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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2(2); 2023 > Article
1920-30년대 중국의 두창 방역과 공공의료 : 상하이와 베이징의 사례를 중심으로†

Abstract

Beijing and Shanghai, representative modern cities in China, witnessed the development of various urban infrastructures and quarantine systems in the 1920s and 1930s. Both cities established Health Demonstration Stations in the 1930s, as part of their implementation of modern health administration. This foundation played a pivotal role for making health administration more practical. Huang Zi-fang (1899-1940) and Hu Hung-ji (1894-1932), the inaugural directors of the health bureau in the respective cities, were both graduates of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School of Public Health in the United States. They shared a similar view of public health. Active exchanges occurred between the heads of the health administration in the two cities who were the leading forces in the health reform, encompassing various health experiments including the Health Demonstration Station.
During the 1930s in China, state medicine gained prominence as the most ideal medical model for constructing a modern state. As such, the quarantine activities they promoted were also considered the most ideal model. The public health care centered on Health Demonstration Stations in the 1920s and 1930s that developed in large Chinese cities such as Beijing and Shanghai pursued similar goals by strengthening quarantine administration through free medical treatment and modern spatial control. Nonetheless, each city exhibited differences in terms of the subjects and targets of quarantine, as well as the primary bases of quarantine, which were either Health Demonstration Stations or hospitals.
Both municipal governments and the civilian sector led the sanitary infrastructure development. While Shanghai showed stronger development in terms of the number of vaccinations, Shanghai’s dualized quarantine system did not necessarily create a better health environment than Beijing in terms of spatial control.
In the 1940s, the Japanese occupation government implemented measures to inherit and further develop existing health administrations in Beijing and Shanghai. Existing international settlements were incorporated into the Japanese occupation government, and the occupation government pursued homogenization of urban space and tried to maintain the existing urban policy as much as possible to preserve the status quo. However, the intensification of the Anti-Japanese War and the Chinese Civil War brought an end to the health experiment centered around the Health Demonstration Station in China in the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1. 머리말

중국 전통사회에서 감염병 유행은 중앙정부의 관할이라기보다는 감염병 유행지의 지역사회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영역이었다. 특히 명청시기 강남에서는 선당(善堂)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의 지방유력자가 주도하는 방역활동이 전개되었다(Leung, 1987). 예를 들어, 강남에서 두창(痘瘡)이 유행했을 때, 지역사회의 우선적인 조치는 감염자를 격리하거나 감염지역에서 도피하는 것이었고, 지방유력자들은 사재를 출연하여 자선과 구제사업 등을 통해 지역사회의 감염확산에 대응하고자 했다(余新忠, 2014).
대부분의 감염병 유행에 대해서 지역사회가 주도적으로 대처했던 것과 달리, 두창 유행에 대해서만큼은 중국 황실이 전면적으로 대응해 나갔다. 특히 입관(入關) 전부터 청조 황실은 두창으로 인해 심대한 타격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北京) 점령 이후 수도 인근에 피두소(避痘所)를 설치하고 두창 조사체계를 확립하는 등 두창 방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Chang, 2002). 청조가 수도인 베이징에서 두창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두창의 확산 속도와 치명성 때문이었다. 청조는 두창의 확산을 막기 위해 격리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정치·군사·외교적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두창의 유행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이처럼 두창 유행에 대해 청조는 매우 예민하게 대응했으며, 수도를 중심으로 두창 방역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고 있었다.
청조가 두창을 막기 위해 피두소와 같은 격리시설을 운영했지만, 이 같은 방안으로 두창의 유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두창은 언제 어디서든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만 두창은 한 번 걸리면 재발하지 않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청조는 면역을 이용한 예방법에 주목했다. 바로 사람의 진성 두묘를 사용하여 면역에 이르게 하는 인두법(人痘法)이었다. 인두법은 이미 송대에 개발되었으나, 실제로는 명대 이후 상용화되었다. 1742년 청조는 『의종금감(醫宗金鑒)』 등의 발간을 지원함으로써 인두법의 표준적인 지식의 개발과 확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세기 중반 인두법의 정착으로 중국사회는 두창의 유행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확보했으나, 인두법은 사람의 진성 두묘를 사용하는 만큼,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두창을 확산시킬 수도 있었다. 인두법은 두묘의 채취, 숙성, 보관, 접종 등 고도의 임상 기술이 수반되어야만 면역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두법의 성공적 보급과 확산에는 시술자의 임상 술기 수준이나 지역사회의 상황이 크게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신규환, 2022a: 275-277). 19세기에 들어서자 인두법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서양의 우두법이 등장하였다. 19세기 초에 중국에 왕래하던 외국인 상인과 선교사 등이 마카오(澳門),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제너의 우두법을 소개하였고, 우두법은 기존의 인두법과 경쟁하면서 두창을 억제하는 데 기여하였다. 1860년대부터는 강남 각지의 지방관들이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여 무료로 우두 접종을 실시하기도했다(余新忠, 2014: 208-209).
마카오는 우두법 도입에 있어 중요한 시작점이었지만, 우두법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상하이였다. 상하이는 개항장으로서 선진적인 방역정책이 전개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또한 상하이는 19세기 후반 조계(租界)와 화계(華界)로 분리되면서 조계당국, 중국정부, 민간 사이에서 방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반면 베이징은 청조가 일찍부터 두창 방역의 전초기지로 삼아 두창 방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시정부의 지원 속에서 최신의 방역행정이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1920-30년대 상하이와 베이징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 지역을 통틀어 가장 선진적인 공공의료 시스템이 작동하던 곳 중 하나였다(신규환, 2022b: 625-627).
두창 방역은 청조 이래의 국가 방역이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지만(Chang, 2002; 邱仲麟, 2006), 최근에는 상하이와 베이징과 같은 개별 도시의 방역행정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劉岸冰, 2006; 福士由紀, 2015; 조정은, 2020; 신규환, 2006; 李自典, 2014; (신규환, 2021). 그러나 두 도시의 방역 활동이 어떠한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비교·분석은 이루어진 바 없었다. 특히 1920-30년대 두 도시는 ‘국가의료(state medicine)’ 주창자들의 활동 무대로서 “국가 또는 사회가 공적 재정을 바탕으로 의료에 관한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여 국민에게 보편적인 의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의료’에 관한 이념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방역이나 도시 관리는 두 도시에서 매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우두법이라는 효과적인 예방법이 등장하면서 우두 접종 양상에 따라 방역 성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따라서 두창 방역은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실행된 공공의료의 이념과 실제를 비교·평가할 수 있는 핵심적인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두창 유행에 대해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방역활동이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볼 것이고, 이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선진적인 공공의료의 구체상을 비교·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연구는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서 주권 국가의 근대적 방역체계가 수립되는 사례를 제공함으로써 선진적 공공의료의 수립이 근대적 도시건설과 도시민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구체적 사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2. 상하이의 방역행정과 위생사무소

1) 공공조계의 방역행정

상하이의 근대적 방역행정은 조계(租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 이래로 상하이가 개항되고, 영국영사관과 청조의 지방관 사이에 제1차 토지장정(土地章程)이 반포되어 1845년 상하이에 영국 조계가 설치되었다. 그 후 1848년에는 미국 조계가, 1849년에는 프랑스 조계가 성립되었으며, 1863년에는 영미조계가 합쳐져 공공조계(公共租界)가 되었다. 1854년 7월, 공공조계에 최고 시정기구인 공부국(工部局, Shanghai Municipal Council)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상하이 사회는 외국인이 관리하는 조계(租界)와 중국인이 관리하는 화계(華界)로 분할되어 있었고, 공공조계 공부국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두창의 유행에 대비하였다. 1868년 에드워드 핸더슨(Edward Henderson)이 공공조계 공부국 초대 의관으로 부임하면서 우두 접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1870년 공부국은 공공조계 내에서 인두법을 금지시키고, 무료 우두 접종을 확대해 나갔다. 1898년 공부국은 위생처를 설치하여 위생행정을 전담하게 하였으며, 동구, 서구, 남구, 중구를 총 14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위생분처(衛生分處, Branch Health Office)를 설립하여 사망원인 조사, 감염병 관리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劉岸冰, 2006). 초대 위생처 처장으로 스탠리(Authur Stanley, 재임기간 1898-1922)가 재직하면서 행정, 의원, 실험실, 환경위생 등으로 분장하여 업무를 진행하였고, 관련 인원은 100명이 넘었다.
1920년대 이후 공부국 위생행정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위생처의 활동 영역이 단순히 환경위생의 관리나 감염병 관리에 한정되지 않고, 의학지식과 술기를 활용하여 조계 내의 주민들의 위생과 건강 증진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들어서서 강제접종 시스템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정기검진과 우두접종을 받아야만 했다(Henriot, 1993: 203-210). 특히 14개의 위생분처를 중심으로 위생행정을 강화해 나갔다. 위생분처 중심의 위생행정은 국민에게 보편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 19세기 말 영국에서 등장한 국가의료의 이념에 기초한 것이었다(Nakajima, 2018: 87). 1920-40년대에 위생처 처장으로 재직했던 조단(J. H. Jordan, 재임기간 1926-1943)은 1930년대에 위생처 산하에 식품위생부, 약품부, 구호차무처(救護車務處), 소독처, 공공시험소, 출판부 등을 증설하고, 의원, 요양원, 화학실험실, 화장장 등 부속시설도 설치하였다. 공공의료의 확산에 따라, 위생처 산하 직원은 730명 내외에 이르게 되었다. 14개의 위생구는 1942년까지 총 17개의 위생구로 확대되었다. 1943년 8월, 왕징웨이(汪精衛: 1883-1944) 정권이 공공조계를 회수함에 따라, 공부국 위생처는 상하이특별시정부 제일구공서위생처(第一區公署衛生處)로 개편되었다(張明島·邵浩奇, 1998: 534).
1870년부터 1930년까지 공공조계의 중국인 인구는 13배, 외국인은 21배가 증가하여, 1870년 7.6만 명 정도였던 공공조계 인구가 1930년에는 60년 만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인구 증가에 따라 주거환경은 더 열악해졌고, 두창 등 급성 감염병의 위협은 더 증가하였다. 1890년대에 두창으로 인한 중국인 사망자는 최대 300여 명, 외국인 사망자는 20여 명까지 치솟기도 했지만, 19세기 후반기 동안 두창으로 인한 사망자는 대체로 중국인이 100명 내외, 외국인이 10명 내외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상하이의 중국인 사망자가 연간 최대 88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두창을 충분히 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정 당국으로서도 이에 대한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했다(上海公共租界工部局, 1930: 115; 조정은, 2020: 128-129). 1902년, 1904년, 1907년 각각 434명, 759명, 884명의 두창 사망자가 발생했고, 민국시기에도 상하이에서 두창 유행은 빈번해서 1926-1949년까지 23년간 6차례의 대유행이 발생하기도 했다(上海通志館, 2003). 20세기 전반까지 두창은 상하이 사회가 우두 접종을 통해 감염병을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질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협적인 질병으로 남아 있었다.
상하이 공공조계의 사망통계에 따르면, 1870-1940년까지 외국인 사망자 중 감염병에 의한 사망 비율은 평균 31.43%에 이른다. 이 수치는 민국시기 강남지역 중국인의 감염병 사망 비율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다(李玉尙, 2020). 외국인 감염병 사망자의 통계 수치가 낮지 않았다는 것이 외국인들의 주거 및 생활 환경이 절대적으로 열악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하이 공공조계 내 외국인의 위생 상황은 비교적 우수한 편이었다. 조계 내에 외국인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시설이 많았고, 백신 접종이나 방역 조치 역시 최신식이었다. 반면 공공조계 내 중국인 감염병 환자는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로 인한 사망자도 많았다. 중국인의 감염병 사망률이 외국인보다 낮게 나오는 것은 불완전한 통계로 인한 것이다. 예를 들어 1926-1940년까지 상하이 중국인의 감염병 사망 비율은 전쟁 시기 몇 해만 제외하면 평균 20%대를 유지하였다(李玉尙, 2020: 42). 그러나 중국인의 주거환경이나 위생인프라 등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이보다는 훨씬 열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공조계 위생행정의 핵심은 위생처(衛生處)와 위생분처(衛生分處)의 운영에 있었다. 위생분처는 일종의 위생구사무소(衛生區事務所, Health Demonstration Station)를 지칭하는 것인데, 위생분처는 각 지역 위생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지역센터로서 생명통계의 작성, 사망원인 조사, 감염병 관리, 각종 예방접종 사무, 식품 및 음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기존 연구에서 공공조계 위생분처의 역할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1930년대 공부국 위생처는 공공조계를 16개 구역으로 나누었지만, 실제로는 14개의 위생분처를 운영하고 있었다. 1929년 공공조계에 거주하는 주민은 855,260명이었고, 그 중 중국인이 830,760명에 달했다. 1929년 14개의 위생분처를 포함한 동, 북, 서, 중앙지구에서 각각 20,504건, 16,306건, 13,446건, 7,958건 등 총 58,213건의 무료 우두 접종을 실시했으며, 위생처가 직접 주관한 무료 우두 접종까지 포함하면 72,790건이다.1) 이것은 1929년 11,155건에 비하면 전년 대비 5배 이상 늘어난 수치였다.2) 당연하게도 접종의 75% 이상이 영유아에게 집중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 많은 접종이 이루어졌다. 1937년 우두 접종은 432,454건에 달했다(Shanghai Municipal Council, 1938: 175)3). 1929년 대비 우두 접종이 6배 가량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일본점령기에도 공공조계의 우두 접종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1942년 우두 접종은 559,613건에 달했다(Shanghai Municipal Council, 1943: 73)4). 1910년대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공공조계 내에서 두창 사망자수가 200명 내외로 억제된 것은 공공조계 당국이 우두접종을 점증적으로 강화했던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공부국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두창 유행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1843년 상하이에서 윌리엄 록하트(William Lockhart)는 인제의원(仁濟醫院)을 설립하고, 설립 초부터 우두 접종을 시작했다. 공공조계 내에 위치했던 인제의원은 공부국의 지원을 받아 매년 수천 건의 우두 접종을 실시하였다. 1850년에는 화계 내의 성황묘에 인제의원 분원이 설치되면서 화계의 우두 접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화계의 우두 접종은 록하트의 제자인 황춘푸(黃春甫)가 1854년부터 1897년까지 우두 접종을 주도하였다. 인제의원 본원과 분원은 록하트가 운영하는 민간병원이었지만, 사실상 공부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무료 진료와 무료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 사회의 환영을 받았다. 공공조계 공부국 자료에 따르면, 화계에 위치한 인제의원 분원을 중심으로 1856년부터 1899년까지 매해 평균 4,483회에 이르는 우두 접종을 실시한 바 있다(Municipal Council Shanghai, 1899: 108; Elliston, 1941: 34; 조정은, 2020: 133). 1897년 황춘푸의 은퇴 이후, 인제의원 분원의 접종 건수는 크게 극감하였고, 대신 화계의 동인의원(同仁醫院)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19세기 후반까지 상하이 화계에서는 민간의 우두 접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민간이 우두 접종을 주도하고 조계 당국이 우두 백신을 지원하는 형태로 관민협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조계의 방역행정에 대헤서는 자료나 연구 부족으로 구체적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프랑스 조계 당국인 공동국(公董局, French Municipal Council)에서도 1896년 위생대(衛生隊)를 조직하여 위생업무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여름에 일시적으로 운영되었을 뿐이었다. 1911년 위생처(衛生處)가 설립되었고, 1930년 공공위생구제처(公共衛生救濟處)가 설치되어 프랑스 조계 지역의 위생행정을 전담하였다. 1935년에는 공공위생구제처 산하 위생감독과, 방역과, 의료구제과 3과 체제에서 위생과, 시의과(施醫科), 시종과(施種科), 화험과(化驗科), 방역과 5과 직원 9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3년에는 직원이 152명으로 증원되었으나 왕징웨이 정권이 성립됨에 따라 프랑스 조계가 회수되었고, 공공위생구제처는 제8구 공서위생처(公署衛生處)로 개편되었다(張明島·邵浩奇, 1988: 536).
상하이 공공조계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위생행정 조직을 갖추고 각종 감염병의 유행에 대비하였다. 특히 두창의 유행에 대비하여 우두 접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민간의 우두 접종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상하이 공공조계의 선진적인 방역시스템이 화계 또는 베이징의 방역행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20세기 초까지 상하이 화계와 베이징에서는 근대적인 방역행정을 전개할 수 있는 인적·물적 토대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1920-30년대 상하이 공공조계의 방역행정은 양적·질적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더불어 같은 시기 상하이와 베이징에는 시정부가 들어서면서 화계와 베이징의 방역행정 역시 근대적 공공의료를 실시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2) 화계 위생사무소의 설치와 방역활동

상하이는 조계와 화계가 분리되어 있었고, 감염병 관리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중국인이 밀집한 화계는 도로, 주거, 상하수도 등 도시 인프라 등에서 조계지역보다 열악한 상황이었다. 화계는 1926년 송부(淞埠) 위생국 성립 전까지는 통일적인 위생행정이 존재하지 않았고, 남시(南市), 갑북(閘北), 포동(浦東), 오송(吳淞) 등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위생행정을 운용했다. 1927년 7월, 상하이 특별시정부 위생국(초대 국장 후훙지 胡鴻基: 1894-1932, 재임기간 1927-1932)이 성립됨에 따라, 화계의 위생행정이 통일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하였다. 위생국은 3과로 운영되었고, 의약관리, 감염병관리, 위생교육, 생명통계, 도로청결, 육류검사, 방역 등을 담당했다. 화계 각 구는 다섯 개의 위생사무소가 설치되어, 각 구의 방역사무 및 위생사무를 담당하였다. 호남위생사무소(滬南衛生事務所), 호북위생사무소(滬北衛生事務所), 오송위생사무소(吳淞衛生事務所), 강만위생사무소(江灣衛生事務所), 고교위생사무소(高橋衛生事務所) 등이 그것이다. 민간에서도 여름에 감염병 유행시에는 20여 개의 감염병의원 [時疫醫院]과 각종 위생조직을 설치하여, 예방접종과 순회진료 등을 지원하였고, 점차 상설화되기도 했다(張根福·周梁羊子, 2018: 132).
위생사무소가 가장 먼저 설치된 곳은 인구 4만여 명이 거주하는 오송구(吳淞區)였다. 오송구는 오송철로가 관통하는 지역으로 교통상의 입지 여건으로 날로 발전하는 지역이었지만, 위생 상황은 낙후한 편이었다. 이 지역은 남쪽의 온조병(薀藻浜), 서북쪽의 오송 철로도방(鐵路道旁) 등 오송구, 은행구(殷行區), 포송구(蒲淞區) 등을 포괄하였으며, 시정부는 이곳에 1928년 가을 오송위생공소(吳淞衛生公所)를 설치한 데 이어, 1929년 1월에 오송위생모범구(吳淞衛生模範區)를 설치했다.
오송위생모범구사무소(이하 오송구위생사무소)에는 총무, 검사, 보건, 의무 등 4개과를 설치하고, 총무과에서 생명통계를 작성하고, 검사과에서 청결검사 및 공공위생사무를 담당하였으며, 보건과에서 위생선전, 학교위생, 공장위생, 아동보육, 공공위생 및 가정위생, 감염병 예방 등을 지도하였고, 의무과에서 일반 환자진료, 식품사무, 화학실험 등을 관리하였다. 특히 오송구위생사무소의 환자진료는 일반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는데, 비싼 진료비 때문에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없는 빈곤층 주민들은 대학교수들의 무료 진료와 간호사들의 가정방문을 크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전임의사 2명, 간호사 7명 등 위생구사무소의 직원 규모가 매우 적어서, 생명통계, 감염병관리, 환경위생, 위생교육 등 각 방면에서 지속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더욱이 재정과 인력 등의 부족으로 오송구위생사무소는 1931년 3월부터는 외래 진료를 전면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吳淞衛生模範區辦事處, 1931: 1-4).
더욱이 1932년 1·28 제1차 상하이사변(이른바 一二八淞滬抗戰)으로 오송지구는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1933년 7월 오송구위생사무소가 재개되었고, 상하이시 위생국과 국립 동제대학(同濟大學)이 위생구사무소를 공동 주관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오송구위생사무소의 재개로 위생행정 각 분야에서 일부 성적을 내기도 했지만, 1937년 8·13 제2차 상하이사변(이른바 八一三淞滬抗戰)의 발생으로 오송구는 또 다시 전쟁터로 변했다(周梁羊子, 2017: 50-51).
상대적으로 화계의 위생사무소 중에서는 고교구위생사무소(高橋區衛生事務所)가 성과를 내고 있었다. 고교구(高橋區)는 상하이시에 속한 지구이긴 하지만, 인구 3만 9천여 명으로 사실상 농촌지역에 해당된다. 1930년 고교향촌위생모범구 판사처(高橋鄕村衛生模範區 辦事處)가 설립되었고, 1932년 6월 국립상하이의학원 위생과가 참여함에 따라 고교구위생사무소로 개편되었다. 고교구 위생사무소의 소장은 국립상하이의학원 위생과 주임교수가 담당하였고, 그밖에 4명의 의사와 10여 명의 간호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고교구위생사무소 역시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국립상하이의학원 학생들과 홍십자회의원 간호사들의 실습장으로 활용되었다(周梁羊子, 2017: 52-57).
고교위생사무소는 4개과로 구성되었으며, 제1과는 문서, 회계, 의약관리, 위생교육 등, 제2과는 도로청결, 음료 및 분뇨처리, 식품위생 등, 제3과는 부녀위생, 학교위생, 공장위생 등, 제4과는 생명통계, 방역, 진료 등을 각각 담당하였다. 제4과는 방역활동 중 1932년에 5,674명, 1933년 8,343명에 대해 우두접종을 실시하였다(上海市衛生局高橋衛生事務所, 1935: 30). 고교위생사무소는 설립 이래, 매년 적지 않은 성과를 냈지만, 인력이나 재정 방면의 부족으로 그 성과의 한계는 피할 수 없었다.
화계에 존재한 다섯 개의 위생구사무소는 1930년대 이전에는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1934년 2월에는 호남구위생사무소(滬南區衛生事務所)가 설치되었고, 상하이 인구의 1/5인 인구 70만이 거주하는 갑북(閘北) 지역에 설치된 호북구위생사무소(滬北區衛生事務所)의 경우 1937년 7월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위생사무소의 설치로 방역행정에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위생사무소 역시 인력과 재정 등 방역행정의 진전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상하이 사회에서 급성감염병이 어느 정도 억제된 것은 근대적 위생행정이 시작되면서 위생사무소가 활성화된 것과 무관치 않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점령정부는 기존 위생사무소를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성 감염병의 폭발은 피할 수 없었다. <표 5>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중에서도 두창, 콜레라, 장티푸스 등은 가장 폭발력이 강했고, 언제든지 다수의 사망자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그나마 상하이에서 이질, 디프테리아, 결핵 등의 유행 상황은 다른 질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3. 베이징의 방역행정과 국가의료

청조가 신정(新政)을 시작하면서 1905년 순경부(巡警部)가 설립되고, 순경부 휘하에 위생사(衛生司)가 설치되어 경찰이 종두 업무를 담당하였다. 1906년에는 순경부가 민정부(民政府)로 개조되고, 1908년 <순경도관제(巡警道官制)>의 반포로 각성에 순경도(巡警道)가 설치되어 위생행정을 담당하였다. 청조는 우두 접종을 통해 두창을 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두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1910년 민정부는 『관리종두규칙(管理種痘規則)』을 반포하여, 경찰관서의 심의 하에 우두 접종이 이루어지도록 규정하였고, 이를 어길시 5일 이상 10일 이하의 구류나 5위안 이상 10위안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田濤·郭成偉 整理, 1996: 97-99). 20세기 초까지 중국 정부가 우두 접종을 주도하는 모습은 기본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민국 초기 중앙정부의 약체화로 인해 중앙과 지방에서 강력한 방역행정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베이징에서 위생국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인 위생행정은 1928년 새로운 시 정부가 성립한 이후의 일이었다. 1928년 난징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 하에서 베이징은 수도의 지위를 잃게 되면서 베이핑(北平)으로 변경되었고, 베이핑시 정부(北平市政府)의 초기 위생행정을 지휘했던 황쯔팡(黃子方: 1899-1940)은 “개인의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예방 및 치료의학의 모든 가능성을 공동체의 모든 성원에게 부여하는 것, 즉 국가가 사회적 예방의학과 임상적 치료의학, 의료인, 모든 형태의 설비 제공 등 모든 의료 업무에 대해 책임지는” ‘국가의료’를 표방함으로써 근대적 국가건설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국가의료를 실천하기 위한 중심은 위생국이었지만, 실제적인 위생 활동은 지역 거점인 위생구사무소(衛生區事務所)를 통해 이루어졌다. 위생구사무소는 1925년 이미 내일구(內一區)에 설치되어 근대적 위생행정을 위한 실험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실험은 베이징협화의학원(北京協和醫學院) 공공위생학 교실 교수인 존그랜트(John B. Grant: 1890-1962)와 황쯔팡 등이 주도하였다(신규환, 2020: 88-105).
베이징의 도시 공간은 과거 황제가 거주했던 쯔진청(紫禁城)인 황성(皇城) 주위에 귀족과 고위 관료들이 거주했던 내성구(內城區), 일반 서민이 거주하는 외성구(外城區), 성 밖에서 농민들이 거주하는 교구(郊區)로 구성된다. 베이징의 위생실험은 내성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25년 내일구에 제일위생구사무소가 설치된 이래로, 1933년 12월, 내이구에 제이위생구사무소, 1934년 12월, 내삼구에 제삼위생구사무소, 1935년 9월, 내사구에 제사위생구사무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외성구와 교구에는 위생구사무소가 설치되지 않았지만, 외성구의 경우는 1933년 설치된 시립의원이 사실상 위생구사무소의 역할을 대신하였고, 중일전쟁 이후 베이징을 점령한 일본 점령당국은 교구의 동서남북 사교의원(四郊醫院)을 위생구사무소로 전환하기도 했다(신규환, 2021).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베이징의 방역행정은 위생구사무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두창 관리는 위생구사무소를 중심으로 다핵화된 ‘지역 거점 방역’ 체계를 구축하였다. 시정부는 위생구사무소, 구공소, 구경찰서[區署], 10여 개의 방공소(坊公所) 등에 종두 지점을 설치하고, 이 지점에서 한날 한시에 동시에 우두 접종을 실시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우두 접종을 실시하게 되면, 정해진 지역 내에서 이동하는 인구들에 대해서는 미접종자를 발견해 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공간통제 방식은 일시에 제한된 공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우두 접종의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고, 그 효과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한계 역시도 명확했다. 일시에 주요 거점에서 우두 접종을 실시하더라도 거주민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거나 이동하지 않으면 접종 대상자를 파악할 수 없었고, 특히 영유아의 경우 부모가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1932년과 1936년 베이징에서 두창이 크게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거점 중심의 방역체계가 가진 한계 때문이었다. 실제로 제일구 위생구사무소는 영아들의 접종 확대를 위해 1937년 중반까지 매해 세 차례의 통지문을 보냈지만, 접종률은 40-50%에 그쳤다.
1936년 내일구에서 112명의 환자와 4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치명률은 39.3%였다. 시 전체로는 1,040명의 환자와 84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치명률은 81.4%에 이르렀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실제로 1936년 내일구에서 두창으로 사망한 사람은 44명이었는데, 이 중 10세 미만이 37명에 달했다. 아동과 영아의 사망자 비중이 84.1%에 이르렀다. 결국 1936년의 두창 환자 및 사망자의 폭증 사례는 기존의 우두접종 방식과 방역대책만으로는 두창의 유행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시정부로서는 기존의 방역대책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비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위생구사무소가 고안한 새로운 방법은 위생 요원을 각 가정에 파견하여 미접종자에 대해서 우두 접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방문 접종’을 통한 일종의 호구 검역을 실시한 것이었다. 1937년 7월부터 1938년 4월까지 내일구 지역에서 출생한 2,404명의 등록 신생아 중 이미 우두 접종을 받은 영아는 1,428명으로 영아 접종률은 59.4%였다. 1938년 4월부터 6월까지 제일위생구사무소의 가정방문을 통해 우두 접종을 받은 영아는 1,898명으로 영아 접종률을 79.0%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호구 검역 이외에도 접종자를 확대하고 접종 횟수를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1937년 15만명, 1939년 17만명 등 시정부는 우두 접종자 수를 계속해서 확대해 나갔다. 이처럼 베이징에서는 기존의 지역 거점 방역에서 방문 접종으로 전환함으로써 일본점령기와 국공내전기 동안 두창을 상당 부분 억제할 수 있었다.
1920-40년대 베이징에서 위생구사무소 중심의 방역행정이 전개되었다고는 하지만, 주로 내성구 중심이었고, 특히 교구는 사실상 농촌과 같은 곳이어서 시정부의 방역행정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에 시정부는 1934년 1월 자치사무감리처(自治事務監理處)를 설치하고, 베이핑시 전체에 15개의 자치사무구분소(自治事務區分所)를 설치하였다. 자치사무구분소는 치안, 교육, 위생, 풍속, 생활개선, 사회조사 등 대부분의 시정업무를 대행하였고, 시정권력이 미치지 않는 교구에서는 자치사무구분소가 방역행정의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특히 시정부는 교구에서 보갑제도(保甲制度)를 부활시켜 치안 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위생 업무도 보갑장(保甲長)에게 위임하고자 했다(北平市政府, 1934: 1-5).
난징국민정부도 기층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보갑제도의 부활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1934년 11월 행정원 명령을 통해 전국 성시(省市)에 보갑제의 부활을 지시했다. 베이핑에서 보갑제도는 농촌 지역의 치안유지와 각종 자치업무를 위임하기 위한 것이었고, 효율적인 보갑제도의 운용을 위해서는 촌중의 유력자나 권세가가 보갑장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유력자와 권세가들은 지역사회에서 자선과 구제활동을 주도하고 있었고, 지역사회의 정치적·사회적 자원을 장악하고 있어서, 그들의 말 한마디면 안되는 일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시정 권력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보갑장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베이징의 교구에서 보갑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은 중농층들이었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과 빈번하게 교류했지만, 일체의 권위는 없었다. 시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중농 위주의 보갑장에게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시정부는 구질서를 대표했던 구식산파나 음양생이 담당했던 출생 및 사망의례까지도 보갑장에게 넘겨주어 출생 및 사망관리를 담당하게 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실패했다. 광대한 농촌 지역에서 활동하는 구세력들을 시정부가 일일이 통제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신규환, 2020: 186-1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정부는 보갑제도의 부활을 통해 지역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했고, 특히 교구에서 가장 중요한 위생업무는 출생 및 사망관리 이외에 감염병 관리였다. 그 중에서도 두창은 광대한 교구 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대표적인 감염병이었다. 두창은 유아들에게 가장 치명적이었고, 교구 주민들도 우두 접종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크지 않았다. 보갑장들이 출생 및 사망관리 분야에서는 큰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우두 접종에서는 나름 연착륙을 시도할 수 있었다.
교구는 시내와 달리 전통적인 인두법을 통해 종두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두창이 크게 확산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보갑장은 우두 접종에 필요한 선전 활동을 주도하고 아동 접종의 신청을 접수를 담당했다. 우두 접종 인력과 약품은 시정부 위생국의 지원을 받았다.5) 남교의 교구민은 대략 10만 명 내외인데, 이 중에서 우두 접종자가 몇 명인지 정확한 통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1930년대 중반 이전까지 교구 사회에는 인두법이 여전히 유행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시정부와 자치조직이 결합되어 우두 접종이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4. 상하이와 베이징의 두창 방역 비교

19세가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의 방역행정은 상하이의 조계 당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계의 방역행정이 중국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상하이의 화계나 베이징 등에서 근대적인 위생행정을 위한 인적·물적 토대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1920년대 베이징에서 근대적 위생행정을 위한 위생실험이 본격화되면서 ‘국가의료’를 주창한 청년 의사들에 의해 근대적 위생행정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베이징의 위생실험에 참여했던 청년 의사들은 상하이의 위생행정에 진출함에 따라 위생구사무소를 통해 공공의료를 실천하고자 하였고, 이것은 베이징을 넘어서서 타 지역으로 확장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1920년대 상하이 공공조계 위생처 등지에서 활약했던 위생관료들은 대부분 국가의료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Nakajima, 2018: 86-87). 더욱이 베이징에서 위생실험에 참여했던 청년 의사들이 상하이시정부의 위생관료로 활동하면서 국가의료에 대한 공감대는 더욱 확장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국가권력이 방역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공간통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위생구사무소는 그러한 공간통제의 핵심센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베이징과 상하이는 도시공간의 성격이 달랐다. 베이징은 내성구, 외성구, 교구 등으로 구성되는데, 내성구는 전통적으로 고위관료나 귀족들이 사는 공간이었고, 외성구는 일반 서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교구는 사실상 농촌과 다름없었다. 1920-30년대 베이징에서 위생구사무소는 내성구에만 설치되었다. 위생구사무소에 상주하는 의료인력이 각구(各區) 곳곳에 배치되어 각구 주민에 대한 출생 및 사망관리, 감염병 관리 등을 시행하였다. 위생구사무소가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지만, 위생구사무소가 설치되지 못한 곳에서는 이러한 의료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외성구와 교구에 위생구사무소의 역할을 대신한 시립의원이나 사교의원이 존재했지만, 그것들이 담당해야 하는 공간 범위가 내성구에 비해 지나치게 넓었다. 이러한 도시공간의 공간적 분절성으로 인해 내성구, 외성구, 교구의 의료환경과 공공의료 상황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6)
상하이는 베이징과 또 다른 도시공간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상하이는 공공조계, 프랑스조계, 화계로 분할되어 있었던 만큼 공간적 분절성은 베이징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19세기 후반 조계지역에서는 근대적 방역행정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화계는 20세기 초까지 방역행정이 사실상 방치되어 있었다. 공간통제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상하이의 공간적 분절성은 방역 효과에 치명상을 안겨줄 가능성이 높았다. 1927년 7월, 상하이특별시정부가 수립되고, 시정부 산하에 위생국이 설치되면서 화계 각 구에 위생사무소가 설치되었고, 위생사무소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위생행정이 본격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화계는 상하이 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고, 위생사무소의 활동 역시 1930년대 이전에는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화계 지역은 항일전쟁 전후 폐허가 되다시피 해서 방역행정에서 체계적인 성과를 도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화계의 우두접종만이 1927-1935년까지 안정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을 뿐이었다(上海市衛生局, 1938: 28).
도시공간의 공간적 분절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1930년대 베이징시정부는 교구에서 보갑제를 실시하였다. 보갑제는 기층사회에서 치안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생행정의 공백을 메워줌으로써 도시공간에 대한 공간통제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제도였다. 특히 시정부는 보갑을 활용하여 우두접종을 실시함으로써 감염병 통제와 인구관리를 강화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도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시기에 보갑제도가 부활했다. 특히 공공조계에서는 1942년 보갑위원회가 설립되어, 주민관리·치안유지 이외에 환경위생, 감염병 관리를 위해 보갑을 적극 활용하였다(飯島涉, 2000: 95-208; 福士由紀, 2010: 230-232).
상하이와 베이징의 실제 두창 유행과 방역 상황을 비교해 줄 통계가 많지 않다. 1936년 난징정부가 작성한 질병 통계를 통해 1930년대 중반 중국 각 도시의 질병 사망원인의 단편적인 상황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각 도시의 인구분포가 다르기 때문에, 수치만으로 도시의 위생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결핵을 제외하면 상하이의 질병 상황이 크게 우수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930년대 상하이의 인구가 베이징의 두 배에 달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상하이의 두창 사망자 수가 베이징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7>은 1930년대 상하이 특별시정부, 상하이 공공조계, 베이징시의 우두 접종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정확한 비교를 위해 1936년과 1937년을 기준으로 우두 접종 상황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1936년도 상하이 총인구 수는 3,778,364명(중국인 3,710,098명, 외국인 68,266명)으로 공공조계 1,180,969명(중국인 1,141,727명, 외국인 39,242명), 프랑스조계 498,193명(중국인 479,294명, 외국인 18,899명), 화계 2,099,202명 (중국인 2,089,077명, 외국인 10,125명) 등이었다(上海公共租界工部局, 1937: 270). 1936년도 화계와 공공조계 우두 접종자는 511,506명으로 대략 두 지역의 인구 3,280,171명 중 15.6%가 접종한 것이다. 반면 화계만을 따져보면, 화계 지역민의 9.7%만이 우두 접종을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상하이의 총인구 수는 3,848,644명(중국인 3,775,371명, 외국인 73,273명)으로 공공조계 1,218,630명(중국인 1,178,880명, 외국인 39,750명), 프랑스조계 477,629명(중국인 454,231명, 외국인 23,398명), 화계 2,152,385명(중국인 2,142,260명, 외국인 10,125명)이었다(Shanghai Municipal Council, 1938: 118).7) 따라서 1937년 공공조계의 인구 수는 1,218,630명이고 우두 접종자는 423,454명으로 공공조계 인구의 34.7%가 접종한 것이다.
베이징의 인구는 1920년대 중반까지 100만을 넘지 못하였다. 1928년 베이핑시정부가 성립하면서 내외성구와 교구가 통합되면서 130만 명을 넘었다. 1930년대 중반 150만 명에서 신중국 성립 직전 200만 명을 넘었다. 1936년도 베이핑시의 총인구 수는 1,539,105명으로 성내구 626,622명(40.7%), 성외구 453,926명(29.5%), 교구 458,557명(29.8%) 등이었다(北京特別市公署衛生局, 1938: 6). 따라서 1936년 우두 접종자는 105,248명으로 대략 베이핑 인구의 6.8%가 접종한 것이다. 1937년도 베이징시의 총인구 수는 1,529,393명이고(北京特別市公署衛生局, 1938: 3), 1937년도 우두 접종자는 155,835명으로 대략 베이징 인구의 10.2%가 접종한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1930년대 베이징에서 우두 접종 실적은 최대 인구대비 10%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하이와 베이징의 우두 접종을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상하이가 베이징보다 많은 접종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하이 공공조계와 베이징을 비교하면, 상하이의 우두 접종자가 비교적 높은 비율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역으로 상하이 화계와 베이징을 비교하면, 베이징의 우두 접종자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비율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방역의 성과나 효율을 양적 수치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을 것이다. 특히 상하이는 공공조계, 프랑스조계, 화계로 분할되어 있었던 만큼 공간적 분절성은 베이징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방역의 공간통제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공간적 분절성은 방역 효과에 치명상을 안겨줄 가능성이 높았다.

5. 맺음말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근대 도시인 베이징과 상하이는 각종 도시 인프라와 방역체계가 발달한 곳이었다. 두 도시는 근대적 위생행정을 실시하면서 1920-30년대 위생구사무소를 조직하여 위생행정을 보다 실질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두 도시에서 초대 위생국장으로서 위생행정을 주도했던 황쯔팡이나 후훙지 등은 모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공공위생대학원 출신으로 공공의료에 대한 비슷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두 도시의 위생행정 책임자들과 위생개혁의 주도 세력들 사이에는 위생구사무소를 비롯한 각종 위생실험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1920-30년대 두 도시에서 위생실험에 참여했던 청년 의사들은 근대적 국가건설에 필요한 가장 이상적인 보건의료 모델로서 국가의료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이 추진했던 방역 활동 역시 국가의료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추진했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실제로 1920년대 중후반 베이징에서 국가의료를 지향하던 청년 의사들은 위생구사무소의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이상적인 의료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위생구사무소는 위생행정을 실시하는 지역 핵심 센터로서 위생행정의 기초적인 생명통계의 작성뿐만 아니라 감염병 관리, 환경위생, 위생교육 등을 주도하였다. 다른 한편 같은 도시 안에서도 위생구사무소가 도시 전역에 설치된 것은 아니어서 위생구사무소가 설치되지 않은 곳은 위생 각 분야에서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말하자면 도시 공간의 위상과 배치에 따른 위생행정의 분절적인 상황 역시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도시 공간에서 위생행정의 작동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베이징에서는 1925년 제일위생구사무소가 설치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위생실험이 실시되었다. 특히 이 위생실험에 참여했던 황쯔팡이 베이핑시정부의 초대 위생국장으로 임명되면서 베이핑의 위생실험은 더욱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제일위생구사무소의 위생실험이 베이핑시정부 성립 이후에는 위생국을 중심으로 실시된 위생행정의 주춧돌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베이핑시정부는 각종 감염병의 유행에 대응하면서 1930년대 ‘지역 거점 방역’의 두창 통제를 운영하였고 이를 통해 상당 부분 효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의 허점이 드러나자 시정부는 기존의 지역 거점 방식에서 벗어나 ‘방문 접종’으로 전환하였고 이를 통해 방역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자 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들어선 일본 점령정부 역시 기존 시정부의 위생행정을 지속하고자 했는데, 콜레라 유행이 심각해지자 자신들만의 새로운 방식을 탐구하기도 했다.
상하이는 조계와 화계라는 이원화된 공간을 구축하였고, 방역체계 역시 이원화되어 작동하였다. 더군다나 상하이의 조계는 공공조계 및 프랑스조계로 구성되어 독자적인 방역행정이 실시되면서 사실상 상하이 사회는 상하이 시정부와두 개의 조계당국 등 삼원화된 권력구조와 위생행정이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공조계 공부국은 1898년 14개의 위생구를 설치하여 위생구사무소 중심의 위생행정을 전개하면서 상하이의 위생행정을 선도하였다. 위생구사무소는 각 지역 위생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지역센터로서 생명통계의 작성, 사망원인 조사, 감염병 관리, 각종 예방접종 사무, 식품 및 음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프랑스조계 공동국 역시 서양식의 최신 설비와 방역체계를 운용하면서 상하이의 위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였다. 반면 화계는 1920년대 후반 위생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통일적인 방역행정이 작동되지 않았고, 조계의 도움을 받은 민간병원이 방역을 주도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면하는 정도였다. 우두 접종 횟수만으로 보자면, 상하이가 베이징보다 상대적으로 우수했다고 할 수 있지만, 공간통제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방역체계가 이원화되어 있던 상하이가 베이징보다 위생환경이 더 나았다고 말할 수 없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 중국의 대도시에서 전개된 1920-30년대 위생구사무소 중심의 공공의료는 무상의료의 실시와 근대적 공간통제를 통해 방역행정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지향점이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각 도시에서 방역의 주체와 대상이 서로 달랐으며, 방역조치의 구체적인 내용도 도시별로 달랐다. 위생인프라 역시 시정부가 주도하기도 하고 민간이 주도하기도 하는 등 서로 다른 환경에 있었다. 1940년대 들어서 일본 점령정부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기존의 위생행정을 계승 발전시키는 조치를 실행했다. 점령정부 하에서 기존 조계지역은 점령정부에 접수되었고, 도시 공간의 균질화가 추진되고 있었으며, 점령정부는 현상유지를 위해 기존의 도시정책을 최대한 지속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격화로 1920-30년대 중국에서 전개된 위생구사무소 중심의 위생실험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Notes

1) Shanghai Municipal Council, Annual Report of the Shanghai Municipal Council, 1929 (Shanghai: Printed by Kelly & Walsh, LTD., Ferry Road, 1930), p. 113; p. 156.

2) Shanghai Municipal Council, Annual Report of the Shanghai Municipal Council, 1929, (Shanghai: Printed by Kelly & Walsh, LTD., Ferry Road, 1930), p. 113.

3) Shanghai Municipal Council, Annual Report of the Shanghai Municipal Council, 1937, (Shanghai: North-China Daily News & Herald, LTD., 1938), p. 175.

4) Shanghai Municipal Council, Annual Report of the Shanghai Municipal Council, 1942, (Shanghai: Pax Publishing & Printing Company, 1943), p. 73.

5) 「南郊擴大種痘宣傳運動卽將開始」, 北平市自治事務第十四區分所 編, 『南郊月刊』 2期, (1936. 2), 19쪽.

6) 도시사회에서 근대적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그치지 않고 수치화를 포함한 관념상의 공간을 포괄하며, 근대 도시는 질병의 공간화, 신체의 공간화, 의학의 공간화라는 관념적 층위를 내포하고 있다. 도시공간의 공간통제와 공간재편의 과정에 대해서는 신규환, 『북경의 붉은 의사들』(역사공간, 2020), 482-485쪽 참고.

7) Shanghai Municipal Council, Shanghai Municipal Council Report and Budget 1937 (1938), p. 118.

Table 1.
The Death Toll from Infectious Diseases by Domestic and Foreign Nationals in the 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 1890-1919 (number of persons)
국적 두창 콜레라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성홍열 결핵
외국인 206 170 274 60 165 813 1,688
중국인 5,660 3,423 0 765 3,381 12,928 26,157

출처: 上海公共租界工部局, 『上海公共租界工部局年報』 (上海: 華文處 譯述, 第6期, 1935: 283); 朱德明, 『近代上海租界衛生史略』, 『中華醫史雜誌』 26-1 (1996. 1), 16쪽.

Table 2.
Distribution Table of Branch Health Office under the Health Bureau of Shanghai Municipal Council in the 1930s
위생분처 주소 위생분처 주소
中一區 漢口路 304호 北二區 北四川路 190호
中二區, 中三區 福州路 667호 北三區 北福建路 270호
東一區, 東二區 通州路 80호 北四區, 北五區 北蘇州路
東三區 舢路 133호 西一區 愛文義路 380호
東四區, 東五區 揚州路 311호 西二區 麥根路 160호
東六區 松藩路 30호 西三區 勞勃生路 435호
北一區 海寧路 130호 西四區 愚園路 130호

출처: 張明島·邵浩奇 主編, 『上海衛生志』 (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1998), 536쪽; 上海市檔案館 所藏, 『上海公共租界工部局年報』 (1935), U1-1-961.

Table 3.
The Comparison Table of the Deaths of Smallpox in the 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 1890-1930 (number of persons)
연도 국적
연도 국적
중국인 외국인 중국인 외국인
1890 79 4 1911 156 10
1891 223 3 1912 124 3
1892 78 5 1913 207 12
1893 184 11 1914 162 11
1894 125 9 1915 106 15
1895 138 7 1916 3 0
1896 316 19 1917 188 18
1897 92 2 1918 107 4
1898 65 2 1919 0 1
1899 183 7 1920 0 0
1900 54 0 1921 204 23
1901 31 1 1922 230 10
1902 434 3 1923 51 6
1903 241 7 1924 92 6
1904 759 11 1925 59 7
1905 246 14 1926 169 12
1906 29 0 1927 7 0
1907 863 21 1928 139 20
1908 143 5 1929 165 12
1909 19 0 1930 46 4
1910 304 13 6,821 318

출처: 上海公共租界工部局, 『上海公共租界工部局年報』(公共租界工部局, 1930), 115쪽.

Table 4.
The Statistics of Infectious Diseases in Shanghai Chinese District, 1930-1936 (number of persons)
연도 장티푸스
발진 티푸스
디프 테리아
두창
이질
유행성 척수막염
성홍열
콜레라
합계
환자 사망 환자 사망 환자 사망 환자 사망 환자 사망 환자 사망 환자 사망 환자 사망 환자 사망
1930.1-7 104 6 4 0 137 12 63 12 75 4 157 45 89 9 - - 629 88
1933.7-12 47 11 3 0 160 20 28 7 248 14 20 8 66 4 - - 572 64
1934.1-10 68 21 - - 277 23 149 49 159 10 107 21 159 10 1 0 713 124
1935 94 9 4 - 552 45 15 1 111 4 91 23 138 4 0 0 1,005 86
1936 27 13 4 - 381 41 96 3 168 17 66 18 150 10 0 0 982 112
합계 340 60 15 0 1,507 141 351 82 761 49 441 115 602 37 1 0 3,901 474

출처: 劉雪芹, 「近代上海的瘟疫和社會: 以1926-1937年上海華界的瘟疫爲例」 (上海師範大學 歷史系 碩士論文, 2005), <표1-1-3>를 참고.

Table 5.
The Death Toll from Major Infectious Disease among Shanghai Chinese, 1926-1940 (number of persons)
1926 1927 1928 1929 1930 1931 1932 1933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두창 169 7 139 165 4 122 189 67 9 63 122 441 319 4
콜레라 366 94 6 129 3 18 149 - - - 387 1722 56 45
이질 260 127 64 93 102 172 76 111 120 184 611 1012 428 538
장티푸스 397 457 446 512 474 471 283 495 441 503 559 1376 1123 1499
결핵 1127 975 871 966 855 956 746 873 903 866 925 1479 1705 2424
디프테리아 105 33 39 32 49 56 73 50 46 61 219 256 139 121
2424 1693 1565 1897 1487 1795 1516 1596 1519 1677 2823 6286 3770 4631

출처: 上海公共租界工部局, 『上海公共租界工部局年報』(公共租界工部局, 1926-1940).

Table 6.
The List of Causes of Death by Disease in Each City, (1933. 7-1934. 6) (number of persons)
콜레라 두창 이질 장티푸스 결핵
난징 11 261 317 350 739
상하이 - 1,305 255 1,093 2,753
베이징 17 83 164 124 5,323
칭다오 - 9 147 18 109
광저우 - 5 35 85 711
한커우 166 312 142 488 859
톈진 3 14 2 85 102
항저우 6 41 43 994 503
웨이하이 7 44 79 59 275

출처: 中華民國內政部 年鑑編纂委員會 編, 『內政年鑑』 第二, 衛生編 (商務印書館, 1936), 236-237쪽.

Table 7.
The Number of Vaccination of Shanghai Chinese District, 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 and Beijing in 1930s (number of cases)
연도 상하이 화계 상하이 공공조계 결핵
1930 133,460 - -
1931 185,781 106,847 -
1932 182,844 262,475 -
1933 222,891 181,402 -
1934 246,063 262,450 95,963
1935 224,946 - 89,767
1936 202,765 308,741 105,248
1937 - 423,454 155,835

출처: 上海市衛生局編, 『上海市衛生局十年來之公共衛生』 (上海: 上海市衛生局, 1938), 28쪽; Shanghai Municipal Council Report and Budget (1930-1938); 張泰山, 『民国時期的傳染病與與社會』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8),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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