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현재 한국 의과대학의 의학사 교육은 일정 수준 기반을 다진 상황이다. 먼저 교육 현황이다. 만주에서 귀국한 김두종(金斗鍾, 1896-1988)이 194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의학사 과정을 개설한 이래(여인석, 2010), 2023년 기준 전체 40개 대학 가운데 절반이 넘는 22개 대학에서 의학사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이상미ㆍ예병일, 2023).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김두종과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영택(李英澤)의 은퇴로 한동안 교육의 흐름이 단절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역사학 전공자 가운데 의학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박윤재, 2010),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료인문학의 중요성이 부상함에 따라, 의학사 교육 역시 다시 확장되는 추세이다.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는 저역서 역시 다양하다. 서양의학사 전반을 훑을 수 있는 포터의 『의학: 놀라운 치유의 역사』(2010), 바이넘의 『서양의학사』(2017) 등이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한국의학사에 대해서는 여인석 등의 『한국의학사』 (2018)가 좋은 길잡이가 된다. 통사뿐만이 아니다. 후술하겠으나, 더핀의 『의학의 역사』(2006)와 같이 서양의학 각 분야의 역사를 독립적으로 서술하거나, 퍼사우드의 『사람 해부학의 역사』(2022) 등 한 분야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저작도 출간되어 있다. 분야사 외에도 슈라이옥의 『근세 서양의학사』(2002), 르 파누의 『현대의학의 모든 역사』(2016), 신동원의 『조선의약생활사』(2014), 박윤재의 『한국현대의료사』(2021) 등 특정 시공간에 집중한 저작도 다수 존재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구성된 저역서의 존재는 의학사 교육의 기반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중요한 축이다.
이와 같은 기반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의학사 교육을 시행하는 구체적인 방법론, 다시 말해 어느 단계의 학생을 대상으로 어떻게 교육을 시행하여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부족한 실정이다. 인물사를 활용한 의학전문직업성의 함양을 모색한 연구(박승만ㆍ김평만, 2022)가 사실상 유일한 예외에 가깝다. 물론 한국의 의학사 교육이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여러 의과대학에서는 다양한 교육법을 선도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교육의 경험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저마다의 후일담으로만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이에 본 연구는 역사교육학과 의학교육학의 이론, 그리고 외국 의과대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학사 교육의 시기와 교수법, 구성의 다양한 방법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제시하려 한다.
2. 시기: 언제 교육을 시행할 것인가?
한국의 의학사 교육은 대개 의학전교육(Pre-Medical Education, PME)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예과 1학년 또는 2학년을 대상으로 의학사를 포함하는 또는 의학사를 단독으로 다루는 과정을 개설하여,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집중 교육 모델’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기본의학교육 과정에서 의학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교육하는 일부 대학도 있으나, 그 역시 예과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병행한다는 점에서 집중 교육 모델의 예외라고 보기는 힘들다.
집중 교육 모델의 장점은 분명하다. 하나는 교육의 응집성이다. 하나의 과정이 개설되어 교육이 이루어지는 만큼, 교수자가 체계적으로 수업을 구성하고 실행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체 교육 내용을 몇 가지 원칙에 따라 유기적으로 구상하고, 이를 연속된 교육을 통해 구현하는 일이 가능하다. 또 하나는 의학전교육의 목표에 부합한다는 점이다. 의학전교육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교양을 갖춘 예비 의료인의 양성이며, 여기에서 교양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자기완성을 의미할 뿐 아니라, 현대적인 의미에서 의료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슈미데바흐, 2022). 문화사 또는 사회사로서의 의학사는 이러한 두 가지 목표에 모두 기여할 수 있다. 마지막은 행정 편의이다. 소수의 교수자가 학기 단위로 교육을 구성하기 때문에, 행정력이 크게 소모되지 않는다. 의학 교육에는 적지 않은 행정 자원이 요구되는 만큼,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문제는 단점 역시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하나는 낮은 학습 동기이다. 의학전교육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후의 기본의학교육(Basic Medical Education, BME) 과정에 비해 학습자의 흥미와 동기가 낮다는 점이다. 인문학 교육은 더욱더 그러하다. 일견 의학 교육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과정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하나는 평생 교육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점이다. 역사 교육을 통해 함양할 수 있는 비판적 성찰 능력은 평생에 걸쳐 갈고 닦아야 할 자질에 해당한다. 그러나 의학사 교육을 의학전교육에 집중할 경우, 학습자가 역사학을 교양 과정에서 잠시 배우고 마는 분야로 여길 수 있다. 이는 평생의학교육(Continuing Medical Education, CME)을 강조하는 최근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 큰 결점이다.
집중 교육 모델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다. 가장 유력한 대안은 침투 모델(infiltrative model)이다. 이는 캐나다 퀸스대학교의 더핀이 처음 시도한 것으로, 기본의학교육 과정 전반에 의학사 수업을 편재(遍在)하는 방식이다. 더핀은 해부학교실과 병리학교실, 산부인과학교실 등과 협조하여, 각 과목의 교육과 실습이 진행되는 도중에 해당 과목의 역사를 교육하는 방식으로 의학사 교육을 진행하였다. 이를테면 수련 병원에서 산부인과학을 실습하고 있는 의학과 3학년을 대상으로, 산부인과학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것을 의료 기술의 진보 또는 가부장제의 확장으로 바라볼 것인지 등의 주제를 교육하고 토론하는 식이다(Duffin, 1995; 2012).
더핀이 시도한 침투 모델은 여러 대학으로 확산 중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듀크대학교이다. 다만 해부학과 병리학, 산부인과학 등 기초의학에 해당하는 기본의학교육 초반과 임상의학에 해당하는 후반 모두에 의학사를 배치한 퀸스대학교와 달리, 듀크대학교에서는 산부인과학과 소아과학, 외과학 등 임상 실습 과정에서만 의학사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는 듀크대학교가 기초의학 교육을 축소하고 임상의학 교육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육 전반을 다시 설계하면서, 기초의학 교육 과정 내에 의학사 교육 시수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Barr et al., 2023). 이처럼 퀸스대학교와 듀크대학교는 의학전교육이 아닌 기본의학교육과 의학사를 연계하여 교육함으로써, 의학사는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교육되어야 하며, 특히 의학전교육 과정에 적합하다는 두 가지 암묵적인 가정에 도전하고 있다.
침투 모델은 일견 오슬러 방법(Oslerian method)과 유사해 보인다.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 1849-1919)는 임상실습 과정의 학생에게 토머스 리너커(Thomas Linacre, c. 1460-1524),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토머스 시드넘(Thomas Sydenham, 1624-1689) 등 ‘위대한 의사’의 삶을 교육함으로써, 훌륭한 의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배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Osler, 1932). 이는 역사학의 오랜 전통인 인물사를 의학 교육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의학사를 임상 교육과 연계하여 교육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침투 모델과 일정 부분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오슬러 방법과 침투 모델은 구분되어야 한다. 현대의 침투 모델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오슬러 방법과 차이를 보인다. 먼저 교육의 내용을 ‘위대한 의사’의 삶에 한정하지 않는다. 침투 모델의 의학사 교육은 인물사에 머무르지 않으며, 인물사를 활용할 때도 오슬러와 같이 백인 남성 의사의 사례에 집중하기 보다는 여러 ‘치유자’의 사례를 폭넓게 다룬다. 다음으로 교육의 목표를 시대를 초월한 교훈에 한정하지 않는다. 하비나 시드넘의 삶에서 “오래된, 하지만 여전히 생생하고 새로운 이상”을 길어낼 수 있다는 오슬러의 문장에서 보이듯(Osler, 1932), 오슬러 방법은 학습자에게 의사가 갖추어야 할 초시대적 가치를 가르치고자 한다. 그러나 침투 모델은 그보다는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여 행위자와 사건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것을 강조한다(Lerner, 2000).
집중 교육 모델과 마찬가지로 침투 모델에도 나름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 가운데 하나는 집중 교육 모델과 달리, 학습 동기가 높다는 점이다. 의학 교육과 의학사 교육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 때문에, 학습자의 흥미를 쉽게 유도할 수 있다. 교육 내용의 이해도 역시 높다. 의학전교육에서 의학사를 교육하는 경우, 의학 자체에 대한 이해 부족이 의학사의 이해를 가로막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침투 모델에서는 기본의학교육 과정에서 의학사를 교육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현저히 줄어든다. 마지막은 평생 교육의 의미를 강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침투 모델에서는 기본의학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 동안 계속해서 학습자에게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주문하며, 그러하기에 역사를 통한 반성이 어느 특정 시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수행해야 할 과업임을 쉽게 드러낼 수 있다.
물론 단점 역시 분명하다. 하나는 응집성의 결여이다.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의학사를 교육하는 집중 교육 모델과 달리 여러 과정에 의학사 교육이 산재하기 때문에, 교수자가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전체 교육 과정을 설계하기 힘들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학습자가 교육 전체의 일관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의학사의 주변화이다. 독립된 수업의 부재로 인하여, 학습자가 의학사를 하나의 학문 분야로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이는 의학사를 향한 관심을 애초부터 차단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마지막은 행정의 어려움이다. 침투 모델은 필연적으로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각 교실과의 협업을 요청하며, 이 과정에서 각 교실과 의학사 교육이 필요하다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제대로 된 교육을 시행하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더핀은 교육 시수를 확보하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한 바 있으며(Duffin, 1995; 2012), 기초의학 교육 과정에 의학사 교육을 배치하지 못한 듀크대학교의 사례 역시 이러한 어려움을 예증한다.
집중 교육 모델과 침투 모델이 학부 의학사 교육에 집중한다면, 어떤 이들은 의학사 교육이 갖는 평생 교육의 의미에 주목하여 의학사를 졸업후의학교육(Graduate Medical Education, GME)과 평생의학교육에 활용할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먼저 졸업후의학교육이다. 여기에서는 미국마취과학회(American Society of Anesthesiologists)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미국마취과학회에서는 전공의를 대상으로 한 의학사 교육을 장려하고 있으며, 2014년을 기준으로 설문에 응한 46개 전공의 수련 병원 가운데 21개 병원이 의학사를 수련 과정에 포함하고 있고, 25개 병원이 의학사 교육을 향한 관심을 표명하였다고 한다(Desai et al., 2012; Desai and Desai, 2014).
수련을 마친 전문의를 대상으로 한 교육도 시도되고 있다. 미국외과학회의 경우 미국마취과학회와 유사하게 전공의 의학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뿐 아니라, 학술대회와 미국외과학회지(Bulletin of the American College of Surgeons)에 의학사 세션을 상시 배치하여 의학사를 활용한 평생의학교육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수술의 선구자’(Icons of Surgery)와 같이 전문적인 역사 교육보다는 역사를 통한 예우와 기념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도 있지만, 여성 수술의 역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외과학의 발전 등 본격적인 의학사 연구를 발표하는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학술대회에 의학사 세션이 처음으로 배치된 2016년에는 모두 165명이 세션에 등록했고, 이후에도 비슷한 규모의 인원이 참석하고 있다(Barr et al., 2023).
졸업후의학교육과 평생의학교육은 의학사를 활용한 비판적 성찰을 학부 이후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교육의 질이다. 의학사를 전공하거나 적어도 의학사에 관심이 많은 전담 교원을 교육에 투입할 수 있는 학부 교육과 달리, 전공의나 전문의 교육에서는 의학사 교육을 전담하는 인력을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마취과학회의 전공의 의학사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Desai and Desai, 2014).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외과학회는 학회 내에 역사 및 기록 위원회(History and Archives Committee)를 설치하고, 미국의사학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History of Medicine)와 연계하여 전공의 및 전문의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미국외과학회 기록 보관소를 활용하여 연구하는 전문 역사가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한다(Barr et al., 2023).
3. 구성: 어떻게 전체 과정을 구성할 것인가?
전체 의학 교육 과정에서 의학사에 할당된 시간은 많지 않다. 의과대학 학생 대부분은 졸업하기 전까지 한 학기 정도 의학사 교육을 받는다. 학교에서 의학사를 독립된 과목으로 개설하여 집중 교육 모델을 채택한 경우, 대개 한 주에 한 두 시간씩 15주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것은 의학 교육 과정에서 의학사 과정이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의 최대치에 가깝다. 의학사 교육이 의료윤리를 비롯한 다른 과목과 통합하여 소위 의료인문학 과정의 일부로 제공될 경우, 수업 시간은 훨씬 더 적어진다(이상미·예병일, 2023: 152-153). 이처럼 제한된 시간 내에 충분한 교육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교육 구성이 필요하다.
교육을 구성하려면 먼저 가르칠 내용을 결정해야 한다. 이때 내용은 교육 목표에 따라 달라진다. 의학사는 역사학의 일부이자 교양 과목에 해당하고, 따라서 의학사 교육의 목표 역시 일반적인 역사 인식의 함양을 포함한다. 그러나 ‘좋은 의사 만들기’에 초점을 맞춘 현재의 의학 교육에서 이를 향한 수요는 없다시피 하다. 의학 교육은 의학사가 실제 의사 양성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의학사 또한 이에 발맞추어 전문직업성의 함양과 의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 등을 목표로 내세운다(권복규, 2023: 507-512).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이를 잠정적 목표로 삼아, 교육 구성 전략을 서술하고자 한다. 다만, 이와 같은 여러 목표 사이에서도 층위를 나눌 수 있다. 역사의 개별 사건을 이해한다는 목표와 의학사의 장구한 흐름에 대한 거시적 시각을 갖춘다는 목표를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전자에 비해 후자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어진 교육 시간과 여건을 고려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적합한 교육 내용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교육 내용을 선정한 후에는 그것을 어떻게 나누어서 어떤 순서로 가르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아직 의학사나 의학교육 분야에서는 이에 관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의학사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교육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수업 구성 방법에 관한 고민과 연구를 축적해왔다. 역사교육학의 연구에 따르면, 교육 목표의 효과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업 내용을 그저 연대기에 따라 나열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수업의 틀을 세운 뒤 그에 맞게 개별 주차의 내용을 편성하는 것이 좋다. 바꾸어 말하면, 먼저 역사적 주체와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을 정하고 그에 부합하는 내용을 유기적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교육이 역사적 사실의 나열 또는 파편적 지식의 전달에 불과할 수 있다(이영효, 2007: 96-97).
수업 내용은 기본적으로 ‘통합성의 원칙’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 통합성의 원칙이란 여러 교육 내용을 서로 연결하여 수업을 유기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원리로, 선행 단원과 후속 단원에 연관성을 부여하여 수업 전체의 일관성과 체계성을 유지해야 함을 말한다. 만일 온전히 교수자의 생각만으로 수업을 조직하기 어렵다면, 교과서 체계에 의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교과서는 해당 학문의 기본 구조를 반영하므로 내용의 체계적 전달에 유용하다. 단, 교과서를 참고할 시에는 내용을 비판 없이 따르는 것보다는 교육 현장의 목적에 맞게 변형 또는 재조직할 필요가 있다(김한종, 2008: 109; 131). 이 절에서는 이런 역사교육학의 통찰을 의학사 교육에 적용하여 교육 구성의 예시를 제시하고 각 구성법의 효과와 한계를 밝히고자 한다. 실제 교육에서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예시를 제시하면서 최대한 국내에서 출판된 의학사 교과서 또는 번역서를 사용할 것이다.
전체 교육 내용을 조직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연대순에 따르는 방법과 주제에 따르는 방법이다. 연대순에 따르는 방법은 역사 교육에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온 전통적인 방법이다. 사건 사이의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를 설명하기에 알맞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역사학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점만큼이나 단점 또한 분명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다른 방법을 향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주제에 따른 구성이다. 다만 두 방법 중 무엇이 더 효과적인지 단언하기는 힘들다. 어느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하기보다는 경우에 맞게 두 방법을 혼합하거나 변형하여 사용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김한종, 2008: 136).
연대순에 따르는 방법과 주제에 따르는 방법은 다시 각각 두 가지로 나뉜다. 연대순에 따르는 방법에는 통사적 방법과 시대사적 방법이 있다. 그리고 주제에 따른 방법에는 주제 중심 방법과 분야사적 방법이 있다.
통사적 방법은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주요 사건과 변화를 일어난 순서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다. 의학 사상, 진단법과 치료법, 의료 제도의 시대적 변천을 전달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로는 아커크네히트의 『간추린 서양의학사』를 들 수 있다. 아커크네히트는 서구 사회에서 의학 지식이 발전해 온 과정을 선사시대, 고대, 중세, 르네상스 시대, 근대로 나누어 제시하며, 특히 근대를 다시 17세기, 18세기, 19세기 전반과 후반, 20세기로 세분화한다. 이런 체계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과 시기별 특징을 일관성 있게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아커크네히트, 2022).
통사적 방법을 채택한 다른 중요한 예시로는 여인석 등의 『한국의학사』를 들 수 있다. 여인석 등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의학의 변화를 선사시대,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개항기,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1960-70년대, 1980년대 이후의 시기 구분에 따라 제시한다. 이들은 아커크네히트처럼 의학 지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의료 제도와 정책, 의료와 관련된 풍습과 미신, 의료 문제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면서, 각 시기의 상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여인석 등, 2018). 통사적 방법에 따른 의학사 교육은 이렇게 구성된 시대별 변천사를 각 주차에 분배하여 순서대로 진도를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통사적 방법의 장점은 총체적인 역사를 체계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교수자는 주차별 교육 내용을 시대순으로 배치함으로써 교육 전반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고, 어느 지역 또는 국가 단위의 역사적 흐름을 종합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또한 교육에 필요한 교과서 등의 참고자료가 대부분 통사적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수업 준비 역시 용이하다. 학습자 역시 시간의 순서에 따라 교육이 진행되므로,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김한종, 2008: 138-139).
반면, 단점은 교육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현상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학습자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수업에 대한 학습자의 흥미와 참여도 저하를 초래한다. 그뿐만 아니라 통사적 방법은 학습자에게 왜곡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교수자의 의도와 별개로, 학습자는 시간순으로 나열된 역사적 사건을 접하며 후속 사건의 원인이 선행 사건에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이영효, 2007: 115). 다시 말해, 실제 의학은 많은 굴곡과 단절을 거치며 오늘날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였지만, 통사적 방법은 자칫 이러한 역사가 필연적이고 단선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통사적 방법이 지닌 이와 같은 단점을 보완하고자, 시대사적 방법이 도입되었다. 시대사적 방법은 역사의 어느 한 시기를 택하여,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측면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방법이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변화에 집중하는 통사적 방법에 비해, 한 시대의 여러 측면을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시대사적 방법은 역사에 대한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이해를 촉진한다. 교수자는 이러한 방법을 차용하여, 특정 시대의 성격을 대표하는 사건과 주제를 중심으로 수업을 구성할 수 있다. 이때 수업 내용은 다시 두 가지 방법으로 구성될 수 있다. 해당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연대순으로 세분하여 각 주차에 배분하는 종적인 방법과 시간에 관계없이 사회의 여러 면을 주차별로 살펴보는 횡적인 방법이다(김한종, 2008: 140-141).
근대사에 초점을 맞춘 슈라이옥의 『근세 서양의학사』는 종적인 방법과 횡적인 방법을 결합한 시대사 구성을 보여준다. 슈라이옥은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서구 의학과 공중보건의 변천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17세기의 르네상스 시대, 18세기의 혼란기,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친 근대의 학의 출현, 19세기 중반 근대의학을 향한 사회적 신뢰의 일시적 소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친 이른바 ‘근대의학의 승리’가 그것이다. 이처럼 슈라이옥은 근대의학의 출현과 확산을 시간순으로 서술하면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경험을 비교하며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동시대에 일어난 서구의 보편적 변화라고 할지라도, 지역별로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슈라이옥, 1999). 이런 방법을 적용한 의학사 교육은 세부적인 시기 구분에 따라 주차별 학습 내용을 조직하되, 개별 지역의 경험을 전달하고 비교하는 데 일부 주차를 할애하는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
시대사적 구성법은 특정 시대에 대한 다각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전달한다. 또한, 수업에서 다루는 범위가 의학사 전체에서 한 시대로 줄기 때문에, 시간의 압박이 적고 다양한 학습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 이는 학습자의 흥미와 탐구력을 촉진할 수 있다는 부가적인 장점으로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여전히 연대순에 따라 수업을 조직하기 때문에, 참고자료 확보에도 유리하다. 그러나 역사 전반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교육에서 다루는 시기와 전후 시기의 연속성 또는 전체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을 학습하기 어렵고, 더 나아가 횡적인 방법을 사용할 경우 교육 내용이 분절적으로 구성되어 유기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김한종, 2008: 143-144; 이영효, 2007: 118-119).
주제 중심 방법은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주제를 선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관련된 여러 역사적 사건을 묶어서 제시하는 방식이다. 잘 알려진 예로 포터의 『의학 콘서트』를 들 수 있다. 포터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의학의 역사를 질병, 의사, 몸, 실험실, 치료법, 수술, 병원이라는 7개의 큰 주제로 나누어 검토한다. 그리고 각 주제 영역별로 그와 관련된 여러 사건을 시간순으로 배치하여, 해당 주제가 어떤 역사적 변화를 거쳤는지 보인다(포터, 2007). 카트라이트와 비디스의 『질병의 역사』도 주제 중심 방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들은 흑사병, 매독, 두창, 티푸스, 콜레라, 결핵 등 대표적인 질병 열 가지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질병과 건강의 역사를 살펴본다. 질병 간의 순서는 시대와 무관하다(카트라이트, 비디스, 2004). 주제 중심 방법을 활용한 의학사 교육은 각 주차에 서로 다른 주제를 소개하는 병렬적 구조로 구성된다.
주제 중심 방법의 장점은 특정한 주제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학습자는 한 주제에 속한 다양한 사례를 접하면서, 동일한 역사적 주제가 시대별,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남을 학습할 수 있다. 또한 학습자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주제를 선정함으로써, 관심과 참여도를 높일 수도 있다. 물론 단점도 있다. 먼저, 주차별 교육 내용 사이에 상호 연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업 전체의 유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또한, 개별 주제에 천착하는 탓에, 통합적인 역사 인식을 함양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려면, 연표와 같이 전체적인 시대상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함께 제공하는 것이 좋다. 끝으로 주제별로 구성된 참고자료가 적어서 수업 준비가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김한종, 2008: 146-147).
마지막으로 분야사적 방법은 특정 분야의 발달 과정을 시간순으로 탐구하는 방식이다. 분야사적 방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예시로는 더핀의 『의학의 역사』를 들 수 있다. 더핀은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외과학, 산부인과학, 정신과학, 소아과학, 가정의학 등 세부 분과를 나누어 각각의 역사를 살펴본다(더핀, 2006). 그 외에 하나의 분과를 선택하여, 자세히 다루는 방법도 있다. 이를테면 퍼사우드 등은 해부학이라는 단일 분야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핀다(퍼사우드 등, 2022).
분야사적 방법은 전체를 구성하는 세부 분야의 역사적 변천을 자세히 파악하는 데 용이하다. 그뿐 아니라 주차마다 서로 다른 분야를 배정함으로써, 각 주차의 내용을 독립적으로 구성할 수도 있다. 연속된 교육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거나, 기초의학 또는 임상의학 교육 과정 중에 의학사 교육을 시행하는 경우, 이러한 방식이 알맞을 것이다(Duffin, 2012). 그러나 어느 한 분야에만 집중하여 내용을 전달하다 보니, 전체적인 시대상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없지 않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른 분야와의 연결점 혹은 관계를 함께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한 분야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이것이 다른 분야와 주고받은 상호작용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습자는 전체 맥락 속에서 분야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이영효, 2007: 119-120).
4. 교수법: 어떻게 개별 수업을 진행할 것인가?
의학사 교육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한국 의학사 교육의 또 다른 암묵적인 합의는 강의식 교수법이다. 이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의 교수법으로, 교수자가 주도권을 쥐고 비교적 수동적인 학습자를 향해 주로 한 방향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Percival and Ellington, 1988). 다른 교수법과 마찬가지로 강의식 교수법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새로운 주제의 소개, 학습자가 접근하기 힘든 자료의 제시, 교과서 내용의 보완, 중요한 내용의 요약, 다양한 자료의 압축적 전달 등이 교육의 주를 이룬다면, 강의식 교수법이 적절할 수 있다(김선, 2001). 그러나 수동적인 학습자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학습자의 학습 동기가 떨어지고 이해도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단점도 존재 한다.
강의식 교수법은 의학사 교육에 적합한가? 답은 의학사 교육의 목표를 무엇으로 설정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목표가 의학사 지식의 전달에 있다면, 강의식 교수법은 더없이 적절한 방법이다. 의학사 교육을 통해 전달해야 하는 지식의 양은 적지 않다. 먼저 서양의학사 전반을 교육해야 하고, 한국의 맥락을 고려하여 한국의학사와 동아시아의학사의 일부도 교육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의학을 전공하는 학습자 대부분이 역사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를 바라보는 역사학의 관점이나 기본적인 시대 상황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여기에 의학사 교육에 충분한 시수를 확보하기 힘든 한국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수업에서 다루어야 하는 지식의 양은 더욱 늘어난다. 강의식 교수법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다른 대답도 가능하다. 만약 의학사 교육의 목표가 비판 의식의 함양에 있다면, 굳이 강의식 교수법을 고수할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소화하기 힘든 많은 양의 정보를 제시하기보다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과대학의 맥락에서는 역사학적 사실 자체의 교육보다는 역사를 활용한 의학전문직업성의 함양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점이 강의식 교수법의 필요성을 온전히 기각하지는 않는다. 충분한 배경지식 없이는 비판적 성찰도 불가능하며, 그러하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 전달은 필수 불가결한 탓이다.
그렇다면 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강의식 교수법을 보완할 방법의 개발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교수법이 계속해서 요청되는 상황에서, 강의식 교수법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살릴 방법은 무엇인가? 또 다른 하나는 강의식 교수법을 대체하거나 그것과 병행할 방법의 개발이다. 역사교육학계와 의학교육학계는 이미 예전부터 강의를 대신할 수 있는 다양한 교수법을 개발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의학사 교육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아래에서는 이 두 가지 과제에 제시된 여러 답을 차례로 일별해 보려 한다.
먼저 강의식 교수법을 보완할 방법이다. 하나는 형성평가(formative assessment)의 활용이다. 교육을 모두 마친 뒤 학습자의 이해 정도를 평가하는 총괄평가(summative assessment)와 달리 형성평가는 교육이 진행되는 도중에 학습자의 이해 정도를 파악하고 이를 다시 교육에 반영하여 학습 효과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Dante and Worrell, 2016). 다시 말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총괄평가가 성적을 산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형성평가는 어디까지나 교육의 질을 향상하기 위하여 학습자의 이해 정도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성평가는 강의식 교수법의 단점인 피드백의 부재를 효과적으로 극복할 방법이 된다.
형성평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행될 수 있다. 하나는 퀴즈이다. 수업 중 또는 끝에 다지선다 문항을 1개에서 3개 정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중요한 지점을 다시 환기하는 동시에 학습자의 이해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종이를 활용할 수도 있고, Google 클래스룸의 퀴즈 기능, Kahoot, Mentimeter 같은 앱을 활용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방식은 1분 페이퍼이다. 수업을 마치고 두 가지 질문, 즉 오늘 배운 내용의 핵심은 무엇이었으며, 가장 이해가 힘들거나 헛갈리는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물어본 다음, 답변을 바탕으로 교육 내용을 재조정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3-2-1 전략으로, 수업 끝에 오늘 새롭게 배운 점 세 가지, 흥미로운 점 두 가지, 헛갈리는 점 한 가지를 물어보는 것이다(Railean, 2020).
실제로 여러 의과대학은 형성평가를 활용하여, 학습자의 이해도를 파악하고 있다.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의학사 교육을 맡은 피셀은 실시간으로 다지선다 형식의 퀴즈에 답변할 수 있는 ‘클리커’를 구비하고, 수업 중간에 교육 내용에 대한 학습자의 이해도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 결과 교육의 효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퀴즈를 통해 중요한 내용을 다시 전달하고, 학습자의 참여도도 높일 수 있었다(Fissel, 2016). 요즘에는 학습자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구비한 만큼, 클리커를 따로 사지 않고 앱을 활용한 퀴즈도 충분히 가능하다.
형성평가가 이해도를 파악하려는 시도라면, 학습 동기를 제고하는 방법도 있다. 교보재의 활용이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교보재로는 소설이나 영화, 다큐멘터리 등이 있다. 수업 전에 미리 교보재를 배부하거나 수업 중에 활용함으로써,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한 방향 지식 전달의 단점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형식의 교보재도 시도되고 있다. 먼저 미네소타대학교와 홍콩대학교의 경우, 의학사 담당 교수와 박물관 학예사가 협업하여 유물을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Hendrickson, 2016; Tobbell, 2016; Wu and Wong, 2023). 미네소타대학교는 이에 더해 구술 자료를 교육에 이용하기도 한다. 구술 녹취록과 음성, 영상 등을 활용하여, ‘살아있는 과거’를 전달하려는 시도이다. 구술 대상자의 사전 동의만 얻을 수 있다면, 이는 교육에 생동감을 더하고 학습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Tobbell, 2016).
다음은 강의식 교수법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교수법이다. 유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는 소그룹 사례 학습이다. 의학사의 쟁점이 되는 사례를 소그룹으로 나누어 토론하고, 이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향한 다면적인 평가를 실행해 보는 방식이다. 미시간주립대학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브로디와 빈튼요한슨은 1854년 런던 콜레라의 사례를 선정하고, 17명의 학생을 4개 그룹으로 나누어 ‘당시 펌프 폐쇄는 합당한 결정이었는가’를 토론하게 하였다(Brody and Vinten-Johansen, 1991).
소그룹 사례 학습에서 주의할 점은 교수자의 세심한 지도가 없으면, 토론이 방향성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의과대학 학생의 경우, 역사적 관점보다는 현재의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과거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교수자는 학습자에게 오늘날의 관점이 아닌 당대의 관점에서, 의학적 맥락에 더하여 사회적, 정치적 맥락 모두를 고려할 것을 계속해서 주문할 필요가 있다. 또한 토론에 필요한 사전 지식도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역사학의 연구 방법론에 익숙지 않은 의과대학 학생은 사료나 연구논저를 쉽게 구하지 못한다. 따라서 교수자에게는 다양한 읽을거리를 미리 준비하여 제시할 의무가 있다. 미시간주립대학교의 사례에서 브로디와 빈튼요한슨은 존 스노(John Snow, 1813-1858)의 보고서와 당대에 생산된 신문 보도 및 학술지 논문, 노동계급의 위생 상태에 관한 보고서 등 일차 사료에 해당하는 자료와 19세기 세균학에 관한 의학사 연구논저를 함께 제공하고, 필요한 학습자에게는 도서관과 박물관 이용법을 안내하기도 하였다(Brody and Vinten-Johansen, 1991).
여느 교수법과 마찬가지로, 소그룹 사례 학습에는 나름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한 가지 장점은 풍부한 상호작용이다. 주로 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강의식 교수법과 달리, 토론 과정에서는 학습자 간 그리고 학습자와 교수자 간에 끝없는 소통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학습자는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교수자 역시 학습자의 이해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높은 수준의 인지적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학습자는 스스로 주어진 읽을거리를 바탕으로 쟁점을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바를 토론에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이는 학습의 효율을 제고할 뿐 아니라, 의학사 교육의 목표 가운데 하나인 비판적 성찰 능력 함양에도 큰 도움이 된다.
단점 역시 없지 않다. 하나는 관리의 어려움이다. 소그룹 사례 학습의 장점인 풍부한 상호작용을 살리기 위해서는 교수자와 학습자의 비율이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만약 학습자의 수에 비해 교수자가 부족하다면, 상호작용의 부족으로 토론이 쉽게 좌초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미시간주립대학교의 사례에서는 교수 2명이 17명의 학생을 지도하였는데, 교수 한 명이 백 명에 가까운 학생을 지도해야 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방식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또 하나는 많은 양의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례를 중심으로 교육이 진행되기 때문에, 의학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교육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또 다른 방식은 학생 개인 연구 지도이다. 학생 개인이 특정 주제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교수자가 이를 돕는 방식이다. 미시간의 또 다른 주립대학교인 미시간대학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웰은 주로 상급 학년을 대상으로 선택 과정을 개설하고, 한 달에서 석 달에 걸쳐 학생의 연구를 지도하였다. 대학원 논문 지도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역사 연구에 적합한 주제를 선정하고, 함께 선행 연구를 파악한 다음, 사료 탐색과 해석 등을 돕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주 정부 지원 보험 제도: 초기 미시간주의 사례”, “19세기 코네티컷주 거주민의 노화 관념” 등 다양한 주제의 연구가 진행되었고, 특히 후자는 수정을 거쳐 전문 학술지인 「생물학과 의학사를 바라보는 관점」(Perspectives in Biology and Medicine)에 게재되기도 했다(Stromberg et al., 1991; Howell, 1991).
학생 개인 연구 지도의 장단점은 소그룹 사례 학습과 유사하다. 스스로 사료를 탐색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의 인지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학습자와 교수자의 상호작용도 풍부하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곧바로 단점으로 연결된다. 사실상 대학원 논문 지도와 같은 형식이기에 한 번에 진행될 수 있는 연구의 수가 제한적이며, 특정한 연구 주제에만 집중하는 탓에 폭넓은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 실제로 미시간대학교에서는 교수자의 수를 감안하여, 총원을 6명으로 제한하였다(Howell, 1991). 이러한 한계는 소그룹 사례 학습이나 학생 개인 연구 지도가 현실적으로 강의식 교수법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어디까지나 보완 내지 보충 정도로 활용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5. 결론
의과대학의 의학사 교육은 어느 단계의 학생을 대상으로, 어떻게 시행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글은 교육 시기와 교수법, 구성의 다양한 방법을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먼저 교육 시기는 크게 학부 교육과 학부 이후 교육으로 대별할 수 있다. 다시 학부 교육은 의학전교육 과정에 교육을 집중하는 집중 교육 모델과 의학교육 과정 전반에 수업을 편재하는 침투 모델로 나뉜다. 전자와 후자는 정반대의 장단점을 드러낸다. 전자가 교육의 응집성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면, 후자는 학습자의 동기를 자극하고 평생 교육의 의미를 강조하는 데 유리하다. 다음으로 학부 이후 교육은 전공의를 대상으로 한 졸업후의학교육과 전문의를 대상으로 한 평생의학교육으로 나뉜다. 두 가지 모두 역사를 통한 반성적 성찰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할 수 있지만,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힘들다는 장단점이 있다. 물론 의학사 연구자 집단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후자의 단점은 극복할 수 있다.
다음은 구성이다. 의학사 교육 과정을 구성하는 방법은 크게 연대순에 따르는 방법과 주제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연대순에 따르는 방법은 다시 통사적 방법과 시대사적 방법으로 나뉜다. 통사적 방법은 역사 교육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통적 방법이지만, 수업 구성이 경직되고 학습자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는 한계로 인해 다른 보완법이 적극적으로 탐색되고 있다. 대표적인 대안은 시대사적 방법과 주제에 따르는 방법이다. 주제에 따르는 방법은 다시 주제 중심 방법과 분야사적 방법으로 나뉜다. 두 방법 모두 학습자의 관심과 수업 여건에 맞게 내용과 구성을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수업 전체의 일관성과 유기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은 교수법이다. 의학사 교육 대부분은 강의식 교수법으로 진행되며, 실제로 강의식 교수법은 역사학의 연구와 방법론에 낯선 의과대학 학생에게 다양한 지식을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육이 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학습자가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는 탓에, 학습자의 동기를 유발하거나 이해도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이에 따라 강의식 교수법을 보완하거나 일부 대체할 방법이 꾸준히 모색되었다. 먼저 강의식 교수법을 보완하기 위하여, 학습자의 이해도를 파악하는 다양한 형성평가 기법이 개발되었으며, 학습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소설이나 영화, 다큐멘터리, 그리고 더 나아가 유물과 구술 자료 등과 같은 교보재를 활용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강의식 교수법을 일부 대체할 방법도 있었다. 소그룹 사례 학습과 학생 개인 연구 지도가 대표적이다. 두 가지 교수법은 학습자와 교수자 간에 풍부한 상호작용이 가능하고, 높은 수준의 인지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강의식 교수법의 유력한 대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의학사 전반을 교육하기 힘들고, 무엇보다 대규모 수업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강의식 교수법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일부 보완하는 정도로 활용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방법 모두에 저마다 뚜렷한 장단점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의학사 교육을 시행하는 단 하나의 정도(正道)가 부재함을 의미한다. 이 글이 단일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여러 방법의 장단점을 고루 소개한 까닭이다. 물론 충분한 수업 시수를 확보할 수 있다면 상기한 여러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각각의 단점을 상쇄하고 장점을 부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학사 교육에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를 고려하면,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각 의과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의 의학사 교육 담당자는 각자가 마주한 조건에 비추어, 나름의 방식으로 가능한 최선의 교육 과정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 연구가 하나의 이정표가 되길 바라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