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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2); 2022 > Article
사이토 총독 시기 신설 도립의원에 관한 지정학적 고찰*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fifteen Jahye hospitals and provincial hospitals which were established or relocated during Governor-General Saito’s regim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se hospitals by connecting them to the directions of Japanese colonial policies, the political beliefs of the governor-general, and their necessity by the local people. The period of expansion of provincial hospitals was divided in to three different periods. The periods are divided as follows: the first appointment of Saito as the governor-general, the period when Jahye hospitals turned into provincial hospitals, and when Saito got reappointed as the governor-general. It analyzes the natural and human geographical environment of each region where Jahye and the provincial hospitals were organized. Based on this analysis, it investigates the geopolitical features of Jahye and provincial hospitals which were established on the Governor-General Saito era.
First, the areas that the Joseon Governor-General was interested in establishing Jahye and the provincial hospitals were military points useful for keeping Russia in check and managing the Manchurian region. In addition, those areas were rich in resources needed by Japan and transportation centers which were useful for the collection and distribution of goods. Second, the regions where provincial hospitals were built were rice-producing areas and leading export ports which were related to the rice production growth plan in the early 1920s. Also, the region’s own economic power was able to run the hospitals. Third, at the stage of deciding to install a new provincial hospital, there were conflicts due to concerns over the deterioration of the status of nearby areas and existing regions and the difficulty of operating provincial hospitals. Fourth, each provincial hospital was divided into independent provincial hospitals, provincial branch members, provincial branch offices, etc. according to the region’s size and population. Among them, some provincial branch members and provincial branch offices were promoted to independent hospitals due to the development and expansion of the region and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patients who used the hospitals. Also, it was revealed that in the process of expanding a city, some regional hospitals were turned into provincial hospitals.
In conclusion, the provincial hospitals which were newly built in during the Governor-General Saito era were established in military and economically useful areas for the Japanese colonial rule. Also, transportation facilities such as railroads were installed in the areas, and this lead to concentration of infrastructure and industrial facilities such as companies and factories, which in turn made possible the increase of population, especially the population of Japanese people.

1. 서론

일제강점기 지방민의 질병을 관리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관립 의료기관은 한일병합 직전인 1909년 자혜의원의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자혜의원은 1909-1910년 전국 13도 도청소재지에, 1912년 의료환경이 열악한 벽지 5곳에, 1916년 한센인 수용 치료를 위해 소록도에 설립되었다. 1919년 사이토(齋藤實) 총독 취임 이후 일반인 대상의 관립 자혜의원의 신설이 다시 시작되었다. 관립이었던 자혜의원은 1925년 4월 1일, 소록도자혜의원을 제외하고 모두 도립의원으로 전환되었으며, 1945년 해방 시점에 식민지 조선에는 46개의 도립의원이 운영되고 있었다.1)
도립의원에 대한 연구는 기존 자혜의원 연구를 진행하면서 도립의원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정리하였고(신동원, 1997; 박윤재, 2009), 특정 지역의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연구가 있으며(한동민, 2004; 박인순, 2016; 장민숙, 2020; 김영수, 2021), 최근 도립의원 관제 및 규정, 구성원, 재정 상태 등을 분석한 도립의원 연구가 발표되었다(이방원, 2021). 기존 연구를 통해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이 근대문명 이식의 지표로서 식민지 통치의 정당화, 일본 주둔군 및 일본 식민 이주자들의 건강 보호, 빈궁 시혜로 인한 민심 획득을 목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조선인에게 미치는 실질적 의료 혜택은 일제 당국이 선전했던 것과는 괴리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본 연구는 기존 연구에서 나아가 도립의원의 성격을 밝힐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전국에 산재한 도립의원의 설립 시기와 그 지역적 특성을 밝히고자 한다. 도립의원 관련 사료를 살펴보면서 초기에 설립된 자혜의원을 제외하고, 원주와 같은 특정 지역은 지역민의 열성적인 도립의원 설치 운동에도 불구하고 2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설립되었던 반면 또 다른 특정 지역인 장전 및 삼척 등은 2-3년 만에 빠르게 설립되는 상황을 발견하게 되었다.2) 이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총독부 도립의원 설립 인가 배경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 정책 방향, 식민지 조선의 최고 통치권자였던 총독의 정치 신념 그리고 지역민들 자체의 필요성을 연관시켜 확인함으로써 도립의원 설립의 시기별 · 지역별 특성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연구를 시작할 당시 연구 대상은 사이토 총독의 1차 재임 시기 1개소의 이전 자혜의원, 11개의 신설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그리고 사이토 총독 2차 재임 시기 3개, 우가키 총독 시기 4개, 미나미 총독 시기 9개, 고이소 총독 시기 1개의 신설 도립의원이었다[부록 1]. 사이토 총독 이후 총 1개의 이전 자혜의원과 28개의 신설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지역의 자연 및 인문지리적 상황과 해당 시기 국내외 정치적 상황, 총독의 통치 방향 등을 연결하여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또한 1920년대와 1930년대 특히 중일전쟁 이후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조선통치 정책은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각 총독 시기별로 신설 도립의원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찰함으로써 정책 변화에 따른 신설 도립의원의 지역적 특성 차이 유무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각 총독 시기별 지정학적 특성을 고찰하면 전체 도립의원의 지정학적 특성의 공통점 및 차이점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본 연구는 그 첫 번째 단계로 사이토 총독 시기에 이전한 1개소의 자혜의원, 신설된 14개소의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에 주목하였다. 도립의원의 신설 시기 및 지역에 관한 특성을 확인하고자 시작한 연구이나 사이토 총독 초기 이전 · 설립된 9개소의 자혜의원도 본 연구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들 9개소의 자혜의원도 사이토 총독의 동일한 의료 정책하에서 이전 · 설립된 지방공공의료기관으로, 1925년 4월 1일을 기하여 모두 도립의원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사이토 총독 시기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이 신설되는 시기를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1기는 자혜의원의 이름으로 신설되는 1925년 4월 1일 이전 시기, 2기는 1925년 4월 1일 도립의원으로 전환된 이후 사이토 총독이 해임되는 시기, 3기는 사이토 총독의 재부임 후 도립의원이 설립되는 시기로 구분하고 각 지역의 자연지리와 인문지리적 특성을 정리하였다. 해당 시기에 이전, 신설된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의 지역은 <표 1> 및 <그림 1>과 같다.3)
다음으로 각 도립의원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여 사이토 총독 시기 신설된 도립의원 나아가 일제시기 도립의원에 대한 이해를 풍부히 하고, 이를 토대로 일제강점기에 지방거점병원인 도립의원의 설립 의도를 확인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위해 『조선총독부30년사』, 『조선도립의원요람』, 『조선도립의원개황』, 당시 신문사료와 기존 연구성과 등을 활용하였다. 특히 당시 신문 사료는 각 지역의 도립의원들이 설립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본 연구를 진행할 때 주요 사료로 도움을 받았고, 도립의원이 신설된 지역에 관한 기존 연구성과는 해당 지역의 변천을 살펴보는데 유효하였다. 본 연구가 일제강점기 도립의원 설치 지역의 지정학적 성격을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총독부의 지방의료정책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를 기대한다.

2. 1기(1919.8.12.-1925.3.30.) : 사이토 총독 부임과 신설 자혜의원

1919년 3・1운동 이후 8월 조선 총독으로 임명받은 사이토 총독은 부임 직후 문치주의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고 총독부 관제 개정과 더불어 제반 정책을 시행하였다. 사이토 총독은 무단통치 기간 중 행해진 헌병대의 통제, 각종 권리 제약, 그리고 경제 침탈 등으로 인한 조선인의 불만을 유화시키고 내지인과 동일한 정치상, 사회상의 대우를 한다는 것을 표방하면서 문화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중 하나가 위생시설의 정비였다. 사이토 총독은 부실한 의료환경 개선을 위해 이미 설립되어 있던 의원의 증・개축, 의료분과의 증치, 간호부 양성과 초빙 등을 계획했다. 또한 필요한 곳에 의원(醫院)을 신설하고, 궁벽한 지역에 공의(公醫)의 배치를 늘려 의료기관의 완성을 도모해 제생(濟生), 구료(救療)의 결실을 거두겠다고 천명하였다(박찬승ㆍ김민석ㆍ최은진ㆍ양지혜, 2018: 303-304; 467; 이방원, 2021: 88). 조선총독부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조선총독부의원과 이미 설치된 자혜의원의 증개축 확장을 계획하였고, 1920년에는 자혜의원의 증설 계획도 수립하였다.6) 1920년 8월 조선총독부는 기존 자혜의원 외에 다시 13도에 자혜의원 증설을 계획하고 증설 후보지를 내정하였다. 각 도에 증설되는 자혜의원의 기지와 기지 정리비 등은 해당 지방 유지의 기부로 충당해야 함을 알리고, 도에서 승인하는 회답이 있으면 신설 지역을 발표할 계획이었다.7) 이 과정을 거쳐 조선총독부는 1920년 9월 자혜의원이 신설될 12개 지역으로 경기도 개성, 충남 대전, 전북 군산, 전남 순천, 황해도 사리원, 평북 강계ㆍ선천, 강원도 원주ㆍ철원, 함남 북청ㆍ혜산진, 함북 성진을 발표하였다.8) 총독부는 1921년 5월 기존 발표한 12개 지역 외에 전북 남원, 경남 부산ㆍ마산의 3개 지역을 더하여 자혜의원 13개소와 출장소 2개소의 위치를 발표하였다.9)
1921년 당시 신설이 결정된 15개 자혜의원 중 자혜의원이 도립의원으로 전환되는 1925년 4월 1일 이전 설립된 자혜의원은 전북 남원(1922.02), 전북 군산(1922.02), 전남 순천(1922.02), 경남 마산(1922.09), 평북 강계(1922.12), 함북 성진(1923.08), 함남 혜산진(1923.11), 경기 개성(1924.01)의 8개 지역이었다.

1) 1920년 함북경성자혜의원을 나남으로 이전

사이토 총독 통치 후 가장 먼저 자혜의원의 위치 변동이 일어난 지역은 나남이었다. 나남은 일본이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러시아 견제와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함경 북부지역에 대규모 군기지 건설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주목받은 지역이다. 일본은 나남이 분지 형태로 사방이 구릉으로 둘러싸여 자연 장애물이 형성되어 있고 병영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100만여 평의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며, 약 17Km 거리에 군수물자의 출입항인 청진항을, 약 5Km 거리에 함경북도의 도청소재지인 경성을, 100Km 정도의 거리에 러시아와 중국과의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적격지로 판단하였다. 나남은 1908년 개항되어 병영건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유입으로 인구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1919년도에는 조선인 2519명, 일본인 3504명으로 일본인이 더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렇게 나남이 군사도시로서 자리를 잡아가자 1917년 5월 경성에서 나남으로의 함경북도청 이전이 결정되었다. 1919년 나남과 청진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관공서와 공공시설이 나남으로 이전되고 학교, 신사 등 주요 시설물들을 갖추게 되면서 1920년 11월 도청 이전이 완료되었다. 나남은 군사도시로 시작하여 점점 행정도시, 교통도시, 교육도시, 종교도시 등 상호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다목적 기능도시로 발전하였다(김홍희, 2017: 5-10; 36-38). 이상과 같이 나남이 발전되는 가운데 1920년 12월 함북자혜의원이 경성에서 나남으로 이전되었다.10)

2) 1922년 남원, 군산, 순천, 마산에 자혜의원 신설

나남으로의 자혜의원 이전 이후 1922년 2월 남원, 군산, 순천 지역에 자혜의원이 신설되었다. 남원은 1921년 2차 자혜의원 신설 지역 공포 때 포함된 지역으로 1년 만에 자혜의원이 전격 설립되었다. 남원에 대한 기록은 전주자혜의원 남원출장소로 시작되었다는 기사만을 찾을 수 있었으며 앞으로 사료의 발굴이 필요하다.11)
군산은 1899년 개항되었고, 이와 동시에 일본 정부는 통상무역 및 재류민 보호를 위한 군산분관을 설치하였다. 일본인들은 1901년 2월 공식 인가를 받아 군산일본인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 10월 거류민단법이 공포됨에 따라 군산일본인회는 군산거류민단으로 개칭되어 완전한 자치기관이 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이 되면서 군산은 부(府)로 승격 되었다. 호남평야에서 수확된 미곡 운송의 편이를 위한 호남선(1912년), 군산선(1914년) 철도의 개통, 전주-군산 간 포장 도로의 건설, 근대적 항만시설 구축 등으로 군산 지역은 빠르게 발달하였다. 개항연도를 기준으로 4년 후인 1903년에 10배, 10년 후인 1909년에는 30배, 그리고 1926년에는 70배의 무역증가를 기록했다. 당시 군산 무역의 대부분은 수탈된 쌀의 대일 수출이었다. 군산에는 일찍부터 대규모의 대일 쌀 반출로 인한 정미업, 일본인 거류자들을 위한 조미료업, 기타 생필품 등의 경공업이 발전하고 있었다. 1920년대 이후 군산지역에는 일본인 기업들이 속속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이들 일본인들에게 기업자금과 상업자금을 조달해주기 위한 금융기관도 설립되었다(박종현, 2006: 47-51).
이러한 군산의 발전을 배경으로 사이토 총독에 의해 자혜의원 신설지역으로 계획되었고, 그 직후인 1920년 9월 군산부민이 자혜의원 신설을 총독부에 진정하는 절차를 거쳐 총독부로부터 자혜의원 설립을 인가받았다.12) 조선총독부는 1921년 10월 11일 부령으로 군산과 순천에 자혜의원을 설립하는 것을 공포하였고13) 군산자혜의원은 1922년 2월 15일 개원하였으며, 1922년 10월 23일 개원식을 거행하였다.14)
군산과 동시기에 자혜의원이 설립된 순천에는 1905년 이후부터 일본인 거류민이 등장하고 1908년에는 28명의 일본인이 숙박업, 유곽, 잡화, 운수 관련업을 운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광고를 고려하면 행상의 범위를 넘어 정상적인 점포를 갖추고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의 읍성 내 토지 소유는 시장 상권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이러한 토지 소유는 다시 상권에 반영되어 상업시설 분포와 도심 가로망에 그대로 반영되었다(우승완, 2009: 161; 172). 1911년 일본인을 위한 심상고등소학교가 개교하였으며(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a: 82) 1914년 일본인 스와라 코타로(栖原幸太郞)가 농장을 설립하였고, 어느 시점에 설립되었는지 불확실하나 1927년에는 자하농선주식회사가 존재하였는데 이 시기 각각 90정보, 400정보 규모의 농지를 확보하고 있었다(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b: 423). 이러한 순천 지역의 변화 및 발전하에서 1922년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
마산도 군산과 함께 1899년 개항된 지역이다. 개항 이후 러시아가 마산에 극동 항구와 연결되는 선박창고를 건설하고자 하였고, 일본은 러일전쟁 물자 수송을 위해 마산선을 설립하는 등 군사적 가치로 부각되었다(김예슬, 2019: 195). 일본인의 이주는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 급증하였다. 이주한 일본인들은 그들만을 위한 신도시를 각국 공동조계지 일대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소위 신마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공간을 형성하였고, 1914년 마산이 부(府)로 승격되자 마산의 경제 중심지였던 원마산 지역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해안 매립, 도로 개설, 조창 철거 등을 진행하여 식민도시의 지배기반을 완벽하게 구축하였다(허정도, 2002: 330-331). 1911년 4월 1일 이후 마산항에서는 미곡을 중심으로 곡물들이 일본으로 이출되었고, 1923~1925년 마산에 진주, 함안, 군북 등을 연결하는 경남선이 부설되면서, 인근 내륙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집산이 보다 원활해져 ‘곡물 이출 주도항’이 되었다. 이러한 도시화의 배경하에서 1922년 마산에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김예슬, 2019: 195).15)
사이토 총독 부임 이후 자혜의원이 1차적으로 설립된 지역은 남원, 군산, 순천, 마산 등 전라남북도와 경남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은 모두 주요 쌀 생산지 및 이출 주도항으로 조선총독부가 1920년 수립한 산미증산계획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1922년 말~1924년 강계, 성진, 혜산진, 개성에 자혜의원 신설

1922년 말과 1923년에 걸쳐 평북 강계, 함북 성진, 함남 혜산진에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 총독부는 1920년 당시 평안북도 강계와 선천 양 지역에 자혜의원을 증설하기로 결정하였고, 동 지방의 의료기구 부족을 해결하고자 급히 공사를 시행하였다.16) 결과적으로는 평안북도 동북 지역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인 강계 지역에만 1922년 12월 자혜의원이 개원되었고, 선천 지역에는 자혜의원이 설립되지 않았다.17) 성진자혜의원은 1923년 8월 20일, 혜산진 자혜의원은 1923년 11월에 개원하였다.18) 이들 지역은 1876년 개항 이후 열강의 삼림과 광산 이권 침탈 지역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통감부 시기부터 삼림 수탈을 위해 한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07년 4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삼림을 벌채하기 위한 특별기구로 영림창을 창설하였다. 관련 사무를 보기 위해 영림창 산하에 지창과 출장소를 벌목할 삼림이 소재한 지역의 중심 시가지에 설치하였는데, 이때 혜산진에는 지창이, 강계에는 파출소가 설치되었다(강영심, 1995: 150-151; 164). 삼림과 광산 지대로 주목하면서 개발된 도시에 도립의원이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성군은 사이토 총독이 자혜의원 신설 지역으로 발표한 직후인 1920년 9월 21일 관민 일동이 협의하여 일선인(日鮮人) 7인을 위원으로 선정한 후 조선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인가를 받았다.19) 당시 개성은 장차 부(府)로 승격될 것이 결정되어 있었을 정도로 경기도 도청소재지가 위치한 수원보다 인구나 여러 발전상에 있어 우위에 있어, 한때 수원에 있는 경기도자혜의원을 개성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되기도 하였다. 결국 수원 시민들의 반대로 이는 무산되고20) 수원자혜의원개성출장소를 설립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1924년 1월 28일부터 일반 환자의 진료를 개시하였다.21)

3. 2기(1925.4.1.-1927.12.10.) : 도립의원으로의 전환과 신설 도립의원

1920년을 전후로 세계 경제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1922년 조선총독부는 재정 긴축 방침으로 선회하였다. 그 결과 자혜의원 설립비도 삭감되면서 기존 선정된 지역의 자혜의원 증설의 완성이 1928년까지 연장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사업 공채가 중단되어 자혜의원 신설 계획은 결국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자혜의원 운영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24년 11월, 1925년부터는 직할로 있던 각도 자혜의원의 경영을 도지방청에 일임하는 방침을 확정하였다. 총독부는 자혜의원을 각도로 이관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의원 명칭도 도립의원으로 개칭하였다(박찬승 외, 2018: 468).22)
조선총독부는 1925년 4월 1일 「조선도립의원관제(이하 관제)」(칙령 제86호)와 「도립의원규정(이하 규정)」(조선총독부령 제29호)을 공포하면서 소록도자혜의원을 제외한 모든 자혜의원을 도립의원으로 개편하였다. 자혜의원의 토지 및 건물을 비롯한 부동산과 동산 일체가 도 재정에 귀속되면서 자혜의원의 관리는 중앙에서 지방 각 도로 이관되었고 도 자혜의원의 조선총독부 직접 운영은 종료되었다(박인순, 2016: 127). 조선총독부는 종래 자혜의원의 운영자금으로 관리하던 「조선의원및제생원특별회계법」에 속한 유지자금(공채 및 현금) 476만 6천원을 모두 각 도에 분양해 여기서 나오는 이자, 의원 수익 및 국고보조금 등을 재원으로 도립의원을 경영하도록 했으며, 직원의 봉급과 기타 제 급여, 해당 의원의 설립 유지는 도 지방비로 충당한다고 규정하였다(「관제」 제5조).23) 또한 앞서 예정한 의원의 신설에 대해서는 국고를 보조하여 완성하겠다고 했다(박찬승 외, 2018: 468; 박윤재, 2009: 165-166).4)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재정 긴축 상황에서 사이토 총독 통치 시기 도립의원 관련 「관제」 및 「규정」을 제정하고, 1925년 4월 1일 소록도를 제외한 모든 자혜의원은 도립의원으로 전환되었다.25) 1925년 4월 1일을 기하여 수원자혜의원의 출장소로 운영되던 개성자혜의원이 독립도립의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923년부터 경상북도가 설립하여 운영 중이던 경북 김천병원이 도립의원으로 전환되었다.

1) 1925년 경북 김천병원이 도립의원으로 전환

김천은 1913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령으로 김산군, 개녕군, 지례군 그리고 성주군 일부면을 통폐합해 만들어졌다. 김천에 일본인이 최초로 들어온 때는 1904년 1월 경부선 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905년 경부선 김천역 개통으로 이주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1906년 3월 당시 김천 거주 일본인은 150명 정도가 되었고, 이들은 김천일본인회를 발기하였다. 김천일본인회는 이후 1906년 김천거류민단으로, 1914년 김천진흥회로 조직이 개편되면서 김천 일본인의 생활을 위한 지역 발전을 주도하였다. 김천면은 1917년 10월 1일 특별지정면이 되면서 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며 근대 도시로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김일수, 2016: 240-244, 252).26) 김천의 상업적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김천을 중심으로 한 경북철도가 1924년 10월 김천~상주의 개통을 시작으로 1931년 완공되었다. 1929년 현재 김천 유입 주요 물품은 석탄, 염어(鹽魚), 비료, 목재, 석유 등이었고, 유출 주요 물품은 쌀이 압도적인 가운데 과물, 소가죽, 대두 등이었다(김일수, 2016: 253-257).
이상과 같이 전형적인 농촌사회였던 김천은 경부선과 경북선의 개통으로 경북 북부 지역의 물류 집산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김천에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도 근대적 의료시설이 부족하였다. 이에 면협의회와 학교조합 의원들이 경상북도에 5만원에 해당하는 병원 부지를 지역사회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병원 건립을 청원하였다(김일수, 2016: 259). 경상북도가 청원을 수용함으로써 경상북도도립김천병원으로 1923년 1월 1일부터 은정학교조합사무소에서가(假)병원을 개설하여 진료를 개시하였고, 1923년 6월이 되어서야 김천병원이 준공되었다(김일수, 2016: 259).27) 경북 김천병원이 1925년 4월 1일을 기하여 경북도립김천의원이 되면서 기존 자혜의원 운영비 중 경상북도로 이관된 운영비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2) 1926년 진남포, 신의주에 도립의원 신설

사실상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총독부의 재정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기존 계획되었던 자혜의원의 설립은 전면 중단되었다. 이후 설립된 도립의원은 1920-1921년 자혜의원 신설 계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평남 진남포와 평북 신의주였다.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하였던 당시, 조선총독부의 경제적 보조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도립의원’의 이름으로 최초로 신설된 진남포와 신의주의 도립의원은 다음과 같은 배경하에서 설립되었다.
진남포는 평남 삼화부에 속한 작은 어촌이었으나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드나들게 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 · 원산 · 인천을 개항한 뒤 대동강에 항구를 마련하여 관서 지방의 물산을 손에 넣고자 삼화부의 개항을 추진하였다. 이때에는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관세 수입을 얻기 위하여 삼화부를 개항장으로 지정하고, 해관(海關)을 설치하였다. 삼화부가 개항된 후, 진남포에 일본과 청나라의 상인들이 진출해 서로 경쟁하게 되면서 양국의 영사관이 개설되고 거류민이 늘어나는 등 발전하자 삼화군청을 진남포로 옮겼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이곳은 일본의 군사기지로 군수품 수송의 핵심 항구가 되었고, 1910년 진남포부(府)로 승격되면서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김연옥, 1996). 또한 1910년대 일본으로 이출된 석탄은 평양광업소에서 채굴된 무연탄이 대부분이었는데,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석탄은 대개 진남포에 집산되었다가 일본의 공업지역으로 반출되었다(김은정, 2007: 81-83). 군사도시이며 석탄 집산지였던 진남포에는 1917년에 이미 부립병원이 존재하였던 기록이 있다.28) 1924년 진남포 주민들은 부립병원에 의료 기계가 완비되면 평양자혜의원까지 가서 입원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진남포부립병원의 설비 완비를 진남포부에 요청하였다.29)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부청회의를 거쳐 진남포부립병원을 계승하고 병원 직원들을 인수하여 평양도립의원진남포분원으로 이관한다고 결정하였다. 기존 부립병원을 개축하여 완공한 후 1926년 8월 1일부터 도립의원으로 치료를 개시하였으며 1933년 12월 도립진남포의원으로 승격 독립되었다.30)
신의주는 1907년 5월 통감부 영림창(營林廠)이 개청되고 북부지방 국유 산야지대의 벌채가 본격화되면서, ‘목도(木都)’라고 불릴 정도로 목재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0년 설치된 소산(小山)공장을 시작으로 제재공장들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제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4년 4월 신의주가 평북도청소재지로 지정되고 1921년 11월 도청이 이전되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재정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지진 복구를 위한 목재 공급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신의주의 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신의주에 목재 회사 및 공장을 설립하였고, 1925년에는 6개의 목재 공장이 연합으로 목재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1920년대 후반에는 목재산업이 활성화되었다(이미경, 2016: 4, 19-23). 1926년 2월 신의주 지역대표들은 유일한 국경도시이며 가까운 장래에 10만의 인구를 포함할 대도시 신의주에 온전한 의료기관이 없음을 공감하고, 도립의원 부지를 제공할 것이니 당해에 도립의원이 설치될 수 있기를 진정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평북도립의원본원을 의주에서 신의주로 옮기고 의주의원은 분원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31) 의주 주민의 반대운동으로 의주도립의원신의주분원으로 설치하기로 결정되었고,32) 1926년 12월 1일부터 진료사무를 개시하였다.33)
1926년 설립된 진남포와 신의주는 지역의 자체 경제력으로 도립의원을 설립할 수 있었던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진남포의 경우는 이미 의료인력과 건물, 의료설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진 부립병원을 인계받아 도립의원으로 신설한 경우로 지역민의 의지와 함께 도립의원 신설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신의주 경우도 평북 도청소재지가 될 정도로 평북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관동대지진으로 특수를 누리는 지역으로 지역민의 의지와 함께 도립의원 신설을 위한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지역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3기(1929.8.17.-1931.6.17.) : 사이토 총독 재부임과 신설 도립의원

사이토 총독은 1927년 12월 10일까지 복무하였고 그 후임으로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총독이 부임하였다. 야마나시 총독이 1929년 8월 17일까지 약 1년 8개월 통치하였는데, 이 시기 도립의원은 신설되지 않았다. 다시 1929년 9월 부임 길에 오른 사이토 총독은 당시 일제의 국책인 재정, 경제의 재건을 위해 중앙정부의 긴축 방침에 순응하여 총독부 예산도 상당히 긴축해야 했다. 더욱이 세계적인 불황으로 기존 계획했던 여러 사업에 대한 조정과 집행 연기가 불가피했다(박찬승 외, 2018: 572).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토 총독 재부임 이후 신설된 대전(1930.06), 철원(1931.04), 사리원(1931.07) 지역의 도립의원은 1920년 사이토 총독이 도립의원 증설 지역으로 계획하였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의 이유로 중지되었다가, 사이토 총독이 1926년, 1927년 예산에 각 지역마다 도립의원 설립을 위해 10만 원씩 계상하였던 것이 1930-1931년에 그 설립을 보게 되었다.34) 사이토 총독 1기 말에 대전, 철원, 사리원 지역의 도립의원 신설을 시작하였던 것이 야마나시 총독 시기에 도립의원 신설을 위한 절차들이 진행되었고, 사이토 총독 재부임 이후 그 설립이 마무리된 것이다.
대전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작은 촌락으로 ‘대전’이란 행정지명은 1895년 단행된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처음 등장하였다(원종혜, 1999: 13). 1904년 경부선과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대전은 호남의 곡창지대, 부산의 상공업 지역 그리고 서울을 잇는 교통의 결절 지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17년 「조선면제(面制)」의 시행으로 대전면이 되면서 대전의 인구는 증가했고, 근대 도시의 면모가 강화되었다(김영수, 2021: 36; 39). 유입 인구가 늘면서 대전의 일본인 거주비율은 1920년 전후로 충청남도 도청소재지인 공주보다 약 3배 높았으며, 조선인과 일본인을 합친 인구수도 1920년대 중반 공주보다 앞서기 시작하였다. 대전이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1917년부터 자혜의원 설치에 대한 요구가 등장했다(김영수, 2021: 39).35) 대전 지역민은 1919년 이래 자혜의원의 설립을 열심히 진정하여 총독부의 내락을 얻어 1921년 부지를 매수하였으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신축이 연기되었다. 대전도립의원 설립 논의는 대전이 본격적으로 물류 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김영수, 2021: 41). 대전 측은 1926년 6월부터 1927년 12월까지 1년 반 동안 충청남도평의회에 도립의원 설립을 적극 진정하였으나 대전도립의원의 설립으로 공주도립의원의 운영이 어려워지는 것에 대해 염려한 다수의 반대로 결국 부결되었다.36) 그러나 석달이 지나지 않은 1928년 2월 충청남도임시도의회에서 이미 부결된 대전도립의원 설치안에 대해 다시 논의하였다. 이 회의는 대전뿐 아니라 인근 천안, 조치원의 유지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방청하였고, 대전도립의원은 1920년경부터 자혜의원으로서 계획되어 있었음과 ‘긴요 적절한 시설’임을 확인하며 도립의원 설립안이 통과되었다.37) 대전도립의원은 1928년 11월 공사를 시작하였고 각종 최신식 설비를 정비하여 1930년 6월 7일 개원식을 거행하였다.38)
철원도립의원 설치는 1926년 3월 경부터 철원번영회가 철원이 강원도의 도청소재지로서 최적지라고 하면서 도청 이전과 도립의원 설치 운동을 시작하였다.39) 당시 철원은 1914년 경원선의 개통으로 영서지방 중 유일하게 철도가 부설되어 있었고, 경성과 연결되는 도로망 또한 안정적인 상태로, 교통의 편의는 당시 도청소재지인 춘천보다 우위에 있었다. 또한 금강산으로 향하는 금강산자동차, 금강산전철의 개통으로 철원이 강원도에서 가장 뛰어난 교통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다.40) 철원역 개통 이후 철도 주변에는 공장들이 들어서고 교육기관, 금융기관, 일반행정 관공서 및 각 기관, 기타 접객업소, 식당 등이 100여 개소에 이르렀다(고준성, 2018: 46-47). 1928년 3월 강원도평의회에서 철원군은 근래 인구가 번창하고 교통기관은 물론 문명의 설비가 이루어졌으나 의료기관이 없어 조선에서 사망률이 제1위인 도시가 되었다고 하면서 내선인 모두 강원 북부 5군과 인근 군의 의료기관의 역할을 담당할 도립의원 설립을 열렬히 운동하였다.41) 1928년 5월 26일 철원 대표위원 등 8인이 상경하여 총독부에 도립의원 설치를 요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1929년 2월 총독부가 승인하였다.42) 1931년 초에 도립의원 건축이 마무리되면서 원장, 의관, 기타 직원이 임명되었고, 4월 1일부터 개업하였다.43) 개원한 후 4월 한 달 동안 외래환자 136인, 입원 환자 14인, 시료환자 입원 5인, 시료환자 외래 7인을 치료하는 등 성적이 매우 양호하였다.44)
사리원은 황해도 재령평야의 중심지이며, 농축산물의 집산지였다. 1905년 11월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사리원역은 장연과 해주의 분기점이 되어 도로 ·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리원은 쌀 · 보리 등 곡물의 대집산지가 되었으며, 제분 · 양조 · 견직 · 농기구 공업이 발달하였다(두산백과, 연도 불명). 1912년 12월 봉산군의 군청이 사리원으로 이전하였고 1931년 4월 봉산군 사리원면이 사리원읍으로 승격되었다. 황해도는 1100방리(황해도의 총면적은 16,743㎢)의 거대한 면적을 가지고 150만 명의 인구가 모여 있는데 종래 도립의원은 해주에 하나밖에 없어 조선총독부는 1920년 경의선의 중요역인 사리원에 관립자혜의원을 설치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중단되었다.45) 이후 사리원이 황해도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면서 1926년 2월 1일 황해도평의회에 황해도 제2도립의원 설치안을 건의하여 다수결로 채택되었다.46) 사리원이 발전되면서 도청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해주와 경쟁할 정도가 되었다.47) 사리원의 선일인(鮮日人)으로 조직된 실업협회는 1928년 2월 11일 역원회를 열고 도립의원과 재판소 설치를 중요 안건으로 결의하고, 1929년 3월 9일 도평의회에서 사리원도립의원의 설립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1929년 6월 5일 황해도지사가 총독부에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여 11월 19일 인가를 받았으며, 사리원도립의원은 1931년 7월 15일 개원하였다.48) 사리원도립의원은 개원 1개월 만에 전염병실을 제외한 보통병실은 만원의 성황을 이루고 진료를 바라는 환자는 1일 평균 100명을 상회할 정도였다.49)
대전, 철원, 사리원 세 지역은 모두 각 도의 교통 중심지로서 인구와 산업 등에 있어 기존 도청소재지와 견줄 정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도청 이전 논의까지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들 세 지역의 도립의원 신설은 지역민의 의지와 함께 사이토 총독의 의지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5. 도립의원 선정 지역의 특성과 제 양상

사이토 총독 시기 설립된 자혜의원의 경우, 지역민 대표들이 직접 총독부에 자혜의원 신설을 진정하였으나, 1925년 4월 1일 자혜의원이 도립의원으로 전환된 후에는 대개 다음의 과정을 밟아 설립되었다. 도립의원의 설치를 원하는 특정 지역의 주민들이 도립의원 설치를 위한 필요성을 논의하고 도립의원 설치를 위한 조직인 기성회, 번영회 등을 설립하였다. 도립의원 설치 운동 조직은 도립의원 설치에 필요한 기부금을 모금하고 도립의원 부지를 마련하였으며, 해당 도평의회에 도립의원 설치에 관한 건을 진정하였다. 도평의회에서 도립의원 설치안이 가결되면 해당 도에서도 도지사 및 위생국장을 중심으로 도립의원 설치를 위해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립의원 부지의 적합성을 확인하고 결정하였으며, 지역민 대표들과 총독부에 인가를 받기 위해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총독부가 도립의원 설립의 타당성과 국가 보조 예산의 가능성 등을 타진하여 도립의원 설립 인가를 하면50) 이 시점부터 도립의원 건축을 시작하고, 도립의원 기자재 및 의료기구, 의관 및 의원 등 인적 구성을 발령하여 개원하게 된다.
이상의 여러 단계를 거쳐 설립된 도립의원은 식민지 조선에서 각각의 특수성을 띠며 발전 변화한 지역에 위치하였다.51) 조선총독부의 도립의원 신설 지역을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제가 식민정책에 필요한 지역이라는 인식, 도로망 교통 정비,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인구 증가, 다양한 인프라 형성 등의 요인들이 서로 연관을 맺으며 지역이 활성화되면서 도립의원 신설이라는 과정을 밟고 있다. 사이토 총독 시기 설립된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설립 과정에서 보이는 지역적 특성 및 다양한 양상을 다음의 사항으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1) 도립의원 선정 지역의 특성

사이토 총독이 부임 이후 가장 먼저 자혜의원 설립 지역으로 관심을 가진 지역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 대표적인 지역은 나남, 마산, 진남포 등이다. 나남은 일본이 러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군사 요지로 주목을 받았고, 1908년 개항 이후 군사도시로 건설되기 시작하여 교통, 교육, 행정 등의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결국 1917년 함경북도청으로 결정되었다. 약 10년 만에 놀라운 발전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0년 12월 함북자혜의원이 경성에서 이전하였다. 마산 역시 러일전쟁 시 물자 수송을 위해 마산선을 설립하면서 신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진남포도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일본 해군이 드나들게 되면서 일본이 관심을 갖게 된 지역으로 1897년 대한제국에 의해 개항된 이후 러일전쟁 시기 일본의 군수품 수송 핵심 항구가 되었다. 이들 지역의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은 모두 사이토 총독 첫 번째 부임 시기에 설립되었다.
두 번째로 관심을 가진 지역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주요 자원을 일본으로 유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일제가 쌀의 대일 수탈을 위해 철도를 개통하고 항만시설을 구축하면서 도시화를 이룩한 전남 군산, 경남 마산이 자혜의원 신설 지역으로 선정되었으며 사이토 총독 1기 통치 초창기에 설립되었다. 또한 석탄의 집산지인 진남포, 목재 산지인 신의주 등이 도시로 발전되면서 도립의원이 설립되었다. 이는 1920년대 산미증산계획과 자원수탈 등 총독부의 식민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로 주목한 지역은 각 도의 물류가 모일 수 있는, 다른 주요 지역을 연결할 수 있는 지역이었고, 이러한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 철도의 분기점으로 부상하여 각종 물류의 집산지가 되고, 산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도립의원 설립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대전, 철원, 사리원 등이다. 대전은 호남선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호남과 부산과 서울을 잇는 결절지역, 철원은 강원 영서지방에서 유일하게 철도가 부설되어 있었던 지역, 사리원은 황해도 장연과 해주의 분기점이 되는 지역이었다. 교통의 핵심 지역이 되면서 대전, 철원, 사리원은 각도의 도청소재지인 공주, 춘천, 해주와 견주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활성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의 세 지역은 1920년 자혜의원 신설지역으로 선정되었으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사이토 총독 재부임 시기인 1930-1931년에 도립의원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재정 상태가 안 좋은 시점에서 설립된 지역으로 그만큼 대전, 철원, 사리원이 해당 도에서 차지하는 지정학적 중요성과 도립의원의 필요성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넷째로 신설된 도립의원 중 부립병원을 인수하여 승격된 사례도 보인다. 해당 지역은 진남포로, 기존 부립병원을 계승하여, 병원 직원 인수, 병원의 토지와 건물, 기구, 기계 등을 해당 도에 무상양도하고, 본관과 병사를 개축하는 등 기존 부립병원을 보완하여 도립으로 전환되어 개원하였다. 부립병원이 도립의원으로 전환된 배경에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부립병원 자체의 재정 및 설비 문제로 부청회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며, 도에 귀속되면서 그 규모 및 의료기구 등이 확충된 것을 알 수 있다.

2) 도립의원 설립 과정에서 보이는 지역 간 갈등

각 지역의 상황에 따라 도립의원이 신설되는 과정에서 인근 지역과의 갈등의 사례, 즉 인근 지역의 반대로 도립의원 설립 과정이 평탄하지 않았던 사례가 나타났다. 즉 경기도 수원과 개성, 평안북도 의주와 신의주, 충청남도 공주와 대전의 관계가 그러했다. 도립의원 설립 논의가 있었을 때 해당 도와 조선총독부는 인구 및 산업의 발전으로 새롭게 부상하고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개성, 신의주에 설립할 도립의원을 해당 도의 중추 도립의원으로 지정하고 기존 도립의원을 이전시키려고 하였다. 개성에 자혜의원 설치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1922년 경기도자혜의원을 기존 수원에서 개성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신의주의 경우도 1926년 2월, 1921년 11월 도청이 신의주로 이전된 상황에서 신의주 지역 대표들이 도립의원 설치를 진정하자 총독부는 평북도립의원본원을 기존 의주에서 신의주로 옮기고 의주의원은 분원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논의 및 결정을 알게 된 수원과 의주 지역민의 반대로 물의가 일어나자 수원과 의주의 도립의원을 그대로 존치하고 수원자혜의원개성출장소, 의주도립의원신의주분원으로 설립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개성출장소가 개원하자마자 보통환자 715명, 시료환자 48명을 진료하는 등 좋은 성적을 내자, 조선총독부는 개성에 자혜의원 설립의 필요를 인정하고52) 1925년도 예산에 개성 자혜의원특설비를 계상하고 개성출장소를 수원자혜의원과 동일한 규모로 확장할 계획을 세워 1925년 4월 1일에 이르러 도립의원으로 독립시켰다.53) 또한 신의주분원도 1926년 12월 1일 진료 개시 후 곧 지방비에 예산을 계상하여 의관 및 의원을 증원하고 설비를 확장하여 1927년 5월 도립신의주의원으로 독립시켰다.54) 개성과 신의주의원은 설립된 지 1-2년도 되지 않아 전격 도립의원으로 승격 독립된 사례이다.
대전도립의원의 경우도 1926년 6월부터 1927년 12월까지 1년 반 동안 충남도평의회에서 여러 차례 대전도립의원 설립안을 논의하였으나 대전도립의원 설립 이후 공주도립의원의 운영이 어려워지는 것에 대해 염려한 다수의 반대로 결국 부결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1928년 2월 충남임시도의회에서 도립의원 설립안이 통과되었다.
이상의 사례에서 도립의원의 존재는 해당 지역이 해당 도에 있어서 주요 도시, 발전된 도시, 인프라가 형성된 도시임을 증명하는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도립의원 설립 과정에서 수원, 의주, 공주 등 기존 지역의 위상 저하 및 도립의원 운영의 어려움에 대한 우려로 갈등을 빚기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도립의원의 규모에 따른 등급 및 승격

도립의원은 규모의 차이에 따라 등급이 정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립의원의 규모는 대지, 건물 평수, 환자 수용 능력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으나,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 중 하나가 해당 도립의원 직원의 정원이라고 판단하여 직원 정원과 함께 도립의원의 승격 내용을 다음 에 정리하였다.
각 주요 지역에 신설된 도립의원은 처음부터 도립의원 본원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설립된 지역도 있으나, 진남포 지역은 부립병원에서 도립의원분원으로 계승되었고, 이후 승격 독립되었고, 남원, 개성 지역 등은 도립의원출장소로, 신의주 등의 경우 도립의원분원으로 시작되었다.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은 처음 설립되었을 당시는 그 규모가 작았으나, 지역의 발전 및 확대 그리고 이용하는 환자 수의 증가 등으로 의관 및 의원 등 의료인의 수도 증가하였으며 의료시설도 완비되어 지속적으로 병실, 건물의 증축 등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발전적 변화 속에서 개성, 진남포, 신의주 등 각 도립의원출장소, 분원 등은 도립의원으로 승격, 독립된 경우이다.
도립의원 설립 당시 비교되었던 타 지역의 도립의원의 직원수를 1936년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개성:수원 37:38, 신의주:의주 69:34, 대전:공주 61:24, 철원:춘천 44:45, 사리원:해주 50:55였다.58) 이를 보면 설립 이후에도 함께 비교되었던 각 지역의 도립의원과 경쟁력이 있었으며, 특히 신의주와 대전은 기존 의주 및 공주와 크게 차이가 날 정도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신설 도립의원 지역의 분포 상황

사이토 총독은 1919년 8월 부임 직후 약 1년 동안은 기존 설립된 자혜의원의 시설 정비에 집중하였고 1920년 8월에 이르러 기존 자혜의원 외에 다시 13도에 자혜의원 증설을 계획하였다. 사이토 총독이 2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조선을 통치하는 동안 설립된 총 14개의 도립의원의 신설 지역을 다음의 로 정리하였다.
사이토 총독 시기 설립된 도립의원의 지역적 분포를 보면 전북과 평북 지역에 2개의 도립의원이 설립되었고, 충북 지역에는 한 곳도 설립되지 않았으나, 그 외 지역은 1개소의 도립의원이 설립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사이토 총독이 처음 13도 지역에 균등하게 도립의원을 설립하고자 했던 의도대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재부임 후 1927년 12월 퇴임 전 계획하고 진행되었던 대전, 철원, 사리원 지역의 도립의원 설립을 완성한 것은 총독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6. 결론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특히 자혜의원에서 도립의원으로의 전환을 마련한 사이토 총독 시기 이전 및 설립된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15개소를 일제의 식민지 정책 방향, 사이토 총독의 정치 신념 그리고 지역민들 자체의 필요성을 연관시켜 그 특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먼저 자혜의원이 도립의원으로의 전환과 사이토 총독의 재부임을 기준으로 세 시기로 구분하고 당시 상황 및 사이토 총독의 조선 통치 정책에 대해 정리한 후 각 시기 증설된 도립의원 지역에 대한 자연, 인문지리적 환경을 정리하였다.
1기 자혜의원 신설 지역은 1925년 4월 1일 도립의원 전환 이전에 설립된 남원, 군산, 순천, 마산, 강계, 성진, 혜산진, 개성으로 모두 1920-1921년 증설 계획에 포함된 지역들이었다. 2기 도립의원 전환 이후에 신설된 진남포와 신의주는 새롭게 인가하여 설립된 지역이다. 1기에 함북자혜의원이 경성에서 나남으로 이전되었으며, 2기에 1923년 도립의원으로 설립되어 운영 중이었던 김천병원이 1925년 도립의원 「관제」 공포 이후 경북도립의원으로 전환되어 조선총독부가 인정하는 도립의원으로 운영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1기와 2기에 도립의원이 신설 지역은 1) 군산ㆍ마산ㆍ김천 등의 미곡, 혜산진ㆍ강계 등 삼림, 신의주의 목재, 진남포의 석탄 등 자원의 생산지이자 물류의 집산지였으며, 2) 나남, 신의주 등은 군사, 경제적 배경하에서 급격하게 발전하여 도청소재지가 된 지역이었다.
3기 사이토 총독 재부임 시기에 신설된 대전, 철원, 사리원 지역의 도립의원은 모두 1920년 자혜의원 신설 지역으로 내정되었던 지역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설립이 연기되었다가, 사이토 총독의 재통치 기간에 완성하였다. 세 지역은 모두 각 도의 교통 중심지로서 인구와 산업 등에 있어 기존 도청소재지와 견줄 정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도청 이전 논의까지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지역민의 도립의원 설립 요구도 강하게 제시되었으며, 사이토 총독의 의지도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이토 총독 통치 시기별 도립의원의 설립 지역을 살펴본 후 도립의원 설립 과정에서 보이는 특성 및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조선총독부가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설립 지역으로 관심을 가졌던 지역은 러시아 견제와 만주 지역 관리 등에 유용한 군사적 요충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자원이 풍부한 주요 지역, 물류의 집산 및 연결할 수 있는 교통의 중심지 였다. 2) 도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부립병원이 도립의원으로 승계된 사례와 함께 각 도립의원은 지역의 규모와 인구 수 등의 차이에 따라 독립도립의원, 도립의원분원, 도립의원출장소 등으로 등급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지역의 발전 및 확대, 이용하는 환자 수의 증가 등으로 출장소와 분원이 독립도립의원으로 승격되었던 사례도 확인하였다. 3) 새롭게 도립의원 설치를 결정하는 단계에서 인근 기존 지역의 도립의원 위상 저하 및 운영의 어려움에 대한 우려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이상의 정리와 분석을 통해 사이토 총독 시기 신설된 도립의원은 산미증산계획으로 인한 미곡의 유출, 철도 부설에 따른 석탄의 필요,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목재의 필요 등 조선 내 필요보다 일본의 필요에 따른 자원의 유출과 관계 깊은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 교통이 발달된 물류 · 경제의 중심지로 인구 특히 일본인 증가, 일본인 정착을 위한 제반 시설, 회사ㆍ공장 등 산업시설이 집중되었던 공간이었음을 고찰할 수 있었다. 사이토 총독 시기 도립의원의 지정학적 위치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과 재조선 일본인의 필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 이후 우가키 총독 시기부터 신설된 도립의원의 지정학적 연구를 마무리하면 총독 통치 시기별, 신설 지역별 공통점 및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가장 아쉬웠고 부족하다고 느낀 사항은 각 지역사 관련 저서를 충분히 활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각 지역사 자료에는 대부분 각 지역의 자연지리, 고대부터의 역사, 의병 및 독립운동, 인물, 유적, 문화 등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나 일제시기의 변화 상에 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소략하였으며, 특히 의료기관에 대한 내용은 그 명칭과 아주 간단한 소개에 머물고 있었다. 도립의원이 신설된 지역의 발전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인구 규모 및 경제 규모 등에 대한 언급에서도 한계를 느꼈다. 지역사 관련 사료를 좀 더 발굴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강계, 혜산진, 성진 등 이북 지역에 대한 연구성과는 더욱 찾기 어려웠다. 도립의원이 설립된 지역은 조선총독부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진출하여 교육과 의료기관을 설립하면서 근대화가 이루어진 곳도 상당수 존재한다. 각 지역은 다양한 이유로 선교사 및 일제의 거점 지역이 되었고, 선교사를 위시한 서구문물이, 그리고 일본인과 식민통치를 위한 근대문물이 혼재하며 변화하였다. 앞으로 특정 지역의 개별 도립의원에 대한 연구들이 집적되면 각 지역의 의료환경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방의 공공의료기관으로 도립의원뿐 아니라 부립 및 읍립의원에 대한 연구 등이 축적된다면 일제강점기 국가의 지방의료체계, 그리고 그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도립의원에 대한 평가가 좀 더 완전해질 것이다.

Notes

1) 본 연구의 대상인 도립의원은 사이토 총독 시기 신설된 자혜의원과 1925년 4월 1일 자혜의원이 도립의원으로 전환된 이후 신설된 도립의원을 망라한다. 특별히 자혜 및 도립을 구분하여 서술할 필요가 없는 경우 도립의원으로 통일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2) 원주도립의원과 장전 및 삼척도립의원은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 시기 설립되어, 사이토 총독 시기 설립된 도립의원을 살펴 보고자 하는 본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

3) 총독별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설립은 <부록 1>에 정리하였다.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설립연월일은 『朝鮮道立醫院槪況』 (1930), 47-48쪽과 『朝鮮道立醫院要覽』 5 (1941), 제표, 1-3쪽 참조.

4) 개성도립의원의 경우 『朝鮮道立醫院槪況』 (1930), 47쪽과 『朝鮮道立醫院要覽』 5 (1941), 제표, 1쪽에는 개원일이 1925년 4월 1일로 서술되어 있으나, 이는 독립 승격된 일자이다. 당시 신문 사료를 근거로 1924년 1월로 표기하였으며, 이에 대한 내용은 개성도립의원 관련 본문 내용에서 설명하였다.   

5) 사리원 도립의원은 실제 사이토 총독이 퇴임된 후 약 1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설립되었다. 이는 사이토 총독 시기에 모든 것이 완비된 후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 총독 시기 개원한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우가키 총독 시기에는 1932년 5월이 되어야 인천도립의원이 처음 설립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리원도립의원을 사이토 총독 시기 설립된 도립의원에 포함시켰다.

6) 『朝鮮道立醫院槪況』 (1930), 3-4쪽; 『朝鮮道立醫院要覽』 5 (1941), 3쪽.

7) 「慈醫增設地 今明間發表模樣」, 『동아일보』, 1920년 8월 31일. 

8) 「자혜의원건설지 십이처를 결정」, 『동아일보』, 1920년 9월 11일

9) 「자혜의원증설」, 『동아일보』, 1921년 5월 24일. 

10) 『朝鮮道立醫院要覽』 (1941), 제표, 3쪽.

11) 「醫療施設普及, 僻陬의 地에 醫藥의 惠澤, 자혜의원을 해마다 확장하여」, 『매일신보』, 1924년 2월 20일. 

12) 「群山慈醫新設」, 『매일신보』, 1920년 9월 6일; 「群山慈醫新設內定」, 『동아일보』, 1920년 9월 7일.

13) 「慈惠醫院增設 群山, 順天」, 『매일신보』, 1921년 10월 12일. 

14) 「群山慈醫開院式」, 『매일신보』, 1922년 10월 26일.

15) 「醫療施設普及, 僻陬의 地에 醫藥의 惠澤」, 『매일신보』, 1924년 2월 20일. 

16) 「慈惠醫院 開院期」, 『매일신보』, 1922년 7월 5일. 

17) 「兩 慈惠醫院 開院期」, 『매일신보』, 1923년 4월 28일. 

18) 「城津慈惠開院式九月中旬擧行」, 『경성일보』, 1924년 8월 10일; 「城津慈惠醫院開院祝賀會」, 『매일신보』, 1924년 9월 23일; 「城津慈惠院開業」, 『매일신보』, 1923년 8월 20일.

19) 「開城에 慈惠醫院」, 『매일신보』, 1920년 10월 5일. 

20) 「醫院移轉反對로 수원시민대표가 총독부에 진정해」, 『동아일보』, 1922년 11월 30일. 

21) 「開城慈惠醫院出張所開設」, 『경성일보』, 1924년 1월 14일; 「開城에 慈惠醫院」, 『동아일보』, 1923년 11월 5일; 三木榮, 『京畿道立水原醫院二十五年史』 (1936), 11쪽. 

22) 「治療의 便宜를 圖코자 道立病院을 擴張」, 『매일신보』, 1928년 6월 12일.

23) 『朝鮮道立醫院要覽』 5 (1941), 3-4쪽. 

24) 『朝鮮道立醫院要覽』 5 (1941), 3-4쪽. 

25) 자혜의원이 도립의원으로 전환되는 배경은 이방원(2021) 참조.

26) 김천의 인구는 조선인, 일본인 모두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1923년의 인구를 보면 전체 인구 10,351명 중에서 조선인이 82%인 8,558명이고, 일본인이 16%인 1,706명이다. 1925년이 되면 김천 인구의 16% 정도인 일본인이 80%에 해당하는 조선인의 경제력을 넘어서게 될 정도로 김천 경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김일수, 2016: 260). 

27) 「金泉病院開院」, 『매일신보』, 1922년 12월 23일.

28) 「鎭南浦, 府立病院狀況」, 『매일신보』, 1917년 8월 19일. 

29) 「鎭南浦府病院, 客月中の取扱」, 『조선신문』, 1924년 5월 21일. 

30) 「鎭南浦分院竣工す, 八月一日開業」, 『경성일보』, 1926년 7월 23일; 「新築落成した鎭南浦慈惠分院」, 『경성일보』, 1926년 7월 26일; 「南浦道立醫院 獨立昇格祝賀 十七日」, 『매일신보』, 1933년 12월 15일.

31) 「新義州に道立醫院, 三矢局長に陳情」, 『경성일보』, 1926년 2월 24일; 「國境新義州に道立醫院新設要望, 新年度に實現か」, 『경성일보』, 1926년 3월 20일; 「道立醫院 新義州分院과 義州住民의 反對運動」, 『매일신보』, 1926년 10월 21일. 

32) 「道立醫院問題로 委員上京陳情? 初志를 어대 지 貫徹코죄 義州市民大會運動」, 『매일신보』, 1926년 10월 22일; 「新義州道立醫院 最初計劃을 變更하야 義州와는 全然別立?」, 『매일신보』, 1926년 11월 3일.

33) 「新義州の道立醫院, 十二月に開く」, 『조선신문』, 1926년 11월 24일; 「新義州分院昇格か, 地方費に豫算計上」, 『경성일보』, 1927년 1월 14일; 「五週年紀念을 마진 平北道立醫院 萬般設備도 이제는 完備 堀越院長以下大活動」, 『매일신보』, 1931년 12월 3일; 「新義州施療所道立醫院に昇格, 廿五日指令と同時に直ちに看板を書替へ」, 『조선신문』, 1927년 5월 28일; 「新義州診療所醫院に昇格す, 婦人科を設置」, 『조선시보』, 1927년 5월 29일.

34) 「道立醫院建設」, 『경성일보』, 1926년 7월 2일; 「兩道立醫院, 本年中起工」, 『조선신문』, 1929년 11월 6일.

35) 「病院問題で大田市民大會-陳情委員から報告を得て對策する」, 『조선신문』, 1927년 9월 8일.

36) 「大田の重要問題申知事へ陳情」, 『경성일보』, 1927년 6월 19일; 「忠南道評議會突如衛生費で大論戰, 大田道立醫院設立補助を否决, 當局頗る狼狽す」, 『조선신문』, 1927년 12월 25일; 「病院塲所問題로 議塲空氣騷然 廿四日形勢如何가 注目 忠南道議會第三日」, 『매일신보』, 1927년 12월 25일.

37) 「道立大田醫院設置案 結局 可決-忠南臨時道評議會에서」, 『동아일보』, 1928년 2월 11일; 「前會議で否决した大田道立醫院設置案で, 質問簇出傍聽席亦賑ふ, 忠南道臨時評議會」, 『조선신문』, 1928년 2월 13일. 

38) 「六月十日에 開業할 大田道立醫院 各科職員도 决定」, 『매일신보』, 1930년 5월 23일; 「大田道立醫院開院式擧行七日極めて盛大に」, 『조선신문』, 1930년 6월 7일.

39) 「鐵原繁榮會 役員會의 宣言發布 道廳은 鐵原이 最適地이다」, 『매일신보』, 1926년 3월 16일.

40) 「巡廻探訪(六十四) 康平地方大觀 <1>>」, 『동아일보』, 1926년 9월 3일; 「交通은長足發展」, 『동아일보』, 1927년 5월 13일. 

41) 「江原道」, 『경성일보』, 1928년 3월 4일; 「緊縮方針と鐵原の道立病院, 期成會と繁榮會で設置實現の猛運動」, 『조선신문』, 1929년 7월 23일 

42) 「鐵原道立醫院設置 陳情委員の上京」, 『부산일보』, 1929년 5월 30일; 「多年懸案の鐵原道立醫院建設, 石田警察部長語る」, 『조선신문』, 1929년 2월 14일. 

43) 「鐵原醫院明年四月開院」, 『조선신문』, 1930년 12월 21일; 「鐵原道立病院開院の準備成る, 醫官醫師等も赴任」, 『조선신문』, 1931년 3월 27일; 「江原道, 鐵原道立醫院愈愈四月一日から開院, 二十五日頃盛大なる開院式, 總督の臨塲を得て」, 『조선신문』, 1931년 3월 31일; 「江原道, 鐵原道立病院開業早早の賑ひ, 入院患も非常に多く婦人科等は押すなすな」, 『조선신문』, 1931년 4월 9일; 「齋藤總督 鐵原行 道立醫院開院式에 臨席」, 『매일신보』, 1931년 4월 21일.

44) 「鐵原道立醫院 開院以來信賴日增」, 『매일신보』, 1931년 5월 26일.

45) 「黃海道 期待される沙里院道立醫院 七月十五日より開院」, 『조선신문』, 1931년 7월 16일. 

46) 「鳳山郡沙里院 慈惠醫院設置案」, 『조선일보』, 1926년 2월 2일. 

47) 「沙里院에 道立醫院 設置要望」, 『중외일보』, 1927년 1월 11일. 

48) 「沙里院 實業協會는 諸施設을 爲하야 市民大會를 凖備」, 『조선일보』, 1928년 2월 16일; 「沙里院に設置す道立醫院の敷地, 知事が見分の上决定」, 『조선신문』, 1929년 2월 2일; 「沙里院道立醫院」, 『부산일보』, 1929년 3월 14일; 「沙里院醫院 七日認可申請」, 『매일신보』, 1929일 6월 15일; 「沙里院 道立醫院 明春에나 開院」, 『매일신보』, 1930년 11월 13일; 「黃海道 期待される沙里院道立醫院 七月十五日より開院」, 『조선신문』, 1931년 7월 16일. 

49) 「黃海道, 多忙を極むる沙里院道立醫院, 普通病室は旣に滿員, 伊藤院長の靈腕に感激」, 『조선신문』, 1931년 8월 5일.

50) 1925년 4월 1일 공포된 「조선도립의원관제」(칙령 제86호) 도립의원 설립과 폐지, 직원 정원은 조선 총독이 정한다(제5조)는 조항과, 「도립의원규정」(조선총독부령 제29호) 도립의원을 설립할 때 도립의원의 명칭과 위치, 개원연월일, 부지와 건물의 평면도, 설계도와 구조사양서(構造仕樣書), 병실 수와 그 평수, 설립 예산, 환자 수용 정원, 직원의 정원, 분과, 수가와 시료에 관한 규정, 초년도의 수지개산(收支槪算), 유지 방법 등의 내용을 구비하여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했으며(제1조), 도립의원 진료 개시 10일 전에 총독에게 보고해야 한다(제2조)는 조항을 명시하여 도립의원 설립의 최종 결정권자는 총독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외 도립의원 관제 및 규정에 대한 내용은 이방원(2021) 참조.

51) 고태우는 ‘북선개발’에 대한 연구에 있어 가토 게이키(加藤圭木)(『植民地朝鮮の地域變容』, 吉川弘文館, 2017)가 식민지 시기 조선사회의 변화가 지역마다 특수성을 띠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동북부, 특히 함경북도의 변화를 일본의 식민지 지배, 조선 사회 내부 요인, 국제적 요인, 제국 내부의 식민지간 관계, 자연환경 변화 등 복합적인 시각에서 검토한 것에 시사점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필자는 이에 동의하며, 도립의원이 설립된 각 지역의 특수성을 구분하여 분석하고자 하였다(고태우, 2020: 169).

52) 「開城慈惠の昇格は急務だ, 開設以來の成績頗る良好」, 『경성일보』, 1924년 6월 18일 

53) 「개성자혜의원 명년사월에 설치」, 『시대일보』, 1925년 1월 15일; 「開城慈惠醫院 四月부터 開設?」, 『동아일보』, 1925년 1월 16일 ; 「開城郡에 慈惠醫院新設, 오늘 사월부터 개원할터」, 『매일신보』, 1925년 1월 27일; 「開城慈惠醫院 四月부터 獨立」, 『동아일보』, 1925년 1월 28일. 

54) 「新義州の道立醫院, 十二月に開く」, 『조선신문』, 1926년 11월 24일; 「新義州分院昇格か, 地方費に豫算計上」, 『경성일보』, 1927년 1월 14일; 「五週年紀念을 마진 平北道立醫院 萬般設備도 이제는 完備」, 『매일신보』, 1931년 12월 3일; 「新義州施療所道立醫院に昇格, 廿五日指令と同時に直ちに看板を書替へ」, 『조선신문』, 1927년 5월 28일; 「新義州診療所醫院に昇格す, 婦人科を設置」, 『조선시보』, 1927년 5월 29일.

55) 각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설립 당시의 직원 정원을 알 수 있는 사료를 찾지 못하여 1936년 『朝鮮道立醫院要覽』을 활용하였다. 『朝鮮道立醫院要覽』 1 (1936), 제표 2 道立醫院職員定員, 3-5쪽. 직원 정원은 의관, 사무관, 약제관, 의원(醫員), 서기, 약제수, 간호부장, 촉탁, 도이원(道吏員), 고원(雇員), 사무용원, 부수(副手), 간호인, 조산부, 간호부, 기타 용인을 합친 총수이다. 

56) 「南浦道立醫院 獨立昇格祝賀 十七日」, 『매일신보』, 1933년 12월 15일. 

57) 「新義州の道立醫院, 十二月に開く」, 『조선신문』, 1926년 11월 24일; 「新義州分院昇格か, 地方費に豫算計上」, 『경성일보』, 1927년 1월 14일; 「五週年紀念을 마진 平北道立醫院 萬般設備도 이제는 完備」, 『매일신보』, 1931년 12월 3일; 「新義州施療所道立醫院に昇格, 廿五日指令と同時に直ちに看板を書替へ」, 『조선신문』, 1927년 5월 28일; 「新義州診療所醫院に昇格す, 婦人科を設置」, 『조선시보』, 1927년 5월 29일. 

58) 『朝鮮道立醫院要覽』 1 (1936), 제표 2 道立醫院職員定員, 3-5쪽.

그림 1.
사이토 총독 시기 이전 및 신설된 자혜의원 및 도립의원
Figure 1. Relocated and established Jahye hospitals and provincial hospitals during Governor-General Saito’s 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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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Relocated and established Jahye hospitals and provincial hospitals during Governor-General Saito’s regime
분류 지역
1기 (1919.8.12.-1925.3.30) 함북 경성(1910.09.13.)→나남(1920.12), 전북 남원(1922.02.15.), 전북 군산(1922.02.15.), 전남 순천(1922.02.15.), 경남 마산(1922.09.15.), 평북 강계(1922.12.01.), 함북 성진(1923.08.20.), 함남 혜산진(1923.11.26.), 경기 개성(1924.01.28) [4]
2기 (1925.4.1.-1927.12.10.) 경북김천병원(1923.01.01.)→경북도립김천의원(1925.04.01.), 평남 진남포(1926.08.02.), 평북 신의주(1926.12.01.)
3기 (1929.8.17.-1931.6.17.) 충남 대전(1930.06.10.), 강원 철원(1931.04.01.), 황해 사리원(1931.07.15.)5
Table 2.
Relocation and elevation of Jahye hospitals and provincial hospitals during Governor-General Saito’s regime
분류 지역 직원 정원 55 이전 및 승격된 내용
1기 함북 나남 92 1910년 9월 13일 경성에 개원, 1920년 12월 나남으로 이전
전북 남원 21 1922년 2월 남원출장소로 개원
전북 군산 64 -
전남 순천 34 -
경남 마산 39 -
평북 강계 39 -
함북 성진 44 -
함남 혜산진 25 -
경기 개성 37 1924년 1월 28일부터 수원자혜의원개성출장소로 개원, 1925년 4월 1일 독립도립의원으로 승격
2기 경북 김천 32 도지방비로 1923년 1월 1일 개원, 1925년 4월부터 도립의원이 됨
평남 진남포 64 부립의원에서 1926년 8월 1일부터 평양도립의원진남포분원 치료 개시, 1933년 12월 17일 독립승격 축하연56
평북 신의주 69 의주도립의원신의주분원으로 설치 결정, 1926년 12월 1일부터 진료 개시. 1927년 5월 도립신의주의원으로 독립57
3기 충남 대전 61 -
강원 철원 44 -
황해 사리원 50 -
Table 3.
Regional distribution of provincial hospitals which were newly established during Governor-General Saito’s regime
연도 경기 경남 경북 전남 전북 충남 충북 강원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
1922 마산 순천 남원 강계
군산
1923 혜산진 성진
1924 개성
1925 김천
1926 진남포 신의주
1930 대전 사리원
1931 철원
총계 1 1 1 1 2 1 0 1 1 1 2 1 1

References

1. 『朝鮮總督府官報』.

2. 조선총독부, 『朝鮮道立醫院槪況』, 1930.

3. 조선총독부, 『朝鮮道立醫院要覽』, 1937-1941.

4. 三木榮, 『京畿道立水原醫院二十五年史』, 1936.

5.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부산일보』, 『시대일보』.

6. 『조선시보』, 『조선신문』, 『조선일보』, 『중외일보』.

7. 강영심, 「일제 영림창의 삼림수탈에 관한 연구」, 『이화사학연구』 22 (1995), 149-182쪽,.

8. 고준성, 「조선말기~일제시기 춘천의 강원도 수부도시화」,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9. 고태우, 「식민지기 ‘북선개발’ 인식과 정책의 추이」, 『한국문화』 89 (2020), 167-196쪽.

10. 김연옥, 「진남포시(鎭南浦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4614. 검색일: 2022.8.21.

11. 김영수, 「근대의사제도와 대전지역의 의료: 대전의 의료인과 도립대전의원을 중심으로」, 『의료사회사연구』 8 (2021), 35-65쪽.

12. 김예슬, 「일제강점기 마산지역 사업체와 조선인경제인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13. 김은정, 「일제의 한국 석탄산업 침탈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14. 김일수, 「일제강점기 김천의 일본인사회와 식민도시화」, 『사림』 56 (2016), 237-270쪽.

15. 김홍희, 「일제하 나남의 군기지 건설과 군사도시화」,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16. 박윤재, 「조선총독부의 지방 의료정책과 의료 소비」, 『역사문제연구』 21 (2009), 161-183쪽.

17. 박인순, 「일제통치기 제주자혜의원(~전라남도립제주의원) 일고」, 『제주도연구』 46 (2016), 115-154쪽.

18. 박종현, 「일제신도시 공간구조의 성장과 변화에 관한 연구-군산시의 사례를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19. 박찬승・김민석・최은진・양지혜,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 (서울: 민속원, 2018).

20. 「사리원」,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7198&cid=40942&categoryId=34025. 검색일: 2022.8.21.

21.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문화예술편』 (순천: 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a).

22.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순천: 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b).

23. 신동원, 『한국근대보건의료사』 (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7).

24. 야마베 켄타로 지음, 최혜주 옮김, 『일본의 식민지 조선 통치 해부』 (서울: 어문학사, 2011).

25. 우승완, 「순천의 근대기 도시화에 관한 연구」, 순천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26. 원종혜, 「일제강점기 대전의 도시지역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27. 이미경, 「일제하 신의주 목재업계의 변동과 목재상조합의 활동(1910-1936)」,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28. 이방원, 「일제시기 도립의원의 설립과 운영(1925-1945)」, 『이화사학연구』 23 (2021), 85-134쪽.

29. 장민숙, 「1910년대 광주자혜의원 연구」,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0.

30. 전전상숙, 『조선총독정치연구』 (파주: 지식산업사, 2012).

31. 한동민, 「근대 수원지역의 공립의료기관-관립수원자혜의원에서 도립수원의원까지」, 『경기사학』 8 (2004), 505-527쪽.

32. 허정도, 「근대기 마산의 도시변화과정 연구: 개항(1899년)부터 해방(19454년)까지」, 울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APPENDICES

Appendix 1.

Jahye hospitals and provincial hospitals established during different governor-generals

시기별 도립의원 합계*
데라우치 마사다케 (1910.10.1.-1916.10.9) 충북 청주(1909.12), 전북 전주(1909.12), 함남 함흥(1910.01), 경기 수원(1910.09), 충남 공주(1910.09), 평남 평양(1910.09), 경북 대구(1910.09), 강원 춘천(1910.09), 경남 진주(1910.09), 함북 경성(1910.09), 평북 의주(1910.09), 황해 해주(1910.09), 전남 광주(1910.09), 강원 강릉(1912.08), 함북 회령(1912.08), 전남 제주(1912.10), 경북 안동(1912.10), 평북 초산(1912.10) 18
하세가와 요시미치 (1916.10.16.-1919.8.12) - 0
사이토 마코토 1 (1919.8.12.-1927.12.10) 함북 경성(1910.09)→나남 이전(1920.12), 전북 남원(1922.02), 전북 군산(1922.02), 전남 순천(1922.02), 경남 마산(1922.09), 평북 강계(1922.12), 함북 성진(1923.08), 함남 혜산진(1923.11), 경기 개성(1924.01). 경북 김천병원(1923.01)→경북김천도립의원(1925.04.), 평남 진남포(1926.08), 평북 신의주(1927.05) 11
야마나시 한조 (1927.12.10.-1929.8.17) - 0
사이토 마코토 2 (1929.8.17.-1931.6.17) 충남 대전(1930.06), 강원 철원(1931.04), 황해 사리원(1931.07) 3
우가키 가즈시게 (1931.6.17.-1936.8.4) 경기 인천(1932.05), 함남 원산(1933.07), 경기 이천(1933.10), 경기 안성(1936.03) 4
미나미 지로 (1936.8.5.-1942.5.28) 충남 홍성(1936.12), 함남 북청(1936.12), 충북 충주(1937.05), 평남 안주(1938.03), 강원 장전(1938.12), 강원 삼척(1939.10), 평북 삭주(1940.11), 경북 포항(1941.07), 강원 원주(1942.01) 9
고이소 구니아키 (1942.5.29.-1944.7.21) 황해 남천(1943.05) 1
아베 노부유키 (1944.7.22.-1945.9.28) - 0
합계 46

* 합계는 이전한 자혜의원은 합산하지 않은 수임. 따라서 함북 나남으로의 이전은 합산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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