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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2(2); 2023 > Article
일본의 의사학 교육 150년: 역사와 과제

Abstract

This paper is the first attempt to get a broad view of the history of modern medical history education in Japan, from the origin of medical history education in the Meiji era to its current state in medical schools. By correcting errors related to the first university lectures on medical history in Japan and historically contextualizing the challenges of medical history education and the academic community’s responses, this paper aims to examine both the historical significance and practical implications.
The history of medical history education in Japan is relatively long. Medical history lectures in a medical school were first planned in 1876, and contrary to popular belief, the actual lecture started in December 1882 under Imamura Ryō’s charge and continues to this day. However, despite its relatively long history, the substance of medical history education in Japan is lacking in both quality and quantity. The absence of full-time professors of medical history education and related departments has led to a vicious cycle of failure in producing experts and a decline in medical education.
Medical history education in Japan failed to take advantage of the fact that it began early despite the absence of tradition. The status of medical history education greatly increased in the 1930s, but the opportunity to expand its base was not utilized during the postwar reorganization of medical education and the student movement in the late 1960s. Falling into amateurism, evasion of real issues, and a lack of collective academic responses have hindered the understanding of these phenomena and problem-solving.
The history of medical history education in Japan provides significant implications for the current reality of medical history education in Korea. The Korean medical history community must also confront and adapt proactively and organizationally within the evolving landscape of medical education. If the community settles for the present, Japan’s past will become Korea’s future.

1. 머리말

일본은 한국과 유사한 의사 양성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의학부/의과대학의 국공립 비중이 한국에 비하여 크게 높고1) 의사 국가자격 취득 후 2년 이상 임상 연수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2.5∼2.6명)2)와 의학부/의과대학의 교육 기간(총 6년)3)을 비롯한 양적인 측면에서 서로 비슷하다.4) 특히 전후 양국 모두 미국식 의학 교육 체계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의학전문대학원 체제가 자리 잡히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5) 교육 내용의 측면에서도 양국은 미국식 역량 바탕 교육(competency based education)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 등 주요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김택중, 2022: 521-522; モデル・コア・カリキュラム改訂に関する連絡調整委員会, 2022: 6-7).
그러나 의사학 교육6)과 관련하여 양국의 의학 교육 체계는 큰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과 달리7) 일본에는 의사학8)의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교실(강좌 9)) 또는 학과가 별도로 존재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의사학 전문 전임교원 또한 희소하다. 1962년에 창설된 준텐도대학(順天堂大学) 의학부 의사학연구실만이 현재 이에 준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비슷한 성격의 기관으로 교토부립의과대학(京都府立医科大学) 인문·사회과학교실, 후쿠시마현립의과대학(福島県立医科大学) 인문사회과학교실, 산업의과대학(産業医科大学) 의학개론교실, 가나자와의과대학(金沢医科大学) 의료인문학연구실 등이 있지만, 이러한 기관의 주된 교육활동은 생명·의료윤리 영역에 집중되어 있고, 의사학 교육을 거의 포함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본의 의학 교육에서 의사학은 위상과 전문성이 낮을뿐더러 전공자 양성 기능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한국보다 앞서 근대 서양의 의학 및 의학 교육을 도입하고 의사학 연구 성과를 오랜 기간 축적해온 일본의 이러한 현실은 한국의 의사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찬가지로 서양의학을 수입하고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의 잔재까지 채 지워지지 않은 한국의 현 상황을 이해하고 여러 문제를 타개하려면 일본의 경험을 참고해야 한다는 일반론도 물론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의학 교육 체계가 변동하고 의학 분과별 가치가 재정립되려는 시점에 학계 차원에서 의사학 교육의 의미를 되짚고 향후의 대응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발전을 도모해온 일본 의사학계의 발자취를 더듬어 이로부터 실천적이고 본격적인 의의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목적 의식을 염두에 두고 약 150년에 이르는 일본 근대의사학 교육의 역사와 과제를 탐구하려고 한다.10)

2. 서양 근대의학의 도입과 일본 최초의 의사학 교육

일본에서 이루어진 체계적인 서양 근대의학 교육의 효시는 에도막부의 요청에 따라 네덜란드 해군 군의 폼퍼(Johannes Lijdius Catharinus Pompe van Meerdervoort, 1829∼1908)11)가 1857년부터 1862년까지 나가사키(長崎) 의학전습소12)에서 실시한 의학 교육이다. 그는 자신의 출신교인 네덜란드 위트레흐트(Utrecht) 육군군의학교의 커리큘럼에 기초하여 사토 다카나카(佐藤尚中, 1827∼1882), 마쓰모토 료준(松本良順, 1832∼1907), 이와사 준(岩佐純, 1835∼1912), 나가요 센사이(長与専斎, 1838∼1902) 등 메이지 시대 일본의 의학 교육과 보건의료 행정을 주도한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다(石田純郎, 1988: 224). 폼퍼의 후임으로 온 전 위트레흐트 육군군의학교 교관 바우다윈(Anthonius Franciscus Bauduin, 1820∼1885)을 비롯하여 1871년까지 일본에서 의학 교육에 종사한 네덜란드 의사 11명 중 10명이 위트레흐트 육군군의학교를 졸업한 군의였을 만큼 일본의 초기 근대의학 교육은 네덜란드 군의학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石田純郎, 1988: 225).13)
1868년, 신정부와 구 막부 세력이 충돌하여 보신전쟁(戊辰戦争)이 발발하자 영국공사관 소속 의사 윌리스(William Willis, 1837∼1894)와 시들(Joseph B. Siddall, 1840∼1904)이 종군하여 근대식 외과술을 선보이며 부상자 치료에 힘썼다.14) 이 과정에서 “수술의 이점을 부정하고 그 대신 복잡한 약품이나 연고를 사용하는” 한방(漢方) 의사와 “메스의 사용을 주장하지만 훌륭한 의도에 걸 맞은 필요불가결한 기술을 배우지 않은” 난방(蘭方) 의사 모두 큰 충격과 자극을 받았고, 소위 ‘영국 의학’ 도입의 기운이 정계로까지 퍼졌다(山崎震一, 2019: 142-143). 그러나 1869년, 신정부가 서양 근대의학 교육의 모델로 채택한 것은 기존부터 영향력을 행사하던 ‘네덜란드 의학’이나 보신전쟁을 통하여 검증된 ‘영국 의학’이 아닌 ‘독일 의학’이었다.15) 이러한 방침에 따라 1871년, 독일 육군 군의 뮐러(Benjamin Carl Leopold Müller, 1824∼1893)와 해군 군의 호프만(Theodor Eduard Hoffmann, 1837∼1894)이 동교(東校)16)에 부임하였고, 같은 해 폐번치현(廢藩置縣)이 단행되면서 에도시대 각 번(藩)이 설치한 지방 의학교 대부분이 폐쇄되었다.17)
뮐러와 호프만이 이식한 것은 프로이센 육군군의학교 방식의 의학 교육 시스템이었다. 결국 폼퍼 이래 일본의 초기 서양 근대의학 교육의 기틀을 다진 주체는 군의였고, 군진의학의 영향이 다분하였다(石田純郎, 1988: 226-229). 여기에 당장 의사학 교육이 설 자리는 없었다.18) 일본의 대학에서 처음으로 의사학 교육이 명시적으로 나타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5∼1901)가 1873년에 설립한 게이오기주쿠의학소(慶應義塾醫學所)19)의 교육 과정에서였다.20) 1876년 12월에 개정된 “게이오기주쿠의학소 약칙(略則)”에 따르면, 1등 본과, 즉 본과의 마지막 학기에 ‘의사(醫史)’ 과목이 강의된다(표 1). 그렇지만 의사학 강의는 박물학, 만방사(萬邦史), 산학(算學), 현미경학, 단송의학(斷訟醫學)과 더불어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으며, 이러한 과목들의 “교과서나 참고서는 분명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읽은 자는 없었다”고 한다(北里文太郞, 1942: 525).21) 교육 과정을 입안한 교장 마쓰야마 도안(松山棟庵, 1839∼1919)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일본 최초의 대학 의사학 강의는 1882년 12월부터 구 도쿄대학 의학부에서 ‘의사(醫史)’라는 과목으로 실시되었다(東京大学医学部, 1883: 12).23) 개설 당시 ‘의사’ 강의는 의학부 최고 학년인 ‘1등 제5년’ 학생을 대상으로 1년(2학기) 동안 매주 1시간씩 실시되었고(표 2), 강사는 이마무라 료(今村亮, 1814∼1890)였다.24) 당대 ‘한방의학의 거두’인 그는 1882년 12월 26일에 도쿄대학 총리(總理)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의 명의로 “본학 의학부 학생에게 화한의사(和漢醫史)를 교도(敎導)해주실 것을 의뢰”받고 강사로 촉탁되었다(和漢醫學講究所, 1883: 6丁)25). 이마무라 외에 ‘촉탁강사’는 ‘외과임상강의’를 담당한 ‘의학계의 거물’ 사토 스스무(佐藤進, 1845∼1921)뿐이었다(東京大学医学部, 1884: 194).26) 이듬해인 1883년 12월부터는 의사학 강의의 명칭이 ‘의사’에서 ‘의학사’로 변경되었다(東京大学医学部, 1884: 14-20). 당시 ‘의학사’ 강의는 ‘화한의사’로서 세 가지 주제, 즉 ‘본방의학연혁(本邦醫學沿革)’, ‘본방명의전(本邦名醫傳)’, ‘양방의전(洋方醫傳)’으로 구성되어 있었다(東京大学医学部, 1884: 63-65). 그러나 3년 후인 1886년 4월 5일에 의사학 강의가 커리큘럼에서 제외되었다(東京帝国大学, 1932: 1182).27)
지금까지 일본 최초의 대학 의사학 강의가 언급된 서술은 대부분 오류를 범하고 있다.30) ‘표준’이라 할 만한 『도쿄대학 의학부 백년사(東京大学医学部百年史)』(1967)에는 1883년 4월부터 “미야케 히즈는 서양의사(西洋醫史), 이마무라 료안[이마무라 료]은 화한의사를 강의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東京大学医学部創立百年記念会·東京大学医学部百年史編集委員会, 1967: 264). 후지카와유(富士川游, 1865∼1940)도 『일본의학사』(1904, 1941) 부록 「일본의사연표(日本醫事年表)」에 1883년 “대학 의학부에 의사과(醫史科)를 두고 미야케 히즈로 하여금 서양의사를 편찬하고 이마무라 료안으로 하여금 화한의도(和漢醫道)의 연혁을 강의하게 하”[인용자 강조]였다고 기술하였다(富士川游, 1904: 부록 100; 1941: 부록 77).31) 또한 『의학사연구』 편집부는 「세계의학사교육·약년표(잠정원고)」에서 1882∼1884년에 미야케가 ‘의사’(이후 ‘의학사’)를, 1884∼1886년에는 이마무라가 ‘의사화한(醫史和漢)’을 강의한 것으로 조사하였다(医学史研究編集部, 1962: 308). 이러한 서술들은 서로 불일치하지만, 공통적으로 미야케가 일본 최초로(혹은 공동 최초로) 의사학 강의를 어떤 식으로든 담당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미야케가 1887년보다 앞서 의사학을 강의(또는 편찬)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1882년 12월부터 의사학 강의를 이마무라가 단독으로 맡았음을 제시하는 증거는 여럿 존재한다. 첫째, 『도쿄대학 의학부 일람』 1883∼1884년 판에 따르면, 의사학 강의의 세 가지 주제는 모두 미야케가 강의하였다고 여겨지는 ‘서양의사’가 아니라 ‘화한의사’에 속하며, 미야케의 담당 과목은 ‘병리학’, 이마무라의 담당 과목은 ‘화한의사강의’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東京大学医学部, 1884: 63-65, 191-194). 둘째, 이마무라 자신이 “1882년 12월에 처음으로 강사로 촉탁된 이래 의학부 1등생에게 황국(皇國) 의도(醫道)의 연혁 및 아방(我邦) 명의의 사적을 강의”하였다고 밝혔고, 1883년부터 준비한 『양방의전(洋方醫傳)』을 1884년에 출판하였는데, 이것들은 위에서 언급한 의사학 강의의 세 가지 주제와 일치한다(東京大学, 1884: 216; 今村亮, 1884). 셋째, 이마무라의 강의 시간은 “매주 화요일 오후 1시부터 2시까지”로, ‘의학사’에 부여된 주 1시간과 일치한다(표 2)(東京大学, 1884: 216). 결론적으로, 일본 최초의 대학 의사학 강의자는 이마무라이며, 그의 강의는 1882년 12월부터 1886년 초 정도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1886년에 중지되었던 의사학 강의는 미야케가 의학 교육 관련 조사를 위한 약 1년 3개월간의 유럽 출장에서 돌아온 1887년부터 재개되었다.32) 제국대학 의과대학(구 도쿄대학 의학부의 후신)에서 그가 직접 맡은 ‘의사(醫史)’ 강의는 4학년 학생에게 1년간 매주 1시간씩 실시되었고, 대상 학년이 1888년에는 1학년 3학기 및 2학년 1, 2학기, 1891년에는 2학년으로 바뀌었다(東京帝国大学, 1932: 1183-1191). 1895년 8월 24일에 개정된 의학과 학과 과정표에 ‘의사’가 제외된 것을 보면, 해당 강의는 1894∼1895년까지 이루어진 것 같다(東京帝国大学, 1932: 1189-1191). 이러한 강의 운영은 대체로 미야케의 일기 기록과 일치하며, 이에 따르면 1888년 10월 1일부터 ‘별과생(別課生)’에게도 ‘의사’ 강의가 이루어졌다(小関恒雄, 1981: 37-42).33) 사카이 시즈(酒井シヅ)는 의사학 강의의 중지를 미야케의 의과대학장 취임과 연관지었는데,34)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중지의 이유를 ‘의사학 배제’보다는 ‘강사의 부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酒井シヅ, 1985: 33).35)

3. 일본 근대의사학의 여명

일본 근대의사학의 여명기를 열어젖힌 인물은 후지카와 유이다. 히로시마 의학교(広島医学校, 현 히로시마대학 의학부) 졸업(1887) 직후 상경하여 보험의(保險醫)로 일하면서 중외의사신보사(中外医事新報社)에 입사한 그는 1890∼1891년경 “우리나라[일본]의 의사(醫史)를 연구할 뜻을 세우고” 1892년 3월 4일, 구레 슈조(呉秀三, 1865∼1932), 도히 게이조(土肥慶蔵, 1866∼1931) 등과 함께 ‘선철제(先哲祭)’를 열었다(富士川游, 1904: 1032).36) 이로부터 일본의사학회의 전신인 사립장진의회(私立奬進醫會)가 발족하였다. 후지카와가 1904년에 펴낸 『일본의학사』는 의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독서계에까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일본 근대의사학의 개막을 알렸다(「富士川游先生」編纂委員会, 1954: 57). 이후 의학계에서 의사학에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여 독일 대학의 의사학 강좌 설치 소식이 보도되거나37) 의학 관련 학회의 총회 장소에 의학사 자료 전시회가 마련되기도 하였다.38)
후지카와는 1909년 5월부터 교토제국대학(京都帝国大学) 교토의과대학39)의 촉탁으로 일본의학사 강의를 맡았고, 1912년 5월 12일에는 저서 『일본의학사』로 제국학사원(帝国学士院) 은사상(恩賜賞) 제3호를 수상하였다(「富士川游先生」編纂委員会, 1954: 87; 帝国学士院, 1915: 68). 1914년 7월에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1915년 3월 30일에는 1912년에 발간한 『일본질병사 상권』을 제출하여 교토제국대학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醫海時報社, 1915: 41; 京都帝国大学, 1923: 294). 이 책은 의학박사 학위의 심사에서 “태서(泰西)에서 출간된 질병사와 서로 비교해보면, 본서는 그 내용에서 전혀 다른 것일 뿐만 아니라, 편수(編修)의 방법 및 체재도 결코 그것을 모방 답습한 것이 아니”라며 “우리나라[일본] 의학에 대하여 공헌하는 바 매우 현저하다”는 평을 받았다(刀圭新報發行所, 1915: 254-255). 후지카와는 1919년부터 1940년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学) 의학부에서 강사로서 의사학을 가르치는 한편, 규슈제국대학(九州帝国大学) 의학부와 나가사키의과대학(長崎医科大学)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의사학 강의를 실시하였다(慶応義塾大学医学部六十周年記念誌編集委員会, 1983: 29; 「富士川游先生」編纂委員会, 1954: 87).40)
이처럼 후지카와의 활약으로 의사학의 보급과 교육이 실현되고 있었지만, 의학계에서는 의사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1907년 5월 19일, 교토제국대학 병리학교실은 교토의학회 제4회 총회의 행사로 ‘의사재료진열(醫史材料陣列)’을 기획하여 전시 자료 1천여 점의 대규모 의학사 전시회를 열었는 데, “무용패잔(無用敗殘)의 폐물을 진열한 고물상”, “실험의학에 도움이 안 되는 것”, “시간 들여 정력만 소모”한 “보람 없는 헛수고”라는 혹평이 쏟아졌다(五洋生, 1907: 81). 후지카와가 1915년에 일본질병사의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두고도 “너무나 이상하다”는 반응과 반발이 있었다(藤浪鑑, 1918: 936). 이러한 세태에 대하여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병리학교실 초대 교수 후지나미 아키라(藤浪鑑, 1871∼1934)41)는 “의사학은 엄연한 학술적 연구이자 의학의 한 분야”이며, 실험실 내의 연구에도 역사적 지식이 불충분하면 그것이야말로 “보람 없는 헛수고”이자 “우물 안 개구리”라고 반박하였다(藤浪鑑, 1918: 936-941). 의사학은 현재의 의학적 지식을 충실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미래 진보의 방침까지 가르쳐주며, 의학이 전문화될수록 그것을 종합하고 총괄하는 의사학의 존재 의의가 커진다는 것이다. 후지나미는 전문 의사학자는 아니었지만, 후지카와의 활동과 의사학의 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편으로 실업가이자 사회사업가인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郎, 1880∼1943)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유럽에서 귀중 도서를 대량으로 사들였는데, 여기에 괴팅겐대학(Universität Göttingen) 의사학교실 소속 문고가 전부 포함되었다(大原孫三郎伝刊行会, 1983: 168; 藤岡巌, 1924: 168). 구라시키(倉敷, 오카야마현)에 도착한 그 30여 상자 안에 윌리엄 하비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저작을 비롯한 의학사상 명저의 원본과 의학사 전문 잡지 등이 포함된 것을 직접 확인한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생리학교실의 후지오카 이와오(藤岡巌)는 도서의 구입을 크게 평가하였다(藤岡巌, 1924: 169-170). 그는 구미와 달리 일본에서는 의사학 연구가 매우 요원하며 그러한 연구가 발표되어도 무관심 속에 묻히거나 “한가한 사람의 헛일로서 비웃음을 살 정도”라고 진단하고 그 원인으로 “의학사적 연구가 의학의 실제에 대하여 어떤 이익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오해”와 “연구의 자료 문헌 부족”을 들었는데, 이로써 두 번째 원인이 크게 완화되리라는 것이다(藤岡巌, 1924: 167-170). 이처럼 메이지(明治) 시대에서 다이쇼(大正) 시대에 이르기까지 의학계에 의사학 경시의 풍조가 만연한 가운데서도 의사학의 여명기가 도래하여 의사학 교육과 연구의 저변이 점차 넓어졌다.

4. 일본 의사학 교육의 확대

일본의 의사학 교육은 1930년대에 들어 더욱 활성화되었다. 1930년 5월 22일, 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東京慈恵会医科大学)에 의학사 강좌가 신설되어 학장 가나스기 에이고로(金杉英五郎, 1865∼1942)가 의사학 강의를 시작하였다(中外醫事新報社, 1930: 367; 東京慈恵会医科大学, 1931: 72). 이비인후과가 전문인 그는 개강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의학사 강좌는 구미 제국(諸國)의 대학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실행되는 곳이 많다. 이는 소위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주지(主旨)로서 하나는 역사를 중시해야 함을 알고 또 하나는 선인이 어떻게 학(學)과 도(道)를 개발하고 진전시키는 데 진력하였는지 알기 위해서이며, 후인이 이를 아는 것도 결코 무익한 일이 아니라 믿는다. 나는 먼저 일본제국의 의학사 대요를 강의하고 여유가 있으면 서양 및 중국의 의학사도 다룰 예정이다(中外醫事新報社, 1930: 367).
의사학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의학자가 의사학의 가치를 인정하고 후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강좌를 개설하여 강의한 것은 미야케 히즈의 의사학 강의 폐강 이후 약 35년 만의 일이었다.
의사학 연구에 대한 의학부 학생의 열기도 높아졌다. 1932년 봄, 도호쿠제국대학 의학부에서는 학생 활동의 일환으로 생리학교실 교수 사타케 야스타로(佐武安太郞, 1884∼1959)가 회장을, 해부학교실 교수 하세베 고톤도(長谷部言人, 1882∼1969)가 고문을 맡는 의사학동호회가 발족하여 연구발표회와 좌담회를 열고 1935년 6월에 센다이의사자료전람회(仙台医史資料展覧会)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東北大学五十年史編集委員会, 1960: 763; 東北帝国大学, 1931: 45-47; 小川鼎三, 1973: 372). 1933년 상반기에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의 학생 유지가 “의사(醫史)에 관한 사항을 연구하고 아울러 인격의 도야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게이오의사학연구회를 조직하여 강연회, 좌담회, 월례회, 연구발표회, 사료 전시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中外醫事新報社, 1933a: 277; 1940: 246). 이 연구회는 이학요법과학교실 교수 후지나미 고이치(藤浪剛一, 1880∼1942)가 회장을, 의사(醫史) 강사 후지카와 유, 의사법제(醫事法制) 강사 야마자키 다스쿠(山崎佐, 1888∼1967), 문학부 강사 고다 시게토모(幸田成友, 1873∼1954)가 고문을 맡았고, 이로부터 다쓰노 가즈오(龍野一雄, 1905∼1976), 오토리 란사부로(大鳥蘭三郎, 1908∼1996) 등의 의사학자가 배출되었다(慶応義塾大学医学部, 1934: 53-56; 慶応義塾, 1932: 275-276; 中外醫事新報社, 1933b: 488; 1940: 246).42) 당시 동 의학부에 정식 의사학 강좌는 없었지만, 의사학 강의와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인재 육성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처럼 의사학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는 가운데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규정하는 사건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사립장진의회는 1915년 1월에 의사학 부문의 장진의회와 기타 부문의 일본의사협회로 분리되었고, 장진의회는 1927년에 일본의사학회로 거듭났는데, 일본의사학회가 1934년 4월에 개최된 제9회 일본의학회 총회에서 일본의학회 ‘제1 분과회’로 가입된 것이다(日本医学会創立120 周年記念事業記念誌委員会, 2022: 323). 일본의사학회가 1902년부터 제1 분과회였던 일본해부학회를 제2 분과회로 밀어내고 32개 분과회 가운데 ‘상석’을 차지한 것은, 분과회 중 가장 오랜 역사43)와 제1회 일본의사회 총회(제1회 연합의학회) 이래 의학사 전람회를 담당해온 이력, 그리고 의사학에 대한 의학계의 인식 제고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44) 제9회 일본의학회 부회두(副會頭)를 맡은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장 나가요 마타오(長与又郎, 1878∼1941)가 「폐회의사(辭)」에서 후지카와 유의 총회 연설 「의술의 사적 고찰」을 아래과 같이 평가하였는데, 여기에는 당대의 의사학에 대한 의학계의 기대와 의학계에의 설득 방식이 동시에 드러난다.
먼저 총회 연설에 관해 보면 후지카와 박사는 그 전공의 학문의 견지에서 의술의 과학적, 철학적, 윤리적 고찰을 시도하고, 결론으로서 의술은 예술로서 최고의 것이어야 하며 이를 최고의 예술로 만들려면 손과 뇌와 마음이 잘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설명하셨는데, 지극히 동감하는 바입니다. 일본의학회가 이번에 의사학을한 부회로서 추가한 것의 주된 취지도 이 점에 있으며, 단순히 오래된 의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풍(醫風) 향상에 이바지하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이라 생각합니다(日本医学会, 1934: 131).45)
1937년, 의사학자 이와쿠마 도루(岩熊哲, 1899∼1943)는 “의학의 모든 영역 가운데 지금까지 가장 등한시된 의사학의 연구가 (……) 점차 흥륭(興隆)의 기운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며 “아마도 가까운 장래에 (……) 각 대학도 앞다투어 의사학의 강좌를 설치”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岩熊哲, 1937: 220). 그의 전망은 어느 정도 적중하여 1942년 한 해에만 나고야제국대학(名古屋帝国大学) 의학부 및 동 대학 부속 의학전문부, 지바의과대학(千葉医科大学) 및 동 대학 임시 부속 의학전문부,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등에 의사학 강좌가 신설되고 강사가 배치되었다(日本臨床医学社, 1942: 47; 千葉医科大学, 1943: 128, 139; 日本医史学会, 1942a: 265; 1942b: 265; 日新醫學社, 1942: 95). 그렇지만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사학 강의를 맡은 문부성 과학문화협회 전무이사 다케우치 요시에(竹内芳衛)가 “일본 민족의 우수성도 분명히 하고” 이를 앞으로 “북방은 물론 넓은 대동아에서 활약해야 하는” 학생에게 많이 “주입”시키고 싶다고 밝힌 것이나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의사학 강좌가 설치된 목적 중 하나로 “학생 생도의 정신적 교육 강화”가 언급된 것 등을 고려하면, 의사학이 ‘전시(戰時) 교육’의 일환으로 강의된 측면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日本臨床医学社, 1942: 47; 日新醫學社, 1942: 95).

5. 전후 일본 의학 교육의 재편과 의사학 교육의 전개

종전 후 점령기 일본에서 연합국최고사령부(GHQ) 공중위생복지국(PHW)이 의료 및 의학 교육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1948년 5월 25일, 미국의 인가(accreditation) 기관을 본떠 46개 대학에 의하여 설립된 대학기준협회 총회에서 ‘의학교육기준’이 승인되었다. 이에 따르면, 수업연한은 4년 이상, 1년의 실제 수업 기간은 30주 이상, 1주의 수업 시간은 33시간 이상이어야 하며, 일반대학에서 3년 이상 교육을 받은 후에 4년 이상의 의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福島統, 2018: 425).46) 의학부의 교육 내용으로는 기초의학에 34%, 사회의학에 10%, 임상의학에 47%, 자유 선택에 9%가 할당되었는데, 자유 선택으로는 의학적 심리학, 의학사 등의 강의 수강과 연구실 수련 등이 가능하였다(福島統, 2018: 426).
이로부터 5년 후 일본의사학회가 전국 47개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953년 12월 현재 의사학 강좌가 설치된 곳은 17개교였고, 이 중 전임강사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의 오토리 란사부로와 요코하마의과대학(横浜医科大学)의 이시하라 아키라(石原明, 1924∼1980) 등 2명뿐이었으며, 독립된 의사학교실과 의사학 전공 교수는 없었다(日本医史学会, 1954a: 84). 이러한 결과를 두고 일본의사학회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신제(新制) 대학의 교육 규정에 따르면, 의사학은 자유 강좌로서라도 반드시 설치하게 되어 있다. 현재 강좌가 없는 30개 대학은 가까운 장래에 강좌를 설치하고 싶은 의향이 있어도 인사(人事)의 점에서 난항을 겪는 곳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의사학 강의 내용의 규준을 정하는 것과 의사학을 전공하는 젊은 세대의 사람들을 육성하는 것은 우리나라[일본] 의사학의 향상을 기하기 위하여 긴요한 문제라 생각한다(日本医史学会, 1954a: 84).
1954년에는 도쿄대학 의학부에 의사학 강좌가 다시 개강하여 매주 2시간씩 혈청학교실 교수 오가타 도미오(緒方富雄, 1901∼1989)가 주로, 해부학교실 교수 오가와 데이조(小川鼎三, 1901∼1984)가 때로 강의하였다(日本医史学会, 1954b: 98). 같은 해 3월 1일에는 1944년 이후 휴간되었던 『일본의사학잡지』도 복간되었다.47) 이같이 의사학 교육과 학회 활동의 동력이 조금씩 붙는 가운데,48) 일본의사학회는 1955년 4월에 열린 제57회 일본의사학회 총회에서 1953년 12월의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의사학 강좌 개설 요망에 관한 건의’를 채택하고 아래와 같이 공표하였다.
의사학 강좌 개설 요망에 관한 건의
신제 의과대학의 학과 과정에 의하면, 의사학은 의학개론, 사회보장제도 등과 함께 자유 강좌로서 전 시간의 10분의 1을 할당하도록 정해져 있다.
이에 따라 각 대학에도 의사학 강좌를 설치한 곳이 있지만, 현재 전국 47개 의대 중 겨우 17개 의대가 의사학 강좌를 갖추고 있는 데 불과하다.
일본의사학회는 제14회 일본의학회 총회를 계기로 위와 같이 의사학 강좌를 갖추지 않은 30개 의대에 대하여 의사학 강좌의 개설을 요망함과 동시에 이를 필수 과목으로 채용할 것을 건의한다.
의사학을 필수로 요망하는 이유는
1. 의학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는 역사적 창조로써 현재에 이른 것이므로 현재의 학문·예술 내지는 문화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꼭 그 역사적 발달의 대강만이라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의학 교육에 있어서는 의사학을 강의함으로써 현대의 의학을 인식시키고 나아가 장래의 의학을 창조할 능력을 의학생에게 함양할 필요가 있다.
2. 위와 같은 견지에서 구미의 각 대학에서는 일찍부터 의사학 강좌가 설치되고 전공학자가 이를 담당하며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일본]의 현재 상황으로는 이러한 제외국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조급하게 의사학 강좌를 각 대학에 설치할 필요가 있다.
3. 일본의사학회는 1934년 이래 일본의학회의 제1 분과회로서 공인되었지만, 아직 강좌 수가 적어서 전공학자가 충분한 사명을 다할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4. 의사학의 국제적 단체인 국제의사학회의는 2년마다 열리는데, 우리나라[일본]에서는 종래 여기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작년 로마에서 제14회 국제의사학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일본의사학회는 국제적 교류를 이루기 위해 도쿄대 교수 오가와 데이조 박사(이사)에게 학회 대표로 참가할 것을 청하여 [그는] 연구 발표와 의견 교환을 하고 제외국의 의사학회로부터 다대한 호의와 기대를 받았다. 이러한 차제로 이미 국내에서도 분과회로서 공인되었고, 또한 이번에 국제적인 연대도 생겼으므로 각 대학에서 의사학 강좌를 빠짐없이 설치하고 이를 필수로 하도록 요망한다.
위의 의사학 강좌 개설의 요망은 제57회 일본의사학회 총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다.
1955년 4월
일본의사학회
이사장 야마우치 고이치(山内孝一)(日本医史学会, 1955: 203-204)49)
그러나 위의 ‘건의’가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은 것 같고, 일본의사학회도 ‘건의’의 공표 이상으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中川米造, 1978: 252). 학회지도 복간 이후 불규칙하게 발간되다가 1959년에 다시 중단된 것을 보면, 당시 학회 활동 자체에 여력이 없었다고 여겨진다.50)
의사학 교육에 진전이 보이게 된 계기는 의학 교육 제도의 변경이었다. 기존의 ‘의학교육기준’이 1954년에 12월에 개정되어 의학 교육의 수업연한이 2년 이상의 ‘진학 과정’과 4년의 ‘전문 과정’, 총 6년 이상으로 결정되었고51), ‘진학 과정’의 일반 교육 과목에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계열 과목이 각각 3과목 12단위 이상 포함되었으며, ‘의학사’가 예시된 ‘전문 과정’의 자유 선택 시간 비중은 9%에서 8%로 감소하였다(中川米造, 1972: 46-47; 福島統, 2018: 426). 하지만 오사카대학 의학부 의학개론연구실의 나카가와 요네조(中川米造, 1926∼1997)는 인문과학 계열 3과목 이상을 설치 의무로 하는 ‘의학교육기준’의 이러한 변경에 따라 의사학을 정식으로 시간표에 넣는 학교가 늘었다고 평가하였다(中川米 造, 1962: 314). 이러한 추세 속에서 1962년 4월, 일본 최초의 의사학 전임교수가 탄생하였다.52) 도쿄대학 의학부 해부학교실을 정년퇴직한 오가와 데이조가 준텐도대학(順天堂大学) 의학부에 신설된 의사학연구실 교수로 부임한 것이다. 오가와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전부터 나는 일본에서는 의사학 강의가 이미 상당히 많은 의과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그 교수 자리가 하나도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이 대(大) 선생[후지카와 유]이 항상 재야에서 연구하고 몇몇 대학에서 강단에 섰지만, 교수 자리에는 결국 앉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반대로 나 따위가 최초의 의사학 교수가 된 것도 하나의 사소한 테마가 될지도 모른다(小川鼎三, 1962: 306).
일본 근대의사학의 역사와 성과에 비하여 전임교수의 탄생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그는 준텐도 제5대 당주 아리야마 노보루(有山登, 1896∼1988)로부터 교수 취임 의뢰를 받고 의사학 교수를 조건으로 승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順 天堂, 1996: 277). “강좌가 없다는 것은 그 강사를 한평생 강사인 채로 끝나게 하는 것”이자 “후계자를 얻는 것조차 곤란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가와의 의사학연구실 부임은 일본 의사학 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다(沢瀉久敬, 1961: 52).
두 번째 의사학 전임교수의 탄생은 그로부터 4년 후에 이루어졌다. 1945년 8월부터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에서 의사학 강사를 맡고 있던 오토리 란사부로가 1966년 6월에 교수로 승진한 것이다(慶応義塾大学医学部六十周年記念誌編集委員会, 1983: 318-320). 이 소식을 접한 의사학계는 “참으로 동경(同慶)을 금할 수 없”다면서 “관공립대학에서도 의사학 강좌의 설치에 관하여 적극적인 배려가 절실하게 요망되는 바”라는 기대를 내비쳤다(日本医史学会関西支部, 1966: 2333). 국립대학 의학부에 의사학 강좌가 설치되면 그 파급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립대학의 의사학 강좌 부재는 의사학계에서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피부과 의사 나가토야 요지(長門谷洋治, 1933∼2014)는 “단 하나도 완전한 의사학 강좌를 가진 국립대학이 없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며 “관학 아카데미의 의사학 경시 태도”를 질책하였다(長門谷洋治, 1977: 187; 1967: 2424). 그러나 이후 일본의 국립대학에서 완전한 형태의 의사학 강좌가 신설되는 일은 없었다.

6. 일본 의사학 교육의 정체와 위기

1960년대 후반 인턴제도 완전 폐지 학생운동과 일련의 전국 학원(學園) 투쟁은 의학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의사법 개정(1968)으로 인턴제도의 폐지와 연수의제도의 도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때까지 규정되어 있던 의학부의 수업 과목과 시간이 기초의학 20∼25%, 임상기초의학 15∼20%, 임상의학 40∼50%, 사회의학 5∼10%, 기타 5∼10%로 대폭 완화되었다(福島統, 2018: 426).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교육 커리큘럼 개선 요구도 많아졌는데, 나고야대학(名 古屋大学) 의학부의 경우 학생자치회의 요구에 따라 1968년에 의학개론·의학사 강의가 개강되었다(神谷昭典, 1973: 269). 1975년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 71개(국립 35, 공립 8, 사립 28) 의학부/의과대학 가운데 ‘의사학’이나 ‘의학사’가 과목 명칭에 포함된 강의를 실시하는 곳은 13개교(국립 4, 공립 1, 사립 8)에 불과하였고, ‘의학개론’이나 ‘의학서설’ 등을 포함한 의료인문학 전반으로 넓히면 40개교(국립 14, 공립 3, 사립 23)로 늘어났다(中川米造, 1978: 252-253).53) 이 결과를 두고 나카가와 요네조는 “의학사는 의학개론 또는 의학서설의 이름으로 강의되기도 한”다면서 “의과대학의 강의 과목에 의학사가 등장하거나 전임자가 교직을 맡는 예가 눈에 띄”는 등 의사학에 대한 냉담한 시선이 최근 몇 년간 변해왔다고 평가하였다(中川米造, 1978: 252).
그러나 나카가와는 “이웃 나라 한국에서는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의학사교실을 설치하였는데, 일본에서는 어느 대학에도 전문 연구자 양성을 위한 교실은 탄생하지 않았다”고 덧붙이며 의사학 강의를 실시하는 대학은 늘고 있지만 “의학사학자로서의 기초적 훈련을 받은 자는 거의 없”고 “독학자”와 “취미로 하는 연구자”가 대부분인 일본 의사학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였다(中川米造, 1978: 255). 또 “일본에서 강좌 요구 등을 하는 경우 항상 (……) 따라야 할 모델로서 구미의 사정이 거론되”는데, 미국의 의학 교육에서 의사학이 하강기에 들어섰다면서 그 이유로 “이제까지 의학사 교육이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해온 교육목표의 상당 부분이 꼭 의학사 교육이 아니어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것, 오히려 의학사보다 더 직접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을 꼽았다(中川米造, 1978: 253, 256). “단지 아카데믹한 연구 대상으로서만 의학사를 생각해서는 안 되”며 “더 현실적인 과제에 직접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中川米造, 1978: 256). 이러한 신랄하고 현실적인 지적은 그가 의학 교육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면서 의사학 교육의 실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단기간에 해결될 만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공감대는 점차 퍼졌다. 정신의학자 가노코기 도시노리(鹿子木敏範, 1921∼2002)는 독일과 일본의 의사학 교육 현황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의사학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일본]에서는 명예교수의 노후 취미라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옛날에는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의 경향이 있었지만, 의사학 커리큘럼이 의학부 필수과목에 편입되고 나서 상황은 일변하였다. (……) 이처럼 독일에서 의사학은 단순한 역사의 회고뿐만 아니라 현대의학에 대한 오늘날의 긴급한 요청과 씨름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일본]의 의학 교육에서 가장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鹿子木敏範, 1982: 138-139).
1980년대 이후 의사학 교육 문제는 더욱 빈번하게 다루어졌다. 마쓰키 아키토모(松木明知)가 개인 자격으로 실시하여 1982년에 발표한 앙케트 결과에 따르면, 전국의 의학부/의과대학 76개교 중 회답을 얻은 62개교 가운데 19개교(약 30.7%)에서 의사학이 독립적으로 강의되었고, 18개교(약 29.0%)에서 의사학이 포함된 의학개론 강의가 실시되었으며, 의사학 강의 담당자는 19개교 중 7개교가 전임교원, 8개교가 학회에 의뢰한 강사, 3개교가 학장이나 기타 교수, 나머지 1개교는 전임강사를 포함한 복수 교원이었다(松木明知, 1982: 73-74). 이는 응답률이 100%가 아닌 불완전한 조사 결과이지만, 1975년에 비하여 의사학 단독 강의가 이루어지는 학교가 상대적으로 많아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쓰키는 25개교(약 40.3%)에 의사학 강의가 부재한 것을 중대한 문제로 보고 가장 큰 원인으로 강사의 부족을 꼽았다. 그는 “현재 요코하마시립대학(横浜市立大学), 준텐도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도카이대학(東海大学) 등에 의사학 강좌가 개설되어 있지만, 모두 공립이나 사립”이라며 “국립대학에 의사학 강좌를 설치하여 전임 교관을 확보하는 것이 제1의 급무”라고 강조하였다(松木明知, 1982: 74-75). 한편 1987년 시점에 전국의 의학부/의과대학 79개교 중 의사학을 정규 교과로 가르치는 곳은 6개교(약 7.6%)에 지나지 않았다(寺畑喜朔, 1987: 58).
1990년대에는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준텐도대학 의사학연구실의 구라카타 히로마사(蔵方宏昌)는 “일본의 의학 교육에서 의학사의 존재는 매우 경시”되고 있다고 진단하며 “의학사 강의를 커리큘럼에 편성하여 비상근강사를 두는 의학부는 열 손가락에도 안 들”고 “전임교원을 배치하는 의학부는 전국 79개 교 중 준텐도대학과 요코하마시립대학 2개교에 불과한” 현실을 지적하고 의학부 교양과정의 축소에 동반하여 “의학사 강의도 감소 일로”라고 우려하였다(蔵方宏昌, 1993: 14). 나가토야 요지는 1960년대 말 의학부 분쟁 때 의사학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분쟁 이후 의사학계의 ‘세력 분포’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경고하였다(長門谷洋治, 1995: 101). 전국의 의학부/의과대학에서 의학사가 의학개론 강의의 테마로 채택되는 비율이, 대부분 증가한 다른 테마와 달리 1988년도 16.4%에서 1994년도 14.9%로 감소하였다는 보고도 있었다(森忠三·西尾利一, 1996: 157).
1996년, 일본의학교육학회에서 ‘의학사 교육 워킹 그룹’을 발족시켜 전국 80개 의학부/의과대학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실시한 결과, ‘의학의 역사’ 커리큘럼이 있는 대학은 40개교, 이 가운데 과목명에 ‘의사학’이나 ‘의학사’가 포함된 곳은 16개교였으며(대부분 선택 과목), 해당 커리큘럼이 없는 이유로는 복수 회답으로 담당 교원의 부재(30개교)와 커리큘럼의 여유 부족(26개교)이 대부분이었다(神津忠彦 외, 1997: 356). 이 결과를 두고 게이오기주쿠대학 의사학연구실의 오무라 도시오(大村敏郎)는 “대학의 자주성이 인정되어 최근 커리큘럼이 바뀐 대학 중에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그만둔 곳이 몇 군데” 있다면서 “연구를 즐기는 데 그치지 말고 교육에의 관심을 더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大村敏郎, 1997: 297). 1997년 9월, 제2회 일본의학회 특별심포지엄 「의(醫)와 교육」에서 의사학 교육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개개인의 ‘진단과 처방’만이 있을 뿐, 의사학회 차원의 합의와 대응은 고사하고 현상 파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사학연구실’도 현재 준텐도대학 한 곳만이 남아 있다. 의학교육학자들이 2020년에 전국 의학부/의과대학 82개교 중 실러버스를 입수한 69개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의학사’ 강의가 이루어지는 대학은 29개교, 평균 강의 시간은 2시간 47분으로, ‘의학철학·의료윤리학’, ‘의료사 회학·의료인류학’을 비롯한 타 의료인문학 분야 가운데 강의 시간 점유율이 가장 낮았고, ‘의학사’ 강의 교원의 임상의와 기초의학 종사자 비율이 세 분야 가운데 가장 높았다(표 3)(外山尚吾 외, 2020: 382-383).54) ‘의학사’ 교육은 질과 양 모두 떨어진다는 것이다.

7. 맺음말

본고는 메이지 시대 일본 의사학 교육의 기원부터 현 의과대학의 의사학 교육 실태에 이르기까지 일본 근대의사학 교육의 역사를 부감한 최초의 시도이다. 폭넓은 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일본 최초의 의사학 강의를 둘러싼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일본 의사학 교육의 과제와 학계의 대응을 역사적으로 맥락화함으로써 연구사적 의의와 실천적 함의를 동시에 포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에 더욱 충실히 따르기 위하여 본문의 내용을 축약·재구성하고 고찰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일본 의사학 교육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길다. 의과대학의 의사학 강의는 독일식 의학 교육 체계의 도입이 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876년에 처음으로 계획되었고, 실제 강의는 구 도쿄대학 의학부에서 1882년 12월에 시작되어 1886년까지 이마무라 료가, 1894∼1895년까지는 미야케 히즈가 담당하였다. 1895년 이후 10여 년의 공백을 제외하면 일본의 의사학 교육은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긴 역사에 비하여 내실은 빈약하다. 의사학 강의가 이루어지는 의과대학 수와 할당된 강의 시간 모두 낮은 비율에 그치고 있고, 의사학 전문 교육자의 부족으로 질적 수준 또한 담보되고 있지 않다. 의사학 전임교수와 관련 교실의 극심한 ‘결핍’이 고착화하여 전문가 양성 실패와 의사학 교육의 퇴조라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일본 의사학 교육이 처음부터 부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몇 차례의 호기가 있었는데도 이를 살리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첫 번째 기회는 근대의사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찾아왔다. 메이지 시대 전반기 일본 의학 교육의 지도적 기관인 구 도쿄대학 의학부에 의사학이 정규 필수과목으로 개강(1882)한 것이다. 강사로 ‘한방 의사’ 이마무라 료가 초빙(1882)되고 의학부장 미야케 히즈가 이후 전담하였지만, 결국 강사의 부재로 폐강(1895)하였다. 만일 교토제국대학 의과대학 개설(1899) 때까지 강의가 계속되었다면 의사학 교육의 저변이 더욱 확대되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기회는 1930년대였다. 의사학 교육이 확산하고 일본의사학회가 일본의학회 제1 분과회로 올라서는 등 의사학의 위상이 높아진 당시는 의학 교육의 장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제9회 일본의학회 총회(1934)에서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장 나가요 마타오는 의사학에 “단순히 오래된 의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풍 향상에 이바지하는” 보다 실제적인 역할을 주문하였지만, 당시 의사학계는 이러한 의학계의 요청을 읽어내기는커녕 의사학 강좌 개설을 위한 적극적인 대응조차 하지 않고 장밋빛 전망을 내놓는 데 그쳤다.
세 번째 기회는 전후 의학 교육의 재편이었다. 대학기준협회의 ‘의학교육기준’(1948)에서 의사학이 ‘기초의학’ 범주에 들지 못한 것은 그때까지 의사학이 자의든 타의든 기초의학이 아닌 ‘특수 영역’으로 존재해온 것이 반영된 결과로 치부하여 차치하더라도, ‘의학사’가 ‘자유 선택’ 과목의 한 예로 명시되었는데도 ‘의사학 강좌 개설 요망에 관한 건의’ 공표 이상의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아 ‘영토’를 넓히지 못한 것은 일본 의사학계의 패착이었다. 이후 ‘의학교육기준’의 개정(1954)으로 의사학 강의가 늘고 1960년대 초중반 두 명의 의사학 전임교수가 탄생하였지만, 여세를 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네 번째 기회는 1960년대 말의 학생운동이었다. 불합리한 인턴제도 폐지 운동으로 촉발되어 전국의 의과대학으로 퍼진 일련의 학원 투쟁은 의학 교육 체제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의료인문학적 성찰이 가능하도록 커리큘럼 개선을 요구하는 의과대학 학생들은 의사학에 우호적이었다.55) 그러나 현실적인 과제와 긴급한 시대적 요청에 대응할 수 없는, 아니 그에 앞서 그러한 고민조차 하지 않는 의사학은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단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적인 흐름이었지만, 일본의 의사학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체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 의사학계가 여러 번 찾아온 기회를 모두 살리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그들은 의사학 교육의 상황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많은 의사학자가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노출하고 나름의 대처법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문제와 위기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고, 추상적인 일반론에 기대는 경우도 많았다.56) 그렇기에 설득이나 해결은 물론 현상 파악조차 요원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논의나 문제 제기가 연구자 개인 수준에서 이루어질 뿐, 학회나 학계 차원의 합의와 대응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들의 저류에 흐르는 것은 다소 자폐적인 아마추어리즘이라 할 수 있다.57) 일찍이 의사학자 다쓰노 가즈오와 의학개론학자 나카가와 요네조는 각각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의사학은 현대 역사학의 목적과 방법 등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아니, 현대 역사학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로부터 유리되어 구태에 안주하고 있다고 칭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龍野一雄, 1949: 1284).
취미로 하는 연구자는 세부에 관심이 너무 향한 나머지 전체적인 전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中川米造, 1978: 255).
지금까지 살펴본 일본 의사학 교육의 역사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갖추면서도 한국 의사학 교육의 현실에 큰 시사점을 제공한다. 다변화하는 의학 교육의 흐름 속에서 현재를 직시하고 능동적·조직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한국 의사학계의 당면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험에서 보아낼 수 있듯이, 현실에 안주하면 의사학 전임교수와 관련 교실의 극심한 ‘결핍’은 한국의 미래가 될 것이다(권복규, 2022: 513-514). 일본의 사례를 거울삼아 한국 의사학 교육의 향배를 의학 교육의 장에서, 그리고 의료인문학이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여인석, 2023: 196).

Notes

1) 일본 전국의 의학부/의과대학 82개교는 국립 43개교, 공립 8개교, 사립 31개교로 이루어져 국공립 비중이 62.2%에 달하지만, 한국의 경우 국립 10개교, 사립 30개교로 국공립 비중은 25%이다.

2) 2020년 기준 한국과 일본의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는 각각 2.5명, 2.6명이다(OECD, 2023). 다만 한국의 경우 한의사가 포함된 수치이다.

3) 의학부/의과대학의 교육 기간은 6년으로 동일하지만, 일본은 의학과 6년제로 운영하는 반면, 한국은 의예과 2년, 의학과 4년으로 구분되어 있다. 한국에는 2005년에 4+4년제 의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된 바 있지만, 현재 운영 중인 학교는 1개교뿐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4) 의사의 사회적 지위,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 의학부/의과대학 입학 난이도 등 사회문화적인 부분도 상당히 유사하다.

5) 일본의 경우 4+4년제 의사 양성 교육은 패전 직후부터 계획되었다. 1945년 말 연합군총사령부(GHQ) 일본의과학심사위원회(Committee for Investigation of Japanese Medical Science)가 제안하고 1946년부터 GHQ 공중위생복지국(Public Health and Welfare Section) 국장 크로퍼드 샘스(Crawford F. Sams, 1902∼1994)가 추진한 이 계획은 당시 후생성 의학교육심의회의 찬성을 얻었지만, 문부성 교육쇄신위원회 좌장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1883∼1966)가 패 전국 일본의 곤궁을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고 GHQ 민간교육정보국(Civil Information and Education Section)도 협력하지 않으면서 좌절되었다(二至村菁, 2013).

6) 본고에서 다루는 의사학 교육은 의학 교육 내에서 의사학의 위상을 문제시하는 기획 의도에 따라 의학부/의과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의사학 교육에 한정한다.

7) 한국에서는 40개 의과대학 가운데 22개교에서 의사학이 독립된 과목으로 강의되고 12명의 의사학 전문 전임교원이 11개 교실 또는 과에 소속되어 있다(이상미·예병일, 2023: 151-153).

8) 의학의 역사(history of medicine)를 지칭하는 용어로 한국과 일본의 관련 학회, 의학계, 의학교육기관 등에서는 주로 ‘의사학’을 사용해왔다. 본고에서도 ‘의사학’을 주로 사용하되 인용문에 포함된 경우,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의사학’과 그 연구 대상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의학사’도 병용하였다.

9) 일본의 대학에서 ‘강좌’는 하나의 전문 교과와 그것을 담당하는 교원들을 포괄하는 교육·연구 조직을 의미하며, 여기에 소속 학생이나 연구생 등을 포함하여 ‘교실’ 또는 ‘연구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일본 대학의 ‘의사학 강좌’는 전임교원의 부재로 비상근강사 등이 강의만 담당하는 불완전한 ‘강좌’인 경우가 많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10) 지금까지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일본의 의사학 교육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부감한 연구는 없었다. 본고는 의학 교육의 틀 속에서 전개되는 한계를 지니면서도 이러한 연구사적 공백을 메우는 최초의 시도이다.

11) ‘폼페’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본고에서는 외국 인명과 지명을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였음을 밝혀둔다.

12) 나가사키 의학전습소는 일본 최초의 근대 서양의학 교육기관이며, 1861년에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근대 병원 양생소(養生所)가 부속되었다. 이후 세이토쿠칸(精得館)을 거쳐 현 나가사키대학 의학부가 되었다.

13) 위트레흐트 육군군의학교는 운영(1822∼1865) 당시 네덜란드의 유일한 군의학교였다(石田純郎·ハルム・ボイケルス, 1985: 193-195).

14) 윌리스는 간토(関東)와 도호쿠(東北) 지역을 종군하며 600여 명의 부상자를 직접 치료하는 가운데 절단 수술 38건, 탄환 적출 23건, 부골(腐骨) 제거 200여 건을 집도하였고, 약 1천 명의 부상자에 대한 치료를 지도하였다(ウィリアム・ウィリス, 2003: 389). 시들도 125명의 중상자를 대상으로 부목 처치 102건, 절단 수술 22건, 파쇄골 적출 1건 등을 실시하였다(Siddall, 1876: 92).

15)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근대의학 교육의 향방을 결정지은 ‘독일 의학’ 도입의 경위는 그 자체로 일본 의사학의 중요한 문제로서 수많은 논의가 축적되어왔다. 본래 정부 관계자들은 네덜란드 의사와 영국인 의사를 병용할 계획이었으나 영국 측이 이를 거부하자 독일인 의사 초빙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尾暗耕司, 2012: 43-64). ‘독일 의학’ 도입의 결정은 그때까지 일본에서 독일인이 교육에 종사한 적이 없고 일본인 중에서도 독일어가 가능한 자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酒井シヅ, 1985: 30-31).

16) 1869년에 설립된 의학교 겸 병원이 대학동교(大学東校, 1869)를 거쳐 개칭된 것으로, 이후 제1 대학구 의학교(1872), 도쿄의학교(1874), 구 도쿄대학 의학부(1877), 제국대학 의과대학(1886),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1897), 도쿄제국대학 의학부(1919)를 거쳐 현재의 도쿄대학 의학부(1947)에 이르고 있다

17) 이후 다시 각 지방에 의학교가 설립되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여러 계통의 의학 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문부성이 1882년에 포달한 「의학교통칙(医学校通則)」에 따라 모든 의학교에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의학사(医学士)’가 일정 수 이상 교원으로 부임함으로써 ‘중앙집권적’ 독일식 의학 교육 개혁이 본격화하게 되었다.

18) 독일인에 의한 독일어 의학 교육은 전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기초과학과 의학 외에는 대부분 독일어와 독일 문화(역사, 지리 등) 관련 과목으로 채워져야 했을 것이다.

19) 현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의 전신 격으로, 약 300명의 의사를 양성하였지만, 의학 교육 제도의 변화, 세이난전쟁(西南戦争)의 영향, 재정 부담의 문제 등으로 발족 7년 후인 1880년에 폐교하였다(安田健次郎, 2009: 80). 그로부터 37년 후인 1917년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 등에 의하여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의학부가 창설되었지만, 게이오기주쿠의학소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20) 이에 앞서 도쿄의학교의 1874년도(1874년 9월부터 1875년 2월까지) 학과표에 예과 1등생 과목으로 “의사 및 지리학(醫史幷地理學)”이 등장한다(東京帝国大学, 1932: 398-399). 이것이 정확한 표기라면 일본 최초의 의사학 강의가 되겠지만, 이후의 학과표를 고려할 때 “역사 및 지리학”의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 1872년에 독일에서 온 ‘어학 교수’ 헤르만 풍크(Hermann Karl Ludwig Funk, 1844∼1888)가 이 과목을 담당하고 독일어와 라틴어도 가르쳤다(入澤達吉, 1924: 25; 小関恒雄, 1983: 462-476).

21) 정규 강의 계획에 ‘의사(醫史)’가 포함된 이유 중 하나로, 후쿠자와가 미국에서 들여온 의학 서적 가운데 의사학 관련서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인명과 업적이 나열되고 연표 등이 수록된 얇은 책자였다고 한다(北里文太郞, 1942: 528).

22) 각 1기는 5개월 단위이다(北里文太郞, 1942: 525).

23) 정규 의사학 강의에 앞서 해부학 강의에서 해부학의 역사가 다루어진 것으로 보인다(坂井建雄, 2019: 551).

24) 일본 최초의 의사학 강사가 이마무라 료였다는 것은 통설과 다른데, 다음 절에서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25) ‘독일 의학’의 산실 구 도쿄대학 의학부에서 ‘한방 의사’에 의한 의사학 강의가 개강한 것으로부터 의사학 교육에 대한 대학 또는 의학부 측의 적극적인 의도를 읽어내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당시는 사실상 한방의학의 ‘폐지’를 의미하는 ‘의술개업시험’의 실시로 한방의학계가 크게 반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방의학계의 ‘원로’ 격인 이마무라를 강사로 초빙한 것은 정부의 회유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深川晨堂, 1934: 286). 그가 구 도쿄대학 의학부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의사학이 유일하였을 것이다. 다만 이후 학장 미야케 히즈(三宅秀, 1848∼1938)가 의사학 강의를 이어받아 전담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의사학 강의 개설에 호의적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6) ‘준강사(准講師)’로 4명이 있었으며, 이들은 조제학, 해부학, 현미경용법, 동식물학 등을 담당하였다(東京大学医学部, 1884: 194).

27) 이때 의사학 강의가 제외된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28) ‘별과 의학 과정’이 따로 개설되었다.

29) ‘[ ]’ 표시 내 두 과목의 강의는 격년제로 운영되었다. 『도쿄대학 의학부 일람 1882∼1883년』 도쿄대학 의학도서관 소장판에는 붉은색으로 추가되거나 삭제된 표시가 있는데, 이를 통하여 잘못 인쇄된 부분이 있거나 모든 강의가 꼭 과정표대로 운영되지는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의사’에는 따로 표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대로 이루어진 것 같다.

30) 주로 일본어 문헌을 대상으로 한다. 이를 언급한 거의 유일한 한국어 문헌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인문의학교실 70년(개정 증보판)』에도 다음과 같이 잘못된 서술이 등장한다. “일본의 대학에서 처음으로 의사학을 강의한 사람은 미야케 히이즈(三宅秀, 1848-1938)이다. 미야케가 東京大學 醫學部에서 醫史를 강의한 것은 1883년이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인문의학교실 및 동문회, 2018: 252).

31) 이후 후지카와는 다음과 같이 더욱 퇴보된 기술을 남겼다. “1887년, 선생[미야케 히즈]은 유럽에서 귀국하신 후 도쿄대학에서 의사(醫史)를 강술하셨다. 이는 실로 우리 제국대학에 의사학의 강의가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이마무라 료도 초빙되어 화한의사를 강의하였다. 아마도 선생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富士川游, 1942: 236).

32) 그 이후 미야케는 병리학 강의에서 물러나 주로 의사학과 재판의학을 강의하였다(福田雅代, 1985: 311).

33) 1888년 10월 1일, “별과생에게 의사를 개강함.” 1890년 9월 11일, “매주 목요일 의사를 강의함.” 1891년 1월 10일, “매주 토요일 2년생에게 의사를 강의함.” 1891년 4월 8일, “교과 변경에 따라 1년생에게 의사의 수업을 요하지 않음.” 1891년 9월 15일, “본 학년부터 병리학을 화목 양일, 의사를 토요일에 강의함.” 1892년 1월 12일, “매주 화목 양일에 병리학을, 토요일에 의사를 수업.” 1892년 3월 26일, “의사 강의를 종료함.” 1892년 4월 11일, “제3학기 시작됨. 월수금 병리, 목 의사.”

34) 사카이는 미야케의 의사학 강의가 “의과대학장 취임 후 중지”되었다고 기술하였지만, 실제 의사학 강의가 중지된 것(1895년 이전)은 의과대학장 취임(1896년)보다 앞선 일이었다. 다만 이러한 잘못된 기술이 이 두 가지 사건의 연관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카이는 이어서 “[ 그 후] 지금[1985년]까지도 도쿄대학에서는 정규 과목으로서 의사학 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1954년 도쿄대학 의학부에 의사학 강좌가 개강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日本医史学会, 1954b: 98).

35) 이마무라는 이미 사거한 뒤였고, 당시 일본에 의사학 전공자 혹은 전문가는 없었다.

36)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沢, 1723∼1803),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 등이 고즈카하라형장(小塚原刑場)에서 사형수의 해부를 견학하고 『해체신서(解体新書)』의 번역을 결의한 날(1771년 3월 4일)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37) 예컨대 1906년에 발간된 『중외의사신보』 620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등장한다. “독일국대학에서 의사학 강좌가 설치된 곳은 베를린, 뷔르츠부르크, 괴팅겐 등 2, 3의 대학에 불과하였지만, 작년 겨울학기부터 라이프치히대학에도 새로 의사학 강좌를 두고 닥터 주도프[Karl Sudhoff, 1853∼1938] 씨를 교수에 임명하였다”(中外医事新報社, 1906: 143-144).

38) 대규모 의학 학술행사에 의학사 전람회를 마련하는 것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도 일본의학회 총회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

39) 당시 교토제국대학에는 교토의과대학과 후쿠오카의과대학(福岡医科大学)이 설치되어 있었다.

40)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国大学) 의학부, 니가타의과대학(新潟医科大学) 등지에서도 특별강의나 강연의 형태로 의사학을 가르쳤다(赤松金芳, 1988: 324-325). 이러한 전국적인 강의는 그의 명성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전문 의사학 강사가 부족한 현실도 동시에 드러낸다.

41) 의사학에 대한 후지나미의 열의는 제자 윤일선(尹日善, 1896∼1987)에게도 영향을 주어 한국의 근대의사학 교육과 연구가 시작되는 데에 간접적으로 공헌하였다(李楑源, 2021: 209).

42) 당시 다쓰노와 오토리는 의학부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신진연구자였다.

43) 일본의사학회의 설립일은 전신인 사립장진의회가 발족한 1892년 3월 4일로, 1893년 7월 20일에 창립한 일본해부학회에 1년 이상 앞선다(日本医学会創立120周年記念事業記念誌委員会, 2022: 323-324).

44) 이는 1930년 4월 5일 오사카(大阪)에서 개최된 제8회 일본의학회 총회 석상에서 제9회 회두(會頭)에 1932년부터 일본의사학회 제2대 이사장을 맡고 있던 이리사와 다쓰키치(入沢達吉, 1865∼1938)가 추대된 것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해 5월 5일에는 후지카와 유, 후지나미 고이치 등이 간사로 촉탁되었고, 각 학회장 및 교섭단체 대표자 회의, 협의회, 간사회 등을 거쳐 영양학회, 일본민족위생학회, 일본내분비학회와 더불어 분과회 가입이 결정되었다(日本医学会, 1934: 7, 556-571). 일본의사학회는 현재도 일본의학회 138개 분과회 가운데 제1 분과회를 유지하고 있다.

45) 나가요는 당시 도쿄제국대학 약리학 조교수 아즈마 료타로(東龍太郎, 1893∼1983)가 의학부의 특별강의로 “역사, 의사(醫史), 의걸대열전(醫傑大列傳) 같은 것”을 제안한 것에 찬성하여 후지카와 유와의 회담을 기하기도 하였다(小高健, 2001: 516). 이러한 일화는 의사학에 대한 당대 의학 교육계의 긍정적인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46) 플렉스너 보고서(Flexner Report)의 영향이 다분히 드러난다.

47) 또한 같은 해 ‘의사학교실’도 등장한 듯 보였다. 『일본의적록(日本医籍録)』 1954년 판의 의육기관(醫育機關) 일람에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의사학교실’이 등재되어 있고, 1957년 3월에 발행된 『일본의사학잡지』에도 역시 오토리 란사부로의 소속이 게이오대학 의학부 ‘의사학 교실’로 되어 있다(医学公論社, 1954: 21; 大鳥蘭三郎, 1957: 214). 그러나 동 대학 ‘의사학교실’의 소속 교원이 ‘강사’만 2명(오토리와 다쓰노 가즈오)인 점, 그리고 이후 동 대학 측에서 다음과 같이 ‘교실’이 아니었다고 언급한 점을 통하여 ‘연구실’의 오기임을 알 수 있다. “의사학은 도서가 교재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므로 기타사토기념의학도서관 내 교재용 도서를 보관하는 일실에서, 교실이라는 명칭은 아니었지만 연구실로서 하나의 교육 단위에 해당하는 업무가 이루어지고 있다”[인용자 강조](慶応義塾大学医学部六十周年記念誌編集委員会, 1983: 318). 완전한 형태의 ‘교실’은 아닐지라도 당시 의사학 분야에서 하나의 독립된 조직으로 인정받으며 교육과 연구 활동을 수행하는 곳은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 의사학연구실이 유일하였다.

48) 종전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일본 의사학자의 활동은 비교적 빨리 재개되었다. 오토리 란사부로는 1945년 8월부터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의사학 강의를 시작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본관 회의실에서 후지카와 유 박사 기념강연회가 열리기도 하였다(日本医史学会総会百回記念誌編纂委員会, 2000: 100). 그러나 1954년이 되어서야 일본의사학회의 활동이 학회지의 복간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재개된 것은 한국전쟁 특수(特需) 등에 힘입은 경제 상황의 개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당시 일본의사학회 이사장 야마우치 고이치(山内孝一)는 그동안 학회지의 복간이 불가능했던 이유로 물자의 부족, 경제 상황의 악화, 학회 간부의 소개(疏開) 등을 꼽았다(山内孝一, 1954: 1). 같은 해 열린 제56회 일본의사학회 총회에는 3백 수십 명이 참석하며 성황을 이루었다(日本医史学会, 1954b: 105). 다만 이러한 성황이 오래 이어지지는 못하고 1950년대 후반에는 다소간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49) 이 ‘건의’에 다급한 문제의식은 드러나지만, 관계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비쳤는지는 의문이다. 고질적으로 의사학 강사가 부족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강좌 수가 적어서 전공학자가 충분한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소 난센스로 들린다.

50) 이러한 침체 국면에서 오가와 데이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일본의 의사학계의 현상을 우려하며 어떤 사람은 그 원인의 하나로 의사의 빈곤, 즉 일본의 의사가 경제적으로 힘든 입장에 있다는 것, 그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것도 분명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小川鼎三, 1962: 306). 그러나 나카가와는 그 원인이 내부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수년 전부터 일본에는 일종의 역사 붐이라 여겨질 정도로 역사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의학사 연구의 중핵이어야 할 기관지가 이렇게 다소 침체를 보이는 것은 의사학회의 방향에 다소간의 어긋남이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1960년 말 ‘새로운 의학사를’이라는 요청에 따라 우리 의학사연구회에 순식간에 500명이 넘는 회원이 모인 것이 의학사에의 관심도 아직 결코 저하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中川米造, 1962: 314).

51) 의학부가 기존의 ‘전문 과정’에 더하여 ‘진학 과정’까지 아우르게 되면서 교육 기간이 4년 이상에서 6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52) 1947년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교실이 탄생하여 김두종 주임교수가 취임한 것은 이보다 약 15년 앞선 일이었다.

53) 의사학을 비롯한 의료인문학 전반의 강의가 시행되는 사립 의학부/의과대학의 비율이 국공립에 비하여 2배 이상 높았다.

54) 표 3에서 제시된 의료인문학 세 분야는 기초의학이나 임상의학 영역에 속하지 않으므로 강의 교원의 임상의와 기초의학 종사자 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강의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55) “의학부 분쟁이 한창일 때 의학개론이나 의사학 강좌의 필요성이 다시 클로즈업되어 그 면에서는 실적도 있는 오사카대나 도쿄대에서는 상당한 확실성을 갖고 교실의 실현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결국 문부성에 인가받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長門谷洋治, 1995: 101).

56)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인식을 들 수 있다. “현대 의학 교육에는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부족하다. 의학의 역사 따위 몰라도 국가시험에 합격한다. 그래서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소박한 사상의 사람들이 슬프게도 적지 않다”(大村敏郎, 1989: 555). “일본인은 즉물적이고 현실주의 중시의 경향을 가진 국민이다. 따라서 의학 교육에서는 인격의 육성보다도 치료의 실제 면을 중시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왔다. 이 때문에 의사학 같은 인문학적인 학문은 중시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杉田暉道, 1999: 51).

57) 아마추어리즘을 띤다고 해서 연구 성과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상황은 의사학 연구가 곧바로 교육의 확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Table 1.
The Keio Igakusho Curriculum (revised in December 1876)
예과 3등 예과: 소독(素讀), 계고(稽古) 3시간 단어편(單語篇), 궁리초보(窮理初步), 문전(文典)
2등 예과: 강의 및 소독, 계고 3시간 박물학, 화학초보, 만방사(萬邦史)
1등 예과: 강의 및 암송, 계고 3시간 이학서(理學書), 화학서, 산학초보(算學初步)
본과 5등 본과: 강의 및 암송, 계고 3시간 해부학, 조직학, 건전학(健全學), 생리학, 실제산학
4등 본과: 강의 및 암송, 계고 3시간 약제학, 외과학, 산과학, 대수초보
3등 본과: 강의 및 암송, 계고 3시간 내과학, 임상의학, 병리학, 기하학
2등 본과: 강의, 계고 3시간 찰병학(察病學), 위생학, 정신생리
1등 본과: 강의, 계고 3시간 붕대학, 현미경학, 단송의학(斷訟醫學), 의사(醫史)

(北里文太郞, 1942: 525)

Table 2.
The Tokyo University Faculty of Medicine Curriculum (from December 1882 to November 1883)
5등 제1년 동기(冬期) 물리학(매주 6시간) 해부학(6) 화학(6) 해부 실지연습(4), 식물학 및 약용식물학(2)
하기(夏期) 해부학(10), 물리학(6), 화학(6), 식물학 및 약용식물학(2)
4등 제2년 동기 생리학(9), 해부 실지연습(12), 분석술(4), 동물학 및 비교해부학(4)
하기 생리학 및 태생학(12), 생리학 실지연습(6), 분석술(6), 조직학 현미경용법(5)
3등 제3년 동기 외과총론(4), 내과총론(4), 약물학 및 독물학(6), 내외과 임상강의(12), 처방학(2)
하기 외과총론(4), 외과기기 붕대학(2), 내외과 임상강의(12), 진단법(3), 병체해부학(3)
2등 제4년 동기 외과각론(2), 내과각론(3), 내과 임상강의(9), 외과 임상강의(6), 국처해부학(2), 안과학(2), [산과 혹은 부인과](2), 안과 임상강의(2)
하기 외과각론(2), 내과각론(3), 내과 임상강의(9), 외과 임상강의(6), 국처해부학(2), 안과학(2), [정신병학 또는 산과 모형연습](2), 안과 임상강의(2)
1등 제5년 동기 외과각론(2), 내과각론(3), 내과 임상강의(9), 외과 임상강의(6), 안과학(2), [산과 혹은 부인과](2), 안과 임상강의(2), 재판의학(2), 의사(1), 외과수술 실지연습
하기 외과각론(2), 내과각론(3), 내과 임상강의(9), 외과 임상강의(6), 안과학(2), [정신병학 혹은 산과 모형연습](2), 안과 임상강의(2), 위생학(2), 의사(1), 외과수술 실지연습

(東京大学医学部, 1883: 12)

Table 3.
Class hours, target grade, faculty affiliation and major in three fields of medical humanities (2020)
의학철학·의료윤리학 의료사회학·의료인류학 의학사
해당 수업의 총 수업 시간 1066시간 20분 213시간 5분 192시간 5분
수업 시간 수의 69대학 평균 (±표준편차) 15시간 27분 (±14시간 41분) 3시간 5분 (±9시간 26분) 2시간 47분 (±6시간 32분)
69대학 중 해당 수업이 존재하는 대학 수 62 16 29
1학년 44 (72%) 13 (81%) 25 (86%)
2학년 17 (28%) 3 (19%) 3 (10%)
3학년 19 (31%) 1 (6%) 1 (3%)
4학년 13 (21%) 0 (0%) 4 (14%)
교원 소속이 분명한 수업의 총 수업 시간 1030시간 8분 213시간 5분 189시간 5분
자 대학 883시간 1분 (86%) 152시간 32분 (72%) 145시간 53분 (77%)
외부 147시간 7분 (14%) 60시간 33분 (28%) 43시간 13분 (23%)
교원 전공이 분명한 수업의 총 수업 시간 1027시간 38분 213시간 5분 189시간 5분
임상의 271시간 59분 (27%) 44시간 18분 (22%) 57시간 16분 (30%)
기초의학 80시간 7분 (8%) 0분 (0%) 20시간 53분 (11%)
사회의학 47시간 12분 (5%) 0분 (0%) 2시간 29분 (1%)
의학교육 93시간 31분 (9%) 22시간 45분 (11%) 11시간 58분 (6%)
타 의료계 학부 14시간 34분 (1%) 4시간 5분 (2%) 0분 (0%)
인문계 연구자 482시간 7분 (47%) 139시간 17분 (65%) 71시간 30분 (38%)
기타 38시간 9분 (4%) 2시간 40분 (1%) 25시간 (13%)

(外山尚吾 외, 2020: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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