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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2(1); 2023 > Article
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에서 의지, 의학, 그리고 장애: A. A. 마크스 의지 회사(A. A. Marks Artificial Limb Company)를 중심으로

Abstract

Through the case of the A. A. Marks Artificial Limb Company, this article explores how the technology and business of prosthetics grew in America up to the First World War. In 1853, Amasa A. Marks established the artificial limb company A. A. Marks in New York. By the time of the First World War, the company had become the largest supplier of artificial limbs in the United States and had gained international recognition, exporting its products all over the world. Focusing on the company’s growth before the war, this paper analyzes how American artificial limb makers positioned themselves between art and medicine and between surgeons and disabled customers at a time when their occupation had yet to be established as a specialized profession.
From the mid-nineteenth century when the artificial limb business burgeoned to the First World War, American society went through various social and cultural changes that influenced the prosthetics industry and the perception of disability. During the Civil War, numerous soldiers were injured but survived because advancements in amputation techniques enabled surgeons to save more lives despite limb loss. The growing number of maimed veterans required more mechanical and public support for their rehabilitation. As a reconstruction project of the nation and a way to address the sense of damaged masculinity felt by injured war veterans, both Union and Confederate states approved support for providing them with artificial limbs at public expense. In postbellum America, as well as deformity and amputation, industrialization created a need for artificial limbs as the brutality of advanced weapons and unfortunate accidents involving machines and railroads increased the number of amputees. Thus during the late nineteenth century and early twentieth century, recognition of maimed bodies in public places went through a legislative and cultural transformation.
The growth of artificial limb manufacturer A. A. Marks was in tune with such technological, medical, and sociocultural changes. Along with technological innovations and patents to protect these innovations, Amasa Marks devised various marketing methods and strategies through which the company secured customers and finally expanded the prosthetics market. As its customers increased, the company accumulated quantitative and qualitative data from patients’ responses and interviews, and its own observations.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George E. Marks, Amasa Marks’s son and a representative of the company, analyzed customers’ experiences of disability, gathering information on patterns of disability and mortality rates. Based on the company’s rich experience with a large number of patient cases, George Marks advanced criticisms of surgical methods and provided second opinions on amputation surgeries. In doing so, he attempted to promote the limb maker’s position from mere artisan to specialist, redef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medicine and prosthetics and between surgeon and prosthetist. He also conveyed patients’ complaints and needs to the medical men in the process, and distributed the company’s findings and knowledge to surgeons and the general public by publishing treatises, articles, and manuals. Consequently, the company influenced an important epistemological turn in which the prosthetic perspective was considered prior to amputation surgery, not just as an inevitable follow-up.

1. 들어가며

손상된 신체의 외형과 기능을 보완하거나 대체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인간은 다양한 의지(artificial limb) 기술을 발달 시켜왔다. 의지는 상지의지와 하지의지로 나누어지며, 의수(artificial arm)는 전자에 그리고 의족(artificial leg)은 후자에 해당된다. 서양의 역사에 있어 현대적인 의지보조기학1)의 등장과 괄목할만한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는 대체로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본다. 대규모 인명 피해가 있었던 이 전쟁을 기점으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경험하면서 의족 및 의수와 같은 인공 신체의 재료(알루미늄 그리고 그 이후 플라스틱의 도입), 생산방식(표준화), 연구 개발 방식이 변화했고, 이 분야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성장했기 때문이다.2)
미국의 경우 1차 세계대전 말미(1917년 4월 16일)에 참전을 결정했으나 전쟁 기간 동안 의지를 해외로 수출했다. 이 시기 미국의 의지 기술은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을 입은 프랑스와 영국 군인들은 미국의 의지를 착용했다. 1918년 프랑스인들은 나무에 생가죽을 이용해 의지를 제작하는 미국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영국에서 참전 군인 재활의 중심지였던 로햄튼 퀸 메리 부속병원(Queen Mary Convalescent Auxiliary Hospital at Roehampton)의 경우 미국의 의지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Guyatt, 2001: 309, 311; McMaid, 2002: 136).3)
미국에서 1차 세계대전 이전 의지에 관련된 연구는 주로 남북전쟁(The Civil War, 1861-1865)이라는 큰 사회변동에 대한 연구과 관련해 발전해 왔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기록된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대략 62만에서 85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다수의 사지 절단 환자가 발생했다.4) 이 시기 처음으로 상이군인에게 의지를 공급하는 프로그램이 실시되면서 남북전쟁 이전에 서서히 성장하던 미국의 의지 산업이 더욱 진보하게 되었다. 리사 헤르슈바흐(Lisa Herschbach)는 「의지적 재건: 산업 만들기, 몸 다시 만들기, 국가 모델 세우기(Prosthetic Reconstructions: Making the Industry, Re-Making the Body, Modeling the Nation)」에서 남북전쟁 이후 상이군인의 신체 재건은 개인적 차원의 재활을 넘어, 전쟁의 상흔을 지우고 새로운 국가 발전상을 세우는데 기여하는 정치적 함의를 가졌었다고 주장했다(Herschbach, 1997). 개별 지역의 프로그램에 대한 미시적인 연구와 자료집 발간도 있었는데, 제니퍼 데이비스 맥데이드는 「‘어떻게 외다리 반란자들은 살았는가’: 버지니아의 남부 연합 재향 군인과 의지(‘How a One-Legged Rebel Lives’: Confederate Veterans and Artificial limbs in Virginia)」에서 상이군인의 신체뿐 아니라 삶을 재건하는데 있어 1867년에서 1894년까지 지속된 버지나아 의지 프로그램이 가진 한계를 강조했다(McDaid, 2002). 앤슬리 헤링 웨그너(Ansley Herring Wegner)는 남북 전쟁기 부상, 남부 의지 공급 프로그램 등에 대한 간략한 챕터와 함께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절단 수술을 받은 군인 및 의지 수혜자와 관련된 기록의 인덱스를 수록한 『환상통: 남부 연합 재향 군인을 위한 노스캐롤라이나의 의지 프로그램(Phantom Pain: North Carolina’s Artificial-Limbs Program for Confederate Veterans)』이라는 자료집을 발간했다(Wegner, 2004). 남북의 프로그램을 통합적으로 고찰한 연구로는 가이 하세가와(Guy R. Hasegawa)의 연구 『부서진 병사 고치기: 연방과 남부 연합의 의지 공급 프로그램 (Mending Broken Soldiers: The Union and Confederate Programs to Supply Artificial Limbs)』이 있다(Hasegawa, 2012).
국가 주도의 상이군인 의지 지원 사업이 실질적으로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지라도 이들 연구자들은 남북전쟁기를 통해 미국의 의지 산업이 확장되었고, 이후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굴지의 의지보조기 관련 회사들이 이 시기를 거쳐 성장 또는 탄생 했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한다. 위의 헤르슈바흐와 맥데이드 연구가 일부 의지 제작자들이 자신의 제품을 선전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지에 대한 이미지를 사회에 투사하는 과정을 논의하고 있지만 남북전쟁 관련 연구들은 대체로 의지 기술자와 관련 사업의 관점 보다는 의지 기술과 사업이 전쟁과 재건이라는 국가 프로젝트를 위해 어떻게 동원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재건기 이후 의지와 관련된 연구로는 에드워드 슬라비샤크(Edward Slavishak)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피츠버그 산업 노동자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와 5개의 의지 회사 카탈로그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 전자의 경우 헤르슈바흐의 남북전쟁기와 재건기 논지와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높은 산업 재해 비율로 악명이 높았던 피츠버그에서 도시의 건전한 미래상을 만들어 가는데 손상되었지만 재건 가능한(특히 노동력 회복의 측면에서) 신체가 가지는 상징적 함의가 중요함을 논한다(Slavishak, 2003). 후자는 산업화가 진행되고 대중적 소비문화가 도래하는 19세기 말, 광고와 카탈로그 그리고 의지 착용자 클럽 등을 통해 미국의 의지 회사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구매할 소비자 층을 생산해 냈음을 보여준다(Slavishak, 2009). 그러나 이러한 연구사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세기 전반기에 장인의 위치에 있었던 의지 제작자들이 이후 전쟁, 산업화,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의 변화에 대응해 20세기 초 전문가의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매우 부족하다.
이러한 연구사적 공백에 기여하기 위해 본 논문은 미국의 의지 회사 A. A. 마크스(A. A. Marks Artificial Limb Company)를 중심으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의지 회사의 성장 과정을 되돌아 보려한다. A. A. 마크스는 남북전쟁 이전 1853년에 아마사 아브라함 마크스(Amasa Abraham Marks, 1825~1905)에 의해 뉴욕에 설립된 긴 역사를 가진 회사이다. 이 회사는 휠체어와 목발을 비롯한 기타 보조기기를 포괄적으로 생산하는 회사였지만 주 생산 품목은 의족과 의수였다. A. A. 마크스는 1957년 윙클리 의지 회사(Winkley Artificial Limb Company)5)에 인수합병 되었지만, 유사한 시기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꾸준히 발전한 ‘행거(Hanger, Inc.)’와 같이 1차 세계대전 이전에 급성장했던 기업 중 하나였다.
A. A. 마크스의 역사는(앞서 소개한 시대별로 분절되어 있는 연구에서는 알기 어려운) 남북전쟁 이전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근대 의지 산업의 발전을 의지 제작자의 관점에서 연속성 있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유용한 렌즈의 역할을 한다. 20세기 초까지 이 회사는 국내와 국외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회사 중 하나로 성장했다. A. A. 마크스는 남북전쟁기 연방의지 프로그램의 주요 공급자로 선정되었었고, 1880년도 말에 이르러서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의지를 공급하는 회사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A. A. 마크스는 미국의 내수 시장에서 중심이 되는 회사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인지도가 있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 회사의 제품은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유럽 국가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도 수출되었다(Sweet, 2017: 114; Kinder, 2018: 99; Sweet, 2022: 18-19). A. A. 마크스는 제품에 대한 카탈로그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서와 매뉴얼 등 다양한 홍보물과 자료를 오랜 기간 제작하고 출판한 회사로 이러한 자료들은 이 회사의 발전상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1차 사료를 제공한다.
본 논문에서는 남북전쟁과 전후 산업화 기간 동안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A. A. 마크스가 의료인과 장애인 소비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며 관련 기술에 대한 전문성을 쌓고 의지보조기학 분야의 전문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더불어 A. A. 마크스의 케이스를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의 의지 제작자들이 기술, 의학, 장애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했으며,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 ‘장인’과 ‘의사’ 사이: 의지 제작자의 지위와 특허권

의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19세기 미국에서 이용되었던 의족 모델의 기원은 앵글시 의족(Anglesey leg)으로 알려져 있다. 앵글시 후작 헨리 윌리엄 패짓 (Henry William Paget, the Marquess of Anglesey(Wales) / Earl of Uxbridge, Canada, 1768~1854)은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다. 이후 런던의 제임스 포츠(James Potts)가 앵글시 후작을 위해 나무로 된 의족을 제작했는데, 이것이 앵글시 의족의 기원이 되었다. 포츠가 사망한 후 1839년에 그의 동업자였던 윌리엄 셀포(William Selpho)가 뉴욕으로 이주해 앵글시 의족을 판매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 의지 사업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Warne, 2008: 29; Hasegawa, 2012: 9).6)
이후 앵글시 의족을 직접 착용했던 벤자민 프랭클린 파머(Benjamin Franklin Palmer)라는 사람이 스프링과 금속 힘줄을 이용해 변형된 형태의 앵글시 의족을 제작했고, 1846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의지 특허를 받았다. 그는 같은 해에 워싱턴 D. C.에서 개최된 전국박람회에서 자신의 제품을 세상에 소개했다. 다음 해인 1847년 파머는 뉴햄프셔의 메러디스 브리지(Meredith Bridge)에 제조 공장을 설립했고, 2년 후인 1849년까지 하나의 특허를 더 받았다. 이후에는 필라델피아에 본사를 두고, 여러 파트너들과 함께 뉴욕 및 보스턴으로 지점을 확장했다.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에 설립된 대부분의 회사들은 파머의 파트너이거나 자회사인 경우가 많아 미국의 초기 의지 역사에 있어 파머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1852경에는 파머사와는 별도로 존 S. 드레이크(John S. Drake)가 뉴욕 지역에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Hasegawa, 2012: 9).7)
파머와 드레이크의 회사가 미국의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의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을 1853년 무렵에 뉴욕에 남북전쟁 이전 미국의 의지 역사에서 중요한 회사가 하나 더 설립되는데, 이것이 A. A. 마크스 의지 회사이다. 이 회사의 창립자인 아마사 아브라함 마크스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아마사 A. 마크스는 코네티컷 뉴헤이븐의 배서니(Bethany, New Haven)에서 레비 M. 마크스(Levi Merwin Marks, 1792~1880)와 에스더 튜틀(Esther Tuttle, 1792~1858)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 엘리자 G. 마크스(Eliza G. Marks)8) 와 첫 결혼을 했고, 1850년 8월에는 루시 앤 플랫 (Lucy Ann(Platt) Marks, c.1824~1888)과 재혼해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유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루시 A. 플랫과는 7명의 자녀를 두었다.9)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 중, 딸 두 명과 아들 하나는 10세 이전에 사망했고, 나머지 네 자녀는 성인으로 성장했다.10)
아마사 A. 마크스는 차남인 조지 에드윈 마크스 1세(George Edwin Marks, I, 1853~1932)가 태어난 1853년 자신의 친형인 데이비드 비처 마크스(David Beecher Marks, 1819~?)와 함께 뉴욕시 맨해튼의 브로드웨이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설립했다. 1854년 3월 7일, 연방정부에 첫 특허를 등록 했으나, 앞서 소개한 파머 등의 회사들과 비교해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에 사업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어지는 경영난에 형 데이비드 B. 마크스는 의지 사업을 포기 했지만, 아마사 A. 마크스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다. 병원을 방문해 유명 외과의들과 인터뷰를 하거나 손, 발, 팔과 다리의 해부학 및 생리학적 구조에 대해 공부하기도 했고, 고객들의 다양한 케이스를 통해 의지에 대해 배워 나갔다.11)
한편, 캐롤라인 라이퍼스(Caroline Lieffers)에 의하면 미국 의지 역사의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아마사 A. 마크스가 도전하기 어려운 강력한 경쟁자였던 파머는 양적 팽창 이외에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후 의지 역사에 있어 중요한 선례를 만들었다. 그 첫째는 의지 제조업자의 직업적 지위에 대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의지 제조업자는 나무, 금속, 신발 등을 만드는 장인(artisan)으로 훈련 받았었다. 의지 제작자를 의료인과 유사한 지위로 정의 내리길 원했던 파머는 ‘외과의-장인(surgeon-artisan)’이라는 새로운 지위로 자신의 지칭했다. 라이퍼스는 파머가 새로 고안한 이 지위는 탈장대(truss)와 부목 등을 만드는 ‘외과기 계공(surgical mechanician)’의 지위보다 한 단계 상향된 지위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Lieffers, 2017: 141).12) 이를 통해 파머는 의료인과 장인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의지 제조업자를 위치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파머는 특허 제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의지 제작자들이 기술 소유권을 인정받고 안정적인 경제적 수입을 올리는데 도움이 되는 제도적 장치인 특허 제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선례를 마련했다. 19세기 중반에도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 AMA)는 화폐경제의 논리로부터 의료행위의 도덕성을 보호하기 위해 의료인이 특허를 신청하는 것을 금지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초기 미국에서 의지 사업이 확장해 나가는데 있어 파머의 파트너나 계열사의 역할이 컸다. 사업의 확장은 기술 유출과 잦은 기술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초래했다. 미국에서는 1790년에 처음 특허법(The Patent Act)이 도입되었는데, 파머는 기술 소유권 보호를 위해 특허권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사협회의 윤리 지침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였다. 파머는 의지 기술 개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안전한 기술의 발전을 위해 제대로 된 기술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고 특허권은 이러한 기술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Lieffers, 2017: 137, 144, 147-152). 파머는 의료인과 장인 사이의 애매한 지위에서 특허권에 대한 재해석(AMA가 특허권 제한으로 표방하는 의학의 도덕성 확보에 특허권이 기여한다는)을 했고, 당시 의료인들로서는 불가능하거나 선택하기 어려웠던 특허 등록이라는 제도를 통해 경제적 이권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파머가 의지 제작자의 지위를 의료인의 위치로 상향시키길 원했지만, 의사 그룹도 의지 기술 영역에 대한 권위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라이퍼스에 의하면 1857년 뉴욕의 로체스터(Rochester) 출신의 의사(physician)13) 더글라스 블라이(Douglass Bly)가 의료인으로서 이례적으로 AMA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의족 특허를 신청했다(Lieffers, 2017: 145). 예전에는 파머의 동업자였으나 이제는 블라이와 동업하는 또 다른 의사 에라스무스 다윈 허드슨(Erasmus Darwin Hudson)과 블라이를 소개하는 글에서 뉴욕의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의 한 유명 외과의는 “창의적인 천재뿐만 아니라 교육받은 의사(educated physician)”14) 가 이 오랜 기간 동안 비의료인(non-medical men)이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의지 기술 영역에 관여함이 마땅함을 피력했다. 의지 기술이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으로 성장하면서 이 영역에 가장 적합한 직업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의지 제작자들은 대체로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분류해 볼 수 있다. 북동부에 자리 잡은 벤자민 F. 파머와 이후 남북전쟁 기간 동안 급성장한 버지니아 출신의 제임스 에드워드 행거(주3 참고)는 모두 본인이 장애를 가진 의족 착용자였다. 18세였던 1861년 6월에 버지니아의 필리피 전투(Battle of Philippi)에서 부상을 입은 행거는 남북전쟁의 첫 절단수술 환자(왼쪽 다리 무릎 아래)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Seed, 2015: 120).15) 시장이 거의 발달하지 못해 제조 상품을 구할 수 없었던 초기 의지 역사에 있어 장애를 가진 개인이 더 나은 보조기기나 의수 및 의족을 개발하는 경우가 흔했고, 파머와 행거의 의지에 대한 관심도 많은 부분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행거의 경우 자신의 제품을 마케팅 하는데 있어 장애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McDaid, 2002: 135). 이외에도 후일 등장하는 제임스 A. 포스터(James A. Foster), 조지 베이커 주이트(George Baker Jewett), 메이슨 W. 매틀랙(Mason W. Matlack) 등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Hasegawa, 2012: 85-87). 두 번째 그룹으로 의지 사업이 성장하면서 의지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로 매우 소수이지만 의사면서 의지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위에서 언급된 블라이와 허드슨 그리고 J. A. 밀러(J. A. Miller)와 같은 제조업자들이 이 그룹에 속했다(Hasegawa, 2012: 83, 88). 마지막으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아마사 A. 마크스와 같이 비장애인이면서 의사가 아닌 사람들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서는 의지 관련 사업이 성장하면서 이전 보다 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의지 제작과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의지 기술을 둘러싸고 의사와 의지 제작자, 그리고 의지 제작자들 사이에 주도권 경쟁이 계속되었다. 특허권은 기술 도용에 대한 아무런 규제가 없는 19세기 미국의 의지 시장에서 기술 개발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 장치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의지 제조업자들에게 특허권은 전체 시장에 공급되는 제품의 품질을 규제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했고, 소비자에게는 상품의 선택에 있어 어느 정도 공증된 기준을 제공했다. 그러나 곧 이어 다가오는 남북전쟁이라는 사회적 위기는 의지에 대한 수요뿐만 아니라 공급자의 수도 증가시켰고, 의지 제작자들은 자신의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더 적극적인 방법을 고안해 내야 했다.

3. 신제품 만들고 판매하기: 남북전쟁에서 재건기까지 의지 시장의 확대와 마케팅 전략의 발전

아마사 A. 마크스에게 남북전쟁은 의지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기술 개발을 통해 첫 특허를 등록했을 뿐 아니라 상이군인에게 의지를 지원하는 연방 프로그램의 공급자로 선정 되었다. 더 나아가 이 시기 아마사 A. 마크스는 효율적인 상품 판매를 위해 관련 분야 외과의와 고객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상품 판매 전략을 마련하게 된다.
미국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 중에 하나로 기록된 남북전쟁은 사지 절단 환자의 수를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남북전쟁으로 최소 620,000명에서 850,000명의 사망자가 발행했다. 이와 함께 진보된 무기 기술은 대규모 절단 수술 환자의 발생에 기여했다. 특히 남북전쟁기에 많이 쓰였던 버지니아 출신의 발명가 제임스 버톤(James H. Burton, 1823-1894)에 의해 개량된 미니에 탄(Minié Ball)16)은 무른 납으로 제조되어 인체에 들어갔을 때 파편으로 부서져 부상 정도가 심한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Miller, 2015: 24; Wegner, 2004: 10).
한편, 남북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군의 외과의들은 신속한 수술로 환자의 생존율을 높였다. 과도한 혈액의 손실을 막기 위해 마취 후 수술은 대략 5분에서 10분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북군과 남군의 절단 수술 생존율에 대해서는 전체 인구집단에 대한 비교 가능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북부 연방군의 경우 29,980명이 절단수술을 받았고, 21,753명이 생존했다. 전체 생존율은 대략 70% 정도이고, 절단 부위별 생존율은 발 절단(foot amputation)의 경우 96%, 수술의 위험성이 크고, 회복이 더 어려운 고관절 절단(hip joint amputation)의 경우에는 17% 정도였다. 남부연합군의 경우에는 북부에 비해 상세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 통계 추산이 어렵지만 전체 수술의 ¾이 절단 수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부연합군의 의료자원은 북부에 비해 매우 열악했지만 그럼에도 역사가들은 유사한 생존율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군의 경우 38%는 손가락, 발가락, 손, 발 절단 수술을 받았고, 나머지는 이 보다 더 많은 신체 부위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북과 남을 합쳐 대략 60,000건의 절단 수술이 진행되었고 이 중 45,000이 생존했다(Hasegawa, 2012: 2-3; Bernard, 2013: 93; Miller, 2015: 39).
남북전쟁으로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인구수가 증가했고, 수요의 증가는 의지 기술과 제조 사업의 발전을 촉진 시켰다. 남북전쟁 이전 1846년에서 1860년까지 신규 및 개량 의지와 보조기, 휠체어 등을 포함해 단 34개의 특허가 발행되었었다. 그러나 남북전쟁과 재건기17)에 해당하는 1861년에서 1873년까지 133개의 특허가 등록되었다. 88개가 의족, 19개가 목발, 18개가 의수, 그리고 나머지 8개는 휠체어에 대한 특허였다. 1861년에서 1873년 사이에 등록된 특허는 그 이전 15년 동안의 특허 수 보다 3배가 더 많았다. 1874년에서 1895년 사이에 82개의 특허가 등록된 것을 보았을 때, 남북전쟁에서 재건기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에 특허 등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닐슨, 2020: 172; Hasegawa, 2012: 9-10).
전투와 군 생활 중에 장애를 가지게 된 군인들의 재활을 돕고, 사회로 복귀시키는 작업은 이미 전쟁 기간 중에 시작되었다. 북군의 경우 장애가 있는 군인들이 군 복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별도의 부대를 만들기도 했고, 1862년 연방 정부는 상이군인에게 의지를 지급하기 위해 $1,500의 지원금을 마련했다(닐슨, 2020: 166). 남북전쟁기 연방과 남부 연합의 의지 프로그램을 연구한 하세가와에 따르면 이러한 결정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군인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처우가 필요하다는 인식과 함께 재향군인에게 제공되는 연금을 줄이고자 하는 경제적 동기도 작용했다. 북부의 경우 1864년과 1865년에 $66,000과 $45,000를 의지 프로그램에 더 지원했다. 남부의 경우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가 주 차원에서 연방과 유사한 기금을 마련했고, 1864년에는 민간단체이지만 남부 연합주의 상이군인들에게 의지를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남부연합의지 프로그램(The Confederate Limbs Program)이 창설되었다(Hasegawa, 2012: 22-23; Figg and Farrell-Beck, 1993: 462-465; Grant, 2012: 244; Miller, 2015: 135-136).
의지프로그램을 관할하는 기관은 입찰 과정을 통해 품질과 가격 조건이 맞는 업체를 선정했다. 지원 프로그램 대상자는 의지업체에서 의지를 구매하고, 업자는 담당기관으로부터 해당 금액을 지원받는 형식으로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18) 그러나 남북전쟁 이전 대부분의 산업 및 상업 시설들은 북부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었고, 의지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의지 산업이 발달해 의지 공급 선정 대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사업체가 많은 북부와는 달리 남부의 의지프로그램은 양질의 의지를 공급할 수 있는 업체를 찾는 것부터가 어려웠고, 북부의 의지 제조업자가 남부에 상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이 시기 북부와 남부 모두에서 의지 공급업체로 선정된 파머사는 1864년 미국의지회사(American Artificial Limb Company)로 그 이름을 바꿨고, 벤자민 프랭클린 파머는 이 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했다(Grant, 2012: 245-246; Hasegawa, 2012: 22-56, 57-69). 남북전쟁으로 인해 상이군인이 증가하고 이들에 대한 국가적 의지 지원사업이 운영되자 시장은 확대되었고, 의지 회사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의지 제조사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시장에서의 경쟁도 과열되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남부 지역보다 경쟁이 더 치열했던 북부의 의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마사 A. 마크스도 첫 특허를 등록했다. 이 시기 아마사 A. 마크스는 자신이 10여 년 간 고수해 오던 기존 디자인을 수정해 새로운 의족을 개발했다. 기존 모델은 앵글시 의족과 유사한 디자인이었다(Warne, 2008: 29). 이 모델은 무릎과 발목 두 군데가 움직일 수 있는 관절(joint)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무로 된 발이 끈으로 다리에 연결되어 있었고, 되도록 실제 다리의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상하회전이 가능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19)
그런데 어느 날 한 손님이 발목관절의 움직임이 거의 쓰임이 없고 오히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절단단(stump)에 상처가나 의료비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마사 A. 마크스는 발목관절의 필수성을 재차 강조했지만, “발목이 단단한 다리(a Leg all solid at the ankle)”를 만들어 달라는 고객의 요구에 이내 설득되었다.20) 따라서 새로 제작된 모델에는 인디아 고무로 만든 발(Rubber Feet)을 달았고, 발목 부위의 움직임을 거의 없앴다. 고무발이 장착된 의족은 기존의 나무만으로 제작된 의족보다 3배 정도 더 무거웠지만, “철제 경칩, 볼트, 끈, 유리 볼, 나사” 또는 “발을 다리에 견인하기 위한 별도의 장치가 필요” 없었다.21) 신축성과 탄력이 있으면서도 단단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장점과 함께 이 새로운 모델은 가격 면에서도 더 저렴했다. 더 나아가 불필요한 선회와 움직임으로 딸각거리는 소음이 나는 기존의 모델은 착용자에게 거슬릴 뿐만 아니라 소음으로 인해 타인이 의지를 착용한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단점이 있었는데, 새로운 디자인의 고무발 의족은 그러한 걱정이 없었다.22) 이 제품으로 1865년 아마사 A. 마크스는 연방 의지 프로그램 공급자로 선정되었다.23)
1865년 국가 의지 지원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아마사 A. 마크스는 자신의 상품을 더 넓은 시장에 소개하기 위해 새로운 판매 전략을 도입했다. 이는 자신의 제품을 소개하는 책자를 출판하는 것이었는데, A. A. 마크스 뿐만 아니라 다른 의지 회사들도 이 시기 유사한 소책자 발행을 통해 자신들의 제품을 광고했다. 『마크스의 인디아 고무 손과 고무 발 특허 의지(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라는 제목의 24페이지 분량의 소책자는 신제품의 이름과 특성 그리고 이 제품이 특허가 등록된 우수한 제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책의 앞면과 후면 표지에는 연방의지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전자에는 프로그램 참여 업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고 후자에는 상이군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그들의 애국적 공로에 대한 감사와 함께 자신의 회사가 그들과 같은 고객에게 열려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서두에서는 자신의 의족에 대한 철학과 원칙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마사 A. 마크스는 “보행의 용이함과 편안함,” “자연스러운 움직임, 경쾌함과 고요함이 어우러진 우아한 발걸음,” “신뢰, 안정성, 단단함, 그리고 내구성”을 주요한 3대 원칙으로 들고 있다.24) 이어지는 페이지에서는 그림과 함께 고무로 제작된 발과 손이 장착된 의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며, 이외에 상품 주문 방법, 상품 가격(의족 $100, 의수 $75)25) 등이 이 책자에 안내되어 있다.26)
그러나 이 신제품 소개 책자의 ½이 조금 안 되는 분량을 차지하는 내용은 상품에 대한 안내가 아니라 일종의 상품 후기이다. 이는 아마사 A. 마크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고객으로부터 온 편지들로 각자의 사연과 함께 상품 우수성에 대한 칭찬, 사용 만족도, 판매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27) 슬라비샤크는 이 편지들의 진위 여부나 편지를 작성한 동기, 상품에 대해 호의적인 내용만 선택했을 가능성에 대해 의심할 이유가 있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보다는 이러한 편지를 수록한 기획 의도라고 설명한다(Slavishak, 2009: 101-104). 아마사 A. 마크스는 고객들의 증언이 완전히 경험에 기반을 둔 평가임을 강조한다. 또한 “착용한 사람보다 의지의 품질이나 필요사항에 대해 더 잘 알기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28) 고 후기 수록 이유를 밝혔다. 판매자가 전면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제품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광고 전략인 것이다.
이에 더해 아마사 A. 마크스는 기존 고객을 제품판매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또 다른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이 책자의 후반부에 25명의 고객의 이름과 그들의 주소를 적어 놓은 명단을 수록했다. 이는 회사가 위치한 뉴욕의 여러 카운티뿐만 아니라 오하이오,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버몬트, 미주리, 버지니아, 위스콘신, 노스캐롤라이나, 미시건 등 미국의 여러 주에 거주하고 있는 A. A. 마크스의 기존 및 새 의지 모델을 사용하고 있는 고객들의 명단이었다. 아마사 A. 마크스는 자신의 회사 제품을 직접 보고 싶거나, 의지에 대해 사적으로 대화를 원하는 경우 명단에 있는 사람들 중 현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상담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29) 이는 기존 고객을 일종의 에이전트로 삼아 이들과 (원거리에 거주하거나 프라이버시를 지키길 원하는) 잠정고객을 연결해 주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소비자층을 확대해 나가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앞서 서론에서 언급한 에드워드 슬라비샤크는 19세기 의지 제작자들이 소비자층을 확대하기 위해 장애인 커뮤니티의 형성을 촉진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망을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였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Slavishak, 2009: 104-116).
일종의 소비자의 상품 이용 후기는 20세기 초까지 이어져 A. A. 마크스의 오랜 광고 전략 중 하나가 되었다. 1876년 120여 페이지로 증판된 1865년 책자와 동일 제목을 가진 책자에도 12페이지 상당의 사용 후기가 실렸다. 상품 이용 고객의 편지는 절단 부위와 길이, 절단 신체의 수에 따라 항목별로 참고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30) 이에 더해 1876년도 책자에는 “증명서(Certificate)”라는 제목으로 150여 명의 미국 각지에 사는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는 A. A. 마크스의 고객명단과 주소도 수록되었다.31) 20세기 초에 출판된 A. A. 마크스의 의지에 대한 매뉴얼(Manual of Artificial Limbs)에도 “추천의 글(Testimonials)”이라는 이름으로 대략 140~150페이지 정도 분량의 상품의 품질을 보장하는 A. A. 마크스사 고객들의 경험담이 함께 출판되었다.32) 다양한 길이의 추천의 글들이 실렸지만, 20세기 A. A. 마크스사의 의지 매뉴얼에서는 신체의 일부를 절단해야 했던 고통스러운 경험에서부터 의지의 착용이 자신의 일상과 삶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증언하는 다소 긴 내러티브 형식의 글들이 증가했고, 삽화 등을 통해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글의 사실성을 높였다.
1876년 책자에는 고객의 증언 이외에도 A. A. 마크스 제품의 우수성을 홍보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이 있었다.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열리는 상품박람회에서 수상한 화려한 경력과 함께 각종 잡지와 신문에 실린 A. A. 마크스 관련 기사, 그리고 외과의들이 이 회사 제품의 우수한 품질을 확증하는 추천의 글도 있었다.33) 그러나 20세기로 갈수록 이와 같은 항목들은 그 분량이 줄어들었다. 대신 상품을 직접 사용한 고객들의 후기와 증언은 그 분량이 점점 늘고 내용의 길이도 더 길어지며, 하나의 주요한 항목으로 자리 잡았다. 1865년 소책자에서 A. A. 마크스가 강조한 사용해 본 사람이 제품에 대해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으며 예비 고객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시장과 소비자 관점의 전략은 20세기로 이어졌다.
남북전쟁이 의지를 필요로 하는 소비자의 수를 잠정적으로 증가시키고 공적 자금의 유입을 촉진해 의지 기술과 사업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남북전쟁이 종전된 이후에도 이 전쟁으로 발생한 상이군인에 대한 연방의 지원은 1890년도까지 계속되었다. 1870년에는 1회만 제공되던 의지 지원을 (교체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5년 이후 다시 지원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을 바꿨다. 1872년에는 의지 피팅(Artificial limb fitting)을 위한 여행 경비도 지원하도록 했다. 1874년에는 한 달에 $18를 지급하던 팔꿈치 또는 무릎 위로 절단 수술을 받은 군인의 연금을 $24로 상향 조정했다.34) 1891년부터는 기존에 5년이었던 의지 재신청 기한을 3년으로 단축시켰다.35)
그러나 전후 시간이 지나 연방과 남부주들의 의지 지원 프로그램이 이미 수적으로 성장한 의지 제조업자들에게 충분한 소비자를 제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전쟁 종결 이후 북부와 남부 모두에서 의지 공급 확대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들이 있었다. 연방군의 승리로 끝난 전쟁에서 남부 연합군은 반란군으로 정의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31년이 지난 1896년에 출판된 『마크스의 고무 손과 고무 발 특허 의지에 대한 논문(A Treatise on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에서 조지 E. 마크스는 여전히 “반란 전쟁(the War of the Rebellion)”이라는 표현을 썼다.36) 연방 이탈자로 간주된 남부 연합에 참전한 군인에게 주어진 지원은 북부의 연방 참전 군인들이 누릴 수 있는 것에 비해 제한적이었다(닐슨, 2020: 171). 우선, 남부 정치와 문화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남부의 경우 군인의 절단된 신체는 의족과 의수와 같은 인공 신체로 굳이 가릴 필요가 없는 희생의 상징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에 전후 남부에서는 남북전쟁에 참전해 신체 절단의 희생을 치룬 “빈소매(empty sleeves)” 유권자들이 정계에 많이 진출하기도 했다(Miller, 2015: 129-130, 139-140). 그렇다고 남부가 상이군인에게 의지를 제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부의 군인들은 민간 자선단체와 해당 주(state)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북부에 비해 지원받을 수 있는 금액이 적었다. 또한 남부에서는 의지 산업 자체가 미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초기에 공급자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북부회사들이 남부에 의지를 공급하는 것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전을 한 남부 연합 주들의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공적 자금이 동원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Kinder, 2018: 99; Grant, 2012: 244). 북부의 경우에도 지원 받은 의지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의지와 같은 지원보다는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보장을 바라는 경우 정부로부터 의지를 지원 받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1890년도까지 연방 지원 프로그램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이군인 자신들은 시간이 갈수록 연방의지 프로그램에서 멀어졌다(Hasegawa, 2012: 78). 이에 더해 19세기 말엽에 이르면 다수의 상이군인들이 노령에 들어서고 사망하기도 했다. A. A. 마크스사는 남북전쟁과 재건기를 통해 성장했지만 전후 미국 사회의 변화는 의지 산업에도 변화를 촉구했다.

4. ‘절단’과 ‘장애’ 통계적으로 이해하기: “문명의 구현물(implements of civilization)”과 산업사회에서 의지 기술의 위치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아마사. A. 마크스가 60대 초반의 나이가 된 1880년대 말경에 이르러서 A. A. 마크스 의지 회사에서는 2세대 경영진으로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사 A. 마크스가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 그의 두 아들 조지 에드윈 마크스(George Edwin Marks, 1853~1932)와 윌리엄 링컨 마크스(William Lincoln Marks, 1862~1922)가 회사의 공동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37) 그러나 막내아들 보다는 35세가 된 1888년 맨해튼에서 루이사 리다복(Louisa Ridabock, 1862~?)과 결혼해 세 자녀를 두고 있었던 차남이었던 조지 에드윈 마크스가 회사 경영에 있어 중심이 되었고, 1880년대 이후 A. A. 마크스의 출판물에는 아버지가 아닌 조지 E. 마크스의 이름이 올랐다.
일찍이 남북전쟁 후 10여 년이 지났을 즈음 아마사 A. 마크스는 전쟁 중에 절단 수술을 받은 군인들 이외에 다른 고객층을 확보하기 위해 이미 노력을 하고 있었다. 재건기 말엽이었던 1876년에 출판된 『마크스의 인디아 고무 손과 고무 발 특허 의지』에는 기존에는 없었던 “기형 그리고 고관절 질환으로 인해 짧은 다리를 위한 의족(Limbs for Deformities, and Shortened Legs by Hip Diseases)”이 추가되었고, “어린이 의지 착용의 중요성(Importance of applying Artificial Limbs to Children)”이라는 섹션도 생겼다. 아마사 A. 마크스는 많은 외과의들이 아동의 경우 성장이 빨라 의지를 착용하면 금방 작아져 버리기 때문에 어린이의 의지 착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 하는 것을 반박하며, 아동의 의지 착용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의지의 경우 어린이의 성장에 맞추어 저렴한 비용으로 빠르게 사이즈를 조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어린이에게 의지를 착용시킬 경우 몸에 변형(굽은 등, 목발 사용으로 삐뚤어진 어깨 등)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어린이의 정상적인 성장을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당시에 많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아동의 의지 착용을 옹호했다.38) 아동을 위한 의지에 대한 설명은 이후 출판물에도 계속 이어졌다. 1870년대 중반 이후, A. A. 마크스는 전후 그 수가 감소했던 상이군인에서 선전적/후천적 기형, 질병에 의한 몸의 변형, 그리고 어린이로 고객층을 꾸준히 늘려나갔다. 이에 더해 1896년에는 “고령자(The Aged)”라는 섹션도 새로 만들었는데,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목발이나 환자용 의자(invalid chair)에만 의지 할 필요가 없으며, 노인도 의지를 착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성공적인 이용 사례를 소개했다.39)
한편, 주문이 늘어가고 회사가 성장해 가면서 A. A. 마크스는 장애를 가진 고객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조지 E. 마크스는 자신의 고객들이 가진 장애의 패턴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1888년, 자신의 회사에서 출판되는 『마크스의 고무 손과 고무 발 특허 의지에 대한 논문』에 수록했다. 그는 8,606건의 의족과 의수 주문 중 통계적 분석이 가능한 3,500건의 고객정보를 기반으로 6개의 항목에 대한 분석을 진행했다.40) 이 섹션의 제목은 “통계(statistics)”이고, 각각의 항목은 아래와 같다. “다리와 팔(Legs and arms)” “남성과 여성(Males and Females)” “절단 지점(Points of Amputations)” “절단의 원인(Causes for Amputation)” “절단 수술 나이(Ages at Which amputations are made)” “의지 착용자의 직업(Occupations of wearers).”41)
조지 E. 마크스의 분석에 의하면 의수에 비해 의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월등히 많았다.42) 남북전쟁 종전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성 고객 중 33.3%는 다리를, 그리고 24.4%는 팔을 남북전쟁과 기타 해외 전쟁에서 잃은 사람들이었다. 29.5%는 기차 사고로 다리를 잃었고, 12%는 질병,43) 나머지는 여러 종류의 사고와 작업장(산업, 농업, 제분소, 광산 등)에서 수족을 잃었다. 남성과 달리 여성의 경우 하지절단의 가장 큰 이유는 질병이 51.5%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사고와 기차 사고가 이었다. 여성의 경우 팔 절단이 필요하거나 또는 절단 없이도 의수 착용이 필요한 선천적인 기형이 원인인 경우가 35%로 가장 많았고, 각종 사고와 제조업 공장에서 기계로 인해 팔을 잃은 경우가 각각 17%를 차지했다([표 1] 참고).
조지 E. 마크스는 이 연구를 통해 남녀 모두 열차 사고로 인한 절단이 많지만, 남성과는 달리 여성의 경우 질병이나 선천적 기형이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확인했다.44) 남성은 20세에서 30세(38%) 사이에 여성은 남성 보다 일찍 10세에서 20세 사이(31%)에 가장 많은 수가 하지를 절단했고, 팔의 경우 남성은 10세에서 20세가 33%, 20세에서 30세가 34%, 그리고 여성은 10세 이전에 47%가 절단을 했다. 조지 E. 마크스는 0.5% 정도의 남성은 고령인 70대에 절단을 한 경험이 있음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는 “이는 근대 수술뿐만 아니라 우리의 70대가 가진 활력에 대해 잘 말해준다”라고 전후 미국의 외과 수술의 진보와 고령인구의 양호한 건강 상태에 대해 평가했다.45)
마지막으로 조지 E. 마크스는 통계를 이용해 의족과 의수를 주문한 남녀 고객의 직업에 대해 분석했다. 여성의 경우 의족 주문자의 62%가 가정주부였지만, 나머지 48%는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16%는 의류제작자, 그리고 선생님(7%), 학생(6.5%), 공장 노동자(5.5%), 상점직원(1.5%)과 간호원(1.5%)이었다. 의수의 경우도 60%가 가정주부였고, 선생님(20%), 의류제작자(10%), 공장 노동자(10%)가 나머지를 차지했다. 여성의 경우 단지 6개의 항목으로 간단이 나뉘어져 있었지만, 남성은 17개로 항목으로 더 복잡했다. 그 구분이 균일하지는 않지만, “정주업(sedentary)”, 농업, “좌업(Working at bench)”, 전문직, 중장비, 노동자, 철도부설, 많이 걷는 직업, 물건을 많이 들어야 하는 직업, 판매원, 선원, 경비원, 군인, 학생, 광부, 점원, 자본가로 세분화해서 분석했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17%로 가장 많이 의족을 주문했고, 다음으로 좌업 등이 뒤를 이었다. 의수는 좌업과 농업 순이었다.46)
번창한 의지 사업가로서 조지 E. 마크스는 자신의 고객에 대한 양적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고객들의 장애 패턴과 성별 특징, 장애가 시작된 나이, 장애 정도와 원인 그리고 그들의 직업에 대해 분석했다.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출판된 A. A. 마크스에서 발행된 책자에는 반복적으로 자료들이 이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통계” 섹션은 1888년 책자에만 실려 있다.47) 이 이례적인 통계적 분석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산업화된 미국에서 장애의 패턴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했다. 어떤 이유로 신체가 절단되거나 절단 수술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의지가 필요한 대상, 즉 소비자층에 대한 분석이었고, 이를 통해 어떤 종류의 의지를 만들고 판매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 그리고 조지 E. 마크스의 분석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남북전쟁 이후 노령화된 상이군인들이 1880년대 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수는 줄어가고 있었다. 사회는 변화해 가고 있었고, 그 변화를 읽어 내는 것은 소비자를 이해하고, 구매자층을 늘리는데 유용한 기술개발과 판매 전략을 세우는데 중요했다.
1896년 조지 E. 마크스의 관심은 장애인의 수명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이 시기에 매우 보기 드문 장애인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중요한 연구 과제임에도 지금까지 이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1853년부터 축적된 43년간의 회사 기록을 토대로 분석한 “신체장애자의 장수(The Longevity of the Maimed)”라는 제목의 연구결과를 1888년과 동일 제목의 책자에 수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애가 수명을 단축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이 연구의 주장이다. 조지 E. 마크스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신체나 정신적인 질병에 덜 시달리며, 인체의 일부를 잃은 대신 오히려 건강한 삶을 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로 조지 E. 마크스는 가설이기는 하지만 신체의 일부가 제거되었을 때 생명력(vital force)이 저장되고 다른 남아 있는 부분에 이 생명력이 더 충분하게 공급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정했다. 이 밖에도 그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더 주의 깊게 돌보고 위험한 일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등 그 행동 패턴에도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48) 위와 같은 분석으로부터 조지 E. 마크스는 “사지를 잃는 것이 절망을 초래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불구자(A cripple)는 냉소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고 더 낫고, 행복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고 “대자연은 늘 그렇듯 너그럽게 모든 불행에 대해 보상한다”고 평가하며, 장애인에 대한 당대의 편견에 대해 항변했다.49)
재건기를 거치며 미국에서는 2차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870년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산업혁명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열차, 증기선, 운하 등의 운송수단 및 관련 기반시설이 빠르게 발전했고, 중공업과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공장제 생산과 도시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거대 기계는 생활의 편리를 증가 시키고 생산성을 높였지만, 이러한 기계화와 산업문화는 다른 한편 작업장과 일상생활 공간에서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했다. 열차, 추락, 충돌, 붕괴, 기계 끼임 등으로 인한 사고는 산업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생활인의 신체적 안전에도 위협이 되었다.
A. A. 마크스 의지 회사의 차세대 경영주였던 조지 E. 마크스는 1888년 통계를 통해 전후 미국 사회에서 기술문명과 기계의 발달이 인간의 신체적 불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바깥 활동이 많은 남성의 경우 전쟁과 질병을 제외한 54.7%의 사람들이 이러한 변화한 전후 작업 및 생활환경 속에서 사고를 당했고, 사지 절단의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여성의 경우 병이나 선천적 기형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제조 공장에서 손(17%)을 잃는 경우가 많았고, 철도 사고와 같은 위험에 다리(12.6%)나 팔(4.5%)을 잃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50)
1896년 출판한 『마크스의 고무 손과 고무 발 특허 의지에 대한 논문』의 서두에 조지 E. 마크스는 기존에는 없었던 “짧은 역사(A bit of history)”라는 항목을 추가해 이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전국에 걸친 철도 시스템의 급속한 확장으로 [의지에 대한] 수요는 더욱 증가했다. 거대하고 위험한 기계를 사용하는 제조소의 증가; 잔디 깎는 기계, 수확기, 타작 기계와 같은 농기구의 발명 및 도입; 광산 개방, 거대한 숲을 건축을 위한 목재로 전환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문명의 구현물(implements of civilization)’로 여겨져 왔지만, 인체를 절단하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나았다.51)
그러나 다른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의술의 발전은 더 많은 환자를 위와 같은 사고부터 구해내는데 기여했다. 1860년대 말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에 의해 영국에서 시작된 무균법이 1876년경 미국에도 도입 되었다. 이는 외과 기술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였고, 이로 인해 더 안전한 수술이 가능하게 되었다. 조지 E. 마크스는 이와 같은 의학의 변화가 자신의 사업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수술은 변화했다. 반세기 전 수술 방식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같지 않다. 외과의들의 골칫거리인 독성 세균(Toxic germs)은 소독제에 그 자리를 양보했고, 병이 들거나 짓이겨진 신체 부분을 제거하기 위한 절단 수술의 사망률은 최소화되었다. 근대 수술로 인해 예전에는 잃었을 많은 사지(limbs)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의지기사(prosthetist)가 기존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나가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기여했다.”52)
기술 문명은 여러모로 의지기술의 발전과 사업의 확장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 A. A. 마크스의 출판물에는 하나의 전문화된 직업영역을 뜻하는 “의지기사(prosthetist)”53)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파머와 같은 다른 회사들과 달리 마크스사는 아마사 A. 마크가 초창기 사업을 할 때부터 지점 운영을 절대하지 않았는데, 조지 E. 마크스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이 의지 제작을 원할 경우, 근처의 의사, 약사, 탈장대나 도구 제작자에게 사이즈를 측정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물론 기술 유출로 인한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기도 했겠지만, 판매에 제약을 받으면서도 수평 확장을 지양했던 이유를 조지 E. 마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직업은 외과의와 비슷하다. 우리의 [일에서] 매우 자주 필요한 기술과 판단은 지점의 매니저에게 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54)라며 그는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기술을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조지 E. 마크스는 “의지 제작자는 그가 인류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측면에서 수복외과의(the reparative surgeon)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특히 오늘날 그들의 작업은 중요하다. 절단 케이스는 점점 더 자주 생긴다. 트롤리, 증기 기차, 농기계, 그리고 공장은 모두 이러한 잦은 사고에 책임이 있고, 이들의 수는 자연스럽게 증가하고 있다”55)라고 역설했다. 그는 의지 제작자를 외과의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기계문명과 함께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그들의 성장이 필연적임을 강조했다.

5. 의지의 새로운 이미지 투사하기: 기계, 몸, 그리고 복구된 삶

19세기 말 미국에서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제철, 제강과 같은 중공업, 화학 공업, 철도뿐만 아니라 식품, 자동차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제조업이 성장했다. 의지 산업도 이러한 산업화의 물결을 타면서 규모가 큰 회사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19세기 말까지 A. A. 마크스는 이 분야에 굴지의 회사로 자리 잡았다.
A. A. 마크스는 원자재 벌목부터 제작, 판매에 걸친 모든 과정을 한 회사가 관리하는 수직형 구조를 가지고 있는 회사였다. 조지 E. 마크스는 1896년 회사의 역사와 제품을 소개하는 책자에 “절단단에서 사지까지(From the Stump to the Limb)”라는 섹션을 새롭게 추가했다. 그는 이 섹션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상세한 의지 제작 과정을 설명했다. 뉴욕 브로드웨이 701번지에 위치한 A. A. 마크스 의지 회사는 네 개의 층으로 된 브라운 스톤 건물이었다. 본사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위치하지만 시 외곽, 특히 코네티컷 주 근방에 원료가 되는 목재를 가공하는 제재소와 창고가 있었다. 벌목, 원자재 보관과 원목 시즈닝은 코네티컷 공장에서 진행되었다. 그 후 뉴욕으로 준비된 재료를 운송했는데 나머지 제작, 포장, 상품운송의 과정은 모두 뉴욕 본사에서 진행되었고, 이곳에는 쇼룸과 피팅 및 리셉션 룸도 있었다.56)
19세기 말에 A. A. 마크스의 판매 지역은 미국 내의 거의 모든 지역, 그리고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미국 내 48개주와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Territory), 오클라호마 준주(Oklahoma Territory)로부터 고객의 제품에 대한 리뷰가 도착했고, 캐나다, 뉴펀들랜드, 멕시코, 코스타리카, 산살바도르, 페루, 칠레, 쿠바, 자메이카,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덴마크, 뉴질랜드, 하와이 섬, 영국령 동남아시아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 일본, 중국, 남아프리카로 부터도 유사한 편지가 왔다. A. A. 마크스는 회사의 역사와 제품에 대한 상세 설명을 담고 있는 책자에 뉴욕에서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우편물의 긴급우편요금을 정리해 수록했는데, 유럽의 18개 주요 도시와 서인도제도,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주요 항구의 목록을 포함했다. 미국 달러의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멕시코, 브라질 화폐 환율에 대한 내용도 첨부했다. A. A. 마크스사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팸플릿도 제작했고, 스페인어로 된 품질 확인 추천자 명단을 번역해서 수록하기도 했다. 해외 수출은 주로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멕시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57) A. A. 마크스의 제품은 전 세계로 팔려나갔고,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번역된 마크스사에서 발행한 제품 설명서와 회사 소개자료, 그리고 다양한 국가에서 보내온 사용 후기는 더 광대한 지역에 위치하는 소비자들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책자는 단순히 회사 및 상품에 대한 홍보를 넘어 ‘의지’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하고 전파하는데 기여했다.
미국에서 의지 산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1860년대 의지는 잃어버린 신체 부분을 대신하는 일종의 기계로 인식되었다. 일찍이 1876년, 자신의 새로운 특허 제품인 고무로 제작된 발과 손이 장착된 의족과 의수를 설명하는 책자에서 아마사 A. 마크스는 의지를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인간의 골격은 너무나 놀랍고 신비로운 구조로 되어 있어, 단순한 진기함을 제외한 어떤 목적을 위해 전체로서의 인간의 골격을 인공적 매커니즘으로 모방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던 몇몇의 숙련된 장인들은 결국 실패했고… 실패할 것이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의지가 단순히 기계적 구조이며, 이것은 몸의 구성 부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익을 보조하고, 외모를 개선하고, 연합적으로 인간의 몸의 구성부분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의지는 그 이외에 무엇도 아닌 기계적 구조물(MECHANICAL CONSTRUCTIONS)이다.58)
2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시기 의족 디자인의 효시인 앵글시 모델에 기반 한 의지는 오히려 사용자에게 고통을 줬고, 보행에도 용이하지 못했다. 앵글시 모델은 인체의 움직임을 모방해 만들어졌지만 고무 발을 단 새로운 의족은 발목 관절의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축소해 지지와 보행에 안정감을 주는 방향으로 디자인이 수정되었다.
1865년 초대 기업주 아마사 A. 마크스에 의해 발명된 의족 모델은 이후에도 몇 십 년 동안 A. A. 마크스 의족 모델의 기본이 되었다(앞의 [그림 1] 참고). 이 회사는 어떤 재료가 신체적, 기능적으로 가장 유용한 의지를 만들어 내는데 적합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했고, 아마사 A. 마크스의 전통을 이어 나무와 고무에서 그 답을 찾았다. 나무는 사지 절단 장애를 가진 고객이 의지를 착용하는 절단 부분을 덜 자극하면서도 적절한 강도와 내구성을 가지기 때문에 좋았고, 고무 발 또한 탄성, 내구성, 안정성, 그리고 가격 면에서 A. A. 마크스가 높게 평가해 주원료로 이용한 재료였다. “생가죽, 가죽, 경화고무(vulcanite-rubber), 셀룰로이드, 파피에 마세(papier-mache)59), 주석, 구리, 강철, 그리고 펄프” 등의 다양한 재료 중 그 “강도, 가벼움, 단단함 그리고 내구성”의 면에서 가장 적합한 나무가 주재료로 선택되었는데, 뉴잉글랜드 지역에 자생하는 버드나무(willow)와 참피나무(bass)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 밖에 A. A. 마크사의 대표 상품인 발목의 움직임이 최소화된 고무 의족과 의수의 재료로 중앙 및 남아메리카 토착 수종인 인디아 고무나무(India-rubber tree)가 이용되었다.60)
그러나 아마사 A. 마크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의족은 기계일 뿐이며 기술을 통해 본래의 팔과 다리의 이미지를 재현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하면서도, 의지가 신체적으로 완전한 외형을 연출하는데 매우 유용함을 강조했다. 그는 1876년 책자에서 부터 기형이나 질병으로 인해 다리에 변형이 있는 경우 착용할 수 있는 의족 모델의 이미지와 함께 짧아진 기형이 있는 다리를 가진 고객의 의지 착용 전과 후 이미지를 수록했다. 아마사 A. 마크스는 의지가 “보기에는 볼품이 없어(an ungainly appearance)” 보이지만 옷을 입었을 때 “단정하게 기형을 숨길 수 있다(it neatly hides the deformity)”고 고객을 설득했다.61) 또한, “이 경우 발목 관절의 덜컥거림을 없앴다는 특징이 특히 중요하다”며 의지 착용을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적인 측면에서 타인이 신체적 결함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제품을 개선했음을 강조했다.62)
미국에서는 재건기 이후부터 대략 세기 말까지를 ‘도금의 시대(the Gilded Age)’라고 지칭한다. 이 시기 동안 산업의 발달과 함께 자본의 축적이 일어났고, 기업문화와 상업의 발달에 따른 소비문화가 활발하게 발달했다. ‘황금’이 아닌 ‘도금’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자유경제체제(laissez-faire) 하에서 경제 규모가 크게 확장되는 가운데 정경유착, 규제 없는 기업 확장, 노동자 인권 등의 수많은 사회문제가 상존해 있었다(닐슨, 2020: 176).
그러나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물질문화는 확장되었고, 이 시기 외모(appearance)는 개인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외부로 드러내는, 그리고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공동체 중심의 사회질서가 깨어지고, 개인 중심 사회로 변화해 가면서, 자선이나 공동체 원조의 의미와 그 대상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부정적으로 변화했다. 새롭게 대두한 “외모의 시대(Age of Appearance)”에 스스로의 경제적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자립은 개인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고, 외모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인의 자립성을 확인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Kinder, 2015: 33-34). 1881년 시카고는 “보기흉한 몸(Unsightly Body)”을 공공장소에서 보이지 못하게 하는 아래와 같은 법률을 만들었고, 유사한 법률이 다른 지역에서도 이어서 제정되었다(닐슨, 2020: 176-179; Schweik, 2009: 23-140; Standen, 2021: 257-259).
“이 도시의 거리, 고속도로, 대로 또는 공공장소에서 질병에 걸리거나 불구가 되거나 훼손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형이 되어 보기 흉하거나 역겨운 물건 또는 부적절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 각 위반 사항은 $1[오늘날 대략 $20]의 벌금형에 처한다.”63)
절단되거나 변형된 신체 일부를 재건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북전쟁 참전군인들이 “텅 빈 옷소매”를 용맹함과 희생의 증거로 자랑스럽게 거리에 내보였던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절단 수술은 19세기 미국에서 신체적 완전성에 대한 논란을 가져왔고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사회적으로 노출할 수 있는 몸의 기준이 바뀌었다. 공공장소에서 착용 가능한 의지64)는 산업사회에서의 정중함(politeness)과 매너의 표현이자 이용자의 사회적 계급을 나타내는 척도였다(O’Connor, 1997: 744-746; Mihm, 2002: 287-288).
이제 의지는 단순히 인체의 한 부분을 다시 끼워 맞추는 “기계적 구조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의지는 인간의 몸의 전체성(wholeness)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는 외형의 개선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립성의 획득65), 그리고 사회로의 복귀를 뜻했다(O’Connor, 1997: 756-758; Mihm, 2002: 286, 289-290). A. A. 마크스 의지 회사는 초기 아마사 A. 마크스가 명확하게 하고자 했던 리얼리즘(현실에 있어 의지 기술의 한계)을 강조하는 것에서 멀어져 점점 손상된 인체의 복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자립과 사회 복귀의 가능성을 선전했다. 19세기 말 A. A. 마크스의 책자에는 의지 착용 후 외형뿐만 아니라 보행능력(locomotion)과 운동 능력의 월등한 향상과 자연스러움에 대한 언급이 매우 많다. 이러한 내용들은 일러스트레이션과 같은 판매자가 제공하는 자료에서 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인 구매자의 이용 후기에도 매우 자주 등장했다. 아래는 에디슨 전기 회사(Edison General Electric Co.)의 직원으로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지부에서 일하는 한 전기기사(line man)가 A. A. 마크스 의족을 착용한 후 완벽하게 어려운 작업을 소화하는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다.
“알바 영(Alvah Young)은…고무 발 의족이 잃어버린 부분(lost members)을 놀라운 정도로 복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입니다. 그는 몇 년 전에 철도 사고로 양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는 A. A. 마크스의 고무 발 의족을 착용했고, 그 이후로 생계를 유지하는 활발한 육체노동(active manual labor)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는 그 어떤 동료보다 능숙하게 전봇대를 오르고, 의족으로 크로스바에 몸을 고정시키고, 철저하게 숙련된 방식으로 전선을 배치할 것입니다.”66)
무릎 아래 절단 수술 후 A. A. 마크스의 의족을 착용하고 있는 한 신문 배달원 존 샤프(John Sharff)는 다음과 같이 상품에 대해 평가했다.
“저는 R. R. 기차에서 조간신문을 팔고, 기차가 움직일 때 타고 내리는데, 귀하의 고무 의족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친구는 거의 없으며 저를 놀라운 발의 소유자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불편함이 없으며, 귀하의 회사 제품을 최상품으로 추천합니다.67)
1880년대 후반 조지 E. 마크스는 장애의 상태와 종류, 그리고 연령에 관계없이 의지가 더 나은 삶을 구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피력했다. 앞의 4장에서 논의한 1888년 “통계” 섹션을 마무리하며, 조지 E. 마크스는 특히 마지막의 의지 주문자의 직업에 대한 통계 분석을 근거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타인에게 필수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걸 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68) 더 나아가 “여기의 증거들은 독자가 외관 복원과 같은 의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의지의 유용성과 노동 경제에서 의지가 수행하는 훌륭한 작업에 대해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라며 산업 사회에서 의지 기술의 역할과 순기능을 역설했다.69)
역사가들은 남북전쟁과 이후 산업사회에서 의지를 매개로한 사회재건 프로젝트들의 기술 만능주의를 비판해 왔다. 전쟁으로 손상된 남성성, 속출하는 산업재해로 인해 추락한 도시 이미지를 가리는 작업에 의지 기술이 하나의 유용한 해결책으로 이용되었지만, 이러한 기술로의 환원은 다른 한편 진실을 가리고, 사회문제와 상처를 외면하게 하며, 그리고 다른 대안(가령 사회보장제도)을 마련하고 장애를 사회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O’Connor, 1997: 759-769; Rose, 2017: 122-136; Handley-Cousins, 2019: 84-85).
이 당시 A. A. 마크스 의지 회사와 같은 대형 의지 회사에서 끊임없이 사회로 내어 보냈던 위와 같은 메시지는 어쩌면 이러한 과정에 일조를 한 것이었다. 19세기말 도금의 시대에 만연했던 자유경제체제, 공동체 보다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의 개편, (사회적 지원 보다는) 개인의 자립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신체 이미지에 대한 문화적 평가와 해석의 변화는 A. A. 마크스의 의지 이미지에 투영되기도 했고, 희망을 파는 소비사회의 마케팅 전략과 함께 이러한 이미지는 또 다시 사회로 투사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지 E. 마크스는 새롭게 도래한 산업화 시대에 의지 기술과 산업이 손상된 신체부분을 복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립 가능한 삶의 복원에 기여해 인류에 공헌하고 있음을 공언했다.

6. “의지의 관점에서 고려된 절단(Amputations Prothetically Considered)”70): 의지 기술과 의학의 관계 재조정과 의지기술의 전문화를 향하여

기술보호를 위한 특허 등록, 소비자 그룹 형성, 절단과 장애, 장애인 대한 통계적 연구와 사회적 인식 바꾸기, 그리고 의지 기술의 사회적 유용성 주장하기 등에 더해 19세기 말 A. A. 마크스는 의지학을 외과학에 견줄만한 대등한 분야로 격상 시키고, 의지 제작을 하나의 전문 직업 영역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진행했다.
1893년 9월 7일 조지 E. 마크스는 조지 밀러 스턴버그 의사(George Miller Sternberg, 1838~1915)의 초청으로 워싱턴에서 개최 된 ‘범아메리카 의학 회의(the Pan-American Medical Congress)’에서 논문 하나를 발표했다. 스턴버그 의사는 당시 미육군의 군의감(Surgeon General of the US Army)이었고, 자신이 의장을 맡았던 “군의학과 외과학(Military Medicine and Surgery)”이라는 섹션에 조지 E. 마크스를 초청했다.71) 그는 이곳에서 “의지제작자의 관점에서 본 절단 수술(Amputations Viewed by an Artificial Limb Maker)”이라는 글을 발표해, 최근 의지 기술의 발달을 통해 기존에 유용하지 못하다고 간주되었던 수술이 가능하게 되었고, 외과 의사들이 의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하지절단의 경우 의지 제작자들이 길이가 긴 절단단(long stump)에 적합한 의족을 만들어 낼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의사들은 신체를 더 보존하고 싶어 했음에도 오랜 기간 발목이나 족근(tarsus) 아래까지 뻗어 있는 긴 절단단을 만드는 것을 지양하고 인체를 더 잘라내야 했었다. 그러나 조지 E. 마크스는 아직까지 의지 제작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많은 기술적 진보가 이 분야에 있어 진행되었고 위와 같은 반대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긴 절단단에 적합한 의족을 만들 기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은 지난 몇 년간 A. A. 마크스에서 다양한 절단 수술 환자를 위한 수 백 건의 의지 제작과 착용에 참여해 왔고, 자신의 회사는 18,000건 이상의 의지와 의수를 제작해 왔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풍부한 경험에 비추어 길이가 긴 절단 단에도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는 의족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72)
또한 조지 E. 마크스는 대다수의 의사들이 의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의지 착용에 적절하지 못한 수술을 진행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조지 E. 마크스는 “상당한 수의 외과의사(의지 산업의 중심지에 거주하는 의사뿐 아니라 더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의사)와의 교류를 통해 의지적 관점에서 볼 때 절단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식이 제한되어 있거나 다양한 의견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제 “이 주제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의지적 지식이 더 넓게 확산되어야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73) 실질적으로 “외과의사의 수는 언제나 의족 제작자의 수보다 많기 때문에, 그들이 이 분야에 대해 방대하고, 치밀하고, 옳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정말 더 중요하다”며 이와 더불어 “멀지 않은 미래에 외과 학교나 대학의 교과 과정에 의지라는 주제가 포함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74)
구체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조지 E. 마크스는 자신의 논문에서 잉여 부분 없이 충분한 피판(flap)으로 절단단을 마무리하는 법, 절단단에 나타나는 반흔을 관리하는 법, 상처가 아문 뒤 의지 착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절단단을 작게 관리하는 법, 그리고 의지를 착용하기에 적절한 시점 등에 대해 논의했다.75) 마크스는 이 발표를 한 이듬해 1월 27일에 동일한 글을 『뉴욕의학저널(New York Medical Journal)』에 “의지의 관점에서 고려된 절단(Amputations Prothetically Considered)”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76) 1865년부터 발행된 이 저널에 의지학에 대한 내용이 수록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77)
1년 후인 1896년, 조지 E. 마크스는 “의지의 관점에서 고려된 절단”과 함께 “외과학의 의지학에 대한 관계(The Relation of Surgery to Prothesis)”라는 24 페이지에 달하는 새로운 섹션을 회사에서 발행하는 『마크스의 고무 손과 고무 발 특허 의지에 대한 논문』에 수록했다. 이 글의 서두에서 그는 외과학과 의지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고 상보적인 분야로 정의했다.
“외과학은 신체의 질병이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수작업을 하는 의학(medical science)의 한 분야이다. 의지학은 신체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인공적인 부분을 추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sciences)들은 상관관계가 있다. 수술은 제거하여 치료하고, 의지는 인공적인 수단을 이용해 복원을 한다.
이러한 과학 간의 긴밀한 제휴를 통해 외과의와 의지기사 사이에 긴밀한 친밀감을 만들어 내야하며, 각자는 상대방의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외과의가 의지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의 무지는 환자의 예후를 망칠 것이다. 만약 의지기사가 외과적 기술의 기초가 되는 해부학과 생리학에 대한 모든 지식이 없다면, 그는 자신의 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과학적으로 의지를 만들어도, 그것을 제대로 맞추거나 적응시키지 못하면, 그의 노력은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는 선천적이든, 갑상선종이든 또는 다른 것이든 간에 뼈, 신경, 근육 또는 조직에 생기는 모든 비정상적인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의지를 개조하는 그의 기술로 악성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78)
조지 E. 마크스는 의지기술과 수술의 관계가 오늘 날(그의 시대)과 같이 멀어지게 된 시작점을 16세기로 소급해서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의지학은 외과학의 자녀(child)였다.” 절단 수술과 보조기 분야의 기원에 기여한 프랑스의 외과의사 앙브루아즈 파레 (Ambroise Paré, c. 1510-1590)를 소개하며, 조지 E. 마크스는 “파레의 시대 이후 즉시 이 과학(science)[의지학]은 그 자체로 산업(industry)이 되었고, 모호한 기계공의 작업장으로 표류했다. 그리고 200년 동안 그것이 중요성을 잃어버렸다는 것, 합법적인 부모(parents)[즉, 외과학]의 관심을 끌 정도로 충분한 생명력을 보여준 것이 최근에 들어서라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고 적었다.79)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렸다. “현재는 의지 분야가 수술의 연속 단계로 인정되고 마땅히 받아야 할 존엄성을 인정받는 시대의 시작이며, 이것이 완전히 실현되면 외과 의사들 사이에 혼란이 줄어들고 의지기사들은 더 크게 단합할 것이다…외과학은 의지학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하며 의지학은 외과 의사가 하는 일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0) 이를 위해 조지 E. 마크스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의지 제작자들뿐만 아니라 의사들도 “돌팔이 의지 기사(Prothetic quacks)”81)를 경계해야하며, 의지 제작자들 사이에서 통일성 있는 표준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의지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덜 실험의 대상이 되고, 더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따라서 방법에 있어서 다양성과 불필요한 모험적 실험을 줄이고, 더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자격이 있는 경우에만 의지를 제작할 수 있도록 각 주와 나라에서 자격증(license)에 대한 법적 규정을 강화해야한다고 조지 E. 마크스는 주장했다.82)
이에 더해 조지 E. 마크스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신이 집필한 이 책을 통해서도 교육의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절단단의 적절한 길이와 (잉여 또는 이례적인)피부, 발목관절과 발의 부분 절단, 함몰된 발뒤꿈치와 수축된 발꿈치 힘줄, 아래로 굽은 경골 절단단, 지지면, 치유가 어려운 절단단에 생긴 빈 구멍, 반흔 유착, 원뿔형 절단단 등의 케이스를 들어 잘못된 수술 케이스를 비판하며, 다양한 각각의 케이스에 대한 상술과 함께 좀 더 정확하게 절단단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많은 수의 이미지를 수록했다.83)

7. 나가며

이 글에서는 A. A. 마크스 의지 회사의 사례를 통해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의지 기술과 사업의 성장 과정과 의지제작자, 의사, 소비자 사이의 관계 변화를 살펴보았다. 1853년에 설립된 A. A. 마크스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큰 의족 공급업체가 되었고, 그 제품은 전 세계에 수출되어 회사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의지 산업의 성장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 사회는 의지 기술과 산업, 장애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겪었다. 의지 제조업체 A. A. 마크스의 성장은 기술적, 의학적, 사회문화적 변화에 맞추어 진행되었고, 이러한 변화하는 조건들 가운데 의지 기술의 위치는 점차 새롭게 정의 내려졌다. 남북 전쟁 동안 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는데, 절단 기술의 발전으로 외과 의사들이 사지 절단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소독제와 외과수술의 발전은 더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사고나 절단 수술에서 생명을 구하는데 기여했다.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은 군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재활을 위해 더 많은 공공 지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연방 정부와 남부 연합 소속 주 모두 공적 재원으로 의족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전쟁 후 미국에서는 선천적이거나 질병으로 인한 기형과 절단뿐만 아니라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기계 및 철도와 관련된 불행한 사고로 인해 사지가 절단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고 이에 의지의 필요성이 증가했다.
남북전쟁 동안 A. A. 마크스의 창립자인 아마사 A. 마크스는 발목 부분에 불필요한 선회를 없애 안정성과 운동성을 높인 의족을 개발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그 크기가 확장되고 경쟁이 치열해진 의지 시장에서 이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특허를 등록했다. 이에 더해 의료인과의 협력, 장애를 가진 잠정 고객 간의 네트워크 형성, 박람회 참석, 회사 소개를 위한 책자 발행 등 다양한 마케팅 방법과 전략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소비자를 확보하고 전후 국내외 의지 시장에서 그 위치를 확고하게 해 나갔다.
한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은 미국 사회에서 장애와 몸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을 변화시켰다. 개인의 자립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는 가운데, 신분이나 혈통을 대신해 신체적 외모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급기야 이 시기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절단된 신체를 공공장소에서 드러내는 것을 제한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렇듯 변화하는 시기에 아마사 A. 마크스의 아들이자 회사 공동 대표였던 조지 E. 마크스는 의지 기술을 넘어 의지의 소비자인 장애인과 장애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 성장 가도를 달렸던 A. A. 마크스 의지 회사는 고객이 늘어남에 따라 환자의 응답과 인터뷰, 설문, 관찰을 통해 고객에 대한 양적·질적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조지 E. 마크스는 고객의 장애 경험을 분석하고 장애 패턴과 사망률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그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성공적인 경제 활동을 통한 자립과 사회 활동이 가능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장애인의 의존성, 신체적 취약함 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손상되거나 약화된 신체를 보조하는 일종의 기계로 인식되었던 의지는 기능과 외모의 복원을 넘어 경제와 문화적 측면에서 장애인의 사회인으로서의 삶을 복원하는 기술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의지의 새로운 이미지는 제품 소개에서 부터 소비자의 상품 후기까지 A. A. 마크스의 책자를 통해 사회로 투사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 사회는 사회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신체적 외형의 기준을 확실히 ‘손상이 없는 몸’에 두고 있었다. 어쩌면 신체적 ‘외형’과 ‘정상성’에 기준을 둔 이 시기 의지문화는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만들고,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밀어내는 역할, 아이러니 하게도 조지 E. 마크스가 바꾸려고 노력했던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강화 시키는데 기여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가에게 있어 현재적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이 시기의 역사가 현대 사회에 남긴 유산을 생각해 볼 때 위와 같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의지 마케팅은 장애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 보조적 기구를 이용해 신체적 손상을 가리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몸의 복원에 개인과 사회가 매진하게 했다는 비판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A. A. 마크스의 케이스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 미국의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의학과 재활, 그리고 사회에서의 장애 인식이, 기업인, 의료인, 그리고 소비자라는 세 개의 주체를 중심으로 어떻게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 고객과 잠정소비자를 연결하고 고객들 간의 네트워크 형성을 독려하는 A. A. 마크스를 비롯한 19세기 미국의 의지 회사의 마케팅 전략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적 연결망을 구축하는데 기여한 바가 있다.
이와 함께 조지 E. 마크스는 절단 수술과 재활로 양분되어 있었던 의학과 의지학의 관계를 신체적 손상의 축소와 더 효율적인 재활을 위해 상보적 관계로 재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이 시기 의지학은 의료인 보다는 다수의 환자를 접하고 다양한 절단 케이스에 접근성이 높은 의지기사와 기업 활동을 통해 발전했다. 다수의 그리고 다양한 절단 장애를 가진 의지 소비자의 사례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기술 개발을 바탕으로 조지 E. 마크스는 의학과 의지 기술, 외과의와 의지 제작자의 관계를 재정의해 나갔다. 그는 축적된 양적, 질적 자료와 그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환자들의 불만과 필요를 의료진에게 전달했고, 의사들의 수술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적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더해 연구 논문 및 의지 관리 매뉴얼을 발간해 새로운 발견과 지식을 외과의와 일반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노력을 통해 조지 E. 마크스는 의학과 의지학이 함께 발전해야 하는 분야임을 피력하고, 기존에 장인으로 인식되었던 의지 제작자의 지위를 전문 직업 분야로 성장 시키는데 기여했다. 더 나아가 조지 E. 마크스는 의지학의 전문화를 추구하고 의학과 의지학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의지가 절단 수술의 불가피한 후속 조치가 아니며, 절단 수술에 의지적 관점이 반영되어야 함을 강조해 의학과 재활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인식론적 전환에 기여했다.

Notes

1) 의족과 의수와 같은 인공 사지뿐만 아니라 근육과 관절의 손상, 통증으로 인해 약화된 운동 기능을 보조하는 다양한 기기에 대한 연구개발을 포괄하는 분야이다.

2) ‘미국 보조기의지 협회(The American Orthotic and Prosthetic Association, AOPA)’의 전신인 ‘의지 제조업체 및 보조기 협회(The Artificial Limb Manufacturers and Brace Association, ALMBA)’는 1917년에 설립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 참고. Heather R. Perry, Recycling the Disabled: Army, Medicine, and Modernity in WWI Germany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4); David Serlin, Replaceable You: Engineering the Body in Postwar America (The University of Chicago, 2004).

3) 세 개의 회사로 미주리 캔자스시티(Kansas City) 주재의 카르네스 의지 회사(The Carnes Artificial Limb Company), 버지니아에 본사를 두고 있었던 행거(Hanger, 제임스 에드워드 행거(James Edward Hanger, 1843-1919)의 회사), 그리고 아이오와 주재의 J. F. 로울리(James Francis Rowley (?-1938)의 회사)이다. 순서대로 1910년, 1861년, 그리고 1876년에 설립되었다. 행거는 현재 “Hanger Inc.(이전에는 J. E. Hanger, Inc., Hanger Orthopedic Group, Inc.)” 라는 회사명으로, J. F. 로울리는 1904년 시카고로 본사를 옮긴 후 현재는 “Bionic Prosthetics & Orthotics”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며 오하이오(Ohio)에 본사를 두고 있다.

4) 남북전쟁 참전군인 토마스 L. 리버모어(Thomas L. Livermore, 1844-1918)가 1900년도에 출판한 『1861-1865년 미국 남북전쟁의 숫자와 손실(Numbers and Losses in the Civil War in America, 1861-1865)』에 의하면 620,000명(대략 연방군 359,528명과 남부연합군 260,000명)정도의 사람이 남북전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까지 대체로 리버모어의 집계가 받아 들여져 왔지만 2011년 J. 데이비드 해커(J. David Hacker)는 더 높은 숫자를 추산해 750,000명(최대 850,000까지)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Flotow, 2022: 71-72; Miller, 2015: 4).

5) 1888년에 설립된 회사로 ‘Winkley Artificial Limb Company’는 1957년도 이름이다. 현재 회사명은 ‘윙클리 보조기의지(Winkley Orthotics and Prosthetics)’이다.

6)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A. A. Marks, 1896), p. 16;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A. A. Marks, 1899), p. 16. [이하, 동일 제목을 가진 책의 경우 축약 시 연도와 함께 표기 함]

7)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96 & 1899), p. 16.

8) 엘리사의 결혼 전 성(maiden name)과 결혼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렵다.

9) Charles Amasa Marks (1851~1927), George Edwin Marks, I (1853~1932), Lucy Esther Marks (1855~1860), Frederick Abraham Marks (1857~1865), Mary Eliza Marks (1860~1862), William Lincoln Marks (1862~1922), 그리고 Anna Adele Marks (1866~1906).

10) “Amasa Abraham Marks, 1825~1905,” “Lucy Ann (Platt) Marks, abt. 1824~1888,” Accessed on December 12, 2022, https://www.wikitree.com/wiki/Marks-2178. “Family Tree for George Edwin Marks I,” Accessed on December 12, 2022, https://www.wikitree.com/wiki/Marks-2193#Ancestors.

11)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96), pp. 11-12.

12) 의학의 영역과 유사한 과학적 전문화의 중요성을 의지 분야에서 표방하며, 파머는 1864년 펜실베이니아 서부대학(Western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명예 법학박사(doctor of law) 학위를 수여 받은 이후로는 ‘doctor’라는 호칭을 애용하기도 했다고 한다(Lieffers, 2017: 142).

13) 내외과의의 직능 구분이 명확했던 영국에 비해 미국은 그렇지 못했다. 18세기에도 동일한 의료인을 지칭하는데 있어 ‘physician’과 ‘surgeon’이라는 명칭이 동시에 이용되기도 했고, 실질적인 진료 영역에 있어서 구분이 애매한 경우도 있었다.

14) [S. Smith?], “Claims of Mechanical Surgery,” American Medical Times 4 (1862), p. 266. (Lieffers, 2017: 145)에서 재인용.

15) “AOPA History 1&2,” American Orthotic & Prosthetic Association, p.34 Accessed on December 1, 2022, https://www.aopanet.org/about-aopa/history/.

16) 1849년 프랑스인 클라우드 에티엔느 미니에(Claude-Etienne Minié, 1804-1879)가 처음 발명한 총알이다. 대략 지름 0.5인치, 길이 1인치로 사격 거리는 200~250야드(182~228미터) 정도이다. 총알의 크기가 대체로 크고 58구경이 주종을 이루나 54구경과 68구경도 있다.

17) 재건기는 대략 1877년까지의 기간을 지칭하지만 1861~1877년에 해당하는 특허 관련 자료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어지는 자료를 대신 이용한다.

18) 업체들은 의족은 $35과 $90 사이, 의수는 $25와 $135 사이의 금액으로 지원했다(Hasegawa, 2012: 23).

19)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N. F. Turner, Steam Book and Job Printer, 1876), p. 10. [동일 제목의 다른 책이 있기 때문에 이하 축약시 연도를 표시함]

20) Ibid., pp. 11-12.

21) Ibid., p. 11.

22) Ibid., pp. 7-9, 11.

23)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William B. Smith, Job and Card printer, 1865), 표지 전면과 후면.

24) Ibid., p. 10.

25) 2023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할 때 전자는 대략 $1,851, 후자는 $1,388 정도이다.

26)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65), pp. 8-13, 23-24.

27) Ibid., pp. 14-19.

28) Ibid., p. 23.

29) Ibid., pp. 20-21.

30) “Legs with Amputations above knee,” “Knee-bearing Legs,” “two Artificial Legs below knees,” “one Artificial Leg below knee,” 그리고 “Artificial Arms.”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76), pp. 35-54.

31) Ibid., pp. 55-60.

32) Manual of Artificial Limbs (New York: A. A. Marks, 1907), pp. 257-414; Manual of Artificial Limbs (New York: A. A. Marks, 1908), pp. 257-414; Manual of Artificial Limbs (New York: A. A. Marks, 1910), pp. 257-398; Manual of Artificial Limbs (New York: A. A. Marks, 1912), pp. 257-398.

33)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76), pp. 33-35, 87-94.

34) Ibid., pp. 78-80.

35) Manual of Artificial Limbs (1912), p. 241.

36)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96), p. 16.

37)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A. A. Marks, 1888), p. preface.

38)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76), pp. 23-26.

39)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96), p. 212

40)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88), p. 127.

41) Ibid., pp. 127-132.

42) 의지 착용자의 85%는 의족을, 15%는 의수를 주문했다.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하지절단 장애인 보다 상지절단 장애인이 살아나가는데 덜 어려움을 느껴서 상지절단 장애인의 경우 의지를 사용하지 않는 케이스가 많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절단의 경우 약간의 차이로 오른쪽 다리 절단율(49%)이 왼쪽 다리 절단율(46%)에 비해 높았고, 5%는 양쪽 다리를 모두 절단한 경우였다. 남성(4.5%)의 경우 여성(2.6%)에 비해 양쪽 다리를 모두 절단한 케이스가 두 배로 더 높았는데, 조지 E. 마크스는 그 이유가 여성에 비해 남성이 “스스로를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의 경우 반 이상이 무릎과 발목 사이를 절단했고, 여성의 경우도 48%로 거의 반에 가까웠다. 남성의 경우 2%만, 여성은 5%가 절단이 아닌 기형(deformities) 때문에 의족을 착용했다. 팔의 경우 팔꿈치 아래 절단이 남성은 83%, 여성은 75%로 대다수를 기록했다. Ibid., pp. 127-128.

43) 남녀를 합해 다음과 같은 질병들이 포함되었다. 강직, 동맥류, 패혈증, 건막류, 암, 수두, 티눈, 단독, 색전증, 표저, 열, 괴저, 염증, 모기물림, 괴사, 류머티즘, 연주창, 뱀에게 물린 상처, 활액 막염, 종양, 정맥류, 궤양, 상피병.

44)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88), pp. 129-130.

45) Ibid., p. 131.

46) Ibid.

47) 1880년대에서 1890년대 사이에 출판된 마크스의 책에는 “논문(treatise)”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1860년대와 1870년대 1세대 경영진 시기와는 달리 1880년과 1890년도 조지 E. 마크스의 초기 경영 시기에 발간된 서적들은 그 분량도 크게 늘었고, 본문에서 언급한 연구적 관점을 취하는 섹션들이 추가되었다.

48)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96), pp. 313-315.

49) Ibid., p. 316.

50) Ibid., p. 129.

51) Ibid., p.17.

52) Ibid.

53) 여기서는 “prosthetist”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조지 E. 마크스는 동일한 의미로 “prothetician”이라는 단어도 사용했다. 후자는 현재 사용되지 않으며, 전자가 해당 직업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54)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96), p. 304.

55) Ibid., pp. 360-361.

56) Ibid., pp. 348-368.

57) Ibid., pp. 395-518, 522.

58) 대문자 표기는 원저자에 따름.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76), p. 10

59) 혼응지(混凝紙). 젖은 종이에 아교나 풀을 섞어 만든 종이 재질로 건조되면 매우 단단함.

60)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96), pp. 348-350.

61)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76), pp. 20, 95.

62) Ibid., 20.

63) (Schwek, 2009: 1-2)에서 재인용.

64) 예를 들어 ‘외발이 나무 의족(peg-leg)’과 같은 기능성만 강조한 단순하고 저렴한 의족은 공공장소에서 예의 있게 보이기에 적당한 의지는 아니었다.

65) 이 시기에 만연했던 장애를 “육체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로 정의한 관료적/사회적 경향에 대한 비판은 킴 닐슨, 김승섭 역, 『장애의 역사: 침묵과 고립에 맞서 빼앗긴 몸을 되찾는 투쟁의 연대기』 (서울: 동아시아, 2020), 174쪽 참고.

66)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96), p. 433

67) Ibid., p. 470.

68)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88), p.132.

69) bid., p. 133.

70) 원전에 따른 표기이다. 조지 E. 마크스는 “prosthesis”와 “prothesis”를 동의어로 정의하고 있다.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1899), p. 11.

71)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96), p. 322.

72) Ibid., pp. 320-321.

73) Ibid., p. 317.

74) Ibid.

75) Ibid., pp. 320-321.

76) George E. Marks, “Amputations Prothetically Considered,” New York Medical Journal 59 (January 27th, 1894), pp. 113-116.

77) 1865년부터 20세기 초까지 게재된 논문을 살펴보았지만 조지 E. 마크스의 글 이외에 의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78)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96), p. 323.

79) Ibid., p. 317.

80) Ibid., p. 323.

81) 역시 원전 표기에 따름.

82)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1896), pp. 317-323.

83) Ibid., pp. 325-437.

그림 1.
A. A. 마크스 의족, 1853-1896
Figure 1. A. A. Marks’s Artificial Legs, 1853-1896
왼쪽부터 a는 1853년 모델, b는 1856년 모델, c, d, e는 1863년 첫 특허를 받은 고무발 의족이다. c는 무릎 위 절단, d와 e는 무릎 아래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를 위한 제품으로, d는 무릎관절과 절단단(stump)이 유연한 경우, e는 그렇지 못한 경우를 위한 제품이다. f는 1896년 고무발 의족이다.
(a, b, f는 A. A. Marks, 1896: 19; c, d, e는 A. A. Marks, 1865: 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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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의수와 의족을 착용한 절단환자
Figure 2. An Amputee Wearing A Pair of Artificial Hands and One Artificial Leg.
A. A. 마크스의 한 고객이 의족과 의수를 착용한 전후 모습을 비교한 것이다. 철도국 직원이었던 고객은 어느 날 폭풍을 만나 양손과 발에 심각한 동상에 걸린 채 발견되었다. 중간 그림은 양측 팔에는 레버로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의수를 착용하고, 동상으로 발목 위쪽을 절단한 왼쪽 다리에는 의족을 착용한 모습이다. 가장 오른쪽 그림은 의족과 의수를 착용한 후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A. A. 마크스의 1896년 책자는 그가 매우 심각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의수와 의족 착용 후 “어느 정도(walk acceptably) 보행이 가능하고 일할 수 있으며, 생계를 스스로 꾸려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A. A. Marks, 1896: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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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알바 영(좌측)과 존 샤프(오른쪽)의 일러스트레이션
Figure 3. Illustrations for Alvah Young(Left) and John Sharff(Right)
(A. A. Marks, 1896: 433,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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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Causes of Amputation among A. A. Marks’s Clients
양쪽 사지 다리 다리

남성 여성 남성 여성
질병 14 15.8 1.5 12 51.5 1 8.8
철도 26 28.1 11 29.5 12.6 12.3 4.5
전쟁(외국포함) 30 30.4 21.7 33.3 - 24.4 -
추락 3 3.3 1.1 3.4 3. 1.3 -
염좌와 골절 4.5 4.3 1.9 4.4 3.5 1.8 4.5
추락물에 짓눌림 3.5 2.3 13.5 3.5 2.4 10.4 8.7
농사도구 2.5 2.3 3.9 2.5 1.8 4.5 -
총기 사고 1.5 1 1.1 0.7 3 1 4.5
말과 운송수단 2.5 3 1.1 3.1 2.4 1.3 -
제조 기계 2 0.7 11.5 0.8 - 11.3 17
제분소 2 1 10.6 1 - 12.2 -
광산 0.4 0.5 - 0.5 - - -
보트와 수상사고 0.8 1 - 1 - - -
엘리베이터 0.3 0.3 - 0.2 - - -
끝이 날카로운 도구 0.5 0.4 1.1 0.4 - 1.3 -
폭발 0.8 0.5 5.5 0.2 - 6.3 -
동상 1.5 2 0.8 2 0.6 1 -
기형 1.5 1 5.5 0.8 3 2.7 35
화상 0.2 0.4 - 0.2 1.2 - -
각종 사고 2.5 1.7 8.2 0.5 15 7.2 17

참고문헌 REFERENCES

1.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A. A. Marks, 1888).

2.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A. A. Marks, 1896).

3. A Treatise on Artificial Limbs with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A. A. Marks, 1899).

4. Manual of Artificial Limbs (New York: A. A. Marks, 1907).

5. Manual of Artificial Limbs (New York: A. A. Marks, 1908).

6. Manual of Artificial Limbs (New York: A. A. Marks, 1910).

7. Manual of Artificial Limbs (New York: A. A. Marks,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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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Marks’ Patent Artificial Limbs with India Rubber Hands and Feet (New York: William B. Smith, Job and Card printer, 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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