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study analyzes the annual reports of CMB in order to examine CMB’s assistance of Korea. CMB originally assisted medical education in China, and it turned to assist Asia with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This paper examines three periods spanning from 1953 to 1980 when Korea received CMB assist. The first period was from 1953 to 1962, when Korea received help with material resources that were lacking after the Korean War. The second period was from 1963 to 1972 during which the scale of assistance further expanded. Additionally, Seoul National University began to have human resources with the necessary support for education and research with the assistance from CMB. The third period was from 1973 to 1980, when the CMB newly established the overall direction of aid, the contents of assistance for Korea also changed. Throughout this period, Korean medicine was able to lay the foundation for independence, and public health, including community medicine, came to be considered as an important aspect of society.
1. 들어가는 말전쟁 이후 한국은 물질적으로 피폐한 환경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국제사회로부터의 원조 사업은 한국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의학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후 한국의 의학 연구 및 실천적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원조 사업이 실시되었고, 대표적인 사업으로 미네소타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미네소타프로젝트는 서울대학교가 미네소타대학으로부터 농학, 공학, 의학 분야의 인적, 물적 지원을 받은 대규모 원조 사업이다. 특히 미네소타프로젝트의 핵심인 교환교수 프로그램은 젊은 학자들에게 미국 유학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최신 학문을 경험하도록 하여 학문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1950년대 중, 후반에 이루어진 미네소타프로젝트의 지원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교수 인력의 역량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시설, 장비 등을 지원받아 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네소타프로젝트는 1961년을 끝으로 종료되면서 발전에 필요한 자원 마련은 지속되지 못했다. 또한 이 사업이 서울대학교에 집중됨에 따라 국내 다른 의과대학과의 고른 발전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미네소타프로젝트 외에 1950년대 한국 의학 분야의 발전을 지원한 국제 원조 사업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차이나메디컬보드(China Medical Board, 이하 CMB)였다. CMB는 중국의 의학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이었다.1) 1913년 설립된 미국의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은 아시아 지역의 보건의료,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공중보건과 의학교육 및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CMB를 조직하고 관련 사업을 진행했다. CMB는 중국의 의료 상황 및 교육 환경 등을 조사하고, 당시 중국의 의료 실정에 맞게 대규모 공중보건 사업이나 연구보다는 의학 교육에 지원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14년 북경 연합의과대학을 사들인 CMB는 이 학교의 이름을 북경협화의학원(Peking Union Medical College, 이하 PUMC)으로 바꾸고, 이곳을 존스홉킨스 의대 급으로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목표를 설정했다. 1928년에 이르면 CMB는 록펠러 재단이 제공한 기부금과 함께 PUMC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독립적인 조직으로 변화했다.
이처럼 CMB는 중국의 의학 교육 발전을 위해 PUMC의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미국과 중국 간 정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CMB의 활동은 어려움에 처해졌다. 무엇보다 중국 내 모든 자산이 동결되고 PUMC도 국가 소유로 전환됨에 따라 더 이상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결과 CMB는 중국에서의 지원 활동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2)
이 무렵 CMB는 시야를 전환하여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다. 바로 아시아 지역 전반에 대한 의료 활동 지원을 계획했던 것이었다. CMB 헌장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PUMC 및/또는 극동이나 미국에 있는 기관 같은 곳에 재정적 원조를 지출하는 것”이 활동의 목적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CMB는 더 이상의 지원이 어려워진 중국의 PUMC가 아닌, 극동지역과 미국의 의학 발전을 위한 지원으로 운영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한국이 CMB의 지원을 받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3)
CMB의 활동과 관련한 선행 연구 대부분은 중국 지원 또는 동아시아 지원 전반에 대한 종합적 논의들이라 할 수 있다. 로렌스 슈나이더는 그의 저서 Biology and Revolution in Twentieth-Century China를 통해 20세기 초 중국의 유전학 및 생물학 분야의 발전에 CMB의 지원과 선진적 훈련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보였다(Schneider, 2003). 또한 CMB의 주된 활동 내용이기도 했던 중국의 의학교육 지원, 특히 PUMC 관련 연구가 국내외적으로 발표된 바 있다(조정은, 2022; 2020; Fukudome, 1968). CMB의 지원 영향이 미쳤던 미국의 대학 중 워싱턴대학교를 대상으로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참여자들의 설문조사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Gao, 2019).
하지만 이에 비해 CMB 한국 지원에 대한 연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연세대의 지원 내용에 집중한 여인석의 연구와 서울대병원 건축 지원 과정에 주목한 정준호의 연구가 있다(여인석, 2015; Junho Jung, 2022). 그 밖에 2014년 CMB 활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에서 개최된 세미나 발표를 모아 엮은 Medical Education in East Asia: Past and Future라는 단행본에 서울대 보건대학원 문옥륜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학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L.C. Chen et al., 2017). 이왕준은 학위논문에서 CMB의 지원 내용과 특징 등을 서울대에 한정하여 간략하게 정리한 바 있다(이왕준, 2006). 이처럼 CMB의 한국 지원에 관한 연구는 특정 학교 및 기관을 중심으로 소개한 논문과 CMB 지원을 포함하여 한국 의학 교육 전반을 담은 글이 일부 있고, 종합적 고찰은 아직 이루어진 바가 없다. 아마도 자료 대부분이 국내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연구자들의 접근도가 낮아서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연구는 CMB가 매년 발표한 연례보고서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에 대한 주된 지원 내용과 특징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CMB는 매년 6월 말 1년 동안의 사업 내용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제출해왔다. 연례보고서는 CMB의 아시아 지원의 내용을 프로그램별로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전반적인 지원 내용을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연례보고서의 맨 앞에는 CMB의 아시아 지원 사업을 기획, 관리하는 임원 및 이사진의 명단과 지원 국가를 지도로 나타내고 있다. 이어서 본문에는 CMB의 그간의 활동 내용과 목표, 지원에 대한 전반적인 기조 등을 1-2쪽 분량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본문 대부분은 지원 프로그램별로 각국의 각 학교에 대한 지원 내용을 담고 있다. 본문 말미에는 이사진들의 퇴직이나 임명과 관련한 사항들을 소개하고 있다. 1973년까지는 본문 마지막에 펠로우십 지원 내역을 국가별로 정리함과 동시에 각국의 수혜자 명단 및 지원 기간, 학교 등을 제시했고, 각국에 파견된 방문교수의 명단도 나타나 있다. 특히 예산 집행 내역 부분이나 아시아 각국 또는 미국을 방문한 개인에 대해서도 설명된 부분이 있는데,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한국에 대한 지원 내용을 세밀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4)
이 논문에서는 한국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된 1953년부터 1980년까지 발표된 연례보고서를 중심으로 하면서 세 시기로 구분하여 살피고자 한다. 첫 번째 시기는 1953년부터 1962년까지로 CMB의 한국 지원이 처음 시작된 시점부터 사업이 진행되는 방식을 두루 살필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1963년부터 1972년까지로 CMB의 한국 지원 내용 중 인력 양성 및 연구를 위한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세 번째 시기는 1973년부터 1980년까지인데, 1973년은 CMB의 아시아 지원 사업의 방향이 크게 변화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1980년 이후 CMB는 중국에 대한 지원 활동을 다시 왕성하게 시작하게 되는데, 이 글에서는 그 전까지를 살피면서 CMB의 한국 지원 활동과 그 의미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그동안 국내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CMB의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내용을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반적인 지원 맥락을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지원의 과정이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고, 이것이 한국 의학 자원의 형성에도 긴밀하게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CMB의 아시아 지원 프로그램과 의학 인프라 마련1950년대 초반은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 간 대립 또는 갈등이 짙어지면서 이른바 냉전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여러 노력 가운데 원조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원조 경쟁을 펼치며 진영의 결속과 연대를 마련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아시아 지역을 비롯한 냉전의 주변부에 속했던 국가들에 대한 원조가 집중되었다(이봉범, 2015). 이러한 모습은 국가 차원의 움직임에서 뿐 아니라 민간 재단의 활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 등 미국의 민간 재단은 국가의 외교 정책과 관심을 같이 하며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김민수, 2018). 당초 록펠러 재단의 산하기관으로 출발했던 CMB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CMB의 아시아에 대한 지원은 1952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5) 오랫동안 PUMC를 지원해 오던 CMB가 중국에서 더 이상의 활동을 진행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중국이 아닌 새로운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1952년 일본과 대만의 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펠로우십 지원을 통해 CMB의 아시아 지원이 시작되었다.6) 1953년부터는 버마(미얀마), 실론, 홍콩, 인도네시아, 한국,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등을, 1957년부터는 베트남과 피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7) 아시아 국가에 대한 지원 내용은 PUMC 지원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지원 활동 국가가 변경되기는 했으나 그 기조나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아시아의 의료 개선을 위한 교육 지원에 집중되었고, 의과대학 및 간호학교가 중심이 되었다.8)
CMB의 지원 프로그램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추가되기도 하고, 대대적으로 개편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각국의 의과대학과 간호학교의 교수와 학생을 위한 것들이었다. 1950년대에는 5개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었는데, 지원 초반이다보니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되었다. 연례보고서에 기재된 CMB의 지원 프로그램은 물품 및 장비, 서적 및 저널, 건축, 방문교수 프로그램, 펠로우십 프로그램 등이 있었다.
먼저 물품 및 장비 지원은 전쟁으로 파괴되었거나 시설이 낙후한 곳의 의학 교육과 연구를 위해 각종 물품과 장비들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원 규모는 1만 달러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편이었지만 지원을 받은 학교들은 전자현미경이나 실험실 장비 등을 마련하여 교육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소액이나마 거의 매년 지원이 이루어져서 이후에는 학교별로 특정 실험실을 갖추고 운영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9)
서적 및 저널 지원을 통해서는 아시아 지역의 의과대학과 도서관에 새로운 출판물을 제공하고, 의학 저널 구독을 통해 서구에서 형성된 최신 의학 지식이 아시아에도 축적될 수 있도록 했다. 다른 지원 프로그램과 달리 서적 및 저널 지원 프로그램은 언제, 어느 학교에, 얼마의 자금을 지원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나타나 있지는 않다. 다만 1950년대에는 CMB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서적, 저널 지원 보조금 규모가 10만 달러 전후였다가 1960년대에 이르면 매년 20만 달러 가량을 지원하는 것으로 상향되었다. CMB는 이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각 학교에 외국 학술지가 확보될 수 있도록 했다. 학술지 최신 호 외에도 지난 호 가운데 빠진 부분이 있으면 채워넣고자 했고, 가급적 학교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구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10)
건축 및 재건 지원은 말 그대로 전쟁으로 파괴된 학교 건물을 재건하거나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자금을 지원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의과대학 건물 신축이나 기존 건물의 증축, 리모델링을 위한 지원이 이루어졌고, 병원과 의학도서관 확장에도 자금이 투입되었다.
방문교수 프로그램은 미국에 있는 의대 교수들이 아시아 지역의 의과대학에 방문하여 의학 교육이나 운영 관련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방문교수 자격으로 아시아 각국의 의과대학 또는 병원 등을 방문한 사람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한 내용을 자문하거나 방문한 곳에서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체류 기간은 사례마다 모두 달랐지만 짧게는 4주부터 길게는 20개월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펠로우십 프로그램은 연구자들이 발전된 의학 환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CMB에 의하면 펠로우십 프로그램은 극동의 의학 교육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여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했다.11) 펠로우십 프로그램은 여행과 연구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여행 펠로우십은 이미 과학적 명성을 갖춘 교수진이 최신의 학문을 배워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해당 분야의 최신 흐름을 경험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으며 기간은 6개월 이내로 제한된다. 연구 펠로우십은 자신이 활동하고자 하는 분야의 새로운 연구 방법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제공되며 대부분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활동한다. 연구 펠로우십은 지원 기간이 종료되면 귀국하여 자신의 원래 소속 학교에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펠로우십 프로그램은 지원이 시작된 1952년 13개 의학교의 16명에게 지원되었다.12) 이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1973년까지 아시아 지역의 전체 펠로우십 프로그램 수혜자는 총 784명이었고, 이 가운데 연구 펠로우십이 611명, 여행 펠로우십이 173명으로 대부분 연구를 위해 지원받았음을 파악할 수 있다.13)
1950년대 중반부터는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 지원이 시작되었다. 연구 프로그램은 대학 내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것이고, 교육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장학금 제공이나 미국 대학과의 교류 협력 추진 시 참여하는 교수진이나 학생들을 지원하는 것이다.14) 한편 1973년 전후로 CMB 지원 프로그램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개편되면서 의료 인력 대상의 보수교육과 대학원 교육을 위한 교육 센터가 운영되었고, 특히 자립을 위한 기부금 조성 프로그램이 적극 추진되었다.
한국은 1953년 CMB로부터 지원을 받기 시작한 이래로, 약 30년 간 인적, 물적 지원을 통해 의학 발전에 필요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아래 그래프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CMB의 국가별 지원 규모를 나타낸 것인데, 한국의 경우 지원 규모가 1950년대 7.73%, 1960년대 18.31%, 1970년대 28.02%로 시간이 지날수록 큰 폭으로 증가하는 모습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대한 지원 규모가 커진 것은 CMB 지원 방향의 전략적 변화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15) 1950년대만 해도 CMB는 물품 구입 및 제공과 같은 직접적인 지원을 했었는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원국과의 관계를 파트너로 인식하고 그들이 스스로 자원을 결정, 구매,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 방향을 전환했다.16) 동시에 각국의 여러 학교를 지원하기보다는 다른 학교들의 롤모델 역할을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학교 한 두 곳으로 지원을 집중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17) 1960년대 CMB 지원 규모의 국가별 분포를 보면, 대만이 24%로 1위, 한국이 18%로 2위이고, 일본이 14%로 3위의 순이다.18) 1970년대에는 한국이 1위(28%), 태국이 2위(19%)를 차지했고, 1위였던 대만은 4위(12%)로, 3위였던 일본은 10위(0.2%)로 변화되었다. CMB는 1960년대를 지나면서 모든 아시아 의학 기관을 만족시키기에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견실한 기반이 갖추어진 한 두 곳의 선두 학교에 지원을 집중하는 것으로 결정했다.19) 이는 이 학교들이 다른 학교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지도자들을 배출할 것이고, 특정 학교의 높은 수준이 다른 곳의 질적 향상을 자극한다는 기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지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점차 증가했다.
3. CMB의 한국 지원: 원조 대상에서 자립 단계로1) 1953-62: 물적 자원 원조1950년대 초 전쟁으로 인해 한국의 의과대학은 교육과 연구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건물 파괴는 물론이고 각종 기자재들이 심각하게 소실됨에 따라 이러한 물적 자원을 구비하는 것이 시급했다. 이에 따라 CMB는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이나 시설 지원을 시작했고,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서적, 저널 등과 실험실 용품과 장비 지원을 도왔다.
먼저 이 시기 물품 및 장비 지원과 관련해서는 1954년 경북대에 의료용품과 장비 구입에 대한 도움을 시작으로 1955년에는 경북대에 병리학 교육에 필요한 슬라이드와 필름 등을, 세브란스의대에는 실험실 용품과 장비 교체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았다. 1956년에는 연세대 실험실과 전남대 예과 실험실 장비 구입, 1957년에는 연세대와 수도의과대학에 필요한 장비 구입이 지원되었다. 연세대의 경우 당시 건축 중이었던 의료원 완공 시 이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장비를 구입하도록 했고, 수도의과대학은 영양 및 생화학과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도록 했다. 1958년 이후부터는 구체적인 용처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물품과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1만 달러 전후의 금액이 꾸준히 지원되었다.
이어서 서적 및 저널 지원과 관련해서는 다른 지원 프로그램과 달리 보고서 본문에 특정 대학이 지칭되지 않았고, 1955-56년에 발표된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6개 의과대학에 저널 구독을 돕기 위해 보조금이 지급되었다는 표현이 있을 뿐 어느 학교에 어떤 규모로 보조금이 지원되었는지는 잘 알기 어렵다.20) 1950년대 중반까지는 지원하는 국가나 학교마다 규모가 모두 달랐으나 후반부터는 특별한 언급 없이 지원 국가와 금액 정도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서적 및 저널 지원 목적으로 책정된 금액과 지원 국가 수를 비교해 보면, 1956-57년에는 5개국 대상으로 85,000달러, 1958-59년에는 7개국 대상으로 143,000달러, 1960-61년에는 7개국에 127,500달러, 1961-62년에는 5개국에 187,500달러 등으로 각국에 15,000 내지 20,000달러 선에서 지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금액이 한국의 의과대학에 다시 배분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각 학교에 대한 지원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다.21) 적은 규모일 수 있지만 프로그램의 지속적인 운영을 통해 손실되었던 도서와 외국 학술지를 구비하여 교육과 연구의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될 수 있었다.
셋째로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건축 및 재건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연세대 의대는 신축에 필요한 자금을 대대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었다. 1956년 환율 문제가 생기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이경록, 2022), 이때 CMB가 45만 달러의 금액을 지원해 주었고, 이는 그 해 CMB가 지원한 모든 프로그램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기도 했다.22) 이어 1959년에 30만 달러, 1961년에 25만 달러를 추가 보조금으로 지원함으로써 CMB 원조는 연세대 의대 건물 완공에 크게 기여했다. 연세대 외에 1959년 전남대에도 미생물학 실험실 재건을 위해 4,500달러가 지원되었다.23)
다음으로 방문교수 프로그램을 통해 각 분야 전문가들이 한국의 의대를 방문하여 전문적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 1950년대 후반부터 이 프로그램의 지원이 시작되었는데 주로 연세대를 방문하여 의료원 건축에 필요한 내용이나 의학교육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해 주었다. 존스홉킨스 의대 외과 교수였던 피러(Warfield M. Firor)가 1957년 7월부터 4주간, 1958년 7월부터 5주간, 1961년 7월부터 6주간, 코넬의대 교수를 역임했던 큐란(Jean A. Curran)이 1961년 1월부터 3개월간, 1963년 2월부터 3개월간 연세대 의대를 방문하여 건물 신축 이후 실천될 의학교육과 관련한 자문을 제공했다.24)
다섯째로 펠로우십 프로그램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한국에 대한 지원이 보고서에 처음 명시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1952-53년 연례보고서에는 수혜자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일본, 대만 등 국가와 함께 펠로우십 지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5)
지원 규모는 대체로 개인당 연간 5천 달러 내외로 책정되어 펠로우십 수혜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해 주기도 했다. 펠로우십 프로그램 수혜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펠로우십 프로그램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경북대, 서울대, 연세대, 수도의과대학, 전남대 등 여러 대학에 지원 기회가 주어졌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전적으로 연세대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행 펠로우십을 받은 경우도 3-4건 가량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연구 펠로우십을 받아서 연구 역량 증진의 기회로 삼기도 했다. 지원을 받은 29명 중 기초분야가 11명, 임상분야가 15명, 간호학 3명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기초와 임상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임상분야의 펠로우십 지원이 조금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구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조금 늦게 지원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그램도 연세대에 지원이 집중되었는데, 1959년 기초의학 연구 지원 15,000달러를 시작으로 1960년 전임상 및 임상 연구 프로젝트 5개에 24,000달러, 1962년 실험동물, 동물의 먹이와 케이지 조달에 필요한 비용을 포함한 6개의 연구 프로젝트에 35,000달러의 지원이 있었다.26)
이처럼 CMB의 한국 지원이 처음 시작된 1953년부터 약 10년간 지원된 내용을 보면 대체로 전쟁 이후 파괴된 건물이나 시설을 지원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연세대 의대 건물 신축을 대규모로 지원함으로써 한국에서의 의학 교육과 연구를 위한 환경을 마련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큰 금액을 지원받은 건축 재건 프로그램 외에도 연세대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상당 비율의 지원을 받았다. 펠로우십 프로그램도 전체 29명 중 연세대가 16명으로 절반 넘게 차지하고 있고, 방문교수와 연구 프로그램은 연세대에만 지원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는 CMB 중국 지원 중단 이후 극동 지역 국가들을 답사할 때 한국을 들렀던 CMB의 총재 라욱스(Harold L. Loucks)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라욱스는 북경협화의학원 근무 시절 친분이 있었던 선교부의 펜 박사와 세브란스 외과 교수였던 러들러(Alfred I. Ludlow)로부터 세브란스의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고, 그가 직접 세브란스를 방문했을 당시 재건 노력에 열심을 기울이는 교직원들을 보고 지원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있다(여인석, 2015; 179). CMB의 아시아 지원이 시작된 이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 기반 구축에 필요한 물적 자원을 제공받음으로써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2) 1963-72: 인력 양성두 번째 시기인 1963-72년에는 앞의 시기와 지원 프로그램은 거의 비슷했으나 지원 규모가 커지면서 지원 항목이 세밀해졌고, 횟수도 확대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앞 시기 한국에 대한 CMB의 총 지원 금액은 1,309,110.59 달러였던 데 비해 두 번째 시기인 1963-72년에는 3,502,239.23달러로 지원 규모가 거의 3배에 달했다(Norris, 2003; 266). 거의 같은 지원 프로그램이지만 전보다 많이, 빈번하게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지원 규모도 증가했다.
또한 1963년부터 서울대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한 점도 이 시기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서울대는 1955년부터 미네소타프로젝트의 지원으로 여러 시설들이 마련되고 연구 인력이 확충될 수 있었다.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던 까닭에 서울대 측에서는 프로젝트의 연장을 적극적으로 희망했으나 정부 입장은 고등교육 지원보다는 경제적 지원을 더 우선시하면서 결국 종료되었다(이왕준, 2006; 157-158). 미네소타프로젝트 종료 이후인 1963년 당시 서울대 의대 학장이었던 나세진은 의대 운영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CMB에 의학교육을 자문해 줄 교수를 요청했고, 미네소타프로젝트 총괄 자문관이었던 골트가 1963년 5월 서울대를 방문하여 자문을 제공하기도 했다.27) 이후 서울대에 대해서도 CMB의 지원이 시작되었다.
앞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물품 및 장비 지원이 계속되었다. 지원은 연세대와 경북대, 서울대의 세 학교에만 이루어졌지만, 1960년대 지원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예를 들면, 이 프로그램으로 거의 매년 지원을 받은 연세대의 경우 1963년에는 기초분야의 교육 장비를 비롯하여 심장수술팀의 훈련과 수술실 및 동물실 장비를 위해 지원이 이루어졌고, 1964년에는 예방의학 및 환경보건연구실, 일반 교육 및 연구용 장비, 생리학 및 약리학 학생 실험실 장비, 이비인후과 및 기타 학과의 교육용 부품과 수술용 현미경 등이 지원되었다.28) 1965년에는 간호대학의 난방시설과 신축건물 내 교실, 실험실, 사무실, 도서관의 가구와 장비를 지원받았고, 1967년에는 전자현미경을 비롯하여 방사선학과와 유전학실험실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할 수 있었다.29) 1968년에는 심장학연구실과 생화학과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졌다.30)
경북대는 1964년 생화학과의 교육 및 연구 시설, 중앙실험실의 장비 등을 지원받았고, 1965년에는 각종 기구들을 수리할 수 있는 기구 수리점 설치를 지원받기도 했다.31) 서울대도 1967년부터는 의대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시청각장비, 보건대학원 혈청학실험실의 지원이 이루어졌다.32) 1970년대 이후부터는 이러한 구체적인 용처가 밝혀지지는 않았고, 교육 및 연구용 지원으로만 기록되었으며 학교별로 약 2만 내지 5만 달러가 지원되었다.
둘째로 서적 및 저널 지원도 앞의 시기에 이어 계속되었다. CMB는 각 학교의 의학도서관에 외국 학술지들이 가급적 충실하게 갖춰질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연례보고서에서 학술지의 구독과 학생들이 사용할 교재 및 참고서의 구비 등이 중요하게 강조되었고, 특히 확보된 학술지의 경우에도 누락된 호가 있는 경우 최대한 채워넣고자 했다.33)
셋째로 건축 및 재건 지원과 관련해서 눈여겨 볼 점은 1967년 서울대 보건대학원과 1968년 서울대병원의 건물 신축에 필요한 지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59년 처음 문을 연 서울대 보건대학원은 초창기 변변한 강의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의대 건물 이곳저곳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서울대학교보건대학원사편찬위원회, 1996: 118-119). 처음에는 예방의학교실 뒤편의 실험준비실을 개조해 쓰다가 1960년대 이후에는 의대 건물 뒤편의 보건소 건물, 외국인 숙소로 쓰던 2층 목조 건물 등을 강의실이나 세미나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CMB로부터 보건대학원 건물 신축 자금을 제공받게 되었다. 1966년 당시 보건대학원 원장 김인달이 CMB 총재인 맥코이(Oliver McCoy)에게 건축비 지원을 요청하며 의견 교환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967년 CMB 이사회에서 가결됨에 따라 건물 신축에 필요한 자문 및 자금 25만 달러가 제공될 수 있었다.34) 또한 1968년 서울대병원의 건립에 필요한 자금도 함께 제공되었으며, 1971년에는 의학도서관 지원을 위해 20만 달러의 예산이 승인되기도 했다.35) 1972년에는 대학병원의 냉난방시설을 비롯한 여러 설비의 설치도 지원되었다.36)
연세대는 1961년 완공된 의대 건물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적으로 협소해지면서 증축 논의가 있었는데, 이에 필요한 비용을 CMB를 통해 지원받았다(여인석, 2015: 182). 공사에 필요한 전체 금액의 절반을 CMB가 지원하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부담하는 방식으로 하여 1970-71년 동안 연세대 의대에 건물 증축과 개조에 필요한 비용 20만 달러가 지원되었다.37) 그 밖에 1965년 경북대에도 도서관에 필요한 열람실과 도서 수납 공간 확장 지원, 세균학과의 학생 실험실 지원이 이루어졌는데, 그 규모는 1만 달러 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었다.38)
넷째로 이 시기의 방문교수 프로그램은 서울대와 연세대에 대해서만 지원이 이루어졌다. 서울대는 미네소타프로젝트 종료 직후 여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963년 골트가 다녀간 바 있고, 그 이후로는 보건대학원 건물 신축 관련하여 브라운(Harold W. Brown)이 세 차례 다녀갔다. 콜롬비아대학 의대의 기생충학 교수인 브라운은 1967년, 1968년, 1972년 공중보건교육 전반에 걸쳐 자문을 해주었다. 프로젝트사용법을 설명해 주기도 했고, 건축물에도 조예가 깊어 보건대학원 건물 신축 당시 기본설계와 도안 작성을 하기도 했다(서울대학교보건대학원사편찬위원회, 1996: 120). 또한 1971년에는 뉴욕주립대 다운스테이트 메디컬 센터의 약리학 교수인 이광수가 방문교수로 서울대를 방문하여 교육과정 개정 시행과 관련한 도움을 주었다.39)
연세대에는 1968년 뉴저지의 뮤렌버그병원 병리학 연구소장으로 있었던 현봉학이 병리학과에 방문하여 약 2개월간 머물면서 의료원 임상실험실 서비스를 조직, 개선하는 일을 도왔다.40) 또한 1972년 미네소타대학 의대 신경학 교수였던 성주호도 연세대 신경병리학과를 6개월간 방문했다.41)
다섯째로 펠로우십 프로그램은 앞의 시기에 비해 훨씬 많은 인원이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1962년까지만 해도 도합 30명이 되지 못했던 펠로우십 프로그램 수혜자는 이 시기 75명으로 2배가 훨씬 넘게 늘어났다. 아래의 표는 1963년부터 1972년까지 CMB의 펠로우십 프로그램 지원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표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이 연구 펠로우십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경우에 따라 추가 지원을 통해 체류 기간을 연장하며 연구에 몰두한 사례들도 있었다. 또한 앞의 시기와 다르게 임상보다는 기초 분야의 연구자들이 기회를 조금 더 많이 얻었다. 전체 75명의 수혜자 가운데 기초는 34명, 임상은 27명으로 두 분야 간 차이가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앞의 시기에서는 임상이 기초보다 약간 더 많았던 것을 보면 충분히 달라진 부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963년부터 서울대도 CMB의 지원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는데, 특히 펠로우십 프로그램 내 서울대의 비중이 상당히 높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전체 75명 가운데 서울대 소속 연구자가 41명, 연세대는 25명, 경북대는 9명으로 서울대 연구자가 절반을 훨씬 넘게 차지했다. 다른 학교들에 비해 CMB로부터의 지원이 늦게 시작되었지만, 서울대는 1955년부터 미네소타프로젝트를 통해 기본적인 시설을 갖춘 상태였고, 유학 경험이 있는 연구자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학교들과 달리 서울대에 대해서는 CMB 지원 초반부터 연구 관련 지원 비중이 높았다.
간호학 분야에서도 12명이 지원됨에 따라 CMB의 간호 분야에 대한 관심도 확인할 수 있었다. CMB는 1964-65년 보고서를 통해 개발도상국에서 현대 의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의학 및 간호교육 시스템이 전국적으로 잘 갖추어질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CMB의 목적임을 강조했다.42) 특히 잘 훈련된 의사와 간호사는 의료 활동 뿐 아니라 인구 통제를 비롯한 다양한 유형의 공중보건 프로그램을 계획, 감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각국은 이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자체적인 시설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간호학 펠로우십의 증가도 CMB의 이러한 목적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도서관 사서들에게도 펠로우십이 제공되었다. 1967년 연세대 의학도서관의 김종회와 1969년 경북대 의학도서관의 고성수는 일본 게이오대학교 기타사토기념도서관에서, 1967년 서울대 의학도서관의 이영자는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등에서 6개월 내지 12개월간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43) CMB는 1965-66년 보고서에서 초창기에는 건물 재건이나 물품 공급, 교원 훈련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의대 교수들의 역량 강화에 힘써야 하고, 이를 위해 의학도서관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44) 지원 보조금의 규모가 주목할 만큼 큰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의학 사서를 교육하기 위해 이들에게 펠로우십을 제공하기 시작했다.45)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도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의 지원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CMB는 교수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의학도서관 개선 외에 연구 활동 장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다. 한국에 지원된 연구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연세대와 서울대가 1963년부터 거의 매년 10개 내외의 프로젝트 지원을 받았다. 학교에 배정되는 예산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 정확히 얼마나 배정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매년 승인된 과제가 8개, 9개, 많게는 15개 정도였던 것에 비해 책정된 예산은 1만-3만 달러 또는 5만 달러였던 것으로 보아 과제당 지원된 액수는 3천 달러 전후로 많지는 않았다.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의과대학 뿐 아니라 간호대학이나 보건대학원의 연구 과제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서울대의 경우 CMB 펠로우십 지원으로 유학 경험이 있는 연구자들이 신청한 과제가 선택되는 경우도 많았다.46) 두 대학에 비해 규모가 작고 지원 빈도도 일정치 않지만 경북대에 대해서도 연구 지원이 이루어졌다. 1965년 세균방사선학과, 생화학과, 예방의학과에 대한 지원 외에 1968년 2개, 1970년에 3개의 프로젝트가 선정되어 지원을 받았다.47)
교육 프로그램은 연세대와 서울대에 집중되었다. 1967년 연세대 생리학과 교육 지원 외에 1968년에는 대학원 훈련 프로그램, 예방의학 및 공중보건학 워크숍 등에 6만 달러 가량의 지원이 제공되었고, 1971년에는 간호사 급여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간호대학에 대한 보조금이 마련되었으며 1972년에는 5명의 의사가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지원되기도 했다.48) 서울대의 경우 주로 보건대학원 운영 관련 지원이 많았다. 1968년 국내외 공중보건시설의 단기 근무 지원, 1971년 약 2만 달러의 비용으로 보건대학원 학생들의 현장 훈련 지원, 1972년 6만 달러의 보조금으로 간호대학에 급여 및 건물, 장비 지원 등이 이루어졌다.49)
이밖에 특징적인 점으로 1972년 연세대 의대 발전기금이 조성된 것을 들 수 있다. 과거 CMB가 PUMC를 지원할 당시 사용했던 계좌가 중국에 의해 국유화되면서 은행 거래도 함께 차단되었는데, 운영을 위해 이전에 예치해 두었던 508,194달러에 달하는 금액이 상환되었다.50) 1972년 1월 뉴욕주 대법원 판결에서 PUMC에 지원했던 것과 같은 목적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상환된 것으로, 같은 해 6월 열린 이사회 회의에서 CMB가 이 금액을 연세대 의대 발전기금 설립에 책정했다. 구체적으로 더 나은 전임교수진 개발, 특별 교육 프로그램 및 연구 지원 목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인데, 10년간은 운영비용으로만 쓸 수 있고, 10년 후에는 잔액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이 시기에 한국은 CMB로부터 인력 양성과 관련한 지원이 많았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프로그램이 앞의 시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전에 비해 펠로우십 프로그램 수혜자가 큰 폭으로 증가했고, 1960년대 접어들면서부터는 연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젝트 지원도 많아졌다. 또한 의사나 간호사의 양성을 중요하게 인식하여 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 지원도 증가했고, 개발도상국의 상황 속에서 공중보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관련 시설 또는 현장 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도 이루어졌다. 큰 금액의 보조금은 건축 및 재건에 배치되기는 했지만, 지원 빈도는 펠로우십, 연구, 교육 프로그램 등에 좀 더 집중되는 것을 볼 때 이 시기 CMB의 한국 지원의 특징은 인력 양성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3) 1973-80: 자립 유도와 공중보건 강조CMB는 1973-74년 연례보고서에서 지원 방향을 전면적으로 새롭게 제시했다. 1951년부터 20여 년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14개 국가를 대상으로 보건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마다 각기 다른 성장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51) 특히 일본은 탈공업 시대로 접어들 만큼 발달한 반면,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서술하면서 CMB는 한국, 대만,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8개 국가의 의학, 간호, 공중보건학부에 대해서만 집중 지원을 결정했음을 언급했다. 또한 해당 국가의 모든 관련 학부가 아닌,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몇몇 학교에 지원을 집중하기로 했고, 한국은 서울대와 연세대가 그 대상이 되었다. CMB는 이후 아시아 사회의 건강 수준과 서비스 개선을 위해 지역 기관을 지원하고, 그 지역 기관의 질적 개선과 함께 적절한 보건종사자의 양적 확대를 지원하는 등 2가지 새로운 활동 방향에 대해 합의했다.52)
동시에 CMB는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아시아 스스로가 관련 문제에 접근, 분석할 수 있는 충분한 전문 지식이 있다고 판단한다며, 앞으로 아시아의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점차 국가 자체 또는 아시아 국가 간 협력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했다. 이른바 닉슨독트린으로도 잘 알려진 ‘아시아 문제의 아시아화’가 CMB의 활동 맥락에도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53) 1976-77년 보고서를 보면, 1969년 연방세법 개정으로 CMB의 지원 프로그램의 목적 달성 방법에 문제가 제기되면서 그 동안의 프로그램을 종료하거나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54) 국가의 외교적 상황과의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닉슨독트린 선언 이후 아시아의 의학, 간호, 공중보건을 지원하는 CMB 역시 주요 프로그램과 지원 방향을 대대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아시아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 의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 개발, 평생교육(Continuing Medical Education, CME), 의료 서비스 제공, 연구, 개발 기금 지원 등의 방향으로 개편했다.55) 지원 프로그램이 여러 이름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실제는 아시아 자체적으로 자립을 유도하기 위한 지원과 공중보건의 강조라는 두 가지 특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 개발은 자립 유도의 방향을 잘 드러내는 프로그램으로, 기존 펠로우십 프로그램의 수혜자들을 활용하면서 아시아 지역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도록 하는 목적에서 수행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 동안 펠로우십 지원을 받았던 700명 가량의 수혜자들이 이제 아시아 내에서 필요한 훈련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고 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56) 크게 국가 의학 센터(이하 국가 센터)와 지역 의학 센터(이하 지역 센터)의 두 종류로 구분되었는 데, 국가 센터는 자국의 다른 의대나 간호대, 보건대학원의 교직원 또는 지역 병원의 직원들 대상으로 교육을 수행하는 곳이며, 지역 센터는 이들 국가 센터에서 교육을 수행할 교수진들의 양적, 질적 향상을 위한 곳이다. 국가 센터는 한국을 비롯해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 태국 등에서 운영되었고, 지역 센터는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운영되었다.57)
이 프로그램은 평생교육(CME), 연구 프로그램과도 긴밀히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평생교육은 민간에서 진료 활동을 하고 있거나 정부에서 보건 업무를 담당하는 의사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1973년 12월 서울대 보건대학원 박형종 학장은 CMB에 보조금을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기도 했다.
…… 많은 졸업생들이 졸업 후에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학교와 접촉하는 것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서울과 그 주변의 졸업생들은 변화하는 서비스 요구, 새로운 기술지식, 그리고 지속적인 교육 프로그램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58)
이러한 의학교육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서울대 의대는 CMB로부터 필리핀대학교와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았다.59) 서울대 의대 학장이었던 권이혁은 개업의들에 대한 보수교육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1972년 연수교육위원회를 구성하여 개업의 대상의 연수와 교수훈련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권이혁, 1993: 208). 이 모임으로 의학교육연수원 설립 필요성이 공유되었고, 국내외 전문가들과의 논의를 비롯한 여러 행정 절차를 거쳐 1975년 서울대 의학교육연수원이 설치되었다. CMB도 의학교육연수원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20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다.60)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은 의대 입학생 선발, 학부 교육과정, 연구 프로그램, 국가 차원의 교원 훈련 등이었다.61) CMB는 지원을 통해 학교가 스스로 교육 역량을 개발하고, 다른 기관을 위한 교육에도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장려했다.
연구와 관련해서도 자체적인 성장을 유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전까지는 각 학교의 연구자들이 연구 프로젝트를 신청하고 CMB에서 연구비를 제공했지만, 이후에는 각 학교에 연구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해서 제출된 연구 계획서를 모두 검토, 심사, 개선 방향 제시까지의 역할을 모두 맡도록 했다.62) CMB는 연구위원회에게 연구자가 제출한 내용에 대해 연구 계획과 개념, 실험기법 및 결과 제시 방식에 이르는 과정을 비판하고, 연구의 타당성을 비롯하여 지식에 대한 기여나 비용-편익 등을 따져 우선순위를 결정하도록 했다.63)
자립을 유도한 또 다른 방식으로는 지원 프로그램마다 매칭펀드 조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CMB가 지원하는 금액에 대응하는 일정 규모의 자금을 스스로 마련하게 해서 장기적으로 각 학교가 발전에 필요한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매칭펀드를 마련해서 지원이 이루어진 프로그램도 있었으나, 이후에는 앞서 언급한 교육과 연구 프로그램 운영에 매칭펀드 조성이 선결되어야 할 만큼 확대되었다.64) 또한 CMB의 지원 프로그램 외에도 교수진들의 기부금 조성을 유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연세대의 경우, 1972년에 의대에서 50만 달러, 1974년 간호대에서 25만 달러의 기부금이 조성되었는데, 1976년 CMB가 여기에 25만 달러를 매칭 보조금으로 제공하면서 총 100만 달러의 기부금이 연세대에 마련될 수 있었다.65)
한편 CMB는 지역사회의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학교 내부적 발전만 고려하는 곳보다는 국가 차원의 기여나 발전을 모색하려는 학교에 지원을 우선시했다. CMB가 볼 때 지원 국가 대부분이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한 국가 규모의 종합 계획을 가진 곳이 없었으므로, 대학이 의료 활동을 위한 인력 뿐 아니라 의료인력 훈련과 의료 제공 등을 포함한 정부 계획을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66) 즉 CMB는 이 지원을 통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국가적으로 필요한 의학, 간호, 공중보건 교육의 자급자족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 간호 인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 동안 펠로우십과 연구 프로그램 등을 통해 간호 교원들의 교육과 연구가 지원되었으나 1976년 개발도상국의 의료 환경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간호사 역할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CMB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의료 서비스가 의사보다는 간호사에 의해 수행되므로 간호사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질 것이며, 이에 따라 전과 다른 유형의 간호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67) 즉 의사 지시에 따르기만 하는 간호사가 아니라 공중보건종사자 또는 정부 서비스의 교육자 등 지역사회 건강관리의 주요 부분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는 간호사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CMB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간호사들이 적어도 고등학교 교육은 필수이고, 학문적 능력을 쌓으려면 대학 학위를 가져야 하며, 실천의 영역에서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기 위한 광범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76-77년 연세대 간호대학과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는 CMB의 새로운 간호인력 양성 목표와 부합하는 교육과 연구에 대한 지원 명목으로 각각 25만 달러와 27만 5천 달러를 받았다.68) 두 학교에서 공통적으로 간호학 강사들의 급여 지원을 비롯하여 석사 학위 취득 지원, 한국어로 된 간호학 교재 출판, 해외 유학 지원 등이 계획되었다.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도시 뿐 아니라 농촌에서의 의료 서비스 교육에 중점을 두는 연구 프로그램에도 지원을 받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CMB는 공중보건 분야 지원에도 힘을 실었다. 사실 CMB는 1960년대 후반 무렵 공중보건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1967-68년 보고서에서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가기 위해 의학, 공중보건, 간호 교육의 질적 향상을 장려”한다고 언급했다.69) 그 동안 의학, 간호교육 시스템 구축이 주요 목적임을 언급해 왔던 것과 비교하면 CMB가 ‘공중보건’에 대해서도 주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1967-68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건축 지원을 비롯하여 이듬해 장비 및 교육 프로그램 지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지원이 건물 마련과 교원 양성에 집중되었다면, 1970년대 이후부터는 지역적으로 만연한 질병이나 인구 연구, 가족계획 등 실질적인 공중보건 활동을 위한 프로그램 등 구체적인 활동에 필요한 부분이 지원되었다. 아마도 이는 WHO의 알마아타 선언 채택 과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알마아타 선언에서는 개발도상국의 보건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 일차보건의료의 중요성 특히 지역사회의 보건문제가 중요하게 지적되었다. 70) CMB의 1977-78년 보고서에서도 특별히 <개발도상국에서의 보건문제>, <저개발국에서 해외 프로그램의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과 같은 항목을 두어 CMB가 그 동안의 지원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지역적 특징이 무엇이고, 보건의료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러한 지역적 특징을 어떻게 연관지어 고려해야 할 지에 대해 서술하기도 했다.71) 동시에 같은 해에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대상으로 공중보건 분야의 학문적 연구나, 지역 문제 관련된 공중보건 및 예방의학적 연구,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의 지역사회 의학과 의료 전달 문제 연구 등을 위해 25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다.72) 직전 해에 보건대학원에 지원된 보조금이 7만 5천 달러 정도였음을 감안한다면 대폭 향상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CMB의 지원은 냉전 시기 미국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국제적 보건의료 활동 및 원조의 맥락 속에서 진행되었고, 한국은 여기에 적극 부응하며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4. 맺음말처음 조직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의 의학 발전을 위한 사업에 주력했던 CMB는 1950년대를 전후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사업 진행 방향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했다.73) 이러한 가운데 한국은 1953년부터 30여 년 동안 CMB의 지원을 받으면서 의학 교육과 연구의 환경을 갖추어나갈 수 있었다. CMB의 지원이 한국의 의학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 연구는 약 30년에 걸쳐 이루어진 CMB의 한국 지원 활동을 세 시기로 구분하여 검토하고, 각 시기에서 어떤 특징들이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첫 번째 시기는 한국에 대한 지원이 시작된 1953년부터 1962년까지로 CMB는 전쟁으로 결핍된 물적 자원을 갖추는 데 필요한 도움을 제공했다. 전쟁으로 건물이나 기자재 등이 대규모로 손실된 상태였으므로 이에 대한 지원이 우선되었다. 이 시기 가장 큰 규모의 지원은 연세대 의대 건물 건축을 위한 것이었다. 1956년 CMB 전체 지원금 중 가장 큰 액수인 45만 달러를 시작으로 1958년 30만 달러, 1960년 25만 달러가 추가로 지원되면서 건물 완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연세대 의대 건물에 지원된 금액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매우 작지만 경북대, 전남대, 수도의과대학 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물품과 장비를 비롯하여 도서관에 필요한 서적, 저널 등에 대해서도 지원이 이루어졌다. 또한 펠로우십 프로그램 지원을 통해 29명의 연구자가 미국 유학의 기회를 제공받기도 했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적은 규모의 금액이지만 국내 여러 학교를 대상으로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필요한 물적 자원들을 조금씩 갖추어나갈 수 있었다.
두 번째 시기는 1963년부터 1972년까지로 기존 프로그램에 큰 변화는 없지만 지원 규모가 좀 더 커졌고, 인력 양성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앞 시기 지원 자금의 약 3배 가량의 금액이 제공되면서 지원의 규모가 커졌고, 연구 활동과 관련한 지원이 많았다. 이러한 모습은 이 시기에 서울대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된 것과도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서울대는 1963년부터 CMB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미네소타프로젝트를 통해 어느 정도의 물적, 인적 기반을 다져두었으므로 이를 발판삼아 새로운 역량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1950년대부터 지원을 받았던 다른 학교들이 처음에 주로 물품이나 서적 및 저널 구비 등에 지원이 집중되었던 것과 달리 서울대는 CMB 지원 초부터 연구나 펠로우십 프로그램 지원을 받으면서 이 시기 인력 양성의 맥락에 중요하게 기여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CMB가 지원 국가 중 선도적 역할을 하는 특정 대학을 중심으로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주된 지원이 서울대와 연세대에 집중되기도 했다. 연구 프로그램의 경우 연세대와 서울대는 거의 매년 10개 내외의 프로젝트 지원을 받았던 반면, 경북대는 1965, 68, 70년에 평균 2-3건의 지원을 받았으며, 교육 프로그램의 경우는 연세대, 서울대에만 지원이 이루어졌다. 펠로우십 프로그램도 비슷했다. 연세대 25명, 서울대 41명, 경북대 9명으로 연세대, 서울대에 지원이 집중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기는 상대적으로 물적 기반이 갖추어진 서울대가 CMB의 지원 대상으로 본격 합류하면서 인적 자원들의 역량 구축에 지원이 집중될 수 있었다.
세 번째 시기는 1973년부터 1980년까지로 이 시기 지원의 특징은 자립과 공중보건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CMB는 그 동안 비중 있게 운영해 오던 펠로우십 프로그램을 폐지하면서 새로운 지원 방향을 제시했다. 펠로우십 프로그램으로 양성된 인력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마련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국에서 교육 및 연구 활동을 수행하고, 부족한 점 역시 아시아 국가 간 협력을 통해 해결하기를 요청했다. 또한 CMB의 지원과 함께 학교 자체적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하거나 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과제 제출부터 선정까지의 과정을 직접 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이와 함께 지역 사회의학에 관심을 나타내며 실천적 영역에서 간호사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공중보건 교육과 연구에도 주목했다. 한국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간호 인력이 양성될 수 있도록 교육 및 학위 취득에 필요한 보조금을 지원받았고, 또한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중심으로 공중보건 현장 훈련이나 관련 연구 및 교육에 대한 지원을 받으며 공중보건 분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CMB는 약 30년 동안 한국의 의학, 간호 및 보건학 분야를 다양하게 지원하면서 물적, 인적 자원을 충분히 갖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미네소타프로젝트가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서울대를 집중 지원했던 것과 다르게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대학에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의학 자원의 기반 마련에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1953년부터 20년 가량 펠로우십 프로그램 지원을 받으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선진 학문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었고, 물품 지원이나 서적, 저널 구비 등의 도움을 통해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자원 또한 확보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서울대와 연세대의 두 학교에 대한 지원이 집중되었는데, CMB는 이를 통해 이들 학교가 다시 다른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대했다. 이에 대해 CMB가 편중된 지원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두 학교를 중심으로 물적, 인적 자원과 교육 및 연구 역량이 형성되어 한국의 의학 발전을 견인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Notes1) 차이나메디컬보드 홈페이지 https://chinamedicalboard.org/centennial 2) CMB의 PUMC에 대한 지원이 당장에 모두 종료된 것은 아니었고, 1951년 6월까지는 그간에 진행된 활동들을 마무리하는 시간으로 사용했다.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51-52 (China Medical Board, Inc., 1952), p. 3, Rockefeller Archive Center, China Medical Board, Inc. records (FA065), Box P 1. 이후의 연례보고서 역시 출처가 같으므로 발행시기와 해당 내용이 기록된 쪽만 밝히고 별도로 표기하지 않겠다. 3) 최제창에 따르면 한국은 1945년 10월 록펠러 재단과 관계를 맺었고, 이곳에서 장학금을 받은 한국의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미국에서 공중보건학을 배워올 수 있었다. 1950년 중국이 중국 내 미국의 모든 자산을 동결하고, PUMC도 국유화되면서 새로운 지원 대상을 물색하던 CMB는 한국을 선택하여 지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최제창, 『한미의학사』 (영림카디널, 1996), 293쪽. 4) CMB 관련 대부분의 자료는 현재 록펠러 아카이브 센터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연구는 해당 기관을 방문하여 수집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의 도움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5) Laurie Norris, The China Medical Board: 50 Years of Programs, Partnerships, and Progress 1950-2000 (New York: China Medical Board of New York, Inc., 2003), p. 266. 6) China Medical Board of New York, Inc., Board Meeting June 18, 1951, Rockefeller Archive Center, China Medical Board records, Accession 2014:022, SG1(FA1292), Series 2: Fellowships and Grants Box 11, Fellowships, Completed, A-B. 9)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55-56, pp. 4-5. 이후 매년 연례보고서에 물품 및 장비 부분에서 지원 내용과 함께 그 영향으로 특정 실험실이 운영될 수 있었음이 보고되었다. 12) 이때 펠로우십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은 16명은 훈련과 여행이 각각 8명씩이었고, 이중 여행 펠로우십을 받은 사람은 홍콩의 2명과 일본의 6명으로 모두 미국에서 4개월 가량을 보내며 경험을 축적했다. 특히 일본의 6명은 모두 소속된 학교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고, 이중 리더는 일본의학교육위원회 의장으로, 미국의 주요 의학교들을 둘러보는 경험을 통해 일본 의학교육 개선에 앞장설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51-52, p. 6. 14) 1961년부터 교육 프로그램 지원으로 필리핀의 필리핀대학교 의과대학과 미국 캔사스대학교 의과대학 간 교류 프로그램이 이루어졌는데, 각 학교의 교수진과 학생이 서로의 학교에 체류하면서 교육 활동이 진행되었다.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2-63, p. 15. 15) Laurie Norris, The China Medical Board: 50 Years of Programs, Partnerships, and Progress 1950-2000, pp. 63-64. 특히 1970년대에는 한국에 대한 CMB의 지원 금액이 약 560만 달러로 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높게 책정되기도 했으며, 약 290만 달러를 지원받은 1960년대와 비교해 볼 때 지원 금액이 거의 두 배에 가깝게 증가되었다. 16) Laurie Norris, The China Medical Board: 50 Years of Programs, Partnerships, and Progress 1950-2000, p. 64. 17) Laurie Norris, The China Medical Board: 50 Years of Programs, Partnerships, and Progress 1950-2000, p. 68. 18) Laurie Norris, The China Medical Board: 50 Years of Programs, Partnerships, and Progress 1950-2000, p. 64. 한편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일본에 대한 지원은 점점 축소되다가 1973년부터는 중단되었다. 21)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를 보면 이 무렵 의학학술지 지원과 관련해서는 연평균 1,500달러에 불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제1권, 1946~2006』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2008), 153쪽. 24)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57-58, p. 15.;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58-59, p. 17;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0-61, p. 19;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1-62, p. 19. 25) China Medical Board of New York, Inc., FELLOWSHIP ALLOCATION (1953-1955; 1959), Rockefeller Archive Center, China Medical Board records, Accession 2014:022, SG1(FA1292), Series 2: Fellowships and Grants Box 11, Fellowships, Completed, A-B; C; D-H; L-O. 연례보고서 외에 CMB의 다른 자료에서 펠로우십 수혜자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1953년 경북대 의대의 이규택이 펠로우십 지원으로 워싱턴 대학에 다녀왔음을 알 수 있다. 1953년 이규택 외에도 1954년 서울대 장석철, 1955년 경북대 정창수 등이 펠로우십 지원으로 미국에 다녀온 것으로 보이나 연례보고서에는 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연례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살피고, 펠로우십 지원 관련해서는 후속 연구를 통해 보강하겠다. 26)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59-60, p. 25;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0-61, p. 27;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2-63, p. 30. 28)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3-64, p. 29;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4-65, p. 29.. 31)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3-64, p. 8;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4-65, p. 8. 34)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4-65, p. 10; 33; 서울대학교보건대학원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사 1959~1995』 (서울대학교보건대학원, 1996), 119쪽. 이때 CMB는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25만 달러를 제공하면서 같은 규모의 금액을 마련하도록 요청했고, 서울대는 문교부 예산을 통해 건축비를 마련함으로써 신축에 들어갈 수 있었다. 35)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8-69, p. 15;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71-72, p. 17. 43)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7-68, pp. 20-21;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8-69, p. 23. 46)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70-71, p. 11;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71-72, p. 12. 47)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5-66, p. 10;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8-69, p. 13;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70-71, p. 11. 48)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7-68, p. 33;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8-69, p. 36;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71-72, p. 37. 49)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68-69, p. 36;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71-72, p. 14; 37. 53)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으로 경제적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 지출을 줄이고 외부 개입을 축소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었는데, 지역의 안보는 해당 지역에서 주도권을 갖고 적극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줄일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장준갑, 「닉슨독트린과 미국의 대한정책」, 『역사학연구』 34 (2008), 229-249쪽; 박태균, 「베트남전쟁 시기 한미관계의 변화」, 『軍史』 89 (2013), 331-361쪽; 김봉중, 「닉슨의 베트남 정책과 닉슨독트린」, 『미국사연구』 31 (2010), 169-198쪽; 문순보, 「닉슨 행정부 시기의 데탕트와 한미관계」, 『국제관계연구』 13-2 (2008), 39-71쪽. 57) 지역 센터 운영 기관으로 홍콩의 홍콩대학교 의학부, 싱가포르의 싱가포르대 의학부가 선택되었는데, 두 대학은 다른 곳에 비해 광범위하고 수준 높은 교수진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구 역량의 질적 수준을 높이 평가받았다.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75-76, pp. 7-9. 63) 연구위원회 조직과 활동은 1972년 말 논의되었고, 이와 같은 방식의 운영은 1975년부터 이루어졌다. China Medical Board, Inc., Annual Report 1974-75, pp. 10-11. Table 1.Table 2.참고문헌 REFERENCES1. 권이혁, 『또 하나의 언덕』 (신원문화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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