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paper examines the patterns of infectious diseases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as described in No Sangchu Ilgi (the diaries of No Sangchu) and the responses of No Sangchu and his family. During this period, infectious diseases such as smallpox and measles were prevalent. No Sangchu’s diaries detailed accounts related to his family and hometown. For example, the diaries show that the infection rate was high among young children, such as No’s younger siblings and nephews. The process of nursing them is meticulously documented. To address infectious diseases, No sought medical assistance by meeting with doctors or visiting pharmacies for prescribed remedies. Additionally, he and his family would relocate to temples or relatives’ homes to avoid areas with severe outbreaks. When engaged in official duties, updates about his family and hometown were received through letters, and the diary primarily focused on the circumstances at his workplace. In 1799, while working in the central government, No encountered a large-scale outbreak of infectious diseases. He extensively documented the resulting damage, including the loss of his own family members. An examination of his diaries not only reveals No Sangchu’s individual responses but also sheds light on the state’s efforts to maintain a relief system. In summary, No Sangchu Ilgi provides detailed records of infectious diseases directly related to household well-being and the state’s to infectious diseases, making it a valuable source for understanding the experience of infectious diseases in the late Joseon period.
1. 머리말감염병은 병원체(세균)가 감염으로 인체에 침입하여 증상을 발현하는 질환이다.1) 역사적으로 감염병은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인의 생존과도 직결되면서도 사회 공동체 유지를 해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경우 기근, 자연재해와 함께 감염병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고 이에 국가는 물론 민간에서도 끊임없이 대응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관에서는 의료 기구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제사를 지내 민심을 달래는 한편, 민간에서는 의서나 약재를 구비하거나 의원을 찾아가야만 했다(이규근, 2001: 12-30; 김호, 2009: 211-317). 기존 의학사 연구는 법전, 연대기사료와 의학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신동원, 2010: 18-27; 김성수, 2020: 374-389), 최근에는 조선 후기 감염병 실태와 그 대응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 일기가 주목받고 있다. 일기는 날짜의 순서에 따라 필자의 활동 등을 주로 기록한 자료이다(염정섭, 1997: 220; 정연식, 2009: 297). 일찍이 『미암일기』, 『쇄미록』, 『묵재일기』, 『흠영』 등이 알려졌고, 지금까지도 다양한 종류의 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일기 자료는 개인의 일상은 물론 당시 사회의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감염병에 대한 기록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더욱이 분량과 상세함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일기에서 감염병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즉 일기는 개인과 가족, 그리고 향촌 사회가 감염병이라는 재난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알 수 있는 사료인 셈이다.
관련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일기를 활용한 의학사 연구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첫 번째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민간사회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김호, 1998: 119-130; 2001: 130-151; 신동원, 2006a: 390-391; 김성수, 2014: 108-130). 주로 서울 지역에서 활동한 양반들이 남긴 일기를 활용하였는데, 특히 양반들의 약재 거래, 의학서 구입과 같은 의술 활동에 주목하였다. 아울러 18세기 들어서는 의약 시장이 성장하여 의원이 전공별로 나누어졌고, 돈으로 약재를 거래하는 행위가 일반화되었음을 지적하며 민간 의료가 발달하였음을 밝혔다. 이는 궁극적으로 의료 행위를 통해 조선 후기의 발전된 사회상을 찾고자 한 것으로, 조선 후기 의학사 연구의 전반적인 경향과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김호, 1993: 137-145; 1996a: 233-249; 김대원, 1998: 192-205; 이규근, 2001: 30-42; 원보영, 2005: 24-42; 김성수, 2007: 60-72; 여인석 외, 2018: 129-188).
두 번째로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민간의 구체적인 대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감염병을 비롯한 질병에 걸렸을 때 개인이 취한 의료활동이 무엇이었는지 검토한 연구가 있다. 주로 특정 감염병 유행 사례에 대해 정리하거나, 특정 일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김성수, 2013: 37-46; 신동원, 2014: 174-506; 2015: 399-414; 김호, 2020: 200-210; 배대호, 2020: 283-306; 김정운, 2021: 4-25; 이광우, 2021: 564-592).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의 질병 실태와 그 대응에 관한 부분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다만 여전히 감염병 관련 내용이 담긴 일기가 많이 남아있는 만큼 정밀한 접근을 통해 각 사례를 정리, 축적하여 조선 후기의 사회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는 특히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2) 이 일기는 영조 39년(1763)부터 순조 29년(1829)까지 무관 노상추(盧尙樞, 1746~1829)가 남긴 것으로, 주로 고향인 경상도 선산(善山)에서의 생활과 중앙관직 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일기는 감염병 관련 기록이 비교적 상세한 편인데, 단순히 감염병이 발생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집안의 환자가 발생했을 시의 대응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다. 해당 일기는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로 연구가 이루어진 바가 있으나, 아직 감염병의 실태나 그 대응에 관한 연구는 소략하다. 문숙자가 노상추의 가족과 일생을 소개하면서 감염병을 언급한 바가 있으며(문숙자, 2009: 33), 신동원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를 대표하는 일기로 『노상추일기』를 들었으나, 구체적인 의약 생활을 분석하지는 않았다(신동원, 2014: 544). 그 외에도 조선 후기의 감염병 실태를 설명할 때 보조적으로 활용되었을 뿐이다(김정운, 2021: 4-25; 이광우, 2021: 564-592; 염원희, 2022: 200-211; 유희전, 2020: 10-26).
『노상추일기』의 경우 감염병 대응의 다양한 층위를 하나의 사료에서 함께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무과 급제 이전의 청년기와 은퇴 이후 노년 시절 향촌에서 보낸 일상과 관직 생활 당시의 기록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청년기의 일기에는 연대기 자료와 같은 중앙의 기록에 자세히 등장하지 않는 선산 일대의 국지적인 감염병 창궐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중앙에서 관료 생활하는 중에 쓴 일기는 조정의 대응과 그것이 관료조직에 미친 피해 및 충격을 알아보는 데 적합하다. 일반적으로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한 양반의 일기는 조정 업무를 보는 내용이 다수이고, 지방에 오래 머문 양반의 일기는 향촌에서 겪은 일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노상추일기』를 통해 이 두 가지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당 자료는 향촌의 민간사회와 중앙의 국가가 각각 감염병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분석하기에도 적합해 보인다.
따라서 이번 연구에서는 노상추의 일기를 중심으로 감염병 기록의 의미를 확인하는 한편,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에서 유행한 감염병의 실체를 한층 상세히 복원해 보고자 한다. 본고는 크게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2장에서는 『노상추일기』 전반의 서술 경향을 살펴보았다. 다음 3장에서는 노상추 일가가 머물렀던 선산 지역을 중심으로 주요 감염병 유행과 그 대응 사례를 정리할 것이다. 마지막 4장에서는 노상추가 관직 생활 중에 마주한 큰 사건이자 일기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 정조 23년(1799) 대유행 감염병에 주목하여 국가의 대응과 노상추 일가가 겪은 경험을 함께 분석하고자 한다.
2. 『노상추일기』 내 감염병 기록 양상먼저 『노상추일기』의 대략적인 소개와 더불어 일기에 실린 감염병 기록 양상과 그 특징을 설명하고자 한다(문숙자, 2009: 17-38; 정해은, 2017: 7-17; 2022: 8-26). 노상추의 집안은 안강 노씨로 경상도 선산에 자리 잡은 남인 가문이다. 할아버지 노계정(盧啓禎, 1695~1755)은 무과 출신이며, 노상추 또한 무관의 길을 걸었다. 일찍부터 노상추의 6대조 노경필(盧景佖)의 아우인 노경임(盧景任)이 선조 29년(1596) 27세부터 일기를 썼다. 이와 같은 집안의 전통으로 인해 노상추의 아버지 노철(盧哲, 1721~1772)도 19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47세까지 작성하였다. 노상추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17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고, 84세 죽기 직전까지 일기를 적었다.3)
안강 노씨 집안의 일기 쓰기는 가장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수행한다는 의미였다. 노상추가 일기를 쓰게 된 계기는 그의 큰형 노상식(盧尙植)이 영조 38년(1762) 일찍 사망하자 아버지가 세상일에 흥미를 잃어 아들에게 일기 쓰기를 넘겨주면서 시작되었다.4) 즉 이때 집안의 가장 역할을 이어받은 셈이다. 집안의 대소사를 비롯하여 혼인, 출산, 죽음, 대인관계, 풍흉, 농사, 제사, 관직 근무 등 풍부하게 일기로 남긴 것은 후손이 참고할 것을 염두한 것으로 여겨지며, 노상추 본인도 선대의 일기를 참고하였다.5) 그렇기에 감염병을 비롯한 질병과 재해는 노상추에게 가족의 상실과 집안일의 지체를 이끄는 요인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노상추일기』에는 감염병 유행 소문부터 간호, 대피 등의 관련 행위를 포함한 기록이 영조 39년(1763)부터 순조 29년(1829)까지 약 600여 개 정도 실려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저자인 노상추의 상황에 따라 일기 서술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일기는 청년기-장년기-노년기의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정해은, 2017; 11), 감염병 기록의 경우 크게 노상추가 고향에 머무르는 시기와 관직에 근무할 시기로 나누어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고향에 머무른 청년기 시절(1763~1780)에는 마을의 감염병 유행과 가족의 감염병 대처 과정을 상세히 남겼다. 당시 노상추는 무과 시험을 준비하였기에 여러 차례 한양을 왕래하였지만,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동생과 조카들을 돌봐야 하는 입장이므로 감염병에 대해 비교적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해마다 선산을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감염병 유행 소문을 확인하였고, 가족 구성원들이 아플 때마다 대응해야만 하였다. 의원을 만나 진단받거나 약재를 구하는 과정 등 의약적 대응이 가장 많이 수록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기록이 질적으로는 가장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과거 급제 이후 외지에서 거주한 장년기 시절(1781~1812)에는 가족과 마을의 감염병 소식에 대한 기록 방식이 달라진다. 그는 무과 급제 후 한양뿐만 아니라 진동, 삭주, 홍주, 가덕 등의 지방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므로 가족으로부터 집안에 별일 없었는지, 고향에서 어떤 병이 유행하였는지 간접적으로 전달받은 것을 기록하였다. 한편으로는 조보를 통해 중앙과 지방의 감염병 유행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어 이전에는 기록하지 못했던 정보를 남겼다.6) 가령 근무지 외의 지방 사정을 파악한다던가, 왕실 일원이 감염병에 걸린 일 등을 들 수 있다. 일례로 정조 10년(1786) 홍역이 크게 유행했을 때 도성에서 사망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었고, 서울과 지방에 관문을 보내 여제를 지내게 되었음을 조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7) 문효세자가 이 시기 홍역을 앓다가 사망하여 장례를 지내는 과정,8) 순조대 왕실 일가가 두창과 홍역에 걸린 일을 기록하는 등9) 중앙의 사정을 그때마다 기록으로 남겼다.
가덕 첨사를 끝으로 낙향한 노년기 시절(1813~1828)에는 청년기와 마찬가지로 마을의 사정과 가족의 감염병 경험을 여러 차례 기록하였다. 노상추는 이 때 노령인 관계로 가족들이 감염되었을 때 직접 간호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대응 방식은 비교적 소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염병은 가족과 노비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에 해마다 감염자의 현황을 남겼고, 무사히 넘기면 기뻐하였다.10) 함께 살았던 서자 승엽이 아플 때, 혹은 본인이 아플 때의 조치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시기는 순조 15년(1815)11)과 순조 22년(1822)(김신회, 2014: 424-437) 두 차례 전국적으로 감염병 유행이 있어서 해당 연도에 기록이 집중되어 있다. 순조 15년(1815)에는 1월부터 9월까지 손자를 비롯하여 친인척과 마을 사람들이 감염병에 걸려 많이 사망하였다.12) 순조 22년(1822)의 경우, 순조 21년(1821)부터 콜레라(괴질)가 유행하였는데13) 이듬해에도 재유행하여 사망자가 속출하였다.14)
다음으로 일기에 실린 감염병의 실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15) 노상추는 두창과 홍역을 비롯해서 이질, 학질, 괴질 등 다양한 종류의 감염병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전반적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질병이 이 일기에도 그대로 나타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호, 1996a: 235-241; 이규근, 2001: 21-30). 다만 癘氣, 時氣, 時疾, 輪痛, 輪疾, 輪症 등 통상적인 감염병을 일컫는 용례가 많고 병명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무래도 전해들은 소문을 기록하는 일이 많다 보니 구체적인 병명을 적기 어렵기에 표현이 다소 거칠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輪感, 毒感, 寒感, 感氣 등도 앞의 표현과 함께 기록되었는데, 특히 정조 22년(1798)부터 정조 23년(1799)까지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일시적으로 기록이 증가하였다.16)
『노상추일기』에서 가장 확인하기 쉬운 감염병은 급성 발열성 발진성 질환인 두창이다. 이 질환은 유년기에 대부분 앓는 질병이기에 등장 빈도가 비교적 높다.17) 두창은 痘, 痘症, 痘疾, 痘疫 등으로 기록되었다. 주로 노상추가 고향에 머무는 시절의 기록이 매우 많은데, 그 이유는 영조 43년(1767), 영조 49년(1773), 영조 50년(1774), 정조 2년(1778)에 선산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 두창 유행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이때마다 가족과 친인척들이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마을에 두창이 유행했다는 소문을 기록하였고, 낙향한 이후에는 손자와 증손들이 두창에 걸리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노상추가 두창의 예방법인 종두(種痘)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18) 순조 24년(1824) 4월 증손 중악(中嶽)을 시작으로 집안에 두창이 유행하여 4명의 아이가 감염되었고 증손녀 1명은 두창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19) 그 중 증손 산악(山嶽)과 서손 천석(天錫)이 종두한 사례가 나온다. 산악은 몇 년 전에 종두를 하였으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금일 다시 하였으니, 두창이 발병한 지 나흘이 되었는데도 온몸에 난 반점의 개수가 몇십 개에 불과하였고, 사흘 아픈 뒤 반점이 생긴 후 나았다. 반면 천석은 종두를 했으나 열흘이 지나도록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 다시 종두를 하였다고 한다.20)
노상추의 일기 외에도 19세기에 종두를 한 사례는 다른 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19세기 대구에서 거주한 서찬규(徐贊奎)가 남긴 『임재일기(臨齋日記)』에서도 종두하였다는 기록이 있고,21) 안동에 거주했던 김중휴(金重休)도 자신의 일기에 마을에서 종두했다는 기록을 남겼다.22)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의 종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노상추가 살던 19세기 전반까지는 인두법이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역과 두창 등의 치료법이 절실해지면서 18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두창을 예방할 수 있는 인두법이 도입되었고, 19세기에는 관련 의서도 제작되었다. 이를 통해 19세기 전반 선산 지역에도 두창에 대비하는 방법이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김호, 2016: 84). 이는 노상추 또한 의학적 지식에 어두운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한다.
홍역은 주로 장년기와 노년기 시절에 기록되었다. 홍역은 疹, 紅疹, 疹候, 紅疫 등이 용례로 사용되었다. 일기 작성 기간 홍역의 유행은 영조 51년(1775), 정조 10년(1786), 순조 2년(1802), 순조 22년(1822)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23) 일기에서도 그 여파가 잘 드러난다. 영조 51년(1775)의 일기는 남아있지 않기에 직접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정조 즉위년(1776) 여종 분진이 사망하면서 작년 겨울에도 노비의 가족들이 진(疹)으로 사망하였다는 사례를 통해 선산 지역도 홍역 유행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24) 정조 10년(1786)은 한양에서 근무하는 중 도성 안에 홍역과 온역이 유행 중임을 자세히 서술하였다.25) 이 후 순조 2년(1802) 12월 선산 지역에 홍역이 유행하고 있다는 소문, 같은 달 아들 승엽이 홍역을 겪은 것을 시작으로 홍역의 기록 빈도가 높아졌다.26) 순조 22년(1822) 겨울에는 손자와 증손들이 홍역에 걸렸다. 그밖에 다양한 감염병이 서술되었다. 온역은 染疾, 染疫, 染痛, 瘟疫, 瘟症, 瘟 類 등으로, 이질은 痢, 痢候, 痢症, 痢氣으로, 학질은 瘧, 瘧疾, 瘧症, 瘧氣, 患痁으로 표현되었다. 학질과 이질은 주로 여름에 발생하였는데, 상대적으로 위생적인 음식과 식수를 공급받기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이다(김호, 1993: 128-130). 따라서 대부분 따뜻한 계절에 앓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까지는 노상추가 관직에 있을 때 주로 이질을 겪었는데 19세기 들어서는 학질을 앓기 시작하였다. 괴질은 怪疾, 恠疾 등으로 쓰여 있는데 콜레라 유입 전에는 괴이한 질병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순조 22년(1822)에 괴질이라는 표현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기에 순조 21년(1821) 유입된 콜레라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순조 21년(1821) 일기가 없으므로 그 당시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정체불명의 괴질이 서울에 두루 퍼졌는데 서울에서는 그쳤고 영남 땅에서 죽은 사람이 많다”, “근래 들으니 괴질이 두루 유행하여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다. 혹독한 더위 때문에 생긴 급성 질환으로 죽는 것인데, 학질과 비슷하게 구토와 설사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금방 죽는다고 한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선산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27)
요컨대 노상추의 일기는 시기마다 서술 경향에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가족과 고향의 감염병 유행 사례가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었다. 관직에 있을 때는 고향뿐만 아니라 근무 지역의 사례도 함께 수록되었다. 또한, 여러 가지 종류의 감염병이 발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두창과 홍역은 유년기에 대부분 앓는 질병이기에 등장 빈도가 비교적 높았다. 다음 장에서는 노상추 일가의 감염병 대응 사례를 자세히 확인해보고자 한다.
3. 선산지역 노상추 일가의 감염병 대응과 영향『노상추일기』에는 노상추 가족이 감염병에 걸렸을 때의 대응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로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시기의 관련 기록이 많으며, 또한 본인이 아팠을 때의 대응 과정도 자세하다. 우선 노상추 일가의 감염병 대응을 살펴보기 전에, 노상추가 살고 있던 조선 후기의 지방 의료 시스템은 어떠한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조선 전기에는 전의감, 내의원, 혜민서, 활인서 등 중앙의 제도를 정비하면서 지방에도 관아에 의료기관을 설치하고 의원을 파견하였다. 반면 조선 후기에는 점차 민간의료의 비중이 커졌다. 『동의보감』을 비롯한 의서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의료 지식도 보급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의약 종사자들 등장하게 되었으며, 전문화되었다(김대원, 1998: 192-205; 김호, 1996a: 233-249; 김성수, 2007: 60-72; 김덕진, 2022: 11-17).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민간 주도의 의국과 약국도 설치되었는데, 약재를 구비하기 위한 약국계나 의국계도 그 중 일환이었다(李揆大, 1988: 263-290; 신동원, 2006: 4-19; 김성수, 2009b: 52-66; 김호, 2018: 309-410; 2022: 11-19).
『노상추일기』에도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지역 내에 의국(醫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47년(1771) 남산서원(금오서원) 중건이 진행되면서28) 의국계(醫局契)의 추수곡을 보태어 사용하려는 일이 있었는데, 의국도감(醫局都監)을 누구로 정할지 갈등이 있었다. 일기에 따르면 고을의 선대 부로(父老)들이 의국을 창설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재원으로 의국계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29) 관련 내용은 단 한 건밖에 나오지 않지만, 18세기에 지역 사족들이 재원을 모아 질병에 대응하는 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다.30)
『노상추일기』에는 수많은 의원도 등장하는데, 노상추가 청년기 시절 만난 의원의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기본적으로 의원에게 처방을 받아[問藥] 약국에 가서 약재를 구해 제조하고 복용하는 형식으로 의료 행위는 이루어졌다. 의원을 집에 부르는 경우도 있고, 직접 의원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도 하였다. 그 후 의원이 약을 직접 지어주거나, 혹은 의원이 처방전만 주면 따로 약재를 구해서 복용하는 식이다. 노상추 본인이 약을 구하러 가기도 하고, 집안의 노비에게 시켜서 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특정 의원에게 받은 처방에 대해 다른 의원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해당 약국에 약재가 없으면 인근 약국에 가서 약재를 구해오는 경우도 많았다(유희전, 2020: 18) 약국에도 약재가 없으면 주변 사람에게 얻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영조 50년(1774) 동생이 두창에 걸리자 약재인 자초용(紫草茸)을 구하기 위해 여러 약국을 방문하였으나 구하지 못해 주변 사람에게 약재를 얻었다.31) 노상추 집안도 약재를 소장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의원을 만나거나 약재를 거래하고 처방하는 일이 일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아버지의 병환(전광규, 안○○, 이춘보, 김태채)이나 여성의 출산 문제(이희장, 신○○, 권○○), 그리고 가족의 감염병 증세(전광규, 권○○, 이계환)로 인해 의원을 만났다.32) 자주 만난 의원으로 전광규와 안 의원이 있는데, 전광규는 그의 딸이 노상추의 서족 노수의 아들 상박과 혼인하였고, 전광규의 동생 광익의 딸도 노수의 아들 상집과 결혼하였다는 점에서33) 노상추와는 무관하지 않은 관계였다. 안 의원은 안국관(安國官), 안도감(安都監)으로 기록되어 있는데34) 가족들이 아플 때 자주 만난 의원 중 하나이다. 두 의원이 함께 아버지의 병환을 살피기도 하였는데, 다만 전광규가 친인척이라 그런지 다른 의원에게 처방받은 것을 전광규에게 상담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의학 지식이 있는 친척에게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일례로 오만운(吳萬運)35)은 노상추의 아버지가 담습증을 앓을 때 약을 지은 바 있으며, 노상추가 처방전을 받으러 방문하기도 하였다.36) 척장 정곤도 집안에서 두창이 발생했을 때 진단하러 왔다.37)
이어서 구체적으로 노상추 일가가 겪은 감염병 피해와 대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노상추가 고향에 머무르던 시기, 청년기 시절(1763~1780)을 중심으로 노상추 일가가 어떤 감염병에 자주 걸렸는데 확인하고자 한다. 일기에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동생, 조카, 자녀 등 많은 친인척이 등장한다. 아래 <표 2>는 비교적 노상추가 자주 만난 가족 구성원인 부모님, 죽은 형의 조카,38) 동생, 아들이 겪은 감염병 사례를 요약한 것이다
크게 4가지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어린 시절부터 등장한 조카와 동생, 자녀의 경우 대부분 두창을 한 차례 이상 앓은 것이다. 노상추의 기록되지 않은 동생들은 감염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두 차례나 있었으며, 노상추의 조카 용엽과 노상추의 아들도 감염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노상추의 경우 족보에 등재된 자녀보다 등재되지 않은 자녀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문숙자, 2009: 49-54). 둘째, 이 시기에는 아버지를 간호하는 내용이 많다. 아버지 노철은 영조 39년(1763)부터 담증(痰症)을 앓았고 영조 48년(1772) 세상을 떠날 때도 담습증으로 고생하다 사망하였다. 앞서 의원을 만나는 이유도 아버지의 병 치료 때문이었는데, <표 2>를 통해서도 아버지가 최소 5차례 이상 감염병으로 고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노상추는 가족의 건강과 직접적으로 연결 된 감염병 유행에 촉각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일기에 관련 기록을 많이 남긴 것이다. 셋째, 계절에 따라 유행하는 감염병이 달랐다는 점이다. 주로 추운 시기에는 독감, 감기와 같은 감염병이 유행하였고, 주로 따뜻한 시기에는 학질, 이질과 같은 감염병이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사망률은 전체 20건 중 4건으로 약 20%인데 대부분 어린 나이에 앓다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노상추 일가가 활용한 처방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을까. 노상추 일가가 많이 겪은 질병인 두창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노상추가 취한 조치들이 어떠하였는지 『동의보감(東醫寶鑑)』39)과 비교·분석해보고자 한다.40) 두창은 노상추 가족들의 어린 시절 대부분 겪은 질병이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시기에 앓기 때문에 치사율도 높았다. 따라서 일기에 두창이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으며, 사망 횟수도 많아 위 표에서 4건 중 2건이 두창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노상추는 두창으로 동생(1767)과 자녀(1778), 손자(1808)까지 잃었다. 자녀가 두창으로 죽자 “34세에 세 번 장가 들어 9세 된 아들 하나만 있어 통탄스럽다”고 할 지경이었다.41)
두창과 관련된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자면, 먼저 영조 43년(1767) 조카와 동생 3의 사례가 있다. 3월부터 두창이 유행하여 당시 많은 사람이 질병에 걸렸다. 5월 25일 조카 용엽(龍燁, 아명 希曾)이 먼저 두창에 걸렸으나, 용엽의 경우 증세가 심하지 않았고 6월 8일에 딱지가 다 떨어졌다.42) 그러나 용엽의 형인 정엽(珽燁, 아명 述會)은 6월 11일 발진이 생겼고, 노상추의 동생도 발진이 생겼다.43) 정엽은 수포에 고름이 차고 있으나 움직일 수 있었고, 얼굴에 모두 딱지가 떨어져 나았다. 그러나 동생은 얼굴에 딱지가 앉아 괜찮은 줄 알았으나 6월 26일 설사가 생겨서 정곤 척장의 명으로 정중탕(定中湯)과 황토고(黃土膏)를 사용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후 27일 이중고신목향산(理中固身木香散)을 조제하여 달였으나 여전히 증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6월 30일에 사망하였다.44)
두창 유행으로 인해 두 조카는 살았지만, 동생은 사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때 취한 조치들은 적합했을까? 당시 동생은 발진이 생겼고, 딱지까지 앉았으나 설사 증세가 발생하였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두창이 돋은 후 토하고 설사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이때 정중탕을 써야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정중탕을 사용한 것은 적합한 조치로 보인다.45) 다만 황토고의 경우 정확한 약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으나 대략 황토가 들어간 약제를 처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황토는 적백의 설사나 이질로 배가 아픈 경우 활용하는 약재이고,46) 정중탕도 황토를 활용한 약이기에 설사를 멈추는 효과를 기대하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설사 증세는 계속되었고, 그리하여 이중고신목향산을 사용하였는데 두창으로 인한 설사를 치료하는 약재들을 혼용하여 제조한 듯하다.47) 27일까지 설사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28일부터는 두창에 좋지 않은 찬 성질의 수박과 냉수를 먹는 것을 용인하였는데48) 이때부터는 동생이 더 이상 나을 가망이 없는 상태라고 판단한 것 같다.
두 번째 사례로, 영조 50년(1774)에는 남동생 상근(尙根, 아명 英仲)이 두창에 걸린 일이다. 당시 22세라 비교적 늦게 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카가 먼저 걸렸는데49) 뒤이어 상근이 허리통증과 함께 코피를 흘리면서 아프기 시작하였다. 두창에 걸린 것을 확인한 노상추는 치료제인 자초용(紫草茸)을 구하러 교동(校洞)으로 갔으나 약재를 구하지 못하였다. 이어 전광규 의원을 만났으나 약을 구하지 못하고 장산(長山) 약국에 가서 자초용 2전을 얻었다. 다음날 여전히 상근의 몸이 뜨겁고 피부에 붉은 점이 나타났다. 이에 신해탕(神解湯)을 먹이려고 하였으나 입을 다물고 있어 사용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다음날 새벽부터 의식이 돌아왔으나 얼굴 부위와 양손에 붉은 점이 나타난 상태였다. 화독탕(化毒湯)을 먹여보려고 하였으나 사용하지 못하였다. 증세가 호전되면서 용암면의 이계환 의원이 와서 진찰하였다. 점차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였고, 딱지가 앉으면서 회복하였다.50)
남동생이 동생 3과 마찬가지로 두창에 걸렸음에도 사망한 동생과 처방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동생 3의 경우 딱지가 앉은 이후, 즉 병의 후반부에 설사가 발생하여 이에 따라 조치한 것이고, 남동생의 경우 두창에 막 걸린, 즉 병의 초반부에 아프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다른 약재를 사용한 것이다. 자초용은 두창에 반드시 써야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두창 치료에 사용되는 약재이다.51) 그러나 여전히 상근이 열이 나자 신해탕을 사용하였는데, 신해탕은 열이 나고 두창이 돋으려 하며, 허리가 아플 때 사용하는 약이다. 이후 붉은 점이 나타나자 화독탕을 사용하려 하였는데, 화독탕은 열이 난지 하루 만에 붉은 점이 보일 때 사용하는 약이다.52) 비록 이 약은 먹이지 못하였으나 위와 같은 조치는 『동의보감』에 실린 대로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점괘를 보거나, 민간신앙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상추는 여러 차례 점쟁이를 만나 혼사,53) 집터의 길흉,54) 제사,55) 과거시험,56) 개인의 운세 등 다양한 주제로 점괘를 받았다. 가족이 아팠을 때도 점을 본 적이 있었다. 정조 4년(1780) 조카 용엽의 병세가 나빠져 점괘의 말을 믿고 아픈 이를 속노(贖奴) 덕수의 집으로 내보내 거처를 옮기게 하였으나, 다시 밤에 본가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57) 또 다른 예로, 순조 16년(1816) 서자 승엽이 온역으로 증세가 심해지자 승엽의 모친(첩)은 여자 점쟁이를 만나러 갔는데, 점쟁이는 조상신의 영령이 모두 가묘 안에 있으니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이에 노상추는 점쟁이의 말이 나의 뜻과 일치하다며 집에 돌아와 사당을 정리하여 단오 제사의 거행에 대비하였다.58) 이처럼 노상추는 가족의 감염병 치료를 위해 다양한 방도를 강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감염병이 유행하였을 때 노상추 일가를 비롯한 민간에서 취한 대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많은 대응 방식은 “대피”였다. 병을 피해서 거처를 옮기는 것을 피접(避接)이라고 한다. 마을에 두창과 같은 감염병이 발생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피해야만 했고,59)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경우 마을 밖에서 만났다.60) 집안에 감염병에 걸린 환자가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61) 병에 걸린 사람이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노상추 아버지가 학질을 앓을 때 신기로 피접하였는데, 나은 뒤에 다시 내려왔다고 한다.62)
노상추 일가의 경우 감염병을 피해서 산속의 절로 피신하거나, 인근 친척 집에 머물렀다. 주로 두창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은 인근 친척 집으로 이동하였다.63) 또한, 친척들이 두창을 피해 임시로 노상추네 집으로 오기도 하였다.64) 집에 머무르기 힘든 경우 인근 절로 피신하였다.65) 주로 읍의 외곽에 위치한 미봉사(尾鳳寺),66) 대둔사(大芚寺),67) 도리사(桃李寺)68)로 향한 사례가 많았다(<그림 1>). 노상추 일가가 머물렀던 곳은 세 사찰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절로 거처를 옮기는 것 또한 완벽한 방역 수단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염병을 피해 절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영조 49년(1773) 인근 두창을 피해 20여명이 대둔사에 머물고 있어 오히려 스님들이 폐해를 감당하기 어려워한다는 사례가 있으며,69) 순조 14년(1814)에는 영흥사에서 감염병으로 의심되는 병이 생겨서 산으로 내려와 그대로 백련암으로 올라갔으나, 이 암자에서도 의심스러운 병이 생겼다고 하여 다른 곳으로 다시 이동한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70)
한편 집안 노비가 아플 경우 감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하는 병막(病幕)에 보내었다. 감염병에 걸렸다고 판단이 되면 마을에서 내보내고 병막으로 보냈다.72) 거기서 그대로 죽기도 하였지만,73) 증세가 호전되면 병막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74) 일례로 여자종 원점의 딸 월금이 염병으로 병막으로 나갔으나 병이 나았고, 그 어미는 염병으로 죽었다고 한다.75) 수도 한양에서는 염병 때문에 병막으로 나와서 사는 사람의 수가 마을을 이루었다는 보고도 있었다.76) 노상추가 한양에 있을 때 노비 덕돌의 증상이 의심스러워 막차를 빌리는 돈을 주고 이웃 상놈이 있는 막차로 보냈고, 이후 걸어 다닐 기운이 생기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77)
가족 중 감염병에 걸린 사람이 있거나, 동네에 감염병이 도는 경우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일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행위는 바로 제사이다.78) 감염병으로 인해 정해진 날짜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제사를 나중에 지내거나, 지방(紙牓)을 써서 제사를 간소하게 치렀다.79) 일례로 순조 2년(1802) 12월에 동네 전역에 홍역이 유행하면서 새해에도 아침 차례를 거행하지 못하였고,80) 형의 기일에도 아직 집안과 마을이 정결하지 않아서, 신주를 내놓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이후 2월 10일 마을의 홍역이 끝나자 비로소 신주를 내어 제사를 지냈다.81) 또한, 감염병을 앓은 자가 죽으면 조문 갈 수 없었고, 집안에 감염병 환자가 있으면 마찬가지로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82) 그 외에 두창으로 인해 혼사 일을 의논하는 것을 연기하기도 하였고,83) 묘자리를 구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84)
감염병으로 사망한 경우 장례는 어떻게 치러졌을까. 어릴 때 사망한 경우, 별다른 장례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근처에 시신을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정조 2년(1778) 노상추의 아이가 두창 증세로 사망하였는데, 다음날 시신을 산의 남쪽에 묻어두었다.85) 반면 결혼도 한 조카 용엽이 사망한 경우에는 염하여 입관한 후, 장지를 정하여 죽은 지 8일 만에 발인하였다.86) 원래 용엽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는데, 며칠 뒤 다른 병이 침범하였는데 이게 감염병[輪症]이라고 진단받았다. 그로 인해 일부 친척은 그의 증세를 의심하여 곡하러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87)
그밖에 감염병 유행은 재해와 동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노상추는 매일 날씨를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매년 풍흉과 재해 여부를 서술하였는데, 가뭄이나 홍수가 발생하는 경우 감염병이 유행한다는 기록이 함께 나타났다. 일례로 영조 40년(1764)에는 가뭄으로 인해 지역 내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영조 42년(1766)에는 근래 3년 내내 흉년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88) 영조 40년(1764)과 영조 44년(1768)에 감염병 유행을 막기 위한 여제가 치러지기도 하였다.89)
이와 같은 노상추 일가의 대응은 조선 전기에도 이루어진 조치이고(권복규, 1999: 21-29) 18세기 다른 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대처법이다.9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염병 관련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개인과 가족, 그리고 향촌이라는 공동체에 모두 영향을 주는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노상추일기』의 경우 감염병 기록이 많은 것은 노상추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장 역할을 한 부분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족의 건강이 집안의 대소사에 미치는 게 중대하였다. 따라서 자주 발생하는 질병의 경우 과거에 사용했던 처방을 일기에 기록해 두어 추후 이용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노상추 일가는 두창, 홍역, 학질, 이질, 온역 등 다양한 감염병에 걸린 이력이 있으며, 노상추는 본인을 포함하여 부모님, 동생, 조카, 아들 등에게 처방한 내용을 일기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일반적으로 의원을 만나 처방을 받고 약국에서 가서 약재를 구해 먹었으나, 직접적인 의료 행위 외에도 감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일시적으로 다른 곳으로 대피하거나, 감염자를 격리시키기도 하였다. 마을에 감염자가 발생하면 거주지를 옮기거나 집안 행사를 연기시켜야만 했기에 감염병의 추이에 촉각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주로 노상추가 고향인 선산 지역에 있을 때 주로 작성되었다.
4. 중앙 근무 시절 정조 23년(1799) 감염병 유행과 대처이번 장에서는 관직 시절 노상추가 남긴 감염병 기록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정조 4년(1780) 무과 급제 이후 노상추는 고향을 떠나 도성 혹은 외지에 근무하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가족 소식이나 고향의 감염병 유행과 같은 내용을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 간혹 동생이나 조카 등을 통해 집안과 마을의 근황을 편지로 전달받을 뿐이었다.91) 그러므로 고향에 있었던 청년기와 노년기를 제외하고 관직에 있던 장년기에는 상대적으로 가족의 감염병 대처 기록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앙에서 근무할 때 남긴 감염병 관련 기록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조 23년(1799)의 대규모 감염병 유행이다.92) 이때 유행했던 감염병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93) 노상추는 훗날 “기미년(1799)의 호감[己未胡感]”이라 표현하였다.94) 다른 사료에는 해당 감염병을 윤질(輪疾),95) 독감(毒感),96) 한질(寒疾),97) 호역(胡疫),98) 윤감(輪感)99) 등으로 기록되었다. 이 감염병은 양서 지역을 중심으로 전파되어 도성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이후 전국적으로 퍼졌다.100) 당시 사람들이 이 감염병은 중국에서 건너왔으리라 확신한 이유는 이 시기에 청나라 태상황인 건륭제가 사망하였기 때문이다.101) 실제로 관련 칙서를 보면 건륭제가 작년 겨울 감기에 걸려 곧 나았으나 정력은 예전만 못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102) 이미 건륭제는 나이가 많고 병을 앓고 있어 감염병으로 사망하였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서로(西路) 지역의 피해가 심하였기에 당시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103)
해당 감염병으로 이때 많은 백성이 사망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1월 경외(京外)로 약 12만 8천여 명이 사망하였으며,104) 같은 해 3월 전국의 감염병 사망자 수를 집계한 것도 대략 12만 3천여 명이었다. 이를 정조 22년(1798) 12월 한성부에서 전국 백성의 호구 수를 올린 것과 비교해보았을 때 각도마다 약 1~3%의 백성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표 3> 참고). 특히 양서 지역의 피해가 심하였는데,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평안도의 사망자 수가 가장 많았고, 황해도는 사망자 비율이 가장 높음을 확인할 수 있다.105)
도성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당시 한성부는 5부의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중부 533구, 동부 523구, 서부 1,666구, 남부 1,023구, 북부 623구, 총 4,368구로 파악하였다.106) 이 시기 도성의 인구가 19만 3,783구로 집계되었으니107) 이와 비교해보면 사망자 비율이 약 2.2%로 상대적으로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노상추 또한 한성의 5부에서 1만여 인이 사망했다는 소문을 듣기도 하였다.108) 그 외 다른 사료에서도 도성의 감염병 유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당시 동지사로 참여한 서장관 서유문(徐有聞)이 남긴 연행록에서도 도성의 감염병 유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109) 이를 통해 정조 23년(1799)의 감염병이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주었음을 보여준다.
약 12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전국적인 감염병 유행 후에 노상추 일가 또한 상당한 피해를 받았다. 노상추는 당시 선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 사정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으나 해당 지역에서도 감염병이 유행하였다. 양서 지역부터 유행한 감염병은 차츰 다른 지역까지 전파되었으며, 그의 고향인 선산도 예외가 아니었다.110) 2월 3일 노상추가 영남의 소식을 들으니, 감염병이 선산과 인동 사이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다며 걱정이 된다고 기록한 바 있다. 다음 날에도 황해도, 평안도, 경기 지역에서는 병이 잦아들고 있지만, 삼남 지역과 함경도에 감염병이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하였다.111)
노상추도 이때 가족을 잃었는데, 다름 아닌 형수와 셋째 부인이다. 2월 10일 선산으로부터 집안 편지를 받았는데, 죽은 형 노상식의 처(형수)가 2월 1일 감염병으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일기에 따르면 올해 나이가 61세인데, 아프기 시작한 지 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노상추는 올해가 죽은 형의 회갑이라 언문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죽고 다음 날인 2일에 도착했다는 것에 애통해하였다.112) 거기다 2월 24일에는 셋째 부인 달성 서씨가 사망하였다.113) 셋째 부인은 해수병[咳嗽之症]을 4년 동안 앓았고, 2년 전 자식이 죽어서 상심이 컸는데 감염병이 더해져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안동에 있던 누이는 감염병을 겪고도 살았다.114)
이처럼 가족을 잃고도 노상추는 바로 고향에 내려갈 수 없었다(정해은, 2019: 206-207). 무엇보다도 같은 해 6월 25일 “지금 큰형수와 부인이 죽었으니 부모의 기일을 맞을 때마다 안채에는 일하는 며느리가 없게 되었고 우리 형제는 벼슬살이하느라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인정으로 볼 때 끝없는 슬픔이 예전보다 각별하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관직에 근무 중이기에 고향으로 가기 힘든 상황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115) 공교롭게도 노상추는 정조 22년(1798) 12월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116) 당시 우림 위장이었으나 근무도 다른 사람에게 직숙을 부탁하고 먼저 돌아갔을 정도였다.117) 심지어 1월 8일에는 병조에 병을 사유로 교체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병조도 상황이 좋지 못한지 노상추에게 몸조리 후 다시 직임을 살피라고 하였다.118) 일기에 따르면 2월까지 병으로 인해 병조판서에게 교체를 세 번이나 요청하였으니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다가,119) 그 후 7월이 되어서야 교체되어 고향에 내려갈 수 있었다.
당시 노상추가 몸이 좋지 않음에도 쉽게 교체되지 않은 배경에는 대규모 감염병 유행으로 인한 전현직 관원들의 죽음이 있었다. 노상추는 정조 23년(1799) 1월 한 달 동안만 전현직 관원 40명의 죽음을 기록하였다.120) 이 기록 또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니 실제로는 더 많은 관원이 사망했으리라 추정된다. 일기에 따르면 최소 대신 3명과 관찰사 4명121)이 사망하였는데 특히 채제공(蔡濟恭)의 죽음은 노상추에게 “임종 때에도 여전히 영남 사람을 잊지 않고 이렇게까지 돌보아주셔서 우리들이 의지하고 받든 것이 헛되지 않았으니, 재상에 대한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은 갈수록 한이 없다”라며 큰 슬픔을 주었다.122)
많은 관원의 죽음은 곧바로 후임자 차출로 이어졌다. 1월 말 조정 내에서 사망한 전현직 관원 20여 명의 제사 물품을 지급하는 문제를 논의하였고,123) 2월에는 주요 대신들의 시호를 증여하였다.124) 2월 8일에는 주요 관찰사와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방어사 등 30명이 임명되었다.125) 비록 죽어도 제대로 장례를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126) 조선 조정에서는 감염병 극복을 위한 여러 가지 대응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관료 시스템 유지에 힘을 기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정조 23년(1799) 감염병에 대한 조정의 대응은 어떠하였는가?127) 당시 조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통상적인 선에서 조치하였다.128) 국가에서는 백성들을 구휼하여 피해를 줄이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우선 감염병 유행으로 병을 치료하기 어려운 자나, 죽어서 장사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진휼청에서 임시로 막을 지어 수용해 돌보도록 하였다.129) 가령 노상추의 고향 선산 지역의 경우, 선산 부사 박명섭이 초봄에 감염병이 유행했을 때 빈민을 뽑아 이교(吏校)를 나누어 보내 세 차례 양식을 주고, 막을 지어 편하게 지내게 하여 구제하는 데 신경을 썼다며 영남 암행어사 김희순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30)
특히 양서 지역의 피해가 컸기에 해당 지역에 여러 조치가 이루어졌다.131) 양서 지역에서 호조로 곡물 운반하는 것을 일시 정지하도록 하였고,132) 양서 지방에 관문과 진문의 취점(聚點)을 정지하였다.133) 1월 말에도 감염병의 피해가 계속되자 굶주리고 장사를 치르지 못한 이들에게 휼전(恤典)을 제급하였고, 양서 지역에서 함부로 신역을 충당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내렸다.134) 또한, 조정에서는 부민(富民)에게 구료하고 염하여 매장하게 하고, 그 부민에게 2-3품의 자급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는데, 일례로 곡산부에서는 5명의 백성이 응하여 모두 자급을 제수받았다.135)
이와 더불어 여제(厲祭)를 시행하였다. 여제는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인데, 여귀는 후손이 없는 귀신으로 의지하여 돌아갈 바가 없어 백성에게 화를 일으키는 귀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인 여귀에게 제사를 지내 피해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주로 감염병이 발생했을 때 여제를 진행하였다.136) 그리하여 이 당시에도 중앙뿐만 아니라 감염병이 치성한 곳까지 제사를 거행하도록 하였다.137)
또한, 이 시기 소의 도축을 일시적으로 허락하였다. 원래 소는 농경에 필요한 동물이기에 도축을 제한하는 것이 원칙이다.138) 그러나 1월 10일 백성이 계속 사망하는 것을 염려하여 20일까지 소를 잡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다. 이때 노상추는 그러나 5부에서 도축한 소는 넘쳐나는데 소고기값이 올라서 도살을 금지했던 때와 같다고 괴이하다고 묘사하였다. 그리하여 1월 16일에 다시 도축을 금지하였다.139) 그러나 이후 영남에서는 병을 다스릴 방책으로 소를 잡으라는 지시가 있었고 소고기가 병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소를 많이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140) 실제로 같은 해 6월 암행어사 김희순의 별단에 따르면 감염병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우금을 풀어주자 대다수 지역에서 우금(牛禁)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141) 지방에서는 소를 잡아 감염병을 물리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도성에 있었던 노상추 개인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 당시에도 ‘격리’의 방법이 활용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노상추는 정조 22년(1798) 12월부터 정조 23년(1799) 1월까지 약 한 달간 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에 아픈 사람이 많았기에 몸조리하기 위해 임시로 머무는 곳을 옮긴 셈이다. 통상적으로 감염병이 유행할 때 거처를 옮기듯이 노상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1월 2일 선전관 이응회의 바깥방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1일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다만 철저하게 격리하지는 않았는지 거처를 옮긴 후에도 찾아오는 이들을 만났고, 귀가한 후에는 병문안을 오지 않은 이들을 비판하였다.142)
여기에서 노상추가 스스로 치료를 위해 어떤 의료 행위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타지에서 근무할 때의 경험을 보면, 나름대로의 의약적 대응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일례로 정조 11년(1787) 진동 만호로 있었을 때 노상추는 이질을 앓았는데 갑산 부사에게 증세를 적어 약을 부탁하여 처방받았다.143) 정조 22년(1798) 7월 도성에서 근무할 때 약 한 달간 이질 증세로 고생하였는데 청서육화탕(淸暑六和湯)과 삼근탕(三根湯)을 복용한 바가 있다.144) 또한 순조 3년(1803)에 학질로 인해 통증이 심하였을 때, 어의(御醫) 현동지(玄同知)의 처방이라는 시평탕(柴平湯)을 복용하고 회복하였다.145) 이처럼 질병으로 고통받을 때 해당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이용하거나, 효과 있는 처방을 공유하여 치료를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146) 마침내 감염병이 사그라든 이후 9월이 되어서야 노상추는 마침내 고향에 내려가 형수와 셋째 부인의 무덤을 모두 방문하였다.147)
정리하자면 노상추가 정조 23년(1799)의 감염병 관련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개인의 건강을 비롯해 고향과 가족의 사정이 직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비록 감염병 대처 과정은 일기에서 비중이 감소하였지만, 편지를 통해 고향과 가족의 사정을 주기적으로 확인하였고, 조보를 통해 전국의 감염병 유행 소식을 기록하였다. 둘째, 그의 일기가 업무일지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기에, 전현직 관원들의 죽음과 임명 상황을 상세히 남긴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관원의 교체와 함께 소의 도축 일시 금지 등 국가의 구휼 시스템 유지와 감염병 극복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따라서 해당 사례는 감염병에 대한 노상추 개인과 집안의 대응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의료 관리가 어떻게 작동하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은 기록이라 생각한다.
5. 맺음말이상 본 논문에서는 『노상추일기』에 나타난 18~19세기 감염병의 양상과 더불어 노상추 및 그 일가의 대응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도 노상추가 고향에 머물렀던 시기와 관직 근무를 한 시기의 서술 경향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전자의 경우 고향의 동태를 비롯하여 일가 친족들의 구체적인 증상과 처방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으며, 반면 후자는 조보를 통해 중앙을 포함한 여러 지역의 근황과 피해를 다루고 있었다. 아울러 일기가 작성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두창, 홍역 등 다양한 감염병이 수시로 발생하였고, 노상추 일가 또한 여러 가지 감염병에 걸린 이력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두창과 같은 감염병에 걸렸을 때의 의약적 조치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원을 만나거나 약국에 가서 직접 약재를 구하는 직접적인 대응부터 다른 장소에 일시적으로 대피 혹은 환자를 격리하는 등의 조치까지 자세하게 나타났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관직 생활 중에 경험했던 정조 23년(1799)의 대규모 감염병 유행의 경우 전현직 관원의 사망을 비롯하여 조정의 대응과 전국의 피해 실태를 정리해 일기의 형식으로 남겼다. 노상추가 일하고 있던 도성의 사정뿐만 아니라 고향에 있는 가족의 피해 상황을 기록하였고, 관원인 상황에서 감염병이라는 재난을 만났을 때의 긴박함과 국가의 대응 등을 또한 포착할 수 있었다. 노상추가 이를 상세히 기록한 이유는 감염병이 집안의 대소사와 직결되는 것과 동시에 일기를 일종의 업무 일지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본고는 『노상추일기』라는 구체적인 자료의 감염병 관련 항목을 정리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조선 후기 감염병과 의료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본 연구는 어디까지나 『노상추일기』라는 개별 사료를 중심으로 한 것이며, 여전히 감염병 관련 내용이 담긴 일기들이 많이 남아있다. 따라서 이들 일기 자료에 대한 미시적 검토를 통해 각 사례를 정리 및 축적하여 조선 후기 감염병 생활상, 나아가 사회상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도출해 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변화상을 포착하는 것을 추후 연구 과제로 삼고자 한다.
Notes1) 우리나라는 2010년부터 종전의 ‘전염병’이라는 용어를 전염성 질환과 비전염성 질환을 모두 포함하는 ‘감염병’으로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법률 제9847호)). 질병 관련 개념으로 전염병, 돌림병, 시기병, 유행병 등의 표현이 있는데(이경록, 2021: 3-5) 본고에서는 여러 질병을 포괄할 수 있는 ‘감염병’이라 통칭하고자 한다. 2) 본고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5년에 발간한 한국사료총서 49집 『盧尙樞日記』와 김지홍·원창애·이선희·정정남·정해은이 번역한 『(국역) 노상추일기』 1-12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17-2020)를 참고하였다. 3) 전체 68년의 분량 중 총 53년간의 일기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17세(1762년), 30세(1775년), 38세(1783년), 52세(1797년), 56세 후반(1801년 7월~12월), 59세(1804년), 60세(1805년), 61세(1806년), 62세(1807년), 68세(1813년), 72세(1817년), 73세(1818년), 74세(1819년), 75세(1820년), 76세(1821년)의 일기는 빠져있다. 8) 정조 10년(1786) 5월 3일부터는 동궁에게 홍역의 조짐이 있었는데, 조보와 분발을 통해 그 경과를 지켜보았다(『노상추일기』, 정조 10년(1786) 5월 3일; 4일; 5일; 6일; 7일; 8일; 9일; 10일; 11일). 왕세자는 결국 사망하였는데 이때 노상추는 며칠 만에 경사가 재앙으로 바뀌어 망극할 따름이라며 의관들이 동궁의 홍역을 치료할 때 마지막에 삼과 부자를 쓴 것이 통탄스럽다 하였다(『노상추일기』, 정조 10년(1786) 5월 12일, 15일). 실제로 죽기 전날 인삼차를 복용하였는 데 이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정조실록』 권21, 정조 10년(1786) 5월 10일 임자; 『일성록』, 정조 10년(1786) 5월 10일 임자). 11) 정약용은 “내가 강진에 있을 때인 가경(嘉慶) 기사년(순조 9년, 1809), 갑술년(순조 14년, 1814)에 큰 기근을 당했고, 그 이듬해(순조 15년, 1815) 봄에 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다”고 기록한 바 있다(『牧民心書』 愛民 寬疾). 15) 감염병에 대한 주요 설명은 김호, 1993: 128-130; 권복규, 2000: 56-62; 신동원, 2013: 145-227; 김성수, 2009a: 113-210; 김호, 2009: 211-317 참고. 16) 전체 감염병 관련 기사를 정리해 보았을 때 노상추 일가와 그 주변 경상도 일대의 내용이 가장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본고에서는 전체 통계 수치를 제시하기보다는 비교적 질병 구분이 분명한 사례를 중심으로 그 대응 과정을 살펴보았다. 시기별로 일기의 서술방식의 차이가 커서 단순한 수량으로 비교하기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장년기 시절에는 한양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근무하거나 고향에 다녀오는 경우가 있어 장소의 이동이 잦고, 정조 23년(1799)의 사례가 집중적으로 서술되므로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각 시기의 감염병 근황을 수치로 살피기에는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구체적인 통계 분석은 3장 청년기 시절의 노상추 일가의 병력 분석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17) 두창의 주요 증세는 처음에 감기와 비슷하게 열이 나다가, 얼굴이나 팔다리에 돌기가 올라온다. 그 돌기가 부풀어 오른 뒤 곪았다가 나으면 딱지가 만들어지고, 딱지가 떨어져 나가면 나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홍역은 두창과 증세가 비슷하지만, 두창의 경우 완두콩만한 돌기가 솟아오르고, 홍역은 작은 돌기가 솟아오른다는 차이가 있다. 병의 초기에는 홍역과 두창을 구별할 수 없었지만 16세기 중후반 이후 의학서에서 두 질병을 구분하게 되었다(정연식, 2005: 98-100). 가령 용어에서도 조선 전기에는 두창을 두진(痘疹)이라 하여 두창과 마진을 포함하는 발진성 질환을 나타내었지만, 16세기 후반부터 두창과 반진을 구별하기 시작하였다(김호, 1996b: 137-155). 18) 조선 후기 종두와 관련하여 金斗鍾, 1981: 339-347; 김옥주, 1993: 53-56; 김호, 2016: 84; 신규환, 2022: 63-72 참고. 20) 『노상추일기』, 순조 24년(1824) 5월 12일. “曾孫山嶽以年前種痘甚未瀅, 今日於前更爲, 今果發㿀巳四日而箇數不過遍身數十箇, 初痛三日大叚, 而發㿀以後逝戱如常, 庶孫天錫初次與中嶽同時種痘, 過十日不痛, 故更種之.” 23) 정약용 저, 김남일·안상우·정해렴 역, 『마과회통』 (서울: 현대실학사, 2009), 348-349쪽; 『비변사등록』, 영조 51년(1775) 7월 30일; 『정조실록』 권21, 정조 10년(1786) 4월 10일 계미; 『승정원일기』 1858책, 순조 2년(1802) 9월 25일 계사; 『승정원일기』 2161책, 순조 22년(1822) 12월 10일 경술. 30) 경상도 지역마다 약방(藥房), 약계(藥契), 약국(藥局), 약보원(藥保院), 약원(藥院), 의국(醫局) 등의 기구와 약보(藥保), 심약(審藥), 의생(醫生), 약한(藥干) 등의 직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유희전, 2020: 7-9). 32) 노년기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주로 본인이 아플 때마다 의원을 만나 진찰받았고, 처방받은 약의 종류를 남기기도 하였다(『노상추일기』, 순조 27년(1827) 1월 13일; 순조 29년(1829) 8월 30일). 아들 승엽의 경우 치질을 앓았는데 의원 권응탁과 이자손을 만나 치료받는 과정을 남기기도 하였다. 지방에도 전문의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노상추일기』, 순조27년(1827) 11월 17일; 11월 24일; 11월 25일; 순조 28년(1828) 8월 18일). 34) 선행연구에서는 안도감과 안의원에 대해 언급할 때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원 활동과 약국 활동을 함께 했다고 보았다(유희전, 2020: 13). 앞서 의국계의 의국도감을 누구로 할지 갈등을 빚은 사례를 언급한 바 있는데, 만약 안 의원이 의국도감을 맡은 자라면 지역 내 위상이 어느 정도 있는 사족으로 추정된다. 35) 오천운(吳千運)은 노경임의 5세 종손 노계훈의 사위로 노상추의 아버지인 노철과 친한 관계이다(정해은, 2022: 25). 오만운은 오천운의 큰형이다. 39) 『동의보감』 발간 이후 서울을 비롯해 지방까지 책이 보급되었으며, 또한 동의보감을 간편하게정리한 의서가 간행되거나, 특정 병만을 다루는 전문 의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김호, 2000: 197-218). 『노상추일기』에는 노상추가 어떤 의서를 참고했다던가, 의서를 소장한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의서는 대부분 『동의보감』의 영향을 받았기에 해당 의서를 중심으로 처방을 비교했다. 47) 『노상추일기』 국역본에서는 이중고신목향산을 이중탕(理中湯)과 고진탕(固眞湯)에 쓰는 약재와 목향을 가루로 만든 약으로 추측하였다. 이중탕은 태음병으로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하며 갈증이 없는 경우 사용하고(『동의보감』 잡병편 권2 寒(上) 太陰形證用藥 理中湯), 고진탕은 두진으로 인한 설사를 치료할 때 사용하며(『동의보감』 잡병편 권11 小兒 痘瘡諸證 泄瀉 固眞湯), 목향산은 두창으로 인한 복창, 갈증, 설사를 치료하는 약이다(『동의보감』 잡병편 권11 小兒 痘瘡諸證 嘔吐 木香散). 49) 당시 남동생과 여동생이 두창을 피해 신기(新基)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정황상 남동생의 자녀인 것으로 추측된다. 『노상추일기』, 영조 50년(1774) 2월 22일; 2월 27일; 3월 4일; 3월 6일; 3월 7일. 50) 『노상추일기』, 영조 50년(1774) 3월 8일; 3월 9일; 3월 11일; 3월 12일; 3월 13일; 3월 14일; 3월 15일; 3월 16일; 3월 17일; 3월 18일; 3월 19일; 3월 20일; 3월 21일; 3월 22일; 3월 23일; 3월 25일. 사돈집에서 아팠는데, 밤에는 안식구들이 모두 옆집에 있는 여자종의 집으로 피하고, 낮에는 안채의 작은 방에 들어가 거처해 병시중을 들었다. 상근의 처남이 안채의 작은방에 거처 하며 음식 제공하여 노상추가 감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58) 노상추일기』, 순조 16년(1816) 4월 11일; 4월 17일; 4월 18일; 4월 19일; 4월 20일; 4월 21일; 4월 22일; 4월 24일; 4월 25일; 4월 29일; 4월 30일; 5월 1일; 5월 2일. 63) 『노상추일기』, 영조 39년(1763) 12월 24일; 영조 43년(1767) 12월 24일; 영조 49년(1773) 4월 22일; 12월 13일; 영조 50년(1774) 2월 21일; 2월 27일; 4월 1일. 79) 『노상추일기』, 영조 46년(1770) 5월 5일; 5월 13일; 영조 49년(1773) 6월 25일; 정조 즉위년(1776) 5월 13일; 정조 2년(1778) 6월 24일; 정조 3년(1779) 5월 12일; 순조 14년(1814) 11월 5일; 11월 10일. 89) 영조 40년(1764) 노상추가 산장(山長)을 대신해서 여제 헌관으로 향교에 들어가 제사를 거행한 적이 있다. 그의 친척 형도 1768년 여제에 참석했다는 기록도 있다(『노상추일기』, 영조 40년(1764) 3월 3일; 영조 44년(1768) 7월 15일). 90) 일례로 18세기 전반 상주에서 거주하던 권상일(權相一)이 남긴 『청대일기(淸臺日記)』에서도 피접 사례 외에도 서울로 과거시험을 볼 때 감염병이 발생한 지역을 피해서 이동하거나 일정이 지체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편지를 주고받을 수 없어 소식을 전달할 수 없는 어려움을 확인 할 수 있다(『淸臺日記』, 영조 3년(1727) 8월 4일). 또한 고성에서 살았던 구상덕(具尙德)이 쓴 일기인 『승총명록(勝聰明錄)』에도 가족과 마을의 감염병 대응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데, 괴질을 치료하기 위해 마을에서 징이나 북을 두드리며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광경을 묘사하기도 하였다(『勝聰明錄』, 영조 6년(1730) 6월 13일). 91) 『노상추일기』, 정조 11년(1787) 3월 2일; 정조 12년(1788) 7월 23일; 정조 16년(1792) 2월 5일; 정조 17년(1793) 5월 23일; 순조 10년(1810) 6월 8일. 92) 정조 23년(1799)의 감염병 유행과 관련하여 최근 두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모두 『하와일록(河窩日錄)』을 중심으로 당시의 감염병 유행 실상과 국가 및 개인의 대응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와일록』은 안동에 사는 풍산류씨 가문의 류의목(柳懿睦)이 정조 20년(1796)부터 순조 2년(1802)까지 작성한 일기이다. 다만 같은 사례를 다루었음에도 연구의 결론은 조금 다른데, 김정운은 국가가 국가공동체 유지를 위해 감염병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고 민간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인식했다고 평가하였다(김정운, 2021: 14-25). 반면 이광우는 감염병에 대한 국가의 조치가 미흡했을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거리 두기를 제대로 하지 않아 피해가 컸음을 지적하였다(이광우, 2021: 593). 93) 선행연구에서는 해당 질병을 인플루엔자(독감)로 판단하였다(황상익, 2020: 3-7). 94) 『노상추일기』, 순조 11년(1811) 1월 9일. “初九日己未, 暘寒如昨. 無異己未胡感, 而無人不痛云. 兵判尙不出仕, 公忠水使身死代, 姑未行政, 新延下人之來待, 已過五日. 笑歎笑歎.” 103) 일례로 문인 윤기(尹愭)는 시의 서두에 “무오년(1798) 겨울부터 기미년(1799) 봄에 이르도록 독감이 유행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국(청나라)에서 시작하여 죽은 이들이 몹시 많았고, 청나라 건륭제까지 이 질병으로 붕어하였다. 마침내 우리나라 국경을 넘어 열흘 만에 도성까지 번졌고, 공경 이하로 죽은 이가 열에 두셋은 된다.”고 남겼다(『無名子集』 詩稿册四 詩. “自戊午冬末, 至己未春, 毒感遍行, 人言自大國而始, 死者甚多, 乾隆帝亦崩其疾, 遂越我國地境, 旬日之間, 直抵京都, 人無得免者, 而公卿以下死者十二三, 蓋沴氣劫運也, 詩以記之.”) 안동에 거주하던 류의목도 이번 감염병은 호국(청나라)로부터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었고 특히 의주와 한양의 피해가 심하다는 기록을 남겼다(『하와일록』, 정조 23년(1799) 2월 22일; 3월 3일). 109) 서유문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새해가 되기 전 괴이한 감염병이 크게 성하여 도성에서 7만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대신 3명과 도백 4명 등 많은 관원이 일어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편지로 접하였다(『戊午燕行錄』, 정조 23년(1799) 3월 3일). 류의목도 한양에서 6만 3천 명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하와일록』, 정조 23년(1799) 3월 3일). 110) 이때 경상도 사망자 1만 5,532구 중 선산부 지역은 334구 사망하였는데(『일성록』, 정조 23년(1799) 3월 30일 무자),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戶口總數)』(奎1602)와 비교해보면 (8,863호, 42,972구) 대략 0.7% 정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113) 노상추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 앞서 월성 손씨, 풍산 유씨와 혼인하였으나 모두 출산 후유증으로 일찍 사망하였고, 달성 서씨와 세 번째로 혼인하였다. 세 번째 아내와는 앞의 두 부인과 달리 약 26년간 부부로 살았다. 그러나 혼인 후 10년 되던 해부터 노상추가 관직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함께 산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하였다(문숙자, 2009: 41-76). 116) 그는 이 당시 일기에 ‘찬 바람을 쐬니 더 악화되어 아프다’, ‘병에 가래가 그윽해 고통이 심하다’, ‘가래가 그윽하고 기침을 하고 있어 일어나 활동할 수 없다’고 서술할 만큼 통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노상추일기』, 정조 22년(1798) 12월 22일; 12월 27일; 정조 23년(1799) 1월 4일; 1월 6일. 이는 당시 유행했던 감염병의 증세와 유사하다. 121) 강원도 관찰사 홍인호, 황해도 관찰사 이의준, 평안도 관찰사 민종현, 경상도 관찰사 이의강 등도 같은 시기에 사망하였다(『노상추일기』, 정조 23년(1799) 1월 7일; 1월 9일; 1월 18일). 이 4명의 죽음은 연대기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정조실록』 권50, 정조 22년(1798) 12월 19일 무신; 12월 29일 무오; 『승정원일기』 1803책, 정조 23년(1799) 1월 18일 정축; 1월 27일 병술). 122) 『노상추일기』, 정조 23년(1799) 2월 1일. 『하와일록』에서도 ‘영남의 운수가 쇠할 것’이라며 지역의 큰 슬픔으로 기록되었다(『하와일록』, 정조 23년(1799) 2월 1일; 2월 2일). 참고로 노상추는 영남 남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정해은, 2009: 211-212) 채제공의 죽음을 특히 안타까워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채제공의 시호에 대해 공정하게 정해졌는지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노상추일기』, 정조 23년(1799) 2월 6일; 5월 1일). 노상추에게는 영남 남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126) 가령 심진현과 심흥영의 경우 각각 금화현과 초산부에서 사망하였는데, 심진현은 죽은 지 10여 일 만에 빈소를 차려서 염을 하였고, 심흥영은 1백여 리나 떨어진 곳까지 시체를 메고 갔다며 이후 금화현감과 초산 부사를 조사하는 일이 있었다(『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1799) 5월 22일 기묘). 노상추도 이웃에 살던 이유철과 그의 집 노비가 한꺼번에 3명이나 사망하였는데 사망한 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관으로 사용할 나무를 얻을 수 없어 방에 시체를 둔채 상주가 직접 양주에 가서 널판을 구해온 일을 목격한 바 있다(『노상추일기』, 정조 23년(1799) 1월 1일; 1월 18일). 128) 『경국대전』 예전 혜휼조에서도 병을 앓고 있는 이에게 의원과 약을 보장해준다는 조항이 있으나 『속대전』에 서울과 지방에 역병이 돌 때 온 식구가 사망하여 시신을 매장하지 못할 경우 호조와 진휼청 및 여러 도에서 휼전을 거행한다는 조항이 생겼다(“京·外癘疫時, 全家合沒而未得收瘞者, 令戶曹·賑廳及諸道, 恤典擧行”). 또한 정조대에는 「자휼전칙(字恤典則)」, 「진역구료절목(疹疫捄療節目)」을 비롯한 재난과 감염병 극복을 위한 여러 조치가 이루어졌다(김호, 1996a: 233-249; 신동원, 2014: 603-631; 이기봉, 2020: 14-29). 142) 『노상추일기』, 정조 23년(1799) 1월 7일; 1월 8일; 1월 16일; 1월 18일; 2월 16일. 일례로 한사겸 부자는 본인이 아픈 지 26일이나 되었는데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는데, 특히 그가 노론이라고 지적하였다. 반면 장지원은 문안을 왔지만, 문안 자격이 없는 자라며 경상도 노론 친지들에 붙어 정론을 배척하고 있다고 그를 반기지 않았다. 143) 『노상추일기』, 정조 11년(1787) 11월 8일; 11월 10일; 11월 11일; 11월 12일; 11월 13일; 11월 15일; 11월 16일. 당시 그는 메밀가루, 바다쑥, 생강, 동변 등을 활용하였다. 144) 『노상추일기』, 정조 22년(1798) 7월 21일; 8월 10일. 『동의보감』에서 이질에 효과 있는 약으로 청서육화탕을 언급한 만큼 이는 타당한 조치로 보인다. 그 뒤에 복용한 삼근탕은 사용한 재료까지 기록으로 남겼는데, 『동의보감』에 실린 것과 달리 원래 제조법보다 재료를 적게 쓴 것으로 여겨진다(『노상추일기』, 정조 22년(1798) 8월 3일; 『동의보감』 잡병편 권3 寒下暑病吐瀉; 『동의보감』 내경편 권4, 大便 痢疾諸證; 『동의보감』 내경편 권4, 大便 痢疾諸證). 145) 『노상추일기』, 순조 3년(1803) 7월 27일; 7월 29일; 8월 1일. 이후 순조 11년(1811)에도 같은 약을 활용하여 학질을 치료하였다(『노상추일기』, 순조 11년(1811) 7월 8일; 7월 9일; 7월 10일; 7월 12일; 7월 14일). 146) 이 밖에도 노상추는 서울에서 아플 때 의원을 만난 적이 여러 차례 있다(『노상추일기』, 정조 16년(1792) 5월 14일; 5월 15일). 특히 종기로 고생하자 종기를 치료한다는 황 의원을 만나 진단받기도 하였다(『노상추일기』, 정조 24년(1800) 3월 7일; 4월 7일).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도성에서 근무할 때의 노상추도 의약 활동을 여러 차례 했으리라 판단되지만, 서울과 지방의 의료 환경을 구체적으로 비교하기에는 서울에서의 의약 활동 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일기만으로는 비교가 어렵다. 다만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어의의 처방까지 입수했을 정도면 지방에 있을 때보다 열악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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