literature should also take interest in medical technology and instruments as well.

1. 서론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의] 우두법(牛痘法, Vaccination)은 전 유럽, 아시아, 미국으로 퍼져, 수많은 사람이 접종받고 두창의 참화에서 벗어났다. 이를 높게 평가한 스페인 왕이 백신을 접종받은 어린아이들을 배에 태워 자신의 영토 여러 곳, 특히 필리핀 섬들로 보냈다. 가경(嘉慶) 10년(1805년) 음력 4월 백신[牛痘苗]은 이제 중국에 들어왔다. 현지에 거주 중인 영국인 의사와 포르투갈인 의사가 이 기술[우두법]을 소개하여, 백여 명이 이미 접종을 받았는데 한 명도 실패가 없었다.1)
위의 인용문은 동인도회사 소속 외과의 알렉산더 피어슨(Alexander Pearson)이 중국의 우두법 전래 과정을 소개한 글이다. 글에 등장하는 “영국인 의사”가 바로 피어슨이다. 우두법이란 소의 두창[牛痘] 고름을 인간에게 접종함으로써 두창(痘瘡)에 대한 면역을 얻는 방식이다. 우두법이 전래 되기 전까지 중국에서는 인두법(人痘法, Variolation)이 널리 시행되었는데, 이 방식은 두창 환자의 바이러스를 직접 이용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두창을 전염시킬 우려가 있었다. 그에 반해 우두법은 사람 간 전염이 되지 않아 안전하며, 기술도 비교적 간단하고 성과도 이미 충분히 입증된 방식이었다. 중국에서는 두창이 정기적으로 유행하여 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두법을 소개함으로써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런데 우두를 접종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우두묘, 즉 백신이 필요하다. 백신이 없으면 우두법을 알아도 접종을 할 수 없다. 피어슨은 우두묘를 입수하고자 노력했지만, 1803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伊莎貝爾 · 莫賴斯, 2007: 130). 다행히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2년 후인 1805년 음력 4월 필리핀에서 우두묘가 들어오면서 우두 접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필리핀으로, 다시 마카오에 이르는 항해 동안 우두묘가 활성을 잃지 않고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린아이의 몸을 보관 용기로 이용하는 일종의 보존 기술 덕분이었다. 즉 중국에서의 우두접종사(史)를 연구하는 데 있어 우두묘의 존재, 이와 관련된 각종 기술과 도구의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양사에서는 이미 2000년도 중반부터 우두의 기술적 측면에 주목한 연구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연구사도 정리된 바 있다(이현주, 2018a). 한국사에서도 최근 두묘의 채취 및 보관, 접종 기술 등 그동안 종두법 연구에서 간과되어 온 원천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연구가 발표되었다(신규환, 2022).
중국사에서는 먼저 우두라는 새로운 지식이 중국에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분석하면서 필연적으로 기술적인 부분도 소개한 연구가 있다(範行準, 1953; 伊莎貝爾 · 莫賴斯, 2007; ジャネッタ, 2013; 朴基水, 2013; 조정은 2021a). 한문 우두서(牛痘書)의 역할에 주목한 연구에서도 기술이나 도구의 분석이 병행되었다. 예를 들면 『인두략(引痘略)』(1831년)2) 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치우시(邱熺)가 접종 기술을 중의학적 관념에서 재해석하여 소개함으로써 많은 중국인이 위화감 없이 우두를 받아들일 수 있었음을 강조했다(董少新, 2007; 張嘉鳳, 2007; 梁其姿, 2012; 朴基水, 2013). 한문 우두서가 일본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면서 중일 우두서에 소개된 접종 기술과 도구를 비교한 연구도 있다(조정은, 2018). 이러한 연구는 초기 우두 기술이 수용된 양상을 확인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나, 기술이나 도구에 관한 관심은 부수적인 차원에 그쳤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만 인두법의 방식을 활용하여 우두묘를 건조 시켜 보존력을 높였음을 지적한 연구(寥育群, 1997)나, 푸젠(福建) 지역에서 우두법을 받아들이면서 우두묘 확보, 접종 방식 등을 현지 상황에 맞게 개량하였음을 밝힌 사례 연구는 참고할만하다(黃穎, 2022).
근대를 다룬 논문으로는 상하이의 도시공간에서 우두가 어떻게 확대되었는가를 분석하면서 우두묘의 수입과 제조, 공급에도 주목한 연구(조정은, 2020)나, 우두 접종을 독려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 활동을 분석하면서 접종 기술도 소개한 연구(조정은, 2022)가 있다. 역시나 제도적 측면이나 우두법에 대한 인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기술이나 도구에 집중한 연구라 말하기는 어렵다.
종합하면 지금까지 중국의 우두법에 관한 연구에서 지식과 실제 적용의 연결 고리가 되는 기술과 도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부차적인 분석 대상에 머물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중국 근대 우두접종사의 전체상을 “우두 기술과 도구가 중국에서 어떻게 수용[현지화]되었는지”를 통해 그려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새로운 의학 기술과 도구가 중국에 적응해가는 과정, 역으로 말하면 중국이 새로운 의학 기술과 도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우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2장에서는 우두 백신의 보관, 수입, 제조를 가능하게 한 우두 기술의 발전과 한계를 중국 현지의 상황과 함께 검토한다. 3장에서는 접종 부위와 접종 기술, 접종 도구가 중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살핀다. 이러한 연구는 근대 의학 발전에 있어 기술과 도구가 미치는 영향력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두를 통해 근대 중국의 사회와 문화를 한 층 깊이 이해해보려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2. 백신의 현지화

1) 우두묘 확보와 보관을 위한 노력

우두 접종을 위해서는 우두묘의 확보가 필수적이므로, 우두묘를 보관하고 운반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이 고안되었다. 19세기 전반까지 우두묘 확보에는 일반적으로 제너가 썼던 암투암(arm-to-arm) 방식을 활용했다(Fenner, 1988: 279). 암투암 방식이란 우두를 앓는 사람에게서 우두묘를 채취하여 다른 사람의 팔에 접종하는 것을 말한다. 즉 팔에서 팔로 옮기는 방식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피어슨이 사용한 우두묘도 이 방식을 통해 들어왔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명에 따라 각지의 스페인령에 우두법을 전파하던 스페인 의사 발미스(Dr. Francisco Xavier De Balmis)는 3-9세 사이의 고아 소년 26명을 배에 태워 우두묘 저장소로 활용했다(朴基水, 2013: 223). 안전을 위해 한 번에 두 명의 어린이에게 접종했으므로, 계산상 26명의 아이로 3개월에서 4개월 동안 두묘를 저장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 페드로 후에(Pedro Huet; Mr. Hewit)가 1805년 5월(음력 4월) 발미스의 우두묘를 에스페란자호에 실어 마닐라에서 마카오로 전달하였고, 우두묘를 확보한 피어슨은 드디어 접종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조정은, 2018: 349-350). 암투암 외에도 실에 환자의 고름[痘漿]을 묻혀 말리거나 유리판에 고름을 올리고 유리판으로 덮어서 보관 및 운반하는 방식도 있었고, 두창 환자의 딱지[痘痂]를 직접 보관 및 운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운반 도중 바이러스가 활성을 잃어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장거리의 경우에는 사람을 저장 용기로 이용하는 방식이 최선이라 여겨졌다(香西豊子, 2019: 44).
그러나 암투암 방식은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백신의 효능이 약해지거나, 매독과 같은 혈액 매개성 감염이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이현주, 2018a: 274; 이현주, 2018b: 12). 또한 이 방식은 접종자에게 농포가 생겼을 때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식으로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접종자에게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때[不善感]를 대비해서 다른 여러 명의 미접종자를 확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香西豊子, 2019: 435-436).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귀우두(再歸牛痘) 방식이 개발되었다. 본래 우두는 소에게서 얻는다. 이를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접종하는 것을 인화우두(人化牛痘)라 부른다. 인화우두를 소에게 접종하여 우두를 얻으면, 소에게서 온 우두를 다시 소에게 되돌렸다고 하여 일본어로 “재귀”우두라 한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초부터 재귀우두묘 제작 시도가 있었는데, 1873년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가 네덜란드에서 직접 배워 일본에 도입했다고 전한다(二宮陸雄, 1997: 504-506). 19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소를 백신 생산에 처음 사용한 이래, 소를 이용하는 관행은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19세기 말에는 보편화되었다. 이와 함께 많은 나라에서 암투암은 불법이 된다(Fenner, 1988: 279). 송아지를 백신 제조에 제일 먼저 이용한 이유는 제너가 소에게서 얻은 우두묘로 우두 접종을 본격적으로 시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의 피부에서 백신을 얻는 방식은 사람이 지닌 병을 옮기지 않아 안전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명확한 장점이 있었다(이현주, 2018a: 275-276).
피어슨과 그에게서 우두법을 배운 치우시는 암투암 방식을 사용했다. 문제는 두창 유행이 끝나면 사람들이 금방 우두 접종을 하지 않아서, 백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접종 희망자를 확보하는 일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피어슨은 적어도 두 번 우두 접종이 끊어진 적이 있다고 토로했다.3) 그래서 치우시는 더워지면서 접종 희망자가 줄어드는 4-9월에는 가난한 집의 아이에게 무료로 우두를 접종해주고, 접종받은 아이가 두장을 제공하면 그 부모에게 돈을 주었다. 그러자 접종받으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4) 이처럼 지역 엘리트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아 우두법을 시행한 사례는 여러 지방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王彬, 2020: 70).
두장을 얻기 위해 소를 이용하기도 했다. 가경 연간 치우시에게서 우두법을 배우고 푸젠 지역에서 의사로 활동한 덩리우(鄧旒)의 사례이다. 그는 양행(洋行)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두장 제공자에게 돈을 주고 두장을 계속 확보하는 방식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접종자에게서 얻은 두장을 소에게 접종하고, 활성을 잃기 전 다시 다른 소로 연이어 접종하는 식으로 두장을 확보했다. 선행 연구에서는 덩리우가 이런 방식을 어떻게 고안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방식 덕분에 푸젠 지역에서 우두법이 확대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黃穎, 2022: 33).
상하이 공공조계에서도 부모가 아이에게 백신을 접종시키고 두장을 제공하면 돈을 주었다. 약간의 돈을 받겠다고 부자들이 되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가난한 집에서 두장을 제공하고 돈을 받았다.5) 다만 이러한 방식은 “우두 접종 후 농포를 부주의하게 다루고 중약[native drug]을 바르는 습관 때문에 성공적으로 접종한 아이에게서도 두장[lymph]을 얻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6) 1879년 공공조계 연례보고서에서 상하이의 두장은 상하이 근교나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등지의 접종소에서 공급받고 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이 시점까지는 암투암 방식도 여전히 이용되고 있었던 듯하다.7)
피어슨과 치우시는 암투암을 이용했기 때문에,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와 『인두략』에는 접종 부위와 접종 시 사용할 우두칼 그림[그림 11][그림 12]은 있어도 백신을 보관하는 용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를 번역하고 일부 내용을 추가한 히로세 겐쿄(廣瀨元恭)의 『신정두종기법(新訂痘種奇法)』에는 두장을 보관하는 유리판 그림이 실려 있다.8) 유리판은 두 개가 한 세트로, 유리판 위에 두장을 놓고 다른 유리판으로 덮어 밀봉한다. 중국과 달리 암투암 방식으로 우두묘가 들어오지 않은 일본에서는 이런 보관법을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867년 혼마 소켄(本間棗軒)의 『내과비록(内科秘録)』9) 에는 유리판이 아닌 금속판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재료만 다를 뿐 유리판처럼 활용했다. 금속판 중앙이 살짝 오목하여, 이곳에 두장을 담도록 했다[그림 1].
이처럼 고름을 말려서 두가(痘痂)의 형태로 저장하면 15일 정도까지 보존할 수 있어, 거리가 먼 곳까지 두묘를 운반할 수 있다(寥育群, 1997: 237). 이를 건묘법(乾苗法)이라 한다. 1828년 베이징(北京)에 들어온 우두묘는 건묘법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두묘가 활성을 잃어 접종에 실패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範行準, 1953: 139).
한편 『내과비록』에는 두가를 보관하는 유리병도 그려져 있다[그림 1]. 중국에서 유리병이나 유리관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1881년 『우두천설(牛痘淺說)』에서 두장을 유리관에 보관하는 법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範行準, 1953: 140). 딩푸바오(丁福保)는 <그림 2>와 같이 길이 약 5-10 센티의 모세관이나 방추형 유리관에 두장을 보관하는 방식을 소개했다. 한쪽은 막고 한쪽은 봉랍(封蠟)으로 밀봉하여 보관하는데, 사용할 때는 봉랍을 제거하거나 혹은 모세관의 한끝을 부숴 안에 있는 두장을 꺼냈다. 두장은 깨끗한 유리그릇에 쏟아 놓고 한 명에게 접종할 때마다 우두칼을 한 번씩 두장에 담가서 사용했다.10) 1898년부터 상하이에서는 백신을 제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글리세린으로 처리하고 유화(乳化)시킨 백신을 튜브에 담아 공급했다.11) 그 후에는 동결한 백신을 튜브에 진공 포장한 백신 기술이 개발되는데, 이는 1919년 1차 세계대전 중의 일이다(이현주, 2018a: 273).
온도가 높으면 백신이 활성을 쉽게 잃기 때문에, 시원하게 보관하는 일도 중요했다. 1898년 상하이 위생관 아서 스탠리(Arthur Stanley)는 백신 튜브를 아이스 박스에 보관할 것을 추천하고, 약국과 협약을 맺어 한 달 지난 두묘는 무료로 교환해주기로 했다.12) 위생교육회(衛生敎育會)에서 발간한 『광제의간(廣濟醫刊)』 상식란에서는 “두묘는 꼭 냉장고에 냉동된 상태로 저장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패하기 쉽다. 첫 접종에 효과를 보지 못한 경우는 이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13)
베이핑(北平) 내정부(内政部) 위생서(衛生署)에서는 “두묘는 일정 기간 내에 사용해야 효력이 있다. 유효기간은 우두묘가 들어있는 통에 기재가 되어 있다. 구입할 때는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나 확인해야 한다. 구입한 후에는 반드시 냉장고에 보관한다. 우두묘가 빛과 열을 받으면 효력을 쉽게 잃기 때문이다. 만약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으면 유효기간이 남아있더라도 효력을 잃기 쉽다”고 지적했다.14) 이처럼 보관법이 점차 발전한 덕분에 두묘는 더 오래, 더 멀리까지 보낼 수 있게 되었다.

2) 수입에서 국내 제조로

피어슨과 치우시 이래 중국에서는 암투암 방식과 외국에서 두묘를 수입하는 방식을 병용했다. 1863년 광저우(廣州)의 의료선교사 커(John G. Kerr)는 홍콩과 인도에 있는 의사에게서 우두묘를 받아 1,494명의 아이들에게 접종했다고 기록했다(조정은, 2021a: 462-463).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우두를 접종한 윌리엄 록하트(William Lockhart)는 캘러타와 런던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우두묘를 받았다(조정은, 2020: 131). 상하이 공공조계 행정기관인 공부국(工部局)에서도 런던에 우두묘를 요청하곤 했다. 1871년 위생관 보고서에 따르면 백신은 스코틀랜드 백신 제조소(Scottish Vaccine Dispensary)나 런던의 국립 백신 기구(National Vaccine Establishment)에서 오기도 하고, 상하이의 어린아이들에게서 얻기도 했다.15) 암투암 방식이 기본이었지만, 좋은 두장 제공자가 없으면 외국에서 가져온 튜브에 담긴 백신을 이용했다고 한다.16) 앞 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암투암 방식에 몇 가지 단점이 있다 보니, 이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외국의 두묘를 사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수입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1871년에 영국에서 보낸 백신은 장기간의 운송 과정에서 품질이 떨어져 사용할 수 없었다.17)
게다가 암투암이나 수입만으로는 필요한 백신의 양을 충족할 수 없었다. 1883년 공부국 위생관은 양질의 우두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우두묘를 상하이에서 직접 배양하거나, 혹은 일정 기간마다 영국에서 우두묘를 수입해서 저장해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부국 이사회에서는 우두묘를 배양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대신 위생관이 필요한 백신을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비용을 대주기로 했다(조정은, 2020: 143-144). 1896년 상하이 공부국 연례보고서에서는 신선한 우두묘 확보를 위해 홍커우에 있는 시립 축사에서 동물에게 접종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8) 1898년에는 격리 병원(Isolation Hospital)에 우두제조소(Vaccine Station)가 설치되었는데, 실험실과 수술실, 4마리의 송아지를 위한 마구간으로 구성되었다.19) 우두제조소에서 만든 백신 튜브는 1898년 25,000개에서 1930년 335,148개로 늘어났고, 1937년에는 652,595명분의 백신을 제조했다. 공공조계 위생처의 무료 우두 접종 건수도 1903년 520건, 1929년 72,790건, 1937년 423,454건으로 늘어났다.20) 즉 우두묘를 직접 제조하여 자체적으로 공급하면서 상하이 공공조계 위생처에서는 무료 접종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한편 우두묘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상하이 약국에서도 적극적으로 우두묘를 수입하여 판매했다. <그림 3>부터 <그림 9>의 우두묘 광고가 이를 증명한다. <그림 3>부터 <그림 7>은 『신보(申報)』, <그림 8>과 <그림 9>는 『신문보(新聞報)』에 실렸다.
<그림 3>과 <그림 4>는 각각 1909년과 1913년 동아공사서약국(東亞公司書藥局)의 광고로, 일본 도쿄(東京)의 우미노쿠라 우두관(角倉牛痘館)에서 제조한 최신 우두묘를 판매한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우두관의 설립자인 우미노쿠라 요시미치(角倉賀道)는 우두묘를 제조, 판매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두서도 출간하는 등, 우두를 알리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일본에서 우두를 수입한 이유는 거리가 가까워 신선한 두묘를 가져오기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5-7>은 각각 상해과발약방(上海科發藥房), 광관당약국(廣貫堂藥局), 상해오주대약국(上海五洲大薬局)의 우두묘 광고이다. 상해과발약방 광고는 “우두묘 판매”라는 제목 아래, “최근 중국인도 우두 접종을 선호하여 이곳저곳에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여 접종하고 있는데, 실로 공덕(功德)이 무량하다. 본 [약국] 주인도 제세(濟世)의 마음에서 선명(鮮明)한 두묘를 가져와 원가 양(洋)2각(角)5분(分)에 판매한다. 먼 곳에서는 알지 못할까 우려되어 신보에 게재하여 특별히 이렇게 널리 알린다”고 썼다. 광관당약국 광고는 “새 우두묘 도착(新到牛痘苗)”라는 글과 약국 주소, 약국 이름만 있는 간략한 형태이다. 상해오주대약국에서도 매우 신선한 두묘를 싼 값[洋1角5分]에 판매한다고 강조했다. 동쪽에서 가져왔다는 글귀가 있어 일본 수입산이 아닐까 짐작되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림 5-7>을 통해 두묘가 높은 수익을 올리는 품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두 접종을 공덕이 무량하다고 평가하고, 제세의 마음에서 두묘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우두 접종과 두묘의 확보를 자선사업으로 여기고 약국 홍보에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1)
이와 달리 우두묘의 수입에 비판적인 논조도 찾을 수 있다. 1917년 『실업천설(實業淺說)』의 기사에서는 “우두묘는 모두 외국에서 수입하고 우리가 제조할 수 없다. 이익이 외국으로 유출되니 매우 안타깝다”, “우두묘는 일본에서 겨우 5-6문(文)에 불과하나 중국에 오면 7-8각(角)대양(大洋)에 이른다”고 하였다.22)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속에서 외국 물건을 배척하고 중국 물건을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나간 영향이었다.
따라서 우두묘 제조는 국산품 애용의 일환이자 외국에 이권을 넘기지 않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 되었다. 1919년 가을에는 베이양(北洋)정부 중앙방역처에서 우두묘 제작에 성공했다. 이어서 1936년 기사에 따르면 난징 황푸로(黃埔路) 중앙방역처[실험소], 베이핑 천단(天壇) 제조소, 상하이시 위생시험소에서 우두묘를 제조했다고 한다.23) 같은 시기 잡지 기사에서는 “우두묘는 대부분 배로 실어 온 것으로 국내 생산품은 매우 적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약학이 발전하여 두묘의 국내 제조도 날로 보편화되고 있으니 당연히 기뻐할 일이다”, “이전에 우리나라는 우두묘를 제조하지 못했다. 따라서 우두묘는 모두 외국에서 온 것이었다. 최근 베이핑 중앙방역처에서 이미 매우 좋은 우두묘를 제조하고 있으니 외국 물건을 쓸 필요가 없다”라며 우두묘 제조를 환영하는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다.24)
사설 기관에서도 우두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설립된 상하이 신아혈청창(新亞血淸廠)이 대표적이다. <그림 8>과 <그림 9>는 성패(星牌) 우두묘 광고로, 아래에 신아혈청창 제조라 쓰여 있다. <그림 8>의 왼쪽과 <그림 9>의 위쪽에 있는 “청무이(程慕颐) 박사가 제조를 감독하였다(程慕颐博士監製)”는 글귀가 눈에 띈다. 청무이는 신아혈청창의 설립자이다. 그는 도쿄제국대학 의과를 졸업하고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상하이 위생시험소 소장 겸 기정(技正)을 맡아 우두묘는 물론 장티푸스, 콜레라 백신 제조 등에도 앞장섰다. <그림 8> 왼쪽에는 작은 글씨로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여 깨끗하게 정제하였으며 더욱 엄밀한 검사를 거쳤다”고 적혀 있고, <그림 9>에서도 성패 우두묘라는 글자 아래 “효력이 확실하다”, “정밀하게 검사하였다”고 강조했다. 맨 아래에는 약방에서 균일가로 판매한다고 적었다.
전문가의 이름을 걸고 품질이 좋은 우두묘임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약국 판매 우두묘의 평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38-1939년 상하이 두창 유행 관련 기록에서는 약국 시판 두묘가 발두력이 약하고 잡균이 포함된 경우가 많으니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 젖소를 기르는 목장에서 부업으로 우두묘를 제조하는 등, 상하이 교외에서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지 않고 무책임하게 두묘가 제조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25) 이는 우두묘가 수익성이 높은 상품으로 떠오르고, 두묘 제조의 방법이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유되면서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성패 우두묘 판매자는 성패 우두묘가 믿을 만한 곳에서 제조하여 품질이 좋다는 점을 내세워 다른 우두묘와의 차별을 꾀하였다.
이처럼 공공기관과 민간에서 우두묘를 제조하여 공급하였지만, 농촌에까지 전해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허베이성(河北省) 딩현(定縣)에서 7년간 우두 접종 운동을 진행한 위환원(俞煥文)의 1937년 기록에 따르면 농촌 여성들이 “우리는 양화(洋花)는 접종하지 않는다. 본지화(本地花)를 접종할 것이다”라며 우두 접종을 거부하는 사례가 있었다. 양화(洋花)는 외국의 두장, 본지화(本地花)는 중국인에게서 암투암 방식으로 얻는 두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환원은 “소위 암투암[人工挑漿]은 소독할 수단이 없어 피부가 짓무를 위험이 있지만, 우리가 가져온 두장은 베이핑 중앙방역처에서 제조한 것으로, 결코 외국에서 건너온 게 아니”라 설득해야 했다. 그는 여전히 구습에 젖어있는 농촌 부녀자를 계몽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설득과 교육에 힘입어 점차 우두를 접종받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소개했다.26) 이 사례는 농촌 사람들이 국내에서 생산 유통되는 우두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두묘는 모두 외국에서 온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3. 접종 도구와 기술의 현지화

1) 우두칼의 선택과 현실

우두칼은 우두묘를 접종하는 데 사용한 도구이다. <그림 10-12>는 각각 제너의 우두칼, 피어슨의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 우두칼 그림, 『인두략』의 우두칼 그림이다. 셋 모두 흡사한 형태이다.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와 『인두략』의 우두칼 그림에는 짧은 소개글이 붙어있다. 그 중 『인두략』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두칼[種痘刀]은 칼날이 얇고 날카로우며, 날을 보호하기 위해 거북이[玳瑁]의 등딱지로 칼집을 만들어 접을 수 있게 했다. 상아로 된 작은 핀(象牙小簮)은 두장을 더는 용도로 쓰는데, 양 끝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어 양쪽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둘 다 길이는 한 마디(寸) 정도이다.27)
1914년 딩푸바오는 세 종류의 우두칼 그림을 소개했다[그림 13].28) 첫 번째 그림에는 접종용 랜싯(Lancet)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당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형태로 생각된다. 두 번째 그림에는 “華伊喜(ウイヒハルト)씨 접종도”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華伊喜(ウイヒハルト)”는 서양인의 이름을 음차한 듯한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29) 딩푸바오는 최근에는 강철제 접종칼, 즉 가장 아래에 있는 칼을 사용한다고 기록했다. 염가에 사용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접종 도구를 선택할 때 편의성과 가격이 중요한 고려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전용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침이나 바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가격 때문에 나왔다. 1935년 『강소성소학교사반월간(江蘇省小學敎師半月刊)』 “독자의 목소리”에서 푸전뎬(符鎮殿)이라는 사람은 “우두칼은 표피를 째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두묘를 피부 속에 침투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바늘로 우두칼을 대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바늘은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일반적인 바늘을 말한다. 그는 우두 접종 시 바늘을 사용하면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고 보았다. 우두칼은 가격이 비싸고 특별하게 구매해둬야 하지만, 바늘은 경제적이며 어디서든 구하기 쉽다. 우두칼을 많이 사용해 본 사람은 깊게 찌르고 싶으면 깊게 찌르고 얕게 찌르고 싶으면 얕게 찌르는 조작이 능숙하지만 처음 써 보는 사람은 조작이 어려운데, 바늘은 이러한 폐해가 없다.30) 누구나 쉽고 편하게 우두를 접종하도록 하려면, 비싸고 손에 익어야 하는 우두칼이 아니라 싸고 기술이 필요없는 바늘을 이용하자는 주장이다. 안전보다도 일단은 우두 접종을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침이 우두칼을 대체할 수 있다는 중의학 쪽의 주장도 매우 흥미롭다. 장융성(張永生)은 삼릉침(三稜鍼)을 실험해보니 우두칼보다 편하고 폐단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양식 약방에서 파는 우두칼은 백동으로 제작하며 길이는 약 2촌(寸), 폭은 약 3분(分)의 장방형 모양이다. 칼의 한쪽 끝은 검의 머리 모양이고 한쪽 끝은 다섯 개의 이가 달린 갈퀴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이 설명은 <그림 14>와 같은 우두칼을 뜻한다고 생각된다. 장융성은 삼릉침과 우두칼의 편리함과 운용을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양쪽 머리가 다른 모양인 우두칼보다 한쪽만 있는 삼릉침이 사용하기 편하다. 우두칼의 검의 머리 모양은 갈퀴 모양보다 날카롭지만, 삼릉침은 검의 머리 모양보다 날카롭다. 우두칼의 갈퀴 모양은 아기에게 접종할 때 사용하는 데, 검의 머리 모양보다 통증이 더하다. 그러므로 통증이 없기를 바란다면 삼릉침을 사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삼릉침은 인체의 경맥혈도에 우두를 접종하기 수월하다. 따라서 삼릉침을 우두칼 대신 사용하여 침술의 이용을 확대해야 한다.31) 중의학에서도 우두를 보편적인 두창 예방책으로 수용한 상황에서, 서양의 도구가 아닌 침을 사용함으로써 중의학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자 한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사용된 다양한 형태의 우두 접종 도구 중에는 <그림 15>와 같은 바늘 형태도 있다. 실제로 당시 각 나라에서 사용한 접종 도구는 칼부터 바늘 형태까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접종 방식도 찌르는 방식, 째는 방식, 긁는 방식 등 다양했지만, 모두 피부에 상처를 내서 두묘를 바른다는 점에는 같았다.32) 즉 도구는 “두묘를 피부 속에 주입한다”는 기본적인 역할만 충족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가격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도구 선택을 좌우하는 예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2) 혈자리 접종에서 흔적이 없는 접종으로

제너 이래 우두를 접종하는 부위는 주로 팔이었다. 사실 우두의 원리는 몸 안에 두묘를 집어넣는 데 있으므로, 몸의 어느 부위에 접종하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팔에 주로 접종한 것은 노출이 쉬워 접종하기 좋고 예후를 살피기에도 편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피어슨 이래 우두는 주로 팔에 접종했다. 다만 그 접종 부위와 방식에 중국식 해석이 더해졌다. 피어슨은 분명 접종부위에 대해 “팔꿈치 위 어깨에 가까운 곳으로, 왼팔이든 오른팔이든 상관없다”라고 하였다.33)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의 접종 부위 그림에도, 한쪽 팔에 접종 부위가 한 군데 그려져 있을 뿐이다[그림 16]. 그러나 치우시는 『인두략』에서 우두는 양팔의 두 혈자리에 접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덧붙였다. 우두의 원리는 신장에 있는 선천지독[胎毒]을 몸 밖으로 끄집어 냄[引痘]에 있으며, 삼초(三焦)의 근원이 신장이므로 삼초와 연결된 소락(消濼)34)혈과 청냉연(淸冷淵)혈 두 혈자리에 접종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림 17].35) 접종 방식에 있어서도 피어슨은 “피막과 평행이 되게 찌른다(平刺皮膜)”라고만 했지만, 치우시는 여기에 “옛 침자법(針刺法)을 따른다”라는 말을 붙여, 마치 전통의학에서 침을 찌르는 방식과 같은 것처럼 표현했다(張嘉鳳, 2007: 781). 앞 절에서 설명한 침이나 바늘로 우두칼을 대체하자는 논의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중의학적 이론의 영향이 있었다.
이후 중국에서 우두법을 논한 사람들은 대부분 치우시의 방식에 따랐다(張嘉鳳, 2007 참고). 중서의회통(中西醫匯通)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인 당종해(唐宗海)도 『의경정의(醫經精義)』에서 같은 논리를 수용하고 있다.36) 3살이 넘은 아이는 팔도 이미 길어져 두 혈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으니 두 혈 사이에 있는 협백(俠白)혈에도 접종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그림 18]. 저자는 만약 백일이 지나지 않았다면 두 혈에만 접종해도 된다고 하였다.37)
당연히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들은 양팔에 접종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양팔에 모두 접종하는 건 어린아이의 고통만을 가중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두는 사지에 모두 접종가능하나, 가장 편하므로 팔에 접종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조정은, 2022: 41). 한 쪽 팔에 2-6곳 정도 접종하는 게 보편적이었던 듯하다. 딩푸바오는 한쪽 팔에 위아래로 네 군데를 절개한 그림을 남겼다[그림 19]. 간격을 두는 이유는 농포가 서로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38) 내정부 위생처에서는 상하로 하나씩 옆으로 그은 그림을 소개했다[그림 20]. <그림 21>은 두 군데씩 세 줄로 배열하여 총 6곳을 접종한 그림이다.
위 그림은 모두 절종법(切種法)을 소개한 것이다. 내정부 위생서에 따르면 절종법은 말 그대로 피부를 몇 군데 절개하여 두묘를 집어넣는 방식이다. 먼저 왼손으로 이미 소독한 상완 안쪽을 잡고 우두를 바를 상완 바깥쪽 피부를 긴장시킨다. 우두묘를 아래위로 두 곳에 바른다. 오른손으로는 이미 소독한 침을 잡고 우두묘를 바른 피부의 표피를 절개하여 진피를 노출시킨다. 붉은색은 비치지만 피는 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두칼로 절개한 부분을 약간 마찰하여 수 분 후에 두묘가 마르면 끝이 난다. 절종법 외에는 연속압자법이 있는데, 이는 외피를 여러 차례 찔러 우두묘가 피부 속으로 주입되게 하는 방식이다. 우두묘를 바른 피부를 25차례 정도 연속으로 눌러 우두묘가 피부 속에 침투하게 하는 것이다. 종두 후 피부에 남은 우두묘는 말릴 필요 없이 소독솜으로 가볍게 제거하면 된다.39)
이러한 방식의 가장 큰 단점은 접종 흔적[痘痕]을 남긴다는 것이다. 흔적이 남지 않는 우두 접종법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921년 7월 4일 『시보(時報)』에는 일본의학박사 야마우치(山內保)가 연구하여 남녀노소에게 실험한 결과 우두 접종 흔적이 남지 않았으며, 도쿄 준텐도(順天堂) 의원의 사토(佐藤一郎)도 어린아이에게 접종하였는데 역시 흔적이 남지 않아 의학계 모두가 놀랐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40) 기사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절개할 필요 없이 피부 속에 직접 우두묘를 집어넣는 피하주사 방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어서 1930년 7월 6일 『신보』에도 피하주사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도쿄 전염병연구소 기사(技師) 야하기 박사(失矧博士)가 종두균의 피하주사를 발명하였다. 이 방법은 주사를 맞은 후 곧바로 입욕할 수 있고 종래의 방식과 달리 흔적도 두드러지지 않아 큰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41)
이어서 1937년에도 “흔적이 없는 종두(没有疤痕的種痘)”라는 제목으로 피하 주사를 이용한 종두접종을 선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저자는 “구식 절종법의 반응상태”라는 이름으로 6곳에 종두를 접종한 후 반응상태를 찍은 사진을 소개하면서[그림 21], 이처럼 두흔이 크게 남는 절종법을 비판했다. 게다가 한 번으로 평생 면역이 보장되는 인두와 달리 우두는 주기적으로 맞아야 하므로, 두흔은 계속해서 늘어나기만 할 것이다. 이는 점점 노출이 일상적이 되어 가던 시대에 청년층, 특히 젊은 여성에게는 큰 문제였다. 기사에서는 피하주사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하였다. 먼저 접종 부위는 다른 방식과 마찬가지로 팔의 바깥쪽이 가장 좋다. 소독한 후 정제된 두묘를 주사한다. 주사 후 4-5일은 반응이 없다가 보통 6일 후부터 반응이 시작되어 8-10일에 최고조에 달한다. 주사를 놓은 곳이 붉게 부어오르고, 피부밑에 단단한 알갱이[硬核]가 맺히고 미열이 난다. 1주일 후 부기가 가라앉고 피부밑 알갱이도 한 달 이내에 사라진다. 피하주사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보통 사람이 가장 금기시하는 두흔이 전혀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절개식에 비해 아픔이 덜하여 어린아이도 맞기 용이했고, 종두를 맞은 적이 있으면 효능이 약하게 나타나기도 하는 절개식과 달리 종두를 여러 번 맞았더라도 절대적으로 효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42)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두가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경맥설과 침자법을 적용하여 우두법을 실천했다. 그러나 피하주사에 관한 기사에서는 이미 어떠한 전통적 해석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중국인들도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우두관과 미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접종 흔적 때문에 우두를 꺼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피하주사 방식은 매우 유용했을 것이지만, 이 기술이 실제로 도입되는 데에는 시일이 소요되었다. 1937년 일본 동인회(同仁會)43) 의 기간지 『동인의학(同仁醫學)』에 피하주사에 대한 문답이 실렸다. 이 내용에 따르면 여러 잡지에서 이 기술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지만, 피하주사를 이용한 종두 접종은 아직 통용되지 않고 있었다.44) 1938-1939년 상하이 두창 유행 상황을 기록한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상하이에서는 여전히 피하주사법이 아닌 절개식을 사용했다. 공공조계 위생처에서는 <그림 20>과 같이 상완 바깥쪽에 1인치 정도의 길이로 1인치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줄을 긋는 형태였다. 프랑스 조계에서는 5밀리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내에 여러 줄을 교차시킨 것을 2-3개 정도 만드는 식이었다. 일본인은 일본 국내와 같이 십자형으로 절개한다고 적었다. 즉 1930년대 말에도 피하주사법이 아닌 기존 방식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45)

4. 결론

우두법은 소가 앓는 전염성질병인 우두의 고름을 사람에게 접종하여 두창에 대한 면역력을 얻게 하는 예방법이다. 1805년 알렉산더 피어슨이 중국 최초의 우두 접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접종하는 암투암 방식 덕분에 백신이 활력을 잃지 않고 마카오까지 온 덕분이다. 피어슨이나 그 뒤를 이은 치우시는 암투암 방식을 활용했기 때문에, 백신 보관 용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접종 방식이 사람에게 얻은 백신을 소에게 접종했다가 다시 인간에게 접종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보관 용기 또한 유리관부터 튜브 형태까지 다양해졌다. 낮은 온도에서 보관해야 한다는 유의점은 점차 상식이 되었다. 이처럼 보관법의 발전으로 우두묘의 보존 기간이 길어지면서, 먼 곳까지 우두묘를 보낼 수 있게 된다. 이는 우두 접종의 확대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직접 보관하는 방식 외에도, 외국에서 직접 우두묘를 수입하기도 했다. 남아있는 광고를 통해, 백신의 수입 판매가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약국에서는 전통적인 자선사업의 형태를 빌려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백신을 수입하고 판매하는 것이라 홍보했다. 한편으로 가격이 비싸고 외국산이라는 이유로 수입 백신을 배척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는 당시 중국에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이 팽배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중국에서 직접 백신을 제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상하이와 베이징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백신 제조가 시작되었다.
백신의 수입이나 제조뿐만 아니라 접종 기술도 현지화의 길을 걸었다. 전통 의학의 경맥설 및 침자법을 활용하여 우두를 접종함으로써, 중의학적 관념에 익숙한 중국인들도 쉽게 우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중의학계는 서양의 도구가 아닌 침을 사용함으로써 중의학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자 했다. 이는 서양의학의 도전에 직면한 중의학이 나름대로 우두법과 융화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즉, 의학 기술과 도구는 중국에 그대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중국적 맥락을 받아들이면서 현지화되었다. 한편으로 1920년대 들어 피하주사를 선호하고 접종 흔적이 남는 것을 꺼리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그들도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우두관과 미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중국의 우두 기술은 보편적인 발전과정을 따라가면서도, 근대 중국이라는 배경의 영향을 받으며 중국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역으로 우두 기술은 근대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역사가가 의학 기술과 도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부족한 점을 고백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서론에서 밝힌 것처럼, 이 글에서는 우선 우두 기술이 근대 중국에서 어떻게 수용[현지화]되었는지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도시와 농촌 간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지역별로 어떤 특색이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후속 연구에서는 도시-농촌 간의 차이 및 지역별 특색을 분석한 개별 연구를 진행하여, 그 성과를 토대로 중국 근대 우두법 수용의 양상을 더욱 명료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Notes

1) 이 내용은 피어슨이 영문으로 쓰고 스탠턴(George Staunton)이 중국어로 번역한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𠸄咭唎國新出種痘奇書)』의 영문 초록에서 가져왔다.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 본문과 영문초록은 다음 책의 맨 뒤에 실려 있다. 인용문은 이 책의 312쪽에 실린 내용이다. “Abstract of the Contents of the Following Chinese Work on the Vaccine Enoculation”, George Thomas Staunton, Miscellaneous Notices Relating to China, and Our Commercial Intercourse with that Country. Part the Second (Havant: I. Skelton, 1828).

2) 이 글에서는 광동과기출판사(廣東科技出版社) 중의경전고적집성(中醫經典吉籍集成) 영인본 『인두신법전서(引痘新法全書)』(1857년)를 이용했다. (淸) 邱熺 撰, 『引痘新法全書』 (中醫經典吉籍集成(影印本), 廣東科技出版社, 2018).

3) Alexander Pearson, “Report Submitted to the Board of the National Vaccine Establishment, Respecting the Introduction of the Practice of Vaccine Inoculation into China, A. D. 1805; Its Progress since that Period, and Its Actual State. Dated Canton, February I8th 1816”, The Chinese Repository 2, 1833, p.37.

4) 『引痘新法全書』, 70-71쪽.

5) Edward Henderson, “Appendix A: Health Officer’s Report”, Municipal Council of Shanghai,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March, 1871 (Shanghai: Printed at the “North-China Hearld” Office, 1871) p.19.

6) Edward Henderson, R. A. Jamieson, “Appendix A: Health Officer’s Report 1871”, Municipal Council of Shanghai,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March, 1872 (1872) p.43.

7) James Johnston, “Health Officer’s Report 1879”, Municipal Council of Shanghai,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79 and Budge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80 (Shanghai: Printed at the “Celestial Empire” Office, 26 and 28, Kiangse Road, 1880) p.66.

8) 廣瀬元恭, 「新訂痘種奇法圖式」, 『新訂痘種奇法』 (時習堂藏版, 1849). 『신정두종기법』에 대해서는 조정은, 2018: 359-362 참고.

9) 本間棗軒, 『内科秘録』 (横山町(江戸) : 玉巌堂, 1867).

10) 丁福保, 「學說: 種牛痘法一夕談 : 附圖」, 『中西醫學報』4(10), 1914, 5-6쪽.

11) Arthur Stanley, “Health Officer’s Report. Shanghai, 31st December, 1898”,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98 and Budget for the Year Ending 31st December 1899 (Shanghai: Printed by Kelly&Walsh, Limited, Nanking Road, 1899) p.108.

12) Arthur Stanley, “Health Officer’s Report. Shanghai, 31st December, 1898”, p.109.

13) 「常識: 簡易安全種痘法」, 衛生敎育會, 『廣濟醫刊』2(7), 1925, 19쪽.

14) 内政部衛生署, 「天花及其預防方法: 舊法種痘的害處, 新法種痘的好處(附圖)」, 『敎育短波』55, 1936, 14쪽.

15) Edward Henderson, R. A. Jamieson, “Appendix A: Health Officer’s Report 1871”, p.43.

16) E. Henderson, R. A. Jamieson, “Health Officer’s Report 1872”, Municipal Council of Shanghai,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March, 1873 (Shanghai: Printed by at the “North-China Herald” Office, 1873) p.68.

17) Edward Henderson, R. A. Jamieson, “Appendix A: Health Officer’s Report, 1871”, p.28.

18) J. Taylor Grant, “Health Officer’s Report for the Year 1896”, Shanghai Municipal Council,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96 and Budget for the Year Ending 31st December 1897 (Shanghai: Printed by Kelly & Walsh, Limited, Manking Road, 1897) p.91.

19) “Works Matters: Engineer and Surveyor’s Report. Shanghai, January 16th, 1899”,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98 and Budget for the Year Ending 31st December 1899 (Shanghai: Printed by Kelly&Walsh, Limited, Nanking Road, 1899) p.167.

20) 1898년부터 1930년까지 우두제조소에서 만든 백신 튜브의 수, 1903년부터 1930년까지 공공조계 위생처의 무료 우두 접종 건수는 조정은, 2020: 138, 145 참고. 1937년 자료는 “Report of Acting-commissioner of Public Health”, Report for the Year 1937 and Budget for the Year 1938 (Shanghai: North-China Daily News & Herald, LTD, 1938) p.117, 139 참고.

21) 중국 약방은 전통적으로 자선사업을 홍보방식의 하나로 활용했다. 박하린, 「근대 天津 中藥業의 전환과 계승: 樂家老鋪 達人堂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3, 19-21쪽 참고.

22) 曹志林, 「牛痘苗之製法」, 『實業淺說』 98, 1917, 1쪽.

23) 傅和平, 「演講 : 種牛痘的方法」, 『廣播周報』 75, 1936, 44쪽.

24) 鄭鏡人, 「牛痘苗之製造(附照片)」, 『東方畫報』 33(4), 1936, 11쪽; 內政部衛生署, 「天花及其預防方法」, 14쪽.

25) 「上海に於ける痘瘡流行状況 : 自昭和十三年至昭和十四年」, 『興技調査資料』 27 (東京: 興亞院技術部, 1939) 15-16쪽.

26) 俞煥文, 「定縣種痘七年經過」, 『大公報(上海版)』, 1937년 1월 5일.

27) 『引痘新法全書』, 59쪽.

28) 丁福保, 「學說: 種牛痘法一夕談: 附圖」, 2쪽.

29) 딩푸바오는 주로 일본어 의학서적을 번역하여 중국에 소개한 인물이다. 이 글도 일본어책을 참고하거나 편역했을 가능성이 크나 확인이 어렵다.

30) 符鎮殿, 「讀者之聲 : 關於種牛痘的一點小意見(附圖)」, 『江蘇省小學敎師半月刊』 2(20), 1935, 46쪽.

31) 張永生, 「三稜鍼與牛痘刀」, 『鍼灸雜誌』 3(2), 1935, 26쪽.

32) 중국과 일본은 우두칼을 사용하여 몇 개의 십자형 상흔을 긋고 두묘를 바르는 방식으로 우두를 접종했다. 독일은 절개라기보다는 칼끝으로 찌르는 쪽에 가깝고, 덴마크는 무딘 칼로 긁는 형태였다. 프랑스는 일본과 비슷했다. 미국은 나무 바늘과 같은 물건으로 긁어서 상처를 냈다. 柳江, 「没有疤痕的種痘」, 『良友畵報』 124, 1937, 32쪽.

33) 『咭唎國新出種痘奇書』, 5쪽.

34) 『인두략』에는 消爍으로 표기되어 있다. 『引痘新法全書』, 65쪽.

35) 『引痘新法全書』, 65-66쪽; 嚴蒼山, 「種牛痘時之淸冷淵消爍二穴」, 『上海醫報』 17, 1930, 169쪽.

36) 張永生, 「三稜鍼與牛痘刀」, 26쪽.

37) 劉毓麟, 「報告門: 引種牛痘淺說通告(附圖)」, 『醫學雜誌』 5, 1922, 80쪽.

38) 丁福保, 「學說: 種牛痘法一夕談: 附圖」, 3쪽.

39) 「天花及其預防方法」, 14쪽.

40) 馬崇鏸, 「種牛痘無痕跡」, 『時報』, 1921년 7월 4일.

41) 「皮下注射種痘成功」, 『申報』, 1930년 7월 6일.

42) 柳江, 「没有疤痕的種痘」, 32-33쪽.

43) 동인회에 관해서는 조정은, 2021b: 12 참고.

44) 「診療問答: 皮下種痘法」, 『同仁醫學』 10(3), 1937, 72-73쪽.

45) 「上海に於ける痘瘡流行状況」, 15-16쪽

그림 1.
우두 접종 도구
Figure 1. Vaccination tools
kjmh-32-1-1f1.jpg
그림 2.
두장을 보관하는 유리관
Figure 2. Glass tubes for storing vaccine lymph
kjmh-32-1-1f2.jpg
그림 3.
우두묘 광고
Figure 3. An advertisement for the vaccine
kjmh-32-1-1f3.jpg
그림 4.
우두묘 광고
Figure 4. An advertisement for the vaccine
kjmh-32-1-1f4.jpg
그림 5.
우두묘 광고
Figure 5. An advertisement for the vaccine
kjmh-32-1-1f5.jpg
그림 6.
우두묘 광고
Figure 6. An advertisement for the vaccine
kjmh-32-1-1f6.jpg
그림 7.
우두묘 광고
Figure 7. An advertisement for the vaccine
kjmh-32-1-1f7.jpg
그림 8.
성패(星牌) 우두묘 광고
Figure 8. An advertisement for Xingpai (星牌)’s vaccine
kjmh-32-1-1f8.jpg
그림 9.
성패(星牌) 우두묘 광고
Figure 9. An advertisement for Xingpai (星牌)’s vaccine
kjmh-32-1-1f9.jpg
그림 10.
제너의 우두칼
Figure 10. Edward Jenner’s lancets
kjmh-32-1-1f10.jpg
그림 11.
우두칼
Figure 11. Vaccination lancet
kjmh-32-1-1f11.jpg
그림 12.
우두칼
Figure 12. Vaccination lancet
kjmh-32-1-1f12.jpg
그림 13.
세 종류의 우두칼
Figure 13. Three types of vaccination lancets
kjmh-32-1-1f13.jpg
그림 14.
두 개의 머리가 달린 우두칼
Figure 14. A vaccination lancet with two heads
kjmh-32-1-1f14.jpg
그림 15.
바늘 모양의 접종도구
Figure 15. Needle-shaped inoculation tools
kjmh-32-1-1f15.jpg
그림 16.
우두 접종 부위
Figure 16. Vaccination site
kjmh-32-1-1f16.jpg
그림 17.
우두를 접종할 두 혈자리
Figure 17. Two acupuncture points for inoculations
kjmh-32-1-1f17.jpg
그림 18.
우두를 접종할 세 혈자리
Figure 18. Three acupuncture points for inoculations
kjmh-32-1-1f18.jpg
그림 19.
네 곳을 절개한 그림
Figure 19. A picture with four incisions
kjmh-32-1-1f19.jpg
그림 20.
두 곳을 절개한 그림
Figure 20. A picture with two incisions
kjmh-32-1-1f20.jpg
그림 21.
구식 절종법의 반응상태
Figure 21. Reaction to the outdated incisional method of vaccination
kjmh-32-1-1f21.jpg

참고문헌 REFERENCES

1. (淸) 邱熺 撰, 『引痘新法全書』 (中醫經典吉籍集成(影印本), 廣東科技出版社, 2018).

2. 『江蘇省小學敎師半月刊』, 『廣濟醫刊』, 『廣播周報』, 『敎育短波』, 『大公報(上海版)』, 『東方畫報』, 『同仁醫學』, 『良友畵報』, 『上海醫報』, 『時報』, 『新聞報』, 『申報』, 『實業淺說』, 『醫學雜誌』, 『中西醫學報』, 『鍼灸雜誌』.

3. 「上海に於ける痘瘡流行状況 : 自昭和十三年至昭和十四年」, 『興技調査資料』 27 (東京: 興亞院技術部, 1939). 1939).

4. 廣瀬元恭, 『新訂痘種奇法』 (時習堂藏版, 1849). 1849).

5. 本間 棗軒, 『内科秘録』 (横山町(江戸): 玉巌堂, 1867). 1867).

6. Staunton, George Thomas. Miscellaneous Notices Relating to China, and Our Commercial Intercourse with that Country. Part the Second (Havant: I. Skelton, 1828).

7. Municipal Council of Shanghai,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March, 1871 (Shanghai: Printed at the “North-China Hearld” Office, 1871).

8. __________________________,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March, 1872 (1872).

9. __________________________,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March, 1873 (Shanghai: Printed by at the “North-China Herald” Office, 1873).

10. __________________________,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79 and Budge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80 (Shanghai: Printed at the “Celestial Empire” Office, 26 and 28, Kiangse Road, 1880).

11. __________________________,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98 and Budget for the Year Ending 31st December 1899 (Shanghai: Printed by Kelly&Walsh, Limited, Nanking Road, 1899).

12. __________________________, Report for the Year Ended 31st December 1896 and Budget for the Year Ending 31st December 1897 (Shanghai: Printed by Kelly & Walsh, Limited, Manking Road, 1897).

13. __________________________, Report for the Year 1937 and Budget for the Year 1938 (Shanghai: North-China Daily News & Herald, LTD, 1938).

14. 朴基水, 「淸 중엽 牛痘法의 도입과정과 광동 行商의 역할」, 『명청사연구』 40 (2013), 219-270쪽.

15. 박하린, 「근대 天津 中藥業의 전환과 계승 : 樂家老鋪 達人堂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3.

16. 신규환, 「民國 後期 北京에서 두창의 역습과 근대적 공간 통제 : 지역 거점 방역에서 방문 접종으로」, 『역사학보』 252 (2021), 65-91쪽.

17. ______, 「20세기 전반 중국의 두창 유행과 관민의 대응: 상하이와 베이징의 사례를 중심으로」, 2022년 의료역사연구회 · 대구대학교 메디토리연구소 ·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 “질병과 국가” 연구사업팀 공동 동계워크숍 발표문 (2022년 1월 15일), 25-37쪽.

18. ______, 「한국 종두법의 발전과 의학 기술의 문제 : 인두법에서 우두법으로 전환과 의학지식과 기술의 간극」, 『의료사회사연구』 10 (2022), 59-83쪽.

19. 이현주,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 한국의 우두법 및 백신접종 연구에 있어 지구사적 관점(global perspective)의 유용성」, 『동국사학』 65 (2018a), 267-313쪽.

20. ______, 「미국에서의 백신 반대 운동」, 『미국사연구』 47 (2018b), 1-34쪽.

21. 조정은, 「의학지식의 수용과 변용 : 종두법(種痘法)의 전래와 한문 우두서(牛痘書)를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49 (2018), 339-372쪽.

22. ______, 「근대 상하이 공공조계 우두 접종과 거주민의 반응: 지역적 · 문화적 비교를 중심으로」, 『의사학』 29-1 (2020), 121-164쪽.

23. ______, 「청말 의료선교사의 눈으로 본 두창과 종두법」, 『명청사연구』 65 (2021a), 451-482쪽.

24. ______, 「일본점령기 상하이의 콜레라 방역과 도시공간 : 백신 강제 접종과 주민의 인식을 중심으로」, 『도시연구』 26 (2021b), 7-39쪽.

25. ______, 「근대 중국 우두지식의 보편화를 향한 노력」, 『의료사회사연구』 9 (2022), 31-58쪽.

26. 董少新, 「論邱熺與牛痘在華之傳播」, 『廣東社會科學』 (2007), 134-140쪽.

27. 鄧鐵濤 主編, 『中國防疫史』 (廣西科學技術出版社, 2006).

28. 梁其姿, 『面對疾病: 傳統中國社會的醫療觀念與組織』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12).

29. 李計籌, 「民國時期廣州的種痘事業」, 『南京中醫藥大學學報(社會科學版)』 (2014), 88-94쪽.

30. 範行準, 『中國預防醫學思想史』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53).

31. 王彬, 「淸代牛痘術在華推廣贊助路徑探析」, 『貴陽學院學報(社會科學版)』 (2020), 67-71쪽.

32. 寥育群, 『岐黃醫道』 (沈陽市: 遼寧敎育出版社, 1997).

33. 伊莎貝爾 · 莫賴斯, 「種牛痘與澳門葡人」, 『廣東社會科學』 (2007), 128-133쪽.

34. 張嘉鳳, 「十九世紀初牛痘的在地化 : 以『(.

35. 黃穎, 「從《保赤指南車》探析鄧旒對牛痘接種術的改良」, 『福建中醫藥』 (2022), 32-34쪽.

36. .

37. 香西豊子, 『種痘という衛生: 近世日本における予防接種の歴史』 (東京大學出版會, 2019).

38. Nakajima, Chieko. Body, Society, and Nation: the Creation of Public Health and Urban Culture in Shanghai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8).

39. Fenner, F., Henderson, D. A., Arita, I., Jezek, Z and Ladnyi, I. D. Smallpox and Its Eradication (Geneva: World Health Organization, 1988).

TOOLS
PDF Links  PDF Links
PubReader  PubReader
ePub Link  ePub Link
Full text via DOI  Full text via DOI
Download Citation  Download Citation
  Print
Share:      
METRICS
0
Crossref
0
Scopus
2,556
View
92
Download
Related article
Editorial Office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partment of Humanities and Social Medicine, College of Medicine,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222 Banpo-daero, Seocho-gu, Seoul, Korea (06591)
TEL: +82-2-3147-8306   FAX: +82-2-3147-8480   E-mail: medhistory@hanmail.net
About |  Browse Articles |  Current Issue |  For Authors and Reviewers |  KSHM HOME
Copyright ©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Developed in M2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